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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5 | 1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35 | 광양자 | |
3336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36 | 질량 | 질량(質量, )은 물리학에서 물질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양을 일컫는 말이다. 질량의 SI 단위는 킬로그램(kg)이다. 질량의 개념은 고대 그리스의 여러 철학자들의 물질이나 물질관에 대한 토론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질량은 일반적으로 다음 세 가지 방법으로 정의된다.
관성질량은 에른스트 마흐의 방식에 따라 뉴턴의 운동법칙으로 정의된다. 뉴턴의 작용-반작용 법칙에 가속도의 법칙을 적용해 "두 물체를 작용시켰을 때, 두 물체의 가속도는 항상 반대 방향이며, 그 크기의 비는 두 물체에 고유한 양이 된다."라고 해석하고, 물체의 질량을 기준물체의 질량에 대한 배수로 정의한다. 즉 물체의 관성질량이 m이고 이 물체에 F의 힘이 작용하면, 가속도 a=F/m으로 주어진다.
맥스웰의 고전전자기학 이론에서부터 전자기적 질량과 상대론적 질량을 유도할 수 있다. 전자기적 질량에서는 전하를 띤 물체가 유전체를 통과할 때 발생하는 변위 전류에 의해 물체가 저항을 받아 물체가 질량을 가지는 것으로 인식한다. 전자기적 질량은 전자기장의 운동량 보존의 한 표현으로, 관성질량에 해당한다. 막스 아브라함은 전자의 질량을 전자기적 질량으로 표현하였다. 카우프만은 실험을 통해 전자의 질량이 온전히 전자기적 질량으로 표현됨을 보였으나 반박되었다.
상대론적 질량은 기준계의 운동과 관계없이 맥스웰 방정식이 동일한 형태로 유지되도록 로런츠 변환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등장하였다. 로런츠 변환을 적용할 때 운동량 보존 법칙이 성립하려면 물체의 질량이 속도에 의존하는 값이 된다. 운동량 보존 법칙에서 유도된 상대론적 질량 또한 관성질량이다. 상대론적 질량은 물체가 기준계에 대해 불변량이 정지해 있을 때의 질량으로 나타내지며, 이를 고유 질량 또는 정지 질량이라고 한다. 전자의 비전하에 대한 실험 결과 전자기적 질량이 틀린 이론이고 상대론적 질량이 옳은 이론임이 확인되었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질량-에너지 동등성을 유도된다. 쌍생성, 쌍소멸의 경우와 같이 질량과 에너지는 남김없이 변환될 수 있다.
능동적 중력질량과 수동적 중력질량은 뉴턴의 중력법칙으로 질량을 정의한다. 전자는 물체가 주위에 만드는 중력장의 크기의 비로 질량을 정의하고, 후자는 중력장을 만드는 물체에서 같은 거리만큼 두 물체가 떨어져 있을 때, 두 물체에 작용하는 중력의 크기의 비로 질량을 정의한다. 즉, 지구 표면에서 지구가 물체에 작용하는 힘의 크기를 Fg, 중력가속도의 크기를 g라 하면, 물체의 수동적 중력질량은 Fg/g가 된다. 관성질량과 수동적 중력질량은 실험적으로 높은 정밀도로 확인되어 있으며, 능동적 중력질량과 수동적 중력질량의 동등성은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서 유도된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는 관성질량과 수동적 중력질량이 같은 것으로 가정되므로 세 가지 질량의 정의가 이론적으로 동등하다.
어원.
고대 그리스의 여러 철학자들의 물질이나 물질관에 대한 토론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단위.
현재 국제단위계(SI 단위계)에 따르면 질량은 킬로그램이라는 단위로 측정된다. 킬로그램에 대한 공식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다.
이 정의는 1901년 제 1차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 정해진 것이다. 이 정의가 있기 전까지 킬로그램은 4°C의 물 1L의 질량이라고 정의되어 있었지만 물의 밀도의 불안정성 때문에 1889년 미터 조약에서 1kg에 해당하는 질량 원기를 만들게 되었다. 현재 7개의 SI단위 가운데 유일하게 질량만이 인공적으로 만든 원기를 표준으로 삼아 질량의 단위를 정의하고 있는데, 이 이유는 국제킬로그램원기를 통해 원자 하나가 측정될 때 수반되는 오차 수준의 정밀도보다 높은 정밀도로 측정하고자 하는 물체의 질량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당시에는 원자질량단위가 생각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현재 이 원기는 인공물이어서 물리적 특성이 변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2011년에 열린 제 24회 국제도량형총회에서 기존의 원기를 폐지하고 새로운 질량의 정의를 도입할 방침을 밝혔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새 대안은 플랑크 상수를 통해 질량을 정의하는 방안이다.
질량의 단위는 킬로그램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단위가 바로 원자질량단위이다. 원자질량단위는 1961년 IUPAC 회의에 따라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수식으로 쓰면
이로써 주어지는 원자질량단위를 킬로그램으로 환산하면 대략 1.66×10−27kg 정도가 된다.
여기까지 언급하지 않은 질량의 단위로는 주로 영국에서 쓰는 파운드(lb), 입자물리학에서 볼 수 있는 플랑크 질량(mp), 천문학에서 볼 수 있는 태양질량 등이 있다.
질량에 대한 개념 요약.
질량은 물체가 가지는 고유한 양이며 고유하기 때문에 질량은 변화하지 않고 보존된다. 그런데, 무게는 지구상에서는 질량과 중력가속도의 곱이므로 무게는 지구에서나 어디서나 다르다. 다시 말해 지구에서 측정한 무게가 질량과 중력가속도가 다른 달또는 화성 등에서 측정한 무게가 다른 것이다.
고대, 중세의 물질에 대한 개념.
‘질량’의 개념이 아이작 뉴턴에 의해 처음으로 명확하게 정의되었는데, 그 바탕에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시작되어 뉴턴시대까지 이어지는 물질에 대한 이해의 역사적 발전의 성과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술한 책들 《자연학》, 《형이상학》, 《》을 통해 고대인들의 물질에 대한 체계적이고 깊이있는 탐구의 시도를 볼 수 있다. 이후 위의 책들의 저술로서 파생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론을 보완하기 위한 10~12세기의 이븐 시나, 이븐 루시드와 같은 이슬람의 자연철학자들의 활약이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중세 유럽의 신학자들은 신학에서의 중요한 문제를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과 연관짓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론에 대한 이븐 루시드의 저술은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와 아지디우스 로마누스(Aegidius Romanus)와 같은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마침내 아지디우스 로마누스는 질량과 근접한 개념인 '질료량'을 명확하게 정의하였다.
고대의 물질의 양에 대한 측정.
고대 문명에서 교역이 발달하고 상품의 무역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상품들의 양을 측정할 방법이 필요해지기 시작했다. 고대에도 역시 무게와 부피를 결정하는 방법이 있었다는 것을 아래 여러 역사적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오른쪽 그림을 보면 고대 이집트의 신 아누비스가 심장의 무게를 저울을 통해 재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고대 이집트의 오시리스 종교에서는 측정의 용도로 저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성경에서도 무게를 쟀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창세기 제 23장 16절에서,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좇아 에브론이 헷 족속의 듣는데서 말한대로 상고의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를 통해 이 부분에서는 돈의 무게를 달았던 시대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최초의 측정의 기준은 무게의 단위가 아니라 부피의 단위었다. 기원전 2800년경에 발견된 최초의 부피의 단위를 나타내는데 쓰였던 수메르 초기왕조시대의 라가슈에서 출토된 엔테메나라는 은제항아리는 10 실라(sila)(대략 5리터)를 정의하는 데 쓰였다. 반면에 무게의 단위는 그 당시에는 장소마다 매우 다양했다. 아시리아왕국의 살마나사(Salmanassar)5세 때 미나(mina)(대략 1킬로그램)가 공식적인 무게의 단위로 쓰인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다른 상품의 양은 다른 단위를 통해 측정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록 고대부터 무게 또는 상품의 양을 비교하기 위해 저울을 이용했지만, 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무게는 현대에 우리가 이해는 것과 같이 물질의 양이나 질량에 비례하는 힘이나 다른 역학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무게는 물체가 가지고 있는 색깔, 냄새와 같은 특성의 일종으로 이해되었다. 피에르 부트루(Pierre Boutroux)라는 학자는 이러한 현상이 바로 자유낙하는 물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잘못된 결론에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고대의 물질에 대한 자연철학.
고대 그리스의 많은 철학자들은 자연의 본성, 또는 자연의 현상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활발한 토론을 하였다. 그리스의 많은 자연철학자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중심에 서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연에 대해 많이 탐구하였고, 《》("Physics"), 《》("Metaphysics")과 같은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이 외에도, 이 시기에 물질의 본성에 대해서 루크레티우스, 심플리치우스와 같은 자연철학자들, 그리고 스토아 학파, 플라톤 학파,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과 같은 여러 학파들 사이에 많은 토론이 오갔다. 하지만 기록으로 남아있는 여러 고대문헌들을 통해서 고대에는 정량적인 의미로서의 ‘물질의 양’,즉 질량과 연관성을 가지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론은 고대를 거쳐 중세까지 매우 깊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중세시대의 이슬람의 이븐 시나, 이븐 루시드와 같은 자연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론을 보완하기 위해 여러 생각들을 내놓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의 자연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애 동안 물리학, 형이상학, 시, 희극, 음악, 논리학, 정치학, 윤리학에 걸치는 방대한 양의 글을 남겼다. 대부분의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은 서양 철학의 전반적인 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 특히, 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은 후에 아이작 뉴턴에 의한 고전역학의 등장으로 사장되었지만, 그의 물리학에 대한 글은 이후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사실 그의 이론을 후세 사람들이 보완하고 수정하는 과정에서 근대적 질량의 개념이 나오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론은 다음과 같이 크게 두 원리로 요약될 수 있다:
자연운동의 경우에는 물체의 자연본성이 그 움직여주는 것에 해당한다. 그래서 어떤 물체가 자연운동을 수행해서 태어난 장소에 도달하면 그것의 운동은 종결된다. 중요한 부분은 강제운동을 다루는 대목인데, 강제운동의 경우에는 움직여주는것은 외부의 힘이다. 외부의 힘은 그 물체로 하여금 그 자연본성을 어기고 자신이 태어난 장소와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하는데, 여기서 이 외부힘이 사라지면 운동은 중단된다. 힘만이 물체의 운동을 유일하게 결정하지는 않았다. 지상계에서의 모든 운동은 외부의 힘에 대한 저항력이 작용하게 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저항력과 외부의 힘이 운동의 빠르기를 결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자연운동을 논의하는 가운데 《》와 《》에서 다른 무게를 가진 두 물체의 낙하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문장은 보통 '무거운 물체는 더 빨리 떨어진다. 그리고 그들의 무게에 비례하여 더욱 빨리 떨어진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더불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따르면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의 무게는 그 입자가 큰 물체를 구성하는 입자인지 작은 물체를 구성하는 입자인지에 따라 결정된다. 다시 말해서, 만약 어떤 입자가 작은 물체의 구성요소였다가 큰 물체의 구성요소가 된다면, 그 입자의 무게는 무거워진다. 이러한 생각들을 종합해 볼때, 고대에 있어서 무게는 크기성질이 아닌 세기성질에 더 가까웠다. 두 물체의 낙하운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결론으로 미루어 볼 때, 현재 받아들여지고 있는 물질의 양(질량)과 무게 사이의 정비례관계와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무게는 결코 물질의 양을 나타내는 척도가 될 수 없었다. 사실 애초부터 이러한 무게와 질량사이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의 물질관에서는 절대 고려될 수가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불은 물질을 구성하는 하나의 원소였다. 그리고 불은 가벼운 성질을 가지는 원소였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의미하고자 했던 바는 상대적 의미에서의 가벼움이 아닌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가벼움이었고, 따라서 불은 가볍기 때문에 지상계의 외곽으로 상승한다고 하였다. 곧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무게(우주 중심으로 하강하려는 자연본성)를 가지지 않는 물질은 충분히 존재할 수 있었다.
자연운동으로서의 물체의 낙하운동이 아닌 외부의 요인에 의한 강제운동에 있어서도 ‘물질의 양’, 즉 질량의 개념을 찾아 보기 힘들다. 지상계에서의 모든 강제운동에서는 외부의 힘 뿐만 아니라 매질의 저항 역시 작용한다. 즉, 모든 운동은 기동력(움직여 주는 힘)과 저항에 의존한다. 강제운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생각은 그의 저서 《물리학》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앞에서 언급한 강제운동에서의 두가지 운동의 요인인 무게와 매질의 저항을 제외하고는 다른 요인을 배제한다. 물체 자체의 내재적인 저항(관성질량)과 가속시키는 힘의 존재에 대한 부정에 대한 암시를 그의 저서 《천체에 관해서》(라틴어:"De Caelo", 영문:"On the heavens")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서술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은 질량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는 주장을 더욱 뒷받침해 준다.
다른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그 어느 곳에서도 ‘물질의 양’ 과 관련된 개념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 물리학은 자연본성("physis")에 더 가까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에서 '질료'("hylē", 본래 고대 그리스어에서는 목재를 의미했다)를 비롯한 여러 용어들은 사실 유기체와 유기체적 현상과의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다. 유기물은 항상 변화하기 때문에 불변적인 성질들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변하지 않는 ‘물질의 양’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질의 공간적 성질에 대한 고대의 생각들.
피타고라스의 학파의 영향을 받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과 이후 그의 철학을 따랐던 사람들은 물질의 형이상학적 본질은 공간이라고 했고, 물리학을 기하학적 관점에서 보려고 했다. 물리학을 기하학적 관점에서 보는데 토대가 되었던 생각은 기하학적 크기는 어디서나 불변이고 항상 일정하다는 사실이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공간은 모든 것들의 모체였고 영구적이기 때문에 기하학적 크기는 물질의 정량적인 특징을 나타내는 신빙성있는 양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플라톤 학파의 생각은 스토아 학파의 큰 반대에 부딪혔다. 스토아 학파는 공간과 물체의 구별을 강조했다. 스토아 학파의 주장의 핵심은 바로 물체는 단지 수학적인 공간의 크기이상의 성질을 가지는 물리적 객체라는 것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수학적인 기하학적 객체와 물리적 객체를 구분짓는 요소는 바로 물리적인 압력에 저항하는 물체의 저항성이었다. 이 성질은 물체가 완전히 구부러지거나 모든 원소들이 섞이는 것을 막는다.
이후 2세기경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서 살았다고 보고되는 엠피리쿠스는 물체는 크기, 모양, 저항, 무게를 갖는 존재라고 말했다. 그에게 있어서 크기, 모양은 물체에게 공간적 크기를 부여하여 기하학적 객체를 획득하게 하는 요소들이고 저항과 무게는 그 기하학적 객체를 물리적 객체로 만드는 요소들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기서의 저항과 무게가 물질의 양을 나타낼 수 있는 척도로서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물질 자체는 절대 정량적인 값으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이었다. 현대의 우리들에게 있어서 크기, 모양, 저항, 무게는 모두 세기 성질과 관련지어 질량을 나타내는 척도로 이용될 수 있지만, 그 당시에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물체의 성질들은 물질의 양과는 거리가 먼 물체의 부수적인 형상에 불과했다.
물질의 보존성에 대한 고대의 생각들.
비록 고대 철학과 과학에서 ‘물질의 양’에 대한 개념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물질이 보존된다는 생각을 고대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데모크리토스는 물질의 영구적, 불멸적인 성질의 개념에 대해 초석을 놓았다. 그의 형이상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를 서술하고 있다.
고대 로마의 시인이자 철학자였던 루크레티우스는 《만물의 본성에 관하여》"On the nature of things")라는 장편의 서사시를 남겼다. 이 서사시는 물질이 영구적으로 보존되는 성질에 대해 논하는 매우 유명하고 대표적인 시 중 하나이다. 그의 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이 두 문장은 분명히 분해되지 않고 창조되지 않는 물질의 성질에 대해 거론함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기초로 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러한 문장들은 루크레티우스는 분명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체계와는 다른 사고체계를 가졌음이 틀림없음을 증명한다. 또한, 는 위의 문장들을 통해 루크레티우스가 물질의 양과 무게의 비례관계에 대한 생각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무게는 물질의 양에 대한 척도의 기능을 했을 거라고 주장했다.
아르키메데스에 대한 오해와 진실.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수학자이자 과학자로 손꼽히는 아르키메데스와 부력에 관한 일화는 대중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히에로 2세는 아르키메데스에게 신에게 바칠 왕관이 순금으로 되어있는지 의뢰했는데, 그는 이 문제를 고민한 끝에 사람이 욕조에 들어가면 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고 부력의 원리를 깨달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가 저술한 책 《뜨는 물체에 관하여》에서는 자신이 발견한 지금 불리는 '아르키메데스의 원리'에 대해 설명한다. 이러한 일련의 아르키메데스와 부력의 원리와의 관련성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아르키메데스가 비중과 밀도의 개념을 통해 질량의 개념에 대해 인식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별로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종종 현대의 많은 과학서적에서는 아르키메데스가 비중과 밀도의 개념을 도입한 사람이라고 서술되어있다. 더불어, 많은 물리학의 교과서들이 역학에서의 질량의 개념을 도입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아르키메데스의 원리에 대해 서술한다. 사실, 아르키메데스의 일화의 대중화에 공헌한 비트루비우스는 기원전 15년경 쓰인 그의 유명한 저서 《》(De architectura)에서 이 일화를 소개하는 글에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여기서 질량(Massa)은 이 문맥에서 덩어리(lump)를 의미하는데, 과학적인 용어의 질량으로서 해석하는 것은 아르키메데스가 질량의 개념과 연관이 있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비록 그의 유체정역학에 대한 설명에서 비중의 개념이 암시되어 있지만, 이 용어는 아르키메데스가 정의하지도 않았고 사용하지도 않았다.
중세의 신학적 사변.
신학서에 등장하는 창조, 죽음, 그리고 성변화(聖變化, transubstantiation)와 관련된 현상을 언급하는 문구들을 이성적, 논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중세 신학자들의 여러 시도는 물질과 질량의 개념의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한 설명들은 물질의 생성, 소멸, 그리고 변화의 자연철학과 전적으로 형이상학적인 물질의 보존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뉴턴 이전의 관성질량 개념의 역사적 발전.
뷔리당의 임페투스 이론.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체의 운동을 자연운동과 강제운동으로 구별하여 서술한다. 하지만 그의 운동이론은 강제운동의 특수한 사례에 대한 설명을 하는 과정에서 난점에 봉착하게 된다. 그 사례는 바로 투척된 물체의 사례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움직여 주는 요인이 없으면 운동도 있을 수 없다고 했는데, 투척된 물체의 경우 그 물체를 던지는 사람의 손(움직여 주는 요인)을 떠나는 순간 그 물체를 움직여 주는 요인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손을 떠나도 투척된 물체의 지속되는 운동을 어떻게 설명하냐는 것이 문제였다.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설명은 움직이는 물체가 통과해 가는 매질이 운동원인으로 작용한다는 모호한 설명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물체가 처음 움직이면서 매질을 움직이게 되고, 그 움직임 때문에 매질이 다시 물체에 운동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었다. 강제운동의 원인을 전부 외부에 의한 요인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결코 다른 학자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고대 말부터 제기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강제운동의 원인을 외부의 매질에 의한 것이 아닌 비물질적 운동원인을 가정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개념은 ‘임페투스(Impetus)’라 불리게 되었고 존 뷔리당(John Buridan)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립되었다. 그는 그의 임페투스 이론을 다루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이 서술을 통해 임페투스는 물질의 양에 비례하는 양임을 알 수 있다. 임페투스의 속도와의 연관성 역시 찾아볼 수 있다.
위의 두 서술을 종합해 볼 때, 임페투스는 아래와 같은 간단한 수식적 관계로 환원시킬 수 있다.
formula_2
이 관계식은 고전역학에서의 운동량 개념과 일부 유사성을 띠고 있다. 더불어, 뷔리당과 그의 학파는 물체 속에 있는 물질의 양이 기동력에 저항하는 저항력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일련의 고전역학과 임페투스 이론간의 유사성 때문에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뷔리당의 임페투스 이론을 근현대 역학의 발전의 중요한 단계로 평가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임페투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론의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고 뷔리당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개념틀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즉, 임페투스는 운동량이 아니고 여기서의 저항은 절대 관성이 아니다.
뷔리당 이외에도 색소니의 앨버트(Albert of Saxony)와 니콜 오렘의 저술에서 역시 물질의 양과 임페투스 이론과의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다.
갈릴레오.
뷔리당을 비롯한 중세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에 대한 연구가들은 그의 역학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임페투스'의 개념 도입 등 여러 방면에서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연구의 흐름은 15, 16세기에 접어들어서 스콜라 학문의 일부를 이루게 되어 대학에서 이러한 문제들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갈릴레오는 바로 이 시기에 등장하여 중세 학자들이 해결하려 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의 문제에서 그의 탐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후에 근대 역학의 근간을 이루는ㅡ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관성의 개념, 운동의 상대성ㅡ개념과 원리들을 이끌어냈다. 비록 그의 관성에 대한 개념이 근대의 관성의 개념과는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개념이 익숙해진 후에 여러 학자들에 의해 보완되고 수정되어 관성질량의 개념의 토대를 이루게 되었다.
그의 관성에 관련한 언급은 <두 개의 세계 체계에 관한 대화>("Dial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에 처음 등장한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코페르니쿠스 우주체계를 옹호하는 살비아티는 지구가 움직이면 지구 위의 물체가 뒤로 뒤처지니 않냐는 심플리치오의 질문에 대해 배에서의 운동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여기서 물체의 관성적 운동에 대한 암시가 드러난다.
그는 1632년 교황청에 의해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이후 역학에 연구에 몰두하여 1638년 <새로운 두 과학>("Discorsi e Dimostrazioni Matematiche Intorno a Due Nuove Scienze")을 출판했다. 이 책에는 갈릴레이의 관성에 대한 생각이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책에서 관성과 관련된 문장에 주목해보자.
위 두 문장을 통해서 갈릴레이의 관성에 대한 개념이 얼마나 고전역학에서의 관성의 개념에 근접해있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고전역학에서의 관성은 수평한 평면위에서 운동해야 한다는 조건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관성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위의 갈릴레이의 말에 따르면 물체는 속도를 유지하며 균질한 운동을 계속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이 균질한 운동이 등속 직선운동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등속 원운동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갈릴레이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다.
비록 그는 관성의 개념을 도입했지만, 이 개념을 질량과 연계시키지는 못했다. 그는 1623년 출판된 책 <Assayer>에서 물질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는 물질의 일차적인 특성들을 나열했지만, 물질의 비기하학적이고 지속적인 특징(질량)을 고려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그의 저서 <두개의 세계 체계에 관한 대화>에 대한 주석에서도 갈릴레오는 질량에 대해 정의를 할 수 없었다는 것으로 묘사된다.
케플러.
독일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케플러는 그의 스승 티코 브라헤로부터 얻은 당시로서는 아주 정확한 천문 관측 데이터를 통해 천체들이 등속원운동을 한다는 기존의 이론이 들어맞지 않고 타원 궤도로 교체되어야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기존에는 단순하고, 완벽하고, 연속성을 띠는 원의 성질 때문에 플라톤 때부터 행성의 원운동은 자연스러운 운동으로 인식되었지만, 케플러는 행성이 타원 궤도로 움직인다는 것을 발견한 이후 과연 이러한 타원궤도의 운동이 일어나는 것이 여전히 '자연스러움'이라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된 인과적 원인을 밝혀주는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인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곧 케플러는 이러한 행성들의 운동에 대한 동역학적 설명을 제시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과정으로부터 단순히 형이상학적 개념에 머물렀던 관성에 대한 개념을 구체화시키는 데 막대한 공헌을 했다. 케플러의 관성에 대한 생각은 뉴턴 이전의 관성개념의 구체화 단계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고 이후 뉴턴이 관성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사실, 케플러의 관성에 대한 개념은 타원궤도를 발견하기 이전부터 꾸준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그의 초기의 관성에 대한 생각을 그의 저서 <De stella nova in Pede Serpentarii>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그는 그의 저서 <신천문학>에서 행성은 운동을 하지 않으려는 명백하고 내재적인 경향이 보인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상호 끌어당김 현상을 통해 역학적 관점에서의 질량의 개념을 언급한다.
케플러가 제시한 위의 중요한 관계는 질량의 실험적 정의의 바탕이 되는 원리로서도 이용될 수 있다. 이 원리는 후에 마흐가 질량을 정의하는 데 쓰였던 방법과도 유사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케플러는 이러한 가능성을 인식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케플러는 마침내 형이상학적인 추측에 불과했던 관성의 개념을 물리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끌어들였다. 다음 문장에서 관성의 개념이 어떻게 물리학적인 논리에 사용되었는지 알 수 있다.
케플러에게 있어서 관성은 자기자신이 공간상에서 움직일 수 없는 물질의 성질인 뿐만 아니라, 외부의 자극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저항, 즉 관성의 정도는 물질의 양에 비례한다고 주장했다.
케플러의 다른 저서에서도 관성의 세기와 다른 물리적 양과의 관계를 찾을 수 있다.
위의 인용문에 따른 관성의 세기와 물리적 양과의 관계는 후에 뉴턴이 질량을 정의하면서 제시했던 관계식과도 유사하다. 케플러는 관성질량의 개념의 형성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지만, 케플러의 관성은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자발적인 운동의 불가능성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관성의 개념에 있어서 운동상태를 유지하는 측면은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데카르트.
데카르트는 관성질량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데카르트 역학은 17세기 초에 출현하여 ‘기계적 철학’체계의 일부로서 동시대의 인물인 보일, 가쌍디(Gassendi)와 더불어 세계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그의 역학이 관성을 고려했는지 아니면 배제했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다르다. 분명한 것은, 그의 역학에 따르면, 물질의 유일한 본질은 외연(外延), 즉 공간을 차지하는 성질이다. 물질의 양은 무게에 비례하는 양이 아닌 부피로서 주어졌다. 그에게 있어서 무게는 물질의 부수적인 특징에 불과하고 물질의 양과 무게는 비례하는 관계가 성립하지 않았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체계는 동시대의 다른 자연철학자들 뿐만 아니라 신학자들에게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저서 <철학원리>("Principia philosophiae")에서는 그는 다음과 같은 자연법칙을 서술했다.
위의 법칙들은 물체의 관성적 특성에 대해서 거의 정확히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이 책에서 ’관성(inertia또는 natural inertia)‘이란 단어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놀랍게도 데카르트가 말한 이 자연법칙들은 뉴턴의 <프린시피아>에서 비슷한 형태로 재서술되어 있다. 사실 프린시피아의 ’공리들, 혹은 운동의 법칙‘의 제 1법칙에 서술되어 있는 관성의 법칙은 뉴턴이 데카르트의 <철학원리>의 위의 법칙으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이를 통해 데카르트 체계가 후의 뉴턴의 개념형성에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하위헌스.
17세기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하위헌스는 물질의 동역학적인 측면에 있어서 폭넓은 탐구를 했다. 그는 지금까지 정성적으로만 논의되었던 원심력에 대해서 처음으로 정량적인 논의를 제시했다. 또한, 그는 충돌현상에 대해서도 체계적으로 탐구하여 데카르트의 충돌이론을 반박하고 후에 뉴턴역학과도 일치하는 두 물체의 충돌시의 속도와 질량과의 관계를 정량적으로 얻어냈다. 하위헌스의 이러한 일련의 연구들은 관성질량 개념의 성립에 있어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는 그의 저서 <원심력에 대하여>("De vi cetnrifuga")에서 원운동을 하는 물체에 작용하는 힘과 물체의 변하지 않는 양(solid quantities)사이의 관계를 제시했다.
하지만 마흐의 이러한 정의는 이후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열띤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아래는 마흐의 정의에 대한 반론과 이에 대한 해결방안들이다.
임을 유도하였다. 전자의 속도가 시간에 대해 일정하다면 전자기장의 운동량 또한 일정하며, 역학적 운동량과 장의 운동량의 합이 보존되므로 역학적 운동량 또한 일정하다. 아브라함은 이를 관성의 법칙의 전자기적 해석으로 보았다. w가 가속도이고 μ가 전자기적 질량일 때
으로 표현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운동에 평행한 방향의 운동량과 운동에 수직한 방향의 운동량을 구분하여 운동에 평행한 방향의 질량과 운동에 수직한 방향의 질량을 각각 구한다. 작은 속도의 경우 두 방향의 질량이 같고 헤비사이드의 결과와 일치한다. 은 전자의 비전하를 측정하는 실험을 통해 전자의 질량이 속도에 의존함을 확인하였으며, 특히 전자의 질량이 온전히 전자기적 질량임을 보였다.
전자기적 질량의 성공을 통해 일부 물리학자들은 전하와 자기장으로만 모든 물리법칙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질량은 물질이 통과하는 매질에서의 작용에 의해 나타나며, 이로써 질량과 물질의 양 사이의 관계가 사라졌다. 그러나 전자 이외의 다른 물질에 대해서 전자기적 질량을 일반화하는 데 실패하였고, 상대론적 질량과의 괴리로 인해 전자기적 질량에 대한 반론이 증가하였다.
상대론적 운동량.
갈릴레이 변환에서 운동량은 질량과 속도의 곱이며, 운동량 보존 법칙이 유지된다. 그러나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는 모든 관성계에서 맥스웰 방정식에 의한 빛의 속력이 동등하게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로런츠 변환을 채택한다. 그러면 운동량에 추가적으로 감마 인자가 곱해져야한다.
1905년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논문에서는 전하 e를 가진 질량 m0의 물체의 운동을 생각한다. 물체의 위치가 x이고 전기장 E가 작용할 때 뉴턴의 운동 제2법칙에서 m0(d2x/dt2)=eE"'이다. 여기에 로런츠 변환을 적용하고 운동량이
로 정리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적 운동량의 유도는 전자기 이론에서 유도된 것이므로 전하를 띠지 않는 물체의 상대론적 운동량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1909년 길버트 루이스와 은 질량이 같은 두 물체의 비탄성 충돌을 생각해 운동량 보존 법칙과 로런츠 변환에 근거해서만 상대론적 운동량을 유도한다. 은 충돌이 운동방향에 수직인 경우에 대해 상대론적 운동량 식을 유도하였고, 외트너는 두 물체가 탄성충돌하는 경우에 대해서 식을 유도하였다. 이 연구들은 모두 운동량 보존 법칙이 로런츠 변환 후에도 성립한다고 가정하였다. 일반적으로 로런츠 변환이 일어날 때 운동량 보존 법칙이 여전히 성립하면 운동량은 속도에 의존하는 감마인자를 가진다.
운동량 보존 법칙이 로런츠 변환 후에도 성립한다고 가정하고 상대론적 식을 간단히 유도해 보자.
두 물체 A, B의 질량이 m로 같다고 하자. 두 물체의 질량 중심이 정지한 좌표계에서 물체 A가 물체 B를 향해 좌표계에 대해 속도 -u로 접근하면, 운동량 보존 법칙에 의해 물체 B는 물체 A의 방향으로 속도 u로 움직인다. 운동량이 보존에 의해 두 물체의 완전 비탄성 충돌이 일어난 후에는 합쳐진 물체가 질량 중심이 정지한 좌표계에 대해 정지해 있을 것이다.
충돌 전 물체 A에 대해 정지한 좌표계에서 바라보자. 충돌 전 물체 B의 속도 v를 계산하면
이다. 속도 v로 움직이는 물체 B의 질량이 m일 때 운동량 보존 법칙을 적용하면
이다. v에 대한 식을 변형하여 p에 대해 정리하면
로 상대론적 운동량 식이 얻어진다.
헤르만 민코프스키는 3차원 운동량 벡터에 에너지와 관련된 성분을 추가한 4차원 에너지-운동량 벡터 Pi를 사용해 상대론적 역학을 정리하였다. 에너지-운동량 벡터는 4차원 속도벡터 Ui에 항상 평행해야 하고, 외력을 받지 않는 물체의 운동량-에너지 벡터가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3차원 공간과 관련된 성분은
로 표현된다. 물리학과 학부 교재들이 m에 감마인자를 곱한 것을 물체의 상대 질량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교육적 목적으로 도입한것에 가깝고 혼란을 야기한다.
질량-에너지 등가성.
존 헨리 포인팅은 1884년 포인팅 벡터를 사용해 전자기장을 통해 전달되는 에너지를 계산하였다. 1900년에 푸앙카레는 빛의 운동량을 포인팅 벡터로 표현해 전자기파의 관성질량을 E/c으로 유도한다. 푸앙카레는 전자기 에너지를 공간에 분포하는 가상의 유체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하였지만, 이 유체가 보존되는 존재임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904년 하센뇌를은 전자기 에너지가 내부가 완벽한 거울로 되어 있는 질량이 없는 빈 상자 안에 갇혀 있으면, 그 상자가 움직일 때 전자기 에너지의 크기에 비례하는 관성을 가진 것처럼 운동한다는 것을 보였다.
일반적으로 질량-에너지 등가성은 1905년 아인슈타인이 유도한 것으로 인정된다. 아인슈타인은 맥스웰 방정식으로부터 물체가 전자기 복사의 형태로 질량 E를 방출하면 물체의 질량이 E/c2만큼 감소함을 보였다. 이로부터 아인슈타인은 물체의 질량은 물체가 가지는 에너지의 척도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1905년 논문에서는 유도 과정에서 질량-에너지 동등성과 관계된 가정이 포함되어 있어 순환 논리의 오류가 있다. 질량-에너지 동등성은 1907년 막스 플랑크에 의해 올바르게 유도되었다.
물체의 운동에너지에 대해서는 질량-에너지 동등성을 간단히 증명할 수 있다. 운동에너지는
로 정리된다. mc2을 물체의 정지에너지라 한다. 만일 물체의 모든 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환원될 수 있으면 정지에너지는 0이고, 질량과 에너지는 동일한 물리적 존재의 다른 표현이 된다. 질량이 남김없이 에너지를 전환될 수 있음은 물질의 쌍생성과 쌍소멸에 대한 실험에 의해 확인되었다.
질량과 에너지가 남김없이 상호 전환될수 있지만 항상 모든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다. 고전적 관점에서 물체를 질량과 에너지로 구분하는 기준은 반응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화학 반응에서는 최외곽 전자의 에너지만이 변화하며 물질의 핵력, 내부 전자껍질의 에너지 등의 나머지 부분은 질량으로 볼 수 있다. 반면 기본 입자의 반응에서는 입자의 모든 에너지가 다른 형태로 전환되기 때문에 입자의 변화하지 않는 질량은 존재하지 않는다.
질량-에너지 동등성이 확립되기 이전에는 운동량 보존, 질량 보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각각 따로 존재하였다. 3차원 공간에서 운동량 보존 법칙은 세 성분이 존재하므로 모든 물리적 현상은 총 다섯 개의 등식을 만족해야 했다. 질량-에너지 동등성 이후에는 4차원 운동량-에너지 벡터의 보존 하나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질량 보존과 에너지 보존이 통합되어 물리적 현상 네 개의 등식만을 만족하면 된다. 더불어 질량-에너지 동등성에 의해 에너지의 단순한 차이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값이 의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전자기적 질량이 전자기장의 에너지를 질량으로 표현하려는 노력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상대론적 관성과 전자기적 관성의 비교.
먼저, 상대론을 고려하면 질량은 관성의 척도가 아님을 언급한다. 관성을 formula_18일 때 formula_19라고 정의하는데, 이는 상대론에서는 관성이 감마인자를 포함하여 속력에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추가적으로 속도와 힘이 이루는 각도에도 영향을 받는다. 힘과 속도가 수직하면,
평행하면
으로 각각 관성이 formula_22과 formula_23이다. 즉 뉴턴 역학 때처럼 일관된 관성이 정해지지 않는다.
이제 윗 항목에 나온 특수한 상황들을 보자. β=v/c일 때 아브라함의 전자기적 관성을 급수로 전개하면
이고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적 관성을 전개하면
로 다르다. 전자기적 관성과 상대론적 관성 중 옳은 식을 실험을 통해 가려내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다. 1902년 카우프만은 전자의 비전하를 측정하여 전자기적 질량이 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막스 플랑크는 카우프만의 실험 결과를 통해 두 이론 중 참인 것을 가려낼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전자의 비전하를 측정한 이후의 실험들의 결과는 상대론적 관성 식을 지지하였다.
에너지의 관점에서 전자기적 관성과 상대론적 관성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전자기적 관성의 경우 formula_26formula_27formula_28이지만, 상대론적 관성의 경우 formula_29으로 두 개념의 질량-에너지 동등성 식에 차이가 존재한다. 전자기적 관성에 계수 4/3이 붙은 것은 아브라함의 전자기적 관성의 정의가 움직이는 입자의 부피 바깥에서만 전자기장의 에너지를 적분하였기 때문이다. 상대론적으로 올바른 전자기적 질량의 정의에서는 입자의 텐서를 포함하는 전체 에너지-운동량 텐서에 기반해야 한다.
중력질량.
능동적 중력질량.
능동적 중력질량은 물체 주위의 공간에 중력장을 만들어내는 물체의 성질이다.
케플러.
요하네스 케플러는 튀코 브라헤의 행성 관측 결과를 바탕으로 행성들의 궤도를 설명하는 법칙 세 가지를 발표하였다. 세 번째 법칙인 조화의 법칙은 태양계의 모든 행성의 공전 장반경의 세제곱과 공전 주기의 제곱의 비가 일정하다는 것이다. 이 비율은 태양이 만드는 중력의 세기를 서술하므로 태양의 능동적 중력질량을 의미한다. 이 값을 표준 중력계수라 한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케플러가 조화의 법칙을 발표한 이듬해 망원경으로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 네 개를 발견한다. 갈릴레오는 위성들의 공전 주기와 공전 장반경을 측정한다. 여기서 목성의 능동적 중력질량을 측정할 수 있는데, 그 값은 태양의 1000분의 1 정도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실험을 통해 낙하하는 물체의 운동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갈릴레오는 물체의 운동이 물체의 무거운 정도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갈릴레오는 두 개의 무게가 다른 물체가 실로 연결된 경우에 대한 사고 실험을 제안하였다. 고전적 사고방식에서는 두 물체의 무게의 총합이 더 커졌으므로 각각을 떨어뜨릴 때보다 더 빨리 떨어지는지, 가벼운 물체가 무거운 물체가 빨리 떨어지는 것을 방해할 것인지 모순이 생긴다. 갈릴레오는 이에 대한 결론은 모든 물체가 같은 빠르기로 운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갈릴레오는 1638년에 발간된 《두 가지 새로운 과학》에서 기울어진 면을 내려오는 구의 가속도를 측정한 실험을 소개한다. 갈릴레이는 기울어진 면의 다양한 각도에서 실험한 결과 물체는 자유낙하에서 낙하한 시간의 제곱에 비례하는 길이만큼 낙하한다고 하였다. 이로써 갈릴레이는 지구의 중력장에 의한 중력 가속도는 낙하하는 물체의 질량과 관계 없음을 보였다. 그러나 케플러의 중력 질량과 갈릴레이의 중력장은 뉴턴에 의해서야 통합된다.
뉴턴.
로버트 훅은 1674년에 모든 천체는 다른 천체에 자신의 중심으로 향하는 인력을 작용한다고 기술하였다. 훅은 이 인력이 다른 천체가 천체의 중심에 얼마나 가까운지에 따라 인력이 증가한다고 생각하였다. 훅은 중력이 두 천체의 거리의 역제곱에 비례함을 아이작 뉴턴에게 증명하게 하였다. 뉴턴은 프린키피아에 중력의 역제곱 법칙을 서술하였다.
뉴턴은 케플러의 세 법칙으로부터 중력질량과 갈릴레오의 중력가속도를 연결하는 다음 관계를 증명하였다.
g는 천체가 중력장에 의해 받는 가속도이고, μ는 중력을 생성하는 천체의 표준 중력 계수이며, r은 두 천체 사이의 거리이다. 이제 두 가지 방법으로 지구의 질량을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달의 궤도를 분석해 케플러의 방법에 따라 지구의 질량을 계산할 수 있고, 지구 표면에서 중력가속도를 측정하여 지구 반지름의 제곱을 곱해 지구의 능동적 중력질량을 측정할 수도 있다. 두 방법으로 계산한 결과 지구의 질량은 태양 질량의 300만분의 1로 일치한다.
훅의 논의에서는 왜 천체만 중력장을 형성하는지와 왜 인력의 방향이 천체의 중심을 향하는지를 설명하지 않았다. 뉴턴은 천체에 대한 훅의 논의를 모든 물체로까지 보편화시켜 모든 물체가 능동적 중력질량을 가지고 따라서 중력장을 형성한다고 하였으며, 그 세기는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고 하였다. 뉴턴은 이를 바탕으로 큰 구형 물체가 여러 작은 질량 요소로 이루어져 있을 때 각각이 형성하는 중력장의 합을 구하여 천체가 만드는 중력장의 방향을 계산하였다. 이를 중첩원리라 한다. 계산 결과 같은 반지름에 해당하는 지점의 밀도가 모두 같을 경우 물체는 전체질량에 비례하고 물체 중심으로부터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중력장을 형성하여 훅의 이론의 문제점을 설명하였다. 왼쪽 그림에서 지구의 각 부분은 능동적 중력질량을 가지므로 각 부분마다 중력장을 형성한다. 각 부분의 영향을 모두 합성하면 마치 오른쪽 그림처럼 지구 전체가 지구 중심으로 향하는 중력장을 형성한 것과 같다.
수동적 중력질량.
수동적 중력질량은 중력장에 의해 영향을 받는 물체의 성질이다.
물체가 중력장 내에 있을 때, 중력가속도의 크기가 g이고 물체가 받는 중력의 크기가 F일 때, 물체의 수동적 중력질량은
로 주어진다.
무게.
무게는 중력장 내에서 물체가 정지하도록 가해 주어야 하는 힘의 크기이다. 따라서 물체의 무게는 물체의 수동적 중력질량과 비례한다. 그러나 무게는 실생활에서 흔히 질량과 혼용된다. 무게는 힘의 크기이므로 단위가 뉴턴(N)이며, 중력장의 세기가 바뀌면 무게도 바뀐다. 질량은 중력장의 세기와 무관하게 주어진 값이므로 어느 곳에서나 일정하다. 하지만 지구 표면에서는 중력장의 세기가 거의 바뀌지 않기 때문에 물체의 무게는 어디서나 똑같이 느껴지고, 따라서 옛날 사람들은 무게가 물질의 근본적인 성질이라 착각하였다.
능동적, 수동적 중력질량의 동등성.
능동적 중력질량과 수동적 중력질량의 동등성은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 주어진다. 물체 1의 수동적 중력질량을 formula_33, 능동적 중력질량(표준 중력계수)을 formula_34라 하고, 물체 2의 수동적, 능동적 중력질량을 각각 formula_35, formula_36라 하자. 물체 1이 물체 2에 작용하는 중력의 크기와 이고 물체 2가 물체 1에 작용하는 중력의 크기는 각각
로 주어진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 formula_39이므로
로 수동적 중력질량과 능동적 중력질량이 비례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이 때 두 가지 중력질량의 비례계수를 1로 해주는 상수를 중력상수 G로 정의한다. 따라서 뉴턴의 중력법칙은
로 주어진다. 1797년 헨리 캐번디시가 처음으로 비틀림 저울을 사용해 중력상수를 측정했으며, 오늘날 중력상수의 값은
으로 알려져 있다.
관성질량과 중력질량의 동등성.
뉴턴 역학.
뉴턴의 운동 제2법칙과 중력법칙을 이용하면 물체가 중력만을 받을 때 물체의 가속도는
로 주어진다. 여기서 m은 물체의 관성질량이고 M은 물체의 중력질량이다. 따라서 물체가 똑같은 중력장 내에서 항상 일정한 가속도를 가지는 것과 물체의 관성질량과 중력질량의 동등성은 동치이다.
물체의 관성질량과 중력질량의 동등성은 실험적인 사실이다. 뉴턴은 진자를 사용한 실험을 바탕으로 관성질량과 중력질량의 동등성을 주장하였다. 이후 프리드리히 베셀은 뉴턴의 실험을 더 정확하게 발전시켰다. 외트뵈시 로란드는 중력과 지구의 회전에 의한 힘을 철사의 비틀림을 사용해 비교하였다. 로버트 헨리 딕은 비틀림 저울을 사용해 정밀도를 향상시켰다. 계속적으로 정밀도가 향상된 실험이 진행되었고, 모두 관성질량이 중력질량에 비례함을 확인하였다. 현재 관성질량과 중력질량이 5×10−13의 정밀도로 일치함이 확인되어 있다.
일반 상대성 이론.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는 관성질량과 수동적 중력질량이 서로 비례하는 것이 등가원리에 의해 당연하다. 일반상대론의 등가원리에서는 '균일한 중력장 아래서 기술되는 물리법칙은 그 중력장에 해당하는 등가속도 운동을 하는 기준계에서 기술되는 물리법칙과 동일하다.' 즉 중력장에 의해 물체가 느끼는 중력과 가속되는 물체가 느끼는 힘은 동일하며, 관성질량과 수동적 중력질량이 동등하다.
반면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는 작용 반작용의 법칙을 적용할 수 없으므로 수동적 중력질량과 관성적 중력질량의 동등성을 바로 유도할 수 없다. 하지만 에너지-운동량 텐서를 통해 관성질량과 능동적 중력질량의 동등성을 증명할 수 있다. 따라서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는 세 가지 질량의 정의가 이론적으로 동등하다.
같이 보기.
질량과 관련한 자연철학자, 물리학자
질량과 관련된 개념, 이론 |
3337 | 94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37 | 흑체 복사 | |
3368 | 74946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68 | 골뱅이표 | @ 또는 골뱅이표는 아스키의 64번째 부호로, 현대에는 전자 우편 주소를 표기할 때 주로 쓰인다. 영어로는 at sign이라고 부르며 흔히 at(앳)이라고 읽는다. 한국에서는 흔히 @라고 부른다.
전자우편 주소 표기에 널리 사용되기 이전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영어 단어 at과 뜻인 일반적인 상업부호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사과 15개가 2달러인 경우 장부에 간략하게 "apple 15 @ 2$"로 기입하였다.
2004년에 모스 부호에 포함되었고, 콤마트(commat)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모스 부호로는 A와 C의 연타(.--.-.)로 표시한다.
트위터 등에서는 누군가에게 답장을 쓸 때 "OO에게"라는 의미로 사용자이름 앞에 @를 쓴다. (예: @사용자이름)
모두(http://www.modoo.at)에서는 홈페이지를 찾을 때 홈페이지명 뒤에 @을 붙여서 검색한다.
스페인어권 국가에서는 의미는 같지만 성별을 나타내기 위해 a와 o로 끝나는 단어를 동시에 나타내는 데에도 사용한다. (예: extranjer@)
언어별 명칭.
언어권마다 @을 부르는 방법은 다양하다. |
3373 | 33387481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73 | 로스앤젤레스 | 로스앤젤레스(, [los ˈaŋxeles])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남부에 위치한 대도시로, 면적은 1290.6 km2에 달한다. 2010년 미국 인구조사를 기준으로 3,792,621 명의 인구 가 거주하고 있어 캘리포니아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자, 미국 전체에서는 뉴욕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가장 많다. 로스앤젤레스는 약 1,800만 명으로 추정되는 로스앤젤레스 대도시권의 중심지로, 이 대도시권은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크며, 세계에서 가장 큰 대도시권 중 한 곳이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이 모여드는 군 중 한 곳인 로스앤젤레스 군의 군청소재지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는 사람들을 앤젤레노스(Angelenos)라고 부르기도 한다.
로스앤젤레스는 1781년 9월 4일 스페인 총독 펠리페 데 네베에 의해 설립되었다. 1821년 멕시코 독립 전쟁이 일어나면서 멕시코에 편입되었다. 이후 1848년 멕시코-미국 전쟁의 결과로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을 맺으면서 로스앤젤레스를 비롯한 캘리포니아 지역을 미국에게 양도했다. 로스앤젤레스는 1850년 4월 4일 지방자치제를 시작했고, 5달 후 캘리포니아 연방 자격을 획득했다.
천사의 도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로스앤젤레스는 사업, 국제 무역, 엔터테인먼트, 문화, 미디어, 패션, 과학, 스포츠, 기술, 교육의 중심 도시로, 세계 도시 순위 6위, 세계 파워 도시 순위 13위에 올랐다. 도시에는 문화, 경제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 기업 본사들이 밀집해 있어 미국 내 가장 중요한 경제 도시이다. 또한 할리우드는 텔레비전 제작, 비디오 게임, 음악 산업에 있어 세계를 선도하고 있으며, 영화 제작 산업으로 매우 유명하다. 1932년과 1984년에 하계 올림픽을 개최한 도시이며, 2028년에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할 예정이다.
역사.
로스앤젤레스 해안 지역은 수 천년 전부터 북미 원주민 부족 통바(또는 가브리엘리노스)와 추마시가 거주하고 있었다. 가브리엘리노는 이 지역을 "옻나무가 많은 지역"이라는 의미에서 iyáangẚ(스페인어로 양나라고 부름)라고 불렀다.
포르투갈 출신 탐험가 로드리게스 카브리요는 1542년 스페인 제국 하에 캘리포니아 남부를 발견했다. 가스파르 데 포르톨라와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후안 크레스피는 1769년 8월 2일 현재의 로스앤젤레스 지역에 이르렀다.
1771년 프린치스코회 수도사 후니페로 세라는 이 지역에 미션 샌 가브리엘 교회를 지었고, 이 지역에 처음으로 전도를 했다. 1781년 9월 4일, 44명으로 이루어진 정착민 집단은 "로스 포브레도레스"로 잘 알려진 정착촌을 설립했고, 정착민들은 이곳을 "엘 푸에블로 데 누에스트라 세뇨라 라 레이나 데 로스 안겔레스 데 포르시운쿨라"라고 불렀는데, 영어로 "로스앤젤레스 강에서 온 천사의 여왕 성모 마리아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천사의 여왕은 성모 마리아의 경칭이다. 정착민의 3분의 2는 아프리카계와 유럽계가 섞인 메스티소 또는 물라토였다. 정착촌은 수 십년동안 작은 목장 마을에 불과했지만, 1820년 거주자는 약 650명으로 증가했다. 오늘 날 이 지역은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오래 된 유적지 중 한 곳으로, 로스앤젤레스 플라자 역사 지구와 올베라 거리에 있는 역사지구로 기념되고있다.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에 속해있던 이 지역은 1821년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독립했고, 이후 멕시코 영토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멕시코 법에따라 당시 멕시코의 통치자였던 피오 피코는 로스앤젤레스를 알타 캘리포니아 지역의 수도로 선포했다. 멕시코-미국 전쟁이 일어나던 중 멕시코의 법은 끝나면서 미국이 이 지역을 다스렸고, 1847년 1월 13일 카후엔가조약으로 전쟁이 끝났다. 전쟁에서 진 멕시코는 1848년 2월 2일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으로 캘리포니아 지역을 미국에 양도했다.
1876년 서던퍼시픽은 로스앤젤레스에 철도 건설을 완료했다. 1892년부터 1923년까지는 석유가 발견되었는데, 당시 미국은 세계 석유 생산량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고, 캘리포니아 지역은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큰 산유국으로 만드는데 한 몫했다. 1900년 인구는 102,000만 명 이상까지 늘었고, 도시의 수도 시설에 압력을 가했다. 1913년 윌리엄 멀홀랜드의 감독하에 로스앤젤레스 수로교가 완료되면서 도시의 지속적인 성장을 보장했다.
1910년 할리우드가 로스앤젤레스에 합병되었고, 도시에는 이미 적어도 10개의 영화 회사가 운영되고 있었다. 1921년 L.A.는 세계 영화 산업의 80% 이상을 차지했다. 이후 대공황이 오면서 도시에 계속해서 돈을 공급했던 영화 산업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도시의 사람들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통을 받았다. 1930년 도시의 인구는 100만 명을 넘겼다. 1932년에는 하계 올림픽을 개최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한 이후에 로스앤젤레스는 샌퍼넌도밸리 쪽으로 스프롤 현상이 그 어느 때보다 빨리 확산되었다. 1969년 로스앤젤레스는 인터넷의 발생지 중 한 곳으로, 멘로파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에서 처음으로 아파넷을 개발했다.
1984년에 로스앤젤레스는 1984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했다. 당시 공산주의 14개 국가의 보이콧에도 불구하고 1984년 하계 올림픽은 이전보다 더 많은 상업적 성과를 거뒀다. 현대 신문지들의 분석에 따르면, 1932년 하계 올림픽 개최 경험과 로스앤젤레스의 도움이 두 번째 올림픽의 이윤까지 얻게해줬다고 발표했다.
1992년 4월 29일에는 인종간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는데, 경찰청 경찰관의 로드니 킹의 구타 동영상 사건이 시미벨리 배심원단들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LA 폭동이 발생했다. 1994년 강도 6.7의 노스리지 지진으로 125억 달러의 재산피해와 72명이 죽었다. 세기 말에 일어난 램파드 스캔들은 미국 역사상 경찰의 위법 행위에 중 가장 광범위하게 문서화된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2002년 샌퍼넌도밸리와 할리우드는 도시에서 독립하기 위해 선거를 벌였지만, 실패했다.
지리.
지형.
로스앤젤레스는 불규칙적인 모양으로 펼쳐져있고 총면적 502.7 제곱 마일(1,302km2)인데, 육지 면적은 468.7 제곱 마일(1,214km2), 수면 면적은 34.0 제곱 마일 (88km2)으로 이루어져있다. 도시는 세로 44마일(71 km), 가로 29마일(47Km)로 뻗어있다. 도시의 총 둘레는 342마일(550Km)이다.
로스앤젤레스는 평평하고 언덕이 많은 두 지형을 갖추고있다. 도시에서 가장 높은 지대는 마운트 루켄스로, 5,074 피트 (1,547 m)이다. 이 곳은 샌퍼넌도밸리의 북동쪽 끝자락에 있다. 산타모니카산맥의 동쪽 끝 시작점은 태평양 쪽의 다운타운 로스앤젤레스와 로스앤젤레스 반도의 샌퍼넌도밸리를 분리한다. 마운트 워싱턴을 포함한 다운타운의 북쪽 지역은 많은 땅이 언덕으로 이루어져있는데, 보일하이츠 크렌쇼 지역 주변의 볼드윈 힐스, 샌피드로는 동부 지역의 일부분이다.
로스앤젤레스 강은 계절에 따라 수위가 크게 달라지며, L.A. 지역 배수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미국 육군 공병대는 콘크리트로 51마일에 걸쳐 방수로 공사를 했다. 강은 카노가 공원 지역에서 시작해 산타모니카산맥의 동쪽 가장자리를 따라 샌퍼넌도밸리의 동쪽으로 흐르고, 이 곳을 지나고나서 남쪽의 다운타운, 그리고 태평양의 롱 비치 항구로 흘러간다. 발로나 크릭에서 산타 모니카 베이, 플라야 딜 레이 쪽으로도 작게 흐른다.
로스앤젤레스 지역은 해변, 습지, 산지와 같은 다양한 서식지가 존재 해 토종 식물 종이 많다. 가장 흔하게 해안 세이지 관목류를 볼 수 있다. 이 외에 토종 식물로 금영화, 양귀비과 식물, 토이온, 코스트참나무, 자이언트갯보리 등이 있다. 로스앤젤레스해바라기와 같은 토착종의 대부분은 멸종 위기에 처한 것으로 간주 될 정도로 희귀하다. 이 지역의 토착종은 아니긴하지만 로스앤젤레스의 시목은 에리스리나 나무(에리스리나 카프라)이며, 시화는 극락조화이다. 멕시코팬팔름, 카나리아섬팔름, 캘리포니아팬팔름은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 몇 안되게 흔히 볼 수있는 토착종이다.
지질.
로스앤젤레스는 환태평양 조산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지진이 자주 발생한다. 지질의 불안정은 많은 단층을 만들어내고, 거의 매년 10,000번의 지진이 일어난다. 주요 단층 중 하나는 산 안드레아스 단층이다. 태평양 판과 북아메리카 판 사이 경계선이 있는 이 단층은 남부 캘리포니아에 큰 지진을 일으킬 원인으로 예상되고있다. 로스앤젤레스 지역에 일어난 주요 지진으로는 1994년 노스리지 지진을 포함해 1987년 휘티어내로스 지진, 1971년 샌퍼넌도밸리 지진, 1993년 롱비치 지진이 있다. 이렇게 자주 일어나긴 하지만, 약간의 진동이나 낮은 강도의 지진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로스앤젤레스 주변과 광역권은 또한 맹목적 돌진 지진에서 오는 위험이 언제든지 있다. 일부 도시 지역은 쓰나미에 취약한데, 1960년 발디비아 지진 당시 항만 근처 지역은 파도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
기후.
로스앤젤레스는 아열대-지중해성 기후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라 해안 지역은 "Csb", 육지 지역은 "Csa"로 구분)를 띠고 있고, 연강수량이 충분하기 때문에 쾨펜의 "BSh" 또는 "BSk" (스텝 기후)로 분류되지 않는다. 로스앤젤레스는 거의 일년내내 맑기 때문에 매년 강수량을 측정 할 수 있는 날은 평균 35일뿐이다.
다운타운의 평균 온도는 66 °F (19 °C)으로, 낮에는 75 °F (24 °C), 밤에는 57 °F (14 °C)이다. 가장 추운 달은 1월달로, 낮에는 59에서 73 °F (15에서 23 °C), 밤에는 45에서 55 °F (7에서 13 °C) 정도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가장 더운 달은 8월로, 낮에는 79에서 90 °F (26에서 32 °C), 밤에는 64 °F (18 °C) 정도로 기온이 올라간다. 4월, 5월, 6월, 11월은 일년 중 기온이 90 °F (32 °C)가 넘는 날은 하루 정도이며, 7월, 8월, 10월은 3일, 9월은 5일이다. 기온의 변동폭은 상당한데, 내륙지역에서 하루에 기온이 가장 높을때와 낮을 때 차이가 30 °F (17 °C)를 넘는 경우도 있다. 바다의 연평균 온도 중 1월에는 58 °F (14 °C)에서 63 °F (17 °C)이고, 8월에는 68 °F (20 °C)이다. 일조시간은 1년에 총 3,000시간 이상으로, 12월의 평균 일조시간은 7시간, 7월의 평균 일조시간은 12시간이다.
또 이 지역은 미기후 현상이 나타나는 대표적인 곳으로, 서로 다른 기온이 만나 극단적인 온도 변화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산타모니카 피어의 7월의 평균적인 최고기온은 75 °F (24 °C)인데 반해 카노가 공원은 95 °F (35 °C)이다. 남부캘리포니아 해안에 위치한 도시는 "June Gloom"이라고 부르는 늦봄, 초여름과 같은 날씨가 계속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또한 아침에 흐린 날씨나 안개가 낀 날씨를 동반해서 이른 오후에나 태양이 뜬다.
다운타운 로스앤젤레스의 평균 연강수량은 384.6 mm이다. 비는 겨울이나 봄(주로 11월, 4월)에 주로 내린다. 일반적으로 소나기 형태로 내리지만, 가끔 큰비와 겨울 폭풍 중 천둥을 동반한 비가 내리기도한다. 산악 지역은 강수량이 약간 더 많고, 해안 지역은 대체로 적다. 그러나 로스앤젤레스의 샌퍼넌도밸리 지역은 연간 410mm에서 510mm까지의 강수량을 기록한다. 눈은 도시 지역에서는 극히 적지만, 도시 경계 내의 강설량은 대체로 산악 지대에서 온 것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기록된 가장 많이 내린 강설량은 1932년 당시 2인치(5cm)이다. 다운타운 로스앤젤레스에서의 최고 기온은 2010년 9월 27일 기록한 113 °F (45 °C)이고, 가장 낮았던 기온은 1944년 12월 22일 기록된 24 °F (−4 °C)이다.
도시 경관.
도시는 80개가 넘는 구역과 주변 지역으로 이루어져있다. 그 중 대부분의 지역은 도시의 비법인지구 또는 지역 사회로 통합되었다. 인근 지역사회와 내륙의 대부분은 로스앤젤레스 대도시권에 포함되었다. 도시는 다음과 같은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다운타운 로스앤젤레스, 이스트 로스앤젤레스, 노스이스트 로스앤젤레스, 사우스 로스앤젤레스, 하버 지역, 그레이터 할리우드, 윌셔, 웨스트사이트, 산페르난도, 크레센타밸리.
로스앤젤레스는 다음과 같은 잘 알려진 지역 사회도 포함한다: 웨스트 애덤스, 왓츠, 라이메르트 파크, 볼드윈 힐스, 베니스, 다운타운 파이낸셜디스트릭트, 할리우드, 실버레이크, 코리아타운, 웨스트우드 그리고 부유층이 많은 할리우드힐스, 벨에어, 베네딕트캐년, 로스 펠리스, 퍼스픽펠리세이즈, 센추리시티, 브렌트우드, 핸콕파크.
문화.
로스앤젤레스는 종종 "세계 창조의 수도"라고 불린다. USC스티븐스혁신기관에 따르면 "로스앤젤레스는 문명의 역사상 그 어떤 도시보다 예술가, 작가, 영화 제작자, 배우, 댄서, 음악가로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로스앤젤레스는 할리우드의 고향으로, 세계적으로 영화산업의 중심지로 알려져있다. 영화산업의 중심지라는 증거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하고, 권위있는 영화 시상식인 아카데미상이 매년 이 곳에서 열린다. 마지막으로 로스앤젤레스는 USC 영화예술학교가 있는 곳으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 학교이다.
공연예술은 로스앤젤레스의 문화 정체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USC스티븐스혁신기관에 따르면 매년 1,100개 이상의 연극이 만들어지고 매주 21개의 연극이 열린다고한다. 로스앤젤레스 뮤직 센터는 미국에서 가장 큰 공연 예술 센터 중 한 곳으로, 연간 130만 명 이상이 방문한다. 뮤직 센터로 유명한 곳인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이 생겨난 곳이다. 센터시어터그룹, 로저 와그너 합창단, 로스앤젤레스 오페라단과 같은 이름있는 단체 또한 음악 센터의 거주자 기업이다. 재능은 콜번 스쿨과 USC 손턴 음악 학교와 같은 최고의 기관에서 가르친다.
박물관과 미술관.
로스앤젤레스 군에는 841개가 넘는 박물관과 미술관이있다. 실제로 로스앤젤레스는 세계의 그 어떤 도시보다 1인당 박물관 수가 많다. 미국 서부에서 제일 큰 미술 박물관인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 세계의 귀중한 물품이 많은 기관 J. 폴 게티 트러스트의 일부인 게티 센터,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은 유명한 박물관들이다. 주요 미술관들은 대부분 갤러리 로에 위치하고있으며, 한달간 열리는 다운타운 아트 워크에는 수 만명이 참석한다.
미디어.
이 지역의 영어로된 주요 일간신문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이다. "La Opinión"은 스페인어로된 주요 일간신문, 《미주 중앙일보》에서 발행하는 《The Korea Daily》와 《코리안 타임스》는 한국어로된 주요 일간신문이다. 그리고 《로스엔젤레스 센티널》은 미국 서부 가장 많은 흑인 독자 수를 자랑하고있는 로스앤젤레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주요 일간신문이다. 플라야델레이에 본사를 두고있는 《인베스터즈 비즈니스 데일리》는 L.A.의 기업 사무실에서 발행된다.
샌퍼넌도밸리 지역을 집중적으로 보도하는 《로스앤젤레스 데일리 뉴스》, 《LA 위클리》, 《로스앤젤레스 시티비트》, 로스앤젤레스 대도시권의 음악계를 집중적으로 보도하는 《L.A. 레코드》, 《로스앤젤레스 매거진》, 《로스앤젤레스 비지니스 저널》, 법률 산업과 관련된 신문 《로스앤젤레스 데일리 저널》, 《더 할리우드 리포트》, 엔터테인먼트 산업 관련 신문 《버라이어티》,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 뉴스》는 수 많은 작은 지역신문들을 대안하는 주간지, 잡지들이다. 주요 신문들 이외에도 이민공동체들에게 에르메니아어, 영어, 한국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 히브리어, 아랍어, 페르시안어와 같은 자신의 모국어로된 많은 지역 정기 간행물을 발행한다. 로스앤젤레스에 인접한 많은 도시들은 로스앤젤레스 주변지역과 보도와 독자가 겹치는 일간지를 가지고있다. 사우스베이에서 발행되는 《데일리 브리즈》, 《더 롱비치 프레스-텔레그램》이 이와 같은 예이다.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은 일곱 개의 VHF를 할당받은 유일한 두 곳의 미디어 시장이다. 로스앤젤레스는 세 개의 PBS 뿐만 아니라 주요 방송 채널이 있는 도시이다. 월드 TV로 두 개의 채널이 있고 몇개의 스페인어 텔레비전 네크워크도 있다. KTBN-TV 40은 미국 기독교 케이블 방송의 주요 네트워크국으로 샌타애나에 본사를 두고있다. 또한 다양한 독립 텔레비전 방송국이 운영되고있다.
스포츠.
로스앤젤레스를 연고지로 하는 프로스포츠팀은 NFL 로스앤젤레스 램스와 로스앤젤레스 차저스, MLB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NBA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NHL 로스앤젤레스 킹스, MLS 로스앤젤레스 갤럭시, WNBA 로스앤젤레스 스파크스 등이 있다.
인구.
2000년에는 3,694,820명이었으며, 2006년에는 약 3,849,478명으로 늘어났다.
2005–2007년 미국 통계청의 조사에 의하면, 백인은 로스앤젤레스 인구의 48.7% 이고, 흑인은 9.9%, 인디언은 0.5%, 아시아계 미국인은 10.6%이었다. 그리고 히스패닉과의 혼혈이 인구의 48.5%를 차지했다. 약 380만 인구 가운데 ‘백만장자’만도 약 25만 명에 이른다. 로스앤젤레스 일대에서만 노숙자가 10만 명에 이르기도 한다.
경제.
로스앤젤레스의 경제는 국제무역, 엔터테인먼트 (텔레비전, 영화, 비디오게임, 음악산업), 항공우주 산업, 기술, 석유, 패션, 섬유, 관광이 주를 이루고 있다. 또 미국 서부에서 가장 큰 공업지역이다. 로스앤젤레스 주변 항구와 롱비치는 서반구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이고, 세계 다섯 번째 항구이다. 또 환태평양 무역에 있어서 필수적인 항구이다. 이 외에 주요 산업으로 대중 매체, 금융, 통신, 법, 의료, 교통이 있다.
로스앤젤레스-롱비치-산타애나 대도시 통계 지구(MSA)의 대도시총생산(GMP)는 7,357억 달러(2010년 기준)로, 뉴욕-뉴어크-브리지포트 대도시권과 도쿄 수도권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경제 규모이다. 로스앤젤레스 대도시권이 하나의 국가로 독립 해 명목 국내총생산을 따진다면 세계 15위이다. 영국의 러프버러대학교 연구 그룹이 2010년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로스앤젤레스는 "알파 세계도시"로 분류되었다.
포춘 500 순위에 든 기업 중 여섯 개가 로스앤젤레스에 본사를 두고 있다. 여섯 개의 기업은 자원 기업 옥시덴탈 페트롤리움, 건강보험 회사 헬스 넷, 금속 배급회사 릴라이언스 스틸 엔 알류미늄, 기술 컨설팅회사 AECOM, 부동산 회사 CBRE 그룹, 건설사 튜터페리니이다. 이 외에 캘리포니아 피자 키친, 캐피탈 그룹 컴퍼니스, 치즈케이크 팩토리, 커피빈 앤드 티리프, deviantART, 폭스 엔터테인먼트 그룹, 게스, 도쿄팝 등 수 많은 기업들이 로스앤젤레스에 본사를 두고 있다.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USC)는 매년 40억 달러를 기부해 도시의 가장 큰 민간 부문 고용과 기부를 하고 있다.
2010년 도시의 포괄적인 연차 재무보고에 따르면 2009년 가장 많은 고용을 한 기관 10위권에 로스앤젤레스 군,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세다스 시나이 의료센터, 카이저 퍼머넌트, 폭스 엔터테인먼트 그룹, 파머스 인슈어런스 그룹, 팀원, 노스럽 그러먼이 포함되었다.
교통.
도로.
도시와 로스앤젤레스 대도시권은 광범위한 고속도로와 간선도로망으로 연결되어있다. 텍사스교통국은 연간 도시 교통량 조사에서 로스앤젤레스가 2005년 인구 1인 당 연간 교통 정체량이 최고라고 발표했는데, 미국에서 가장 혼잡한 도로 교통량을 보유하고있다. 연구에 따르면 로스앤젤레스의 인구 1인 당 연간 교통 체증 경험 시간이 72시간으로, 각각 평균 60시간을 기록한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워싱턴 D.C., 애틀랜타에 이어 최고치를 기록했다. 도시의 교통 혼잡률에도 불구하고 뉴욕, 필라델피아, 시카고와 같은 다른 주요 도시에 비해 통근 거리는 비교적 짧다. 로스앤젤레스의 평균 통근 시간은 26.2분으로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D.C.와 비슷한 수준이다.
로스앤젤레스의 주요 고속도로는 남쪽으로 샌디에이고에서 멕시코 티후아나를 이어주고, 북쪽으로는 새크라멘토, 포틀랜드, 시애틀, 캐나다 국경까지 이어주는 주간고속도로 제5호선, 동쪽으로는 잭슨빌까지 이어지는 주간고속도로 제10호선 등이 있다. 또 캘리포니아 해안지역,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 북해안지역, 오리건주, 워싱턴주를 이어주는 국도 제101호선이 있다.
대중교통.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도심 교통당국과 교통 기업은 광범위한 버스노선 뿐만 아니라 전철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를 가로지르는 모노레일을 운영하고 있다. 2011년 9월 버스와 전철, 모노레일을 합친 월간 대중교통 이용자는 3,880만 명으로 조사되었다. 이중 3,050만 명이 버스 이용자들이였는데, 버스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두 번째로 혼잡하다. 전철과 모노레일을 합친 월 평균 이용객은 820만 명이다. 2005년 로스앤젤레스의 통근자 10.2%가 대중교통을 이용한다고 조사되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교통을 담당하고 있는 공사는 로스앤젤레스 도시 교통국 (Los Angeles County Metro Transit Authority, LACMTA)다.
로스앤젤레스 전철은 미국에서 아홉 번째로 이용자가 많고, 모노레일은 두 번째로 많다. 노선으로는 전철 노선인 파란선, 빨간선, 보라선, 초록선, 금선, 엑스포선이 있다. 오렌지 라인과 실버 라인은 간선급행버스체계 형식으로 지어졌다. 메트로링크의 통근철도는 로스앤젤레스와 주변 지역, 교외를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메트로링크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도심 교통당국에서 운영하는 철도교통 이외에 도시간을 이어주는 암트랙이 있다. 로스앤젤레스 철도교통의 중심이 되는 역은 다운타운 북쪽에 있는 유니온역이다.
항공.
주요 공항으로는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 (IATA: LAX, ICAO: KLAX)이 있다.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은 2006년 6,100만 명의 이용객과 200만 톤 이상의 화물 처리를 했는데, 세계에서 6번째로 혼잡하다. 미국에서 3번째로 혼잡한 공항이지만, 공항 확장이 어렵고 대중교통이 다소 불편한 편이다. 또 유나이티드 항공의 허브 공항이다.
이 외에 주요 공항으로 다음과 같이 있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밴 나이스 공항(IATA: VNY, ICAO: KVNY)은 세계에서 가장 바쁜 범용 공항 중 한 곳이다.
자매 도시.
로스앤젤레스는 25군데의 자매 도시가 있다. |
3374 | 382784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74 | 로널드 레이건 | 로널드 윌슨 레이건(, , 1911년 2월 6일 ~ 2004년 6월 5일)은 미국의 제40대(1981년 ~ 1989년) 대통령과 제33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낸 정치인이다.
레이건은 일리노이주 화이트사이드 카운티에 있는 탬피코에서 태어났고, 일리노이주 리 컨트리에 있는 딕손에서 자랐으며, 일리노이주 유레카 대학에서 경제학과 사회학으로 문학사를 취득했다. 졸업 후에 레이건은 처음으로 일리노이 주를 떠나 아이오와로 가서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했으며, 1937년에는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로 자리를 옮겼다.
생애.
정치 입문.
1911년 일리노이주 탬피코에서 가난한 구두 판매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32년 유레카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아나운서로 일했다.
1937년 할리우드에 들어가 1964년까지 《Kings Row》(1942년) 등 약 50편의 영화에 출연하였으나 특별한 주목은 받지 못했다. 1947년 미국노동총연맹 산하 영화배우협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처음에는 민주당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지지했으나, 1950년대 초부터 차츰 보수적 입장으로 기울어졌다.
1949년에는 제인 와이먼과 이혼했고 3년뒤인 1952년에 낸시 데이비스와 재혼했다.
정치 활동과 대통령 선거.
제2차 세계대전 때는 공군 기지의 부관으로 종군했고, 1962년 공화당에 가입했고, 경제적 자유주의자로 증세와 재정지출 확대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1966년 캘리포니아주의 주지사로 당선되어 조세감면, 복지제도의 축소, 고등교육정책 등을 추진하였고, 캘리포니아 주의 재정은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했다.
1968년•1976년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나섰으나 패하였고, 198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에 지명되어, 미합중국 제40대 대통령 선거에 나서 경제불황으로 인기가 떨어지던 민주당의 지미 카터 대통령을 이겨 당선되었다.
대통령 집권기.
초선과 자유주의 경제정책 노선.
당시 미국은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발생했는데 기존 케인스 경제학으로는 설명을 할 수 없는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기현상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집권당 내부에서도 상당한 세력의 반대가 있었지만 임기초부터 방만한 재정지출 축소와 대규모 감세를 단행했다. 또 가격과 경쟁을 정부에서 통제하고 관리감독하는 틀 자체를 폐지시켜버렸다. 대표적인 사례가 항공기 산업인데 당시 미국의 항공사는 민간 업체였지만 항공요금은 정부에서 가격을 통제했다. 항공사들은 가격경쟁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할인행사나 기내식 서비스로 서로 경쟁을 하려고 했지만 레이건 정부 이전까지만해도 이런 기내식 서비스나 할인권 발매 같은 경쟁도 금지시키고 동일하게 운영하게 늘 관리감독을 했다. 레이건 정부에서 산업부분에 경쟁체제를 도입한 후 항공사들끼리 가격경쟁이 일어나면서 항공권 가격은 일제히 하락했다. 이 저렴한 항공권 때문에 소비자들이 늘어나면서 항공기 산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런 경쟁이라는 개념은 지금은 매우 상식적인 일이지만 냉전시기였던 당시만해도 경쟁이라는 개념은 금기시하던 시대였다. 물론 레이건 정부의 경제적 자유주의 정책을 통해 미국은 스태그플레이션을 벗어났고 동시에 침체한 경기를 활성화해 엄청난 경제 호황을 누리게 됐다는 건 수치상으로 증명이 된다. 문제는 경쟁에서 밀려난 소수의 계층이 존재한다는 점인데 레이건 정부는 이런 계층에 대해서는 소홀하게 인식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암살 시도.
1981년 3월 30일에는 힐튼 호텔에서 노동계 지도자들과 오찬을 마치고 떠나던 도중 정신질환자였던 (John Hinckley)에게 저격을 당했으나 다행히 총알이 심장에서 12 cm 떨어진 곳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초로 테쿰세의 저주를 피해간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이 저격사건으로 인해 경호원이었던 (Tim McCarthy)도 몸으로 레이건을 막아 부상을 당했으나 회복되었다.
당시 존 힝클리는 범행 이유에 대해 '당시 유명 영화배우였던 조디 포스터(Alicia Christian Foster)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고 범행 이유를 자백하였고, 정신병을 앓고 있었던 점과 대통령이 무사하다는 점이 정상 참작되어 1982년, 무죄 판결을 받고 세인트 엘리자베스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재선과 강경보수 외교정책 노선.
레이건은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보수적이고 강경한 국내 내치 정책과 국외 외교 정책을 펼쳐 1984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월터 먼데일에게 압승을 거두면서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조세감면과 사회복지지출을 억제한 ‘레이거노믹스’의 결과 재정 및 무역 적자를 초래했고 대외정책에서 레바논 파병과 리비아 폭격, 냉전체제가 공산권의 사멸로 끝났으니 국방비를 복지비용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비평을 억누르려는 그레나다 침공, 니카라과 반군지원 등으로 제3세계 국가들에게 위협을 주었고 포클랜드 전쟁에서는 우방국인 영국을 옹호했으며 아르헨티나를 테러집단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하여 중남미에서는 레이건이 마가렛 대처의 정부라는 소문을 퍼뜨리는 등 레이건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1986년 '이란 - 콘트라 사건'으로 인기가 떨어지자 소비에트 연방에 대해 유화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1987년 12월에는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중거리핵전력폐기조약'(INF Treaty)을 맺어 냉전을 종식시켰고 1988년 대통령선거에서는 부통령이었던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를 도와 공화당 재집권에 성공했으며 1989년에 퇴임하였다.
대한민국과의 관계.
미국 대통령으로서 재임시절 여러번 방한 한 적이 많았었고 한국에게 관대한 외교적인 노선을 자주 보여 왔다. 박정희 대통령의 핵무장 프로그램과 미사일 개발을 중단시키고, 대한민국과 굳건한 한미공조를 이뤄냈다.
퇴임 이후.
그는 공화당을 더욱 강경한 보수주의로 이끌었던 미국 보수주의운동 진영에서 배출한 최초의 대통령으로, 미국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많은 나이인 70세의 나이로 취임한 대통령이기도 했으며, 최초로 이혼 경력이 있는 미국 대통령이기도 하였다. 그 후, 1989년, 조지 H. W. 부시는 대통령이 되고 난 후, 그는 퇴임하고 자신의 고향인 캘리포니아 자택으로 돌아갔다. 1992년, 대통령 선거가 다시 돌아왔지만 빌 클린턴이 당선되고 조지 H. W. 부시는 결국 낙선되었다. 하지만 1993년, 조지 H. W. 부시는 퇴임을 앞두고 로널드 레이건을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했다.
서거.
1994년 11월 레이건이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뇌의 퇴행성 질환의 하나로 의식의 혼탁과 기억 장애 등의 증상을 유발하는 이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기를 바랬고, 이 병의 치료 방법을 찾기 위해 1995년 그의 부인 낸시 여사와 함께 국립 알츠하이머병 재단과 함께 로널드 낸시 레이건 연구소(Ronald and Reagan Research Institute)를 창설했다. 1997년 10월에는 자신의 대통령 재직 사실도 모르고, 정신 혼미와 발작증상 등이 나타났으며, 1999년에는 신체기능이 급속히 악화되었다. 레이건은 파킨슨병이 악화된 이후로는 대중과의 노출을 일체 차단한 상태로 투병생활을 해왔다. 낸시 여사는 2001년 가진 인터뷰에서 "내 남편은 사람들이 옛날의 레이건으로 기억해주길 바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투병상태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다.
2004년 6월 5일, 10년간 투병해 온 그는 캘리포니아의 자택에서 폐렴 합병증으로 향년 93세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레이건의 시신은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치되었다.
평가.
2011년, 갤럽(Gallup)의 여론조사에서는 미국인이 생각하는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레이건이 19%를 득표하며 1위를 기록했다. 2위는 14%를 기록한 링컨이었다.
사회학자 송호근은 기술관료적 성격을 갖는 정치인이라면 불가능했을 사회혁신을 특유의 정치력으로 밀어붙인, "카리스마적인 정치지도자" 중 한 명으로 레이건 대통령을 언급했다. 노사협력 제도를 창안해 정착시키고, 사회적 투명성과 합리성을 증진하는 제도는 물론 상호신뢰를 높이는 각종 제도를 도입했던 선진국 지도자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집없는 사람들을 여럿 만들었다는 점, 교도소 민영화로 인해 미국 내 전과자 비율을 10%까지 상승시켰다는 점, 공용 정신병원을 없앴다는 점에서 그는 비판 받기도 한다.
기타.
하지만 이 기록은 도널드 트럼프가 만 70세의 나이로 제45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깨졌으며,
2020년 11월 9일 조 바이든이 78세의 나이로 46대 대통령에 당선이 되면서 역대 3위로 밀려났다.
저서.
레이건은 대통령 재임시절 단 한권의 책을 썼는데, 소논문 형식으로 쓴 《낙태와 국가의 양심》이다. 이 저서에서 그는 "노예제를 폐지하지 않고 미국의 자유 공화국이 완전하지 않았던 것처럼, 태아의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지 않는 나라는 결코 자유국가로 살아남을 수 없다"라고 경고하였다. |
3376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76 | Every Little Thing | Every Little Thing(에브리 리틀 씽)은 일본 에이벡스에 소속된 대중음악 그룹이다. 줄여서 ELT라고도 부른다. 일본 내에서 인기가 있고, 한국에도 상당한 팬층을 갖고 있다. 에이벡스 그룹의 에이벡스 트랙스에 소속되어 있다.
'Every Little Thing'이란 이름은 "우주에서 내려다 보면 작은 존재인 인간과 동물등 모든 것들에게"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덧붙여 "만물은 어차피 모두 조그맣다. 앞만 보고 가자!"란 메시지도 담고 있다고 한다.
연혁.
1996년에 보컬, 작사 담당 모치다 카오리, 기타 · 작곡 · 편곡 담당 이토 이치로, 리더 사운드 프로듀스 · 키보드 · 작사 · 작곡 · 편곡 담당 이가라시 미츠루의 3명으로 첫 번째 싱글 "Feel My Heart"로 avex trax에서 데뷔했다. 이 싱글은 오리콘 최고 순위 24위를 기록하고 약 1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1997년에 세 번째 싱글 "Dear My Friend" 로 히트를 치고 첫 앨범 "everlasting"의 메가 히트, 1998년 여덟 번째 싱글 "Time goes by"가 싱글 최초의 밀리언 히트를 기록하는 등 이가라시 음악의 세계관, 신디사이저를 구사한 사운드와 모치다의 보컬, 패션이 10대~20대를 중심으로 지지를 받게 되고, 199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그룹으로 성장하였다.
초창기 작사 · 작곡 · 편곡은 이가라시가 혼자서 맡아서 데뷔 이래 하이 페이스를 유지하며 싱글 릴리스를 계속해왔다. 1999년 제작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고자 하는 이가라시의 생각에서 3월의 열한 번째 싱글 "Over and Over", 열두 번째 싱글 "Someday, Someplace"와 베스트 앨범 "Every Best Single +3"의 릴리스 후 릴리스와 투어 없이 휴식기를 보냈다. 2000년에 열세 번째 싱글 " Pray / Get Into A Groove"와 열네 번째 싱글 "sure", 세 번째 앨범 "eternity"발매 후 3월에 이가라시가 프로듀싱에 전념하기 위해 탈퇴하였다. "이가라시가 탈퇴 후 사운드 프로듀싱에 전념할 것"이라고 발표 이후부터 TV와 콘서트에 출연은 하지 않고 악곡 제공은 계속 이어갈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eternity"에서 싱글 컷 된 열다섯 번째 싱글 "Rescue me (Single Mix)"를 제외하고 나머지 ELT의 악곡에 직접적으로 이가라시가 참여하는 것은 오랫동안 없었다. 그로부터 약 9년 뒤인 2009년 9 월 23일 발매된 서른여섯 번째 싱글 "DREAM GOES ON", 같은 해 11월 18일 발매된 서른일곱 번째 싱글 "冷たい雨", 2010년 2월 24일 발매된 서른여덟 번째 싱글 "Change"에 이가라시가 사운드 프로듀서로 작곡 · 편곡에 참여하였다.
이가라시 탈퇴 후 곡의 작사는 거의 모두 모치다가 하고 있고, 작곡은 카즈히토 키쿠치, 타고 쿠니오, HIKARI 등의 작곡가로부터 곡을 제공받고 있다. 물론 모치다와 이토가 작곡을 맡는 경우도 있다. 또한 사운드 면에서도 이가라시 시절에는 신디사이저를 많이 사용한 곡이 많았지만, 이가라시 탈퇴후 1년여를 거친 2001년 가을 이후에는 밴드 사운드 어쿠스틱 지향의 곡이 많아지고 있다. (이가라시 탈퇴 직후에는 그의 노래 스타일을 답습한 곡이 많았다). 2007년 무렵부터는 기타 이외의 반주를 메인으로 하고 기타를 장식음으로 처리하는 곡도 증가하기 시작해 이가라시가 프로듀싱을 재개한 2009년 이후에는 초창기의 스타일을 다시 도입한 곡도 만들고 있다.
대표곡 중 하나인 "fragile"는 2001년 오리콘 연간 가라오케 차트에서 1위를 차지, 그 후에도 3년 연속 연간 TOP10에 진입하는 등, 일반 여성의 가라오케의 애창곡으로 정착하고있다. 여성 아티스트의 경우 솔로 체제가 많은 가요계에서 이러한 밴드 체제로 데뷔 이후 15년 이상 활동을 하고있는 매우 귀중한 존재이다. 또한 NHK 홍백가합전은 8회 연속 출전하였다. (1997년 ~ 2004년)
구성원.
사이드 기타. 탈퇴 후 ELT에서는 사이드 기타를 배치하지 않고 있다. |
3377 | 33379663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77 | 보아 | 보아(BoA, , 1986년 11월 5일 ~ )는 SM 엔터테인먼트 소속의 대한민국 솔로 가수 겸 배우 겸 프로듀서이다. 1998년 경기도 구리시의 백화점 댄스경연 대회 찬조출연 뒤 15개 기획사 명함을 받았는데 그 중 한 기획사였던 SM 엔터테인먼트를 선택해 연습생이 되었다. 해외진출을 목표로 데뷔 전부터 일본어와 영어를 배웠으며 약 3년의 연습 기간을 거친 뒤, 2000년 8월 25일 한국 첫 정규 음반 《ID; Peace B》를 발매하며 데뷔했다. 현재는 2022년부터 활동을 시작하는 프로젝트 그룹인 GOT the beat의 멤버이다. 그녀의 무대 이름은 Best of Asia(말 그대로 "아시아 최고")의 배크로님입니다.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데뷔한 이후 일본의 레이블사 AVEX와 계약을 체결하고 2001년 일본 데뷔 싱글 "ID; Peace B"를 발매하며 일본에 진출했다. 일본 첫 정규 음반 《Listen to My Heart》는 한국 가수로 처음으로 오리콘 앨범차트 1위에 오르며 10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해 밀리언 인증을 받았다. 2003년 발매한 두 번째 일본 정규 음반 《Valenti》와 2005년 발매한 일본 베스트 음반 《Best Of Soul》이 100만 장을 넘겼다. 한국에서도 《No.1》 (2002), 《Atlantis Princess》 (2003), 《My Name》(2004), 《Girls On Top》(2005)을 발매하였다. 2009년 4월 17일에는 미국 진출을 선언하며 미국 첫 정규 음반 《BoA》를 발매해 한국 가수로 최초로 빌보드 200 127위에 진입했다. 2010년에는 한국에서 5년 만의 정규 음반 《Hurricane Venus》를 발매했고, 2년 뒤인 2012년 일곱 번째 정규 음반 《Only One》을 발매했다. 그로부터 2년여만인 2015년 5월에는 데뷔 15주년을 기념하여 보아 자신이 전곡을 작사, 작곡하고 직접 프로듀싱에 참여한 여덟 번째 정규 음반 《Kiss My Lips》를 발매하였다. 2018년 2월에는 데뷔 이래 첫 미니앨범인 《ONE SHOT, TWO SHOT》을 발매하였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아홉 번째 정규 음반 《WOMAN》을 발매하였고 2019년 12월 두번째 미니앨범 《Starry Night》을 발매했다. 2020년 데뷔 20주년을 맞이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20주년 기념이자 열 번째 정규 음반 《BETTER》을 발매했다.
보아는 한국 가수 최초로 오리콘 차트 1위를 달성하였다. 지금까지 여섯 장의 정규 음반을 연속으로 오리콘 위클리 앨범차트 1위에 올려놓았는데 이는 하마사키 아유미와 코다 쿠미에 이은 역대 2위의 기록이다. 세 장의 정규 음반을 100만 장 이상을 판매해 밀리언 셀러를 달성하였고, 일본에서 지금까지 1000만 장에 가까운 음반이 판매되었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 6년 연속으로 《홍백가합전》에 출연했다. 보아의 경제적 가치는 2000억 원이 넘고, 음반 외 활동까지 합치면 수천 억 원에 이른다고 추산되고 있다.
생애.
1986–1998: 어린 시절 및 데뷔 준비.
보아는 어머니 성영자와 아버지 권재철 사이에서 1986년 11월 5일 대한민국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에서 태어났다. 보아의 아버지는 TBC 방송국의 사운드 엔지니어였고, 방송국 퇴사 후에는 음향 장비와 관련된 일을 했다. 그 후, 보아의 아버지가 목장을 경영하면서, 보아는 도시가 아닌 한적한 시골에서 자랐고, 보아의 어머니는 방송에서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전원에서 마음껏 뛰놀며 보낼 수 있었던 것이 아이들 모두에게 행운이었다. 도심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생활을 즐기며 감춰져 있던 감수성과 창의력을 마음껏 발휘해 지금의 삼남매가 있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보아의 형제로는 두 오빠가 있는데, 큰오빠인 권순훤은 서울대학교 음대 학사, 동대학원을 나와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작은오빠인 권순욱은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활동하며 서인영, 보아, 걸스데이 등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기도 했다. 보아는 남양주양정초등학교에 다녔고, 전교회장을 역임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가수가 되는 게 꿈이었고, 한 인터뷰에서 "초등학교 때 나의 꿈은 가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무척 좋아했거든요."라고 말했다. 초등학교를 졸업 한 후 사립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고, 이후 한국켄트외국인학교(K.K.F.S.)로 전학했다. 가수활동과 학업을 병행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수활동에만 집중하기 위해 학교를 자퇴했다. 그리고 2003년 9월 중졸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2004년 4월 고졸(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그러던 중 13살(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1998년, SM엔터테인먼트의 프로듀서 이수만에게 발탁되어 약 2년 반의 트레이닝 기간을 거쳤다. 나중에 보아는 인터뷰에서 "노래를 좋아하는 것만으로 무대에 설 수는 없었습니다. 가수가 되기 위해 3년 동안 피나는 훈련을 참아 냈습니다."라며 말했다. SM 엔터테인먼트는 당시 보아를 "세계시장을 겨냥한 여가수"를 준비했다고 발표했고 이에 따라 일본에서 활동하기 위해 NHK 아나운서의 집에 머물며 정확한 일본어 발음을 익혔고, 구리시 서울삼육중학교에 다니던 중 영어회화를 위해서 한국켄트외국인학교로 전학했다. SM 엔터테인먼트는 보아의 데뷔 프로젝트를 "신비 프로젝트"라 이름을 붙이고 보아의 데뷔를 진행해 나갔다. 이는 30억 정도를 들인 프로젝트였으며, SM 엔터테인먼트에서 H.O.T. 등의 가수들로 벌어들인 돈을 거의 모두 동원한 중대한 프로젝트였다. 보아의 데뷔가 다가오면서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이름이 바비, 신비라는 소문이 돌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0–02: 한일 양국에서의 데뷔.
보아는 2000년 8월 25일 "15세의 춤추는 소녀"라고 불리며 데뷔 앨범 "ID; Peace B"를 발매했다. "ID; Peace B"에는 동명의 타이틀곡 "ID; Peace B"와 "SARA", 〈비밀일기〉 등 소녀적인 감성을 살린 밝은 댄스 곡과 발라드 곡으로 채워졌다. 보아는 2000년 8월 27일 SBS의 《인기가요》을 통해 데뷔 무대를 가졌다. 보아는 나름 어린나이에 당시 춤과 노래를 소화하며 화제성을 모았으나, 데뷔 초 아주 어린 나이에 데뷔한 탓에 근거없는 루머가 퍼지면서 안티 팬들이 늘어 갔고 이들에게서 혹독한 비난을 받았다. 당시 차트 10위대를 유지하는 등 신인으로서 어느 정도 성공은 했지만, 30억이라는 준비 과정과 비교하면 첫 앨범 활동은 그에 걸맞은 성과를 이루지는 못했다.
한국에서 데뷔 이후 2001년 3월 7일, 보아는 에이벡스와 레이블 계약을 체결하며 일본 진출을 선언했고 그동안의 수록곡들을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바꿔 부른 스폐셜 앨범 "Don't start now - Jumping into the world"을 발매했다. 또한 같은 날, 일본 도쿄에서 대만, 홍콩, 일본 각국 취재진이 모여 쇼케이스를 취재했으며, 에이벡스는 이 쇼케이스에 7억을 투자했다. 에이벡스의 회장 요다 다츠미는 "보아는 카리스마와 빼어난 댄스동작, 가창력을 지녀 J-Pop의 여왕 아무로 나미에를 능가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평가했다. 2001년 5월 30일 보아는 일본에서 데뷔 싱글 "ID; Peace B"를 발매하며 공식적으로 데뷔했고 오리콘 주간 싱글차트 20위권에 진입했다. 7월 25일에 발매한 두 번째 싱글 "Amazing Kiss"를 발매해 역시 20위권에 진입했다. 12월 5일에는 세 번째 싱글 〈키모치와 츠타와루〉를 발매해 오리콘 싱글차트 최초로 11위에 진입했고, 이어 12월 19일에는 코다 쿠미와 함께 네 번째 싱글이자 9·11 테러 추모 싱글인 "The Meaning of Peace"를 발매해 오리콘 싱글차트 7위에 오르며 이때부터 일본에서 가능성을 보였다. 2002년 1월 17일에는 네 번째 싱글 "LISTEN TO MY HEART"를 발매해 처음으로 오리콘 싱글 차트 5위에 올랐고 18만 장에 가까운 판매량을 기록했다. 보아는 7장의 싱글을 발매한 이후 2002년 3월 13일 첫 일본 정규 앨범 "LISTEN TO MY HEART"을 발매해 한국 가수로는 처음으로 오리콘 일간, 주간 앨범 차트 1위를 했다. 이후 100만 장 이상을 판매해 앨범은 밀리언 인증을 받았다.
2002년 4월 12일에는 한국에서 두 번째 한국 정규 앨범 "No.1"을 발매했다. 대한민국에서는 보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져 있던 상황이었고, 이와 동시에 타이틀 곡 〈NO.1〉은 2002년 월드컵과 맞물렸음에도 불구하고 큰 인기를 얻었다. 한국음악산업협회의 음반 판매량 집계에 따르면 《No.1·늘..》은 2002년 한 해 동안 54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했고, 이 기록은 2002년 발매된 전체 음반들 중 4위를 차지하는 기록이다. 보아는 이 앨범에서 후속곡 〈My Sweetie〉와 발라드 곡 〈늘..〉 등으로 활동하다가 8월에 2집 활동을 마감했다.
8월 28일에는 일본에서 6번째 싱글 "VALENTI"를 발매했다. "VALENTI"는 라틴 리듬의 경쾌한 댄스 곡으로, 보아의 일본 싱글들 중 년 현재까지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는 싱글이다. 음반 순위 면에서도 오리콘 주간 싱글 차트 2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기록했다. 이어 3주 뒤에는 7번째 싱글 〈奇蹟/NO.1〉을 발매했다. 특히 싱글 〈/NO.1〉을 발매한 주에는 〈VALENTI〉와 〈/NO.1〉이 모두 주간 차트 5위권 내에 진입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12월 11일에는 발라드 싱글 〈JEWEL SONG/BESIDE YOU-僕を呼ぶ声-〉를 발매하고 활동했다. 한편, 9월 26일에는 그 간의 일본 활동곡들을 모아 한국어로 번안하여 수록한 스페셜 앨범 《MIRACLE》이 대한민국에서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서 보아는 〈VALENTI〉와 〈기적〉으로 활동했고, 30만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히트했다. 이러한 정규 2집 활동과 스페셜 앨범에서의 활약 덕분에 한국음악산업협회 기준 2002년 최다 음반 판매량을 기록한 아티스트가 되었고, 연말 보아는 서울가요대상과 SBS 가요대전, m.net Music Video Festival에서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대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매년 12월 31일 그 해 인기 가수들이 출연하여 노래하는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하게 되었고, 이 무대에서 보아는 〈VALENTI〉를 노래했다. 이 때 출연한 뒤 보아는 2007년까지 6년 연속으로 홍백가합전 무대에 올랐다.
2003–05: 대중적인 성공.
2003년 1월 29일, 보아는 일본에서 2번째 정규 앨범 "VALENTI"을 발매했다. 이 앨범은 발매 일주일 만에 60만 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오리콘 주간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최종적으로는 120만장을 돌파하며 보아의 첫 밀리언 셀러로 기록되었고, 2003년 오리콘 연간 앨범 차트에서 5위를 마크했다. 《VALENTI》 발매 이후에는 오사카시·나고야·도쿄 등지를 돌면서 첫 콘서트 투어 'BoA 1st LIVE TOUR 2003 VALENTI'를 개최하였다. 3월 27일부터 4월 6일까지 4개의 공연이 일정에 잡혀 있었지만 이후 2회의 추가 공연이 결정되어 총 6회의 공연을 펼쳤다. 특히, 도쿄 공연 때에는 모리 요시로 전 일본 총리가 관람한 기사가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5월 14일에는 9번째 싱글 〈Shine We Are!/Earthsong〉을 발매하였다. 발매 당일 일간 차트 1위를 기록했지만, 주간 차트에서는 모리야마 나오타로의 〈〉에 밀려 2위를 기록했다. 2003년은 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한 지 100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미국에는 한인들을 위한 음악제가 여럿 개최되었다. 보아도 4월 2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 음악제'와 9월 29일 뉴욕에서 열린 '미주 이민 100주년 기념 한인 대축제'에 출연하였다. 5월에는 한인 이민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미국 공영방송 PBS에서 제작한 대한민국 특집 프로그램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수로서 출연하여 진행자와 영어로 인터뷰하는 장면이 방송되기도 했다.
5월 30일에 보아는 대한민국에서 3번째 정규 앨범 《Atlantis Princess》를 발매하고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타이틀 곡은 〈아틀란티스 소녀〉로, 전설의 대륙 아틀란티스를 묘사한 동화 같은 가사를 담고 있는 밝은 댄스 곡이다. 보아는 이 곡으로 6월 1일부터 TV 활동을 시작했고, 후속곡 〈Milky way〉와 발라드 곡 〈나무〉로 활동을 계속하며 3집 활동은 9월까지 이어졌다. 이때 보아는 교통사고로 인한 매니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타이틀 곡 〈아틀란티스 소녀〉대신 〈나무〉를 불러 매니저를 추모하며 방송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3집 발매에 앞선 2003년 2월 보아는 서울특별시 홍보대사로 위촉되었다. 이에 맞춰 보아는 서울을 홍보하는 노래 〈서울의 빛〉을 녹음했으며, 2003년 5월 25일 제1회 하이 서울 페스티벌에서 공연하며 대중들에게 공개했다. 〈서울의 빛〉은 이 시기에 발매된 3집에도 수록되었고, 서울특별시 홈페이지에서도 들을 수 있다. 10월 22일에는 싱글 〈DOUBLE〉이 발매되었다.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 동시 발매되어 대한민국에서는 첫 싱글, 일본에서는 통산 10번째 정규 싱글이었다. 이러한 싱글 동시 발매는 이어 발매된 〈Rock With You〉도 똑같이 이루어졌다. 12월 3일에는 대한민국에서 《MIRACLE》과 같은 방식의 스페셜 앨범 《SHINE WE ARE》가 발매되었다.
2004년 1월 15일, 일본에서 3번째 정규 앨범 《LOVE & HONESTY》가 발매되었다. 오리콘 주간 앨범 차트에서 2주 연속 1위를 차지했고, 보아의 통산 3번째 1위였다. 이 앨범으로 미국의 빌보드 차트, 일본의 오리콘 차트, 영국의 UK 차트 등 공신력있는 음악 차트를 토대로 세계 각국 음반 판매량을 집계하여 순위를 매기는 유나이티드 월드 차트에서도 1위를 차지하였다.
이후에도 보아는 《BEST OF SOUL》로 1위에 오른다. 앨범 발매 후 일본에서의 2번째 콘서트 투어도 진행되었는데, 'BoA LIVE TOUR 2004 LOVE & HONESTY'는 한 달여의 기간 동안 총 9회의 공연을 선보인 콘서트 투어였다. 3월 19일에는 보아가 참여한 m-flo의 싱글 〈the Love Bug〉가 발매되었다. 이 때의 인연으로 이후 m-flo의 VERBAL이 보아의 콘서트 무대를 찾았을 때나, 2004년 연말 m-flo가 내한하여 MKMF에 참가했을 때 함께 〈the Love Bug〉를 부르기도 했다. 2월 14일에는 싱가포르에서 열린 'MTV 아시아 어워즈'에 한국과 일본의 공동 대표로 참가하여 '한국 최고 인기 아티스트상'과 특별상인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이 때 축하무대에서 보아는 록 밴드와 함께 〈Rock With You〉를 한국어와 일본어로 동시에 불렀다.
6월 11일에는 대한민국 4번째 정규 앨범 《My name》을 발매하고 타이틀 곡 〈My Name〉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때의 음악 스타일은 이전의 보아와는 아주 다른 파격적인 변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전까지 〈NO.1〉·〈아틀란티스 소녀〉 등의 귀여운 10대 소녀로서의 이미지를 버리고 성숙한 여성으로서의 이미지로 변신했다. 타이틀 곡 〈My Name〉은 어반 댄스 스타일의 곡으로, 골반 댄스 등 노래의 안무도 화제를 낳았다. 보아는 이 앨범의 수록곡 〈Spark〉와 〈My Prayer〉로 9월까지 활동했고, 연말에 MKMF에서 대상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9월 1일에는 일본에서 13번째 싱글 〈QUINCY/コノヨノシルシ〉를 발매했다. 이어 3개월 뒤인 12월 1일에는 14번째 싱글 〈メリクリ〉를 발매했다. 이 싱글은 크리스마스 시즌에 잘 맞는 발라드 곡으로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던 보아의 인기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판매량도 싱글 〈Shine We Are!/Earthsong〉 이후 넘지 못했던 10만 장 선을 넘었고,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롱 히트했다. 미국의 유명 록밴드 위저가 리메이크한 곡이기도 하다.
2005년 2월 2일, 보아는 일본에서 첫 번째 베스트 앨범 《BEST OF SOUL》을 발매했다. 《BEST OF SOUL》은 2001년 〈ID; Peace B〉로 일본에서 데뷔한 이후, 〈メリクリ〉까지 총 14장의 싱글을 발매하는 동안 발표했던 싱글 곡들을 모은 앨범으로, 첫 주 48만장으로 주간 차트 1위를 기록했고 최종적으로는 110만 장 가까이 팔렸다. 베스트 앨범을 발매하고 2개월 뒤 일본에서의 3번째 라이브 투어 콘서트 'BoA ARENA TOUR 2005 BEST OF SOUL'를 열었다. 투어 기간 직전에 발매된 15번째 싱글 〈DO THE MOTION〉은 보아의 싱글들 중 최초로 오리콘 주간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이는 한국인으로서도 최초의 기록이다. 2005년 보아는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출판국에서 출간한 영어교재 《》의 〈〉라는 글에 국제적인 스타의 성공 사례로 실려 화제를 모았다. 6월 24일부터는 대한민국에서 5번째 정규 앨범 《Girls On Top》을 발매하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타이틀 곡 〈Girls On Top〉은 남성 우월주의에 빠진 남성들에게 보내는 경고 메시지를 담은 강렬한 댄스 곡으로, 이 곡에서는 곡 후반에서 남자 댄서의 등에 올라타 노래를 부르는 안무가 화제가 되었다. 이 곡으로 보아는 MBC 《음악캠프》에서 1위를 수상했고, SBS 《생방송 인기가요》에서는 7월 17일부터 7월 31일까지 3주 연속으로 1위에 해당하는 '뮤티즌 송'을 수상했다. 이어 후속곡 〈MOTO〉로 활동했다. 대한민국에서의 5집 활동이 마감되어 갈 때쯤, 8월 31일에 16번째 싱글 〈make a secret〉이 발매되었다. 〈DO THE MOTION〉의 노선을 이어 나가듯 절제되고 세련된 분위기의 곡이다. 11월 23일에는 빠른 댄스 곡을 앞세운 17번째 싱글 〈抱きしめる〉를 발매했다. 한편, 이때부터 보아는 본격적으로 미국 진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2006–08: 일본 활동.
보아는 2006년 2월 13일 네 번째 일본 정규 앨범 "OUTGROW"를 발매했다. "OUTGROW"는 발매 첫 주 222,000만 장을 팔아 오리콘 위클리 앨범차트 1위에 올라 네 장의 앨범이 연속으로 1위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이전 앨범들에 비해 발매 첫 주 가장 낮은 판매량을 보였다. 2006년 4월 5일에는 일본 19번째 싱글 "七色の明日~brand new beat~/Your Color"를 발매했다. 이어 8월 9일에는 20번째 싱글 "KEY OF HEART/DOTCH"를 발매했다. 〈KEY OF HEART〉도 〈~brand new beat~〉의 연장선 상에 서 있는 밝은 댄스 곡이다. 21번째 싱글 "Winter Love"는 11월 1일에 발매되었다. 처음으로 '실연'을 주제로 한 애절한 발라드 곡이다.
여름에는 일본에서 여러 행사에 참가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ap bank 페스티벌'과 '메이지 신궁 불꽃놀이 축제'였다. 'ap bank 페스티벌'은 Mr.Children의 보컬 사쿠라이 가즈토시와 고바야시 다케시, 사카모토 류이치 등이 모여 만든 환경 단체인 ap bank에서 주최하는 축제로, 대형 가수들이 초대되며 2005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무대에서 보아는 사쿠라이 가즈토시와 함께 앨범 《OUTGROW》의 수록곡 〈cosmic eyes〉를 불렀다. '메이지 신궁 불꽃놀이 축제'는 매년 도쿄 메이지 신궁에서 개최되는 불꽃놀이로, 보아는 불꽃놀이 축하무대에 올라 6곡을 공연했다. 이 때 오른쪽 발목 부상을 입은 채 댄스 곡 공연을 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가을부터는 라이브 투어 'BoA THE LIVE 2006 -裏ボア…聴かせ系-'를 개최했는데, 이 콘서트는 한 곡도 춤추지 않고 오직 노래만으로 공연한 콘서트이다. 댄스 곡도 새롭게 편곡하여 공연하였고, 이전까지와 비교하면 관객과 아주 가까운 작은 규모의 공연장에서 공연했다. 한편 2006년에는 한국 영화 '사랑따윈 필요없어'의 OST 〈Sunshine〉에 참여했고, 성우로써 목소리 연기에 도전했다. 보아는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 《헷지》에서 '헤더' 역을 맡아 한국어와 일본어로 목소리 연기했는데, 《헷지》가 제59회 칸 영화제에서 비경쟁 부문에 출품되어 목소리 연기를 맡은 보아는 한국 가수로서는 처음이자 최연소로 칸 영화제에 참석해 레드카펫을 밟았다.
1월 17일에 일본에서 5번째 정규 앨범 《MADE IN TWENTY (20)》가 발매되었다. 이어 3월부터는 일본 내 통산 5번째 콘서트 투어인 'BoA ARENA TOUR 2007 MADE IN TWENTY (20)'를 개최하였다. 4월 25일에는 화장품 광고 음악으로 쓰인 싱글 〈Sweet Impact〉를, 9월 26일에는 도시바 휴대전화의 광고 음악으로 사용된 발라드 싱글 〈LOVE LETTER〉를 발매했다. 12월 12일에는 일본의 록 밴드 DOPING PANDA의 Yutaka Furukawa와 함께한 격렬한 댄스 곡 〈LOSE YOUR MIND〉를 싱글로 내놓아 미국의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마티 프리드먼으로부터 흑인도 무색할 정도로 펑키의 느낌이 잘 살아있고 전성기 때의 마이클 잭슨이 떠오른다는 극찬을 받았다. 2005년 영국에 이어 보아의 입지적인 스토리가 일본 영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10월 말에는 애니콜의 광고 모델이 되었고, 애니콜을 홍보하기 위해 구성된 애니밴드라는 밴드의 메인 보컬로 참여했다. 이들은 11월 말 콘서트를 가지기도 했다. 2006년에 이어 한국 영화 《M》의 OST 〈안개〉에 참여했다. 11월 26일에는 일본 베스트 히트가요제 골드 아티스트상을 수상하였다. 이는 홍백가합전과 함께 6년 연속 수상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보아는 2월 27일에 일본에서 6번째 정규 앨범 《THE FACE》를 발매했다. 《THE FACE》는 11만장 대의 판매량으로 오리콘 주간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했고, 보아는 데뷔 앨범부터 정규 앨범 6연속 1위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하마사키 아유미에 이은 역대 단독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이어 콘서트 투어 'BoA LIVE TOUR 2008 ~THE FACE~'를 개최했다. 8월 15일에는 SM 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들이 펼치는 콘서트 "SM 타운 라이브 '08"에 출연해 9개월 만에 모국의 무대에 올랐다. 한편, 구글 코리아에서 리서치 목적으로 여러 웹페이지를 검색한 결과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국 등 모두 31개국가 및 국민의 대표적 한국 대표 키워드 10개로 인물 분야에서는 유일하게 확인되었다. 연말 보아는 연말 프로인 SBS 가요대전에 엔딩으로 참가하였으며 시간을 내어 연초까지 대한민국에서의 활동을 이어갔다.
2008–11: 미국 진출 및 한국에서의 컴백.
보아는 2009년 3월 17일 미국 데뷔 음반 "BoA"를 발매하며 미국 진출을 했는데, 음반에는 블러드샤이& 아방트, 션 가렛, 브라이언 케네디와 같은 프로듀서들이 참여했다. "BoA"는 발매 첫 주 8,000장을 팔아 한국 가수로는 최초로 빌보드 200 127위에 올랐다. 빌보드 200 이외에 댄스/일렉트로닉 앨범차트에서 5위까지 진입했다. 음반 발매에 앞서 2008년 10월 21일 첫 번째 싱글 "Eat You Up"을 발매해 빌보드 핫 댄스클럽 플레이차트 8위에 올랐으며, 2009년 6월 2일 발매한 두 번째 싱글 "I Did It for Love"는 19위까지 진입했다. 이후 2010년 1월 발매한 세 번째 싱글 "Energetic"은 빌보드 핫 댄스클럽 송 17위까지 진입했다.
비슷한 시기, 보아는 2009년 4월 18일 일본에서 두 번째 베스트 음반 "Best & USA"를 발매했다. "Best & USA"는 발매 첫 날 29,433만 장을 팔아 오리콘 데일리 앨범 차트 1위에 올랐으나, 위클리 차트에서는 145,000만 장을 팔아 2위를 차지했다. 200년 6월 2일 발매한 일본 26번째 싱글 "Vivid"는 29,000만 장을 팔아 오리콘 위클리 싱글 차트 5위에 올랐다. 싱글의 수록곡인 "Kissing you", "Sparkling", "Joyful Smile"은 모두 영화와 드라마의 주제곡으로 사용되었다. 2009년 2월 18일에는 27번째 싱글인 "에이엔/UNIVERSE/Believe in LOVE"를 발매했고 22,000만 장의 판매량으로 위클리 싱글 차트 8위에 올랐다. 이후 보아는 일곱 번째 일본 정규 음반 발매에 앞서 2009년 10월 28일 28번째 싱글 "BUMP BUMP!"을 발매했고, 13,800만 장을 팔아 위클리 싱글 차트 8위에 올랐다. 같은 해 12월 9일 29번째 싱글 "마모리타이 ~White Wishes~"를 발매했고 50,000만 장을 팔아 오리콘 위클리 3위에 올려놓았다. 한편, "White Wishes"는 2009 도쿄 게임쇼에 출연해 "Tales of Graces"의 주제곡으로 선정되었다고 발표했다. 2009년 12월 4일부터 5일은 도쿄, 8일에는 오사카에서 공연하는 크리스마스 콘서트 BoA THE LIVE X'mas 2009를 진행했고, 2010년 3월 3일 공연 실황을 담은 DVD 음반 "BoA THE LIVE 2009 X'mas"를 발매했다. 이후 보아가 직접 프로듀싱에 나선 일곱 번째 일본 정규 음반 "Identity"를 2010년 2월 10일에 발매했다. 음반은 오리콘 위클리 앨범 차트 4위에 올랐으며, 72,000만 장을 팔아치웠다. 이외에 타이완 국제 음반 차트 2위를 차지했고, 필리핀 차트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2010년 6월 21일에는 한국 컴백에 앞서 30번째 일본 싱글이자 디즈니 온 아이스 일본 공연 25주년을 기념하는 싱글 "WOO WEEKEND"를 발매해 오리콘 주간 싱글 차트 10위에 올랐다.
보아는 Live Tour 2010: Identity를 마치고 난 뒤, 2010년 8월 5일 여섯 번째 한국 정규 음반 "Hurricane Venus"를 발매하며 5년만에 컴백했다. 보아는 발매에 앞서 "GAME", 〈옆 사람〉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했고, 2011년 8월 2일 타이틀곡 "Hurricane Venus"의 티저도 공개했다. "Hurricane Venus"는 공개되자마자 각종 음원 차트 1위를 휩쓸었고, 가온 디지털 종합 차트 3위에 올랐다. "Hurricane Venus"는 55,0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이후 6집의 리패키지 음반인 "Copy & Paste"를 2010년 9월 24일 발매했다. 2010년 12월 6일에는 일본에서 디지털 싱글 "I See Me"를 발매하였으며, 이 곡은 보아 자신이 광고모델인 오디오 테크니카의 CM송으로 사용되었다. 보아는 2011년 12월 4일부터 SBS 《K팝 스타》에 출연했는데, YG를 대표하는 양현석, JYP를 대표하는 박진영과 함께 SM을 대표하는 심사위원으로 2012년 4월까지 방송되었다. 12월 7일에는 일본 데뷔 10주년을 맞이해 발매하는 DVD을 선보였는데, 이에 앞서 첫 DVD 싱글 "Milestone"을 발매했다. 또한 2011년 12월 10일과 11일 양일간 일본에서 자신의 일본 데뷔 10주년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 라이브, THE LIVE 2011 X'mas ~The 10th Anniversary Edition~을 개최했는데, 이 공연 실황을 담은 DVD도 발매되었다.
2012–16: 셀프 프로듀싱과 연기 활동.
2012년 7월 25일 보아는 일곱 번째 한국 정규 앨범 "Only One"을 발매했다. 이에 앞서 22일 온라인을 통해 먼저 발매되었고, 동명의 타이틀곡인 "Only One"은 보아가 직접 작사, 작곡한 곡이다. 또한 "Only One" 뮤직비디오에 유아인과 함께 출연했다. 2012년 7월 28일에는 일곱 번째 정규 앨범 컴백을 맞이해 SBS에서 데뷔부터 지금까지의 성장 모습을 담은 컴백쇼 《보아 4354》를 방영했다. "Only One"은 가온 디지털 차트와 코리아 K-Pop 핫 100차트 2위에 올랐고, 앨범은 34,0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2012년 11월 18일부터는 지난 해에 이어 《K팝 스타 2》의 심사위원으로 출연하였다. 2013년 1월 26, 27일에는 대한민국 서울 올림픽 공원 올림픽홀에서 데뷔 이후 처음으로 한국에서 BoA SPECIAL LIVE 2013 ~Here I Am~이라는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1월 28일에는 콘서트에서 처음 공개한 보아의 자작곡 〈그런 너〉의 음원을 공개했다. 이후 2월 27일에는 일본 31번째 싱글 〈Only One〉을 발매했고 첫 주 약 1만 장을 팔아 오리콘 위클리 차트 10위에 올랐다. 6월 26일 발매된 32번째 싱글 〈Tail of Hope〉는 일본 후지 TV 드라마 《백의의 눈물》의 주제곡으로 쓰였다. 2013년 9월에는 KBS 드라마 《연애를 기대해》에 캐스팅되어 배우 데뷔를 하였으며, 보아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메이크 유어 무브 3D》도 개봉했다.
2015년에는 한국 데뷔 15주년을 기념하여 보아 자신이 앨범 수록곡 전곡 작사, 작곡하고, 직접 프로듀싱한 여덟 번째 정규 음반 "Kiss My Lips"를 발표했는데, 5월 6일에 다이나믹 듀오의 개코가 작사와 피쳐링에 참여하고, EXO의 세훈이 뮤직비디오에 참여한 "Who Are You"를 선공개한 뒤, 그로부터 6일 뒤인 2015년 5월 12일에 동명의 타이틀곡인 "Kiss My Lips"를 비롯한 수록곡 12곡을 공개했다. 하지만 길었던 공백에 비해 음악방송 활동이 불과 3주에 불과해 팬들에게 많은 아쉬움을 남겼는데, 대신 이전 앨범활동과 달리 《크라임씬》, 《삼시세끼》, 《냉장고를 부탁해》 등과 같은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색다른 모습을 선보였으며, 2015년 8월 22, 23일에는 여성 아이돌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2015 BoA Special Live "NOWNESS"라는 제목의 두번째 한국 단독 콘서트이자 데뷔 15주년 기념 콘서트를 성공리에 개최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11일에 세트리스트 일부를 수정하여 도쿄에서도 공연하였는데 이는 보아가 최초로 한국 콘서트를 일본에서 공연한 것으로 세트리스트 대부분을 한국어로 불렀다. 12월 중순엔 일본에서는 EDM 장르의 새 싱글 "Lookbook"을 발매하고, 한국에서는 'Winter Garden'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로 후배가수인 f(x)와 레드벨벳과 함께 순차적으로 겨울싱글을 발매하며 음악활동을 이어나갔다. 2016년 SM STATION에 참여하여 빈지노와 함께한 ' No Matter What ' 은 음원차트 1위를 달성하며, Beatburger 팀이 부른 'Music Is Wonderful'에 피처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또한 음악활동 외에 연기활동도 이어나가 2015년 10월부터 《가을우체국》이라는 영화의 원톱주연으로 캐스팅되어 촬영하였고, 이는 2017년 3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이미 상영되고, 2017년 10월 19일에 정식개봉하였다. 2016년 가을에는 송지효와 이선균이 주연인 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에 조연으로 출연하여 촬영하였다.
2017–19: 첫번째 미니앨범과 한일 양국의 아홉번째 정규앨범, 두번째 미니앨범.
2017년 1월, 보아는 첫 미니앨범을 2월 중으로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으나 구체적인 일정은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2월 23일에는 보아가 프로듀스 101 시즌2를 진행한다는 기사가 발표되며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았다. SG 워너비의 이석훈과, 전 애프터스쿨 리더 가희가 트레이너로 합류하여 함께 하였으며, 보아는 프로그램 진행 중 SM STATION을 통해 '봄비(Spring Rain)'를 한국에서 발표하고, 일본에서는 'BoA THE LIVE in Billboard Live' 개최, 디지털 싱글인 'Right Here, Right Everywhere' 공개를 발표하는 등 프로그램 이외의 가수로서의 활동도 함께 진행하며 성공적으로 방송을 마쳤다. 뿐만 아니라 프로듀스 101 시즌2 마지막 방송(6월 16일)에서 중간 광고 방송 전 "CAMO" 컴백 티저 영상이 방영되며 컴백 소식을 알렸고, 2017년 6월 26일 디지털 싱글형태로 정식 발매되었으나 별도의 활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별도의 활동이 없었던 보아는 2017년 11월 일본 공식홈페이지에 2018년 초, 4년여만의 일본 정규 9집 앨범 "私このままでいいのかな" 발매와 함께 2018년 3월부터 4월까지 일본 전국 라이브 투어 공연 BoA THE LIVE 2018 ~Unchained~ 개최가 됨을 알렸다. 또한 이번 개최되는 라이브 공연에서는 자신의 최초 미니앨범인 "Unchained"의 CD반을 관객 전원에게 증정하고, CD+DVD반은 mu-mo 한정으로 발매된다는 사실을 밝혔다. 한편 한국에서도 "CAMO" 이후 약 반년만의 컴백 소식이 밝혀졌으며, 이 앨범의 준비과정을 담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인《키워드#보아》가 방영되었다. 이 앨범의 선공개곡인 '내가 돌아(NEGA DOLA)'는 1월 31일에 뮤직비디오와 음원이 공개되었으며, 2월 1일 엠카운트다운을 시작으로 활동을 1주일 동안 활동을 하였고, 이후 2월 20일 데뷔 후 첫 미니앨범인 'ONE SHOT, TWO SHOT'를 공개하고 1주일동안 각종 음악방송에 참여하여 무대를 선보였다. 그리고 앨범활동이 끝나고 2018년 5월부터 8월까지 이수근, 서장훈, 박성광, 태용, 유아, 니클라스 클라분데와 함께 《식량일기 닭볶음탕편》에 출연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20일~21일에는 열리는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데뷔 후 처음으로 한국에서 뮤직 페스티벌에 참가해 11곡을 소화하였다. 그랜드민트페스티벌(GMF)2018 Awards에서는 <최고의 공연>, <최고의 순간 ‘히트곡 떼창의 순간’>으로 2관왕을 수상하였다. 그 다음 주 수요일인 10월 24일에는 한국 정규 9집 《WOMAN》이 발매되어 2주라는 짧은 기간동안만 활동하였지만, 2018년 11월 28일부터 SBS에서 방송된 예능프로그램 《더 팬》에 팬마스터 역할로 참여하여 팬들을 만났다. 2018년 12월 29일과 30일 양일동안에는 2018년 12월 20일과 21일 양일 간 일본에서 개최됐던 'BoA THE LIVE 2018 X'mas'의 한국 공연 버전인 ' BoA THE LIVE 2018 in SEOUL'을 개최하여 팬들을 만났다. 이듬해인 2019년 10월 26일과 10월 27일 양일간 첫 콘서트가 열렸던 올림픽 공원 내 올림픽홀에서 2019년 9월 22일부터 10월 14일까지 일본에서 개최된 'BoA LIVE TOUR 2019 -mood-'의 한국 공연 버전인 'BoA LIVE TOUR 2019 -mood- in SEOUL'을 개최하였는데, 일본 공연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던 이전 공연과 달리 거의 완전히 세트리스트를 새로 구성하여 기존에 발표됐던 한국곡 위주로 공연을 진행하였다. 또한 이 공연에서 올해 안에 새로운 음반이 발표될 예정이라고 밝혔고, 한 달 가량이 지난 2019년 12월 초 소속사인 SM 엔터테인먼트가 2번째 미니앨범인 《Starry Night》가 2019년 12월 11일 발매된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2020-현재: 데뷔 20주년 기념 열번째 정규앨범.
2020년 데뷔 20주년을 맞이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20주년 기념이자 열 번째 정규 음반 《BETTER》을 발매했다.
음악가적 기교.
음악 및 영향.
보아는 한국과 일본 양국 모두에서 노래를 잘한다고 평가받고 있다. 보아의 주요 장르로는 힙합, R&B, 댄스 팝이다. 또한 보아는 평소에 핑크, 에이브릴 라빈의 노래를 들으면서 록 장르의 음악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발라드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우타다 히카루, 하마사키 아유미와 종종 비교되어 왔다. 보아는 데뷔 이후 아티스트로서의 인생에 올인해야 했고, 이 때문에 "My Name", "Girl's On Top", "Hurricane Venus"와 같은 강한 일렉트로닉 댄스 노래만 해왔다. 하지만 2012년 일곱 번째 정규 앨범 "Only One"을 기준으로 보아는 강한 여전사 이미지를 버리고 일렉트로닉 댄스곡은 그만하고 싶다고 밝혔다.
보아는 미국 진출 당시 힙합풍의 노래 "Eat You Up"을 첫 싱글로 발매했는데, 《LA타임즈》에서 "Eat You Up"은 브리트니 스피어스도 질투할만 노래이지만, 보아가 미국에서 장기적 성공을 하기 위해선 브리트니 이상의 차별화된 스타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세계적인 뮤직비디오 감독인 조셉 칸은 보아에게 "보아는 굉장히 퍼포먼스적으로 춤과 노래가 모두 뛰어난 환상적인 가수다. 세계적인 어떤 스타들과 비교해도 보아만큼 퍼포먼스를 잘 해내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한국은 보아를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아의 주요 음악적 영향은 힙합이지만, R&B도 즐긴다고 했다. 보아는 데뷔때부터 마이클 잭슨을 팬이자 롤 모델이라고 말해왔는데, "팝의 황제 잭슨은 내 영웅이고, 영원히 사랑한다"고 트위터에 글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보아는 자신의 콘서트에서 잭슨의 노래를 공연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자넷 잭슨, 브리트니 스피어스, 제니퍼 로페즈, 제이-지, 저스틴 팀버레이크, 넬리와 같은 댄스 팝, R&B 가수들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핑크, 에이브릴 라빈과 같은 팝 록 장르의 가수들도 좋아한다고 말했다. 보아는 이후 많은 한국의 아이돌 가수들에게 영향을 끼쳤는데, 씨스타의 효린은 "그동안 보아를 존경했다. 그런 무대를 보여주고 싶었다"며 보아의 "My Name" 무대를 공연했다. f(x)의 루나는 "어렸을 적부터 보아가 롤모델이어서 모든 것들을 똑같이 닮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또한 보아는 활동 중인 후배 가수들과 연습생들 사이에서 조사한 "본받고 싶은 롤모델" 1위로 뽑혔다.
이미지.
보아는 데뷔 2년 전부터 소속사인 SM 엔터테인먼트에서 비교적 강도 높은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데뷔를 준비했고, 소속사 또한 그녀를 대한민국 내에서만 머무르게 하지 않고 해외진출을 데뷔 이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철저한 준비 과정을 거친 그녀는 한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기 전에 바로 일본에 진출하여 일본의 거대 연예 매니지먼트사인 AVEX와 계약에 성공한 최초의 한국 가수이다.
보아는 많은 브랜드 광고에 출연하였는데, 보아가 광고를 했었던 브랜드로는 올림푸스, 나이키, 로레알, 꼬달리, 엘리트 교복, 서울우유, 미샤, 삼성 에니콜, 큐리텔, 비브라스, 하이트 맥주, 메이블린 뉴욕, 팅, KB 카드, 베가레이서, 브레인 토피아 닷컴, apm, 광동 옥수수 수염차, 초코틴틴, GM 대우 자동차 일본에서는 코세, 스케쳐스, 오디오 테크니카, 한국GM과 같은 광고에 출연했었다. |
3379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79 | Mr.Children | Mr.Children()은 사쿠라이 가즈토시, 다하라 겐이치, 나카가와 게이스케, 스즈키 히데야로 구성된 일본의 록 밴드이다. 흔히 줄여서 미스치루라고 불리기도 한다.
1989년에 결성된 Mr.Children은 5천4백만 장이 넘는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며 가장 성공한 일본 록 그룹 가운데 하나로 꼽히며, 1990년대 중반엔 발매한 음반들이 모두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는 등 ‘미스치루 현상’()을 일으키기도 했다.
Mr.Children은 싱글 29장 연속 1위 기록을 갖고 있으며, 1994년엔 〈Innocent World〉, 2004년엔 〈Sign〉으로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대상을 받았다.
2012년 11월까지 Mr.Children은 정규 음반 14장과 싱글 33장, 컴필레이션 음반 5장, 라이브 음반 1장, 영상 음반 15장을 발매했다. 스즈키가 작곡한 〈Asia〉 (《Atomic Heart》)와 〈#2601〉 (《Discovery》)를 제외한 밴드의 노래 대부분은 리드 싱어인 사쿠라이가 작곡하는데, 때로는 프로듀서인 고바야시 다케시와 함께 작업하기도 한다.
내력.
2008년.
2008년 봄에는 그들의 노래 〈쇼넨〉이 NHK 야구 드라마 《배터리》의 주제가로 사용됐다.
여름, 그들은 3개월간 3작품 연속 발매를 발표했다. 첫 번째는 《2008년 하계 올림픽》 NHK 방송 테마송인 싱글 《GIFT》, 두 번째는 작년에 개최한 전국 투어에서 요코하마 국제종합경기장에서 열린 공연을 담은 DVD 《Mr.Childre "HOME" TOUR 2007 ~in the field》, 세 번째는 드라마 《코드블루》 주제가인 싱글 《HANABI》이다.
〈Habani〉는 야마시타 도모히사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 《코드 블루》의 주제가로 사용됐다.
11월에는 첫 디지털 싱글인 〈하나노 니오이〉를 발매했다. 이 노래는 11월 22일 개봉한 나카이 마사히로가 주연한 영화 《나는 조개가 되고싶다》 주제가로 쓰였다.
12월 10일엔 정규 음반 《Supermarket Fantasy》를 발매했는데, 발매 첫 주에 약 70만 장이 팔리며 오리콘 주간 음반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2009년 ~ 2011년.
2010년 12월 1일, Mr.Children은 음반의 유일한 싱글이자 디지털 싱글로 발매한 〈fanfare〉가 수록된 그들의 16번째 음반 《SENSE》를 발매했다. 발매 직전인 11월 29일까지 발매일을 제외한 수록곡, 곡수, 음반 제목, 커버 등 상세한 정보는 밝혀지지 않았었다.
2011년 4월 4일, Mr.Children은 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기부금을 모으기 위한 디지털 싱글 〈카조에 우타〉를 발매했다. 이 노래는 발매 첫 주에 AKB48의 자선 싱글 〈다레카노 타메니 (What Can I Do for Someone?)〉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으며, 2011년 일본의 아이튠즈 연간 다운로드 순위에서 일본의 음악가로는 가장 높은 순위인 4위를 차지했다.
2012년.
2012년 4월 18일, Mr.Children은 3년 7개월만에 3A 싱글 〈이노리: 나미다노 기도/End of the Day/Pieces〉를 발매했다. 수록곡 가운데 두 곡 은 영화 우리들이 있었다 주제가로 사용됐다.
2012년 5월 10일에는 데뷔 20주년을 기념해 베스트 음반 《Mr.Children 2001-2005<micro>》와 《Mr.Children 2005-2010<macro>》 두 장을 함께 발매했다. |
3397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97 | 중앙 처리 장치 | 중앙 처리 장치(中央處理裝置) 또는 CPU(, central/main processor)는 컴퓨터 시스템을 통제하고 프로그램의 연산을 실행처리하는 가장 핵심적인 컴퓨터의 제어 장치, 혹은 그 기능을 내장한 칩이다. 컴퓨터 안의 중앙 처리 장치(CPU)는 외부에서 정보를 입력받고, 기억하고, 컴퓨터 프로그램의 명령어를 해석하여 연산하고, 외부로 출력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중앙 처리 장치(CPU)는 컴퓨터 부품과 정보를 교환하면서 컴퓨터 시스템 전체를 제어하는 장치로, 모든 컴퓨터의 작동과정이 중앙 처리 장치(CPU)의 제어를 받기 때문에 컴퓨터의 두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실제의 CPU 칩엔 실행 부분뿐만 아니라 캐시 등의 부가 장치가 통합된 경우가 많다.
CPU에는 MCU(Micro Control Unit)와 주변 장치(외부 확장 장치에 관한 IC)가 다 들어있는 Soc(System On Chip)가 있다. 주변 IC가 따로 달려 있을 경우, 그것은 MCU라고 할 수 있다.
CPU는 기계어로 쓰인 컴퓨터 프로그램의 명령어를 해석하여 실행한다. CPU는 프로그램에 따라 외부에서 정보를 입력받아,이를 기억하고, 연산하며, 결과를 외부로 출력한다. CPU는 컴퓨터 부품과 정보를 교환하면서 컴퓨터 전체의 동작을 제어한다.
기본 구성으로는 CPU에서 처리할 명령어를 저장하는 역할을 하는 프로세서 레지스터, 비교, 판단, 연산을 담당하는 산술논리연산장치(ALU), 명령어의 해석과 올바른 실행을 위하여 CPU를 내부적으로 제어하는 제어부(control unit)와 내부 버스 등이 있다.
각종 전자 부품과 반도체 칩을 하나의 작은 칩에 내장한 전자 부품을 마이크로프로세서라고 한다.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전기 밥통에 쓰이는 낮은 성능의 제품부터 컴퓨터에 쓰이는 높은 성능의 제품까지 매우 다양하다. 마이크로프로세서들 가운데 가장 복잡하고 성능이 높은 제품은 컴퓨터의 연산 장치로 쓰인다. 이것을 중앙 처리 장치라고 한다.
역사.
CPU의 출현.
'고정된-프로그램 컴퓨터'라고 불리는 ENIAC같은 컴퓨터는 다른 종류의 작업을 하기 위해 전선을 재배열 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CPU"라는 용어가 소프트웨어의 실행을 위한 장치로 불리게 된 이래로, CPU라고 불릴 수 있는 장치의 출현은 프로그램 내장 방식 컴퓨터의 출현 덕분이었다.
프로그램 내장 방식 컴퓨터는 J.Presper Eckrt와 John Willian Mauchly's의 ENIAC 설계에도 이미 어느 정도 드러나 있다. 하지만 ENIAC을 빨리 제작하기 위해서 생략되었다. ENIAC이 만들어지기 전인 1945년 6월 30일 수학자 폰 노이만은 'EDVAC 초안에 대한 보고'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것은 프로그램 내장 방식 컴퓨터의 개요로써 1949년에 완전히 정립되었다. EDVAC은 일정한 수의 다양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확실한 것은, EDVAC 프로그램은 물리적 선의 연결이 아니라 빠른 속도의 컴퓨터 메모리에 저장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ENIAC의 한계를 이겨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폰 노이만의 디자인은 소프트웨어(프로그램)를 단순히 메모리에 있는 내용을 바꾸는 것 만으로 손쉽게 실행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EDVAC은 최초의 프로그램 내장방식 컴퓨터는 아니었다. 맨체스터 대학교의 SSEM(Small-Scale Experimental Machine)과 마크 1이 프로그램 내장 방식 컴퓨터의 초기 버전이다.
트랜지스터와 집적회로 CPU의 등장.
트랜지스터 CPU는 트랜지스터 발명 이후 등장했다. 트랜지스터는 같은 역할을 하던 진공관을 빠르게 대체하여 CPU의 부피를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마이크로프로세서.
페드리코 페긴이 1970년대에 발명한 것은 CPU의 설계와 구현에 대한 전반적인 기초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1970년에 등장한 최초의 상업용 마이크로프로세서(Intel 4004)와 1974년의 최초의 범용 마이크로프로세서(Intel 8080) 이후로 생겼다.
연산.
모든 CPU에서 메모리에 저장된 명령어들을 순서대로 불러와서 실행한다는 사실은 물리적형태와는 관계없이 동일하다. 그리고 CPU가 이 동작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꺼내고, 해독하고, 실행하는 5단계가 필요하다. 마지막 단계에서 명령어를 실행하고난 이후에는 다시 이 다섯 단계의 명령 주기가 반복되며, 프로그램 카운터의 변화된 위치에서 실행될 명령어를 불러오게 된다.
인출.
첫 번째 단계인 인출(Fetch)은 프로그램의 메모리에서 명령어를 불러오는 역할을 한다. 프로그램 내부의 명령어의 위치(주소)
해독.
두 번째 단계인 해독(Decode)은 인출 단계에서 가져온 명령어를 해독하여 명령어 내의 데이터 정보와 연산 정보를 추출한 뒤, 중앙처리 장치 내의 각 장치에 적절한 제어신호를 보내 연산, 처리에 대한 준비를 하는 단계이다.
실행.
실행(Execute)은 명령어에서 추출한 두 데이터와 연산 정보를 이용해 실제로 연산을 하는 단계를 말한다. 연산이 끝난 결과는 곧바로 다음 명령어에서 사용될지, 그렇지 않을지에 따라 메모리 단계로 갈지, 라이트백 단계로 갈지 결정된다.
메모리.
네 번째 단계인 메모리(Memory)는 연산결과가 다음 명령어에 바로 사용되지 않는다면, 결과를 메모리에 저장하는 것을 말한다.
라이트백.
연산의 마지막 단계인 라이트백(Write-Back)은 이전 명령어의 연산 결과가 다음 명령어의 입력 데이터로 사용될 경우, 계산 결과를 레지스터에 다시 쓰는 것을 말한다.
설계와 구현.
기본 구성으로는 CPU에서 처리할 명령어를 저장하는 역할을 하는 프로세서 레지스터, 비교, 판단, 연산을 담당하는 산술논리연산장치(ALU), 명령어의 해석과 올바른 실행을 위하여 CPU를 내부적으로 제어하는 제어부(control unit)와 내부 버스 등이 있다.
CPU의 내장회로는 CPU가 수행할 수 있는 기본적인 연산들의 집합인 '명령어 집합'으로 이루어져있다. 예를 들면 두 개의 숫자에 대한 가감연산 혹은 비교연산 같은 것이 있다. 각각의 기본 연산은 옵코드(opcode)라고 불리는 특정한 비트의 조합으로 나타내진다.
모든 명령어의 실제 수학적인 연산은 CPU 내부의 산술논리장치(ALU, arithmetic logic unit)이라는 조합논리회로에서 담당한다. CPU는 대부분 산술논리장치가 연산을 수행하기 위한 명령어를 메모리로부터 불러오고, 연산의 결과값을 저장하는 일을 한다. 메모리로부터 데이터를 불러오는 연산의 명령어 집합의 종류와 동작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성능.
중앙 처리 장치의 성능은 크게 클럭(Clock) 속도와 코어 수로 결정된다.
클럭.
CPU에서 클럭이라고 하는 수치는 중앙 처리 장치 내부에서 일정한 주파수를 가지는 신호로 이 신호에 동기화되어서 중앙 처리 장치의 모든 명령어가 동작되게 된다. 예를 들어, 클럭 수가 3.0GHz이면 초당 30억 번의 명령어 처리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클럭 주파수가 빠를수록 제한된 시간에 더 많은 명령을 처리할 수 있기에 더 좋은 성능의 중앙 처리 장치라고 할 수 있다.<br>
코어.
중앙 처리 장치안의 코어의 수로도 성능의 차이가 난다. 코어는 중앙 처리 장치의 역할을 하는 블록으로 예전에는 한 개의 칩 안에는 한 개의 코어의 구조를 가진 싱글코어가 다수였지만 최근에는 한 개의 칩 안에 여러 개의 코어를 가지는 멀티코어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싱글 코어.
싱글 코어(Single Core)는 하나의 코어로 이루어진 CPU이다. 일반적으로 멀티 코어에 비해 경비가 싸고 프로그래밍도 간단하지만 보수 작업이나 고장의 경우에는 시스템이 완전히 멈추고 수많은 작업을 잘 분산시키지 못해 멀티 코어에 비해 처리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이 있다.
멀티 코어.
한 개의 칩 안에 여러 개의 연산을 처리할 수 있는 장치를 병렬적으로 연결한 멀티 코어 시스템을 통하여 더 좋은 성능의 중앙 처리 장치를 얻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프로그램을 작성할 때 멀티코어를 활용할 수 있도록 코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멀티코어 CPU라도 멀티코어를 활용 못할 수 있다.
싱글 코어 및 다중 코어를 칭하는 명칭은 다음과 같다.
현재는 코어의 속도를 높이기 힘든 한계에 왔기 때문에, 속도보다는 병렬성을 높이는 것에 집중하여 CPU 다이에 64개의 코어를 넣은 AMD EPYC 7742 서버용 CPU도 출시되었다.
CPU 메이커.
대중적인 운영 체제하의 CPU 설계 또는 제작사 |
3398 | 22169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98 | 커널 | 커널(Kernel)은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
3399 | 123884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99 | 핵 (수학) | 수학에서, 어떤 사상의 핵(核, )은 0의 원상의 포함 사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특별한 단사 사상이다. 범주론을 통해 추상적으로 정의할 수 있으나, 적절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구체적 범주에서는 특정 원소의 원상의 포함 함수가 된다.
정의.
영 사상을 갖는 범주 formula_1 속의 사상 formula_2의 핵 formula_3은 다음과 같은 영 사상과의 동등자이다.
영 대상을 갖는 범주 속의 사상 formula_5에 대하여, formula_6인 formula_7가 존재한다면 formula_5를 정규 단사 사상(正規單射寫像, )이라고 한다. "정규"라는 용어는 군론의 정규 부분군에서 유래하였다. 임의의 영 대상을 갖는 범주에서, 정규 단사 사상은 (동등자이므로) 단사 사상이다.
모든 단사 사상이 정규 단사 사상인 영 사상을 갖는 범주를 정규 범주(正規範疇, )라고 한다.
성질.
준가법 범주 (아벨 군의 모노이드 범주 formula_9 위의 풍성한 범주)에서, 두 사상의 동등자는 그 차의 핵과 같다.
아벨 범주에서 모든 사상은 핵을 가지며, 모든 단사 사상은 정규 단사 사상이다. 구체적으로, 아벨 범주에서 모든 단사 사상은 그 여핵의 핵과 같으며, 모든 전사 사상은 그 핵의 여핵과 같다.
예.
벡터 공간과 가군.
환 formula_11 위의 왼쪽 가군의 범주 formula_12는 영 사상을 갖는 범주이며, 이 범주에서 모든 사상(가군 준동형)은 핵을 갖는다.
구체적으로, formula_13의 핵 formula_14는 다음과 같은 포함 함수이다.
formula_12에서 모든 단사 사상은 정규 단사 사상이다. 이는 (군이나 유사환의 경우와 달리) 임의의 부분 가군에 대한 몫가군을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선형대수학에서 formula_11가 체일 경우, 체 위의 가군들은 벡터 공간이며, 벡터 공간의 범주에서는 핵이 존재한다. 특히, 행렬은 유한 차원 벡터 공간 사이의 선형 변환을 정의하며, 행렬의 핵은 벡터 공간의 범주에서의 핵이다. 선형대수학에서 핵은 영공간(零空間,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군.
군과 군 준동형의 범주 formula_18에서, 영 사상은 1(군 연산의 항등원)로 가는 상수 함수이다. formula_18에서 모든 사상(군 준동형)은 핵을 갖는다.
구체적으로, formula_20의 핵 formula_21는 다음과 같은 포함 함수이다.
이 경우, formula_23는 formula_24의 정규 부분군을 이룬다.
군의 범주에서, 임의의 군 준동형 formula_20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아벨 군과 군 준동형의 범주 formula_9에서, 영 사상과 핵은 formula_18에서와 같다. 즉, 영 사상은 0(군 연산의 항등원)으로 가는 상수 함수이며, 핵은 0의 원상으로 가는 포함 함수이다. formula_9에서 단사 함수인 모든 군 준동형은 정규 단사 사상이다. 이는 아벨 군의 모든 부분군이 정규 부분군이기 때문이다.
유사환.
유사환과 유사환 준동형의 범주 formula_33에서, 영 사상은 0 (덧셈 항등원)으로 가는 상수 함수이다. formula_33에서 모든 사상은 핵을 갖는다.
구체적으로, formula_35의 핵 formula_36는 다음과 같은 포함 함수이다.
이 경우, formula_38는 formula_11의 아이디얼을 이룬다.
유사환의 범주에서, 임의의 유사환 준동형 formula_35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곱셈 단위원을 갖는) 환과 환 준동형의 범주 formula_45에서 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아이디얼은 1을 포함하지 않을 수 있어 부분환을 이루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점을 가진 공간.
점을 가진 공간의 범주 formula_46에서, 영 사상은 formula_47으로 가는 상수 함수이다. 이 범주에서 모든 사상 formula_48은 핵 formula_49을 가지며, 이는 formula_47의 원상에 대한 포함 함수이다. |
3402 | 22169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02 | 정당 | 정당(政黨) 또는 당(黨)은 공공 이익의 실현을 목표로 하여 정치적 견해를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집단을 일컫는다. 정당은 정치의 기구·조직 가운데서 비교적 최근에 발달한 편에 속한다. 사회가 근대화됨에 따라 정치가 다원화하는 것을 반영하는 데 있어서 의회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게 되어 여기서 생기는 투입과정의 차질을 보완하기 위하여 점차 정당이 형성되기 시작되었다.
서구의 정치사에서는 근대정당의 성립과 발전을 대체로 19세기 초부터 잡고 있으며 의회정치를 기준으로 해서 볼 때에는 나라에 따라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정당정치의 전통이 확립되는 경우도 있다. 근세 이전은 말할 것도 없고 16세기에 이르는 사이에 정당이 발달하지 못했던 이유는 정치에 참여하는 인구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가 귀족이나 지식을 가진 계층에 의하여서만 이루어질 때 정치를 좌우하는 것은 합리성이며 또한 그 바탕은 동질적인 것이다. 이러한 단일의 정치적 주체에 대하여 처음에는 부르주아지가, 그리고 뒤이어서 프로레타리아가 도전하면서 정치는 복잡한 투쟁관계로 변모하게 되었다. 투쟁의 첫단계에서는 주로 폭력이 이기고 지는 것을 가름했으나 어느 쪽의 종국적인 승리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서는 타협과 선의의 경쟁이 룰(rule)이 되었고 이에 정당이 필요 불가결한 것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정당의 기본적인 개념을 정치사회적으로 보아 다원적 경쟁사회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여길 때 현대의 전체주의적 국가에서 볼 수 있는 단일정당은 정당이라고 하기보다는 특수 기능을 장악한 정부의 한 조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정당이란 어휘 자체가 원래 '부분적인 모임'이라는 뜻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또 현대의 신생 제국에서 대개의 경우 정당
특징.
정당의 특징을 몇 가지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역사.
인간이 도당 또는 당파를 조직해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 역사는 오래된다. 이것을 인간의 투쟁본능의 표현으로 보는 설도 있으나, 어떻든 단결이 힘의 결집수단으로서 효과적이라는 단순한 이유가 작용하고 있음은 틀림이 없다. 정당도 이러한 당파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단순한 도당과 정당 사이에서는 유사점보다도 상위점 쪽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당은 근대적 의회제도 아래서 정치권력을 위해 투쟁하는 조직이지만, 도당은 역사적으로 그 이전의 현상이며, 정치권력이 개인 내지 폐쇄적인 집단에 독점되었던 시대에 거기에 대항하는 집단으로서의 도당은 직접 폭력수단에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암살이나 협박, 반란 같은 수단에 의존했는데, 권력측도 이에 대항해서 투옥, 사형 등의 위력수단으로 준열한 탄압을 가했다. 그 결과 반정부세력은 종종 비밀결사의 형태를 취하게 되고, 당파의 목적·구성원·조직·활동은 일체 비밀에 붙여지고, 이 비밀의 유지를 위해서는 엄격한 규율이 준수되었다. 한편 정당은 근대적 의회정치와 더불어 발전해 온 조직이다.
근대적 의회정치는
제도를 말한다.
‘전국민을 대표하는 의원’의 개념은 고정적 이해의 대립을 초월한 공적인 국가의 성립을 전제로 하며, 이해관계나 의견의 대립을 무력이 아니라 토론과 다수결로 해결한다는 것은 다수와 소수를 초월한 전체라는 개념이 인정되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근대적 의회정치가 시민사회를 기초로 하는 근대국가에서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리하여 의회 내부에서 동지로서 의원을 모아 다수파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노력이 벌어지고, 의원의 원내조직으로서 정당이 생기게 된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의회의 세력이 한층 더 강화되어 정부가 의회의 다수파를 기초로 해서 설립되게 되자 정당도 정권의 획득·유지를 위해 그 결속을 한층 더 강화하게 되었고, 또 유권자의 범위가 한층 더 확대됨에 따라 정당 자체가 선거활동의 영역에까지 그 활동범위를 넓히게 되었다. 이렇게 정당의 활동은 의회정치의 구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목적.
정당이라는 조직의 목적을 어떻게 보는가에 관해서는 특정의 주의 및 정책의 실현이라고 하는 설과 정권의 획득·유지라고 하는 설이 있는데, 보다 현실적인 관점에서 후자의 설이 타당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버크(1729년-1797년)는 '정당이란 그 성원 전원의 지지를 받는 특정원리에 입각해서 공동의 노력으로 국가적 이익을 추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일단의 사람들의 결합체'라고 하는 유명한 정의를 내렸으나 실제로는 정책단체라고 볼 수 없는 정당이 적지 않다. 가령 미국의 양대 정당은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의 여름에 각기 당대회를 열어 당의 강령을 발표하나, 양당 사이에 정책상의 차이는 별로 없고, 또 어느 당이건 선거강령과 집권 후의 정책 사이에는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의회에서 의안이 채결될 때에는 같은 당 소속의 의원이 찬반 양진영으로 갈라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정당을 정책을 중심으로 결집한 사람들의 집단으로 보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오히려 정권의 획득과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정치단체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투쟁조직으로서의 정당.
2개 이상의 정당이 다같이 정권장악을 목적으로 해서 활동한다는 것은 이들 정당이 서로 대립관계에 서서 정권을 둘러싸고 투쟁하는 조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투쟁은 선거에서부터 시작되어 입법·사법·행정의 모든 영역에서 인사 및 정책에 관해 격렬히 전개된다. 그러나 정당이 투쟁조직이라는 것은 반드시 정당 상호간의 관계가 전부 적대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3개 이상의 정당이 존재할 때는 선거나 내각타도라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몇 개의 정당이 잠정적·부분적인 협력관계를 맺는 예가 적지 않다. 또한 연립내각도 이러한 잠정적·부분적 협력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이러한 협력은 어디까지나 일시적·부분적이며, 결국은 투쟁의 한 국면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지속적·전면적인 협력이 실현된다면 그것은 이미 정당의 병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투쟁조직으로서의 정당의 당면 과제는 투표자·지지자·당원 및 소속의원의 수를 늘리는 당세확장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당원의 질을 높이고 그 사기를 고무해서 당의 결속을 강화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무원칙·무방침의 팽창정책이 당내에 많은 이질분자를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아, 분파의 대립을 격화시켜 통제를 마비케 하고 결국은 당의 투쟁력 약화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말하면 정당은 대립정당이 완전히 약체·무력하게 되는 것을 바라기보다는 강력하기를 바란다. 강력한 경쟁대상이 있어야 당내의 결속이 공고해지는 것이며, 상대방이 무시해도 될 만큼 무력할 때는 당의 결속이 이완되어 내분이 생기는 예가 많다.
자주적 결사로서의 정당.
정당은 의회정치라는 기계를 움직이는 엔진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공적 조직이며, 정당이 없는 민주정치는 생각할 수도 없다. 미국의 대통령선거나 비례대표제의 의원선거는 정당의 존재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으며, 의회의 의사운영도 정당이 없다면 극도의 혼란을 빚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여당이 결정한 정책은 정부에 의해 실제로 시행될 수 있다. 이렇게 정당이 국가적 의의가 있는 중요한 공공의 기능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정당에 국가기관적 성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당은 국가와는 다른 의미에서 사회에 기초를 두는 정치세력이며 본질적으로 다른 여러 가지의 결사와 동일하게 사적 성격을 띤다. 다시 말해서 정당은 근대국가에 있어서의 결사의 자유를 전제로 하는 정치결사로 특정의 정치적 목적을 공통으로 갖는 사람들의 자발적 결집체이다. 그러므로 정부가 특정 정당의 활동자금을 보조하거나 세법상 특혜를 준다면 이는 민주국가의 헌법에 위배되는 처사가 된다.
정당의 정책.
정당은 집권을 목적으로 하는 투쟁단체이고 정책단체는 아니나, 정당과 정책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근대적 의회제도 자체가 편견이나 폭력이 아니라 토론과 이성에 호소하여 문제를 처리하는 제도이므로 이 제도하에서 활동하는 정당이 일정한 원리에 입각하여 주의, 주장, 정책을 놓고 투쟁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선거는 본래 ‘인물’의 선택을 의미했으나, 정당이 선거 때에 정책을 발표하게 되면서부터 ‘정책’의 선택이라는 의미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유권자의 수가 격증하고 사회적으로 많은 계층적 이질요소가 형성되어 종전처럼 입후보자나 그 지지자인 명망가들의 지명도나 권위에만 의존해서는 표를 모으기가 곤란해진 데서 온 결과이며, 또한 정부의 시책에 의해서 적절한 해결을 기대할 수 없는 문제의 범위가 넓어졌기 때문에 유권자가 정책을 주목하는 경향이 생긴 데서 오는 결과이기도 하다. 영국에서는 1891년에 뉴캐슬에서 열렸던 전국자유당연맹대회에서, 미국에서는 1832년의 공화당전국대회에서 각각 최초의 당 강령이 발표되었다. 이 두 사건을 계기로 선거는 종전처럼 후보자 개인의 인물의 선택과 그에 대한 백지위임이 아니라 당의 정책의 검토와 선택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고, 따라서 후보자 개인의 투쟁이 아니라 당과 당 사이의 투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또 선거 후에도 의원은 종전처럼 유권자의 백지위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당의 공약으로 그 행동이 규제되며, 또 유권자의 감시와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의원이 당원으로서 당의 강령에 구속되는 것은 당연한데, 의회 안에서의 당원의 행동통일을 기하기 위해 당의 규율도 점차 엄격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종래와 같이 유권자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의 양심과 판단에 기해 자주적으로 행동하는 의원은 없어지고, 의사당은 극언해서 거수기에 불과한 의원들을 조종하는 정당의 투쟁장소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당이 선거에 임해서 내세우는 정책은 될수록 많은 유권자의 지지를 받아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수단이다. 유권자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대자본가, 중소기업자, 농민노동자, 연금생활자, 실업자, 인텔리층 기타 사회적 이해관계에 대해서는 서로 모순되는 듯한 여러 계층의 정치적 요구를 광범하게 당의 강령 속에 반영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당이 표방하는 정책은 내용이 포괄적이고 막연한 것이 되기 쉽고, 특히 중요한 정치문제에 관해서는 명확한 주장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정당은 광범한 사회적 이익을 고려함으로써 많은 사회층으로부터 지지를 받지만 그 정당에게 ‘이끌리는 사회적 이익’과 그 정당이 ‘대표하는 사회적 이익’과는 다르다. 가령 영국의 보수당이 조직이 없는 극빈층의 표를 상당히 획득하고 있다고 해서 보수당이 극빈층의 이해를 대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의원이나 당운영의 중추를 장악하고 있는 간부의 출신계층이나 당자금의 공급원을 살펴보면 보수당이 대표하는 사회적 이익은 영국의 전통적인 지배계급, 즉 재계와 자본가계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당이 현실적으로 ‘수행하는 정책’은 그 정당이 ‘대표하는 사회적 이익’의 정치적 요구를 중심으로 한다는 것은 각국의 정치사가 예증하고 있다. 보통 ‘수행하는 정책’과 ‘표방하는 정책’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사정의 변경 기타의 변명으로 일시적으로 미봉하게 되는 정도에 이르면, 공약 불이행의 비판을 초래할 것이고 유권자의 신뢰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정당의 선거기능.
정당은 사적 성격을 갖고 있지만 그 활동은 의회정치에서 불가결한 공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선거는 의원, 대통령 및 기타 공직자의 지명절차이며, 각 정당은 입후보자를 내세우고 강령을 발표하며 유권자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선거운동을 전개한다. 이러한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그 하나는 정당이 정치지도자 선출의 파이프로서 당에서 양성하고 선정한 자를 국민에게 제공한다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정당이 중요한 정치문제를 쟁점으로서 국민에게 제시하고, 거기에 대한 당의 정책을 밝혀 국민의 선택을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유권자는 본래가 아무런 조직도 없는 개개인의 단순한 집합체에 불과하여, 공통의 이해나 명확한 정치적 의사를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주권자라고는 해도 실은 수동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유권자 자신들이 정치지도자를 내세우거나 정치적 요구의 통일을 기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입후보자와 정당이 선택의 자료를 유권자에게 제공하고 유권자는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지지 정당을 선택한다. 이런 의미에서 유권자는 정당의 활동을 통해서 비로소 효과적으로 그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정당이 유권자의 개별적 의사와 이해를 통합, 집약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 점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유권자는 정당에 의해 비로소 정치적 발언이 유효하게 되었으나, 실제로는 그 발언이 매우 한계가 좁았다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즉 유권자에게 제시된 것은 한정된 정당의 후보자와 정책에 불과하며, 정치참가를 단념하지 않는 한 유권자는 제시된 선택의 자료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유권자 앞에 제시되는 정책이 전부 내용이 막연하여 구별의 기준이 생기지 않을 때는 유권자의 선택이 무의미해져 버린다. 선거란 정당이 유권자를 위로부터 조종하여 민의를 유도하고, 체제를 택하는 소란스러운 형식적 절차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정당이 정치적 쟁점을 명시하여 정치문제에 있어서의 정보를 제공하고, 여론의 형성을 지도함으로써 유권자의 정치의식을 높이는 정치교육을 행하는 것과, 혹은 선거 이외의 기회에 야당이 여론형성을 지도하여 이 여론을 배경으로 해서 정부를 비판하고, 여당이 정부의 정책을 수정시키는 것 등 국정과 여론 사이의 교량역할을 하는 것이 정당의 부차적 기능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정당의 국정기능.
선거 결과 양당제의 국가에서는 의회에서 다수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집권하고, 다수정당제의 경우에는 정당 사이의 절충으로 성립된 연립내각이 정권을 담당한다. 미국에서는 보통 과반수의 선거위원을 차지한 정당의 입후보자가 대통령이 되어 국정을 담당한다. 이렇게 정권을 담당하는 당이 여당이고, 그 밖의 정당이 야당이다. 다수정당제의 국가에는 준여당과 준야당도 있을 수 있으나, 정당은 본래가 투쟁단체인만큼 엄밀한 의미에서의 중립은 있을 수 없고, 각 정당은 정권지지와 반대의 양진영으로 갈라진다. 정당의 국정기능은 주로 정권을 둘러싸고 이 양진영이 하는 역할을 중심으로 한다. 먼저 여당은 당내에서 선정한 정치지도자를 정부에 보낸다. 정부의 수반은 여당 당수인데 그 밑에 여당간부가 각료로 취임한다. 적재적소라는 말은 구호에 그치고 있으며, 당내 분파의 영수들에게 약간의 포스트를 배정하는 일이 많으며 분파의 밸런스를 중요시하고 있으나, 이 관직분배로 오히려 분파의 불만이 생기는 경우가 많아, 내각개편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예가 종종 있다. 다음에 여당은 다수의 유권자의 지지를 얻는 원인이 된 '표방하는 정책'을 의회와 정부를 통해서 실천할 책임이 있다. 다수정당제하의 연립내각은 정권에 참여한 각 정당 사이에서 성립된 정책협정을 기초로 하고 있으므로 선거 때에 각 정당이 내세운 정책이 그대로 실시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양당제의 경우에도 '표방하는 정책'과 '수행하는 정책'이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것은 공약의 '해석'을 대체로 왜곡되게 하고 '정세의 변화'라는 둔사(遁辭)에 의해 사문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정당의 '이끌리는 사회적 이익'과 '대표하는 사회적 이익'이 다르다는 점에 근본적 원인이 있으며, '표방하는 정책'이 득표의 편의라는 견지에서 정해진다는 사실에 근본원인이 있다. 여당은 의회에서는 정부를 지지하는 것이 주된 임무이며, 마치 변호사의 형사재판(刑事裁判)에서의 역할이 피고인의 변호인 것과 동일하다. 의원내각제의 경우에는 정부를 조직하는 정당이 동시에 의회의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정부와 의회는 여당을 통해서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바꾸어 말한다면 정부와 의회의 쌍방을 통제하는 강력한 힘이 여당에 있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미국과 같은 권력분립제의 나라에서는 대통령이 속하는 여당이 반드시 의회의 다수파가 아니므로 정당을 통해서 정부와 의회가 연결되지 않는다면 국정은 마비될지도 모른다. 최후로 정부는 여당을 기초로 하지만 여당 그 자체는 아니며, 정부와 여당 사이에는 그 입장에 따라서 미묘한 차이가 있다. 가령 여당이 그 대표하는 사회적 이익의 여러 가지 정치적 요구를 당의 입장에서 정부에 제시하는 경우에도 정부는 여당에 대해서만 책임지는 꼭두각시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의회 전체에 대해, 그리고 의회를 통해 전 국민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여당이 원하는 방향대로만 움직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야당의 임무는 주로 정부와 여당을 비판·공격하는 데에 있다. 19세기에 있어서는 의회에서의 토론이 다수세력 형성의 원동력의 하나가 될 수 있었으나, 현재는 의사당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정당이며, 웅변에 감동을 받아 개개의 의원이 그 태도를 바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의회에서의 토론은 매스컴을 통해서 유권자에게 호소하여 정부와 여당에게 타격을 입히는 것을 그 주된 목적으로 한다. 야당의 주된 투쟁장소는 의회이지만 유세활동 및 선거구에서의 일상활동을 통해서 직접 유권자와 접촉하여 호소하는 것도 매우 효과적이다. 야당은 이렇게 정부와 여당을 비판 공격하는 한편으로 정권인수 태세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즉 행정책임을 맡을 능력이 있는 인재의 양성과 즉각 실천할 수 있는 현실적 정책의 연구와 준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야당은 공직을 지배할 수 없고 또 운영자금도 부족한 형편이지만 야에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야당으로서는 최대의 이점으로 모든 실정의 책임을 여당에게 물을 수 있는 입장에 있다. 또 일체의 반정부세력이 야당 주변에 집결하게 되면 그만큼 정부타도의 전망은 밝아지는 것이다. 그런데 여당·야당을 통해서 정당은 의회운영에 불가결한 기능을 맡고 있다. 의회의 운영에 관해서는 헌법·의회법·의원 규칙 및 의사선례 등이 있으나, 그 해석이 반드시 획일적으로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므로, 개개의 구체적인 사항은 정당 간의 협의에 의해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 수백 명의 의원을 거느리고, 방대한 업무를 처리해야 할 의회에 만약 정당이 없다면 의회의 질서 있고 효과적인 운영은 도저히 불가능해질 것이다.
정당의 본질.
그 하나는 정당을 다양한 사회적 이익의 정치적 요구를 조직화시켜 이를 정치에 반영시키는 민주정치의 도구로서 보는 설이며, 또 하나는 소수 지배층이 선거를 통해서 유권자를 조종하여 민의를 조작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지배층의 득표조직에 불과하다고 보는 설이다. 전자의 설에 의하면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다양한 사회적 이익이 복잡한 상호관계를 가지면서 잡다한 정치적 요구를 내세우는데, 이러한 요구는 그 자체로서는 사회 전체 중 소수자의 의사를 반영하며, 직접 정치와는 연결되지 않는다. 이러한 잡다한 요구를 집약해서 정치적 표현으로 발전시키는 작용이 정당의 존재로 인해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서 정당은 그 입후보자와 정책을 통해서 사회적 모든 이해의 소리를 정치에 반영시키는 임무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사회를 대표해서 국가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라는 것이 제1의 학설이다. 여기에 대해 제2의 학설에 의하면 다양한 사회적 이해는 저마다의 정치적 요구를 갖고 있으나 입후보자와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적 이해가 아니라 정당이며, 사회적 이해는 정당이 결정한 것을 받아들이는 데 지나지 않는다. 사회적 이익과 정당의 관계를 보더라도 정당의 우위가 확실하다. 물론 정당으로서도 다수의 지지를 얻어서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각종 사회적 이해와 연결을 가지고, 그들의 요구를 입후보자나 정책에 반영시켜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와 반대로 사회적 이해의 측에서도 정치적 발언권을 얻기 위해서는 정당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회적 이해는 무수히 있는 데 반해 정당은 고작 몇몇 개가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으므로 그 관계는 정당을 정치적 지지의 결정적 매수시장으로 했으며 정당의 우위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정당이란 일반 유권자가 자유로이 참가하여 당원대중의 민주적 의사로써 운영하는 조직이 아니라, 소수의 직업정치가의 집단이 당운영의 실권을 장악하고 입후보자와 정책을 결정하는 단체이다. 그러므로 정당을 현실적 입장에서 보는 한 유권자를 위로부터 조종해서 민의의 향방을 결정짓는 득표공작 기구라는 설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은 영국이나 미국 같은 양당제를 전제로 하며, 스칸디나비아 3국과 같은 다수정당제하에서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러한 제도하에서는 각 정당과 사회적 이익이 명확한 형태로 결부되어 있으므로 정당의 사회대표적 성격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위 의의가 성립하려면 각 정당이 어느 사회 분야에 대해 확실한 주관으로 뚜렷한 문제의식과 해결 방향성이 있을 때 의미가 있다. 사회적 요구를 발언하기 위한 조직 보다 정권 쟁취의 목적이 주된 정당 체제는 민주주의를 과두정으로 후퇴시키는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다.
정당에 대한 각종 구분.
명망가 정당·근대적 정당.
막스 베버는 정당조직의 역사적 변화에 주목하여 명망가 정당과 근대적 정당의 두 가지 형으로 정당을 구분했다. 명망가 정당은 근대적 의회정치의 초기단계, 즉 제한선거 시대의 정당형으로 의회내에서의 막연한 인적 결합을 의미했으며, 당규율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고 이합집산이 빈번한 유동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또한 당비 제도나 정기적 집회가 따르는 지속적인 조직으로서의 지방선거구 조직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고, 선거시에만 지방 명망가의 정치집회가 임시적으로 열렸는데, 그 의장도 유력자가 임시로 맡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집회에서 입후보자가 선정되고 정책이 토의되었다. 그러나 정책은 입후보자나 의회의 정당에 일임되는 예도 많았다. 요컨대 지방선거구에서는 명망가가, 중앙에서는 개개의 의원이 정치의 주역이었다.
한편 근대적 정당은
의 결과로 생긴 것이다. 근대적 정당제도하에서 당비납부제와 정기적 집회 및 각 단계 당기관의 상호관계를 수반하는 지방선거구 및 전국의 당조직이 확립되고, 후보자 및 정강의 결정에 병행하여 당조직이 선거비용의 조달과 지출의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개선을 희망하는 의원은 당조직의 지도를 받는 한편 원내의 행동에 관해서는 원내총무의 지시를 받게 되어 의원의 독립성은 점차 상실되어 갔다. 그러나 당운영의 실권을 누가 장악하는가는 나라에 따라 다르며, 미국에서는 원외의 직업적 보스, 독일에서는 원내정당의 간부가 잡고 있다. 이러한 근대적 정당이 성립된 것은 미국에서는 1840년경, 영국에서는 1867년 이후였다.
간부정당·대중정당.
뒤베르제는 정당을 간부정당과 대중정당의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보수정당이나 우익정당을 전자로, 사회주의당이나 노동당을 후자로 생각하고 있다. 간부정당은 선거를 그 목표의 중심에 두고 다수의 의원을 당선시키는 일에 집중적으로 노력을 기울인다. 따라서 이러한 정당에서는 선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수의 명사(名士)가 중심적인 존재가 된다. 명망이나 권세가 있어 표를 모으는 데 유리한 영향력이 있는 명사라든가, 유권자의 취급과 선거운동에 유능한 전문가나, 선거비용을 댈 수 있는 재계의 유력자 등이 그러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같이 간부정당에 있어 중요한 것은 당소속의 인원수보다 당소속 인원이 선거전에서 얼마만큼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일반유권자를 권유해서 당원으로 만들 필요는 그리 없다. 또 조직면에서 볼 때 간부정당은 각 선거구의 당조직에 대해 상당한 자율성을 인정하는데, 전국조직은 이러한 지방조직의 이완된 연합체로, 말하자면 지방분권적인 구조이며 중앙집권적이며 긴밀한 결속을 특색으로 하는 지부조직의 정당과는 다르다. 대중정당은 본질적으로는 선거를 위한 조직이 아니고 특정의 사회적 이익을 위한 정치운동이므로, 이 운동에 참가하는 당원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조직은 강대해진다. 그 위에 당은 당원에 대해서 정치교육을 실시하며 정치지도자를 양성하지 않으면 안 되며, 또 당의 활동자금을 소수의 자본가의 기부에 의하지 않고 당비로 충당하므로 이 모든 의미에서 당원수가 많을 필요가 있다. 조직면에서는 대중정당은 긴밀하게 결속된 지부조직의 정당이며 중앙집권적인 전국조직이 그 구조적 특색이다. 간부정당과 대중정당의 구별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일반대중에게 선거권이 없고 따라서 정치적 영향력이 전혀 없던 시대에는 대중을 당원으로 조직한다는 것은 전혀 무의미한 일이었다. 우선 당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제한선거가 보통선거로 발전함으로써 생긴 개념이었다. 그러나 보통선거가 실현되면서 곧 대중정당이 출현한 것은 아니었다. 간부정당은 새로 선거권을 획득한 대중을 득표조직 속에 끌어들이기 위해 당을 대중에게 개방하는 자세를 취하기는 했으나 대중의 정치참여는 한정된 범위내에서 인정한 데 불과했고, 당운영의 실권은 여전히 소수간부의 손에 머물러 있다. 대중정당의 출현은 사회당이나 노동당의 등장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국민정당·계급정당.
국민정당과 계급정당의 구분기준은 주로 정치투쟁의 무기로서 이용되는 이데올로기의 성격이며 학술적인 것은 아니다. 즉 보수정당의 입장에서는 이런 주장이 성립된다. 정당은 공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전 국민적·전 국가적인 이익의 추진을 목적으로 광범한 일반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국민정당의 본분이며, 특정의 계급적 입장에서 계급적 이익의 증진을 도모하고, 주로 노동자계급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정당, 즉 계급적 정당은 특정계급의 이익을 국가의 이익에 우선시키므로 의회민주주의 이념에 배치된다. 한편 노동당이나 사회주의 정당의 주장은 이러하다. "사회에는 현실에 있어 서로 대립하는 계급이 존재하는데, 특히 오늘날과 같이 국가의 사회적·경제적 간섭이 적극화된 시대에는 계급적 이익을 초월한 전 국민적 내지는 전 국가적인 이익이란 것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국민정당을 주장하는 보수정당의 논리가 이해관계의 계급적 대립을 부정하는 것 그 자체가 지배계급의 이익과 일치되는 것이다. 그런데 보수정당이 현실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결코 그들의 말하는 바와 같이 계급적인 것이 아니고, 그들은 지배계급의 정치적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의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배경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배계급에 속하는 유권자는 극히 소수이지만 피지배계급의 유권자는 압도적 다수를 이룬다. 따라서 전자의 이익을 대표하는 정당은 전자의 계급적 이익을 강조하고, 전자의 지지만으로는 정권의 장악이 불가능해지므로 공익관념이나 세계관이나 종교 등 초(超)계급적인 호소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이와는 달리 후자의 이익을 대표하는 정당은 후자의 계급적 자각을 높여, 그 정치적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계급적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오히려 유리하다고 생각되고 있다.
보수정당·진보정당.
보수정당은 보수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정당이며 진보정당은 진보주의에 입각한 정당이다. 문제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를 어떤 의미로 해석하는가에 있다. 이 구별을 매콜리(1800년-1859년)는 인간의 기질의 차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보수와 진보를 초역사적인 인간본래의 기질에 둔다는 것은 타당치 않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존의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질서에 대한 어떤 기본자세의 문제로서 포착되어야 할 것이다. 즉 현존의 질서를 방위 내지 옹호하려는 입장이 보수주의이며, 혁신의 관념에 입각해서 현존질서에 비판적 내지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진보주의이다. 그러므로 현존 질서하에서 지배적 계층에 있는 사람은 보수주의를 지지하고, 피지배계층의 사람들은 진보주의를 지지하기 쉬운 것이다. 보수와 진보의 의미를 현존질서를 기준으로 해서 생각할 때는 그 중간적 입장은 이론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소위 중도정당은 실은 보수정당의 온건파와 진보정당의 온건파의 집합체에 불과하다. 현존 질서의 기초에 중대한 위협이 가해질 때 중도정당이 항상 분열할 운명을 지니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원내정당·원외정당.
원내정당.
원내정당(院內政黨)은 국회에 소속 국회의원을 보유한 정당이다.
정치력이 막강한 정당들이며 국회의원의 수가 많을수록 정치력이 강하다.
따라서 원내정당이 국회의원을 보유한 상태에서 차기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면 또 다시 원내정당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원내정당은 국회의원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반드시 여당이 있어서 정권을 잡고 있는 정당이 있다.
원외정당.
원외정당(院外政黨)은 국회에 소속된 국회의원을 보유하지 못한 정당이다. 정치력이 미약한 정당들이며, 국회의원을 보유하지 못하여 원내에서의 발언권이 없어서 정당보다 시민단체의 성격을 띠고 있다.
원외정당들은 원내진출을 하기 위해 국회의원 총선거에 주로 비례대표로 출마하는 일이 많으나, 정치력이 미약하고, 출마하는 후보 및 선거구의 수가 적어 원내진출하는 일이 흔치 않다.
정당의 조직.
정당이 활발하게 정치활동을 전개하고, 대립정당과의 효과적인 투쟁을 통해서 정권을 장악한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영속적인 결사(結社)로서 그 조직을 확립하고, 그것에 의해서 움직이는 기구를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명망가 정당의 단계에서는 거의 조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 지도적 정치가 개개인의 주변에 막연하고 유동적인 집단이 형성되어 있을 뿐이다. 오늘날과 같이 치밀하고도 방대한 정당조직이 출현한 것은 19세기 후반에 보통선거제가 실현되어 많은 새로운 유권자가 등장하고 사회주의정당 기타의 대중정당이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당원.
뒤베르제는 유권자를 정당과의 관계에서 투표자·지지자·당원·활동가의 4종류로 구분하여 각각의 성격과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투표자는 선거에 있어서 지지하는 정당에 투표하는 자를 말하나, 반드시 그 정당의 당원은 아니다. 지지자·당원·활동가는 반드시 안정된 투표자이며, 유권자의 당에의 관계의 강도는 투표자에서 활동가의 순서로 강하다. 투표자수에 대한 당원수의 비율을 당원율이라고 말하는데, 간부정당은 당원율이 대중정당에 비해 훨씬 낮다. 그리고 투표자와 당원 사이에는 당내의 위기나 사회적·경제적·정치적 변화에 대한 반응이나 그 수의 증감의 속도 등에 있어 뚜렷한 차이가 있다. 이것은 양자가 상대적으로 독립한 두 개의 요소임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당원이 투표자 중의 자각분자라 해서 당원을 투표자를 대표하는 존재라고 볼 수도 있다"라고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의원과 기타 선거에 의한 공직은 투표자의 투표에 의해 선출되지만, 당원으로서 당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즉 극단적으로 말해서 의원은 투표자의 의사를 따를 것인가, 당의 명령에 따를 것인가 결정해야 할 입장에 놓일 수도 있다. 투표자와 당원의 정치의식 사이에 거리가 있을 때 어떤 의미에서는 민주주의에 차질이 생기게 되므로, 정당은 그 일상적 활동 기타를 통해서 유권자나 투표자에 대한 교육 선전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다음에 지지자라는 것은 선거시에 당의 입후보자에게 투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의 기관지를 구독하고 당이 주최하는 집회에 출석하고, 혹은 당의 기금을 기부하는 등 당에의 관여도가 투표자보다 높은 자를 말한다. 지지자가 선거에서 당의 후보자에 대한 안정된 투표자인 것은 물론이다. 간부 정당에는 진정한 의미의 당원은 처음부터 존재치 않으며, 일반적으로 간부정당의 '당원'이라 함은 실은 이 지지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에 반해서 대중정당의 경우는 지지자와 당원이 명확히 구별된다. 즉 당원은 당의 정규구성원으로 그 신분이 당원명부에 등록되어 당조직의 일원으로서의 의무(당비납부·집회출석·선거운동·일상활동 등)를 가지나, 지지자에게는 이러한 요건이 없다.
활동가.
활동가는 당원 중의 적극분자로 모든 단계의 당조직에서 활동의 중심이 되는 소수자이다. 따라서 일반당원보다 당과의 유대가 훨씬 긴밀하다. 당비를 규칙적으로 납부함은 물론 당집회에 규칙적으로 출석하여 적극 발언하고, 선거에서는 무보수로 선거운동의 선두에 나서는 등 실제 당활동의 기획과 수행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들은 당의 의사결정을 지도하는 자라기보다는 당무의 충실한 집행자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간부정당에는 원래 당원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당조직 내부에서 일하는 자는 모두 여기에서 말하는 소수의 활동가이다. 대중정당에 있어서 비로소 당원의 일부로서의 활동가의 관념이 성립되는 것이지만, 당원 중에서 활동가가 차지하는 비율은 보통 20% 이하이며, 만약 이것이 30%를 넘는 정당이 있다면 그 정당은 특히 활기에 넘치는 정당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활동가의 존재는 당의 운영에 있어 빠질 수 없으며, 그들 없이는 당은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활동가라는 핵심집단이 형성되면 일반당원이 모든 적극적인 당활동을 일체 활동가의 수중에 일임해 버리려는 경향이 생기게 되므로, 일반당원이 점점 더 수동적이 되어 당활동에서 멀어질 위험이 생길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민주주의적이어야 할 당운영이 소수의 활동가에 의해 지배되는 과두체제로 전환되게 된다.
정당의 조직원리.
그 하나는 당원조직에 대해서 중앙집권과 지방분권, 둘째로 원내정당과 당원조직의 관계, 셋째로 당내 민주주의와 과두 지배체제의 문제가 있다.
당원조직의 중앙집권과 지방분권.
모든 조직은 각기 권한과 책임을 달리하는 여러 기관이 상하의 계층질서를 형성하고 횡적으로 상호연결된 기구인데, 그 구성기관 중에는 하부의 의사를 집약하고 상부의 명령을 자체의 책임으로 이행하는 중추적 존재가 있다. 이것이 당원조직에 있어서는 이러한 지위를 가진 것이 선거구의 당조직인데, 그 하부의 조직은 선거구조직에 의해 통괄되며, 전국조직과의 관계로는 의원 후보자의 선정과 같은 업무처리에 있어서 어떤 범위까지의 자율권이 선거구조직에 인정된다. 이렇게 선거구조직이 정당의 기본적 단위로서 그 중추적 역할을 인정받는 것은 정당이 선거활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는 사실로써 설명된다. 따라서 전국조직에 권한을 집중시키는가(중앙집권), 혹은 선거구조직에 상당한 범위의 자율권을 인정하는가(지방분권) 하는 문제는 그 정당이 선거에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부과하는가에 따라 좌우된다. 별개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이 문제는 정당성립의 역사적 배경에 의해 좌우된다고도 할 수 있다. 즉 간부정당은 원래 독립된 각 지방의 선거위원회의 이완된 연락조직으로서 성립된 것이어서, 말하자면 지방분권적 성격을 체질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대중정당은 중앙에서의 정치운동으로 출발해서, 의회에 그 대표를 파견할 필요 때문에 지방조직을 정비하기 시작하는 것이므로, 처음부터 중앙집권적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원내정당과 당원조직.
전국 조직이건 선거구 조직이건 요컨대 당원의 당조직인데, 당이 선출하는 의원들은 의회 안에서 협동하여 행동할 필요가 있으므로 특별한 원내조직, 즉 원내정당을 만들게 된다. 즉 의원은 당원조직의 일원인 동시에 원내정당의 일원이기도 하므로 이 양자의 관계, 특히 후자의 당원조직으로부터의 독립성이 문제가 된다. 당 성립의 역사적 배경으로 볼 것 같으면 간부정당의 경우에는 먼저 형성된 것이 원내정당으로, 그 구성원의 재선을 확보하고, 다시 새로운 다수의 의원들을 선출하여 원내정당의 세력을 확대시킬 목적으로 당원조직이 만들어졌으므로 당원조직은 원래 원내정당 때문에 있으며, 봉사하는 수단이며, 당원조직이 원내정당을 구속한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일이라는 견해가 나오게 된다. 영국의 자유당을 예로 든다면 1876년에 전국자유당연합이 조직되어, 한편으로 선거구조직을 민주적인 것으로 재편성하는 동시에, 또 한편 이와 같은 선거구조직으로 형성된 전국연합에 의하여 당출신 의원의 원내행동을 지시하려고 시도했으나, 이 기도는 실패로 끝나고 원내정당의 주도권이 확립되었다. 그러나 대중정당의 경우에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노동당이나 사회주의정당의 경우 먼저 형성된 것은 노동조합이나 사회주의운동과 같은 원외의 대중조직·대중운동이며, 당원조직은 원내활동의 필요 때문에 그 후에 형성되어 선거운동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의원들이 원내에서 조직한 원내정당은 당원조직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기네의 정치적 요구나 정책을 의회를 통해서 실현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당원조직이 원내정당에 요구와 지시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이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대중정당이 원내정당의 당원조직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나, 그것이 근대적 의회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하는 존재로서 정권교체 체제 안에 묶여 버렸을 때에는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 원내정당의 독립성을 인정치 않을 수 없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당내민주주의와 과두지배.
당내민주주의는 당원이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당의 운영에 참여하여 그 의사에 따라 정당이 활동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즉 당의 의사결정의 최고기관인 당대회에 일반당원이 대의원을 통해서 참가하며, 당대회의 결정사항을 집행하는 당의 임원은 일정한 임기 중 그 직무를 수행하고, 당대회에 정기적으로 보고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조직형태이다. 그러나 문제는 형식적인 조직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당원의 의사로 당운영의 내용이 좌우될 수 있는가의 여부에 있다. 간부정당은 권위주의적·전통적 성격이 농후하여 당수를 중심으로 하는 소수 당간부의 독재적 지배가 일반적인 사실이 되고 있다. 당수·당간부·원내정당·당원조직의 순서로 일관된 권위주의적 지도체제가 확립되어 있어 일반당원으로부터 상향하는 통제기능의 선은 매우 약하다. 이에 반해 대중정당은 당내민주주의의 원리를 당체제로서 내세우고 있으므로, 당원대중의 의사가 당지도부에 미치는 영향은 조직면에서 상당히 강하다. 즉 원리적으로는 당대회·집행부·원내정당·당수의 순서로 당원대중의 상향적 의사에 의해 민주적인 당운영이 보장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 당내민주주의는 두 가지 사실 때문에 붕괴될 수밖에 없다. 이 두 가지 사실이란 정당이 투쟁단체적 성격 때문에 신속한 의사결정의 능력과 군대적 규율을 가진 계층적·통일적 조직이 필요하게 된다는 사실과 방대한 수의 당원과 막대한 당재정과 정치의 복잡화 및 전문화에 따라 필연적으로 당사무국 관료의 발언권이 증대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는 당관료를 구사하는 실력을 가진 소수 간부의 수중에 당의 실권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일반당원은 무력함과 무관심 속에 빠지는데, 이것이 또 소수자의 독재를 필요하게 만드는 작용을 한다. 이 악순환이 로베르트 미헬스(1876년-1936년)가 '과두지배의 철칙'이라고 부른 병리현상이다.
정당의 법적 규제.
정당은 본래 근대적 의회정치하에서 등장하고 발전한 것이지만, 의회정치의 원리와 정당제도간에는 조화되지 않는 점도 있다. 예를 들어 의회정치의 입각점이 되는 국민대표권의 개념은 의원의 독립성을 요구하지만, 정당조직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의원을 당 의사의 구속하에 둔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국가가 정당을 오히려 적대시했다. 그러나 정당이 의회정치의 현실의 운영에 불가결한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선거법이나 의회법으로 이를 공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또 나아가서는 국민의 정치적 통합이라는 정당의 중요 기능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동시에 정당운영에 따르는 각종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정당관계의 입법 노력도 추진되고 있다.
정당을 대상으로 하는 입법은 예전에는 원내위원회의 구성, 선거운동,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확보, 정치자금의 공개 등 개개의 사항에 관해 필요한 범위내에서 규제하는 내용에 그쳤으나, 근래에는 서독·이탈리아 및 한국처럼 헌법 중 정당에 관한 원칙규정을 두고, 또 정당에 관한 독립입법을 하는 경우(아르헨티나·서독·한국 등)도 생기게 되었다.
독립적인 정당입법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반체제 정당의 목적은 파시즘 정당이 헌법상의 자유를 십분 이용하여 헌법체제 자체를 파괴하는 데 성공한 독일과 이탈리아의 쓰라린 경험에서 온 것이나, 서독에서는 1956년에 공산당이 반체제정당의 낙인을 찍혀 해산되었다. 정당을 대상으로 하는 독일의 법적 규제를 예로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독일의 법적 규제.
독일연방공화국헌법 21조는
이러한 위임법률의 하나로서 1967년에 정당법이 제정·시행되었다.
정당의 해산.
정당의 목적·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 경우에 정부는 헌법재판소에 그 해산을 제소할 수 있고, 헌법재판소의 심판에 의하여 정당은 해산된다(헌법 제8조). 해산의 대상이 되는 정당은 원칙적으로 정당으로서 등록을 마친 정당에 한하며, 헌법재판소가 정당해산의 결정을 할 때에는 9인의 재판관 중 6인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헌법 제113조 제1항). 헌법재판소가 정당해산의 결정을 하면 그때부터 당해 정당은 모든 정당특권을 상실한다. 헌법재판소의 정당해산결정은 확인적 효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결정에 의하여 비로소 정당해산의 효과가 발생하는 창설적 효력을 가진다. |
3403 | 75312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03 | 민주노동당 (대한민국) | 민주노동당(民主勞動黨)은 대한민국의 진보정당이다. 2000년 1월 30일 창당하여 2011년 통합진보당으로 통합되었다.
2004년 17대 총선거에서 지역구 2석, 비례대표 8석(정당 득표율 13.1%)을 획득하여 대한민국 의회 진출에 성공하였고,
대한민국 내에서 좌파 이념정당의 강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정당이었다.
이후 2011년 국민참여당, 새진보통합연대(진보신당 탈당파)과 합당을 선언하여 통합진보당이 출범되면서 소멸되었다.
역사.
창당에서 2002년 대선까지.
민주노동당의 전신은 1997년 10월에 결성한 국민승리21이다. 국민승리21의 주요 세력은 진보정당 추진을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민중정치연합'(대표:노회찬)과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준비, 추진하던 민주노총, 민족 민주운동을 대표하는 전국연합이었는데, 1997년 대선을 거치면서 전국연합은 이탈하고, 남은 두 세력을 중심으로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을 창당한다. (대표:권영길, 부대표:노회찬)
2004년 총선거 이후.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면서 제도권 정당으로 진입하였다. 지역구 당선자(2명)는 권영길(경남 창원을) 의원과 조승수(울산 북구) 의원이었고, 특히 정당 투표에서 13.03% 득표하여 8명의 비례대표를 당선시켜 '44년 만의 진보 정당 원내 진출'이라고 묘사되는 큰 성과를 얻었다. 국회의원 총선거 직후에 시행된 제2기 지도부 선거에서 김혜경 후보가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7대 총선거 당시 울산 북구의 음식물 자원화 시설 관련 간담회에서 있었던 조승수 의원(당시 국회의원 후보)의 발언이 빌미가 되어 2005년 9월에 조승수 의원이 의원직 상실에 해당하는 대법원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곧바로 10월 26일에 시행된 재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의 정갑득 후보가 한나라당 윤두환 후보에게 패함에 따라 민주노동당의 전체 의석 수는 총 9석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민주노동당 측은 조승수 의원이 뇌물수수 등의 범죄사실이 없으며, 조승수 의원의 의원직 박탈은 정부의 민주노동당 탄압의 일환이라고 비판하였다.
2007년 대통령 선거.
2007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자주파의 지지를 받은 권영길 의원이 평등파의 지지를 받은 심상정, 노회찬 두 후보를 누르고,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17대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는 3.0%의 득표율(712,121 표)을 기록했는데, 이는 2004년 제17대 총선의 13.03%의 득표율은 물론, 2002년 대통령 선거의 3.9%보다 낮아진 수치였다. 각 시도 지자체 중 가장 높은 지지율을 얻은 곳은 울산광역시(8.4%)이다.
민주노동당의 분당.
민주노동당은 여러 가지 문제로 진보신당과 분당하게 된다.
첫 번째 문제는 2007년 대선의 저조한 득표결과로 인한 지도부 책임론이다. 대선 이후 자주파의 지지를 받던 문성현 대표가 퇴진하고, 평등파에 속하는 심상정 의원이 비상대책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심상정 위원장은 혁신안을 통해 당내 다수파인 자주파의 대북정책을 비판하고 진보정당으로서의 혁신을 위하여 노력했는데, 이것은 여러 가지 당내 논쟁을 촉발시켰다. 혁신안의 핵심 내용은 당시 일심회 사건에 연루되어 당내 정보를 북한에 넘겨왔던 두 명의 당원을 제명하고 자주파 간부들을 당내 2선으로 물러나게 하며, 제3세력 중 일부에서 주장하였던 정파등록제를 도입하여 당내 여러 계파들을 공식적으로 등록하는 것 등이었다.
두 번째 문제는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어왔던 당직선거에 대한 문제였다. 그동안 당직선거는 인터넷 투표를 악용한 대리투표(예를 들어 당직자가 노트북을 들고 다니면서 당원들에게 자신의 정파 후보를 투표하게 하는 방식)와 오프라인 투표에서의 "몰표" 현상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는데 대선 이후 부산의 한 지역위원회 위원장 투표에서 평등파 후보가 단일 후보로 나오자 다수파인 자주파에서 일부러 낙선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에 부산에서 상당한 탈당이 이어지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세 번째 문제는 북핵 사건으로 인한 친북 종북주의 문제다. 2005년 북한의 핵보유 선언에 이은 2006년 북한 핵실험에 대한 입장 차이(평등파는 북한 핵실험을 규탄할 것을 주장했고, 자주파는 북핵은 미국에 맞서기 위한 자위적인 측면이 있으므로 일방적으로 규탄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었다.)로 자주파와 평등파 사이에서 상당한 감정싸움이 진행되었고 심지어는 조승수 전 의원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하여 신당 창당의 목적을 자주파의 친북 종북주의 문제로 규정할 정도로 상당한 논란이 지속되었다.
결국 이러한 파행들로 인하여 당내 혁신에 한계를 절감한 당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진보정당의 모색이 본격화되었고, 2008년 1월 11일 부산 해운대 평당원 52명의 탈당을 시작으로 분당과정을 겪게 된다. 탈당을 선언한 당원들과 평등파 일부가 새로운 진보정당 운동을 선언하며'새로운 진보정당 운동'을 발족했고 이들은 2월 3일에 있었던 민주노동당 임시당대회(일명 분당대회) 이후에 진보신당을 창당하는데 주력하였다. 당시 심상정 위원장은 혁신안이 부결될 경우 탈당도 불사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천명하였다. 반면 자주파 대의원들은 민주노동당이 국가보안법 피의자들을 이중처벌 한다는 점 등을 들어 혁신안을 반대하였다. 그리고 자주파와 평등파에 속하지 않는 제3세력들 중에는 자주파의 패권주의적 당 운영을 비판하는 동시에 평등파가 사실상 자주파를 대체하여 당내 권력을 쥐려 한다는 점과 함께 정파등록제를 통해 자신과 노선이 다른 계파들을 통제하려고 한다는 점을 비판하는 정파도 있었다.
결국 2008년 2월 8일, 센트럴시티 9층 대회의실에서 진행된 민주노동당 임시당대회에서 자주파 성향 대의원들의 반대로 혁신안의 핵심 내용은 부결되었으며 자주파의 수정안대로 통과되었다. 혁신안이 부결되자 심상정 위원장을 비롯한 비대위원 전원이 사퇴하였고, 민주노동당 제1기와 제2기 지도부를 구성하였던 인물들 가운데 김혜경, 주대환, 김종철, 심재옥, 홍승하, 김기수 등이 탈당하였으며, 민주노동당 소속 국회의원 심상정, 노회찬, 조승수, 단병호도 탈당하였다. 임시당대회 이후 2008년 4월까지 민주노동당을 탈당한 당원우 16,904명에 이르렀고, 2008년 1월 당시 11만여 명에 이르던 민주노동당의 당원 수는 9만 4천여 명으로 줄었다. 민주노동당을 탈당한 사람들 중 일부는 2008년 2월 21일 '진보신당연대회의'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으며, 2008년 3월 진보신당 창당이 공식 선언되었고, 민주노동당은 분당되었다.
분당 이후.
2008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창원시 을 선거구에서 권영길 후보, 사천시 선거구에서 강기갑 후보가 각각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비례대표는 곽정숙, 홍희덕, 이정희 세 명의 후보가 당선되어 지난 2004년보다 5석 줄어든 5명의 국회의원이 당선되었다. 권영길 의원은 진보정당 국회의원으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지역구에서 재선에 성공하였고, 강기갑 의원은 여론 조사 결과를 뒤엎고 한나라당의 사무총장이자 이명박 대통령의 대표적인 측근인 이방호보다 182표를 더 득표하여 당선되었다. 민주노동당의 정당 지지율은 2004년 총선의 13.1%에 못미치는 5.7%를 기록했으며, 진보신당의 2.9%를 합쳐도 9%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2007년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가 얻은 3.0%의 득표율보다는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였다.
총선이 끝난 5월 초부터 한미 쇠고기 협상 논란이 불거져 나오자, 민주노동당은 강기갑 의원을 중심으로 졸속협상 비판, 이명박 정부를 상대로한 투쟁에 돌입했다. 당 지도부가 일주일 동안 단식농성을 치렀으며, 이후에는 협상 내용을 비판하는 촛불 집회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5월 말에는 정당 지지율이 10.3%에 이르기도 했다.
이후에는 강기갑이 당 대표에 선출되고, 이정희의원이 정책위의장이 되는 등, 국회의원단과 긴밀한 연관성이 있는 구조로 체제를 개편하였다.
2009년 들어 벌어진 재보궐선거에서는 민주당의 텃밭으로 알려진 호남 지역에서 1명의 광역의원, 1명의 기초의원을 당선시켰다. 한편, 울산 북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는 김창현 후보가 출마하였다가 진보신당의 조승수와의 여론조사 단일화를 이루며 사퇴하였고, 조승수가 울산 북구에 당선되었다. 이에 대해 민주노동당에서는 "진보진영 단일후보 조승수 후보의 승리에 박수를 보낸다."는 논평을 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당, 국민참여당, 창조한국당과 함께 야권 후보 단일화에 합의해 인천광역시에서 기초단체장 2명을 배출했고, 36명의 광역의원을 당선시켰다. 그리고 2011년 재보궐선거에서는 역시 야권 후보 단일화로 전남 순천에서 최초로 호남 출신 국회의원인 김선동 후보를 당선시켰다.
2010년에는 경향신문과 민주노동당 간의 마찰이 있었는데 경향신문은 '삼대세습을 비판 하는 것이 진보정당이 할 일'이라며 민주노동당을 비판했고, 이에 대해 민주노동당은 이것은 색깔론과 같은 것이라며, 경향신문을 비판하며 일부에서는 절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11월 23일 연평도 포격에 대해서 민주노동당이 왜 비판하지 않느냐는 여론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 민주노동당은 6.15남북 공동선언을 기초하여 이들 여론에 대해서 입장을 밝혔다.
정책과 성과.
다음은 민주노동당의 강령의 일부이다.
그 외에도 민주노동당은 부유세의 신설을 통한 빈부의 격차 해소와 국가보안법의 폐지 등을 주장하였다. 2002년 대선과 2007년 대선에서는 무상의료, 무상교육 정책이 큰 관심을 모았으며 이중 무상 급식은 민주노동당이 가장 먼저 내놓은 정책으로 2010년 ~ 2011년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며 정국의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 외에도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 이자제한법,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같은 서민 정책도 민주노동당이 처음으로 내놓은 정책들이었다. 처음 민주노동당이 주장한 부유세도 참여정부에서 종합부동산세로 빛을 봤다.
일반적으로 다른 정당이나 언론에서는 민주노동당이 남북통일 문제에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북한과 관련된 정책만을 주되게 추진한다고 주장하나, 실제로 민주노동당이 대한민국 제17대 국회 기간 동안 추진한 대표적인 정책들은 다음과 같다.
역대 당 대회.
민주노동당 창당대회.
2000년 1월 30일, 민노당 창당대회는 강령과 정강정책을 채택한 뒤, 권영길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초대 위원장을 당 대표로 선출했다.
2000년 민주노동당 임시 당 대회.
2000년 4월 14일, 대한민국 제16대 총선 득표수 미달로 해산된 민노당은 5월 24일 재등록한 뒤 6월 11일 당 대회에서 16대 총선 공식 평가안을 의결하고 김혜경 전 서울 관악구 의원과 최순영 전 경기 부천시 의원을 여성 부대표로 선출했다.
2001년 민주노동당 정기 당 대회.
2001년 2월 24일, 민노당 대회는 2001년 사업계획과 진보세력 연대를 통한 재창당 방안, 2002년 양대선거 기본 방침등을 논의했다.
2002년 민주노동당 정기 당 대회.
2002년 3월 16일, 민노당 당 대회는 경선을 통해 권영길 대표를 대표로 재선출했다.
2003년 민주노동당 정기 당 대회.
2003년 3월 1일, 민노당대회는 비례대표 공천과 당원소환권을 골자로 당헌을 개정하고, 부대표 보궐선거를 치러 김형탁 전 민주노총 부위원장을 부대표로 선출했다.
2003년 민주노동당 임시 당 대회.
2003년 11월 1일, 민노당 대회는 농민위원회 신설과 농민에 대한 부문할당 등 전국농민회총연맹과의 합의를 인준했다.
2004년 민주노동당 정기 당 대회.
2004년 6월 6일, 민노당 당 대회는 전자투표를 도입한 진성당원 총투표를 통해 당직자 선거를 치른 결과, 대한민국 제17대 총선 원내진입 이후 대거 유입된 자주파의 지원을 받은 김혜경 부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였다.
2005년 민주노동당 정기 당 대회.
2005년 2월 27일, 민노당 대회는 혼재된 지역조직을 시군구 단위 지역위원회로 편제하는 것을 골자로 당헌을 개정하고, '주한미군을 감군 및 후방배치'한다는 강령을 '철수'로 개정하였다.
2005년 12월 민주노동당 중앙집행위원회.
2005년 10월 31일, 김혜경 최고위가 10.26 재보선 패배에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자 12월 5일, 민노당 중앙집행위는 당 국회의원-시도당위원장 연석회의가 추천한 권영길 전 대표를 중심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를 인준했다.
2006년 민주노동당 정기 당 대회.
결선투표
2006년 2월 26일, 민노당 대회는 진성당원 총투표를 통해 문성현 경남도당 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한 뒤, 중앙위 명의로 발의된 결선투표 부정선거 의혹 진상조사단을 구성하고 최고위와 예비당원제 관련 당헌을 개정했다.
2006년 민주노동당 임시 당 대회.
2006년 7월 24일, 민노당 대회는 국회의원 비례대표의 10%, 모든 선출직, 임명직 5%를 장애인에 할당하는 장애인할당제를 의결하고, 최고위원이 기타 당직을 의무로 맡게 하고 확대간부회의를 월 1회로 정례화, 시도당위원장에게 소집권을 부여하도록 당헌을 개정하였다.
2007년 민주노동당 정기 당 대회.
2007년 3월 11일, 민노당 대회는 대의원 정족수 미달(2/3에 38표 부족)로 국민참여경선을 도입하는 당헌개정안을 부결시키고, 예결산 심의,의결권을 중앙위로 이관하는 안과 최고위원 숫자를 줄이고 정책위 의장과 사무총장을 대표최고위원이 임면하는 안 역시 부결시켰으나, 정기 당 대회 간격을 2년으로 연장하는 안은 통과시켰다.
2008년 1월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보다 득표가 감소하면서 일심회 사건을 비롯한 자주파의 종북 문제와 당직선거 부정 문제 등이 붉어지자 2007년 12월 29일, 문성현 최고위는 심상정 전 원내수석부대표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천한 뒤 총사퇴했다.
이후 2008년 1월 12일, 중앙위원회는 심상정 의원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인준했다.
2008년 민주노동당 임시 당 대회.
2008년 2월 3일, 민노당 대회는 '민주노총에 의존'하고 '친북 논란에 적극적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대선패배평가와 종북논란을 일으킨 일심회 사건 관련 당원들을 제명안 등 비대위가 제안한 혁신안을 모두 부결시켰다. 이에 따라 심상정 비상대책위원장을 포함한 비대위원들과 평등파 당원들이 탈당해 진보신당을 창당한다.
2008년 2월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
2008년 2월 19일, 민노당 중앙위는 총사퇴 후 탈당해 진보신당을 창당한 혁신위를 대신해 천영세 대표대행을 위원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를 인준했다.
2008년 민주노동당 대표 선출대회.
2008년 7월 17일, 민노당 대회는 최고위원 경선을 통해 강기갑 전농 전 부의장,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 오병윤 전 광주시당 위원장, 박승흡 대변인, 최순영 전 부대표, 이영순 전 의원, 우위영 전 문예위원장과 민주노총 몫의 이영희 민주노총 정치위원장과 전농 몫의 최형권 전농 정치위원장을 각각 최고위원으로 선출했으나, 과반 득표자가 없어 대표최고위원 선출을 위한 1,2위간 결선투표에 들어갔다.
7월 23일부터 7월 24일까지 진행된 온오프라인 결선투표 결과, 강기갑 전 부의장이 이수호 전 위원장을 꺾고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009년 민주노동당 정책 당 대회.
2009년 6월 21일, 민노당 대회는 이명박 정부를 독재정권으로 규정하고 이에 맞서기 위해 민주당, 국민참여당 들과 연대할 것을 결의하였다.
2010년 민주노동당 임시 당 대회.
2010년 3월 1일, 민노당 대회는 불법후원 논란으로 당원 전자투표가 불가능하게 되자, 대한민국 제5회 지방 선거에 한해 후보를 지역위 운영위, 당 대회에서 추천해 중앙위에서 인준하기로 결정했다.
2010년 민주노동당 대표 선출 대회.
2010년 민노당은 7월 3일부터 7월 7일까지 진성당원 총투표로 치러진 당직자선거를 통해 이정희 의원, 장원섭 전 광주시당 위원장, 김성진 전 최고위원, 정성희 전 사무부총장을 일반명부 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대표최고위원은 최고위원 선거 1,2위를 차지한 이정희 최고위원과 장원섭 최고위원 간의 결선투표를 통해 선출될 예정이었으나, 장원섭 후보의 사퇴로 이정희 후보가 찬반투표를 통해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011년 민주노동당 정책 당 대회.
2011년 6월 19일, 민노당 대회는 진보신당과의 합당을 통한 통합진보정당 건설과 당 강령에서의 '민주적 사회주의' 문구 삭제를 의결했다.
2011년 8월 민주노동당 임시 당 대회.
2011년 8월 28일, 민노당 대회는 진보신당과의 통합 합의문을 통과시키고, 국민참여당과의 합당 안을 부결시켰다.
2011년 9월 민주노동당 임시 당 대회.
2011년 9월 25일, 민노당 대회는 참여당과의 통합 안을 상정, 64.6%의 찬성을 받아 합당에 필요한 의결 정족수 66.7%를 채우지 못해 부결되었다.
2011년 11월 민주노동당 임시 당 대회.
2011년 11월 27일, 민주노동당 대회는 당권파 지도부의 의견에 따라 국민참여당과의 합당을 의결함으로써,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새진보통합연대는 통합진보당으로 출범하였다.
사건과 비판.
전공노, 전교조의 정치활동 수사 관련 논란.
2010년 2월 6일, 경찰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의 정치활동 혐의 규명을 위해 영장을 발부 받아 확보하려던 민주노동당 홈페이지 서버 하드디스크를 민주노동당 관계자들이 빼내고 제출하지 않았다.
전교조와 전공노의 불법 정치 행위를 수사하던 경찰은 이들의 당원 가입, 당비 납부, 투표 기록 등을 확인하기 위해 수색 영장을 발부 받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KT 인터넷데이터센터(IDC) 서버관리실에 있는 민주노동당 홈페이지 및 투표사이트 서버를 압수수색하였지만 관련 기록이 저장되어 있던 하드디스크 2개가 사라져서 압수수색에 실패하였다. 그리고 사라진 하드디스크 2개는 서버관리업체인 스마일서브 직원이 민주노동당의 요구로 하드디스크를 빼내서 전달한 것이 확인되었다.
이에 민주노동당은 압수수색이 종료된 것으로 알고 당의 사유재산을 따로 보관한 것으로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검찰은 “민주노동당 측 주장은 범죄를 정당화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며 이는 영장집행중에 행한 증거인멸죄에 해당한다고 반박했다.
또한 압수수색과정에서 선관위에 등록되지 않은 민주노동당 계좌에서 10억원이 강기갑 대표 등 당직자의 계좌에 유입된 사실이 드러났다. 그동안 당의 공식 계좌로 입금되었다거나 노조조합비라고 밝혔던 돈이 소속 국회의원에게 넘어간 것에 대한 비판받고 있다.
친북 종북 성향 의혹 관련 비판.
정계와 인터넷에서 민주노동당의 행보가 친북, 종북 성향을 보인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2011년 5월 30일 진보진영에서 논의중인 통합정당 정책 합의 과정 중 진보신당이 통합진보정당의 정책으로 “북한의 3대 세습 반대 입장을 채택하자”고 요구한 데 대해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는 “분단의 이분법”이라며 비판해 물의를 빚은 바 있다.
해산 청원.
이러한 가운데 2011년 8월 26일 국민행동본부(본부장 서정갑)과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위원장 고영주)에서 민주노동당 해산 청원에 나선 사실도 있다. 이들은 법무부에 '해산청원서'를 내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에 대해 헌법학자인 김철수 서울대 법대 명예교수는 2011년 8월 12일 한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에서 민주노동당은 헌법적으로 해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3404 | 112386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04 | 민주 노동당 | |
3405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05 | 아벨 군 | 군론에서 아벨 군(Abel群, ) 또는 가환군(可換群, )은 교환 법칙이 성립하는 군이다. 정수환 위의 가군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정의.
아벨 군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법으로 정의할 수 있다.
두 정의는 서로 동치이다. 교환 법칙을 만족시키는 군 formula_3이 주어졌다면, 여기에
와 같이 정수환의 작용을 정의할 수 있다. 반대로, 정수환 위의 가군 formula_8이 주어졌다면, 정수환의 작용을 잊으면 formula_3는 가환 법칙을 만족시키는 군을 이룬다.
생성 집합.
아벨 군 formula_10의 생성 집합(生成集合, ) formula_11은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는 부분 집합이다.
formula_10의 최소 생성 집합(最小生成集合, )은 생성 집합 가운데, 집합의 크기가 가장 작은 것이다. 최소 생성 집합이 유한 집합인 아벨 군을 유한 생성 아벨 군(有限生成Abel群, )이라고 한다.
계수.
아벨 군 formula_10의 일차 독립 부분 집합(一次獨立部分集合, ) formula_18는 그 합이 0인 선형 결합이 자명한 선형 결합밖에 없는 부분 집합이다. 즉, formula_19가 유한개의 성분들만 0이 아닌 formula_20개 음이 아닌 정수들의 순서쌍이라고 하면,
일 필요충분조건은 formula_22인 경우다.
아벨 군 formula_10의 계수(階數, ) formula_24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방법으로 정의될 수 있는 기수이다.
따라서, 유리수 위의 벡터 공간의 경우, 아벨 군으로서의 계수는 유리수 위의 벡터 공간으로서의 차원과 같다.
높이.
아벨 군 formula_10의 원소 formula_12 및 소수 formula_31가 주어졌을 때, formula_32의 formula_31-높이() formula_34는 다음과 같다.
직접곱과 직합.
아벨 군들의 집합 formula_36이 주어졌다면, 직접곱
를 정의할 수 있다. 이는 군의 직접곱의 특수한 경우이며, 아벨 군들의 직접곱은 항상 아벨 군을 이룬다.
아벨 군들의 집합 formula_36이 주어졌다면, 직합
를 정의할 수 있다. 이는 가군의 직합의 특수한 경우이다. 직합은 직접곱의 부분군이다.
만약 formula_41가 유한 집합이라면 직합은 직접곱과 같으나, 무한 집합이라면 직합은 직접곱의 진부분 집합이다.
임의의 크기의 집합 formula_41에 대하여 다음이 성립한다.
여기서 우변은 기수의 합이다.
텐서곱.
아벨 군들의 집합 formula_36이 주어졌다면, 텐서곱
을 취할 수 있다. 이는 가군의 텐서곱의 특수한 경우다.
성질.
군론적 성질.
다음과 같은 포함 관계가 성립한다.
특히, 모든 아벨 군은 데데킨트 군이므로, 아벨 군의 모든 부분군은 정규 부분군이다.
아벨 군들의 직접곱은 아벨 군이다. 아벨 군의 부분군은 아벨 군이다. 그러나 아벨 군의 자유곱은 아벨 군이 아니다.
유한 생성 아벨 군의 유한 개의 직합은 유한 생성 아벨 군을 이룬다.
모든 아벨 유한군은 유한 생성 아벨 군이며, 계수가 0이다.
모든 아벨 군 formula_10에 대하여, formula_10의 계수는 formula_10의 최소 생성 집합의 크기보다 같거나 작고, formula_10의 최소 생성 집합의 크기는 formula_10의 크기보다 같거나 작다.
아벨 군 가운데 단순군인 것은 소수 크기의 순환군 formula_51밖에 없다.
가군론적 성질.
아벨 군은 정수환 위의 가군이므로, 가군론을 적용할 수 있다. 가군론적 각종 성질은 아벨 군의 성질에 다음과 같이 대응한다.
아벨 군 formula_10의 (정수환 위의 가군으로서의) 크룰 차원은 다음과 같다.
라고 하자. 그렇다면 formula_10의 크룰 차원은 formula_55의 크룰 차원과 같다. 즉, formula_56일 경우 formula_10의 크룰 차원은 1이며, formula_58인 경우 formula_10의 크룰 차원은 formula_60이며, 0 또는 1이 아닌 경우 formula_10의 크룰 차원은 0이다.
아벨 군 formula_10의 (정수환 위의 가군으로서의) 길이는 그 합성열()의 최대 길이와 같다. 예를 들어, 아벨 유한군 formula_63의 길이는 formula_64의 소인수 분해가
일 때 formula_66이다. 무한 순환군 formula_4의 길이는 무한대이다.
정역 formula_68 위의 가군의 계수는 formula_69이다. 여기서 formula_70는 formula_68의 분수체를 뜻하며, formula_72는 분수체 위의 벡터 공간으로서의 차원이다. 이 경우, 아벨 군의 가군론적 계수는 아벨 군으로서의 계수와 같다.
대수기하학적 성질.
아벨 군은 정수환 위의 가군이다. 대수기하학적으로, 정수환의 스펙트럼은 다음과 같이, 소수 주 아이디얼을 닫힌 점으로 하는 1차원 스킴이다.
가환환 위의 가군은 가환환의 스펙트럼 위의 가군층을 이룬다. 즉, 아벨 군은 정수환의 스펙트럼 formula_73 위의 층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우, 유한 생성 아벨 군
의 지지 집합은
이다. 가군층의 직합 및 텐서곱은 아벨 군의 직합 및 텐서곱과 같다. 아벨 군 formula_10의, 닫힌 점 formula_77 위에서의 가군층의 올은 유한체 formula_78 위의 벡터 공간
이며, 일반점 formula_80 위에서의 가군층의 올은 유리수 위의 벡터 공간
이다. 즉, 일반점 위에서의 가군층의 차원은 아벨 군의 계수와 같다.
예를 들어, 순환군 formula_82의 지지 집합은 formula_83의 소인수들이다. 만약 formula_82 및 formula_85이 주어졌을 때, 두 아벨 군의 텐서곱은
이 된다. 특히, formula_83과 formula_64이 서로소라면 이는 자명군이 된다. 기하학적으로, 이는 formula_89의 지지 집합은 formula_82의 지지 집합과 formula_85의 지지 집합의 교집합이 되기 때문이다. 두 지지 집합이 겹치지 않는다면, 텐서곱이 항상 0이 된다.
호몰로지 대수학적 성질.
아벨 군을 정수환 위의 가군으로 간주하였을 때, 사영 가군은 자유 아벨 군이며, 단사 가군은 나눗셈군이다.
임의의 아벨 군 formula_10는 자유 아벨 군 formula_93의 몫군 formula_94으로 나타낼 수 있다.
또한, 자유 아벨 군의 모든 부분군은 자유 아벨 군이므로, 이는 길이가 1인 사영 분해를 이룬다. 따라서, 아벨 군 formula_10의 사영 차원은 다음과 같다.
마찬가지로, 임의의 아벨 군 formula_10은 어떤 나눗셈군 formula_102의 부분군으로 나타낼 수 있다.
또한, 나눗셈군의 몫군은 역시 나눗셈군이므로, 이는 길이가 1인 단사 분해를 이룬다. 따라서, 아벨 군 formula_10의 단사 차원은 다음과 같다.
범주론적 성질.
아벨 군과 군 준동형의 범주 formula_109는 대수 구조 다양체의 범주이므로, 완비 범주이자 쌍대 완비 범주이다. 이 경우, 각종 극한과 쌍대극한은 다음과 같다.
다시 말해, 정수환 위의 단사 가군은 나눗셈군이며, 정수환 위의 사영 가군은 자유 아벨 군이다.
아벨 군의 아벨 범주이며, 따라서 다음 성질들이 성립한다.
망각 함자
의 왼쪽 수반 함자가 존재하며, 이는 집합을 그 집합으로부터 생성되는 자유 아벨 군에 대응시킨다. 마찬가지로, 포함 함자
의 왼쪽 수반 함자가 존재하며, 이는 군을 그 아벨화에 대응시킨다.
또한, 아벨 군의 범주에서 유사환의 범주로 가는 충실충만한 함자
가 존재한다. 이는 아벨 군 formula_115를 모든 곱이 0인 유사환 formula_116, formula_117으로 대응시킨다.
폰트랴긴 쌍대성에 의하여, 아벨 군의 범주의 반대 범주는 콤팩트 하우스도르프 아벨 위상군과 연속 군 준동형의 범주와 동치이다.
또한, 아벨 유한군의 범주의 반대 범주는 스스로와 동치이다.
모형 이론적 성질.
아벨 군의 모임은 하나의 2항 연산(+)과 하나의 1항 연산(−), 하나의 0항 연산(0)을 갖는 대수 구조 다양체이다. 군의 대수 구조 다양체와 마찬가지로, 아벨 군의 합동 관계는 임의의 부분군에 의하여 정의된다 (아벨 군의 경우 모든 부분군이 정규 부분군이다).
분류.
아벨 군들은 일차적으로 계수 formula_24에 의하여 분류된다. 이는 기수이다.
일반적인 아벨 군은 분류하기 힘들다. 다만, 다음과 같은 부분적인 분류가 존재한다.
아벨 유한군의 분류.
모든 아벨 유한군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표준적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이러한 표현은 유일하다. 이를 소분해(素分解, )라고 한다.
여기서 formula_31는 소수이다.
마찬가지로 아벨 유한군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으며, 이를 불변 인자 분해(不變因子分解, )라고 한다.
여기서
이다 (formula_125는 formula_126가 formula_127의 약수임을 뜻한다).
이 두 분해는 중국인의 나머지 정리를 사용하여 서로 동치임을 보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와 같다. 여기서, 만약 formula_131라면 formula_132으로 정의한다.
아벨 유한군은 항상 계수가 0이며, 최소 생성 집합의 크기는 formula_133이다. 즉, 불변 인자 분해에서 항의 수와 같다.
아벨 유한군의 자기 동형.
아벨 유한군의 자기 동형군 역시 완전히 알려져 있다.
소분해가 주어진 아벨 formula_31-유한군의 자기 동형군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항상
이며,
이다. 임의의 아벨 유한군
의 자기 동형군은
이다.
유한 생성 아벨 군의 분류.
모든 유한 생성 아벨 군 formula_10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표준적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이러한 표현은 유일하다.
여기서 formula_143는 아벨 유한군이며, formula_10의 꼬임 부분군이라고 한다. 자연수 formula_145은 formula_10의 계수와 같다.
꼬임 부분군이 없는 계수 1 아벨 군의 분류.
꼬임 부분군이 자명군이며, 계수가 1인 아벨 군들은 다음과 같이 완전히 분류된다.
계수가 1인 아벨 군 formula_10가 주어졌다고 하자. 임의의 formula_12 (formula_149)에 대하여, 모든 소수 formula_31에 대한 formula_31-높이들의 수열
을 정의할 수 있다. 임의의 두 원소 formula_1 (formula_154)에 대하여, 계수가 1이므로 항상
인 formula_156이 존재한다 (formula_157). 따라서, 만악 formula_31가 formula_83 또는 formula_64의 소인수가 아니라면, formula_161가 된다. 즉, formula_162와 formula_163는 유한 개의 성분을 제외하고는 서로 일치한다. 이러한 두 formula_164에 대하여
와 같이 동치 관계를 정의하면, 동치류 formula_166는 formula_12에 상관없이 유일하게 정의된다. 이를 formula_10의 형() formula_169라고 하자.
그렇다면, 꼬임 부분군이 없는 계수 1의 두 아벨 군 formula_10, formula_171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고차 계수 아벨 군.
계수가 2 이상인 아벨 군의 분류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계수가 2 이상인, 꼬임 부분군이 자명한 아벨 군의 분류는 계수 1인 경우와 비교할 때 (어떤 집합론적인 엄밀한 의미에서) 훨씬 더 어렵다.
예.
흔히 볼 수 있는 아벨 군의 예로는 다음이 있다.
역사.
역사적으로, 군론은 고차 방정식의 해법 가능성 여부에 대한 갈루아 이론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이를 연구하던 닐스 헨리크 아벨은 어떤 다항식의 분해체의 갈루아 군이 아벨 군일 경우, 다항식의 해를 거듭제곱근만으로 나타낼 수 있음을 보였다. (이후 에바리스트 갈루아는 사실 갈루아 군이 가해군임이 족함을 보였다. 아벨 군은 가해군의 특수한 경우이다.)
아벨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카미유 조르당이 이 개념을 "아벨 군"이라고 명명하였다. |
3406 | 82597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06 | 군 | 군에는 다음과 같은 동음이의어가 있다. |
3408 | 32689467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08 | 결합법칙 | 수학에서 결합법칙(結合 法則, associative property)은 이항연산이 가질 수 있는 성질이다. 한 식에서 연산이 두 번 이상 연속될 때, 앞쪽의 연산을 먼저 계산한 값과 뒤쪽의 연산을 먼저 계산한 결과가 항상 같을 경우 그 연산은 결합법칙을 만족한다고 한다.
실수의 덧셈과 곱셈은 결합법칙을 만족한다. 예를 들어 다음 식은 참이다.
결합법칙이 성립하지 않는 가장 쉬운 예는 실수의 뺄셈일 것이다. 다음 식에서,
좌변과 우변의 결과값은 각각 -2와 4로 서로 다르다. 따라서 실수는 뺄셈에 대하여 결합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실수의 나눗셈도 결합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 다음 식에서,
좌변과 우변의 결과값은 각각 0.38095...와 3.42857...로 서로 다르다. 따라서 실수는 나눗셈에 대하여도 결합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
정의.
집합 "S"에 대해 정의된 이항 연산 formula_3이 결합법칙을 만족하면 다음 식이 성립한다.
이 때 좌변과 우변의 값은 연산을 수행하는 순서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 법칙은 formula_3 연산이 세 번 이상 나타날 때에도 확장해서 적용할 수 있으며, 따라서 formula_3가 결합법칙을 만족하면 연산 순서를 따로 지정하지 않아도 모호함 없이 수식의 값이 결정된다. 따라서 보통 위의 수식을 괄호 없이 다음과 같이 쓴다. |
3409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09 | 교환법칙 | 수학에서 교환법칙(, )은 두 대상의 이항연산의 값이 두 원소의 순서에 관계없다는 성질이다.
정의.
수학에서, 집합 "S"에 이항연산 * 이 정의되어 있을 때, "S"의 임의의 두 원소 "a", "b"에 대해
가 성립하면, 이 연산은 교환법칙(交換法則, commutative property)을 만족한다고 한다. 이때 연산은 가환(可換, commutative)이라고도 한다. 교환법칙을 만족하지 않는 연산은 비가환(非可換, non-commutative)이라고 한다.
예.
예를 들어 자연수 집합에서 덧셈과 곱셈은 교환법칙을 만족한다.
그러나 뺄셈과 나눗셈은 일반적으로 교환법칙을 만족하지 않는다.
교환법칙을 만족하는 연산의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교환법칙을 만족하지 않는 예는 다음과 같다. |
3411 | 756139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11 | 대통령 | 대통령(大統領, president)은 대통령제 국가의 국가원수이다. 대통령의 역할은 정부형태에 따라 달라지며, 같은 정부형태를 채택하더라도 나라마다 구체적인 권한과 의무, 임기 및 선출방식 등 운용이 다르다. 대통령제에서 대통령은 국가원수 및 행정부 수반으로서 이중적 지위를 가지며 정치적 실권도 있는 반면,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상징적 권한만 가진 존재이다.
중화인민공화국과 베트남은 국가주석이고 중화민국에서는 총통(總統)이란 명칭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영문으로 번역할 때는 똑같이 president로 번역된다. 흔히 경칭으로는 각하로도 알려져 있고 대한민국에서는 정부 수립 이후 사용되다가 제4대 장면 정부 때인 1960년 8월 12일 폐지되었으며, 1963년 12월 19일 제3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부활했다가 제12대 전두환 정권 때인 1988년 초까지 쓰였다.
역사.
미국의 헌법의 모태가 된 1787년의 필라델피아 헌법회의의 구성원들이 영국 헌정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발전시킨 정부 형태 자유민주주의에 뿌리를 두고 샤를 루이 드 세콩다 몽테스키외의 권력분립 사상을 충실히 수용하여 탄생하였다. 19세기가 되면, 1819년 대 콜롬비아의 성립을 시작으로 남미 국가에서 대통령제가 시행된다. 그리고 20세기가 되면, 1911년 ~ 1912년 신해혁명을 시작으로 공화제 국가가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바이마르 공화국과 같은 대통령제 국가에서 소비에트 연방 등 일당제 국가까지 다양했다.
어원.
미국에서 대통령제가 생기기 전 president는 원래 1774년 대륙회의의 의장()을 부르던 말이었는데, 이는 권한이 많지 않은 명예직이었다. 이후 1787년 헌법을 만들면서 합중국의 수장을 president로 부르게 되었다.
동양에서 '대통령'이라는 용어는 '통령(統領)'으로부터 비롯된 말이다. 청나라 후기에 '통령'은 오늘날 여단장급의 무관 벼슬 명칭인 근위영 장관(近衛營 長官)을 이르는 말이었다. 또 고대 한나라 시대에 북방 흉노 군대의 장군을 '통령'으로 지칭하는 등 소수 민족 군대의 장군을 비공식적인 표현으로 '통령'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조선 시대에 조운선 10척을 거느리는 벼슬을 '통령'이라 불렀다. 일본에서는 '통령'이라는 말이 고대부터 쓰였는데, '사무라이를 통솔하는 우두머리'라는 군사적 용어였으며, 군사적 수장이나 씨족의 족장을 의미하는 용어로 매우 흔하게 쓰였다.
근대 일본에서는 고대 로마의 집정관이나 베네치아 공화국의 원수, 프랑스 제1공화국의 집정관 등 다른 나라의 직위를 설명하는 번역어로 '통령'을 이용하였다. 일본은 'president'를 번역하면서 자신들에게 익숙했던 '통령'이라는 용어에 "큰 대(大)" 자를 덧붙여서 '대통령'이라는 말을 만든 것이다. 그리하여 최소한 1860년대 초부터 일본에서는 이미 '대통령'이라는 용어가 출현하기 시작하고 있다.『일본국어대사전』에는 1852년에 출간된『막부 외국관계 문서지일(文書之一)』에서 '대통령'이란 낱말이 처음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중국에서는 'president'의 번역어로 1817년 '두인(頭人)'이라는 비칭(卑稱)의 성격을 띤 호칭을 사용한 이래, '총리(總理)', '국주(國主)', '추(酋)', '수사(首事), '추장(酋長)', '방장(邦長)', '백리새천덕' 등의 용어를 쓴 바 있다. '통령'이라는 번역어가 쓰인 것은 의 《》(1838)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통령'이라는 용어도 1875년 경 출현한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1870년에 이르러 '총통'이라는 용어를 널리 쓰면서 ‘통령’·‘대통령’이라는 용어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현재 중화민국에서는 'president'를 '총통(總統)'으로 번역하고, 국부천대 후에도 자국 국가 원수의 직함으로 '총통(總統)'을 계속 쓰고 있다.
한국의 기록에서 '대통령'이라는 용어는 조사 시찰단으로 일본에 다녀온 이헌영이 1881년 펴낸「일사집략(日槎集略)」이라는 수신사 기록에서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글에서 일본 신문이 "미국 대통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 뒤 1884년『승정원일기』에서도 고종이 미국의 국가 원수를 '대통령'이라고 호칭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국에서 '대통령'이라는 용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된 계기는 바로 상해 임시정부가 최고 통수권자로서 '대통령'이라는 용어를 선택하여 사용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차용되었던 이 용어가 현재 대한민국에서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헌법상 지위.
권한.
대통령의 헌법상의 지위는 나라마다의 권력구조에 따라 다르다. 대통령제 국가에서의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지위와 함께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지위를 가지며, 의회와 별개 선거로 선출되어 별도의 정당성 기반을 가진다.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대통령의 지위는 입법부와 사법부와 함께 동령에 위치한다. 그러나 국가원수로서의 대통령은 삼부를 총괄하는 위치에 있으며, 이러한 이중적 지위에 의하여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 동남아시아 등 권위주의 체제에서는 행정부의 수반을 의미하는 대통령이 입법부와 사법부보다 월등하게 우월한 지위에 있기도 하다.
의원내각제 국가에서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지위만을 가지며, 정치적 실권은 행정부 수반인 총리에게 있다. 대통령은 국가통합의 상징으로서 의전 등의 형식적 권한만을 가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원집정부제 국가에서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지위와 함께 행정적 실권 역시 가진다. 그러나 대통령제에서와 달리 대통령이 임명한 내각이 의회의 신임에 구속되므로, 의회의 선거 결과에 따라 대통령의 정치적 실권의 크기도 변하게 된다. 동거정부 출현시 행정부 수반으로서 실권은 총리가 행사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매우 황당한 신분이었던 적도 있었다. 1860년대의 멕시코가 그랬는데 당시 멕시코는 베니토 후아레스가 정상적으로 대통령으로서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나폴레옹 3세가 멕시코에 개입해서 막시밀리아노 1세를 황제로 즉위시켜서 멕시코에 대통령과 황제가 공존하는 초유의 사태를 유발시켰다. 하지만 베니토 후아레스가 막시밀리아노 1세를 체포 후 총살시킴으로써 일단락 되었다.
의무.
각 국가의 헌법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일반적으로 대통령의 의무는 헌법 준수의 의무, 영업 활동의 금지, 겸직 금지의 의무, 청렴의 의무 등을 들 수 있다.
선출 방식.
선출하는 방식도 국민의 직접 투표 혹은 의회에서 선출하는 방식으로 나뉜다. 입법부 선거와 별도로 행정부 선거를 두는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직선 선출이 대부분이나, 선거인단을 통한 간선을 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미국은 연방국가의 특성상 시민권자가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지지하는 선거인단을 선출해 그들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투표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총득표자수는 많아도 선거인단의 수에서 뒤져 낙선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임기.
각국의 대통령의 임기는 나라마다 다르고, 나라에 따라 중임에 제한을 두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임기는 5년이나 재선이 불가하고, 미국 대통령 임기는 4년이나 재선이 가능하지만 3선은 불가능하다. 러시아는 3연임은 불가능히지만 무한히 재선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2번 연임하고(3대, 4대) 중간에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를 한번 끼워넣는(5대) 방식으로 현재 4선째(6대, 7대) 대통령을 하고 있다. |
3413 | 20227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13 | NATO | |
3414 | 33239554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14 | 질병 목록 | 아래는 질병의 목록이다.
면역 질환.
알레르기성 질환.
수두 |
3415 | 39822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15 | 동화 | 동화(童話)란 어린이를 독자층으로 하는 이야기를 말한다. 아동 문학의 한 장르이다.
판타지나 우화, 프로파간다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나라별 동화.
그리스의 이솝우화, 이탈리아의 피노키오, 독일의 헨젤과 그레텔 등 동화로 알려진 문학이 있다.
한국.
한국에서는 흔히 어린이를 위한 옛날 이야기를 동화라고 이해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이 문학 유형이 갖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간접적으로 설명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전통적 의미에서 동화는 한 지방이나 국가에서 세대를 거치면서 자기 나라말로 구전된 것에서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적 동화는 종류가 대단히 한정될 수밖에 없다. 현대에 들어서 동화의 창작은 간과할 수 없는 문학 작업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의 본격적인 창작동화는 1923년 마해송(馬海松)의 〈바위나리와 아기별〉이 발표되고, 이어서 《어린이》·《아이생활》·《별나라》 등 여러 잡지와 구연회(口演會)를 통하여 방정환·고한승(高漢承)·진장섭(秦長燮)·정인섭·이정호(李定鎬) 등 색동회 동인들과 기타 이주홍(李周洪) 등의 작가들이 창작활동을 활발히 전개함으로써 비로소 기반을 쌓게 되었다. 현재도 보리출판사, 사계절출판사, 예영커뮤니케이션 등 다수의 출판사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창작동화들을 출판하고 있다. |
3417 | 936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17 | 이솝동화 | |
3418 | 8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18 | 이솝 | |
3419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19 | 안네 프랑크 | 아넬리스 마리 "안네" 프랑크(, , 1929년 6월 12일 ~ 1945년 3월 12일)는 독일의 유대인 소녀로 나치가 네덜란드를 지배한 시기에 쓴 일기로 유명하다. 그 일기는 한국어로는 《안네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생애.
키티와의 만남.
안네의 일기에 따르면 안네는 1929년 독일의 상업도시 프랑크푸르트에서 유대인 은행가 오토 프랑크()와 어머니 에디트 프랑크(, 홀렌더·) 사이에서 태어났다. 에디트는 독실한 개혁파 유대교 신자여서-현대 유대교는 토라의 엄격한 준수를 주장하는 정통주의 유대교, 토라의 느슨한 준수를 주장하는 개혁파 유대교로 구분된다. 큰 딸 마르고트와 작은 딸 안네도 어려서부터 시나고그에서의 유대교 예배에 참여하여 유대교 신앙을 배웠다.
1933년에 나치당의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으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교육, 교통, 거주지 등에서의 인종차별이 실시되고, 1938년 17세 소년 헤르셸 그린슈판()이 거주의 자유 박탈에 항의하다 파리주재 독일대사관 3등서기관 에른스트 에두아르트 폼라트()를 살해한 사건을 구실로 유대인들에 대한 집단 테러를 가한 범죄인 수정의 밤 사건을 시작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홀로코스트)이 일어나자, 삼촌들은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안네 프랑크의 가족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망명했다. 당시 대다수의 유럽국가들은 히틀러가 유대인 정책을 강제 추방에서 강제수용소 수용 및 학살로 바꿀만큼 유대인들의 망명을 좋아하지 않았고 영국의 경우 재정후원이 있는 경우에만 어린이의 망명을 허락했다. 그래서 유럽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홀로코스트를 묵인한 공범이라는 비평을 받았다.
몬테소리 학교에서 개별 자유 수업을 받았으며, 중학교는 유대인 중학교에 진학하였다. 그 이유는 1938년 이후 유대인들을 유럽사회에서 소외시키려는 나치의 인종차별 실시로, 학교 진학에서도 차별을 받았기 때문이다. 13살 생일에 (후에《안네의 일기》라고 불리게 된) 붉은 체크 무늬 일기장을 선물로 받았다. 안네는 일기장에게 '키티()'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시작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미국으로의 망명실패와 은신처 생활 시작.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은 서부 유럽으로 확대되어 나치 독일은 네덜란드를 중립국가임에도 점령하였고, 곧 네덜란드 내의 모든 유대인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당시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나치의 네덜란드 점령에 대해 그리 위험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2007년 1월 26일자 《타임》에서 공개한 편지에 따르면, 오토 프랑크는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한 사건이 가족들을 해외로 망명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일만큼 위험한 사건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미국 대사관이 나치 독일의 네덜란드 점령으로 폐쇄되어 미국으로 망명할 수 없게 되자, 고육지책으로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암스테르담의 프린센흐라흐트() 263번지에 있는 펙틴(과일잼에 들어가는 식재료) 공장 사무실에 있는 창고를 책장으로 위장해서 교묘하게 막고(오른쪽 그림의 화살표) 1942년 7월 5일에 자신의 가족을 그곳으로 피신시킬 준비를 하였다.
은신 계획은 비밀리에 진행되어서, 안네가 일기장에 아빠가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몰랐다고 적었을 정도였으며, 안네의 일기에 따르면 이웃들도 안네 자매가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을 보았다느니, 안네 일가가 나치에게 끌려갔다느니 하는 헛소문이 돌만큼 보안도 완벽했다.
계획을 실행할 때가 되자 안네 일가는 새벽에 일어나 옷가지같은 생필품만 챙긴 채 은신처에 갔다. 도망가는 것을들킬까 봐 트렁크는 쓸수 없었다.차별 때문에 안네는 자동 전차를 타지도 못하고 비를 맞으면서 걸어갔다. 그래서 네덜란드 사람들이 자신들을 불쌍하다고 쳐다보는 것을 알면서도 참아야 했던 비참한 상황이었다고 적었다. 이때부터 비밀 저택이라고 이름붙인 은신처에서 2년간 숨어 살면서 안네는 일기장 키티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안네의 일기》를 적어 갔다.
은신처에서 산 이들은 안네의 가족과 그의 이웃 유대인들(오토 프랑크의 사업을 돕던 판 단과 그의 가족, 치과 의사 뒤셀) 들을 포함한 총 8명이며, 약 2년 동안 생존을 위해 투쟁하였다. 식료품(주로 감자)와 생활용품)은 당시 오토의 공장에 종사했던 3명의 사무직원이 담당하였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미프 기스(Miep Gies)라는 처녀가 심부름을 해 주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으며 안네의 표현을 빌면 쉴 틈이 없었을 정도로 행동의 자유가 없는 은신처 사람들의 심부름을 해 주었다. 나치의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압수과정으로부터 안네의 일기와 그가 습작한 글들을 몰래 빼돌린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은신처에서 안네 일가와 다른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안네의 일기에 따르면 부친의 먹거리 장사로 중산층 이상의 생활 수준을 누리던 은신생활 이전의 삶과는 달리 먹을 것, 속옷 등의 생활에 있어야 할 것들이 부족했고, 같이 살기 전에는 몰랐던 서로의 결점이 눈에 띄면서 사이가 나빠지기도 했지만, 나치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 죽지 않기 위해 불만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하지만 일기에는 자그마한 행복들도 보인다. 지하경제로 산 고기와 양념으로 소시지를 만들어서 자우어크라우트(양배추를 발효한 음식)와 같이 먹은 이야기, 불어, 영어, 지리, 역사 등을 공부한 이야기, 독후감, 딸기를 사서 먹은 이야기 등의 일상생활에서의 작은 행복들이 일기에 담겨 있다.
은신처 발각과 안네의 죽음.
1944년 8월 4일 밤, 익명의 밀고를 받은 나치의 제복 경찰()은 이 은신처를 급습하여 유대인전원을 체포하고 안네의 가족을 나치 강제 수용소로 이송했다. 그래서 안네의 일기는 1944년 8월 4일로부터 불과 3일 전인 8월 1일 화요일로 끝나 있다.
범우사에서 번역한 안네의 일기 해설에 의하면, 안네의 가족을 잡아간 나치의 게슈타포 카를 요제프 질버바우어()는 훗날 검거되었다. 안네의 가족을 고발한 밀고자의 신분에 관해서 지금까지 서너 가지 추측이 있었다. 이를테면 창고지기가 한 사람당 5길더를 받고 밀고를 했다는 설이 있는데, 모두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다.
안네는 16세의 나이로 1945년 3월에 유대인 강제수용소 베르겐벨젠에서 영양실조와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해방되기 2달 전이었다. 어머니는 정신이상으로 죽었다. 언니 마르고트도 장티푸스로 죽었는데, 그녀가 사망한 후 안네가 상심이 커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네의 가족 가운데 아버지 오토만이 옛 소련군의 수용소 해방으로 생명을 건졌는데, 네덜란드로 돌아온 그는 '이제 두 번 다시 이런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며 안네의 일기를 책으로 출판했다. 그외 은신처 가족들은 모두 수용소에서 병이나 가스실에서의 학살로 죽었는데, 판단 씨 가족의 경우 부인은 안네와 마르고트와 같은 수용소에서 지내면서 아이들을 돌보다가 독일이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죽었고, 판단 씨는 가스실에서 학살되었으며, 안네의 남자친구였던 페터는 독일군의 수용자 강제이주로 어디론가 끌려간 뒤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도 하고 수용소에서 죽었다고도 전해진다.
안네가 쓴 일기는 1947년에 아버지 오토 프랑크의 편집(성에 대한 사춘기적 관심이 드러나는 부분, 부모와 은신처의 다른 가족을 비난하는 부분이 삭제되었다)을 거쳐 출판되었으며, 이 일기는 약 60개 국어로 번역되어 약 3천 2백만 권이 팔린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중 한국어판은 안네 아버지가 편집한 원고를 출판해오다가, 원고를 모두 번역한 무삭제판이 안네가 습작한 단편소설들과 함께 출판되었다. 안네의 가족이 피신하여 살던 집은 현재 안네 프랑크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3420 | 596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20 | 안네의 일기 | 《안네의 일기》(, )는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가 국외 탈출에 실패한 아버지의 결단으로 2년간 은신 생활을 하면서 남긴 일기이며, 일기장에서 '키티'()라고 부르며 친구에게 말하듯이 써내려간 독특한 양식이 특징이다.
내용.
일부내용은 은신 생활에 들어가기전의 내용(독일과 네덜란드에서의 성장 과정)을 담고 있지만, 대다수 내용은 은신생활을 주제로 하고 있다. 1942년 6월 12일부터 1944년 8월 1일까지 썼고, 네덜란드어 판은 1947년 아버지 오토 프랑크의 일부 원고 편집에 의해서 출간되었다. 1995년 한국어판으로 무삭제 원고가 완역되어, 문학사상사에서 출판되었다. 1944년 8월 4일 독일 비밀경찰 게슈타포가 안네의 가족이 살던 곳을 급습하여 일행이 모두 붙잡혔고 그 뒤 안네는 다음해 3월 수용소에서 16살의 나이로 장티푸스에 걸려 죽고 말았다.
출판 역사.
안네 프랑크가 쓴 일기에는 두 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안네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일기장과 두 공책에 첫 번째 버전의 일기(version A)를 작성했다. 안네는 1944년 라디오에서 전쟁 기간을 기록에 남기기 위해 전쟁 중의 일기를 모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일기를 재작성했다(version B). 버전 B는 철 되지 않은 종이에 작성되어 있고 버전 A에서 몇몇 부분이 추가되거나 생략된 형태이다.
네덜란드어판 출판.
안네의 일기는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랭크가 스위스에 있는 자신의 친구들과 친척들을 위해 독일어로 처음 필사됐다. 이들은 안네의 아버지가 일기를 출판하라고 설득시켰다. 그는 버전A, 버전B와 함께 안네의 에세이들을 발췌하고 출판을 위한 첫 번째 원고를 재출했다. 이 원고에는 원작자의 운명을 설명하는 에필로그가 포함되어 있다. 1946년 봄에는 이 원고가 두 역사학자 Jan Romein 박사와 그의 아내 Annie Romein-Verschoor의 관심을 끌게 된다. 이후 Anne Romein이 출판사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Romein 박사가 Het Parool에 이 일기에 관한 글을 기고 했다. 이 글을 본 출판중개인은 출판 심사를 위해 오토 프랭크에게 일기의 네덜란드어 원본을 달라고 부탁한다. 출판사는 결국 일기를 출판하기로 했지만 오토 프랭크에게 안네의 성(sexuality)에 대한 솔찍한 언급은 특정 보수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고 조언하고 약간의 내용 삭제를 제안한다. 추가로 초반 부분 또한 삭제되었다. 일기(버전A+버전B)는 "Het Achterhuis. Dagbrieven van 14 juni 1942 tot 1 augustus 1944(비밀의 별관. 1942년 6월 14일부터 1944년 8월 1일까지의 일기 편지)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된다. 오토 프랭크는 나중에 안네가 지금 이곳에 있었다면 안네는 매우 자랑스러워 할 것이라고 말한다. 책은 잘 팔렸다. 첫 번 째 에디션은 3000부가 팔려 매진되고 1950년에 여섯 번 째 에디션이 출간된다.
1986년에는 무삭제판이 출간된다. 총 714 쪽이고 세 권에 나누어 출판이 되었다.
한국어판 출판.
안네의 일기는 범우사에서 사루비아 문고 시리즈로 출판했다.
진위 여부.
안네는 작가를 지망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적은 일기도 퇴고해서 새로 적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일기에는 오리지널 일기와 자신이 정서한 개정판 원고의 두 가지가 있다. 이 원고들은 어느쪽이건 완전한 책의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사후에 출간된 책은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양쪽을 상호 보완하는 형태로 편집해서 만든 것이다.
이 편집의 도중에 안네가 기술한 내용 중, 사춘기 소녀다운 성적 호기심이나 지루한 에피소드, 어머니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제 3자들에 대한 비판은 일부 삭제나 정정이 있었다. 그런데 안네 프랑크가 유명해지면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안네의 일기가 허구이며 안네는 실존하지 않았거나 일기의 내용이 부친에 의해서 날조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958년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의 '안네가 실존했다면 안네를 체포한 인간을 찾아내라"는 주장에 대하여 나치 헌터로 유명한 시몬 비젠탈은 게슈타포 출신으로 네덜란드에서 SD 상사였던 카를 질베바우어를 1963년에 찾아내어 안네가 실존했음을 증명하는데 성공한다. 인터뷰에서 실베바우어는 그가 전시중에 SD에서 일했음을 시인했고 안네 프랑크의 사진을 보고 그가 체포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고 인정했으며 체포한 유대인들에게서 압수한 물건을 담는 가방에서 안네의 일기장을 빼내는 것을 보았다고 한 그의 진술은 오토 프랑크의 진술과 합치했다.
이후에도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끈질기게 안네의 마지막 일기가 허구라는 주장을 계속했으며 1970년대에 영국의 유명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 데이비드 어윙은 일기가 가짜라고 주장했고 1976년에 일기가 허위라는 팜플렛을 프랑크푸르트에서 배포하던 네오나치주의자 에른스트 뢰머와 에드거 가이스가 체포되었을 때 일기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쟁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 재판중에 오토 프랑크의 의뢰를 받은 역사가 팀이 원본을 정밀 조사하여 일기가 진짜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1978년 뢰머와 가이스가 상소하면서 독일 내무성 소속 범죄조사국(Bundes kriminalamt ; BKA)은 원본의 종이와 잉크에 대한 과학 분석을 실시해서 "일기를 적을 때 사용한 잉크는 전시중의 것이지만 나중에 기입된 정정사항들은 흑, 녹, 청 볼펜으로 기록된 것이다"라는 취지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BKA는 이에 관련된 상세한 내용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일기의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볼펜은 1950년대에나 널리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것이야말로 일기가 허위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받아들였다.
1986년 일기의 원본을 보관하고 있는 네덜란드의 전시자료 연구소는 보다 상세한 과학적 조사를 진행하기 위해 BKA에게 볼펜으로 기술된 부분을 지적할 것을 요구했으나 BKA는 그 부분을 지적할 수가 없었다. 추후의 조사를 통해서 볼펜으로 기입된 종이 두 장을 발견했으며 1987년 함부르크의 심리학자로 필적 감정 전문가인 한스 오클먼은 그의 어머니인 도로시 오클먼이 미나 베커와 공동으로 일기를 조사했을 때 그 볼펜의 텍스트를 기입했음을 밝혀내어 일기의 진위에 대한 의문점은 해결되었다. 2003년에 출간된 수정판 일기에서는 논란이 된 두 장의 종이의 사진을 게재하고 있다.
문학에서의 언급.
소설가 가람 이병주는 역사소설 《그를 버린 여인》에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권위주의와 폭력을 비판하는 소재로 《안네의 일기》와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인용했다. |
3424 | 45068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24 | 둥젠화 | 둥젠화(동건화, ; , ; 퉁치화, ; 1937년 7월 7일 ~ )는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난 기업인이자 정치인으로, 홍콩의 중화인민공화국으로의 반환 이후 초대 행정장관을 지냈다.
1996년에 위임하여 1997년 7월 1일 홍콩 특별행정구 초대 행정장관으로 취임했다. 2002년 재선되었으나 5년 임기를 채우기 전인 2005년 3월 12일에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사임했다. 현재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을 역임하고 있다. |
3443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43 | 음높이 | 음높이(소리의 높이) 또는 피치(pitch)는 음의 높낮이를 가리키는 음악용어다. 보통 A4, B3과 같은 표기법을 사용하거나 Hz로 표기한다. 악보에서는 음높이를 줄과 칸으로 표현한다. 음의 진동수가 클수록 음높이는 높아지며, 진동수가 2배가 되면 한 옥타브 높은 음이 된다.
개요.
같은 세기로 피아노의 왼쪽 건반과 오른쪽 건반을 두드렸을 경우, 둘의 소리 감각은 다르다. 이 차이를 소리의 높이로 나타낸다. 소리의 높이는 음파의 진동수의 차이에 의한 감각으로, 진동수가 많으면 높은 음으로, 적으면 낮은 음으로 느낀다. 회전하는 톱니바퀴에 두꺼운 종이를 대면 소리가 들린다. 회전이 빨라질수록 그 소리는 높아진다. 레코드의 회전판에 손을 대서 회전을 느리게 하면 소리가 갑자기 낮아진다. 이것도 회전의 변화로 진동수가 변하기 때문이다. 소리의 높이는 음파의 진동수에 관계가 있지만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진동수가 2배가 되어도 소리의 높이는 2배가 되었다고는 말하지 않고 원래의 소리의 높이보다 1옥타브 높은음이라고 말한다. 우리들의 귀에 소리로서 들리는 진동수는 약 20-20000Hz의 범위인데, 이 범위의 소리를 가청음이라고 한다. 음악에서는 대강 30-8000Hz의 범위의 소리가 사용되며, 여성이나 아이들의 발소리는 약 250-550Hz, 남자는 약 90-300Hz 범위라고 한다. 진동수가 각기 다른 두 개의 음파를 동시에 들을 때의 소리의 높이는 어떻게 될까. 진동수의 차이가 작을 때에는 울림이 생기지만, 이때 소리의 높이는 두 진동수의 평균 높이로 느낀다. 진동수의 차가 커지면, 두 소리의 높이를 나누어서 들을 수도 있지만, 소리의 크기가 다르면 커다란 소리의 진동수 높이로 들린다. 예를 들면, 우리들이 흔히 듣는 악기 소리와 같이 진동수의 차가 작은 진동수를 기준으로 해서 정수배(整數倍)가 되어 있을 때는 언제든지 작은 진동수·소리의 높이로 들린다.
표준 음높이.
지역별 시대별로 여러 표준 음고가 있었지만 현재는 보통 1939년 런던 국제회의에서 정한 A4 = 440 Hz를 사용한다. |
3444 | 61983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44 | 리히텐슈타인 | 리히텐슈타인 공국 또는 리히텐슈타인 후국()은 중앙유럽에 있는 내륙국이다. 스위스,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1866년 군대를 폐지한 이후로, 국방은 스위스에 의지하고 있다. 또한 1919년 협약에 의해, 따로 정하지 않은 경우에, 제3국에서 스위스 대사가 리히텐슈타인을 대표하여 외교행위를 할 수 있다. 주요 언어는 독일어이고, 국민 대다수가 믿는 종교는 천주교이다.
지리.
면적은 남북으로 25km, 동서로 6km 정도 뻗어 있으며 세계에서 6번째로 작은 나라이다.(또한 유럽에서는 4번째로 작은 나라이다.) 인구는 약 3만 명 정도이다. 독일의 슈베비슈 알프스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국토의 대부분이 산이다. 서쪽은 스위스, 동쪽은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한다. 국경의 길이는 77.9km이다. 우즈베키스탄과 함께 세계에서 둘 밖에 없는 이중 내륙국 가운데 하나이다.
기후.
평야지대는 기후가 다소 온화하여 1월 평균기온은 섭씨 영하 2도~0도, 7월 평균기온은 15도~18도이며, 푄 현상의 피해를 자주 입는다. 연강수량은 평야부에서 800mm, 산릉부에서는 2,600mm에 이른다.
행정 구역.
리히텐슈타인의 행정 구역은 11개 지방 자치체로 구성되어 있다.
경제.
리히텐슈타인의 산업구조는 2006년 기준 1차산업 2%, 2차산업 45%, 3차산업 53%이며 협소한 국토, 빈약한 부존자원 및 소규모 인구에도 불구하고 부유한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는 스위스와의 관세동맹, EFTA 가입 및 EEA협약 서명 등 적극적인 대외개방정책에 힘입은 바 크다. 이같은 대외개방정책과 함께 국내정치 안정, 유리한 세제 및 편리한 교통 등의 조건이 약 1,600여 개의 기업 활동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해주고 있다. 국내 노동력이 부족하여 2만 9천여 명의 노동자 중 1만 3천여 명이 스위스, 오스트리아 및 독일에서 매일 출퇴근하고 있다(2001년).
농업 부문은 밀을 약간 수입하는 것 이외는 국내에서 자급자족하고 있다. 포도와 포도주, 그 밖에 과실 등이 많이 산출되며, 목초지가 잘 정비되어 축산이 활발하다. 공업에 대한 의존도도 크며, 지금까지의 방직·피혁 이외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근대화정책으로 금속가공업, 직물, 화학, 현미경·고주파기·광학기기 등의 정밀기계, 난방기기, 화학제품, 소시지가공, 전지, 제지업, 건축자재 접착기술(Hilti AG), 보일러(Hoval AG), 치과의료기(Ivoclar AG), 금속표면보호(Balzers) 등의 업종이 발달하였다. 또 아름답기로 소문난 우표의 매상이 많아 국고수입의 1/3을 차지할 정도이며,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이 항상 파두츠의 우체국에 몰린다. 1999년 3월 말에 스위스의 스위스콤이 민영화함에 따라 1921년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이 맺은 우편·전화협정은 효력이 없어졌으며, 리히텐슈타인은 1999년 4월 우편공사를 설립하였다.
세금 부담이 매우 가볍기 때문에 외국자본이 지주회사를 설립하고 있으며, 수도인 파두츠에는 2,000개 이상의 회사들이 등록을 해놓고 있다. 최근 전반적으로 경제가 호조를 보이고 있으며 실업률이 1999년 2.0%에서 2002년 1.3%로 감소하였다. 1996년 수출은 24억 7000만 달러, 수입은 9억 1730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전자계측기, 정밀기계, 치과용기기, 우표, 하드웨어, 도자기 등이며, 수출상대국은 EU 62.6% (독일 24.3%, 오스트리아 9.5%, 프랑스 8.9%, 이탈리아 6.6%, 영국 4.6%), 미국 18.9%, 스위스15.7% (2004)이다. 수입품은 기계, 금속 등이고 주요 무역 상대국은 EU(61%)와 EFTA(유럽자유무역연합)국가들이며 특히 스위스(16%)와의 거래가 많다.
문화.
음악분야에서는 프란츠 리스트의 친구이자 저명한 작곡가 험퍼딩크(Humperdinck)의 스승이기도 한 작곡가 조세프 가브리엘 라인베르거(Joseph Gabriel Rheinberger:1839~1901)가 유명하다. 리히텐슈타인에는 유명한 음악가뿐 아니라 많은 음악협회나 합창단들이 있는데 그 수가 400개 이상에 이른다. 또한 리히텐슈타인 음악학교는 국립재단으로 열성적으로 음악사업을 육성하며 '국제적 마스터 코스'로 잘 알려져 있다.
미술분야에서는 플라스틱 아트로 유명한 게오르크 말린(Dr. Georg Malin)이나 브루노 카우프만(Bruno Kaufmann)등이 유명하다. 젊은 예술가들의 활동도 활발하여 정부에서는 'Art on Buildings' 법률로 그들을 뒷받침하고 있으며, 은행이나 기업들도 그들을 후원하고 있다. 부활절 전에 푼켄존탁(Funkensonntag;Spark Sunday)이라는 축제가 열리는데 일종의 마녀 화형식에서 유래하였으며 공공축제이면서 마을 간 대항전이기도 하다. 리히텐슈타인인의 90%가 천주교회 신자이기 때문에 많은 전통이 성모 승천을 기념하는 8월 15일 등 천주교회에 따른 기념일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종교.
기독교인의 대부분은 천주교회 신자로서 전체 종교인의 87%를 차지한다. 그외 개신교는 7.2%, 이슬람은 5.4%이다. 국가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스포츠.
리히텐슈타인은 유럽 축구 연맹(UEFA) 회원국 가운데 유일하게 프로 축구 리그가 없는 나라이다. 리히텐슈타인의 축구 클럽은 스위스의 축구 리그에 참여한다.대표적으로 FC 파두츠가 있다.
평창동계올림픽 알파인스키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적이 있다. 이 나라는 모든 메달을 동계 올림픽 알파인 스키 한 종목에서만 가져왔다.
외교.
리히텐슈타인의 외교는 스위스가 대신한다.
한국 관계.
리히텐슈타인은 대한민국과 1993년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며 주스위스대사관이 겸임하고 있다. 국제 사회상에서는 대한민국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는 외교관계가 없었지만, IOC 정회원국으로서 선수 및 임원단을 서울에 파견하기도 했다. |
3450 | 75312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50 | 칼 폰 린네 | 칼 폰 린네( , 1707년 5월 23일 ~ 1778년 1월 10일) 또는 카롤루스 린나이우스()는 스웨덴의 식물학자로서 생물 분류학의 기초를 놓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여 현대 ‘식물학의 시조’로 불린다. 귀족이 되기 전 이름은 ‘카를 린나이우스(Carl Linnæus)’이고, 스스로는 라틴어 이름인 ‘카롤루스 린나이우스(Carolus Linnæus)’를 썼다.
웁살라 근교, 로스폴트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룬트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나, 신학교수이자 식물학자인 셀시우스의 소개로 웁살라 대학교의 식물학자인 루드베크의 조수가 되었다. 1735년, 네덜란드의 하르더르베이크 대학교에서 의학 학위를 땄다. 이 곳에서 식물의 관찰, 분류학상의 문제에 대한 연구에 종사하다가 1738년 귀국, 《자연의 체계》, 《식물의 종(種)》을 저술하고, 약 4,000종의 동물, 5,000종의 식물을 다루었다. 속명 다음에 종명 형용사를 붙여서 두 말로 된 학명을 만드는 이명법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변종에 대한 개념도 제시했다. 투르느폴 밑에서 일하던 바이언의 저작에서, 수술의 중요성을 알고, 수술의 수로 강을 나누고 암술의 수로 목을 나누는 암수술 체계를 만들었다. 《자연 분류법 단편》을 초하여 식물 분류에 통일성 있는 원리를 만들려 했으나 미완으로 끝났다. 이것은 베르나르 드 쥐시외와 그의 조카인 앙투안에 의해 계승되어 완성되었다.
생애.
가족 관계.
칼 폰 린네는 1707년 5월 23일에 스웨덴의 스텐브로훌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닐스 린네우스와 크리스티나 브로델소니아 사이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혈통에서 처음으로 정립된 성씨를 사용한 사람이었다. 닐스 린네우스가 스웨덴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인 룬드 대학교에 입학하던 청년 시절, 그에게는 하나의 성이 필요했고, 닐스 린네우스는 자신의 스웨덴 농가에서 자라나던 라임 나무의 라틴어인 Linnaeus을 성으로 삼았다. 이후 린네가 태어났을 때, 그의 이름은 아버지의 성을 써서 칼 린네우스라고 지어졌다. 린네의 이 라틴어 이름 Linnaeus는 ae 합자로 쓰였는데, 인쇄물이나 손 글씨로도 항상 자신의 이름을 ae 합자로 서명했다.
린네의 아버지 닐스 린네우스는 아마추어 식물학자였고, 루터교의 성직자였으며 마을의 부목사였다. 린네의 어머니 크리스티나 브로델소니아는 스텐브로훌트의 교구 목사 사무엘 브로델소니우스의 딸이었는데, 그녀는 이후 세 명의 딸과 아들 한 명을 더 낳았다. 아들은 사무엘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스텐브로훌트의 교구 목사가 되었다. 그는 양봉에 대한 저서 또한 썼다. 칼 린네가 태어난 다음 해에는 그의 할아버지인 사무엘 브로델소니우스가 죽고, 그의 아버지 닐스 린네우스가 그곳의 교구목사가 되었다.
유년 시절.
칼 린네는 어릴 때부터 식물, 특히 꽃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였다. 닐스 린네우스는 자신의 아들인 린네와 함께 정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꽃을 좋아하는 자신의 아들에게 꽃을 자주 보여주며 꽃들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덕분에 린네는 식물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키울 수 있게 되었다.
칼 린네의 아버지는 린네가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라틴어, 종교, 지질학 등을 가르쳤다. 칼 린네가 7살이었을 때, 닐스 린네우스는 선생 한 명을 고용하기로 결정했다. 칼 린네의 부모는 그 지역의 자작농의 아들이었던 요한 텔란더에게 린네의 교육을 맡기기로 했다. 안타깝게도 칼 린네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훗날 린네의 자서전에는 요한 텔란더가 ‘아이의 재능을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사라지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요한 텔란더는 린네를 2년 정도 가르쳤는데, 이후 그는 벡셰에 있는 초급 그래머 스쿨(Lower Grammer School) (1717)에 보내졌다. 당시 린네는 공부보다는 식물에 더 큰 관심이 있었기에,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이라기보다는 주로 시골로 식물을 보러 다니는 학생으로서의 생활을 했다. 15세에 최고학년이 된 린네는 교장 선생님이었던 다니엘 란네루스에게 지도받았다. 식물학에 관심이 있었던 교장 다니엘 란네루스는 린네의 식물학에 대한 관심을 알아차리고 린네에게 그의 정원을 관리하게 했다. 또, 그는 린네에게 스몰란드의 주 의사이자 벡셰 김나지움에서 선생님을 하는 요한 로스만을 소개해주었다. 칼 린네의 식물학에 대한 관심은 식물학자였던 요한 로스만에 의해 크게 키워졌다. 그중에서도 특히 유성 생식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또 린네가 약학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1724년에 벡셰 김나지움에 입학한 린네는 그리스어, 히브리어, 신학, 그리고 수학을 본격적으로 배워나갔다. 이 커리큘럼은 성직자가 되기 위해 준비하고자 하는 아이들을 위해 체계화 된 것이었다. 김나지움에서의 마지막 해에, 칼 린네의 아버지 닐스 린네우스는 그의 아들이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지를 살피고, 선생님들을 만나기 위해 학교를 방문했다. 당황스럽게도 닐스 린네우스는 대부분의 선생님들에게서 칼 린네가 절대 장학생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요한 로스만은 다른 선생들과는 생각이 달랐다. 칼 린네에게 약학에 큰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 요한 로스만은 닐스 린네우스에게 린네를 로스만의 가족과 함께 살게 하면서 생리학과 식물학을 배우게 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닐스 린네우스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대학.
룬드 대학교.
요한 로스만은 린네에게 식물학이 진지한 학문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줬다. 먼저 그는 린네에게 투르네포르의 시스템에 의해 식물을 분류하는 법을 가르쳤고, 이후에는 린네가 세바스챤 바일란트로부터 식물의 성(性)에 대해 배웠다. 1727년에 21세의 청년이 된 칼 린네는 스코네에 있는 룬드 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대학에 입학할 때, 자신의 이름을 라틴어 버전인 "Carolus Linnaeus"로 등록하였고, 이 이름은 훗날 린네의 저서의 라틴어 출판본에 쓰이기도 했다.
대학에서 만난 교수 킬리안 스토바에우스는 자연 과학자이자 의사이고, 역사학자였던 그는 린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린네에게 교습과 숙박을 제공했고, 식물학에 대한 많은 책이 있는 그의 도서관을 사용하는 것 또한 허락해 주었다. 또 그는 린네에게 강의의 무료입장권도 주었는데, 이러한 많은 도움 아래에서 대학 생활을 한 칼 린네는 같은 취미를 가진 학생들과 함께 스코네의 식물군에 대한 탐구를 계속해 나갔다.
웁살라 대학교.
1728년 8월, 린네는 그가 약학과 식물학을 모두 공부하는 것을 제안했던 요한 로스만의 조언에 따라 웁살라 대학교에 진학했다. 웁살라 대학에는 식물원이 있었는데, 린네는 곧 거기에 매료되었다. 웁살라 대학의 식물학, 동물학, 약리학과 해부학 강의는 그리 좋은 수준이 아니었지만, 린네는 그곳에서 올로프 셀시우스라는 새로운 후원자를 만나게 된다. 올로프 셀시우스는 신학 교수이자 아마추어 식물학자였다. 그는 린네를 그의 집에 받아들여주었고, 덕분에 린네는 당시 스웨덴에서 제일가는 식물학 도서관이었던 올로프 셀시우스의 도서관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729년에 칼 린네는 "Praeludia Sponsaliorum Plantarum"이라는 식물의 성(性)에 대한 논문을 썼다. 이 논문은 교수 루드베크의 관심을 끌었고, 그는 2학년 밖에 안 된 칼 린네에게 대학의 강의를 맡겼다. 칼 린네의 강의는 인기가 있어 300여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곤 했다. 같은 해 6월에 린네는 루드베크의 24명의 아이들 중 3명의 교사를 맡기 위해 올로프 셀시우스의 집에서 루드베크의 집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올로프 셀시우스와 린네의 우정은 변하지 않았고, 서로의 식물학적 탐구를 계속해서 지지했다. 그 해 겨울, 투르네포르의 분류 시스템을 의심하기 시작한 린네는, 자신의 새로운 분류 체계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수술과 암술의 숫자를 기준으로 식물들을 분류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꽃의 해부학을 담은 "Adonis Uplandicus"라는 식물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다.
1731년 3월, 루드베크의 전 조수인 닐스 로젠이 약학 학위를 가지고 대학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는 해부학 강의를 하기 시작했고 린네의 식물학 강의를 빼앗으려 했지만, 루드베크가 이를 막았다. 같은 해 크리스마스에 린네는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와 그의 부모님과 만났다. 린네의 어머니는 그가 성직자가 되지 않은 것에 대해 비난했지만, 그가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를 격려했다.
초기 원정.
라플란드.
린네는 부모님의 집을 방문했을 때, 라플란드로 여행하려는 자신의 계획을 말씀드렸다. 린네보다 앞서 루드베크가 1695년에 같은 여행을 했었는데, 그 당시 탐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불에 타 없어져버린 상태였다. 린네는 여행을 통해 새로운 식물, 동물, 그리고 가능하다면 값비싼 광물을 찾기를 원했다. 또한 그는 원주민인 사미인의 관습에 대해 궁금해 했다. 사미인은 스칸디나비아의 넓은 툰드라를 방황하는 순록을 목축하는 유목민들이다. 1732년 4월, 린네는 웁살라의 왕립 과학회에서 그의 여행을 승인받았다.
린네는 5월에 여행을 시작했다. 그는 그의 저널을 가지고 걷거나 말을 타고 이동했는데, 가끔씩 그는 길에서 꽃이나 돌을 관찰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이끼와 지의류에 큰 관심을 보였다. 지의류는 라플란드에 서식하는 순록의 주요 식단이다. 린네는 보트니아 만의 해안을 시계방향으로 여행하며 우메오, 룰레오, 토르니오에서 주요한 내륙 관찰을 했다. 그는 10월에 2000 km 정도 되었던 원정에서 돌아왔다. 그는 많은 식물, 조류와 돌 등을 모으고 관찰했다. 라플란드는 비교적 제한적인 종을 가진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린네는 그 곳에서 약 100여 종의 알려지지 않은 식물을 발견했다. 이것은 그의 책 《라포니카 식물상》("Flora Lapponica")의 기초가 되었다. 식물학계에서는 그의 저서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린네가 포유류의 분류에 대해 통찰력을 얻은 것도 이 여행 도중이었다. 여행 중 길에 서 있던 말의 아래 턱 뼈를 살피던 중 린네는 “내가 모든 동물이 치아의 종류와 개수, 유두의 개수와 위치를 알면 나는 아마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네 발 짐승의 분류를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달라나.
1733년에는 웁살라 대학에서 광물학 강의를 했다. 1734년, 린네는 몇 명의 학생들과 함께 광산지역인 달라나 원정을 갔다. 이 원정은 달라나 정부에 의해 후원받았고, 기존의 자연물을 분류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로로스의 노르웨이 광산업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
유럽에서의 린네.
박사학위.
린네가 웁살라에 돌아갔을 때, 그와 닐스 로젠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그로 인해 그는 팔룬에서 자신의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자는 클래스 쇼흘버그이라는 학생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광산 검열관이었던 쇼흘버그의 아버지는 린네가 팔룬 근처의 광산을 방문할 수 있게 해주었다. 클래스 쇼흘버그의 아버지는 린네에게 쇼흘버그를 네덜란드로 데려가 그를 가르칠 것을 제안했다. 당시 네덜란드는 자연사를 공부하기에 제일 좋은 장소 중 하나였으며 스웨덴 인들이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주로 가는 곳이었다. 린네는 평소에 이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쇼흘버그 아버지의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1735년 4월, 린네와 쇼흘버그는 네덜란드를 향해 출발했다. 린네는 하르더르웨이크 대학교에서 약학 박사 과정을 밟기로 되어 있었다. 네덜란드로 가던 길에 그들은 함부르크에 들러 시장을 만났는데, 시장은 그들에게 머리가 7개인 히드라의 유해의 박제를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린네는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 박제에는 족제비의 발톱이 달린 발, 그리고 뱀의 피부가 붙어있었다. 린네는 자신의 관찰 결과를 공표했고, 그 히드라를 비싼 가격으로 팔려던 시장의 계획은 망쳐졌다. 이 때문에 시장의 분노를 살 위기에 놓인 린네와 쇼흘버그는 함부르크를 재빨리 떠나야만 했다.
린네가 하르더르웨이크에 도착했을 때, 그는 바로 학위를 따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 하르더르웨이크는 1주만에도 ‘인스턴트' 학위를 주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제일 먼저 그는 스웨덴어로 작성한 말라리아의 원인에 대한 논문을 제출했고, 대중 토론에서 자신의 논문 내용에 오류가 없음을 보였다. 다음 단계는 구두 심사를 받고 환자를 진찰하는 것이었다. 2주도 되지 않아 린네는 학위를 받았고, 28세의 나이에 의사가 되었다. 같은 해 여름에 린네는 웁살라에서 사귄 친구인 피터 아테디를 만났는데, 웁살라를 떠나기 전 그들은 한 명이 먼저 죽는다면 다른 한 명이 죽은 사람의 일을 끝내야 한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10주 후에 아테디는 암스테르담의 운하 중 하나에서 익사했고, 어류의 분류에 대한 그의 미완성 원고는 린네에게 남겨졌다.
동료들.
린네는 헤르만 부르하베라는 네덜란드에서 가장 저명한 물리의사이자 식물학자를 만나게 되었다. 부르하베는 린네에게 남아프리카와 아메리카로 여행할 기회를 주었지만 린네는 자신이 그곳의 더위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후 부르하베는 린네에게 그가 요하네스 버만이라는 식물학자를 만나야 할 것을 제안했는데, 린네를 만나고 그의 지식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버만은 겨울 동안 린네와 함께 지내며 서로의 연구를 도왔다.
요하네스 버만과 함께 지내던 동안, 린네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이사이자 하테캠프에 있는 큰 식물 정원의 주인인 조지 클리포드 3세를 만났다. 클리포드는 린네의 식물 분류 능력에 크게 감명을 받았고, 그를 자신의 의사이자 정원의 관리자로 초청했다. 린네는 버만과 겨울 동안 함께 있기로 했기 때문에 이 제안을 바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클리포드는 버만에게 한스 슬론 경의 《Natural History of Jamaica》라는 귀한 책을 주면서 린네를 보내줄 것을 설득했고, 결국 요하네스 버만은 린네가 조지 클리포드에게 가는 것을 받아들였다. 1735년 9월 24일, 린네는 하테캠프의 식물 관리자이자 주치의가 되었고, 그가 원하는 어떤 책이나 식물도 살 수 있게 되었다.
1736년 7월, 린네는 조지 클리포드의 자금으로 영국으로 여행을 갔다. 그는 첼시 피직 가든과 그 관리자인 필립 밀러를 보기 위해 런던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린네는 밀러에게 《Systema Naturae》에 있는 자신의 새로운 식물 세부분류법을 가르쳤다. 필립 밀러는 이에 큰 감명을 받았고, 그 때부터 린네의 시스템에 따라서 자신의 정원을 정립하기 시작했다. 린네는 식물학자인 요한 제이콥 딜레니우스를 만나기 위해 옥스퍼드 대학에도 갔다. 하지만 린네는 딜레니우스에게 자신의 시스템을 공용으로써 받아들이게 하는데 실패했다. 영국 여행을 끝마친 린네는 많은 희귀 식물종들을 가지고 하테캠프로 돌아왔다. 다음 해, 그는 《Genara Plantarum》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935 속의 식물을 묘사했고, 얼마 되지 않아 《Corollarium Generum Plantarum》이라는 책으로 60가지 추가 속을 보충했다.
린네가 하테캠프에서 이룬 업적은 그곳의 식물들의 분류를 담은 새로운 책인 《Hortus Cliffortianus》를 출판하도록 했다. 그는 이 책을 9개월 만인 1737년 7월에 완성했지만, 1738년까지 출판되지는 않았다. 이 책은 낭상엽 식물의 속인 네펜데스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쓴 책이다.
린네는 1737년 10월 18일까지 하테캠프에서 클리포드와 함께 있었는데, 이후에 그는 그 곳을 떠나 다시 스웨덴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병과 네덜란드 친구들의 친절은 그를 네덜란드에 몇 달 더 머물게 했지만, 1738년 5월에 그는 다시금 스웨덴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그는 1달 정도 파리에 머물렀고, 안토니 쥐시외 등의 식물학자를 만났다. 그는 돌아온 뒤 다시는 스웨덴을 떠나지 않았다.
다시 스웨덴으로.
린네가 1738년 6월 28일 스웨덴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팔룬으로 가서 사라 엘리자베스 모라에아와 약혼했다. 린네는 그의 후원자가 되어준 카를 구스타프 테신 백작과 만났는데, 백작은 해군 본부에서 린네가 의사직을 맡을 수 있도록 도왔다. 이에 그치지 않고 스톡홀름에 있는 동안 린네는 스웨덴 왕립 과학 한림원을 창설하도록 도왔고, 제비뽑기를 통해 첫 번째 대표가 되었다.
그의 경제 사정이 한 가정을 지탱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약혼녀와 결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린네의 결혼은 1739년 6월 26일에 이루어졌다. 7년 후에 사라 모라에아는 첫 아들인 칼을 낳았고, 그로부터 2년 후에 엘리자베스 크리스티나라는 딸을, 그 다음 해에는 사라 마그달레나라는 딸을 낳았다. 안타깝게도 사라 마그달레나는 생후 15일 만에 죽었다. 린네는 이후 로비사, 사라 크리스티나, 요하네스와 소피아라는 네 명의 아이를 더 갖게 된다.
1741년 5월, 린네는 웁살라 대학의 약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약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책임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곧 다른 약학교수와 자리를 바꿔 식물학과 자연사, 식물학 정원을 대신 맡게 되었다. 그는 정원을 철저하게 재건하고 확장했다. 이렇게 웁살라에서 자리를 잡게 된 린네는, 같은 해 10월에 그의 아내와 9살 된 아들과 함께 웁살라에서 살게 되었다.
후기 원정.
욀란드와 고틀란드.
린네는 교수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약으로 쓸 수 있는 식물을 찾기 위해 욀란드와 고틀란드에 갔다. 먼저 욀란드로 가서 6월 21일까지 머물렀고, 이후 고틀란드에 1달 쯤 머물다가 웁살라로 돌아왔다. 이 원정을 통해 린네와 그의 학생들은 약 100여종의 기록되지 않은 식물을 찾았다. 이 원정에서 관찰된 것은 훗날 "Olandskaoch Gothlandska Resa"에 출판되었다. 라포니카 식물상과 같이, 이 책은 동물학적, 식물학적 관찰을 모두 담고 있었고, 욀란드와 고틀란드의 문화에 대한 관찰도 담고 있었다. 1745년 여름, 린네는 《Flora Suecica》와 《Fauna Suecica》라는 두 책을 더 집필했다. 《Flora Suecica》는 식물학 책이었고, 《Fauna Suecica》는 동물학에 관한 책이었다.
안데르스 셀시우스는 1742년에 그의 이름을 딴 온도 스케일을 만들었다. 초기 셀시우스의 스케일은 현대와 반대로, 끓는점을 0도로, 어는점을 100도로 설정하였다. 1745년, 린네는 이 스케일을 돌려서 지금 쓰는 표준 스케일로 만들었다.
바스터고틀랜드.
1746년 여름, 린네는 정부에 의해 스웨덴의 바스터고틀랜드로 다시 원정을 나가게 되었다. 그는 6월 12일에 웁살라를 떠나 8월 11일에 돌아왔다. 린네는 이전 원정에서 함께 했던 에릭 구스타프 리드벡이라는 학생과 함께 스웨덴에 갔다. 다음 해 그는 이 원정에서 발견한 새로운 것들을 담아 "Wastgota-Resa"라는 책을 출판했다. 린네가 여행에서 돌아오자 정부는 린네에게 최남단인 스카니아로 다시 원정을 떠날 것을 제안했지만, 그가 너무 바빴기 때문에 이 일정은 연기되었다.
1747년, 린네는 스웨덴의 왕 아돌프 프레드릭으로부터 최고 의사를 나타내는 “Archiater”라는 작위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같은 해에 그는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스카니아.
1749년 봄, 린네는 드디어 스카니아로 원정을 갔다. 그는 올로프 소더버그라는 학생과 원정을 함께 했고, 스카니아로 가는 길에 스텐브로훌트에 있는 남매들을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이 원정은 이전의 원정과 비슷했지만, 이번에는 추가로 호두나무와 스웨덴산 마가목류를 기르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를 찾아야 했다. 이 나무들은 군대에서 라이플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원정은 성공적이었고, 린네의 관찰 결과는 다음해에 출판되었다.
교육자로서의 린네.
1750년, 린네는 웁살라 대학교의 총장이 되었다. 아마 그가 웁살라에 있는 시간 동안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었을 것이다. 린네의 많은 학생들은 세계의 다양한 곳으로 원정을 다니며 식물 샘플들을 수집했다. 린네는 이 학생들 중 우수한 학생들을 그의 Apostle, 즉 사도라고 불렀다. 그의 강의는 대부분의 경우에 크게 인기가 있었고, 식물 정원에서 진행되었다. 린네는 학생들에게 자기 스스로 생각하라는 것과 다른 사람을 신봉하지 말라는 것을 많이 가르쳤다. 린네의 강의보다 더 인기가 있는 것은 여름 매주 토요일 이루어지는 식물학 교외활동이었다. 린네와 그의 학생들은 식물과 동물을 웁살라 근교에서 관찰했다.
제자들.
린네가 웁살라 대학교의 교수이자 총장으로 있었을 당시, 그를 따르던 수많은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는 그들 중 특별한 17명을 뽑아 "Apostles"라고 칭했다. 그들은 가장 유망하고 열성적인 학생들이었는데, 그들 모두는 린네의 도움을 받아 세계 곳곳으로 식물학 탐사를 다녔다. 그는 자신의 총장으로서의 영향력을 사용하여 제자들의 원정에 장학금과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제자들에게 그는 여정에서 무엇을 찾아보아야 할지 설명을 제시했다. 제자들은 린네의 분류체계에 따라 새로운 식물, 동물 그리고 광물들을, 곳곳에서 모으고 정리했다. 원정이 끝나면 그들은 수집물들을 린네에게 제공하였다. 린네가 전 세계를 돌아다닌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학생들의 원정 덕분에 범세계적인 린네의 분류법을 만들 수가 있었다. 영국인 식물학자 윌리엄 스턴은, 제자들의 공로가 없었다면 린네의 새로운 분류 체계가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많은 제자들은 원정을 하는 과정 중에 생을 마감했다.
첫 번째 제자 크리스토퍼 탄스트롬은 아내와 자식들을 둔 43세의 사제로서 1746년에 그의 원정을 시작했다. 탄스트롬은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같은 해에 열대 지방의 풍토병에 걸려 콘손 섬에서 사망하였다. 탄스트롬의 부인은 린네에게 자신의 남편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에 대해 강하게 항의했는데, 이는 훗날 린네로 하여금 젊고, 미혼인 제자들을 식물학 원정에 보내기를 선호하게 했다. 훗날 피터 포스칼와 페르 로플링을 포함하여 6명의 제자가 추가로 원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탄스트롬이 원정을 다녀오고 2년이 지난 뒤, 핀란드 출신의 페르 캄이 두 번째로 북미에 원정을 가게 되었다. 그는 북미에서 2년 6개월을 지내면서 그곳의 식물과 동물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나갔다. 린네는 캄이 많은 꽃과 씨앗들을 가지고 돌아와 아주 기뻐했다. "Species Plantarum"에 소개되어 있는 700여종 중 90종은 캄이 원정에서 가져온 것이다.
다니엘 솔란더와 요셉 뱅크스는 제임스 쿡과 함께 호주 원정을 떠났다. 다니엘 솔란더는 자신이 웁살라의 학생으로 있었을 때 린네의 집에서 살았었다. 린네는 그에게 자신의 장녀와의 결혼을 약속할 만큼 그에게 애정이 있었다. 또 린네의 추천으로 솔란더는 1760년에 영국으로 원정을 떠났는데, 그곳에서 그는 영국인 식물학자 요셉 뱅크스를 만났다. 이후 뱅크스와 솔란더는 제임스 쿡의 원정에 합류하여 1768-71년에 오세아니아에 다녀왔다. 솔란더 이외에도 제임스 쿡과 함께 원정을 다녀온 제자는 이후에도 더 있었다.
아마도 가장 유명하고 성공적이었던 제자는 1770년부터 9년간의 원정을 다녀온 카를 피터 툰베리일 것이다. 그는 남아프리카에서 3년간 지낸 뒤,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내의 모든 외국인들은 데지마 섬에서 지내야만 했는데, 이 때문에 툰베리는 식물군에 대한 연구를 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통역가들을 설득함으로써 다양한 식물들을 구할 수 있었고 그 자신도 델리마의 정원에서 식물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린네가 죽은 다음 해인 1779년에 스웨덴으로 돌아갔다.
일생의 마지막 무렵.
린네는 웁살라가 너무 시끄러우며 건강에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느껴, 1738년에 두 농장을 샀다. 그 농장의 이름은 함마르비와 사브자이다. 다음 해인 1739년, 그는 옆에 있는 에데비 농장도 샀다. 그는 함마르비에서 가족과 여름을 보냈다. 처음 그곳에는 작은 1층집 밖에 없었지만, 몇 년 뒤인 1762년에는 새롭고 큰 집을 추가하였다. 함마르비에서 린네는 식물을 키울 수 있는 정원을 만들었다. 또 1766년에 그는 함마르비 뒤에 있는 언덕에 박물관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그 곳으로 그의 도서관과 식물 컬렉션을 옮겼다. 이는 웁살라의 3분의 1 정도를 파괴하고 그의 주택을 위협한 불 때문이었다.
1735년 《Systema Naturae》가 처음 출간된 후 이 책은 몇 번이나 확장되고 재판되어, 10판이 1758년에 나왔다. 이 판은 동물학적 명명법의 시발점이 되었다.
1757년, 스웨덴의 왕 아돌프 프레드릭은 린네를 귀족으로 인정했고, 1761년에 작위를 받았다. 작위를 받으며 그는 칼 폰 린네(Carl von Linne)라는 이름을 받았는데, 린네는 Linnaeus를 줄이고 프랑스화한 것이다. 독일 타이틀 von은 그의 작위를 상징한다.
작위를 받은 후에도 린네는 가르치는 일과 집필을 계속했다. 그의 명성은 전 세계에 퍼졌고,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캐서린 2세는 그녀의 나라인 러시아에서 얻을 수 있는 씨앗을 보내주었다. 그는 지오바니 안토니오 스코폴리와도 교류했다. 그는 의사이자 식물학자였다. 스코폴리는 그의 모든 연구, 발견과 해석을 서로 나누었다. 린네는 그를 매우 존중했고, 그의 업적에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린네와 스코폴리는 너무 멀리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린네는 1763년에 스웨덴 왕립 과학 한림원에 대한 의무를 벗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전과 같이 10년 이상을 그 곳에서 일했다. 이후 린네는 건강상의 이유로 웁살라 대학에서 1772년 12월에 사퇴했다.
린네는 그의 말년에 건강상의 문제에 시달렸다. 그가 1764년에 걸린 심각한 병은 로젠의 치료 덕분에 이겨 낼 수 있었다. 1773년에는 좌골 신경통을 앓았고, 그 다음해에는 발작을 일으킨 후에 몸이 부분적으로 마비되었다. 그는 1776년 두 번째 발작을 일으켰고, 오른쪽 몸을 쓰지 못하게 되었으며, 기억을 잃었다. 그는 자신의 글에 감탄했지만, 그 글이 자신이 쓴 글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1777년 12월에, 그는 다시 발작을 일으켰고, 몸이 매우 약해졌다. 결국 1778년 1월 10일에 그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린네는 함마르비에 묻히기를 원했지만, 1월 22일 웁살라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의 도서관과 수집품은 그의 아내 사라와 아이들에게 남겨졌다. 조셉 뱅크스라는 영국인 식물학자는 그의 수집품을 사고자 했지만, 린네의 아들 칼이 거절하고 수집품을 웁살라로 옮겼다. 하지만, 1783년 칼이 죽고 사라가 수집품을 물려받았다. 그녀는 그것을 조셉 뱅크스에게 팔고자 했지만, 그 때는 이미 뱅크스가 그것들에 흥미를 잃은 이후였다. 대신 그의 지인이 수집품을 사기로 했다. 그는 24세의 의학과 학생인 제임스 에드워드 스미스로, 모든 수집품을 구입했다. 수집품은 총 14000여개의 식물, 3198개의 곤충, 1564개의 갑각류, 3000개의 편지와 1600권의 책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5년 후, 스미스는 영국 린네 협회(Linnean Society of London)를 창설했다.
폰 린네라는 이름은 그의 아들 칼이 결혼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세대에서 사라졌다. 다른 아들인 요하네스는 3살에 죽었다. 린네의 딸 중 2명은 현재 200명 이상의 린네의 후손을 남겼다.
분류학.
린네 이전의 분류.
고대의 분류학.
생명의 분류라는 제도는 그리스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생각에서 유래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하는 모든 물질, 또는 생겨난 물질을 형이상학적 방법으로써 첫 번째로 분류하여 발표한 사람이다. 분류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은 물질, 종, 속과 같이 현재까지도 사용되는 단어를 제공하였다는 점과, 그의 제도가 린네에 의해 개조되어 보다 일반적인 모습으로 계속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후에 린네가 식물에 대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동물들의 생식 방법에에 대한 관찰 등을 포함하여 동물들과 그 분류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에 대한 분류는 현대에 와서 주로 쓸모없는 추가적 정보로 취급되거나, 잊혀지게 되었다.
철학적인 관점에서의 분류는 이렇게 말한다. 첫 번째, 제일실체는 철수, 영희와 같은 존재처럼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제이실체는 '사람인 철수와 영희'와 같이 제일실체의 일부분에 대한 서술로, 그에 대한 성질이나 특성 같은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 피터인 것은 아니지만, 그는 사람에 속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이실체라 말할 수 있는 특성은 한낱 개별적인 것이 아니다.
종이란 각각의 생명체에 대한 가장 참된 제이실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은 동물이지만 모든 동물이 인간인 것은 아니다. 또한 속이 종을 포함한다는 것은 자명한 관계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종을 포함하는 무한히 많은 개수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속이 발견될 것이라 예상하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린네의 분류체계처럼 종을 문이나 강 등의 더 상위 구조에 포함시키지는 않았다.
제이실체는 같은 속 안에서 특정한 차이점(종차)을 이용하여 하나의 종을 다른 종 과 구분 짓는다. 따라서 사람은 여러 일반적인 항목에서 나타나는 종차들의 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종차의 합을 통해 종을 정의 내릴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사람은 살아 있고, 감각이 있고, 이성적인 실체이다. 여기서 가장 특징적인 정의는 '사람은 이성적인 동물이다'와 같이 종과 그에 따르는 가장 일반적인 속을 포함하고 있다.그러나 종은 같아도 하나의 개체는 서로 다른 점을 많이 가지고 있을 수 있기에, 이러한 종의 정의는 통일성의 문제를 안고 있다.
서로 다른 여러 속의 집합을 보았을 때, 가장 윗부분은 하나의 실체와, 반드시 실체 안에 존재해야 하는 일반적인 비본질적 성질 아홉 개를 포함한 열 개의 범주로 나뉘어 진다. 실체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지만, 양이나 질과 같은 비본질적 성질은 반드시 실체 안에만 존재한다. 고대의 분류에서는 속보다 상위 범주인 'being'은 그에 따르는 문제로 인해 존재하지 않았다. 만일 사람이 이성적인 동물이라면 이성이라는 것은 동물의 특성이 아니라는 것고 마찬가지로 종차란 그 종이 포함되어 있는 속에서는 존재할 수 있는 특성이 아니라는 점에서 발생된 문제는 중세시대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해결하기 이전까지는 그 누구도 속의 상위단계에 대해 고려할 수 없었다. 상위단계 'being'에 대해 고려하게 되면 그 안에 속해 있는 실체가 being의 일부가 될 수 없게 되는 모순이 발생하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being'의 문제점은 스콜라철학자들에서부터 중세시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시한 해답은, 존재론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함으로써 존재의 유사성에 대해 말한 것이다. 존재론은 공공적으로 더 나은 부분을 받아들였고, 철학과 실험과학에 선을 그었으며, 그 휴 실험과학은 실용적인 기술의 르네상스에 도달하였다. 고전 학자였던 린네는 다시 이 두 분야의 구분선을 접합하여 계몽주의 시대를 도입하였다.
르네상스의 분류학.
스위스의 교수인 콘라드 폰 제스너는 당시까지 알려졌던 분류들을 편찬함으로써 중요한 진전을 이끌어내었다. 그 후 유럽인들의 신대륙 발견은 새로운 식물과 동물이 발견됨에 따라 분류하고 조사해야 할 생물의 증가를 이끌어내었다. 기존의 분류 체제는 가끔 같은 식물과 동물 채집품을 보고서도 서로 다른 명명을 하게 될 정도로 새로 발견된 종들을 연구하고 분류하는 것이 어려웠으며, 분류된 것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분류의 결과를 찾기 쉽고, 여러 종을 함께 묶어 분류할 수 있는 새로운 분류 체제가 필요하게 되었다.
형태학을 기초로 하여 비슷한 외모를 가진 생물체들을 하나의 범주로 묶는 이명법이 개발되었고,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 사이에는 동물에 대한 조심스러운 연구가 개시되었다. 또한 다양한 해부학적 지식이 발견되오 파브리시어스(Fabricius,1537–1619), 페트러스 세브리너스(Petrus Severinus, 1580–1656),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 그리고 에드워드 타이손(Edward Tyson, 1649–1708)와 같은 해부의학자들은 이러한 지식을 이용해 살아있는 존재들에 대해 연구하고 자료를 모아 분류함으로써 분류학에 있어 많은 진전을 일으켰다. 또한 마셀로 말피기 (Marcello Malpighi, 1628–1694), 얀 스웨머담(Jan Swammerdam, 1637–1680), 그리고 로버트 후크(Robert Hooke, 1635–1702), 로드 몬보도(Lord Monboddo, 1714–1799)와 같은 곤충학자들과 최초의 미생물학자들 역시 분류에 대한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들의 작업은 종간 관계를 진화의 이론과 연관지어 생각한 초기의 시도였다.
계통학자들.
계통학이란 생물 간의 유연관계를 조사하여 계통적인 체계에 따라 생물을 분류하는 학문이다. 계통학자라는 이름은 칼 린네가 그의 저서 《Bibliotheca Botanica》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로, 생물의 수집과 관찰뿐만이 아닌, 그것들을 분류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뜻한다. 대표적인 계통학자들에는 이탈리아의 철학자, 의사이자 식물학자인 안드레아 캐살피노, 영국의 자연학자 존 레이, 독일의 의사이자 식물학자인 아우구스투스 퀴리너스 리비너스, 프랑스의 의사, 식물학자이자 여행가인 조세프 피톤 드 투르네포트가 있다.
안드레아 캐살피노는 그의 저서 《De plantis libri XVI》에서 식물의 첫 계통학적 분류를 제시했다. 그는 식물의 줄기와 과실의 구조에 따라 식물을 15가지의 “높은 속”으로 분류했다.
존 레이는 식물, 동물, 자연 신학에 대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영국의 자연학자였다. 그는 그의 저서 《Historia Plantarum》에서 현대 분류학을 향한 큰 발걸음을 내딛었다. 레이는 2분법적인 과거의 분류 시스템을 버리고 관찰에 의해 발견된 식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바탕으로 식물을 분류했다. 캐살피노와 레이는 분류학적인 위치를 나타내지 않는 기존의 식물명을 그대로 사용했다. (사과와 복숭아는 존 레이의 분류에서 서로 다른 속에 속했지만, 이름은 "Malus"와 "Malus Persica"로 그들의 분류학적인 차이를 나타내지 못했다.) 리비너스와 피톤 드 투르네포트는 이에 한 발 더 나가 속을 분류학적 계층에서 특징적인 계층으로 만들어 식물의 속에 따라 이름을 정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아우구스투스 퀴리너스 리비너스는 식물의 꽃에 따라 식물을 분류하며 목이라는 항목을 만들었다. (존 레이와 안드레아 캐살피노의 “높은” 속에 해당) 그는 처음으로 풀과 나무로 식물을 나누는 이전의 방법을 버리고 식물의 과실을 이용해 식물을 분리하고자 했다. 그의 명명법은 조세프 피톤 드 투르네포트의 그것과 비슷했다. 같은 속에 있는 식물의 이름은 같은 단어로 시작하고(속명), 한 가지 이상의 종이 속해있는 속에서 첫 번째 종은 속명만으로 명명되었고, 그 이후의 종들은 종을 구분할 수 있도록 속명 뒤에 추가 단어를 붙여 명명했다. (예시 : 벼의 학명 "Oryza sativa" Linne)
조세프 피톤 드 투르네포트는 강, 아속, 속, 종으로 이루어진 더욱 복잡한 체계를 사용했다. 그는 처음으로 속명과 추가적인 단어들로 이루어진 종명을 일관성 있게 사용했다. 리비너스와 그의 다른 점은 두 가지 이상의 종이 속해있는 속에서 첫 번째 종만이 아닌 모든 종에 추가적인 단어를 붙여 그들을 명명했다는 것이다.
린네 분류학.
18세기는 자연학에 대한 지식이 팽창하던 시대로 많은 새로운 분야의 과학이 만들어지던 시대였는데, 린네 역시 ‘linnaean taxonomy’라 불리는 새로운 범위의 학문을 만들어내게 되었고, 이는 생물학에서 널리 사용되는 과학적 분류에 대한 학문이다. 린네 이전에도 동식물 분류를 시도한 학자들은 많았지만, 린네는 이전의 연구들을 뛰어넘는 본인과 제자들이 수집한 방대한 양의 수집 자료로써 당시에 알려져 있던 대부분의 동식물을 분류체계에 포함시켰다. 이는 당시 식물학자들에게 유용한 검색표를 제공했고, 분류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 잡는 데 기여했다.
린네는 이전의 분류 체계를 더 세분화 시켜 동물계, 식물계, 광물계의 세 가지 계와 그에 속한 강, 목, 속, 종, 변종 등의 계급을 새로 도입했다. 린네의 방식은 자연을 3개의 계로 나누는 것으로 시작하여 서로 포함관계를 갖는 집단들로써 구분하는 것이었다. 각각의 계는 서로 다른 강으로, 강은 목으로, 목은 속으로, 속은 종으로 분리되었으며, 린네는 가끔 종에서 더 낮은 단위로의 분류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대 분류학에서 이는 식물학에서의 품종, 또는 동물학에서의 아종을 의미한다. 현대 분류학에는 린네의 원래 시스템에는 존재하지 않던 ‘과’라는 등급이 목과 속 사이에 새로이 추가되어 있다.
동물계
린네는 분류에 필요한 조직적인 범주를 설정해 약 4000종의 동물을 분류하고 명명했다. 동물계에는 다음과 같은 6가지의 강이 속해 있다.
식물계
린네는 최초로 생식 기관을 식물의 분류 기준으로 사용했다. 식물은 꽃의 암술과 수술의 개수와 배치에 따라 24개의 강으로 분류되었다. 각각은 다음과 같다.
광물계
현대 분류학에서 광물은 생물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지만, 린네는 광물도 하나의 계로 보고 분류했다.
린네의 가장 큰 분류학적 업적은 현대까지 이어져오는 명명법인 이명법을 확립시켰다는 것이다. 린네 이전의 계통학자들 중에서도 속명과 종명을 이용해 종을 명명한 사람이 있었지만, 린네는 최초로 저작에서 일관되게 이명법을 사용함으로써 이를 공식화했다. 이명법이란 라틴어로 속명과 종명을 조합하여 나타내는 명명 방식으로, 속명은 고유 명사, 종명은 보통 명사 또는 형용사를 쓴다. 그 뒤에 명명자의 이름을 붙이고 필요시에 학명이 창시된 연도를 명시하는 경우도 있다. 속명과 종명은 이탤릭체로 기울여 쓰고, 저자의 이름과 연도는 정자로 쓰는 것이 원칙이다.
린네는 본인의 분류 체계를 스스로 인위적인 것이라고 표현했다. 생물간의 모든 공통점과 차이점을 고려한 것이 아닌, 인위적으로 설정한 기준에 의한 분류이기 때문이다. 린네의 생물 집단 조직은 간단한 차이점들 또는 공통된 물리적 특성들에 대한 관찰을 기반으로 하여 진행되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생겨난 여러 등급과 집단 중 동물의 상위 단계의 분류집단은 여전히 사용되지만, 몇몇 집단은 그 집단을 정의하고 기반하는 이론과 원칙에 따라 크게는 그 개념 자체의 변경이 있기도 했다. 실제로 식물의 생식기관에 의한 분류는 많은 오류를 낳았고, 이후 크게 수정되었다. 하지만 린네의 분류는 생물들을 지정된 범주 안에 넣기에 쉽고 유용한 체계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린네 분류학이 현대 분류학의 초석이 되었다는 것 또한 자명한 일이다. 비록 린네가 관찰한 특성들 중 많은 것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새로운 지식 또는 DNA sequencing과 같은 새로운 실험 방법의 등장과 함께 변화되고 대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분류학에서 린네가 사용한 기본적인 이론적 원리가 여저히 남아있는 것은 그가 관찰된 특성을 기반으로 분류학의 계층구조에 대한 아이디어를 확립하였으며 자연의 연관성을 그 아이디어에 반영하였다는 점 때문이다.
인류에 대한 시각.
독일의 생물학자인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에 의하면 인류의 기원에 대한 질문을 던진 사람은 린네라고 한다. 린네는 사람을 분류학의 범주에 넣은 최초의 사람으로써, 인류의 역사를 다른 식물이나 동물과 같이 묘사함으로써 미래의 자연학 연구에 도움을 주었다.
린네는 사람이 생물학적으로 동물의 일부에 속한다고 믿었으며, 그의 분류 체제에서 사람을 동물에 포함시켰다.
안드로포모르파(Anthropomorpha).
《Systema Naturae》 (1748) 6판에 보면 린네는 안드로포모르파를 호모("homo")와 시미아("simia")의 두 가지로 나누어 묘사하고 있다. 린네는 사람을 《Systema Naturae》의 초판에서부터 영장류로 구분하고 있다. 하테캠프(Hartekamp)에서 머무르는 동안 그는 몇몇 원숭이들을 관찰할 기회를 가지게 되어 사람과 그들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기록할 수 있었는데, 그를 통해 그는 두 종이 말하는 기관을 제외한 다른 부분에서는 기본적인 해부학적 특징을 동일하게 갖는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다른 차이점을 찾을 수 없었기에 그는 사람과 원숭이 모두를 사람과 유사하다는 의미를 가진 안드로포모르파라는 같은 범주 안에 들어있도록 배치하였다.
이러한 분류는 요한 고스찰 웰러리우스(Johan Gottschalk Wallerius), 야곱 테오드르 클레인(Jacob Theodor Klein), 요한 조지 멜린(Johann Georg Gmelin) 등과 같은 생물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신학에서 제기된 비판.
신학에서 등장한 문제는 더 심각했다. 첫째로, 사람을 원숭이나 고릴라와 같은 수준에 넣는 것은 존재의 대사슬에서 영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으며, 둘째로 성경이 말하기를 사람은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만일 원숭이나 고릴라와 사람의 디자인이 크게 구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면 성경의 말씀을 따랐을 때, 원숭이와 고릴라들 역시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많은 측면에서 받아들여 질 수 없었다. 사람을 동물의 한 종류로써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과학적 이론과 종교 사이의 충돌은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 의해 창조와 진화 사이의 논쟁이 시작됨으로써 몇 세기가 지난 현재도 뜨거운 냄비 속 물과 같이 진행 중이다.
이러한 비판 이후 린네는 더욱 명확한 설명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Systema Naturae》의 10판에서는 포유류(mammalia)와 영장류(primates)라는 새로운 단어를 포함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사람을 이명법에 따라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로 명명하게 하였고 안드로포모르파를 대체하는 역할을 하였다. 새 분류법의 도입으로 린네의 이론에 대한 비판은 줄었지만, 사람이 자연에 속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 바깥에 존재한다고 생각한 많은 자연학자들은 여전히 그가 인간을 이전 위치에서 강등 분류하였다고 생각했다.
미지의 생물들.
린네는 1658년에 출간한 《Systema Naturae》에서 호모 속에 호모 트로글로다이트(homo troglodytes), 1771년의 3판에서 호모 라(homo lar)라는 새로운 종을 추가하였다. 스웨덴 역사가인 구나 브로버그(gunnar broberg)는 린네가 묘사한 새로운 인류는 사실 신대륙에서 발견된 원주민이나 정착민들로, 외부인을 위협하기 위해 발랐던 진흙 등에서 비롯된 착오라고 말한다. 《Systema Naturae》의 초반 본에는 많이 알려진 전설 속 생물들인 불사조, 용, 맨티 코어 같은 것들이 포함된 포괄적 범주인 파라독사(paradoxa)가 존재한다. 린네는 히드라와 같은 생물들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 시도했다. 용에 대하여 린네는 그것들이 도마뱀 또는 광선을 보고 창조된 것이 계속하여 전해 내려오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호모 트로글로다이트에 대하여 린네는 스웨덴의 동인도회사에 그것의 존재를 확인해달라는 의뢰를 하였으나, 그들은 결국 그 존재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호모 라의 경우 후에 긴팔원숭이(hylobates lar)로써 재분류되었다.
네 종의 인류.
《자연의 체계》 초판에서 린네는 사람의 종을 국적과 피부색에 따라 Europæus albus" (white European), "Americanus rubescens" (red American), "Asiaticus fuscus" (brown Asian) and "Africanus niger" (black African)라는 4개의 세부 종으로 세분시켰다. 10판에서 그는 고대부터 내려오는 4개의 기본적인 성질에 따라 각각의 전형적인 특성들을 더욱 자세히 구분하였으며, 사람의 피부색을 노란색으로 바꾸었다. 추가적으로 린네는 야생에 존재한다는 인간이나 몬스터 등 알려지지 않은 그룹들에 대한 분류항목인 몬스트로서스(monstrosus)를 창조하였다.
주요 저서.
《자연의 체계》.
《자연의 체계》 초판은 1735년 네덜란드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1758에 10판이 되었는데, 4400여종의 동물과 7700여종의 식물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Physalis annua ramosissima, ramis angulosis glabris, foliis dentato-serratis"와 같은 굉장히 길고 어려운 학명이 사용되었는데, 이러한 학명들이 간결한 이명법을 따른 학명으로 대체되었다. 이명법을 따른 학명은 속명(specific name)과 종명(specific name)의 병렬식으로 나열한 것이다. 이 이명법들은 종을 나타내는 하나의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
식물의 종.
《식물의 종 ("Species Plantarum, exhibentes plantas rite cognitas, ad genera relatas, cum differentiis specificis, nominibus trivialibus, synonymis selectis, locis natalibus, secundum systema sexuale digestas")》은 총 2권으로 1753년에 초판 인쇄가 되었다. 이 책은 국제적으로 현대 식물학 명명법의 시발점으로 받아들여진다. 1권은 5월 24일에 나왔고, 같은 해 8월 16일에 2권이 나왔다. 이 책은 총 2권 1200페이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7300여 가지가 넘는 종을 담고 있었다. 같은 해에는 왕이 그에게 북극성 훈장을 수여했다. 1754년에 린네는 식물계를 25개의 강으로 분류하였다.
식물의 속.
《식물의 속》은 1737년에 처음 출판되었다. 이 책은 식물의 분류법 중 속에 해당하는 부분을 기술하고 있다. 10 판의 출판은 린네 혼자 모든 것을 한 것이 아니며, 가장 중요한 것은 1754년의 5판이다.
식물 철학.
《식물 철학》(1751)은 식물 분류와 명명법에 대한 린네의 생각의 요약이었고 그가 이전에 출판했던 책들을 더 잘 갖추어 낸 책이었다. 이 책은 그가 이전에 사용하던 분류 시스템의 전체 개론을 담고 있었다. 또, 이 책에는 식물 정원을 관리하는 법과 여행에서 저널을 쓰는 것에 대한 정보도 담겨 있었다.
린네의 여파.
린네 분류학의 오류.
린네 분류학은 확실히 현대 분류학의 시발점이었지만, 이 분류 체계는 많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었다.
먼저, 린네 분류 체계에서 식물계의 Monoecia 강에 속한 Monadelphia 목은 자웅동체이면서(Monoecia) 수술이 수술대에서 합쳐지는(Monadelphia) 식물로 분류되었는데, 침엽수 등과 함께 참꽃을 가진 식물이 포함되는 오류가 있었다. 또, 뚜렷한 생식 기관이 없는 식물인 Cryptogamia 강에는 양치식물, 선태식물, 이끼류를 비롯해 해면동물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동물계의 6가지 강인 포유류, 조류, 양서류, 어류, 곤충류, 연충류 중 4가지는 분류가 확실했지만, 곤충류와 연충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7가지 분류체계를 통합한 것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보다 부정확한 것이었다. 린네는 고래를 어류로 분류해 이후 수정되기도 했다.
린네는 종이 창조되었고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생물의 외형적인 특징에만 의존해 종을 분류하였다. 따라서 린네의 분류는 종간의 계통이나 유연관계가 고려되지 않은 분류였다. 특히 식물의 생식 기관을 기준으로 한 분류에서는 정밀하지 못한 분류가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후에는 생물의 발생 과정에서 나타나는 형태를 기준에 따라 생물을 분류한 존 레이의 분류 체계를 따르게 되었다.
린네 이후의 분류학.
비록 린네가 구분하기 쉬운 분류를 했다고 하지만, 린네적 분류의 아이디어는 18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종의 기원》이 발간될 시기에 동물계와 식물계를 기반으로 하는 계통수로 바뀌게 되었다. 이래즈머스 다윈이 1796년에 《주노미아》를 출판하고, 장바티스트 라마르크의 《동물철학》이 1809년에 출간되면서 종의 변화라는 아이디어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로버트 챔버의 책에 의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다윈의 이론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분류는 '공통조상'의 존재라는 다윈의 이론을 반영하여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화석이 발견되고 연구됨에 따라 진화의 나무가 과학적인 작업을 통해 만들어졌다. 조상 생물의 화석이 발견되어 현대적인 집단으로 구성된 첫 번째 예시는 새이다. 새롭게 발견된 화석을 이용하여 토마스 헨리 헉슬리는 새가 리처드 오웬에 의해 1842년에 명명된 집단인 공룡에서 진화되어 나왔다고 말했다. 이러한 생각은 진화학적 분류를 이끌어내게 되었고, 점점 더 많은 화석이 발견됨에 따라 많은 고생물학자들이 동믈의 역사를 알려진 집단끼리 연결시켜가며 이해하기 위한 작업을 수행했다. 1940년대의 현대종합설은 주요 집단의 역사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진화학적 분류는 린네 분류학의 기본적 원리가 되었다. 1960년대에는 계통발생에 따른 명명법이 분기학적 방법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단원적 분기군과 의사단원적인 분기군, 다원적 분기군의 정의가 이루어졌고, phylocode라 불리는 계통학적 명명법이 공식적으로 정리되었다.
린네가 동물계, 식물계로 나누었던 2계 체제 역시 시간이 흐르며 다양한 과정을 거쳐 바뀌게 되었다. 아래의 표는 그 변화 과정을 나타낸다.
린네와 생태학.
생태학의 발전에서 린네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 린네는 신과 자연, 물질과 영혼에 대해 신이 자연을 개개의 유기체를 형성하고 그 사이의 관계를 조절했으며 이러한 질서와 목적은 식물, 동물과 같은 모든 자연의 기능과 모양을 뒷받침하는 '자연의 경제성'을 나타낸다는 관점을 가졌다. 이러한 관점은 신과 자연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에 입각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린네의 초기 생태학에서는 기독교, 플라톤, 스통다철학의 전통을 띠는 색을 모두 찾아볼 수 있다. 자연에 대한 린네의 철학에서 가장 눈에 띠는 부분 중 하나인 물질신학은 교회를 그 뿌리에 두고 있다. 그것은 지연학에 다양한 영감을 불어넣었다.
린네의 초기 생태학은 근본적으로 그의 종교적 관념과 관련되었다. 그의 자연철학과 물질신학에서 가장 눈에 띄는 요소는 유용한 개념과 자연의 연구에 중요한 점을 모두 제공하였다. 린네의 초기 생태학적 연구는 경험적 관찰과 자연 철학의 원칙을 바탕으로 하여 동물과 식물이 모든 자연과 상호작용하는 방법에 대한 이론을 수립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졌다.
자연의 경제성이라는 개념은 17세기에 처음 사용된 것이며 신의 창조를 통한 자연의 지배 방법임을 반영한 것이었다. 린네는 이 개념에 풍부한 의미를 부여하여 자연철학의 중요한 개념 개발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며, 물질신학을 통해 창조를 통한 신의 정의라는 생각을 조직화시켰다.린네가 주장한 '자연의 경제성' 개념은 자연이 '자가 갱신' 과 '자가 정화'라는 개념을 포함하여, 그 자연이 죽은 생물과 같은 폐기물이 과다한 경향성 속에서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갱신하며 자연적으로 순환하는 과정과 지구의 건강을 유지시키는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고 하였다. 1747년 그는 여행에서 '동물이 죽을 때 그들이 뿌리를 덮어 흡수되어 식물이 발생하고, 그것이 동물에 의해 흡수되어 다시 동물의 일부가 되는' 자연의 사이클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린네는 다른 동식물에 의한 일부 동물의 피해 역시 개별 종이 아닌 전체적인 생명에 대해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너무 빠른 번식에 의한 특정 종의 기초적인 파괴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린네의 개념과 생각 중 일부는 19세기에 세속적인 방향으로 기발되었으며, 린네의 초기 생태학에서는 현대적 생태 용어의 개념을 포함하는 전구체적 언어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현대적 생태학은 자연의 연결에 대하여 완전히 다른 이해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의 사고가 우리의 강조와 선택에 의해 쉽게 좌우됨에 반해 린네적 유추 방법은 주로 경험적 관찰에 기초하는 증거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린네의 자연철학은 주로 '추측에 근거한'. '더 이상 쓸모 없는', '환상에 입각한' 과 같은 단어로 특징지어지곤 한다. 린네는 한 명의 물질 신학자로써 그는 전통을 심화시켜 물질신학이 더 복잡하게, 환경적 요인을 수용할 수 있도록 발전하도록 하였다. 그 후 린네는 자연에서의 신의 작업이라는 관점을 유지하였으며, 환경의 영향은 단지 자연에서의 신의 존재성에 대한 더 넒은 예시이며, 창조를 위한 신성한 계획에 대한 증거라 생각하였다.
또한 린네는 유추를 이용하여 자연의 연결을 설명하였는데, 자연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모든 레벨에 대하여 상호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현대 생물학의 생태와 진화에 연결될 수 있다.
자연학과 생물학 그리고 생태학.
19세기 초반에 생물에 대한 연구를 나타내기 위한 용어인 '생물'이 라마르크오 힐레어에 의해 제안되었다. 생물은 시스템 및 종 설명에 초점이 맞추어진 자연학과 대조적으로 자연의 일반적인 법칙과 생명체의 기본 원리를 찾기를 시도하였다.에른스트 헤켈은 '생태학'라는 용어를 제안하여 '생태학을 통해 우리는 동물의 경제성과 절약성을 이해할 수 있다' 고 정의하였으며, 이는 생태학이 존재하는 모든 생물과 그 주변 환경, 생태계를 구성하는 생물들 간의 복잡한 상호 관계, 즉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접촉함으로써 만들어지는 다양한 관계를 포함함을 의미했다. 이는 '생태'라는 것이 '자연의 경제성'또는 다윈이 주장한 '존재를 위한 투쟁'과 같은 것을 의미함을 말하며, 다윈과 린네의 초기 생태학에 대한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린네와 진화 생물학.
다윈의 주장은 크게 자연선택과 상속이라는 두 가지 이론의 조합으로 요약된다. 자연선택은 더 많은 생물이 특정지역에서 생존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이 태어났을 때 발생하는 프로세스로,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연결됨을 의미하며, 모든 생물이 달라질 수 있어 이러한 변화 중 일부가 더 나은 적응의 형태로 상속된다는 것이다. 다윈에 의하면 이러한 이론 역시 진화에 필요한 조건이지만 새로운 종의 생성이 선택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선택과 진화와 관련된 모든 자연적 배경에 대한 공부가 필요했으며, 이는 다윈으로 하여금 생태학적, 자연철학적 측면에 관심갖게 하였다.
따라서 다윈은 다양한 출처를 통해 초기 생태학적 자료와 시각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새와 곤충이 자연에서 사는 방법에 대한 초기 관찰은 길버트 화이트의 책에서 영향을 받았다. 린네의 전통에서 영감을 받은 화이트는 린네의 제자이자 그 당시 유명한 동물학자인 다니엘 솔랜더, 토마스 페넌트와 함께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의 아이디어를 더욱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라이엘은 린네의 초기 생태학에 대한 아이디어와 가치를 가장 잘 파악하고 이해한 사람으로써 그의 개인적 업적에서 자연의 경제성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대로 사용하였다고 평가받았다.
다윈은 1840년대에 린네의 책을 읽으며 린네의 아이디어와 맞닥뜨리게 되었으며, 그 시기 그의 출간물과 편지에서는 '자연의 절약' 또는 '자연의 정치'와 같은 표현을 점점 더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다윈의 생각 중 다양한 생물종이 적절한 장소를 갖고 있다는 생각 역시 린네의 생각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역사학자들은 다윈이 '존재를 위한 투쟁'과 같은 그의 아이디어를 경제학자 멜서스의 '인구 압력'에 대한 이론에서부터 얻어왔다고 주장하였으나, 멜서스 이전에 이미 비슷한 아이디어가 라이엘 또는 윌리엄 패일리의 물질신학적 출간물에서 '모두에 대한 모든 사람의 전쟁' 과 같은 표현이 발현된다는 것으로 보아 린네의 저서와 아이디어가 그들과 다윈에게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영감을 제공했을 수 있다.
초기 생태학의 발전.
린네가 제안한 자연의 경제성이라는 개념은 스웨덴에서 린네의 제자들에 의해 매우 제한된 범위로 전달되었다. 린네의 아이디어는 종의 우성성, 시스템, 그리고 스웨덴의 동식물에 대한 포괄적 연관성 지도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린네는 다양한 규칙을 마련하고 그 규칙에 입각하여 자연이 어떻게 시스템화되어 있을 수 있는지를 보였다. 린네 학문을 따르는 자들의 1세대와 2세대 모두 동식물을 차트로 정리하고 생물 간의 보다 일반적 연관성을 찾아 자연의 법칙을 찾으려 하였다. 린네의 초기 생태학적 아이디어는 잉글랜드에서 정교히 발전했지만 린네의 제자인 칼과 오드먼에 의해 스웨덴에서도 연구의 수행이 이루어졌다.
칼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영향에 관한 여러 가지 초기생태학적 관찰을 진행하여, 인디언의 생활과 개척자의 등장에 의한 자연의 변화를 설명하고 관찰하였다. 오드만은 열도의 새 전문가로서 초기 조류 생태 연구에 대한 예가 될 수 있는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는 린네의 정신에 입각하여 자연의 상황을 묘사하였으나, 이론 수준에서는 새롭게 기여하지 않았다.
린네를 기념하는 것들.
매년 린네의 생일이 기념되며, 특히 100년마다 린네의 생일은 크게 축하된다. 린네는 수많은 종류의 스웨덴 우표와 지폐에 등장하였으며, 전 세계 국가에 린네의 조각상이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 런던에서 열리는 린네 학회는 식물학이나 동물학에서 나온 좋은 결과에 대해 1888년부터 린네 메달을 수여한다. Växjö 대학과 칼 마르 대학은 스웨덴의 의회의 승인을 받아 2010년 1월 1일에 병합 후. Linnaeus 대학이 되었다. 린네의 이름을 딴 다른 것들에는 twinflower 속 Linnaea, 지구 달에 분화구 중 하나인 Linné 및 코발트 황화물의 미네랄 Linnaeite을 포함된다. |
3451 | 114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51 | 린네 | |
3454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54 | 이마누엘 칸트 | 이마누엘 칸트( , 1724년 4월 22일 ~ 1804년 2월 12일)는 근대 계몽주의를 정점에 올려놓았고 독일 관념철학의 기반을 확립한 프로이센의 철학자이다.
칸트는 21세기의 철학에까지 영향을 준 새롭고도 폭 넓은 철학적 관점을 창조했다. 그는 또한 인식론을 다룬 중요한 저서를 출간했고, 종교와 법, 역사에 관해서도 중요한 책을 썼다. 그의 탁월한 저서 중 하나인 《순수이성 비판》은 이성 그 자체가 지닌 구조와 한계를 연구한 책이다. 이 책에서 칸트는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인식론을 공격하고 있으며, 칸트 자신이 그 분야에 공헌한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가 만년에 출간한 다른 주요 저서에는 윤리학을 집중적으로 다룬 《실천이성 비판》과 미학, 목적론 등을 연구한 《판단력 비판》이 있다.
그는 종래의 경험론 및 독단론을 극복하도록 비판철학을 수립하였다. 인식 및 실천의 객관적 기준을 선험적 형식에서 찾고, 사유가 존재를, 방법이 대상을 규정한다고 하였다. 도덕의 근거를 인과율이 지배하지 않는 선험적 자유에서 찾고, 완전히 자유로운 도덕적 인격의 자기 입법을 도덕률로 삼았다.
그는 도덕적 인격을 목표로 하면서도 자의적인 ‘한 사람의 의욕과 다른 사람의 의욕이 자유의 보편원칙에 따라 합치될 수 있는 여러 조건’을 법이라 생각하였다. 칸트에게 내적 자유의 실현 수단인 법은 외적 자유를 제한하는 강제를 본질로 한다는 점에서 도덕과 엄격히 구별되었다. 칸트는 국가에 대해서 계약론의 입장을 취했는데, 그는 국가계약을 역사적 사실처럼 생각한 계몽기의 사상을 발전시켜서 이것을 국민주권을 위한 이론적 요청으로 생각하였다. 또 칸트는 국가 간의 전쟁을 하지 않는, 영구 평화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저술했다. 그는 전쟁으로 인해 생긴 문제점을 전쟁이 끝난 뒤에 조정하여 해소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제도의 내용은 국제법의 개념에 근거한 국제 연맹이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생애.
1724년 프로이센의 상업도시 쾨니히스베르크(현재의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서 수공업자인 아버지 요한 게오르크 칸트(, 1682–1746)와 어머니 아나 레기나 칸트(, 로이터·, 1697–1737)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1명 자녀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다(11명 자녀 가운데 어른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4명뿐이었다). 칸트는 '에마누엘'(Emanuel)이란 세례명을 받았으며, 히브리어를 공부하고서 '이마누엘'(Immanuel: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로 바꾸었다. 그는 삶을 통틀어서 단 한번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100마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여행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프로이센에서 가장 북쪽 도시인 메멜에서 이주한 독일인 마구(馬具) 제작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칸트 할아버지는 스코틀랜드에서 동프로이센으로 이주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가족의 성을 영어식("Cant")으로 적곤 했다. 어렸을 때 칸트는 돋보이지는 않았으나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는 경건주의를 따르는 가정에서 성장했다. 기독교의 경건주의는 종교적인 헌신과 겸손함 그리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칸트가 받은 교육은 수학과 과학보다 라틴어와 종교였고, 엄격하고 가혹한 훈련을 강조한 것이었다.
칸트 부모는 청교도적 생활을 하였으며, 이는 유년시절 칸트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칸트는 1732년 어머니와 친분 있던 신학자 슐츠가 지도하던 사학교 프리드릭스 김나지움에 입학하고 1740년에 졸업했다. 같은 해 쾨니히스베르크의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과 수학을 공부했는데, 특히 마르틴 크누첸(Martin Knutzen)에게 논리학과 수학을 지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자연과학에 관심 두었고 아이작 뉴턴의 물리학에 매료되었다.
후대 전기 작가 기록에 의하면, 칸트는 1746년 《활력의 진정한 측정에 관한 사상》("Gedanken von der wahren Schätzung der lebendigen Kräfte")이라는 졸업논문과 함께 대학을 졸업했으나, 아버지가 사망함에 따라 학자금과 생계유지를 위해 수년에 걸쳐 지방 귀족가문의 가정교사 생활하면서 홀로 철학연구를 계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칸트는 곧 대학으로 돌아왔으며 1755년 6월 12일, 《일반자연사와 천체이론》("Allgemeine Naturgeschichte und Theorie des Himmels")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음과 동시에 《형이상학적 인식의 으뜸가는 명제의 새로운 해명》(Principorum primorum cognitionis metaphysicae nova dilucidatio)이라는 논문으로 대학에서 강의할 자격을 얻었다. 이후 대학에서 일반논리학, 물리학, 자연법, 자연신학, 윤리학 등 여러 주제로 강의했다. 1756년 크누첸이 사망하자 그 후임으로 교수직을 얻으려 노력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렇지만 1764년 프로이센의 교육부에서 제공한 문학 교수자리를 거절할 정도로 철학 교수직을 갈망했다. 18세기까지도 수학과 물리학은 자연철학으로 간주되어 철학 영역에 속했다. 1766년에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왕립도서관 사서로 취직하여 1772년까지 근무하기도 했다. 그사이 칸트는 원하던 대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철학 교수직을 얻었으며, 이때 발표한 교수취임논문(1770년)은 칸트 비판 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저술로 평가되고 있다.
10여 년간 철학적 침묵기를 거친 후 칸트는 1780년대에 일련의 중요한 저서, 즉 에세이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ärung?", 1784), 《윤리 형이상학의 정초》("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1785),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Metaphysische Anfangsgründe der Naturwissenschaft", 1786)를 잇달아 발표하면서 점점 명성이 올라갔다. 그리고 《순수이성비판》(초판:1781년, 재판:1787년), 《실천이성비판》(1788), 그리고 《판단력비판》(1790)에서 그의 비판철학의 정수를 선보였다. 눈부신 학문적 성취와 더불어 1786-8년에는 쾨니히스베르크대학의 총장에 선출되는 영예를 누렸다.
칸트는 한번도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지 않았으며, 알려진 것처럼 규칙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강의와 사유에 전념했다. 다만 1792년에 논문출판과 검열을 두고 학부 관리처와 작은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문제의 논문은 《인간본성에 있어서의 근본악에 관하여》("Vom radikalen Bösen in der menschlichen Natur")란 제목으로서 당시의 계몽주의사상과 종교에 관한 칸트의 솔직한 견해가 대학 관리처로부터 경고를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커피와 담배를 즐겼던 칸트는 1804년 2월 12일 새벽 4시, 80세를 향년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그것으로 좋다(Es ist gut)”라는 말을 남겼다.
칸트 철학.
칸트는 18세기 철학에 있어 가장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 평가 받는다. 실제로 칸트 이전의 철학과 이후의 철학은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칸트가 초감각적인 세계를 논하는 기존의 형이상학과는 다른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의 체계를 세우려고 했으며, 그러한 체계의 근거가 되는 인식론을 연구하여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인식론에 바탕을 두고 두 사상의 한계에서 벗어난 철학을 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칸트가 말하는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인식론에 근거를 두고 이성이 이성 자신을 비판하는 철학이다.
비판 철학.
칸트의 철학이 비판철학이라 불리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의 세 가지 저서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에서 연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 책의 제목 끝에 붙인 '비판'이라는 개념은 칸트가 과거의 철학을 비판적 연구 분석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또한 칸트는 이러한 측면에서 스스로의 철학을 '비판철학' 이라고 불렀다. 칸트가 이러한 비판 철학을 펼치게 된 데에는, 뉴턴의 자연과학과 루소의 철학, 그리고 인간의 인식능력에 대한 흄의 회의를 받아들인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권의 저서 내용을 요약한 질문과 각 책이 다룬 영역은 다음과 같다.
인식론.
17~18세기 철학의 인식론은 크게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로 나뉘었다. 여기서 합리주의는 인간이 본래부터 지닌 선험적 이성을 중시하였고, 경험주의는 인간이 경험함으로써 지식을 얻는 귀납법을 중시하였다. 합리주의의 방식은 "백마는 희다"와 같이 술어가 주어의 개념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분석판단을 하므로, 지식을 확장해 나가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였고, 경험주의의 방식은 귀납적인 방법을 강조하며 종합판단을 한 나머지 진리의 필연성을 찾는 데 한계를 드러내었다. 여기서 칸트는 이 두 사상을 통합한 선험주의를 주장하였다. 즉, 지식의 보편성과 필연성을 인정하면서도 인식을 확장하는 '선험적(선천적:a priori) 종합판단' 을 긍정하였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이성이 지닌 한계를 지적하면서 인간 인식에 선험적 형식을 도입하는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Kopernikanische Wendung)을 시도하였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란 인간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이 대상의 관념을 만들어낸다는 생각이다. 쉽게 말하면 인간은 대상이 있는 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대로 그 대상이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에게 진리는 주체의 판단형식에서 찾아야 하는 무엇이다.
칸트의 인식론은 감성을 통해 얻은 감각을 범주를 사용하여 지성(Verstand:오성)으로 인식하고, 초경험적인 것은 이성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감성은 어떤 물자체를 지각하는 능력이며, 범주는 이러한 감각을 인식하게 하는 하나의 틀이다. 따라서 감성과 지성은 인간이 지각 하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적인 요건인 셈이다. 여기서 칸트는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는 데 시간과 공간 값이 필요하다고 본다. 구체적인 연장과 존재하는 시간이 없으면 우리는 인식을 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감정과 같은 것은 공간 값은 없지만 시간 값만 있는 것으로 보았다.
칸트는 저서 《순수이성비판》에서 초경험적인 것을 이성으로 알려고 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가령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존재론적 증명 등을 비판하여 여러 형이상학적인 사상들을 배격하고자 하였다. 이 말은 형이상학의 영역이 거짓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 할 수 없는 것으로, 어떤 형이상학적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칸트는 인간의 지성(Verstand)이 사물의 현상을 분류,정리할 수 있으나, 그 현상 너머에 숨은 본질에는 이를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은 사물의 본질이나 신에 해당하는 물자체를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에 따르면, 기존의 형이상학은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초감각적이고 초경험적인 것을 인식의 범주 안으로 끌어들이는 오류를 저지른 것이다. 칸트는 형이상학이 그런 오류에서 벗어나 이성의 인식체계에 대한 학문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칸트는 형이상학적인 신, 영혼들의 존재를 도덕을 다루는 과정에서 다시 요청하게 된다.
윤리학.
칸트는 윤리학을 연구하면서 주관적인 감정이나 상황에 따라 ‘차이가 나는’ 도덕이 아니라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도덕을 추구하였다. 모두가 합리적이고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도덕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덕을 도덕법칙이라고 부르는데, 칸트는 인간은 자신의 감정에 따라 선을 베푸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여기서 칸트는 인간은 마음 속에서 충동과 도덕이 투쟁한다고 보았다. 즉, 옳고 그른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 인간의 마음 속에서는 충동과 도덕심이 투쟁을 하며, 도덕이 이기면 선한 행동을 하고 충동이 이기면 그른 일을 하게 된다고 보았으며, 그렇다고 도덕이 충동을 없애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칸트는 행위의 ‘결과’보다 행위의 ‘동기’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어떤 결과를 얻거나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는 ‘수단으로서 명령’이 아니라, 명령 그 자체가 목적인 ‘무조건적인 명령’을 도덕법칙으로 제시하였다. 다시 말해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조건적인 가언명령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 의무로서 명령인 정언명령을 내세운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누구나 어떤 조건에서든 따라야만 하는 정언 명령은 다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명령, “네 의지의 준칙(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 하라”이다. 이 말은 쉽게 말해 누구든지 어떤 행동을 할 때 스스로 생각할 때 다른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행동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되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 명령,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도록 행위 하라”이다. 칸트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자연론적인 인간관을 반대하였다. 인간이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본 자연론적인 인간관을 부정하면서, 그는 모든 인간의 평등한 존엄성을 강조했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도덕 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인격체로서,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며 그에 합당한 존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영향과 비판.
영향.
서양 사상에 대한 칸트의 폭넓은 영향은 헤아릴 수 없는 정도이다. 특정한 사상가에게 준 구체적인 영향을 넘어서, 칸트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서부터 지금까지에 이르는 철학연구가 칸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철학의 틀 구조를 바꾸었다. 달리 말하면, 그는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을 이루었다. 이러한 전환은 공리주의에서 후기 칸트학파의 사상에 이르는 혁신과 밀접하게 연관된 채로 철학과 사회과학, 인문학 분야 모두에서 유지되었다.
칸트의 생각은 그 전부 또는 일부가 이후에 각기 다른 주장을 펼친 학파들에게서 드러나고 있다. 독일 관념론, 실증주의, 현상학, 실존주의, 비판 이론, 언어 철학, 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 해체주의가 그러한 예이다. 칸트의 영향은 사회과학과 행동과학에서도 나타나는 데, 막스 베버의 사회학과 장 피아제의 심리학, 그리고 노암 촘스키의 언어학을 예로 들 수 있다. 칸트가 패러다임을 철저하게 바꾸었기 때문에, 특별히 칸트의 저서나 칸트의 용어를 언급하지 않는 학자들까지도 칸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의 생애 동안에, 그의 사상은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그는 1780년대에서 1790년대까지 라인홀트, 피히테, 셸링, 헤겔, 노발리스에게 영향을 끼쳤다. 칸트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글쓰기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철학 운동은 독일 관념론으로 알려졌다. 예를 들어 독일 관념론자인 피히테와 셸링은, 전통적으로 "형이상학"에 포함되었던 "절대적인 것", "신", "존재"와 같은 개념을 칸트 비판 철학의 영역으로 옮기려고 시도하였다.
비판.
칸트가 살아있을 당시부터 칸트 철학에 대한 비판과 반발이 있었다. 칸트는 이성의 능력과 종교를 모두 비판했고, 이러한 비판은 당시에 이성을 신뢰하던 철학자나 종교를 믿던 종교인에게는 매우 불만스러운 것 이었다.
제자가 바라본 칸트.
칸트의 제자 요한 헤르더는 그의 스승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
3455 | 5668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55 | 칸트 | |
3456 | 75312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56 | 후천면역결핍증후군 | 후천면역결핍증후군(後天免疫缺乏症候群, ; , 에이즈)는 HIV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발병하면 나타나는 전염병이다. HIV는 바이러스의 이름이며, 에이즈는 HIV에 감염된 환자가 발병하면 나타나는 증상들을 일컫는다.
질병관리본부의 '문답으로 알아보는 에이즈 상식' 자료에 따르면 HIV와 에이즈(AIDS)는 다른 말이다. HIV는 바이러스를 말하며 에이즈는 면역이 결핍돼 나타나는 상태를 뜻한다. HIV에 걸린 사람을 에이즈 환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HIV 감염인이란 HIV에 걸린 모든 사람을 말하며 이 중에서 질병이 나타난 사람을 에이즈 환자라고 부른다. 아무런 치료를 받지 않아도 면역결핍으로 사망에 이르기까지 10~12년 정도 걸린다. 올바른 관리를 한다면 30년 이상 살 수 있다. 현재 에이즈는 만성질환으로 분류되고 있다.
에이즈는 신체의 면역, 저항력이 저하되는 질병으로 보통 에이즈 질환으로 인한 사망과 그외에도 면역력이 약화되어 기타 다른 질병에 함께 감염되어 합병증으로 사망하는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역사.
에이즈는 병리학적으론 최초로 1981년 미국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언제 HIV 바이러스가 번지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말할 수 없으며, 의학계에서는 침팬지에서 발견되는 SIV에서 HIV가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 출현 시기를 1930년대로 보고 있다. 즉 중앙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SIV를 보유하고 있는 침팬지와 접촉함으로 인해 인간의 면역체계를 약화시키는 변종 바이러스 HIV가 생겨난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간접적 증거로는 현재 가장 높은 에이즈 감염 및 사망률을 보이고 있는 지역이 바로 아프리카 대륙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이 때는 아프리카 개발이 집중적으로 시작된 시기로 인간들의 무분별한 야생동물 사냥과 원시림을 파괴하며 얻은 SIV를 포함한 침팬치의 고기 및 다른 고기를 유통, 공급하면서 접촉하여 생긴 환경파괴 질병으로 보기도 한다.
공식적으로 에이즈가 인식된 것은 다섯명의 치명적인 폐렴 환자를 보고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폐렴이 아닌 인체의 면역저하에부터 오는 Pneumocystis pneumonia 이었다. 즉 이들은 먼저 에이즈를 통해 면역저하를 걸린 후 이 폐렴이 발발한 것이다. 이들은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 거주하는 남성 동성애자들이었다. 이렇게 미국에서 처음 발견된 에이즈 환자들은 동성애자들의 커뮤니티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에이즈가 혈우병과 마약중독자들 사이에서 많이 나타났는데 마약에 중독된 이들은 그 주사바늘을 돌려쓰기 때문에 에이즈 환자들의 피와 직접 접촉이 되어 걸리게 되는 것이다. 사회 전반에 동성애자들에 대한 편견이 있었기 때문에 동성애혐오적인 의미를 내포한 병명이 사용되기도 했었던 적이 있다는 소문도 있지만 실제적으로 에이즈는 의학자와 과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고 그 병명이 지어졌다. 여성 동성애자의 경우 이성애자들보다 걸릴 확률이 적다. 에이즈 환자의 원인으로 의심되어 동성애자들은 많은 국가에서 차별을 받았는데 최근에는 이러한 차별에 대항하는 많은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대체로 서유럽에서 동성애자의 인권은 지켜지는 편이지만 러시아의 경우 오랫동안 동성애를 범죄화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러시아내에선 동성애자를 멸시하고 탄압하는 문화가 당연시 되고 있다.
현재까지 에이즈는 약 2800만 명의 인간을 죽음에 몰아넣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 및 서부 아프리카 국가들 가운데에는 전체 인구의 10% 이상이 에이즈에 감염되어 있을 것이라고 추측되며, 특히 짐바브웨와 보츠와나는 25%에 달하는 충격적인 HIV 감염율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심각한 추세는 아프리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며, 인도, 동남아시아의 여러 국가들 그리고 특히 중국에서도 HIV의 감염자 수가 급속도로 증가하여 에이즈 예방이 국가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원인.
에이즈는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HIV)의 감염으로 생기는 궁극적인 결과이다. 에이즈 바이러스인 HIV는 레트로바이러스이다. 레트로바이러스는 숙주 세포에 침입하여 자신의 RNA를 DNA로 역전사한 후 숙주 세포의 DNA에 끼여 들어가 증식한다.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기관들인 CD4+ T 세포와 대식세포 그리고 수지상세포들에 우선적으로 감염된다. 특히 HIV는 직간접적으로 CD4+ T 세포들을 파괴한다. 특히 역전사 과정을 일으키는 역전사 효소는 일반적인 DNA 복제 효소와는 달리 오류정정 기능이 없기 때문에 많은 돌연변이를 일으키게 되어 HIV는 매우 쉽게 변이된다. 임상연구에서는 에이즈에 감염된 환자가 여러 가지 변종의 HIV를 지니고 있는 경우가 자주 보고되고 있다.
HIV 감염자의 50~70%는 감염 후 3~6주 뒤 독감과 유사한 급성 임상 증후군을 앓게 된다. 그러나, HIV 감염자는 그 이후 짧으면 3년에서 길면 12년까지 무증상 상태를 보이므로 곧바로 HIV 감염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매우 흔하며, 에이즈의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을 때에는 이미 신체의 면역 체계가 상당 부분 약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만일 HIV가 CD4+T세포들을 죽이기 시작하여, 혈액 1µL당 200개 안팎의 T세포 밖에 남지 않게 되면 세포성 면역을 잃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급성 HIV 감염은 곧 임상적 후기 HIV 감염으로 진행하게 되고 결국 에이즈에 이르게 된다. 혈액 내에 남아있는 CD4+ T세포의 수를 측정하여 위와 같은 진행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감염.
에이즈는 체액 교환을 통해 감염되며, 현대 사회의 주된 에이즈 전염 경로는 성병 예방 조치를 하지 않은 성행위(혈액 감염)와 HIV 감염자의 출생을 통한 수직 감염, 불특정 다수가 돌아가며 사용하는 비위생적인 주사기 및 시술 도구 사용 등으로 인한 혈액 감염이다. 특별히 항문성교를 통해 감염된다. 항문은 그 점막이 매우 연약하여 약간의 마찰에도 찢어진다. 그래서 성관계시 에이즈 감염자의 항문의 찢어진 곳에서 나오는 혈액으로 성관계 대상자가 감염된다. 그러나 에이즈는 단순 신체 접촉이나 공기 중으로 감염되지는 않는다. HIV 감염자와 악수하거나 포옹을 한다고 에이즈에 감염되지 않는다. 또한 에이즈 보균자가 항상 위험한 것이 아니며 더럽거나 혹은 종교적 저주를 받았거나 문란하거나 사회적인 악영향을 일으키며 에이즈를 감염시키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왜냐면 에이즈의 경우 대부분이 혈액에 의한 감염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우 적은 소량의 혈액 한 방울에도 에이즈균은 존재하며 이로 인한 감염이 가능하다. 입 안 즉 구강에는 상처가 매우 쉽게 나기 때문에 에이즈 감염자의 침에는 혈액이 섞여있을 가능성이 높다. 손에 상처가 있는 에이즈 감염자가 만든 음식을 구강에 상처가 난 비감염자가 먹을 경우에도 혈액에 의한 에이즈 감염을 주의하여야 한다. 또한 성행위의 경우 생식기에 상처가 나있는 경우에 매우 소량의 혈액으로도 감염될 수 있다. 따라서 에이즈 보균자의 경우 손이나 몸같은 신체 또는 구강 등에 상처가 나지 않았는지 주의해야한다. 또 에이즈 감염자의 경우 상처의 회복이 느린 점도 주의해야한다. 작은 상처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매우 소량의 혈액이 분비되며 여기에는 HIV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에이즈는 다양한 성행위를 하면서 접촉하게 되는 체액(주로 혈액)들에 의해 감염될 수 있다. 콘돔 등 아무런 예방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갖게 되는 성행위를 통해서는, 삽입자 보다는 그 반대편이 위험도가 높다. 구강 성교 또한 예외는 아니다. 구강 성교를 통해서 행위에 참여한 모두가 감염될 수 있다.
성폭력의 경우에는 감염 확률이 매우 높다. 강간 가해자는 콘돔의 사용 확률도 적으며, 피해자의 생식기나 직장에 외상을 입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마약 복용도 HIV 감염의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연구가 있다. 2008년 연구자들은 메스암페타민을 복용한 사람들이 성병 예방 조치 없이 성 행위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결과 메스암페타민 복용자들은 당연히 타 집단에 비해 HIV감염 확률이 높았다.
다른 성 매개 감염(STI)들에 감염되면 생식기에 궤양을 일으킨다. 이렇게 상피 세포들이 손상되는 것뿐만 아니라, 정자나 질 분비물에 HIV 감수성이 있는 세포 혹은 HIV에 이미 감염된 세포(대식세포나 림프구)의 축적은 결국 HIV감염의 위험을 높인다.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유럽 그리고 북미에서 실시된 역학 조사에 따르면, 매독이나 연성 하감을 통해 발생한 생식기 궤양이 실제적으로 HIV 감염률을 4배나 증가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HIV의 전파도는 초기 감염자의 전파성과 감염되지 않은 파트너의 감수성에 영향을 받는다. 병의 전파성은 개인마다 일정하지 않다. 혈장에서 바이러스가 발견되지 않은 것이 정액이나 생식기 분비물에서도 바이러스가 없다는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혈액 HIV 수치가 10배 증가할 때마다 81%의 경우에서 전파가능성이 증가했다.
여성의 경우가 호르몬 변화나 생식기의 미생물학적 환경 때문에 HIV-1에 더 감수성이 높다. HIV 균주 중 하나에 감염되었다고 해서 다른 균주에 감염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생존하고 있는 동안에는 더 병원성이 강한 균주에 의해 재감염 될 수 있다. 항문 성교의 경우 다른 체위에 비해 HIV 감염이 상대적으로 높다.
단 한번의 접촉으로 감염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대부분의 경우 장기간 다수의 파트너와의 성관계를 통해 감염된다. 이런 패턴이 오히려 많은 파트너에게 재차로 감염 기회를 높인다.
출생을 통한 수직 감염.
에이즈는 감염된 부모로부터 출생할 시에도 감염이 된다. 대한민국에서 에이즈 감염을 알고도 자녀를 출산한 경우가 1건 있는데, 1990년 4월과 5월 각각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은 부부가 에이즈 감염 사실을 알고도 1993년 1월 여자 아이를 낳은 사례가 있다. 여자 아이를 출산한 에이즈 감염 부모는 줄곧 여자 아이의 에이즈 검사를 거부하다가 2003년 8월 검사를 하였는데, 만10세가 되는 이 여자 아이는 에이즈에 감염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증상과 발전단계.
에이즈 병세의 발전 과정은 대개 다음과 같은 세 단계로 나뉜다.
항레트로바이러스 약물 치료 없이는 HIV감염 후 에이즈로 발달하기까지 보통 9~10년 정도 걸린다. 그리고 에이즈로 진행된 후에는 평균적으로 10개월을 살지 못한다. 그러나 임상적인 병의 진행 속도는 개인에 따라 다양하다. 어떤 경우에는 2주도 안 걸리는 데 반해 다른 경우에서는 20년이나 걸리기도 한다.
다양한 요소들이 진행속도에 영향을 미친다. 보통 사람의 일반적인 면역 증강에 도움이 되는 요소들도 진행을 늦추는데 도움을 준다. 나이가 많아 면역계가 약해진 노인층에서 진행 속도가 특히 빠른 것이 이 때문이다.
평소 건강 관리에 소홀했거나, 결핵과 같은 질병에 걸린 내력도 병의 급속한 진행을 돕는 환경을 만들어준다. 감염자의 유전적인 내력도 영향을 미치는데, 어떤 사람의 경우 몇 가지 HIV 균주에 내성을 띠기도 한다. 일례로, CCR5-Δ32 유전자가 동형접합인 사람들은 특정 HIV균주에 저항성을 나타낸다. HIV 자체가 유전적 변동이 심한 편이며 그 균주도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병의 진행 속도는 더욱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진단.
HIV/AIDS는 실험실 검사를 통해서 진단되며, 증상의 발현에 근거하여 단계가 결정된다. 미국 예방 서비스 태스크 포스는 HIV 검사를 모든 임신한 여성을 포함하여 15세부터 65세까지의 모든 사람에게 권고한다. 또한 검사는 성병을 진단받은 적이 있는 사람을 포함하여 감염될 위험이 높은 사람에게 권장된다.
HIV에 감염된 대부분의 사람은 최초의 감염 이후 3주에서 12주 이내에 특정한 항체를 발달시킨다. 혈청 변환 전의 HIV 진단은 HIV-RNA나 p24 항원을 측정함으로써 행해진다. 항체 검사나 PCR 통하여 얻어진 확진 결과는 다른 항체 검사나 PCR을 수행한 후 확정된다.
예방.
성적 접촉.
지속적인 콘돔의 사용은 장기간 동안 HIV 전파 위험을 80% 정도 낮출 수 있다. 파트너 한쪽이 감염된 커플이 콘돔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HIV 감염 비율은 일년에 1% 미만이다. 페미돔이 콘돔과 동일한 수준의 예방 효과를 제공한다는 몇몇 증거가 있다. 성관계 직전에 테노포비르를 함유한 질용 젤을 바르는 것은 아프리카 여성 사이에서 감염 비율을 약 40% 낮추는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에 살정제 노녹시놀-9(nonoxynol-9)의 사용은 직장과 질에 염증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전염의 위험을 증가시킬 수 있다.
노출 전 예방.
항레트로바이러스 요법은 CD4 세포가 µL당 550개 이하인 HIV 감염자의 파트너의 HIV 감염을 예방하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러한 예방적 치료는 감염의 위험이 10배에서 20배 정도 줄어드는 것과 관련이 있다. 테노포비르 약물을 엠트리시타빈과 함께 또는 엠트리시타빈 없이 매일 복용하는 노출전 예방법은 남성과 성관계를 갖는 남성과 한쪽 파트너가 HIV에 감염된 커플, 아프리카의 젊은 이성애자 등 감염 위험이 높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이다. 미국 예방 서비스 태스크 포스(USPSTF)는 2019년에 노출전 예방요법을 감염 위험이 높은 사람들에게 권고하였다.
노출 후 예방.
HIV에 감염된 혈액이나 생식기 분비물에 노출된 이후 48시간에서 72시간 이내에 시행된 일련의 항레트로바이러스 요법은 노출후 예방요법이라고 불린다. 지도부딘 단일 약제의 사용은 HIV에 오염된 바늘에 찔린 이후에 감염될 위험을 5배 줄인다. 2013년 미국에서 권고된 예방 요법은 테노포비르, 엠트리시타빈, 랄테그라빌 등 세 개의 약물로 구성되며, 이는 감염 위험을 더 줄일 수 있다.
모자 수직 감염.
HIV의 수직 감염을 예방하기 위한 프로그램은 감염 비율을 92%에서 99%까지 낮출 수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에는 주로 임신 중과 출산 후의 항바이러스제 배합의 사용이 포함되며, 잠정적으로 수유보다는 분유 수유도 포함된다. 대체물 수유가 수용될 수 있고, 지불될 수 있으며, 실현될 수 있고, 지속적이며, 안전할 경우 산모는 신생아에게 모유를 수유하는 것은 피해야 하지만, 그러한 경우가 아닌 경우에는 배타적인 모유 수유는 첫 달 동안에 권장된다. 만약 배타적인 모유 수유가 실행된다면 신생아에 대한 확장된 항바이러스 요법은 전염의 위험을 낮춘다. 2015년 쿠바는 HIV의 모자 수직 감염을 근절한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백신.
현재 HIV나 AIDS를 위한 허가된 백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까지 가장 효과적인 백신 실험은 2009년에 출판된 RV 144로 30% 정도로 전염 위험을 부분적으로 낮추는 것으로 밝혀져, 진정으로 효과적인 백신을 개발하는 연구 커뮤니티에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RV 144의 후속 실험은 진행 중이다.
치료.
에이즈의 완치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발견되었으나,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1995년에 시작된 일종의 칵테일 요법인 고활성 항레트로바이러스 요법("h"ighly "a"ctive "a"nti-"r"etroviral "t"herapy, 이하 HAART 요법)이 HIV 질환의 진행을 늦추고 생존기간을 연장시키는 데에 획기적인 성과를 나타내면서, 에이즈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당뇨병과 같은 조절 가능한 만성 질환으로 인식이 전환되고 있다.
HAART 요법은 뉴클레오사이드 유사 역전사 효소 억제제(Nucleoside analogue reverse transcriptase inhibitor, 이하 NRTI)와 비뉴클레오사이드 역전사 효소 억제제(Nonnucleoside reverse transcriptase inhibitor, 이하 NNRTI) 및 단백질 분해효소 억제제(Protease inhibitor, 이하 PI)와 같은 항바이러스 제제를 병합하는 요법이다. 2가지 NRTI 약물에 1~2가지 PI 약물을 환자에게 함께 투여하거나, 2가지 NRTI 약물에 1가지 NNRTI 약물을 투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만약 이러한 초치료가 실패하면, 약물 전체를 바꾸어 다시 시도하는 것이 원칙이다.
항바이러스 제제의 유형별 약물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2000년대 들어서는 그동안 에이즈 치료제의 주류를 이루었던 역전사 효소 억제제와 단백질 분해 효소 억제제의 치료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새로운 기능을 갖는 약물의 개발도 꾸준히 진행되어 왔으며, 2007년부터 새로운 형태의 에이즈 치료약이 미국 FDA의 승인을 받고 시장에 출시되기 시작했다. 2007년 7월에 처음 소개된 마라비록(Pfizer, 상품명 Selzentry)는 최초로 병원체인 바이러스가 아닌, 숙주세포에서 감염에 관여하는 수용체(receptor)의 작용을 억제시키는 치료제(진입 억제제)이며, 2007년 12월 FDA의 승인을 받고 시판된 랄테그라빌(머크, 상품명 Insentress)은 HIV 바이러스에서 역전사된 DNA가 숙주 세포의 유전자 안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억제하는 치료제(통합효소 억제제)이다.
2010년 12월 드디어 후천면역결핍증 완치 사례가 발표되었다. 해당환자는 2007년에 치료를 받고 현재 완치 판정을 받은 상태이다. 그러나 이 환자의 경우 급성 골수형 백혈병의 치료를 위해 골수 이식을 받았다가 이 골수를 제공한 사람이 HIV저항인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해당 인자를 스스로 생산해낼 수 있게 된, 우연히 완치된 경우였고, 골수 이식의 위험 부담이 높아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개념을 바탕으로, 기존의 에이즈 치료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의 Gene Therapy가 미국에서 연구되어 임상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이 시술법은, 개별 환자의 몸에서 T세포를 추출하여 HIV바이러스가 T세포와 융합하는 매개처인 CCR5 수용체를 변형, 삭제하여 다시 몸속으로 주입하여 환자 스스로 바이러스를 퇴치하게 만든다. 이미 실행된 임상실험에서는 75%의 환자들에게서 효과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합병증으로 인한 사망.
에이즈 감염균으로 인한 직접적인 사망 외에도 에이즈 감염으로 면역력이 약해지면서 다른 질병이 합병증으로 걸려서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 2011년 미국의 국립 암연구소 연구 결과 에이즈환자의 사망원인 가운데 비에이즈 관련 암, 특히 폐암, 항문암, 간암, 호지킨림프종 등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립암연구소(NCI) 감염증 면역역학 미레디스 쉴스(Meredith S. Shiels) 박사는 “에이즈환자에서 발생하는 암의 수와 암 형태는 1991년부터 2005년 15년간 크게 변화하고 있다”고 Journal of the National Cancer Institute에 발표했다. HIV감염자에서는 카포지육종, 비호지킨림프종, 자궁경암 위험이 높아진다고 알려져 있다. 또 HIV감염자에서는 폐암, 항문암, 간암, 호지킨림프종 등의 ‘비에이즈 관련 암’ 위험이 높아진다.
쉴즈 박사의 NCI와 미질병관리본부(CDC) 공동연구팀은 미국 에이즈환자를 대상으로 이들 2개군의 발암 현황을 검토하기 위해 미국HIV/에이즈 암대비연구와 CDC 데이터를 1991~1995년(전 HAART기), 1996~2000년(HAART초기), 2001~2005년(HAART 후기)의 3개 기간으로 나누어 평가했다. 이러한‘에이즈 관련 암’의 이환율은 1990년대 중반에 고활성 레트로바이러스약물요법(HAART)가 등장하면서 낮아지기 시작했다. 이후 에이즈 관련 암 환자수는 예상대로 전HAART기(3만 4587명)에서 HAART 후기(1만 325명)에 크게 감소했다. 그러나 에이즈의 정확한 원인과 예방법은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98년에는 기존의 에이즈균과는 다른 변종 에이즈균 역시 나타난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전파매개행위에 대한 처벌.
대한민국에서는 에이즈에 대해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이라는 법령을 두어 관리하고 있다. 이 법령 제19조에 따르면 '에이즈에 감염된 사람이 혈액이나 체액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파매개행위를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며, 제25조에서는 '이를 위반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형으로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에이즈가 많은 국가들.
아시아에서 중국은 에이즈 발병율이 독보적 1위이다. 125만명의 에이즈 감염 중국인들이 존재하지만 이 수치는 주요 몇몇 도시에서 나타난 수치로 지방에서의 수치를 합하면 300만명에서 2천만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홍콩 조사에서는 3억명으로 나오고 있다. 또한 중국에서는 허난성 등등 마을에서 수만명이 집단으로 에이즈에 걸리는 등 에이즈 마을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중국 정부에서는 국제 이슈로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사를 불가하고 있다. 미국 국무부 조사에 따르면 중국 여성 매춘부들의 숫자가 전세계에서 가장 많으며 이들은 아프리카 유럽등지에 퍼져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중국 남성들의 에이즈 발병률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에이즈 발병률과 비슷한 수준이다. 게다가 90년대에 중국 마을을 대상으로 수혈로 생계 유지를 하는 것을 장려한 캠페인 때문에 에이즈 비율이 늘어났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또한 베이징 Zhou bao 신문에 의하면 중국인 여성 연예인이 기업 스폰서 남성을 에이즈 전염을 이유로 고소한 일이 있다. 동아시아에서 사실상 성매매 합법 국가나 마찬가지인 일본과 싱가폴에서도 에이즈 발병률은 높게 증가하는 추세이다. 미국에서, 유럽에서 성매매 합법 국가인 네덜란드,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영국 등에서, 그리고 북유럽에선 에스토니아, 아이슬란드에서 에이즈 인구가 늘고 있으며 남미에서는 매춘 합법 국가인 멕시코, 브라질, 칠레, 콜롬비아에서 아프리카에서는 에티오피아 등에서 에이즈율이 증가하고 있다.
감염인에 대한 차별.
대한민국 국가인권위원회가 2017년에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3%가 "사회 전반적으로 차별이 많거나 있는 편"이라고 대답하였다. 2019년에 세계 에이즈의 날을 맞아'HIV/AIDS 인권활동가 네트워크는 에이즈 감염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멈출 것을 축구하였다.
감염인권리운동.
대한민국에는 HIVAIDS감염인 권리운동을 하는 한국HIVAIDS감염인연합회KNP+라는 단체가 있다. |
3457 | 5668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57 | AIDS | |
3460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60 | 심장 | 심장(心臟, ) 또는 염통은 대부분의 동물에서 순환계의 혈관을 통해 혈액을 순환시키는 근육 기관이다. 내보내진 혈액은 폐로 이산화탄소와 같은 대사폐물을 운반하면서, 산소와 영양분를 몸에 공급한다. 인간의 심장은 거의 주먹 크기이며, 흉부의 종격 안, 폐 사이에 위치한다. 보다 정확히는 가슴 한가운데 흉골을 기준으로 왼쪽에 2/3, 오른쪽으로 1/3이 위치한다. 심장은 인체에 퍼져 있는 총 80,000km(성인 기준) 이상 되는 혈관으로, 날마다 쉬지 않고 혈액을 순환시킴으로써 물질대사를 비롯하여 인체가 살아있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심장은 관상 동맥이라는 두 개의 작은 동맥들에 의해 영양분을 공급받으며 내막, 중막, 외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과 다른 포유류, 조류에서 심장은 네 개의 부분으로 나뉜다. 이는 좌심방과 우심방, 그리고 좌심실과 우심실이다. 일반적으로 우심방과 우심실은 함께 "우심장"이라고 부르고 좌심방과 좌심실은 "좌심장"이라고 부른다. 반면에 물고기는 심방과 심실, 두 개의 부분이 있는 반면, 파충류는 세 개의 부분이 있다. 건강한 심장에서는 판막이 역류를 막아 혈액이 한쪽 방향만으로 흐르게 된다. 심장은 또한 소량의 심낭액을 포함하는 보호 주머니인 심막에 둘러싸여 있다. 심장의 벽은 심외막, 심근, 심내막의 세 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장은 굴심방결절의 심박조율기 세포에 의해 형성되는 리듬에 맞춰 혈액을 펌프질한다. 심박조율기 세포는 심장이 수축하게 만드는 전류를 만들며, 전류는 방실결절을 통과하며 심장 전기 전도계를 따라 움직인다. 사람에서 산소가 부족한 혈액은 위대정맥과 아래대정맥을 통해 우심방으로 들어가 우심실로 이동한다. 이후 폐를 거치며 폐순환으로 들어가 이산화탄소는 내보내고 산소를 얻는다. 산소가 풍부한 혈액은 좌심방으로 돌아오고, 좌심실에서 대동맥을 통해 체순환으로 들어간다. 체순환은 동맥, 세동맥, 모세혈관(혈관과 세포 사이에 영양분이나 다른 물질들, 특히 세포가 이산화탄소를 내놓고 산소를 얻는 등 교환이 일어나는 혈관), 세정맥, 정맥을 거친다. 휴식 중 심박수는 분당 72회 정도이다. 운동은 일시적으로 심박수를 상승시키지만 장기적으로는 휴식기의 심박수를 감소시켜 심장 건강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심혈관계질환(CVD)은 2008년 전 세계 사망자의 30%를 차지한, 가장 흔한 사망 원인이었다. 이 중 3/4 이상은 관상동맥질환과 뇌졸중으로 인한 사망이었다. 심혈관계질환의 위험 인자에는 흡연, 과체중, 운동 부족, 고콜레스테롤혈증, 고혈압, 당뇨병의 조절 실패 등이 있다. 심혈관계질환은 가끔 아무 증상을 보이지 않기도 하지만 흉통이나 호흡곤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심장병의 진단은 병력 청취, 청진기를 이용한 심음의 청진, 심전도, 심초음파를 통해 이루어진다. 심장병을 전문으로 하는 전문가들은 심장학자라고 하지만, 심장학 외의 다른 많은 진료과 역시 심장병의 치료에 관여할 수 있다.
기능.
심장의 혈액을 내보내는 작용은 역학적으로는 펌프와 거의 같다. 즉, 심방이 확대되어 정맥에서 혈액을 빨아들인다. 심방의 수축과 심실의 확대에 의해 혈액은 심실로 빨려들어가고, 이어서 심실이 수축하여 혈액을 동맥으로 내보내는데, 이때 심방은 확대되어 다시 정맥으로부터 혈액을 빨아들인다. 이렇게 하여 심장은 태생기에 활동을 개시하고 나서 죽을 때까지 이 운동을 계속한다. 심실에서 내보내진 혈액량을 심박출량이라 한다. 건강한 사람이 안정된 상태에서 1회에 60-80㎖, 1분간 약 6~ 8ℓ를 내보낸다. 이 양은 체표 면적에 비례하며, 1m²당 2~3ℓ이다.
심장은 인체에 아주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심장 한 기관이 몸 전체의 기관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혈액은 우리 몸을 돌면서 산소 전달, 이산화탄소 흡수, 여러 영양물질을 공급한다. 그 혈액이 만약 멈추면 이산화탄소 흡수, 여러 영양물질 공급이 중단된다. 그렇기 때문에 심장이 잘못 되면 몸 전체에 아주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심장은 조그마한 충격에도 전기활동이 많이 변화하기 때문에 제일 조심해야 하는 부위이기도 하다.
구조.
심장의 바깥쪽은 두 겹의 막으로 에워싸여 있는데, 이를 장막성(漿膜性) 심막이라 한다. 하나는 심장 근육에 밀착해 있어 이것은 심장 윗부분의 혈관이 드나드는 부분(심저)에서 구부러져 다시 심장 전체를 에워싼다. 이 두 겹의 막 사이의 틈을 심막강이라 하며, 내부에는 약간의 활액이 들어 있다. 바깥쪽 심막에는 많은 결합 조직 섬유가 붙어 있는데, 그 때문에 섬유성 심막이라 한다. 그 좌우 양 측면에는 폐의 벽측 흉막과 인접해 있다.
원시적인 심장은 환형동물의 지렁이 등에서 볼 수 있다. 지렁이에는 2개의 큰 혈관이 몸의 정중선(正中線)을 따라 등쪽과 배쪽으로 달리고 있어 각각 등혈관·배혈관이라고 불리며, 또 이것을 잇는 횡행 혈관이 있다. 등혈관은 자동적으로 수축하여 혈액을 몸의 뒤쪽으로부터 앞쪽으로 보내며, 등혈관에는 체절마다 판막이 있어 혈액의 역류를 막는다. 한편, 배혈관에는 자동성이 없고 판막도 없다. 이와 같이, 지렁이의 혈액 순환은 등혈관의 자동적인 수축과 판막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환형동물의 심장이 가장 기본적인 구조라 할 수 있다.
절지동물의 심장은 '심문(心門)'이라고 하는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특징이며, 등쪽에 관 모양을 하고 있어서 '관심장'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관벽의 양쪽에는 근육'익상근'이 붙어 있어서 심장의 수축 운동을 맡는다. 바퀴벌레·지네 등은 원시적인 심장을 가지고 있는데, 배혈관이 넓어진 것 같은 심장이 배쪽에서부터 가슴 부위까지 이르고 있다. 심문은 심장의 좌우로 뚫려 있는데, 둘레는 판막으로 덮여 있다. 심장이 수축할 때는 판막이 닫히고 혈액은 동맥 속으로 보내지며, 심장이 이완할 때는 심문의 판막이 열려 심장 속으로 혈액이 흘러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바퀴벌레는 심문이 13쌍이나 있고, 지네 무리는 100쌍 이상의 심문이 있다. 절지동물의 혈관계는 동맥의 끝이 열려 있는 개방 혈관계이므로, 심장에서 보내진 혈액은 동맥을 통하여 체내의 조직으로 흘러들어 다시 심장으로 돌아온다.
연체동물의 심장은 심방과 심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위심강(圍心腔)으로 싸여 있다. 심실은 1개이지만, 심방의 수는 종류에 따라 다르다. 이를테면 부족류는 2개, 권패(나사조개)는 1개, 오징어·문어는 2개로 되어 있다. 또 혈액의 역류를 막도록 심실과 심방, 심실과 동맥 사이에는 판막이 있다. 심실에서는 2개의 동맥이 나오는데, 하나는 머리로, 또 하나는 내장으로 뻗어 있다. 오징어·문어 등의 두족류는 2심방 1심실의 심장 외에, 좌우 아가미의 뿌리 밑에 아가미 심장이라는 특수한 기관이 1개씩 있어서 아가미로 정맥혈을 보낸다.
척추동물의 경우, 진화의 과정에서 육지 생활에 적응함에 따라 심장의 구성에도 변화를 볼 수 있다. 어류의 심장은 모두 1심방 1심실이지만, 양서류 이상의 동물은 심방이 2개이다. 양서류의 심장은 2심방 1심실로서, 심실이 1개이기 때문에, 2개의 심방에서 온 혈액이 심실에서 섞인다. 한편, 파충류의 심장은 심실 안에 격벽이 생겨서, 정맥혈과 동맥혈이 혼합되는 것을 어느 정도 막아주는 2심방 불완전 2심실의 구조를 나타낸다. 조류·포유류의 심장은 2심방 2심실로서, 심방·심실이 각각 좌우로 완전히 나뉘어 있기 때문에 정맥혈과 동맥혈이 섞이는 일이 없다. 이러한 사실은 조류·포유류가 일정하게 체온을 유지하여 활발히 활동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점이다.
심방과 심실.
심장은 2심방 2심실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방은 우심방과 우심실로, 온 몸에서 온 혈액은 상하 대정맥에 의해 우심방으로 돌아가며, 심실과의 경계인 방실판(房室瓣)을 통해서 우심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밀려나오면 폐동맥을 통해서 폐로 보내진다. 우심실과 폐동맥의 경계에는 폐동맥판이 있다. 두 번째 방은 좌심방과 좌심실이다. 폐에서 나온 혈액이 4개의 폐정맥에서 좌심방으로 돌아오면 심실과의 경계인 방실판(2첨판)을 통해서 좌심실로 들어가고, 여기에서 밀려나오면 대동맥으로 유출되어 온몸으로 보내진다. 좌심실과 대동맥과의 경계에는 대동맥판이 있다. 이 두 개의 방은 심방과 심방, 심실과 심실이 인접해 있고, 좌우를 구획하는 막을 각각 심방 중격(中隔)·심실 중격이라 한다. 심방 중격은 비교적 엷은 막으로, 태생기에 아래위에서 뻗어나와 중앙부에 구멍이 남는데, 출생후 1년 정도 되면 폐쇄된다. 심실 중격은 근육으로 된 두꺼운 벽으로, 태생기에 심첨(心尖)에서 뻗어나와 위쪽에 근육이 없는 곳에 약간 남을 뿐으로 좌우가 완전히 분리된다. 이 분리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고 좌우 심실 사이에 연락 구멍이 남는 상태가 심실 중격 결손이다.
심방과 심실 벽은 심장에 독특한 근육(심근)으로 되어 있다. 완성된 심장의 심방은 약 절반 정도가 원래의 심방(심근 벽을 가진 심방)이고, 나머지 부분은 원래는 정맥관이었던 것이 심방에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은 벽이 엷다. 심실벽은 모두 심근으로 되어 있는데, 좌심실 벽은 우심실 벽보다 3~4배로 심장 구조 중 가장 두껍다. 이것은 우심실은 혈액이 폐에만 도달할 정도의 힘으로 밀어내면 되지만 좌심실은 온몸에 혈액이 전달되도록 강한 힘으로 밀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심실 내면에는 심근이 불규칙하게 융기해 있는데, 이를 육주(肉柱)라고 한다. 그중 몇 개는 특히 잘 발달하여 손가락 모양으로 돌출해 있으며, 이를 유두근(乳頭筋)이라 한다. 유두근 끝에는 이첨판이나 삼첨판의 끝부분이 뻗어나온 건삭(腱索)이 붙어 있다. 심방이나 심실 내면은 심내막이라 하며, 한 겹의 엷은 막으로 덮여 있다.
심장벽의 혈관.
심장 내부에는 혈액이 흐르고 있는데, 이 혈액에서 심근 등이 산소나 영양을 받아들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은 혈액이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 두꺼운 근육으로 된 내부와의 사이에서 물질 교환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심근의 영양은 관상동맥에 의해 보급된다. 이 동맥은 대동맥 기부에서 대동맥판 바로 근처까지 가지가 갈라지며, 대동맥의 첫 가지이다. 관상동맥은 좌우 2개가 나오는데, 약 60% 정도의 사람이 오른쪽 관상동맥이 약간 굵고 길다. 관상동맥은 심방과 심실 사이의 경계에 있는 홈(관상구)을 따라 달리며, 그 도중에 심방과 심실로 가지를 보낸다. 관상정맥은 동맥과 거의 나란히 달리며, 심장 뒷면에 있는 관상 정맥동에 모여 우심실로 들어간다.
심장의 특징과 위치.
심장은 근육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속이 비어 있는 장기이며 무게는 약 250~300그램이다. 심장은 양쪽 허파 사이의 공간에 위치하며, 정중선상에서 볼 때 2/3가 왼쪽으로 치우쳐 있고 횡격막 위에 얹혀져 있다. 심장의 경계는 위쪽은 제2늑연골, 오른쪽은 흉골의 약간 오른편, 왼쪽은 제3~5늑연골까지 걸쳐 있다.
심장의 식용.
소, 양, 돼지, 닭 등의 가금류의 심장이 여러 나라에서 식용으로 쓰인다. 심장은 내장으로 분류되지만 근육 때문에 맛은 보통 육고기와 같다. 맛과 생김새가 사슴고기와 유사하다.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지는 순대의 '염통' 부분도 돼지의 심장에 해당된다.
심장에서의 특수근전도계의 작용.
동방결절에서 발생된 느린 반응에 의해서 퍼니 채널(funny channel)의 안정막 전압에 의해서 활동전압이 생기게 되고 이것이 심방 전체로 퍼지게 된다. 이 전압은 방실 결절에서 지연되면서 심실과 심방의 시간차가 나는 박동이 가능하게 한다. 여기서 심장 세포는 기능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함께 뛰는 것이 정상이지만 유일하게 심방과 심장 사이에는 섬유질로 인한 차단 효과로 특수근전도계를 통하지 않고는 전도가 되지 않는다. 방실결절에서 지연된 활동전압이 푸르키네섬유를 통해서 아주 빠른 속도로 심실 전체로 퍼져 나가게 되어서 심실이 수축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심근 세포는 빠른 반응을 보이게 되며, 0 단계에서는 Na 채널의 빠른 유입으로 인해서 가파른 곡선으로 탈분극이 되고, 1단계에서는 K 채널의 유출로 인해서 약간 재분극을 했다가 다시 2단계에서 Ca 채널의 유입으로 인해 평탄기를 가지면서 활동전압이 길게 유지되고 3단계에 다시 K 채널의 유출로 재분극이 되고 4 단계에 안정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심근세포의 활동전압은 그 유지시간이 길다. 따라서 절대적 불응기가 길게 되어서 강축 현상이 일어나지 않아서 부정맥을 방지하는 하나의 원리가 될 수 있다. 푸르키네섬유나 방실 결절도 스스로 활동전압을 만들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많은 양의 활동전압을 만드는 동방결절에 의해서 억제 되므로 심주기에서는 동방결절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
3461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61 | 파두츠 | 파두츠(, )는 리히텐슈타인의 수도로 인구는 2005년 기준으로 5019명이다. 리히텐슈타인 공작가(家)는 본래 오스트리아에 거소가 있었는데, 1938년부터 이곳에 거소를 두었다.
스위스 국경 부근의 라인 강 동쪽 비탈면에 위치하며 16세기에 건축된 군주 요제프 2세의 고성(古城)이 시가를 내려다보고 있다. 파두츠는 행정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소를 방목하고 곡물이나 포도가 재배되는 농업 중심지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섬유·식품·정밀 기계 등의 경공업도 활발하며, 아름다운 환경에 힘입어 관광지로서도 알려져 있다. 시 중앙에 있는 우체국에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아름다운 우표를 사려고 많은 관광객이 모인다. |
3462 | 82597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62 | 룩셈부르크 | 룩셈부르크 대공국(, , , , ), 약칭 룩셈부르크(, , , )는 서유럽에 위치한 국가이며 대공이 통치하는 대공국이다. 수도는 룩셈부르크이다. 룩셈부르크는 세계에서 국민 소득이 높은 나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세계 최대의 철강 업체 아르셀로미탈의 본사가 룩셈부르크에 있다.
유럽 연합, 경제협력개발기구, 유엔, 북대서양 조약 기구, 베네룩스 경제 연합의 창립 회원국이며, 수도 룩셈부르크에는 유럽 연합의 여러 기관이 위치하고 있다. 2013년에 역사상 처음으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이사국으로 선출되어, 2014년에 임기를 마쳤다. 2016년 기준 룩셈부르크 여권 소지자가 무비자 혹은 도착비자로 여행할 수 있는 국가는 187개국이며, 이는 전세계 15위에 해당한다.
지리.
독일, 프랑스, 벨기에 사이에 있는 내륙국가로, 독일과 프랑스의 완충국으로서의 의미도 지녔다.
행정 구역.
수도는 룩셈부르크이다. 룩셈부르크는 3개 구와 12개 주, 116개 지방 자치체로 구성되어 있다.
행정 구역 목록.
다음은 룩셈부르크의 행정 구역 목록이다.
경제.
전통적으로 협소한 국토 때문에 이웃 나라와 유대를 굳게 하여 1843년부터 1918년에 독일과 관세 동맹을 맺고, 1921년 이후 벨기에-룩셈부르크 경제동맹, 1944년 베네룩스 경제동맹,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 1958년 유럽경제공동체 등에 가맹함으로써 소국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있다. 프랑스와 국경을 따라 발달한 철강 산업은 룩셈부르크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철강 산업은 무역액의 29%, 국내총생산(GDP)의 1.8%, 산업고용의 22%, 노동력의 3.9%를 차지한다.
남부의 구틀란트를 중심으로 농업이 이루어져 감자, 보리, 사탕무 등을 생산하고 있으며, 독일 국경을 따라 흐르는 모젤 강 연안의 포도원에서 생산하는 포도주는 특히 유명하다. 이 나라 제1의 산업인 광공업은 남서부의 뒤들랑주, 로딩겐, 에슈쉬르알제트, 디페르당주 등지에서 산출되는 철광석을 원료로 하였으나, 철광석층의 대부분이 고갈되어 프랑스의 수입에 의존한다.
이밖에 화학제품·금속제품·시멘트를 생산하며, 맥주, 담배, 낙농제품의 제조도 성하다. 그러나 석유파동 이래 세계적 경제의 혼미는 룩셈부르크의 철강업에도 큰 영향을 끼쳐 정부는 경제적 부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외국기업유치에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자국(自國)을 금융시장으로 부상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현재 룩셈부르크는 은행·보험업, 철강업을 기간산업으로 하는 서비스산업국이자 공업국으로 실업률은 유럽 연합 국가 중 최저이며, 1인당 국내총생산은 세계 최고수준이다. 1998년 이후에도 제조업의 수출증가나 금융업의 호조에 의해 고성장을 유지하였다.
무역면에서는 1998년 수출 208억 달러, 수입 174억 달러이며, 주요 수출품은 금속, 기계, 전기제품, 플라스틱, 고무, 섬유 등이고 수입품은 기계류, 전기제품, 금속, 수송용 기기, 광산물품(석유 포함) 등이다. 주요 무역 상대국은 독일, 프랑스, 벨기에, 영국, 네덜란드, 이탈리아, 미국, 중국 등이다.
주민.
게르만족이 바탕이 되고 프랑스인과의 혼혈이 있다. 포르투갈인과 이탈리아인들이 소수로 살고 있는 데, 이들은 룩셈부르크의 철강 산업의 붐이 일어날 때 노동자로 들어왔다.
언어.
헌법상의 명시적 조항은 없고, 룩셈부르크어(이 언어는 독일어의 방언으로 규정한다), 프랑스어, 독일어가 사실상의 공용어이다.
입법 활동은 프랑스어가 독점하고, 행정 및 사법분야는 3개 언어를 사용한다. 전 국민의 97%가 익숙한 프랑스어이기에,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영어도 관광 장소에서 사용한다.
종교.
국교는 없고, 주민 대부분은 전통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에 속해 있다. 그러나 세속화 경향이 심하고, 외국인의 유입이 많아 무신론자나 이웃 종교 신도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개신교, 유대교, 정교회, 성공회, 이슬람교 등의 신자가 있다.
대한관계.
룩셈부르크는 한국전쟁 참전국으로 UN군으로 참전하여 44명의 병력을 파병하였다. 1961년 대한민국과 수교하였으며 해운협정(1987년)과 항공 협정(2003년)을 체결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2001년에 수교하였다. 2016년 기준으로 별도의 한국대사관이 존재하지 않고, 주 벨기에 대사관에서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
3469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69 | 기원전 24년 | |
3470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70 | 기원전 23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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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2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92 | 기원전 1년 | |
3493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93 | 1년 | 길이.
= 365일 6시 9분 9.5초 + 0.0001초(t - 1900) (황도상의 고정점을 기준)
= 363일 6시 13분 53.0초 + 0.0026초(t - 1900) (근일점 기준)
= 365일 05시 48분 46.0초 - 0.00530초(t - 1900) (춘분점 기준) |
3494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94 | 2년 | |
3495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95 | 3년 | |
3496 | 32771967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96 | 4년 | |
3497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97 | 5년 | 5년은 전한-원시가 있는 년이다. |
3499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499 | 6년 | |
3500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00 | 7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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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2 | 32772024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02 | 9년 | |
3503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03 | 10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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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5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05 | 12년 | |
3506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06 | 13년 | |
3507 | 32992994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07 | 14년 | |
3508 | 22169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08 | 15년 | |
3515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15 | 이벤 모글렌 | 이벤 모글렌(Eben Moglen)은 컬럼비아 로스쿨의 교수이다. 또한 그는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을 포함한 수많은 프로 보노 고객들을 변호하는 소프트웨어 자유 법률센터(Software Freedom Law Center)의 설립자 겸 회장이다. 리처드 스톨만과 함께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의 GPL을 포함한 GNU 라이선스를 작성했다. |
3516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16 | 16년 | |
3517 | 32993013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17 | 17년 | |
3518 | 3299301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18 | 18년 | 사건.
그의 나이는 27세. |
3519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19 | 19년 | |
3520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20 | 20년 | |
3521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21 | 21년 | |
3522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22 | 22년 | |
3523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23 | 23년 | |
3524 | 32993024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24 | 24년 | |
3525 | 32993027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25 | 25년 | 사건.
후한이 건국되었다. |
3529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29 | 귀스타브 쿠르베 | 장데지레 귀스타브 쿠르베(, 1819년 6월 10일 - 1877년 12월 31일)는 19세기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이다.
생애.
쿠르베는 1819년 프랑스 프랑슈콩테 주 오르낭 시에서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중등학교 ()를 나온 후, 1837년 브장송()의 왕립 고등학교()에 입학함과 동시에 근교에 있는 사립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배웠다. 리세 졸업 후 1840년 쿠르베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할 계획으로 파리로 간다. 그러나 곧 법학 수업을 포기하고 그림 그리기에 전념하여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847년 네덜란드를 여행한 후, 렘브란트의 화풍, 베네치아화파 그리고 에스파냐 화풍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 분석한다. 1850년을 전후로 하여 쿠르베는 자신의 고유한 화풍인 사실주의 색채를 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의 철저한 사실주의는 천사를 그리라는 주문에 "천사를 실제로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릴 수 없다"라고 딱 잘라 거절했다는 일화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예술활동에 숨기보다는 파리코뮌에 참여할 정도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58살에 짧은 생을 마감하셨다. |
3530 | 8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30 | 쿠르베 | |
3531 | 5668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31 | 렘브란트 반 라인 | |
3532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32 | 로코코 | 로코코(Rococo 또는 Late Baroque)는 18세기 프랑스에서 생겨난 예술형식이다. 어원은 프랑스어 "rocaille"(조개무늬 장식, 자갈)에서 왔다.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받아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 건축의 유행을 말한다. 바로크 양식이 수정, 약화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로코코는 왕실예술이 아니라 귀족과 부르주아의 예술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희와 쾌락의 추구에 몰두해 있던 루이 14세 사후,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귀족계급이 추구한, 사치스럽고 우아한 성격 및 유희적이고 변덕스러운 매력을, 그러나 동시에 부드럽고, 내면적인 성격을 가진 사교계 예술을 말하는 것이다. 귀족계급의 주거환경을 장식하기 위해 에로틱한 주제나 아늑함과 감미로움이 추구되었고 개인의 감성적 체험을 표출하는 소품위주로 제작되었다. 또한 로코코에서는 신와저리가 많이 유행하였다.
로코코란 낱말이 서양 예술사에서 전문용어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아마 1840년대로 보인다 (1842년 프랑스 학술원에서 이 낱말의 사용 인정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좁은 의미에서 로코코란 루이 15세 시대 (1730년 - 1750년)에 유행하던 프랑스 특유의 건축의 내부장식, 미술, 생활용구의 장식적인 양식을 의미한다 (조개무늬를 장식으로 많이 쓰기 때문에 "style de rocaille"라고 부른다). 후에 이 국한된 의미를 벗어나 예술사를 연구하는 이들 사이에서 후기 바로크를 이어주는 건축과 서양미술의 한 예술 양식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로코코는 바로크나 르네상스처럼 한 시대를 대표하는 사조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18세기는 로코코 뿐만 아니라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가 병존하는 시대이며, 이 시기에 유행하고 나타난 예술양식들은 서로간에 영향을 받고 주는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건축물로 상수시 궁전(Sans-Souci Palace)이 있다. |
3533 | 29389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33 | 르네 데카르트 | 르네 데카르트(, , , 1596년 3월 31일 - 1650년 2월 11일)는 프랑스의 철학자, 수학자, 과학자, 근대 철학의 아버지, 해석기하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는 합리론의 대표주자이며 본인의 대표 저서 《방법서설》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계몽사상의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주체'의 근본 원리를 처음으로 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1606년 예수회가 운영하는 라 플레쉬 콜레주(Collège la Flèche)에 입학하여 1614년까지 8년간에 걸쳐 철저한 중세식 그리고 인본주의 교육을 받게 된다. 1626년부터 2년 동안 수학과 굴절광학을 연구하며 미완성 논문 <정신지도의 규칙>을 썼다. 1628년 말, 네덜란드로 돌아온 그는 다시 저술 활동에 몰두해 《세계론》(Traite du monde)을 프랑스어로 출판한다. 1637년에는 《방법서설》에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의 세 가지 부분을 덧붙여 익명을 출판했다가 후에 프랑스어로 《방법서설》을 완성한다.
1644년 신플라톤주의와 스토아주의를 계승, 자신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라틴어로 《철학 원리》를 출판한다. 그 후 그는 여러 사람과 편지로 자기 생각을 전하곤 했는데, 보헤미아의 왕 프리드리히의 딸 팔츠의 엘리자베스에게 최고선에 관한 자기 생각들을 편지로 보낸 것들이 모여 1649년 출판된 그의 마지막 책, 《정념론》(Les passions de l'ame)이 된다. 1650년 2월 11일, 그는 폐렴에 걸려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생애.
초기.
데카르트는 1596년 3월 31일 투렌 지방(Touraine)의 투르 인근에 있는 소도시 라에의 법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브르타뉴 지역 렌의 시의원이었으며,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14달이 못 되어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는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고, 어린 시절 몸이 무척 허약했다고 한다.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지만 그가 태어난 장소는 위그노 교세가 힘을 떨치던 푸아투 지방이었다.
그는 주변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강해 어려서부터 조용한 곳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버릇이 있었다. 그의 부친은 그에게 철학가 기질이 있음을 발견하고 ‘꼬마 철학가’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부자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는지 그는 스스로 형제 중에서 아버지가 가장 싫어하는 아이였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형제들과도 살가운 정을 나누지 못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그는 자주 집을 떠나 혼자 여행을 다녔고 친구들에게 마음을 쏟았다.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장난감 중에서 사팔뜨기 인형을 제일 좋아했던 그는 커서도 유독 장애인들에게 호감을 보였다.
1607년 허약한 체질 탓에 조금은 늦은 나이로 예수회가 운영하는 라 플레쉬 콜레주(Collège la Flèche)에 입학한다. 데카르트는 여기서 수학 과학을 처음으로 배웠는데,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이론도 배웠다.
데카르트의 선생님은 그를 똑똑하고 부지런하며, 품행이 단정하고, 내성적이지만 승부욕이 강하고, 수학에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학교의 구시대적 교육방식에 불만을 참지 못하고 자신이 배운 교과서를 잡다한 지식의 쓰레기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1614년까지 8년간에 걸쳐 철저하게 중세식 그리고 인본주의 교육을 받았다. 5년간 라틴어, 수사학, 고전 작가 수업을 받았고 3년간 변증론에서 비롯하여 자연철학, 형이상학 그리고 윤리학을 포괄하는 철학 수업을 받았다. 그가 이 시기에 받은 교육은 후에 그의 저서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기게 되는데 특히 《방법서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데카르트는 라 플레쉬를 졸업하고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푸아티에 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서는 수학·자연 과학·법률학·스콜라 철학 등 배우고, 수학만이 명증한 지식이라고 생각하였다. 1616년 리상스(Licence)를 취득한다. 이후 그는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에서 실질적인 지식을 얻고자 학교 밖으로 나갔고, 다시는 제도권 교육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식견을 높이기 위해 1617년 그를 다시 파리로 보냈다. 그러나 그는 화려한 도시 생활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수학과 관련된 도박만이 그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1617년의 어느 날 한가로이 길을 걷던 데카르트는 벽에 붙은 광고지를 발견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광고지가 붙은 곳으로 다가갔다. 광고는 네덜란드어로 적혀 있어서 내용을 알 수 없었다. 그는 네덜란드어를 아는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행인을 발견한 데카르트는 광고에 적힌 내용을 물었다. 뜻밖에도 그 사람은 네덜란드 대학교 교장이었고 데카르트에게 광고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광고는 어려운 기하학 문제가 적혀 있었고 이 문제를 푸는 사람에게 사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상황을 이해한 데카르트는 단지 몇 시간 만에 문제를 풀었고 자신에게 수학적 재능이 있음을 발견했다.
졸업 후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네덜란드에 갔으며, 30년 전쟁이 일어나자 독일에 출정하였다. 1619년 네덜란드를 여행하면서 첫 작품인 짧은 《음악 개론》(Compendium Musicae)을 썼다. 같은 해에 독일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군대에 들어가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여행한다. 입대 후 1619년 11월에는 백산 전투도 겪는다. 병영의 침대에 누워 천장에 붙어있는 파리를 보고 파리의 위치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방법을 찾으려고 애쓰다가 좌표계를 착안하기도 한다.
1619년 11월 10일에는 울름 근교의 한 병영에서 자기 삶의 길을 밝혀 주는 꿈을 꾸게 된다. 데카르트는 심각한 감기에 걸려 벽난로 안에서 문을 굳게 닫고 잠에 든다. 거기서 세 가지 꿈을 꾸고, 성령이 자신에게 새로운 철학의 영감을 주었다고 믿게 된다. 첫 번째 꿈에서 데카르트는 심한 바람이 불고 있는 거리 한 모퉁이에 서 있었다. 그는 오른쪽 다리가 약하여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는데 그 근처에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한 사람이 있어 데카르트 자신이 그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잠깐 눈을 떴다가 다시 잠에 빠져들었는데, 두 번째 꿈에서 그는 미신으로 흐려지지 않는 과학의 눈으로 무서운 폭풍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폭풍은 일단 그 정체가 폭로되고 난 후에는 그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세 번째로 꿈을 꿀 때는, 테이블 위에 사전과 그 옆에 다른 책이 놓여 있는데 ‘나는 어떠한 생활을 보내야 할 것인가?’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오며 낯선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Quiet Non’(그는 이것을 인간의 지식과 학문의 ‘참과 거짓’이라 해석함)으로 시작하는 시를 보여주었다. 그는 세 번째 꿈에서 깨어난 후에 이미 꾼 꿈들의 의미를 생각하였는데 첫 번째 꿈은 과거의 오류에 대한 경고이며, 두 번째 꿈은 그를 사로잡은 진실의 정신이 내습한다는 것이고, 마지막 꿈은 모든 과학의 가치와 참된 지기에의 길을 열 것을 명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중 두 번째 꿈은 현대의학적으로는 폭발머리증후군으로 이해된다.
그는 이미 이 꿈들을 꾸기 8개월 전 베크만에게 보낸 보고에 ‘앞으로는 기하학에서 발견해야 할 것은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라고 자신의 계획을 공언하였다. 기하학과 대수학의 결합으로 두 개의 학문 영역을 하나의 학문으로 파악하는 데 성공한 데카르트는 더 나아가 모든 학문을 하나의 방법론으로 통합하려 하였다. 모든 문제는 동일하고 보편적인 ‘수학적’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 방법을 그는 '보편수학’이라고 불렀으며, 현대에는 해석기하학이라 불린다. 하지만 철학의 진술은 수학의 진술처럼 아주 기초적이고, 논리적이고, 엄격해야만 하는데 아직은 그러한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 철학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해서 우선 모든 것들에 대해 회의했다. 그럼으로써 모든 근본 중의 근본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근대철학의 토대를 발견했으며, 이 토대 위에 하나의 새로운 철학의 체계를 세웠다. 곧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사상에 도달한다.
학자로서의 삶.
프랑스.
1620년 제대하고 프랑스에 귀환, 1626년부터 파리에서 수학·자연 과학, 특히 광학을 연구하였다. 1627년에 다시 종군한 후, 1628년 단편 <정신 지도의 법칙>을 집필, 자신의 방법론 체계를 세우려 하였다. 같은 해 겨울 연구와 사색의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로 건너가 철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방법서설》, 《성찰》, 《철학의 원리》, 《정념론》 등은 네덜란드에 약 20년간 머물러 있는 동안에 저술한 것이다.
네덜란드.
1628년 겨울에 데카르트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향 밑에 있는 프랑스를 떠나,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가 지배적인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네덜란드에서 암스테르담, 하아렘, 에그몬드 등의 도시로 여러 차례 주거지를 옮기면서 더러는 개인 교사로 혹은 은둔 학자로 생활을 했다. 이 시기 (1630년 - 1633년)에 자연과학에 관한 책 '《세계론》(Le Monde)을 집필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 책에서 그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주장한 지동설을 바탕으로 세계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진술했다.
1637년부터 데카르트는 존재론과 인식론 문제에 몰두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해에 《방법서설》을 출판했다. 존재론과 인식론에 관한 연구 결과는 1641년 《제1 철학에 관한 성찰》(Meditationes 후에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판하게 된다.
사망.
(left) The tomb of Descartes (middle, with detail of the inscription), in the , Paris; (right) memorial to Descartes, erected in the 1720s, in the Adolf Fredriks kyrka1649년 2월, 스웨덴의 여왕 크리스티나는 데카르트를 스웨덴 황궁으로 초대했다. “크리스티나는 학문에 대한 열정과 해박한 지식을 지녔다. 그녀는 여왕으로서 위대한 학자의 시간을 뺏을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그녀에게 사랑에 관한 글을 써서 바쳤는데, 이것은 그때까지 그가 무시해왔던 제목이었다.” 여왕은 일주일에 세 번 그에게서 철학 강의를 들었는데 반드시 새벽 5시에 강의하도록 명했다. 데카르트는 그동안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왕의 명에 따라 일주일에 3일은 한밤중에 일어나서 스웨덴의 찬 공기를 가르며 자신의 숙소에서 여왕의 서재로 찾아가야 했다. 1650년 2월 1일, 새벽 찬 바람을 맞은 데카르트는 감기에 걸렸고, 곧바로 폐렴으로 악화되었다. 데카르트는 1650년 2월 11일 스톡홀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골은 1667년에 파리에 돌아왔고 주느비에브 뒤몽 성당에 안치되었다. 1799년 프랑스 정부는 그의 유해를 프랑스 역사관으로 옮겨 프랑스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과 함께 모셨다. 1819년 이후 그의 유골은 다시 생 제르맹 데프레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데카르트, 유럽 르네상스 이후 인류를 위해 처음으로 이성의 권리를 쟁취하고 확보한 사람이다.”
사상.
그는 학문 중에서 수학만이 확실한 것으로 철학도 수학과 같이 분명하고 명확히 드러나는 진리를 출발점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로 인해 그는 기존의 모든 지식을 의심하였는데, 그렇지만 최후의 의심할 수 없는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 도달, 이것이 철학의 근본 기초라고 설명하였다. 그 기계적 우주관은 18세기 프랑스의 유물론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수학에 있어서는 해석 기하학을 창시하여 근대 수학의 길을 열어놓았다.
데카르트는 수학자로서도 유명하지만 철학자로의 삶도 살았다. 데카르트는 가장 확실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를 찾으려 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진리가 아닌 것들을 소거하는 것인데, 그 방법은 저서 《방법서설》에 잘 나타나 있다. 데카르트는 확실한 진리를 찾으려 불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감각도 배제 했는데, 이는 감각도 반드시 맞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도달한 결론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이 결론에 도달한 것은 《방법서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전능한 악마가 인간을 속이려 한다고 해도, 악마가 속이려면 생각하는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이는 《제일철학을 위한 성찰》에도 나와있다.) 이 명제는 근대 철학을 대표하는 명제이며, 데카르트 이후 근대 철학은 이 명제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특히 데카르트가 사용한 관념이라는 개념은 칸트와 같은 철학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데카르트는 본유관념과 인위관념, 외래관념을 분리하였다. 여기서 외래관념은 밖에서 오는 관념을 말하고 인위관념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하며, 본유관념은 태어나면서부터 존재하는 관념을 말한다. 본유관념은 '삼각형의 꼭짓점은 세개이다.', '정육면체의 면은 여섯개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두 평행선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 와 같은 것으로, 언제나 확실하게 참인 것으로 판단되는 것을 말한다. 덧붙여 데카르트는 신의 관념도 확실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존재론적 증명을 통하여 신이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론적 증명은 나중에 칸트의 비판을 받았다.
데카르트는 주체와 대상을 일치시키려 실체를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바로 연장과 사유이다. 연장은 구체적인 부피와 같은 공간을 차지하는 실체를 말하고, 사유는 연장과 달리 부피와 같은 것이 없는 실체를 말한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연장과 사유가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사유는 몸을 제어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몸과 사유를 이어주는 부분을 송과선으로 보았는데, 데카르트 이후 철학자들은 이 송과선을 몸으로 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논란을 벌이기도 했다.
업적.
르네 데카르트는 근대사상의 기본 틀을 처음으로 확립함으로써 근대철학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는 정신과 물질,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는 이원론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과학적 자연관과 정신의 형이상학을 연결지어 세상을 몰가치적이고 합리적으로 보는 태도와 정신의 내면성을 강조하였다. 대륙철학의 합리주의의 근본이 된 그의 회의론은 다양한 해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의심이 가능한 모든 믿음을 제외함으로써 기본적인 신념만을 남기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수학을 이러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기본 신념으로 여겨 철학을 포함한 모든 진리를 수학적인 원리로 해석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그는 철학 뿐만 아니라 수학, 과학적인 업적도 이룩하였다. 1625년부터 파리에 거주하며 광학을 연구한 끝에 빛의 굴절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1637년 《방법서설》 및 이를 서론으로 하는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의 세 시론을 출간하였다. 수학자로서의 그는 직교 좌표계를 만들어 해석기하학의 창시자로 알려졌으며 방정식의 미지수에 최초로 formula_1를 사용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거듭제곱을 표현하기 위한 지수의 사용 등을 발명했다. 데카르트는 다양한 여러 상황에서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수학을 만든 혁명적인 수학자이며 동시에 고대 그리스 과학을 모두 집대성한 철학자이자 과학자이다. 그의 보편적인 수학은 본인이 예견했듯이 광학, 천문학, 기상학, 음향학, 화학, 건축학, 물리학, 회계 등에 다양하게 응용되었으며 본인이 미처 예견하지 못했던 분야인 전기학, 인공두뇌학, 미생물학, 유전학, 경제학 등에도 응용되고 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며 이 절대적인 진리를 이용해 구성요소의 진리값을 이용한 다른 진술을 증명하는 법을 개발했다. 그는 과학을 대하는 데에 있어 크기, 모양, 운동 등의 경험적인 양에 집중하고자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는 이론에 따라 진공의 개념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세 가지 물질의 연장이 곧 공간을 이루고 있다고 설명했다. 르네 데카르트의 글과 방법론을 곁들인 데카르트적 회의는 서양철학의 특징적인 방법 중의 하나가 되었다. 데카르트의 철학에 관한 부분은 뒤에서 다루기로 한다.
수학적 업적.
르네 데카르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해석기하학의 창시이다. 특히 그가 고안한 직교좌표계는 이전까지 독립적으로 다루어졌던 대수론과 기하학을 체계적으로 융합시켜 자신 이후의 뉴턴역학을 비롯한 근대 수학과 과학의 발전에 바탕이 되었다. 데카르트의 직교좌표계는 당시까지 지배적이었던 유클리드의 기하학적 공간을 대체하였고, 이는 아인슈타인이 새로운 공간 개념을 도입할 때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방법서설》("Discourse on Method)"에 포함된 소논문 《"La Géométrie"》(1637)은 수학의 역사에 큰 공헌을 했다. 논문에서 그는 곡선에 대수 방정식을 부여하는 방법을 발견해, 모든 원추곡선을 단 한 종류의 2차 방정식으로 표시하는 데에 성공하고 그를 제시함으로써 과학과 수학을 연결하는 중요한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또한 그는 숫자(밑) 위에 작은 숫자(지수)를 씀으로써 거듭제곱을 간단하게 표현하는 방식을 생각해냈다. 그의 수학적 업적은 라이프니츠가 제안하고 뉴턴이 발전시킨 미적분학의 근간을 이루었다. "실계수의 n차방정식의 양의 실근의 개수는 다항식 formula_2의 실수의 열사이에서 일어나는 부호변화의 수와 같거나 그 수보다 짝수 개만큼 적다."는 데카르트의 부호법칙은 다항식의 근의 개수를 구하는 데에 유용하게 사용된다. 방정식의 미지수에 처음으로 formula_1를 사용한 것도 르네 데카르트의 업적이다. 1618년 르네 데카르트는 네덜란드로 여행을 떠나 이삭 베크만을 조우했으며, 그에게 많은 문제에 수학을 적용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그는 수학이 어떻게 류트의 음정을 맞추는 데에 정확하게 응용될 수 있는지와 무거운 물체가 물 속에 들어갔을 때 수면의 높이 변화를 나타내는 대수적인 공식을 제안했다. 또한 진공 상태에서 물체가 낙하할 때 임의의 시간에서 그 물체가 가속하는 속도를 예측하는 방법과 어떻게 회전하는 팽이가 똑바로 서있으며 이를 통해 인간이 공중에 뜰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했다. 베크만의 일기를 통해 1618년 말까지 데카르트가 이미 기하학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대수 방정식의 적용을 여러 방면에 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르네 데카르트는 수학을 "불연속적인 양의 과학"으로, 기하학을 "연속적인 양의 과학"으로 보았으나 그 둘 간의 장벽은 해석기하학이 창시됨에 따라 허물어졌다. 그는 산술과 대수학은 그저 숫자의 과학이 아니라 무리수의 사용을 정의하고 새로운 수학의 가능성을 연 명제의 과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방법서설(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을 통해 그는 수학과 모든 과학은 상호관계적이며 둘을 따로 생각하는 것보다 전체적으로 다루는 것이 쉽다고 주장했다.
과학적 업적.
과학자로서의 르네 데카르트는 물리학 분야에 큰 공헌을 했다. 10살 때, 라 플레슈(La Fleche)의 학교에 입학해 논리학, 윤리학, 물리학과 형이상학, 유클리드 기하학과 새로운 대수학 및 갈릴레이의 망원경에 의한 최신 업적에 이르기까지의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과학자로서의 초석을 다졌다. 1618년 르네는 군에 자원 입대하여 장교로서 복무하였는데, 이 때 그의 과학적 흥미는 탄도학, 음향학, 투시법, 군사기술, 항해술 등까지 발전시켰다. 그 해 겨울 아마추어 과학자이자 당시 수학의 지도자였던 이삭 베크만을 처음 만나 다시 이론적인 문제와 물리학에 흥미를 가진 이후 몇 년간 물리학분야에 있어 빛의 원리, 공학, 자유낙하 등에 관련된 여러 문제들을 해결했다. 특히 그가 빛의 원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빛을 중요시하던 스토아 학파의 영향을 받은 점도 있다(사실 이는 당대 수학자나 과학자들의 공통적인 경향이기도 했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 이론적 전개 방식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가장 작은 수의 원리로부터 출발하여 이미 알려져 있는 모든 사실을 설명하고, 더구나 새로운 사실의 발견으로까지 이끌어 내는 방식이다. "스넬의 법칙"이라고도 불리는 그의 굴절의 법칙이 이 때 발견되었으며, 그는 자신의 저서 《굴절광학》에서 독자적으로 증명한 "굴절의 법칙"을 언급하는 한편, 시력에 관한 다양한 연구 내용을 설명했다. 여기서 그는 굴절의 법칙에 대해 서술할 때 자신이 고안한 직교좌표계를 활용하여 법칙을 증명하기도 했다. 그는 《천체론(Le monde)》를 통해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주장한 지동설을 바탕으로 하는 세계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후일 뉴턴에 의해 거부된 그의 와류이론에 의하면 에테르의 미소한 입자들이 혹성이나 태양 주위에 거대한 회전흐름, 즉 소용돌이 속에 떠 있는 어린이의 보트와 같이, 이 태양의 소용돌이 속으로 운반되고, 달도 마찬가지로 지구의 주위로 운반된다는 것이다. 르네 데카르트의 물리학은 "Clifford Truesdell"로부터 "데카르트의 물리학은 현대적 의미의 시초이다.""(Truesdell 1984,6)"라는 평을 들었다. 데카르트는 사물의 본질을 외연(extension)으로 보았다. 사물에 체계적 의심을 적용해 그것의 감각적 특징들을 지워 나간다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공간의 일부를 채우고 있는 무색, 무미, 무취의 어떠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의 공간은 물질로 꽉 차있는 플레넘(plenum)으로, 불의 원소, 공기의 원소, 흙의 원소의 세 종류의 물질로 채워져 있다. 다른 어떠한 감각적 속성이 없이도 크기, 모양, 운동 등으로만 물질을 정의해 차가움, 뜨거움, 습함 등의 질적인 개념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은 데카르트는 플래넘을 구성하는 작은 원소들의 충돌이 자연의 크고 작은 변화들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또한 데카르트는 그의 책에서 눈에 대한 해부학적 구조를 설명하며 빛이나 외부 이미지가 동공과 내부 유리체를 거쳐 굴절되고 상이 뒤집혀 망막에 맺히고 시신경을 통해 자극이 전달되는 과정 뿐 아니라 눈이 얼마나 상을 최대화하고 또렷하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과정을 현미경과 망원경의 개념에까지 확대시켰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렌즈 깎는 법을 설명하며 망원경과 현미경의 유용성을 언급했다. 또한 생물학 분야에서의 르네 데카르트는 윌리암, 하베이와 나란히 근대 생리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는 전생리학의 기초가 되는 대가적 가설을 도입했다. 다양한 동물의 머리를 해부해보며 상상력과 기억이 위치하는 곳을 찾기 위한 연구를 했으며, 네덜란드에 머무른 기간 동안 많은 시간을 들여 인체를 해부했다. 데카르트는 가설적 모델 방법을 통해 육체 전체를 일종의 기계로 간주해 눈의 깜빡임과 같은 자율적인 동작 현상과 보행과 같은 복합 동작에 있어 많은 관찰과 다양한 기계론적 설명을 내세웠다. 이러한 모든 동작과 운동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하는 그의 방식은 근대적 생리학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결국 그는 자연에서 영혼을 제거시켜 중세적 자연관을 밀어내고 기계적 세계관을 정당화함으로써 자연계의 만물을 물체의 위치와 운동으로 설명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데에 막대한 기여를 했다.
철학.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
데카르트적 회의는 르네 데카르트의 글과 방법론이 곁들여진 방법론적 회의이다. 데카르트적 회의는 자신이 믿는 바의 진실성 여부에 대해서 의심하는 체계적인 방법으로 철학의 특징적인 방법이 되었다. 이 의심의 방법은 절대적인 진실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믿음을 의심한 르네 데카르트에 의해 서양 철학에 대중화되었다.
특성.
데카르트적 회의는 방법론적이다. 데카르트적 회의의 목적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는 것으로서 의심을 절대적인 진리를 찾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특히나 경험적 정보의 오류 가능성은 데카르트적 회의의 대상이 된다.
데카르트 회의론의 목적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이 중 가장 저명한 것은 토대주의자들의 주장으로 데카르트의 회의론은 의심이 가능한 모든 믿음을 제외하는 것으로서 기본적인 신념만을 남기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할 여지가 없는 기본 신념으로부터 데카르트는 다음 지식을 파생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지식을 상대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진리를 토대로 쌓아갔다. 이는 대륙철학의 합리주의를 축약시켜 보여주는 원형적이고 중요한 예시이다.
기법.
데카르트적 회의는(4개의 과학적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사실이라고 아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 둘째, 이 사실들을 더 작은 단위로 나누는 것. 셋째, 간단한 문제들을 먼저 해결하는 것. 넷째, 더 확장된 문제들의 완전한 목록을 만드는 것. ) 의심을 과대하게 하는 것이므로 의심의 경향성을 가진다고 한다. (데카르트의 기준으로의 지식은 단순히 합리적인 것 아닌 가능한 모든 의심을 넘어선 것을 말한다. ) 그의 성찰(1641)에서 데카르트는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로만 이루어진 믿음체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믿음의 진실 여부를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데카르트의 방법.
데카르트적 회의의 원조인 르네 데카르트는 모든 신념, 아이디어, 생각, 중요성을 의심에 두었다. 그는 어떠한 지식에 대한 그의 근거나 추리 또한 거짓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식의 초기 상태인 감각적 경험은 잘못되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의심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느 사람이 보는 것은 환각일 수도 있다. 그가 보는 것이 환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즉, 만약, 어떠한 신념이 논박될 수 있는 방법이 하나라도 존재한다면, 이의 진실 여부에 대한 근거가 불충분한 것이다. 이 것으로부터 데카르트는 꿈과 악마라는 두 가지 주장을 제안했다.
데카르트는 인간은 자신이 깨어있다는 것을 믿는 다는 것을 가정했을 때, 우리가 꿈을 꿀 때 믿기 어려운 와중에 현실 같을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깨어있을 때의 경험과 꿈을 꿀 때의 경험을 구별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없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꿈이라는 생각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세계에 산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성찰(1641)의 끝에 가서는 적어도 회상을 할 때에는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악의적 천재에 의해 조정 당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천재는 똑똑하고 강하며 남을 잘 속인다. 데카르트는 그가 우리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허울적인 세상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성찰(1641)에서 데카르트는 한 사람이 미쳤었다면, 그 광기가 그 사람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자신의 정신이 자신을 속이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우리가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으로부터 막는 어떤 강력하고 교활한 악마가 존재할 수 도 있다고 했다.
데카르트는 그의 모든 감각들이 거짓말을 할 때, 한 사람의 감각이 그 사람을 쉽게 속일 수 있기 때문에 그 생각을 자신에게 거짓말 할 이유가 없는 강력한 존재가 심어두었으며 그의 강력한 존재에 대한 생각은 사실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코기토 에르고 숨.
자신의 존재조차도 의심의 방법을 적용하여 의심하는 것이 ”Cogito ergo sum”(코기토 에르고 숨,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란 말을 탄생시켰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려고 했지만, 존재하지 않는 다면 의심할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의심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합리론.
인식론에서 합리주의란 사실의 기준이 감각이 아닌 지적이고 연역적인 것이다.
이 방법을 강조하는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관점의 합리주의자들이 있다. 추리력이 지식을 얻는 다른 방법들보다 우선적이라는 온건한 위치부터 추리가 지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극단적인 위치까지 존재한다. 근대 이전의 합리주의는 철학과 같은 것을 의미했다.
배경.
계몽운동 이후로, 합리론은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스피노자에서와 같이 수학적인 방법을 철학에서 사용하기 시작한다. 합리주의는 영국에서 경험주의가 우세했던 것과는 달리 유럽의 대륙 쪽에서 우세했기 때문에 대륙 합리주의라고도 불린다. 합리주의는 경험주의와 자주 대조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합리주의를 믿으며 동시에 경험주의를 믿을 수 있다는 점만을 봐도 아주 넓게 보았을 때 이 두 관점은 서로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극단적인 경험주의자는 모든 생각이 외적인 감각이던 내적인 감정이던 경험을 통해 얻는다는 관점을 갖는다. 따라서 지식은 본질적으로 경험으로부터 유추되거나 경험을 통해 직접 얻는다는 입장이다.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에 있어서 논점이 되는 것은 인간의 지식의 근본과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증명하는 적절한 방법이다. 합리주의의 몇 부류의 지지자들은 기하학의 자명된 이치와 같은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원칙들로부터 나머지 모든 지식들을 연역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관점을 가졌던 철학자들로는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를 들 수 있다. 이 둘은 데카르트에 의해 제기 되었던 인식론 상의 근본 원리에 대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것으로 합리주의의 근본적인 접근의 발전을 가져왔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둘 다 원칙적으로는 과학적 지식을 포함한 모든 지식이 추론만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수학을 제외한 영역에서는 인간에게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관찰했다. 합리주의자와 경험주의자의 구별은 나중에 일어난 일로 그 시기의 철학자들은 알지 못했다. 그 구별 또한 애매하여 대표적인 세 합리주의자들은 경험주의에 있어서도 중요하게 평가된다. 또한, 많은 경험주의자들이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보다 데카르트의 방법론에 가까웠다.
합리주의와 데카르트.
데카르트는 불변의 사실들에 대한 지식들만 추리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지식들은 과학적 방법의 도움을 받아 경험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꿈이 감각적 경험과 같이 생생하게 느껴지지만, 이러한 꿈들은 사람에게 지식을 제공할 수는 없다고 했다. 또한, 자각하고 있는 감각적 경험은 환각이 원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감각적 경험 자체가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했다. 그 결과로 데카르트는 사실을 찾기 위해서는 현실의 모든 믿음을 의심해야 한다는 것을 연역적으로 얻어내었다. 그는 이러한 믿음을 방법서설, 제1 철학에 관한 성찰과 철학원에 실었다. 데카르트는 지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것은 지식으로 분류하지 않는 방법을 통해 사실을 찾아내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얻어낸 사실들은 데카르트에 의하면 어떠한 감각적 경험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추론을 통해 얻어낸 사실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작은 요소들로 나뉘어 연역적인 방법을 통해 현실에 대한 명백한 사실들에 도달할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그의 방법의 결과로 추론은 지식을 결정짓는 유일한 방법이며 이 방법은 감각의 도움 없이 행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코기토 에르고 숨은 어떠한 경험의 간섭도 받지 않은 결론이다. 이는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반박할 수 없는 논리로서 다른 모든 지식을 쌓을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이원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이라는 명제는 그의 형이상학의 제일원리인 동시에, 견실한 과학에 도달하기 위한 제일 원리였다. 데카르트는 기존의 사상에 반동적이었으며 과학에서 발견된 사실을 철학적인 세계관에 옮기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갈릴레오의 기하학적 물리학에 큰 영향을 받았으나, 데카르트가 보기에 그것은 엄밀성이 부족했다. 감각에 기초한 물질 세계의 개념과 좀더 엄격한 수학적인 물질세계의 개념을 구별하는 가운데, 데카르트는 후자가 더 객관적인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물질 세계를 지각하는 감각적 경험은 주관적이며 자주 착각을 일으키고 외부세계와 동일한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회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목표는 주관을 넘어서 객관적 지식을 확보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따라서 그가 취하는 입장은 감각적 경험이 아닌 이성관념으로, 이는 선험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데카르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선험적 관념에 따라, 실체를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두 가지로 구분했다. 왜냐하면 정신과 육체는 명확하고 명료한 속성들의 전적으로 구별되는 두 조합을 통해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정신적인 실체의 본성은 '사유하는 것(res cogitans)'이며 물질적인 실체의 본성은 '연장된 것(res extensa)'였다. 먼저 정신은 연장적인 특징이 없고 불가분적이므로, 연장을 지니고 있는 물질과는 판명하게 구분된다. 데카르트는 육체 없이도 존재하는 나를 상상할 수 있다고 하면서, 정신을 물질과는 분리되어 생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실체로 본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좁은 의미에서는 순수한 지성(수학, 철학을 탐구하는)을 뜻하며 넓은 의미에서는 상상 작용, 감각 작용이 속한다. 감각 작용 신체에서 온 감각인 내부 감각과 외부사물로부터 비롯된 외부 감각으로 나뉜다. 내부감각은 다시 어디에서 오는지 위치를 알 수 있는 고통, 배고픔, 목마름과 같은 관념과 위치를 알 수 없는 분노, 슬픔과 같은 정념으로 나뉜다. 이 신체들의 내부감각은 정신을 속여 가짜의지를 생성해서 신체를 움직이게 한다. 그에게 있어 정신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무한한 것이며, 제한 되어있지만 신과 동일한 유형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신적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신이었으며, 이런 배경으로 인해 순수하게 지적인 능력인 상상력이나 감각 지각과 같이 육체를 전제로 하는 능력과 구분된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물질(육체)은 연장을 가지고 있으며, 기하학적 공간에 위치하기 때문에, 섞여있거나 겹치지 않는다. 또한 기하학의 원리에 따라 무한 분할이 가능하며 이러한 모든 물체의 위치와 공간은 기하학적 공간에서 좌표화 가능한 것이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공간 개념에 있어서 빈 공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항상 물질에 의해 점유되어 있는 것으로서 운동은 연쇄적으로 각 물질의 위치가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에게 있어 관념들 자체는 사물의 본성이 아니라 그와 유사한 것으로 각 관념들은 물체를 특수한 방식으로 그려낸다. 또한 정신과 육체는 섞여있는 것이다. 과거 플라톤의 정신과 신체는 선원과 배의 관계로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하는 것이었으나, 데카르트는 이 둘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데카르트는 송과선이라는 솔방울 모양의 샘을 통해 설명하려 한다. 육체가 신경선으로 동물정기라는 기체화된 혈액을 자극하면 인과적으로 감각적 내용이 송과선을 통해 정신에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설명에 대해 기계적인 방식으로 ‘자연에 의해 확립되었다’라는 주장을 한다.
데카르트 사상과의 대립.
아이작 뉴턴.
과학혁명 이전의 자연관은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다. 자석들은 왜 서로 잡아당기거나 밀어낼까? 상처에 약을 바르면 왜 나을까? 이런 질문에 대해서 르네상스 자연주의에서는 자연을 살아있는 신비한 생명체로 파악하며, 자석의 N극과 S극이 서로 잡아당기는 이유는 서로가 공감을 하기 때문이고, N극과 N극이 밀치는 이유는 서로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식물이 성장하고, 동물이 스스로 자각해서 움직이는 모든 운동의 원리를 영혼으로 보았다. 이렇게 자연을 마치 생명과 감정이 있는 인간처럼 여기는 르네상스 자연주의는 신비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자연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추구할 동기로 부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근대 과학은 자연에서 신비로움을 제거해 버렸다. 자연은 객관적 실체로 이루어져 있고, 수학적 법칙에 의해서 설명할 수 있으며,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운동은 외적인 요인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신념을 가져다 주었다. 이런 근대 과학의 출발점이 된 것이 바로 데카르트와 아이작 뉴턴이다.
데카르트는 "기계적 철학(mechanical philosophy)"을 제시하며,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새롭게 규정했다. 기계적 철학은 자연이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연 현상이란 이런 물질들의 운동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전제하고, 각종 자연 현상들을 미세한 물질들의 직선 운동과의 충돌로 설명했다. 앞에서 르네상스 자연주의자들이 자석을 공감, 반감을 이용해서 설명했던 것에 비해서, 데카르트의 기계적 철학에서는 입자와 운동이라는 개념을 이용해서 설명하고 있다. 즉, 자석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구멍들이 있고, 자석 주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나사들이 배열되어 있어서 자석의 구멍을 통해서 작은 나사들이 통과하는데, 나사들의 운동 방향에 따라서 자석은 서로 끌리기도 하고, 서로 밀어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르네상스 자연주의에서 자석은 외부에서 특별히 힘이 작용하지 않아도 스스로 움직이는 매우 신비로운 존재로 여겨졌지만, 기계적 철학의 눈으로 본 자석은 신비로움을 잃었다. 이렇게 데카르트는 자연을 합리적이고 명쾌하게 이해가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었다.
기계적 철학에서는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구분조차 불필요했다. 데카르트에게 자연은 단지 기계에 불과했으며, 그 자체의 목적이나 생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자연에서 영혼을 제거시켜서, 중세적 자연관을 밀어내고 기계적 세계관을 정당화했다. 이로써 자연은 기계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며, 자연계의 만물은 물체의 위치와 운동으로 설명 가능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데카르트는 17세기 과학혁명의 기본 구조를 만들어냈지만, "자연은 정확한 수학적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완전한 기계"라는 그의 생각은 일생동안 하나의 가설로 남아있어야 했다.
데카르트의 꿈을 실현시키고, 과학혁명을 완성한 사람은 아이작 뉴턴이었다. 데카르트의 기계적 철학에서 "운동"이라는 개념을 이어받아, 뉴턴도 자연 현상의 기본을 운동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운동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는 데카르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입자의 운동에 수학적 성격을 합친 "힘"이라는 개념을 가져와, 운동을 정량적으로 분석했다. 다시 말해서 "힘"을 운동의 원인으로 설정하여, 힘의 수학적인 표현을 찾아내고, 거기서부터 가속도, 속도, 물체의 움직이는 궤적 등을 계산하는 역학의 방법을 정식화했다.
뉴턴은 결국 데카르트를 뛰어넘지만,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서는 데카르트와 공유하는 부분이 많았다. 복잡한 자연을 단순하게 분해해서 이해하는 방식이나, 운동에서 자연 현상의 근원을 찾고, 그 운동을 수학적인 언어로 풀어내려고 했던 점 등은 두 사람 모두에게서 발견되는 경향이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까지 "프랑스의 데카르트와 영국의 뉴턴 중 누가 옳았는가" 하는 문제가 양국 과학자들의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두 사람의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이 부각되어 왔지만, 사실 두 사람은 차이점보다 공유하는 것이 더 많았던 사람들이다.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을 그렇게 항목별로 비교할 수 있다는 점 자체가 역설적으로 두 사람이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데카르트와 뉴턴의 가장 큰 공통점은 우리가 자연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새롭게 규정했다는 점에 있다. 20세기 초에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의 등장으로 위기를 맞는 듯했지만, 여전히 우리의 일상 세계는 데카르트와 뉴턴이 확립해 놓은 고전역학의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실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실체란 자신 안에 있으며, 자신에 의하여 생각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즉, 실체는 그것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서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뜻이고,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적으로 존재함을 뜻하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 생각된다는 것"은 그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것을 필요로 하지 않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스피노자는 실체를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 존재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데카르트는 그 정의를 실체로 적용할 때, 의미를 악화시켜서 자신이 내린 정의에 충실히 따르지 않았다. 그는 실체란 "존재하기 위해서 신의 도움만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라고도 정의한다. 이는 실체 개념을 창조물에까지 확대시킨 것이다. 반면 스피노자는 자신이 내린 실체 개념을 엄격히 적용하였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실체는 자립적 존재이기 때문에 "유한 실체"라는 말은 불합리한 개념이며, 신만이 실체라고 주장한다.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존재할 수 없으며, 또한 파악될 수도 없다"고 한 스피노자의 정리에서 잘 드러난다.
신이 어떤 존재이며, 어떤 방식으로 세계에 개입하는지에 대해서도 두 사상가는 커다란 입장 차이를 보인다. 이신론을 주장하는 데카르트의 신은 인격을 소유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세계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창조, 소멸, 심지어는 개입할 수도 있다. 반면 스피노자는 신을 그런 초월적 존재로 보지 않는다. 신의 의지에 의한 "기적"같은 것은 신의 작동 방식을 법칙으로 이해하고자 한 스피노자에게는 비합리적인 것이다.
종교적인 믿음.
르네 데카르트의 종교적 믿음은 학계에서 엄밀히 논쟁되어 왔다. 그는 《제1 철학에 관한 성찰》("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의 목적들 중 하나가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시대에서 데카르트는 이원론 또는 무신론을 믿은 것으로 비난받았다. 그가 말년에 비교적 사상적으로 자유로운 스웨덴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것 또한 이러한 종교적 신념을 비난받은 것과 관련있다.
동시대의 블레즈 파스칼은 "그의 철학에서 데카르트를 용서할 수 없다. 데카르트는 신 없이 지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신에게 손가락 움직임 하나만으로 세계를 확립하라고 재촉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지만, 그 후에 그는 신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다."
스티븐 고크로져의 데카르트 전기에서는 그가 죽는 날까지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단호하고, 열정적인 열망과 함께 로마 가톨릭 교회에 깊은 종교적 믿음을 가졌다고 기술하고 있다. 데카르트가 스웨덴에서 죽은 후, 스웨덴 법에 의하면 지도자는 개신교도이어야 했기 때문에 크리스티나 여왕이 로마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기 위해서 왕위에서 물러났는데,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 그녀가 장기적으로 접촉한 사람은 개인 지도 교사인 데카르트뿐이었다. |
3534 | 8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34 | 데카르트 | |
3536 | 94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36 | 지질학 시대구분표 | |
3539 | 36036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39 | 알칼리 금속 | 알칼리 금속(alkali metal, -金屬)은 화학 원소 리튬(Li), 나트륨(Na), 칼륨(K), 루비듐(Rb), 세슘(Cs), 프랑슘(Fr)으로 구성된 화학 계열이다. 수소와 함께 주기율표의 s-구역에 있는 1족 원소를 구성한다. 모든 알칼리 금속은 최외각 전자를 s 오비탈에 가지고 있다. 이 공유 전자 구성은 알칼리 금속들이 매우 유사한 성질을 갖도록 한다. 대표 원소의 이름을 따서 리튬족이라고도 한다.
알칼리 금속은 표준 온도 압력에서 광택이 있고 무르고 반응성이 높은 금속이며, 최외각 전자 껍질의 전자 하나를 쉽게 잃어 +1 전하를 가진 양이온을 이룬다. 무른 금속이므로 칼로 쉽게 자를 수 있으며, 잘린 반짝이는 표면은 공기 중의 수분과 산소와 결합하여 산화하여 빠르게 변색된다. 리튬의 경우엔 공기 중의 질소와도 반응한다. 반응성이 높기 때문에 공기와의 반응을 방지하기 위해 기름 속에 저장해야 하며, 자연적으로는 염의 형태로만 발견되며, 자유 원자로는 발견되지 않는다. 다섯 번째 알칼리 금속인 세슘은 모든 금속 중에서 가장 반응성이 높다. 모든 알칼리 금속은 물과 반응하며, 무거운 알칼리 금속은 가벼운 금속보다 더 격렬하게 반응한다.
발견된 모든 알칼리 금속은 자연에서 화합물 형태로만 발견된다. 나트륨이 가장 풍부하며 그 다음으로 칼륨, 리튬, 루비듐, 세슘 순이며, 높은 방서성을 띤 프랑슘은 매우 드물게 발견된다. 프랑슘은 붕괴 계열의 중간 산물 형태인 미량 동위원소로만 발견된다. 알칼리 금속의 다음 원소 후보인 우누넨늄(Uue)을 합성하기 위한 실험이 진행되었으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우누넨늄은 초중량 원소의 화학적 성질에 큰 영향을 미치는 상대론적 효과의 예측에 의하면 알칼리 금속이 아닐 수 있으며 알칼리 금속에 속하더라도 다른 알칼리 금속과는 물리적, 화학적 성질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 것으로 예측된다.
대부분의 알칼리 금속은 많은 응용 분야에서 쓰이고 있다. 순수한 원소의 가장 잘 알려진 응용은 원자 시계에 루비듐과 세슘을 사용하는 것이며, 그중 세슘 원자 시계는 1초를 정의하는 기준이 된다. 나트륨은 효율적인 조명 기구인 나트륨등에 사용된다. 먹는 소금은 염화 나트륨이 주성분으로, 고대부터 사용되어 왔다. 리튬은 정신의학 약과 리튬 전지의 산화극 소재로 사용된다. 나트륨과 칼륨은 필수 무기질로, 전해질로 주요한 생물학적 역할을 하고 있으며, 다른 알칼리 금속은 필수는 아니지만, 신체에 유익하고 해로운 다양한 영향을 미친다.
역사.
나트륨 화합물인 소금(염화 나트륨)은 고대부터 인간 활동에 있어 중요한 상품으로, 급여를 뜻하는 영어 단어 "salary"도 로마 병사에게 소금 구입을 위해 지급된 돈을 가리키는 단어 살라리움("salarium")에서 유래되었다. 고대부터 칼리가 사용되었으나 나트륨 화합물인 소금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물질이라는 것은 알 수 없었다. 1702년에 게오르크 에른스트 슈탈은 나트륨염과 칼륨염의 근본적인 차이를 제시하는 실험적 증거를 얻었고, 1736년 앙리 루이 뒤하멜 뒤 몽소는 이 차이를 증명할 수 있었다. 당시 칼륨과 나트륨 화합물의 정확한 화학적 구성과, 칼륨과 나트륨의 화학 원소로서의 지위는 그 당시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1789년 그의 화학 원소 목록에 어떤 알칼리 원소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순수한 칼륨은 1807년 영국의 험프리 데이비에 의해 처음으로 분리되었다. 데이비는 새롭게 발명된 볼타 전지를 이용하여 가성 칼리(KOH, 수산화 칼륨)의 용융된 소금을 전기 분해하여 추출했다. 이전의 칼리 수용액을 이용한 전기 분해 시도는 칼륨의 높은 반응성으로 인해 성공하지 못했다. 칼륨은 전기 분해를 통해 분리된 최초의 금속이다. 같은 해 말, 데이비는 유사한 물질인 가성 소다(NaOH, 수산화 나트륨)로부터 비슷한 방법을 통해 나트륨을 추출한 것을 보고했고, 두 원소가 다르다는 것을 증명했다.
페탈라이트(LiAlSi4O10)는 1800년 브라질의 화학자 조제 보니파시우 지 안드라다가 스웨덴 우퇴섬의 광산에서 발견했다. 하지만 1817년이 되어서야 화학자 옌스 야코브 베르셀리우스의 실험실에서 일하던 요한 아우구스트 아르프베손이 페탈라이트 광석을 분석하여 새로운 원소의 존재를 감지했다. 이 새로운 원소는 나트륨과 칼륨과 유사한 화합물을 형성하지만 탄산염과 수산화물은 다른 알칼리 금속보다 물에 덜 녹고 알칼리성은 더 강한 점에 주목했다. 베르셀리우스는 식물의 재에서 발견된 칼륨, 동물의 피에 풍부한 나트륨과 달리 단단한 광물에서 발견된 것을 반영하여 이 미지의 물질의 이름을 "돌"을 뜻하는 그리스어 (lithos)에서 유래한 "리(lithion)/리티나(lithina)"라 지었다. 이 물질 안에 있는 금속의 이름을 리튬(lithium)이라고 지었다. 리튬, 나트륨, 칼륨은 1850년 요한 볼프강 되베라이너가 발견한 원소의 주기성, 즉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 동일한 족의 원소 중 하나이다.
루비듐과 세슘은 로베르트 분젠과 구스타프 키르히호프가 1859년 발명한 분광기를 이용해 발견한 최초의 원소이다. 다음 해에 분젠과 키르히호프는 독일 바트뒤르카임의 광천수에서 세슘을 발견했다. 루비듐의 발견은 이듬해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레피돌라이트 광물에서 발견했다. 루비듐과 세슘의 이름은 방출 스펙트럼에서 가장 두드러진 선으로 루비듐은 밝은 빨간 선(짙은 빨간색, 또는 밝은 빨간색을 뜻하는 라틴어 루비두스(rubidus)), 세슘은 하늘색 선(하늘색을 뜻하는 라틴어 카이시우스(caesius))에서 왔다.
1865년경 존 뉴랜즈는 일련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원자량이 증가하는 순으로 원소를 나열했을 때 유사한 물리적 화학적 성질을 가진 원소가 8개 간격으로 되풀이됨을 보였다. 그는 이런 주기성을 음악의 옥타브에 비유하여 한 옥타브 떨어진 음표가 비슷한 음악적 기능을 가지는 것과 비교하였다. 뉴랜즈는 논문에서 당시 알려진 모든 알칼리 금속(리튬에서 세슘까지)을 알칼리 금속처럼 +1 산화 상태 특성을 가진 구리, 은, 탈륨과 한 족으로 묶었다. 뉴랜즈는 할로젠과 수소를 표의 같은 자리에 배치했다.
1869년 이후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는 리튬을 나트륨, 칼륨, 루비듐, 세슘, 탈륨을 가진 족의 맨 위에 배치하는 주기율표를 제안했다. 2년 후 멘델레예프는 자신의 주기율표를 수정하여 수소를 리튬이 속한 I족 위에 배치하고, 탈륨도 붕소족으로 이동시켰다. 이 1871년판에서는 구리, 은, 금을 두 번 배치하였는데 한 번은 IB족의 일부로, 한 번은 오늘날의 8족에서 11족 원소를 아우르는 'VIII족'의 일부로 배치하였다. 18열 주기율표 도입 후 IB족 원소는 d-구역의 현재 위치로 이동했고, IA족에는 알칼리 금속이 남았다. 이후 1988년 IA족 이름이 1족으로 바뀌었다. 관용명인 "알칼리 금속"은 1족 원소의 수산화물이 모두 물에 용해되었을 때 강한 알칼리라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프랑스 파리 퀴리 연구소의 마르게리트 페레가 1939년 220 keV의 붕괴 에너지가를 가진 것으로 보고된 악티늄-227 샘플을 정제하여 프랑슘을 발견하기까지 적어도 네 번의 오류와 불완전한 발견이 있었다. 그러나 페레는 에너지 준위가 80 keV 미만인 붕괴 입자를 발견했다. 페레는 이 붕괴 활동이 이전에 확인되지 않았던 붕괴 생성물에 의해 일어났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물질은 정제 과정에서 분리되었으나 순수한 악티늄-227에서 다시 나타났다. 다양한 실험을 통해 이 미지의 원소가 토륨, 라듐, 납, 비스무트, 탈륨일 가능성을 제거했다. 이번 새로운 생성물은 (세슘 염과 공침하는 등의) 알칼리 금속의 화학적 특성을 보여 페레는 악티늄-227의 알파 붕괴로 생겨난 87번 원소라고 믿게 되었다. 페레는 그 후 악티늄-227에서 베타 붕괴와 알파 붕괴의 비율을 결정하려고 시도했다. 그의 첫 번째 실험에서 알파 붕괴 비율이 0.6%로 나왔고, 이 수치는 후에 1%로 수정되었다.
주기율표에서 프랑슘 아래의 다음 원소(에카프랑슘)는 119번 원소인 우누넨늄(Uue)이 될 것이다. 우누넨늄의 합성은 1985년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의 슈퍼HILAC 가속기에서 칼슘-48으로 아인슈타이늄-254의 표적을 폭격하여 처음 시도되었다. 원자가 확인되지 않아 300 nb의 한계 수율로 이어졌다.
존재.
태양계 내부.
오도-하킨스 규칙은 수소를 제외하고 원자 번호가 짝수인 원소가 홀수인 원소보다 더 흔하다는 내용이다. 이 규칙은 홀수 원자 번호를 가진 원소는 짝없는 양성자 하나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양성자를 포획할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에 원자 번호가 증가한다고 주장한다. 짝수 원자 번호를 가진 원소는 양성자가 짝을 가지며, 짝진 양성자 간에 서로의 스핀을 상쇄하여 안정성을 높인다. 모든 알칼리 금속을 홀수 원자 번호를 가지며, 태양계 내에서 인접한 원자 번호를 가진 원소(비활성 기체와 알칼리 토금속)만큼 흔하지 않다. 루비듐 이후의 무거운 알칼리 금속은 항성 핵합성에서는 만들어지지 않고, 초신성에서만 합성될 수 있기에 가벼운 금속보다 덜 풍부하다. 리튬은 대폭발 핵합성이나 항성 핵합성 어느 쪽에서도 잘 합성되지 않기 때문에 나트륨이나 칼륨보다 훨씬 덜 풍부하다. 5개에서 8개의 핵자를 가진 안정적인 원자핵이 없기 때문에 대폭발 과정에서 미량의 리튬, 베릴륨, 붕소만 합성된다. 항성 핵합성에서는 세 개의 헬륨 핵을 합성하여 탄소를 형성하는 삼중 알파 과정을 통해 이 세 원소를 건너뛴다.
지구.
지구는 태양을 형성한 것과 같은 물질의 구름으로부터 만들어졌지만, 태양계의 형성과 진화 과정에서 행성들은 서로 다른 구성비를 갖게 되었다. 결국, 지구의 자연사는 지구의 각 부분이 다른 원소 농도를 갖게 했다. 지구의 질량은 약 5.98 kg이다. 대부분 철(32.1%), 산소(30.1%), 규소(15.1%), 마그네슘(13.9%), 황(2.9%), 니켈(1.8%), 칼슘(1.5%), 알루미늄(1.4%)으로 구성됐으며 나머지 1.2%는 미량의 다른 원소로 구성됐다. 행성의 분화로 인해 지구의 핵은 주로 철(88.8%)로 구성되어 있으며, 소량의 니켈(5.8%), 황(4.5%) 및 1% 미만의 미량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파악된다.
알칼리 금속은 높은 반응성으로 인해 자연적으로는 순수한 금속 형태로 산출되지 않는다. 산소와 쉽게 결합하며, 이산화 규소와 강하게 결합하며, 상대적으로 밀도가 낮은 광물을 이뤄, 지구 중심부로 가라앉지 않고 지구 표면 근처에 남게 된다. 칼륨, 루비듐, 세슘도 이온 반지름이 크기 때문에 부적합 원소이다.
나트륨과 칼륨은 지구의 지각에서 가장 풍부한 10가지 원소에 속한다. 나트륨은 지각에서 6번째로 풍부한 원소로, 지각 질량의 약 2.6%를 차지하며, 칼륨은 지각에서 7번째로 풍부한 원소로, 지각 질량의 약 1.5%를 차지한다. 나트륨은 여러 많은 광물에서 발견되며, 그 중 가장 흔한 것은 바닷물에 녹아있는 방대한 양의 일반 소금(염화 나트륨)이다. 다른 고체 퇴적물로는 암염, 각섬석, 빙정석, 칠레 초석, 제올라이트 등이 있다. 이런 고체 퇴적물의 대부분은 고대의 바다가 증발한 결과 만들어졌으며, 지금도 미국 유타주의 그레이트솔트호나 중동의 사해 등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화학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리튬은 크기가 작아서 일반적으로는 나트륨이나 칼륨과 함께 산출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반응성이 낮기 때문에 많은 양의 바닷물에서 발견되는데, 바닷물에는 약 0.14~0.25 ppm, 또는 25 마이크로몰라로 추정된다. 마그네슘과의 대각 관계는 종종 철마그네슘 광물에서 마그네슘을 대신할 수 있게 하는데, 지각에서의 농도는 갈륨과 나이오븀과 비슷한 약 18 ppm이다. 상업적으로 가장 중요한 리튬 광물은 스포듀민으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산출된다.
루비듐은 아연만큼 풍부하고 구리보다 더 풍부하다. 백류석, 폴루사이트, 광로석, 진왈다이트, 레피돌라이트 등의 광물로 자연적으로 산출되지만, 이들 광물은 루비듐과 함께 다른 알칼리 금속도 함유하고 있다. 세슘은 안티모니, 카드뮴, 주석, 텅스텐과 같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일부 원소보다 풍부하지만, 루비듐보다는 훨씬 덜 풍부하다.
프랑슘-223은 프랑슘의 유일한 천연 동위 원소로, 악티늄-227의 알파 붕괴 생성물로 우라늄 광물에서 미량으로 발견된다. 주어진 우라늄 표본에서, 1018 개의 우라늄 원자 당 하나의 프랑슘 원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22분의 짧은 반감기 때문에 지구 표면에는 많아봐야 30 그램의 프랑슘만이 있는 것으로 계산되었다.
성질.
물리적 및 화학적 성질.
알칼리 금속의 물리적 및 화학적 성질은 ns1 원자가 전자 배치를 하고 있어 약한 금속 결합을 가진 것으로 쉽게 설명될 수 있다. 모든 알칼리 금속은 부드럽고 밀도가 낮은 데다 녹는점과 끓는점이 낮으며 승화열, 기화열, 해리열도 낮다. 체심 입방 격자의 결정 구조를 가지며, 바깥의 s 전자가 매우 쉽게 들뜨기 때문에 독특한 불꽃색을 가진다. ns1 전자 배열 때문에 원자 반지름과 이온 반지름이 매우 크며, 높은 열전도도와 전기 전도도를 가진다. 화학적 성질은 최외곽 s-궤도에 있는 유일한 원자가 전자를 잃고 +1 산화 상태를 가지는 것이 지배적인데 전자를 잃어 이온화되는 것이 쉽고, 두 번째 이온화 에너지는 매우 높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화학 작용은 처음 다섯 원소에서 대부분 관찰된다. 프랑슘의 화학적 성질은 높은 방사성 때문에 잘 확립되어 있지 않다. 프랑슘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지만, 예상대로 세슘과 가깝게 행동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프랑슘의 물리적 성질은 대량으로 관찰한 적이 없기 때문에 더 피상적이다. 문헌에서 찾을 수 있는 데이터는 거의 대부분 추측성 외삽이다.
알칼리 금속은 다른 족 원소끼리에 비해 서로 더 비슷하다. 실제로 유사성이 너무 커서 이온 반지름이 비슷한 칼륨, 루비듐, 세슘을 분리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리튬과 나트륨은 조금 더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표 아래로 이동할 때, 알려진 모든 알칼리 금속은 원자 반지름이 증가하고, 전기 음성도가 감소하고, 반응성이 증가하며, 녹는점과 끓는점이 낮아지고, 융해열과 기화열도 감소한다. 칼륨이 나트륨보다 밀도가 낮다는 점을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표 아래로 이동하면 밀도가 높아진다. 매끄러운 경향성을 보이지 않는 알칼리 금속의 아주 적은 특성 중 하나는 환원 전위이다: 리튬의 값은 변칙적이고 다른 것들보다 더 음성을 띤다. 이는 Li+ 이온이 기체 단계에서 매우 높은 수화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리튬 이온이 물의 구조를 현저하게 교란하여 엔트로피에 더 큰 변화를 일으키지만, 이 높은 수화 에너지는 기체 상태에서 이온화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환원 전위는 가장 전기 양성인 알칼리 금속임을 나타내기에 충분하다.
안정된 알칼리 금속은 세슘을 제외하면 모두 은색 금속이다. 세슘은 옅은 황금색 색조를 가지며, 색이 뚜렷한 세 금속 중 하나이다(다른 두 금속은 구리와 금이다). 또한 무거운 알칼리 토금속인 칼슘, 스트론튬, 바륨은 물론이고 란타넘족의 유로퓸과 이터븀도 옅은 노란색을 띠지만 세슘에 비해 색이 덜 두드러진다. 알칼리 금속의 광채는 산화로 인해 공기 중에서 빠르게 변색된다. 알칼리 금속은 체심 입방 격자 결정 구조로 결정화되며, 바깥 s 전자가 쉽게 들뜨기 때문에, 독특한 불꽃색을 가지고 있다. 이 불꽃색은 일반적으로 이온을 가진 모든 염이 용해되기 때문에 이들을 식별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모든 알칼리 금속은 반응성이 매우 높으며, 자연에서 원소 형태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보통 광물유나 등유에 저장된다. 할로젠과 공격적으로 반응하여 알칼리 금속 할로젠화물을 형성하는데, 흰색의 이온 결정 화합물로 플루오린화 리튬(LiF)을 제외하고는 모두 물에 녹는다. 알칼리 금속은 또한 물과 반응하여 강한 알칼리 수산화물을 형성하므로 매우 주의하여 다루어야 한다. 무거운 알칼리 금속은 가벼운 금속보다 더 강력하게 반응한다. 예를 들어, 동일한 몰 수의 금속이 물에 빠졌을 때 세슘은 칼륨보다 더 큰 폭발을 일으킨다. 알칼리 금속은 유효 핵전하가 낮고, 전자 하나를 잃어 비활성 기체의 전자 배열에 도달할 수 있으므로, 주기율표의 같은 주기 원소 중에서 첫 번째 이온화 에너지가 가장 낮다. 알칼리 금속은 물 이외에도 알코올, 페놀, 기체 암모니아, 알카인 등의 양성자 주개와도 반응한다. 환원제로서의 큰 힘은 다른 산화물이나 할로젠화물에서 금속을 해방시키는데 매우 유용하게 쓰인다.
모든 알칼리 금속의 두 번째 이온화 에너지는 핵에 더 가까운 완전한 껍질 안에 있기 때문에 매우 높다. 따라서 알칼리 금속은 거의 항상 하나의 전자를 잃어 양이온을 형성한다. 예외적인 경우로 알칼리화물이 있는데, -1 산화 상태의 알칼리 금속을 함유하고 있는 불안정한 화합물로, 이례적인 알칼리화물의 발견 이전에는 알칼리 금속은 음이온을 형성할 수 없다고 예상되었고 양이온으로만 염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알칼리 음이온은 s-전자 껍질을 채웠기 때문에, 존재하기에 충분한 안정성을 제공한다. 리튬을 제외한 모든 안정한 알칼리 금속은 알칼리화물을 형성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알칼리화물은 특이한 화학량론과 낮은 이온화 퍼텐셜 때문에 이론적 관심이 많다. 알칼리화물은 화학적으로 전자화물과 유사하며, 전자화물은 갇힌 전자가 음이온 역할을 하는 염이다. 알칼리화물의 특히 두드러진 예는 "역수소화 나트륨", H+Na−(두 이온 모두 착이온이다)이며, 일반적인 수소화 나트륨인 Na+H−과는 반대로, 수소에서 나트륨으로 두 전자의 이동 때문에 높은 에너지로 인해서 여러 유도체는 준안정 또는 안정적이나 분리되면 불안정하다.
수용액에서 알칼리 금속 이온은 화학식 [M(H2O)"n"]+의 아쿠아 이온을 형성하며, 여기서 n은 용매화 수이다. 이온의 배위수와 모양은 이온 반지름에서 예측된 결과와 잘 일치한다. 수용액에서 금속 이온에 직접 부착된 물 분자는 일차 배위권에 속한다. 물 분자와 금속 이온 사이의 결합은 산소 원자가 두 전자를 모두 제공하는 공유 결합이다. 배위 결합된 물 분자는 수소 결합을 통해 다른 물 분자에 부착될 수 있다. 이 경우 이차 배위권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알칼리 금속 양이온의 경우, 양이온의 +1 전하가 이차 배위권과 강한 수소 결합을 형성할 수 있을 만큼 일차 배위권의 물 분자를 편극시킬 만큼 충분히 높지 않아 2차 배위권이 잘 형성되지 않아, 보다 안정적인 실체를 생성한다. Li+에 대한 용매화 수는 실험적으로 4로 결정되어, 사면체 모양의 [Li(H2O)4]+를 형성한다. 리튬 아쿠아 이온에 대해 3에서 6의 용매화 수가 발견되며, 4 미만의 용매화 수는 접촉 이온쌍의 형성 결과일 수 있으며, 높은 용매화 수는[Li(H2O)4]+의 면에 접근하는 물 분자로 해석될 수 있지만, 분자 역학 시뮬레이션 결과는 팔면체 헥사아쿠아 이온의 존재를 가리킨다. 나트륨 이온의 일차 배위권에는 아마도 6개의 물 분자가 있어, 팔면체 [Na(H2O)6]+ 이온을 형성할 것이다. 더 무거운 알칼리 금속의 경우 팔면체 모양의 헥사아쿠아 이온을 형성한다고 생각했으나, 그 이후로 칼륨과 루비듐은 엇사각기둥 모양의 [K(H2O)8]+와 [Rb(H2O)8]+ 이온을 형성하며, 세슘은 12극의 [Cs(H2O)12]+ 이온을 형성하는 것이 밝혀졌다.
리튬.
리튬의 화학은 작은 Li+ 양이온이 음이온에 극성을 주고, 화합물에 더 많은 공유 결합성을 주기 때문에 나머지 알칼리 금속의 화학과는 몇 가지 차이점을 보여준다. 리튬과 마그네슘은 비슷한 원자 반지름으로 인해 대각 관계를 가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 비슷한 성질을 보인다. 예를 들어 리튬은 안정된 질화물을 형성하는데, 이는 (마그네슘이 속한) 모든 알칼리 토금속에서는 일반적인 성질이지만 알칼리 금속 중에서는 독특하다. 또한 각각의 족 중에서 리튬과 마그네슘만이 충분한 공유 결합성을 가진 유기 금속 화합물(예: LiMe, MgMe2)을 형성한다.
플루오린화 리튬은 물에 잘 녹지 않는 유일한 알칼리 금속 할로젠화물이며, 수산화 리튬은 흡습성이 없는 유일한 알칼리 금속 수산화물이다. 반대로 극성을 띠기 어려운 큰 음이온을 갖는 과염소산 리튬이나 다른 리튬염은 다른 알칼리 금속의 유사 화합물보다 훨씬 안정적인데, Li+가 용매화 에너지가 높기 때문일 것이다. 이 효과는 대부분의 단순한 리튬염이 일반적으로 수화물 형태로 발견된다는 뜻인데, 무수 형태가 극도로 흡습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것은 염화 리튬이나 브로민화 리튬을 제습기나 에어컨에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프랑슘.
프랑슘은 또한 높은 원자량으로 인해 약간의 차이를 보일 것으로 예측되며 전자가 빛의 속도에 상당히 근접한 비율로 이동하게 되어 상대론적 효과가 더욱 두드러진다. 알칼리 금속의 전기 음성도와 이온화 에너지가 감소하는 추세와는 대조적으로 프랑슘의 전자 음성도와 이온화 에너지는 7s 전자의 상대론적 안정화로 인해 세슘보다 높을 것으로 예측되며, 또한 원자 반지름은 비정상적으로 낮을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기대와는 달리 세슘은 프랑슘이 아닌 알칼리 금속 중 가장 반응성이 높다. 프랑슘의 모든 알려진 물리적 성질은 첫 번째 이온화 에너지, 전자 친화도, 음이온 극성 등은 리튬에서 세슘으로의 추세를 벗어나지만 프랑슘에 대한 알려진 데이터의 부족으로 인해 많은 출처가 상대론적 효과로 인해 리튬에서 세슘으로의 추세를 쓰기 어렵다는 점을 무시한 채 외삽된 값을 제시하고 있다. 상대성을 고려해 예측된 프랑슘의 몇 안되는 특성에는 전자 친화도 (47.2 kJ/mol)와 Fr2 분자의 해리 엔탈피 (42.1 kJ/mol)가 있다. CsFr 분자는 Cs+Fr−로 분극되며, 프랑슘의 7s 부껍질이 세슘의 6s 부껍질보다 상대론적 효과에 훨씬 더 강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산화 프랑슘(FrO2)은 6p 전자로부터의 결합 기여 때문에 다른 알칼리 금속 과산화물과는 달리 상당한 공유 결합성을 가질 것으로 예상된다.
원자핵.
모든 알칼리 금속의 원자 번호는 홀수이다. 따라서 알칼리 금속의 동위 원소의 핵은 홀수-홀수(양성자수와 중성자수 모두 홀수) 또는 홀수-짝수(양성자수는 홀수, 중성자수는 짝수)이다. 홀수-홀수 핵은 질량수가 짝수이고, 홀수-짝수 핵은 질량수가 홀수이다. 홀수-홀수 원시 핵종은 드물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홀수-홀수 핵은 베타 붕괴와 관련하여 매우 불안정한데, 붕괴 생성물이 짝수-짝수 핵이고, 핵 짝짓기 효과로 인해 더 강하게 결합되기 때문이다.
홀수-홀수 핵의 희귀성 때문에 알칼리 금속의 거의 모든 원시 동위 원소는 홀수-짝수(경량의 안정 동위 원소인 리튬-6과 장수명 방사성 동위 원소인 칼륨-40만이 예외이다)이다. 홀수 질량수인 경우, 짝수-홀수 핵과 홀수-짝수 핵 사이의 결합 에너지 차이가 없기 때문에 하나의 베타 안정성 핵종만 있을 수 있다. 동일한 질량수(동중 원소)의 다른 핵종은 최소 질량의 핵종을 향해 자유롭게 베타 붕괴가 일어난다. 두 종륭의 핵자 중 어느 쪽이라도 홀수인 경우에 불안정하다는 효과 때문에 알칼리 금속과 같은 홀수 원자 번호의 원소는 짝수 원자 번호의 원소보다 적은 수의 안정 동위 원소를 갖는 경향이 있다. 안정 동위 원소가 하나인 26개의 원소 중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홀수 원자 번호를 갖고 있으며,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짝수 개의 중성자를 가지고 있다. 두 규칙의 유일한 예외는 베릴륨으로, 원자 번호가 낮기 때문이다.
리튬과 세슘을 제외한 모든 알칼리 금속은 적어도 하나의 천연 방사성 동위 원소를 가지고 있다. 나트륨-22와 나트륨-24는 우주선에 의해 생겨나는 미량 방사성 동위 원소이며, 칼륨-40과 루비듐-87은 매우 긴 반감기를 가지고 있어 자연적으로 발견된다. 프랑슘의 모든 동위 원소는 방사성이다. 세슘은 20세기 초까지는 방사성 물질로 생각되었으나, 자연적으로 발견되는 방사성 동위 원소는 없다. 칼륨의 천연 방사성 동위 원소인 칼륨-40은 천연 칼륨의 약 0.012%를 차지하며, 따라서 천연 칼륨은 약한 방사성을 띤다. 이러한 자연 방사성은 1925년 87번 원소(세슘 이후의 다음 알칼리 금속) 발견에 대한 잘못된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다. 천연 루비듐은 마찬가지로 약한 방사성이 있으며, 27.83%는 장수명 방사성 동위 원소 루비듐-87이다.
30.17년의 반감기를 가진 세슘-137은 스트론튬-90과 함께 사용 후 최대 수백 년까지 사용후 핵연료의 방사능 대부분을 담당하는 두 가지 주요 중생 핵분열 생성물이다. 체르노빌 사고에서 아직 남아 있는 방사능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세슘-137은 고에너지 베타 붕괴를 겪으며 결국 안정적인 바륨-137이 된다. 감마선의 강한 방출체이다. 세슘-137은 중성자 포획률이 매우 낮으며, 가능성은 낮지만, 결국 붕괴하게 된다. 세슘-137은 삼중수소와 유사하게 수문학 연구에서 추적자로 사용되어 왔다. 거의 모든 핵실험과 일부 원자력 사고, 특히 고이아니아 사고와 체르노빌 사고를 통해 소량의 세슘-134와 세슘-137이 환경으로 방출되었다. 2005년 현재 세슘-137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주변의 출입 금지 구역의 주요 방사선원이다. 알칼리 금속이 가진 화학적 성질인 염의 높은 수용성으로 인해 자연에서 쉽게 움직이고 퍼져나가며 필수 무기질인 나트륨과 칼륨으로 착각하여 몸에 흡수되기 때문에 수명이 짧은 핵분열 생성물 중 가장 문제가 되는 물질이다.
주기성.
알칼리 금속은 다른 족 원소끼리에 비해 서로 더 비슷하다. 실제로 유사성이 너무 커서 이온 반지름이 비슷한 칼륨, 루비듐, 세슘을 분리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리튬과 나트륨은 조금 더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표 아래로 이동할 때, 알려진 모든 알칼리 금속은 원자 반지름이 증가하고, 전기 음성도가 감소하고, 반응성이 증가하며, 녹는점과 끓는점이 낮아지고, 융해열과 기화열도 감소한다. 칼륨이 나트륨보다 밀도가 낮다는 점을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표 아래로 이동하면 밀도가 증가한다.
원자 및 이온 반지름.
알칼리 금속의 원자 반지름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증가한다. 차폐 효과 때문에 원자가 하나보다 많은 전자 껍질을 가질 때 각 전자는 핵으로부터의 전기적 인력 뿐만 아니라 다른 전자로부터의 전기적 반발이 생긴다. 알칼리 금속에서 최외곽 전자는 내부 전자에 의해 일부 핵 전하가 취소되기 때문에 +1의 순 전하만을 느낀다. 알칼리 금속의 내부 전자의 수는 항상 핵 전하보다 하나 적다. 따라서 알칼리 금속의 원자 반지름에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요인은 전자 껍질의 수이다. 이 숫자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증가하기 때문에 원자 반지름도 아래로 갈수록 증가하게 된다.
알칼리 금속의 이온 반지름은 원자 반지름보다 훨씬 작다. 이는 알칼리 금속의 가장 바깥쪽 전자가 내부 전자와 다른 전자 껍질에 있기 때문에, 제거되면 원자는 전자 껍질이 하나 더 적어지고, 크기도 작아진다. 또한 유효 핵 전하가 증가하여 전자가 핵쪽으로 더 강하게 끌려, 이온 반지름이 감소한다.
첫 번째 이온화 에너지.
원소 또는 분자의 첫 번째 이온화 에너지는 원소 또는 분자의 기체 원자 한 몰에서 가장 느슨하게 유지되는 전자를 이동시켜 전하 +1의 기체 이온 한 몰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이다. 첫 번째 이온화 에너지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핵전하, 내부 전자에 의한 차폐 효과, 그리고 핵으로부터 가장 느슨하게 유지되는 전자(전형 원소의 경우엔 항상 가장 바깥 전자이다)와의 거리이다. 처음 두 가지 요인은 가장 느슨하게 유지되는 전자의 유효 핵전하를 변화시킨다. 알칼리 금속의 가장 바깥 전자는 항상 같은 유효 핵전하(+1)를 느끼기 때문에, 첫 번째 이온화 에너지에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요인은 가장 바깥쪽 전자에서 핵까지의 거리 뿐이다. 이 거리가 주기율표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증가하기 때문에 가장 바깥쪽 전자는 핵으로부터 덜 끌리게 되고, 따라서 첫 번째 이온화 에너지가 감소한다. (이 추세는 7s 궤도의 상대론적 안정화와 수축으로 인해 프랑슘에서 깨져 프랑슘의 원자가 전자가 비상대론적 계산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핵에 더 가깝게 된다. 이로 인해 프랑슘의 가장 바깥쪽 전자가 핵으로부터 더 많은 인력을 띠게 되며, 세슘보다 약간 더 첫 번째 이온화 에너지를 증가시킨다.)
알칼리 금속의 두 번째 이온화 에너지는 두 번째로 느슨하게 유지되는 전자가 완전히 채워진 전자 껍질의 일부로 제거하기 어렵기 때문에 첫 번째 이온화 에너지보다 훨씬 높다.
반응성.
알칼리 금속의 반응성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증가한다. 이는 알칼리 금속의 첫 번째 이온화 에너지와 원자화 엔탈피라는 두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알칼리 금속의 첫 번째 이온화 에너지가 아래로 갈수록 줄기 때문에, 가장 바깥쪽 전자가 원자에서 제거되어 화학 반응에 참여하기 더 쉬워져 아래로 갈수록 반응성이 증가한다. 원자화 엔탈피는 원소의 금속 결합의 강도를 측정하는데, 아래로 내려갈수록 원자 반지름이 증가하고, 따라서 금속 결합의 길이가 증가하게 되며, 비편재화 전자가 더 무거운 알칼리 금속 핵의 인력에서 더 멀리 벗어나게 된다. 원자화 엔탈피와 첫 번째 이온화 에너지를 더한 값은 알칼리 금속과 다른 물질 사이의 반응의 활성화 에너지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이 값은 아래로 갈수록 감소하고 활성화 에너지도 감소한다. 따라서 화학 반응이 더 빨리 일어날 수 있고, 반응성은 아래로 갈수록 증가한다.
전기 음성도.
전기 음성도는 원자나 작용기가 전자(또는 전자 밀도)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경향을 설명하는 화학적 성질이다. 염화 나트륨에서 염소와 나트륨이 공유 결합을 한다면, 외부 전자에 대한 유효 핵전하가 염소는 +7이지만, 나트륨은 +1이기 때문에 공유 전자 쌍이 염소 쪽으로 끌릴 것이다. 전자 쌍은 염소 원자에 아주 가깝게 끌려 사실상 염소 원자 쪽으로 옮겨진다(이온 결합). 그러나 나트륨 원자가 리튬 원자로 바뀔 경우, 리튬 원자가 작기 때문에, 전자 쌍이 이전처럼 염소 원자에 가까이 끌리지 않고 리튬의 유효 핵전하에 더 강하게 끌리게 된다. 주기율표 아래의 더 큰 알칼리 금속 원자는 결합 전자 쌍이 원자 쪽으로 덜 강하게 끌리기 때문에 전기 음성도가 낮다. 앞서 언급했듯이 프랑슘은 예외적일 것으로 예상된다.
리튬의 높은 전기 음성도 때문에, 리튬 화합물 중 일부는 더 공유 결합의 특성을 가지게 된다. 예를 들어 아이오딘화 리튬(LiI)은 대부분의 공유 화합물처럼 유기 용매에 용해된다. 플루오린화 리튬(LiF)은 물에 녹지 않는 유일한 할로젠화 알칼리 금속이며, 수산화 리튬(LiOH)은 알칼리 금속 수산화물 중 유일하게 흡습성이 없다.
녹는점과 끓는점.
물질의 녹는점은 고체에서 액체로 상이 바뀌는 온도이고, 끓는점은 액체의 증기 압력이 액체를 둘러싼 환경 압력과 같아 모든 액체가 기체로 상이 바뀌는 온도이다. 금속이 녹는점까지 가열됨에 따라 원자를 제자리에 유지시키던 금속 결합이 약해져서 원자가 움직일 수 있게 되고, 끓는점에서 금속 결합은 완전히 끊어진다. 따라서 알칼리 금속의 녹는점과 끓는점은 금속 결합의 강도가 아래로 갈수록 감소함을 나타낸다. 이는 금속 원자가 양이온과 비편재화 전자 사이의 전자기적 인력에 의해 결합되기 때문이다. 아래로 갈수록 원자 반지름이 증가하기 때문에, 이온 핵은 비편재화 전자에서 더 멀어져 금속 결합이 약해져 금속이 더 쉽게 녹고 끓을 수 있어 녹는점과 끓는점을 낮춘다. (늘어난 원자핵의 전하량은 차폐 효과로 인해 관련이 없다.)
밀도.
알칼리 금속은 모두 같은 결정 구조(체심 입방 격자)를 가지고 있으므로, 단위 부피당 질량으로 정의되는 밀도는 특정 부피에 들어갈 수 있는 원자의 수와 원자 하나의 질량 만이 영향을 준다. 첫 번째 요인은 원자의 부피에 따라, 따라서 원자 반지름에 따라 달라며, 아래로 갈수록 원자의 부피는 증가한다. 알칼리 금속 원자의 질량 또한 아래로 갈수록 증가한다. 따라서 알칼리 금속의 밀도의 추세는 원자 질량과 원자 반지름에 따라 달라진다. 이 두 요소에 대한 수치가 알려져 있으면, 알칼리 금속의 밀도의 비를 계산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칼륨을 제외하고는 알칼리 금속의 밀도는 아래로 갈수록 증가한다. 같은 주기 원소 중에서 알칼리 금속이 가장 원자량이 낮고 가장 원자 반지름이 크기 때문에 주기율표에서 알칼리 금속은 가장 밀도가 낮은 금속이다. 리튬, 나트륨, 칼륨은 주기율표에서 물보다 밀도가 낮은 단 세 금속이다. 리튬은 실온에서 가장 밀도가 낮은 고체로 알려져 있다. |
3540 | 3308564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40 | 수소 | 수소(水素, )는 주기율표의 가장 첫 번째(1족 1주기) 화학 원소로, 원소 기호는 H(←), 원자 번호는 1이다. 표준 원자량은 1.008로, 질량 기준으로 우주의 75%를 구성하고있는 우주에서 가장 흔한 원소이기도 하다. 순물질은 실온에서 기체상태의 H2로 존재하며, 1족 원소 중에서 유일한 비금속 원소이다. 동위원소로는 중수소(2H)와 삼중수소(3H)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질량수 7까지의 수소 동위원소가 보고되었다. 양성자이다.
수소(水素)라는 이름의 어원은 ‘물을 만들다’의 독일어 Wasserstoff에서 유래하였다. 영어로도 Hydrogen은 라틴어의 Hydro(물)와 비금속 원소의 접미사 -gen(만들다)이 합쳐진 뜻을 가지고있다. 프랑스어 hydrogène 역시 라부아지에가 1783년 '물을 생성한다.'의 의미로 명명하였다.
화학적 성질.
족의 분류.
수소는 현재 주기율표에서 가장 바깥쪽 껍질에 전자를 하나 가진 리튬 위에 배열한다. 하지만 수소는 사실상 알칼리 금속들이 위치해있는 1족 원소치고는 화학적 성질이 할로젠 원소들과 여러면에서 더 비슷하기 때문에, IUPAC에서는 수소를 17족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연소.
급격히 불에 타는 가연성 연료이다. 수소가 연소할 때에는 폭발음과 함께 무색의 불꽃을 내며 타는데, 이때 수소와 산소가 반응하여 물 분자가 형성된다.
2H2(g) + O2(g) → 2H2O(l) + 572kJ(반응열, 286 kJ/mol)
수소 기체는 공기 중에서는 4~74%의 농도, 염소 화합물에는 5~95%의 농도일 때 강한 폭발성을 띈다. 혼합물은 자연스레 불꽃, 열 또는 태양광에 의해 폭발하며, 자연발화 온도는 대략 500° C이다. 순수한 수소-산소 불꽃은 자외선과 맨눈으로는 거의 볼 수 없는 매우 밝은 빛을 방출한다. 때문에 수소 가스의 누출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불꽃 감지기가 필요하다.
또한 수소는 공기보다 가볍기 때문에 비행선을 띄우는 데 적합한 재료로 사용되었지만, 1937년 연료 탱크에서 누출된 수소 가스가 폭발하여 발생한 힌덴부르크 참사 이후로 현재 많은 나라에서 풍선이나 비행선에 수소를 채우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사건 당시 힌덴부르크 호에 탑승했던 승객중 3분의 2는 화재로부터 목숨을 건졌지만, 나머지는 비행선에서 추락하거나 연료가 점화되어 사망했다.
산으로서의 작용.
단일 수소 원자가 전자 하나를 버리고 양이온(양성자)의 형태로 존재하면 금속을 부식시키는 등 산성 용액의 특징을 나타내는 주요한 원인이 되기도 하며, 상온에서 염소나 플루오린과 반응하여 염화 수소나 플루오린화 수소 등의 부식성 기체를 형성한다.
양자적 이성질체.
전자의 배치에 따라 오르토 수소나 파라 수소를 형성한다. 전자가 수소 분자의 바깥을 향하면 오르토 수소이다. 비교적 전환 속도가 느리므로 서로 구분할 수 있으며, 상온에서는 오르토 수소와 파라 수소가 3:1 정도의 비율로 존재한다.
동위원소.
수소에는 세 개의 자연에서 발견되는 동위원소(1H, 2H, 3H)가 있다. 다른 매우 불안정한 동위원소들은 실험실에서 합성된 적이 있으나(4H,5H,6H,7H),자연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1H는 자연에서 발견되는 수소 중 99.98%를 차지하는 가장 흔한 동위원소로 원자핵이 양성자 단 하나로 이루어져 있어 경수소라는 형식적 이름을 가지나 이 이름은 잘 사용되지 않는다. 중수소와 구분하기 위해 Protium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2H는 다른 안정한 동위원소로 중수소라고 불리며, 원자핵이 양성자 하나와 중성자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중수소는 대폭발 때 생겨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중수소는 방사성을 띠지 않으며 독성 위험도 크지 않다. 중수소와 그 화합물은 화학 실험에서 방사능을 띠지 않는 표지나 1H-NMR 분광법의 용매로 사용되며, 상업적 핵융합의 잠재적 연료이기도 하다.
특히 중수소가 많이 포함된 물을 중수라고 부르며, 중성자 감속재나 원자로 용매로 사용된다.
3H는 삼중수소라고 불리며, 원자핵이 양성자 하나와 중성자 두 개로 이루어져 있다. 삼중수소는 방사성을 띠어 12.32년의 반감기를 갖는 베타 붕괴를 통해 3He로 붕괴된다. 적은 양의 삼중수소가 우주선과 대기의 상호작용으로 생겨나 자연에 존재한다. 삼중수소는 핵무기 실험에서 방출되기도 한다. 삼중수소는 핵융합 반응에 사용되거나 동위원소 지구화학에서 추적자로 사용된다.
수소는 각 동위원소의 다른 이름이 흔히 사용되는 유일한 원소이다. D와 T라는 표기가 2H와 3H 대신 중수소와 삼중수소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여전히 2H, 3H를 권장하지만 IUPAC도 D와 T를 인정하고 있다 방사능의 초기 연구에서, 많은 방사성 동위원소가 이름 지어졌으나 수소 이외에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역사.
발견과 사용.
16세기의 연금술사 파라켈수스는 금속이 산에 녹을 때 어떤 기체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그 기체를 수소라고 맨 처음 언급하였다. 그 당시에는 수소가 일산화탄소와 같은 다른 가연성 기체와 혼동되었으나, 1766년 헨리 캐번디시는 수소가 다른 가연성 기체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한다. 1776년 월타이어는 수소가 연소할 때 물을 만든다는 것을 발견하고, 몇 년 후 라부아지에는 이 기체를 수소라고 명명하였다.
수소 기체는 파라셀수스가 금속과 강산을 섞어 처음 만들었다. 그는 이 화학 반응으로 만들어지는 가연성 기체가 새로운 화학 원소임을 알지 못했다. 1671년, 로버트 보일이 수소 기체가 발생하는 반응인 철가루와 묽은 산 용액 간의 반응을 재발견하고 기술하였다.
수소 기체를 개별적인 물질로 처음 인식한 것은 헨리 캐번디시였다. 그는 1766년 금속-산 반응에서 나오는 기체를 “인화성 공기”로 확인했고,1781년에는 그 기체를 연소시키면 물이 생김을 발견했다. 헨리 캐번디시는 보통 수소의 발견자로 인정받는다. 그 뒤 1783년에 앙투안 라부아지에가 피에르시몽 라플라스와 함께 수소가 연소되면 물이 생긴다는 캐번디시의 발견을 재현한 뒤 원소에 수소라는 이름을 붙였다.
수소는 제임스 듀어에 의해 재생식 냉각법과 그의 발명품인 진공 보온병을 이용해 1898년 처음 액화되었다. 그는 그 다음 해에 고체 수소도 만들었다.
중수소는 헤롤드 유리가 1931년 12월에 발견했고, 삼중수소는 어니스트 러더퍼드, 마크 올리펀트, 파울 하르텍이 1934년 만들었다. 물 분자에서 보통 수소의 자리가 중수소로 대체된 중수는 1932년 헤롤드 유리의 그룹이 발견하였다. 에드워드 다니엘 클라크는 1819년에 수소 기체 취관을 발명했다. 1823년에는 되베라이너 등과 석회광이 발명되었다.
수소 충전 풍선은 자크 알렉상드르 세사르 샤를이 1783년에 처음 발명하였다. 앙리 지파르가 수소를 이용해 뜨는 비행선을 1852년에 발명하면서 수소가 항공 교통 수단이 공중에 뜨는 수단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 뒤 독일의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 백작이 수소를 충전하여 공중에 뜨는 경식 비행선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이 비행선은 나중에 체펠린 비행선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1900년에 처음 비행했고, 1910년에는 규칙적으로 비행하게 되었다. 1914년 8월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체펠린 비행선은 중대한 사고 없이 3만5천 명의 탑승객을 운반했다. 전쟁 도중에 수소로 뜨는 비행선들은 관찰대나 폭격기로 이용되었다.
첫 무착륙 대서양 횡단은 1919년 영국 비행선 R34가 이루었다. 정기적인 여객 서비스가 1920년대에 재개되었고, 미국에서의 헬륨의 발견은 비행선에 더 큰 안전성을 보장했으나, 미국 정부는 비행선에 사용할 목적으로 쓰이는 헬륨을 파는 것을 거부했다. 그래서 LZ 129 힌덴부르크에는 수소가 사용되었고, 힌덴부르크는 1937년 5월 6일에 비행 도중의 화재로 파괴되었다. 이 사고는 라디오로 생방송되었다. 새어나온 수소에 불이 붙어 화재가 발생했다고 여겨졌으나, 수사 결과 알루미늄 섬유의 정전기 때문에 불이 났다고 밝혔다. 하지만 수소의 비행선에의 사용은 이 사건으로 막을 내렸다. 현재 비행선에는 거의 헬륨을 사용하고 있다.
니켈-수소 전지는 1977년 미 해군의 NTS-2에 처음 사용되었고, 국제 우주 정거장과 마스 오디세이,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 에도 장착되었다. 수소는 공기보다 가벼워 한때 풍선속 공기로 활용되었지만 위험성이 알려지며 지금은 헬륨으로 대체되고 있지만 수소가 싸다는 이유로 일부 상인은 불법으로 풍선에 수소를 넣고 있는데 이는 아직까지도 논란과 파문이 되고 있다.
양자 이론에서의 역할.
양성자 하나와 전자 하나만으로 구성되는 비교적 간단한 원자 구조 때문에, 수소 원자와 수소 원자가 내는 스펙트럼은 원자 구조 이론의 발전에 중심이 되어 왔다. 게다가 그에 따르는 수소 분자와 그 양이온 H2+의 간단함은 화학 결합의 본질에 대해 더 완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 간단함으로 인해 수소 양이온과 수소 분자 양이온에 대해 슈뢰딩거 방정식의 완전해를 구할 수 있다.
뚜렷하게 관찰된 양자적 효과 중 하나는 양자역학 이론이 완전히 정립되기 반세기 이전에 이루어진 수소에 대한 맥스웰의 관찰이다. 맥스웰은 수소 분자의 비열용량이 상온에서는 이원자 분자의 비열용량 경향을 따르고 극저온으로 내려가면 단원자 분자의 비열용량 경향과 비슷해지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관찰했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이 현상은 양자화된 회전 에너지 수준 사이의 차이가 수소의 낮은 질량 때문에 매우 커지기 때문이다. 이런 에너지 수준 간의 큰 차이가 낮은 온도에서 같은 양의 열 에너지가 회전 운동으로 바뀌는 것을 막는다. 한편 더 무거운 원자로 구성된 이원자 분자에서는 에너지 수준 간의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이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생물학적 반응.
H2는 혐기성 생물이 하는 물질 대사의 결과물로써 수소화효소라고 부르는 철 혹은 니켈이 포함된 효소의 촉매 반응을 하는 미생물이 생성하기도 한다. 이 효소는 H2와 그 구성 물질인 두 개의 양성자와 두 개의 전자 간에 이루어지는 역[[산화·환원 이런 생물들 중에는 [[엽록체]] 내의 특별한 수소화 효소가 작용하여 양성자와 전자가 기체 수소로 환원되도록 진화한 개체도 있다. 대표적으로 [[:en:Chlamydomonas reinhardtii|클라미도모나스 레인하드티]], [[남조류]]가 있다. 산소가 존재하는 경우에도 효율적으로 H2를 합성하는 남조류의 수산화효소를 유전자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으며, [[생물반응기]] 내의 유전자 조작 조류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안전과 주의사항.
수소는 공기와 혼합되었을 때 폭발과 함께 화재를 동반할 수 있다. 하지만, 수소는 원자번호 1번, 즉 공기보다 14배 가벼운 기체이기 때문에 공기중에 누출시에 매우 급속도로 확산되며, 점화 온도(약 500°C)가 높아 자연적 발화 자체가 극히 낮다. [[액체 수소]] (영하 253도 이하에서 액체화)는 [[극저온유체|극저온 유체]]로써 기체수소에 비해 부피기준 1/800 수준이기 때문에 약 10배 이상의 수소효율성이 예상된다. 액체상태의 수소를 직접 피부와 접촉하면 [[동상]]에 걸릴 수 있으나 일반인이 직접 접촉하게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수소는 또한 금속재료에 흡수되어 수취화(Hydrogen Embrittlement , 水素脆化)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어딘가 수소가 누출되면 수소 취성이 일어나거나, 균열이 가거나, 심할 경우에는 폭발할 가능성도 있다. 외부 공기와 접촉하게 된 수소 기체는 산소 등이 존재할 경우 폭발할 수 있는데 이 때 일어난 화재의 경우 매우 뜨겁고, 거의 보이지도 않아 우연치 않게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
외부 링크.
[[분류:수소| ]]
[[분류:비금속]]
[[분류:화학 원소]]
[[분류:환원제]]
[[분류:냉매]]
[[분류:전형 원소]] |
3541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41 | 동위 원소 | 동위 원소 (同位元素, Isotope)는 원자 번호가 같지만 질량수가 다른 원소를 말한다. 어떤 원소의 동위원소는 그 원소와 같은 수의 양성자와 전자를 가지지만, 다른 수의 중성자를 가진다. 원소의 화학적 성질은 양성자와 전자의 수에 의해 결정되므로 동위 원소의 화학적 성질은 원래 원소와 같다. 하지만 중성자의 수가 달라서 질량이 다르므로 물리적 방법으로 분리할 수 있다. 즉, 동위 원소는 서로 다른 물리적 성질을 가진다. 즉, 화학적 성질은 비슷하다.
참고.
동위 원소는 양성자의 수가 같은 원소이다. |
3543 | 10476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543 | 인터넷 검색엔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