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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0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840 | 1인 2표제 | 1인 2표제는 유권자들이 서로 다른 시스템을 사용하는 단일 의회에 대해 두 번의 개별 선거에 실제로 참여하며, 한 선거에서의 결과가 다른 시스템의 결과에 거의 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혼합 선거 시스템을 말한다.
도입 사례.
대한민국에서는 17대 총선부터 도입된 총선 투표 방식이다.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선출함에 있어 기존에는 단순 지역구 의석수를 기준으로 각 당에 전국구 의석을 배분하여 왔으나, 17대 총선부터는 지역구 의원에 대한 표와 별도로 지지정당을 선택하는 두 번째 표를 부여하여 그 득표 비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하게 되었다. 방식이 다소 복잡하긴 하나, 다양한 국민의 의견이 반영된다 |
2841 | 61390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841 | 맥도널드 (동음이의) | 맥도널드(Macdonald/MacDonald/McDonald)는 스코틀랜드의 도널드 가문과 관련있는 이름이다. |
2842 | 3333316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842 | 윤년 | formula_1
윤년(閏年)은 역법을 실제 태양년에 맞추기 위해 여분의 하루 또는 월(月)을 끼우는 해이다. 태양년은 정수의 하루로 나누어떨어지지 않고, 달의 공전주기와 지구의 공전주기는 다르기 때문에 태양력에서는 하루(윤일), 태음태양력에서는 한 달(윤달)을 적절한 시기에 끼워서 이를 보정한다.
태양력에서는 보통 윤일이 들어 있는 해를 말하는데, 이 경우 1년은 366일이 되며 이것이 바로 윤년이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데에는 365일 05시간 48분 46초가 걸리므로 365일을 제외한 시간들을 모아 태양력에서는 04년마다 한 번 12월 32일을 두어 하루를 늘리고, 태음력에서는 평년이 354일이므로 계절과 역월(曆月)을 조절하기 위하여 19년에 7번의 비율로 윤달을 끼워 01년을 13개월로 한다. 윤년이 아닌 해는 평년이라고 한다.
태양력의 윤년은 12지에서 쥐띠, 용띠, 원숭이띠에 해당하며, 육십간지 중 경자, 경진, 경신년의 경우 윤년이 아닌 경우도 있고 임자, 갑자, 병자, 무자, 임진, 갑진, 병진, 무진, 임신, 갑신, 병신, 무신년은 무조건 윤년이다. 또한 2월 29일이 낀 경우에는 윤년인 해의 1월 1일부터 그 다음 해 평년인 12월 31일까지 전년과 2요일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2020년 1월 1일이 수요일이면 2월 29일로 인해 두 요일이 밀려 목요일은 건너뛰고 2021년 01월 01일과 2021년 12월 31일은 금요일이 된다. 01월은 12월 32일에 의해 10월과 요일이 동일하거나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03월도 마찬가지로 전년 09월과 전년 12월에 동일하거나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태양력의 윤년.
현재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쓰는 그레고리력은 04년에 반드시 하루씩 윤날(12월 32일)을 추가하는 율리우스력을 보완한 것으로, 태양년과의 편차를 줄이기 위해 율리우스력의 400년에서 3일(세 번의 윤년)을 뺐다.
그레고리력의 정확한 윤년 규칙은 다음과 같다.
즉, 400년에 97년은 윤년이 되며, 1년은 평균 365.2425일이 된다. 이는 춘분점을 기준으로 한 태양년보다 0.0003일(26초)이 길기 때문에, 약 3,300년마다 1일의 편차가 난다.
윤년 수정 제안과 그 한계.
그레고리력은 상당히 치밀한 역법으로 1582년에 만들어진 이래 아직까지 수정된 바가 없다. 그러나, 약 3천 년마다 1일의 편차가 발생할 수 있어서 몇 가지 수정안이 제시된 바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4,000년마다 1일씩 윤년을 추가로 빼자는 제안이다. 간혹 이 제안이 이미 받아들여졌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현재의 태양년과 그레고리력의 수적 차이, 율리우스력이 128년마다 1일의 편차가 난다는 것만 고려하면 3,200년마다 1일씩 윤년에서 제외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러한 수정안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수천 년 이상의 주기로 일어나는 지구의 세차운동이나 조석의 감소로 인한 하루 길이의 증가를 계산에 넣고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특히, 조석은 후빙기 반동이나 기후 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에 따라 꽤 변할 수 있는데, 이러한 자료는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를 고려하여 역법을 만드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다.그리고 2033년에는 윤년과 삭망월이 겹처져서 2033년 문제가 생긴다.
태음태양력의 윤년.
태음태양력에서는 태음력과 태양력의 오차를 보정하기 위해 윤달을 두는데, 윤달이 든 해를 윤년(閏年)이라고 한다. 지구의 공전 주기는 365.2422일인 데 비해 1삭망월은 29.5306일로 1년을 만들면 약 354일이므로 3년만 지나면 33일 가량이 모자라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오차를 보정하기 위하여 19년에 일곱 번가량 윤달을 두게 된다. |
2844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844 | 프랑스 문학 | 프랑스 문학(-文學)은 프랑스에서 창작된 문학 작품을 일컫는다.
프랑스 문학사.
배경.
원주민 골족(Gaulois)의 언어는 켈트어였고, 그들이 개명하기 시작한 것은 카이사르에게 정복되어(기원전 100년) 로마의 문화와 혼합되면서부터이다. 로마 제국의 한 속주(屬州)로 5세기 동안 예속되면서 인종적 혼합인 갈로-로맹인(人)을 형성했고 기독교를 비롯하여 제도·관습·언어 등이 로마화(化)하여 갈로 로맹 문화로 미개한 상태를 벗어났다. 한편 언어는 프랑스 지방의 사투리처럼 된 구어(口語) 라틴어를 사용하여 이를 정통 라틴어에 대하여 로망스어라 한다.
당시 프랑스는 크게 북부는 오일어(langue d'oïl), 남부는 오크어(langue d'oc)로 분화되어 있었는데, 현대 불어는 오일어, 그중에서도 파리 방언에 기원한다. 중세 유럽에서는 라틴어가 거의 유일한 문어였지만 차츰 지방의 로망스어, 즉 프랑스어로도 글을 쓰려는 움직임이 있어왔다. 가장 오래된 불문학의 흔적은 9세기의 스트라스부르 서약과 성녀 에울랄리아 찬가로 거슬러 올러간다.
중세 프랑스 문학 (11-15세기).
중세 프랑스 문학은 신앙과 기사도정신(騎士道精神)을 고취하거나 귀부인과 기사들의 사랑과 무용(武勇)을 담은 귀족문학과 상류층·승려·지배자를 풍자하는 해학적인 서민문학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최초의 서사시인 무훈시(武勳詩,기사도 로망)들, 장시 로망 등이 전자에 속하고 여우 이야기<파블리오=짤막한 소담(笑談)> 등이 후자에 속한다.
16세기 프랑스 문학.
프랑스의 르네상스는 16세기에 선진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에 자극을 받고 이를 섭취·소화하는 과정에 두 가지 흐름이 발원한다.
하나는 기독교 이전의 그리스·로마 고전문예의 큰 장르(정형서정시, 극시)들을 프랑스어로 소화하여 부흥시키려는 시(詩) 운동이다. 마로가 처음으로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형식을 프랑스어로 시도했으며 고전 라틴문학과 이탈리아 문학의 주제와 양식을 모방하고자 했으며, 이는 피에르 드 롱사르를 필두로 한 플레야드파(7성시인)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라틴어 및 이탈리아어에서 신중히 단어를 선별하고 언어구조를 모방해 불어에 받아들여 불어를 고전언어 못지않게 고상한 문학언어로 만드는 것을 꾀했다. 이에 따라 프랑스어는 고전 프랑스어(Français classique)로 발전하게 되고 중세 프랑스어와 상당한 차이가 나게 된다. 이렇게 가다듬고 순화된 고전 프랑스어로 희극·비극 장르의 도입을 시도함으로써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의 터가 닦였다.
다른 하나의 흐름은 고전문예에 담긴 정신·사상을 되살리려는 산문문학의 흐름이다. 가톨릭 교회에서 금서지정을 받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로 유명한 라블레는 인간성과 현세적 삶의 해방을, 《수상록》으로 에세(essai)라는 1인칭 문학을 창조한 몽테뉴는 회의와 검증(檢證)·인간탐구의 정신을 일으켜 놓았다.
17세기 프랑스 문학.
17세기는 프랑스에 있어서 대세기(大世記, le Grand Siècle)라 불린다. 종교갈등도 잦아든 전제군주 치하의 프랑스는 유럽의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했으며, 문학사에 있어서도 불어에게 '몰리에르의 언어'(la langue de Molière)라는 이칭을 선사한 몰리에르가 활약한 것도 이 때이다. 17세기의 문학사는 바로크와 고전주의라는 양대산맥의 대립·상보라고 요약할 수 있다.
1610년대 등장한 바로크는 문학적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어 프레시오지테, 뷔를레스크 등의 갈래를 낳았으며, 마들렌 드 스퀴데리를 위시한 살롱이라는 문학공간이 흥성하기도 하였다. 귀부인들이 주재하는 살롱이 속출 유행하면서 사회적 지식층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민간의 세력권을 이루고, 사교·대화·시적 교류·관찰을 통해 살롱문학(인물·성격묘사, 회고록, 잠언집 등)이 발달한다.
태양왕 루이 14세가 친정을 시작한 1660년이 문학사의 구분점이 되어 고전주의 문학이 전성기를 만든다. 몰리에르를 비롯한 라신, 라퐁텐 등이 궁정의 비호를 받으며 고전주의 극시(劇詩)를 만들어냈다.
17세기 말 신앙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성이 중요시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18세기의 계몽주의로 이어진다.
18세기 프랑스 문학.
18세기는 계몽시대(siècle des Lumières)라 불리는데, 이전 세기의 르네상스 및 데카르트적 정신을 통해 이성의 승리를 추구하고자 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계몽주의는 전 유럽의 현상이지만, 18세기 사상을 가장 잘 결집해낸 것은 프랑스의 철학자들이었으며, 이로써 프랑스 혁명을 넘어 전 유럽 및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당시 프랑스 및 불어권의 대표적인 계몽철학자들로서는 볼테르, 루소, 디드로, 몽테스키외 등이 있다. |
2845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845 | 19세기 프랑스 문학 | 18세기 말부터 19세기는 프랑스의 사회 정치사에서 격동기이다. 이 시기에 프랑스에서 비롯된 정치 사회적 변화는 프랑스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걸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며, 나아가서 유럽의 새로운 정치적 판도와 사회 문화적 가치 체계의 변모를 가져왔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 7월혁명, 계몽주의 등의 낱말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의 격동하는 프랑스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문학이 반드시 정치 사회적 소용돌이의 산물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그러나 역사 정치적 배경을 미리 살펴 봄으로써 인간 문화 발전의 동기가 되는 여러 요소를 발견할 수 있으며, 이와 더불어 문화, 특히 문학의 경향을 파악할 수 있다. 예컨대 드니 디드로, 볼테르, 빅토르 위고, 장 자크 루소, 프랑수와 샤토브리앙 등은 바로 18세기 말을 전후로 프랑스의 정치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활동한 작가들이라는 사실 하나만을 놓고 보더라도 정치와 문학세계가 - 넓게는 학문세계 -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 가을 짐작해 볼 수 있다. |
2846 | 75312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846 | 경제학 | 경제학(經濟學, )은 자원이 제한된 상황에서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연구하는 사회과학의 한 분야다. 대부분 재화나 용역의 생산, 분배, 소비에 초점을 맞춘다.
경제학의 영단어 이코노믹스(economics)라는 용어는 고대 그리스어 οἰκονομία에서 유래한다. 경제학은 복잡한 경제 활동에서 특정한 규칙성을 발견하여 경제 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탐구하고 예측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경제학자들은 다양한 전제와 분석 대상을 설정한다. 그중에서도 현대 경제학에서의 주요 연구 대상은 세계의 경제 상태, 개개인과 기업이 노동, 소비, 투자, 고용, 가격 등을 어떻게 결정하는 지에 대한 것이다. 또한 경기의 침체와 호황, 개인이나 국가간에 나타나는 부의 불균형과 같은 것들도 경제학의 주요 관심 분야이다.
정치경제학의 한 영역으로 시작하였다.
기본적으로 경제학은 모형의 단순화를 위해 "다른 외적 조건이 동일하다면(ceteris paribus)"이라는 전제 하에서 모든 분석이 진행된다.(마르크스 경제학에서는 이러한 배제를 추상(abstract)이라 부른다.) 그러나 경제학자마다 분석 대상과 전제가 다르기 때문에 그들이 주목하거나 과감히 배제해버리는 부분은 모두 각각 다르다. 이러한 전제와 분석대상의 차이로부터 각 경제학파들의 차이가 생겨난다.이중 몇몇 유명한 경제학자들이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문제들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국부의 성격과 원천'(애덤 스미스), '대지에서 수확되는 생산물의 분배를 규율하는 법칙'(리카도), '삶의 일상사에서 인간이 하는 행동'(데번포트), '이런저런 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 희소한 수단과 목적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인간의 행동'(로빈슨), '유효수요의 결정 요인 분석과 국민소득수준과 고용량'(케인스), '근대사회의 움직임에 관한 경제적 법칙을 규명하는 것'(마르크스)
경제학의 학파에는 고전학파, 케인즈주의, 제도학파, 통화주의, 신고전파, 행동경제학, 신제도주의등이 있다. 비주류 경제학으로는 대표적으로 포스트케인지언이 있으며 그 이외에도 신경경제학 등이 있다. 실증경제학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반면 규범경제학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연구한다.
현대 주류 경제학의 전제와 경제학의 연구 대상.
현대 주류경제학은 자원 등 경제적 가치가 있는 대상이 희소하고 이를 선택할 때에는 기회 비용이 발생한다는 것을 기본적인 전제로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공기와 같은 것마저 공짜가 아니다. 개인, 기업, 국가와 같은 경제 주체들은 시장에 참여하여 재화와 용역의 수요와 공급을 창출하고, 이 과정에서 최대한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하려한다. 따라서 경제 활동은 각 경제 주체가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려는 경향성을 보이게 되고 이때문에 일정한 규칙이 성립하게 된다. 경제학은 이러한 경제 활동의 규칙을 찾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의 경제를 예측한다. 경제학은 현재의 상황을 분석하여 그 원인과 결과를 규명하는 실증경제학과 가치 판단에 따라 경제 활동을 평가하는 규범경제학으로 나뉠 수 있다. 한편, 경제학은 시장에 참여한 경제 주체의 활동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미시경제학과 국가 단위 규모의 경제 활동과 정책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거시경제학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인간은 다양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원을 사용하는 모든 과정이 경제학의 연구 대상이 된다.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는데 사용되는 최종적인 대상을 재화와 서비스라고 한다. 재화는 유형적인 대상, 서비스는 무형적인 대상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머리빗은 재화이고,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는 것은 서비스이다. 재화와 서비스는 노동, 자본, 원자재 같은 생산요소를 결합하여 생산된다. 예를 들어 플라스틱 머리빗은 노동력과 머리빗 만드는 기계(자본), 플라스틱의 원료가 되는 석유(원자재)를 결합하여 생산된다.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는 경제 행위자들 사이에서 교환되어 분배된다. 분배된 재화와 서비스는 최종적으로 소비되어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게 된다. 이 각각의 과정, 즉 생산, 교환, 분배, 소비 등이 경제학의 연구 대상이 된다.
생산, 교환, 분배, 소비 등의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이나 혹은 특정한 산업 역시 경제학의 연구 대상이 된다. 노동이라는 생산요소에 초점을 맞추는 노동경제학, 농업이라는 산업에 특화된 농업경제학 등이 그 예이다.
산업 내의 구도를 연구하는 산업조직론, 국가 간 무역을 연구하는 국제무역론, 국가 간 금융 거래와 흐름을 연구하는 국제금융론 등도 있다.
장기적이고 경제 전체를 연구하는 분야로는 거시경제학이 있으며, 거시경제학에서는 경제성장, 경기변동, 실업률, 물가 등을 다룬다.
직접적으로 경제와 관련된 문제 이외에도 현대의 경제학은 경제학 제국주의라고 불릴만큼 인접 학문의 주제들을 넓게 연구하고 있다. 법, 투표, 범죄, 정보, 교육 등이 대표적으로 인접 학문과 겹치는 분야들이다.
역사.
경제학이 체계적인 학문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출판한 1776년 이후이다. 애덤 스미스 이전에 경제에 대한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닌데, 이를테면 경제에 대한 노동가치설의 효시가 되는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출판할 당시, 각 개인의 경제적 자유는 지금처럼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지 않았다. 국가가 개인의 경제 활동을 통제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여겨졌고, 세금, 수출입 규제 등은 체계적인 이론 없이 자의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애덤 스미스는 시장의 자율적인 조정 능력을 강조하며, 개인이 사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사회 전체의 이익에 기여한다는 것을 보였다. 애덤 스미스는 국가가 개인의 경제 활동에 개입하지 않아도 시장에서의 가격 조정을 통해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룬다고 주장했다. 이런 시장의 기능을 그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애덤 스미스는 또한 분업의 이점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였고, 노동가치설을 설명하기도 했다.
국부론 이후, 토마스 맬서스, 데이비드 리카도, 존 스튜어트 밀, 카를 마르크스 등이 애덤 스미스를 계승하여 가치론, 분배 이론, 국제 무역에 대한 설명을 제공했다.
애덤 스미스 이후, 경제학이 방법론 상의 큰 변화를 겪은 것은 한계 효용 학파의 등장 이후이다. 한계 효용 학파는 물리학의 프레임워크를 받아들여 미적분을 사용한 수학적인 모형을 개발했다. 일반 균형 모형이 연구된 것이 한계 효용 학파 시대이다. 경제학이 현대의 주류 경제학과 가까운 모습으로 정착한 것은 한계 효용 학파 이후다. 한계 효용 학파 이전의 경제학에는 수학이 제한적으로 사용되었고, 많은 부분이 말로 설명되었다.
한계 효용 학파에 따르면, 합리적인 경제주체는 한계 효용이 한계 비용과 같아지는 지점을 선택한다. 이 원리는 현대에서도 다수의 경제 모형의 결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원리이다.
한계 효용 학파 시대에 경제학은 처음으로 대학에 독립된 학과로 개설되었다. 알프레드 마셜이 1903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에 경제학과를 개설한 것이 최초이다.
알프레드 마셜의 제자였던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국가의 전체적인 관점에서 경제를 설명하려 했다. 그는 현대에 사용되는 재정 정책과 통화 정책 등의 경기 부양 정책의 기초적인 논리를 마련했다. 그는 거시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경기 불황시에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강조했다.
1944년에 존 폰 노이만과 오스카 모겐스턴은 게임의 이론과 경제 행위라는 책을 출간한다. 이는 게임 이론의 시초가 되는 저작으로 여겨진다. 게임 이론은 경제 행위자간 상호작용을 다루는 경제학의 분야이다.
현대의 경제학은 학문으로서 성공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대부분의 국가의 정책 결정에 필수적으로 사용된다.
초창기에는 도덕 철학이나 정치학의 일부로 여겨졌으나, 오늘날에는 심리학과 더불어 사회과학 중 정말로 과학으로 분류되다시피 하는 영역이다.
현재 전세계에서 이들 경제학자들이 남겨 놓은 경제이론을 바탕으로 국가의 경제정책을 펼치고 있으며 여전히 많은 경제이론 등이 개발되거나 발전되고 있다.
경제학의 연구방법.
경제는 연구하기 까다로운 대상이다. 그 이유는 첫째, 경제라는 시스템은 절대적인 크기가 크며, 둘째, 인간이라는 변칙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고, 셋째, 상호작용하는 요소가 다양하고 수가 많기 때문이다. 이 이유들 때문에 경제는 실험을 통해 연구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주류경제학은 독특한 연구 방법을 발전시켜왔다.
대부분의 경제학은 수학적 모형으로 경제를 표현하여 그 성질을 분석한다.
주류경제학에서 인간의 행동을 수학적으로 형식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중요한 가정은 인간의 선호에 대한 합리성 가정이 있다. 거칠게 설명하자면, 합리성 가정은 인간의 선호에 순서가 주어질 수 있다는 가정이다. 이 가정은 수학적으로 형식화된 몇 개의 공리로 이뤄져 있다. 대부분의 현대 주류경제학 이론은 이 공리에 기초하고 있다.
선호에 순서가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행동을 관찰해보면 그다지 강한 가정은 아니다. 경제학에서 선호에 순서가 주어질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두 개의 대상을 똑같이 좋아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순서에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당신에게 세 명의 친구 영희, 철수, 민희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당신이 영희를 철수보다 더 좋아하고, 철수를 민희보다 더 좋아하면, 당신은 영희를 민희보다 더 좋아할 것이다. 이 경우 세 명의 친구에 대한 선호는 영희>철수>민희의 순서가 된다. 영희, 철수, 민희를 똑같이 좋아하는 경우에도 합리성 가정은 만족된다. 다만 합리성 가정이 배제하는 경우는 영희를 철수보다 더 좋아하고, 철수를 민희보다 더 좋아하는데, 민희를 영희보다 더 좋아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영희>철수이면서 철수>민희지만 영희>민희라고 쓸 수 없게 된다.
합리성 가정은 크게 무리있는 가정은 아니지만, 이 합리성 가정에 대해서는 신경경제학, 행동경제학 등 다른 경제학계에서 비판이 있었다. 실증적으로는 합리성 가정이 깨지는 경우가 있으며 어린아이의 경우 그런 경향이 더 크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경제학에서는 주로 실험 대신 통계적 방법으로 이론을 검증한다. 경제학 이론을 검증하는데 특화된 통계학을 계량경제학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시뮬레이션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신경경제학 같은 비주류 경제학에서는 fMRI 등의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경제학의 분야.
경제학 분야의 분류.
경제학은 크게 개인과 기업 등의 개별 경제 주체의 행동을 다루는 미시경제학과 경제성장, 경기변동, 실업, 인플레이션 등 경제 전체의 움직임을 다루는 거시경제학, 그리고 일정기간의 경제활동 및 경제조직에 대한 역사와 변천과정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며, 경제 외적 활동이나 제도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연구하는 경제발전론으로 나뉜다.
현대의 주류 경제학은 그 중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을 중점적으로 분석하며 환경경제학, 교육경제학, 정보경제학, 노동경제학 등 연구의 주제나 연구방법에 따라 분류하기도 한다. 기타 제도학파 경제학의 경우 경제발전론에 큰 비중을 둔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주류 경제학과 다르게 개별 경제주체 보다는 제도적인 차원인 생산관계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그 분석 대상이 주류경제학에서의 거시 경제학과 크게 겹친다고 볼 수 있으며, 경제발전론의 주요 분파중 하나인 종속이론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미시경제학.
미시경제학은 개인과 기업 등 개별 경제 주체의 행동을 다룬다. 미시경제학은 개별 주체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의 양이 제약되어 있을 때, 개별 주체가 어떻게 최선의 선택을 하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대개의 경우 수학적으로는 제약하의 최적화로 모형화한다.
미시경제학의 하위 분야인 게임이론에서는 경제 주체 간의 상호작용을 다룬다.
그 외의 미시경제학에 속하는 경제학 분야로는 산업조직론, 재정학 등이 있다.
거시경제학.
거시경제학은 경제 전체의 움직임을 다룬다. 경제성장, 경기변동, 실업, 인플레이션 등이 거시경제학의 주요 주제이다.
거시경제학의 하위 분야로는 국제금융론 등이 있다.
거시경제학의 미시적 기초.
개념적으로 경제학을 크게 거시경제학과 미시경제학으로 나누지만, 그 경계가 그렇게 분명한 것은 아니다. 경제의 거시적인 현상은 결국 미시적인 현상들의 상호작용이 하나의 흐름으로 나타난 것이다. 예를 들어, 거시경제학에서 사용하는 총수요 개념은 실제로는 각 가계의 수요가 종합된 개념이며, 각 가계의 수요는 미시경제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반영하여 최근의 거시경제학에서는 미시경제학적 설명을 기초로 한 모형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다만 사용하는 수학의 수준이 높기 때문에, 학부 기초 수준의 과목에서는 미시경제학적 설명이 포함된 거시경제학 모형이 잘 다뤄지지는 않는다.
경제발전론.
저개발 국민경제의 경제적 기본여건과 발전의 저해요인을 규명, 해결하여 실질국민소득의 양적 성장과 질적 수준을 향상시켜 복지경제 사회로 지향하는 보편적 경제이론과 정책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개발도상국의 개념과 특징 및 저해요인, 경제발전의 기초조건, 경제발전의 역사, 중상주의, 고전학파, 신고전학파, 케인즈와 그의 후계자, 동태적 경제성장에 관한 이론 등의 전통적 경제발전이론과 중상주의, 역사학파, 마르크스, 슘페터, 로스토우 등의 비전통적 경제발전이론, 개발도상국의 사회학적 접근방법, 자원의 간접 및 직접배분, 균형,불균형 성장론, 농업개발론과 공업개발론, 노동집약적 기술과 자본집약적 기술, 자유주의 무역론과 보호주의 무역론 등을 포함한 개발도상국 경제의 이론 등이 주요 내용이다. 특히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이론과 정책에 중점을 둔다.
경제학에서의 통계학의 사용.
통계학은 경제학에서 필수적으로 사용된다. 경제학은 실험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통계적인 방법으로 검증하는 경우가 많다. 통계학 중에서도 경제 데이터 특유의 난점에 집중하는 통계학을 계량경제학이라고 한다. 계량경제학을 사용한 이론 검증은 대부분의 경제학 분야에서 사용된다. 계량경제학 이외에 경제 과정을 확률 과정으로 모형화하는 경우에도 통계학적 기초가 필요하다.
경제학의 학파.
고전학파.
고전 경제학(古典經濟學, classical economics)은 경제사상사에서 최초의 근대 경제 이론으로 지목하는 경제학의 한 부류이다. 고전경제학을 정립한 주요 학자로는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르도, 토머스 멜더스, 존 스튜어트 밀 등이 있다. 이들 외에도 윌리엄 퍼티, 요한 하인리히 폰 튀넨,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 등도 고전경제학자로 다루어지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1776년 출간된 애덤스미스의 국부론이 고전경제학의 시발점으로 여겨진다. 고전경제학은 19세기 중반까지 경제 이론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며, 1870년 시작된 영국의 신고전경제학 발현의 근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케인즈주의.
존 메이너드 케인즈가 시초다.
케인즈 경제학(Keynesian economics)은 20세기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사상에 기초한 경제학 이론이다. 케인즈 경제학은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이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하는 혼합경제를 장려한다. 이는 시장과 민간 부문이 국가의 간섭이 없는 상태에서 가장 잘 작동한다고 주장하는 방임주의적 자유주의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실제로 케인즈 경제학은 여러 경제학자들이 방임주의의 실패로 인한 것으로 여기는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케인즈의 이론은 거시경제적 흐름이 각 개인들의 미시적 행동을 압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경제적 과정을 잠재 생산의 지속적인 성장으로 보는 18세기 후반 이후 고전 경제학자들의 관점과는 달리, 케인즈는 (특히 불황기에) 경제를 이끌어 가는 요소로서 상품에 대한 총수요를 강조했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1930년대의 높은 실업률과 디플레이션에 대해 거시적인 규모에서 대처하기 위해 정부가 정책적으로 소비를 유도해야 한다고 논했다. 불황 시기에 정부가 지출을 늘리면 보다 많은 돈이 유동되므로 시민들의 소비와 투자가 유도되어 경제가 정상 상태를 회복한다는 것이 케인즈의 주장이다. 이는 공급경제학에 반대되는 의미로서 수요주의 경제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카고학파.
시카고 학파 (경제학)는 시카고 대학교의 학생들과 교수진들의 연구와 관련된 신고전파 경제학 학파이다.
시카고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케인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제학의 거물들인 밀턴 프리드먼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있다. 거시 경제학의 맥락에서, 시카고 학파는 연안 대학들에 기반을 둔 짠물 학파와 대조적으로, 거시 경제학의 "민물 학파"와 연결된다. 시카고 거시 경제 이론은 1970년대 중반까지 통화 주의를 지지하는 케인즈식을 거부해 왔는데, 그 때 그것은 합리적인 기대의 개념에 기초하여 주로 새로운 고전적인 거시 경제학으로 돌아섰다. 민물 학파와 짠물 학파의 구분은 두 전통이 서로 상당히 결합된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대부분 구식이다. 구체적으로, 새케인스학파 경제학자들은 새로운 고전적인 경제학에 대한 반응으로 불완전한 경쟁과 끈적거리는 임금에 대한 전통적인 케인스 학파의 집중을 포기하지 않고 합리적인 기대치를 반영하기로 결정했다.
시카고학파의 역사적 영향.
1980년도에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의 마거릿 대처 수상이 시카고 학파의 경제학 이론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미국과 영국의 경제 정책에 반영 시켰다. 또한 남미에서는 일명 "시카고 보이즈"라고 불리는 시카고대 출신 경제학자들이 경제부 총리 같은 중요 직책들을 다루었다.
오늘날의 시카고학파.
지난 6년간 4개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과 총 30개의 노벨 경제학상으로 시카고 대학의 경제학부는 2, 3위이자 다른 세계적인 경제학부인 하버드나 MIT를 합친 것 보다도 노벨 경제학자들을 압도적으로 많이 배출해 오고 있다. 현재 시카고대의 경제학부는 전통적인 시카고학파 출신 보다는 여러 가지 다른 사고를 가지고 있는 교수진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교수진 중에서 대표적으로 2017년도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효율적 시장 가설(이 가설 또한 시카고학파 출신 교수이자 2013년도 노벨 경제학 수상자인 유진 파마 교수의 이론이다)을 반대하는 리처드 탈러 교수가 있다.
정책면에서는 전세계 경제에 가장 영향력을 미치는 중앙은행 총재, 은행가, 지식인 30명으로 구성된 G30조직에서 5명이 시카고대 출신이다. 이 5명은 전 일본 중앙 은행 총재, 전 인도 중앙 은행 총재이자 IMF의 총괄 경제학자, 전 이스라엘 중앙 은행 총재이자 미국의 가장 큰 은행인 JP모간 체이스의 총괄 회장,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은행인 UBS 회장, 그리고 "중앙 은행의 중앙 은행"이라고 부리는 Bank of International Settlements (중앙 은행들을 관리하는 전세계에서 가장 큰 중앙 은행)의 총재가 포함되어있다.
통화주의, 새고전주의.
거시경제학 내의 학파다. 소위 신자유주의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여겨진다. 보통 통화주의는 프리드먼이 창시하다시피 한 50~60년대의 학파고, 새고전주의는 루카스, 사전트, 프레스콧 등이 연관이 있는 70년대 이후의 학파다.
제도학파.
소스타인 베블런이 시초다.
신제도학파.
신제도학파는 종류가 굉장히 많지만 가장 주류적 위치를 점하는 분야는 합리적 선택 신제도주의다.
합리적 선택 신제도주의는 통상 주어진 제도적 환경 하에서 합리적 인간의 행태를 분석하는 학문이다. 공공선택론, 게임이론, 로널드 코즈, 엘레너 오스트롬, 나아가 행동 경제학 등이 이와 관계가 있다.
행동경제학.
주로 인간의 행동에 대한 관찰에 초점을 맞추는 경제학이다. 신경경제학과도 관계가 있다. 기존 경제학은 합리적이고(rational), 계산적이며 이기적인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에 기반한 학문인 반면, 행동경제학은 인간이 제한적으로 합리적이며, 때론 감정적으로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미국 같은 여러 나라에서는 이미 주류적 위치를 차지한다고 봐도 무방하나, 대한민국에서는 아직 제대로 전파가 되지 못했다.
비주류 경제학.
신경경제학.
신경과학에 근거한 경제학이다.
열역학경제학.
니콜라스 조제스쿠-뢰겐을 시초로 하는 경제학 분야이다. 열역학 법칙을 경제학에 적용한다.
생태경제학.
경제를 생태계의 일부로 보는 관점을 적용한 경제학 분야이다. 열역학 경제학과 관계가 깊다.
1970년대에 인류의 복지 향상을 위해서는 인류 사회와 생태계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함께 추구해야 한
다는 분야가 태동하였다. 이 분야가 바로 생태경제학(ecological economics)이다.
환경경제학.
1960년대에 선진국에서 환경주의의 영향을 받아 환경문제를 경제학의 테두리에서 고민하는 분야가 태동하였다. 환경경제학(environmental economics)이다. 환경호르몬은 유독 폐기물, 온실효과 기체 등 환경을 오염시키는 물질은 경제 활동의 결과 배출된다, 따라서 환경경제학은 경제 활동의 영역 안에서 환경문제의 원인을 규명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한다. 환경경제학에서는 시장실패, 곧 자원 배분의 비효율성은 외부효과 때문에 발생하며, 외부효과는 환경오염으로 인해서 나타난다고 전제한다. 따라서 환경경제학은 시장 실패를 해결하기 위해 대기 및 수질 오염, 유독 폐기물, 지구 온난화, 생물 다양성 보존 등에 관련된 환경정책에 대한 비용 및 편익 분석을 통해서 가장 효율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한다. 환경오염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시장실패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환경오염의 원인 제공자가 환경 이용에 대해 응분의 가격을 치르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들고 이를 실시해야 한다. 이를테면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를 배출할 수 있는 권리를 설정한 다음에 이러한 탄소 배출권을 자유롭게 사고팔게 하는 방법이 대표적 사례이다. |
2848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848 | 동양 미술사 | 동양 미술사(東洋美術史)는 아시아(동양) 지역 미술의 역사이다. 동양 미술은 그림의 표현 양식, 특히 쓰이는 기본재료에 따라 크게 묵화와 채색화로 나뉜다. 채색화는 그림의 대상에 따라 아래과 같이 구분한다. 현대에 이르러 서양화의 회화방법과 사용되는 재료의 부분적인 수용을 통하여 동양화는 그 표현양식 및 기법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
2849 | 755807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849 | 서양 미술사 | 서양 미술사는 서양에서 발생한 시각 예술의 역사를 망라한다.
서양미술의 역사.
서양미술의 근원지는 현재의 유럽과 함께 중동지역, 서부와 남부 러시아를 기준으로 하며 이후에는 북 아메리카 지역까지 확장된다. 미술의 역사는 출토되거나 보존된 미술품을 기준으로 그 작품이 생겨나게 된 시대적 배경과 작가, 작가의 특성 등을 고려하고 있다. 미술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 그 자체이며 따라서 미술의 역사를 말할 때 각 시대의 역사적인 사건들과 그 파장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미술의 발전은 동양미술과 극히 많은 차이를 보인다. 서양미술의 역사의 시작은 고대의 기원전 4만년까지 올라가며 조각품과 동굴벽화에서부터 시작한다. 이후 여러 문명과의 교류를 거쳐가며 미술은 서양미술의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집트 문명 시절에는 왕과 신을 거대한 조각상으로 표현하기도 했으며 피라미드나 스핑크스와 같은 유명한 고대 건축물을 남기기도 하였다. 서양미술은 조각과 그림, 직물에서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를 포함하고 있으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는 종교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이후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서양미술은 극적인 발전과 변화의 시기를 맞게 된다. 이후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위시한 근대미술이 발전하였으며, 인상주의는 모더니즘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렸다. 20세기 이후 미술은 포스트모더니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게 된다.
선사 시대.
서양 미술의 역사의 시작은 분명치 않다. 기원전 4만년 전에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 이후 인류는 발전을 거듭하면서 최초의 미술 형태를 이루는 돌 조각품을 만들게 된다. 기원전 3만년에서 2만 5천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이라는 작은 조각품은 서양 미술의 역사에서 최초의 미술작품 중 하나라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고대에 만들어진 미술 작품들은 정확한 제작년도를 추정하기 힘들며 작가는 물론 어떤 민족이 제작했는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즉, 미술의 역사는 사실상 이미 역사가 시작되고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에서야 비로소 쓰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대의 미술 작품은 대다수가 유럽과 남부 러시아를 걸쳐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재료는 대부분 돌이나 짐승의 뼈를 조각한 작품이거나 동굴 벽에 그려진 벽화들이다. 고대에 만들어진 미술 작품들은 그 용도가 관상용이 아닌 종교적이거나 교육적인 이유라고 추정되며 사람의 모습이나 들소, 야생말, 다른 야생동물 등 일상적이고 그들이 흔히 보는 모습들을 소재를 다루고 있다.
고대.
미노아 문명.
미노아 문명은 기원전 3000년의 오랜 옛날로부터 시작되어 기원전 2000년경에는 가치나 정도에 있어서,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고도의 문화를 전개하였다. 이 문명은 다른 먼 곳에서 이식된 것이 아니고 크레타섬에서 자생한 것이다. 크레타 문명은 중기 미노스 시대(기원전 2200∼1700년경)에 제1의 성기(盛期)에 달했다. 이 시대는 이집트의 중왕국 시대에 해당된다. 크노소스나 파이스토스가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것은 이 시대이다. 계속되는 후기 미노스 시대의 제1기(기원전 1700∼1500) 내지 제2기(기원전 1500∼1400)에는 원숙한 황금시대를 맞는다.
크레타인은 대리석이나 청동의 큰 조상(彫像)은 만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미술의 다른 분야에서 예술적 재능을 보여 준다. 벽화를 보면 그들이 특히 자연이나 동물에 대해서 친숙한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자는 허리가 호리호리하고, 대체로 허리에 띠만을 두르고 있다. 여자는 꼭 끼는 옷을 입었고, 그 스커트에는 이따금 꼰 끈이나 레이스의 장식이 붙어 있다.
크레타인의 사치는 금·은·상아·보석을 재료로 한 정교한 제품에 반영되어 있다. 바피오에서 발견된 한쌍의 잔은 하나는 황소를 포획하는 것을 표현하고, 다른 하나에는 그 사육(飼育)의 목가적인 정경이 묘사되어 있다.
미케네 문명.
카스피해 북동방(A. Nehring 설)의 옛땅에서, 기원전 3000년 후반에는, 이미 동·서 양 방향으로 나뉘었다고 생각되는 인도·유럽어족의 한 파가 발칸반도에 모습을 보인 것은 기원전 2000년 경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발칸반도를 남하하여, 이후 약 800년에 걸쳐, 계속 또는 간헐적으로 그리스 본토로 들어온다. 그 제1차가 그리스인의 한 그룹, 아카이아인이다. 그들은 기원전 1850년경부터 그리스 본토로 남하하고 얼마 안 가서 미노아 문명의 세계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미노아 왕국의 세력하에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계속 그 수를 더하여 오는 아카이아인에 의하여, 얼마 후에는 미노아 왕국과의 세력 관계가 역전되었고, 지중해 대지진이 미노아 문명의 괴멸에 박차를 가하였다. 기원전 1400년 경, 끝내는 크노소스가 멸망되었다. 이리하여 이번에는, 아카이아인이 에게해의 주인공이 되었다. 미노아 문명의 잔영(殘影) 밑에, 이 아카이아인이 창조한 문명의 한 시기가 미케네 문명이다.
미케네적 특색은 특히 건축에 나타나 있다. 미케네의 궁전은 크레타의 것과 같은 관(館)이 아니고 언덕 위에 쌓아올린 거대한 성(城)인 것이다. 미케네나 티린스의 산성(山城)이 그 대표적인 예다. 성 입구에서 차례로 통로를 더듬어 궁전의 깊숙한 곳에 들어가면, 귀중품의 배치나 구조에 있어서 미케네인은 고유의 풍습을 지키고 있다. 가장 특색이 있는 것은, 앞뜰을 가진 메가론(megaron)을 채용한 것이다. 메가론이란 것은 그리스어로 '넓은 방'이란 뜻이며, 본디는 원시 그리스의 주거였다. 소위 '남자의 크고 넓은 방'의 평면도는,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장방형으로서 현관 다음에 전실(前室)이 있고, 그 뒤에 커다란 주실(主室)의 있다. 주실 중앙에는 난로가 비치되어 있다.
미케네 궁전은, 이와 같이 거주 건축의 근본 형식에 있어서는, 그리스적인 특징을 나타내지만, 일반적으로 보면, 여기서도 크레타 미술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특히 건축의 세부(細部)나 내부의 장비(裝備)는 크레타 미술을 모방한 점이 많다. 무인다운 강건한 왕후들도 차츰 주거(住居)의 쾌적성을 충분히 즐기게끔 되었다. 그들은 기분이 좋은 거실이나 욕탕의 설비를 갖추고, 그들은 넓은 방을 좋아하는 벽화로 장식했다. 따라서 미케네 성(城)의 실내는 크레타의 궁전을 닮은 셈이다. 그런 경우, 회화에 있어서 미케네의 요소와 크레타의 요소가 결합했다고 하겠다.
고대 그리스.
크레타·미케네의 미술은 그 후의 시대인 그리스 미술과 비교하여 미적 감각이나 미술상의 양식에 있어서 상당히 다른 것이며, 크레타·미케네의 미술이 반드시 그리스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스 미술은 극히 조소적(彫塑的)이며, 간소하고 또한 장중(莊重)한 데 대하여, 에게해 미술은 현저하게 회화적·공예적이어서, 기념비적인 조각은 근소한 예외를 빼고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기원전 10세기 말에 이르러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람이나 동물을 기하학적 모형으로 표현하는 양식이 나타나 기원전 8세기까지 유행하였다. 기원전 10세기부터 9세기에 걸쳐 성립된 그리스의 폴리스는 기원전 7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서 뚜렷한 발전을 하여, 지중해 주변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이집트나 오리엔트와의 접촉하면서 대리석 기념물을 제작하는 방식을 습득하여 고대 그리스 조각은 아르카이크기(고졸기)에 진입한다.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로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아테네에서는 5세기 후반부터 이상미를 추구하는 고전기에 돌입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으로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 시대에는 고전적인 감정은 격정·흥분에까지 높아지고, 운동은 격동·동요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헬레니즘적 특성은 로마에까지 계승되었다.
그리스 건축 영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신전이며, 또 그리스 건축의 구성의 아름다움과 특색이 특히 신전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처음에는 전체의 비례나 개개의 부분의 형식이 각각이었으나, 기원전 6세기에 처음으로 엄격하고 때로는 수학적으로 정확한 건축 방식이 만들어졌다. 그리스 신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건축의 구조상으로 보아 기둥 및 그 위에 얹히는 수평 부재, 즉 엔태블러처(entablature)이며, 주범 양식(오더)은 각부의 비율이나 형태의 차이에 따라 도리아식·이오니아식 및 코린트식의 세 가지로 구별된다.
에트루리아.
로마인보다 앞서 이탈리아 반도에 최초로 독자적인 문화를 남긴 에트투리아인은, 기원전 8세기경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 북쪽은 토스카나 지방부터 남쪽은 로마에 이르는 지중해 연안 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부 이탈리아의 거의 전역을 지배한 민족이다. 기원전 7세기경부터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식민도시를 통하여 그리스 문화와의 접촉이 빈번하게 되고, 기원전 6세기 이래 강한 영향을 받았다. 에트루리아인이 항아리에 그린 그림이나 분묘의 벽화의 주제가 그리스적 요소를 다분히 보인다. 건축·조각·회화·공예 등의 조형 분야에서는 에트루리아인이 독자적 예술을 발전시켰으며 그들의 분묘 예술은 그 가장 현저한 증거이다.
에트루리아 건축을 가장 특징짓고 있는 것은 분묘이다. 그 형식은 시대에 따라 상당히 다르며, 정자형(井字型)·장방형·사각형·원형 등 각양각색이다. 가장 오래된 유적(遺蹟)은 빌라노바 문화와의 혼성기라고 하는, 기원전 10세기부터 기원전 9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가 있다. 그 형식은 우물형인데, 가운데에 뼈항아리를 놓는 감실이 만들어져 있다. 그 후 기원전 8세기에 와서 새로운 형식의 장방형 분묘가 만들어지고, 다시 기원전 7세기 말 이후에는 궁륭 천장을 가진 순연한 분묘 건축이 나타났다.
에트루리아인은 여러 가지의 형태를 한 분묘를 만들고 거기에 많은 일용품을 부장함과 함께, 분묘의 벽면을 아름답게 채색한 벽화로 장식했다. 타르퀴니아의 분묘군에는 벽화가 가장 많이 보이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랜된 벽화는 <황소의 묘(Tomb of the Bulls)>로서, 기원전 6세기 중엽의 것이다. 기원전 5세기가 되면 <남작의 묘(Tomb of the Baron)> <식탁의 묘(Tomb of the Triclinium)> 등에서는 색채가 부드러워져서, 구도에 조화와 통일이 있는 엄격한 화풍이 나타났다. <남작의 묘>의 기법은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던 프레스코가 아닌 템페라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인물 사이에 나란히 선 수목이나 작은 새들의 묘사는 사실적이다. 이것들은 분명히 그리스 회화의 영향이지만, 자연과 인물의 환경 묘사는 그리스 회화에서 볼 수 없는 에트루리아 회화의 특징이다.
고대 로마.
로마 미술은 북방의 에트루리아 미술과 반도 남부의 그리스 식민도시 미술의 영향을 받아서 싹이 트고 발전한 것이다. 로마는 현실적·행동적인 요소를 에트루리아인으로부터 받아 계승하면서 그리스적 형식을 모방했다. 기원전 2세기 후반에 그리스를 정복한 이래, 매우 많은 수의 그리스 조각이 로마로 운반되었다. 다수의 그리스 예술가가 로마에 초빙되어 그리스 명작을 모방했다. 청동의 원작은 대리석에 되새겼고, 그것들은 로마인의 취미나 헬레니즘 시대의 자연주의적인 경향으로 약간 변경되어 갔다.
로마 미술의 특성은 건축에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로마의 건축은 기둥과 들보로 되는 그리스 건축의 구성과, 에트루리아의 성문이나 분묘에 쓰이고 있는 아치형을 채용하였다. 구조면에 있어서는 아치형의 채용에 수반해서, 벽돌이나 돌을 가루로 만든 일종의 시멘트가 건축 공업에 채용되어, 거대한 건축의 건조를 가능하게 했다. 아치형에서는 상부의 중력은 원 둘레의 각 부분에 균등하게 중합(重合)하기 때문에, 기둥의 수를 줄이고 내부를 넓힐 수 있다.
조각에 있어서는 그리스의 영향이 특별히 현저하여, 기원전 2세기 후반에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한 이래 대부분의 그리스 조각이 로마로 운반되고, 또한 파시텔레스를 비롯하여 다수의 그리스의 예술가를 로마로 불러들여서 고전의 명작을 모방시켰다. 초상 조각에는 로마 조각의 훌륭한 독창성이 보이는데, 그것은 단순한 용모의 모방이 아니라 성격 묘사의 교묘한 점인 것이다.
로마의 회화는 헬레니즘 회화의 수용에서부터 시작한다. 헬레니즘 회화의 원작은 헬레니즘의 여러 지역에서는 거의 잔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원후 79년에 일어난 베수비오산의 분화로 매몰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에 남아 있는 벽화를 통하여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의 회화를 알아낼 수가 있다. 프레스코 및 모자이크에 의한 그들의 화풍은 헬레니즘 시대의 정신을 반영하고, 감각적이며 신비적이고 산문적인 주제가 사실적 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중세.
중세 초기.
서방 세계에서는 로마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한 4세기경부터 게르만의 여러 민족이 각지에 침입하여 새로운 지배자로서 정주(定住)하게 되었다. 로마제국 전역에 퍼져 있던 기독교는 이 지방민족(地方民族) 사이에도 깊이 침투되어 있었다. 이교(異敎)나 아리우스파(4세기 전반에 동로마제국의 교회내에 일어났던 이단파)를 믿고 있던 그들의 지배자도 5∼7세기에 걸쳐 점차 기독교(가톨릭)로 개종하고, 마침내 프랑크제국을 중심으로 서구적 기독교 미술이 형성되는 길이 열렸다. 고대제국의 붕괴로부터 소위 로마네스크 미술이 생겨났던 10세기경까지의 사이를 넓은 의미의 중세초기라고 부르고 있다.
메로빙거 왕조의 미술은 고전고대의 미술과 중세미술을 잇는 꼭 중간점에 있었다. 이 시대에는 갈리아(프랑스), 게르마니아(독일), 비지고트(에스파냐), 브리타니아(영국과 아일랜드) 등이 각각 다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구로마제국의 지배가 강했던 지역에서는 고전 양식을 좇은, 사실성이 강한 기독교 미술이 생겨나려 하고 있었으나, 알프스 이북이나 에스파냐에서는 북 또는 동으로부터 이동하여 온 게르만 민족과 선주민(先住民)인 켈트족이 가지고 있던 추상적인 형체감각이나 순수한 장식성과 결부된 조형(造形)이 행하여지고 있었다.
8세기 말, 샤를마뉴(카를)는 스스로 서로마 황제의 왕관을 받아 고대 로마의 재래를 기대하며 동시에 문화적으로도 고전문화의 부활을 시도하면서 서쪽의 그리스도 교권(敎圈)의 지도적 지위를 구축하고 있다. 수도 아헨에는 프랑크인 아인하르트를 위시하여, 각지의 유명한 학승(學僧)이 모여 학예의 중심이 되었다. 조형예술도 예외일 수는 없어 이 학예운동에 포함되었다. 이보다 앞서, 대제의 부친 피핀이 랑고바르트로부터 탈취한 라벤나를 교황령으로 기증(756년)함으로써 궁정과 교회의 결탁(結託)이 성립되었다. 기독교 미술은 종래와 같이 신을 믿는 사람들이나 교단 가운데서 만들어지던 것으로부터, 점차 확립되어 가는 봉건제도하의 궁정이나 영주 등의 권력을 배경으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성격이 바뀌어 갔다. 교회의 건축양식은 바실리카식으로 지어졌다. 공법은 석재를 쌓아올리는 로마 고래의 방법에 따라 주두(柱頭)가 있는 원주를 사용하였는데, 이미 목재 사용에 뛰어났던 북방 민족인 게르만인은 그 기술까지도 병용하여 지붕은 주로 목조로 하였다.
건축이나 그에 부수되는 미술이 대부분 소실된 오늘날, 소미술(小美術)이라고도 할 장식사본(미니어처)·제기·성기류(聖器類)의 공예품은 카롤링거 왕조 미술의 모습을 잘 전해 주는 것이다. 의전서인 성전(聖典)은 각 페이지는 물론이요, 표지까지도 금공이나 칠보로 아로새겨졌다. 동로마 제국에서는 성상 파괴 운동이 성행되고 있을 즈음 아헨에는 많은 성제기류가 동방으로부터 수집되어 왔다. 장식사본은 라인강 유역과 북프랑스 일대에 여러 유파가 형성되어 제각기 독특한 표현이 행해지고 있었다. 이들 여러 유파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그리스도를 위시하여 사도 여러 성자의 풍부한 도상화(圖像化)이며, 그 둘째는 동적, 사실적인 형체 표현(예컨대 <위트레흐트 시편의 미니어처> 위트레흐트 대학 소장)과, 3차원을 의식한 볼륨 있는 채색법(가령 <고데칼크의 복음서> <카를 대머리 왕의 제일성서>, 둘 다 파리 국립도서관소장) 등이 있다.
로마네스크.
10세기부터 12세기(지역에 따라서는 13세기 전반까지)경까지를 로마네스크 시대라 부르며, 11세기에서 12세기 초에 걸쳐 그 전성기를 이루었다. 광대한 프랑크제국이 분열되고, 노르만인, 사라센인 등의 거듭되는 침입으로 서유럽에 혼란과 공백이 계속되는 사이에 각지의 봉건 제후는 세력을 넓혔고, 중앙집권제는 붕괴되었다. 미술활동도 궁정 중심의 전유럽적인 것을 상실하고, 각지에서 부흥한 수도원을 단위로 해서 창조되는 것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따라서 저마다 지방양식이 로마네스크 미술의 특징의 하나가 되게 되었다. 로마네스크란 원래 건축사상의 용어였다. 두꺼운 석조의 벽체, 아치, 돔을 가진 건축에 끼친 고대 로마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로마네스크(로마풍)라는 호칭을 붙였으나, 그 후 개념의 변화가 생겨 고대 로마의 전통을 가미하고 에스파냐를 거쳐 전해진 사라센 양식이나, 활발해진 수도원 상호간의 교류, 십자군, 성지 순례 등을 통하여 전래된 동방 여러 지역의 양식 또는 카롤링거 양식, 비잔틴 양식 등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생겨난 중세 중기의 양식을 가리키게 되었다.
고딕.
12세기 말 북부 프랑스에서 고딕 미술이 발생하여, 고딕 건축이 발달하면서 덩달아 발달했다. 프랑스에서 처음 유행한 이래로 서유럽 전반과 알프스 북부에 두루 퍼졌으며, 중세 유럽을 대표하는 미술 양식이 되었다. 지역 차이는 있으나, 고딕 미술 운동은 15세기경까지 계속되어 르네상스로 이어졌다.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두껍고 넓은 벽면이 제거되고 크고 높은 들창의 형성이 가능해지자 스테인드 글라스가 발달하였다. 13세기까지의 기술은 주로 모양에 맞추어 자른 색유리를 H자형 단면을 가진 납 테에 끼워 한 장의 그림을 조립하고 필요에 따라 쇠 테로 보강하여 창으로 시공하였다. 이것은 게르만 켈트의 전통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긴 중세의 역사를 통하여 발달하여 온 소공예(칠보 등)의 색면 대비의 아름다움에, 투과광의 영롱함을 결부시켜 대예술로 발전을 본 것이다. 어두운 성당 안은 영롱하게 비치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색과 빛 속에 완전히 종교적인 분위기가 넘치게 되었다. 전형적 작품 예로 샤르트르 대성당의 150개에 가까운 크고 작은 창이 모두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어 있다.
이 시기에는 사실적 경향의 발달과 더불어 순수한 공예는 사양화(斜陽化)하나 사본류는 13세기의 파리를 중심으로 성행하였다. 교회에 귀속하는 것보다 귀족의 주문에 의한 것이 많고 랭부르 형제의 작품인 <베리공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는 그 좋은 예이다. 북프랑스를 중심으로 발달한 고딕 회화는 후에 플랑드르파의 탄생을 맞게 되는 것이다.
비잔틴 미술.
비잔틴의 미술은 고대 로마가 둘로 분열된 후 점차 쇠퇴되고 있던 서로마 중심의 라틴 미술에 대해서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급속한 발달을 보았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 용인령을 공포하여 비잔틴의 미술은 그 출발점에 있어서 이미 궁정(宮廷)의 지지를 배후에 업은 기독교 미술로서 장대함과 호화로움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동로마 제국은 기독교의 원천이 된 유대교의 신앙 지역이나 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 등의 그리스 문명의 유산을 보존하는 헬레니즘 문명의 중심지, 또는 동로마 제국을 자주 위협하는 강적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위치에 있었다. 이렇게 인접해 있는 이질문명이 동로마제국의 전사(前史)를 이룬 로마적 지중해 문명과 융합되어 동방적 요소와 라틴적 요소를 가미하면서 헬레니즘의 전통 위에 새로운 국면(局面)을 더한 형태로 전개되는 것이 비잔틴의 예술이다. 6세기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에 최초의 전성기를 맞아 갖가지 중요한 문화 유산을 남겼으나, 8∼9세기에 걸쳐서 성상 숭배에 관한 논쟁과 사라센인의 침입이 겹쳐 문화적으로는 혼미한 상태에 있었다. 그 후 10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서 한때 재흥기(再興期)가 있었다.
르네상스.
이탈리아 르네상스.
이탈리아는 당시 동방 무역을 통해서 이슬람의 문화나 고대와 고전의 학문·예술 등이 유입되고 있었으며, 고대 로마의 고지(故地)로서 유적·유물에 접하는 기회가 풍부했다. 유럽 중세의 신에 대해 고대 그리스·로마의 인간이 대치되어 피안적(彼岸的)이 아니고 차안적(此岸的)·개인주의적이며 현실주의적인 생의 약동에 찬 문화가 시민계급에 의해 이 곳에서 창조되기에 이르렀다.
알베르티, 브루넬레스키가 건축에서, 그리고 기베르티, 도나텔로가 조각에서 이룬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환이 회화에 있어서는 마사초에 의해 이루어졌다. 바사리의 열전(列傳)에 기술된 것처럼, 그가 프레스코화를 그린 피렌체에 있는 카르멜회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교회는 많은 르네상스 화가들의 수업의 도장이 되었다. 필리포 리피, 우첼로, 카스타뇨 등 피렌체의 화가들은 북이탈리아에서 한때 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조토가 파도바의 아레나 예배당에 프레스코화를 그렸고(1306), 도나텔로가 그곳에 10년간(1443∼53) 체재하여 산토의 주제단(主祭壇)과 ⟪가타멜라타 장군 기마상⟫을 제작한 일은 마사초에 이어서 초기 르네상스의 중요한 화가인 만테냐에게 적잖은 자극이 되었다.
피렌체파는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중심으로 하여 14세기로부터 16세기에 걸쳐 르네상스 미술의 주류를 이룬 건축·조각·회화의 유파로, 특히 회화에서는 주지적 합리주의(主知的合理主義)·조형적 형태주의(造形的形態主義)가 그 특징이다. 주제에 관련이 있는 것만을 단순화하고, 또 이를 극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공간구성은 화면 안의 통일이다’라는 고딕과는 다른 형식의 회화를 만들어냈다. 피렌체파의 사실적 성과는 메디치가의 번영에 힘입어 르네상스 회화 발전의 주류가 되었다. 이 자연주의(自然主義)는 1400년대 예술의 주류가 되었으며, 자연과학의 발흥과 더불어 인체묘사·운동묘사·풍경묘사 등에서 새로운 국면이 열리게 되었다.
매너리즘.
성기 르네상스에 완성된 고전주의 예술의 뒤를 이어받아, 거의 1520년 경부터 17세기 초두에 걸쳐서 주로 회화를 중심으로 매너리즘이 유행하였다. 이러한 양식을 낳게 한 역사적 조건으로서는 라파엘로이나 미켈란젤로의 완성된 힘찬 표현에 대한 경도(傾倒), 독일, 특히 뒤러의 작품을 통해서 전해진 북방 고딕의 강렬한 표현주의의 전통, 황제 카를 5세의 군대에 의한 '로마의 약탈'(1527)이나 종교전쟁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혼란한 시대 특유의 사회적 불안, 퐁텐블로의 프랑수아 1세나 피렌체의 코시모 대공을 비롯해 많은 예술 애호가 군주의 적극적인 보호정책을 들 수 있다. 표현은 극도로 세련된 기교, 곡선을 많이 쓴 복잡한 구성, 비뚤어진 원근법 등을 이용한 뜻하지 않은 구도, 명암의 콘트라스트나 복잡한 안길이의 표현에 의한 강렬한 효과, 환상적인 세부, 때로는 부자연스러운 프로포션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색채 등을 특색으로 하고, 자주 복잡한 우의적(寓意的), 추상적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근세.
바로크.
16세기의 매너리즘에 있어서 지적인 편중은 복잡한 우의(寓意)를 즐겨 쓰기도 하여 그의 호기심과 유희성은 환상적이기도 하고 에로틱하기도 한 작품을 만들어 세련된 유미주의(唯美主義)에 의해 귀족과 일부 지식계급의 주목을 끌었으나 이에 비해 17세기의 이탈리아 회화는 카라바조의 사실주의와 카라치의 아카데미즘을 두개의 축(軸)으로 하여 출발하나 이 양자가 모두 현실성과 감각성의 많고 적음의 여하로 매너리즘 회화와 구분되고 있다. 바로크의 창시자인 카라바조의 영향은 곧 에스파냐와 북유럽으로 퍼져 그 추종자를 '카라바제스키'라 불렀다. 특히 루벤스, 렘브란트를 낳은 플랑드르와 네덜란드는 바로크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에스파냐에서는 벨라스케스, 수르바란 등이 활동하였다. 프랑스에서는 니콜라 푸생 같은 작가가 있었으나 오히려 르네상스적인 '루이 14세 양식'이 성행하였다.
로코코.
화려하고 장중한 베르사유의 예술은 루이 14세가 이전과 같이 현실 생활을 향락할 수 없는 나이가 되자 사교 생활의 중심으로서 재차 파리에 집중되었다. 파리의 세련된 생활 속에서 우아하고 경쾌한 로코코 예술이 육성되었다. 로로코 양식은 계몽주의와 더불어 전 유럽의 궁정 문화를 프랑스화하였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대왕, 오스트리아의 계몽 군주 요세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왕, 네덜란드·스웨덴·에스파냐 등 모든 나라의 궁정에 프랑스 예술가가 초청되어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파리가 과거의 로마와 같이 유럽 미술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이다.
앙투안 바토는 이탈리아 희극과 귀족적 환락을 결부시켜 풍요한 색채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그것이 페트 갈랑트(fetes galantes)라고 불리어지는 주제인데, 상류사회의 남녀가 숲과 정원에서 향연을 즐기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풍속화라고 볼 수도있으나, 귀족들의 덧없는 몽상(夢想)을 우아하고 요염하게 형상화한 것으로 거기에 덧없는 애수의 정이 서려 있다. 루이 15세의 치하 전반에 가장 환영을 받은 것은 이런 유의 회화로서, 파테르·랑크레 등이 이를 계승하였다.
고전주의.
미술에서의 고전주의는 문학과는 달리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나타났다. 서구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그에 이어지는 로마 시대가 문화의 이상으로서 존경을 모으는데, 그 예찬은 상기한 시대에서 엄격한 주의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고대로의 관심은, 18세기의 중간 무렵부터 폼페이 및 그 밖의 지역에서 많은 고대의 유적들이 발굴되어서 비약적으로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술에서 그 주의를 철저하게 추진시킨 것은 다비드로서, 다비드는 18세기 세상을 풍미했던 염미적 회화를 배격하여, 프랑스 혁명 전인 1785년에는 이미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를 발표하고 있는데 그것은 국난(國難)에 임하는 고대의 용사를 묘사한, 준엄을 극한 작품이었다. 고전주의에는 정신적인 엄숙감은 있지만 색채는 냉정이 지나쳐 생기가 부족하고, 미와 기쁨에서 멀어져서 그 엄격성은 곧 낭만주의를 유발하였다.
낭만주의.
혁명시대에 넘쳐 흘렀던 고대의 애국정신이나 제정시대에 보급된 고대의 영웅정신은 차차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여, 1800년에 이르면 그 반동으로서 낭만주의가 탄생한다. 낭만주의는 문학에 선명하게 나타나서, 그 무렵부터 중세의 이야기나 이국정서 등에 비상한 흥미를 보였다. 미술의 경우는 단지 제재를 문학이나 정서에서 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혁신적인 사상을 뿌리쳐 감정을 자유롭게 토로하고, 그 내용이나 색채에 훨씬 정열을 의식케 하는 표현을 하였다. 그로는 루벤스의 정열적인 색채에 심취하고 있으나, 한편에서는 스승 다비드의 엄중한 교의(敎義)를 존중하면서도 그 분방한 천성은 유감없이 작품에 나타나서, 특히 전쟁화에는 초연(哨煙)의 냄새와 더불어 사람을 뒤흔들 것 같은 감동이 움직이고 있다. 그로는 그 색채에서도 약동이야말로 작품의 생명임을 증명하고 있는데, 그로에 이어서 제리코가 나오고, 다시 들라크루아가 나타나서 낭만주의는 크게 발전하였다.
근대.
사진술의 발명.
17세기경부터 유럽에 카메라 옵스쿠라가 유행하였는데, 렌즈를 통화한 빛이 반대쪽 면에 선명한 화상으로 맺히게 하는 장치였다. 이 장치는 풍경의 유람에 제공되고 풍경이나 초상의 포즈(pose)를 그리는 수단으로서 사용되고 있었다. 이 화상을 어떠한 방법으로서 정착시켜 기록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으나 1826년에 조제프 니세포르 니에프스가 금속판 위에 화상을 잡음으로써 세계에서 처음으로 화상의 정착에 성공하였다.
1831년에 루이 다게르는 옥화은판을 노출한 뒤 수은 증기에 쬠으로써 사진술의 기초원리를 발명하였다. 1837년에는 촬영, 현상, 정착의 프로세스를 완성하고 화상을 영구적으로 고정시켜 자기 스튜디오(studio)의 한 구석을 촬영하여 <예술가의 스튜디오>라 제목을 붙이고, 이 프로세스를 다게레오타이프라고 이름붙였다. 같은 무렵 영국에서는 윌리엄 폭스 탯벗이 니에프스나 다게르와 별개로 자연의 영상을 종이의 섬유 중에서 염화은을 만들어 레이스(Lace)나 깃뿌리를 밀착 현상했다. 명암이 반대로 음화로 되고, 이것을 원판으로 하여 몇 장이고 양화(陽畵)를 만들 수 있게 됐다. 1839년 8월 19일 파리 과학아카데미 회의에서 프랑수아 아라고가 다게레오타이프를 공식 발표하였다.
사진의 등장은 초상화를 그리던 화가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 회화는 사진이 할 수 없는 것에 집중하게 되어, 인상주의의 등장에 영향을 미쳤다.
인상주의.
인상파는 1874년 4월에, 파리 카프신가의 전 나다르 사진관을 회장으로 하여 첫 번째 전시회를 열었다. 피사로, 모네, 시슬레, 드가, 세잔, 르누아르, 모리조, 기요맹 등이 모인 화가·조각가·판화가 무명 협회전이라는 것이었는데, 회장에 우연히 모네의 ⟪인상, 해돋이⟫라고 명명한 작품이 있어, 그것을 들어 잡지 ⟪샤리바리⟫의 비평가 르로아가 그저 인상을 그리는 일당(一黨)이라는 데에서, 인상파라고 야유한 연유로 인하여 그 이름이 널리 퍼졌다. 그 인상파는 1886년 제8회전까지 계속되는데, 최초에는 압도적인 매도로 시작하였으나, 이윽고 고갱이나 고흐도 참가했다. 19세기 말기에는, 살롱 화가에도 앵그르 시대의 단정함과 위엄이 결여되고, 틀에 박힌 관념에서 차갑고 깨끗이 그릴 뿐 완전히 막다른 곳에 부딪치고 있었다. 인상파는 그 교착 상태에 활로를 열어 참신성을 주입하고, 회화는 그것을 계기로 하여 급속도로 현대로 향했다.
표현주의.
20세기 전반 독일을 중심으로 주관 표출을 목표로 하는 전위적 예술 운동인 표현주의가 발생하였다. 독일 표현주의 운동은 나비파와 접촉이 있던 노르웨이 화가인 뭉크처럼 뛰어난 선구자 이외에도 독일의 향토 예술과 정감적인 자연파, 세기말의 미술에서 선구자를 가졌으며, 또한 16세기로 소급하는 독일 미술의 전통 중에서도 풍부한 영양을 섭취한 것이었다.
독일 표현주의의 최초의 그룹은 1905년 드레스덴 고등공업학교 건축과 학생들로 결성된 '브뤼케'였다. 1909년 뮌헨에서 '신예술가동맹(Neue Künstlervereinigung München)'이 탄생하여 인상주의를 신봉하는 분리파인 구세대에 대항할 새로운 세력을 결집하였다. 더욱 1911년 신예술가동맹에서 새로이 '블라우에 라이터' 그룹이 파생하였다. 이 그룹은 다분히 낭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제예술(諸藝術)의 통합'을 이념으로 내건 모임이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뒤의 '바우하우스' 운동을 선취하는 것이다.
20세기 이후.
유럽에 있어서의 19세기까지의 미술전통은 한마디로 사실주의 미학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 사실주의란 다름 아닌, 현실 내지는 자연의 충실한 재현(再現)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르네상스 이래 미술의 유일한 규범으로 간주되어 오던 이 사실주의 전통에 대한 반기를 들고 20세기 미술은 새로운 조형적 질서를 창조하기 위해 조급한 모색을 거듭하였거니와 한편에서는 순수한 형태의 조형성을, 또 한편에서는 색채의 독자적인 표현력을 제각기 추구하면서 끝내 반(反)사실주의의 절정인 추상 미술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사실주의 전통과 쌍벽을 이루는 또 하나의 유럽정신의 기틀, 즉 합리주의 정신에 대한 반항도 또한 20세기를 특징짓는 요인의 하나로서 나타나며, 그러한 움직임의 가장 획기적인 표명으로서 우리는 다다이슴과 쉬르레알리슴을 들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고비로 전후 미술은 20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더 한 층 과격한 미학적인 모험과 실험을 거듭하고 있다. 그 가열된 소용돌이는 우선은 앵포르멜 미술과 액션 페인팅의 등장으로 전쟁 이전의 고전적 추상미학에 종지부를 찍음으로써 비롯되어, 연이어 상극(相克)과 초극(超克)의 눈부신 변천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이 전후의 동향은 전전의 '이즘' 중심의 미술 운동과 달리 '아트(art)'의 명칭을 앞세우고 있다. 이를테면 팝 아트, 옵 아트를 필두로 하여 키네틱 아트와 라이트 아트, 또는 정크 아트, 그리고 오늘날의 개념 미술(conceptual art)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
2851 | 5668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851 | 렘브란트 반 리진 | |
2852 | 10645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852 | 세포생물학 | 세포생물학(細胞生物學)은 생물체의 기본 바탕을 이루는 세포의 구조를 연구하는 생물학의 전문 연구분야이다. 세포의 관찰과 연구는 분자 생물학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세포학은 세포의 구조에서 비롯하여 세포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함으로써 생물의 생성과 발전에 보다 상세한 지식을 얻음으로써 생물학 관련 분야, 생화학, 유전학, 진화 생물학 등에 유익한 자료를 제공한다. |
2853 | 50721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853 | 아이네이아스 | 아이네이아스( Αἰνείας / Aeneas)는 필멸자 앙키세스와 아프로디테(베누스) 여신의 아들로, 트로이 전쟁의 영웅 중 한 명이다.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스>에서 아이네이아스를 주인공으로 놓고 찬미한다.
아스카니우스(또는 율루스)의 아버지이기도 한 아이네이아스는 로마의 기원이 되는 라비니움의 전설적인 건국자이자, 로마 왕국의 시조이다. 라티누스 왕은 아이네이아스에게 자신의 딸 라비니아를 시집보냈다. 아이네이아스는 이 두 번째로 맞이한 아내, 라비니아의 이름을 따서 라비니움이라 칭해진 도시를 다스렸다.
로마 문학과 신화.
<아이네이스>에 따르면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를 떠난 뒤 카르타고에 닿아 그곳의 여왕 디도와 사랑을 나누는 등 7년 동안의 유랑 끝에 이탈리아의 라티움에 상륙하였다. 아이네이아스는 그곳의 왕 라티누스의 딸 라비니아와 결혼하여 새로운 도시 라비니움을 건설하였고 이후 로마 제국의 건국 시조로 묘사되었다. 또한 아이네이아스가 로마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조상이라는 로마 건국 신화도 있다. 또한 아이네이아스의 증손이 영국으로 이주하여 최초의 영국 왕이 되었다고도 한다. |
2854 | 50721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854 | 베르길리우스 | 푸블리우스 베르길리우스 마로(, , 기원전 70년 10월 15일 - 기원전 19년 9월 21일)는 로마의 국가 서사시 《아이네이스》의 저자이다. 로마의 시성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시인으로 이후 전유럽의 시성으로 추앙되며 단테가 저승의 안내자로 선정할 만큼 위대한 시인이었다.
"만토바의 시성"이라고도 불리는 베르길리우스는 기원전 70년 10월 15일 현 롬바르디아에 위치한 안데스에서 태어나, 기원전 19년 9월 21일 브린디시에서 사망한 라틴어 시인으로, 로마 공화국 말기와 아우구스티누스 황제 치세 초반의 인물이다.
베르길리우스의 작품, 특히 문체에 있어 각각의 전형을 보여주는 세 걸작들(귀족적인 아이네이스, 서민적인 목가, 중간적인 농경시)은 라틴어와 라틴문학의 본질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은 유럽 작가들, 특히 고전주의의 옹호자들로 하여금 세대에 걸쳐 미학적 이상의 기준을 주었다.
생애.
이탈리아의 포 강 중류의 만투아(Mantua, 현재 만토바 Mantova) 근교의 안데스(Andes)에서 태어났다 (출생시 집정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그의 고향은 당시 로마의 행정구역인 갈리아 키살피나("Gallia cisalpina" 갈리아 알프스 이쪽 지역, 즉 이탈리아 북부)로서 그의 부모는 서민 출신으로서, 아버지는 농부이자 도자기굽는 일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마기아 폴라(Magia Polla)는 베르길리우스를 낳기 전에 월계수가 울창하게 자라는 해몽꿈을 꾸었다고 전해진다. 이 꿈과 관련하여 그의 이름 "Vergilius"는 라틴어의 "virga" (어린나무)에서, 그리고 여기서 기원후 5세기를 전후로 "Virgilius"라는 명칭이 (현재 영어나 프랑스어의 표기)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기원전 59년에서 53년까지 베르길리우스는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후, 메디올라눔(Mediolanum, 현재 밀라노)로 가 웅변술과 여러 학문들을 배운다. 기원전 54년에 로마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웅변술을 배운 후, 실지로 소송 사건의 변론을 맡아 법정에서 활약을 하지만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사실과, 워낙 수줍음이 많은 천성이었던 베르길리우스는 정계 데뷰를 포기하고 젊은 문학자들과 잦은 교류를 통해 에피쿠로스 철학을 접하게 되고, 이후 문학에 정진할 것을 다짐한다. 기원후 52년 로마를 떠나 나폴리로 가서 시로가 주도하던 에피쿠로스학파에 들어가 약 3-4년간 생활을 하면서 고대 그리스 철학을 깊이 배우게 된다.
시를 써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을 때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알게 되어, 일생 동안 황제의 도움을 받았다. 이후 《농경시》(Georgica)등을 아우구스투스에게 직접 낭송하기도 한 그는,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건국을 다룬 작품을 써 보라고 권하자 그에 응하여 《아이네이스》(Aineis)를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죽기 전의 11년 동안 썼는데,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 시는 세계 문학사상 가장 뛰어난 서사시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으며, 호메로스 서사시의 구조를 바탕으로 하여 집필하였다. 또한,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의 안내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작품집으로 《농경시》,《목가》,《아이네이스》 등이 있다.
읽어보기.
저서.
참고서적 : 단테 클럽 미국의 단테협회의 전신이다. 같은 이름의 역사 추리 소설이 나와 한국어로도 번역되었다. |
2867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867 | 정치 | 정치(政治, politics)는 데이비드 이스턴(David Easton)이 내린 "가치의 권위적 배분(authoritative allocation of values)"이다. 또는 정치를 국가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정의하는 경향도 있는 바, 대표적으로 막스 베버는 정치를 "국가의 운영 또는 이 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 라고 정의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정치를 국가의 영역 뿐 아니라 모든 인간 관계에 내재된 권력 관계로 정의하는 경향도 생겼다. 이와 같이 정치는 "배분", "국가 혹은 정부의 활동", "권력 관계"라는 세가지 측면에서 정의되고 있으며 어느 한 측면도 소홀히 여겨질 수는 없다. 가장 이해하기 쉬운 정치의 정의는 아마도 해롤드 라스웰(Harold Lasswell)이 말한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갖느냐(Who gets what, when and how)"라는 것일 것이다. 라스웰 또한 정치를 '배분'의 측면에서 정의함을 알 수 있다.
정치학은 정치적 행동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하는 학문이다. 관련된 분야로는 정치철학, 비교정치학, 국제정치학 등이 있다.
어원.
정치라는 말은 고대 중국의 유교 경전인 『상서』(尙書)에서 "道洽政治"라는 문장으로 처음 등장한다.
‘정치’(政治)에서 ‘정’(政)은 바르다의 ‘正’(정)과 일을 하다 또는 회초리로 치다의 의미인 攵(등글월문 = 攴)이 합쳐서 이루어진 말이다. 즉, 바르게 하기 위해 일을 하거나 회초리로 치는 것을 뜻한다. 정(政)은 특히 자신의 부조화로운 면을 다스려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치(治)는 물(氵= 水)과 건축물(台 태)이 합하여 이루어진 말이다. 이것은 물(水)의 넘침에 의한 피해를 잘 수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치(治)는 특히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부조화로운 면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정치(政治)는 자신과 다른 사람의 부조화로운 것, 부정적인 것을 바로잡아 극복하는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는 다른 사람을 지배한다는 의미가 들어있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의미가 주를 이루고 있다. 정치(政治)는 다른 말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 즉 자신을 닦은 후 남을 돕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가(政治家)는 먼저 자신의 부조화로운 것, 네거티브한 것, 즉, 천지자연의 이치에 조화하지 못하는 자신의 부정적인 측면을 다스려 극복한 후,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어려움, 곤란함, 부조화로운 면을 제거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즉, 군자 또는 성인을 의미한다.
‘정치’(政治)가 politics의 번역어로 쓰인 오래된 예로는 위원의 《해국도지(海國圖志)》(1844년판) 등이 있다.
주요 개념.
정부.
정부는 규칙이나 법률을 제정하고 시행시킬 권위를 가진 조직체를 말한다. 철학자 플라톤은 정부를 군주정과 과두정, 금권정, 민주정으로 분류했다.
근대의 정부들은 대체로 위와 같이 간단히 분류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입헌군주정에서는 군주가 국가의 원수로서 존재하나, 실제의 권력은 국회를 비롯한 입법기관 등이 보유하고 있다. 공화정은 군주가 존재하지 않는 정치 체제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공통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형태의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현대에는 민주정의 기준도 상당히 애매하다고 할 수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국호에서 알 수 있듯이 스스로를 민주국가로 규정하고 있으나, 국외의 많은 이들은 이를 전체주의적 독재정으로 인식하고 있다.
독재정은 한 사람이나 집단이 법률적 제한을 받지 않고 거의 무제한의 권력을, 정당성이 아닌 폭력에 기반해 행사하는 정치 체제를 말한다. "독재"라는 표현은 많은 경우 비난의 의미로 사용된다.
주권.
주권은 정부가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영토를 통치할 능력을 말한다. 주권을 명확히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다.
'주권'이란 국가의 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권리를 일컫는다. 나아가 국가의 정치에 관한 최종적인 결정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원리를 '국민 주권'이라 한다. |
2868 | 61983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868 | 공산주의 | 공산주의(, , , , 共産主義)는 사유 재산의 철폐와 생산수단의 공공 소유에 기반을 둔 경제·사회·정치 공동체 형성에 관한 사상 또는 이러한 사회 형성을 목표로 삼는 형식적·실질적 정치 운동에 관한 사상이다.
플라톤(Platon)의 『국가』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본래 공산주의적 사고는 전근대 사회에도 존재했으며, 이후 유럽의 로마 가톨릭 사회에서 등장한 유토피아주의자의 만민 평등 사상 및 지상천국 운동을 뜻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오늘날에 통용되는 공산주의라는 의미는 카를 마르크스의 이론 전반에 관한 것을 뜻하며, 변증법·역사주의·유물론이 핵심 사고로 자리잡고 있다.
이 사상이 현실 정치에서 본격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 시점은 19세기 유럽의 산업화 시기와 겹친다. 이 당시 유럽은 급속한 산업 발전에 따른 갖가지 사회병리현상을 겪고 있었는데, 공산주의는 이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주창되었다.
이후 수많은 사회주의 이론과 병립하여 공산주의는 거대한 종합 사상으로 성장하였다. 1871년 파리에서 코뮌 봉기의 형태로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가 성립했으나, 존속 기간은 상당히 짧았다. 1917년에는 러시아의 공산주의자에 의해 10월 혁명이 일어났고, 그 결과 발발한 내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하여 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성립되었다. 이후 공산주의 운동은 주로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대표하는 운동으로 인식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의 경로를 통하여 동유럽 및 아시아의 공산주의권이 성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한 이후부터 공산주의 운동은 사실상 쇠퇴의 일로를 맞고 있다.
어원.
"Communisme"라는 프랑스어로부터 비롯되었으며, Communisme는 라틴어로 '공동체', '공유'(共有), 공공(公共) 등을 뜻하는 "Commúnis"에서 나왔다. 실제 문헌에 등장하는 첫 사례는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뷔토르 뒤파이(Victor d'Hupay)가 프랑스 소설가인 레티프 드 라 브르통느(Nicolas-Edme Rétif)에게 보내는 서한의 내용이다. 그는 여기서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묘사하고 있다.
"Communisme"에 기초한 용어 사용은 영국과 독일 등을 시작으로 하여 전(全) 유럽에 퍼졌다. 19세기 초반까지 공산주의라는 용어는 인간이 갖고 있는 형이상학적 도덕성 발현 및 로고스(Logos)의 실천적 구현을 통하여 지상천국을 건설하기 위한 일종의 인본주의(Humanism) 정치 운동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본래 국가의 소멸을 주장하는 사상과는 무관하였다.
1840년대부터는 공산주의라는 용어가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였고 사회운동가들은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하였다. 이 당시에도 공산주의는 위와 같은 정의를 포함하여 경제적인 영역을 넘어서 모든 사회 조직을 평등하게 조직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치 운동으로 이해되었다. 이와 달리 사회주의는 경제 영역에서만의 평등을 추구하는 정치 운동으로 받아들여졌다. 공산주의가 다시 정치 용어로 전면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회주의를 낡은 용어라고 규정한 후 볼셰비키당을 러시아 공산당으로 개칭한 이후부터이다. 이 시기부터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와 확실히 다른 개념이자, 동시에 유물론과 계급 투쟁에 기초한 진일보한 혁명 사상이라는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레닌이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와 확실히 다른 개념이다.'라고 선언한 이후부터 마르크스주의자 사이에서 사회주의는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를 의미하는 용어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등치됐다. 유럽 내 비(非)마르크스주의 집단 사이에서 공산주의는 주로 계급 투쟁, 무신론, 유물론에 기초한 반신론(反神論)적 폭력 혁명 사상으로 여겨졌다. 유럽 내에서의 이러한 규정은 당시 유럽 사회가 기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는 특수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사회주의는 대륙에서 존중받았으나, 공산주의는 그렇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샤를 푸리에나 로버트 오웬과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종교 진영 내에서도 존경받는 운동가로 인식되었으나 공산주의자에 대한 종교인들의 시선은 그렇지 않았다.
기원.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정립 이후 공산주의는 주로 유물론 철학에 기초한 유물사관을 전제로 하는 사상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공산주의에 관한 주장은 전근대에도 존재했다.
공산주의적 공동체나 그 실천을 강조하는 사상은 주로 신플라톤주의와 절대계(絕對界)-현상계(現象界)라고 하는 플라톤적 양분론을 강하게 고수하고 있었으며, 철학 체계에서 객관적 관념론과 유물론의 경계에 걸쳐있었다.
일례로 6세기 당시 마니교의 일파인 마즈다크교는 경제, 문화, 정치 등 모든 영역에서 철저한 금욕, 계급제도의 철폐와 완벽한 평등을 추구했다. 동시에 마즈다크교는 선악 이원론과 존재론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인간의 이성적 자각, 자력을 통해 영혼의 급수를 올려 궁극적인 선으로 나아간다는 전형적인 형이상학, 신비주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한편으로, 마즈다크교는 종교적 의례나 예식을 모조리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오로지 인간의 내적 수련만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엄숙주의적 측면이 존재했다.
이러한 마즈다크교는 아랍 지역에서 하층민을 중심으로 무장 반란을 선동하였다. 아랍 세계에서 주류적 위치에 있던 조로아스터교와 이슬람은 마즈다크교를 마교(魔敎)라고 칭하였고, 강력하게 탄압했다.
16세기 초 급진 재세례파 신학자 토마스 뮌처도 공산주의적 사고를 나타냈었는데, 그는 당시 그리스도교가 행하던 유아 세례를 배격하고 진정한 신앙은 이성(理性)의 외적 발현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같은 개혁교회 내에서도 이교도라는 소리를 듣기에 충분했는데, 뮌처는 뮐하우젠에서 빈민 공동체인 〈영원한 의회〉를 수립하였으며, 농노 반란을 지도하였다. 그는 프랑켈하우젠 전투에서 패배한 후 참수형에 처해졌는데, 이 당시에 “모든 사람은 그 능력에 따라 일해야 하며, 필요에 따라 분배받아야 한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의 공산주의 사상가인 톰마소 캄파넬라는 《감각철학》, 《형이상학》 등을 통해 기존 가톨릭 기조를 거스르는 합리주의 철학을 전개하다가 종교 재판에 회부되기도 하였다. 캄파넬라는 스페인 지역에서 노예, 농노 등 그 어떠한 계급과 착취도 없는 이상적인 신정국가 건립 운동에 참여하다 발각되어 27년 동안 투옥을 당한 투쟁가로도 유명하다. 그는 모든 것이 계획되고, 똑같으며, 궁극적인 선에 도달하기 전까지 철인에 의해 통제받는 공산제(共産制)라는 미래상을 그렸다.
이러한 점을 통해서 전근대의 공산주의 사상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절대선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확신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공산주의적 미래 지향은 인류 스스로가 개별 인간 모두에게 내재된 이성 일반을 충분히 성장시킬 수 있고, 그것을 현실 사회에서 경제 구조나 정치 구조의 형태를 갖는 논리로 풀어낼 수 있다는 이상주의와 연관된다. 이는 이후 마르크스가 절대정신을 강조하는 헤겔의 학설을 인본주의의 입장에서 강하게 고수한 것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라인홀트 니부어, 이사야 벌린와 같은 공산주의 비판자들은 위의 역사적 실례를 통해 당시 소비에트 연방과 같은 공산국가에서 소수의 혁명가에 의한 폭압 독재, 인간의 욕구를 억압·통제, 일원론 철학 강요라는 특징이 나타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분석했다.
토브(Taubes), 코와코프스키(Kołakowski), 아감벤(Agamben), 바디우(Badiou) 등 유럽의 철학자들은 공산주의의 기원이 현실의 변혁과 실천주의를 원용으로 하는 존재론과 강한 연관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공산주의가 갖는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일찍부터 유럽 내에서는 공산주의 사상이 그리스도교에 대항하는 피조물의 사상이라는 인식이 강해졌고 이에 따라 공산주의라는 용어는 서구권에서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회주의.
현대 공산주의자 사이에서 사회주의는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여겨진다. 이러한 관점은 레닌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사회주의로 규정한 이후부터 등장한 관점이다. 레닌의 이러한 규정이 있기 전까지 사회주의는 경제 영역에서 평등과 분배 정의를 실현하는 다양한 사회 운동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으며, 공산주의는 경제 영역에서 사유제의 전면적인 철폐를 위해 문화, 사회, 정치등 인류 사회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에 대한 전방위적 변혁을 주장하는 사상으로 여겨졌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전반까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의미가 확립되어 가는 와중에 사회주의는 개개인의 자유로운 의사를 전제한 협동 경제 형성과 당시 사회에서 나타나는 부조리를 사회 공동체의 집단적인 노력을 통해 해결하자는 이념으로 그 의미가 굳어졌다. 반면, 공산주의는 기존 사회 체제를 모조리 뒤엎어야 함을 전제했으며, 이후 사회 변혁은 혁명 세력에 의한 강제력에 호소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러한 점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그 실행 과정에 있어서도 차이점을 보였다.
정치철학적 견지에서 놓고 볼 때, 사회주의는 초기 자유주의 사상의 정수를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비판적으로 조명하여 정치철학 논리를 구사한 것에 반해, 공산주의는 자유주의 사상이 성립되기 전부터 존재하던 여러 형이상학 담론을 인용하면서 독자적인 정치철학 구조를 형성했다.
이러한 성격 차이로 인해 사회주의는 기존의 질서 내에서 종교 명망가 및 선진적인 활동가의 분배 정의를 위한 실천 운동으로 여겨졌지만, 공산주의는 전통의 파괴를 동반하며 기존 사회 체제를 모조리 변혁하는 반국가 및 반그리스도교 운동으로 이해되었다. 즉, 공산주의는 사회주의보다 훨씬 급진적인 운동으로 이해되고 있었으며, 그리스도교 문화가 강렬하게 남아 있던 유럽 사회에서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당시 공산주의라는 용어가 갖고 있던 성격을 조명하였고, 스스로의 사상이 사회주의라기보다는 공산주의에 적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엥겔스는 《공산주의의 원리》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갖고 있던 기회주의적 처신, 온건적인 성격을 폭로했고, 이러한 특징의 소멸로 하여 비로소 사회주의자와 구별되는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후 긴 시간이 지나면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레닌의 입장과 더불어,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의 범주 안에 포함된 사상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인 인식으로 굳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역사.
국제사.
18세기 말엽 당시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을 통하여 정치 영역에서 최초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흐름이 일어났다. 프랑스 대혁명은 개혁적 귀족, 부르주아와 도시 빈민 사이의 혁명적 연합을 통하여 발현된 사건이었지만, 당시 프랑스 혁명의 지도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자코뱅 좌익(앙라제)에서 공산주의적 사고가 시발(始發)하였기 때문이다.
앙라제는 여성 해방에 대해 기회주의적 입장을 갖고 있던 몽타뉴파를 비판하였고, 반동을 타격하기 위한 상시적인 비밀경찰의 성립을 주장했다. 이들은 부르주아의 재산을 탈취하여 빈민에게 분배해야 함을 주장했고, 생산 수단의 공동 소유도 주장하였다. 앙라제는 사유제 폐지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지만, 공산주의 운동의 외형적 특성을 갖췄었다.
앙라제가 권력 유지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판단한 몽타뉴파는 앙라제 지도자 자크 루를 체포하였다. 루가 자살로 사망하자 앙라제는 구심점을 잃고 해체되었다.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후 몽타뉴파는 지리멸렬하여 극소수의 정파만 남게 되었다. 이후 앙라제의 사상을 이어받은 공산주의자 그라쿠스 바뵈프(Gracchus Babeuf)가 테르미도르파 정권에 저항하였는데,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후 바뵈프의 사상을 이어받은 극좌 지식인들은 인민의 함구적인 해방이 구 체제의 철저한 파괴, 전복의 선행 없이는 불가능함을 선동하였다.
공산주의자동맹 성립 (1847).
벨기에의 청년헤겔주의 조직인 브뤼셀 공산주의자 연락위원회(Communist Correspondence Committee of Brussels)와 영국의 기독교 공산주의 단체인 정의자동맹(League of the Just)이 1847년 6월에 합당하여 '공산주의자동맹'(Communist League)이 성립하였다. 공산주의자동맹 창당 시기에 쓰여진 선언문이 바로 『공산당 선언』(독일어: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이다.
공산주의자동맹의 맹원들은 급진적 공화주의자들이 요구하던 기초적 요구와 더불어 자본주의 사회가 갖고 있는 비인간성을 비판하였고, 자본주의 사회보다 질적으로 더 높은 사회 단계를 이룰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정의자동맹의 지도자였던 빌헬름 바이틀링과 연락위원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칼 마르크스의 노선 차이로 인해 내부 맹원들이 서로 수시로 다퉜고 결국 1852년에 동맹을 해산하게 된다.
제1인터내셔널 성립 (1864).
정식 명칭은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이다. 1864년 9월 28일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주도로 런던에서 성립되었다. 당대 유럽 사회를 자본주의 단계라고 분석하였으며, 자본주의 사회가 갖고 있는 온갖 병페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계급이 주도하는 계급 투쟁이 국제적으로 벌여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카를 마르크스가 작성한 국제노동자협회 발기문 및 임시 규약문에서 상세히 확인할 수 있다.
제1인터내셔널은 공산주의자 외에도 유토피아주의자, 급진적 공화주의자, 아나키스트, 국가사회주의자 등 수많은 진보적 운동가들이 참여한 국제 노동운동 단체였기에 내부 노선 투쟁이 상당히 가열차게 진행됐다. 마르크스는 1872년 제1인터내셔널 헤이그 대회에서 프루동파의 주택 문제 해결 방법이 급진적 부르주아가 구상하는 일반적인 방법론과 다를 게 없다고 하였다. 당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투기성을 극복하지 않는 한 국가 주도의 주택 공급이든, 사회적 기금 형태의 주택 공급이든 모두 최종적 실패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으며, 결과적으로 투기성은 자본주의의 본질이기에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투기를 없앨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를 타파해야지만 토지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을 얻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1875년에는 『고타 강령 초안 비판』를 작성하여 페르디난트 라살레 주도 국가사회주의의 소부르주아성과 이들과 타협한 전(全)독일노동자동맹(독일 사회민주당의 전신)을 비판하였다.
파리 코뮌 붕괴 이후 각국의 노동운동 탄압이 심해지고 일련의 투항주의 경향이 잇따라 일어나자 제1인터내셔널 내 이론적 논쟁은 더욱 심화되었고, 내부 계파는 더욱 많은 수로 증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1876년 해산하게 된다.
파리 코뮌의 형성 (1871).
1870년 9월 2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후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의 총리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항복하였다. 이 소식이 파리 군중에게 전해지자 분노한 군중은 거리로 나와 항쟁하였고 프랑스 제2제정 정부는 빠르게 무너져갔다. 이후 제2제정을 구성했던 일부 대의원이 프랑스 임시정부를 세웠으나 혼란을 멈추지 않았다.
프랑스는 국민의회를 구성하기 위하여 1871년 2월 8일에 총선거를 치루었다. 이 선거에서 왕당파가 60% 이상 넘는 득표율을 얻었으나, 파리 지역만은 공화파가 더 높은 의석을 확보하게 된다. 1871년 2월 12일에는 국민의회가 구성하였던 프랑스 임시정부가 프로이센에게 유리한 조건인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프랑스 임시정부는 기존의 체제를 다시 공고히하기 위하여 파리 지역도 복고화하려고 했으나 파리 대중은 이에 불만을 느꼈다. 임시정부의 수반인 아돌프 티에르가 파리 지역의 수비대를 해산하려고 하자 같은 해 3월 26일 파리 대중이 봉기하여 파리 코뮌이 성립되었다.
이 시기 공화파는 크게 두 가지 계파로 이루어졌었는데, 급진자코뱅의 경우는 공산주의적 신념을 갖고 있었으며, 이 중에서 폭력혁명을 긍정한 계파는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가 지도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집산주의에 기초한 자율적 사회주의를 추구한 프루동도 공화파로 분류되었다. 이 시기 공화파는 특정 작업소의 야간 노동 금지, 교육의 세속화와 무상교육 실시, 공창(公娼)제 폐지, 노동자를 향한 고용주의 독단적인 행동 저지, 토지 분배 등의 정책을 실현하였다. 1871년 5월 21일 마크 마옹이 이끄는 진압군이 파리에 진입하여 코뮌을 파괴하였고, 코뮌에 동조하였던 공화파는 학살당하였다.
제2인터내셔널 성립 (1889).
독일 사회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1860년대 후반기에 걸쳐 유럽 노동 운동이 발전하게 됐다. 한편, 독일 제정은 1878년 사회주의 탄압법을 제정하였다. 이에 따라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통일적인 행동 지침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였고, 그 결과 독일 사회민주노동당, 프랑스 노동당 등을 중심으로 제2인터내셔널이 성립됐다.
제2인터내셔널은 명목상 국제적인 노동 운동 지도 조직이었지만, 인적 구성은 독일, 벨기에, 프랑스의 사회주의 조직에서 활동하던 주요 인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따라서,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를 받는다는 것은 곧 서유럽의 담론 체계에 묶인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제2인터내셔널은 초기에 프랑스의 쥘 게드(Jules Guesde) 및 독일의 카를 카우츠키(Karl Kautsky)의 이론에 크게 영향받았다.
1890년 사회주의 탄압법이 폐지되기까지 제2인터내셔널은 각국 노동 운동에 지도 지침을 내렸고, 그 결과 세계적으로 노동 운동이 급성장하였다. 또한, 노동조합의 일반적인 조직 형태, 노동자 정당의 구성 등에서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진보를 이루었다.
1891년 제2인터내셔널은 브뤼셀에서 제2차 노동자 대회를 통해 군국주의에 대항할 것을 천명했고, 1907년 슈투트가르트 제7차 노동자 대회를 통해 제국주의에 대항할 것을 맹세했다. 그러나, 모로코 분쟁과 발칸 전쟁으로 인해 형성된 바젤 긴급 회의에서 위와 같은 원칙은 무색한 것으로 됐다. 특히, 각국 사회주의 조직은 국제주의 원칙을 버렸으며, 조국방위주의의 입장을 취하게 됐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에 의해 주도된 이러한 수정주의 흐름은 제2인터내셔널의 국제주의 방침에 심대한 타격을 줬다. 이러한 간극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1916년에 제2인터내셔널은 해체되었다.
제2인터내셔널의 해체는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 단기적으로 악영향을 줬지만, 러시아의 볼셰비키파는 오히려 독자적으로 성공하여 혁명을 성취하게 됐다.
러시아 혁명 (1917).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 대전은 유럽의 강국을 끌어 들여 각 국은 총력전을 펼쳤다. 러시아 제국도 세르비아와의 상호 협약에 의해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오스트리아 방면에서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그러나 독일전에서는 1914년 타넨베르크 전투와 이듬해 1915년 고를리체-타르누프 전투를 시작으로 패배가 이어졌고, 러시아 국내에서는 길고, 고통스러운 전시 생활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있었다. 황제에 대한 농민의 존경은 변함이 없었지만, 라스푸틴이 영향력을 행세하는 독일 제국 출신의 알렉산드라 황후에게는 노골적인 불만을 나타내는 등 국내의 불안 요인이 짙어지고 있었다.
결국,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7년 3월 8일에 러시아에서 부르주아와 농본주의자,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가 연합하여 혁명을 일으켰다. 로마노프 왕조가 세운 제국이 무너지고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폐위되었으며, 러시아 제국은 멸망했다.
당시 혁명에 참여한 이들은 러시아 제국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여성, 노동자였으며, 사병들이 혁명에 참여하며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로 단결하였다. 민중들이 2월 혁명에 참여한 이유는 러시아 제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으로 극도의 생활고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즈음 멘셰비키 소속 의원이나 노동자 대표 등으로 1905년과 비슷한 소비에트의 결성을 호소할 수 있었다. 이날 밤 회의에서 임시 위원이었던 멘셰비키의 니콜라이 치헤이제가 의장으로, 임시 위원으로 당시 혁명파 의원으로 유력자로 주목 받고 있던 사회 혁명당 의회 의원 케렌스키를 부의장으로 하고 페테르부르크의 소비에트가 결성되었다. 동시에 선출된 집행위원 15명 가운데 급진적인 혁명을 주창하는 볼셰비키는 2명뿐이었다.
2월 혁명으로 성립된 임시 정부의 실권은 사회혁명당의 두마 의원으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부의장이었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쥐고 있었다. 전쟁에 지쳐 평화를 바라는 병사에 반해 육군 장관을 겸임하였던 케렌스키는 제1차 세계대전의 지속을 주장했다. 6월 16일 (율리우스력), 그는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에 갈리시아 공격을 시작한다. (케렌스키 공세) 서전 승리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사기 하락으로 전선은 붕괴되고 7월 2일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7월 6일에는 반대로 독일군 - 오스트리아군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러시아군은 후퇴를 거듭하여 급기야 8월에는 독일군의 리가 공세로 리가를 빼앗겼다.
이 공격 실패를 계기로 농민들의 전쟁에 대한 불만과 노동자들의 배고픔과 어려움에 대한 불만이 폭발했다. 7월 3일에서 7월 7일(율리우스력)에 페트로그라드에서 볼세비키가 이끄는 노동자와 농민들이 거리로 나와 임시 정부에 대한 봉기를 시작했다. 페트로그라드 앞바다 해군 기지 섬 크론에서 수병 20,000명 정도가 무장을 하고 페트로그라드로 행진하여 소련에 대한 권력 집중을 요구했다.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의 노동자들도 같이 봉기하여 사태는 커졌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시가전이 일어났지만 임시 정부는 군대를 지휘하여 봉기를 진압했다. 이 봉기 이후 임시 정부는 볼세비키가 반란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판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블라디미르 레닌이나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를 포함한 볼세비키 지도자는 체포를 피해 몸을 피했고, 일시적으로 볼세비키의 세력은 후퇴했다. 7월부터 8월까지 볼세비키는 준합법적인 활동을 시작했지만, 러시아 정계에서 극좌의 정치적 위치는 점점 더 강력해졌다.
8월부터 9월까지 코르닐로프 사건이 일어났고, 이것은 볼세비키의 세력 부활에 큰 역할을 한 10월 혁명의 촉매가 되었다. 임시 정부군 총사령관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은 혼란스런 러시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더 신뢰할 수 있는 군사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임시 정부와 소비에트에 속한 케렌스키와 대립하였다.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를 총사령관에 임명했지만, 그 직후에 코르닐로프를 스스로 군사 독재를 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1917년 10월 10일(율리우스력), 볼세비키 중앙위원회는 투표를 실시하여 10대 2로 무장봉기는 더 이상 피할 수 없으며, 시기가 무르익었다."라는 선언을 채택했다.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는 10월 12일(율리우스력)에 〈공농혁명위원회〉를 설치했다. 이것은 원래 페트로그라드의 방위를 목적으로 멘세비키가 제안한 것이었지만, 무장봉기를 위한 기관을 필요로 하고 있던 볼세비키는 찬성했다. 트로츠키는 "우리는 권력 탈취를 위한 사령부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고 연설하고 노골적으로 무장봉기의 방침을 인정했다. 그는 권력 장악을 승인하기 위해 10월 25일(율리우스력) 개회 예정인 제2회 전국 소비에트 대회에 맞춰 봉기하자고 주장했다. 멘세비키는 공농혁명위원회 참여를 거부했고, 위원회의 구성 멤버는 볼세비키 48명, 에스에르 좌파 (사회혁명당 좌파) 14명, 무정부주의자 4명이 되었다.
그 이후 군부의 각 부대가 차례로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에 대한지지를 표명했고, 임시정부가 아닌 소비에트의 지시에 따를 것을 결정했다.
10월 23일 (그레고리력 11월 5일), 볼세비키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에스토니아 인의 얀 안벨트(Jaan Anvelt)는 혁명 이후 설립된 에스토니아 자치 정부의 수도 탈린에서 극좌 혁명 세력을 이끌고 무장 봉기를 시작했다. 10월 24일, 마지막 반격을 시도했던 임시정부는 부대를 동원하여 볼세비키의 신문 《라보치 프치》, 《소르다트》의 인쇄소를 점거했지만, 공농혁명위원회는 이것을 계기로 무력 행동을 시작했다.
그러자 적위대는 별 저항없이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페트로그라드의 인쇄소, 우체국, 발전소, 은행 등 요충지를 제압했고, 10월 25일(양력 11월 7일)에 '임시 정부'는 타도되었다. 국가 권력은 페트로그라드 노농 소비에트 기관이며, 페트로그라드의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와 혁명군을 이끄는 공농혁명위원회로 옮겨졌다"고 선언했다.
제3인터내셔널 성립 (1919).
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는 1918년 당명은 러시아 공산당을 개칭하였고, 1919년 3월 2일에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제3인터내셔널을 성립했다. 제3인터내셔널의 이칭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었고, 약칭 코민테른(Коминте́рн)이라고 흔히 불렸다.
창건대회에는 총 30개국, 35개 공산당이 참여했으며, 대표단은 총 52명이었다.
코민테른은 1920년 7월 19일 모스크바에서 제2차 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 코민테른은 가맹 조건을 확립하였다. 이에 따라 코민테른 가맹 공산주의 정당은 21개 조항을 수락해야 했다. 21개 조항의 내용은 크게 다음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920년 9월 1일에는 〈제1차 동양 인민 대회〉를 통해 코민테른 극동서기국의 지위, 임무를 확립하였다. 이 대회에서 코민테른은 군벌 중국, 식민지 인도, 식민지 조선, 식민지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의 해방에 실질적인 지원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1922년에는 볼셰비키가 내전에서 최종 승리하였고, 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하였다.
1924년 6월 17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5차 대회는 사회민주주의를 사회 파시즘이라고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공산주의자는 개량주의적 편향 및 개량주의인 사회민주주의와 적극적으로 투쟁해야 했다.
1928년 7월 17일, 모스크바에서 제6차 대회가 열렸다. 이 시기 식민지 공산주의자의 투쟁 방침을 정하였는데, 이 투쟁 방침은 1927년 2월 15일 〈식민지 억압과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국제 회의〉에서 결의된 내용을 재검토하고 있다.
특히, 군벌 시대의 중국과 식민지 조선, 식민지 인도, 그리고 일본의 사회 성격을 재차 규정하였다. 제6차 대회에서 코민테른은 위 네 나라를 반봉건사회(半封建社會)라고 규정하였고, 당면 혁명의 목표를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정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을 주도로 신민주주의혁명론이, 조선 항일 세력에서는 김일성을 주도로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론이 대두됐다.
코민테른은 1935년 7월 25일에 마지막 대회(제7차 대회)를 열었다. 제7차 대회에서 코민테른은 〈반파쇼인민전선론〉을 채택했다. 반파쇼인민전선론은 파시즘과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는 각 나라의 사회민주주의 및 자유주의 세력과 연합을 해야 한다는 노선이다. 이에 따라 스페인 내전, 중국 혁명 전선, 만주-조선 항일 전선에는 새로운 연합 전선이 생겨났다.
1943년 5월 15일, 코민테른은 제2차 세계 대전 양상에 따라 각국 혁명이 갖는 지역·토착적 성격이 강화되었기에 각 혁명은 각국 혁명 조직이 지도한다는 원칙을 확립한다는 명분 아래에 해체되었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시작 (1928).
레닌이 사망하기 1년 전인 1923년부터 러시아 공산당 내에서 권력 투쟁이 시작됐다. 이 투쟁에서 최종 승리한 정치인은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1926년 당내 분파 활동을 금지하였고,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잔당을 추방, 제명하였다.
스탈린은 1928년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하였는데, 이 경제 정책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모든 공산국가 경제 계획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기계·섬유·전기·화학공업의 급속한 발전을 목표로 한 이 5개년 계획은 1942년까지 3차에 걸친 계획을 통해 거대한 성과를 이루었으며, 소비에트 연방은 공업국가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소비에트 연방의 공장지대가 대규모로 파괴되었지만, 1950년 복구 계획을 통해 전쟁 전의 상태로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냉전과 공산주의 (1947).
서구의 민주 사회는 세계 공산주의 혁명의 전파를 막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1949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 설립은 동유럽 공산권의 군사적 고립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한편, 신생 독립국 중 미국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필리핀, 대한민국, 중화민국, 베트남 공화국 등지에는 미국의 전면적 후원을 등에 업은 강력한 권위주의 정부가 들어서 반공산주의 교육을 강화하며 국내 진보 사회운동 세력들을 공권력으로 탄압하며 정치계에서는 극단적인 반공주의로 불리는 매카시즘 등으로 진보 진영 분열을 꾀했다. (자세한 것은 코인텔프로를 참고하라.)
이러한 반공주의는 미국에서도 극심하였다. 1950~60년대이후 미국의 공산주의 탄압은 겉으로는 공산주의자와 간첩 추방을 목표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뉴딜정책 관련 정치인과 지식인들을 힘없게 하려는 미국 공화당의 정치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미국 정부는 지적 반공주의 그러니까 반공주의 지식인들의 활동을 CIA에서 거액보조금으로 키우는 방법으로 정치와 외교 문제에 대해 자유주의적 견해를 주장하는 미국 내 자유주의자들의 수를 급감시키기도 했다.
매카시즘 광풍이 1954년 막을 내린 이후에도 미국 내 공산주의 탄압은 계속되어 미국 지식인 사회는 큰 타격을 입었는데, 이는 미국 지식인 사회에서 활약하던 진보주의자들은 물론, 공산주의자들과 지지자들이 탄압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 출판계도 마찬가지여서 미국 출판사 편집자들은 논란의 소지가 있는 진보적 작가들의 책을 내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 출판인들은 유럽 출판계와 협동하거나, 다른 출판사에서 외면받은 작가들과 계약하는 등 공산주의 탄압으로 침체된 미국 지식인 사회를 회복시키고자 하였다. 그 실례로 미국 랜덤하우스 계열사였던 판테온 출판사는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P. 톰슨의《영국노동계급의 형성》("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es"), 에릭 홉스봄, E. H. 카 등의 저서, 미국 노예제도를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해석한 《노예제도의 정치경제학》("The Political Economy of Slavery", 유진 제노비스 저) 등을 출판하였다.
사상사.
카를 마르크스 등장 이후부터 공산주의는 서구 사회에서 발생한 민주주의 제도와 자유 확립이라는 가치를 지양(止揚)의 결과로서 보존해야 했고, 미래 사회에 대한 공상적인 제시를 거부하는 추세가 이론적으로 타당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이후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까지, 공산주의 운동은 미래 사회에 대한 공상적인 제시와 인공적인 사회 계획을 실질적으로 긍정하였다.
고대 공산주의.
고대 아테네의 철학자인 플라톤(Platon)은 자신의 저서 『국가』에서 생산자, 수호자, 철인이라는 세 계급으로 구성되는 공공(公共)의 국가를 구상하였다. 플라톤은 『국가』 제5권과 제8권에서 민주주의 정치는 개인의 억견(Doxa)에 기반한 정치이기에 필연적으로 부정의를 낳을 수밖에 없으며 결국엔 잘못된 자에 의해 이끌어지는 참주정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철학적 능력이 뛰어난 자를 선별하여 이들을 수호자 계급으로 하고, 최정점에 선 자를 철인으로 정하여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제5권에서 유동 재산, 주거, 토지에 관한 완전한 국가 소유 및 이에 기초한 공유를 주장한 동시에, 자녀도 국가가 책임을 지고 양육(養育)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사고를 내보이고 있다.
캄파넬라의 공산제.
이탈리아의 철학자인 톰마소 캄파넬라(Tommaso Campanella)는 『형이상학』(Metaphysica)에서 전하는 선의 이데아가 어떠한 경로를 통하여 세계를 선하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논하였는데 그 결실이 바로 그의 저작인 『태양의 나라』(La città del Sole)이다.
그는 본래 로마 가톨릭의 교육을 받고 자랐으나, 사상은 인본주의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는 선의 이데아는 부동의 일자(一者)라고 하였으며, 이것은 어떠한 인격신의 모습을 취하지도 않으며, 동시에 만유 그 자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자의 합일성은 인간의 이성을 통하여 충분히 이질적이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당시 로마 가톨릭 사회에서 금기시되는 합리주의적 사고였기에 그는 여러 번 투옥을 겪어야 했다.
그는 『감각철학』, 『형이상학』 등에서 선의 이데아는 하강화(Prohodos)를 통하여 스스로의 선함을 현실적으로 구현하는데, 그 선함은 본래의 선한 의도라고 할 수 있는 선의 이데아와 동질이라고 할 수 없으나, 인류에게 충분히 선한 작용을 하며, 하강화의 본래 특성에 따라 감각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형태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정통 그리스도교 원칙에 어긋나는 주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공상 소설인 『태양의 나라』에서 그 주요한 형태의 첫 번째 대원칙은 모든 토지, 주거의 공공 소유로 묘사했다. 두 번째는 교육, 의료의 전적인 무상이다. 여기서 그는 자녀의 교육은 모두 국가가 맡아야 하며, 자손증식은 오로지 국가가 정해놓은 규정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세 번째로는 모든 인민이 노동권을 보장받아 적절한 노동을 하며, 노동 시간은 일요일을 제외한 일 4시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 외에도 이혼의 자유•철인으로 구성된 집단제도제의 성립•토지의 국유화•주거, 식량, 의복의 균일화•농축산업의 기계화•전쟁 포로에 대한 인간적인 대우•국가가 운영하는 고아원의 건설 등 수많은 비전이 묘사됐다.
캄파넬라의 저작은 유토피아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자주 비교된다. 하지만, 토마스 모어가 노예제를 긍정한 반면, 캄파넬라는 노예제의 전면적인 폐지를 주장했다. 이와 함께 가장 중요하게 지적되는 사항은, 모어의 경우 모든 인민에게 균일한 토지가 분배되어야 하며, 기본적으로 토지의 소유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으나 캄파넬라는 단일한 정부만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다고 보았다.
위와 같은 차이 외에도 수많은 차이가 존재했다. 모어가 대가족에 기초한 가부장 사회를 유지함을 원했던 것과 달리, 캄파넬라는 가족 제도의 최종적인 폐지가 가능함을 역설했다. 이어서, 일에 권장되는 노동시간에 대해 모어는 6시간을 주장했으나, 캄파넬라는 4시간에서 5시간 사이를 주장했다. 그리고 예수가 신임을 부정하는 자, 인격신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자의 추방을 묘사했던 모어와 달리, 캄파넬라는 범신론적 논리를 전개하였고, 자연법칙 일반이 곧 신이기에 합리적으로 사유되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봤다. 이러한 점에서 모어는 당시 가톨릭 사회의 기득권을 수호하는 선에서 개혁론을 주장했지만, 캄파넬라는 기존 사회의 모든 것을 뜯어고치는 매우 급진적인 주장을 전개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독일의 공산주의 이론가인 카를 카우츠키는 공상 소설인 《태양의 나라》가 예술적 차원에서 공산주의 이론의 성립의 필수적인 가교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이어서, 러시아의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 그리고 이후 소비에트 연방의 관변 역사학에서는 이러한 내용이 공산주의 문화 예술을 선전할 ‘기념비적 선전 계획’의 일환으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캄파넬라가 17세기 초의 ‘사회주의적’ 사상가(토머스 모어와 같은)와 달리, 명백한 프로토-공산주의자라고 특정지어질 수 있는 근거라고 판단했다.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카를 마르크스는 이전에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칭하였던 관념적 사회주의와 스스로의 사상을 구분하였으며, 이를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하였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은 생산 관계와 생산력 사이의 모순이 역사 발전의 본질적인 원동력이라는 그의 사적 유물론에 기초하고 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통하여 노동(Arbeit)이 갖는 의식적 성격을 규명한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이전의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현상계와 절대계를 나누고 있으며, 존재론적 함의를 버리지 않고 있으나, 현상이 없이 절대가 없으며, 절대가 없이 현상이 없다라는 실천주의 논지를 바탕으로 이전의 교조적 형이상학과 자신의 철학을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본질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의식적 실천을 노동이라고 한 것이다. 노동은 생물체 중 가장 고등한 인간의 추상성을 대표할 수 있는 가장 전위적인 의식 활동으로, 인간이 진정 인간다울 수 있게 하는 해방성을 갖추게 하는 능동적 창조 행위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자유로운 의미에서의 노동은 생산력의 한계를 통하여 구축된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로 인해 온전히 발현되지 못 한다.
마르크스는 노예제 사회에서 노동은 노예노동으로 되며, 봉건제에서 노동은 소생산 행위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노동력(Arbeitcraft) 산출로 열화된다고 하였다. 그는 인간이 진정 자유로운 의식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은 생산 관계와 생산력 사이의 모순이 사라진 공산주의 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인류는 모순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투쟁하여 사회를 발전해왔는데 그것을 계급 투쟁이라고 하였다.
계급 투쟁은 생산 관계와 생산력 사이의 모순을 해소하여 더 높은 수준의 생산력을 수용할 수 있는 생산 관계를 구축한 사회를 만드는 혁명 실천이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인간의 의식성은 생산 관계와 생산력 사이의 모순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았는데, 당시 시대적 상황은 자본주의 사회로, 노동력 산출이 노동의 열화된 형태로서 기능하는 사회라고 분석했다.
제국주의 시대의 마르크스주의.
카를 마르크스는 1845년 자신의 저서 『독일 이데올로기』(Die Deutsche Ideologie)에서 이전 청년헤겔주의자들의 형이상학적 허구성을 비판하고 생산관계에 의해 발전되는 미래 사회에 대해 논했다. 그리고 그것을 1848년 『공산당 선언』에서 '공산주의'라고 칭하였다. 이 이후부터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견지에서 일반적으로 공산주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극복된 사회를 의미한다. 물론 이러한 상대는 프리드리히 헤겔(Friedrich Hegel, 1770 - 1831)이 주장한 절대정신(absoluter Geist)과 같은 이상적 상태이며, 그것은 현재적 의미에서 논해질 때 하나의 실현 가능성으로서 다뤄지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청산하는 시기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기간을 상정하였고, 이 기간을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에 대해 투쟁하는 최상의 열기가 존재하며, 동시에 그 싸움이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로 확정되는 과도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가 취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논하지 않았으며, 결국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혁명 과정에 대한 해석에서 수많은 후대 공산주의자들의 논쟁을 촉발하게 된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 논쟁에 참가하여 자본주의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가 가져야 할 자세와 이들이 과도기적 단계에서 만들어나가야 할 사회를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카를 카우츠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치열한 경쟁을 하였고, 이 과정에서 정립된 이론과 테제는 훗날 레닌주의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레닌주의의 기반 위에서 1917년 혁명 이후 보완해야 할 점을 추가하여 최종적으로 스탈린에 의해 계승된 것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동시에 블라디미르 레닌의 인식론 저서인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정리하였다. 이 저서는 당시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이자 물리학자인 에른스트 마하의 속류유물론적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는 동시에, 동시대 경험주의적 유물론, 기계적 유물론을 비판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일반적인 유물론을 정립하려고 했던 레닌의 의도로부터 쓰여진 것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레닌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계승하여 DIAMAT 교조를 수립하였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일체의 유심주의, 기계주의, 기회주의 해석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현실 정치 측면에서도 수많은 족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우드로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의 허구성을 지적하며 탄생한 블라디미르 레닌의 민족자결론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세계 민족해방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 사상이다. 또한 사회주의국가에서 노동자·농민·병사 위원회인 소비에트의 독재의 필요성을 서술했다. 이것은 현대 정치에서 직접민주주의와 간접민주주의, 그리고 혁명적 독재라는 세 가지 요소를 모두 갖는 사회주의정치라는 독특한 특징을 갖는다. 더 나아가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종교 문제에도 급진적으로 개입하여, 국가 무신론을 주장했으며,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주장한 인민의 지도자 또는 수령의 독점적인 역할을 《레닌주의의 기초와 레닌주의의 제문제》에서 강조한 만큼 국민주권(Popular sovereignty), 대의제(Representative democracy), 법치주의(Nomocracy)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에 필적하는 대표적 사상이었다.
혁명에 대한 입장은 소위 '정통마르크스주의자'(Orthodox Marxist)라고 불리던 집단과 달랐다. 기존의 정통마르크스주의자 ― 소위, 칼 카우츠키를 신봉하는 ― 들의 경우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그 공황으로 인해 자본가는 최후의 선택을 하며, 자본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노동자들과 계급대립이 정점에 이르면서, '자발적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레닌주의자들은 이미 유럽의 자본주의 공황은 끝에 다다랐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이미 러시아에 영향을 준다고 봤다. 자본의 팽창에 따른 공황, 그리고 그 공황으로 인한 부정적 영향은 국경 단위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세계 단위로 이루어진다. 그 근거를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태동했던 독일 그리고 프랑스의 자본주의 공황으로 인한 주위 유럽 국가들의 경제적 혼란 조성을 예로 들었으며, 혁명이 실패한 이유는 그저 노동자 세력이 와해되거나, 유산계급에 헌신하는 국가의 무차별적 탄압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동시에 카를 마르크스가 깊게 조명하지 못 했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구체적인 제도화를 계획했다. 이러한 면에서 레닌주의는 실질적이고 현실적으로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하려고 했다. 또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이러한 레닌주의를 그대로 계승했다.
로자의 레닌 비판.
블라디미르 레닌과 유사하게 독일 사회민주당의 우경화를 비판하고 있던 로자 룩셈부르크는 레닌의 원칙에 동의하면서도, 레닌이 마르크스주의의 주요한 원칙을 폐기했다고 비판했다. 가령, 레닌이 해석한 제국주의에 대한 이론은 사회주의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주체성을 격하하는 동시에, 지나치게 농민의 동맹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 비판은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 이후 더욱 강렬해졌다. 특히, 레닌의 볼셰비키파가 소비에트 러시아를 운영하면서, 사회주의 변혁에서 지나치게 소농과 중농의 영향력을 의식한다고 하였다. 당시 그녀의 입장은 러시아 내 좌익공산주의파와 유사하게 농업의 희생을 통해 공업화를 달성해야 한다는 주장과 흡사했다.
이어서 로자는 레닌이 주장한 전위당 이론과 직업 혁명가에 의한 엘리트주의가 공산주의가 지양으로서 보존하고 있는 민주제의 기본 원칙을 모조리 파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서 1920년부터 볼셰비키가 러시아 내 노조를 탄압하자 그녀는 레닌의 이론이 권위주의적인 정치 수단을 수반하는 자본주의라고 비판했다.
로자가 주장하는 사회주의는 개별 노조, 노동자 집단이 참여하고, 그들이 직접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의회주의 형태의 정치 구조로 대표됐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일원화.
레닌 사후 스탈린은 권력 투쟁을 통해 좌익반대파와 통합반대파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니콜라이 부하린을 당내의 형식적인 우파로서 기능하게 했고, 스스로는 당의 정통 세력을 대표한다고 선전했다. 1928년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당시 부하린과의 갈등이 심해지자 그는 부하린을 숙청하였고, 1938년에는 《볼셰비키당사》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의 일반적 해석을 독점하였다. 그리하여 탄생된 것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강렬한 영향을 줬다. 특히, 1935년 8월 25일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를 중심으로 반파쇼인민전선론이 채택되게 되었는데, 이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핵심적인 투쟁 방침으로 되었다. 당시 식민지 지역의 공산주의 운동가들은 통일 전선과 반파쇼인민전선론에 따라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내셔널리스트, 자유주의자 사이의 확고한 동맹을 형성했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에 이론적 기초는 코민테른이 제공했다.
한편으로 이 시기는 공산주의 확립 과정이 일반적 테두리가 형성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공산주의는 대규모 사회 계획, 계획 경제, 중공업 중시, 토지와 산업의 전면적인 국유화, 선진 노동계급이 점유한 당의 독재, 무상 복지, 계급 투쟁을 수반한 종합적인 정치 운동이라는 인식이 확고해졌다. 이러한 내용은 본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으나,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이론적 패권을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쥐었기 때문에 이러한 내용이 공산주의 특징의 일반적 내용으로 되었다.
트로츠키의 혁명론.
권력 투쟁에서 밀린 트로츠키는 멕시코로 망명하여 스탈린 비판에 전념했다. 스탈린의 독재 체제는 사회주의를 타락시키는 원흉이며, 그것은 관료주의로 대표할 수 있다. 트로츠키는 사회주의 사회로서 소비에트 연방의 성격을 부정하지 않았으나, 기형적 노동자 국가(타락한 노동자 국가)라는 의미에서 소비에트 연방을 바라봤다.
그는 또한, 스탈린의 인민 전선 노선이 스페인 혁명을 망쳤고, 프랑스에서 파시스트의 성장을 방관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인민 전선 노선이 그것 자체가 갖고 있는 ‘혁명이라는 대의를 위한 협조’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극심한 분열주의를 낳은 동시에 공산주의자가 정권을 확실히 잡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트로츠키의 특유 혁명론은 연속 혁명으로, 하나의 지역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경우 이 혁명을 지속적으로 수출하여 혁명 전선이 일정하게 유지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트로츠키가 소비에트 연방에서 스탈린과 경쟁했을 때,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과 대척점에 선 노선으로 인식됐다.
트로츠키는 레닌의 사망 이후 스탈린과의 권력 다툼에 밀려 소련에서 추방당한 이후 일생을 스탈린주의에 대항하며 살았는데 그에 관한 대표적인 저서로는 《스탈린주의 날조학》이라는 저서가 있다.
유럽공산주의의 등장.
1970년대 초반부터 프랑스 공산당 등의 서구의 공산당들은 유로코뮤니즘(Eurocommunism)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자신을 소련 특히, 스탈린주의에 대한 무비판적이며 무조건적인 지지의 전통에서 분리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정당들은 프랑스,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일본도 비슷한 노선을 걸었다. 프랑스 공산당의 경우 1970년대 프랑스 사회당과 함께 70% 이상의 득표율을 얻기도 했었으나, 1990년대 소련의 해체와 소련의 위성 국가들의 붕괴 이후 의석 수가 줄어들며 위상이 급격히 떨어졌다.
공산주의에 대한 오해.
공산주의에 관한 오해는 크게 다음 두 가지로 나눠진다.
(1)은 냉전 시기 공산국가라 칭해지던 소비에트 연방과 동구사회주의권의 정치 현실에 착안하여 널리 통용되는 오해이다. 카를 마르크스 이론의 적통을 이어받는다는 의미에서의 공산주의를 말할 때, 공산주의가 민주주의에 대하여 후진적인 사회라고 규정한 것은 맞다. 이후 논의되는 문건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대다수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사회주의의 아래 단계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경제 영역에서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내적 모순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 한 상태에서는 사회주의보다 열등한 민주주의적 정치가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사회주의보다 열등한 사회 체제라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현재 공산주의 집단 사이에서 격렬하게 논의되는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나, 사회주의 혁명이냐?”라는 주제가 있다. 북한의 경우 자신들을 인민민주주의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주권이 국민이 아닌 독재자에게 있으므로 민주주의가 아니다.
(2)은 카를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규정하는 노동(Arbeit)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 했을 경우 오해하는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에 대하여 “인간의 경제 행위가 노동(arbeit) 그 자체로서 발현될 수 있는 완전히 해방된 사회”라고 하였다. 이것은 노동이 생산 수단을 점유한 특정 계급에 의해 열화되는 것이 아닌, 인간이 자율적인 사고하에서 그 자체로 표현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 사회에서 유·무형 재산은 물론이고, 노동의 대가는 이에 맞춰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를 “필요에 따라 분배를 받으며, 능력에 따라 노동하는 사회”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것이 적용될 때는 엄청난 계급의 불평등을 자아낸다.
대한민국의 사례.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는 경제, 정치, 철학적이고 학술적인 공산주의의 의미가 아니라 왜곡되고 적대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이는 한국 전쟁의 경험에서 기인한 것으로, 한국 전쟁 발생 20년 전후로 출생한 사람들이 남북한 대립의 상황으로 인해 공산주의라는 단어 자체를 꺼내는 것을 금기시하거나 적대적인 것과 관련있다.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는 철학적 이념, 정치·경제 체제와 더불어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통치 체제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 경제 권력이 김일성, 김정일 일가에 독점되는 특유의 시스템과 결함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정권들을 거치면서 공산주의가 민주주의의 반의어인 것처럼 쓰였다는 주장도 있다.
대한민국의 군인 대통령 시대를 지나 사회가 선진국식 민주화와 전지구적 시장경제로 점차 진행되고 냉전이 종료된 뒤는 공산주의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는 분위기는 상당히 없어졌다. 하지만 대한민국 내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은 지지정당과 관계없이 부족한 편이다. |
2870 | 66951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870 | 이탈리아 | 이탈리아 공화국(), 약칭 이탈리아(, 약자: IT, , 이태리)은 남유럽의 이탈리아반도와 지중해의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시칠리아 및 사르데냐로 이루어진 단일 의회 공화국이다. 북쪽 알프스산맥을 경계로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우리나라와 같이 반도이다. 주변 바다로는 동쪽의 아드리아해, 남쪽의 이오니아해, 서쪽의 티레니아해와 리구리아해가 있다. 이탈리아의 영토 안쪽에는 위요지 국가인 산마리노와 바티칸 시국이 접하여 있으며, 스위스 영토 안쪽에 이탈리아의 월경지 영토인 캄피오네디탈리아가 있다. 국토 면적은 301,340 km2이며, 온대 기후대에 속한다. 인구는60,200,000여 명으로, 유럽에서 여섯 번째로 인구가 많고, 전 세계 기준으로는 23위이다. 주요 도시로는 수도인 로마를 비롯하여 밀라노, 나폴리, 제노바, 피렌체, 토리노, 베네치아 등이 있다.
오늘날 '이탈리아'로 알려진 이 땅은 에트루리아나 고대 로마 등 유럽의 여러 문화와 민족의 요람이었다. 수도 로마는 옛 로마 제국의 수도이기도 하였으며 수 세기 동안 서구 문명의 정치문화적 중심지였다. 로마가 몰락하자 이탈리아는 롬바르드족과 동고트족 같은 게르만족과 몽골족, 사라센 등 오랫동안 타민족의 침입에 시달렸다. 수 백년 뒤 이탈리아에서는 이후 유럽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르네상스가 탄생하였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이탈리아는 수많은 왕국(사르데냐 왕국, 양시칠리아 왕국, 밀라노 공국 등)과 도시국가들(베네치아 공화국 등)로 분열되었다가 1861년에 이르러서야 "리소르지멘토"라는 격변기를 겪으며 통일을 이루었다. 19세기 말부터 양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이탈리아는 식민지를 거느리게 되어 리비아, 에리트레아,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 에티오피아, 알바니아, 로도스섬, 도데카니사 제도, 중국 톈진까지 지배하였다. 원래 군주제 국가였으나(이탈리아 왕국)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하면서 1946년에 공화정이 되었다. 이탈리아는 1957년 유럽 공동체(EC)의 창립 회원국이었으며, 1993년에 유럽 공동체는 유럽 연합이 되었다. 이탈리아는 1999년에 유로화를 채택하였다.
오늘날의 이탈리아는 민주 공화국이며, 이코노미스트지 조사에서 삶의 질 세계 8위를 기록했다. 이 나라는 높은 생활 수준을 구가하며, 2010년 인간 개발 지수는 24위였다. G7과 G20 소속이며, 2011년 기준으로 명목 국내총생산은 세계 8위이다. 이탈리아는 오늘날 유럽 연합의 창립 회원국으로, 1957년 로마 조약이 체결된 나라이기도 하며,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원년 회원국이다. 그 밖에도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와 세계 무역 기구(WTO), 유럽 평의회, 서유럽 연합의 일원이다. 이탈리아의 군비 지출은 세계 8위이며,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핵 공유에 참여하고 있다.
이탈리아(특히 로마)는 정치와 문화 면에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데, 식량 농업 기구(FAO), 국제농업개발기금(IFAD), 세계 식량 계획(WFP)의 본부가 이 곳에 위치한다. 이탈리아는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와 더불어 유럽의 정치, 사회, 군사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주요 지역 강국이기도 하다. 이 나라는 높은 교육 수준과 풍부한 노동력을 보유한 세계화된 나라이며, 2009년 국가 브랜드 순위에서 6위를 차지하였다. 또 이탈리아의 기대 수명은 뉴질랜드와 버뮤다 다음 세계 19위로 길다. 또 관광 대국인 이탈리아는 해외에서 4,370만 명이 방문하여 세계에서 5번째로 관광객이 많은 나라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분에서 보여지듯(44곳) 예술과 과학 분야에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대학 졸업자의 첫 연봉은 2010년 기준으로 약 23,000유로이다. 이탈리아의 대표 음식으로는 피자, 젤라또, 파스타 등이다.
역사.
고대 시기.
대략 85만 년 전부터 원생 인류들이 현재의 이탈리아 반도로 이주하여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대략 20만 년 전에 네안데르탈인들이 이 곳에서 살았다고 전하며, 현생 인류는 약 4만 년 전부터 살기 시작한다고 한다. 이탈리아는 선사 시대에도 중요한 인간 활동의 무대여서 라치오주, 토스카나, 움브리아, 바실리카타 지역 등 곳곳에서 그 유적이 발견되었다. 로마 시대 이전의 이탈리아에서는 로마인들이 속한 라틴족, 사비니족, 켈트족, 삼니움 족등이 모여 살았으며, 대다수가 인도유럽어족이었다. 기원전 17세기와 11세기에 미케네 문명의 그리스인들이 이탈리아 반도로 처음 접촉하기 시작하였고, 해안을 따라 시칠리아 지방과 반도 남부에 여러 도시국가들을 세워 식민지화하였다. 이 때의 그리스와의 접촉은 이탈리아인들에게 민주정의 개념과 뛰어난 예술, 문학 양식들을 전파하였다.
로마 제국.
로마는 기원전 753년, 테베레강 인근에 세워진 도시국가로, 이후 244년간 라틴과 사비니 계통의 왕정을 유지하다가 나중에는 에트루리아 출신의 왕들이 연달아 즉위하였다. 이후 7명의 왕들이 즉위하여 로마를 통치하다가, 기원전 509년에는 로마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을 쫓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이후 로마는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귀족정으로 변모하였다.
이후 이탈리아 반도는 로마가 확장함에 따라 에트루리아, 켈트, 그리스인들을 정복하며 로마의 통치하에 편입되었다. 정복된 이탈리아의 부족들 대부분은 로마로 매우 성공적으로 융화되었으며, 나중에는 로마가 아예 서유럽과 중동, 북아프리카를 대대적으로 정복할 때에 든든한 기반이 되어주었다. 기원전 1세기, 로마에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뛰어난 장군이 등장하였으며, 그는 로마의 영토를 크게 넓히고 사실상 로마의 공화정을 제정으로 바꾸어놓았다. 시간이 흐르자 로마 제국은 브리튼섬에서 페르시아까지 이르는 거대한 대제국으로 성장하였으며, 지중해 전체를 자신의 영향권 내부에 넣으며 막대한 국력을 과시하였다. 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기나긴 황금기의 서막을 열었으며, 이후 현명한 명군들이 연이어 즉위하며 로마 제국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 불리는 200여 년에 달하는 번영기를 맞으며 크게 번성하였다. 이 시기에 이탈리아 반도는 제국의 수도인 로마가 위치한 곳으로 제국의 최고 중심지라는 영예를 안았으며, 심지어는 '렉트리스 문디', 즉 세계의 여왕이라 불리며 화려하게 문명의 꽃을 피웠다.
이 시기 로마 제국은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선두에 서있는 나라들 중 하나였으며,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들 중 하나였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치세 하의 로마 제국은 5백만 제곱 킬로미터의 영토를 거느렸으며, 제국의 문명은 이후의 서구 문명들에게까지 깊숙한 영향을 미쳐 가히 서양의 토대를 놓았다 할 정도로 서구인들의 정신적, 물질적 세계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로마의 달력, 수 체계, 언어, 문자 등이 모두 다른 나라들에게까지 전래되었으며 로마의 국교였던 기독교가 서양의 중심 종교로 떠올랐던 것이다. 이 시기 로마는 저 멀리 있는 인도와도 무역을 전개하였으며, 폼페이에서 상아로 만든 여신 락슈미의 조각상이 발견될 정도였다.
이토록 번영한 로마 제국마저 쇠퇴의 흐름을 피할 수 없었기에, 기원후 300년 경에 로마 제국은 동서로 분열하였으며, 이들 중 이탈리아 반도가 속해있었던 서로마 제국은 지속되는 야만족들의 침략을 견디지 못하고 게르만족 오도아케르가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쫓아내며 멸망하고 말았다. 다만 동로마 제국, 즉 동로마 제국은 번영을 이어가 이후 1,000여 년을 더 지속할 수 있었다.
중세.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이후, 이탈리아 반도는 오도아케르가 세운 왕국의 통치를 받다가 나중에는 동고트족의 손에 떨어졌다. 6세기 경에는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다시 이탈리아 반도를 재정복하는 데에 성공하며 다시 로마 제국의 세력권에 다시 들어갔으나, 게르만 부족인 랑고바르드족이 대거 밀려오면서 동로마 제국은 라벤나 총독부와 같이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다시 이탈리아를 뺏기고 물러나야만 하였다. 이 때 이후로 이탈리아 반도는 약 1,300여 년 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여러 국가로 쪼개져 분열하게 된다. 야만인들이 끊임없이 국경을 넘어 쳐들어와 약탈을 저질렀기에 이 시기를 암흑기라고 부른다. 랑고바르드인들이 세운 랑고바르드 왕국은 8세기 후반 경 카롤루스 대제가 세운 프랑크 왕국에 흡수되었는데, 이 때 프랑크 왕국은 종교적인 정통성을 획득하고 교황과의 친밀도를 올리기 위하여 로마를 포함한 그 주변지역을 교황령(Papal State)로 떼어 주었다. 이후 교황 레오 3세는 이에 화답하여 카롤루스 대제에게 서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바쳤으며, 이때부터 신성로마 제국이 성립되었다. 이때부터 13세기까지는 이탈리아의 정치는 대부분 신성로마 제국과 교황 사이의 협력과 갈등 관계를 다루는데, 이 두 권력이 다툴 때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편을 든 쪽을 기벨린, 교황의 편을 든 쪽을 구엘프라고 부른다.
독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교황은 함께 중세 유럽의 최고 권력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한 하늘에 두 태양이 있을 수 없듯이, 양쪽은 누가 더 세속적인 권위에서 우월한 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다투었고 왕, 추기경, 귀족들을 임명하는 문제에서 서로를 무시하고 갈등을 겪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로 인하여 기벨린과 구엘프 사이에서 내란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서 황제와 중앙의 영향력이 약해지며 여러 도시국가들이 독립하여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워낙 황제와 교황이 치열하게 대립하며 전쟁을 끊임없이 반복하였기에 치안은 위협받았고 그 어디도 안전한 곳이 없었다. 이 때문에 여러 도시들은 스스로 살 길을 찾아나서야 했고, 치안과 경제를 스스로 책임져야 했던 것이다. 1176년에는 이 도시들이 모여 만든 롬바르디아 동맹이 레그나노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1세의 군대를 이기기도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의 도시들 대부분이 황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여 떨어져 나갈 수 있었다.
독립한 도시 국가들 중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와 같은 도시들은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하였다. 은행업과 대부업 등이 새롭게 갈라져나왔으며, 사회적이나 경제적으로도 크나큰 발전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한편 이탈리아의 해안과 남부 지역에서는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한 해양 공화국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여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고 동방으로의 교역로를 통제하며 막대한 이익을 얻어내었다. 이들은 한때 동로마 제국이 통치했던 지역들에서 새롭게 설립된 공화국들로, 모두 도시 국가의 형태를 띠고 독립적인 자율을 누렸다. 이처럼 다양한 국가들의 성립은 학문적, 예술적인 성취를 이루어냈고, 이 시기에 가장 잘 알려져 있던 해양 공화국들에는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아말피 등이 있었다. 이 국가들은 지중해의 섬들을 서로 따로따로 통치하였으며, 지중해의 해역들을 크기에 따라 나누어 가지며 그 영유권을 독점하였다. 이들은 심지어 중동이나 흑해, 북아프리카까지 식민지들을 개척하였으며, 가장 세력이 강했던 베네치아는 17세기 중반까지 키프로스, 그리스, 달마티아 등의 지역에 막대한 크기의 영토를 소유하고 있을 정도였다.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동방으로 향하는 유럽의 주요 길목이었으며, 유리 산업의 중심부였다. 한편 피렌체는 비단, 양모, 은행, 보석업이 성행하였으며 이 산업들로 엄청난 자금을 벌여들였다. 이처럼 막대한 자금들이 이탈리아 내부로 유입되자, 자연히 사람들은 예술과 문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공화국들은 서로 원정과 전쟁들을 앞다투어 벌였으며, 주로 이 전쟁들을 통하여 교역로들을 차지하고 경쟁국들의 국력을 깎아보고자 노력하였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아시아로 향하는 마르코 폴로를 재정적으로 지원하여 주기도 하였다. 대학들이 세워졌고,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신학자들이 국제적인 명성을 얻으며 문학을 발전시켰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탈리아 반도를 신성로마제국의 문화적, 경제적 중심으로 만들었으며 피렌체에서는 자본주의와 은행업을 기반으로 한 유력 가문들이 떠올랐다. 피렌체에서는 단테나 조토 디 본도네 등의 대예술가들이 1300년대에 활동하기도 했다.
한편 남부의 시칠리아에서는 9세기 경에 무슬림들이 침입하여 시칠리아 토후국을 세웠다. 이 토후국은 11세기 경에 이탈리아 노르만 족들이 랑고바르드 왕국과 동로마 제국의 영토와 함께 멸망당했다. 이후 남부 이탈리아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며 점차 하나의 세력 밑에 결집하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호엔슈타우펜 왕가, 나중에는 앙주의 카페 왕가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5세기부터는 아라곤 가문이 주도권을 쥐었다. 또한 사르데냐 지방에서 한때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도시들이 독립하여 주디카티를 형성, 따로 번영하였으며, 고도의 자치를 누렸다. 다만 몇몇 섬들이 제노바나 피사의 영역권으로 떨어지기는 하였으나, 대부분의 주디카티들은 15세기에 아라곤 가문이 합병하기 전까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1348년 즈음에 닥친 흑사병은 이탈리아 인구의 3분의 1 가까이를 사망시키며 엄청난 공포와 인명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이후 이탈리아 반도는 전염병으로부터 빠르게 회복하였고, 도시들과 경제가 부흥하며 인본주의와 르네상스의 꽃봉오리가 피어오르기 시작하였다.
근대.
이탈리아는 13세기와 14세기에 일어난 유럽의 문예 부흥 운동인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다. 이 르네상스 시기를 중심으로 유럽의 중세기와 근대기를 나누며, 신과 교회에 편중되어 있던 사회에서 벗어나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급속도의 발전을 이룩하고 서양이 본격적으로 번영하기 시작한 시대로 본다. 이 때의 이탈리아 반도는 서로 다른 독립적인 도시 국가들로 쪼개져 귀족들이 통치하였으며, 이 귀족들은 자신들의 영토에서 사실상의 왕으로 군림하였다. 이들은 무역과 행정을 담당하였으며, 부와 세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예술과 과학자들을 후원해주었다. 유명한 귀족 가문들로는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과 스포르자 가문, 제노바의 도리아 가문, 베네치아의 모체니고 가문과 바바리고 가문, 페레라의 에스테 가문, 만투아의 곤자가 가문 등이 있다.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에서는 이러한 귀족 가문들의 비호 아래 상인들이 막대한 부를 이탈리아 내로 축적하였으며, 이들의 후원을 받아 여러 예술가들이 두각을 드러내었다. 이 예술가들은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는데, 가장 유명한 자들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브루넬레스키,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도나텔로 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레온 바티스티 알베르티, 안드레아 팔라디오, 도나토 브라만테 등의 건축가들이 두각을 드러내었다.
서방 교회의 분열이 일어난 이후, 교황들은 아무래도 베드로가 순교한 로마가 더 정통성 있는 교황좌라고 판단하여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새로운 교황 마르티노 5세가 3년 간의 여행을 거쳐 다시 로마의 교황령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마르티노 5세는 이 3년 간의 여정 동안 여러 이탈리아 도시들을 거쳤고, 이탈리아 반도를 서방 기독교의 최고 중심부로 다시 재건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 시기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 교황에게 공식적으로 자금을 대거나 돈을 빌려주기 시작하였고, 교황과의 돈독한 관계를 바탕으로 이탈리아 반도의 주요 정치 세력으로 급부상하기도 하였다. 르네상스 시기, 교황을 선출하는 선거인 콘클라베와 같은 행사들은 이탈리아에서의 지배권과 서방교회 교회에 대한 영향력을 얻어내기 위한 유력 가문들 사이의 암투로 전락하였으며, 수많은 비밀 거래들과 약조들이 이 사이에서 오고 가곤 하였다. 1439년에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와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가 코시모 데 메디치가 중재한 피렌체 공의회에서 만나 동서 교회의 화합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1453년에는 교황 니콜라오 5세가 군대를 파병하여 오스만 제국의 군대로부터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수성하게 돕기도 하였는데, 결국 오스만 제국군의 막대한 포력을 견디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결국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자 이 곳에 살던 그리스 학자들이 터키를 피하여 서방 세계로 이주하였다. 이 때에 오랫동안 잊혀졌던 고대 그리스 세계의 인본주의가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하였으며, 교황 피우스 2세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와 같은 인본주의자들이 인간이 중심이 되는 이상적인 인본주의 세계를 건설하려 우르비노나 피엔자 등의 도시들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피코 델라 미란돌라와 같은 철학자는 '인간 존엄성에 관한 연설'을 집필하여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하여 설파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르네상스 인본주의의 최고봉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에 사학자 레오나르도 부르니는 인류 역사를 고전기, 중세기, 근대기로 나누며 며 최초의 현대적인 역사학을 구성하기도 하였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유럽에 대항해시대를 열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탈리아 해양 공화국의 탐험가들과 항해가들은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기존의 무역로를 장악한 오스만 제국을 피하여 새로운 무역로를 찾아내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들은 대서양 국가들에게 접근하여 새로운 무역로를 찾아주겠다고 약속하였고, 이에 설득당한 국왕들이 이들에게 배와 선원들을 후원해주고 대대적인 해상 탐험 원정이 일어나며 본격적인 대항해 시대의 서막이 올랐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사례가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로, 스페인의 후원을 받아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인 개척지를 건설하는 것에 지대한 공로가 있는 이이다. 1497년의 존 카봇은 영국의 후원을 받았으며, 처음으로 '새로 발견된 땅'을 인지하고 북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기도 하였다.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사실 콜럼버스가 발견한 땅이 아시아나 인도가 아니며, 지금까지 사람들이 몰랐던 제 4의 대륙이라고 주장하며 완전히 새로운 '신세계'의 개념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현재 '아메리카 대륙'의 이름도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프랑스의 후원을 받은 조반니 데 베라차노는 아메리카 대륙의 대서양 연안 지역을 1524년에 최초로 조사한 유럽인이기도 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이후, 롬바르디아 전쟁이 종결되었으며 서로 맞서 싸우던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 즉 베네치아, 나폴리, 피렌체, 밀란, 교황령은 서로 모여 이탈리아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때 피렌체의 로렌조 데 메디치가 이탈리아 동맹의 가장 큰 권력가였으며, 또한 르네상스 시기 가장 열성적으로 예술가들을 지원하여 준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는 파치 음모 사건과 투르크의 침략을 견뎌 내고 이탈리아 동맹을 유지하며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해오자 이 이탈리아 동맹은 무너지고 말았고, 결국 이탈리아에서는 발루아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 사이에서 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때문에 1500년대에 이탈리아는 유럽 각국들이 간섭하며 전쟁이 일어나고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르네상스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하며 유럽의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로 번영하기도 하였다. 로마의 교황들도 이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이 다 달랐는데, 율리오 2세의 경우에는 최대한 외국 군주들의 간섭을 줄이려 한 반면 바오로 3세는 외국 군주들 사이를 중재하여 평화를 이끌어내고자 한 경우도 있었다. 이 때 메디치 가문에서 선출된 레오 5세나 클레멘스 7세 등의 교황들은 가문의 입맛에 맞추어 신교 세력들을 적대하였으며 가문과 개인의 부를 늘리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전쟁이 끝났을 무렵, 이탈리아 북부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남부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에 떨어져 있었다.
이때까지도 교황령은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반종교개혁을 실시하여 신교 세력들의 비판을 무마하고 천주교회를 개혁해 보려 하였다. 이 때 발생한 주요 사건에는 트렌트 공의회, 엘리자베스 1세의 파문, 레판토 해전 등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그레고리 천문대의 건설, 그레고리 달력 반포, 마테오 리치를 파견하여 중국에 예수회 선교사들을 보낸 사건, 프랑스 종교 전쟁, 투르크와의 장기전, 조르다노 브루노의 화형, 교황령의 린체이 아카데미(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속해있었다)의 설립, 30년 전쟁, 대튀르크 전쟁 동안 교황 인노켄티우스 6세의 주도 하의 마지막 신성 동맹의 결성과 같이 유럽사와 세계사적으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매우 많이 일어났다.
이탈리아는 1500년대의 영광을 뒤로 하고, 1600년대와 1700년대에는 대서양의 노예 무역에서 소외되며 점차 경제가 쇠퇴하였다. 18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왕위 계승 전쟁 이후에 이탈리아 남부는 스페인 부르봉 가문에게, 북부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로레인 왕가에게 지배당했다. 프랑스에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과 전쟁을 치를 때에, 상대적으로 프랑스에 가까웠던 이탈리아 북부는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하여 여러 자매공화국들로 찢어졌고, 나중에는 프랑스 제1제국의 하위 국가인 이탈리아 왕국이 들어섰다. 이탈리아 반도의 남쪽 지방에서는 나폴레옹과 혈연 간이었던 조아킴 뮈라가 나폴리의 국왕으로 즉위하여 통치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쇠퇴하자 이같은 권력구도도 무너졌고, 빈 회의에서 이탈리아의 정치 지형을 다시 18세기 후반으로 되돌리기로 결정하였다. 허나 나폴레옹 통치기에 뿌려진 자유와 평등과 같은 혁명의 유산들은 뿌리뽑을 수 없었고, 이 때문에 19세기 초에 이탈리아는 다시 혼란기에 돌입하게 된다.
통일.
이탈리아는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몇 천년 동안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쪼개져 있었는데, 결국 1800년대 들어서야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과 사보이아 왕가가 힘을 합쳐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이탈리아 왕국이 설립되었다. 1815년의 빈 회의 이후, 이탈리아에서는 통일의 움직임이 사회적으로 급부상하였고 외국의 통치를 받는 지역들을 모두 독립시켜, 하나의 국가 아래에 통일시키자는 의견이 떠올르기 시작하였다. 이 때의 가장 대표적인 급진주의자가 바로 주세페 가리발디였는데, 그는 비밀 결사조직 카르보나리 당의 일원이자 1830년대에 떠오른 청년 이탈리아당의 창립자였다.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통일한 공화정을 만들고 싶어하였으며, 리소르지멘토를 주도하였다.
주세페 가리발디는 청년 이탈리아당에 열성적인 지지자들이 매우 많았고, 이들은 이탈리아 남부에서 통일 분위기를 조성하며 가리발디의 뜻을 충실히 따랐다. 이 때 이탈리아 북부를 통치하던 사르데냐 왕국의 사보이아 왕가와 사르네냐 왕국 정부를 이끌던 카밀로 벤소 디 카보우르 백작도 통일 이탈리아 국가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었고, 1848년에 유럽을 휩쓸은 1848년 혁명의 열기를 이어 처음으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에 1차 독립전쟁을 선포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1855년, 사르데냐 왕국은 크림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편을 들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카보우르 백작의 통일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강대국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사르데냐 왕국은 1859년에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2차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롬바르디아를 오스트리아에게서 해방시켰다.
1860년과 1861년 사이, 가리발디는 나폴리와 시칠리아 지방을 통일하였으며, 사보이아 왕가는 로마와 교황령 일부를 제외한 이탈리아 중부를 완전히 점령하여 통일하였다. 1860년 10월 26일, 테아노에서 사보이아 왕가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가리발디가 역사적인 회담을 가졌고, 합의가 이루어져 마침내 에마누엘레 2세가 이탈리아 전체의 왕으로 등극하였다. 가리발디는 본디 공화정을 바랐던 자신의 꿈을 접고 사보이아 왕가를 지지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될 수 있었다. 카보우르 백작도 가리발디가 통일한 이탈리아 남부를 1861년 3월 17일에 샤르데냐 왕국에 편입시키는 것에 동의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1861년 3월 17일에 공식적으로 이탈리아 왕국의 건국이 선포되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왕국의 첫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며, 왕국의 수도를 피렌체로 옮겼다. 이 때 이탈리아 왕국의 수립에 기여한 4명의 인물들(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가리발디, 카보우르 백작, 마치니)를 건국의 아버지라 부른다.
왕정기.
새롭게 수립된 이탈리아 왕국은 수립 직후 강대국의 지위를 획득했다. 샤르데냐 왕국의 헌법이 이탈리아 전역에 확대되어 적용되었으며, 시민들에게 자유와 평등에 대한 보장을 일부 하였으나, 선거권을 빈자들과 교육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주지 않는 등 나름대로 문제도 있었다. 새로운 왕국은 입헌군주정이었으며, 진보적인 세력이 장악한 의회에서 국정을 맡아 처리하였다. 한편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서는 산업화가 일어나 급속도로 발전하였으나, 중부와 남부에서는 여전히 산업화가 일어나지 않았으며 농촌 지역으로 남아있었다. 이 때문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북부로 이주하였으며, 이러한 사회적 혼란을 틈타 이탈리아 사회당이 기존의 진보와 보수 정당들에 도전하며 점차 힘을 키워갔다.
19세기 초반, 이탈리아는 소말리아와 에리트레아를 식민지화하며 식민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1899년 11월에서 1901년 9월까지는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의 난에 8개국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1901년 9월 7일에는 청나라가 강제로 이탈리아에게 톈진의 조계를 할양하였으며, 1902년 6월에는 공식적인 이탈리아 영토로 포함되어 관리를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1913년에는 모든 성인 남성들에게 선거권이 주어졌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이탈리아에서는 지오반니 지올리티 총리가 1892년과 1921년 사이에 5번이나 연임하며 이탈리아의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인 현대화를 본격적으로 이끌었다.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함께 삼국 동맹을 맺었으나, 1915년에 영토를 확장시켜준다는 조건으로 변절하여 연합 세력에 동참하였다. 이후 이탈리아는 미국, 영국, 프랑스와 함께 연합국의 주요 4개국으로 떠올랐고, 전쟁 승리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세계 대전의 과정은 상당히 고난하였는데, 이탈리아 군대가 알프스 산맥에서 교착전에 빠져 막대한 인명, 물적 피해를 보며 더이상 전진하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된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이후 군대를 재조직하고 대대적인 모병을 거치며 전열을 가다듬었고, 그라파산이나 피아베강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1918년 10월에는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결국 이탈리아 전선에서 승리하며 전쟁을 일단락지었다. 이로 인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치명타를 입고 몰락하였으며, 2주 후에는 세계 대전도 종결되었다.
이탈리아는 세계 대전 동안 65만 명에 달하는 군인과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왕국은 재정적으로 파산 위기에 이르렀다. 이탈리아는 세계 대전의 승전국으로서 국제 연맹의 상임이사국 자리를 영구적으로 얻어내고 국제적인 위상도 어느 정도 올랐으며 전쟁 이전 요구했던 영토들도 상당수 얻어내었으나, 달마티아 지방을 얻어내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과격한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두고 전쟁이 '실패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으며 사회는 불신에 휩싸였다. 다만 이탈리아는 전쟁 막바지에 헝가리의 영토였던 리예카를 원래 자신들에게 약속된 영토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격하여 자국 영토로 편입하기도 하였다.
파시즘 독재.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사회는 갈수록 혼란스러워졌고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 급진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의견들을 내세우며 군중들을 부추겼다. 실례로 1919년 3월에 북이탈리아 공업지대에서 러시아 혁명을 본받아 노동자의 공장 운영, 거리투쟁, 공장 생산 거부 등의 강력한 행동이 개시되었는데, 이는 남부 농업지역에도 파급되어 노동자층의 계급투쟁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러한 민중들의 단결을 두려워한 지주, 군벌과 전통적인 자유주의 세력들은 로마제국의 영광을 되찾자고 주장하며 국가주의를 내세운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을 지지하기 시작하였다. 1922년 10월, 파시스트당의 검은셔츠단이 로마 진군을 실시하였고,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으려 하였다. 이 쿠데타 시도는 무위로 돌아갈 뻔 하였으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무솔리니를 결국 수상으로 임명하면서 성공하였다. 이후 권력을 잡은 무솔리니는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정치적 단체들을 불법으로 규정하였으며 개인의 자유도 심각하게 제한하고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무솔리니의 행보는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고, 결국 후에 히틀러의 나치당과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에 영감을 주는 참사를 낳았다.
1935년, 무솔리니 주도 하의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입하였고,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를 설립하였다. 이 행동은 국제사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이탈리아는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고 말았다. 이후 이탈리아는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과 동맹을 맺었으며,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시스코 프랑코를 지지하며 국제적인 행보를 넓혀갔다. 1939년에는 알바니아를 합병하였으며, 이후 약 몇십여년 동안 사실상 보호령으로 두었다. 이탈리아는 1940년 6월 10일에 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령 소말릴란드, 이집트, 발칸 반도, 동부 국경으로 군대를 투입하였다. 허나 이탈리아 군대는 동아프리카, 북아프리카, 소련 국내에서 패배하며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체결된 빌라 주스티 정전 협약으로 이탈리아는 유고슬라비아 지방을 합병할 수 있었다. 파시즘 기간 동안, 무솔리니는 이 유고슬라비아 지방을 '이탈리아화'시키려 하였으며 슬라브어, 학교, 정당, 문화를 철저하게 억압하였다. 이탈리아는 전쟁 기간 동안 초법적인 살인 만행을 저질렀으며, 유대인과 슬로베니아인 등의 민족들을 대상으로 하여 이들을 이탈리아 강제수용소로 보내어 인종 청소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다만 독일과는 다르게 이탈리아의 전쟁 범죄는 전후 상대적으로 적게 기소되었고, 처벌도 훨씬 적었다. 연합국 군대는 1943년 7월부터 시칠리아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하여 본격적인 이탈리아 본토 침공이 시작되자, 무솔리니는 얼마 가지 못하고 실각하였으며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파시즘 대평의회 의원들 대다수의 동의를 얻어 권좌에서 쫓겨났다. 9월 8일에는 카시빌레에서 연합국과의 휴전 협정을 조인하였는데, 이 직후 이탈리아 파시스트 당의 도움을 받은 나치 독일 군대가 빠르게 국경 내부로 들어와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를 장악하였다. 이때문에 이탈리아에서는 세계 대전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북중부를 장악한 나치 독일과 남부에서부터 서서히 밀고 올라가는 연합국 군대 사이에서 전쟁이 계속되었다.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독일이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을 세웠고, 무솔리니를 구출해내어 이 공화국의 대표로 세움으로써 나치 독일의 괴뢰국으로 변질시켜버렸다. 남부 지방에 있던 몇몇 이탈리아 군대들은 이탈리아 공동교전군을 조직하여 연합국의 편에서 싸웠다. 다만 상당수의 이탈리아 군대는 여전히 무솔리니와 독일에게 충성을 바쳤고,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의 편에서 연합국에 대항하여 전투를 계속하였다. 결국 이탈리아는 내전 상태에 돌입하였는데, 이때 이탈리아에서는 휴전 협정 이후부터 이미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사회 전반적인 반파시즘 분위기가 점차 강해지고 있었기에,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게릴라전을 펼치며 이탈리아 사회공화국 군대와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우기도 하였다. 1945년 4월, 독일과 히틀러의 패색이 만연해지자 무솔리니는 북쪽으로 도주하여 목숨을 건지려 하였으나, 결국 잡혔고 코모 호수 인근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시신은 이후 밀라노로 옮겨졌고, 공공장소에서 거꾸로 매달린 채로 대중들에게 전시되며 자신의 죄악에 대한 대가를 일부나마 치르었다. 1945년 4월 29일에는 이탈리아에 주둔하던 독일 군대가 마침내 항복하며 공식적인 교전은 모두 끝났다. 이 전쟁에서 50만 명에 달하는 이탈리아 국민들이 사망하였으며, 이탈리아 경제는 파탄 수준에 이르러 1944년의 1인당 GDP는 20세기 이래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공화정.
이탈리아는 1946년 6월 2일 국민 투표를 통해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으며, 1948년 1월 1일 새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후 이 날을 공화국의 날로 제정하고 기념하고 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아들인 움베르토 2세는 왕위에서 퇴위하도록 강요당했고, 사보이아 왕가는 이탈리아에서 쫓겨났다. 1947년에 이탈리아 평화 협정이 맺어졌으며, 이로 인하여 베네치아줄리아가 다시 유고슬라비아에게 돌아갔으며 이탈리아가 해외에 가지고 있던 식민지들도 모두 빼앗기면서 이탈리아 식민 제국이 종말을 맞았다. 1950년에는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가 1960년 7월 1일까지 이탈리아의 행정력 아래에 국제 연합의 신탁통치를 받기도 하였다.
이후 돌입한 냉전 시기에서, 특히 미국을 포함한 서방 국가들은 이탈리아가 선거를 통하여 다시 극단적인 파시스트나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는 것이 아닌가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두려움은 중도적인 성향의 기독교민주당의 알치데 데 가스페리 총리가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며 소멸되었다. 1949년에 이탈리아는 NATO에 가입하였으며, 이후 미국의 마셜 플랜의 도움을 지대하게 받아 1960년대 후반까지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보이며 '경제 기적'을 일구어냈다. 1957년에 이탈리아는 유럽 경제 공동체의 창립 회원국으로 참여하였으며, 이 것이 나중에 발전하여 1993년에 유럽 연합으로 성립되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이탈리아는 납의 시대를 겪었다. 이 시기에는 특히 1973년의 석유 파동 이후의 경제적인 위기와 광범위한 사회적 갈등,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테러, 냉전의 격화에 따른 미국과 소련 사이의 갈등으로 이탈리아 전체가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납의 시기는 기독교민주당의 정치인이자 총리였던 알도 모로가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되었다가 암살당하며 그 정점을 찍었고, 또한 네오 파시스트들이 볼로냐 대학살을 일으키며 85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는 1945년 이래 처음으로 기독교민주당이 여당의 지위를 빼앗기며 타 정당들에게 주도권을 내주었다. 하나는 공화당의 조반니 스파돌리니 총리였고, 나머지 하나는 이탈리아 사회당 출신의 베티노 크락시 총리였다. 다만 기독교민주당은 여전히 의회 다수당의 지위를 유지하였고, 정국의 최대 주도 세력이기도 하였다. 크락시 총리의 재임기에 이탈리아는 다시 경제가 회복세를 띠기 시작하였고, 세계에서 5번째가는 산업 국가로 발돋움하였으며 1970년대에는 G7에 가입하기도 하였다. 허나 크락시 총리는 지나친 정부 확장 재정 정책을 운용하였고, 이로 인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탈리아의 빛은 GDP의 100%를 넘기고 말았다.
1992년과 1993년 사이, 이탈리아 정부는 이전에 시칠리아의 마피아들을 집단으로 처벌한 막시 재판의 후폭풍을 호되게 겪었다. 마피아들은 이에 앙심을 품고 여러 테러 공격을 일으켰으며, 이때문에 정부는 반테러 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1992년에는 2번의 주요 폭탄 공격으로 판사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1993년에는 로마, 밀라노, 피렌체 등 이탈리아의 주요 대도시의 관광지들에 일부러 폭탄 테러를 시행하기도 하며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혔다. 이로 인하여 10명이 사망하였으며, 93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역사적인 문화재들도 다수 피해를 입었다. 이 때 천주교회는 공개적으로 마피아를 책망하였는데, 직후 교회 2곳이 테러를 당했고 반마피아 성향의 성직자들이 로마에서 죽은채로 발견되기도 하였다. 1990년대초, 이탈리아는 정치적 극단화, 막대한 공공부채, 엄청난 부정부패 등에 실망한 국민들이 대대적인 개혁을 요구하였다. 이 때 부정부패 스캔들에 휘말리지 않은 정당들이 없었으나, 그 와중에도 특히 50년 동안 이탈리아의 주요 정치세력이었던 기독교민주당이 특히 부정부패가 심했다. 결국 기독교민주당은 여러 분파들로 쪼개졌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사회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결성하였으며 1990년대와 2000년대에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중심의 중도 우파 세력과 로마노 프로디 중심의 중도 좌파 세력이 연정을 만들어 정부를 운영하였다.
한편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2008년부터 시작된 경제 침체기의 여파로 인하여 결국 2011년에 사임하였고, 그가 이끌던 보수 정부는 마리오 폰티 중심의 진보 정부로 대체되었다. 2013년 총선 이후, 이탈리아 민주당 부대표였던 엔리코 레타가 조르조 나폴리타노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 우파, 좌파를 모두 참여시킨 대연정 정부를 구성하였다. 다만 2014년에 새로운 민주당 당대표 마테오 렌치의 도전을 받고 결국 사임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마테오 렌치가 총리직으로 올랐고, 이탈리아 상원을 폐지하거나 선거법을 개정하는 등 개헌과 같은 개혁적인 조치들을 추진하였다. 다만 이 개혁 조치는 12월 4일에 국민투표에서 부결되고 말았고 마테오 렌치 총리는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다. 이후 파올로 젠틸로니 외무장관이 대신 새로운 총리에 올랐다.
2010년대 유럽은 점차 난민들의 유입으로 골머리를 썩기 시작하였는데, 이 난민들 상당수의 최종 목적지가 바로 이탈리아였다. 2013년부터 2018년까지 이탈리아는 70만 명이 넘는 난민들을 수용하였으며 이들중 대부분이 아프리카 사하라 지방에서 온 자들이었다. 이는 이탈리아 대중들의 크나큰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정계에서 극우 세력들이 득세하고 유럽 연합 탈퇴를 주장하는 세력들이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 2018년 총선에서는 포퓰리스트 정당인 오성운동과 극우 계열의 북부동맹이 크게 약진하였고, 이로 인하여 대학 교수였던 주세페 콘테가 새로운 총리에 당선되었다. 주세페 콘테 총리는 이 두 정당을 모아 포퓰리스트 연정을 구성하여 내각을 이끌어나갔다. 허나 14개월 이후 북부동맹은 주세페 콘테 총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고, 이로 인하여 오성운동은 어쩔 수 없이 중도 좌파 세력들과 연정을 이루어 국정을 계속 담당하였다.
2020년, 이탈리아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에 직격탄을 맞았고, 주세페 콘테 총리는 3월부터 5월까지 국가 격리 정책을 내려 전염병의 전파 속도를 늦추려 하였다. 이 정책은 대중적으로 폭넓은 지지를 받았으나, 한편 이탈리아 건국 이후 최대의 인권 제한 조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탈리아는 35,000여 명의 사망자를 내며 세계에서 가장 코로나 19로 사망자를 많이 낸 국가라는 불명예를 안았으며, 경제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히며 이탈리아 경제를 침체의 늪에 빠뜨렸다.
정치.
이탈리아는 왕정이 국민투표로 인하여 폐지된 1946년 6월 2일 이래로 단일 의회 공화국이었다. 현재의 이탈리아의 최고 수반은 2015년부터 이탈리아의 대통령직("Presidente della Repubblica")을 맡고 있는 세르조 마타렐라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7년마다 한 번씩 의회에서 선출한다. 이탈리아는 성문헌법을 가지고 있는데, 이 헌법은 나치와 파시스트 세력이 세계대전 이후 몰락하고 반파시즘 세력의 대표들이 모여 작성한 것이다.
정부.
이탈리아의 선거제도는 비율제와 다수제를 섞어 운용하고 있다. 의회는 상원과 하원으로 나뉘어 있는데, 이들중 하원격에 속하는 이탈리아 하원은 몬테치토리오 궁전에서 회의를 열며, 상원격에 속하는 이탈리아 상원은 마다마 궁전에서 모인다. 이들은 거의 법률 상으로 동일한 권한을 같고 있다. 이탈리아의 총리("Presidente del Consiglio dei Ministri")는 이탈리아의 정부 수반이며, 총리와 내각 요인들은 대통령에 의하여 임명되며 그 전에 무조건 의회의 재가를 받아야만 한다. 총리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으로 선거를 통하여 과반수를 획득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총리직을 잃을 수도 있다. 총리는 장관회의를 주재하는데, 이 장관회의는 최고 의사결정기구이다. 다만 이 장관회의에서 결정된 정책들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다른 기구들의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 이탈리아의 총리는 대다수의 다른 의회내각제 국가들의 총리들과 비슷한 권한을 가지고 있으나, 다만 의회를 해산시킬 권한만큼은 없다.
대통령은 상원과 하원, 지역 대표가 합동으로 선출한다. 이탈리아의 20개 주(region)에서 선출된 58명과 320명의 상원의원, 630명의 하원의원이 선거인단이 되어 이들의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한다. 이들은 비밀투표를 통해 대통령 후보 중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며, 여기서 2/3 이상의 지지를 받는 후보가 있으면 그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그렇지 않으면 투표를 다시 치른다. 이렇게 3번 치러도 뽑히지 않으면 그 때부터는 과반의 득표를 얻은 후보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이탈리아 장관회의가 다른 국가와 다른 점은 이탈리아 장관회의는 정보와 기밀들을 모두 전적으로 취급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총리는 첩보 작전과 국가 사이버 보안을 강화할 책임이 있으며, 기밀들이 유출되지 못하게 하고 국가 요원들을 비밀리에 배치하거나 국내외 법을 어기는 내용의 비밀 작전들을 승인하기도 한다.
이탈리아 의회가 타 국가들과 다른 점들 중 하나는 해외에 거주하는 국민들을 위한 대표들을 따로 마련해놓는다는 것이다. 총 4개의 해외 선거구에서 12명의 하원들과 6명의 상원의원들을 선출할 수 있다. 추가적으로 이탈리아 상원에는 소수의 '종신 상원의원'들이 있는데, 이들은 대통령에 의하여 임명되며 '사회적, 과학적, 예술적, 문학적 분야에서 뛰어난 애국적 기여를 한 자'들이 주로 임명된다. 특히 이탈리아의 전 대통령들도 같은 예우를 받아 종신 상원의원직을 자연적으로 받는다.
이탈리아의 상원은 1인 2표제로, 116석은 소선거구제를 통해, 193석은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통해 선출되는데 20개 주(region)마다 선거구가 나뉜 권역별 비례대표제이다. 나머지 6석은 해외 거주 이탈리아인들을 위한 의석으로 거주지별로 선거구를 나눠 불구속명부식 비례대표제로 선출된다. 봉쇄조항은 일반적인 정당의 경우 전국 단위에서 3%, 정당연합의 경우 전국 단위에서 10%, 특정 언어권 지역(쥐트티롤 독일어권 지역 등)을 대변하는 정당의 경우 해당 지역에서 20%이다. 하원의 경우에는 상원처럼 1인 2표제로, 232석은 소선거구제를 통해, 386석은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통해 선출되는데 상원과 달리 전국구 비례대표제이며 봉쇄조항은 전국 단위에서 3%. 나머지 12석은 해외 거주 이탈리아인들을 위한 의석으로 거주지별로 선거구를 나눠 불구속명부식 비례대표제로 선출된다.
현재 이탈리아에는 3개의 주요 정당들이 있는데, 크게 오성운동, 이탈리아 민주당, 북부동맹이 있다. 2018년 총선동안 이 3개의 정당들은 이탈리아 하원에서 630석 가운데 614석을 쓸어갔으며, 상원에서는 315석 가운데 309석을 가져갔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 주도의 포르자 이탈리아가 극우 계열인 마테오 살비니의 북부동맹과 연합하여 동맹을 결성하였는데, 현재 이 정당이 2018년 총선에서 가장 많은 수의 의석을 얻었으나, 의회 과반수를 점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나머지 의석들은 대부분 오성운동, 마테오 렌치 전 총리가 이끄는 민주당 등이 나누어 가져갔다. 현재 총리인 주세페 콘테 총리의 소속 정당은 반난민, 반이민, 반EU 정책을 주장하는 포퓰리즘 정당 오성운동이다.
국방.
이탈리아의 군대는 크게 이탈리아 육군, 이탈리아 공군, 이탈리아 해군, 그리고 카라비니에리로 이루어진다. 군대의 최고 통수권자는 총리가 아닌 대통령이며, 2005년 이래로 모병제로 전환하였다. 2010년 집계 조사 결과에 의하면 이탈리아에는 현재 총 293,202명의 군인들이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들 중 114,778명이 헌병인 카라비니에리이다. 2010년 이탈리아가 국방비에 지출한 예산은 세계에서 10번째로 많았으며, 국가 전체 GDP의 1.7%에 이른다. 이탈리아는 나토의 핵무기 공유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미국에서 B61 핵폭탄 90기를 국내로 들여와 설치하고 있으며 게디 공군 기지, 아비아노 공군 기지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이탈리아 육군(Esercito Italiano)은 국가적인 육군 조직이며, 2008년에 총 109,703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가장 잘 알려진 전투 차량은 Dardo 보병전투차와 아리에테 탱크, 켄타우로 차륜형 대전차장갑차 등이 있다. 또한 비행기들 가운데에서는 A129 망구스타가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EU, NATO, UN 업무 등에 자주 파견된다. 그 외에도 레오파드 탱크, M113 장갑차 등을 소유하고 있다. 이탈리아 해군은 2008년에 총 35,200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있었으며 85척의 해군선과 123기의 전투기들을 보유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해군은 대양 해군으로 막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으며, EU와 NATO의 평화 유지군으로 차출되어 세계의 평화에 기여하고 있다.
이탈리아 공군은 2008년 기준으로 43,882명의 병사가 소속되어 있었으며 585기의 전투기가 있다. 이들 중 전투기가 219기이고, 헬리콥터가 114기이다. C-130J 슈퍼 허큘리스, C-27J 스파르탄을 27기나 보유하고 있어 탁월한 기동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카라비니에리는 국가 헌병 조직으로, 군사 경찰 역할도 동시에 맡고 있다. 이탈리아의 경찰들과 함께 군사와 민간 부문 전체를 총괄하여 관여하는데, 경찰과 다른 점이라면 경찰들은 이탈리아 내무부에 보고하는 반면, 카라비니에리는 각각의 사안마다 그 사안에 맞는 부서들에 따로 보고서를 올리고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행정 구역.
이탈리아는 20개의 레조네(regione)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중 5개는 특별자치주이며, 20개의 레조네들은 총 107개의 프로빈차(provincia), 7,960개의 코무네(commune)로 나뉜다.
지리.
이탈리아 영토의 대부분은 지중해에 뻗은 커다란 반도와 시칠리아, 사르데냐 이 두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은 주변 바다를 몇 구역으로 나눈다. 북동쪽으로는 아드리아해, 남동쪽으로는 이오니아해, 남서쪽으로는 티레니아해, 북서쪽으로는 리구리아해를 형성한다.
이탈리아 반도의 등뼈에 해당하는 아펜니노산맥은 북서쪽에서 알프스산맥과 맞닿는다. 알프스 산맥은 곡선을 그리며 이탈리아의 북쪽 경계를 형성한다. 이 지역에는 충적으로 형성된 거대한 포-베네치아 평원이 있어 물은 포강과 알프스산맥, 아펜니노산맥, 돌로미티산맥 등에서 흘러내리는 수많은 지류로 흘러든다. 포 강 외에 잘 알려진 강에는 테베레강, 아디제강, 아르노강 등이 있다.
해발 4,810m의 몬테비안코산(프랑스어로 몽블랑)이 가장 높은 지점이지만 이탈리아 하면 떠오르는 산은 나폴리 근처의 휴화산 베수비오산과 시칠리아의 활화산 에트나산 이 두 화산이다.
경제.
이탈리아는 자본주의 혼합 경제 체제로, 유로존에서 3번째로 거대하며 세계에서는 8번째로 거대한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다. 이탈리아는 G7, 유로존, OECD의 창립 회원국이며 세계에서 가장 산업화된 국가들 중 하나이자 세계의 수입과 수출을 주도하는 나라들 중 하나이다. 이탈리아는 2005년에 전 세계 삶의 질 순위에서 8번째를 차지하며 고도로 발달된 선진국임을 입증하였고, 인간개발지수는 26위이다. 이탈리아는 특히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사업, 거대한 농업, 세계 최고급 수준의 자동차, 기계 공업, 음식, 디자인, 패션업 등으로 매우 유명하다.
이탈리아는 세계에서 6번째가는 제조업 국가로, 소수의 다국적 거대 기업들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적고, 그 대신 훨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소기업들이 더 많다. 기업들은 대부분 산업지구에 모여 있는데, 이들이 바로 이탈리아 산업의 중추를 이룬다. 이탈리아 산업들은 보통 명품업과 틈새 시장에 치중하며, 양으로는 승부하기 힘든 대신에 적은 임금으로 치고 올라오고 있는 중국과 같은 아시아 개발도상국들에게 뛰어난 질을 내세우며 맞서고 있다. 이탈리아는 2016년에 세계의 7대 수출국이었으며, 가장 가까운 무역 상대국은 유럽 연합의 다른 국가들이고 전체 무역의 59%을 차지한다. 유럽 국가들 가운데에서는 독일이 12.9%, 프랑스가 11.4%, 스페인이 7.4%를 차지한다.
이탈리아의 자동차 산업은 가히 제조업의 핵심이라 할 정도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2015년에만 144,000여 개의 회사와 485,000여 명의 사람들이 자동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전체 GDP의 8.5%를 차지하고 있다. 피아트 크라이슬러 오토모빌스는 세계에서 7번째가는 자동차 제조 회사이다. 이탈리아는 작은 부품에서부터 초고가 명품 자동차까지 모든 종류의 자동차 부품을 다 생산하는데, 이들 중 특히 마세라티, 람보르기니, 페라리 등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명품 브랜드들이 모두 이탈리아 기업들이다.
이탈리아는 유럽단일시장의 일부로서, 5억 명이 넘는 잠재 고객들을 소유하고 있다. 이탈리나는 EU의 협약을 통하여 2002년에 유로화를 도입하였으며 유로존의 멤버로서 3억 3천만 명의 시민들을 대변하고, 이탈리아의 주요 금융 정책은 유럽중앙은행이 상당 부분 통제한다.
이탈리아는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하여 크게 경제가 휘청거렸는데, 이는 단순히 국제적인 영향이 아니라 이탈리아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었다. 이탈리아 경제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연 5~6%의 고도성장기를 거쳤고, 1980년대와 90년대에는 서서히 성장률이 줄어들었으며 2000년대 들어서는 완전히 정체기에 다다랐다. 정치인들과 정부는 정체된 경제를 살리기 위하여 막대한 양의 공적 자금을 쏟아부었는데, 이로 인하여 국가의 부채가 급속도로 증가하였으며 2017년에는 전체 GDP의 131.8%에 이르러 EU에서 그리스 다음가는 최대의 채무국이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이 때문에 현재 이탈리아의 빛 대부분은 정부의 부채이며, 가계 부채는 심지어 OECD 평균보다도 낮다.
이탈리아는 남부와 북부가 경제적 격차가 매우 심하고, 이 때문에 사회적, 경제적 불안정이 일어나고 있다. 보통 북부가 더 공업화와 산업화가 남부에 비하여 훨씬 더 잘되어 있고 소득 수준도 높은데, 북부에서 가장 부유한 지방인 알토아디제 티롤 지역은 이탈리아의 1인당 GDP의 152%를 평균적으로 벌어들이는 반면, 가장 빈곤한 지방인 칼라브리아는 61%밖에 벌어들이지 못한다. 이탈리아의 실업률은 11.1%로 유로존 평균보다 약간 더 높은데, 이마저도 북부에서는 6.6%로 낮은 반면 남부에서는 19.2%로 상당히 높다. 2018년 3월에 청년실업률은 31.7%로 매우 높은 수치를 보였고, 유럽 전역과 비교하였을 때에도 극히 위험한 수치이다.
농업.
2010년 경, 이탈리아에서는 160만 여 개의 농장이 있었고, 1270만 헥타르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 중 63%가 이탈리아 남부 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이 농장들 중 99%에 달하는 농장들이 모두 가족들이 운영하는 소규모 농장들이며, 평균적으로 그 크기도 작아 보통 8헥타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임업을 제외하고 농업에 쓰이는 토지 비율에서 밀이 31%를 차지하며, 올리브 나무가 8.2%를 차지하며, 포도밭이 5.4% 등이 있다. 나머지는 귤, 사료용 작물 등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탈리아는 세계에서 제일가는 포도주 제조국으로, 그 외에도 올리브유, 사과, 포도, 올리브, 오렌지, 레몬, 배, 헤이즐넛, 복숭아, 체리, 복숭아, 딸기, 키위 등 여러 농산물들을 주력으로 하여 수출한다. 그 외에도 토마토와 같은 채소들도 주로 재배하는 편이다. 가장 유명한 와인은 토스카나 키안티, 피에몬테 와인 등이 있다. 이탈리아는 이같은 고급 포도주 외에도 수많은 제품들을 생산하고 있는데, 특히 지역별로 치즈들이 따로따로 생산되며, 이 치즈들마다 모두 향과 맛이 독특하여 인기가 많다. 이같은 제품들은 주로 유럽연합의 엄격한 심사와 품질 인증관리제도 하에 생산되어 과도한 대량 생산을 막고 품질 저하를 예방하고자 하고 있다.
중소기업.
이탈리아의 경제는 다양화된 산업 경제로 프랑스, 영국과 총생산과 1인당 생산이 유사하다. 지역에 따른 경제 격차가 큰 편으로, 산업화되고 사유 기업 중심인 북부와 농업 중심으로 발전이 덜 되고 실업률이 20%에 달하는 남부 사이의 불균형을 아직까지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서유럽의 인근 나라들과 비교할 때 중소 기업의 수가 많다. 산업에 필요한 대부분의 원자재와 에너지 필요량의 75%는 수입에 의존한다. 지난 10년간 이탈리아는 유럽경제통화연맹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긴축된 재정 정책을 편 결과 낮은 이율과 물가 상승률에 힘입어 1999년 유로화의 첫 도입 당시부터 이탈리아 역시 유로를 도입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경제 실적은 다른 EU 나라들에 비해 뒤떨어진다. 현 정부는 다수의 단기 개혁을 시도해 경쟁력을 높이고 장기 성장을 도모하려 하나 많은 경제학자들이 지지하는 구조적 개혁, 즉 높은 세율을 낮추는 것, 경직된 노동 시장과 높은 비용이 드는 연금 제도를 재정비하는 것은 밀고 나가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불경기와 노동 조합들의 반대 때문이다.
협동조합.
이탈리아 볼로냐와 에밀리아로마냐주(州)는 협동조합이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기독공보에 따르면, 이탈리아에서 제일 발전이 더딘 도시였던 볼로냐와 에밀리아로마냐주(州)는 협동조합 운동으로써 주민들이 높은 소득을 얻고 있으며, 실업률이 낮다. 2013년 기준으로 에밀리아로마냐주(州)와 볼로냐의 협동조합은 8천여개, 4백여개이다. 노동자 임금이 에밀리아로마냐 주는 9만 유로(원화로 약 6천만 원)이고, 볼로냐는 이탈리아 평균 임금의 2배에 가깝다. 실업률은 볼로냐는 3.1%인데, 사회복지학자들은 실업률이 2퍼센트 내외라면 완전고용이라고 생각하므로 협동조합이 발전된 지역은 고용이 매우 안정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다.<rf></ref>
관광업.
이탈리아는 세계에서 5번째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국가이며, 2016년에만 5,230만 명의 관광객들이 이탈리아를 찾았다. 관광업과 관계 산업이 GDP에 미친 영향은 무려 10.1%의 비중을 차지하며, 2014년에는 이탈리아 전체 인구의 4.8%가 관광업에 종사하며 1,082,000명이 관광업에 직업을 두고 있다. 이탈리아가 이처럼 관광업이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대 로마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문화재가 많고 자연 풍광이 아름답기 때문인데, 이탈리아는 55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양이다. 이탈리아의 수도인 로마는 유럽에서 3번째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도시이며, 세계적으로는 12번째이다. 로마는 2017년에 약 940만 명의 관광객들을 맞았고, 밀라노는 680만 명의 관광객들을 맞으며 세계에서 27번째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도시로 떠올랐다. 그 외에 베네치아와 피렌체도 세계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명소들 100순위 안에 항상 꼽히는 명소들 중 하나이다.
인구.
이탈리아는 언어와 종교 면에서는 동질적인데 비해 문화·경제·정치 면에서는 다양하다. 이탈리아의 인구밀도는 1km2당 196명으로 면적 10,000km2 이상 국가 중 유럽에서 다섯 번째로 높다. 소수집단도 있는데 가장 큰 소수집단은 남티롤의 독일어 사용 인구(1991년 통계: 28만 7503명이 독일어 사용, 11만 6914명이 이탈리아어 사용)와 트리에스테와 그 근교의 슬로베니아어 사용 인구이다. 여성 1인당 합계출산율은 2012년 현재 (세계은행 추정) 1.40명이다. 합계 출산율은 1995년 1.18로 바닥을 친 이래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2020년 기준, 인구는 약 6100만 명이다.
2020년 초, 이탈리아에는 총 60,317,116명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1제곱 킬로미터 당 202명이 살고 있는 인구 밀도를 가지고 있으며, 서유럽 국가들 대부분보다 더 높은 인구 밀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허나 인구 분포는 전국적으로 매우 불균형하며, 가장 인구가 심하게 몰려 있는 곳은 포 계곡과 로마와 나폴리의 도심지이다. 그를 제외한 알프스와 아펜니노 산맥 부근의 고지와 산맥, 사르데냐 섬 등은 거의 사람들이 살지 않는다. 이탈리아의 인구는 20세기 동안 거의 2배로 늘어났는데, 1950년대와 60년대에 대대적인 경제 복구가 일어나며 남부의 낙후지대에서 사람들이 북부의 공업지대로 대대적으로 이주하면서 성장이 매우 불균형하게 일어났다. 1970년대까지만 하여도 이탈리아는 높은 결혼율과 출산율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 시기 이후 급격히 고령화를 시작하였다. 2010년에 이르자 이탈리아 인구의 5분의 1이 65세 이상이었으며, 현재 이탈리아는 세계에서 5번째로 고령화된 사회로 중간 연령이 45.8세에 달한다. 다만 이탈리아는 최근들에서는 성장률이 조금씩 오르고 있으며, 여성 1인당 평생 낳는 아기의 수도 1995년의 1.18명에서 2008년에는 1.41명까지 늘었다. 다만 여전히 인구를 유지하기 위한 아기 수인 2.1명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하며, 1883년에 최고치를 찍었던 5.06명에 비하면 매우 낮은 수치이다. 다만 전체 출산율은 2030년 경이 되면 1.6명에서 1.8명까지 상승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된다.
19세기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이탈리아에서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빠져나갔다. 1898년부터 1914에는 이런 디아스포라 현상이 극에 달했는데, 매년 75만 명에 달하는 국민들이 이탈리아를 탈출하여 외국으로 이민을 간 것이다. 이로 인하여 2,500만 명의 사람들이 국외로 빠져나갔으며, 동시대 최대의 이민 현상으로 기록되었다. 결과적으로 현재에 410만 명에 달하는 이탈리아인들이 해외에 살고 있으며,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등에 대략 6천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탈리아계 조상을 가지고 있다.
민족.
이탈리아는 라틴계인 이탈리아인이 주류를 형성하는 국가다. 하지만 북부, 중부, 남부에 따라 인종이 달라지는 편이다. 북부에 갈수록 장신, 금발, 푸른 눈동자의 인종이 많이 보이고, 남부로 갈수록 단신, 짙은 머리털에 검은 눈동자의 인종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남부에서 북부로 일거리를 찾으러 많은 이주민들이 늘어나 모두 섞인 편이다. 또 소수 민족으로 유대인과 국경지역에 프랑스인, 오스트리아인, 슬로베니아인이 살고 있다.
문화.
이탈리아는 1861년의 통일 이전까지 정치적, 지리적으로 나뉘어 있었고, 이로인하여 지역적으로 매우 다른 문화들이 발전하였다. 이탈리아는 서구 문화의 역사적인 중심이었으며, 아직도 예술과 문화의 본고장으로 인정받는다. 중세와 르네상스 기간동안 수많은 귀족 가문들이 최고의 건축가, 학자와 예술가들을 이탈리아로 끌여들였고, 이들의 후원에 힘입어 이탈리아에서는 당시 유럽 최고의 걸작들이 탄생하였다. 이 가문들은 서로 정치적, 사회적으로는 고립되어있었으나, 문화적, 예술적으로는 서로 끊임없이 경쟁하며 교류하였기에 이탈리아에서는 아름다운 문화의 꽃이 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는 55개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워낙 근대에 국민들이 해외로 많이 이민을 갔기에 그 영향으로 세계적으로도 이탈리아 문화들이 잘 보급되어 있다. 이탈리아는 10만 개가 넘는 문화유적(박물관, 궁전, 건물, 조각상, 교회, 빌라, 분수, 유적) 등을 보유하고 있으며, 전세계 예술품의 절반이 이탈리아에 있다고 추정할 정도로 압도적인 문화유적 수를 자랑한다.
건축.
이탈리아 건축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유명하다. 고대 로마 시기에는 아치, 돔 등을 이용하여 건물을 지었고, 이 건축양식이 14세기 후반과 16세기 사이의 르네상스 건축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에도 그리스로마 양식은 신고전주의 건물들에 영향을 주었으며, 신고전주의는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등에서 17세기 후반과 20세기에 유행하여 귀족들과 상류층들이 주로 이 양식으로 자신들의 건물들을 짓고는 하였다. 이탈리아 초기에는 그리스와 에트루리아인들의 건축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이 것들이 이후 로마 양식으로 흡수되었다. 이후 고전 로마가 끝난 이후에는 르네상스에 또다시 고전 양식이 부활하고 르네상스 양식이 바로크 양식으로 바뀌었다. 기독교의 회당이자 중세 초기에 엄청나게 지어졌던 바실리카도 로마에서 처음으로 유래되었다. 바실리카는 주로 길고 직육면체로 지어졌으며, 거의 고대 로마 시대의 건물들과 비슷하게 지어져 모자이크와 장식이 풍부하다. 초기 기독교 미술과 건축도 자신들이 이교도로 불렀던 고대 로마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이 때문에 조각상, 모자이크, 그림들도 로마식으로 만들어 장식하였다. 이탈리아에서 처음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들은 800년대에 등장하였다. 한편 동쪽에서 전파된 비잔틴 양식도 로마에서 유행하였는데, 동로마 제국에서는 당시 로마 제국의 발달된 건축 기술을 보전하고 있었기에, 고대의 기술들마저 잃어버린 중세 유럽에서는 비잔틴 양식이 훨씬 진보적인 공법이었던 것이다. 이 영향을 많이 받은 건축물에는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대성당이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800년대부터 1100년대까지 유행했으며, 이탈리아 건축에서 가장 화려하고 창조적인 건축양식들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유명한 건물로는 피사의 사탑 등 피사 대성당 등이 있다. 로마에서 물려받은 아치, 창문, 기둥들을 주로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이탈리아 로마네스크 양식의 주 특성은 바로 둥근 천장인데, 로마네스크 양식은 서구 건축에서 처음으로 둥근 천장이 사용된 예였다. 건축기술은 르네상스 들어 더욱 발전하였는데,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 대성당의 거대한 돔을 지어 당시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엄청난 규모의 돔을 짓는 것에 성공하기도 하였다. 또한 성 베드로 대성당도 이때 지어졌는데, 16세기 도나토 브라만테가 설계하였다. 안드레아 팔라디오는 빌라와 궁전들을 설계하여 전 유럽에 영향을 끼쳤다.
바로크 시대인 17세기 이탈리아에서는 여러 명건축가들이 탄생하였다. 특히 18세기 후반에 지어진 사보이가의 저택 스투피니지 궁전은 바로크 후반과 로코코 양식의 걸작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 이탈리아의 건축은 신고전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이로 인하여 이때 지어진 건물들 대부분이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건물들과 거의 유사한 생김새를 하고 있다. 파시스트가 호령하던 20세기에는 ‘노베첸토 운동’이 일어났는데,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자는 예술 움직임이었다.
그림.
이탈리아 회화는 서양 예술의 토대가 될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 로마 예술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으며, 사실상 고대 그리스 회화의 후계로 평가받았다. 로마인들은 자신 나름대로의 예술들을 개척하여 나갔으나, 현재는 남아있는 것들이 많이 없다. 현재 전해지는 로마 그림들은 캄파니아 등에서 발굴된 빌라 등의 유적에서 찾은 벽화들 밖에 없다. 판화는 로마네스크 기간 동안 동로마 제국의 영향을 받아 점차 유행을 타기 시작하였다. 13세기 중반, 중세 예술과 고딕 예술은 점차 대상을 더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하였으며, 부피와 입체를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치마부에와 그의 제자 조토 디 본도네가 당시 예술계를 이끌었다. 조토 디 본도네의 시대 이후, 이탈리아의 그림들은 이전보다 훨씬 자유로워졌고, 탈형식화되었다. 이 때문에 치마부에와 조토 디 본도네는 서구 중세 예술의 최고 거장들로 인정받기도 한다.
14세기에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17세기 중반까지 지속된 이탈리아 르네상스 기간에, 이탈리아 회화는 황금기를 맞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조반니 벨리니, 파올로 우첼로, 프라 안젤리코, 마사초,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안드레아 만테냐, 프라 필리포 리피, 조르조네, 틴토레토, 티치아노 베첼리오 등의 명화가들이 수도 없이 등장하였고, 인간 비례와 비율을 활용하여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그림들을 남겼다. 이들은 수많은 예술 기법과 공법들을 새롭게 만들기도 하였다. 미켈란젤로는 특히 1500년에서 1520년까지 활동하였으며, 다비드 상, 피에타 상, 모세 상같은 걸작들을 후세에 남겼다. 르네상스에 활동한 또다른 조각가들에는 도나텔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안드레아 델 베로치오, 로렌조 지베르티 등이 있다. 15세기와 16세기에 르네상스가 전성기를 찍었을 때에 르네상스 미술의 방식이나 형식을 계승하되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에 따라 예술작품을 구현한 예술 사조인 매너리즘이 등장하였으며, 작가들은 의심, 개인의 고뇌 등을 작품 속에 그대로 담아넣어 표현하였다. 이전 작가들의 대표 격인 라파엘로가 숭고하고, 흠없는 처녀들을 그렸다면 이후의 작가들은 당황하고 분노한 표정들을 그림 속에 그대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17세기 바로크 시대에는 카라바조, 마티아 프레티, 카를로 사라체니, 바르톨로메오 만프레디 등의 화가들이 활동하였다. 18세기에는 프랑스 로코코 양식의 영향을 받았으며,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와 카날레토 등의 예술가들이 활동하였다. 이탈리아의 신고전주의 양식에서는 안토니오 카노바 등이 활동하였다.
19세기, 낭만주의가 득세하던 이탈리아에서는 프란체스코 하예즈, 주세페 베주올리, 프란체스코 포데스티 등이 활동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이후 인상주의 화풍이 들여왔고, 조반니 파토리, 조반니 볼디니 등이 이끌었다. 사실주의 화가로는 주세페 펠리자 다 볼페도 등이 있다. 20세기에는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미래주의가 유행하였으며, 움베르토 보치오니와 자코모 발라 등이 주로 활동하였다. 미래주의는 이후 브루노 카루소나 레나토 구토소 같은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문학.
라틴 문학은 기원전 240년부터 시작되었는데, 특히 막 흥하기 시작한 로마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라틴 문학은 그 이후부터 로마 제국의 성장과 함께 전 세게적으로 퍼져나갔으며, 아직까지도 세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때 수많은 명연설가들과 철학자, 시인과 역사학자들이 등장하였는데, 예를 들어 대플리니우스, 소플리니우스,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프로페르티우스, 오비디우스, 리비우스 등이 대표적이다. 로마인들은 구전 전통, 시, 연극과 비극으로도 매우 유명하였는데, 13세기에 활동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첫 이탈리아 시인으로 평가받으며, 종교 작품인 ‘태양의 찬가’를 남기며 명성을 날렸다.
이탈리아 문학은 시칠리아에서도 발전하였다. 13세기 절반에서 시칠리아 왕국을 다스렸던 프레데릭 2세의 궁정에서는 구전으로만 내려오던 찬가들과 시들이 훨씬 정제된 형태로 기록에 적혀졌다. 이때 적혀진 시들 중에서 소네트 양식의 선구자인 자코모 다 렌티니 등의 시들이 유명하다. 13세기에는 귀도 귀니젤리가 등장하였고, 전통적인 사랑시에다가 철학적인 사조를 불어놓었다. 이때부터 사랑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등장하였으며, 이후의 작가들은 사랑을 부드럽고 명료하게 표현하게 되었다. 이의 영향을 받은 시인들로는 귀도 카발칸티와 단테 알레기에리 등이 있다. 단테 알레기에리는 현대 이탈리아어의 기초를 놓았으며, 중세 유럽 문학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신곡을 남기며 이름을 크게 떨쳤다. 14세기에 등장한 작가들 중에는 페트라치와 지오반니 보카치오 등이 있는데, 고전 작품들을 재분석하고 모방하며 자신들만의 문학풍으로 재탄생시켰다. 페트라치가 남긴 시 모음집은 이후 수백년 동안 후대 작가들의 모델로 인정받았으며, 보카치오가 지은 데카메론과 같은 유명한 작품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기에는 수많은 문학가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키아벨리가 집필한 군주론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학, 현대 철학 저술이며, 추상적인 개념들보다 ‘현실’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사회 안정에 대한 이론을 주장하였다. 이 시기에 나온 명작들 중에는 루도비코 아리오스토의 올란도 퓨리오소, 마테오 마리아 보이아르도의 미완성 로맨스작 올란도 인나모라토 등이 있는데, 기사시들 중에서는 최고작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가 작성한 궁정론은 완벽한 신사숙녀들의 예의범절들을 집대성해 놓았으며,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다. 지오반니 프란체스코 스트라파롤라와 지암바티스타 바실레는 유럽에서 첫 동화집을 발표하였다. 17세기 초에는 잠바스티나 마리노가 쓴 신화시 르‘아도네가 출판되었다. 이후 바로크 시대에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과학적 발견이 터져나왔으며, 완벽한 철학자-사제가 통치하는 이상국가를 묘사한 ’태양의 도시‘가 발표되었다. 17세기 말에는 여러 사람들이 지나치게 형식적으로 변한 문학계를 더 간단하고 명료하게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18세기에는 카를로 골도니가 여러 작품들을 발표하며 당시의 중산층과 당시 현실을 묘사하기 시작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외세에 맞서 자유와 정치적 통일을 추구하는 리소르지멘토 움직임이 본격화되며, 문학에도 낭만주의적인 사조가 불어닥쳤다. 19세기 초 이탈리아 작가들은 낭만적인 풍의 작품들을 쏟아냈고, 특히 비토리오 알피에리, 우고 포스콜로, 자코모 레오파르디 등의 작품들이 유행하였다. 이탈리아 낭만주의의 상징 격인 알레산드로 만초니는 이탈리아 통일과 애국주의의 상징처럼 떠올랐고, 그의 소설인 ‘약혼자들’은 기독교의 정의와 평등이라는 가치에 경의를 표한 내용의 첫 이탈리아 역사 소설이었으며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유명한 이탈리아 소설로 칭송받았다. 19세기 말, 사실적인 문학풍이 유행하였으며, 사이언스 픽션 계열의 소설들도 유행하였다. 1883년에 카를로 콜로디는 피노키오의 모험을 출간하였으며, 이탈리아 작가가 쓴 최고 아동문학이라는 명예를 거머쥐었다. 20세기 초에는 미래주의 사조가 유행하였는데, 이 시기의 문학작품들은 미래의 빠른 역동성, 속도, 그리고 기계들의 힘을 찬미하는 내용들이 많다. 현대 문학의 경우, 1980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움베르토 에코, 그리고 풍자가이자 극작가인 다리오 포가 1997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음악.
이탈리아의 음악은 가히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 시절부터 서양의 음악 중심지들 중 하나였다. 피아노와 바이올린과 같은 악기들이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졌으며, 교향곡, 소나타와 같은 음악 형식들도 16세기와 17세기 이탈리아에서 처음 원형이 만들어졌다. 이탈리아의 가장 유명한 작곡가들에는 르네상스 시기의 작곡가인 조반니 피에를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카를로 제수알도 등이 있으며, 바로크 시기에는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아르칸젤로 코렐리, 비발디 같은 명작곡가들이 활발히 활동하였다. 이후 고전기에는 조반니 파이시엘로, 파가니니 등이 활동하였으며, 낭만주의 시대에는 베르디와 푸치니 등이 활동하였다. 현대에 들어서는 루치아노 베리오, 루이지 노노 등의 작곡가들이 전자 음악을 발전시켰다. 이와 동시에 고전 음악들도 여전히 강세를 보이고 있는데, 수많은 오페라 하우스들이 아직도 성업 중이며 전세계적인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피아니스트 마우리치오 폴리니 등이 이탈리아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오페라의 탄생지로도 유명하다. 이탈리아 오페라는 17세기 초 즈음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베네치아나 만투아 같은 도시들에서 처음 공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9세기와 20세기에 로시니, 벨리니, 도니제티, 베르디, 푸치니 같은 작곡가들이 나오며 전국적인 인기와 명성을 얻게 되었고, 이에 힘입어 전유럽으로 뻗어나간 것이다. 밀라노에 위치한 ‘라 스칼라’ 오페라 하우스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격이 높은 오페라 하우스로 유명하기도 하다.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오페라 가수에는 엔리코 카루소와 알레산드로 본치 등이 있다.
1920년대에는 재즈가 이탈리아로 유입되었는데, 당시 이탈리아를 통치하던 파시스트들의 반외세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국민 음악들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현재 이탈리아의 재즈 음악 중심지에는 밀라노, 로마, 시칠리아 등이 있다. 이후 1970년대에 이탈리아는 락 음악과 팝 음악의 중심지로 떠올랐으며, PFM, 고블린, 푸, 방코 델 무투오 소코르소, 레 오르메 등의 밴드들이 활동하였다. 동시기에 극장들도 다양화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영화 산업이 급성장하자 엔니오 모리꼬네, 아르만도 트로바졸리, 피에로 피치오니, 피에로 우밀리아니 등의 영화 음악 작곡가들도 탄생하였다. 1980년대 초에는 힙합 문화가 떠올랐으며, 불의 랩소디, 엘븐킹, 포가튼 툼, 플래시갓 아포칼립스 등 여러 헤비메탈 락밴드들이 출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디스코 음악과 전자 음악도 크게 유행하였는데, 세계 전자 댄스의 선구적인 국가들 중 하나라는 평을 듣는다. 1988년부터는 전자 음악이 이탈로 하우스와 같이 전통 춤과 음악에 동화되어 여러 다른 장르들이 출현하기도 하였다. 또한 2021년 열린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이탈리아의 록 밴드 모네스킨이 우승하기도 했다.
패션.
이탈리아는 세계 패션의 수도라고 불릴 정도로 전세계적인 패션을 선도하고 있는 국가이다. 밀라노, 피렌체, 로마 등의 대도시들은 이탈리아의 패션 수도라고 불리며, 2013년에 작성된 글로벌 패션 수도 랭킹에 의하면 로마는 세계 6위를, 밀라노는 세계 12위를 각각 기록하였다. 구찌, 아르마니, 베르사체, 프라다, 발렌티노, 돌체앤가바나, 미쏘니, 막스마라, 트루사디, 펜디, 모스키노 등의 명품 브랜드들은 세계 각국으로 수출되며 최고의 명품 브랜드로의 명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이탈리아에서 발행되는 패션 잡지인 보그 이탈리아(Vogue Italia)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패션 잡지로 평가받는다.
이탈리아는 패션 뿐만 아니라 디자인 면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데, 특히 건축 디자인, 산업 디자인, 도시 설계 등에 강세를 보이고 있다. 이탈리아는 지오 폰테, 에토레 소트사스 같은 가구 디자이너들을 배출하였으며, 이탈리아 단어인 ‘벨 디세그노’나 ‘리니아 이탈리아나’는 가구 디자인의 용어로 아예 공식적으로 통용될 정도이다. 이탈리아는 이뿐만 아니라 전자 제품들도 함께 설계하며, 세탁기나 냉장고 등도 디자인하여 수출하고는 한다. 에토레 소트사스는 밥 딜런의 곡에서 영감을 받아 포스트모던 느낌의 책장을 만들어 유명해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밀라노와 투린, 이 두 도시가 각각 이탈리아의 건축 디자인과 산업 디자인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밀라노에는 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디자인 기업인 피에라 밀라노가 입주해있기도 하다. 밀라노에서는 이외에도 ‘퓨오리 살론’이나 ‘살로네 델 모바일’ 같은 디자인 행사들을 개최하기도 하며, 브루노 무나리, 루치오 폰타나, 엔리코 카스텔라니, 피에로 만조니 같은 디자이너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음식.
이탈리아 요리는 기원전 4세기부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며, 이후 에트루리아, 고대 그리스, 로마, 동로마 제국, 유대인들의 요리의 영향을 받으며 급격히 발전하였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 감자, 토마토, 고추, 옥수수 등이 들어왔고, 18세기 들어서 이 식재료들이 대량으로 수입되기 시작하며 이탈리아 요리들도 크게 바뀌게 되었다. 이탈리아 요리의 특징에는 지역적 특색, 맛의 풍부함 등이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들 중 하나로 전세계에 뻗어있다.
이탈리아 요리는 지중해성 식재료들을 기본으로 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이탈리아 요리인 스파게티처럼 파스타 종류의 요리가 많으며, 생선, 과일, 채소 등을 많이 사용한다. 또한 요리들의 구성 재료들이 대단히 단순한 걸로도 유명한데, 상당수의 요리들이 오직 4개에서 8개 정도의 재료들로 만들어진다. 이탈리아 요리의 조리법 등은 전문 셰프 등이 전수해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이 가정 내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경우가 많다. 이탈리아 요리가 해외에서도 성공한 이유들 중 하나는, 전통적인 재료들을 효과적으로 잘 사용했다는 것인데, 주로 치즈, 와인 등을 사용하며 대다수의 레스토랑에서는 EU 법에 따라 오직 정부에서 지정한 농장이나 사육장에서 생산한 식재료들만을 취급한다. 이탈리아 디저트도 매우 유명한데, 피스타치오, 아몬드 등을 주로 사용하며 리코타 치즈, 마스카포네 치즈와 같은 달콤한 치즈와 함께 초콜릿, 바닐라, 계피 같은 이색적인 향도 잘 쓴다. 유명한 이탈리아 디저트 종류에는 젤라토, 티라미수, 카사타 등이 있다.
스포츠.
이탈리아에서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는 축구이다.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팀들 중 하나로, 1934년, 1938년, 1982년, 2006년 FIFA 월드컵에서 우승하기도 하였다. 이탈리아 팀들은 48개의 유럽 주요 경기에서 우승을 거머쥐었으며, 이탈리아를 유럽에서 2번째로 승리를 많이 거둔 국가로 만들었다. 이탈리아의 최고 축구 리그는 세리에 A라고 불리며, 전세계에 수백만 명의 팬들을 거느리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스포츠로는 그 외에도 농구, 배구, 럭비 등이 있다. 이탈리아의 남자 배구 국가대표팀과 여자 배구 국가대표팀은 세계 정상급으로 평가받는다. 이탈리아 농구 국가 대표팀은 유로바스켓 1983년과 1999년에 승리를 거두었으며, 2004년 올림픽에서는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레가 바스켓 세리에 A는 유럽에서 가장 치열한 경기 리그로 손꼽히고는 한다. 럭비는 특히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서 대중적이며, 이탈리아 럭비 국가대표팀은 6개국의 국가대표팀들과 경쟁하며 럭비 월드컵에도 개근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세계 럭비의 최강국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남자 배구 국가대표팀은 1990년, 1994년, 1998년에 월드 챔피언십에서 우승하였으며, 1996년, 2004년, 2016년의 올림픽에서도 은메달을 땄다.
이탈리아는 전통적으로도 개인 경기가 유명한데, 자전거 레이싱이 매우 대중들에게 잘 보급되어 있으며, 벨기에를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나라들보다도 자전거 챔피언십에서 메달을 많이 따냈다. ‘지로 디탈리아‘는 매년 5월에 열리는 경기로, 투어 데 프랑스와 부엘타 아 에스파냐와 함께 3대 그랜드 투어들 중 하나로 손꼽힌다. 알프스 스키도 매우 유명하며, 이탈리아는 북부의 알프스 산맥을 활용하여 스키 리조트 등을 지어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테니스도 유명한데,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이탈리아 국민이 4번째로 많이 즐기는 스포츠가 테니스라고 한다. 1930년에 만들어진 로마 마스터즈는 세계에서 가장 명예로운 테니스 경기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탈리아는 항상 올림픽에서도 괜찮은 성적을 보여왔는데, 1회 올림픽에도 참가하였으며, 하계 올림픽에서 지금까지 522개의 메달들을 따냈으며 동계 올림픽에서는 지금까지 106개의 메달을 따내 총 628개, 그중 235개의 금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이룩했다. 현재 이탈리아는 세계에서 5번째로 메달을 많이 따낸 국가이며, 1956년 동계 올림픽, 2006년 동계 올림픽, 1960년 하계 올림픽을 열었으며 앞으로 2026년 동계 올림픽을 개최한다.
이탈리아는 문화 예술과 수많은 기념물들로 잘 알려져 있다. 피사의 사탑과 로마의 콜로세움 등의 역사적 건축물과 이탈리아 음식(피자, 파스타 등), 포도주, 생활 양식, 우아함, 디자인, 영화, 연극, 문학, 시, 미술, 음악(특히 오페라), 관광 등은 이탈리아를 세계적 문화국가로 만들었다.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도시들이다.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는 14세기와 15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페트라르카, 토르콰토 타소, 루도비코 아리오스토의 시와 조반니 보카치오, 니콜로 마키아벨리,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산문은 서양 문화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산티, 산드로 보티첼리, 프라 안젤리코, 미켈란젤로 등의 거장들을 배출한 회화와 조각, 건축 부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현대 미술가로는 조각가 톰마소 제라치가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몬테베르디, 팔레스트리나 비발디 등은 한 시대를 풍미했고 19세기에는 조아키노 로시니, 주세페 베르디, 자코모 푸치니 등의 작곡가들에 의해 이탈리아의 낭만주의 오페라가 전성기를 구가했다. 현대의 이탈리아 미술가들과 작가, 영화감독, 건축가, 작곡가, 디자이너 등도 오늘날 서양 문화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스포츠 종목은 단연 축구로 이탈리아인들의 축구에 대한 광적인 열정은 잘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 전체 인구는 5,700만 명에 불과하지만 축구협회에 가입된 클럽은 대개 2만개 가량이 되고 선수는 무려 11만 명에 이른다. 이탈리아는 영국으로부터 대략 19세기 말쯤 축구를 받아들였는데 영국과 독일 스페인과 더불어 유럽 4대 축구 강국으로 불린다. 1934년, 1938년, 1982년, 그리고 2006년 네 차례에 걸쳐 FIFA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또한 현재까지 굵직한 국제대회에서 단 한 번도 독일에게 패한 적이 없다. 이 나라는 월드컵에서 남·북한에게 모두 패배한 적이 있었다.
전국에서 뽑힌 18개 팀이 맞붙은 세리에(Serie) A 경기가 열리는 날은 이탈리아 전체가 용광로처럼 들 끓게 된다. 이탈리아의 축구는 팬들에게 짜릿한 감동과 흥분, 즉 창조적인 볼거리를 제공하고, 클럽과 시, 정부, 기업에게 막대한 재원을 안겨준다. 이탈리아의 진정 굴뚝 없는 산업은 축구로서 국민적인 비즈니스로 정착했다.
축구 이외에 전국적인 인기를 모으는 스포츠로는 자전거 경주가 있다. 유명한 자전거 경주인 '지로 디탈리아 (Giro d'Italia)' 나 '투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에서 이탈리아 선수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면서 따라 달리곤 한다.
이탈리아는 체육수업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이탈리아는 수영이나 펜싱은 물론 조정과 사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챔피언과 올림픽 챔피언을 적지 않게 배출했으며, 선수들 모두 스포츠 무대의 중심을 차지하기 위하여 분투하고 있다. 이밖에 농구와 배구, 핸드볼도 인기 있으며 이탈리아 북부와 지방 항구도시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영향으로 야구가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이다. 이탈리아의 성악가 체칠리아 바르톨리, 안드레아 보첼리, 루치아노 파바로티, 레나타 테발디 등이 이탈리아를 빛내고 있다.
교육.
이탈리아에서 교육은 자유이나, 6세에서 16세까지는 의무교육이다. 이탈리아의 교육 체계는 총 5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장 하위 단계가 3년의 유치원, 그다음이 초등학교로 5년제, 그 다음이 중학교로 3년제이다. 학년은 9월부터 6월까지로, 총 3학기제이다. 중학교 과정을 이수한 이후에는 고등학교로 진학하는데, 현재 5년제의 고등학교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첫 2년(Biennio)은 대부분 학교의 교육과정이 같으며 의무교육이다. 이후 3년(Triennio)은 본인이 원하는 고등교육기관으로 선택해 진학한다.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을 경우에는 대학교로 진학하여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초등학교 과정동안, 학생들은 이탈리아어, 영어, 수학, 자연과학, 역사, 지리학, 사회학, 체육과 예술 등 국민으로서의 기본적 소양을 배운다. 고등학교는 총 5년 동안 지속된다. 2012년에 이탈리아의 고등학생들은 OECD의 평균보다 약간 낮은 수치를 기록하였다. 다만 과학과 수학 분야에서는 2003년 이래 꾸준히 증가해오고 있는 추세이다. 다만 이탈리아의 남북 격차가 교육 분야도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부유한 북부 지역의 학교들이 훨씬 교육 상태와 학업 성취도가 높으며, 몇몇 과목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남부 지역의 학교들은 이보다 훨씬 뒤떨어지는 결과를 보이고 있다. 이탈리아의 대학들은 주로 공공대학, 사립대학 등으로 나뉜다. 2019년 기준, 세계 500대 대학에서 이탈리아의 대학 33개가 들어갔고, 유럽에서는 영국과 독일 다음으로 3번째로 많은 수였다. 1088년에 창설된 볼로냐 대학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며, 이탈리아와 유럽 최고 명문대학들 중 하나이다. 그 외에도 밀라노 대학교, 보코니 대학교, 사크로 쿠오레 가톨릭 대학교, 투린 폴리텍 대학, 로마 라 사피엔차 대학들이 쟁쟁한 대학들로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고 있다.
종교.
옛 로마 제국 때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가톨릭이 국교로 정해지게 된 까닭에 수도인 로마 시를 중심으로 서방교회가 오랜 역사를 거치는 동안 압도적인 강세에 있으며, 이탈리아의 역사 자체도 가톨릭과 거의 맥을 같이 해왔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탈리아 통일 이후에도 1929년부터 1978년까지 가톨릭이 공식적인 국교였으며, 현재에도 국민 상당수가 가톨릭 신자이다. 현재는 국교가 없고, 신앙의 자유를 존중하므로 이외의 종교를 믿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개신교도 존재한다. 또한 이민자들에 의하여 이슬람교, 힌두교의 종교도 존재한다.
2017년 기준으로 이탈리아인들의 75%가 자신이 천주교인이라고 답했다. 다만 이탈리아는 1985년 이후 가톨릭을 공식 국교에서 해제하였다. 가톨릭의 최고 중추인 교황좌와 교황령이 바로 로마에 자리하고 있으며, 교황은 바티칸의 최고 수반으로 이탈리아와는 별개의 주권 국가를 다스리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성좌 자체를 ‘바티칸’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정확하게 성좌는 1929년에서야 건국된 바티칸 시국과는 다른 개념이다. 2011년에 동방 정교와 같은 기독교 소수 분파들이 대략 전체 인구의 5%, 150만 명에 달한다고 전했다. 여호와의 증인이 대략 251,192명이라고 한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들 중 하나가 바로 유대교인데, 유대교는 고대 로마 이래 끈질기게 로마에서 명맥을 유지해왔다. 이탈리아는 스페인 등 유럽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을 상대적으로 관용적으로 받아들였는데, 허나 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 중에 이탈리아 유대인의 20%를 죽이는 대참사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이때 수많은 유대인들이 이탈리아에서 도망쳐 아메리카 등으로 도망쳤기에, 이탈리아에는 28,400명의 유대인들 밖에 남지 않았다. 점차 종교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무신론이 득세하며 기독교 외의 종교들이 점차 세를 얻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인도에서 전래된 시크교 신자가 7만 명 정도 있으며, 그 외의 인도계 종교를 믿는 신도들이 80만 명에 달한다고 전한다. 이탈리아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며, 그 대신에 0.8% 정도의 종교세를 부과하여 오직 공식적으로 인정된 종교 단체들만이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한다. 개신교, 유대교, 불교, 힌두교 단체들은 기부와 세가 허가되나, 아직까지 무슬림 종교단체는 공인된 바가 없기에 공식적인 종교 활동을 하기에 제약이 있다. 종교에 돈을 기부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국가복지세를 대신 낸다. |
2871 | 347569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871 | 소련 |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또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 ), 약칭 소비에트 연방() 또는 소련(, )은 1922년 12월 30일부터 1991년 12월 26일까지 유라시아 북부에 존재하였던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이다.
1917년 3월에 일어난 러시아 2월 혁명은 러시아 제국을 멸망시켰다. 혁명 이후 수립된 러시아 임시 정부는 1917년 11월에 일어난 10월 혁명으로 붕괴하였고 볼셰비키가 러시아의 정권을 잡았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백군이 반란을 일으켜 러시아 내전이 일어났지만 볼셰비키는 내전에서 승리하였다.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자캅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통합되어 소련이 탄생하였다.
소련의 초대 지도자 레닌은 1924년 1월 21일에 사망하였고,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이 소련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소련은 스탈린의 경제 정책과 강력한 정치 억압을 통하여 거대한 규모의 산업화를 이루어 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이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전쟁인 대조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소련은 1945년 5월 9일 대조국전쟁에서 승리하였고 1945년 8월 대일전에 참전하였다. 소련은 대일전에서도 승리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이후 소련은 미국과 함께 세계의 주도권을 두고 다투는 초강대국이 되었다. 소련과 중앙 유럽 위성 국가들은 서방 세계에 맞서 냉전 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양측 동맹국 사이에서 갈등, 긴장, 경쟁 상태가 이어졌다. 1986년,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통해 소련의 경제를 중흥시키려 하였다. 1991년 8월 공산당 보수파가 일으킨 8월 쿠데타가 소련 국민들의 반발로 실패한 뒤 1991년 12월 25일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사임하면서 소련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국명과 상징.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즉, 소련이라는 명칭은 소비에트()에서 나왔는데, 이는 러시아어로 '평의회' 또는 '회의'를 뜻한다. 노동자, 농민, 병사의 공동체 조직인 소비에트는 직접민주제, 간접민주제를 거부하고, 인민민주 상향식 선거를 통해 일당제 체제 하에서 평의회 대의원을 선출한다. 작게는 각 생산수단 및 소공동체에서부터 크게는 모스크바의 최고 소비에트에 이르기까지 각 계층에 걸쳐 설치되어 있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러한 체제는 블라디미르 레닌 스스로가 자신의 저서인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파리 코뮌의 형태와 러시아 특유의 소비에트 제도를 본따서 만든 제도라고 밝혔다. 이러한 체제가 카를 마르크스가 최초로 주장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조금 다른 점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소비에트 제도의 경우 노동자, 농민, 혁명가들로 구성된 '혁명적 당'이 장기간 일당 독재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정치 제도가 하나의 '정통적 체제'로 대변된다는 점에 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원형은 '당'을 사회주의 혁명 이후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기에 생산 수단의 사회화를 진행하기 위한, 일종의 '민주적 폭력'을 실행하기 위한 체계화 된 조직으로 묘사했고, 이러한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정당 독재는 공산주의에 진입한 후 사라질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의 소비에트 제도는 공산당 일당 독재의 장기화했고 이러한 제도를 바탕으로 모든 공산주의적 정책을 실행했다. 학문적으로 보면 소련이 기준에 따라 민주주의에 들어갈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소련의 성립기와 말기를 제외하면 소련 공산당의 일당 독재 체제였다.
국기.
소련의 국기의 가로와 세로의 비율은 2:1이다. 바탕의 색은 혁명을 상징하는 붉은색이다. 금색의 낫과 망치는 각각 농민과 노동자를 상징하였고, 그 위의 붉은 별은 5대륙 노동자의 단결을 의미하였다. 1955년에는 낫과 망치의 모양이 기존의 크기보다 조금 작아졌으며, 1980년에는 국기 배경색이 진홍색에서 조금 연한 진홍색으로 변했다.
국장.
소련의 국장은 1923년에 처음 제정되었으며 소련이 해체된 1991년까지 사용되었다.
국장 가운데에는 지구를 배경으로 금색 낫과 망치가 그려져 있으며 지구 아래쪽에는 떠오르는 금색 태양이, 지구 위쪽에는 빨간색 별이 그려져 있다.
국장 양쪽을 밀 이삭이 감싸고 있으며 빨간색 리본이 이를 묶고 있다. 빨간색 리본에는 소련의 표어인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문구가 15개 공화국의 언어로 쓰여져 있다.
역사.
러시아 혁명.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의 차르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였고 러시아 제국은 멸망하였다. 혁명 이후 성립한 임시 정부는 점진적인 개혁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914년 7월 28일 시작된 제1차 세계 대전, 특히 독일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또한 어린이들이 먹을 우유가 모자랄 정도로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임시 정부에 휴전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17년 11월 7일에 레닌의 지도 하에 11월 혁명이 일어났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적위군을 조직해 러시아 제국의 수도인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장악하였다.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과 외국 열강이 볼셰비키를 공격해 러시아 내전이 일어나자 백군 및 외국 열강의 군대에 대항하려고 레프 트로츠키는 적위군을 적군으로 개편했다. 적군은 외국 열강과 백군을 쳐부수고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했으며, 모든 반대파를 숙청해 볼셰비키가 러시아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어 1922년 12월 30일의 소비에트 대회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 연합하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1924년 레닌의 사후 집권한 스탈린은 세계 혁명론을 주장하는 트로츠키와는 달리 일국사회주의를 내세우며 1928년에는 경제 발전 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또한 그 과정에서 레프 트로츠키를 외국으로 추방하였고, 이후 멕시코에서 트로츠키를 살해하는 등 반대파를 60~200만여명 숙청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았고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은 중앙유럽 일대를 독일인의 생활권( )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스탈린은 중앙유럽, 동유럽 국가를 공산화하여 위성 국가로 두고 싶어 했는데, 소련과 독일은 결국 중앙유럽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충돌하게 된다. 1939년 8월 소련과 나치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그 해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소련도 9월 17일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의 영토를 점령하였다. 이어 소련은 1940년에는 핀란드의 영토를 빼앗았고 발트 3국까지 탈환하였다. 그러나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 독일과 소련 사이에 전쟁(대조국전쟁)이 발발했다. 그 결과로써 소련은 연합국에 참전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독일군이 우세하여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했으나, 쿠르스크 전투 이후 소련군은 전세를 역전시켜 끝내 1945년 4월 30일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함락시키고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소련은 동부 독일을 점령했고 서부 독일을 점령한 프랑스, 영국, 미국과 독일을 분할하여 관리하기로 하였다. 1945년 8월 8일에는 얄타 회담의 협정에 근거해 소-일 불가침조약을 파기, 일본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여 일본과 전쟁을 해 승리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소련은 만주국도 점령했지만 중국공산당에게 주었다.또한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를 점령하였고, 사할린을 얻을 수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전후 소련 정부의 국가 지도 방향을 결정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소련 정부는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주아적 사상이라고 평가했던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강조하면서 소련인을 하나로 단결시켰다. 그리고 기존에 국교로서 인정하지 않았던 러시아 정교회의 지위를 회복시켰고, 소련군의 명칭을 붉은 군대에서 소비에트군으로, 국가를 국제공산당가인 인터내셔널가에서 소련 찬가로 바꾸면서,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공산주의의 기본 이념을 깨뜨렸다.
냉전.
소련의 중앙유럽, 동유럽 점령 이후 중앙유럽과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연이어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 차츰 소련의 위성 국가가 되어갔다. 이들은 1955년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결성,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에 맞서려고 했다. 미국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마셜 플랜을 발표, 서유럽의 경제 부흥을 도우려고 했다. 또, 북대서양 조약 기구를 창설하여 이 과정에서 양 진영은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냉전이 시작되었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 이후 등장한 흐루쇼프는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여 전체주의 독재 정책을 크게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소련은 여전히 경찰국가였다.
또한, 1956년에 소련은 부다페스트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소련 붕괴 사이에 미국과는 직접적인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베를린 봉쇄 등의 적대 행동이나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 등, 세계 각지에서의 대리전쟁이라고 하는 형태로 냉전으로 불리는 대립 관계가 형성되었다. 특히 한없는 군비 확장과 또한 핵개발 경쟁은 세계를 핵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다.(1962년의 쿠바 위기 등).
1960년대에 들어와 흐루쇼프 체제가 안정되면서 미국과의 관계는 다소 개선되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개혁 노선에 회의적이었던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이 이끄는 중국과의 관계는 반대로 악화되었다.
1964년에 실각한 흐루쇼프에 이어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소련의 지도자가 된 이후, 식료품이나 연료, 생활필수품의 공급 부족으로 국민 생활이 어려워졌다. 1968년 8월에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리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소련은 무력으로 민주화 운동을 진압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
1979년 12월 27일에 브레즈네프는 아프가니스탄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려고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실시했지만 이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되는 1980년 하계 올림픽에 대한 서방 여러 국가들의 대량 보이콧을 부르게 되었다. 이 전쟁은 1989년까지 계속되어 소련의 국제 사회로부터의 고립을 불렀던 것뿐 아니라, 막대한 전비를 지출했기 때문에 경제를 압박하는 결과를 낳았다.
페레스트로이카.
1982년 11월 브레즈네프가 죽고 유리 안드로포프가 소련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1984년 2월 안드로포프가 죽고 안드로포프를 승계한 콘스탄틴 체르넨코마저 1985년 3월에 죽자, 54세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지도자가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1970년대 초부터 시작된 소련의 경제 침체를 타개하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재건, 개혁)와 글라스노스트(정보 공개, 개방)가 진행되었다. 또한 부패한 정치체제의 개혁이 추진되어, 1990년에 지금까지의 소련 공산당 1당 독재 대신 복수 정당제와 대통령제가 도입되었다.
또한 고르바초프 집권 후 소련의 개혁에 영향을 받아 중앙유럽 위성 국가들에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 1989년부터 1990년 사이에 동독,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 소련의 위성 국가들이 연이어 민주화를 달성한 동유럽 혁명이 일어났다. 거의 대부분은 무혈 혁명이었지만 루마니아에서는 유혈 혁명이 일어나 1989년 12월 25일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즉석 재판에서 총살당하였다.
동구권의 붕괴로 냉전은 사실상 종식되었다. 1989년 12월 3일 몰타 회담에서 고르바초프와 미국의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냉전이 종결되었다는 선언을 하였다.
해체.
고르바초프는 유럽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보였지만 소련 영토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는데, 1991년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에서 유혈 사태가 일어나자 친선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하던 부시조차도 그에게 다시 폭력이 발생하면 경제 관계가 동결될 것이라며 개인적으로 경고하였다.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고르바초프는 결국 서기장에서 사임하고 소련 공산당을 해산하였고 소련의 붕괴만은 막으려 하였으나 막지 못하였다. 소련은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사임하면서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지리.
소련은 유럽 대륙의 동부와 아시아 대륙의 북부를 차지하였다. 그 영토의 거의 대부분은 북위 50도 이북에 있었다. 또한 소련은 22,402,200 km2의 면적을 차지하여 세계 제1의 넓은 영토를 자랑했으며, 그 면적은 지구의 육지 면적의 1/6에 달하였다. 소련의 거대한 영토는 한대, 아한대로부터 아열대에 이르기까지 걸쳐 있었다. 면적의 11%는 경작지, 16%는 초원지대, 41%는 숲, 32%는 (툰드라를 포함한) "기타"로 분류되었다.
유럽 부분은 영토의 4분의 1에 해당하였고, 이 부분은 소련의 문화적, 경제적 중심이었다. 동쪽의 영토는 태평양에 닿고, 남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과 마주 하고 있었다. 아시아 부분의 인구는 유럽 부분 보다 적었다. 소련 서부의 그단스크 만의 칼리닌그라드로부터 동부의 베링 해협에 있는 라트마노바 섬 사이의 거리는 1만km가 넘었으며, 소련의 영토는 동서로 1만 킬로미터에 11개의 시간대에 걸쳐 있었으며, 4개의 기후대(한대 기후, 냉대 기후, 온대 기후, 건조 기후)가 걸쳐 있었다.
1991년 당시, 소련은 서쪽으로 노르웨이, 핀란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남쪽으로는 터키, 이란, 아프가니스탄, 중국, 몽골, 북한과 육상의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소련의 국경은 세계에서 가장 길어 약 6만 킬로미터에 달하였다. 국경선의 길이 중 3분의 2는 해안선이 차지하고 있었다. 194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의 국경은 아프가니스탄, 중화인민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핀란드, 헝가리, 이란, 몽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르웨이, 폴란드, 루마니아, 터키와 접하였다. 해상 국경으로는 베링 해협으로 미국의 알래스카주와 마주보고 있었으며 소야 해협을 두고 일본의 홋카이도와 접해 있었으며, 북극해를 두고 덴마크의 그린란드 및 캐나다와 접했다.
구성국.
소련은 15개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SSR)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독자적인 헌법, 최고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인구 100만이 되지 않는 민족은 그 규모에 따라 자치 공화국(ASSR), 자치주, 자치관구를 이루었다. 그들도 독자적인 헌법과 최고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소련의 15개의 공화국은 소련의 붕괴 이후 모두 독립한 국가가 되었다.
정치.
레닌 시대 초기와 고르바초프 시대 후반의 잠깐을 제외하고는 소련 공산당의 일당 독재가 이루어졌다. 공산당에 의한 일당 독재, 민주집중제, 계획경제를 기초로 하는 이른바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불리는 체제는 노동자, 농민 및 인민 계층이 지지하는 정당에 의한 독재 체제이며, 표현이나 집회, 결사의 자유는 사실상 없었다. 이 때문에, 카를 마르크스가 주창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의 이상과는 크게 동떨어져 일반 노동자·농민에게 있어서는 지배자가 로마노프 왕조의 차르를 공산당이 대신한 것뿐으로, 정치적으로는 어떤 해방도 되지 않은 체제가 되었다는 평도 있다. 이 때문에 실질적 최고 지도자인 서기장은 「적색 황제」라고도 불렸다. 특히 스탈린 시대에는 숙청으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어 스탈린주의 하의 공산주의는 억압적인 체제와 동일시되었다.
고르바초프 시대 마지막에 잠시 대통령제를 도입한 것을 제외하고는, 스탈린 시대 이래 소련의 국가 원수는 소비에트 최고 간부 회의의 의장이었으나, 실권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있었으며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이후의 서기장들은 최고 간부 회의 의장을 겸임하였다. 소련 공산당의 일당 독재는 1991년 8월의 쿠데타가 3일 천하에 그친 뒤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소련 공산당을 해체하여 막을 내렸다.
역대 소련의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다.
내각.
내각은 소련 최고 집행 기관이면서 최고 회의의 휘하기관이다. 내각의 수장은 총리이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선출한다.
역대 소련의 총리는 다음과 같다.
정치국.
정치국(러시아어:Политбюро, 정식 명칭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러시아어:Политбюро ЦК КПСС)은 소련 공산당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통치체의 기능을 했다. 이것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주요 구성원들이 참여했다. 1952년부터 1966년 사이에는 간부회라고 불렸다.
1990년에 열린 제28차 당대회에서는 정치국의 권한을 최고 소비에트로 이양하는 것이 승인되었다. 정치국은 1991년 8월의 쿠데타 실패 직후에 해산되었다.
1987년까지 정치국원은 소련 공산당원만 출마할 수 있었으며, 각 지역에서 하향식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 마지막 정치국원이 선출되었던 1990년 7월 14일에는 부로케비시우스, 굼바리아제, 고르바초프, 구렌코, 자소호프, 이바시코, 카리모프, 루신쉬, 마살리예프, 모프시샨, 무탈리보프, 나자르바예프, 니야조프, 폴로즈코프, 프로코피예프, 루비크스, 세묘노바, 실라리, 소콜로프, 스트로예프, 프롤로프, 셰닌, 야나예프 등이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었다.
소련 최고평의회.
소련 최고평의회(Верховный Совет)는 소련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법을 만들고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상설 기관으로는 최고평의회 상임위원회를 선출했으며, 최고 회의 간부회 의장이 소련 국가 원수였다.
연방평의회(연방원)와 민족평의회(민족원)의 양원제를 택했으며, 임기는 모두 5년이었다. 연방 회의는 30만 명을 1개 선거구로 한 소선거구제를 택했고, 민족 회의는 각 민족별 인구를 반영해 설치했다. 그 대의원은 소련의 15개 공화국, 11개 자치공화국, 5개의 자치구 및 민족관구에서 선출되었다.
경제.
소련은 세계 2위(1985년 GDP 2조 2천억 달러,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었다. 1인당 GDP는 약 9,300$(1990년 기준, 세계 31위)에 달했다. 소련은 생산 노동자에 한하여 주 35시간 근로제를 채택했으며, 농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에만 한하여 주 41시간 근로까지 허용했다. 경제력에 관련해서 소련은 군수산업, 산업정비기기산업 부문에서 그 규모가 세계 1위였으며, 1986년 고르바초프가 시장 경제를 받아들였다. 1965년 이전까지는 소련의 경제는 고스플란이 통제하였으나, 1965년 이후부터는 고스플란의 역할이 축소되고, 각 생산 수단을 맡은 경영인들의 역할이 중시되었다. 농민들은 콜호스에서 일을 했다.
1920년대에 일어난 러시아 내전은 소련 경제를 피폐화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계획 경제의 문제점이 크게 부각되자, 레닌이 자본주의를 도입하여 "신경제정책"을 실시하였다. 경제가 안정된 후 소련은 다시 계획 경제로 경제를 운용하였으며, 1930년대 스탈린이 추진한 5개년 계획이 성공하면서 거대한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 1930년대에 대공황으로 자본주의 국가들은 심각한 불황에 시달렸지만 소련은 대공황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아주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여 1938년에는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1925년부터 지속된 계획 경제는 소련의 농민들을 수탈하여 인명을 대거 희생시켰고, 노동자들에게는 과도한 중노동 부담를 안겼다. 이러한 중노동으로 인해 중앙 계획경제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이 생겼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65년에는 독립채산제를 시행하여 혼합 경제 체제를 받아들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도 소련의 경제는 크게 발전했다. 소련은 1950년대에도 아주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고 1960년대까지 소련은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1970년대부터 소련의 경제는 침체되기 시작했다.
1986년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소련의 마지막 서기장이자 소련의 초대 대통령)는 혼합 경제를 받아들였다.
소비재.
군사에 투자되는 자금에 비해 국민 생활에 필요한 전자제품이나 소비재의 개발과 생산, 물류의 정비는 소홀히 다루어졌다.
서방의 전자제품이나 화장품, 의류 등의 소비재의 수입, 유통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지만, 모스크바 등의 대도시에만 설치된 굼(GUM) 등의 외화 전용 백화점에서 구입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들을 구입할 수 있는 것은 외국인이나 공산당 간부와 그 가족뿐이었다.
무역.
소련의 서방 수출은, 농산물이나 어패류 등의 제1차 상품, 원유나 천연가스 등의 에너지 자원이 대부분이었다. 통화인 루블 자체도 국외에서 통화로서의 가치가 낮았기 때문에 서방과의 무역수지는 대개 적자였거나 매우 적었다.
그에 비해 동유럽에 위치한 소비에트 위성국이나 공산국가들과의 무역은 1차 상품이나 에너지 자원은 물론, 전자제품이나 소비재, 공작기계로부터 자동차, 항공기 등의 군사 물자까지도 수출되었다. 또한 그 대부분의 물자가 사실상의 원조품으로서 무상에 가까운 형태로 공급되었다.
공업.
이오시프 스탈린은 1928년부터 5개년 계획을 실시하면서 콤비나트 공업지대를 만들었다. 유명한 콤비나트로는 드네프르 콤비나트, 앙가라-바이칼 콤비나트, 우랄 콤비나트, 쿠즈네츠크 콤비나트 등이 있다.
소련은 중공업에 치중하였기 때문에 국민의 생활에 밀접하게 관계되는 경공업 생필품의 질은 서방 세계에 비해 떨어졌다.
소련은 천연가스와 석유를 세계에서 제일 많이 생산하는 국가였다.
농업.
소련의 농업은 거의 대부분 솝호스(Sovkhoz)와 콜호스(Kholkoz)를 통해 이루어졌다. 솝호스는 Sovetskoe khozyaistvo(소비에트 농장)의 약칭으로, 거대한 국영농장이었다. 솝호스의 농작물 생산은 국가의 계획에 따라 결정되었다. 생산하는 농작물은 수매 가격까지도 국가의 결정에 따라 정해졌다.
콜호스는 집단농장으로, 1928년에 시작된 이오시프 스탈린의 제1차 5개년 계획에 따라 만들어졌다. 콜호스는 국유지를 무료로 사용하고 경작을 실시했으며 이에 따라 부농을 의미하는 쿨라크가 일소되었다. 농기구나 가축 등은 공유되었으며 생산물은 국가에 매각되었다.
각 개인의 주택에 부속된 소규모 농지에서 채소의 재배, 가축의 사육이 가능했고 개인이 생산한 생산물은 자유롭게 판매해도 되었다. 생산력 향상이 농민의 수입 증가에 직접 연결되는 이 자류지 재배는 국영농장보다 높은 효율성을 나타내서 취약한 소련 농업에 도움이 되었다.
군사.
소련은 미국을 필두로 하는 자본주의 진영에 대항하기 위하여, 재래식 무기 이외에도 1949년에 원자 폭탄을 만들었고 1953년에는 수소 폭탄을 만들었다. 1961년에는 현재까지 폭발한 가장 큰 폭탄이었던 차르 봄바 수소 폭탄을 만들었다. 그리고 소련은 1957년 세계 최초로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만들었고 많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과 핵잠수함을 배치하여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하여서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였으며, 이는 국민들의 생활을 피폐하게 하였다. 그리고 1979년부터 10년 동안 계속된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소련의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을 불러왔다. 또한 대한항공 007기 격추사건과 같은 타국의 민간기 격추 사건을 일으키는 등 관료주의와 권위주의는 서방 여러 나라의 반발을 샀다.
또한 소련은 중앙유럽의 위성 국가들과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결성하여 자본주의 진영과 대립하였으며, 동시에 회원국 내에서 일어난 반소, 반공 운동에 무력으로 개입하였다. 소련은 중앙유럽의 위성 국가들과 북한, 중화인민공화국, 쿠바와 북베트남 등 사회주의 국가에 각종 무기를 수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나라에 무기와 그 기술을 수출하고 장교 등을 파견하여 군사 훈련을 하여, 그들 나라의 군사 기술의 향상에 기여하였으며, 그 중에는 스파이나 테러리스트의 양성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군사 퍼레이드.
소련은 자국의 군사력과 소련군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하여 붉은 광장에서 미사일, 탱크와 장갑차까지 동원하여 평균적으로 1년에 한 번씩 군사 퍼레이드를 벌였다.
과학.
소련은 1950년대 이후 미국과 나라의 위신을 걸고 우주 개발 경쟁을 벌였다. 1957년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올렸고, 또한 최초의 우주비행사인 유리 가가린,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인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등을 배출하였다. 소련은 보스토크 계획, 소유즈 등 일련의 우주 개발 프로그램을 추진하였고, 장기간 운용하는 우주 정거장 미르 계획을 성공시켰으며, 우주 개발 이외에도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인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형 원자로를 개발하여 거대과학과 순수과학에 있어서도 소련은 큰 발자취를 남겼다.
또한 소련은 항공기, 잠수함, 탱크 등의 병기공학도 발달하였다. 대표적인 소련의 전투기로는 수호이, 미그를, 항공기로는 일류신, 투폴레프 등을 들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스탈린의 오르간」이라고 불리며 독일군이 두려워한 카츄샤 로켓도 개발하였다. 또한 스텔스에도 중요한 이론적 영향을 주었으며, 테트리스 등의 컴퓨터 게임도 개발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거대과학에 대한 치중은 군사비와 마찬가지로 경제에 상당한 부담을 주었으며, 항공 우주 산업이나 중공업을 우선한 나머지 소비재의 제조가 뒷전으로 밀려 민중을 괴롭히게 되었다. 또한 안전과 건강을 고려하지 않은 원자력 개발과 공장 건설로 인하여 체르노빌 사고와 같은 일도 벌어졌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공장의 유해 물질과 방사능에 의한 환경 오염도 심각하였다.
소련은 아카뎀고로도크 같은 과학 도시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련 당국은 외국으로 기술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하여 과학 시설이 밀집한 일부 도시는 외국인의 출입이 금지된 폐쇄된 도시가 되었으며, 이들 도시는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다.
노동운동.
소련은 공산당의 지배력이 약화된 시기인 1989년 말 이후를 제외한 모든 시기 동안 자유 노조를 허용하지 않았으며, 모든 노조는 당에 소속이 된 상태로 운영이 되었다. 또한, 산업노동자들이 패권을 잡은 사회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능동적 노동운동보다는 정부의 생산 목표를 이루기 위한 어용 노동운동이 주를 이루었다. 당은 해당 방침에 따라 공산주의 노동 영웅, 스타하노프 노동자 칭호를 수여하였다. 스타하노프 운동은 알렉세이 스타하노프로 대표되는 노동자들의 목표초과달성과 노동생산성향상 노동운동이다.
문화.
소련의 헌법은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으나, 사실상 검열에 의해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제약되었고 출판은 공산주의 이념을 선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소련은 발레와 클래식 음악(쇼스타코비치 등)에서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정부는 유명한 발레단과 오케스트라를 후원했다. 므라빈스키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명연주를 남겼다.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에 소속된 볼쇼이 발레단과 레닌그라드의 마린스키 극장에 소속된 마린스키 발레단은 세계 최고의 발레단으로 인정받는다. 고르바초프 시대 이후에는 대중문화도 크게 발전했다.
복지.
노동 복지는 당시 자본주의 선진국에 비해 일찍 시작했지만, 법 조항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실질적인 복지 수준이 매우 미비한 수준이었다. 일례로, 1918년 소련 공산당은 외국인노동자차별금지법, 아동노동금지법, 양성평등고용법 등을 명문화하는 동시에 이러한 법들이 실질적으로 실행되기 위해 국가가 책임을 지고 노력해야 한다고 적시했다. 또한 법적으로 지정된 공휴일과는 별도로 각 산업지마다 약 연평균 25일의 휴일을 주었다. 1917년 11월 11일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최초로 일 8시간, 주 48시간 근무제를 채택했다. 이러한 정책은 당시 일 10시간 내지는 일 12시간 근무제를 채택했던 유럽 국가들의 노동 정책에 영향을 주었다. 1927년 우익반대파와 스탈린 계파를 중심으로 일 7시간, 주 42시간 근로제가 확립되었다. 1961년 흐루쇼프 집권기에는 주 41시간 근무제로 노동법이 수정되었으며, 광업과 화학공업에 한해서 35시간 근무제가 시행되었다. 1966년에는 주 35시간 근로제가 제안되었으나 시행되지 못 했으며, 니키타 흐루쇼프는 1968년 안에 주 근로시간을 최대 30시간까지 낮춘다는 계획안을 발표했지만 달성하지는 못 하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 고성장을 해온 소련 경제로 인해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선 본격적인 복지 제도가 실시된 것이다. 브레즈네프 집권 시기엔 지식·문화·예술에 관련된 복지 정책이 성과를 거두었다. 각 공동체엔 문화예술 시설과 도서 시설이 들어섰다. 이 당시 소련은 서적 출판율이 높았으며, 독서량은 1960년대에 들어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빈부의 차 없이 거의 모든 계층이 문화·예술 활동을 하거나 또는 감상할 수 있었다. 소규모 교육 제도도 발달하여, 추가 교육을 받고싶은 노동계급은 여유 시간을 내서 학점을 이수해 추가적인 학력증진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으며, 이는 명목상 무상이었으나 실제 기회는 일부 제한되었다. 또한 이러한 복지는 소련이 붕괴하기 직전인 1990년까지 거의 대부분 이어졌다.
총 소득 가운데 교육, 의료, 주거 등 여러 가지를 보장해주는 사회적 임금의 비중이 높은 편에 속했다. 주거 복지의 경우는 1950년대 후반부터 짓기 시작한 호당 평균 9평 짜리 5 ~ 7층(층당 평균 8호) 패널형 아파트인 흐루숍카로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식량의 경우는 러시아 소비에트 시절인 1918년부터 각 소행정단위마다 존재하는 식량 배급소에서 일정 식량을 배급했다. 이러한 배급은 1921년 신경제정책을 도입하면서부터 다시 폐지되었고, 1929년에는 식량배급제가 다시 부활했다. 1935년에는 식량 분배 수위를 국가가 조절할 필요가 사라지면서 다시 폐지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다시 부활하여 1940년대 후반까지 시행되었다. 소련은 1947년부터 배급제를 공식적으로 내걸지 않았지만, 의류, 옥수수, 비누와 같은 생필품의 경우는 배급으로 분배하는 경우가 잦았으며, 이러한 정책은 소련이 붕괴하는 1991년까지 지속되었다.1989년까지는 이러한 복지 시스템이 어느정도 유지가 되었지만, 몰타 회담 이후 소련은 혼합경제 제도를 절충적으로 받아들임으로 여러 가지 사회적 복지 혜택이 많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1990년에는 공산주의적 요소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형태의 국가가 되었다.
교육.
공산주의 혁명 이후 러시아 내전과 전시 공산주의는 학교 교육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1914년 어린이의 91%가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으나, 1920년 24.9%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1926년까지 교육 수준은 퇴보했으며 당시 문자해독율은 56.6%였다. 1923년에 초등학교 4학년까지 의무교육이 시작되었고, 소련의 교육 위원회 초대 위원장인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는 문맹 퇴치를 위하여 글을 아는 사람들을 채용하여 글을 가르쳤다. 1937년 센서스에 따르면 문자해독율은 75%로 상승했다. 1950년대에는 문맹률이 1% 미만으로 낮아졌다.
1970년대 소련의 의무교육은 11년제(초등학교 4년, 중학교 7년)를 채택하고 있었으며, 종합대학은 5년제, 단과대학은 4 ~ 6년제였다. 1981년부터 10학년(발트 국가들은 11학년)까지 의무 교육이 실시되었고, 모든 학교는 정부가 관리하였다.
1986년 소련 인구 1만 명 당 고등교육을 받는 학생의 비율은 181명에 그쳐, 미국(517명)의 1/3에 불과했다.
의료.
혁명 이후 1918년에 정부는 "의료는 국가의 관리 하에 둘 것이고, 의료는 무료로 시민들에게 제공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혁명 이후 소련의 평균 수명은 증가하였다. 그러나 1964년 러시아 남성의 평균 수명이 64.89세의 정점에 도달한 이후 다시 하락하기 시작하여 1984년 61.7세까지 떨어졌으며,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정점의 수준을 끝내 회복할 수 없었다.
소련에서 시행되는 많은 의료 치료법과 진단법은 표준에 못 미쳤으며 (종종 어떤 의료 검사도 하지 않고 환자를 면담하기만 한 상태로 의사가 진단을 내렸다.) 의료 서비스 제공자가 제공하는 치료 표준이 떨어져서 수술로 인한 감염의 위험이 높았다. 소련의 보건 의료 시스템은 의료 장비, 의약품 및 진단용 화학 물질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서구 세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수많은 의약품 및 의료 기술을 결여하고 있었다. 그 시설은 기술 수준이 낮았고 의료 요원은 보잘것 없는 교육을 받았다. 소련 붕괴 직전까지도 소련 의료 시스템의 열악함은 크게 개선되지 못하여 1989년 조사에서는 러시아 병원 중 20%에서 온수 공급이 되지 않고 3%는 냉수 공급조차 되지 않았다. 7%는 전화기조차 갖추지 못했고 17%는 적절한 위생 설비를 갖추지 못했다. 비록 특권층인 노멘클라투라를 위한 특수한 병원과 진료소는 더 높은 수준의 건강 관리를 제공했지만 여전히 서구 표준 이하였다.
스포츠.
소련의 스포츠는 모두 당에 의해 운영되었고 자유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운동선수가 프로모터가 기획하는 운동 경기에서 나감으로써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고 이윤을 얻는 상업적 스포츠(프로 스포츠)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소련은 국위 선양을 위해 스포츠, 특히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자 했다. 그래서 소련은 국가의 선수 육성 프로그램으로 선수를 육성했고, 소련의 운동 선수들은 올림픽에서 많은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에 따라 당이 후원하는 풀타임 아마추어 운동선수의 범람은 올림픽 대회가 과거에 가졌던 순수 아마추어 스포츠맨십의 이상을 쇠퇴시켰다.
소련은 축구, 농구, 배구, 하키, 아이스하키, 기계 체조 강국이었다. 소련이 참가한 마지막 올림픽이었던 1988년 하계 올림픽에서 소련은 스포츠 강국 동독과 미국을 크게 앞서며 55개의 금메달로 압도적인 1위를 하였다.
1980년 소련은 1980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였으나, 미국을 필두로 한 자유 민주주의 진영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해 이 대회를 보이콧했다. 소련과 공산 진영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되는 1984년 하계 올림픽을 보이콧하였다(표면상의 불참사유는 '선수단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 이 두 올림픽을 두고 "반쪽 대회"라고 한다.
1980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핀란드 선수가 당시에는 금지되지 않았던 혈액 도핑을 하고 10000M와 5000M 메달리스트가 되었다.
소련은 월드컵에 7회 출전했으며, 1966년에는 4위를 차지했다. 또한 1956년과 1988년 올림픽 축구에서 금메달을 차지하였다.
언론.
소련 공산당의 기관지인 프라우다와 정부 기관지인 이즈베스티야, 공산 청년 동맹 기관지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등의 신문이 유명했고 특히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22,000,000부가 넘는 세계 최대의 발행 부수로 기네스 북에 등재되었다. 통신사는 1925년에 창설된 국영 타스통신이 있었다. 대외 방송은 1922년 창설된 모스크바 라디오가 있었다.
소련인은 외국의 방송을 듣는 것이 금지되었고, 신문과 라디오, 텔레비전 같은 보도기관에 대해서는 소련 공산당이 완벽하게 보도 관제를 했다. 이것은 외국의 큰 뉴스나 체르노빌 사고나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과 같은 큰 사건으로부터 국내의 정치, 경제적인 사건, 당간부의 숙청이나 지하철 사고, 탄광 사고와 같은 사건에 이르기까지 소련 정부와 공산당에 위해가 되는 보도는 일절 불가능했으며, 만약 보도되어도 정부와 당에 유리하도록 왜곡되었다.
서방 언론의 특파원은 기본적으로 국내를 자유롭게 취재, 보도하는 것이 금지되고 있어 사전에 신청이 필요했다. 또한 취재처의 선택 및 일정은 모두 준비 된 것에 따라야 했다. 모스크바 올림픽 등의 국제적 이벤트나, 외국의 수뇌진이 공식 방문을 할 때 소련을 방문한 보도진에게는 준비된 취재 스케줄이 반드시 제공되었다. 서방의 보도기관에서 일하는 소련인 종업원 역시 당국이 선택하였다. 그들은 서방의 보도기관이나 그 특파원의 행동을 당국에 보고해야만 하였다.
인구.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 구성을 보였다. 그 국경 내에 150개 이상의 서로 다른 민족이 살고 있었다. 소련의 인구는 1990년 291,000,000명으로 중국, 인도에 이어 당시 세계 제3위였다.
다수를 이루는 민족은 러시아인(50.78%)이고, 다음은 우크라이나인(15.45%), 우즈베크인(5.84%)의 순이었다. 그 이외에도 벨라루스인(3.51%), 카자흐인(2.85%), 아제르바이잔인(2.38%), 아르메니아인(1.62%), 타지크인(1.48%), 조지아인(1.39%), 몰도바인(1.17%), 리투아니아인(1.07%), 투르크멘인(0.95%), 키르기스인(0.89%), 라트비아인(0.51%), 에스토니아인(0.36%), 기타(9.75%: 타타르인, 체첸인, 독일인, 야쿠트인, 바슈키르인, 유대인, 헝가리인 등)등의 민족이 있었다.
인구 증가율은 러시아와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과 우크라이나에서는 낮았던 데 비해, 캅카스 3국(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과 몰도바에서는 높았다. 따라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러시아인이 소련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차차 낮아져 갔다.
언어.
공식적 언어는 없었으나 사실상 러시아어가 공용어 역할을 하면서 주로 사용되었다.
외교.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 진영의 맹주였으며, 중앙유럽의 위성 국가 이외에도 중남미(쿠바), 중동(남예멘), 아프리카(앙골라, 모잠비크 등), 동아시아 등에서의 공산정권 수립을 지원했다. 따라서 미국과 일본, 대한민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과는 대립관계에 있었다.
소련은 유엔의 원년(元年) 회원국이었으며,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이었다.
동유럽 위성 국가.
이들 위성 국가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정권을 쓰러뜨리고 인민들이 점령되어 소련의 간섭을 받는 국가가 되었다.
대한민국과의 관계.
제2차 세계 대전 이래 대한민국(남한)과 소련의 관계는 북한의 수립을 소련이 간접적으로 지원했다는 것과 특히 한국 전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원한 소련의 역할 때문에 출발부터 적대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은 한국 전쟁에 부분적으로 참전하였고 중국과 함께 정전 회담에 참여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였다.
1970년대 이후 대한민국과 소련의 관계는 점차 누그러져 갔으나, 1978년 4월 21일 대한항공의 보잉 707기가 무르만스크 인근에 강제 착륙당한 사건과 1983년 9월 1일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이 벌어졌다.
고르바초프의 등장 이후 대한민국과 소련의 관계는 차츰 해빙되었다. 1988년 하계 올림픽에 소련이 참가하였고,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에 따라 1990년 6월 대한민국-소련 정상 회담이 열렸으며, 1990년 10월 국교가 수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아에로플로트가 대한민국에 취항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
1945년 8월 소련군이 한반도 이북에 진주하면서 정치사회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1948년 9월 9일에 공산정권이 출범하자 가장 먼저 승인하였고 1949년에 김일성이 한국 전쟁 지원요청을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이오시프 스탈린과 만났고 1950년 한국 전쟁에는 직접 군사를 보내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소련제 첨단 무기와 탱크, 전투기 등을 지원하면서 대한민국을 간접적으로 침공하는데 일조하였다. 그 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열렸던 대한(對韓) 지원 결의에서는 유엔 회원국이자 위성국인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폴란드 등과 함께 불참 및 기권하였다. 또 미국과 서방 국가들이 대한민국에 전투병력을 지원한 것을 두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두둔하였다. 1953년 스탈린이 죽고 후임인 니키타 흐루쇼프 시절부터는 관계가 다소 소원해졌으나 1960년대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화대혁명으로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관계를 회복하였다. 미국에서 열렸던 1984년 하계 올림픽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함께 불참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열렸던 1988년 하계 올림픽에 소련 정부가 자국 선수단을 파견하고 1990년 대한민국 소련의 국교 수립과 동서독 통일 이후로 관계가 소원해졌으며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연방이 출범하면서 이후에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
공산국가들의 맹주였던 소련은 자본주의 진영의 맹주였던 미국과는 '냉전'이라고 하는 형태로 대립해, 1950년대의 한국 전쟁이나 1960년대의 베트남 전쟁 등, 대리 전쟁이라고 하는 간접적인 형태의 군사적 대립을 하고 있었지만, 전면적인 핵전쟁에 대한 공포가 쌍방의 억제력이 되었기 때문에 전면적인 군사적 대립은 없었다.
그러나 베를린 봉쇄나 쿠바 위기 등에서는 전면적인 군사적 대립의 일보직전까지 갔으며, 영공을 침범한 미군기의 격추 등 한정적인 군사적 대립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와 같은 대립 관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식 국교가 끊어진 적은 없고, 쌍방의 수도에 대한 민간기의 노선연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이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의 사건이 있었을 때에는, 「제재 조치」로서 민간기의 노선연장이 시한적으로 제한되거나 스파이 사건 등이 표면화되어, 한쪽의 외교관이 국외 추방되면 그에 대한 「보복 조치」로서, 다른 한쪽 국가의 외교관을 맞받아 국외 추방하는 등의 외교적 술책을 하고 있었다.
일본과의 관계.
일본과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만주국과의 국경에서 종종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노몬한 사건 등). 1941년 4월에 소-일 중립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1945년 8월 8일에 소련은 이것을 일방적 파기, 일본에 선전 포고를 했다. 또한 일본인 포로를 오랫동안 강제 노동 수용소에 구류했다.
그 후, 1956년에 소-일 공동 선언을 통해 국교가 회복했지만, 일본이 미국의 동맹국인데다가 쿠릴 열도 분쟁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계 개선은 진전되지 않은 채 냉전이 종결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국공 내전에서 소련의 지원으로 중국 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였다. 당초에는 협력 관계에 있었지만, 195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관계가 악화되어 1960년대에는 국경 분쟁이나 사상적인 대립의 문제로 말미암아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의 대립이 표면화했다. 양국간의 이와 같은 대립관계는 그 후 문화대혁명이 종결되는 197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1980년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하계 올림픽에는 중국이 불참했고 대신 적국이었던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렸던 1984년 하계 올림픽에는 소련이 불참하고 중국이 참가했다.
출국.
출국은 망명과 외화 유출을 막는 것을 주된 이유로 당국의 허가가 없는 한 출국은 불가능했다. 또, 자유 진영 국민과의 교제나 결혼은 사실상 불가능했으며, 심지어 동유럽 소비에트 국민과의 결혼조차도 소련 당국으로부터 다양한 방해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외국 항로를 운행하는 선박이나 외국에서 연주여행을 하는 악단 등에는, 승무원이나 악단원의 망명을 저지하고 서방 언론 노출을 감시하기 위해서 반드시 공산당의 정치장교가 동행하고 있었다.
종교.
소련은 세속 국가, 즉 헌법상 종교와 정부의 분리를 선언한 국가였다. 처음으로 이 원칙이 선언된 것은 1918년 1월 20일(교회력) СНК РСФСР의 칙령 "정부와 종교, 학교와 종교의 분리에 관하여"에서이다. 교회가 정부 및 공립학교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며, 법인으로서의 권리와 소유권이 없으며 인민의 개인적인 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법령이었다.
소련 공산당은 공개적으로 '종교적 편견'의 소멸을 그 임무로 삼을 것임을 선언했다. 1939년까지 행정 절차에 따라 정부기관, 특히 NKVD가 '종교적 삶 청산정책'을 실시했다. 이후 종교 정책은 보다 차별적으로 바뀌었다.
1910년대 초반 소비에트 정권은 많은 정교회 성당을 파괴했다. 특히 모스크바의 구세주 그리스도 성당이 있으며, 16세기에 세워진 모스크바 크렘린 내 몇몇 수도원, 그리고 러시아 전역에서 수십개의 성당을 파괴했다. 1925년부터 1947년까지 소련에선 대중사회조직 '무신론자 투쟁 연합'이 있었다. (1929년 6월까지의 명칭은 '무신론자 연합'.) 또한 출판사 '무신론자', 이후 '국립반종교문학출판사'(ГАИЗ)가 활동했다.
이러한 무신론적 세계관은 당기관과 정부기관에 의해 지지되고 홍보되었으며, 대학에서는 '과학적 무신론'이란 원칙을 가르쳤다.
1943년 소련에는 총대주교좌가 복원되었으며, 소비에트 정부의 옹호 아래 세르게이 총대주교가 취임했다. 이때부터 모든 합법적 종교활동은 두 정부기관의 직접적이고 공개적인 감독 하에 이루어졌는데, 이는 1965년 12월 소련 장관평의회 산하의 종교평의회로 통합되었다.
소련에서 러시아 정교의 최종적인 복권은 페레스트로이카의 시기, 1988년 정부 차원에서 루시의 세례 1000주년을 기념했을 때 이루어졌다.
공식적으로 무신론을 내세운 소련 정부의 정책과는 다르게, 당시의 자료에 따르면 소련 국민의 1/3이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그 중 절대다수는 기독교(대부분 러시아 정교회, 일부는 로마 가톨릭과 침례교, 루터교, 오순절교회 등의 개신교 교파) 및 이슬람교(대부분 수니파, 아제르바이잔인은 시아파)를 신봉하였다. 소수의 유대교, 불교, 라마교, 샤머니즘 신자도 있었다.
치안.
소련은 현행범으로 체포된 중범죄자에 대해 재판 과정없이 총살형을 시행하는 국가였으며, 범죄에 대한 처벌이 매우 강한 나라 중 하나였다. 또한 사회보장정책이 광범위하게 보장되는 소련 사회에서 자연인이 범죄인으로 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소련 사회는 범죄율이 매우 낮고, 치안이 강한 사회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1987년부터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 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정부 통제력에 상당한 손실이 왔고, 그 결과 치안력이 약해져 범죄 문제에 시시각각 노출되기에 이르렀다. 전문가들은 소련 말기에 일어난 범죄율 급증의 이유로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정책으로 인한 범죄 통제력 약화와, 혼합 경제 정책으로 인해 나타난 빈부격차, 사회 불안정을 든다. 1989년에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특수목적대'를 설립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1990년에 이르러서 소련 내의 범죄는 중앙정부에서 통제할 수 있는 수위를 벗어났다.
프로파간다.
프로파간다는 소련이 국민들의 공산주의적 애국심을 키우기 위하여서 만든 일종의 이벤트다. 프로파간다를 위하여 소련은 포스터, 라디오, 책, 미술 등을 이용했다.
소련의 프로파간다, 특히 레닌 시대의 프로파간다는 선구적인 것으로, 몽타주 이론이나 전위파 등이 그 대표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
2872 | 581721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872 | 김재규 | 김재규(金載圭, 1926년 3월 6일 - 1980년 5월 24일)는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제9대 국회의원(유신정우회, 전국구),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박정희의 집권 기간 동안 대표적인 최측근으로 있었으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등을 암살한 10.26 사태를 일으켰다. 본관은 김녕(金寧)이고 경상북도 선산군 출생이며 호는 덕산(德山)이다.
생애.
군인 생활.
박정희의 동향(경상북도 구미) 후배이자 육사 2기로 박정희와 동기이다.
1943년 안동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해군 비행 예과 연습생에 선발되어 전투기 조종훈련을 받고 소위 임관을 앞둔 와중에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지금의 육군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12월 졸업하였다. 그러나 재직 중 부대 내 사망사고의 책임을 지고 면직되어 잠시 김천중학교와 대륜중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복직하였다. 1952년에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1970년 한양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는 보병제6사단 사단장으로 있었으며 1954년 육군 제5사단 36연대장을 거쳐 육군 제101연대장을 지냈고, 1956년 육군 준장 진급, 1957년 육군대학교 부총장을 지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일시 감금되었으나 박정희의 명령으로 풀려나 군사정부에 적극 협조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이후 군사정권 치하에서 1961년 호남비료 사장, 1963년 육군 제6사단장, 1966년 육군 제6관구사령관, 1968년 육군 보안사령관, 1971년 육군 제3군단장을 역임하고 1973년 1월 6일 중앙정보부 차장 직책에 취임하였으며 해당 직책 재직 중이던 1973년 4월 25일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그는 육군 제6사단장 시절이던 1964년, 6.3사태 당시 계엄군을 지휘하여 박정희에게 더 큰 신임을 받게 된다.
국회 입문은, 1973년 유신정우회(維新政友會) 소속의 9대 국회의원이 되어 국회에 입문하게 되었다.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내기도 한 그는 1974년 9월, 건설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76년 12월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맡으면서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이후 빈번한 소요사태 발생과 긴급조치령의 남발에 따른 정치세력간의 알력과 갈등이 첨예하게 전개되던 상황 속에서, 그는 주도면밀한 정보수집과 사태무마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박정희 암살과 사형.
그러나 1979년 8월 11일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YH貿易 女工 籠城 事件),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金泳三)의 국회의원 제명 사건, 10월 16일 부마사태 등 계속된 정국불안사건을 수습하면서, 유신정권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과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시국 수습책을 둘러싸고 강경파인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車智徹) 과 심각한 마찰을 빚고, 차지철과 그를 옹호하는 박정희에 대한 반감과 불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주프랑스 공사 이상열(李相悅)을 매수하여 1979년 10월 7일 전(前) 중앙정보부장 김형욱(金炯旭)을 유인 살해하도록 유도한다.
19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 및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과의 연회 술자리 도중,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발터 PPK 권총으로 시해, 10.26 사태를 일으키고 체포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궁정동 안가에 남겨둔 박 전 대통령을 국군병원으로 옮긴 것을 몰랐으며, 김계원 비서실장이 시신을 옮기는지 알았다면 허락 안했을 것이라며 "혁명의 실패는 김계원 비서실장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후 1980년 1월 28일 육군 고등계엄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그 해 5월 24일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김재규의 생존 루머.
사형 집행이 끝나고 김재규의 시신을 바꿔치기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친동생 김항규씨는 김재규 전 중정부장이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설은 루머이며, 시신을 받아서 혹여나 시신이 바뀌었는지 탐독했던 탐정 소설에서처럼 여기 저기 살펴본 결과 형이 틀림이 없었고 시신의 목에는 교수형 때 밧줄 자국이 선명하게 있었다고 한다.
박정희 암살의 동기.
민주화 혁명.
YH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과 정면 대결을 선포하는 기자 회견에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박정희씨의 하야를 강력히 요구한다."라 발표한다.
김재규 본인의 변론.
김재규는 1심 최후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다.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도 ‘옛날 최인규와 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들이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라고 말을 했다. 이에 김재규는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했다고 한다. 하지만 차지철과 분쟁이 있기 전까지는 박정희의 충신이었다는 점에서 그가 급조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장준하 측근을 돕고 김대중을 풀어 김영삼과 만나게 하는 등의 거사 전 행동과 미국의 기록을 볼 때 민주주의에 생각이 많은 자라 볼 수 있어 김재규의 주장은 신빙성이 있다.
[출저: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4년 4월 4일 (일) 제 78 회 ▣ 79년 10월, 김재규는 왜 쏘았는가 / “장준하-김재규 '거사' 밀약 했다” | 일요신문 ]
암살 당시에 안가의 '가'동에는 육군 참모총장이 만날 약속이 잡혀서 정보부장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강신옥 변호사에게 정승화 총장도 자신에게 속아서 궁정동으로 왔다고 답한다.
NPT 가입 후에도 핵개발 추진.
박정희 정부는 1968년 핵확산방지조약(NPT)에 서명하였지만 북한이 NPT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NPT 비준을 미뤄왔다. 1975년 4월 23일에 한국 국회에서 비준이 이루어지면서 대한민국은 조약 서명 후 7년 만에 NPT 회원국이 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NPT 가입 후에도 지속적으로 핵 개발을 추진하였다. 박정희 정부 관계 부처의 의견 변화를 살펴보면 박정희 정부는 NPT 가입 후 오히려 핵능력을 증진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고 가입을 결정했다. NPT 가입이 핵 포기를 의미한다는 일반적인 주장에 합치하지 않는 사례이다.
전 정보기관장의 개인 재산 동결.
1978년 10월말 한미관계조사보고서(프레이저 보고서)에 따르면 씨티은행이 미국과 해외계좌에 있는 그의 재산 총액이 1500~2000만 달러로 추정된다는 자료를 제출했다. 그 자료가 제출되기 전에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하원 청문회장에 증언대에서 260만 달러를 미국으로 가져와서 그 절반은 도박으로 날렸다고 시인했다.
박정희는 미국으로 망명한 최측근 김형욱에 격노하며 상소금지, 재산몰수, 궐석재판에다 외국 도피자·거주자 처벌 등 초법적 내용을 담은 ‘특별조치법’ 제정을 지시한다. 그에 따라 1982년에는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 (반국가특별법) 위반죄로 김형욱은 재산 몰수형까지 받게 되고 1998년에야 재산 몰수형이 취소되어 가족들이 국가로부터 재산을 모두 돌려 받는다.
최태민 박근혜 문제.
부동산 1천억원, 동산 2천억원이던 구국여성봉사단 총재의 개인 재산.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의 국회 통과 시기에 김재규 일가는 언론 인터뷰에서 최태민의 비리가 시해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고 밝혔다. 최순실이 이복 동생 되는 최재석은 2017년 PD수첩 방송에서 아버지 최태민의 개인 재산이 1994년 5월 사망 시점에서는 부동산으로 1천억원, 동산은 개인 금고에 2천억원해서 모두 3천억원 정도 되었다고 알린다. 최재석은 네번째 부인, 최순실은 다섯번째 부인의 자녀인데 최태민이 노란 봉투 2개에 담긴 등기부 등본 등의 서류를 최재석 자신에게 보여주는데 부동산 재산 목록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최태민의 사망직후 친척들이 다 모이고 2~3일 후에 최순실의 친모인 임선희는 에어콘까지 뜯어서 이사를 갔는데 그 금고의 돈도 모두 사라졌으며, 깡패 3~40명이 최재석에게 와서 살해 위협을 하길래 112에 신고하였는데 경찰 조차 오지 않았다.
1975년 5월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로 있는 사이비목사 최태민이 자칭 태자마마라 칭하며 사기횡령 등은 물론 여자들과의 추문도 있어 대통령에게 보고했으며 '정보부에서 그런 것도 조사하나'며 반문해서 김 전부장이 놀랬다고 한다.
우발적 범죄설.
김재규 본인은 1979년 12월 18일 계엄군법회의 최후진술에서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계획적인 혁명 거사였다" 라고 주장한다.
김재규의 1·2·3심 변호를 맡았던 안동일 변호사에게 김재규는 10·26 이전에도 서너 차례 대통령 시해 준비를 했지만 결행하지 못했다고 털어 놓았다.
전국민에게 전달하고 싶어 했던 "혁명을 했다"는 메시지 조차 김재규는 옥바라지했던 동생에게 다급하게 전해야 했다. 12·12 군사반란은 공조직을 병들게 하고 무력화한 군부 안에 암세포 같던 사조직이 반란의 주체였지만 당시 국민은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12월12일이 수요일이었으나 전두환씨는 12월 12일이 토요일이어서 휴일동안 수사를 하고 조용히 마무리 지을 작정이었다고 말한다.
미국의 박정희 제거 지령설.
10.26 사태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했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했다.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비교적 최근인 2011년 1월 18일에는, 한 재미 동포에 의해 김재규에 관한 미국의 당시 비밀문서가 모두 비공개 처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던 당일 오후 2시에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를 만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서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에 대한 의문과 관심이 한층 더 높아지기도 했다.
김형욱 살해 지시.
2005년 5월 26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위원장 오충일)는 1979년 9월 말 이전,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의 프랑스 거점장이었던 이상열 주프랑스 공사에게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살해를 지시하였다는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김재규의 지시를 받은 이상열은 중앙정보부 연수생 2명을 적임자로 선정하였다. 연수생 A는 제3국인 2명에게 살인 청부를 하여 이들과 함께 1979년 10월 7일 승용차로 김형욱을 납치해 파리 근교로 끌고갔고, 제3국인이 권총으로 김형욱을 살해한 뒤 낙옆으로 시신을 덮어놓고 현장을 빠져나왔다. 이후 연수생 B는 제3국인 2명에게 미화 10만달러를 지급하였다. 관저에서 연수생 A로부터 결과를 보고받은 이상열은 증거를 인멸한 뒤 귀국할 것을 지시했고, 귀국한 A는 1979년 10월 13일 경 김재규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결과를 보고 받은 김재규는 A를 중앙정보부장 직속기관인 정책연구실로 발령하고 300만원과 20만원이 든 봉투 두개씩을 지급하며 살해에 가담한 B와 나눠 갖도록 했다.
2020년 2월 3일 김재규의 셋째 동생 김정숙씨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은 우리가 아는 한 고인이 관여한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모사드에 파견되어 특수 암살 훈련을 받은 요원이 중앙정보부 암살 실행조 일원으로 같이 있었으며, 1979년초 청와대 별관으로 불려 갔을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술을 손수 따라주며 "나쁜 놈이로구나, 내가 믿었던 김형욱 이놈이 나쁜 놈이로구나"하고 통탄을 하였다고 언급하였다.
환심 목적 박정희 시계 제작.
1979년 8월 하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생일 선물용 시계를 제작하기로 하고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의 김모 행정비서관을 통해 주제네바대표부 N서기관에게 「일요일 오전 10시에 취리히 공항에 도착하는 KAL기 편으로 긴급문서를 보내니, 기장으로부터 직접 문서를 수령해 결과를 보고하라」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 취리히 공항의 KAL 사무소장은 N서기관이 도착하자 <사진과 같은 회중시계를 파텍 필립사나 피아제사에 주문하되, 11월 중순까지 물건이 서울에 도착해야 한다. 회중시계는 18K로 하고, 시계 전면과 후면의 도안은 나중에 보내겠다>라는 내용이 담긴 중앙정보부의 김모 행정비서관이 작성한 편지와 파텍필립사에서 제작한 회중시계 사진이 들어있는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N서기관은 봉투를 건네 받은 다음 날 아침 파텍필립과 피아제를 차례로 방문하였는데, 파텍필립의 영업 담당 책임자는 「시계의 금형을 새로 제작해야 한다. 시계 표면의 조각과 부속품 제작을 장인들이 수작업으로 해서 빨리 만들 수 없다. 시계를 만들고 나서 한국의 기후와 습도 등을 고려해 한 달 동안 시험 가동을 해야 한다. 최소한 6개월 전에는 주문해야 한다」는 설명을 하며 김재규의 중앙정보부 측에서 원한 11월 초순까지는 시계를 만들기가 어렵겠다고 하였다.
같은 날 오후 피아제를 방문한 N서기관은 극동지역 영업 담당자에게 중앙정보부의 주문 내용을 전달하였고, 다음 날 아침 『시간이 너무 빠듯하지만, 한국과의 거래 관계 등을 고려해 시계를 제작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피아제는 당시 김포공항 면세점에서 자신들의 제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이같은 사실을 N서기관으로부터 보고받은 김갑수 중앙정보부 비서실장은 <시계 제작 문제는 김재규 부장님의 각별한 관심사항이니 차질 없이 처리하라. 시계는 반드시 파텍 필립사에서 제작하되, 기일 내에 서울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하라>는 피아제사에서 시계를 제작하는 것은 안된다는 내용의 전문과 제작할 시계의 도안을 주제네바대표부에 보냈다. 시계 도안은 회중시계 덮개에 봉황 문양의 대통령 문장이 새겨지고, 가운데에는 훈장을 패용한 박정희의 반신상 사진이 들어가도록 도안되어 있었으며 회중시계 뒷면 좌우 양쪽에는 여러 개의 무궁화가, 가운데에는 「근축 탄신 1979」라는 글씨가 새겨지게 되어 있었다.
다음 일요일 N서기관은 김갑수의 전문을 전달받았고, 파텍필립의 영업 책임자를 다시 만났다. 파텍필립 측은 시간 외 작업을 하겠다며 김재규가 주문한 시계 제작을 맡기로 하였다. 주문액 보증금은 제네바 대표부 관인을 날인한 작업요청 공한으로 대신하였다.
1979년 10월 중순 파텍필립은 1만 9000달러의 제작 비용을 청구하는 송장을 주제네바대표부에 보냈고, N서기관은 제네바 현지 시각 기준 10월 26일 오전에 외교 행낭 편으로 송장을 한국으로 보냈다. 한국 시간으로는 10월 26일 오후 무렵에 해당하였고, 주문한 시계 가격인 1만 9000달러는 N서기관의 1년치 봉급과 각종 수당을 합친 금액과 비슷하였다.
송장을 보낸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인 10월 26일 오후 9시경(제네바 현지 시각 기준), 영국 BBC 방송이 「서울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는 긴급 뉴스를 내보냈고 제네바 대표부 직원들은 대개 이 방송을 청취하였으며, 얼마 뒤 김재규가 박정희를 시해한 사실도 전해졌다.
이에 시계의 필요를 상실한 중앙정보부와 제네바대표부는 주문 취소를 고려하였으나 시계 완성을 앞두고 있던 파텍필립 측은 제작 계속 의사를 밝혔다. 1980년 4월 10일경, 중앙정보부 본부는 「회중시계를 구입하기로 결정했으니, 가격과 물품 인수 가능 일자를 보고하라」는 전문을 제네바대표부에 보냈고, 중앙정보부는 중도에 구입을 보류하였다가 다시 시계 구입 결정을 확정하였다.
중앙정보부의 담당 국장은 파텍필립으로부터 받은 시계를 전두환에게 전달하였고, 전두환은 보안사령부를 통해 1980년 경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에게 전달하였다.
평가.
긍정적 평가.
2019년 5월 1일 부대관리훈령 개정을 국방부 차원에서 마무리 하였다고 밝혔다. 그에 따라 육군 3군단과 6사단의 역대 지휘관으로 사진이 게시되며, 부대의 역대 지휘관 명단에도 40여년 만에 다시 올라간다.
함세웅 신부는 "우리 시대 가장 큰 희생자는 김재규 부장이다. 김재규 부장이 역사적으로 재평가될 때 한국의 민주주의가 확인되는 것이다."라고 말했고, 이것을 언론에서는 민주 인권의 상징이라는 존재의 발언으로 보도했다.
김재규 전 중정부장의 매제인 오수춘 전 육군 중령은 김 전부장이 간첩사건을 조작하던 전임자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며, '동백림 사건' 같은 종류의 '한 건'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밝혔다.
박정희 대통령을 규탄하던 부마사태 시기에 마산에서 시위대에게 대열을 갖추라고 하고 구호를 외치게 하던 경남대 여대생 2명은 시위 현장에서 체포되어서, 시위 주동자로서 성고문을 받으며 취조 시설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런데 박 대통령 서거후 한달 반이 지난 후에 면소 판결을 받고 풀려났으며, 부마사태 1번째 시위 주동자의 긴급조치법 위반 혐의는 무죄 판결이 났으며, 어느 시위 참가자의 무죄 판결을 내린 재판관은 판결을 내리며 피고를 격려한 바있다.
신군부는 김재규를 패륜아로 만드는 언론 보도 관제(검열 및 대응) 프레임을 진행했다. 김재규의 여동생 김단희는 언론에 '(부마항쟁 등에) 민란이 일어나면 대통령 가족들을 그냥 두겠느냐, 박근혜와 (박정희) 아이들이 광화문 네거리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내쫓기는 모습을 어떻게 보느냐'고 김재규가 안타까워했었다고 했다.
부정적 평가.
박근혜 전 대통령은 1989년 5월 19일 TV방송에서 옛날에는 독을 앞에 놓고도 임금에게 상소라는 것을 했었고, 아버지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정보부장이라는 높은 자리를 주었는데 유신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했다면 한번이라도 어떻다고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그런 식으로 배신을 하는 것은 패륜이라고 말한다.
상훈.
충무무공훈장, 대통령표창, 보국훈장 천수장·삼일장·국선장·광복장·통일장과 킹압둘아지즈훈장(사우디아라비아) 등을 받았다. |
2881 | 755807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881 | 북대서양 조약 기구 | 북대서양 조약 기구(北大西洋條約機構) 혹은 북대서양 동맹(나토; , ; , )은 30개 회원국(유럽 28개국과 북미 2개국) 간의 군사 동맹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설립된 이 조직은 1949년 4월 4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체결된 북대서양 조약을 이행하며 집단 안보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냉전 기간 동안 나토는 소련이 제기하는 위협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고 소련이 해체된 후에도 유지되었다. 또한 나토는 발칸 반도, 중동, 남아시아, 아프리카에서의 군사 작전에 관여해 왔다.
나토의 주요 본부는 벨기에 브뤼셀에 있으며, 나토의 군사 본부는 벨기에 몽스 근처에 있다. 이 동맹은 동유럽에 나토 대응군을 배치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모든 나토 회원국의 연합국에는 약 350만 명의 군인과 병력이 포함되어 있다. 2020년 총 군사비 지출은 전 세계 명목 총액의 57% 이상을 차지했다. 회원국들은 자신들의 목표가 2024년까지 국내총생산의 최소 2%의 국방비 목표를 달성하거나 유지하는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나토는 12개 창립 회원국으로 구성됐으며, 8차례 새 회원국을 추가했으며, 최근 2020년 3월 북마케도니아가 가입했다. 핀란드와 스웨덴은 2022년 6월 가입 신청을 받아들인 데 이어 31번째, 32번째 회원국이 될 것으로 예상되며, 현재 북대서양 조약 가입 의정서가 기존 회원국의 비준을 받고 있다. 나토는 현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조지아, 우크라이나도 후보국으로 인지하고 있다. 나토의 확장은 나토의 평화를 위한 파트너십 프로그램에 추가로 참여하는 20개국 중 하나인 비회원국, 즉 러시아와의 긴장을 초래했다. 또 다른 19개국은 나토와의 제도화된 대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역사.
됭케르크 조약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냉전이 시작된 1947년 3월 4일, 프랑스와 영국이 독일이나 소련의 공격 가능성에 대비해 동맹과 상호원조 조약으로 체결한 조약이다. 1948년 3월, 브뤼셀 조약에서 베네룩스 국가들을 포함하도록 동맹이 확대되었고, 브뤼셀 조약 기구가 형성되었다. 트루먼 독트린 아래 1948년 2월 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와 같은 공산주의의 침략에 대항하여 국제적 연대를 촉진했던 외교 정책과 유럽과 북미 모두를 포함할 수 있는 더 넓은 군사 동맹을 위한 회담이 그 달 미국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담은 1949년 4월 4일 미국, 캐나다, 포르투갈, 이탈리아,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와 함께 북대서양 조약에 서명하는 결과를 낳았다. 캐나다 외교관 레스터 B. 피어슨은 조약의 주요 창안자 중 하나였다.
한국전쟁 당시 나토는 통합된 군사구조로 이행되기 전까지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951년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창설되면서 당시 장비 표준화 협정, 유럽 주둔 외국군 주둔 협정 등 서방 연합군의 많은 군사 구조와 계획이 채택되었다. 1952년 나토 사무총장이 처음 임명됐고, 그 해 나토의 첫 주요 해상 훈련인 메인브레이스 훈련 작전을 시행했다. 이후 그리스와 튀르키예가 나토에 가입을 했다. 런던과 파리 회담 이후, 서독은 1955년 5월 나토에 가입하면서 군사적으로 재군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소련이 바르샤바 조약을 체결한 주요 요인이었으며 냉전의 대립적인 측면을 보여줬다.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과 40만 명의 미군이 유럽에 주둔했을 때 냉전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1966년 핵 억제력에 대한 프랑스의 독립적인 입장과 나토의 군사 구조에서 프랑스의 철수를 초래한 사건은 유럽 국가들과 미국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의구심을 들게 했지만 소련의 침공에 대한 나토 방어의 신뢰성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되면서 함께 가라앉았다. 이후 1982년 신생 민주주의 국가인 스페인이 동맹에 가입했다.
1989년 유럽 혁명은 나토의 목적, 성격, 과제, 그리고 그 대륙에 대한 집중에 대한 전략적 재평가로 이어졌다. 1990년 10월, 동독은 독일 연방공화국의 일부가 되었고, 1990년 11월 소련과 파리에서 유럽 재래식 무력에 관한 조약(CFE)을 체결했다. 1991년 2월, 바르샤바 조약 기구가 붕괴되고 그해 12월 소련이 해체되면서 나토의 실질적인 주요 적대국들이 제거되면서 대륙 전체에 걸쳐 구체적인 군사 감축이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유럽의 군사비 지출과 장비들을 감소시키기 시작했다. 유럽 재래식 군대에 관한 조약(CFE)은 서명국들이 다음 16년 동안 52,000개의 재래식 무기를 제거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1990년부터 2015년까지 나토 유럽 회원국들의 군사 지출이 28% 감소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1990년 몇몇 서방 지도자들은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나토가 더 이상 동쪽으로 확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그 해 말에 체결된 독일 관련 최종해결에 관한 조약(2+4 조약)의 최종 문서에는 동쪽 확장 문제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1990년대에 나토는 이전에는 관심사가 아니었던 정치적, 인도적 상황으로 활동 범위를 확장했다.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는 동안, 나토는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보스니아에서 첫 군사 개입을 수행했고, 이후 1999년에 유고슬라비아에서 군사 개입을 수행했다. 이러한 갈등은 냉전 이후의 주요 군사 구조조정에 영향을 주었다. 나토의 군사 구조는 축소되고 재편성되었으며, 연합신속대응군단과 같은 새로운 병력이 창설되었다. 이는 1999년 이스탄불 정상회담에서 체결된 유럽 재래식 무력에 관한 조약(CFE)이 인정되고 소련의 붕괴에 따른 변화였다.
정치적으로, 나토는 새로운 중앙 및 동유럽 국가들과 더 나은 관계를 추구했고, 1994년 냉전 이후 동안 나토는 그 주변국 간의 평화를 위한 파트너십과 지중해 대화 계획을 포함한 협력을 위한 외교 포럼이 설립되었다. 1997년 나토 파트너십 협의회와 1998년 러시아 상설공동위원회가 출범했다. 1999년 워싱턴 정상회담에서 헝가리, 폴란드, 체코가 나토에 공식적으로 가입했고, 나토는 "개별 파트너십 실행 계획" 과 함께 새로운 가입 지침을 발표했다. 2004년 불가리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2009년 알바니아와 크로아티아, 2017년 몬테네그로, 2020년 북마케도니아 등 새로운 동맹 회원국들이 가입을 했다. 2007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프랑스의 군사 지위가 크게 개선되었고, 이로 2009년 4월 4일 정회원국으로 복귀하면서 프랑스는 독자적인 핵 억제력을 유지하면서 나토에 가입하였다.
북대서양 조약 제5조는 회원국이 무력 공격을 받는 모든 회원국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조항으로, 9.11 테러 이후 처음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발동되었으며, 그 후 나토가 주도하는 국제안보지원군(ISAF)의 군대가 아프가니스탄에 처음 배치되었다.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973호에 따라 이라크에 훈련병 파견, 해적 퇴치 작전 지원, 리비아 비행금지구역 시행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은 나토 국가들의 강력한 규탄으로 이어졌고, 나토 회원국 간 협의를 요구하는 북대서양 조약 제4조가 발동된 7차례 중 하나였다. 이라크 전쟁과 시리아 내전 당시 북대서양 조약 제4조가 발동된 적이 있다. 2014년 웨일스 정상회담에서 나토 회원국 정상들은 2024년까지 국내총생산의 최소 2%에 해당하는 금액을 국방비로 지출하기로 공식적으로 약속했다. 2016년 바르샤바 정상회담에서 나토 국가들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에 4개의 다국적 대대 규모의 전투단을 배치하는 나토의 개선된 전방 주둔군(EFP) 창설에 합의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후로 나토의 여러 나라가 연합국의 동쪽 측면을 강화하기 위해 지상군, 군함, 전투기를 보냈고, 여러 나라가 다시 북대서양 조약 제4조를 발동했다.2022년 3월, 나토 정상들은 브뤼셀에서 G7 정상들과 유럽 연합 지도자들이 참여한 임시 정상회담을 위해 만났다. 나토 회원국들은 불가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슬로바키아에 4개 전투단을 추가로 설립하기로 합의했으며, 이때 나토 역사상 처음으로 나토 대응군이 가동됐다.
2022년 6월, 나토는 러시아의 침략을 막기 위해 2500km 길이의 동부 측면을 따라 40,000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이 중 절반 이상이 불가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슬로바키아, 폴란드에 배치되었으며, 이 5개국은 259,000명의 전 나토 군대를 소집했다. 불가리아 공군을 보충하기 위해 스페인은 유로파이터 타이푼을 보냈고, 네덜란드는 F-35 라이트닝 II 공격기 8대를 보냈으며, 프랑스와 미국의 공격기도 곧 도착할 예정이다.
군사 작전.
초기 작전.
냉전 기간 동안 나토에 의해 수행된 군사 작전은 없었다. 냉전 종식 후, 1990년 앵커가드 작전과 1991년 에이스가드 작전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촉발되었다. 튀르키예 남동부 지역을 지원하기 위해 공중조기경보기가 파견되었고, 이후 신속대응부대가 이 지역에 배치되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개입.
보스니아 전쟁은 1992년 유고슬라비아의 해체의 결과로 시작되었다. 1992년 10월 9일, 상황이 악화되자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816호에 따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중부에 비행 금지 구역을 명령했고, 1993년 4월 12일, 나토는 비행 거부 작전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1993년 6월부터 1996년 10월까지 샤프 가드 작전은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에 대한 무기금수조치와 경제 제재를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1994년 2월 28일 나토는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항공기 4대를 격추하여 첫 전시 행동을 취했다.
1994년 4월 10일부터 11일까지 유엔 보호군은 고라주데 안전지대를 보호하기 위해 공습을 가했고, 나토의 지휘를 받는 미군 F-16 전투기 2대가 고라주데 근처에 있는 보스니아 세르비아군 사령부 전초기지를 폭격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세르비아는 4월 14일 유엔 요원 150명을 인질로 잡았다. 4월 16일, 영국 해병대 소속 시 해리어 한 척이 세르비아군에 의해 고라즈데 상공에서 격추되었다.
1995년 8월, 스레브레니차 집단 학살 이후 스릅스카 공화국군에 대한 나토의 폭격 작전이 시작되었다. 나토의 추가 공습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종식시켰고, 1995년 11월 데이턴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의 일부로서, 나토는 합동 노력 작전 하에 평화유지군(IFOR)과 유엔 평화유지군을 배치했다. 약 60,000명의 나토군이 이 평화 유지 임무에 비 나토 국가로부터 온 병력과 합류했다. 이 작전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안정화 부대(SFOR)로 전환되었는데, 처음에는 32,000명의 병력으로 시작하여 1996년 12월부터 2004년 12월까지 운영되었다. 이후 나토는 회원국들의 지도에 따라 이러한 작전에 대해 훈장을 수여하기 시작했다.
코소보 개입.
1998년 9월 23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코소보에서 세르비아 주도의 KLA 분리주의자들과 알바니아 시민들에 대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탄압을 막기 위해 결의안 1199호를 통과시켰다. 1999년 3월 23일 미국 특사 리처드 홀브룩와의 협상은 결렬되었고, 그는 이 문제를 나토에 넘긴다. 1999년 3월 24일, 이로 나토는 78일간의 폭격 작전을 시행했다. 연합국은 당시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의 군사력 약화를 목표로 삼았다. 나토는 코소보 난민들에게 인도적 지원을 하기 위해 국제 대응부대 중 하나인 ACE 육상기동부대를 알바니아에 있는 알바니아군(AFOR)으로 배치하기도 했다.
비록 이 작전은 큰 규모의 민간인 피해와 베오그라드에 있는 중국 대사관에 폭탄 피해가 생겼음에도, 1999년 6월 3일,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코소보 전쟁을 종식시킨 국제 평화 계획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6월 11일,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유엔 결의안 1244호를 수락했다. 이로 거의 100만 명의 난민이 코소보를 탈출했고, 이때 코소보군(KFOR)의 임무 중 일부는 폭력 및 공격을 막는 것 외에도 인도주의적 임무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2001년 8월부터 9월까지, 이 동맹은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알바니아계 민병대를 무장 해제하는 임무인 필수적 수확 작전을 개시했다. 2013년 12월 1일부터 31개국을 대표하는 4,882명의 코소보군(KFOR) 장병들이 이 지역에서 계속 활동하고 있다.
미국, 영국, 그리고 대부분의 나토 국가들은 1999년 세르비아에 대한 조치와 같은 나토 군사 공격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승인하도록 요구하는 것에 반대했고, 프랑스는 이 동맹에 유엔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영국 측은 "이것이 동맹의 권위를 손상시킬 것이고, 이에 러시아와 중국이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공격을 막기 위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며, 나토의 개입이 필요한 미래 분쟁에서도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어 조직의 전체 역량과 목적을 무효화할 수 있다" 고 언급했다. 냉전 이후의 군사 환경을 인식한 나토는 1999년 4월 워싱턴 정상회담에서 분쟁 예방과 위기 관리를 강조하는 동맹 전략 개념을 채택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미국의 9·11 테러는 나토가 사상 처음으로 북대서양 조약 제5조를 발동하게 만들었다. 이 조항은 어떤 회원국에 대한 공격이 모든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2001년 10월 4일, 북대서양 조약에 따라 나토가 이 공격이 실제로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고 북대서양 조약 제5조는 승인되었다. 이 공격에 대응하여 나토가 취한 8가지 공식 행동에는 테러범이나 대량살상무기의 이동을 막기 위해 고안된 지중해에서의 해군 작전인 이글 어시스트 작전과 액티브 엔데버 작전이 포함되었으며, 이는 2001년 10월 4일에 개시되었다.
2003년 4월 16일, 나토는 42개국의 군대를 포함한 국제 안보 지원군(ISAF)을 지휘하기로 합의했다. 이 결정은 합의 당시 국제 안보 지원군(ISAF)을 이끌던 독일과 네덜란드의 요청에 따라 이뤄졌으며, 이는 나토 대사 19명 전원의 만장일치로 승인되었다. 8월 11일, 이때 나토가 북대서양 지역 밖에서 임무를 맡은 것은 나토 창립 이후 처음이다.
국제 안보 지원군(ISAF)은 당초 탈레반, 알카에다, 파벌 군벌로부터 카불과 주변 지역을 확보해 하미드 카르자이가 이끄는 아프가니스탄 과도 이슬람국 수립을 허용하는 임무를 맡았다. 2003년 10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국제 안보 지원군(ISAF)의 임무를 아프가니스탄 전역으로 확대할 것을 승인했고, 국제 안보 지원군(ISAF)은 이후 4개의 주요 단계로 임무를 전국으로 확대했다.
2006년 7월 31일, 국제 안보 지원군(ISAF)은 미국이 이끄는 반테러 연합군으로부터 아프가니스탄 남부에서의 군사 작전을 추가로 인계 받았다. 남부에서의 전투가 격렬했기에 2011년 프랑스는 동맹을 지원하기 위해 다소 미라주 2000 전투기와 공격기 편대를 칸다하르로 이동시키는 것을 허용했다. 2012년 시카고 회담에서 나토는 2014년 12월 말까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중단시키고 나토가 이끄는 국제 안보 지원군(ISAF)을 해체하는 계획을 승인했다. 2014년 12월, 국제 안보 지원군(ISAF)은 해체되었고 후속 훈련인 확고한 지원 임무로 대체되었다.
2021년 4월 14일, 나토 사무총장 옌스 스톨텐베르그는 나토 동맹이 5월 1일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을 시작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나토군의 철수가 시작된 직후 탈레반은 무너진 아프간군 앞에서 빠르게 진격하며 아프간 정부를 향한 공세를 펼쳤다. 2021년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방위군은 아프가니스탄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수도 카불을 포위했다. 나토 회원국의 일부 정치인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서방군의 혼란스러운 철수와 아프간 정부의 붕괴를 나토가 건국 이래 겪은 가장 큰 재앙이라고 묘사했다.
이라크 훈련 임무.
2004년 8월, 이라크 전쟁 당시, 나토는 미국이 이끄는 이라크 다국적군(MNF-I)과 함께 이라크 보안군을 지원하기 위한 훈련 임무인 나토 이라크 훈련 임무 작전을 수립했다. 나토 이라크 훈련 임무 작전에 따른 이라크 다국적군(NTM-I)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1546호의 규정에 따라 이라크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창설되었다. 이라크 다국적군(NTM-I)의 목적은 이라크 보안군의 훈련 구조와 기관 개발을 지원하여 이라크가 국가의 요구에 부응하고 효과적이고 지속 가능한 역량을 구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라크 다국적군(NTM-I)은 전투 임무가 요구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북대서양이사회의 정치적 통제 하에 별개로 운영됐다. 운영 상의 중점은 훈련과 멘토링이었다. 임무의 활동은 이라크 당국과 미국이 이끄는 부사령관 자문 및 훈련과 함께 조정되었다. 이 임무는 2011년 12월 17일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튀르키예는 2003년 이라크 전쟁이 시작될 때 북대서양 조약 4조에 따른 첫 회의를 소집했다. 튀르키예는 2012년 시리아 내전 당시에도 두 차례나 이 조항을 인용했고, 비무장 튀르키예 F-4 정찰기가 격추된 뒤, 시리아에서 튀르키예를 향해 박격포가 발사됐고, 2015년에도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영토 보전에 대한 이슬람 국가의 위협이 있은 뒤에도 이 조항을 인용했다.
아덴만 해적 퇴치.
2009년 8월 17일부터 나토는 소말리아 해적들로부터 아덴만과 인도양의 해상 교통을 보호하고, 지역 국가들의 해군과 해안 경비대를 강화하기 위한 작전에 군함을 배치했다. 이 작전은 북대서양이사회에 의해 승인되었고, 주로 미국에서 온 전함들이 참여하였다. 오션 실드 작전은 소말리아에서 세계식량계획 임무의 일환으로 원조를 배급하던 연합국 제공자 작전의 선박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러시아, 중국, 한국도 이 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군함을 보냈다. 이 작전은 해적들의 공격을 저지하고 선박을 보호하며 이 지역의 전반적인 보안 수준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리비아 개입.
리비아 내전 기간 동안, 무아마르 알 카다피 대령 휘하의 시위대와 리비아 정부 사이의 충돌은 고조되었고, 2011년 3월 17일 휴전을 요구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973호가 통과되었다. 이로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한 군사 행동이 승인됐다. 3월 19일, 나토 회원국들의 연합국은 프랑스 공군의 아르마탕 작전을 시작으로 리비아 상공에 비행금지구역을 시행했다.
2011년 3월 20일, 나토 회원국들은 리비아에 대한 무기금수조치를 시행하기로 합의했다. 나토는 "불법 무기나 용병을 운반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선박을 감시하고, 보고하며, 필요할 시 차단하겠다."라고 말했다.
3월 24일, 나토는 초기 연합군으로부터 비행금지구역을 통제하기로 합의했고, 지상부대의 지휘권은 연합군이 통제를 하였다. 나토는 2011년 3월 27일 카타르와 아랍에미리트의 지원을 받아 유엔 결의안을 공식 시행하기 시작했다. 6월까지 28개 회원국 중 8개 회원국만이 전투 작전에 참여하면서 동맹 내 분열 보고가 표면화되면서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과 폴란드, 스페인, 네덜란드, 튀르키예, 독일 등이 대립했고 게이츠는 독일이 더 많은 기여를 요구하는 것과 조직 분쟁에 대해서 자신의 권한을 초과했다고 말했다. 6월 10일, 브뤼셀에서 열린 자신의 마지막 정책 연설에서 게이츠는 동맹국들의 행동이 나토의 종말을 초래할 수 있음을 시사하면서 동맹국들을 더욱 비판했다. 독일 외무부는 "독일이 나토와 나토 주도의 작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며 오바마 대통령이 이 작전을 너무 과대평가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임무가 9월까지 연장되는 동안, 노르웨이는 6월 10일 지원금 규모를 축소하고 8월 1일까지 철수를 완료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 주 초 덴마크 공군기들의 탄약이 바닥나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 다음 주, 영국 왕립해군의 수장은 분쟁에서 국가의 작전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2011년 10월, 무아마르 알 카다피 대령이 사망한 후 작전이 끝날 때까지 나토 항공기는 친카다피 목표물에 대해 약 9,500회의 폭격을 감행했다. 2012년 5월 국제인권감시기구의 보고서에 따르면 적어도 72명의 민간인이 이 작전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2013년 10월 쿠데타 시도에 이어 알리 자이단 리비아 총리는 나토에 지속적인 안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 자문과 지도원을 요청했다.
회원국.
나토는 주로 유럽과 북미에 30개의 회원국을 두고 있다. 이들 국가 중 일부는 북대서양 조약 제6조에 따라 나토의 '책임 지역'을 규정한 대서양 북회귀선까지만 남하할 수 있는 여러 대륙에 영토를 가지고 있다. 원래 조약 협상에서 미국은 벨기에령 콩고와 같은 식민지는 조약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나 프랑스령 알제리는 1962년 7월 3일 독립할 때까지 통치되었다. 30개국 중 12국은 1949년에 가입한 원회원이고, 나머지 18국은 8차례의 확대 회의 중에 가입을 했다.
미국이 나토 방위비의 4분의 3을 차지하나 국내총생산의 2% 이상을 국방비로 쓰는 회원국은 거의 없다.
특별 계약.
덴마크,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등 나토에 가입했던 북유럽 3개국은 항구적인 평시 기지는 없을 것이며, 핵탄두는 불허하며, 초청되지 않는 한 동맹국 군사활동이 허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세 가지 분야에 대한 참여를 제한하기로 결정했다. 하나 덴마크는 미 공군이 그린란드에 있는 툴레 공군기지를 유지하는 것을 허용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프랑스는 나토로부터 독립하는 군사 전략을 추구했다. 니콜라 사르코지는 2009년 프랑스의 통합군 사령부 복귀와 국방계획위원회 복귀를 협상했다. 프랑스는 나토의 핵 계획 그룹에 참여하지 않은 유일한 나토 회원국으로 남아 있으며 미국과 영국과는 달리 핵무장 잠수함을 동맹에 맡기지 않고 있다.
확장.
동맹 가입은 개별 파트너십 실행 계획에 따라 관리되며, 각 회원국의 승인이 필요하다. 나토는 현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핀란드, 스웨덴 등 3개 후보국을 보유하고 있다. 동맹 가입 과정에서 후보국들은 서로를 지원하기 위해 몬테네그로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2003년에 아드리아 헌장에 가입을 했다. 조지아 또한 후보국으로 지명되었고 2008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정상회담 동안 후보국 약속 받았지만, 2014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조지아가 현재 회원국으로 가는 길에 있지 않다고 말했다.2018년 북마케도니아는 프레스파 협정에 의해 마케도니아 국호 분쟁으로 그리스에 의해 가입이 차단되었다. 2019년 2월, 2020년 3월 27일에 북마케도니아는 나토 회원국이 되기 위한 가입 의정서에 서명했고 2020년 3월 27일, 정식 회원국이 되었다.
우크라이나와 나토 및 유럽 간의 관계는 정치적으로 논란이 많았으며, 이러한 관계 개선은 2014년 친러시아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축출된 '유로마이단' 시위의 목표 중 하나였다. 우크라이나는 동유럽의 8개국 중 하나로 개별 파트너십 실행 계획에 포함된다. 개별 파트너십 실행 계획(IPAP)은 2002년에 시작되었으며, 나토와의 관계를 발전 시킬 정치적 의지와 능력을 가진 국가들에 개방되어 있다. 2019년 2월 21일, 우크라이나 헌법이 개정되었고, 이는 유럽 연합과 나토 가입을 위한 우크라이나의 전략적 경로에 대한 규범이 기본법, 3개 조항 및 과도 조항 전문에 명시되어 있다. 나토 정상들은 2021년 6월 브뤼셀 정상회담에서 우크라이나가 맴버십 실행 계획(MAP)의 회원국이 될 것이며, 우크라이나가 외부의 간섭 없이 자신의 미래와 외교 정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결정을 2008년 부쿠레슈티 정상회의에서 반복했다. 2021년 11월 30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나토의 우크라이나 주둔 확대, 특히 러시아 도시나 루마니아, 폴란드와 유사한 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타격할 수 있는 탄도 미사일의 배치는 러시아에게 "레드라인", 즉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나토가 동쪽으로 확장하거나 "러시아 영토와 가까운 곳에 우리를 위협하는 무기 체계"를 두지 않을 것이라는 법적 보장을 요청했고,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우크라이나와 나토 동맹국 30개국만이 나토 가입 준비를 마쳤다. 러시아는 거부권이 없고, 발언권이 없으며, 러시아는 이웃 국가들을 통제하기 위해 세력권을 설정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소련의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유럽 및 미국 협상가들 사이의 평화적 독일 통일을 허용한 비공식적인 이해와 모순된다고 보고 정치적으로 계속 반대했다. 나토의 확장 노력은 종종 러시아를 포위하고 고립시키려는 냉전 시도의 연장으로 모스크바 지도자들에게 보여지지만, 이는 서방에서도 비판을 받았다. 2016년 6월 레바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의 68%가 발트 3국과 러시아와의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폴란드에 나토군을 배치하는 것이 러시아에 대한 위협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2017년 퓨 리서치 센터 보고서에서 조사된 폴란드인의 65%는 러시아를 "주요 위협"으로 지목했으며, 전체 나토 국가에서 평균 31%가 그렇게 답했다. 2018년 조사된 폴란드인의 67%는 폴란드에 미군이 주둔하는 것을 선호했다. 2016년 갤럽이 조사에 따르면 동유럽에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를 제외한 비독립국가연합(CIS) 국가인 모든 국가는 나토를 위협이라기보다 우호적으로 보는 시선이 더 많았다. 2006년 안보 연구 저널의 한 연구는 나토의 확대가 중부 및 동유럽의 민주적 통합에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나토의 확장에 대해 중국도 반대 입장을 표하고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핀란드와 스웨덴에서 나토 가입을 찬성하는 여론이 크게 흔들리면서 처음으로 나토 가입을 반대하는 국민보다 나토 가입을 지지하는 국민이 더 많았다. 2022년 3월 30일,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핀란드 국민의 61%가 나토 가입을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4월 1일 여론조사에 따르면 스웨덴 국민의 약 51%가 나토 가입을 찬성한 반면 27%는 반대했다.4월 중순, 핀란드와 스웨덴 정부는 나토 가입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핀란드 정부는 이 사안에 대한 보안 보고서를 의뢰했다.두 북유럽 국가가 가입을 하게 된다면 북극, 북유럽, 발트해 지역에서 나토의 역량이 크게 확대될 것이다.
2022년 5월 15일, 핀란드 정부는 핀란드 의회의 허가를 조건(5월 17일 의회 투표 결과, 찬성표 188,반대표 8)으로 나토 가입을 신청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스웨덴 총리 마그달레나 안데르손도 5월 17일에 나토 가입을 신청할 것이라고 발표했고, 핀란드와 스웨덴은 5월 18일에 정식으로 나토 가입을 신청했다. 그러나 튀르키예는 핀란드와 스웨덴이 나토 가입하는 것에 대한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면서 튀르키예가 테러단체로 지정한 쿠르디스탄 노동자당(PKK)과 인민수호부대(YPG)를 핀란드와 스웨덴이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2022년 6월 28일, 마드리드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튀르키예는 핀란드와 스웨덴의 가입 신청을 지지하기로 합의했다. 2022년 6월 28일 나토 정상회의의 결정을 공식 승인했으며, 2022년 7월 5일 30명의 나토 대사는 스웨덴과 핀란드의 가입 의정서에 서명했다. 2022년 9월 17일 현재 슬로바키아, 헝가리, 튀르키예를 제외한 모든 국가가 비준했다.
나토 방위비 예산.
지난 몇 년간 나토 회원국의 증가는 국방비의 증가로 이어지지 않았다. 되려 나토 회원국들은 국방예산의 감소를 우려하여 재정 형평성 약속을 개선하고 재정 지출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2014년 웨일스 정상회의에서 국방 투자 서약을 제정하기 위해 만났다. 회원국들은 2024년까지 국내총생산(GDP)의 최소 2%를 국방에, 국방예산의 20%를 국방 연구개발에 배정하는 등 주요 장비에 분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국방 투자 공약 이행은 회원국의 법적 구속력 있는 의무 부재, 유럽연합 재정법, 회원국의 국내 공공지출 우선순위, 정치적 의지로 인해 방해를 받고 있다. 2020년 18개 나토 회원국은 주요 장비에 대한 20% 기여라는 목표를 달성했다. 2021년 8개 회원국은 국방비에 대해 국내총생산(GDP) 기여율 2% 목표를 달성했다. 웨일즈 권고사항 준수 개선은 러시아 연방이 제기하는 회원국의 안보에 대한 위험이 증가함에 따라 촉진되었다.
제3국과의 파트너십.
평화를 위한 파트너십(PfP) 프로그램은 1994년에 설립되었으며 각 파트너 국가와 나토 간의 개별적인 양자 관계에 기초하고 있다. 해당 회원국은 독립국가연합의 현재 및 이전의 모든 회원국을 포함한다. 유럽-대서양 파트너십 이사회(EAPC)는 1997년 5월 29일에 처음 설립되었으며, 50명의 참가국들 간의 정기적인 조정, 협의, 대화를 위한 포럼이다 평화를 위한 파트너십(PfP) 프로그램은 유럽-대서양 파트너십의 운영 부서로 간주된다. 아프가니스탄과 다른 제3국들도 평화를 위한 파트너십(PfP) 체제의 일부 활동에 참여하기 위한 의사를 표했다.
유럽 연합은 2002년 12월 16일 베를린 추가 협정에 따라 나토와 포괄적인 협정을 체결했다. 이 합의로 유럽 연합은 나토 스스로가 행동하기를 원하지 않는 조건, 이른바 "우선매수청구권"을 조건으로 국제 위기 상황에서 독립적으로 행동하기를 원하는 경우에 나토 자산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예를 들어, 1982년 리스본 조약의 42조 7항은 "회원국이 그 영토에 대한 무력 침략의 피해자일 경우, 다른 회원국들은 그들의 권한에 있는 모든 수단을 통한 원조와 책임 의무를 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조약은 전 세계적으로 지정된 영토에 적용되는 반면 나토는 북대서양 조약 제6조에 따라 북회귀선 이북의 작전에 제한된다. 또한 평화를 위한 파트너십(PfP) 프로그램과 연계된 유럽 연합 회원국들을 위한 "이중 체제"를 제공한다.
나토는 수많은 비 나토 회원국과 협력하고 활동을 논의하고 있다. 지중해 대화 계획은 이스라엘 및 북아프리카 국가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조정하기 위해 1994년에 수립되었다. 이스탄불 협력 구상은 2004년에 지중해 대화와 같은 노선을 따라 중동을 위한 대화 포럼으로 발표되었다. 여기서 네 국가들이 걸프 협력 회의를 통해서도 연관되어 있다.2018년 6월, 카타르는 나토에 가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나토는 북대서양 조약 제10조에 따라 유럽 국가만 추가로 가입할 수 있다고 말하며 가입을 거부했다. 카타르와 나토는 앞서 2018년 1월 안보협정에 함께 서명한 바 있다.
일본과의 정치적 대화는 1990년에 시작되었고, 그 이후로 동맹은 이러한 협력 구상의 일부를 구성하지 않은 국가들과의 접촉을 점차 늘려왔다. 1998년 나토는 공식적인 관계 제도화를 허용하지 않지만 협력을 늘리려는 동맹국의 열망을 반영하는 일련의 일반 지침을 수립했다. 광범위한 논쟁 끝에 2000년 동맹국이 "연락 국가"라는 용어를 동의하였다. 2012년까지 동맹은 "전 세계 파트너" 또는 "글로벌 파트너"라는 이름으로 해적 퇴치 및 기술 교류와 같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임을 넓혔다. 연락 국가인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도 AUSCANNZUKUS 전략동맹의 회원국으로 연락 국가와 나토 회원국 간의 유사한 지역적 또는 양자적 협정 또한 협력에 도움을 주고 있다. 옌스 스톨텐베르크 나토 사무총장은 나토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일본, 한국과 긴밀히 협력함으로써 "중국의 부상"에 대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콜롬비아는 나토의 최신 파트너이며 콜롬비아는 나토가 파트너에게 제공하는 모든 협력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콜롬비아는 나토와 협력한 최초와 유일한 라틴 아메리카 국가가 되었다.
구조.
나토의 모든 기관 및 조직은 민간 행정 또는 군사 행정 역할로 분류된다. 대부분 동맹 전체의 안보 역할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역할과 기능을 수행한다.
민간 조직:
군사 조직:
나토의 조직 및 기관:
나토 의회(NATO PA)는 매년 2차례 열리는 나토의 전략적 목표를 폭넓게 정하는 기구다. 나토 의회(NATO PA)는 상임이사국 또는 나토 대사를 임명하는 회원국 정부의 의회 구조와 직접 상호 작용한다. 나토 의회는 북대서양 동맹 회원국 의원들과 13명의 준회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나토와는 구별되는 구조이며, 나토 이사회의 안보 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나토 국가 대표들과 함께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나토 군사령관의 법적 권위.
나토는 30개 주권국가로 구성된 동맹국이며 그들의 개별 주권은 동맹 참여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나토는 의회도 없고, 법도 없고, 집행도 없으며, 개별 시민을 처벌할 권한도 없다. 이러한 주권 부족의 결과로 나토 사령관의 권력과 권한은 제한된다. 나토 지휘관들은 합법적인 명령을 따르지 않거나, 의무를 태만히 하거나, 고위 장교에 대한 무례와 같은 범죄를 처벌할 수 없다. 그래서 나토 지휘관들은 복종하기를 기대하지만 때로는 통일 군사 재판법(UCMJ)처럼 행동강령의 적용을 받는 관계자들에게 자신들의 목적이나 계획을 확고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나토 사령부는 작전계획(OPLAN), 작전명령(OPORDER), 전술방향, 단편명령(FRAGO) 등의 형태로 부하 지휘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다. 공동 교전 규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국제인도법은 항상 지켜져야 한다. 작전 자원은 국가 지휘하에 있지만 일시적으로 나토에 이관되었다. 비록 이러한 국가 단위의 명령들은, 공식적인 권한 이양 과정을 통해, 나토 사령관의 작전 지휘와 통제 하에 놓였지만, 회원국들은 결코 그들의 국가적인 성격을 잃지 않는다. 국방참모총장(CDS)과 같은 고위 국가 대표들은 소위 '레드카드 보유자'로 간주된다. 레드카드는 국가별로 열거된 제한 사항을 말하며 나토 사령관은 이에 대해 고려할 의무가 있다.
견해.
나토는 개별 회원국 정상들 간의 긴장이 지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동맹 내 대중들 사이에서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인다. 조사 대상 16개 회원국에 걸쳐 53%의 중위수가 조직에 대해 호의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으며, 부정적인 견해를 밝힌 비율은 27%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토의 의견과 관련 문제는 조사 대상 국가마다 매우 다양하며, 특히 한 회원국에 대한 공격은 모든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된다고 선언한 워싱턴 조약의 제5조의 의무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회원국 중 나토에 대한 긍정평가는 폴란드 82%와 튀르키예 21%로 비교적 편차가 큰 편이며, 미국과 독일이 각각 52%와 57%로 중간 정도의 수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조사 대상 중 비회원국인 스웨덴과 우크라이나가 동맹을 긍정적으로 보고(각각 63%와 53%) 있지만 러시아는 16%만이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
2908 | 595831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908 | 김정일 | 김정일(金正日, , 1941년 2월 16일 ~ 2011년 12월 17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지도자였다. 또한 김정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의 위원장이였으며, 아버지 김일성, 어머니 김정숙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다.
김정일은 어린 시절 한국 전쟁 당시 평양시를 떠나 간도 지역으로 은신하였으나,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귀환했다. 또한 김정일은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61년 7월 22일에 조선로동당에 입당한 이후부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과 비서 등에 임명되었다. 또한 1974년부터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정되었으며, 1980년 제 6차 0당 대회를 통해서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었다. 또한 1994년 김일성 국가 주석의 사망 이후에 권력을 세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실권을 잡아 통치자가 되었고 경제적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던 1993년부터 6년 동안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재정낭비등으로 무능력한 지도자로 비판받았다. 2011년 12월 17일에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하면서 김정일의 후계 자리는 그의 셋째 아들인 김정은에게 승계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선로동당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이시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신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로 불린다. 그리고 김정은의 아버지다.
생애.
출생과 가정 배경.
김정일은 1941년 소비에트 연방에서 김일성과 김정숙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김정일이 1942년에 백두산 근처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데, 역사학자들은 이 주장이 거짓이라고 본다. 출생년도를 1942년으로 조작한 것은 김일성의 출생년도 1912년과 30년 주기로 맞추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흔히들 김정일이 소비에트 연방(현재의 러시아) 하바롭스크 인근 뱌츠코예에서 유리 이르세노비치 킴(, Yuri Irsenovich Kim)이라는 이름으로 출생했다고 하지만 이도 정확하지 않다. 김일성 일가가 뱌츠코예에 88여단이 창설되면서 거기로 이주한 것은 1942년 7월 중순이므로, 뱌츠코예는 김정일의 출생지가 아니라 유년기를 보낸 곳이다. 또 소련군 시절 김일성의 이름은 김일성(Ким Ир Сен, Kim Ir-sen) 아닌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이었으며, 소련군 문서에는 해방 후 평양에 온 뒤인 1945년 10월 2일부터 김일성(Ким Ир Сен)으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 따라서 김정일의 소련식 이름 유리 이르세노비치 킴(Юрий Ирсенович Ким)도 평양에 온 이후에나 가능하고, 소련에 있을 당시 이름은 유리 지체노비치 진(Юрий Жичэнович Цзин, Yuri Zhichenovich Jing)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김정일의 정확한 출생지를 두고는 논란이 많으나 명백히 밝혀진다. 만주서 일본군의 토벌에 쫓기던 김일성은 김정숙과 함께 부하 몇명을 데리고 1940년 10월 23일 소만국경을 불법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한다. 소련으로 망명해온 항일연군들은 보로실로프(오늘날의 우수리스크) 근처의 남야영(南野營, B야영)과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A야영) 두 곳에 분산 수용되는데 김일성은 남야영에 들어간다. 김정일은 거기서 1941년 2월 16일 태어났다. 남야영은 보로실로프 근처 조그만 기차역이 있는 하마탄이란 마을에 있었다고 하는데,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중간쯤에 있는 오늘날의 라즈돌노예 마을이다. 김정일이 태어난 집은 라즈돌노예 마을길 (Lazo St.) 88번지(2층 빨간벽돌집)로 기차역 부근이며, 지금도 남아있어 연해주 관광객들의 관광 코스로 되어 있다.
라즈돌노예 기차역은 스탈린이 1937년 연해주 한인들 17만여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실어나르던 출발지로, 고려인들의 한이 맺힌 곳이다. 김일성 가족이 88여단이 창설되면서 뱌츠코예 마을로 이주한 것은 1942년 7월이다.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백두산 근처 밀영에서 1942년 2월 16일 태어난 것으로 선전하고 있으며, 이 밀영은 성역화되어 있다. 하지만 김정일이 그런 곳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거니와, 김일성이 빨치산 활동 당시 백두산 속에 밀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만한 근거도 없다. 그가 한동안 백두산 인근 만주의 창바이 현(長白縣), 푸쑹 현(撫松縣), 안투 현(安圖縣) 등지에서 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식량과 물자 조달이 어렵고, 겨울이면 외부와 단절되어 고립되는 백두산 깊숙한 곳에 밀영을 만들어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고, 그런 곳에서 한겨울에 김정일을 낳았을 가능성은 더욱더 없다. 해방 후 김일성을 항일 영웅으로 조작하는 과정에서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의 이미지를 덧붙이기 위해 지어낸 말이며, 백두혈통이니 하는 말도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다. 레오니드 바신도 후일 해방 직후 소련 군정 당시 일을 회상하며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문이 퍼지자 "우리는 그가 진짜이고 백두산의 호랑이가 맞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다."라고 증언하였다. 이를 보아도 백두산의 이미지는 억지로 끌어다 붙여 조작한 것이다.
어린 시절 그는 러시아어 이름 유리의 애칭인 '유라'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1945년 8·15광복 이후 부모를 따라 북한으로 들어온 후로도 한동안 '김유라'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 이후 러시아식 이름을 버리고 김정일(金正一)이라 하였고, 1980년에는 한자 이름을 正日로 개명하였다. 북한 쪽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고 처음부터 김정일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정일(正日)이라는 이름은 어머니 김정숙(金正淑)의 '정'(正)과 아버지 김일성(金日成)의 '일'(日)을 합친 이름이다. 조부 김형직이나 조모 강반석은 그가 태어나기 이전에 사망했으나, 증조부 김보현과 증조모 이보익은 그가 10대일 때까지도 생존하고 있었다.
광복으로 귀국한 후, 김정일은 북한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아홉 살 때 어머니가 난산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후 김정일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불우하게 자랐다.
유년기.
김정일은 1948년 평양 시내의 남산소학교 인민반에 입학했다. 남산소학교 인민반 졸업후 한국 전쟁 중에는 만경대 혁명자유자녀학원에 편입했으며, 그 후 삼석인민학교로 진학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던 그는 권좌에 오른 뒤 어머니 김정숙에게 ‘항일의 여성혁명가 백두 여장군’이라는 칭호를 붙이며 영웅화하였고, 북한 여성이 따라야 할 귀감으로 미화시켰다. 김정숙의 출생지인 함경북도 회령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81년에는 량강도 신파군이 김정숙군으로 지역명을 바꾸기도 했다. 그가 어머니의 우상화에 공을 들인 것은 계모인 김성애와의 권력투쟁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아버지 김일성은 재혼한 김성애와의 사이에 김평일(폴란드 주재 대사)·김영일(사망)·김경진(오스트리아 주재 북한 대사 부인) 등 세 자녀를 뒀는데, 김정일은 후계자 지명 과정에서 이들 및 이들의 후견인격으로 있던 삼촌 김영주와 권력투쟁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일대기에 따르면, 김정일은 1950년 9월부터 1960년 8월 사이에 일반 교육 코스를 끝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6·25전쟁 후에 평양 제4인민학교를 졸업하고 1953년 2월 10일 학급 소년단원들과 함께 <김일성장군님의 략전연구소조>를 조직하였다. 남한 정보에 의하면 1954년 평양 남산고급중학교에 입학하여 1960년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성적은 썩 우수한 편은 아니었으나 상위권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망과 계모와의 관계 등으로 음울한 유년기를 보냈다. 체육이나 활동적인 것보다는 주로 독서와 시, 작문 등에 심취하였다.
청소년기.
김정일은 1954년 9월 평양제1중학교에 입학하여 1957년 8월 중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56년 5월에는 제1차5개년계획의 전망에 대한 사대주의, 교조주의에 물젖은 어느 노동당 간부를 강연에서 논박하기도 했다 한다. 1955년 4월 만경대와 칠골혁명사적지 참관을 조직하고 1956년 6월 5-14일에는 평양제1중학교 혁명전적지들에 대한 답사행군을 하였다. 그 뒤 1957년 9월 1일부터 평양제1중학교 고급반에 진학하여 1960년 평양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했다. 남산고급중학교 재학 중에 이 학교의 교사로 재직함과 동시에, 교내 민주청년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58년 6월 27일에는 종파주의자를 뿌리뽑자는 취지의 학교민청총회를 소집하기도 하였다. 이 시절의 김정일은 감수성이 풍부했고 감정적이었다고 한다.
고급반을 졸업한 1960년 9월부터는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고, 1964년 4월에 졸업하였다. 젊은 시절에 그의 관심거리는 음악, 농업, 그리고 자동차 수리였다. 그는 학술 경쟁과 세미나를 조직하였을 뿐 아니라 야외 연구여행을 도와주기도 했다. 독서에 취미를 붙여 김일성의 고전적 로작들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저서들을 탐독하고 기계공학과 농학, 축산학과 같은 전문기술분야의 책들, 사회과학과 문학예술 분야의 책들을 읽기도 했다 한다.
청년기.
김정일은 1957년 평양제1중학교를 졸업하고, 남산고급중학교를 거쳐 1963년에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정치경제학과를 공부한 다음 문학, 교육, 예술, 언론 개혁, 그리고 천리마운동에 대해서 보다 과학적인 방법들을 주장 하였다고 한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그는 문학과 시에 빠지기도 했고, 다양한 책을 탐독하기도 했다. 또한 김일성 및 공산주의 사상을 찬양하는 시와 산문을 짓기도 했고, 가곡도 몇 편 작곡하기도 했으며, 직접 영화 대본과 희극 대본을 쓰기도 했다.
대학 재학 중 그는 소련과 폴란드, 동독, 중화인민공화국 등을 두루 여행하였고, 비공식적으로는 미국과 프랑스의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정치 활동.
조선로동당 활동.
김일성종합대학 재학 중이었던 1961년 7월 22일 김정일은 조선로동당에 정식으로 입당하였다. 입당 초기 학생당원의 신분이었으나 그는 아버지인 김일성 당시 내각수상 밑에서 주체사상을 지도하는 데 관여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조선로동당의 평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64년 6월 조직지도부 지도원이 되었다. 1969년 9월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 및 선전선동부 부장을 지냈다. 이후 중앙당 문화예술부장, 중앙당 조직 및 선전비서, 정치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72년 10월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73년 9월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7차 전원회의에서는 조직 및 선전 담당 비서로 선출되었다. 1974년 2월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는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3대 혁명 소조운동 주도.
김정일은 천리마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경제성장 운동에 동참했다. 1973년부터 전개된 3대혁명 소조운동을 조직, 직접 지도하였고 1970년대 말부터 3대 붉은 기 쟁취 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1980년 10월 조선노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위원회 비서, 당 중앙군사위원으로 선출되면서 후계자로서 지위가 확정되었다. 이 대회에서 김정일은 최초로 대중 앞에 자신의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1982년 2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이후 죽을 때까지 8, 9, 10, 11, 12기 대의원을 연임했다.
1984년 5월 18일에는 로작 《남조선인민들의 반미자주화투쟁은 높은 단계의 애국투쟁이다》를 발표하였다.
인민군 지휘관 취임.
이후 조선로동당 조직담당 비서를 거쳐, 1990년 5월에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맡았으며, 1991년 12월 24일 당 중앙위 5기 19차 전원회의에서는 김일성이 40년간 맡고 있던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직을 승계받는다. 그 뒤 1992년 4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칭호를 받았다. 그는 대원수에 취임하지 않은 대신 다른 원수들과의 구별을 위해 다른 원수들은 조선인민군 원수라 하고 공화국 원수라는 계급을 별도로 신설하여 자칭하였다. 1993년 4월 헌법개정을 통해 국가주석의 국방위원회 위원장 겸임조항을 삭제하면서 국방위원장직도 넘겨받았다.
정적 숙청.
1970년대부터 자신의 경쟁자이자 잠재적 후계자였던 숙부 김영주를 실각시킴에 따라 1990년대 이후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식 행사 석상에서 김영주는 보이지 않게 된다. 김영주는 김정일의 배다른 동생 김평일과 김영일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김일성이 주변에서 후계 논의를 제기할 당시“10년은 더 할 수 있다”며 후계자 낙점에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일성의 부인 김성애가 압력을 넣자 오진우 등 빨치산 세력들이 반발해 김정일이 후계자로 일찍 결정됐다는 시각도 있다. 김정일의 집권 이후 김성애 역시 공식석상에서 제외되었고, 김평일은 외교관으로 전임되었다.
인민대학습당 사건.
김일성은 인민대학습당을 짓기 위해서 부지를 마련해 놓았다. 그런데 1973년, 김일성이 인민대학습당을 건설하기 위해 확보한 땅에 김성애의 남동생인 김성갑이 자신의 사저를 짓는 사건을 저질렀다. 김정일은 이 사건을 끝까지 추적해서 낱낱이 파헤친 다음 김일성에게 보고했으며 그러고도 모자라 가는 곳마다 이 사건을 떠벌였다. 이에 머리끝까지 분노한 김일성은 당장 김성갑을 숙청했으며 김일성이 대노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과 부부싸움을 벌인 김성애는 김일성과 멀어졌다. 게다가 김정일은 이 기세를 몰아서 김평일을 포함한 김성애 가문 구성원들을 뒷조사해서 그들의 비리를 낱낱이 까발렸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건으로 인해 김일성은 김성애의 친아들인 김평일을 후계구도에서 영원히 배제했다. 이후 김평일은 유고슬라비아 주제 북한 대사로 발령나는 것을 시작으로 한참동안 외국을 떠도는 신세가 된 반면 김정일은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한 공훈으로 인해 김일성의 후계자로 확정되었다.
김성갑이 인민대학습당 부지에 자기 멋대로 사저를 짓는 사건을 일으키는 바람에 그 사저를 철거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으며 이로 인해 인민대학습당은 예상보다 10년 가까이 늦게 지어졌다.
집권 이후.
집권.
김일성 사망 직후.
1994년 아버지인 김일성이 사망하자 3년간의 유훈통치를 발표하였으나 사실상의 통치권자가 되었다. 김일성을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하면서 사실상 국가주석직을 폐지하고, 명목상의 국가원수직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맡게 하되, 김정일 본인은 군사권을 장악한 국방위원장으로 실권을 행사하였으며 2009년 4월 9일에야 헌법을 고쳐 헌법상의 국가원수에 취임하였다.
1990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2년 구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목격한 그는 개방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나진·선봉의 무역지구를 대폭 확대하였고, 개성직할시 내의 개성공단, 함경남도 원산 등의 무역항을 재정비하고 국외 상인들의 출입을 허용했다. 1998년 이후에는 중국의 경제 특구제를 도입하여, 4개의 경제특구를 지정하였다. 사상적으로는, '주체사상의 최종적인 해석권은 수령과 그 계승자에게 있다는 정치적 특권'을 강조하여, 국가지도자 한 사람에게 불법적인 권력이 집중되는 북한의 현 제도를 이론적으로 확립시켰다.
1997년 6월 김정일은 일꾼들에게 '여운형선생 서거 50돐이 되는 계기에 모란봉극장에서 추모회를 조직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1991년 나진과 선봉 지역에 경제특구를 만들어 국제 교역의 거점으로 만들려 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1997년 10월 조선로동당 총비서에 선출되었다. 1998년 11월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과 평양에서 회담을 가졌다. 1999년 1월초에는 신년사에서 새해를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의 해'라고 선언하였다.
과학기술발전 5개년 계획 추진.
김정일은 경제의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공학의 중요성을 알고 이때 과학기술발전 5개년 계획을 3차례에 걸쳐서 준비를 하였으며 특히 전자 공학과 화학 공학 그리고 생명 공학 위주로 추진을 하게 되었다.
특히 반도체 개발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소프트웨어 개발을 육성을 하게 되었으며 특히 리소그래피 장비와 반도체 재료들을 도입하기 위하여 독립채산제를 7.1 경제개혁조치와 더불어 추진을 하게 되었다.
이때 전자 공학 부문에서는 주사전자현미경을 1999년에 개발을 하게 되었고 광학식 패턴 발생기에서 사선 패턴 노광기술을 확립하였으며 특히 알루미늄 배선 기술을 확립한 CMOS를 개발하여 충격을 주었다.
또한 음극 비산 식각법에 의한 알루미늄 2층 배선 제작 기술을 갖추었으며 2000년에는 16비트 마이크로컨트롤러 개발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2005년에는 16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개발하였으며 특히 0.5um 초점심도의 위상반전마스크를 개발하여 111호 마스크 제작소에서 개발하였고 특히 2008년에는 LCD TV의 미세 컬러 필터와 함께 2010년 LCD TV를 자체 개발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2007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45nm 표준셀용 ASIC 제작 기술을 설계 확보하고 제작 기술을 확립하는데 성공을 거둔 사실이 조선중앙통신에 특종보도가 되었다.
2008년에 20nm급 표준셀 제작 기술을 확보하여 평양 집적회로 시험 공장에서 파운드리하여 실증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걸로 바탕으로 2014년에 0.3um 초점심도의 위상반전마스크를 개발하는데 성공을 하였다.
2000년대 이후.
2003년과 2009년 국방위원장에 다시 재추대되었고, 2010년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당 총비서, 당 정치국 상무위원, 당 정치국 위원, 당 중앙군사위 위원장, 당 중앙위 위원 등에 선임되었다. 김정일은 2008년 뇌혈관 질환으로 쓰러진 뒤 2009년 전후, 김정은을 '청년대장'으로 소개하였다. 이어 2010년 9월 김정은이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을 맡으며 공개석상에 처음 등장하였는데, 김일성 주석을 빼닮은 외모로 큰 관심을 끌었다.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김대중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과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을 가진 뒤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은 분단 52년 동안 서로 대립하고 있었던 남북의 긴장을 완화하고, 남북 경제교류 활성화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시금석이 되었다. 이에 따라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남북선수들이 동시 입장하였고, 1998년 시작된 금강산 관광 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 사업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정몽헌 회장을 만나 성사시킨 것이다.
2001년에는 여러 번 러시아를 방문하여 당시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 등과 회담하였고, 푸틴이 답방하여 회담을 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10월 2일부터 10월 4일에 걸쳐 노무현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과 두 번째 남북 정상 회담을 가졌다. 회담의 결과는 남북간 신뢰 구축, 협력 강화 등의 목표를 담은 10·4 남북 공동선언(정식 명칭은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으로 발표되었다. 김대중의 평양 방문 때 다음번 회담에는 서울에 답방하겠다고 하였으나 방문하지 않았다.
2009년 4월 9일에는 헌법을 고쳐 헌법상의 국가원수에 취임하였다.
기타 활동.
북한의 식량난.
2000년 이후 러시아와 중화인민공화국을 수시로 방문하여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미국의 카터, 클린턴 등의 전직 대통령 역시 수시로 평양을 방문하여 외교 활동을 하고 있다. 외교활동의 목적으로 그는 자원 지원을 주로 중점적으로 하였다.
북한은 1993년부터 역사적으로 유래없는 자연재해와 공산주의권 나라들의 붕괴, 그리고 서방세력의 경제봉쇄 등으로 최악의 경제난 및 식량난을 겪었는데, 이를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른다. 약 6년간의 고난의 행군을 마치고 북한은 이제 강성대국으로 향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한민국 통계청이 유엔의 인구센서스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북한주민 33만여명이 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시기에 굶어 죽었다. 2003년에 발표된 국제앰네스티의 리포트에서는 북한 인구의 절반을 넘는 1300만 명이 기근에 시달리고 있으며 2001년에는 미국, 한국, 일본, 유럽연합 등으로부터 상당량의 식량, 비료 원조를 받기도 하였다.
7.1 경제개혁조치.
김정일은 선군경제노선을 관철시키기 위하여서는 결국 비전략부문의 이전을 간구하여야할만한 이유가 있었음을 알수가 있었다. 결국 김정일은 이때 2001년 10.3 방침을 계기로 2002년 7월 1일 7.1 경제개혁조치를 실시를 하게 되었고 이때 비전략부문의 전략 부문 이전을 위한 것과 계획 메커니즘과 시장 메커니즘을 동시에 수립을 하게 되었다.
계획작성, 가격제정, 자재 공급 전반에 걸친 것으로서 계획작성은 전략적 중요성을 가진 지표는 국가계획위원회에서 계획하지만 나머지는 해당 기업소에서 하도록 하였다.
지방경제부문은 공업총생산액이나 기본건설투자액 등 중요지표를 제외한 세부지표는 도, 시, 군 자체 실정에 맞게 계획하도록 지시하였으며 가격제정에서도 지방공업 생산품은 상급기관의 감독아래 공장 자체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자재공급체계에서도 생산물의 일부분을 자재용 물자교류에 사용할 수 있게 했으며 사회주의 물자교류시장을 허용하였다.
경제연구에 의하면 번수입은 현물지표별 계획에 따르는 수입뿐만 아니라 계획외의 수입도 포함된다는 것인데 계획외의 수입이 중시되어야 할 부분이고 물론 계획외의 수입만 추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계획을 수행한 다음에 추가로 생산되는 계획외 수입을 평가실적에 인정해준다는 단서가 달려있기는 하다.
즉, 현물지표별 계획을 수행하였을 때에는 번수입계획수행률을 그대로 인정하지만, 현물지표별 계획을 수행하지 못하였을 때에는 범칙금을 계산하여 번수입계획수행률에서 떼고 평가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기업소는 해당 지역의 감독기관과 협의를 통해 소규모 설비를 이관 및 폐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 있게 됨으로 사장되는 유휴설비의 이용률 제고를 도모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경제개혁조치 이후 동일한 생산과정을 위해 투입되는 노동력을 20 – 30% 줄일 수 있다고 증언하였으며 그는 생산과정에 대한 재조정을 통하여 절약한 노동력은 다른 부분 예를 들어서 기업 외부의 활동과 주택건설이나 도로교통 등에 활용한다고 하였다.
국가의 재정 수입 및 지출 항목을 조정했으며 국가납부금을 번수입에 기초하여 징수함에 따라 간접세 성격의 거래수입금을 폐지하고 이를 직접세 성격의 국가기업이익금에 통합시켜 국가기업이득금이라는 항목으로 예산수입의 원천을 단순화하였으며 2006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장으로 50%의 국가기업이득금만 내면 나머지 유동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2004년 급진개혁안 실행.
2003년 김정일은 박봉주를 총리로 선임하면서 많은 직권을 주었고 특히 많은 개혁 조치에 대하여 엄청난 영향을 받기도 하였으며 특히 2004년에 실행한 거시적인 급진 개혁안 조치가 벌어졌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결국 2004년을 전후하여 결국 중국에서 추진되었던 포공도조 수준의 농지개혁을 실행하였고 농민 한명당 평균 400평의 농지를 경작하게 하고 특히 수매가의 1.8배 높은 36원에 농지 사용료를 내게하고 특히 30%는 세금으로 내고 특히 30%는 수매하고 40%는 6개월 동안의 배급량을 주었다.
탈북자 및 북한주민 지원 단체인 좋은 벗도 최근 발간한 북한소식 1호에서 북한 당국이 올해 3월부터 1인당 300평씩 토지를 배분한 뒤 토지의 질에 따라 상중하로 세금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어떤 농민은 개인경작에 필요한 노동 시간까지 보장받았으며 함경북도 회령시에 사는 사람은 농민은 전체 노동시간의 3분의 2를 농장의 공동경작지에서 일하고 3분의 1은 개인경작지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농장은 개인에게 개인경작지용 비료 등을 지원하고 가을에 현금이나 곡물을 대가로 받아간다며 모든 농가는 개인경작지로 6개월 동안의 식량을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반상점은 기존 국영상점을 기관, 기업소에 임대하여 자율 운영토록 한 위탁상점과 기관, 기업소가 개설한 직매점으로 구분되며 국가는 일부 실적이 부진한 국영상점의 운영권을 능력이 있는 기관, 기업소에 이관하여 국영상점과 일반상점간 경쟁을 유도하고 있다.
영업이 부진한 일부 국영상점을 기관, 기업소, 인민반에 임대 및 분양하고 대신 임대료를 징수하고 있고 가격은 국가계획에 따라 유통되는 상품의 경우에는 국정가격으로 판매하나 비계획상품의 경우에는 시장가격 명확히는 합의가격으로 판매한다.
개인 명의 상점운영은 아직 불허하고 있으나 일부 자금력이 있는 개인은 기관, 기업소 명의를 이용하여 실질적으로 직접 운영하는 사례가 있다.
식당 운영과 관련해서도 국영식당과 합의제식당으로 이원화되어 있는데 국영식당은 국가가 합의제식당은 기관, 기업소가 경영하는 것이 원칙이나 개인도 수익금 제공 조건하에 국영식당을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다.
식당 내 음식가격에 있어서는 국가가 정한 기본메뉴는 국정가격으로 식당의 자체개발메뉴는 합의가격으로 판매되고 있기도 하며 국가는 식당 운영 수익의 일정액을 국가납부금 명목으로 회수하고있는데 식당은 고객유치를 위해 가격을 탄력적으로 조정하는 등 수익위주의 경영이 확산되고 있다.
자금력을 갖춘 주민이 기관, 기업소로부터 맥주집, 가라오케, 목욕탕, PC방 등을 임대하여 운영하거나 신규 개업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2년 9월경부터 농민시장에서 쌀 판매를 허용하였고 12월경부터 공산품의 판매도 전면적으로 허용하였으며 7․1 경제개혁조치 이전까지 암시장 경제에서 안정을 찾고 있던 서민의 생활이 폭등한 물가 때문에 엉망이 되자 민심이 흉흉하였다.
종합시장은 국가가 물자거래에 개입하지 않으며 연중 상설 운영되고 종합시장에는 개인 및 기관이 매대를 임대하여 장사를 할 수 있게 되어 있으며 시장 건물에 매대를 설치하기를 원하는 기관이나 개인은 평양시 인민봉사총국에 신청서를 제출해야 하며 신청인이 많을 경우 추첨을 통하여 결정한다.
종합시장에 개인의 입점을 허용한 것은 큰 변화로 볼 수 있으며 조선신보에 의하면 2003년 3월말부터 이러한 변화가 시작되었는데 이는 시장의 기능에 대한 관점을 변화시킨 것으로서 시장을 통제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사회주의 상품 유통의 일환으로 인정한 것이다.
국가계획초과 달성 유도를 위해 공장기업소는 기본 제품의 부산물로 생산된 생필품의 30% 한도 내에서 시장판매를 허용하고 있으며 쌀, 기름을 비롯한 중요지표 상품의 한도가격을 설정, 수요와 공급에 따라 10일에 한 번씩 검토하여 합의 가격을 산출한다고 한다.
기업개혁조치에서 발표가 되었으며 일부 농업 부문에 시장가격제를 제한적으로 용인하고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장과 기업에 대해서도 시장가격을 도입한다는 것은 북한이 계획경제를 포기하고 시장경제 체제로 나아가는 본격적 조치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대한 변화로 되었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같은 물건에 국영 판매소의 국정가격과 종합시장의 시장가격이 동시에 존재하는 2중 가격제도를 유지하고 있으나 이번 조치에서 국정가격을 없애고 기업이 시장가격에 따라 가격을 자체 제정하여 판매하고 생산과 판매를 국가가 계획하지 않고 기업이 자체 판단하여 수립하고 결제는 은행을 통해 정액으로 납부하고 이에 다른 세금도 추가 납부한다.
기업이 순소득 증대를 한 것을 가지고 노동자별 성과급을 자율 결정하여 지급하는 등의 내용이 들어 있고 최대 월급과 성과급이 3만 원의 급여를 지급하는 데도 있다.
하지만 결국 2005년부터 결국 반개혁조치들이 세워짐으로써 결국 통제정책으로 이어지다 결국 2008년 결국 김정일이 6.18 담화로 인하여 결국 계획형 개선 조치를 뺀 나머지를 전부 무효화 조치를 시켰고 특히 2009년에는 결국 종합시장을 다시 파기하여 농민시장으로 전환하였다.
무역법 3차 분권화 사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97년 개정 헌법에 근거한 1999년의 1차 개정을 거쳐 2002년에 마련한 7.1 경제개혁조치의 실리와 분권화 정책을 적극 반영하여 대폭 개정한 2004년 현행 무역법이 시행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무역법의 특징은 대외무역에 대한 계획 기능과 시장 기능의 균형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국가 즉 내각의 무역상의 통일적 지도아래 기관, 기업소, 단체 등 개별경제 단위에게 독자적 대외 무역의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수출기지를 새로 조성하거나 첨단기술제품, 즉 마이크로프로세서나 소프트웨어, 데스크톱 컴퓨터, LED TV, 슈퍼컴퓨터 등 많은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이 높은 제품을 개발하여판로를 개척한 무역회사에게는 특혜를 주도록 하고 있다.
조선부강회사는 마이크로프로세서를 파운드리하고 있으며 조선비로봉회사와 조선만경대회사는 팹리스 사업을 벌이고 있고 조선백송회사는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중간공장 생산품으로 계획외 생산을 하여 수익창출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일반 경제 단위가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는 새로운 제품, 기술, 서비스 원천을 개발하였을 경우 무역거래 자격을 특별 부여 받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전문 국영무역회사에 의한 독점체제를 무너뜨리고 무역의 주체를 확대하면서 일정한 조건을 마련한 북한의 기관, 기업소, 협동조합은 모두 무역회사 설립을 신청할 수 있도록 하면서 북한 무역관리체제의 자율성을 높였다.
이로 인해 많은 무역회사들이 소프트웨어, 마이크로프로세서, 데스크톱 컴퓨터, LED TV 등 많은 수익성 높은 사업을 벌여 판촉행사를 벌이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화폐개혁.
김정일은 2010년을 기해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화폐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 화폐개혁은 실패했다.
5.26 지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동당 조직지도부가 지난달 26일 주민들에 대한 식량 공급을 포기하는 내용의 지시문을 사상 처음으로 전국에 하달했다고 대북지원단체 좋은 벗들이 14일 밝혔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식량 사정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이 지시문에는 당분간 국가 차원의 식량 해결이 어렵기 때문에 로동당, 내각, 국가 보위부 등이 부문별로 자력 갱생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음을 알수가 있다.
이 지시문은 지난 몇 년간, 특히 지난해 말 화폐개혁 이후 급진적으로 추진하던 사회주의 경제체제 복원 시도의 실패를 시인하였고 시장 경제를 전면 재허용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지시문의 핵심은 당국이 종합시장을 폐쇄하고 시장경제를 강력히 통제하려던 기존의 방침을 철회하고 시장 경제를 전면적으로 허용하는 것으로 입장을 완전히 바꾼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올 1월 시장을 폐쇄했지만 화폐개혁 이후 사회가 큰 혼란에 빠지자 한 달도 안돼 암묵적으로 허용했었다. 하지만 이번 지시문에서는 지금까지 종합시장을 옥죄던 모든 규제를 과감하게 철폐했다.
장사도 24시간 허용되며 금지 품목 제한도 없어졌음을 알수가 있었고 2007년부터 강력하게 통제해 온 종합시장 나이 제한도 함께 풀렸다.
작년에 가장 먼저 폐쇄됐던 평성 도매시장에는 모든 규제를 취소하고 장사를 풀라는 지시가 이미 하달됐고 함경북도 회령에서는 시당 책임비서가 직접 나서 그동안 축소시켰던 종합시장 용지를 다시 확장하고 있다고 하였다.
시장경제 활성화를 위해 올 1월 통폐합했던 무역회사들을 다시 살리기 위한 다양한 조치도 강구됐음을 알수가 있었고 주된 내용은 개인의 무역 거래를 재허용하며 무역 수익금의 일부를 개인이 합법적으로 갖는 것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불과 반년 전만 해도 개인의 무역 거래를 형사처벌하던 것에서 완전히 바뀐 것이고 중국에서의 수입을 증대해 종합시장 가격을 안정화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이번 조치들은 지난 수년간 지속돼 온 종합시장 억제 정책의 실패를 당국 스스로 인정한 것이며 나아가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시장경제 앞에 항복 선언을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앞으로 몇 년간은 시장통제 정책이 크게 위축될 것으로 보이고 몇 년 뒤면 주민들이 김정은 후계자 지명 소식을 직장이 아닌 데이터 서비스에서 접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현장 방문.
김정일은 비날론, 주철, 옷감 등 산업현장을 시찰, 방문하여 직접 지도하였다. 1980년대에는 '남포갑문' 개발 사업을 직접 진두지휘하기도 했는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이를 그의 큰 치적으로 본다. 2009년 2월 21일 함경북도 김책제철연합기업소를 시찰하였고 2월 22일 함북의 7월7일연합기업소를 현지지도하였다.
2010년 3월 14일 북한노동당 황해북도위원회 책임비서 최룡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장 김경희, 장성택, 조선로동당 제1부부장 리제강, 리재일을 대동하고 새해영농전투에 진입한 사리원시 3중3대혁명붉은기 미곡협동농장을 현지지도하였다. 김정일은 먼저 농장책임일군들의 안내를 받아 새로 개건된 혁명사적관 우렝이양식장 등을 돌아본 뒤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어제끼는데서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농업생산을 늘이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농장앞에 나서는 강령적인 과업들을 제시하시였다.' 이어 그는 미곡협동농장에서 최근년간 농업생산을 급격히 늘일수 있은 기본요인은 종자혁명방침을 철저히 관철한데 있다고 하면서 일군들과 농업근로자들의 창발성을 적극 발양시켜 농장의 기후풍토에 맞는 우량품종을 도입하기 위한 사업을 계속 힘있게 추진시켜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생애 후반.
건강 이상설.
200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을 맞아 북한의 최대 명절인 9·9절 기념행사에 참가하지 않아 김정일 건강설이 증폭되었다. 그러다가 김정일의 동정이 묘연해지면서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라는 건강 이상설이 미국 언론을 중심으로 제기되었고, 조사 결과 김정일은 8월 15일 전후로 뇌졸중과 뇌일혈 증세를 일으킨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아소 다로 일본 총리는 최근 김정일이 입원했다는 것을 전하면서, 상황이 좋지 않은 듯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80일 만에 은둔생활에서 벗어나면서 공식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일본 언론은 미국 정부가 김정일 건강이 예상보다 악화되었고, 실각 및 사망을 전제로 대책을 세우는 것을 착수했다고 보도했다. 2009년 3월 19일에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사진에 김 위원장은 배가 쏙 들어가고 매우 야윈 모습으로 나와서 건강 이상설에 힘을 실었다.
한편 김정일은 2009년 3~4월경 김정은을 국가안전보위부장에 임명해 자신을 대신해서 엘리트들을 감시하게 하고, 김정일 사후에도 김정은이 엘리트들을 확고하게 장악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 군사 조직인 국가안전보위부의 우동측 부부장이 김정은의 보위부를 통한 엘리트 장악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제2의 경제개혁 준비 과정.
김정일은 사망 직전까지 김정은과 함께 경제 개혁 준비를 착수를 하였는데 12월 14일까지의 연구 결론은 생산 공장 및 서비스업의 임대 정책을 기본으로 한다는 요건으로 한다는 것을 명확히 규정을 하고 특히 로두철을 TF의 위원장으로 삼아 중국으로 파견을 나갔다.
그리하여 4월경에 경제개혁을 하려고 하였고 이때 중국처럼 개인이 아닌 기관의 명의를 쓴 투자자에게 임대 및 이관의 권한을 주고 대신 조세를 달러나 유로화로 환전하여 받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7.1 경제개혁조치의 연장선상에서 행하려고 하던 것을 결국 3일 뒤에 김정일이 사망을 하여 결국 김정은에게로 승계가 되어 실제 4월에 준비까지 마쳤지만 결국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발언으로 인하여 무위로 돌아갈 뻔 하였다.
사망.
2011년 12월 17일 8시 30분에 희천발전소 현지 지도 방문을 위해 탑승한 열차에서 과로로 인한 급성 심근경색과 심장 쇼크로 인해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망 사실은 2일 동안 극비에 부쳐졌으며, 12월 19일 정오에 조선중앙방송 리춘히 아나운서를 통하여 사망 소식이 공식 발표되었고, 시신은 금수산태양궁전에 안치되었다.
사후.
김정일의 영결식은 12월 28일 평양시에서 거행되었고, 다음 날인 29일에는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추모 대회가 열렸고 추모곡이 작곡되었다. 일각에서는 김정일이 열차가 아닌 평양 교외 별장에서 사망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2012년 2월 16일 71회 생일을 기념하여 조선인민군 대원수에 추서되었다.
비판과 평가.
비판.
자신의 독제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대내적으로는 정치범 수용소와 자유와 끔찍한 인권을 탄압을 자행했다. 현대판 봉건주의 나라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최고지도자인 김일성의 후계자 김정일이 대리청정체계로 들어서면서 극단적인 테러리즘이 생겨났다. 대표적으로 아웅산 폭파 사건과 최은희 등의 납북과 KAL기 폭파사건을 배후 조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이 이런 테러의 배후로 밝혀지면서 우방국들마저 외교관계를 기피하기 시작해 외교무대에서는 입지가 좁아졌다. 이후 미국에 의해 테러지원국으로 정해져 적선국 제재를 받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시간이 흘러 냉전이 종식된 후 미국을 중심으로한 새로운 경제질서에서 완전히 소외가 되는 최악의 결과를 맞게 된다. 사회주회 경제체계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던 1980년대 농업생산력 저하로 고생하는 사회주의 나라들이 인센티브제도를 도입해 생상성 향상을 이뤘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체제보장에 해가 될까 두려워 오히려 협동농장을 유지함으로써 농업생산력은 더욱 떨어졌다. 1995년과 1996년 대홍수를 통해 수 많은 아사자가 나왔지만 특별한 자연재해가 없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모자라는 식량은 50만톤 이상이기 때문에 아사자는 자연스러운 사회현상이 됐다.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였던 후지모토겐지의 증언에 따르면 고난의 행군시절에도 호화로운 생활을 유지했다.
또한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상봉을 지키지 않았고, 2002년에 핵 확산 금지 조약의 탈퇴 선언, 중국의 압력에 의한 신의주 경제 특구 계획 실패 등이 있다.
천안함, 연평도 사건.
2010년 천안함 침몰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의 명백한 배후이다. 북한은 군의 일반 지휘통제에 더해서 중앙에서 정치장교까지 따로 보내 2중으로 관리 통제하는 군지휘통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통제력이 약한 대한민국 군대에서도 사격 훈련 중 탄피분실이 일어나는 상황이 발생하면 비상이 걸리 것을 대비해 본다면 최고지휘자의 허가를 받지 않고 저런 대규모의 도발을 실행할리 만무하다. 북한은 2009년부터 후계자에게 정권이양하는 과도기 과정이었고 2000년 이후부터 생겨난 장마당경제로 인해서 중앙권력의 약화를 우려해 화폐개혁으로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강화하려 했지만 오히려 화폐개혁의 부작용을 통해 상당한 수준의 내부혼란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런 대남도발을 통해 전쟁분위기를 고취시켜 내부단속을 했다는 주장이 유력하다.
2010년 대한민국에서는 9월 28일 북한이 김정일의 셋째 아들 김정은에게 인민군 대장 칭호를 부여, 사실상 후계구도를 공식화 한데 대해 입을 모아 "이해할 수 없는 시대착오적인 일"이라고 지적했다. 안형환 한나라당 대변인은 이날 구두논평을 통해 "독재권력을 3대에 걸쳐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며 "정부는 확고한 안보태세를 바탕으로 만약의 안보불안 상황에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영택 민주당 대변인 역시 논평을 통해 "민주 국가인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고 말했으며, 박선영 자유선진당 대변인은 "28살 애송이를 대장으로 추대하는 이상한 나라가 북한"이라며 "정부는 북한 권력층과 군부의 동향은 물론 관련 첩보 입수에 전력을 다해야 하며, 북한의 권력세습 과정에서 야기될 수 있는 급변 사태에 대한 준비에도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포갑문, 순천비날론 공장.
1980년대의 남포갑문 개발의 성공이 그의 치적이라는 견해도 있다지만 이건 북한당국의 일반적인 주장을 이해하는 수준의 논리이다. 남포갑문은 북한 남포특별시의 서쪽 15km에 위치한 갑문으로서 위에는 도로가 건설되어 남포와 황해남도를 연결하는 역할도 한다. 대동강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1981년 착공하여 3년 내에 완공한다는 목표 아래 1개 군단의 군 병력과 수만 명의 노동자를 투입하였으나 워낙 난공사였고 북한의 토목공사 기술 수준이 낮아 완공 시기를 두 차례나 연기한 끝에 1986년 겨우 완성하였다. 부실시공으로 방파제에서 물이 새어들어오고 틈이 벌어지고 갑문이 황폐화되는 이러한 현실 속에 유지보수를 위해 1개 건설사단이 보충작업을 위해 이곳에서 항시 대기하고 있다. 문제는 갑문공사로 생긴 간척지가 생겨났지만 오해려 갑문때문에 대동강 유역의 기후가 변하면서 농업생산량과 어업생산량이 이전보다 떨어지게 되었다. 고위층 탈북자인 김덕홍 증언에 따르면 남포갑문은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아 홍수피해를 막는 효과가 없으며 갑문으로 인한 간척지가 주는 편익이 있다고 한다. 처음부터 홍수피해를 막기 위함이었다면 지천과 하천정비를 했어야 하지만 이 사업은 소규모 사업이 복수형이여서 정치적 선전에 불리하고 대규모 갑문사업은 정치적 선전에 유리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경제적 편익보다는 정치적인 선전을 우선에 둔 사업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는 1평안남도 순천에 연간 10만 t 규모로 추가건설되던 비날론 공장이었다. 북한 정부는 이 공장이 완공되면 400여 가지 화학제품 생산이 가능해 경공업 발전의 토대가 되어 이팝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경제논리를 배제하고 정치적 선전이나 사상무장으로 계획된 사업은 제대로 돌아갈리 만무하고 석탄 가격을 감당하지 못해 1994년에 이르면 모두 가동이 중지된다. 2007년에는 김정일이 비날론 재건을 지시해 2010년 2·8비날론연합기업소가 재가동에 들어갔지만 결국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포갑문과 순천비날론 공장에 투여한 자본은 150억 달러에 가까운데 북한이 가지고 있던 자본여력 대부분을 산업시설이 아니라 모두 자신의 정치 선전물 건설에 쓴 것이다.
의혹.
암살 미수 의혹.
2004년 4월 22일 북한과 중국 국경 지대인 평안북도 룡천역에서 발생한 폭발 사건으로 인해 150여명이 숨지고 130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이 폭발사건은 김정일의 열차 통과 30분 전에 발생해 김정일에 대한 암살기도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북한의 김정일이 지난 2004년 4월 용천역에서 발생한 대형폭발사건은 자신에 대한 암살기도였다고 인정했으며, 암살과 쿠데타를 우려하며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 것으로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외교전문을 통해 드러났다. 캐슬린 스티븐스 대사는 지난 2009년 2월 26일 '현대그룹, 인내와 관용제안'이라는 제하의 비밀전문에서 2월 13일 현정은 현대아산 회장과 조건식 현대아산 사장, 하종선 현대그룹 전략기획본부사장 등과 점심을 함께 하며 나눈 이야기를 17개 항목에 걸쳐 상세하게 보고했다. 이 항목 가운데 '김정일과 인민군'이라는 항목에서 현정은 현대아산 회장은 "지난 2004년 김 위원장을 암살하려 한 열차폭발사건이후 인민군은 김 위원장이 가장 신뢰하는 집단이 됐다"고 보고했다. 또, "김 위원장은 열차 통과 30분 전 발생한 이 사건에 대해 휴대폰을 통해 자신이 탑승한 열차의 통과시간이 전해짐으로써 거의 근접한 시간에 폭발시킬 수 있었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현 회장은 "김 위원장은 이사건이 자신에 대한 암살실패사건으로 믿고 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북한의 휴대폰 도입이 특이할만큼 늦게 진행되는 것 같다"고 밝혔다. 현 회장은 또 "김 위원장이 암살과 쿠데타를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고 전했다.
성격.
취미.
김정일은 청소년기부터 문학과 시, 영화, 역사학 등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아버지처럼 시와 노래를 짓는 것도 좋아했지만, 영화를 좋아해서 영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민족과 운명", "조선의 별" 등 영화를 만들기도 했으며, 신상옥 감독을 통해서 "불가사리"를 제작했다. 그는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 연출을 하기도 했으며, 시와 단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김정일은 몇 개의 곡도 작곡하였다. 1952년 8월에는 가요 <조국의 품> 을 작사, 작곡하였다.
그는 《주체사상에 대하여》, 《건축예술론》, 《문화예술론》, 《미술론》, 《김정일저작선집》을 비롯한 200여 편이 넘는 저작들을 집필하였다. 역사학에도 관심이 있던 그는 단군릉을 수시로 살펴보고, 단군릉의 정비를 지시하기도 했다. 기타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특별히 신앙을 가졌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음식과 요리에 상당히 조예가 깊어 당대의 미식가였다. 그래서 후지모토 겐지를 자신의 전속 요리사로 채용해서 온갖 산해진미를 즐겼다. 그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일은 물론 그 아들인 김정은과도 친분이 깊다.
여성 편력.
영화배우 출신 성혜림은 전 김일성종합대학 연구사 리평의 아내였으나 그와 이혼시켜 사실혼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성혜림은 정식 배우자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김정일은 성혜림과의 슬하에 장남 김정남을 두었다.
1966년 혹은 1968년 아버지 김일성이 소개해준 조선로동당 간부의 딸인 김영숙과 정식 결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영숙과의 관계는 소원하여 딸 김설송과 김춘송만 있을 뿐 별다른 관계는 없다.
재일교포 무용수 출신 고용희와의 사이에서는 김정철, 김정은 형제와 딸 김여정이 있다. 한때 고용희와 김정남 간의 갈등설이 돌았으나 확인된 것은 없다. 한 때 비서 출신인 첩 김옥이 그를 수행하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행했으며, 둘 사이에 자녀가 있다는 설이 있으나 역시 확인된 것은 없다.
국제 사회에 김정일의 가족관계로써 알려진 것은 성혜림(1남, 김정남), 김영숙(2녀, 김설송, 김춘송), 고용희(2남 1녀,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 등이다. 대한민국의 일각에서는 그가 변태성욕자이며 수시로 여러 여성들과 비정상적인 향락을 즐기는데 5명의 부인을 제외한 다른 여인들과도 관계를 가졌다는 소문이 존재한다. 관련 내용은, 손희림은 김정일에게 강간을 당했고, 김정일과의 사이에서 두 딸을 두었는데, 김정일에게 버림받은 충격으로 건강이 약화되었으며, 가수 윤혜영과 관계를 졌는데 윤혜영은 다른 남자를 좋아하였기에 김정일이 분개해 윤혜영을 총살하였다는 추측성 소문이다. 2004년에는 그의 통치방식과 사생활, 여성 편력 등을 소재로 한 방송이 방영되기도 했다.
그 밖에 대한민국 언론사들은 그의 여인들 간의 권력암투에 관한 보도를 하였으나, 명확한 사실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2010년 8월 공식 후계자로 선언한 김정은은 고용희의 아들로 알려졌으나, 일설에는 고용희가 아닌 김옥의 아들이라는 의혹 도 제기되어 있다.
또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김정일이 여러 여성들을 ‘내연의 처(concubine)’로 삼은 것은 대표적인 권력남용이라고 보도했다. 타임은 “김 위원장의 축첩은 그가 저지른 수많은 잘못 가운데 가장 골치 아픈 문제”라며 “심지어 남한에 특공대를 보내 유명 영화배우 등 여러 여성을 납치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잡지는 또 “이 ‘친애하는 지도자’는 혼인을 거듭하며 자녀 5명을 뒀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론 9명의 사생아가 더 있다”고 보도했다. |
2909 | 529523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909 | 노태우 | 노태우(盧泰愚, 1932년 12월 4일~2021년 10월 26일)는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이다. 제4공화국 당시 친구인 전두환과 하나회를 결성하여 12·12 사태를 주도하였다. 반란 성공 이후 정계에 입문하였고 대통령 당선 이전에는 제41대 내무부 장관직을 역임하였다. 본관은 교하이며 대구 출생이다.
육군사관학교를 11기로 졸업하고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전두환, 김복동의 육사 동기이기도 하다.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12·12 등에 가담했다. 제12대 국회의원과 정무2장관, 체육부와 내무부의 장관을 지냈으며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제13대 대통령을 지냈다.
대구공업중학교를 다니다가 경북중학교로 전학한 뒤, 1950년 한국 전쟁 중 학도병으로 헌병학교에 입대하였다. 1951년에 육사에 11기 생도로 입학, 1955년에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였다. 1961년 8월 17일에는 학생군사교육단(ROTC의 전신)의 창설준비요원과 교관을 역임했고, 베트남 전쟁에는 1967년 지구대대의 대대장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1974년에 장성으로 진급한 그는 신군부의 2인자로 제 9공수특전여단장, 청와대 작전차장보, 보안사령부 사령관 등을 지냈으며, 1980년에는 국가보위입법위원회 비상대책위원과 상임위원을 지냈다. 1981년에 대장으로 예편한 후 제5공화국에서 1981년 정무2장관, 대통령 특사, 1982년 체육부 장관, 41대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1985년에 민주정의당 최고위원으로 전두환 당시 총재로부터 내정되어 당권 전부를 위임받고 1987년부터 민주정의당의 총재가 되었고 6.29 민주화 선언 후 전두환이 퇴임하면서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 후, 대한민국의 대선에 36%의 낮은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물론 그의 대통령당선에는 김영삼 김대중 양김의 분열이 한몫했다.
1988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정치인 및 정치에 대한 풍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였으며 중화인민공화국, 동구권, 소비에트 연방 등 공산권 국가들과의 외교 정책을 추진하였고, 1991년에는 야당과 시민단체의 자치제 부활을 수용하여 지방자치제도를 부활시키기도 했다. 또한 1991년 남북한 UN 동시 가입 결정이 내려지자 보수 세력의 반발에도 이를 강행하였다.
1993년에 퇴임한 후 1995년 비자금 사건 등으로 연루,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강제 진압과 12·12 군사 반란에 가담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구속되었다.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97년 12월 22일에 특별 사면을 받고 복권되었다.
1983년 서울 올림픽 임시 조직위원장이 되었다가 그해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구성되어 1983년부터 1986년까지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 올림픽을 준비하였고, 서울 아시안 게임을 유치한 뒤,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서울 아시안 게임 조직위원장으로 준비와 진행을 지원했다.
체육을 좋아하여 육사생도 시절에는 육상부와 럭비부 팀원으로 활약했다. 1984년부터 1985년까지는 제28대 대한체육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제13대 대선 당시 보통 사람임을 강조했는데, 이는 1994년 그가 정치 비자금을 챙긴 것이 당시 총무처 장관 서석재와 당시 국회의원 박계동 등에 의해 연이어 폭로되면서 풍자되었다.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가계.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신용동에서 공산면사무소 면서기를 지낸 아버지 노병수와 어머니 김태향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해 팔공산에 백일기도를 드리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고, 결국 결혼 후 9년만에 노태우를 낳았다. 노태우는 그 근본 자체는 삼국지의 오나라 참모인 노숙의 후손으로 세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의정부의 영의정을 지낸 문광공 노사신의 15대손이다. 5년 뒤 동생 노재우가 태어났다.
어머니가 노태우를 임신했을 때 꿈을 꾸었는데 어머니가 콩밭에 김을 매던 중 밭에 큰 구렁이가 숨어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집으로 도망 오는데 구렁이가 따라와서 부엌에 숨어있는 노태우 어머니의 발뒤꿈치를 물고 온 몸을 휘감아서 놀라서 깨었다 한다. 할아버지는 이 구렁이가 용이라 하여 원래 아이의 이름을 '태룡'(泰龍)이라고 지으려 했으나 일제 시대였으므로 꿈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어리석을 우'(愚)를 붙여 이름을 '태우'(泰愚)라고 지었다.
유년 시절.
아버지 노병수는 소학교 학력이 전부였으나 신문물에 일찍 눈을 떴으며, 189cm의 훤칠한 키를 가진 사람이었다. 또한 음악적 재질이 뛰어났으며 한문을 잘 하여 면서기를 지냈다. 아버지는 노태우와 노재우 두 형제를 무릎에 앉히고 특별히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려주기도 했다. 어려서 들은 유성축음기 노래 덕에 그는 일찍부터 노래를 잘 불렀으며, '베사메무초'와 '방랑시인 김삿갓'이라는 노래를 즐겨 불렀다. 노태우가 노래를 잘 부르게 된 것은 아버지로부터 배운 노래 실력이었다.
어머니 김태향은 학식은 없었으나 신앙심이 두터운 불교 신자로서 헌신적이었다. 그러나 1939년 아버지 노병수는 동생(노태우의 숙부) 노병상(盧秉祥)의 중학교 졸업식에 참석하러 가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노태우는 끼니를 거르는 등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자신으로 인해 형이 죽었다는 자책감에 숙부는 아버지 이상으로 조카들을 키웠고 사촌 형제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그는 아버지의 유품인 퉁소를 즐겨 불면서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고 음악적 기량을 키워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노태우는 어려서부터 다른 아이들처럼 어리광을 피우며 자라기는 어려웠고, 어른스럽게 행동하며 말을 아끼고 조심스럽게 행동하였다.
학창 시절.
그의 집은 팔공산 근처에 있었다. 1939년 3월 집근처에서 6km 떨어진 공산소학교에 입학했으며, 직접 걸어서 통학하며 다녔다. 형편이 넉넉치 않아 그는 맨발로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성격이 유순하였던 그는 화를 잘 내지 않았는데 학창시절의 별명은 스마일이었다고 한다. 화내는 것을 잘 볼 수 없고 언제나 싱글벙글이었다고 한다. 귀가 크고 듣기를 잘 했다고도 한다.
1945년에 공산소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공업중학교에 진학했다. 그의 소학교 동창 101명 중 중학교로 진학한 학생은 남학생 1명, 여학생 2명으로, 그가 유일하게 중학교로 진학했던 것이다. 중학교 5학년 무렵에는 싸우는 친구를 설득하여 화해시키고 잘 조정하여 조선 세종때의 황희 정승에서 따서 "노(盧) 정승"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부친의 사후 그의 집안은 이렇다할 공직에 몸담던 인물이 없어서, 그의 집안은 창씨개명에 참여하지 않고도 별 타격을 받지 않았다. 소학교 시절 노태우는 성적이 상위권이었으나 형편이 어려웠기에 그의 6학년 때의 담임선생은 특별히 저녁 늦게까지 보충수업을 가르쳤으며, 그는 밤길에도 혼자 산을 넘어서 집에 도착하여 밤늦게까지 공부하곤 했다. 그는 점차 말수가 적고 독서에만 흥미를 두게 되었다.
청소년기.
중고교 시절.
1945년 3월 숙부의 도움으로 대구공업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 재학 중 학질모기에 물려 말라리아와 열병으로 고생했으나 극적으로 생존하였다. 그리고 대구고보 4학년 편입시험에 10대 1의 경쟁률에서 상위 성적을 얻고, 경북중에 편입학하였다. 재학 초기 학생들 중에는 정치 활동에 참여하라는 권고가 있었으나 그는 '학생은 학업에 전념해야 된다'며 거절하고 공부에 매진하였다. 몸집도 작고 싸움을 싫어하였으며 정치 이념문제에 개입하지 않은 덕에 순탄한 학교생활을 하였다.
당시 정치인들 중 그는 김구를 특별히 존경했다. 이후에도 대화 도중 김구가 한 발언들을 인용하기도 했다.
4학년 당시 성적은 224명 중 102등이었으나 5학년 당시에는 218명 중 68등으로 올랐다. 대구고보 재학 중 그는 장래 희망을 의사로 정하였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대학 진학이 불가능하면서 의사의 꿈을 포기하게 된다. 재학 중에는 학예회에 자주 나갔으며 직접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다. 그의 노래를 그의 동창인 경북의사회 회장을 지낸 윤건호는 50년이 지난 뒤에도 기억하고 있었다. 경북고 시절의 담임인 이길우는 그가 과묵하고 착실한 모범생으로 대인관계가 원만했다고 후일 회고하였다.
한국 전쟁 참전.
청소년기의 그는 성격이 매우 온순했다는데 대구공업중학교 동창인 이태원(후일 교사가 됨)은 공업중학 졸업후 대학에 가고 싶어서 노태우를 찾아가 그의 노트를 빌려다가 공부했는데도 한번도 귀찮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대학에 진학하여 의사가 되고자 했던 꿈을 접은 그는 대신 자녀들 교육에 힘써 후일 딸 노소영과 아들 노재헌을 서울대에 진학시키고, 특히 딸 노소영은 시카고 대학교로 유학을 보낼 정도로 자녀 교육에 신경을 썼다.
1950년 한국 전쟁을 맞으면서 피난갔다가 바로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투입됐고, 학도병으로 있던 중 대구에 있던 헌병학교에 입학한다. 이로써 정식 이등병의 신분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이듬해 경북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51년 10월 헌병학교 정규 1기생의 신분으로 첫 정규 4년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육사 수학과 임관.
사관생도 재학 중 그는 전두환·정호용 등을 만나 인맥관계를 형성하였다. 전두환과는 여러 드라마에서 묘사된 상하관계가 아니라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생으로 둘은 명백한 친구사이이다. 일찍부터 같은 경상도 출신인 전두환과 친하게 지냈는데 후일 그는 인터뷰에서 '전두환에게는 사람을 끌리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육사 생도시절, 스포츠를 좋아한 그는 육상부와 럭비부원으로 활동했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할 당시에는 200명의 생도 중에서 10등 안에 들 정도로 공부를 매우 잘했었다. 하지만 전두환같이 공부와는 거리가 먼 친구들을 사귀는 바람에 생도시절 노태우의 학업성적은 눈에 띄게 떨어져갔으며 소위 임관성적은 156명 중 67등을 기록했다.
육군사관학교 재학 중 그는 럭비선수로 활동했다. 럭비선수 활동 초기에는 자주 다쳐서 아키생키(일본식 빨간 소독약)를 자주 바른다 하여 악까중끼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꾸준한 연습으로 럭비팀의 주전 멤버로 해군사관학교, 공군사관학교 및 타 대학교와의 럭비 경기와 친선경기에서 연속으로 우승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때 이기백, 정호용, 김복동, 권익현 등과도 친해지게 되었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그는 헤르만 헤세 등의 시집을 애독하였고 홍사용 시인의 시집 등을 즐겨 읽었다. 그 중 나는 왕이로소이다라는 작품은 특별히 애장하기도 했다.
육사 재직 중 그는 대통령 이승만이 사열나온 것을 우연히 목격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육군사관학교를 둘러보다가 여기가 어디냐 라고 지목한 것을 훗날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1955년 2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사11기로 육군소위에 임관하였다.
군인 생활.
장교 생활.
이후 전방으로 투입되었다가 1956년 봄 육군 제5보병사단 소대장으로 발령받았다. 이때 그는 5사단장이던 박정희를 보고 특별한 인물이라고 예상했다. 5사단 소대장 시절 사단장이었던 박정희는 그에게 각별히 대하였다. 전라남도 광주의 육군보병학교 교육연대 구대장을 거쳐 육군정보학교로 배속되었다. 이후 육사 11기생 동기들과 함께 친목 모임인 북극성회(北極星會)에 가담했고 이어 하나회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당시 군대에서 금지되어 있는 군내 사조직을 결성한 그는 이를 들키지 않게 조심스럽게 운영해 나갔다. 육군 중위 재직 중 친구인 김복동 중위의 대구직할시 본가에 자주 출입하던 중 그의 누이인 김옥숙, 김정숙 자매를 보게 된다. 이어 김옥숙을 유심히 보게 되다가 정식으로 청혼하였고, 1959년 5월 31일에 결혼식을 올린다.
1959년에 먼저 진급한 동기 전두환 대위 등 4인의 대한민국 장교들과 함께 6개월 동안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브랙 기지로 군사유학을 갔다. 그곳에서 심리전학교(Psychological Warfare School)와 특수전학교(Special Warfare School) 두 과정을 차례로 수료한 뒤 귀국했다.
1960년초에는 북극성회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1960년 대위로 진급, 군사정보대학 영어번역담당 장교가 되었다. 1961년에 전두환 등과 함께 학생군사교육단(ROTC) 창설요원이 되었고 ROTC 교관이 되어 전국 16개 대학에서 모인 장교후보생을 교육하였다. 같은 해 5월 16일 5.16 군사 정변이 발생하자 육군대위 재직 중 전두환 등의 장교들과 함께 군사혁명 지지를 선언하고, '군사혁명 지지 행진'에 참가하였다.
월남전 참전 전후.
방첩부대 정보장교를 거쳐 1966년 국군 방첩부대 방첩과장, 이후 육군본부 정보과장과 방첩과장으로 민심과 정치 동향을 수집하였으며, 1962년에는 육사 11기 이후 정규 육사출신들로 구성된 북극성회 회장에 선출되어 육사 졸업생들의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1967년 육군 중령으로 진급하였다. 그 해 베트남 전쟁에는 맹호사단 재구대대(1연대 3대대)장으로 참전하였다. 이때 퀴논 전투에서 북베트남 군대를 전멸시킨 공로로 특별히 을지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또, 맹호사단 재구대대장으로 있을 때는 사이공과 하노이를 잇는 1번도로의 복구와 베트남 대민 지원을 적극 추진했다. 또한 1번도로 변 빈딩 성 푸카트 군 캇하트 면의 1번도로 주변에는 주택들을 건설하여 주민들의 거주지 복구를 주관했다. 그가 복구한 마을 이름은 그의 이름을 붙이려 했으나, 노태우는 강재구 소령을 추모하는 뜻에서 부대 이름이 재구대대라 했다며 재구촌으로 하라고 했다.
이듬해 귀국하였다. 1968년 육군대학에 입교, 그해에 육군대학을 수료하고 수도경비사단 대대장으로 부임했으며, 1970년 육군대령으로 진급, 육군참모총장 수석 부관장교로 서종철 육군참모총장을 보좌하였다. 1971년 보병 연대장을 거쳐 1974년 1월 1일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면서 공수특전여단 여단장 등을 지냈다.
한편 음악적 소질을 지닌 그는 부대장으로 재직 시 직접 부대가를 작사, 작곡하기도 했다. 1976년 박종규, 차지철 등에 의해 발탁되어 청와대 대통령 경호실 행정차장보로 임명되었고, 1978년 1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 그 해 전두환이 사단장으로 전출되면서 전두환 등의 후원하에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전격 발탁되었다.
유신 붕괴의 혼란기.
윤필용 필화사건으로 다른 하나회 회원들과 함께 정치적 위기에 몰렸으나 1979년 3월 전두환이 재기에 성공하여 보안사령부 사령관으로 복직된 뒤 그도 육군 제 9보병 사단장으로 전임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피살 당하자 전두환과 함께 군부를 장악, 그해 12월초 서울에서 전두환, 정호용 등과 함께 계획을 세워 정승화·김재규 등을 군부에서 축출하고 정승화 체포작전을 진행하였다. 이때 노태우는 실패를 염려하여 박철언 등에게 부인과 가족을 부탁하였다.
12.12 사태.
12월 12일 오후 6시경 전두환 등 신군부는 최규하 권한대행에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김재규와 내통했으니 체포할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구했다. 최규하는 정식 결재 라인을 거쳐서 올라오라며 승인을 거부했다. 전두환은 정승화 연행을 재가받으려 하였다. 그러나 최규하는 이들의 예상 밖으로 완강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국방부 장관의 의견을 들어봐야 겠다'며 버텼다. 노태우는 즉시 9사단의 특전부대 병력을 서울로 급파하였다.
전두환은 노태우, 최세창 등 동지들의 부대에 병력출동 준비를 명령했다. 또 총리공관 경비의 무장을 해제시켜 최규하를 완전히 포위했다. 이번에는 전두환 뿐만 아니라 유학성 등 여럿이 함께 쳐들어갔다. 드러내놓고 위협했지만, 1시간 30분을 넘기도록 최규하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노태우는 9사단 특전대 병력을 청와대와 총리실, 관저 등에 보내 최규하 대통령 주변과 정부를 장악하였다.
전두환은 즉시 명령을 내려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여, 국방장관 노재현을 잡아오라' 하였다. 상관을 체포하라는 전두환의 명령은 아무런 머뭇거림도 없이 집행되었다. 치밀하게 계획했고 군의 주요 병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보안사령부의 도청으로 모든 움직임을 샅샅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휴전선을 지키는 최전방의 병력마저 서슴없이 동원하는 대범함도 보였다. 노태우는 9사단 예하 29연대를 중앙청으로 진주시킨다. 한편 노재현은 1공수특전여단에게 체포되어 12월 13일 새벽 1시 30분께 연행된다. 이로서 전두환은 군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다.
정치 활동.
12.12 군사 정변 이후.
노태우는 5월 17일 오전 열린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단행과 군부의 정치 개입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해, 이날 24시를 기해 내려진 비상계엄이 전국 확대되는데 관여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했다.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있으면서 민주정치세력 진압 등 신군부세력의 정권획득을 위한 계획과 과정에 참여하였다.
1980년 5월 31일 국가보위입법위원회 비상대책위원회의 25인의 비상대책위원의 한사람으로 선발되었다. 그해 6월에는 국보위 상임위원의 한사람으로 피선되었다. 수도경비사령관으로 그는 국보위 상임위원직을 겸직했다.
1980년 야당 정치인 가택연금 당시 그는 김종필 등을 비롯한 육사 선배들과 군사 정권 출신 인사들에게 선배로 깍듯이 예우했다. 고문을 치욕으로 여기던 구 군사정권 출신 인사들은 그의 깍듯한 예우에 감동받았다. 이 중 김종필과의 계속된 만남 도중, 김종필은 신군부 세력 중 그에게 유일하게 깍듯이 대했던 노태우에게 처세술을 가르쳤고, 감정을 드러내지 말것과 불쾌감을 드러내지 말라고 충고하였으며 이후 1인자와 틈이 벌어지지 않는 비법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이후 노태우는 1980년 8월 육군중장으로 진급, 8월 6일에 전두환이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자 8월 23일 전두환의 후임으로 국군보안사령부 사령관(國軍保安司令部司令官)직을 역임하였다. 당시 그는 수경사령관이었는데,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의 강력 추천으로 전두환의 후임자로 내정되었다. 퇴역하기 전 7월 11일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였다. 1981년 7월 15일 예비역 대장으로 서부전선에서 전역식을 하고 예편하였다.
그러나 성격이 불같았던 전두환은 친구였던 노태우를 점점 하대하여 노태우는 심한 모욕감을 느끼기도 했다. 일설에는 노태우가 한강변에서 통곡하더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소문은 시중에 돌고 돌아서 그의 육사 동기들을 거쳐 전두환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노태우는 2인자가 불평불만을 드러낼 경우 1인자의 손에 숙청당할 우려가 있다는 김종필의 충고를 잊지 않고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김종필은 자신이 감옥에 갇혔을 때 자신을 끝까지 선배님, 형님이라며 존대한 노태우에게 고마움을 잊지 않고 감시병력들을 내보낸 뒤, 이승만과 김구의 고사, 자신과 박정희의 관계를 노태우에게 설명하였다. 전두환은 후에 자신의 재선 기도와 내각제 개헌이 실패하자 6.10 민중 항쟁 후 노태우가 정권을 잡으면 자신은 무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노태우는 전두환을 백담사에 보내고 민정당 명예총재직을 사퇴하게 만들었다.
초기 정치 활동.
외교 활동과 장관 재직.
1981년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후 민주정의당에 입당하면서 정계에 입문,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에 의해 민주정의당 당무위원에 임명되어 사실상의 민정당의 당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1981년 7월 16일 정무 제2장관이 되고, 그 해 11월에는 대통령 특사로 임명되어 유럽과 미국, 아프리카 대륙 국가들을 순방하였다.
11월 스페인, 이탈리아, 바티칸 시국 등을 거쳐 12월 나이지리아, 오트볼타공화국, 서독, 네덜란드와 아프리카, 미국 등을 방문하고 귀국했다. 이때 그가 중공에도 방문한다는 기사가 떴으나 오보로 드러났고, 바티칸 시국에 방문했을 때는 특별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한국에 방문해줄 것을 간청하여 성사시키기도 했다. 귀국 후 1982년 통일원에서 북조선에 남북고위급 회담을 제의하자 그해 2월 25일부터 정무2장관으로 남북한고위회담 수석대표로 참여하였다. 정무2장관 당시 외교안보 담당 특보를 겸하며 올림픽을 유치를 확정시키기 위해 설득과 노력 끝에 1988년 올림픽 유치를 확정지었다.
한편 전두환은 노신영을 후계자로 낙점해두고 있었고 노태우는 강력 반발하였다. 노태우는 자신이 크게 기여한 것을 강조했고, 전두환은 어디서 말대꾸를 하느냐며 자신이 발탁했음을 강조했다. 또한 전두환의 최측근인 장세동도 잠재적 대통령 후계자로 점지되고 있었다. 전두환은 그를 하대하고 반말과 무시를 하기도 했지만 노태우는 김종필의 충고를 잊지 않고, 끝까지 불평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얼굴에 미소를 띄었다.
1982년 3월 20일 체육부 장관 과 그해 4월 28일 제41대 내무부장관, 대한체육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내무부 장관으로 재직 중 그는 무사명, 무책임, 무소견, 무기력을 추방하자는 구호를 내걸어 4무 장관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각 행정기관에 퇴근시간이 지난 뒤에도 상사나 동료직원들의 눈치를 보느라 퇴근을 미루는 눈치보기 퇴근, 일 미루기 행위를 일절 금지시켰다.
부총리 임명 배경.
1981년 9월 25일 대한민국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에 임명되었다. 무임소장관과 체육부장관 등 국무위원으로 겸임한 기간 외에도 그는 1987년 7월 9일까지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직을 보유하였다.
1981년 11월부터는 부총리라는 대외직명을 사용하였다. 전두환 대통령이 노태우에게 특별 배려를 목적으로 부총리급으로 대우하고 대외직명을 부총리로 하였다. 당시 예편은 노태우가 전혀 예측하지 않은 조치였다는 설이 있다. 내심 전두환의 후계자를 꿈꾸던 노태우는 가장 튼튼하게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군에 남아 참모총장의 길로 가려고 했다. 때문에 일순 모든 것이 깨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다. 측근들 중에는 눈물을 쏟으며 안타까워 하기도 했고, 노태우 자신도 어느 선배를 찾아가 울먹이며 분을 토하기도 했다.
전두환이 무작정 노태우를 예편시킨 것은 아니었다. 내심 정무2장관을 생각하고 있었고 예편 이틀만인 7월 16일 그 자리에 앉혔다. 노태우는 군복을 벗게 된 마당에 부총리자리를 노렸다.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하던 처고종사촌 박철언을 통해 안보담당 부총리 겸 정무2장관을 교섭했다. 전두환은 당장에 들어주지는 않았으나 노태우 정무장관이 해외 순방에 나선 그해 11월, 대외직명 부총리급을 주었다. 11월 9일 그는 해외 순방을 나가면서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서울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준비 위원장.
1983년에는 88올림픽이 서울특별시 유치가 확정되면서 서울올림픽대회 임시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바로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가 정식 구성되면서 위원장이 되어 1986년까지 3년간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또한, 아시안게임 임시 조직위원장에 임명되어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1986년 아시안 게임을 서울로 유치시키기 위해 각국의 정부 고위층과 아시안 게임 담당자들을 설득하였다.
1984년 제28대 대한체육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해 KOC 위원장이 되고, 1984년 서울 아시안 게임 임시 조직위원장이 되었다가, 역시 정식 조직위원회가 발족하자 서울 아시안 게임 조직위원장이 되었다. 이후 1986년까지 서울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으로 아시안 경기대회 준비와 진행을 지원하였다.
한편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로 입후보하였다.
민정당 대표 활동.
1985년에 제12대 총선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곧바로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에 임명되었다. 총재인 전두환이 서대문구·은평구 출마를 권하자 그것보다는 전국구 의원이 되는 것이 좋겠다는 박철언의 건의로 전국구 3번으로 당선되었다. 전두환의 후임자가 되겠다는 열망으로 높은 번호를 얻으면 전두환이 자신을 후계자로 지목했다는 것으로 판단했다. 대표위원 취임 첫날 그는 '우리 당은 무엇보다도 자율과 개방을 내실화하면서 끊임없는 자기 혁신 속에 당내의 언로는 가능한 한 넓혀나가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발표하였다. 이후 야당과의 타협론을 내세웠는데 이는 군부 출신 내부의 강경파들과 마찰을 빚는 원인이 된다. 이때 전두환은 그에게 당권을 전권 위임하였으나 그와 노신영 사이에서 후계자를 선택하려 했다. 그러나 노신영을 선택하려는 것을 군부 집단의 집단 반발로 노태우룰 낙점하게 된다. 그러나 일부 신군부 출신 내에서도 그는 보복을 잘할 것이라며 우려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 무렵 이민우 등 야당 일각에서 직선제를 주장하자 그는 전두환으로부터 직선제 개헌을 막으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그가 여기에 호응하지 않음으로서 전두환과 갈등하게 된다.
1985년 12대 국회 개원협상의 민정당 측 대표자로 야당 인사들을 설득하여 국회 개원을 이끌어냈다. 그해 4월 초까지도 야당은 체포된 재야인사들의 선 사면과 후 개원을 강하게 밀고 나갔으나 그는 선 개원 입장을 내세웠고, 협상은 결렬되었으나 결국 신한민주당의 이민우 총재 등을 간곡히 설득한 끝에 야당을 국회로 등원시켰다. 여당 내 강경파들은 단독개원을 추진했지만 그는 반대하며 "국회의 개원을 위해 우리의 모든 노력을 경주해 우리의 노력과 의지와 국민과 야당에 충실히 전달되도록 힘쓰자."며 강경론에 반대했다. 그러나 1985년에 예산안 파동이 발생했고 직접 나서서 겨우 파동을 수습하였다.
1987년 대통령 선거.
후보 선출.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은 행정관과 외교관을 지낸 노신영을 후계자로 낙점하고 있었다. 제네바 대표부 대사로 있던 노신영을 1980년 외무부 장관으로 불러들였고, 1982년 안기부장, 1985년 국무총리에 임명했다. 그 뒤 노신영에게 정치수업을 시켜서 후계자로 낙점하려고 했으나 전두환의 주변 인사들, 특히 군 출신들이 ‘말도 안 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라며 반발하자 결국 전두환은 뜻을 거두고 말았다. 결국 노태우를 후계자로 정했다.
1987년 6월에는 대통령 후보 자리를 놓고 다른 대안자로 지목되던 노신영과 정호용을 제치고 민주정의당 내에서 대통령 후보자로 추대되었다. 6월 10일 잠실체육관에서 민주정의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개회가 열렸고, 노태우는 이 대회에서 민정당의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사태 수습과 6·29 선언.
그러나 같은 날부터 전국적으로 반정부 시위(6월 민주항쟁)가 일어났다. 전두환 대통령이 발표한 4·13 호헌 조치를 계기로 학생들의 시위와 회사원들까지 가담하여 전국 각지에서 대통령직선제 개헌 등을 주장하는 집회가 전국에 확산된 것이다. 당시 제5공화국은 정치적 위기에 직면였는데, 이에 전두환에게 직선제 개헌안을 수용할 것을 건의하여 승락을 받아냈다. 이후 노태우는 대통령 선거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및 구속자 석방, 사면, 감형 등을 비롯 야당과 재야 세력이 주장해온 헌법 개헌 등의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요구를 대폭 수용하고 직선제 형태의 대통령 선거를 골자로 하는 내용의 8개항의 시국수습방안(6·29 선언)을 발표한다. 이것으로 제5공화국의 정치적 위기는 극복된다. 1987년 7월 전두환은 노태우의 6·29 선언을 전격 수용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시 그의 6·29 선언은 고독한 결단이라고 선전되고 연출되었으나 전두환의 기획과 지시에 의해 노태우가 연출했다는 주장도 있다. 노태우는 전두환의 육사동기였지만 전두환의 확고한 지배하에 있었으며 노태우의 개별적 자율성은 없었다 고 평가된다. 한편 이를 통해 강성 군부세력과 구별되는 온건 군부세력의 이미지를 구축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군사정권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강경파 군부와의 차별 및 군사 정권 인사들의 지지를 동시에 획득하였다.
노태우는 민심이 이반되던 1987년 내내 그는 전두환 정권에 충성을 맹세한다. 8월 5일
. 6.29 민주화ㅈ선언 후 퇴임한 전두환이 민주정의당 총재직을 사퇴하면서 당일의 전당대회에서 민주정의당 제2대 총재에 피선되었다.
보통 사람 유세와 비운.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한 노태우는 "나, 이 사람! 보통 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라고 유세하였다. 그러나 야권은 하룻밤 사이에 별을 더 단 육군 대장 출신이 어떻게 보통사람이냐며 반박했고 그는 전역 후 민간인의 신분이니 보통사람이 맞다며 응수했다. 한편 당시 국회의장인 이재형 역시 "노 총재는 평균보다 앞서 가는 사람이 맞다. 생긴 것도 보통 이상이요, 그가 앞으로 할 일도 보통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평균 의지를 갖고 보통 사람들과 호흡을 같이 하며 평균 시민들 앞에서 이끌어 나갈수 있는 것 보통사람인 것은 맞다."며 그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의 "나, 이 사람! 보통 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라는 발언은 보통 사람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냈다. 이후 1994년 서석재·박계동 등의 폭로사건으로 대통령 비자금 사건이 드러나면서 이는 곧 비아냥의 용어로 바뀌었다.
대통령 선거 당시 차별화된 선거 공약을 내세우며 자신을 코미디 소재로 다뤄도 좋다고 하기도 하였다. 이후 대머리, 주걱턱 등 연예계의 금기용어도 이때 해금되었다고 한다. 그는 정권 중간평가와 경인운하 건설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에도 불구하고 광주직할시 지역 유세 당시 '광주 학살의 원흉'또는 '방조자의 한 사람'이라는 항의 시위대가 나타나서 달걀과 밀가루, 오재미 세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민주주의의 양념'이라며 관련자들의 처벌을 반대하고 오히려 전두환에게 선처를 호소하면서 사건은 그냥 넘어가게 된다.
선거 유세 중 그는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를 제창하였다. 그는 당시 인구 10만 미만의 중소도시들도 직접 찾아다니면서 선거 유세를 벌였다. 그의 유세에 자극받은 김종필 등도 성남, 의정부 등의 중소도시를 직접 찾아다니며 선거 유세를 하게 되었다.
야권의 분열.
직선제 발표 직후 노태우는 자신의 대통령선거 승리를 장담하지 못해 불안해했고 전두환 역시 노태우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어 불안해했다. 그러나 군 출신 인사 중에서도 김종필이 출마하며 민주공화당과 한국국민당의 법통을 주장했기에 군 출신 인사와 보수 인사들의 표심이 갈라지리라 예상, 노태우의 선거 캠프에서는 참신함과 대화와 타협론을 내세워 박정희, 전두환은 물론이고 박정희 계열인 김종필 등과도 차별성을 구사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승리가 예상되던 양김의 분열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통일민주당 후보 선출 문제를 놓고 논란을 빚던 1987년 8월 11일, 김영삼은 김대중과 회동을 갖고 대통령 후보 단일화 문제를 협의했다. 그러나 김영삼의 조기 후보 단일화 주장과 김대중의 개헌 협상 후 조정 주장이 맞서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9월 14일에는 김대중과 만났고, 김대중은 김영삼에게 36개 미창당 지구당 결성을 요청한다. 그러나 김영삼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총선에서의 조직책 선정이나 다름없는 36개 지구당을 창당하는 것은 적전 분열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경선을 하지 않을 바에는 굳이 잡음의 소지가 있는 36개 지구당 창당은 필요없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며 김대중의 주장을 일축한다. 계속된 토론에도 김대중과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이후 9월 29일 김영삼 총재, 김대중 고문 간 후보단일화 회담을 하였으나 이견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다음날인 9월 30일 김영삼은 김대중과 야당 후보단일화 협상을 벌였으나 양자간의 시각차이만 확인하고 결렬되었다. 야당 후보자들의 단일화를 촉구하던 재야인사들은 이를 '적전분열'이라며 강도높게 질타하였다. 10월 10일 통일민주당을 장악한 김영삼은 대통령 선거 출마를 발표하고 나서자 당내 경선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던 김대중은 10월 18일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였다.
대통령 당선.
민정당 대표로 있을 때 노태우는 6월 항쟁으로 계속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여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로 있을 때 6·29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이 마련되었다. 1987년 7월 10일 전두환이 민주정의당 총재직을 사퇴하면서 제2대 민정당 총재로 취임하였다.
한편 김영삼과 김대중은 대선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결과 1987년 11월에 김대중은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이후 김대중이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자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은 각각 2위와 3위인 28%, 27%의 득표율을 얻어 민주정의당의 노태우에게 2백만표차로 패배하였다. 1987년 당시 노태우와 김영삼 대선 후보는 각각 군사정권 후예와 단일화실패 책임문제로 광주 전남 유세에 나섰다가 성난 시민들이 던진 돌과 화염병에 곤욕을 치렀다.
당시 김대중이 평민당을 창당하면서 젊은피 수혈이라는 정책을 펴서 학생운동권 중 민족 해방 계열 출신 청년 정치지망생들을 대량으로 영입하면서 언론 매체 등에서조차 통일민주당의 영향력은 감소했고, 충격을 받은 그 역시 다른 재야 인사 및 운동권 계열 인사 영입에 박차를 가하게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노태우는 의정부시, 고양군, 성남시 등 중소도시에도 직접 유세를 다니기도 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는 전국 득표율 36%로 28%를 얻은 김영삼과 27%를 얻은 김대중 그리고 김종필을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7년 12월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는 새 헌법에 따라 치러진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원활한 여야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5월 28일 야 3당 총재와 청와대 4자회담을 열어 구속자석방 등의 방침을 밝혔다. 대북관계를 포함하여 대외관계 개선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3대 대통령 재직.
취임 초기.
1988년 2월 25일 노태우는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이자, 제6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노태우는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또한 그는 "중용(中庸)을 근간으로 화합과 화해의 정치를 실천하고 이를 바탕으로 계층간ㆍ지역간의 반목을 해소하면서 새시대를 민주 발전과 민족 자본의 시대로 만들겠다"는 정치 이념을 피력하였다. 그는 연설문 등의 초안을 검토 후 내용을 암기하여 그대로 자연스럽게 발표하였다.
노태우의 대통령직 취임 직후 5공 청산을 원하는 여론이 제기되었다. 노태우는 전두환 처벌을 주저했고 전두환은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을 사퇴하고 백담사로 은둔하였다(이것은 국정감사 부활의 결과에 따른 것이다.). 전두환의 백담사 은둔 기간 중에도 시민사회단체는 전두환 구속, 12.12, 5.18 관련 처벌을 꾸준히 요청했으나 노태우는 전두환 처벌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정 방향.
노태우 정부가 내세운 대표적인 국정 방향 2가지는 다음과 같다.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북방 정책"
특히 '북방 외교정책'은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다. 이는 노태우 정부의 주요 업적으로 손꼽힌다. 노태우는 집권 이후 제2세계의 상징과도 같았던 소련과 국교를 맺었고, 이후 헝가리 등과 같은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과도 차례로 국교를 맺었다. 뿐만 아니라 냉전 이후인 1992년에는 한국 전쟁의 적성국이었던 중국과도 국교를 맺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중공과의 외교관계 수립은 오랜 우방이었던 중화민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얻게 된다.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 역시 대표적이다. 그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 시절인 1987년 국회연설에서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열겠다"고 다짐한 바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시대는 권위체제로는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없는 다원의 시민사회이기 때문"에 나와있다. 하지만 그것은 끝내 오지 않았고, 그러나 그의 주장은 정치적 선전으로 그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외교 정책.
외교적으로는 이른바 "북방외교"를 천명하고 소련, 중국 등 공산권 국가와 수교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1991년 9월 국제 연합 입성을 이끌어냈다. 그는 7·7 선언 이래의 북방정책을 꾸준히 추진하였고 1990년 6월 샌프란시스코 방문시 보좌진을 파견해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과 연결하여 한소 정상회담과 한러 관계를 다시 복원시켰다.
1989년 노태우 정부는 일본 도쿄에서 거행되는 히로히토 천황 장례식에 공식적으로 강영훈 국무총리를 정부부문 사절로 파견했다. 1989년 3월 4일, 국회에서 지방자치법개정안이 통과되었는데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북방 정책.
북방정책, 다른 말로 '북방외교'라 불리는 외교정책을 통해 일단 양적인 면에서 한국 외교를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방정책은 노태우 정부 노력의 결과라기보다는 국내외의 외교환경이 만들어준 개연성의 덕택이 컸다는 점에서 평가절하되기도 한다. 노태우 정부 시기에 한국의 대(對)공산권 외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이는 한국 전쟁 이후 공산권 국가들과는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던 기존의 이념지향적 외교 정책과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제5공화국까지의 북방외교는 거의 답보상태에 있었고 교역·통상분야도 간접·제3자 형식의 미미한 규모였던 것에 비하면, 제6공화국의 출범과 동시에 가속화된 북방정책은 지극히 바람직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집권 초기부터 공산권과의 수교를 추진했다. 노태우 정부는 1989년 2월 헝가리를 시작으로 소련, 중국 등 공산주의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거나 관계를 개선하는 이른바 북방 정책을 추진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국제 연합(UN)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함께 가입하였으며,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리고, 문화·체육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등 적극적인 대북 외교를 펼쳤다. 1991년에는 사실상 핵개발을 포기하는 남북한 공동으로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채택했다. 한편, 정부의 주도와는 달리 민간 차원에서도 적극적인 통일 노력이 전개되어 평화 통일을 위한 논의가 활성화되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 당시 소련과 헝가리 등 구 공산권 국가들의 참가한 것을 계기로 이들 나라에 대한 본격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1990년 소련과 수교하였고, 소련의 해체 직후 러시아와 재수교하였다. 1992년에 중국을 방문하여 장쩌민 총서기와 양상쿤 국가주석 등에게 직접 만남을 제의, 정상회담을 개최해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 그 해에 몽골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베트남과는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1988년에는 7 ·7선언으로 알려진 '민족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면서 노태우정부에서는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직접 작성, 발표하였다.
동구권과도 공식 수교를 위한 접촉을 추진, 사절을 파견한 끝에 1989년 2월 1일 헝가리와 공식 수를 맺었다. 2월 27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여 한·미 정상회담을 하면서 조지 부시를 설득, 북방정책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얻어냈다.
1990년 6월 초 미국 방문 중, 미국에 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체류소식을 접한 뒤 밀사를 보내 비밀 회담을 하였다. 비밀 회담 결과로 6월 5일 한-소 정상회담을 가졌고, 6월 6일 부시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때 고르바초프로부터 한국 방문을 약속받고 10월 1일 소련과의 역사적인 수교가 이루어지고 10월 30일에는 서울에 주 소련 대사관이 개설되었다. 1991년에는 유엔총회에서 남북한이 유엔회원국으로 동시에 가입하게 되자, 북한과의 동시 가입은 있을 수 없다는 국내 보수단체들의 집단반발을 무릅쓰고 남북한이 함께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의 발표를 수락했다.
1992년 1월 노태우-부시 정상 회담이 있었고, 2월에 남북한은 나진-선봉 지구 개발 공동보조에 합의하였다. 또한 노태우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하여 장쩌민 총서기와 양상쿤 국가주석 등을 만나 정상회담을 개최해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8월)하였고 같은 해 몽골 및 베트남(12월)과도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또한 구 소련(舊 蘇聯)에서 독립한 신생국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1991년 독립), 아르메니아, 조지아 및 또 다른 신생국인 몰도바(1992년 독립)와 수교하였다. 그리고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와도 이해에 수교하였다. 그 밖에도 남아프리카공화국, 탄자니아 등 1992년에만 모두 18개국과 수교하여 총 수교국 수가 170개국으로 늘어났고 정상회담이 12회, 외무장관회담이 41회에 이르는 등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외교를 벌였다. 특히 수교국수가 크게 늘어난 것은 구 소련(舊 蘇聯)에서 독립한 나라들과 잇따라 국교를 수립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밖에도 주요 공산권 및 제3세계 국가들이 대거 포함돼 있다는 사실은 노태우 정부가 그동안 추진해 온 북방외교가 결실을 맺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북방외교의 성과는 1970년대 말 중국 공산당의 실용주의 노선 채택, 냉전체제의 종식과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대두,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그에 유발된 중앙유럽 국가들의 정치·경제개혁 및 개방 등의 국제정세의 변화에 한국의 경제발전(과장된 면이 많았다.)과 국민적 논의의 대두라는 국내 정세변화가 맞물린 결과이다. 다만, 급변하는 정세변화에 한국이 조금 더 빨리 진지하게 대응하고 그 주체가 정부나 정치권 일부에 그치지 않고 정보개방과 국민적 의사의 결집에 의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라크(1989년), 몽골, 예멘(각 1990년)와도 수교하였다.
주변국들과의 외교.
한편 국민 여론과 일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 및 일본과의 관계 개선도 추진하였다. 1990년 5월 24일 비행기편으로 일본 도쿄를 방문하여 가이후 총리와 1차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일본의 천황 아키히토로부터 사과 성명을 얻어내기도 했다. 한편 1989년 초부터 통일원 등에 지시하여 서울 올림픽과 구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로 일시 중단했던 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도 다시 추진하였다. 1989년 대북관계 개선의 일환으로 9월 11일 국회 본회의에 출석, 특별연설을 통해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제시하여 새로운 통일논의를 발표하였다.
1990년 1월 10일 신년 연두 회견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고령이산가족 왕래 및 금강산 공동개발 등을 추진할 것을 제의했다. 그의 제의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서 수락하였다. 1990년 6월 2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다시 그에게 남북대화 재개를 요청했고, 이를 수락하면서 남북고위급회담 제7차 예비회담이 7월 3일로 예정되었다. 그 해 7월 3일의 남북고위급 회담에서는 뚜렷한 성과를 얻어내지는 못하였지만 남북간의 대화분위기가 지속되자 7월 20일 남북한 민족대교류에 관한 특별담화문을 작성, 발표하여 8월 13일부터 8월 17일까지 이산가족 상봉 및 남북 자유 방문, 안전귀환 상호 보장 등을 북측에 제의하였다. 이를 북한측이 수용하면서 9월 4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총리 연형묵 등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단 90명 일행이 서울을 방문하였다. 이에 일부 보수단체에서는 그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시위를 하였으나 무산되었다.
대화가 진전되어 1990년 9월 5일 남북총리회담이 개막되었다. 회담 2일차인 9월 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연형묵 총리를 독대, 연형묵은 그에게 단독 면담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주석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한편 UN 가입 정책도 추진하여 1991년 9월 16일 대한민국의 UN가입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구 공산권 국가들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가입시켜야 한다고 하여 결국 동시에 가입하게 되었다.
1992년 8월 24일 중국과도 국교를 수립하여, 중국 건국 후 43년만에 수교관계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때 대한민국과 첫 수교 후 오랫동안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대만과의 단교 문제로 보수단체에서 반발했고, 대만에서도 반발했다. 이에 대만 외교부는 노태우의 중국과의 수교를 놓고 항의한 뒤, 결국 단교하였다.
대북 관계.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1988년에는 7 ·7선언 민족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특별선언을 발표하면서 노태우 정부에서는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 제시되었다. 이 선언에서 노태우는 남북한간의 적극적인 교류를 제의하고, 북한이 미국 및 일본과 관계 개선하는 일에 협조할 뜻을 선언했다.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두 개의 주권국가의 연합을 과도기 단계로 인정한 점에서 이전과는 달랐다. 북한은 민간교류를 원하는 당국자간의 교류를 회피해 왔지만, 미국 및 일본과 수교하기 위해서는 남북화해가 선결과제임을 깨닫고 남한의 교류제의를 수락했다. 그리하여 1990년 9월부터 총리를 대표로 하는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 회의가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열리는 동안 범민족통일음악회가 서울과 평양에서 열리고, 남북의 축구팀이 통일축구대회를 서울과 평양 두 곳에서 가졌으며, 1991년 4월에는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5월에는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남북한 단일팀이 참가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1991년 9월 17일 유엔총회에서 남북한이 유엔회원국으로 동시에 가입했다.
1991년 12월 13일 서울에서 열린 제5차 고위급회담에서 남북한이 화해 및 불가침, 교류협력 등에 관해 공동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다. 12월 31일 한반도 비핵화(非核化)에 관한 공동선언이 채택되었다. 남북한 공동으로 사실상 핵개발을 포기하기로 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1992년 9월 15일부터 17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8차 남북고위급 회담을 앞두고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이산 가족 상봉에 큰 기대를 걸고 8차 고위급 회담에서 반드시 성사시키라고 특별 지시를 했다. 대신 북한은 비전향 장기수인 리인모 노인의 송환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회담의 대변인 이동복은 이 때, 이른바 "이동복 훈령 조작 사건"의 주역이었다.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대한 대통령의 지침을 받기 위해, 평양의 상황실은 서울로 청훈(請訓)하였는데, 서울로부터 답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동복은 엉뚱한 훈령을 정원식 대표에게 보고했다.
대유럽 관계.
1988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 ·7선언)에서 남북간에 민족공동체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것 등 6개항 원칙을 선언하면서 공산주의권과의 관계개선의 의사를 천명하였다. 그는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킬 여건을 조성하기 위하여 북한이 미국·일본 등 우리 우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협조할 용의가 있다. 또한 우리는 소련·중국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한다"라고 천명하였다. 이러한 이른바 "북방외교"(또는 "북방정책", Nordpolitik)는 곧 가시화되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 당시 소련과 헝가리 등 구 공산권 국가들의 참가한 것을 계기로 이들 나라에 대한 본격적인 외교관계 수립이 시작되었다. 1988년 8월에 헝가리와의 상주대표부 설치협정 체결(1988년 10월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주(駐)헝가리 한국대표부가 개설)은 북방정책의 첫 결실로 평가된다. 1989년 동구권 국가로는 최초로 헝가리와 수교한데 이어, 같은 해 폴란드, 유고슬라비아와도 수교하였다. 1989년 노태우 정부는 일본 도쿄에서 거행되는 히로히토 일왕 장례식에 공식적으로 강영훈 국무총리를 정부부문 사절로 파견했다. 1990년 1월 인위적 정계개편(삼당 합당)을 시발로 하여 국내 정치적 기반을 다지고 1990년 초 공산권 국가들과 일거에 국교를 수립하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3월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몽골, 루마니아와 대사급 외교 관계를 이루고, 4월에는 고르바초프가 제주도를 방문하였다. 드디어 9월 30일 한-소 국교 정상화를 이룩하였다. 이러한 수교의 정책 수단은 국내경제력이었다. 헝가리와 수교시 6억2500만 USD의 상업 차관을 약속하였고, 한-소 수교시에는 30억USD의 차관을 제공하기로 합의하였다. 1990년 11월 헝가리의 괸츠 아르파드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공식 방문하여, 노태우 대통령과 한국의 유엔 가입 등 한반도 평화정착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공산권과의 수교를 바탕으로 1991년 9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이끌어 냈다. 1991년 소련 붕괴직후 러시아와 재수교하고, 소련의 붕괴와 함께 성립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및 알바니아와 1991년에 수교하였다.
경제 정책.
노태우의 경제 정책은 자유화와 개방화의 확대였다. 그의 정권 하에서 경제는 연평균 8.5%라는 고속성장을 누렸고, 1988년의 서울 올림픽 개최는 발전한 한국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88년 수출은 600억 달러를 돌파하였고 1986년 대한민국은 대외교역사상 최초로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한 이래 그 폭이 매년 확대, 1989년 대한민국은 마침내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반전하였다. 그러나 수출은 1990년대 초 경기침체로 부진을 겪게 되었다.
취임 1년차(1988년 2월 ~ 1989년 2월).
1988년 2월 25일 정식으로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한 노태우는 초기 "6공 황태자"라는 별명을 얻은 박철언 등을 차기 대통령 후계자로 지명하였으나 3당 합당으로 들어온 김영삼 등의 반발과, 차기 대권을 보장하지 않을 때 정권퇴진도 불사하겠다는 구 민주계(김영삼 계열)의 저항에 굴복하여 차기 대권 후보자직과 총재직을 김영삼에게 양도하기도 하였다. 이를 두고 보수 세력으로부터 쉽게 허락하였다, 물렁하다며 비난받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는 5공 청산의 기치를 내걸고 5공 인사들을 대부분 정리, 자진 퇴임을 유도하였으나 5.18 관련자 처벌에는 미온적이었다. 이에 따라 야당과 운동권에서는 5.5공화국이라며 반발했다. 한편 그는 6.29 선언으로 5공화국의 잔재를 털어버리고자 하는 의지를 천명 했고 장기집권의 종식을 정치적 최대 목표 로 지명했다. 또한 5공 청산론을 내세워 청와대에 있던 군 출신 인사들을 대거 해임하고 민간인 출신 전문가들과 대학 교수 출신 인사들을 기용했다. 이에 신군부 출신들은 집단 반발했으나 그는 들어주지 않았고, 신군부 출신들은 노신영이나 정호용, 장세동 대신 노태우를 지지한 점을 언급하며 반발하였으나 노태우는 이들의 주장을 묵살했다. 이후 일부 신군부 인사들과는 척을 지게 된다. 또한 노태우는 인적 쇄신을 목적으로 김종인 등 각 분야의 민간 전문가들을 영입하는 한편, 박정희, 전두환 정권 치하에 저항하여 대쪽 판사로 이름났던 법관 이회창을 영입하여 정계로 발탁하였다.
전두환은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헌법에서 소위 "5·16 혁명정신"에 관련된 사항을 삭제하였으며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폐지하고 하나회 계열에 부정적인 공화당 실세들을 권력형 비리 혐의와 연관하여 제거하였고, 박정희의 시대를 부정과 부패, 비리의 시대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정의사회 구현을 추구한다고 선언하였다. 취임 직후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추모 행사에 대한 간섭, 감시요원 배치를 없애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법통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김준엽의 제안은 거부하였다.
취임 직후부터 그는 공산권이 붕괴되리라 보고 소련과 중국 등 공산주의 국가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외교 담당자들을 초빙하여 연구를 지시하게 했다. 1988년 7월 7일 남북동포 교류 추진 등 대북정책 6개항을 골자로 한 '7·7선언'을 직접 작성, 발표하였으며 8월 8일에는 대국민 담화를 통해 "중공"을 '중국'으로 공식 호칭키로 발표하였다. 이를 두고 일부 보수 세력의 강한 반발을 샀으나, 각 언론과 문헌에 "중공" 대신 '중국'으로 사용하도록 지시, 추진하여 이때부터 대한민국의 문헌 자료에서는 "중공" 대신 '중국'으로 쓰이게 되었다.
청명계획.
1989년 3월 보안사령부가 친위쿠데타를 성공시키는 데 방해가 될 만한 반정부인사 목록을 만들고 이들을 개별적으로 사찰해 비상계엄이 선포되는 D-데이 전후로 전원 검거한다는 명목 하에 예비검속을 실시하였다. 노태우가 5공을 답습한 것 중 하나였으며, 일종의 정치적 개입이었다.
보안사 3처(우종일 처장·김용성 과장)는 1989년 4월 계엄에 대비해 각계 주요인사 923명의 인적사항·예상 도주로·예상 은신처·체포조 등이 기재된 청명카드를 작성하고 계엄시 이들을 검거·처벌하기 위한 청명계획을 수립했다. 보안사 3처 ‘청명 태스크포스’의 ‘청명’ 대상자 선정과 등급분류는 공안합수부 정책협의회에서 검찰·경찰의 좌익인사 자료와 보안사의 좌익인사 명단과 등급 등을 참조해 작성했다. 청명카드 작성작업을 완료한 뒤 1989년 8월 을지훈련기간에 8개 부대를 선정해 도상훈련까지 실시했다.
이어 보안사 3처 6과 분석반은 1990년 10월 보안사 민간인 사찰을 폭로한 윤석양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청수(동향파악)'대상자라는 가명칭으로 민간인 1300여명에 대해 공개 자료와 예하 보안부대의 '동향관찰보고서' 등을 바탕으로 개인별 신상자료철을 작성·관리했다.
보안사가 A급으로 분류해 사찰한 민간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 (당시 통일민주당 의원), 이해찬 전 국무총리 (당시 평화민주당 의원), 이상수 전 노동부 장관 (당시 평화민주당 의원), 이강철 전 대통령 정무특보(당시 진보정치연합 공동대표), 임종석 전 의원(당시 전대협 의장), 고 문익환 목사, 이창복 전 의원(당시 전민련 상임공동의장), 유인태 전 의원(당시 진보정치연합 사무처장), 이태복 전 노동부 장관(당시 주간 < 노동자신문 > 편집실장), 정윤광 당시 지하철노조 위원장 등 총 109명이다.
보안사가 지목한 '청명 대상자' 중 하나였던 노무현 대통령의 개인파일에는, 1989년 당시 거주하던 부산 남구 남천동 S아파트 내부 도면까지 그려져 있다. 아파트 내부 방 구조, 화장실과 베란다 위치 등도 파악해둔 상태였다. 평소 몇 시에 집을 나서 몇 시에 귀가하는지, 타고 다니는 차량은 무엇인지, 자주 걸어 다니는 동선, 평상시 자주 만나는 친구와 연락처, 예상도주로와 예상은신처까지 모두 기록돼 있다.
전교조 불법화 정책.
1989년 5월 22일 전교조는 연세대학교에서 창립대회를 열었다. 이때 학교는 이미 전투경찰에 의해 봉쇄되어 있었으며 창립식 직후 폭력적인 진압으로 많은 참가자들이 다쳤다. 이날 참가하였던 교사들은 전원 경찰에 연행되었다. 5월 22일 저녁 노태우는 대국민 담화를 통해 교사 노조는 불법이라 천명하고 해산 및 단속을 천명하였다. 이어 문교부 장관 정원식 역시 전교조를 불법 단체로 규정하고, 인사들에 대한 구속과 해임, 불이익 조치를 취하여 논란이 되었다. 이후 전교조 가입 인사 및 동조자들에 대한 탄압 정책을 계속하였다.
우선 전교조 불법화 선언과 함께 전교조에 결성에 참여한 오종렬 이외 1500명의 교사들을 해직, 파면시켰으며, 학생 운동권들은 이에 반발하여 학원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했다. 처음에는 노태우와 정원식의 마네킹을 화형하는 수준이었던 학생운동권들의 시위는 점차 분신자살로 이어졌다. 한편 정원식 장관은 수업을 거부한 세종대학교 학생들을 모조리 징계, 유급조치, 퇴학 등을 지시했다. 그 뒤 노태우는 정원식 등과 협의하여 특별 지시를 내려 조치를 완화, 세종대학교 학생들을 모두 복교시켰지만 유급과 징계, 정학을 가한다. 1500명의 전교조 관련 교사 해임과 파면, 징계에 대한 반발과 증오, 강경대의 경찰 폭행치사 사건 이후 연이어 터진 김귀정(金貴井)의 시위대 압살 사망 사건이 발생하면서 반정부 시위는 격화되었고, 노태우는 전교조는 불법 조직이라는 뜻을 반복하였다.
노태우는 재임기간 내내 전교조는 불법조직이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때 해직된 전교조 교사들은 1993년 10월 28일 김영삼 대통령의 집권 1년차이던 이날까지 전교조 복직 신청을 받아서 95%가 복직되었다. 1490명 중 1424명이 복직을 신청하고, 66명이 복직 신청을 거부한다.
7·7 선언.
1988년 7월 7일 노태우는 '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6개항으로 된 이 선언의 내용을 보면, 남북 동포의 상호교류 및 해외동포의 남북 자유왕래 개방, 이산가족 생사 확인 적극 추진, 남북교역 문호개방, 비군사 물자에 대한 우방국의 북한 무역 용인, 남북 간의 대결외교 종결, 북한의 대미·일 관계 개선 협조 등이다. 이 선언 후 우리 정부는 대북 비난 방송을 중단했으며, 남북 대학생 국토순례대행진을 북한측에 요구하기도 하였다.
1988년 서울 하계 올림픽 개최.
1988년 9월 17일, 서울에서 하계 올림픽이 개막되었다. 원래 가난한 나라에서, 세계 인류의 가슴에 화합과 전진을 심어주고 당당히 세계사의 주역으로 나선 것이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이 국제적인 스포츠 경기를 개최한 것은 1986년 아시안 게임 이후 2년 만의 일이었으며, 이를 통해 국가의 자부심이 높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올림픽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 구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분단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개최된다는 점에서 공산 진영의 참가 문제가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은 당시 공산 국가와 외교 관계조차 수립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북한은 이들 공산 국가의 참가를 막기 위한 로비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일단 공산 국가 중에서는 중국이 1984년 7월에, 동독이 1985년 3월에 참가를 선언한 상황이었다.
우선 중국의 경우 당시 중소 분쟁으로 인해 소련에 기대지 않는 독자 노선을 걷고 있던 공산주의 국가였고, 이미 1984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는 등 올림픽 보이콧에 비판적인 입장이었고 한편으로는 1990년 아시안 게임 유치 문제 등을 의식해 서울 하계 올림픽 참가를 발표했다. 그리고 동독의 경우 1984년 하계 올림픽 보이콧에 대한 자국 스포츠계 인사들의 반발이 워낙 거세서 2회 연속으로 올림픽을 보이콧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소련과 협의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서울 하계 올림픽 참가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소련이 참가 여부를 밝히지 않은 상황에서는 다른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나 그 외의 친소(親蘇) 공산주의 국가의 참가 역시 불투명했기 때문에, 김운용 IOC 위원을 비롯한 여러 관계자들은 소련 측 인사들을 설득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소련의 참가 선언을 이끌어냈고 헝가리, 폴란드 등의 동유럽 공산 국가들도 참가하였다. 그 외의 몽골·라오스·베트남 등의 아시아 공산 국가와 친북한 성향의 아프리카 국가들도 참가하면서 12년만에 동서 양 진영 대부분 국가가 참가하면서 참가국 수는 사상 최대인 160개국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일부 국가들이 참가하지 않아 IOC 전 회원국 참가라는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대회 조직위원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해서 끝까지 문호를 개방했고 참가를 유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88년 서울 하계 올림픽의 남북한 공동 개최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회 참가를 거절하였다. 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우호적인 공산주의 국가였던 쿠바, 에티오피아, 세이셸이 동참하면서 보이콧했다. 고립 성향의 공산주의 국가였던 알바니아 역시 불참하면서 알바니아는 4회 연속으로 하계 올림픽에 불참했다. 니카라과는 대한민국의 수교국이었으나 선수단 구성과 재정 문제를 이유로 참가하지 못했다. 결국 당시 IOC 회원국 중 7개 국가가 불참하였다. 마다가스카르는 대회 참가를 선언했지만 재정 문제를 이유로 철회했다.
한편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인해 IOC에서 축출된 상태였으므로 올림픽 참가가 금지되어 있었으며 나미비아는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지배하에 있어 IOC에 가입하지 못해 참가하지 못했다. 캄보디아, 기니비사우, 카보베르데, 부룬디, 코모로, 상투메 프린시페, 미크로네시아 연방, 마셜 제도, 나우루, 키리바시, 투발루, 세인트키츠 네비스, 도미니카 연방, 세인트루시아는 독립 국가였지만 당시 IOC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참가하지 못했다.
1988년 10월 2일, 서울 올림픽은 폐막되었다.
취임 2년차(1989년 2월 ~ 1990년 2월).
1989년 5월 동의대학교의 입시부정에 항의하던 동의대학교 학생들이 전투경찰 5명을 납치, 폭행하고 학내에 감금하여 이를 구출하려던 경찰관 7명이 화재와 추락으로 숨지고 외부에 근무중이던 경찰관 등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91명의 대학생들이 구속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2009년 민주화 운동으로 최종 인정되었다.
대한항공 803편 추락 사고.
1989년 7월 27일 대한민국 김포국제공항을 이륙, 태국의 방콕 돈므앙 국제공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다를 거쳐 리비아의 트리폴리에 도착할 예정이던 대한항공의 803편(맥도넬더글러스 DC-10 여객기)이 악천후와 시야 미확보, 안개 등의 무리한 착륙을 시도하다가 추락, 탑승객 72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승객과 승무원 200명을 태운 대한항공 DC-10 여객기가 한국시간을 기준으로 이날 오후 2시 30분 경 추락하여 탑승객 72명이 사망하고 139명이 부상했다(리비아 현지주민도 포함). 탑승객 대부분은 중동 현지에서 근로하는 근로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현대건설과 대우건설, 동아건설 (공영토건 포함) 등 150명의 근로자들이 모두 탑승하였다.
사고의 원인은 시계 240m의 짙은 안개 속에서 조종사가 무리한 착륙시도를 하다 일어난 것이다.
3당 합당.
1987년 대통령 선거의 뒤를 이어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은 최다 의석을 확보하였으나, 절반에도 못 미치는 125석을 획득하여 사상 첫 '여소야대' 국회가 출범했다. 이 때문에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이 부결되는 등 난관에 부딪혔고, 그는 결국 합당을 추진하기로 한다.
비슷한 시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역시 곤경에 처해 있었다. 선거에서 2위를 기록한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원내 3당으로 밀려나게 된다. 평소 노태우를 멀리하던 김영삼은 "만약에 이대로 있다가는 대통령을 할 수 없다"라는 생각에 여당의 지위를 얻고자 했고, 얼마 뒤 자신의 측근인 서석재가 무소속 후보를 매수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합당을 결심하게 된다.
한편 신민주공화당 역시 교섭단체 확보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당내에서 김종필에 대한 불만이 쏟아져 나온것은 물론이요, 김종필 자신조차도 정권을 잡기 위해 합당을 결심한다.
김영삼이 합당을 한다고 하자, 통일민주당은 분열을 일으키게 된다. 특히 당시 '청문회 스타'라고 불린 노무현은 김영삼에게 협조적이었으나, 합당한다고 하자 강하게 반발하며 결별을 선언한다. 이후 이기택, 김정길, 장성화, 김상현, 박찬종, 홍사덕, 이철, 노무현 등 8인이 3당 합당을 거부하며 김영삼을 따라가지 않고 민주당(일명 꼬마민주당)을 결성하였다.
이로써 민주진영의 주요 인물인 김영삼, 김대중 후보 단일화론이 좌절되었다. 1990년 1월 21일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은 한자리에 모여 합당하기로 합의하였고, 이튿날 3당 체제(물론 이는 전당 대회 전까지 행해졌다)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자유당이 탄생하였다. 이로써 개헌선을 훨씬 초과한 218석의 거대 여당이 되었다.
취임 3년차(1990년 2월 ~ 1991년 2월).
언론 자유화.
1988년 1월 1일의 신년사에서 그는 '정치인에 대한 풍자의 자유를 적극 허용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제5공화국 시절 은근히 유행하던 정치인들에 대한 풍자가 본격적으로 재개되었다. 1988년 여당 민주정의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였다. 이에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그는 일부 보수 세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1990년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을 추진해 1990년 3월 신한국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을 창당, 초대 총재에 추대되었다.
한편 노태우는 언론 자유화를 추진했다. 이에 따른 결과로는 미국 프리덤하우스가 1990년에 '언론 자유국'이라는 지위를 부여한 것이 있다.
또한 재야인사들에 대한 복권과 해금을 대대적으로 단행하였다.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 평화대회추진위원장으로 함석헌을 위촉하여 서울평화선언을 채택하게 했고, 1991년에는 장준하 등을 복권시키고 그해 8월 15일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또한 윤보선 대통령과 함석헌 등을 국가 원로로 예우하였다. 그러나 잇단 조치들로 보수 세력과 군출신 인사들의 반감과 반발을 초래하기도 했다.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사건.
1990년 국군보안사령부(現 국군정보사령부)에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의 사찰 대상 민간인 목록이 담긴 디스크를 들고 탈영해 그 목록을 공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목록에는 정계와 노동계, 종교계 등에 대한 사찰 기록이 담겨 있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노태우 정권 퇴진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보안사는 이후 기무사로 이름을 바꿨으며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혁노맹 사건.
윤석양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어과 85학번으로 학생운동으로 4학년 2학기에 제적되어 군 복무를 하게 됐다. 신병교육 뒤인 1990년 7월 3일, 윤석양은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되어 '혁명적 노동자계급투쟁동맹'(이하 혁노맹)에서의 활동에 대한 조사를 받게 되었다. 보안사의 협박에 못이긴 윤석양은 혁노맹 간부 1인의 소재지를 알려주었고, 이 후 혁노맹 수사에 홍대에서 모임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등 조금씩 협조했다.
7월 19일, 보안사 수사관들은 윤석양을 변장시켜 홍대 앞이 보이는 2층 카페로 데려가 혁노맹 관계자를 지목하도록 했고, 윤석양의 도움으로 혁노맹 관련자들을 체포할 수 있었다. 이 후, 보안사 수사관들은 윤석양을 조금씩 신임하게 되었고, 보안사에서는 8월 22일, 현역군인 10명이 포함된 '혁노맹' 사건을 발표했다. 윤석양은 탈영 이후, 혁노맹은 1990년 3월에 자진해체했으며, 계속 활동했다는 보안사의 발표 내용은 조작이라고 밝혔다.
이후 윤석양은 보안사 분석반으로 옮겨져 혁노맹에 대한 수사 보고서 작성과 사노맹에 대한 자료 정리를 도왔다. 하지만 9월 22일, 말 지의 10월호에서 "보안사의 혁노맹 사건 조작 진상"이라는 기사를 내보내자 보안사의 한 계장이 윤석양에게 이중스파이가 아니냐고 물었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윤석양은 9월 23일 새벽 2시,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관련 색인표와 디스켓을 가지고 보초 교대 시간을 틈타 보안사를 탈영,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에 은신했다.
범죄와의 전쟁.
한편 집권 직후부터 각종 살인 범죄와 강간 등의 범죄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1990년 10월 13일 민생치안 확립을 위한 특별선언인 10.13 특별 선언을 발표한다. 이는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졌다.
각종 깡패와 폭력조직의 활보와 야당 경선 내에도 깡패조직인 용팔이 등이 출몰하자 그는 1990년초부터 특별선언을 준비하여 발표한다. 내용의 골자는 '첫째, 국가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동원해서 이를 소탕해나갈 것, 둘째, 민주사회의 기틀을 위협하는 불법과 무질서를 추방할 것, 셋째, 과소비와 투기, 퇴폐와 향락을 바로잡아 '일하는 사회',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나갈 것' 등 이었다.
10월 14일 노태우는 각부 장관들을 소집하여 10.13 특별 선언의 후속 조치로 사회 질서 확립을 위해 자정 이후 심야영업 단속과 통제, 유흥업소 단속, 교통질서 위반 집중 단속, 공중질서 위반 집중 단속, 학교 주변 청소년보호구역 확대, 불량 비위생 식품 단속, 가정파괴범, 유괴 납치범, 좌익사범 등 흉악범을 비롯한 각종 반사회성 범죄조직에 대한 소탕 등 종합대책을 수립했다. 또한 그는 보복성 범죄를 특정범죄가중처벌 대상에 추가하고 각종 형사관계법을 개정해 마약, 폭력조직, 인신매매, 가정파괴범에 대한 처벌을 강화했다. 그러나 이를 두고 학생운동권들은 공안당국을 만들기 위한 수단이라며 강하게 반대하였다. 범죄와의 전쟁 선언 후 2년 뒤인 1992년 초 각종 극성 범죄율은 약 5% 정도 감소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취임 4년차(1991년 2월 ~ 1992년 2월).
작전 통제권 환수추진과 비핵화 선언.
대통령 후보 시절, 작전 통제권 환수추진을 공약하였고, 그 결과로 평시 작전 통제권을 김영삼의 문민정부 시절에 환수했다.
1991년 11월 13일 노태우는 비핵화를 공식 선언했다. 이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각각 추진하려던 원자폭탄 개발 및 핵 개발의 최종 포기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한편 그의 핵포기 선언에 대해 김영삼은 이를 잘못된 행위라고 지적하였다.
학생 운동권들의 시위.
1988년부터 노태우와 당시 문교부 장관 정원식은 전교조를 불법 조직으로 규정하고 단속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학생운동권들의 반발은 계속되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불법화 선언과 함께 전교조에 결성에 참여한 오종렬 이외 1500명의 교사들을 해직, 파면시켰으며, 이에 반발하여 학원민주화를 요구하며 수업을 거부한 세종대학교 학생들을 모조리 징계, 유급조치, 퇴학 등을 가했다. 그 뒤 조치를 완화시켜 세종대학교 학생들을 모두 복교시켰지만 유급과 징계, 정학을 가한다. 1500명의 전교조 관련 교사 해임과 파면, 징계에 대한 반발과 증오, 강경대의 경찰 폭행치사 사건 이후 연이어 터진 김귀정(金貴井)의 시위대 압살 사망 사건으로 학생운동가들은 정원식 퇴진 데모와 반 정원식 시위, 정원식의 허수아비와 마네킹을 놓고 정원식 화형식 등을 집행하기도 했다. 그 뒤 정원식은 한국외국어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다가 1991년 덕망높은 교육자의 발탁을 이유로 노태우에 의해 총리로 발탁되었다. 한편 노태우 정권을 군부독재의 연장선이라고 주장하던 학생운동권 세력은 1989년 이후 다시 분신자살과 투신자살 등을 감행하였다.
분신정국.
명지대학교의 총학생회장 박광철이 시위 참여 후 학교로 돌아오던 도중 경찰에 연행되었다. 2일이 지난 후 1991년 4월 26일 총학생회장의 석방을 위해 시위가 진행되었고, 시위가 격렬해지자 경찰이 진압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명지대생 강경대가 경찰의 폭력에 의해 사망했고, 이에 대하여 항의하는 시위 도중 성균관대생 김귀정까지 경찰에 의해 사망하였다.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인 4월 27일, 노태우 대통령은 사건의 책임을 물어 안응모 내무부 장관을 경질시켰다. 학생들은 노태우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연세대학교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4월 29일 전남대학교 학생 박승희가 강경대 사건 규탄집회 중 분신하였고 이어서 5월 1일 안동대학교 학생 김영균, 5월 3일 경원대학교 학생 천세용, 5월 8일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5월 10일 노동자 윤용하 등이 잇따라 분신하여 이른바 '분신정국' 이 조성되었다.
이로 인해 민주화에 소극적이던 노태우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게 되자, 노태우 정권은 5월 8일에 노태우 정권을 비난하며 자살한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의 유서를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이 대필했다는 소위 유서대필사건까지 조작하면서 사건을 덮으려 했다.
정원식 계란 투척 사건.
1991년 분신 정국 당시 김지하는 1991년 5월 5일 조선일보에 쓴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글로 분신자살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학생들의 협박과 비난이 계속되었고, 정원식 사건으로 더욱 격화되었다.
1991년 6월 3일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마지막 강의를 하고 나온 정원식에게 대학생들은 계란, 유리조각, 밀가루, 페인트 등을 투척했다. 6월 4일 노태우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사건에 대한 분노와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인륜이 땅에 떨어졌다며 특별 대책을 주문했다. 윤형섭 교육부 장관에게서 정원식의 계란 사건에 대한 보고를 접한 노태우는 "스승의 마지막 강의를 폭력으로 짓밟은 오늘의 학원폭력 상황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며 바로 관계자를 소집한다. 이어 노태우는 학생들의 패륜을 질타하며 정원식, 김지하 등에 대한 폭력 사건에 대한 엄벌을 지시하였다.
노태우는 6월 4일 각부 장관과 경찰, 검찰, 문교부 인사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사회적 윤리와 도덕성, 인성을 회복하고 학원가에 만연한 그릇된 풍토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근본적 대책을 마련해야 된다."라고 지시했다. 당초 노태우 정부는 경찰 수사선에서 마무리 지으려 하였으나 보수단체들의 시위로 검찰수사로 사건을 확대했다. 노태우는 바로 검찰총장 정구영을 불러 엄단을 지시했다. 검찰과 경찰의 합동 수사본부가 조직되고 6월 5일 오전 외국어대학교 주변에서 검문검색을 시작, 교내 주변을 탐문수사하여 정원식 규탄시위에 참여한 학생 310명을 체포, 연행했다.
1991년 국제로터리클럽 폴해리스 명예회원에 선출되었다. 그해 장준하를 명예회복하여,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1년에는 지방자치제도를 부활시키라는 야당과 시민단체의 요구를 노태우가 전격 수용, 1991년 대한민국 지방 선거가 치러지면서 30여년만에 지방자치제가 시행되었다. 이때 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인 민자당이 압승했지만 3당 합당을 계기로 국회에서 개헌선을 넘는 거대여당을 출범시켰으나 보수 진영의 반발과, 야당의 반발이 있었다. 그 해 서울 주변지역 개발정책 중 일산 신도시와 성남시에서 바다 모래로 지은 아파트들이 발견되어 책임자를 바로 문책하였다.
취임 5년차(1992년 2월 ~ 1993년 2월).
노태우는 이후 민주자유당의 당권을 놓고 김영삼과 갈등이 있었고 후계자로는 박철언 등을 내정하기도 했다. 이에 김영삼은 그에게 항의하며 집단탈당과 반정부 투쟁까지도 고려하였다. 결국 노태우는 김영삼에게 대권과 당권을 넘긴뒤, 1992년 8월 28일 노태우는 민자당 총재직을 사퇴하였다. 같은 날 김영삼이 민주자유당의 총재로 취임하면서 노태우는 민자당 명예총재에 선출되었으나, 9월 18일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된다는 이유로 모든 당직을 내놓고 민자당을 탈당하였다.
1992년 9월 18일 노태우는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거국중립내각 구성을 선언, 이에 따라 10월 9일 사상 첫 여당이 없는 중립내각이 출범하였다. 한편 대선 직전 대통령이 여당을 탈당하는 선례를 만들기도 했다.
퇴임.
그러나 김영삼에 대한 악감정은 계속되었는데 후일 그는 김영삼을 가리켜 "김영삼 민자당 대표는 권력투사처럼 행동했고, 그의 국정운영 능력을 의심했으나 달리 대안이 없어 후계자로 만들게 되었다."면서 "그는 민주주의와는 관계없는 사람이었으니 나는 색맹환자였던 셈이며 역사와 국민앞에 죄송하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한편 김영삼에게 순순히 밀려난다고 봤던 그는 야당 인사들에게도 정치자금을 비밀리에 지원하기도 했다. 김대중에게는 20억원 이상의 정치 자금을 지원했다.
1993년 헌정회 원로자문회의 위원이 되었다. 2월 25일 김영삼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고 연희동 자택으로 퇴임하였다.
퇴임 이후.
퇴임 직후.
대통령 퇴임 직후 1993년 8월 금융실명제가 전격 실시되면서 증권가를 중심으로 대통령의 비자금 보유설이 나돌자 그는 그러한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1994년 국회의원 서석재에 의해 4천억 비자금 설이 제기되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반박하였다. 1995년 서석재 의원 등에 의해 그의 비자금 조성문제가 계속 제기되었다. 같은 해 국회의원 박계동에 의해서 전직 대통령 비자금 수수설이 제기되어 수사에 들어가자, 해외 순방 출국 길에 언론,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그러한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라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비자금 수사 후 비자금 수수가 사실로 드러나자 굴복하였다.
1995년 10월, 노태우는 "문화대혁명 때 수천만 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보면 광주사태 저것은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발언으로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다. 노태우는 또한 "중국은 이런 피를 흘린 사건이 있었는데도 몇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처벌하지 않았으며 등소평이 중심이 돼 그 원로들을 다 대접하고 활용했다."고 말해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다.
그 직후 국민들의 비난여론이 일어나자 노태우는 "처음에는 그런 얘기를 한 기억이 나지 않았으나 나중에 녹음 테이프를 들어보니 그런 얘기를 했더라면서 어떻게 그런 얘기가 나올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놀랐다."는 발언으로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광주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처지가 못 된다."며 답변을 유보했다.
당시 노태우의 발언에 정치권까지 듫끓게 되었고 집권당인 민자당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해명을 촉구하는 형식으로 수습하자고 대응했으나 국민들의 공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노태우는 10월 13일, "자신의 발언으로 5.18 피해자 유족에게 상처를 준 점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자신의 광주 발언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1995년 10월 19일 민주당 국회의원 박계동은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신한은행 서소문 지점에 (주)우일양행 명의로 예치된 110억 원의 예금계좌 조회표 사본을 제시하며 '노태우 비자금 4천억 원!'이라는 발언을 강조, 노태우의 비자금 4천억 원이 여러 시중 은행에 차명계좌로 분산 예치되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10월 20일 신한은행 측에서 이 계좌에 대해 해명하는 과정에서 전직 대통령 비자금에 대한 구체적인 단서가 드러나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비자금 수수 사건과 구속.
1995년 10월 20일부터 검찰이 그의 계좌를 수사, 추적한 끝에 노태우의 경호실장 이현우가 검찰에 자진 출두하여 "우일양행 명의 차명계좌에 입금되어 있는 돈은 노태우가 재임 중 조성해 사용하다 남은 돈이며, 전 청와대 경호실 경리과장 이태진이 관리해 왔다."고 진술, 정치비자금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를 계기로 검찰의 수사결과 비자금 수수가 드러나자 노태우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 사실임을 인정하고 자신의 '재임 중 기업체로부터 5,000억 원 가량을 받아 사용하고 1,700억원 가량이 남았다.'고 밝혔다. 수사과정에서는 1995년 10월의 대국민 담화와는 달리 기업체로부터 3,400∼3,500억원을 받고, 198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를 위해 조성한 자금 중 사용하고 남은 돈과 당선 축하금 1,100억원 등을 합쳐서 자금을 조성했다고 밝혔다.
1995년, 포괄적 의미의 뇌물죄가 적용되어 이전에 대통령 재직시 조성한 비자금 수수와 뇌물조성 혐의,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혐의 등의 죄목으로 전격 구속되었다. 그해, 법원 재판에 회부되어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그해 11월 16일 서울 구치소에 구속 수감되었다. 노태우가 수감당할 때, 대법원은 노태우에게 대통령 재직 당시 뇌물을 준 재벌총수 8명을 포함한 기업인 40여 명을 뇌물 공여죄로 기소했지만 항소심에서 재벌기업인들에게는 전원 집행유예, 무죄 선고로 석방되었다. 한편 노태우는 옥중에서 항소했고, 항소심에서 징역 15년에 2,628억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이를 계기로 12.12와 5.18에 대한 재수사 여론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영삼은 취임 직후부터 문민 정부는 5.18 정신을 계승한 정부임을 천명하고 12.12와 5.18에 대한 재수사를 지시했다. 1996년부터 12.12와 5.18에 대한 수사가 이루어져, 1997년 4월 17일 12.12와 5.18 및 대통령 비자금 사건 관련 대법원 선고공판에서 법원으로부터 징역 17년형, 추징금 2,688억원의 형을 선고받았다.
김대중 정부 시절.
1997년 12월 사면되었다. 1997년 추징금 2,629억 원을 선고받고 6월 말까지 2,286억 원을 납부하였다. 2008년까지 남은 추징금은 약 387억 원이다.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김대중은 동서화합을 명분으로 그를 복권시켰다. 이후 각종 국가 행사에 국가 원로로 초청되었다.
1999년 6월 전두환은 백범 김구 기념사업회로부터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백범기념관 건립추진위원장인 이수성(李壽成) 전 국무총리 등 집행부가 전두환과 노태우를 고문으로 추대한 데서 논란이 발생했다.
회원 중 일부는 "광주시민 학살 등으로 민족에 큰 죄를 지은 두 사람을 고문으로 추대하는 것은 백범선생을 모욕하는 것"이라며 단식농성까지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집행부측은 당초 계획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후 노태우는 백범기념관 설립 때까지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직을 유지했다.
2003년 2월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 전두환과 나란히 앉아 행사를 참관했다. 이는 그가 대중 앞에서 보였던 마지막 공식 석상이었다.
2000년대 이후.
사면 이후 노태우는 건강이 악화되어 특별한 정치적 행보와 언론 행보를 보이지는 않았다. 6·29 선언 20주년을 맞이하여 2007년 6월 29일에 열린 만찬장에 참석한 것 외에는 바깥에서 좀처럼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고,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 행사에도 건강 악화로 불참했다. 추징금을 꾸준히 납부해 온 노태우는 2008년 들어 동생 노재우와 조카 노호준을 상대로 소송을 벌였다. 2008년 4월에는 동생과 조카 명의의 회사가 자의 비자금으로 설립된 것이라며 소송을 벌였으며, 12월에는 동생과 조카의 주주권 행사 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다. 하지만 이후 가처분 신청에서 패소해서 나머지 추징금 환수의 난항이 예상되었다. 당시 노태우는 전체 추징금 2,628억 원 중 2,339억 원을 환수한 상태였다.
한편 그 당시 노태우는 소뇌 위축증을 앓고 있었으며, 휠체어를 타고 다닐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다.
2011년 4월에는 기관지에서 침술용 침이 발견돼 화제가 됐다. 한의사협회는 5월 11일 노태우의 몸에서 발견된 침과 침뜸사 김남수의 제자들이 사용하는 침이 유사하다고 주장한 뒤 서울중앙지검에 침 시술자의 신원을 밝혀 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김남수는 1990년대 초 이후 노태우를 만난 적이 없으며, 제자들의 침 수술 의혹에 대해서도 "모르는 일"이라며 선을 그었다.
한의사협회는 2만 회원의 의료기관을 조사한 결과 노 전 대통령을 치료한 곳은 서울의 S병원 한 곳 뿐이며, 이 곳에서도 침 시술은 없었고 6~7년 전(사건당시, 2011년 기준) 약 처방만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한의사가 아닌 무면허 불법 시술에 의한 사고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결국 노 전 대통령 측이 침의 시술자가 누구인지 끝내 밝히지 않아 이 사건은 내사 종결되었다.
노태우는 2013년 6월까지 231억 원의 추징금을 미납한 상태다. 노태우 측은 자식 대신 동생, 사돈으로부터 남은 추징금을 추징해 달라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노태우는 동생과 사돈에게 제기한 재산을 반환하라는 소송을 취하하고, 사돈과 동생이 추징금을 납부하기로 합의했다. 2013년 9월 3일에 노태우의 사돈인 신명수 전 신동방그룹 회장이 80억 원을 납부하고, 동생 노재우가 9월 4일에 나머지 150억 4,000만 원을 납부하여 잔여 추징금을 완납하였다.
사망.
1997년 12월에 사면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2000년대 초반부터 노태우는 전립선암 수술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건강이 매우 안 좋아져, 연희동 자택 와병과 병원 입퇴원을 반복해 왔다. 2021년 10월 초 병세 악화로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해 집중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만 89세 생일을 40일 정도 앞둔 2021년 10월 26일 오후 1시 46분에 향년 90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공교롭게도 노태우는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서거한 지 정확하게 42년 후 같은 날에 서거했다.
10월 27일 정부는 국무회의를 열고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실시한다' 고 발표했다. 김부겸 국무총리가 장례위원장을 맡아 주관했으며, 10월 30일까지 5일 동안 국가장으로 치러졌다.
빈소는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으며, 사위인 최태원 SK그룹 회장, 노재봉 전 국무총리,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정해창 전 대통령 비서실장,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 등 전·현직 정·재계 인사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현직 대통령인 문재인 대통령은 27일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애도의 메시지를 발표하면서도, "유영민 비서실장과 이철희 정무수석이 조문을 갈 것"이라며 직접 조문을 가지 않는다고 시사했었다.
10월 30일 오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발인식을 한 후 연희동 사저에서 노제를 지낸 뒤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영결식이 진행되었으며, 오후에 서초구 원지동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 절차를 밟은 직후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에 있는 검단사에 임시로 안치되었다.
장지는 2021년 11월에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통일동산지구 내 실향민 묘역인 동화경모공원으로 확정됐다.
평가.
6월 민주 항쟁 당시 시국수습방안(일명 6·29 선언)을 발표하고,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고 전두환 측근에 대한 사법처리를 단행하여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전두환의 군사쿠데타에 가담하는 가 하면 5공 성립에 깊숙히 관여했다는 점, 비자금 문제 등은 부정적으로 평가받는다.
윤치영은 '노태우 대표위원에 의한 민주화 선언은 무정부상태로까지 치달을 뻔한 대한민국을 쾌도난마를 끊는 솜씨와 같이 온 국민에게 안도의 숨을 몰아쉬게 만들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노태우의 6.29 선언을 두고 국민에 대한 항복 선언이니, 어쩔 수 없는 궁여지책이니 하고 입방아를 찧는 일은 '너무나도 정치적 선동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았나?'고 비판했다.
긍정적 평가.
정치적 측면.
6·10 민중 항쟁의 뜻을 조건부 수용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고 이를 골자로 하는 6·29 선언을 받아들였다. 이를 통해서 5년 단임의 대통령제를 기반으로 하는 헌법을 제정했다. 이는 권위주의적인 전두환 정권과는 차별화 전략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 올림픽을 성공리에 개최하여 진행하였고 이후 5공 청문회를 하는 등의 제5공화국의 비리를 근절·청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또한 노태우는 1972년 이후 15년만에 민간인 직접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이라는 데에는 의미가 있다. 또한 대통령을 소설이나 풍자물에 등장시킬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의 기존의 권위주의적인 질서를 타파하려 노력하였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한러 국교회복과 한중 국교회복에 새 전기를 마련하고, 남북 관계 개선에 노력했다는 평가도 있다.
경제적 측면.
성장과 분배의 조화.
당시에 자주 거론되던 표현으로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 "아시아의 용에서 지렁이로 전락하다.", "소득 수준 5천 불에 소비 수준 2만 불의 과소비 망국" 등이 있었을 정도로 1980년대 후반 3저 호황의 끝자락에서 재임 기간에 경제성장이 예전보다 침체되었다는 인식이 있었으나, 노태우 정부 집권 기간 동안 30여년간의 경제성장의 과실이 국민에게 고루 분배되고 중산층이 넓게 형성되었다. 아울러 이 시기에 자가용이 대중화되고 해외여행객 수도 급속히 늘어났다. 연평균 7~8%에 달하는 고속 성장을 유지하면서도 지니계수도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낮은 편이었고, 1997년 외환 위기 이전까지는 소득 분배가 양호했다. 빈부격차를 측정할 때 쓰이는 지니계수는 낮을 수록 빈부격차가 낮은데, 노태우 정부 시기에 대한민국의 지니계수는 가장 낮았고 이외에 다른 계산 방법인 10분위 배율, 5분위 배율도 거의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 상대적 빈곤율도 가장 낮았다. 또한 연평균 최저임금 증가율은 17%로 87년 개헌 이후 들어선 5년 단임제 역대 정부 가운데 최대 수치다. 게다가 1989년 갤럽조사에서는 전체 국민의 75%가 중산층이라고 응답했고, 1992년에는 76.3%이 중산층으로 조사되어서 역대 최고 수치를 기록했다.
때문에 진보적 성향의 정치학자인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강의에서 "역대 정부에서 가장 진보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한 지도자는 노(태우) 대통령이다."라고 말했다. 같은 성씨의 노무현 정부의 경우, 진보적 이미지와는 달리 전반적인 경제정책은 '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한다.'라는 말처럼 갈팡질팡하며 재벌들에게 불확실성, 지지자들에게 배신을 안겨주는 경우가 많았다. 노태우는 조순 등 개혁적 인사들을 채용하고, 토지 공개념을 시행하려 애썼으며 최저임금제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요약하면 또한 국제 수지와 국가 재정에서 흑자 기조를 유지하는 등 장기 호황을 바탕으로 분배 정의가 강화되고 낮은 실업률 유지와 구매력 증가가 지속되었던 시기로 최근 강조되는 분배를 통한 소위 소득 주도 성장이 우리 경제 역사상 유일하게 이뤄졌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부동산 정책과 재벌 견제.
종합토지세, 택지소유상한제·토지초과세, 개발 이익 환수에 관한 법률 등 토지 공개념 3법을 도입하여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고자 했다. 이 법안은 90년대 중후반에 차례대로 헌재에게서 위헌 판결을 받았지만, 민주화 이후 가장 진보적인 부동산 토지 정책이었다. 당시 정부는 150평 이상의 집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률까지 제정하려 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까지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5.8 조치를 통해 정부가 재벌과 대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비업무용 부동산을 매각 처분하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이것은 역사상 가장 강도 높은 직접적 재벌 규제로 꼽혔다. 이 일로 재벌과 대기업은 소유하고 있던 비업무용 토지 약 4천만 평을 처분하게 됐다. 노태우 정부는 3저 호황의 여파로 투기자금이 부동산으로 대거 쏠리면서 이로 인한 문제점이 커지자 토지과다보유세 부과와 8.10부동산투기억제종합대책을 발표하였고, 주택 보급 확대와 주택 가격 안정을 위해 주택 200만 호 건설 계획을 발표하여 분당, 일산 등 1기 신도시를 적극적으로 기획 건설하였다. 〈공시지가제도〉(1989)를 도입하였고, 노후 아파트 재건축 사업을 처음으로 승인하는 등의 일련의 정책으로 부동산 폭등을 억제하는 데 주력했다. 이 정책은 재임 초중반기에는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지만 본격적으로 신도시 아파트가 대량 공급되기 시작한 1991년부터 부동산 가격의 상승세가 꺾이는 등 성과를 거뒀다. 아울러 김영삼 정부 들어서도 부동산 투기 억제 정책 기조 자체가 유지되면서 김대중 정부 초기까지 부동산 시장을 안정화시키는 등의 효과를 낳았다.
대기업 채용시장 저변 확대.
그동안 서울 명문대 출신 졸업자 위주로 신입사원을 채용해온 주요 대기업들에게 지방대 졸업자, 특히 지방거점국립대 졸업생을 중심으로 채용할 것을 권고, 기업인력의 저변을 확대하고자 노력했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1989년 정부투자기관경영평가위원회는 지방대 졸업생들의 취업 촉진을 위해 정부투자기관의 지방대생 채용 할당제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본사가 지방에 있는 정부투자기관과 지방사무소 정원이 서울(본사)보다 많은 투자기관은 대졸 신규 채용 인력의 60% 이상을 지방대 졸업자로 뽑도록 했다. 나머지 투자기관과 4대 국책은행은 50% 이상 채용토록 했다. 채용 결과는 정부투자기관 평가 때 반영하게 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의무화했다.
외교적 측면.
노태우는 재직 중 '북방 외교 정책'을 추진하여, 사회주의 국가들과 외교를 맺기도 했다. 1990년대 초 남북이 공동으로 유엔에 가입하고, 공동 탁구대회도 개최었다. 한러 국교회복과 한중 국교회복에 새 전기를 마련하고, 남북 관계 개선에 노력했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7.7 선언 등은 미국에의 절대 의존적인 외교에 어느 정도 자율성을 부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부정적 평가.
군인 출신 정치인.
그러나 노태우는 전두환과 마찬가지로 군인 출신 정치인이고, 일각에서는 군인 출신 정치인임을 들어 전두환 정권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평가하기도 하며 5·18 민주화 운동의 진압의 입장에 서있었다는 것과 제5공화국 출신으로서 5공비리 청산에 미진했다는 것에 한계가 있다. 또한 6공화국이 들어서면서 퇴임한 5공 비리의 핵심 인사인 전두환이 징역을 선고받은 것이 아니라 백담사에서 은거한 점을 미뤄봐도 역시 5공 비리 청산에 미진했다는 시각도 있다.
또한 대통령을 소설이나 풍자물에 등장시킬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의 기존의 권위주의적인 질서를 타파하려 노력하였다는 점과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폐막, 구 공산권 국가들과의 외교노력 면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일각에서는 권위주의적인 질서를 타파하려는 등의 노력을 두고 '물태우'라고 비판하거나 비아냥대기도 한다. 3당 합당으로 현재의 한나라당 계열 정당(당시 민주자유당)에 들어온 김영삼 이전을 군부정권으로 파악하여 군부정권 최후의 통치자로 보기도 한다.
정치적 비판.
문민정부 시절인 1995년에는 재임기간 중에 비자금을 모금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검찰에 구속, 재판을 받는 등 대통령 재직시의 뇌물 수수에 관련하여 비판이 있다. 김영삼 정부 당시 부각되었던 수천억원 규모의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국민적 지탄을 받았다.
또한 5공화국 청산을 주장하면서 5공 인사들을 비호한 것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공공부문의 지나친 확대로 대한민국 경제의 잠재성장성을 훼손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북방정책 비난.
육군사관학교장 민병돈은 1989년 3월 21일 제45기 졸업식 식사(式辭)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이며, 우리의 적이 누구인지조차 흐려지기도 하며, 적성국과 우방국이 어느 나라인지도 기억에서 지워버리려는, 매우 해괴하고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전방에 군인들을 혼란에 빠지게 한다는 여론을 대표한 발언이었다.
논란과 의혹.
부정 선거 의혹.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그가 당선된 이유는 야권의 분열과 중대사고 등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그가 당선된 것이 부정 선거라는 의혹이 존재한다.
실제로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는 선거 직후 이 선거가 부정선거이며 무효임을 규정, 투쟁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 역시 "부정선거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내가 이겼을 것"임을 주장하였고, 투쟁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실제로 1987년 대선 당시 노태우 후보를 찍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대에서 구타를 당하여 죽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이 부대에 있던 상병들은 의문사위원회에서“군 간부들이 노 후보만 찍을 수 있도록 투표용지를 접거나, 다들 지켜보는 책상 위에 투표용지를 올려놓고 도장을 찍었다”고 증언했다.
지역 감정 의혹.
1987년 제13대 대선 당시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을 비롯한 민주세력들은 지역감정을 "군부와 민주정의당의 정치공작이며 지역감정을 악용하여 노태우 후보를 당선시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영남출신의 군인중심인 하나회가 조장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1990년 1월 무렵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의 3당합당에 의한 민주자유당 창당으로 호남을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고립시켰다는 비판도 있다.
보안사 민간인 사찰사건과 도청 의혹.
보안사 민간인 사찰 사건(윤석양 이병 양심선언 사건)은 1990년 보안사령부(현재의 기무사)에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의 사찰 대상 민간인 목록이 담긴 디스크를 들고 탈영해 그 목록을 공개한 사건을 말한다. 이 목록에는 정계와 노동계, 종교계 등에 대한 사찰 기록이 담겨 있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노태우 정권 퇴진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항의에 굴복한 노태우는 즉시 보안사를 기무사로 이름을 바꾸게 했고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전임자들은 기피인물이나 정적을 괴롭힐 때 주로 중앙정보부나 보안사령부를 이용하였으나 노태우는 주로 국세청을 이용했다. 정보기관 이용은 국내외 인권문제를 야기시켰고 국민의 반감을 사기 때문이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망언.
1995년 10월, 노태우는 "문화대혁명 때 수천만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보면 광주사태 저것은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망언으로 국민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노태우씨는 "중국은 이런 피를 흘린 사건이 있었는데도 몇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처벌하지 않았으며 등소평이 중심이 돼 그 원로들을 다 대접하고 활용했다"고 말해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다.
그 직후 국민들의 비난여론이 일어나자 노태우는 "처음에는 그런 얘기를 한 기억이 나지않았으나 나중에 녹음 테이프를 들어보니 그런 얘기를 했더라면서 어떻게 그런 얘기가 나올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놀랐다"는 발언으로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광주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처지가 못된다"며 답변을 유보했다.
당시 노태우의 망언에 정치권까지 듫끓게 되었고 집권당인 민자당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망언에 대해 해명을 촉구하는 형식으로 수습하자고 대응했으나 국민들의 공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노태우는 10월 13일, "자신의 발언으로 5.18 피해자 유족에게 상처를 준 점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자신의 광주 망언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한편 노태우는 2011년 5.18에 대해 다시 "5.18은 "유언비어가 진범"이라며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 시민들 씨를 말리러 왔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들은 시민들이 무기고를 습격하게 된 것이라는 게 주요 내용"이라고 강변했다.
물태우.
노태우의 별명은 '물' 또는 '물태우'였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역대 대통령을 우스개 삼아 '이, 윤, 박, 최, 돌(전두환), 물(노태우), 깡(김영삼)'이라 불렀다.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대통령까지는 성을 그대로 불렀지만 그 뒤로는 별명이다. '물'은 노태우의 수동적이고 미온적인 처신과 카리스마 없는 모습으로 물에 물을 탄 것 같다는 뜻이다. 그러나 노태우는 자신에게 붙여진 '물태우'라는 별명에 좋은 반응을 보였다.
1992년 대선 자금.
노태우는 2011년 8월 9일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1992년 대통령 선거 당시 김영삼 후보에게 3,000억 원을 지원했던 사실을 밝혔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김영삼 대통령 측근과 노태우 대통령 측근들의 갈등이 커지고 있다.
기타.
1987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을 풍자의 소재로 써도 된다고 허용하여 이때부터 대통령과 정치인에 대한 자유로운 풍자 작품이 나타나기도 했다. 대통령 재직 중 당시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소신있는 판결을 내리기로 유명했던 이회창을 법관직에 복직시키고, 그에게 정치 입문을 권고하기도 했다. 또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언급금지령을 철회하였다.
그는 강경론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주장했다. "갈등은 어느 경우에나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여유를 두고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인내와 지혜가 필요하다. 대화하려는 자, 타협하려는 자는 비겁한 자가 아니다. 평화적으로 해결의 길을 찾는 사람이 위대한 개척자이다."라고 했다.
1987년 6월 29일 전두환 중심의 군부정권과 학생운동권 사이에 유혈극한투쟁으로 갈 때 그는 6ㆍ29선언으로 불리는 시국 수습을 위한 특별선언을 발표하여 혼란한 정국을 화합 국면으로 전환시켰다.
그의 어머니 김태향이 사망했을 때는 야당 인사들이 직접 빈소에 찾아오기도 했다. 또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부음 소식 직후 바로 전화를 걸어 노태우를 위로하고, 빈소를 찾아 조문하기도 했다.
군인 시절 차에서 금강경 테이프를 틀어 놓고 들을 정도로 독실한 불교 신자였으나 노년에는 천주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평소에 존경하는 인물로 김구를 지목하기도 했다. |
2911 | 65024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911 | 물질대사 | 물질대사(物質代謝, ), 신진대사 또는 단순히 대사(代謝)는 생물의 세포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일어나는 모든 물질의 변화로, 생체내 물질의 분해합성과 같은 모든 화학 작용이다. 효소가 반응을 촉매하며, 대사를 통해 생물은 성장하고 번식하며, 구조를 유지하고 환경에 반응한다. 대사라는 단어는 소화와 세포 간에 물질 수송 등을 포함하여 생물체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화학 반응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경우 세포 내에서 일어나는 반응의 일부를 중간 대사()라 한다.
대사는 대개 두 부류로 나뉜다. 이화작용()은 세포 호흡을 통하여 유기 분자를 분해하고 에너지를 얻는 반응이다. 동화작용()은 에너지를 이용하여 단백질이나 핵산과 같은 세포의 구성 성분을 합성하는 반응이다.
대사의 화학 반응은 대사경로를 통해 이루어진다. 대사경로에서 한 화합물이 여러 단계의 반응을 거쳐 다른 화합물로 변화하고, 단계마다 다른 효소가 차례로 반응을 촉매한다. 효소는 에너지를 방출하면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반응을 에너지를 요구하는 반응과 짝지어 생명체가 필요로 하는 반응이 일어나게 한다. 효소는 반응이 좀더 빠르게 일어나도록 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 또 세포 주위의 환경이나 세포에 오는 신호에 반응하기 위해 대사를 조절하는 역할도 한다.
생물의 대사 시스템에 따라 어떤 물질이 영양소인지 독인지가 정해진다. 예를 들어, 황화 수소는 몇몇 원핵생물에게는 양분이지만, 동물들에게는 독이다. 생물체의 대사 속도는 필요한 음식의 양과 음식을 얻는 방법에 영향을 미친다.
생물 종이 다를지라도 기본적인 대사경로와 그 구성 성분은 매우 유사하다. 시트르산 회로를 구성하는 중간체로 널리 알려진 카복실산들은 단세포 세균인 대장균에서부터 거대한 다세포 생물인 코끼리에 이르기까지 알려진 모든 생물에 존재한다. 대사경로는 진화 초기에 등장했으며, 그 효율성 때문에 계속해서 유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요 생화학 분자.
동물과 식물, 미생물의 구조는 대부분 아미노산, 탄수화물, 지질(종종 지방이라고 불림) 이렇게 세 가지 기본적인 분자로 이루어진다.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며, 대사는 이 분자들을 만들어 세포와 조직의 구성 성분으로 쓰거나, 분해하여 에너지로 쓰는 화학 반응이다. 주요 생화학 분자는 결합하여 DNA나 단백질 같은 고분자가 된다.
아미노산과 단백질.
단백질은 아미노산이 펩타이드 결합을 통해 결합한 선형 사슬로 이루어져 있다. 단백질 중 다수는 효소로 대사의 화학 반응을 촉매한다. 기타 단백질은 세포 형태를 유지하는 세포골격과 같이 구조나 기계적 기능을 담당한다. 단백질은 또한 세포 신호, 면역 반응, 세포 부착, 막을 통한 능동수송, 세포 주기에 주요 역할을 한다. 아미노산은 또한 일차적으로 에너지를 공급하는 포도당이 부족하거나 세포가 대사적 스트레스 상태일 때 시트르산 회로에 진입하는 탄소원을 제공하여 세포의 에너지 대사에 관여하기도 한다.
지질.
지질은 생화학 분자들 중 가장 다양한 유형으로 나뉜다. 주요 역할로는 생체막 안팎을 구성하는 것과 에너지원으로서의 역할이 있다. 지질은 소수성이나 양친매성 물질로 정의되지만 벤젠이나 클로로폼과 같은 유기 용매에 녹는다. 지방은 지방산과 글리세롤을 포함하는 큰 화합물 무리이다. 글리세롤이 지방산 세 분자에 결합한 에스터를 트라이글리세라이드라 한다. 트라이글리세라이드 구조에서 조금씩 변형된 화합물이 존재한다. 스핑고지질의 스핑고신, 인지질의 인산염과 같은 친수성 기를 예로 들 수 있다. 그 밖에 스테로이드도 주요 지질 유형으로, 콜레스테롤이 여기에 속한다.
탄수화물.
탄수화물은 하이드록시기가 많은 알데하이드나 케톤으로 사슬이나 고리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 탄수화물은 생물계에서 가장 풍부한 분자이다. 기능도 다양해서 에너지를 저장하고 수송하는 역할(녹말, 글리코젠), 구조적 역할(식물의 셀룰로스, 동물의 키틴)을 한다. 기본적인 탄수화물 단위를 단당류라고 하며, 갈락토스, 과당, 그리고 가장 중요한 포도당이 있다. 단당류는 무한정에 가까운 다양한 방법으로 서로 결합하여 다당류를 형성할 수 있다.
뉴클레오타이드.
핵산인 DNA와 RNA는 뉴클레오타이드의 중합체이다. 각 뉴클레오타이드는 인산기와 리보스 당, 질소 염기로 이루어진다. 핵산은 유전 정보를 저장하는데 사용되며, 전사와 번역 과정을 통해서 유전 정보를 발현시키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유전 정보는 DNA 수선 기작이 있어 보호되고, DNA 복제를 통해 분자 수를 증가시킨다. 바이러스는 HIV처럼 RNA 유전체를 가지면서 역전사를 통하여 바이러스 RNA 유전체로부터 DNA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 스플라이소좀이나 리보솜과 같은 리보자임에 있는 RNA는 화학 반응을 촉매하는 효소로 작용한다. 각각의 뉴클레오사이드는 핵염기에 리보스 당이 결합해서 만들어진다. 염기는 질소를 포함한 고리 구조로, 퓨린과 피리미딘으로 나뉜다. 뉴클레오타이드는 또한 대사에서 작용기 전이 반응에 참여하는 조효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조효소.
대사는 거대한 화학 반응이지만 작용기의 전이와 관련된 몇 가지 기본적인 반응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공통적인 화학 반응 덕분에 세포는 서로 다른 반응에 참여하는 작용기를 운반하는 대사 중간체의 수를 줄일 수 있다. 조효소는 이렇게 작용기를 운반하는 중간체이다. 작용기 전이 반응은 특정한 한 조효소에 의하여 진행되며, 효소는 그 조효소를 생산하고 소비한다. 따라서 조효소는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사용되며, 재활용된다.
주요 조효소 중 하나가 세포 공동의 에너지 통화라 할 수 있는 아데노신 삼인산(ATP)이다. ATP는 서로 다른 화학 반응 간에 화학 에너지를 전달하는데 사용된다. 세포에는 소량의 ATP만 존재하고, 에너지 요구량에 부합하기 위해 세포는 계속해서 ATP를 빠르게 재생성한다. ATP는 동화작용과 이화작용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한다. 이화작용은 분자를 분해하는 과정이고, 동화작용은 분자를 합성하는 과정이다. 이화작용을 통하여 ATP가 생산되고, 동화작용은 ATP를 소모한다. 그 밖에도 ATP는 인산화 반응에서 인산기를 운반하기도 한다.
비타민은 소량이 필요하지만 세포가 생산할 수 없는 유기 화합물이다. 사람의 영양 측면에서, 비타민은 체내에서 변화한 후 대개 조효소 기능을 한다. 예를 들어 수용성 비타민은 세포에서 이용될 때 인산화되거나 뉴클레오타이드와 결합한다. 비타민 B3(나이아신)의 유도체인 니코틴아마이드 아데닌 다이뉴클레오타이드(NAD+)는 전자수용체 역할을 하는 중요한 조효소이다. 수백 가지 종류의 탈수소효소가 각자의 기질에서 전자를 제거하고 NAD+를 NADH로 환원시킨다. 환원된 조효소 형태인 NADH는 수많은 환원효소의 기질이 되어 환원 반응에 참여한다. NAD+와 NADP+는 세포 내에서 두 가지 연관된 형태인 NADH와 NADPH로 존재한다. NAD+/NADH 형은 이화작용에서, NADP+/NADPH는 동화작용에서 각각 더 중요하게 사용된다.
무기질과 보조 인자.
무기 원소는 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트륨과 칼륨은 풍부한 반면, 다른 원소들은 소량 존재하면서 기능한다. 포유류 무게의 99%는 탄소, 질소, 칼슘, 나트륨, 염소, 칼륨, 수소, 인, 산소, 그리고 황이 차지한다. 유기 화합물(단백질, 지질, 탄수화물)이 대부분의 탄소와 질소를 포함하며, 산소와 수소는 물로서 존재한다.
풍부한 무기 원소는 이온성 전해질 역할을 한다. 가장 중요한 이온은 나트륨과 칼륨, 칼슘, 마그네슘, 염화 이온, 인산염과 유기 이온인 탄산수소염이다. 막 안팎의 이온 기울기는 정확하게 조절되어 삼투압과 수소 이온 농도를 유지시킨다. 신경과 근육 조직의 기능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활동전위는 세포외액과 세포기질 사이에서 전해질이 교환되면서 만들어진다. 전해질은 세포막에 있는 이온 통로를 통하여 세포에 드나든다. 예를 들어 근육 수축은 이온 통로와 T-소관()을 통한 칼슘, 나트륨, 칼륨의 이동에 의존한다.
전이 금속은 미량 원소로 존재하며, 아연이나 철은 미량 원소 중에도 비교적 많은 편이다. 금속 원소는 단백질의 보조 인자로 쓰이며, 카탈레이스같은 효소와 산소를 운반하는 단백질(예를 들어 헤모글로빈)의 활성에 필수적이다. 금속 보조 인자는 단백질의 특이적인 자리에 결합한다. 효소 보조 인자는 촉매 반응 중에 변형될 수 있지만, 촉매 반응이 끝나면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온다. 금속 미량 영양소는 특이적인 수송체에 의해 생물체 내로 흡수되고 사용하지 않을 때는 페리틴이나 메탈로티오네인()과 같은 저장 단백질과 결합한다.
이화작용.
이화작용은 큰 분자를 분해하는 대사 과정으로 음식을 분해하고 산화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이화작용으로 동화작용에 필요한 물질을 공급하고 에너지를 얻는다. 이화작용의 정확한 특성은 생물마다 각기 다르며, 필요에 따라서는 생물을 에너지와 탄소를 얻는 원천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아래 표 참고). 에너지원으로 유기영양생물()은 유기물을, 무기영양생물()은 무기물을, 광영양생물()은 태양광을 사용한다. 대사는 서로 다르지만 모두 산화환원 반응에 의존하며, 전자를 유기물, 물, 암모니아, 황화 수소, 철 이온(Fe2+)과 같은 환원된 전자공여체에서 산소, 질산염, 황산염과 같은 전자수용체로 전달한다. 동물의 경우 이 반응은 복잡한 유기물을 이산화 탄소와 물과 같은 간단한 분자로 분해하는 형태이다. 식물이나 남세균 등 광합성 생명체는 전자 전달 반응이 에너지를 방출하지 않고 태양광으로부터 에너지를 흡수해 저장하는 용도로 쓰인다.
동물에게 가장 흔한 이화작용은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한다. 첫째는 단백질, 다당류, 지질 등의 큰 유기 분자를 세포 바깥에서 보다 작은 분자로 소화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 작은 분자를 세포 내로 흡수하여 에너지를 일부 방출하는 더욱 작은 분자, 대개는 아세틸 조효소 A(아세틸-CoA)로 전환한다. 마지막으로 아세틸 조효소 A는 시트르산 회로와 전자전달계를 통해 물과 이산화탄소로 산화되고, 이 과정에서 방출되는 에너지의 일부는 조효소 NAD+를 NADH로 환원하면서 에너지를 저장한다.
소화.
녹말, 셀룰로스, 단백질 등의 고분자는 세포 내로 빠르게 흡수될 수 없고, 세포 대사에 이용되기 전에 더 작은 단위로 분해되어야 한다. 일반적인 효소 몇몇이 이러한 중합체를 소화한다. 소화 효소에는 단백질을 아미노산으로 분해하는 단백질 가수분해 효소, 다당류를 단당류 같은 단순한 당으로 분해하는 글리코사이드 가수분해효소(글리코시데이스) 등이 있다.
미생물은 단순히 주변에 소화 효소를 분비하고, 동물만이 특수한 세포에서 장으로 효소를 분비한다. 세포 바깥에서 효소가 고분자를 분해하여 만들어낸 아미노산과 당은 능동수송 단백질을 통해 세포 내로 운반된다.
유기물에서 얻은 에너지.
탄수화물 이화작용은 탄수화물을 더 작은 단위로 분해하는 과정이다. 탄수화물은 대개 단당류로 소화된 후에 세포로 유입된다. 세포로 들어온 단당류(포도당이나 과당)는 해당과정을 거치면서 피루브산으로 전환되고 ATP가 만들어진다. 피루브산은 몇몇 대사 회로의 중간체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세틸 조효소 A(아세틸-CoA)로 전환되어 시트르산 회로로 들어간다. 시트르산 회로에서 ATP가 더 많이 생산되기는 하지만, 이 회로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물은 아세틸-CoA가 산화되면서 NAD+에서 생산된 NADH이다. 무산소 조건에서는 젖산 탈수소효소의 작용으로 해당과정을 통해 젖산이 생산되고, NADH는 해당과정에서 재사용되기 위해서 NAD+로 재산화된다. 포도당은 오탄당 인산 경로라는 다른 경로로 분해될 수도 있다. 오탄당 인산 경로는 조효소 NADPH를 환원하고, 핵산의 구성 성분인 리보스와 같은 오탄당을 생산하는 과정이다.
지방은 지방산과 글리세롤로 가수분해된다. 글리세롤은 해당과정으로 들어가고 지방산은 베타 산화 과정을 통하여 분해되어 아세틸-CoA를 방출하고, 시트르산 회로에 진입한다. 지방산이 산화되면 산소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탄수화물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다. 스테로이드 또한 베타 산화와 유사한 과정을 통해 몇몇 세균에 의해 분해되어 상당한 양의 아세틸-CoA, 프로피오닐-CoA, 피루브산으로 전환되고, 이들은 모두 세포가 에너지를 얻는 데에 쓸 수 있다. 결핵균("M. tuberculosis")은 탄소원으로 콜레스테롤만을 이용하여 증식할 수 있으며, 콜레스테롤 사용 경로와 관련된 유전자가 결핵균이 감염되는 생활사의 여러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아미노산은 단백질이나 다른 생체분자를 합성하는데 이용되거나, 에너지원으로 사용되어 요소와 이산화 탄소로 산화된다. 아미노산의 산화 경로는 아미노기 전이효소에 의해 아미노기를 제거하면서 시작한다. 아미노기는 요소 회로로 들어가고, 아미노기가 제거된 탄소 골격은 케토산의 형태로 남는다. 이 케토산 중에 몇몇은 시트르산 회로의 중간체로, 예를 들어 글루탐산이 탈아미노화되면 α-케토글루타르산이 된다. 어떤 아미노산은 포도당신생합성 과정을 통해 포도당으로 전환될 수 있는데, 이를 당생성 아미노산이라 한다.
에너지 전환.
산화적 인산화.
산화적 인산화 과정에서 전자는 유기 분자에서 제거되어 산소로 옮겨지고 방출된 에너지는 ATP를 만드는데 쓰인다. 이 과정은 진핵생물의 경우 미토콘드리아 막에 있는 단백질 복합체들, 즉 전자전달계에서 일어난다. 원핵생물에서는 세포의 내막에 있는 단백질들에서 일어난다. 이 단백질 복합체들은 환원된 분자(즉, NADH)에서 산소로 전자가 전달되면서 방출되는 에너지를 이용하여 막 바깥으로 양성자를 퍼낸다(pump).
미토콘드리아 기질에서 막 사이 공간으로 양성자를 퍼내면 미토콘드리아 내막을 경계로 안팎으로 양성자의 농도 차가 생겨서 전기화학적 기울기를 형성한다. 이 힘에 의하여 양성자는 ATP 합성효소를 통하여 다시 미토콘드리아로 돌아간다. 양성자 흐름에 따라 ATP 합성효소의 기둥 소단위체(γ 소단위체)가 회전하고, ATP 합성효소 활성 자리의 구조가 변화하여 ADP을 ATP으로 인산화한다.
무기 화합물로부터의 에너지.
화학무기영양생물()은 원핵생물의 일종으로 무기 화합물을 산화하여 에너지를 얻는다. 여기 속하는 생물은 수소, 환원형 황 화합물(황화물, 황화 수소, 티오황산염), 철 이온(Fe II), 암모니아 등의 환원력을 이용할 수 있으며, 이들 화합물을 산화하고 산소나 아질산염을 전자수용체로 이용하여 에너지를 얻는다. 무기 화합물에서 에너지를 얻는 미생물의 대사는 이산화 탄소에서 아세트산을 생산하거나(), 질화 작용(), 탈질소 작용() 등 전세계적인 생물지구화학적 순환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토양비옥도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빛에서 얻는 에너지.
식물, 남세균, 녹색유황세균류와 몇몇 원생생물은 태양광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이 과정은 종종 광합성의 일부로서 이산화 탄소를 유기 화합물로 전환하는 과정을 동반한다. 자색 세균과 녹색황세균이 태양광을 에너지원으로 쓸 수 있듯이 원핵생물은 에너지 포착과 탄소 고정을 각각 따로 시행할 수 있으며, 동시에 대사 방향을 탄소 고정이나 유기 화합물의 발효로 전환할 수 있다.
태양광을 에너지로 저장하는 생물 역시 양성자 농도 기울기를 이용하여 에너지를 저장하므로 원리상 산화적 인산화와 유사하다. 양성자 농도 기울기에 의한 힘이 ATP 합성을 유도한다. 전자전달계를 돌리기 위한 전자는 광합성 반응 중심 또는 로돕신이라는 빛을 모으는 단백질로부터 온다. 반응 중심은 그곳에 존재하는 광합성 색소의 종류에 따라 두 부류로 나뉜다. 광합성 세균은 대개 한 종류의 반응 중심을 가지고, 식물과 남세균은 두 종류를 모두 가진다.
식물과 조류, 남세균은 광계 II에서 빛 에너지를 받아 물에서 전자를 제거하고 부산물로 산소를 방출한다. 전자는 사이토크롬 b6f 복합체로 전달되고, 그 에너지로 엽록체의 틸라코이드 막 안쪽으로 양성자를 퍼낸다. 양성자는 다시 막을 가로질러 확산되면서 ATP 합성효소를 작동시킨다. 전자는 광계 I으로 전달되어 조효소 NADP+를 환원시켜 NADPH가 캘빈 회로에서 사용되게 하거나, ATP 생성을 계속하기 위해 재활용된다.
동화작용.
동화작용은 이화작용에서 방출된 에너지로 복잡한 분자를 합성하는데 이용하는 대사 과정이다. 일반적으로 세포의 구조를 이루는 복잡한 분자는 작고 단순한 전구물질로부터 차례로 합성된다. 동화작용은 기본적으로 세 단계를 거친다. 처음에는 아미노산, 단당류, 아이소프레노이드, 뉴클레오타이드와 같은 전구물질을 생산하고, 그 다음에는 ATP에 저장된 에너지를 이용하여 전구물질을 활성이 있는 형태로 바꾼다. 마지막으로 이 전구물질들을 조립하여 단백질, 다당류, 지질, 핵산 등의 복잡한 분자들을 생산한다.
생물에 따라 스스로 세포 내에서 만들 수 있는 분자들의 종류가 각기 다르다. 식물과 같은 자가영양생물은 이산화 탄소나 물처럼 간단한 분자에서 다당류나 단백질을 합성할 수 있다. 반면에 종속영양생물은 보다 복잡한 물질을 합성하기 위한 전구물질들, 예컨대 단당류나 아미노산을 필요로 한다. 생물은 궁극적인 에너지원에 따라 더 세분화된다. 광합성독립영양생물()과 광합성종속영양생물()은 빛에서 에너지를 얻고, 화학독립영양생물()과 화학종속영양생물()은 무기 산화 반응을 통하여 에너지를 얻는다.
탄소 고정.
광합성은 햇빛과 이산화 탄소(CO2)를 이용하여 탄수화물을 합성하는 과정이다. 식물과 남세균, 조류는 광합성을 통해 물을 분해하고 산소를 부산물로 생산한다. 이 과정은 광합성 반응 중심에서 생산된 ATP와 NADPH를 사용하여 CO2를 3-포스포글리세르산으로 전환하고, 3-포스포글리세르산은 이후 포도당으로 전환된다. 탄소 고정 반응은 캘빈 회로의 일부로 루비스코(RuBisCO)라는 효소가 참여한다. 식물에서는 C3 탄소 고정, C4 탄소 고정, 그리고 CAM 광합성 이렇게 세 종류의 광합성이 일어나며, 이들은 CO2가 캘빈 회로에 들어가는 방법에 따라 구분된다. C3 식물은 CO2를 직접적으로 고정하고, C4 식물과 CAM 식물은 CO2를 먼저 다른 화합물의 일부로 포함시킨다. 이는 강렬한 햇빛과 건조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방편이다.
광합성 원핵생물의 경우 탄소 고정 기작이 좀 더 다양하다. 캘빈 회로, 역방향 시트르산 회로(), 혹은 아세틸-CoA의 카복실화를 통해 이산화 탄소를 고정한다. 화학독립영양() 원핵생물 또한 캘빈 회로를 통해 이산화 탄소를 고정하지만, 반응을 진행하기 위한 에너지는 무기 화합물에서 얻는다.
탄수화물과 글리칸.
단순한 유기산은 포도당과 같은 단당류로 전환될 수 있고, 그 후에 녹말 같은 다당류로 합성된다. 피루브산, 젖산, 글리세롤, 3-포스포글리세르산 및 아미노산 등에서 포도당을 생성하는 것을 포도당신생합성이라고 한다. 포도당신생합성은 해당과정과 많은 부분에서 겹치는 중간체들을 통해 피루브산을 포도당 6-인산으로 전환한다. 그러나 포도당신생합성 경로에 참여하는 효소들 중에는 해당과정에 참여하지 않는 효소가 있으므로 포도당신생합성은 단순히 해당과정의 역반응은 아니다. 이로 인하여 포도당을 생성하고 분해하는 것이 각기 따로 조절될 수 있으며, 두 대사 경로가 에너지만 소모하는 무익 회로(futile cycle)로 동시에 작동하는 것을 방지한다.
에너지를 저장하는 일반적인 분자는 지방이지만, 척추동물의 경우 지방산은 포도당신생합성을 통하여 포도당으로 전환될 수 없다. 이는 식물과 달리 동물에게는 아세틸-CoA를 피루브산으로 전환하는데 필요한 효소 기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기간 기아 상태에서 척추동물은 지방산을 대사하지 못하는 조직(예를 들어 뇌)이 포도당 대신에 사용할 케톤체를 생산해야 한다. 식물과 세균 등 다른 생물은 시트르산 회로에서 탈카복실화 반응을 우회하여, 아세틸-CoA를 옥살아세트산으로 변환하고 포도당 생산에 이용될 수 있게 하는 글리옥실산 회로를 이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한다.
다당류와 글리칸은 유리딘 이인산 글루코스(UDP-glucose)와 같은 반응성 당인산을 중합되고 있는 다당류의 하이드록시기에 순차적으로 부가하는 글리코실전이효소()에 의해 생성된다. 기질 고리 구조에 있는 하이드록시기라면 당이 중합될 수 있기 때문에 다당류는 사슬 구조와 가지친 형태 모두가 될 수 있다. 생성된 다당류는 그 자체로 구조적 기능이나 대사적 기능을 하거나, 올리고당전이효소()에 의해 지질이나 단백질에 결합할 수도 있다.
지방산, 아이소프레노이드 및 스테로이드.
지방산은 아세틸-CoA 단위체를 중합하고 환원하는 지방산 생성효소()에 의해 만들어진다. 지방산의 아실 사슬은 아실기를 더하고 알코올로 환원한 후, 알켄으로 탈수소화하고 다시 알케인으로 환원하는 일련의 반응에 의해 신장된다. 지방산 생합성에 관여하는 효소는 두 그룹으로 나뉜다. 동물과 균류는 여러 기능을 가진 제1형 단백질 하나에 의해 지방산을 합성하고, 식물의 색소체와 세균은 제2형 단백질이 합성 경로의 각 단계에 관여한다.
테르펜과 아이소프레노이드는 카로티노이드를 포함하는 지질의 큰 부류로 식물에서 생산되는 천연물 중 가장 큰 집단이다. 이 화합물은 반응성 전구체인 아이소펜테닐 피로인산과 다이메틸알릴 피로인산에서 받은 아이소프렌 단위체의 중합과 변형을 통해 생산된다. 이러한 전구체들은 서로 다른 경로로 합성된다. 동물과 고균은 아세틸-CoA에서 시작해서 메발론산 경로를 통해 전구체를 합성하고, 식물과 세균은 피루브산과 글리세르알데하이드 3-인산을 이용하여 합성한다. 활성화된 아이소프렌 공여체를 이용하는 주요 반응 중 하나가 스테로이드 생합성 경로이다. 스테로이드 합성 경로에서 아이소프렌 단위체는 결합하여 스쿠알렌이 되고, 고리를 형성하여 라노스테롤이 된다. 라노스테롤은 콜레스테롤과 에르고스테롤 등 다른 스테로이드로 전환된다.
단백질.
생물에 따라 20가지의 아미노산을 합성할 수 있는 능력에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세균과 식물은 20가지 전부를 합성할 수 있지만, 포유류는 오직 열한 가지의 비필수 아미노산만을 합성할 수 있고 나머지 아홉 가지의 필수 아미노산은 음식물에서 얻어야 한다. 마이코플라스마("Mycoplasma pneumoniae")과 같이 단순한 기생충은 모든 아미노산을 합성할 수 없고 숙주로부터 직접 아미노산을 탈취한다. 모든 아미노산은 해당과정, 시트르산 회로, 혹은 오탄당 인산 경로의 중간생성물로부터 합성된다. 질소는 글루탐산과 글루타민에서 공급된다. 아미노산은 적절한 α-케토산의 형성에 의존하여 합성되고, α-케토산은 아미노기 전달반응에 의하여 아미노산이 된다.
아미노산은 펩타이드 결합에 의해 사슬형으로 연결되고 단백질이 된다. 각각의 단백질은 특이적인 아미노산 서열로 이루어지며, 이를 일차 구조라 한다. 아미노산은 다양한 서열로 결합하여 셀 수 없이 다양한 단백질을 형성한다. 단백질이 형성될 때 아미노산은 에스터 결합으로 운반 RNA(tRNA)에 붙어서 활성화된다. 이 아미노아실-tRNA 전구체는 ATP를 이용하는 아미노아실 tRNA 합성효소에 의해 생산된다. 아미노아실-tRNA는 리보솜의 기질이 되고, 리보솜은 전령 RNA에 있는 서열 정보에 따라 아미노산을 신장하는 단백질 사슬에 결합시킨다.
뉴클레오타이드 합성과 회수.
뉴클레오타이드는 아미노산, 이산화 탄소, 폼산으로부터 만들어지는데 이러한 대사에는 막대한 에너지가 소모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생물들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뉴클레오타이드를 효과적으로 회수하는 체계를 발달시켰다. 퓨린은 뉴클레오사이드(리보스에 결합한 염기) 형태로 합성된다. 아데닌과 구아닌은 뉴클레오사이드 전구체인 이노신 일인산에서 합성되며, 아미노산 글라이신, 글루타민, 아스파르트산 및 조효소 테트라하이드로엽산에서 전이된 폼산에서 원자를 이용한다. 피리미딘은 글루타민과 아스파르트산에서 형성된 오로트산으로부터 합성된다.
생체이물 및 산화환원 대사.
모든 생물은 영양분으로 사용할 수 없는 화합물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고, 대사적 기능이 없는 이물질이 세포 내에 축적되면 해로울 수 있다. 이렇게 유해성을 가진 물질을 생체이물이라 한다. 합성 약물, 자연 독소, 항생제 같은 생체이물은 생체이물을 대사하는 효소에 의하여 해독된다. 사람의 해독 효소에는 사이토크롬 P450 산화효소, UDP-글루쿠로노실전이효소(), 글루타티온 S-전이효소 등이 있다. 이 효소계는 생체이물을 산화하고(1기), 생체이물 분자에 수용성 작용기를 부가한 후(2기), 세포 밖으로 퍼내거나 다세포 생물의 경우 계속해서 대사 과정을 거쳐 배출시킨다(3기). 생태학에서 이 반응은 특히 미생물의 오염 물질 생분해와 오염된 땅과 기름 유출에 대한 생물적 환경정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생물의 반응은 많은 부분 다세포 생물의 반응과 유사하지만, 미생물은 특유의 엄청난 다양성으로 다세포 생물에 비하여 훨씬 많은 종류의 생체이물을 처리하며, 유기염소 화합물과 같이 잔류성 유기 오염 물질까지도 처리할 수 있다.
한편 호기성 생물에게는 산화적 스트레스 문제가 있다. 산화적 인산화와 이황 결합 등의 과정은 과산화수소 같은 활성산소를 생성한다. 유해 산화제는 글루타티온 같은 항산화 대사체나 카탈레이스 혹은 과산화효소 등에 의해 제거된다.
생물의 열역학.
열과 일의 전달에 대한 열역학 법칙은 생물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어떤 닫힌계에서 전체 엔트로피(무질서도)의 총량은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생물은 놀라운 복잡성으로 이 법칙에 모순되는 것 같지만, 생물은 주변 환경과 물질과 에너지를 교환하는 열린계로 존재한다. 따라서 살아있는 계는 평형 상태가 아니며, 환경의 엔트로피를 높이면서 고도의 복잡성을 유지하는 흩어지기계()이다. 세포는 이화작용의 자발적 과정과 동화작용의 비자발적 과정을 짝지어 대사가 일어나도록 한다. 열역학적 용어로, 대사는 무질서를 창조하면서 질서를 유지한다.
조절과 통제.
생물이 있는 환경은 계속해서 변하기 때문에 대사는 세포 내의 일정한 조건, 즉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섬세하게 조절되어야 한다. 대사 조절은 또한 생물이 신호에 반응하고 환경과 적절히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한다. 어떻게 대사 경로가 통제되는지 이해하는데에는 아래의 밀접하게 연결된 두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어떤 효소의 활성이 크게 변화하더라도(매우 잘 조절됨) 이 변화로 인하여 대사 경로의 흐름에 큰 변화가 없다면, 이 효소는 해당 대사 경로의 통제에 관여하지 않는다.
대사 조절에는 다양한 단계가 있다. 내인성 조절은 대사 회로가 기질이나 산물의 수준에 따라 스스로를 조절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산물이 양이 감소하면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 그 경로로의 흐름이 증가한다. 이런 경우에는 종종 다른 자리 입체성 조절로 효소의 활성을 조절한다. 외인성 통제는 다세포 생물의 세포가 다른 세포로부터 온 신호에 반응하여 대사를 변경할 때 나타난다. 이 때 신호는 대개 호르몬이나 성장 인자 형태로, 세포 표면에 있는 특수한 수용체에 의해 감지된다. 신호는 단백질 인산화 연쇄 반응을 거쳐 이차 신호 전달계에 의해 세포 내로 전달된다.
외인성 조절의 예로 잘 알려진 것이 인슐린 호르몬에 의한 포도당 대사의 조절이다. 인슐린은 혈당량의 증가에 따라 생산된다. 인슐린이 수용체에 결합하면 단백질 인산화효소 연쇄반응을 활성화하여 세포로 하여금 포도당을 흡수하여 지방산이나 글리코겐 등 저장형 분자로 전환하게 한다. 포도당의 대사는 글리코겐을 분해하는 인산가수분해효소와 합성하는 글리코겐 합성효소의 활성에 따라 통제된다. 이 두 효소는 인산화를 통해 상호조절된다. 즉, 글리코겐 분해효소는 인산화되면 활성화되고, 합성효소는 저해된다. 인슐린은 단백질 인산분해효소를 활성화하고, 따라서 글리코겐 분해 및 합성효소의 인산화 정도를 감소시켜 글리코겐이 합성되도록 유도한다.
진화.
위에서 기술한 해당과정, 시트르산 회로와 같은 주요 대사 경로들은 모든 생물 도메인에 존재하며 모든 생물의 공통 조상에도 있었다. 공통 조상 세포는 원핵세포였으며 아마도 광범위한 아미노산, 뉴클레오타이드, 탄수화물, 지질 대사를 갖춘 메테인 세균이었을 것이다. 진화를 거치면서 오래된 대사 경로를 계속 유지한 것은 그 대사가 특정한 대사적 난제를 해결하는 최적의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해당과정과 시트르산 회로의 경우 최소의 단계로 매우 효율적인 최종 산물을 생산한다. 비부호 DNA 단편에 영향을 미치는 돌연변이는 대사 효율에만 영향을 미칠 것이다. 효소를 이용한 대사 중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퓨린 뉴클레오타이드 대사의 일부이고, 이전의 대사 경로는 고대 RNA 세계의 일부였을 것이다.
새로운 대사 경로가 진화한 기작을 설명하기 위한 모델이 여럿 존재한다. 원형의 대사 경로에 이전부터 존재하던 효소가 새로운 반응 경로에 통합될 뿐만 아니라 새로운 효소가 차례로 더해지고 복제되어 전체 경로가 분지하였다는 모델이 있다. 각 기작의 상대적인 중요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유전체 연구를 통하여 대사 경로의 효소가 공동의 조상을 가진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따라서 이미 존재하던 경로에서 차례로 새로운 기능을 가진 경로로 진화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사 네트워크의 단백질 구조의 진화를 추적하는 연구에서 나온 대안적인 모델에 따르면, 효소는 서로 다른 대사 경로에서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널리 동원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 효소의 진화적 모자이크가 나타나는 것이다. 세 번째 가능성은 대사의 일정 부분이 특정 단위()로서 서로 다른 경로에서 재활용되고 여러 분자에 대해 유사한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진화를 통해 새로운 대사 경로가 생겨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사 기능을 잃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몇몇 기생충은 생존에 필수적이지 않은 대사 과정이 퇴화하고 숙주로부터 아미노산, 뉴클레오타이드, 탄수화물을 얻게 되었다. 세포내 공생하는 생물에서 이와 유사한 대사 능력 감소를 찾아볼 수 있다.
연구 및 조작.
전통적으로 물질대사는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단일 대사 경로에 초점을 맞춘 연구 대상이었다. 특히 귀중한 연구 도구인 방사성 추적자를 사용하여 전구물질에서 최종 산물까지 경로를 생물 전체나 조직, 세포 수준에서 규명할 수 있다. 화학 반응을 촉진하는 효소를 정제하여 저해제에 대한 반응과 속도를 조사한다. 동시에 세포나 조직 안에 있는 작은 분자를 밝혀내고, 이 분자들의 총체적 집합을 대사체라 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단순한 대사 경로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지만, 완전한 세포의 대사와 같은 더 복잡한 계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수천 가지의 효소가 공존하는 세포 내 대사 네트워크의 복잡성이란 것이 어떤 개념인지는 불과 43개의 단백질과 40개의 대사산물 사이의 상호작용을 나타낸 오른쪽의 그림에서 볼 수 있다. 유전체 서열에는 최대 45,000개에 이르는 유전자 목록이 있다. 이제는 유전체 자료를 이용하여 전체 생화학 반응의 네트워크를 재구성하고, 그 행동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전체적인 수학적 모델을 산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특히 전통적인 방법으로 얻은 대사 경로와 대사산물 자료를 단백체학과 DNA 마이크로어레이 연구에서 얻은 유전자 발현 자료에 통합할 때 수학적 모델이 유용하다. 이러한 기술을 통하여 사람의 대사에 대한 모델이 정립되고, 의약품 개발이나 생화학 연구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의 대사 모델은 같은 단백질이나 대사산물을 공유하는 질병을 분류하기 위한 네트워크 분석에 이용되고 있다.
세균의 대사 네트워크는 나비 넥타이 조직의 좋은 예이다. 나비 넥타이 구조는 광범위한 영양물질을 받아들여 상대적으로 적은 중간체를 통해 다양한 산물과 복잡한 고분자를 생산할 수 있는 구조이다.
대사 공학은 주요한 대사 정보 응용 기술이다. 효모, 식물 및 세균은 생명공학기술에 유용하게 유전적으로 변형되어 항생제나 의약품 혹은 1,3-프로판디올(1,3-propanediol), 시킴산 같은 산업용 화합물 생산에 이용된다. 유전자 변형은 대개 생산하는데 드는 에너지 양을 줄이고, 생산량을 증대시키며, 폐기물을 감소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역사.
물질대사라는 용어는 변화 혹은 전복(顚覆, )을 뜻하는 에서 유래하였다. 1260년 이븐 알나피스(는 저서에서 "인체와 각 부분은 지속적인 소멸과 생성 상태에 있으며, 따라서 불가피하게 영구적인 변화를 겪는다"고 서술하면서 물질대사의 개념을 처음으로 문서화하였다. 물질대사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역사는 몇 세기에 걸쳐 나타난다. 동물 전체를 연구하던 초기 시기에서 개인의 대사 반응을 연구하는 현대의 생화학으로 발전하였다. 사람의 대사에 대한 첫 통제 실험은 1614년 출판된 산토리오 산토리오의 저서 "Ars de statica medicina"에서 나타난다. 그는 일상에서 각종 활동을 하는 동안 스스로 무게 변화를 측정하고, 섭취한 음식 무게의 대부분은 잃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것을 "인식할 수 없는 호흡"이라 불렀다.
초기에 물질대사 기작은 밝혀지지 않았고 어떤 힘이 살아있는 조직에 생기를 불어넣는다고 생각하였다. 19세기에 효모에 의하여 설탕이 알코올로 발효되는 것을 관찰한 루이 파스퇴르는 발효가 효모 세포 안에 있는 물질이 발효를 촉매 작용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알코올성 발효는 효모 세포의 죽음이나 부패가 아니라 삶과 연관된 활동이다"고 기술하였다. 이 발견과 1828년 프리드리히 뵐러의 요소의 화학적 합성에 대한 논문은 전적으로 무기 전구체만으로 유기 화합물 합성을 논한 중요한 발견이다. 이로써 세포에서 발견된 유기 화합물이나 화학 반응이 일반적인 화학 반응의 원리와 다를 것이 없음이 증명되었다.
에두아르트 부흐너가 20세기 초 효소를 발견함에 따라 세포의 생물학적 연구에서 물질대사의 화학 반응을 분리하여 연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것이 생화학의 시초가 되었다. 생화학의 지식은 20세기 초에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가장 많은 연구를 한 근대 생화학자 중 한 명은 크레브스()로, 물질대사 연구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는 요소 회로를 발견하였고, 후에 한스 콘버그(Hans Kornberg)와 함께 시트르산 회로와 글리옥실산 회로를 발견하였다. 현대 생화학은 크로마토그래피, X선 회절을 이용한 분광학, NMR 분광법, 방사성 동위원소 표지, 전자 현미경, 분자 역학 시뮬레이션 등 새로운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크게 발전하였다. 이러한 기술들을 통해 세포에 있는 분자 및 물질대사 경로들을 발견하고 상세히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
2913 | 3331351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913 | 그레고어 멘델 | 그레고어 멘델(, 1822년 7월 20일 ~ 1884년 1월 6일)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식물학자·식물실험자이며 아우구스티노회의 수사이자 사제로서 이른바 멘델의 유전법칙을 발견하여 유전학의 수학적 토대를 마련하고 유전학의 첫 장을 연 생물학자이다.
생애.
탄생(자연과학 연구 초기).
멘델은 1822년 7월 20일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메렌 지방(현재의 체코)의 작은 읍인 하인젠도르프에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농사와 원예 일을 도왔던, 멘델은 자연스레 자연과학에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1834년부터 1840년까지는 트로파우(지금의 체코의 오파바)의 김나지움(대한민국의 중·고등학교에 해당)과정을 다녔고, 1840년에서 1843년까지는 올뮈츠(지금의 체코의 올로모우츠)의 철학연구소에서 대학 진학을 위한 보충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학문에 대한 커다란 애착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지주가 시키는 강제노동으로 허리를 다쳐 병이 나는 바람에 멘델은 대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1843년 고향 근처에 있는 소도시인 모라바의 브륀(지금의 체코 브르노)에 있는, 14세기에 건립된 아우구스티노회에 입회했으며, 그레고리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로마 가톨릭 수사로서의 생활은 멘델을 물질적 결핍에서 해방시켰으며,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1847년에 로마 가톨릭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수도원에서 수련 생활을 하는 동안에 과학에 대한 많은 지식을 습득했다. 1849년에 멘델은 브륀 근처에 있는 즈나임(즈노이모) 중등학교의 보조교사가 되어 잠깐 그리스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이와 동시에 멘델은 이전의 못 이룬 대학교에서의 자연과학 공부의 꿈을 저버리지 못하고, 1850년 빈 대학교 자연과학부에 입학을 시도하지만, 시험에서 떨어졌고, 또한 정규교사 시험에 응시했으나 역시 떨어졌다. 그 뒤 대수도원장의 추천으로 빈 대학교에 겨울학기 청강생으로 입학했으며 이곳에서 물리학·화학·수학·동물학·식물학 등의 자연과학 기초 강의를 들으며 공부했다(1851 ~ 53). 1853년에는 견문과 학계와의 접촉을 넓히기 위해 빈의 동식물학회에 가입하게 되고, 1854년 완두콩의 해충에 관한 연구를 학회에서 발표한다. 1854년 그는 브륀으로 다시 돌아와 1868년까지 브륀 국립 실과 학교에서 자연과학을 가르쳤으나 교원 자격증은 끝내 얻지 못했다.
완두콩 실험 및 유전 법칙 연구.
그는 1856년부터는 수도원에 있는 조그마한 뜰에서 완두를 재료로 하여 유전에 대한 실험을 시작, 7년 후 '멘델의 법칙'(Mendelism/Mendel's law)을 발견하였다. 이 사실을 1865년 브륀의 자연 과학 협회의 정례회에서 발표하고, 그 논문은 따로 인쇄하여 발표하였다. 그동안 식물에 대한 225회에 이르는 인공 교배를 하여 1만 2,000종의 잡종을 얻었으며, 계속 실험에 열중하였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인정받지 못하고 1900년대에 들어서야 재조명을 받게 된다.
완두콩 실험 이후.
식물학·양봉·기상학에 대한 그의 관심과 연구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나 1868년 아빠가 되면서 과학은 그의 생활에서 조금 벗어나게 되었으며, 1872년 공포된 교회 과세법에 반대, 정부와 대립하여 전 재산을 몰수하는 등 지루한 싸움을 계속했다. 결국 그는 만성 신장병으로 고생하는 등 불우한 가운데 일생을 마쳤다. 그러나 그가 선종한 뒤 멘델의 법칙이 학계에 받아들여졌다. 1910년 브륀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그 곳은 '멘델 광장'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업적.
1856년부터 수도원의 작은 정원에서 실험을 시작하여 유전의 기본원리를 발견했으며 이러한 원리들은 나중에 유전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는 혼자 힘으로 연구를 했으나, 과학에 대한 관심을 유발시키는 분위기 속에서 일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그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 가운데 몇몇은 과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1862년 브륀에서 자연과학학회를 창립했으며 멘델은 이 모임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수도원과 학교의 도서관에는 중요한 과학 서적들이 많이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그는 아버지의 과수원과 농장에서 얻었던 경험들 때문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던 농학·원예학·식물학에 관한 책을 많이 보았다. 멘델 자신도 이 분야에 대한 새로운 책들이 나오면 곧 구입을 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1860, 1870년대에 출판된 찰스 다윈의 연구노트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멘델은 다윈의 맨 처음 저서가 나오기 전에, 또한 유전이 진화의 원인으로서 가장 기초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기 전에 이미 실험을 시작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는 1865년 2월 8일과 3월 8일에 열린 브륀 자연과학학회에서 결과를 보고할 때에도 '식물의 교잡'에 대한 깊은 관심을 언급했으며, 이 분야에서 자기보다 먼저 발표한 사람들의 연구들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밝히면서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꿍하거나, 이들 사이의 통계적 상관도를 명확히 밝힐 수 있을 만큼 폭넓고 올바른 방법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하나도 없다."
유전 연구 실험에 반드시 필결할 수 있었다. 요한 조건에 대한 이러한 논술과 그 조건들을 만족시켜주는 예비 실험 자료들을 통해 그는 유전과 진화 및 일반적인 생물 현상들을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되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했다.
유전법칙의 발견.
그는 자신이 관찰하면서 정원에서 길렀던 여러 가지 완두를 서로 교배했다. 이들 완두는 키가 큰 것과 작은 것, 잎겨드랑이에서 꽃이 피었을 때 색이 있는 것과 없는 것 등과 같이 일정한 차이를 보이는 대립형질과, 씨의 색·모양, 줄기에 꽃이 피는 위치, 콩꼬투리의 모양 등 유사한 차이를 갖는 대립형질을 갖고 있었다. 그는 식물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대립형질이 변종과 그들의 자손에 계속 나타나는 것은 유전의 기본단위 때문이라는 이론을 세웠는데, 이 유전단위가 지금은 유전자로 알려져 있다. 실험결과에 대한 멘델의 해석은 사람을 포함한 다른 생물들을 통해 계속 관찰되면서 충분히 증명되었는데, 이는 유전단위가 간단한 통계법칙을 따른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법칙의 기본원리는 잡종의 생식세포 안에는 양친 중 어느 한쪽에서 온 유전물질 절반과 다른 한쪽에서 온 유전물질이 절반씩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식세포 안에서 대립형질이 분리되는 것을 멘델의 제1법칙 또는 분리의 법칙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대립형질들이 여러 쌍 있을 경우, 이러한 형질들은 모든 가능한 조합을 이루며 독립적으로 자손들에게 전해진다고 했다. 그가 뿌린 완두의 여러 변종들에서, 그는 독립유전의 법칙에 따라 무작위로 재조합된 7쌍의 대립형질들을 관찰했으며, 이러한 원리를 통계적으로 검증하고, 실험을 통해 확인했다.
현재 멘델의 제2법칙, 즉 독립의 법칙은 서로 다른 연관 그룹 또는 서로 다른 염색체 상에 있는 유전자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멘델은 우성도 관찰했는데, 이것은 잡종이 대립형질 가운데 1가지 형질만 나타내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형질을 우성형질이라고 했으며, 관찰한 7쌍의 형질에 모두 나타난다고 보았으나 더욱 광범위한 실험을 통해서 이것이 모든 대립형질에 적용되지는 못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성들이 그가 처음 증명한 특별한 유전단위 또는 유전자에 의한 유전 체계가 기본적으로 틀렸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20세기 초 멘델의 유전법칙이라고 부르는 이 체계는 검증·확인되어 일반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졌으며 또한 생물학의 기본적인 원리 중의 하나가 되었다. 실험결과로부터 유추한 이러한 이론과 설명은 2편의 논문에 실려 있는데, 1865년초 자연과학학회에서 발표했으며 다음해 이를 좀더 자세하게 기록해 학회 회보에 게재했다. 〈식물의 잡종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이 붙은 이 논문은 유럽과 미국의 주요한 도서관에 보내졌지만 당시에는 브륀이나 다른 지역에서도 생물학적인 견해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뮌헨대학교의 유명한 식물학자 칼 빌헬름 폰 네겔리는 멘델의 기념비적인 논문을 받아들인 대표적인 학자지만 멘델과 주고받은 편지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네겔리조차도 멘델의 논문에 실린 수학적 논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멘델은 꾸준히 연구를 계속해 다른 식물에서도 자신의 이론을 검증하려고 노력했다. 1869년 또다른 1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나 그가 조사한 식물은 네겔리가 멘델에게 실험재료로 추천한 조밥나물속으로, 이 식물의 배는 수정이 일어나지 않고 밑씨가 자라 만들어지는 체세포 단위생식을 하기 때문에 검증재료로는 본질적으로 적당하지 못했으며 멘델의 원리를 확인하기에도 부적합했다.
실험의 의의.
말년에 그는 "나의 시대는 반드시 온다."라고 말하였다고 하는데, 사실 그의 업적은 유전과 진화의 문제를 해석하는 데 있어 획기적인 대발견이었으며, 그에 의하여 유전학이 창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멘델의 연구는 ‘관찰→가설 설정→실험→법칙 수립’으로 이어지는 근대과학적 방법론을 충실히 따랐다. 실질적이고도 명확한 근거를 통해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유전학적 법칙을 완결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그의 실험은 그 계획의 교묘함과 실험의 정확성, 자료 처리법이 탁월한 점, 논리가 명쾌한 점 등 생물학 사상 가장 뛰어난 실험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멘델 연구의 재조명.
그는 동료 수도사들과 자기가 살던 도시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으나, 당시의 위대한 생물학자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1900년 유럽의 식물학자 칼 에리히 코렌스, 에리히 체르마크 폰 세이세네크, 휴고 드 브리스 등이 각각 멘델과 비슷한 결과를 얻어내고 34년 전에 발표된 실험결과와 개괄적인 원리를 문헌에서 찾아냄으로써 그는 선종한 뒤 명성을 얻게 되었다. 지금은 멘델의 실험이 유전학 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고 많은 나라의 생물학자들이 멘델의 학설을 확인하고 그 응용 범위를 넓히고 있으며, 진화학·발생학·생리학·생화학·의학·농학·사회과학 등을 이해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
2914 | 50721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914 | 프랑스어 | 프랑스어(français, )는 인도유럽어족 로망스어군에 속한 언어이다. 한국어에서는 한자로 음역 약칭으로 불어(佛語)라 부르기도 한다. 프랑스어는 (프랑스 북부에서 사용되던 언어인 “오일어”의 변종으로서) 프랑스에서 생겨났다. 프랑스어는 1539년부터 프랑스의 국어로 선포되었다. 2018년 기준으로 전 대륙에 걸친 약 3억 명의 화자가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은 모국어 화자이다. 2018년 기준으로 전 세계 8000만 명의 학생들이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다. 프랑코포니 국제기구에 따르면, 2050년경에는 전 세계의 프랑스어 화자가 7억 명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스어는 국제 연합의 6개의 공식 언어 가운데 하나이자, (영어와 함께) 2개의 업무 언어 중 하나이다. 또한 프랑스어는 유럽 연합과 같은 많은 국제 기구의 공식 언어 또는 업무 언어이기도 하다. 앙시앵 레짐 때 러시아의 차르, 에스파냐와 영국의 국왕, 독일의 군주들이 사용한, 왕실과 궁정의 언어이던 프랑스어는 영어와 함께 국제 외교에 있어 중요한 언어로 자리매김하였다.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 제2조, "공화국의 언어는 프랑스어이다."에 근거하여 프랑스어는 1992년부터 프랑스 주권의 요소 중 하나가 되었다. 프랑스어는 전 세계 프랑스 문화와 사상의 주된 매개 수단이기도 하다. 프랑스어의 배양에 관한 1996년 7월 3일 법령에 의거하여 프랑스어는 프랑스의 공적 영역에서 사용된다. 프랑스어의 특질 및 발달, 체계화는 부분적인 면에 있어 플레야드파와 같은 지식인 집단과 아카데미 프랑세즈와 같은 기관의 작품이다. 프랑스어는 "아카데미"의 언어라고도 불리며, "몰리에르의 언어"라는 별칭이 있기도 하다.
프랑스어는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학습되는 제2외국어이다. 또한 프랑스어는 스페인어, 관화, 영어에 이어 인터넷에서 4번째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이기도 하다.
기원: 어휘와 어원.
프랑스어의 형성.
프랑스어 어휘의 대다수는 (프랑스어의 조어인) 라틴어에서 유래했거나, 그리스어-라틴어 기원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많은 단어들은 동일한 어원을 갖고 있기도 한데, 하나가 민중 라틴어로부터 수백 년에 걸쳐 발달한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고전 라틴어에서 직접 차용한 것이다. 이러한 예시로는 다음의 단어들을 들 수 있다. "métier(직업)/ministère(내각), façon(방법)/faction(파벌), raide(뻣뻣하다)/rigide(엄격하다), froid(차갑다)/frigide(불감증이다), frêle(가냘프다)/fragile(허약하다), rançon(몸값)/rédemption(구원), raison(이성·이유)/ration(할당량), poison(독)/potion(물약), chance(운)/cadence(박자)". 또한 프랑스어 단어는 많은 경우에 있어 고전 라틴어의 형식을 빌려 탄생하곤 했는데, 그 예시로는 다음의 단어들을 들 수 있다. "mère(어머니)/maternel(외가쪽의), frère(형제)/fraternel(형제의), cheveu(머리카락)/capillaire(모발의), foi(믿음)/fidèle(충실하다), œil(눈)/oculaire(눈의), sûr(확실하다)/sécurité(안전), siècle(세기)/séculaire(세기적)". 로망스어 어원 연구의 패러다임 변화로 인하여 라틴어 문어에서 가져온 데이터에 근거한 전통적인 방법은 어휘의 공통되는 핵심이 되는 로망스 조어를 재구성하는 것에 목표를 둔, 비교대조의 방법으로 대체되었으나, 이 또한 "프랑스어 어휘의 대다수는 라틴어에서 유래하였다"는 견해를 띠게 되었다.
갈리아어가 프랑스어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주었는지는 불명확하다. 갈리아어 어휘에서 유래한 단어로는 백여 개 남짓인데, 라틴어에서 갈리아어로 차용된 단어들인 "char(전차)/charrue(쟁기), mouton(양), crème(크림)" 등이 있다. 허나 이와 같은 표현들의 기원은 확실치 않다. 갈리아어가 프랑스어 통사론과 발음에 영향을 준 점 역시 불명확하다.
상층어이었던 프랑크어에서도 프랑스어의 여러 중요한 단어들이 기원하였는데("gris, blanc, blond, bleu" 등), 프랑크어는 오일어, 즉 고(古)프랑스어(protofrançais)로 불리기도 하는 갈리아 북부 로망스어 발음에 있어 큰 영향을 남겼다.
이 고프랑스어는 중세 전기 일드프랑스 지방에서 사용된 오일어의 방언으로 현대 프랑스어의 기원이며, 때로는 "프랑시앵어(francien)"으로 불리기도 한다. 프랭시앵어는, 파리(Paris)가 발전하던 1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매우 이른 시기, 노르만어, 피카르디어, 로렌어, 부르고뉴어 등의 다른 오일어 방언들이 더해져 풍부해진 이 중세 방언을 일컫고자, 1889년 프랑스 언어학자 가스통 파리에 의하여 고안된 용어이다. 프랑시앵어라는 용어는 그 언어를 쓰는 이들이 사용한 용어가 아니며, 그 언어 사용자들은 이를 프랑체에(franceis), 이후 프랑수에(françois)로 불렀다. (이는 확실한데, 원래 프랑스 국왕의 영토는 프랑스 왕국에서 직접 통치되는 부분으로 현 일드프랑스 지방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여기서 사용된 지방어, 프랑수에(françoys)는 왕국에 포함되지 않은, 심지어 국왕에게 전혀 충성을 바치지 않은 다른 지역의 방언과는 어느 정도 다른 고유한 면을 지녔다.) 11세기 전에도 로망어 또는 어느정도 상호소통이 가능했던 로망스제어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것이 왜 오일어(제어)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이 방언들의 상호 소통이 점점 더 어려워질 무렵, 사용자들은 각 방언들에 노르만어, 갈로어, 앙주어, 프랑스어, 피카르디어, 왈롱어와 같은 이름을 붙였다.
오늘날 사용되는 프랑스어(français, 프랑세)는 11세기와 12세기를 기점으로 범지역적으로 서서히 쓰이기 시작한 옛 언어의 이름인 프랑체에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프랑체에franceis [frãntsëé] → 프랑수에françoys/françois [frãswé] → 프랑세français [frãsé]). 기타 오일제어는 프랑스어가 영광을 얻게 되자 점차 사라지게 되었는데, 이는 곧 오일제어들이 프랑스어와 매우 유사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 같은 사실은 왜 오일어에 속하지 않은 로망스제어나 방언(옥시타니아어, 프랑스프로방스어/아르피탕어, 로야어, 리구리아어, 코르시카어 등)과 비로망스제어(브르타뉴어, 플라망어, 로렌 프랑크어, 알자스어, 바스크어)가 더 오래 남게되거나, 또는 이 같은 언어들이 왜 프랑스어로 통합되지 않고 저항하였는가를 설명해준다. 허나 전자(특히 옥시타니아제어)는 프랑스어를 풍부하게 하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어는 아랍어, 이탈리아어, 튀르키예어, 해외 영토나 구 프랑스 식민지의 원주민 언어와 크레올, 현재의 영어, 프랑스나 다른 프랑스어권 국가의 이민자나 국제 관계로부터 온 여타 언어로부터 영향을 받아 풍부해지곤 했다.)
최근의 차용어, 신조어, 철자 변화.
영어에서 온 외래어를 순화하고자 여러 신조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그 예시는 다음과 같다.
몇몇 신조어는 북미의 퀘벡 프랑스어 사무소가 매우 적극적으로 만들었다.
역사.
기원전 52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로마군이 갈리아를 정복할 무렵, 아키텐의 고(古)바스크어 사용 지역을 제외하고, 갈리아에는 서로 연관을 띠고 아마도 상호 소통이 가능했을 켈트제어를 사용하던 갈리아족이 대부분이었다. 그곳에는 하나의 갈리아어가 있던 것이 아닌, 문어로는 거의 쓰이지 않은 여러 갈리아제어(즉, 벨기에어, 트란스피나 갈리아어, 키살피나 갈리아어)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로마인의 언어인 라틴어는 글로 쓰였으며, 권위와 영예의 언어로서, 갈리아족과 가깝던 민중 라틴어는 기원전 51년의 갈리아 정복 이후 세기에 걸쳐 점차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어는 언어 분류학상 로망스어군에 속하는 언어이다. 로망스어군은 그 이름이 뜻하듯이 고대 로마인이 쓰던 라틴어에서, 또는 이의 방언에서 발생한 언어군을 일컫는다. 하지만 프랑스어는 비교적 간단한 통사구조와 굴절이 거의 상실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 기원전 1세기 후반에 현재의 프랑스 지역이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후, 로마의 군인, 상인, 이주민 등의 잦은 왕래, 그리고 그들과 갈리아(프랑스의 라틴어 이름)의 원주민들과의 교섭을 통하여 프랑스어의 모체가 되는 새로운 언어 ‘갈리아 서민 라틴어(Latin populaire des Gaules)’가 생겨났다. 이 갈리아 서민 라틴어는 그 당시에 새겨진 또는 작성된 비문과 기록 문서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문법, 발음, 어휘 등에서 라틴어와 커다란 차이가 있다.
842년 스트라스부르 서약 로망스어판은 후기 라틴어에서 영향을 받고, 게르만족, 특히 갈리아 북부에 거주한 프랑크족(여기서 프랑스족의 이름이 나왔다)의 이동의 결과로서 재탄생한 오일어로 쓰인 첫 문헌이다. 로망스어라는 존재에 관한 첫 언급은 813년에 있었는데, 투르 회의에서 "링구아 로마나 루스티카(lingua romana rustica, 투박한 로망스어)"라고 불린 것이 바로 그것이다. 880년경이 되어서야 첫 문학 텍스트가 나왔는데, 바로 <성 에우랄리아 사건"Séquence de sainte Eulalie">이다. 허나 여기서 쓰인 언어는 프랑스어라기보다는 피카르디어라고 볼 수도 있는데, 프랑스어(français, 프랑세)는 중세의 여러 방언 가운데 하나였으며, 당대에는 시기에 따라 프랑체이스(franceis [frãntseis]) / 프랑추아스(françoys [frãntsois]) / 프랑수에(françois [frãswe])로 불리곤 했다. 파리와 주변 지역은 바로 아 "프랑체이스"의 역사적 탄생지로, 이 언어는 곧 노르만어, 피카르디어, 부르고뉴어와 주변 지역의 다른 오일어 방언들의 영향을 받아 풍부해졌는데, 왜냐하면 파리가 정치적 중요성을 띠게 되자 이 모든 지역으로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이 바로 여러 방언들을 들고 왔기 때문이다.
중세에 프랑스는 언어적으로 통일되어 있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9세기 초 라틴어는 오직 교회나 학문의 언어였으며 프랑스 각지에서는 여러 지역 언어들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사용되었던 지역 언어들은 크게 다음 세 언어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12세기를 기점으로 프랑스어(오일어)는 이탈리아 중세 문학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프랑스어는 1250년을 기점으로 중요해졌는데, 바로 성 루이가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것을 의뢰하였기 때문이다.
1549년, 조아섕 뒤 벨레는 <프랑스어의 옹호와 현양>을 저술하였다.
프랑스어는 라틴어의 후계어로서 17세기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어에게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 라틴어를 대신하여 국제 언어로 쓰였다. 프랑스어가 패권을 지니게 된 주요 이유로는 당대 프랑스가 지닌 힘을 들 수 있다. 1685년, 피에르 벨은 프랑스어가 "모든 유럽인들을 소통하게끔 한다"고 저술한 바 있다. 1714년 3월 6일, 스페인 계승 전쟁을 끝낸 라슈타트 조약은 오로지 프랑스어로만 쓰였다. 유명한 독일 철학자이자 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1646-1716)은 대부분의 저서를 프랑스어로 저술했다.
러시아 여제, 예카테리나 2세(1762-1796)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아카데미 회상록을 전부 프랑스어로만 집필하였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1740-1786)은 프랑스어의 대단한 애호가였는데, 볼테르와 프랑스어로 교류를 하고, 자서전을 프랑스어로 저술하였으며, 베를린 아카데미에서 주 언어로 쓰인 라틴어를 프랑스어로 대체하기까지 했다.
근대 프랑스어 중 17-18세기를 고전 프랑스어(français classique)로 별도로 나누기도 한다. 17세기 작가 장 드 라퐁텐의 우화집의 원문을 프랑스의 아동들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근대 프랑스어는 현대에 와서도 거의 변하지 않은 데 비하여 중기 프랑스어는 이해하기가 좀 더 어려워지고, 고(古)프랑스어는 전문 지식이 없으면 프랑스어 원어민도 독해하기 어렵다.
프랑스어를 유지하는 곳으로는 다음의 기관들이 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 프랑스어와 프랑스제언어 대표 심의회 (DGLFLF), 프랑스어 감독부 (벨기에), 퀘벡 프랑스어 사무소 (OQLF), 프랑스어 고등 회의 (프랑스, 벨기에, 퀘벡).
프랑스어 방언의 특징.
프랑스어에서는 70은 60과 10(soixante-dix)으로, 80은 4개의 20(quatre-vingts)으로 90은 4개의 20과 10(quatre-vingt-dix)이다. 하지만, 지역(스위스,벨기에 등)에 따라 70을 septante, 80을 huitante 이나 octante, 90을 nonante와 같은 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지리적 분포.
프랑스어는 29개 나라에서 공식 언어로 지정되어 있고, 그 중 거의 대부분의 나라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커뮤니티인 프랑코포니를 구성한다. 또한 국제 연합(UN)을 비롯한 많은 국제기구의 공식 언어이다. 프랑스어는 유럽에서 네 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쓰는 모국어이며, 두 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쓰는 언어이다.
다음은 알파벳순으로 나열한 프랑스어가 공식 언어인 나라의 목록이다.
문법.
다른 여러 활어(活語)들에 비하여 프랑스어 문법의 특징이 되는 것 중 하나로는 시제와 서법의 풍부함을 들 수 있다. 허나 이 같은 풍부함은 구어체에서는 제한적인 경향을 띤다. 예를 들어, 단순과거와 같은 몇몇 시제들은 거의 문어에서만 보이며, 더욱이 전과거는 그저 미사여구의 “문체” 놀이로서 거의 제한적이고 여러 표현들과 함께 쓰이기는 하나 모두 être 동사와 함께 쓰인다. (j’eus été…, il eut été…)
또한, 프랑스 문법에 있어 무시할 수 없는 부분들(복수, 인칭 동사 변화)은 오직 문어에서만 확인 가능하다 (ils jouent, il joue). 이러한 동사 변화의 음운적 변별성의 결손에 인하여 불어에서의 인칭 표시는 주어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이 같은 이유로 로망스어로서는 특이하게 주어 대명사를 생략하지 않는다. 동사 변화만으로 인칭을 알 수 있기에 주어 대명사를 일일이 표시하지 않는 이탈리아어나 스페인어와는 대조적이다.
프랑스어는 클로드 포브르 드 보줄라(17세기 전반)나, 벨기에 문법학자이자 문법 참고서 <르 봉 위자주>을 저술한 작가인 모리스 그르비스(1895-1980) 같은 위대한 문법학자들이 그 이름을 빛냈다.
프랑스어는 라틴어의 후예이지만 라틴어의 명사 곡용은 대명사를 제외하고는 거의 상실하였으며, 따라서 고정된 어순으로 명사의 문법적 위치를 나타내게 되었다. 반면 동사의 굴절은 비교적 풍부하게 유지하고 있는데, 동사는 인칭과 복잡한 시제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한다. 단, 이러한 동사 변화의 많은 부분은 대개 음운론적 변화에 비해 보수적인 정서법에 의해 표시되고 있는 경우가 많고, 입말에 있어서는 많은 인칭과 시제의 동사 변화가 사실상 많이 수렴 통합되었다.
프랑스어 정서법 및 표기법.
철자.
로마자를 사용한다. 프랑스어의 알파벳은 모두 26개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k와 w는 외래어를 표기하는 데에만 쓰인다.
알파벳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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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9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919 | 턱스 | 턱스(Tux)는 리눅스 프로젝트의 공식 마스코트이다. 통통한 펭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1996년 래리 유잉(Larry Ewing)이 만들었다. 리눅스의 마스코트를 펭귄으로 삼자는 아이디어는 리눅스 커널의 작성자 리누스 토르발스에게서 나왔다. |
2920 | 3079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920 | 어니스트 헤밍웨이 |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 1899년 7월 21일 ~ 1961년 7월 2일)는 미 육군 상사로 예편한 미국의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이다. 헤밍웨이의 실속 있고 절제된 표현 방식은 20세기 소설에 강한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모험적인 삶과 대중적인 이미지 역시 후대에 영향을 크게 끼쳤다. 헤밍웨이는 대다수의 작품을 1920년대 중반부터 1950년대 중반 사이에 발표하였고, 1954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헤밍웨이는 7개의 소설, 6개의 단편소설 모음집, 그리고 2개의 논픽션 작품들을 출판하였다. 3개의 소설, 4개의 단편소설 모음집, 그리고 3개의 논픽션 작품들은 사후에 출판되었다. 헤밍웨이의 작품들은 미국 문학의 고전으로 여겨지고 있다.
헤밍웨이는 일리노이주 오크 파크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고등학교를 마친 이후 이탈리아 전방의 군대에 입대하여 구급차 운전사가 되기 전에 《캔자스 시티 스타》에서 몇 달 동안 기사를 썼다. 1918년에 심하게 부상을 입은 헤밍웨이는 집으로 되돌아왔다. 헤밍웨이가 겪은 전쟁의 경험은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1921년, 헤밍웨이는 그의 첫 번째 아내인 해들리 리처드슨과 결혼하였다. 부부는 헤밍웨이가 해외 특파원으로 근무한 곳인 파리로 이사를 가게 된다. 헤밍웨이는 파리에서 소위 ‘잃어버린 세대’라고 불리는 1920년대 근대주의적 작가들과 미술가들의 영향을 받게 된다. 1926년에는 그의 첫 소설인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를 출판한다. 1927년 해들리 리처드슨과 이혼한 뒤, 헤밍웨이는 폴린 파이퍼와 재혼을 한다. 둘은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서 해외 특파원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후 이혼하게 되고, 헤밍웨이는 내전을 바탕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를 쓴다. 1940년, 헤밍웨이는 세 번째 아내인 마사 겔혼을 만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런던에서 메리 웰시를 만난 후에 이혼을 했다. 헤밍웨이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파리 해방 전투에 참여한다.
1952년에 《노인과 바다》를 출판하고 난 이후에, 헤밍웨이는 아프리카의 사파리로 떠난다. 그 곳에서 두 차례의 비행기 사고를 당한 그는 남은 생의 대부분을 투병 생활을 하며 지낸다. 헤밍웨이는 1930년도에는 플로리다주 키웨스트에 거주했고, 194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는 쿠바에서 거주한다. 1959년에는 아이다호주 케첨에 위치한 집을 구입하였고, 1961년 여름, 헤밍웨이는 그 곳에서 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생애.
1899년 7월 21일 일리노이주 오크 파크(현재의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여섯 남매 중 장녀인 성악가였다. 그의 아버지는 활동적인 인물로 낚시 및 사냥, 권투 등을 즐겼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고등학교 졸업 후 1917년 지방 신문에 "캔자스 시티 스타"지의 인턴 기자였다. 1918년 적십자 일원으로 이탈리아 북부 호사루타 전선에 구급차 운전 기사로 자원하여 활동중 중상을 입었다. 전쟁 이후 캐나다 토론토에서 "토론토 스타"지의 자유기고 기자를 지냈고, 특파원으로 파리로 건너가 거트루드 스타인 등과 사귀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헤밍웨이는 행동파 작가로 스페인 내전에서 파시스트이자 후에 군사 독재자가 된 프랑코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행동적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을 썼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 등은 그러한 경험이 잘 녹아 있는 작품이다. 당시 그의 소설은 헐리우드 영화의 소재를 제공하여 영화화하였다.
작품은 대체로 짦은 문체를 이용하며, 단편에서는 특히 짧은 문체의 작품이 많다. 이 작품들은 대실 해미트, 레이먼드 챈들러와 이후 계속되는 하드보일드 문학의 원조가 되었다.
1954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52년에 발표한 걸작, 《노인과 바다》 평판이 주요한 영향이었다. 1954년 두 번이나 항공기 사고를 당한다. 두 번의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았지만, 중상을 입고 노벨 문학상 시상식도 나가지 못했다. 이후 그의 특징이었던 강인한 신체와 활동적인 생활을 회복하지 못했다.
말년에 사고 후유증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집필도 점차 어려워졌다. 결국 1961년 아이다호주에서 엽총으로 62세 나이에 자살했다.
헤밍웨이의 자살 원인으로는 그의 아버지와 같은 철과잉증에 의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1961년에 이 질병이 있는 것으로 진단되었다.
남동생인 레스터 헤밍웨이는 작가로, 손녀 마고 헤밍웨이와 마리엘 헤밍웨이는 여배우가 되었다.
《해류 속의 섬들》("Islands in the Stream")의 무대가 된 바하마의 비미니에는 그가 머물렀던 호텔 객실이 있었다. 이 객실을 개조하여 개장한 〈어니스트 헤밍웨이 박물관〉에 유품 등이 전시되었지만, 2006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생애 동안, 그는 다음과 같은 상을 받았다.
사후.
헤밍웨이 박물관(Museo Momerial 'Ernest Hemingway')은 쿠바 아바나에서 멀지 않은 곳에 헤밍웨이가 살았던 집에 있다. 1928년 헤밍웨이가 쿠바를 방문한 후 줄곧 머물며 '노인과 바다' 등의 작품을 쓴 곳으로 내부는 당시의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며 '노인과 바다'책이 있는 방, 타이프라이터, 동물박제, 9,000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다. |
2921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921 | 리누스 토르발스 | 리누스 베네딕트 토르발스(, 1969년 12월 28일 ~)는 핀란드 헬싱키에서 태어난 스웨덴계 핀란드인으로서 소프트웨어 개발자이자 리눅스 커널과 깃을 최초로 개발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후에 그는 리눅스 커널 개발 최고 설계자가 되었고, 현재 프로젝트 코디네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커널의 플랫폼 독립적인 부분과 인텔 IA-32 아키텍처로 구체화되는 핵심 커널의 컴포넌트들을 관리한다. 저명한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개발리더들에게 부여되는 명예 타이틀직인 자비로운 종신독재자(BDFL, )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생애.
리누스는 닐스(Nils)와 안나(Anna) 토르발스의 아들이자, 시인 올레 토르발스(Ole Torvalds)의 손자로 태어났다. 리누스의 가족은 핀란드 인구의 5.5% 정도를 차지하는 소수 스웨덴어 사용자에 속한다. 리누스의 이름은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던 미국인 화학자 라이너스 폴링에서 따온 것이지만, 리누스는 자신의 저서 《Rebel Code: Linux and the Open Source Revolution》라는 책에서 "나의 이름은 피너츠에 나오는 라이너스에나 어울린다"고 언급한 바 있다.
리누스는 1988년 헬싱키 대학교에 입학해 다녔고, 1996년 컴퓨터 과학 석사로 졸업했다. 석사 논문 제목은 '리눅스: 이식 가능한 운영 체제'이다. 리누스는 대학교 1학년을 끝낸 후 포병 관측 장교로 핀란드 군에 입대하여 소위로서 11개월간 복무하여 병역을 마쳤다. 1990년에 복학한 후 최초로 DEC MicroVAX에서 운영하는 ULTRIX의 형태로 유닉스를 만나게 되었다.
2000년 6월에 헬싱키 대학교는 리누스 토르발스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리눅스 개발.
리누스의 컴퓨터에 대한 관심은 코모도어 VIC-20와 함께 시작했다. 이후 싱클레어 QL를 구입하고 그 운영체제를 변형시키며 OS를 변형시키고 어셈블리어 프로그램과 텍스트 에디터를 만들거나 몇 가지 게임을 프로그램 하기도 하였다. 1990년 헬싱키대 재학중에 읽은 앤드루 타넨바움의 책 [운영체제-설계와 이론 및 MINIX에 의한 실제 장치]가 '인생을 바꾼 책'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고 자택의 개인 컴퓨터에서도 동작하는 UNIX 운영체제의 필요성을 느끼고 취미시간과 자택이 설비를 이용해서 리눅스 커널의 초기 개발을 했다.
1991년 2월 2일, 그는 인텔 80386 기반의 IBM PC를 구입하였다. 한 달 정도 페르시아의 왕자 등의 게임을 하면서 MINIX의 사본을 기다렸는데, MINIX가 도착한 직후 그는 리눅스 커널을 만드는 일을 시작하였다. 자신의 시스템으로 MINIX 운영체제를 사용했고, 이걸 스스로 만든 운영체제로 바꾼 뒤 여기에 리눅스(Linux, Linus's Minix)라는 작업명을 붙였다. 친구가 이걸 네트워크에 올리라고 권유하며 자신의 FTP 서버를 제공했다. 이 친구는 리누스에게 리눅스라는 디렉토리를 부여했다.
1991년 8월 리누스는 자신의 성과물을 Usenet 뉴스그룹(comp.os.minix)에 공개했다. 리누스는 리눅스라는 상표명을 등록하는 걸 싫어했지만, 다른 이의 상표 등록을 막기 위해서 1995년 상표를 등록했다. |
2928 | 544213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928 | 1971년 | 1971년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
2929 | 73014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929 | 1972년 | 1972년은 토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
2930 | 73014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930 | 1974년 | 1974년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
2938 | 29389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938 | 장자 | 장자(莊子, 병음 Zhuāngzǐ (좡즈), 기원전 369년?-기원전 286년)는 중국 전국 시대 송(宋)나라 몽(蒙; 현재의 안휘성 몽성 또는 하남성 상구 추정) 출신의 저명한 중국 철학자로 제자백가 중 도가(道家)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노자(老子)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다. 본명은 주(周)이다.
후세에 노자와 함께 부를 때 노장(老莊)이라 부른다. 도교에서는 남화진인(南華眞人), 또는 남화노선(南華老仙)이라 부르기도 하며, 《장자》는 《남화진경(南華眞經)》이라 부른다. 《삼국지연의》에서 황건적의 지도자 장각에게 도를 전수하는 선인이 바로 남화노선(장자)이다.
장자는 만물 일원론을 주창하였다. 어느 날 장자는 자기가 나비가 되어 훨훨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잠을 깨니 내가 꿈을 꾸고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을 꾸고 지금의 내가 되어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장자는 이처럼 상식적인 사고 방식에 의문을 품고 유학자들이 말하는 도덕적 가르침 따위는 하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노자의 생각을 이어받아 자연으로 돌아갈 것과 무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생애.
《사기》에 따르면, 장자는 일찍이 몽(蒙) 칠원(漆園)의 관리가 되었으나, 생활은 매우 가난했다. 《장자》 외편 〈추수(秋水)〉편에 따르면, 초나라 위왕(威王)이 사람을 보내 정치를 보좌해 주길 청했으나, 장자는 거절하였다. 혜자(惠子)와 교우했다.
장자의 인생론.
장자의 인생론에서 이상적인 삶이라는 것은 근심의 근원인 자기의 육체ㆍ정신을 버리고 '허정'(虛靜), '염담'(恬淡)의 심경에 도달하여 자연의 법칙에 따르고 어떠한 것에도 침해받지 않는 자유ㆍ독립을 얻어 세계의 밖에서 초연하게 노니는 것이다. 이것을 실현한 사람을 '진인'이라고 하며, 이 인생론의 근저에는 세계는 불가지의 실재인 도의 표상이라는 세계관과, 개념적 인식과 가치판단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의미한 것이고, 철저한 무지만 올바른 것이라고 하는 지식론이 깔려 있다.
이 지식론은 명가(名家)의 궤변이나 전변(田騈)의 제물설(齊物說)의 비판적 섭취에서 성립, 얼마 후에는 세계관과 혼합하여 세계의 존재와 운동은 '도'(道)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존재론, 우주 생성의 전설을 받아들여 태초의 '혼돈'='도'로부터 세계가 유출하였다고 하는 우주생성론 및 음양 오행설을 채용하여 물(物)의 생사(生死)를 기(氣)의 집산으로 설명한 자연론 등이 전개되었다.
장자의 노장사상.
노자와 장자를 묶어 흔히 노장사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데, 노자가 정치와 사회의 현실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데 대해, 장자는 개인의 안심입명에만 몰두했다. 노자가 혼란한 세상을 구하기 위해 무위자연에 처할 것을 가르쳤던 반면, 장자는 속세를 초탈하여 유유자적하고자 했다. 즉 노자는 어느정도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가진 반면 장자는 오직 개인에 대한 것을 강조하였다. |
2943 | 75578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943 | 펠로폰네소스 전쟁 |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431년에서 404년까지 고대 그리스에서 아테네 주도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주도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역사가들은 전통적으로 이 전쟁을 세 단계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아르키다모스 전쟁’으로 스파르타는 아티케의 침략을 되풀이하였고, 아테네는 자신의 세력권에 불안의 징조를 억누르기 위하여 자국의 해군력을 이용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 해안을 습격하였다. 전쟁의 첫 단계는 기원전 421년에 니키아스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막을 내렸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에서 다시 교전이 일어나 이내 조약의 효력은 약해졌다. 기원전 415년 아테네는 시켈리아(시칠리아)의 시라쿠사이를 공격하기 위해 거대한 시켈리아 원정대를 파견하였으나, 기원전 413년 공격군은 대패하여 군대 전체가 궤멸되었다. 이 패배로 전쟁은 마지막 단계에 돌입하였는데, 보통 ‘데켈레이아 전쟁’ 혹은 ‘이오니아 전쟁’으로 불린다. 이때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아 아테네에 종속된 에게 해와 이오니아의 나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지원하여 아테네의 패권을 잠식하였으며, 결국 아테네의 제해권을 빼앗았다.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가 궤멸되면서 사실상 전쟁은 끝났으며, 아테네는 이듬해에 항복하였다.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그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이미 잘 지적하였듯, 이 전쟁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의 정치, 역사 그리고 문화에 끼친 영향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전쟁은 고대 그리스 세계의 정세를 뒤바꾸었다. 국제 관계 면에서 전쟁 전 그리스에서 가장 강대한 도시 국가였던 아테네는 종속국에 가까운 상태로 전락하였으며, 반면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주도국이 되었다. 전쟁에 따른 경제적 영향은 그리스 전역에 미쳐, 펠로폰네소스에서는 빈곤이 만연하였고, 아테네는 완전히 유린당하여 전쟁 전의 영화를 되찾지 못하였다 또 이 전쟁으로 그리스 사회에는 앞서 말한 영향보다 포착하기 어려운 변화가 생겼는데, 민주주의 국가인 아테네와 과두정 국가인 스파르타의 전쟁으로 서로의 나라에 자국에 우호적인 정치 세력이 등장하면서 그리스 세계에서 내전이 잦아지는 원인이 되었다.
또, 그리스의 전쟁은 원래 제한되고 정형적인 형태였으나, 나라 사이의 전면전으로 변화하였으며, 대규모 잔학 행위도 등장하였다. 전쟁은 종교적, 문화적 금기를 훼손했으며, 농촌과 도시를 파괴하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황금 시대를 극적으로 종식시킨 일대 사건이었다.
원인.
내전으로 분류하기도 애매한 이 전쟁은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다른 폴리스는 엄연히 다른 나라였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제국과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델로스 동맹을 주도하며 델로스 섬에 위탁된 자금을 관리하던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자 이에 스파르타가 내심 불만을 가지면서 위기가 고조되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었고 따라서 대립의 소지가 컸다.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을 발판으로 강대한 제국으로 발돋움하자 스파르타와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테네가 코린토스 및 메가라를 위협하면서 코린토스 지협을 장악하는 동시에 서부 지중해로 진출하려 하자 스파르타와 부딪히게 된다. 그러나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와 〈삼십년 평화 조약〉으로 끝을 맺었다. 욕심을 버리지 못하던 아테네는 코린토스와 상업상 이해관계의 충돌에 있는 식민지 코르퀴라와 동맹을 하게 된다. 이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아테네의 페리클레스가 건재한 동안에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대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으며, 페리클레스 사후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상대로 전쟁에 돌입했다. 이에 28년간이나 계속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된다.
과정.
투키디데스는 전쟁의 시작을 에피담노스에서 벌어진 분쟁에서 시작되었다고 쓰고 있다. 에피담노스는 이오니오스 만 서북쪽 변방에 위치한 식민시로 약간 특이한 역사를 가졌는데, 에피담노스는 케르퀴라의 식민시였지만 식민시의 건설자는 코린토스인인 팔리오스였고 처음 정착민들중 코린토스 인도 몇몇 있었다. 때문에 코린토스인은 에피담노스를 자신들의 식민시로 여기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피담노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직전에 민중파와 귀족사이에 분쟁이 벌어진다. 여기서 에피담노스의 민중파는 귀족을 추방하는 일이 벌어졌고 반대로 귀족이 에피담노스 주변에 비헬라스인과 연대하는 일이 발생했다.
에피담노스의 민중파는 케르퀴라에 지원을 요청하는 사절단을 보냈으나 거절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때문에 에피담노스 민중파는 이번에는 델포이 신탁(에피담노스를 창건한 코린토스인들에게 도시를 맡기고 그들에게서 도움을 구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하자, 코린토스인들에게 도시를 맡기고 그들을 길잡이로 삼으라는 신탁을 받는다)을 명분으로 코린토스에게 도시를 맡아줄 것을 요청했고 코린토스는 때마침 케르퀴라와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에피담노스의 민중파의 요구를 수용해서 군대를 육로로 자신들의 식민시이자 케르퀴라와 에피담노스 사이에 있던 아폴로니아로 파병한다.
결국 양 국가는 에피담노스를 두고 처음에는 협상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충돌하게 된다. 코린토스는 75척의 선단에 2000명의 중무장보병을 태워서 에피담노스로 보냈고 이에 케르퀴라는 80척의 선단으로 맞서서 악티온 곶에서 싸우게된다. 이 해전에서 케르퀴라는 승리를 거둬서 15척의 코린토스 선박을 파괴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레우킴메 곶에 승전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후 케르퀴라는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해서 코린토스의 식민시 레우카스와 동맹국인 엘리스의 퀼레네 항구를 공격한다. 그렇게 1년간 대치하던중 코린토스가 대대적인 전쟁준비를 시작하자 비록 이전에 승리하기는 했지만 동맹국이 없던 케르퀴라는 아테네에 동맹을 요청하고 이에 코린토스도 아테네에 도움을 요청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테네는 두 번의 민회 끝에 케르퀴라가 아테네가 침공을 당할 시에만 돕는 조건부 동맹을 맺기로 하고, 앞에 조건대로 활동할 10척의 아테네 함대를 파견한다. 이후 코린토스와 동맹국은 150척의 대규모 함대를 케르퀴라 앞바다에 파견했고 이에 케르퀴라도 140척의 함대로 대응해서 대규모 해전이 벌어진다. 여기서는 코린토스가 70척의 함대를 파괴해서 매우 우위에 있었는데 이 상황을 지켜보던 아테네의 10+10척(나중에 증강된 함대)의 함대가 전투에 개입하고 갑작스러운 제3자의 개입에 코린토스는 후퇴한다. 이후 코린토스가 아테네 함대에 사절을 보내 개입한 이유를 묻자 민회에서 결정된 동맹을 설명해주었고 코린토스도 아테네와 전쟁을 벌이는 것은 무리라고 여겼는지 퇴각 그렇게 승패가 정해지지 않고 해전은 끝이 난다.
처음에는 아테네가 이길 공산이 매우 컸었다. 그것은 해군에 대한 경험지식이 풍부한 데다가 스파르타 진영은 해군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르키다모스 전쟁'으로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아티케를 선제공격하면서부터 시작하였다. 아테네는 자신의 세력권에 불안의 징조를 억누르기 위하여 자국의 해군력을 이용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 해안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뜻밖의 태풍, 해일 등의 자연재해를 만나 전쟁을 개시하기도 전에 군사적으로 큰 피해를 입어 해군력이 스파르타 해군과 엇비슷한 수준에 이른다. 결국 양측은 군사적으로 대치중에 있어 승패도 없이 10년간 전쟁을 계속하다가 기원전 421년 니키아스 평화조약이 맺어져 양측은 휴전 조치를 내렸고 한동안의 평화가 계속된다.
그러나 이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것은 계속된 전쟁으로 델로스 동맹 국가간의 분열이 계속되어 있었기 때문인데 분열은 전쟁 중반에서부터 델로스 동맹간에 의견 차이로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때문에 아테네는 스파르타 측에 먼저 휴전을 제안했던 이유이기도 했고 전쟁국력을 쏟아 부어야 한 상황이었는데 전쟁 처음부터 아테네 측이 전쟁을 강압한 탓에 델로스 동맹은 분열조짐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동맹국가가 델로스 동맹 탈퇴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가담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러한 상황이 일어날 경우 아테네로써는 군사적으로 약해질 뿐만 아니라 여차하면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이 기회를 틈타 공격해 들어오면 제국의 영원한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파르타 측에 휴전협정을 요청하는 한편, 재차 공격 기회를 노렸던 것이다.
결국에는 펠로폰네소스에서 아테네 측과 스파르타 측에서 충돌이 일어나면서 이내 니키아스 평화조약의 효력은 약해졌다.
기원전 415년 아테네는 시켈리아(시칠리아)의 시라쿠사이를 공격하기 위해 거대한 시켈리아 원정대를 파견하였다.
아테네 측은 반격해오는 스파르타를 막기 위해 알키비아데스로 새로운 아테네군 지도자로 추천되었다. 그는 스파르타의 군사정보를 파악하는 한편 군사배치 등을 계획 중이었으나 전쟁 개시 전에 내분이 먼저 발생한다. 그것은 자신의 정적들의 사소한 고발과 모함으로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알키비아데스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스파르타로 망명하여 아테네의 군사 상황을 모두 넘겨버린다. 이 사건이 아테네의 패배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결국, 기원전 413년 공격군은 대패하였고, 원정군 전체가 궤멸되었다.
스파르타는 이와 동시에 페르시아와 군사협정 체결을 받아 페르시아의 전폭적인 지원을 얻어 흑해의 차단에 나선다. 그리하여 아테네에 종속된 에게 해와 이오니아의 나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지원하여 아테네의 패권과 군사력을 약화시켰으며. 뒤이어 기원전 404년에 일어난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를 궤멸시켜 해상권을 빼앗았다. 이 해전을 끝으로 사실상 전쟁은 끝났으며, 아테네는 이듬해에 항복하였다. 스파르타는 도시의 성벽을 모두 파괴하도록 강요했으며 아테네는 완전히 유린 당하여 전쟁 전의 영화를 되찾지 못하였다.
결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 주도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승리하면서 그리스의 주도권은 아테네에서 스파르타로 넘어갔는데, 이후 아테네의 민주정은 중우정으로 변질되었고 오랜 전쟁으로 그리스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스파르타가 테바이에 패하면서 기원전 400년부터 기원전 340년까지 그리스의 주도권이 테바이로 넘어갔고 테바이가 마케도니아 왕국에 패하면서 기원전 340년부터 기원전 300년까지는 마케도니아 왕국이 그리스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의 주도권을 장악한 이후 그리스는 유럽 역사의 주 무대에서 과거와 같은 영광을 다시 누리지 못하고 퇴장하였으며, 로마 제국(다만 중세 시기 로마는 공용어가 그리스어로 바뀌었고 라틴계보다는 그리스계가 우세했기에 그리스의 역사로 보기도 한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다가 19세기에 들어서야 독립할 수 있었다. 단지 그들의 신화와 철학만이 남아 후세에 영향을 끼쳤다.
영향.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아나바시스.
전쟁의 결과 델로스 동맹은 해체 수순에 들어갔고, 아테네에서는 공화정이 붕괴하고 스파르타의 지도하에 과두파 정권(삼십인 정권)이 발족하여 공포정치를 하며 숙청을 지휘했다. 하지만 9개월 후 트라쉬불로스가 이끄는 공화정 파 세력이 삼십인 정권을 타도하고, 정권을 탈취한다. 공화정 정권하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전의 원인이 된 알키비아데스와 삼십인 정권의 지도자 크리티아스 등의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가 아리스토파네스 등에 의해 탄핵당하고, 공개 재판을 통해 사형을 당했다. 기원전 401년경에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의 크세르크세스 2세와 작은 키루스 사이에서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며, 〈쿠나크사 전투〉가 일어났다. 이 전투에 참가한 크세노폰은 《아나바시스》를 썼다.
페르시아 제국의 자금 지원.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지배자인 지위는 잃었지만 유력 폴리스로 계속 존재했다. 그리스 지방을 지배하려는 페르시아 제국에 맞서는 스파르타를 견제하기 위해 아테네와 테바이 그리고 이후에는 코린토스 등의 스파르타와 적대적인 폴리스에 자금을 지원하였고, 여러 폴리스가 합종연횡을 반복하면서 스파르타에 대항하였다. (예를 들면 코린토스 전쟁, 안탈키다스 평화조약). 기원전 379년에 마침내 스파르타가 그리스와 에게 해의 패권을 장악했지만, 해상 교역이 가져올 부가 시민들 사이에 빈부격차를 낳았고, 주로 자작농으로 구성된 병역을 지는 자유민이 700명 정도까지 감소했기 때문에 질높은 강병을 내세운 리쿠르고스 제도(, Lycurgus)는 타격을 받았다.
보이오티아 전쟁.
기원전 378년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을 대체하는 제2차 해상 동맹을 재결성했다. 그리스 세계는 보이오티아 전쟁으로 만성적인 전쟁 상태에 빠져 서서히 쇠퇴한 반면, 아테네는 기원전 375년의 낙소스 연안 해전에서 페르시아 군을 물리치고 해상의 제해권을 되찾았다. 기원전 371년 스파르타 군은 레우크트라 전투에서 에파메이논다스가 이끄는 테바이 군에 패배를 당하고, 그리스의 패권을 잃었다. 일시적으로 패권을 잡은 테바이도 기원전 362년에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에파메이논다스가 사망하면서 패권을 상실하게 된다.
마케도니아의 대두.
기원전 357년에 테바이와 아테네 사이에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다. 기원전 356년에는 테바이를 중심으로하는 암피크티온 동맹과 포키스를 중심으로 하는 아테네 - 스파르타 연합군 사이에서 제3차 신성 전쟁이 일어났다. 기원전 355년에 동맹시 전쟁은 동맹 도시의 승리로 끝났고, 제2차 해상 동맹은 붕괴되었다. 기원전 346년에 제3차 신성 전쟁도 암피크티온 동맹이 승리하면서,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기원전 347년에 플라톤이 사망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고향 마케도니아 왕국으로 귀국하여, 알렉산더 3세의 스승이 된 것도 이후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기원전 338년의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네, 테바이 연합군이 마케도니아 왕국에게 패배를 당하고, 마케도니아의 패권이 성립되었다. 이렇게 그리스 세계는 마케도니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스파르타만 마케도니아가 주도하는 헬라스 동맹(코린토스 동맹)에 참가하였고, 나중에 아기스 3세가 마케도니아에 반항하여 군사를 일으켰지만, 기원전 331년 메갈로폴리스 전투에서 패했다.) 기원전 336년에 필리포스 2세가 암살되자 일시적으로 헬라스 동맹은 혼란에 빠졌지만, 알렉산더가 권력을 장악했다. 기원전 334년에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의 천적 페르시아를 물리치기 위해 마케도니아 군을 이끌고 동방원정에 나섰다. |
2944 | 75312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944 | 오노레 드 발자크 |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는 1799년 5월 20일 (공화력 7년 목월 1일), 투르에서 오노레 발자크(Honoré Balzac)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1850년 8월 18일, 파리에서 사망한 프랑스의 한 작가이다. 그는 소설가, 극작가, 문예 비평가, 수필가, 저널리스트, 인쇄업자로서 활동했다. 발자크는 1829년부터 1855년까지 출간된 90편이 넘는 소설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묶은 작품인 《인간 희극》을 남겼다. 그는 《100편의 해학 이야기》를 비롯하여 청년 시절에 필명으로 쓴 소설들과 25편의 완성되지 못한 작품들 역시 창작한 바 있다.
발자크는 프랑스 소설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미지의 걸작》과 같은 철학적인 소재를 다룬 소설, 《나귀 가죽》과 같은 판타지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썼다. 그는 특히 《고리오 영감》이나 《외제니 그랑데》에서 볼 수 있는 사실주의 문체에 두각을 보였다.
발자크는 자신이 인간 희극의 서문에서 설명했듯이 뷔퐁이 동물의 종을 식별했던 것처럼 당대 사회의 부류들을 식별하고자 했다. 소설이 '철학적인 가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 월터 스콧의 소설을 읽음으로써 그는 많은 역사가들에게 잊혀진 역사와 그 사회에 관하여 서술하고 민중의 실제 모습과 소설을 겨루며 상이한 사회 계층과 그 사회를 이루는 개개인을 탐구하고자 했다.
작가는 자본주의의 대두와 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귀족을 흡수한 부르주아지들을 묘사하고 있다. 숙명을 띤 존재에게서 인상을 받은 그는 자연이 창조한 것보다 더 많은 인물들을 창조해냈다 ”발자크가의 모든 것은 문까지도 천재적이다.” (보들레르)
정치에 관한 발자크의 견해는 일관되지 않은 애매한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왕당파로서 그는 7월 왕정에 대하여 강한 지지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반면, 이전에는 자신을 자유주의자라 칭한 적이 있다. 발자크가 쓴 소설에서 노동자들은 주요 등장 인물로는 나오지 않았지만, 발자크는 1840~1848년도 당시 이런 노동자들을 지지했다. 보수주의 이념을 지지하던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인정한, 반면 어떤 면에 있어서는 무정부주의자와 반란자들이 관심을 보인 작품을 썼다.
문예 활동 이외에 그는 신문에 기사를 투고하고 훗날 파산하게 되는 두 개의 정기간행물을 성공적으로 편집했다. 작가의 고상한 사명을 확신하던, 사유에 의해 지배당하듯이 살았던 그는 저작권 보장을 위해 싸우고, 문인협회 설립에 이바지했다.
과로로 몸이 약해져 건강이 위태롭던 광적인 작업가였지만, 위험한 투자와 과소비로 인해 여러 거주지에서 가명을 쓰며 채권자들을 피해 살던 발자크. 그는 1850년, 그가 마음에 들어보이고자 17년간 노력한 한스카 공녀와의 결혼 전까지 많은 여성들과의 관계에 있었다. 그가 글을 써가며 번 돈은 부채를 갚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는 항상 인쇄업 같은 사업을 마음에 두었다. 포르튀네 로(rue Fortunée)에 위치한 궁전에서 그는 엄청난 사치 속에서 엄청난 부채를 안고 사망했다.
전 유럽에서 인정받고 읽힌 발자크의 소설은 당대와 후대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소설 《감정교육》을 쓸 때 《골짜기의 백합》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보바리 부인》을 쓴 이는 쓸 때 《서른 살의 여인》에서 영감을 받았다. 광대한 양의 소설 속에서 변모하며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이 인간 희극 내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한다는 점은 에밀 졸라와 마르셀 프루스트에게 큰 영감을 주기도 하였다. 이런 발자크의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출판되고 있다. 《계모》는 1906년 영화화되었다. 이후에도 발자크의 수많은 작품들은 영화와 드라마 등으로 각색되며 전 세계에서 새로이 만들어졌다.
생애.
유년기.
오노레 드 발자크는 국왕 자문회(Conseil du roi)의 비서, 투르의 식품 장관, 시장 보좌이자 구제원장이었던 베르나르 프랑수아 발사(Bernard-François Balssa)와 마레 구(Marais 區)의 장식끈 제조업 가문의 안 샤를로트 로르 살람비에(Anne-Charlotte-Laure Sallambier)의 아들이다. 베르나르 프랑수아 발사는 프랑스 혁명 전 1771년에서 1783년 사이의 파리에서 교섭하여 원래 성인 발사(Balssa)를 발자크(Balzac)로 바꾸었다. 베르나르 프랑수아는 아내보다 32살 연상이었는데, 1797년 결혼 당시 아내는 18살밖에 안된 나이였다. 그는 무신론자이며 볼테르주의자였으며, 아내는 일루미나티와 최면술에 관심을 보인 "사교계를 좋아하는 부도덕한 어머니"였다는 서술이 있다.
1799년 5월 20일에 태어난 오노레는 곧장 보모에게 맡겨졌고 1803년 초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유년기의 이 같은 일로 그는 마치 골짜기의 백합에서 작가의 "분신"으로 등장하는 주인공 펠릭스 드 방드네스(Félix de Vandenesse)처럼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감정을 느꼈다.
오노레 드 발자크는 형제자매 네 명 가운데서 장남이었다. (오노레, 로르, 로랭스, 앙리) 오노레는 자신보다 16개월 늦게 태어난 누이 로르(Laure)를 가장 좋아했다. 둘 사이에는 결코 변치 않던 복잡하고 상호적인 애정이 있었다. 로르는 오노레를 여러 차례 도와주었는데, 오빠와 함께 책을 쓰기도 했으며 1858년에는 그의 전기를 저술했다.
1807년 7월 22일부터 1813년까지, 오노레는 방돔의 오라토리오 수도회 중학교에서 기숙했다. 6년동안 방학 때는 물론이고 한번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어린 발자크는 모든 장르의 책을 탐독했다. 독서는 그에게 있어 어떤 걸로도 만족시킬 수 없는 갈망의 한 종류 [...] 그의 눈은 일곱 여덟 줄을 한 번에 보았고 그의 정신은 자신의 정신같은 신속함을 지닌 의미를 이해했다. 하지만 그의 정신을 채워주고 상상력을 발달시킨 독서는 그에게 “생각의 충혈”에 의한 혼수 상태를 초래하는 결과를 주었다. 이 상황은 1813년 4월을 기점으로 더 악화되었는데, 학교는 그의 건강을 염려해 심각하게 야위어진 그를 가족 곁으로 돌려보냈다.
1814년 7월부터 11월까지 그는 콜레주 드 투르에 통학했다. 그의 아버지는 군 제 1사단의 식품 통솔로 임명되었고, 가족은 파리 마레 구 탕플 로(rue de Temple) 40번가로 이사를 갔다. 청소년 시절 그는 파리 튀렌 로(rue de Turenne)에 있는 레피트르(Lepître) 하숙집에서 기숙했고, 이후 1815년부터는 토리니 로(rue de Thorigny)의 강세 신부 학원 (l’institution de l’abbé Ganser)에서 기숙했다. 이 두 하숙의 학생들은 리세 샤를마뉴의 교육과정을 따랐는데, 그보다 성적이 훨씩 뛰어났던 쥘 미슐레가 여기서의 동창이었다.
1816년 11월 4일, 젊은 발자크는 법학과에 지원했다. 그러면서 개인 교습을 들으며 소르본에서 강의를 들었다. 발자크는 자연사 박물관을 자주 갔었고 그곳에서 퀴비에와 조프루아 생일레르의 학설에 관심을 가졌다. 이론과 실천은 땔 수 없다고 주장한 아버지로 인해 오노레는 공부를 하면서도, 문학에 관해 취미를 보인 교양있는 사람이자 가족과 친한 사이였던 장바티스트 기요에메르빌 (Jean-Baptiste Guillonnet-Merville) 변호사네 집에서 일해야 했다. 쥘 자냉(Jules Janin)이 이미 사환으로 있던 그곳에서 발자크는 공증인 사무소 서기의 전문 일을 견습했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샤베르 대령》에서 변호사 견습 생활 속 소란스런 분위기를 창작해내며, 《인생 초년기》의 스승 데르빌과 오스카 위송같은 인물을 만들어내게 된다. 동시에 발자크는 그의 형이상학적 사유의 상징이자 이 세상을 알고자 하는 욕망으로 많은 철학서들을 탐독하고 요약하고 비교했다. 발자크는 1819년 1월 4일 법학과 1차 졸업 시험을 성공리에 합격했으나 2차 졸업 시험은 응시하지 않고 자격증 역시 따지 않는다.
신인 작가.
발자크의 아버지는 73세로 은퇴를 앞두고 있었는데, 이 당시 가족은 더 이상 파리에서 살아갈 재력이 부족해서 빌파리시로 이사를 갔다. 젊은 발자크는 파리를 떠나기 싫어했고, 문학에 몸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1819년 8월 부모는 아들로 하여금 레디기에르 로(rue de Lesdiguières) 9번지 다락방에 살게끔 해주었으며, 글을 쓸 수 있도록 2년동안 풀어주었다. 발자크는 이 시기 그의 인생을 《잃어버린 환상》에서 회상한다.
발자크는 <정신의 불멸에 관한 논문>을 계획하며 말브랑슈, 데카르트를 읽으며 스피노자를 라틴어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본격적으로 문학에 뛰어들어 셰익스피어 희곡의 등장 인물들에게서 영감을 얻으며, 알렉상드랭 시형 1,906행의 비극 《크롬웰》(1820)을 집필했다. 그가 인척들에게 이 작품을 보여주었는데, 반응은 실망적이었다. 학자 프랑수아 앙드리외는 상담을 하며 그가 작가의 길을 계속 가는 것에 대해 낙담시켰다.
이 젊은이는 1820년 4월 출간되어 프랑스에서 크게 성공한 월터 스콧의 《아이반호》 번역본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역사소설 집필을 향해 나아갔다.
《사보나티 주교의 작품》"Œuvres de l'abbé Savonati"이란 작품에서 그는 카노사 시대의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 가상인물인 사보나티 주교에게 헌사되었고, 초등교사 마트리캉트 씨가 이탈리아어로부터 번역했다고 늘어놓으며, 《아가티스》Agathise (전체 소실되었음)와 《팔튀른》Falthurne라는 두 편의 글을 모았다.
다른 작품 코르시노에서 그는 스코틀랜드 성에서 이탈리아인을 만나 형이상학에 관해 논의하는 네오로"Nehoro"(오노레"Honoré"의 아나그램)라는 젊은 프로방스인을 상상한다. 이 습작들은 머지 않아 버려졌고 그의 생전 출판되지 않았다.
그가 《신 엘로이즈》의 영향을 받으며 1819년 초안을 구상한 서간체 소설 《스테니 혹은 철학적 오류》("Sténie ou les Erreurs philosophiques")역시 비슷한 처지에 놓인다.
1821년 발자크는 그 스스로 “작은 상업문학 일”이라고 칭한 것을 출판하고자 에티엔 아라고"Étienne Arago"와 르프와트뱅"Lepoitevin"과 협력했다. 스스로 “문학의 조악품”이라 칭한 작품이 자신의 평판을 떨어뜨릴까 염려한 그는 룬 경 ("Lord R’hoone") (오노레의 다른 아나그램)이라는 필명으로 출판했다. 이 시기의 작품에는 《L'Héritière de Birague》, 《Clotilde de Lusignan》, 《Le Vicaire des Ardennes》 (출간 금지 당했지만 이 시기 그가 상업적으로 실패하지 않은 유일한 소설이다.)와 《장루이》"Jean-Louis"가 있다.
1822년 그는 앞서 언급된 필명을 버리고 오라스 드 생토뱅 (Horace de Saint-Aubin)으로 바꿨다. 이 이름은 그가 Le Centenaire ou les Deux Beringheld와 Le Vicaire des Ardennes에서 작가명으로 사용한 이름이다. 이 중 후자는 왕이 비난을 했고 출고을 금지당했다. 1823년 그는 《아네트와 범죄자》 (Annette et le Criminel)와 La Dernière Fée ou La Nouvelle Lampe merveilleuse를 출간하나, 서기가 쓴 보드빌*(경가극, 가벼운 희극)과 모트랭 소설의 질 나쁜 모방작인 이 책은 “끔찍했다”.
그는 1824년 11월 7일 폐간될 문예지에 참여했으며 대중의 요구에 맞는 실용적인 다양한 작품들을 집필한다. 《옷치장의 규범》(Code de la toilette) (1824) 이후로 그는 냉소적으로, 사회 전체의 상황이 도둑질에 기초해있으며 정직한 이들은 그들 스스로 변호사, 소송 대리인, 공증인들의 속임수에 대해 자기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입장에 놓여있다고 단언한, 《정직한 이들의 규범》을 출간한다. 그는 <기도에 관한 논문>의 작업을 하며 《예수회의 불완전한 역사》(Historie impartiale des Jésuites) (1824)를 출간한다. 그는 필명으로, 되풀이되는 주제의 Le Droit d’aînesse (1824)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 익명의 브로셔를 손에 쥐던 구 체제의 지지자이자 논박을 감행하던 그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인지도 모른 채 “가명 뒤의 작가”에 대해 분개했다.
1824년이 끝나가며, 지적이고 도덕적인 깊은 충돌의 희생양이 된 발자크는 상업문학을 그만 두고, Wann-Chlore의 발문에 삽입한 Jane la Pâle라는 오라스 드 생토뱅의 유작을 집필한다. 그는 훗날 이 소설의 간략한 줄거리를 비웃으며 이 시기 소설에서 보인 문체를 포기했고, <지방의 뮤즈》(La Muse du département)의 긴 구절에서 그 문체와 줄거리를 우습게 흉내낸다. 이후 그는 1837년에야 출판될, 한 외국인이 이뤄낸 변화에 관한 소설 《파문자》(L'Excommunié)의 집필을 시작한다. 이 작품은 간결한 문학과의 단절을 이뤄내며, 역사 소설 연작의 첫 걸음이 된다. 역사에 푹 빠진 발자크는 예컨데 훗날 《카트린 드 메디치>를 쓴 것처럼, 소설 형식으로 프랑스사를 저술하려는 생각을 갖는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헛되히 쓰고있단 것을 현저하게 의식하면서도, 어두운 멜로드라마, 《흑인》 (Le Nègre)라는 극을 쓰려고도 노력했고, 끝내 완성하지 못한 《푀도라》 (Fœdora)라는 운문 시를 쓸 계획을 세우려고도 했다.
1822년부터 1827년까지 그가 미숙함에 이를 갈며 출판한 젊은 시절 작품들은, 앙드레 모루아에 의하면, 훗날의 소설들의 싹을 틔우고 있었다. "그는 마지못해 천재가 될 것이다." 하지만, 발자크는 자신의 젊은 시절 작품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1837년 벨루아 후작과 그라몽 백작같은 협력자들의 도움으로 몇몇 작품들을 보충할 수 있었던 오라스 드 생토뱅 전집이란 이름으로 재출간될 때까지 자신의 전집 출판을 금지했다. 발자크는 그의 필명과의 연을 끊고 그 흔적을 지우고자, 쥘 상도에게 오라스 드 생토뱅의 생애와 불운이란 제목의 작품의 저술을 부탁했다.
자신이 경멸하던 먹고 살고자 쓰는 문학으로 돈을 벌었다는 것에 실망한 그는, 출판업자-편집자가 되기로 결정한다. 1825년 4월 19일 그는 몰리에르와 라 퐁텐의 삽화 삽입본을 출판하기 위해, 위르뱅 카넬(Urbain Canel)과 오귀스탱 드롱샹(Augustin Delongchamps)과 협력한다. 또한 그는 구舊 질레&피스 주조소 (fonderie Gillé & Fils)의 장비들을 얻어 인쇄소를 설립한다. 그렇지만 그가 팔고자 한 서적들은 팔리지 않은데다 파산이 그를 위협했다. 1826년 5월 1일, 협력자들에게서 풀려난 발자크는 엄청난 부채를 안고 있었다. 납틀을 주조하는 대신, 그는 위계적 합병을 추진하는 것에서 반대로 1827년 8월 15일 식자공 앙드레 바르비에(André Barbier)와 활자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이 일 역시 재정적 실패를 안겨줬다. 1827년 4월 16일 그는 출처에 따라 당대 53,619 프랑에서 60,000프랑에 달하는 부채에 주저앉았다.
첫 성공.
1829년 12월 출간된 《결혼의 생리학》은 수많은 정보가 담긴 책 속 인물들을 알아본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책은 그의 첫 성공이었다. 사생활 풍경과 《나귀가죽》같은 소설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이 성공은 그의 숭배자들 특히 에벨리나 한스카로부터 그에게 수많은 편지들을 가져다줬다. 그는 이 영광의 성공을 지속해 나갔다.
새로운 형식의 소설을 향해.
해석적인 사상과 학설들에 열광한 발자크는 스베덴보리의 저술과 마르티니즘, 오컬트 과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의지의 힘에 대한 확신을 갖던 그는 인간은 "인생에 있어 적절한 힘으로 행동할 수 있고 외부에 그것을 투사할 수 있으며 그의 어머니처럼, 손을 뻗는 것으로 가끔은 치유의 매력을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경험을 통해 소설속에 숨겨진 힘을 알았지만, 이것을 사회 변화의 도구로 보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서문에다 이렇게 서술한다. "아, 만약 내가 국회 의원이었다면, 왕에게 "전하, 모든 이에게 소설을 읽도록 엄명하는 칙령을 내리소서! ..."라며 면전에다 말할텐데, 게다가 국회는 알키비아데스의 개의 꼬리같은 마키아벨리적인 국회이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면서 정치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그가 찬미해 마지않던, 훗날 1842년 서문에서 헌사를 바치게 된 월터 스콧의 한계를 이해했다. 후에 그의 작품 속 등장인물이 젊은 작가에게 경고한 것처럼 말이다. “당신이 월터 스콧의 모조품이 되고 싶다면, 다른 방식으로 글을 써야 할 거요.”
발자크가 자신의 모델을 뛰어넘을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그가 1822년 찾아낸 라바터 (Lavater)의 《관상학을 통한 인간 식별법》덕이며, 그는 이것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육천 종류의 인간형을 조사하여 외면과 성격상의 특징을 “과학적으로” 연결지을 수 있다고 자신한 관상학은 그에게 성경과도 같은 것이 되었다. 이 학설은 “모든 사회 집단 연구의 개요”를 내포하고 있기도 했다. 이 소설가는 가끔 소설속 등장인물을 대략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이 학설을 사용했다.
심술궂고 속이 좁은 늙은 여인에 관하여 그는 “그녀 이마의 평평한 형태는 그녀의 옹졸함을 드러냈다”며 저술했다. 범죄자에 대해서는 “그의 관상학의 특징은 살인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에 대한 라바터의 단언을 확증한다. 그의 앞니는 엇갈려 있었다.”고 썼다. 다른 데서는, 그는 은행가에 관해 “급하게 결정하는 버릇은 눈썹이 각 전두엽을 향하여 높아지는 것에서 보인다. 입술은 근엄하고 빽빽하지만, 업무로 인해 숨겨진, 아마도 억눌린, 하지만 여자와의 교제로 재생할 수 있는, 가려진 좋은 점을, 탁월한 정신을 나타낸다”고도 묘사한다.
편집자로서 파산에 처하게 되자 발자크는 글 쓰는 일로 돌아온다. 1828년 11월, 정치-군대 소설 《올빼미당》을 쓰기 위해 마음의 평온과 필요한 자료들을 찾으며 푸제르(Fougères)의 폼므뢰(Pommereul) 장군네서 묶게된다. 이 시기 발자크는 특히 이 작품, 《올빼미당》을 다듬었는데, 독서 클럽에서 읽힐 목적으로 출판된 그의 전작들의 간행 판본인 12절판보다 더 품격있는 8절판으로 간행하고자 했다. 최종적으로 소설은 1829년, 《마지막 올빼미 혹은 브르타뉴》(Le Dernier Chouan ou la Bretagne)라는 제목으로 나오게 된다. 이 책은 발자크의 작품 중 저자명이 오노레 발자크(Honoré Balzac)인 첫 번째 책이다.
대작 《인간 희극》 계획.
거대하고 엄격하게 계획된 작품.
《나귀 가죽》은 인간 희극의 대서사가 구상된 창조적인 시기의 시작을 알린다. 발자크 작품 전체를 이해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철학 연구>는 이 작품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루이 랑베르》(1832), 《세라피타》(1835)와 《절대의 탐구》(1834)가 이 작품의 뒤를 잇는다.
《풍속 연구》 중 한 범주를 차지하는 《사생활 풍경》은 《고브세크》(1830)와 《서른 살의 여인》(1831)으로 시작한다. 적어도 1832년 쯔음 발자크가 가족들에게 열광적으로 알린 이러한 인간 희극의 체계는 《샤베르 대령》 등으로 구성된 파리 생활 풍경으로 계속된다. 이와 동시에, 생시몽적인 경제 사회 체계를 표현하며 그는 《투르의 신부》(1832)와 《외제니 그랑데》(1833)으로 시골 생활 풍경을, 《시골의사》(1833)으로 전원 생활 풍경을 시작한다.
아포스테리오리하게 작품들을 간단히 엮는 것을 떠나, 본능적으로 발전된 그의 거대한 구상이 시작됐다. 발자크는 자신이 대성당과 비교한 거대한 작품의 계획을 구상했다. 인간 희곡은 한 시대 전체, 모든 사회 계층과 일생의 경과를 볼 수 있게끔 편성되어야만 한다. 퀴비에와 조프루아 생틸레르의 학설에 많은 영향을 받은 그는 “동물에 종種이 있듯이 사회적 종이 존재한다”고 단언했으며 후자가 전자보다 더 다양한데 그 이유는 “군주, 은행가, 예술가, 부르주아, 사제, 빈자의 관습, 의복, 말투와 사는 곳”이 전혀 다르고 문명에 따라 바뀌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발자크는 그가 계획한 소설 전서에 반드시 세가지 형태가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냈다. 바로 남자, 여자, 물건, 즉 그들의 생각, 최종적으로 인간과 인생을 보여주는, 사람과 물질적인 것의 묘사를 지녀야 한다는 결론이다.
1834년부터 쓰인 《고리오 영감》은 그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구간을 나타내는데, 이 작품을 기점으로 발자크가 인간 희극의 주요 특징, 등장인물을 다른작품에서 등장시키는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인간 희곡은 한 등장인물이 여러 작품속에서 등장한다는 점을 이해해야만 전체적인 윤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민중의 실제 모습’와 겨뤄야 한다는 인간 희극 소설 연작의 목표와도 연관이 된다. 그런 고로 실제 인생처럼, 우리가 알던 이들을 몇 년 동안 보지 못하다가 다시 만나듯, 한 작품에서 주인공이였던 인물이 몇 년 후 다른 작품에 조연으로 다시끔 등장한다. 그 결과, 실제 인생속에서 어떤 것도 끝이 나지 않는 것처럼, 이 소설은 “일상 생활에서 모든 이들에게 남아있는 신비로운 무언가를 복구하는”데 있어서 두각을 보인다. 마찬가지로 작가는 “프리퀼”이 애매모호하게 끝나는 것을 노리며, 《이브의 딸》에서 중년으로 그려졌던 배우 플로린의 젊은 시절을 《잃어버린 환상》에서 볼 수 있듯, 전작에서 성숙한 여인으로 만났던 이의 젊었을 적 모습을 다른 소설에서 보여준다.
인간 희극 계획이 진행되면서, 집필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1835-36년 쓰인 《골짜기의 백합》, 1837년의 《세자르 비로토의 영화와 몰락의 역사》, 뒤이어 1838년에 《뉘싱겐 가》, 1839년에 《시골의 신부》와 《베아트리스》, 1841년에 《위르쉴르 미루에》와 《미지의 사건》, 1842년에는 《가재잡이 여인》이 쓰였다. 《잃어버린 환상》은 1837년부터 1843년에 걸쳐 쓰였는데, 《창녀들의 영광과 몰락》 역시 1838년부터 1847년에 걸쳐 쓰였다. 이후 《종매 베트》 (1846)과 《사촌 퐁스》 (1847)이라는 두 권의 걸작이 등장했다.
작품의 전체적인 계획은 시간이 갈수록 새로 짜이고 증보되었는데, 1845년까지 145편이 예정됐었고 85편은 이미 쓰였다. 하지만 발자크의 건강은 악화되었고 그는 계획을 축소해야만 했다. 결국 작가 살아생전 인간 희극은 총 90편이 출판되었다.
진정한 디테일에 대한 열광.
천재적인 관찰력을 가진 발자크는 중요한 것들을 문서에 붙여놓았고 소설 속 줄거리에 나오는 장소들을 정확하게 묘사했으며 분위기를 더 살리기 위해 그 장소에 가거나 이야기 속에 나올 마을의 사람들을 인터뷰 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진실된 디테일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을 지녔으며 작중 무언가를 묘사할 때의 그의 문체는 환희의 지경이었다. 이것은 발자크 소설 속에서 인물들이 왜 그렇게 작품 속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가, 로망푀유통을 쓰던 외젠 쉬가 왜 발자크와 겨룰 수 없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그는 상세하게 도로를, 집의 외관을, 마을의 지형을, 인물들의 거동을, 목소리와 외모의 미세한 차이들을 묘사한다. 동시에 그는 무대 설계자이자 의상 제작자이며 연극 감독이다. “시공간에 대한 매우 특출난 관리로 발자크는 영상 문학(l'écriture cinématographique)을 발명했다..” 집 안의 가구와 골동품 모음, 디테일의 한계까지 묘사한 인물들의 의상ー가두리 장식, 천, 색깔같은ー의 세밀한 묘사는 마치 무대 설계자, 더 나아가 영화감독의 작업과도 같다. 인간 희극의 작가는 무대를 거의 광적인 정성으로 만들었으며 그의 소설을 극장에 옮기는 연출가들의 열광을 설명해준다. (오노레 드 발자크 작품의 영화화 참고) 그는 감옥 기능, 행정 업무, 사법 체계, 주식 투기법, 독점으로 얻는 시세 차익, 오페라 밤 공연과 음악의 효과 역시 동등하게 신경썼다.
그가 쓴 소설과 단편 전체를 통해 발자크는 후대 세대를 위해 일람표를 작성하는 그 시대의 증인이 되고자 했다. 그는 다른 고전 작가들이 무시한 일상생활의 실제성에 열중한다. 세밀함과 풍부한 관찰력덕에, 인간 희극은 오늘날 사회사적 증거의 가치를 갖고있으며 1815년부터 1848년까지 프랑스 부르주아의 출세를 보여준다. 이같은 이유로, 우리는 그를 사실주의 작가로 본다. 하지만, 이런 발자크의 천재성이 도를 넘었다며 보들레르는 규탄한다.
하지만 보들레르는 발자크의 “모든 것을 보고, 보여주고, 분별하고자 하는 과도한 야망에서 출발한 세부묘사에 대한 대한 그의 경이로운 애정”을 인정한다. 많은 비평가들은 “넘칠듯한 상상과 끝없는 풍부함, 셰익스피어 이후로 존재하지 않은 가장 풍요롭고 촘촘한 창조의 상상”이라며 발자크에게 경의를 표했다. 극한까지 밀어붙인 세부 묘사의 정확성으로 발자크의 사실주의는 격렬해지며 시각 이미지로 바뀐다. 어떤 이야기들은 환상적인 영감의 소관이나 다른 이야기들은 신비롭고 난해한 영감에 둘러쌓여있다.
발자크는 사회의 초상을 만들며 1833년 본인이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당대에 영향을 끼치고자 했다. 유럽문학의 1류인 바이런, 괴테, 스콧, 호프만과 같은 위치에 오르고자 했다.
소설 작업 방식.
인간 희극 문서의 해당 란 참고.
발자크는 작중 인물들을 모아놓은 진열실에서 인물을 꺼내와 이야기 속에다가 넣고, 그에게 단편을 요구하던 출판사의 요청에 응하기 위해, 거의 항상 여러 작품을 동시에 작업했다.
발자크의 작업 방식을 묘사하기 위해 앙드레 모루아는 "양식장에 있는 송어들처럼, 필요할 때면 그는 그것을 집었다. 가끔 그는 바로 좋은 결과를 보지는 못했는데 [...] 책이 자기 마음에 안들면 그는 그것을 다시 양식장에다가 던져버렸다. 그는 다른 것을 잡으러 간다."며 수백편의 소설들이 그의 생각속에서 흐르고 있음을 생각했다. 그는 소설의 제목을 바꾸거나 아니면 작중 인물의 이름을 바꾼다거나, 단편으로 먼저 출판된 글을 장편 소설 속에 합치며, 전작들을 개작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또한 그는 결정본에서 장 구분을 삭제하기도 했다.
언론인 발자크.
자신이 설립하고자 했던 적발 협회를 통해 문학과 정치 세계의 거장이 되는 꿈을 가끔씩 꾸던 발자크는 언론에 사로잡혔는데 왜냐하면 언론이란 것이 바로 현실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발자크는 동시에 언론인이라는 직업이 작가를 대표한다는 것의 위험성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는데, 그 이유를 대자면, 명령의 구속 아래 글쓰기를 강요받은 언론인들은 마치 “전쟁 속 병사처럼 전진하는 의견들”과 같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환상》에서, 그는 뤼시앵 드 뤼방프레가 “언론계에 도전할 것”이라며 선언할 때 소모임의 현인들이 말하도록 한다.
여자 관계.
쥘마 카로.
쥘마 카로(Zulma Carraud)는 발자크의 누이동생 로르의 어릴적 친구였다. 이 “고귀한 도덕적 가치의 여인, 강인한 금욕주의자”는 이수됭(Issoudun)에서 살았으며 결혼을 하여 아이가 있었다.
발자크는 그녀를 1818년부터 알게 되었는데, 그들은 1824년에 발자크의 누이 로르가 베르사유에서 둘의 만남을 주선해주기 전까지는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둘은 이 시절부터 편지를 주고받았겠지만, 첫 해의 편지들은 소실되었다. 이 편지에서 쥘마는 작가의 가장 가깝고 지속적인 친구 중 한 명으로 보여진다.
그가 채권자들로부터 뒤쫓기고, 과로하고, 낙담하고, 아픈 시절 그녀의 집으로 도피했다. 그녀는 공화파 이념을 그에게 상기시켰고 사람들의 고통에 더 공감할 수 있도록 초대했다. 그녀는 엄청난 부자가 아니었지만, 쉬지 않고 그를 돕기 위해 애썼다. 그녀는 발자크의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 여인들 중 하나였다.
아브랑테스 공작부인.
1825년, 발자크는 아브랑테스 공작부인의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발자크보다 15살 많았던 이 여성은 본인의 견문과 그와의 관계를 통해 그를 매료시켰다. 나폴레옹에 의해 공작 신분에 오른 쥐노 장군의 미망인이었던 그녀는 왕당파 사회에 드나들기 전, 제국의 호화로움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메테르니히 백작의 정부였다. 자신의 보석과 가구를 팔 수 밖에 없었던 그녀는 베르사유로 소박하게 이주한다.
발자크는 자기 여동생의 친구인, 베르사유에 살고 있던 여인을 통해 아브랑테스 공작부인과 만났다. 발자크는 그녀에게 홀렸다. 공작부인은 처음엔 그에게 우정만을 주었으나 나중가서 이 우정은 서로간의 사랑으로 바뀐다.
공작부인의 이름은 로르였지만, 발자크는 그녀를 오로지 마리라고만 불렀다. 그녀는 자신이 만난 인물들과 성 안의 삶에 대한 정보를 발자크에게 주었다. 한편으로 발자크는 그녀에게 회고록을 쓰는 것에 대해 조언하며 그녀가 쓴 글을 교정해주며 조언자의 역할을 했다.
아브랑테스 공작부인은 발자크가 그녀에게 헌정한 소설 《버려진 여인》에서 보세앙 자작부인의, 《La Maison du chat-qui-pelote》에서 카릴리아노 공작부인의, 페리시테 데 투슈의 몇몇 성격의 모델이 되었다. 발자크가 1829년 릴아담 근처의 마플리에에서 《La Maison du chat-qui-pelote》을 집필하고 있을 때, 아브랑테스 공작부인은 탈레랑페리고르와 함께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오로르 뒤드방 (조르주 상드).
1831년 발자크는 남편을 멀리하는 오로르 뒤드방을 알게 되었고, 파리에서 만날 기회를 가졌다. 발자크는 그녀에게 나귀가죽을 읽게 했는데, 이 책에 열광을 보였다.
1838년 2월 발자크는 노앙 성(château de Nohant)에서 “조르주 상드 동지”를 찾는다. 6일 동안 그들은 그 곳에 머물렀으며, “오후 5시부터 아침 5시까지” 잡담을 하며 밤을 보냈다. 그녀는 그에게 “물담배와 라타키 (터키의 향료담배)”를 피게 했다. 이 경험으로 그는 담배가 “커피 마시는걸 그만두게 하고 일하는게 자극이 될만한 것을 늘려줄 것”이라고 희망했다.
발자크는 지속적으로 그녀가 파리에 머물며 쇼팽과 사귀고 있던 살롱에서 그녀와 만났다. 그들은 소설 구조나 인물 심리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고 그녀는 가끔가다 <Les Galérienset Béatrix>나 <les Amours forcé>처럼 그녀가 다룰 수 없던 줄거리를 그에게 주었다. 그녀 역시 한 모음집에 발자크가 쓴 이야기가 너무 길어 출판사가 받아들이지 않던 원고의 작가가 되기도 했다. 발자크는 그녀를 《두 젊은 유부녀에 관한 기억》에 헌사했다.
작가의 동의로 그녀는 《베아트리스》에서 그가 실제하고 동일하게 묘사한 몇 안되는 여성 등장인물인 페리시테 데 투슈 (Félicité des Touches)의 모델이 된다. 한스카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발자크는 그녀와의 관계에서 우정 이외 다른 것이 있었음을 전면 부정한다.
올랭프 펠리시예.
1831년부터 발자크는 훗날 1847년 로시니와 결혼하기 전에 외젠 쉬의 약혼녀였던 “아름답고 지적인 화류계 여자(courtisane)”, 올랭프 펠리시에(Olympe Pélissier)의 살롱에 자주 다녔다. 그는 그녀와 짧은 관계(brève liaison)를 가진다.
플로린(Florine)과 튈리아(Tullia)같은, 인간 희극을 관통하는 화류계(demi-mondaines) 인물들은 그녀에게 많이 빚지고 있다. 《나귀 가죽》의 방 안에서의 장면은 올랭프네에서 발자크 자신이 행동했던 장면일 것이지만, 그녀는 푀도라(Fœdora)와 연관있진 않는데, 그녀는 그와 항상 친밀하고 헌신적인 관계를 갖는다.
발자크는 계속 그녀의 살롱에 드나든다. 단편의 푀도라에 관해서 발자크는 편지에서 “나는 그들의 내면에 들어가보지 않은 채 그저 알고만 있던 두 명의 푀도라를 만들었다. 이 관찰은 자신감을 넘어 내게 충분했다.”며 명확히 말했다.
카스트리 공작부인.
1832년이 시작할 무렵, 팬들이 그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들 가운데서 발자크는 문예 살롱을 주관하던 이마가 높은 적발의 미녀로 삼촌이 왕당파의 지도자였던 카스트리 공작부인 (duchesse de Castries)의 것을 읽었다.
바로 관심을 갖게 된 발자크는 그녀를 만나게 되고, 외모와 내면에서 그녀를 모델로 한 《서른 살의 여인》의 자필 원고를 그녀에게 보여줬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라면 쩔쩔매던 발자크는 엑스레뱅(Aix-les-Bains)에 있는 그녀의 성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그는 며칠간 글을 쓰며, 나중에 지속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될 제임스 로스차일드 남작을 만나게 된다.
그 후 그는 같은 해 10월 제네바에 그녀와 동행하게 되지만, 그녀와 감정을 공유하지 못한 것에 화가 나서 돌아오고 dilecta사랑을 통해 위로받는다. 그는 랑제 공작부인에서 사랑으로부터 받은 실망을 증언한다.
그녀 또한 《디안 드 모프리뇌스》Diane de Maufrigneuse의 등장인물로 재등장한다. 영국인 혈통을 가진 카스트리 부인은 《골짜기의 백합》의 등장인물, 아라벨 두들리Arabelle Dudley 부인에 부분적으로 영감을 주었다. 발자크는 그녀가 자기 지위에 맞지 않는 익살극이라 평한 《유명한 고디사르》를 그녀에게 헌정하는데, 그녀는 “포부르 생제르맹에서 가장 오래된 가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를 가끔 만났으며, 그를 메테르니히와 인터뷰할 수 있게끔 주선해준 것은 바로 그녀이다.
마리 뒤 프레네.
1833년에 발자크는 "천국의 꽃이 떨어진 것만 같은 순진한 창조물, 조용히 내 집에 와서, 편지나 정성을 요구하지도 않고 “일 년만 날 사랑해 줘! 난 평생 너를 사랑할게”라고 말한 친절한 사람"과 비밀스레 정사를 나눴다.
이 여인은 바로 마리 뒤 프레네("Marie du Fresnay")였는데 별명은 마리아로 24살에 발자크의 딸 마리카롤린 뒤 프레네("Marie-Caroline du Fresnay")를 임신 중이었다. 발자크는 1839년 이 젊은 여인에게 영감을 받은 히로인이 등장하는 소설 《외제니 그랑데》를 그녀에게 헌사하였다. 그는 또한 유언에 자기 딸을 언급했다.
여행.
발자크는 여행을 많이 다녔다. 그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다녀왔다. 발자크는 1846년 10월 13일 에벨리나 한스카의 딸, 안나 한스카의 결혼을 돕고자 비스바덴에 방문했다. 하지만 파리와 프랑스 지방들이 아닌 프랑스 국외에서는 일부 지방만이 발자크에게 영감의 원천을 주었는데, 오직 이탈리아만이 콩트와 철학 소설같은 자신의 여러 글에서 표현한 정열에 영향을 끼쳤다. 러시아에서는 오히려 그가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탈리아.
1836년 발자크는 그와 친분이 있던 귀도보니비스콘티 가의 대리인 자격으로서, 모호한 상속문제를 해결하고자 이탈리아 토리노로 갔다. 그는 젊은 남성으로 변장한 카롤린 마르부티와 동행했다. 여행은 짧게 끝났다. 1837년 2월 귀도보니비스콘티 가는 그에게 다른 임무를 위임했다.
말년과 죽음.
1845년부터 발자크의 작품 집필 속도는 늦어졌으며, 스스로도 편지에서 글을 쓸 수 없다고 한탄했다. 1847년 발자크는 자신의 창조 능력이 풍화되는 것을 느낀다고 인정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첫 대작 <나귀 가죽>의 주인공처럼, 발자크는 매우 젊은 나이에 이른 실폐를 예감한 것으로 보인다.
1848년 8월, 발자크는 마침내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우크라이나 방문에 쓰일 새 여권을 획득했다. 그는 10월 2일 그곳에 도착했다. 1849년 초 발자크는 놀랍지도 않게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다시 한번 자신의 지원을 거절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발자크는 여전히 한스카 백작부인과 결혼하길 원하였으나, 외국인과 결혼한 여성은 차르의 특별 칙령이 없는 한 재산을 자동적으로 상실하게 된다는 러시아 법으로 인해 두 연인의 상황은 복잡하였다. 허나, 차르는 무덤덤하게 이를 거절하였다.
우크라이나에서 머무는 것은 지친 작가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고, 건강 역시 악화되었다. 발자크는 심한 감기에 걸렸는데 이는 기관지염으로 번지고 말았으며, 숨은 갸빠졌다. 건강이 너무 좋지 않아 여행을 다닐 수 없었던 그는 몇 달간 휴식을 가졌다.
작품 연보.
인간 희극.
인간 희극을 구성하는 소설과 단편들은 크게 세 개로 묶을 수 있는데 풍속 연구, 철학 연구, 분석 연구로 묶을 수 있다. 풍속 연구는 다시 사생활 풍경, 지방 생활 풍경, 파리 생활 풍경, 정치 생활 풍경, 군대 생활 풍경과 전원 생활 풍경으로 나뉜다.
참고 자료.
발자크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유년 시절의 기억에서 평생 자유롭지 못했다. 자기보다 서른두 살이나 많은 남자와 사랑없는 결혼을 한 발자크의 어머니는 그가 태어나자마자 유모에게 양육을 맡기는가 하면, 겨우 여덟살 때 기숙학교로 보내진 뒤 6년 만에 쇠약해진 심신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를 찾지 않았다. 이러한 ‘불행한 기혼녀’와 그 여성이 지닌 냉정한 모성은 발자크 소설의 주요한 모티브가 된다.
파리에서 열여섯 살부터 법률 공부를 하면서 공증인 사무실의 서기로 일했으나 스무 살이 되던 해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가족에게 1년의 유예기간을 얻어 레디기에르 가의 누추한 다락방에서 예비작가의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발자크가 자신의 이름으로 작가적 명성을 얻기까지는 10년이란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희곡작가가 되려던 처음의 의도를 포기하고 가명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20대 초반, 스물두 살 연상의 베르니 부인을 만나 연인인 동시에 문학적 조언자로서 오랫동안 그녀를 의지처로 삼게 된다. 이 이외에도 발자크는 쥘마 카로를 비롯하여 다브랑테스 공작 부인, 카스트리 후작 부인 등 많은 여인으로부터 물질적, 정신적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많은 작품의 여주인공에게서 그 여인들의 단편적 초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이십대 중반에 시도한 인쇄업의 실패로 많은 빚을 지게 된 발자크는 평생 빚쟁이에 쫓기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지금은 ‘발자크의 집’이란 이름으로 박물관이 된, 당시 발자크가 기거했던 파시의 집 뒷문에 얽힌 일화는 유명하다. 오후 네시에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자정부터 다음날 낮까지 하루에 열여섯 시간씩 소설을 썼던 발자크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빚쟁이들을 피해 하녀이자 정부였던 브뤼뇰 부인의 도움을 받아 현재의 ‘포도주 박물관’으로 통하는 뒷골목으로 도망치곤 했던 것이다. 포도주 박물관의 한 켠을 이루고 있는 동굴에 등불을 든 발자크 상이 서 있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
이처럼 상상하기 힘든 작업의 결과 발자크는 본명으로 작품을 발표하여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1830년 무렵부터 마지막 소설 《가난한 친척》을 발표한 1848년까지 20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100여 편의 소설을 남길 수 있었다. 프랑스 낭만주의가 꽃을 피운 시대에 사실주의의 문을 연 발자크는 1841년 그동안 자신이 써낸 모든 작품과 앞으로 써낼 작품의 목록을 가지고 {인간희극}이란 총서를 기획한다. 피라미드 형태의 구조를 지닌 하나의 완전한 건축물을 꿈꾸었던 그는 뷔퐁의 박물학의 영향을 받아 여러 종의 동물들로 분화된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인간사회에도 각자가 속한 활동 영역에 따라 여러 가지 전형적인 인간이 존재함을 보여주고자 했다. 등장인물만 2천여 명이 넘는 《인간희극》은 대혁명 직후부터 1848년 2월 혁명 직전까지 프랑스 사회의 파노라마를 정치, 경제, 사회적 영역 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내밀한 사적 영역까지 넘나들면서, 또한 파리 뿐만 아니라 지방과 시골까지 아우르면서 어느것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록하고자 한 발자크적 야심의 산물이다. 비록 계획했던 작품들로 온전히 채워지진 못했지만 《인간희극》은 프랑스 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역작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중에서도 《외제니 그랑데》를 포함하여 《고리오 영감》, 《사촌 베트》, 《골짜기의 백합》, 《마법 가죽》, 《루이 랑베르》, 《사라진 환상》, 《샤베르 대령》, 《세라피타》, 《미지의 걸작》 등이 많이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고리오 할아버지> <골짜기에 핀 백합> <사촌 누이 베트> 등이 유명하다. 그는 프랑스 자연주의 소설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빚에 쫓기는 형편과는 별개로 스스로 ‘문학의 나폴레옹’이 되고자 했던 발자크는 글을 쓰기 위해 하루에 40잔 가까이 커피를 마신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런 극단적인 과도함은 그에게 돌이키기 힘든 심장질환을 안겨준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열정적인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발자크의 삶은 작가적 재능을 위해서도, 또 어렵게 얻은 사랑을 위해서도 지나치게 빨리 소진되어 버린다. 익명의 여성독자로부터 받은 한 통의 편지에서 시작된 한스카 부인을 향한 발자크의 한결같은 사랑은 그녀의 남편이 사망한 뒤에도 8년이나 기다린 끝에 가까스로 결실을 맺는다.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녀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는 단순한 사랑의 증표를 넘어 발자크 문학세계의 세세한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그만큼 한스카 부인은 발자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는 여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발자크는 그녀와 결혼한 지 불과 5개월 만인 1850년 8월 18일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고 만다. |
2945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945 | 알바 롱가 | 알바 롱가(Alba Longa)는 고대 로마의 로물루스 신화에서 언급되는 지방의 명칭이다. 이 지방 이름이 역사적으로 실존하였는가 라는 물음은 고고학계에서 한동안 토론되었으며, 오늘날 알바 롱가는 로마의 남동쪽에 위치했던 지방으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리비우스의 건국사("Ab urbe condita" 1.1-1.3)에 따르면 트로이의 장군 아이네아스("Aeneas")는 트로이가 고대 그리스 동맹군에 의해 함락된 후 (→ 트로이 전쟁), 그를 따르는 부족들과 함께 이탈리아 반도로 피신하여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다. 트로이 부족이 정착한 곳에는 이미 이탈리아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으며, 얼마안가 두 부족은 정복전쟁을 하였다. 라티누스("Latinus")를 족장으로 하는 이탈리아의 원주민은 트로이 부족에게 패배한 후 이들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아이네아스는 라티누스의 딸 라비니아("Lavinia")를 처로 맞아들였으며, 트로이 부족의 새로운 도시 이름을 처의 이름을 따서 라비니움("Lavinium")이라 불렀다.
아이네아스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아스카니우스 1세는 라비니움을 떠나 로마의 남동쪽에 위치한 알바 산기슭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알바 롱가라 불렀다. 로마의 초기 건국사는 분분적으로 전설적 색체를 띠고 있다. 특히 트로이의 후손과 이탈리아 원주민의 융화와 그리고 여기에서 비롯되는 로마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 잘 그려져 있다. |
2947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947 | 호메로스 | 호메로스(, , 기원전 8세기경)는 고대 그리스 중 그리스 암흑기 말기에 활동했던 유랑시인이다.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어로 쓰인 가장 오래된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및 그 밖에 여러 시의 작가이며, 맹인 시인으로 알려졌다. 그의 정확한 생몰 년대는 미상이고, 실존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영어식 이름인 호머(Homer)로도 알려져 있다.
실존 인물 논란.
고대 그리스의 적인 음유 시인 오르페우스의 후손이라 하나, 그의 가계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20세기 초반까지 호메로스는 교과서에 약 기원전 750년경 고대 그리스의 이오니아 지방에서 활동하던 이른바 유랑시인으로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그의 작품이라고 나왔었다. 그러나 고전문헌학계에서는 호메로스와 그의 작품에 관한 많은 의문점이 제기되었다.
호메로스에 관해서는 예부터, 특히 18세기 이래 학계에서 계속되고 있는 논쟁이다. 그 쟁점은 호메로스라고 하는 시인이 있어, 그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만들었는가의 여부이다. 처음에는 실존을 인정했으나, 근대에 와서의 단서는 독일의 고전학자 볼프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가운데 모순이 굉장히 많다는 것(한 번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영웅이 후에 다시 전사하는 등)에 착안하면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차츰 논쟁이 극단으로 나가 드디어는 “호메로스라는 시인은 실재하지 않았다. 다만 짧은 시가 있었을 뿐으로 이것이 시대의 흐름과 함께 집대성되어 호메로스의 시가 이루어졌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시 호메로스의 실존을 긍정하는 견해가 유력해고 있다. 《일리아스》로 하여금 세계 최고의 서사시가 되게끔 만들고 있는 예술적 통일은 한 사람의 위대한 시인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호메로스 논쟁.
호메로스 논쟁은 호메로스의 정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저자, 그리고 이 작품들의 역사성에 대한 의문과 토론에 관한 것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 고전과 헬레니즘 시대의 학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를 연구하는 호메로스학 학자는 17~20세기에 특히 많았다. 호메로스 논쟁의 주요 주제는 다음과 같다. 이 실존인물 논쟁은 고대 그리스 시절인 기원전 5세기와 기원전 4세기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포함한 대부분의 그리스 학자들도 제기한 바 있다. 이 논쟁은 아래와 같다.
이 질문들의 대답 여하에 따라 몇가지 고고학적 해답의 가능성이 더해진다. |
2948 | 8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948 | 호머 | |
2951 | 32517563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951 | 일리아스 | 《일리아스》() 또는 일리아드(Iliad)는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 문학의 가장 오래된 서사시이다. 이름은 트로이인들의 왕성인 ‘일리온’에서 유래하였다. '일리아스'란 이름은 '일리온의 노래' 란 뜻이다. 오디세이아(Odysseia)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와 후대 서양의 문학예술과 문화의 전범(典範)으로 여겨지고 있다. 저자는 호메로스라고 알려져 있다.
일리아드(Iliad)는 고대 그리스의 작가 호메로스가 지었다고 하는 그리스 최고(最古)ㆍ최대의 영웅 서사시이다. 10년에 걸친 그리스군의 트로이 공격 중 마지막 해의 50일 동안 일어났던 사건을 노래한 것으로, 모두 1만 5693행으로 되어 있다.
주제는 그리스의 전설적인 전쟁인 트로이아 전쟁을 배경으로 51일간의 사건을 노래한 것으로 그리스의 장군인 아킬레우스가 중심이 되어 원한과 복수에서 파생되는 인간의 비극을 다뤘다. 9년 동안 계속된 전쟁의 상황과 전쟁에 관여하는 올림포스의 신들, 장수들의 이야기 등을 위주로 한다. 이야기 전개에 따라서 시는 24편으로 나뉘며, 그리스의 대표적 시운중의 하나인 6각운(Hexameter)으로 작곡되었다. 각 권마다 그리스 문자의 24 알파벳 순서로 이름이 붙어있다. 그리스 문학의 대부분이 운명론에 따른 체념이나 절망을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정해진 운명에 굴하지 않고 영광된 죽음을 택하는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
전통적으로 호메로스(기원전 8세기)가 작자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연구는 구전되어 내려오던 이야기를 호메로스가 후대에 전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밀먼 페리는 "호메로스가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처음 제시했다. 그는 그의 서사시의 구조를 보면 구전이 되기 좋도록 되어 있다고 보고, 호메로스가 혼자 글을 쓴 것이 아니라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를 문자화했다고 본다.
줄거리.
아킬레우스의 분노: 아가멤논이 아폴론 사제의 딸, 크뤼세이스를 모욕한 죄과로 아카이 진영(고대 그리스 동맹군)에 전염병이 번진다. 총지휘관 아가멤논은 공개 회의에서 아킬레우스와 격한 말다툼 끝에 그의 애첩 브리세이스를 강제로 빼앗음로써 또한 아킬레우스를 모욕하게 된다. 분노에 사로잡힌 아킬레우스는 앞으로 트로이군과의 전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공언한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는 아들의 부탁에 따라 제우스를 은밀히 찾아가 아카이아군이 패배하도록 요청하여 그의 허락을 받아낸다.
아가멤논은 제우스가 보낸 꿈에서 트로이아가 함락되는 것을 본다. 이 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가멤논은 장군들과 토론 끝에, 전체 군사회의를 소집한다. 네스토르와 오디세우스는 열띤 논쟁을 벌이며, 아카이아군은 트로이 정복을 포기하고 귀향하자는 의견에 마음이 솔깃해지지만, 신들의 영향하에 있는 오뒷세우스의 강한 반대와 건의에 따라 트로이군과 빨리 결전을 치르자는 데에 합의를 본다.
시의 후반(484-877 이른바 전함 카탈로그)은 전쟁에 참가한 아카이아군과 트로이아군의 지방, 도시 그리고 지휘관들을 노래하고 있다.
트로이아군과 아카이아군은 들판으로 나가 전투를 위해 진을 친다. 그러나 트로이아의 장군 파리스는 홀로 양 진영 사이에 나서서 자신과 단판을 할 아카이아 용사는 앞으로 나오라고 소리친다. 아카이아군 진영에서 마땅한 도전자를 찾고 있을 때를 같이하여 트로이아의 왕 프리아모스는 헬레나를 망루에 불러내어 아카이아의 장군들에 관해 이야기를 듣는다. 마침내 파리스는 헬레나의 (전)남편 메넬라오스와 일대일 결투를 벌인 끝에 패배하며, 아프로디테에 의해 목숨을 건진다. 그리고 헬레나는 여신의 강요로 파리스가 쉬고 있는 침소로 가 그를 약간은 핀잔을 주면서 위로한다.
제우스를 중심으로 올림포스의 신들은 트로이전쟁의 앞날에 관한 문제를 놓고 회의를 한다. 아카이아군의 편을 드는 헤라의 요구로 아테나는 판다로스를 꾀어 메넬라오스에게 활을 쏘아 부상을 입힘으로서 이 전에 맺은 협약을 깨친다. 트로이아군의 간계에 분격한 아가멤논은 곧바로 전투 태세를 갖추도록 아카이아 장군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장군들이 이끄는 부대의 열병식을 끝마친 후 아카이아군은 드디어 트로이아 진영으로 공격해 들어간다.
디오메데스의 무공과 아테나의 도움으로 아카이아군은 트로이아군을 궁지에 몰아 넣는다. 디오메데스는 선두에 서서 만나는 졸개들을 모조리 물리친 후 메넬라오스를 부상시킨 판다로스와 그를 지원하는 아이네아스와 대결한다. 먼저 창을 던져 판다로스를 단숨에 꺼꾸러뜨린 다음 아이네아스에게는 바윗돌을 집어던져 기절을 시킨다. 죽을 지경에 놓인 아들을 구출하기 위해 아프로디테가 끼어들지만 성난 황소 같은 디오메데스에게 손에 부상을 입고 도망친다. 아이네아스는 결국 아폴론에 의해 구출되며, 아폴론은 아테나가 잠시 전장을 비운 틈을 타 트로이아군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또한 아레스가 트로이군의 편을 듦으로써 아카이아군이 궁지에 몰린다. 이를 지켜본 헤라는 다시 아테나를 시켜 아카이아군을 돕도록 한다. 다시 디오메데스는 아테나의 힘을 등에 업고 아레스와 맞붙어 싸운다
트로이아군과 아카이아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틈에 헥토르는 동생 헬레노스의 간청에 따라 성으로 돌아가 아낙네들로 하여금 아테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도록 권유한다. 이 사이에 전장에서는 트로이아 장군 글라우코스와 아카이아 장군 디오메데스는 서로 족보를 묻고는 서로의 조상이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기뻐하며 싸움을 그만두고 가지고 있던 무기를 우정의 표시로 교환한다. 헥토르는 트로이아 성에서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있는 동생 파리스를 만나 핀잔을 준 뒤, 남편을 찾아 어린 아들 아스튀르낙스를 품에 안고 이리저리 헤메는 아내 안드로마케를 성문 근처에서 만나 눈물어린 이별의 대화를 나눈다. 이는 일리아스에서 묘사된 가장 유명한 이별 장면이다.
아테나와 아폴론은 헥토르에게 아카이아의 가장 용맹한 장수와 일대 일로 싸우게 부추긴다. 텔라몬의 아들, 큰 아이아스와 헥토르는 일대 일로 결투를 벌인다. 밤이 되어 양쪽 군대가 갈라지고 네스토르가 전사자들을 화장할 수 있도록 휴전을 맺고 아카이아 인들의 선단 주위에 방벽을 쌓도록 권유한다.
제우스는 아킬레우스를 위해 아가멤논에게 복수해 주겠다고 한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른 신들에게 이 전쟁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한다. 이에 다른 신들도 아카이아 군이나 트로이군을 도와주지 못한다. 제우스는 이데산으로 가서 아카이아인들에게 패배를 트로이아 인들에게는 승리의 영광을 내린다.트로이군은 승리하고 밤이 되자 승리에 도취된 헥토르는 아카이아군의 진영앞에서 야영을 한다.
전세가 많이 불리해지자 아카이아 군은 전쟁을 접고 귀국하려고 한다. 아가멤논은 귀국을 하려고 하지만 디오메데스와 네스토르는 이에 반대한다. 아가멤논은 네스토르의 조언에 따라 아킬레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아킬레우스와 화해하려고 하였으나 아킬레우스는 이를 단호히 거절한다.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다른 장군들을 깨워 파수병들을 돌아보게 한다. 디오메데스와 오디세우스는 트로이군의 정탐군인 돌론을 죽이고 트로이군의 진영에 몰래들어가 트로이군을 정탐한다.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우스는 정탐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트라키아인들의 진영을 급습하고 말들을 빼앗아 돌아온다.
새로운 날이 밝자, 아가멤논은 무장을 갖추고 전쟁터로 군사들을 이끌고 나온다. 그는 용감히 싸웠지만 부상을 입고 디오메데스도 역시 부상을 입고 선단으로 돌아간다. 혼자서 고군분투하던 오디세우스가 적군에게 포위당하자 아이아스가 그를 구해준다. 역시 오디세우스도 부상을 당하고 아카온과 에우리필로스도 부상을 당해 선단으로 물러난다. 네스토르가 마카온을 싣고 돌아오는 것을 보고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를 보내 네스토르가 싣고 온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한다.
아카이아군은 트로이군에 쫓겨 방벽안으로 밀려들어가고 헥토르는 방벽을 공격한다. 두 명의 아이아스가 이에 맞서서 항전을 독려한다. 리키아의 두 장군 글라우코스와 사르페돈이 방벽을 맹렬히 공격하다가 글라우코스는 부상을 당해 물러가고 사르페돈이 격국 방벽을 허물고 만다. 헥토르가 돌로 쳐서 방벽의 문을 부수자 트로이군은 방벽을 넘어 문을 지나 물밀듯이 아카이아 진영으로 쳐들어 간다.
아카이아 군의 선단을 둘러싸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포세이돈은 제우스 몰래 아카이아인들을 도와주며 격려한다. 맹렬하게 공격하는 헥토르를 맞아 두 아이아스가 무너진 방벽 근처에서 선전하고 전선의 왼쪽에서는 이도메네우스와 메리오네스가 아이네이아스와 파리스 등을 맞아서 분투한다.헥토르는 풀리다마스의 조언에 따라 군사들을 한쪽으로 집결시켜서 맹렬히 공격을 퍼붓는다.
네스토르가 마카온을 대접한 다음 다시 싸움터로 돌아가다가 부상당한 아가멤논, 디오메데스, 오디세우스와 마주친다. 아가멤논은 철군을 주장하는데 오디세우스가 반대한다.
한편, 헤라는 잠의 신의 도움으로 제우스를 이데산에서 잠재우는 데 성공한다. 이틈을 타서 포세이돈은 아카이아 인들을 도와주는데 큰 아이아스가 던진 돌에 헥토르가 맞고 부상당하여 물러나게 되고 이를 기회로 아카이아인들이 공세를 시작하여 트로이군이 후퇴한다. 작은 아이아스는 큰 공을 세운다.
제우스는 잠에서 깨어나자 헤라에게 크게 화를 낸다. 이리스를 포세이돈에게 보내 싸움에 개입하지 말라고 종용하고 아폴론을 헥토르에게 보내어 그를 회복시키게 한다. 헥토르가 회복하고 다시 전장으로 나가 아폴론의 도움을 받아 아카이아 인들을 맹렬히 공격하자 아카이안인들은 결국 맨 앞쪽의 선단으로부터 후퇴하기 시작한다. 큰 아이아스는 해전(海戰)에 쓰는 긴 창을 들고 홀로 분전하지만 중과부적으로 결국 트로이 군은 맨 앞쪽에 있던 프로테실라오스의 배애 불을 지른다.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무장을 입고 출전하여 트로이 군을 선단에서 몰아낸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에게 트로이군을 선단에서 몰아내기만 하고 돌아오라고 일렀으나 파트로클로스는 이를 무시하고 도망하는 트로이군을 쫓아진격한다. 파트로클로스는 추격전에서 사르페돈을 죽이는 등 혁혁한 공을 세우지만 결국 헥토르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파트로클로스의 시체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아카이아 군과 트로이군과의 일전일퇴의 격전이 벌어진다. 헥토르가 파트로클로스에게서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벗겨 자신이 입고는 더욱 맹렬한 공격을 가한다. 메넬라오스가 안틸로코스를 보내 파트로클로스의 전사소식을 아킬레우스에게 알리게 한다. 두 명의 아이아스가 분전하는 동안 메넬라오스와 메리오네스가 파트로클로스의 시체와 귀환한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분노한다. 테티스는 아킬레우스를 위해 새로운 갑옷과 방패를 만들어주도록 헤파이스토스에게 부탁하겠다고 약속한다. 헥토르가 다시 파트로클로스의 시체를 다시 탈취하려고 공격하는 순간 아킬레우스가 무장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나와 크게 고함을 지르자 트로이 군이 놀라서 도망친다. 밤이 되자 풀리다마스는 헥토르에게 아킬레우스가 출전하기 전에 트로이아 군을 성 안으로 철수 시켜야 한다고 조언하지만 헥토르는 이에 따르지 않는다. 아카이아 군은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애도하고 헤파이스토스는 테티스가 부탁한 아킬레우스의 새 무장을 만들어준다.
날이 밝자 테티스는 아킬레우스에게 새로운 무장을 가져다 주고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는 모든 아카이아 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해한다. 오디세우스의 권고에 따라 모든 아카이아 인들은 아침을 먹고 아킬레우스를 따라 전쟁터로 향한다. 출정하기 전에 아킬레우스의 준마 크산토스가 헤라의 힘을 입어 인간의 음성으로 아킬레우스가 오늘은 승리하지만 결국 전사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무시하고 전쟁터로 나간다.
제우스는 아킬레우스가 당장 트로이 성을 함락하지 못하도록 여러 신들이 전쟁에 관여하는 것을 허락한다. 아폴론이 아이네이스를 부추겨 아킬레우스에게 맞서게 한다. 여러 신들은 각자 자신들이 응원하는 측으로 갈라선다. 아이네이스가 위험해지자 포세이돈은 그를 구해준다. 아폴론은 헥토르에게 싸움에 나서지 말 것을 권고하지만 헥토르는 이를 무시하고 동생 폴리도로스의 죽음에 화가 나서 아킬레우스에게 맞선다.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에게 거의 죽음을 당할 뻔하는데 아폴론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난다. 아킬레우스는 도망치는 트로이군을 크게 무찌른다.
트로이 군의 일부가 스카만드로스 강에 빠져 헤어나오니 못하는데 아킬레우스가 칼을 빼들고 뒤쫓아가서 닥치는 대로 죽이고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대한 제물로 삼기위해 12명의 젊은 군인을 생포해 온다. 강의 신이 화가 나서 아킬레우스를 들판으로 추격하나 헤파이스토스가 불로 강의 신을 물리친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 군을 성안으로 모두 몰아넣는다.
헥토르는 프리아모스 왕과 헤카베 왕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문앞으로 나가 아킬레우스와 일전을 기다린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는 쫓고 쫓기다가 트로이 성을 세바퀴나 돈다. 제우스는 헥토르의 파멸을 결정하고 아폴론은 헥토르를 도와주지 못한다. 아테나가 데이포보스로 변하여 헥토르로 하여금 아킬레우스에게 대항하도록 유도한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이고 그 시체를 전차에 매달고 돌아간다. 헥토르의 부모와 아내는 성벽 위에서 통곡한다.
파트로클로스의 혼령이 밤에 아킬레우스에게 나타나 자신의 장례를 치러줄 것을 요청한다. 아침이 되자 아카이아 군은 나무를 해와서 파트로클로스를 화장한다. 그 다음날 화장터 위에 봉분을 만들고 아킬레우스 주최아래 장례 경기가 벌어진다.
아킬레우스가 뜬 눈으로 밤을 세우고 나서 헥토르의 시체를 끌고 파트로클로스의 무덤을 돈다. 제우스는 테티스를 보내어 헥토르의 시체를 욕보이지 말고 돌려주라고 명령하면서 이리스를 프리아모스에게 보내어 몸값을 내고 아들의 시체를 찾아가라고 조언한다. 프리아모스는 제우스가 보내준 메시지를 믿고 길을 떠나 헤르메스의 안내를 받으면서 무사히 아킬레우스의 막사에 도착한다.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에게 아들의 시체를 인도하고 헥토르의 장례기간동안에는 휴전하겠다고 약속한다. 프리아모스는 헥토르의 시체를 거둬가 장례를 성대하게 치른다. |
3207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07 | 적도좌표계 | 적도 좌표계는 망원경을 통한 천체 관측에서 사용되는 좌표체계이다. 적도 좌표계에서는 측량되는 각도로는 적위와 적경 그리고 시간각이 있다.
적위/적경.
적위는 지구의 위도와 비슷한 개념이다. 천구의 적도를 0º, 천구의 북극을 +90º, 천구의 남극을 -90º로 둔 각도로 천체를 지나는 시간권을 따라 그 천체까지 잰 각이다.
적경은 춘분점을 기준으로 천체가 속한 시간권까지 반시계방향으로 잰 각이다. 적경은 춘분점으로부터 동쪽으로 0~24시로 나타낸다.
시간각.
시간각은 남중 자오선에서 천체가 속한 시간권까지 천구의 적도를 따라 시계방향으로 잰 각을 말한다. 항성시를 구할 때 주로 사용하며 남중한 별의 시간각은 0시이다. |
3208 | 1945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08 | 르네상스 | 르네상스(, , ) 또는 문예 부흥(文藝復興), 학예 부흥(學藝復興)은 유럽 문명사에서 14세기부터 16세기 사이 일어난 문예 부흥 또는 문화 혁신 운동을 말한다. 과학 혁명의 토대가 만들어져 중세를 근세와 이어주는 시기가 되었다. 여기서 문예부흥이란 구체적으로 14세기에서 시작하여 16세기 말에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 예술 전반에 걸친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재인식과 재수용을 의미한다. 옛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 사상, 예술을 본받아 인간 중심(人間中心)의 정신을 되살리려 하였다. 이 점에서 르네상스는 일종의 시대적 정신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유럽은 르네상스의 시작과 더불어 기나긴 중세시대의 막을 내렸으며, 동시에 르네상스를 거쳐서 근세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르네상스의 정신, 혹은 운동은 이탈리아에서 비롯되었으며, 얼마안가 알프스를 넘어 유럽의 다른 국가, 즉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독일, 스페인 등지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나라들은 이 운동에 거의 영향을 입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세기 초 이 운동의 인문주의자들이 종교 개혁의 원동력이 되어 교회 개혁과 학문적 방법에 영향을 주었다.
개념의 확립.
이탈리아어로 Il Rinascimento(Rinasimento)라는 어원을 가진 이 말은 프랑스 역사가인 미슐레가 프랑스어인 Renaissance라는 말로 확립시켰으며 이것이 영어에서도 그대로 사용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원 의미는 “재생”(再生, rebirth)이라는 뜻으로 르네상스라는 개념에 포함된 재생이라는 의미는 두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고전 텍스트의 재발견이며 또 하나는 유럽 문화에 생기를 불어넣은 것 자체이다. 흔히 두 번째 의미로 사용된다
르네상스라는 명칭이 개념화되기까지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겪었다.
1975년 이후 많은 학자들은 르네상스가 하나의 특정한 운동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관점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해스킨스등과 같은 역사가가 ‘12세기 르네상스’나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불렀던 작업들 때문에 생긴 발상이다. 지금은 이런 관점이 학자들 사이에 많이 보편화되어 ‘이탈리아 르네상스’, ‘영국 르네상스’ 등 다양한 용례들이 쓰이고 있다. 이러한 관점의 등장으로 요즘에는 ‘르네상스 시기’라는 말이 ‘근대 초기’라고 대치되어 쓰이는 경우가 많다. 르네상스라는 말의 조어력은 점차 커져서 어떤 시기의 전성기나 융성기를 할렘 르네상스나 샌프란시스코 르네상스 등과 같이 은유적으로 르네상스 시기라고 부르는 일이 많아졌다.
다양한 관점.
르네상스라는 말이 19세기에 만들어진 이후 르네상스 시기는 다양하게 해석되어왔다.
부르크하르트 시대에는 르네상스가 명백한 시대구분이라고 생각되었으나 게르만계 학자들의 중세 재평가 작업에 의해 르네상스의 특징이 사실은 중세에서도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 르네상스 시대에는 점성술이나 마술 등 비이성적, 비과학적인 태도가 여전히 많이 남아있었다. 즉 중세와 르네상스를 명확히 나누는 것은 어렵다는 말이다. 르네상스가 근대의 시작인가 아닌가의 논쟁은 아직 계속되고 있다.
전통적인 관점은 15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중심이 되어 전 유럽으로 확산된 흐름이라고 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아랍의 지식을 흡수하고, 경험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고, 현세지향적이 되고, 인쇄술의 발달로 지식이 확산될 토양을 확보하고, 예술에서 새로운 기법과 실험을 시도하게 되는 등의 변화를 말한다. 이 관점은 르네상스 시기에 유럽이 암흑기에서 벗어나 대항해시대로 상징되는 경제성장 시기로 진입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종종 근대의 시작으로 간주되곤 한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르네상스를 미술, 문학, 철학 등이 변화된 유사혁명 정도로 본다. 오직 극소수의 가진자들에게만 의미가 있었을 뿐 대부분의 유럽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중세였다는 관점이다.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은 르네상스가 실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지적, 이념적 변화 정도로 본다. 더 나아가 중세의 부정적인 특징인 가난, 무지, 전쟁, 종교/정치적 박해 등은 마키아벨리와 종교전쟁, 마녀사냥의 시대인 16세기에 더 심해졌다고 보고 있다. 19세기에 르네상스에 대해 적었던 학자들은 르네상스 시기의 민중들이 황금시대에 살았던 것처럼 묘사하여 지금까지도 그런 이미지가 남아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르네상스 시기의 작가, 화가 그리고 그들의 후원자들이 민중들의 고통과는 관계없이 자신들은 중세의 암흑기를 끝내고 새 시대를 열고 있다고 믿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호이징가는 르네상스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긍정적인 변화였는가에는 의문을 품었다. 그는 르네상스는 중세 말기에 불과하며 오히려 그 시기에 파괴된 것이 더 많지는 않은가 하는 문제제기를 하였다. 예를 들어, 라틴어는 르네상스 시기까지 자연적인 변화를 겪으며 사용되던 살아있는 언어였는데, 고전 순수주의라는 강박관념으로 화석화시켜버린 것이다. 로페즈는 르네상스 시기가 경제 침체기였다고 보았다. 사턴과 손다이크는 르네상스 시기에 과학혁명이 지연되었다고 보았다.
르네상스의 역사.
르네상스를 시간적, 지역적으로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다. 여러 곳에서 점진적으로 시작된 것이며 마찬가지로 중세가 언제 어디서 끝나는지도 얘기할 수 없다. 보통 시작된 장소로는 이탈리아 중부 피렌체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직접적으로 전해진 로마제국의 제도를 유지하며, 서유럽 지역보다 훨씬 풍부한 문화와 문명을 지녔고, 헬라어를 사용하며 고대 그리스 문화를 계승 발전 시켰던 비잔틴제국, 동로마 제국의 붕괴가 있다. 이로 인한 일련의 사건들로 전쟁을 피하기 위해 서유럽으로 왔던 비잔틴 출신 학자와 기술자의 유입과 그들이 지니고 온 책자의 번역, 비잔틴 지역에서 탈취한 문헌과 책들을 유통시킨 유럽과 중동지역 출신의 대규모 도서 거래상의 활동들이 큰 영향을 주었다.
이탈리아는 지리적으로 이슬람 세계, 비잔틴 세계와의 접촉을 유지하여 서유럽과의 가교 역할을 해왔다. 11세기 이후 상업의 발달과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도시의 활성화로 도시는 점차 도시국가 형태의 자치도시가 되었다. 13세기 말의 경제성장기에는 사회계층의 변화가 심해져서 특유의 시민문화가 형성되었는데 도시국가는 그 특성상 고대의 도시국가와 유사한 점도 있어 로마법이나 정치제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조건들은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발생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초기 르네상스를 제현인물로 피렌체 출신의 '단테'가 있다. 그는 정적에 의해 추방당해 유랑생활을 하던 중 대표작인 '신곡'을 완성했다.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지옥, 연옥의 안내인으로 등장시키는데, 영혼의 정화를 통해 천국으로 승천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고전문학과 가톨릭을 조화시켜 대 서사시를 그려내었다.
단테보다 후대 사람인 페트라르카는 로마 제국 시대에 인간이 최고의 것을 성취했고 그 이후 점차 부패하여 중세 암흑시대까지 이르렀다고 보았다. 그는 역사를 종교적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사회 문화적인 진보로 간주했으므로 그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유산을 재발견하여 "재생"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전문헌을 모으고 라틴어로 시와 책을 쓰다가 이런식으로 고전 교양을 모아 인간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사색하는 방식을 '인문주의'라고 불렀다. 그는 속어로 책을 쓰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온고지신적인 태도는 이후의 예술, 과학 등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페트라르카는 '리비우스'의 역사와 '키케로'의 도덕철학에 관심을 보였고 최초의 인문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회화에서 최초의 르네상스인으로 평가받는 사람은 '조토'이다. 그는 시공간을 다룸에 있어 고대의 스타일을 원용하였다. 법률에 있어서는 '볼로냐 대학'을 중심으로 '로마법'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는데 그 체계화를 이룬 사람은 '바르톨루스'다.
이러한 움직임은 1348년의 흑사병과 각종 정치적인 격변으로 더이상 꽃피지 못했다. 이러한 인문주의가 다시 꽃피게 되는 것은 15세기가 되어서였다.
르네상스의 시작점을 오스만투르크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1453년)에서 찾는 관점도 있다. 그것은 대포와 화약이 전쟁의 중심으로 들어온 전환점이 된 전쟁이었고 동로마 제국, 그리스 학자들은 그리스 로마의 문헌들을 가지고 로마로 도망쳤다. 이들은 이탈리아에 새로운 에너지를 주었으며 유럽의 오래된 종교적 질서가 붕괴되는 것에 일조하였다.
잉글랜드 르네상스.
르네상스가 영국에 들어왔을 때는 엘리자베스 1세 때이며, 윌리엄 셰익스피어, 에드먼드 스펜서, 토머스 모어 같은 작가들을 배출해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성립.
14세기~16세기까지 이탈리아 도시들이 무역을 통해 경제력을 키웠다. 피렌체, 베네치아, 피사, 밀라노 같은 도시에서는 이러한 경제력으로 자치권을 사들여, 영주나 교황의 간섭에서 벗어났고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신도 인간처럼 표현하던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를 다시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예술과 문학에 나타난 이러한 새로운 기운을 르네상스라 한다. 특히 르네상스 미술은 이탈리아 피렌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로마와 베네치아에서 전성기를 맞은 후 유럽 전역에 전파되었다.
인문주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인문주의 곧 신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생각이 바뀌는 지적 흐름과 이탈리아 중북부가 도시주 형태의 자치상태에 놓여있었다는 점과 관계가 깊다. 당시 피렌체는 지중해 무역으로 번영하여 토스카나지방의 중심지였고 14세기경부터 교회, 이슬람 세계, 동로마 제국 등의 고전문화에 영향받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이다.
건축.
이탈리아에는 고대 유물이 많았고 따라서 조각가, 건축가 등이 고대 로마의 것을 공부하는 것이 가능했다. 건축에서는 브루넬레스키가 르네상스를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당시 건축에 애를 먹고 있던 피렌체 대성당의 큰 돔을 올리는 데 성공하여 명성을 얻었다. 이후 건축가 브라만테 등이 나타나 르네상스 건축을 이어나간다.
회화.
회화에서는 마사초가 그 서막을 열었다. 그의 자연주의적 태도는 이후 프란체스카, 베로키오 등의 원근법, 해부학 등으로 이어진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인간은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 유명한데 그는 건축, 회화를 넘나드는 방대한 저술로 인문주의자의 한 전형이 되었다. 이후 미켈란젤로, 다빈치, 라파엘로 등의 박식가들이 뒤이어 회화, 건축, 조각 등에서 다방면의 재능을 드러내었다.
조각.
15세기 초엽, 그 때까지 그 본질에 있어서 중세적 양식을 답습하고 있던 이탈리아 조각은 종래에 볼 수 없었던 두 개념, 즉 고전 형식의 재현과 적극적인 사실(寫實) 표현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고전 예술에 대한 관심은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이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서 중시하는 고대 사상과 그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유래한다. 그 반면에 휴머니즘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정신을 불러일으켜, 북방에 있어서 중세 예술의 말기를 장식하는 자연주의로 나아갔다. 같은 자연주의라 할지라도 15세기에 있어서 자연에의 접근은 중세와 달라서 직관적이기보다는 과학적이었고, 종합적이기보다 분석적이며, 신의 질서를 상징하는 것보다 자연 바로 그것을 위하고, 세계의 기존 사실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나체상이 또다시 주제로 채용된 것은 그 표현이다.
음악.
음악은 르네상스 시기의 강력한 교황들의 후원으로 발전할 수 있었는데 시스티나 성당의 성가대는 전 유럽의 음악가, 성악가들로 이루어졌다. 유명한 사람으로는 프레와 팔레스트리나 등이 있다.
메디치 가문.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만개한 곳은 피렌체, 밀라노, 로마, 베네치아 등의 도시가 있다. 학술과 예술가들을 키웠던 후원자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 등이 알려져 있다. 특히, 피렌체의 르네상스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메디치 가문의 후원 덕분이었다. 메디치 가문은 13세기 피렌체에서 상업과 은행업으로 성공해 교황청 재산을 관리하면서 재력가문이 되었다. 15세기부터 300여년 간 르네상스 사상 예술 과학 등을 폭넓게 후원했다. 그 중 미켈란젤로는 15세 때부터 2년 간 메디치 가문의 궁전에서 지내면서 많은 미술작품들을 감상하며 자랐다.
하지만 15세기 사보나롤라의 개혁에 의해 피렌체의 예술이 쇠퇴하고 프랑스와의 전쟁에 의해 밀라노의 스포르차가도 추방당했으나 로마에서는 교황에 의해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설(1515년)이 추진되어 많은 예술가가 모여들었다. 1527년 로마 약탈 이후 로마가 일시적으로 황폐해지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이나 토스카나 대공국 등에서 미술은 계속 꽃필 수 있었다.
혼란의 시대.
르네상스 시대는 흑사병이 유행하거나 정치적 싸움, 전쟁이 계속된 시대였다. 문화가 꽃필 수 있었던 것은 궁정과 교황청 등 극히 일부에서 뿐이었고 일반적으로는 미신과 마술이 믿어지던 시대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유럽의 근대를 이끈 역할을 했지만 그 시기 이탈리아 국내 정치는 엉망이었다. 교황령을 비롯한 여러 소국들로 갈라지고 외국으로부터 간섭받아 국가의 통일이 늦어져 정치, 사회적 근대화가 지연되는 결과가 초래된 시기였다.
1600년에 우주의 무한성을 말했던 조르다노 브루노가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하고 갈릴레이가 지동설로 종교재판을 받은 것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이탈리아에서 자유로운 과학연구를 진행하기는 어려워졌다. 이미 16세기 후반, 미술에서도 형식주의의 매너리즘(manierismo)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그 창조력은 북유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17세기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중심이 된 바로크 미술의 시대가 되었으니 문화적 불모의 시대라고 말할 수는 없다.
프랑스 르네상스.
프랑스 르네상스는 15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프랑스에서 일어난 문화・예술 운동이다. 르네상스는 근세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이후로 타 유럽 국가에 전파되며 프랑스에서도 나타났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르네상스의 특징으로는 삶에 대한 갈구, 인간에 대한 믿음, 지식에 대한 갈망, 자유의지의 정신 등이 있다. 프랑스 르세상스는 중세의 사고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며 새로운 형태의 삶과 문명을 추구했다. 더불어, 인쇄술를 통한 정보의 전파 가능성과 대서양 저편의 신세계 발견은 당대 인간의 세계관을 깊이 변화시켰다.
프랑스 르네상스는 프랑수아 1세와 앙리 2세로 상징되는 왕들에게 고용된 화가와 조각가의 시대였다. 이 시기는 클로 뤼세에서 생을 끝마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시대이기도 하다만, 퐁텐블로파가 창설되고 16세기 메디치 가문이 파리에 도착한 시대이기도 하다.
프랑스 르네상스는 네 시기로 나뉜다. 첫번째 시기는 루이 12세 양식(약 1495-1530)으로,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의 전환기를 형성한다. 허나 이 첫번째 양식은 1515년경, 특히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도입이 매우 빨랐던 루아르 계곡에서부터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탈리아에서처럼, 프랑스 르네상스 제 1기, 이후의 제2기와 그 둘을 종결낸 매너리즘이라는 세 시기는 17세기 초까지의 시기를 삼분(三分)한다.
독일 르네상스.
독일에서는 이탈리아와 가까운 바이에른에서 시작이 되었다.
독일 르네상스는 르네상스적 요소와 후기 고딕적요소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 이유는 다른지역보다 독일에 르네상스적 요소가 늦게 도달했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 4명의 사도 등의 미술 작품을 완성한 알브레히트 뒤러가 선두이다.
알브레히트 뒤러 외에도 많은 독일 르네상스 화가들이 있다.
또한 지식인들이 라틴어 성서를 연구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바탕이 만들어졌다.
폴란드 르네상스.
폴란드에서는 15세기와 16세기 사이에 이탈리아의 화가, 상인, 사상가들이 폴란드에 들어오면서, 크라쿠프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지동설을 주장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와 얀 코하노프스키 같은 시인들이 등장했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중요한 기념물은 다른 많은 도시에서도 볼 수 있다 (예 : 포즈난, 그단스크, 헤움노). 슈체친의 슬라브 왕자의 중세 성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스페인 르네상스.
스페인에서는 이데올로기의 변화가 다른나라와 같이 극심하지 않았다. 다른 유럽에 비해 중세의 문화가 혁파되지 않았고, 문학에서는 이탈리아의 혁신을 받아들였지만 서정시집과 이전의 전통을 잊지는 않고 제 3의 것을 창조했다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전기의 집대성으로서 대표적으로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있다.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는 가장 대표적인 스페인 르네상스 시인이자 작가로 스페인에 이탈리아로부터 처음으로 르네상스 시를 도입한 사람이다.
조형예술에서는 이탈리아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현지 전통과 잘 융화하였다. 르네상스의 혁신은 스페인에 매우 늦게 전달되었는데, 거의 스페인 예술에서의 르네상스는 고딕풍에서 매너리즘으로 급격하게 변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건축은 다음과 같이 16세기 금은 세공사에 의해 사용된 장식을 활용한 건축양식 플라테레스코(15세기에서-16세기의 1분기), 순수(정통)주의 및, 이탈리아풍 (16세기 전반기), 에레리아노; 엘에스꼬리알의 건축가 후안 데 에레라에서 연유한 건축용어(1559년부터 다음세기 중반) 크게 세 시대로 분류가 가능하다. 이중 첫 번째는 표면적인 형태에서 드러나는데 전반적인 고딕양식을 유지하면서 파사드의 화려한 장식을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 장식은 세밀하고 풍부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살라망카 대학 건물의 파사드의 장식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순수(정통)주의는 이탈리아의 가장 후반기의 측면을 반영하고 있는데, 알람브라의 카를로스 5세 궁전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스타일의 중심지는 안달루시아 지방으로서 우베다와 바에사의 안드레스 데 발데비에라, 디에고 데 실로에 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마지막으로 에레리아노 양식은 길게 늘이는 특성을 지닌 매너리즘에 대한 수용에서 비롯되었으며 후안 데 에레라가 엘에스꼬리알에 건축한 수도원이 명실공히 스페인 르네상스의 야심작이라 칭할만 하다.
조각에서는 고딕양식의 전통 헤게모니가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유지된다. 새로운 스타일의 첫 번째 흔적으로서는 펠리페 비가르니와 도메니코 판셀리의 작품을 들 수 있다. 보다 성숙한 단계에 이르러서는 커다란 외형을 가진 스타일이 발생되었고, 이러한 독특한 매너리즘은 이후 바로크 조각의 기초가 되었다.
회화에서의 스페인의 르네상스는 고딕양식의 유산을 유지하는 동시에 이탈리아로부터의 새로운 방식이 공존하는데 이러한 분열은 페드로 베루구에테가 우르비노에서 작업한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스페인 르네상스를 가장 크게 특징짓는 것은 매너리즘으로 명명된 엘 그레코로 대표되는 고유의 양식이다.
네덜란드 르네상스.
오늘날에 벨기에와 합쳐있던 네덜란드는 남유럽과 북유럽을 잇는 교통의 관로였다. 거의 이탈리아와 같은 시기에 르네상스가 일어난 걸로 알려졌다. <우신예찬>을 쓴 에라스무스와 같은 작가가 등장했고, 판 에이크 형제와 피터르 브뤼헐 더 아우더, 히에로니무스 보쉬 같은 화가들이 등장하였다.
르네상스의 종말.
130년간 지속되던 르네상스는 1530년경 끝이 났다. 그 이유는 우선 1492년 크리스토발 코론이 포르투갈인들과 함께 인도로 가는 해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사실은 아메리카로 가는 해로였다.) 그 후에는 북서부 유럽의 상인들이 무역상품을 리스본과 안트웨르펜을 통해 거래하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또한 1517년 아우구스티노회의 수도사인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서유럽 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교회로 분열되었다. 교회의 분열은 그동안 납부금과 세금의 형태로 이탈리아를 풍요롭게 했던 돈줄의 고갈을 의미했다. 유럽인의 아메리카 대륙 상륙과 종교개혁으로 결국 이탈리아는 상업적 무역자본과 자본, 두가지를 동시에 잃었다 또 이탈리아는 그 당시 이탈리아 전쟁 등이 겹치며 정치적으로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태이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르네상스는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
3212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12 | 국제어 | 국제어 또는 국제보조어(國際補助語, International Auxiliary Language, (int.) auxlang, IAL)란 예술어와 함께 인공어의 한 종류로,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들간 의사소통의 장벽을 낮추기 위해 만들어진 중립적이고 간단한 구조의 언어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에스페란토, 인테르링구아, 이도, 볼라퓌크 등의 언어들이 이에 해당한다. 중세 유럽의 라틴어, 현대의 영어 등 비슷한 성격을 띤 자연어 역시 국제어라 이르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세종대학교에서 우니쉬를 만든 바가 있다.
유럽의 주요 언어를 섞은 듯한 유로판토는 언어 유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패러디 국제어이다. |
3213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13 | 갈리아 전기 | 갈리아 전기(, Gallia 戰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1년까지 9년에 걸친 갈리아 전쟁을 기록한 책이다.
전체는 총8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권은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1년의 각 1년 동안 일어난 일을 기술하고 있다. 다만 제3권은 57년과 56년을 모두 다루고 있다. 제1권부터 제7권은 카이사르가 직접 서술했고, 제8권은 카이사르의 비서였던 발부스의 요청으로 카이사르의 부장이었고 카이사르가 죽은 뒤 집정관까지 된 아울루스 히르티우스가 기록했다.
카이사르는 특유의 간결하고 우아하면서도 함축적인 문체로 기술하였으며 "나는... 이러했다"라고 쓰지 않고 "카이사르는...했다"라고 제3인칭 시점으로 기술했다. 히르티우스가 쓴 제8권은 사실적인 필체로 전쟁기를 기록하고 있다.
각권의 구성.
각 권의 개략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
3214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14 | 스레드 (컴퓨팅) | 스레드(thread)는 어떠한 프로그램 내에서, 특히 프로세스 내에서 실행되는 흐름의 단위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한 프로그램은 하나의 스레드를 가지고 있지만, 프로그램 환경에 따라 둘 이상의 스레드를 동시에 실행할 수 있다. 이러한 실행 방식을 멀티스레드(multithread)라고 한다.
프로세스와 스레드의 비교.
멀티프로세스와 멀티스레드는 양쪽 모두 여러 흐름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멀티프로세스에서 각 프로세스는 독립적으로 실행되며 각각 별개의 메모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과 달리 멀티스레드는 프로세스 내의 메모리를 공유해 사용할 수 있다. 또한 프로세스 간의 전환 속도보다 스레드 간의 전환 속도가 빠르다.
멀티스레드의 다른 장점은 CPU가 여러 개일 경우에 각각의 CPU가 스레드 하나씩을 담당하는 방법으로 속도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에서는 여러 스레드가 실제 시간상으로 동시에 수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멀티스레드의 단점에는 각각의 스레드 중 어떤 것이 먼저 실행될지 그 순서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두 스레드가 특정 공유 변수 i의 값을 1 증가시키는 명령을 실행할 때,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수행될 수 있다.
이때 두 스레드가 실행될 때 어떤 스레드가 먼저 실행될지는 보장되지 않으며, 만약 다음과 같은 순서로 실행된다면:
최종 결과로 i는 2가 증가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실행된다면:
최종 결과로 i는 1이 증가되고, 이것은 원래 프로그램의 의도(각각의 스레드가 i를 1씩 증가하는 동작)와 다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문제는 스레드의 실행 조건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오므로, 오류가 발생했을 때 원인을 찾기가 힘들다. 이러한 문제를 경쟁 조건이라고 하며, 문제를 막기 위해 세마포어와 같은 방법을 통해 공유 데이터에 접근하는 스레드의 개수를 한개 이하로 유지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스레드의 종류.
스레드를 지원하는 주체에 따라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사용자 레벨 스레드 (User-Level Thread).
사용자 스레드는 커널 영역의 상위에서 지원되며 일반적으로 사용자 레벨의 라이브러리를 통해 구현되며, 라이브러리는 스레드의 생성 및 스케줄링 등에 관한 관리 기능을 제공한다. 동일한 메모리 영역에서 스레드가 생성 및 관리되므로 속도가 빠른 장점이 있는 반면, 여러 개의 사용자 스레드 중 하나의 스레드가 시스템 호출 등으로 중단되면 나머지 모든 스레드 역시 중단되는 단점이 있다. 이는 커널이 프로세스 내부의 스레드를 인식하지 못하며 해당 프로세스를 대기 상태로 전환시키기 때문이다.
커널 레벨 스레드 (Kernel-Level Thread).
커널 스레드는 운영체제가 지원하는 스레드 기능으로 구현되며, 커널이 스레드의 생성 및 스케줄링 등을 관리한다. 스레드가 시스템 호출 등으로 중단되더라도, 커널은 프로세스 내의 다른 스레드를 중단시키지 않고 계속 실행시켜준다. 다중처리기 환경에서 커널은 여러 개의 스레드를 각각 다른 처리기에 할당할 수 있다. 다만, 사용자 스레드에 비해 생성 및 관리하는 것이 느리다.
스레드 데이터.
스레드 기본 데이터.
스레드도 프로세스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실행 흐름이므로 실행과 관련된 데이터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스레드는 자신만의 고유한 스레드 ID, 프로그램 카운터, 레지스터 집합, 스택을 가진다. 코드, 데이터, 파일 등 기타 자원은 프로세스 내의 다른 스레드와 공유한다.
스레드 특정 데이터.
위의 기본 데이터 외에도 하나의 스레드에만 연관된 데이터가 필요한 경우가 있는데, 이런 데이터를 스레드 특정 데이터(Thread-Specific Data, 줄여서 TSD)라고 한다. 멀티스레드 프로그래밍 환경에서 모든 스레드는 프로세스의 데이터를 공유하고 있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개별 스레드만의 자료 공간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여러 개의 트랜잭션을 스레드로 처리할 경우, 각각의 트랜잭션 ID를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때 TSD가 필요하다. TSD는 여러 스레드 라이브러리들이 지원하는 기능 중의 하나이다.
프로세스 관리의 변화.
멀티스레드 환경이 확산됨에 따라 전통적인 프로세스 관리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해졌다. 예를 들어, fork 또는 exec와 같은 시스템 호출시에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
3215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15 | 갈리아 | 갈리아() 또는 골()은 로마 제국의 멸망 이전까지 현재의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서부, 그리고 라인 강 서쪽의 독일을 포함하는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본국 이탈리아에 포함시키기 전까지의 갈리아 키살피나 (알프스 이남 북부 이탈리아)도 포함되었다. 이 지방은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1년까지 8년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평정되었으며 1세기에 이르러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아퀴타니아,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벨기카, 고지 게르마니아의 다섯 로마 속주로 나뉘었다.
갈리아의 원 거주민은 켈트족으로, 갈리아라는 이름 자체가 '켈타이(Celtae)'를 라틴어식으로 옮긴 것이다. 갈리아의 켈트족은 수십여 개의 부족국가로 갈라져 있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갈리아인들은 260년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사산 제국의 샤푸르 1세에게 사로잡힌 이후 로마 제국에서 독립해 포스투무스를 황제로 한 갈리아 제국을 건설했으나 273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때 다시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로마인들은 갈리아를 두 개의 지역으로 구분하였는데, 알프스 산맥 이 쪽 지역의 갈리아 즉 포강 유역을 갈리아 키살피나라고 부르고, 알프스 산맥 너머의 갈리아 즉 유럽의 먼 나머지 지역을 갈리아 트란살피나라고 불렀다.
갈리아 지방은 포도주가 크게 발달하였으므로 로마산 포도주가 갈리아산 포도주에 밀릴 것을 우려한 로마 황제가
한때 포도 생산을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
3216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16 | 벨가이족 | 벨가이(Belgae)는 현재의 벨기에와 네덜란드, 프랑스의 일부를 합친 지역의 켈트족 원주민들을 일컫는 라틴어이다. 벨가이는 로마로부터 멀리 북쪽에 떨어져 있어 상인의 왕래조차 뜸한 지역이었으며 갈리아 전쟁을 계기로 역사에 등장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는 갈리아 전체를 갈리아, 아퀴타니아, 벨가이의 셋으로 나누며 언어, 관습, 제도가 서로 다르며 벨가이가 게르만족과 인접해 있는 까닭에 가장 호전적이라 기록했다.
갈리아 전쟁 이후 벨가이는 다른 중북부 갈리아와 합쳐 갈리아 코마타 속주의 일부가 되었다가 후에 벨기카로 나뉘었다. 갈리아 전쟁기에는 아트레바테족, 벨로바키족, 칼레티족, 모리니족, 네르비족, 아투아투키족, 메나피족, 레미족 등이 언급되어 있으며 이 중 레미족은 기원전 58년 다른 벨가이 부족들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반로마 연합을 빠져나와 카이사르와 동맹, 후에 갈리아 전체의 유력 부족 중 하나로 떠올랐다. |
3217 | 743026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17 | 아시아의 역사 | 아시아의 역사는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중동 등의 해안 지역과 이를 잇는 유라시아 스텝 지역의 역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 지역에서는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 강, 황하 등의 큰 강 유역에서 주요 고대 문명이 발생하였다. 이들 문명은 수학이나 바퀴 등의 기술을 교류하였다. 또 독자적으로 문자가 발명되었다. 고대 문명은 점차 도시, 국가, 제국으로 성장해갔다.
스텝 지역은 오래전부터 기마 유목민족의 영역이었다. 이들은 스텝을 중심으로 아시아 전체를 활동 무대로 삼았다. 북쪽의 시베리아는 울창한 숲과 툰드라 때문에 스텝의 기마민족이 접근하기 어려웠다.
대륙의 중앙부는 해안과는 높은 산맥과 사막으로 나뉘어 있다. 카프카스 산맥, 히말라야 산맥, 카라쿰 사막, 고비 사막 등은 스텝 지역의 기마병들이 쉽게 건널 수 없는 장벽이었다. 해안 도시들이 보다 기술이나 문화는 앞서 있었으나, 스텝의 기마병들을 막아내기에는 군사력이 충분치 않았다. 이들은 중국, 인도, 중동의 도시를 정복한 기마민족은 곧 이들 문화에 동화되어갔다.
고대.
동아시아.
한반도.
한반도의 역사는 구석기 시대 이후 주로 한반도와 만주, 넓게는 동아시아 지역을 바탕으로 발전되어 온 한민족의 역사이다. 한반도의 역사는 전기 구석기 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토기는 기원전 8000년 무렵의 것이며, 기원전 6000년 이전에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고, 기원전 2500년 무렵에 청동기 시대로 이어졌다. 삼국유사를 비롯한 다른 고려 중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 왕국이 기원전 2333년에 세워졌고 한반도에서 만주에 이르는 영토를 확보했다고 한다. 기원전 1세기에 한나라의 침공을 받고 멸망해 여러 국가로 나누어졌다.
공동기원 초기에, 마한, 진한, 변한, 동예, 옥저, 고구려, 부여 등이 세워져 고조선의 뒤를 이었다. 이 중 백제가 마한 지역을 점령하고, 신라가 진한 지역을 점령하고, 변한 지역은 가야 연맹으로 발전하였으며, 고구려는 영토를 크게 넓혔다. 삼국시대를 맞아 세 왕국(고구려, 백제, 신라)이 다른 고조선의 후속 국가들을 정복하였고 한반도와 만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다. 이 세 왕국은 경제와 군사 면에서 서로 경쟁하였다. 고구려와 백제는 강력하였고, 특히 고구려는 대규모의 군사행동을 해 흉노 등 중앙아시아의 기마 민족과 수나라 등 중국 세력을 격파하고 한반도 북부부터 만주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백제와 신라는 해상 교역과 육상 교역을 통해 중앙아시아부터 시작해 아라비아와도 교류하였다.
수나라의 고구려 침략 과정에서 일어난 전쟁을 고구려-수 전쟁이라 부른다. 수나라는 이때 제1차 세계 대전이 있기 전까지 지구상 최대 규모 군사인 11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였지만, 살수에서 을지문덕의 활약 등으로 실패한다.
신라의 힘은 화랑도를 바탕으로 서서히 커져서 결국 당나라의 지원을 받아 백제와 고구려를 침공하여 멸망시켰다. 신라는 당시 의자왕 아래의 백제에게 40여개 성을 빼앗기는 등 나라가 큰 위기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신라는 본래 김춘추를 고구려에 파견하여 고구려에 도움을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래서 당나라에 도움을 청해 동맹을 맺었다. 이를 나·당 동맹이라 한다. 나·당 동맹에 맞선 다른 나라들, 돌궐-고구려-백제-왜는 동맹을 맺어 나·당 동맹에 대항하였다. 하지만 고구려의 내분 등으로 나·당 동맹이 승리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다.
그러나 당나라는 신라를 배반하고 한반도를 모두 점령하기 위해 신라와 전쟁을 벌이는데, 이 전쟁을 나당 전쟁이라 한다. 비록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두 나라의 유민들은 같은 민족인 신라를 도왔고, 신라가 중국에게 승리하여 한반도를 완전히 통일한다. 한편 멸망한 고구려의 유민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를 건국하였다. 이로써 한반도와 만주, 연해주에 걸친 남북국시대가 성립된다.
발해는 당나라와의 치열한 결투 끝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더욱 성장하여 당나라로부터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의 '해동성국'이라는 별칭까지 얻는다. 발해는 고구려의 후계를 자처하였으며, 일본에 보낸 국서에는 대조영이 스스로를 '고려 왕'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와는 사이가 좋지는 않았으며, 주로 당, 일본과 교류하였다. 발해는 10세기 거란족의 습격으로 멸망 당한다
중국.
중국은 황하 문명의 발원지이며 동아시아 문화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중국은 신화의 영역인 하나라를 넘어, 기원전 17세기경 상나라가 세워진다. 이는 실존한다고 여겨지는 최초의 중국 왕조이다. 상 이후에는 주나라가 기원전 11세기경 상을 몰아내고 중국을 지배하였다. 이때 주의 왕은 스스로를 '천자'라 칭하였다. 주나라 말기, 주 왕실의 힘이 약해지자 봉건제인 주의 특성상 지방 영주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하는데, 이를 춘추 전국 시대라 한다. 기원전 3세기, 진나라가 길었던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중국을 재통일한다. 그러나 피정복민에 대한 강압적인 정치로 불과 15년만에 멸망한다. 진 멸망 이후, 향우의 초나라와 유방의 한나라의 대결에서 한나라가 승리하여 중국을 통일한다. 이로 인해 중국의 문자, 민족 이름도 이 나라의 이름을 따서 각각 한자, 한족이라 불린다. 한은 한반도의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유럽의 로마 제국과 간접적으로 교류하는 등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한 멸망 이후, 중국은 위·진·남북조 시대를 겪게 된다. 중국 북부에는 '북조'라 불리는 선비족 등 북방 유목민 왕조가, 남부에는 '남조'라 불리는 한족 왕조가 들어섰다.
기원후 581년, 북조인 수나라가 남쪽의 한족 왕조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다시 통일한다. 그러나 무리한 고구려 원정, 대운하 건설 등으로 인한 재정난과 민심 이탈으로 불과 38년만에 멸망한다.
수나라의 귀족이던 당 고조(이연)이 곧바로 당나라를 세우고 중국은 전성기를 맞는다. 고구려 원정이 실패하긴 했으나 결국 신라를 도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며, 서양과의 교류가 크게 늘었다. 그러나 신라 침략을 통한 한반도 점령에 실패하였고, 발해의 건국을 막지 못하면서 만주의 영토를 잃고, 아랍 제국과의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하며 서쪽으로의 팽창이 주춤한다. 당 시대는 중국의 전성기로 불리며, 말기에 권력이 강해진 지방 관리들의 반란으로 무너진다. 당나라는 페르시아 등 서아시아 국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고, 유럽에도 다시금 중국의 이름이 알려진다.
서아시아.
세계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원지이다, 수메르인 등이 일찍이 발달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이후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등이 이 지역을 통일한다. 그 후, 기원전 6세기경 아케메네스 제국(또는 페르시아)이 힘을 키워서 현재의 이란 지역부터 아나톨리아까지 매우 넓은 영토를 장악한다. 아케메네스 제국은 유럽의 고대 그리스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벌여 유럽 대륙으로의 팽창을 시도하였으나 패배했다. 그 후, 그리스의 북쪽으로부터 세워진 마케도니아 왕국(또는 헬레니즘 제국)이 기원전 4세기경 고대 그리스를 점령하고 아케메네스 제국까지 멸망시킨다. 그 후, 그리스 문화와 페르시아 문화, 이집트 문화가 마케도니아 왕국이라는 이름 아래 공존한 헬레니즘 문명이 탄생한다. 그리스와 페르시아를 정복하여 마케도니아의 영토를 크게 넓힌 정복자 알렉산드로스 3세의 사후 마케도니아는 3개의 왕국으로 분열된다. 그 후, 페르시아가 자리하던 곳에는 파르티아 제국이 들어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를 계승한다. 이후, 사산 제국(또는 이란국)이 페르시아를 다시 계승하여 서쪽의 로마 제국과 동쪽의 마우리아 왕조, 한나라와의 교류를 이어주는 중계 무역으로 번성한다. 한편, 로마 제국이 유럽을 넘어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점령한다.
유대인 역시 이 지역에서 고대 문명을 피워왔고, 기원후 4년경, 유대인 철학자 예수가 서아시아에서 태어나 자신의 사상, 즉 기독교를 포교한다. 이는 동방에서 시작되어 로마 제국 전체를 흔들어 놓아서, 결국 로마 제국의 국교로 인정받아 지금까지도 전 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슬람 제국 시대.
기원후 4세기경, 로마 제국이 동서로 나누어짐에 따라서 서아시아의 아나톨리아 지역에 동로마 제국이 자리해 사산 제국(이란국)과 경쟁한다. 그리고 7세기경, 아라비아반도의 메카에서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다.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늘어서, 영향력이 큰 종교가 되었다. 같은 하느님이라는 신을 믿지만, 로마에 전파된 기독교와는 다르게 아랍 제국이라는 새 나라를 세운다. 아랍 제국은 급속도로 성장하여 사산 제국을 단숨에 무너뜨리고 아프리카 북부, 스페인 남부까지 점령한다. 이는 역대 서아시아 국가 중 가장 넓은 영토이다. 이로 인해, 서아시아의 서부인 아나톨리아 반도와 유럽의 그리스 지역을 다스리던 동로마 제국은 사산 제국과는 달리 멸망하지는 않았지만, 이슬람 세력의 팽창으로 인해 크게 위축되에 하락세를 맞는다. 반면, 이 드넓은 영토와 번역되지 않는 코란, 그리고 활발한 이슬람 상인들의 활동은 이슬람교와 아랍어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데 기여한 시대이다.
중세.
동아시아.
한반도.
신라가 9세기 후반에 국력이 쇠퇴하자, 후삼국시대가 시작되었고, 왕건이 건국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종식되었다. 비슷한 시기, 926년 발해가 거란족에게 멸망한 이후 많은 발해 사람들이 고려로 넘어왔다.
고려 시대에는 국교로서 불교 문화가 번성하였다. 또한 고려는 남북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활발한 국제교역 활동으로 부를 축적하였으며, 고려 말까지 벽란도를 중심으로 이를 계속하였다. 993-1019년 동안 고려는 거란과 전쟁을 벌여서 거란을 격퇴하였다. 1238년 몽골이 침입하였고 30년에 가까운 전쟁끝에 양 측은 평화 조약을 맺었다. 그 후 공민왕의 자주개혁이 있기 전까지 몽골의 후계인 원의 간섭을 받았는데, 이 시기 성리학이 한국에 전래되었다.
중국, 몽골.
당나라 멸망 이후, 중국에 잠시 혼란기가 찾아오다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한다. 송나라는 수도이자 인구 100만 명에 달했던 대도시 카이펑시를 중심으로 융성하였고,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다. 화약, 나침반 등이 송나라에서 발명되어서 이슬람 제국을 통해 유럽으로 넘어가 현대 문명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문신을 우대한 송나라는 과거 시험을 중심으로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정책이 불러온 당연한 단점으로 군사력이 매우 약해져서, 이민족 왕조들에게 곧바로 중국 북부를 빼앗기고 고려에 대한 영향력도 그렇게까지 크지 못했다. 한편, 만주 지역에서는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요나라를 세웠다. 요나라는 송나라를 크게 위협하였고 고려를 침략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발해의 옛 땅에 살던 여진이 금나라를 건국한다. 금나라는 크게 융성하여 송나라로부터 수도 카이펑을 비롯한 화북 지방을 빼앗고 송나라는 남쪽으로 내쫓아져 남송이 되었다. 금나라는 현재의 베이징 지역을 수도로 삼았다.
그 시기, 금나라의 북동쪽 중앙아시아에서는 테무친이 몽골족을 통일하고 본인을 칭기즈 칸이라 칭했다. 그렇게 시작된 몽골 제국은 동서남북으로 빠르게 팽창하여 금나라와 남송을 순식간에 멸망시키고 중국의 영토를 전부 점령한다. 동쪽으로는 고려를 정복시키고, 서쪽으로는 헝가리까지 멸망시켰으며, 이슬람 제국을 멸망시켰다. 칭기즈 칸의 사후 몽골은 여러 개로 분열되어 그 중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이 현재의 베이징 지역을 수도 삼아 원나라를 건국한다. 원나라는 몽골 왕조이지만 점점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원은 고려와 연합하여 일본을 침략, 원나라의 일본 원정을 벌였지만 태풍으로 실패하였고, 중국의 원주민인 옛 남송의 한족들을 차별하여 민심을 얻지 못해 왕조 성립 100년이 채 되지 않아 멸망한다. 원에 반기를 든 반란군의 우두머리 주원장은 명나라를 세우고 왕이 된다.
서아시아.
유목민 이슬람 제국.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3대륙을 모두 지배하던 아랍 제국은 내분으로 찢어져 멸망한다. 그 이후 중앙아시아 돌궐계 민족인 투르크가 세운 나라인 셀주크 제국은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고 크게 성장한다. 셀주크는 페르시아, 아나톨리아 지역을 거의 다 차지하고 동로마 제국을 크게 위협하였다.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점령한 셀주크 제국은 기독교도들의 성지 순례를 막았다. 마침 유럽의 교황은 권력 강화를 위한 핑계가 필요했기 때문에, 십자군 전쟁으로 셀주크 제국을 침략한다. 그러나 결국 십자군 전쟁에서 셀주크 제국이 유럽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 인해 유럽에서는 교황의 권력이 크게 약화된다. 십자군 전쟁으로 국력을 많이 소모한 셀주크 제국은 힘을 잃어가고 결국 멸망한다. 그리고 셀주크의 영토 중 페르시아 지역에 화레즘 왕조가 성립한다.
몽골 제국이 분열된 다섯 왕국 중 하나인 일 칸국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인다. 일 칸국의 몰락 후, 몽골 제국의 후손인 티무르가 티무르 제국을 세우고 엄청난 정복 활동을 벌인다. 티무르 제국은 페르시아 지역을 모두 점령하였다. 그러다가 14세기, 티무르 제국은 멸망하지만 그 왕족인 바부르가 인도에 가서 무굴 제국을 세우고, 19세기까지 인도를 지배하는 등 번성한다.
셀주크 제국과 마찬가지로 투르크족 국가인 오스만 제국이 강성하여 페르시아, 아나톨리아, 아라비아 등 중앙아시아 전역을 점령하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대국으로 떠오른다. 이는 아랍 제국 이후 가장 강력한 이슬람 국가였다.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인 쉴레이만 1세 시대에는 1,000년 넘게 남아있던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그곳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을 이스탄불로 개칭시켰다. 유럽 진출 관문이 열리자 오스만 제국은 옛 동로마 제국의 영토, 즉 발칸 반도 등과 헝가리까지, 유럽 남서부까지 영토로 만들었다. 최대 진출 영역은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이자 현재는 오스트리아 땅인 빈의 바로 앞까지 진출했을 정도로, 유럽 세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커피와 카페 같은 것들은 바로 이 때, 오스만 제국이 유럽을 점령했을 때 유럽에 전파되었다. 현재에도 이 때 오스만 제국이 점령했던 유럽 영토의 일부는 아직도 오스만의 후계인 터키의 영토로 남아있다.
근세.
동아시아.
한반도.
1392년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일으킨 이후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새 왕 이성계는 명나라에게 '조선'이라는 이름을 선택받아 왕조의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 그는 명나라에 맞서고자 했던 고려와는 달리, 명과 사대 관계를 맺었으며, 몇몇 행정구역과 정부 체제를 개편하였다. 또한 그 때부터 조선왕조실록이 편찬되었다. 이성계의 손자 세종이 왕위에 있던 시기, 한글이 창제되고 측우기, 앙부일구와 같은 발명도 이루어졌다. 칠정산, 농사직설과 같이 조선에 맞는 역법과 농법이 백성들에게 소개되었으며, 또한 북방의 여진과 남쪽의 왜구를 토벌하였고, 고려 시대 최무선의 화약을 바탕으로 화차와 같은 군사병기도 제작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은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지금 남북한을 합친 것과 같은 영토가 이 때 형성되었다.
조선 연산군은 방탕하고 폭력적인 정치로 인해 민심과 신하들의 마음을 모두 잃고, 왕위에서 쫓겨난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지만, 수군을 이끈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여러 명장들의 노력과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조직적인 저항,그리고 명나라의 조선으로의 파병 덕분에 결국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의 명 파병을 비롯한 다른 사정들로 국력이 약해진 명은 북방 영토에 관심을 소홀이 하였고, 이는 만주족 왕조 청나라의 탄생을 불러일으켰다. 광해군은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치며 실익을 추구하고자 하였지만, 명을 아버지의 나라로 여기고 청을 오랑캐로 여기는 보수적인 유교 사상을 가진 관료들은 그의 실익 추구를 탐탁치 않게 보았다. 그리하여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나지만, 결국 1620년대와 1630년대에 걸쳐 조선은 청나라의 침입으로 청나라와 사대를 맺게 되며 조선이 명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청은 왕의 나라 조선은 신하의 나라가 된다.
이후 영조, 정조는 지나치게 변질된 붕당 정치를 바로잡고자 했다. 보수적이고 시대에 뒤처진 유교를 대신하려 하는 실학이 융성하였는데, 대표주자로는 박지원, 정약용 등이 있다. 이들은 서양의 문물과 교류한 청나라에서 서양의 문물을 접하거나 그의 영향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박지원은 수레의 중요성, 즉 운송수단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정약용은 공동 경작, 공동 소유라는, 공산주의와 비슷한 사상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이 제안한 개혁적 정책들은 기존 보수 관료들이 막아서서 실질적인 조선의 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프랑스 등에서 천주교가 전래되었지만, 유교와의 마찰로 뒤이은 왕들에 의해 탄압받았다.
중국.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세워진 명나라는 정화의 함대를 파견하여 이슬람과 인도,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존재와 강력함을 알리고, 전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로부터 조공을 받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떠올랐지만, 그 후 나라의 문을 걸어잠그는 쇄국 정책을 펼쳐서 점차 유럽에 뒤쳐지게 된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떼 조선에 원군을 파견하여 일본 세력이 중국 본토에 진출하는 것을 막아냈지만, 이로 인해 피해를 입어 북방의 여진족이 만주족으로 개칭하고 청나라를 세우는 것을 막지 못했다. 때마침 이자성의 난이 발생하여 명나라는 멸망하고, 이자성이 세운 순나라는 청나라의 침략으로 1년 만에 멸망한다.
17세기 세워진 청나라는 크게 영토를 확장한다. 몽골, 티베트, 위구르 등 유목 민족들을 모두 청나라의 영토로 정복함으로서 명나라 시기와 비교해 중국의 영토를 2배 가까이 늘려놓았다. 강희제는 강희자전을 편찬하여 한자를 집대성해 현대의 한자 연구에 큰 보탬이 되었다. 뒤를 이은 건륭제는 백과사전식 책인 사고전서를 편찬하여, 사회, 경제, 언어, 문화, 종교, 지리 등 모든 분야를 하나로 정리하여 학문과 지식이 매우 크게 발달하였다.
청나라의 도읍 대도(베이징)의 유리창 거리에는 여러 서점들과 상점들이 즐비했는데, 이 서점들에는 청나라, 조선, 일본의 에도 막부 등 전 세계에서 온 학자들이 모여 열띤 토론을 펼쳤고, 이곳의 서적들이 학자들에 의해 조선에 유입되어 북학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유리창 거리는 동아시아 지식·문화 교류의 중심지가 되었다.
만주족 왕조인 청나라는 당연히 만주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점점 한어가 황실로까지 유입되고, 결국 청나라의 황실마저 만주어 대신 중국어(한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언어적인 부분에서 볼 수 있듯, 만주족 왕조 청나라의 지도층들은 점점 만주족 고유의 문화를 잃어갔다. 이 때 만주어가 차츰 사라지기 시작하여 현대에 만주어는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러나 청나라는 모든 중국 국민에게 만주족의 풍습인 변발을 강요하였고, 만주족의 전통 의상 치파오가 한족의 전통 의상 한푸를 밀쳐내고 현재 '중국을 대표하는 옷'으로 자리잡고 있듯 청나라 시기의 만주족 역시 중국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인도.
중앙아시아 티무르 제국 왕족 출신인 바부르는 오늘날 인도 북부에 무굴 제국을 세운다. 무굴 제국은 점차 인도를 통일하고, 이슬람교를 인도 전역에 전파하였다. 공용어로 페르시아어, 힌디어, 아랍어 등을 섞어 놓은 언어인 우르두어를 사용하여 현재 파키스탄의 국어가 되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무굴은 인도의 기존 종교인 힌두교와 무굴 제국의 종교인 이슬람교 사이의 융화를 추친하였다. 그래서 초기에는 두 종교 세력이 별 마찰 없이 잘 지냈으나, 아우랑제브 황제 때부터 힌두교를 탄압하고 이슬람교 중심 정책을 펼치면서 점차 민심을 잃어 갔다. 때맞춘 대영 제국과 프랑스 왕국 등 유럽 국가들이 인도에 침투하기 시작하면서 무굴 제국은 무너졌다.
무굴 제국은 언어, 문화, 종교 모든 면에서 이슬람 문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타지마할인데, 대표적인 이슬람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무굴 제국의 멸망 이후, 인도는 대영 제국의 식민지가 된다.
서아시아.
오스만 제국은 수도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세계의 상인들이 모이는 교역의 중심지가 되면서 성장했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역시 이스탄불의 대시장(바자르)을 보고 감탄했다. 이 시기, 오스만 제국이 점령한 그리스 등 발칸 반도 사람들은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유럽 국가들의 지원으로 그리스가 독립을 이루어낸 후부터, 오스만 제국은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다.
근대.
동아시아.
한반도.
1870년대 초반 일본은 조선에 압력을 행사하면서 이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중국과 충돌하였고, 조선을 일본의 영향력 아래 두려고 하였다. 조선 정부는 일본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러시아과 밀착하는 친러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은 한반도에서 약화된 자신들의 영향력을 만회하고자 1895년 명성황후를 암살하였다. 1897년 조선은 대한제국 (1897-1910)으로 국호를 새롭게 정하였고,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의화단 운동 진압 당시 청국의 만주를 점거한 러시아가 조선에까지 영향력을 뻗치자 이에 두려움을 느낀 일본은 러일 전쟁으로 러시아 제국을 패퇴시키고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으로 국제사회의 외면과 침묵을 얻어 낸 일본은 1905년 대한제국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였고, 1907년 한일신협약에 이어 1910년에는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였다.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 일본 제국은 조선총독부를 세우고 1910년대, 무단 통치라는 방법으로 한민족을 지배하였다. 헌병 경찰제를 시행하여 독립운동과 비밀결사 등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였다. 또한 조선 토지 조사 사업으로 일본인 자본가들이 한국의 땅을 살 수 있도록 하였고 기존의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거기에 여러 철도 등을 부설하며 한반도 내의 물자를 빠르게 일본으로 실어나를 수 있도록 하여 식민지를 수탈하였다. 마침내 한국인은 일본의 점령에 저항하고자 곳곳에서 3.1 운동을 1919년에 전개하였다. 뒤이어 3·1 운동의 영향을 받아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어 만주와 중국과 시베리아에서 직접 군부대를 조직해 일본군과 싸워 승리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3·1 운동의 영향으로 무단 통치의 한계를 인식한 일본은 1920년대부터 무단 통치 대신 문화 통치로 통치 방법을 바꾸었다.
현대.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유엔은 소련과 미국에서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신탁통치를 계획했지만, 그 계획은 미소공위에서 입장차이로 결렬되어 곧 폐기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38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각각 단독 정부가 수립되면서 한반도는 분단되었다. 분단 이후 양 측 간의 긴장이 이어졌고 1950년에 북한이 남한을 선제공격하여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한국 전쟁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의 경제력을 능가하였으나, 1970년대부터 대한민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를 추월하고, 2018년 대한민국은 세계 GDP 순위 10위에 오르는 등 세계적인 대국이 되었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90년대부터 이어진 경제난으로 인하여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최빈국 중 하나로 전락하게 된다.
이때 미국 국가안보국에서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들이 인류 전체에 피해를 주는 국가들이라는 것을 감안하여 아시아를 "악의 대륙"(Continent of Evil)이라고 지칭하게 되고 이것이 아시아의 또 다른 별명이 되었다. 이는 악의 축에서 파생된 단어이기도 하다. 1980년대부터, 러시아를 비롯한 이스라엘과 이슬람 국가들의 득세와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존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존재와 대한민국의 세계 최초 인터넷 검열로 인한 최초의 인터넷의 적,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2010년대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의 득세와 인권 탄압, 유엔 인권보장제도가 부재중인 유일한 대륙이라는 점과,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이 손꼽히고 있다. |
3222 | 529523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22 | 일본의 역사 | 일본 역사(日本-歷史, )는 일본과 일본인이 현재까지 살아온 모든 역사적 과정을 이르는 말이다.
고대.
구석기 시대.
일본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40만년 전이다. 플라이스토세 전기에서 중기에 걸쳐서 빙하기와 간빙기가 2번 반복하고 여기에 동반하여 간빙기에는 해수면이 상승하고 빙하기에는 하강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까지는 일본열도와 동아시아대륙의 지세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약 2만년 전까지 유라시아 대륙과 연결되어 인류의 왕래가 이루어졌던 일본 열도는 플라이스토세 후기(12만6천년전~1만년전)가 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대량의 빙하가 녹아서 해수면이 상승하여 약 1만 2천년 전에 대한해협(현해탄)과 쓰가루 해협 등 일본을 둘러싼 제해협이 형성되고 최종적으로는 홀로세 초인 1만년 전쯤 모든 해협이 확정되어 유라시아 대륙에서 완전히 분리되었다.
조몬 시대.
이어서 일본에서는 조몬 문화(기원전 1만 3천 년 경부터 기원전 300년까지)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신석기문화로 이행했다. 그 뒤에도 해진 현상(海進現像)이 계속되어, 일본 열도는 현재의 혼슈, 시코쿠, 규슈, 홋카이도의 네 개의 큰 섬과 수많은 작은 섬으로 분리되었다.몽골계, 중국계 인종과 시베리아 지역을 통해 왔다고 추정되는 아이누족, 남방 폴리네시아 지역에서 온 민족들이 일본 열도로 이주하여 오늘날의 일본인의 조상이 되었다. 이 사람들을 다른 지역에서 건너 온 사람이라 하여 도래인(渡來人)이라고 한다.
야요이 시대.
도래인들은 기원전 3세기 경부터 일본 열도 각지, 특히 유래지에서 가까운 규슈 지역에 씨족 단위의 촌락(백제,신라,가야의 유흥을 위한 별장)을 형성하고 중국을 비롯한 대륙 지역의 문화를 일본으로 전래시켰다. 이 시대의 문화를 야요이 문화라고 한다. 야요이 시대에는 계급이 생겨 일본 열도에 100여개의 나라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야요이 문화가 일본 열도에 전래되던 시기에 규슈에서 시작된 벼농사 또한 기원전 2세기 이후에는 주부 지방에 보급되었고, 1세기 전까지 간토와 도호쿠 남부에 전파되었다. 최종적으로 3세기까지 도호쿠 북부까지 벼농사가 전파됨으로써 홋카이도를 제외한 고대 일본은 3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농경 생활이 행해지기 시작한다.
고훈 시대.
3세기 이후 도래인의 유입은 극히 드물어지다가, 3세기 후반부터 호족의 연합정권인 야마토 조정이 일본 통일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지배자의 권위의 상징으로서 각지에 고분이 축조되고, 중국에서 한자를 수입하여 고분문화가 성립되었다. 다시 4세기 말에서 6세기 중기까지 도래인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고구려가 4세기 후반부터 남진 정책으로 한반도 남부의 백제와 가야에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하면서 일본 열도로 피난 오는 사람들이 급증하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 일본 왕실(가야왕족의 친척)은 백제를 비롯하여 백제 등지에서 피난 오는 도래 기술자로부터 유용한 대륙 기술을 도입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위해 백제가 고구려에 대적할 수 있도록 전면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일본 왕실(가야왕족의 친척)이 도래인들에게 각종 특혜를 주면서 외교와 경제 분야에서 도래 씨족이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아스카 시대.
6세기 말에는 한반도에서 불교가 전래되어 7세기 전반의 아스카 시대에 일본 최초의 불교문화가 생겨났다. 특히 7세기에 이르러 도래인 계열 씨족 중 대표적인 씨족이었던 소가 씨()는 불교를 앞세워 모노노베 씨 등의 경쟁 씨족을 제압하고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어 5대에 걸쳐 일본 왕실의 외척이 되어 정치적으로 실세를 떨치기도 하였다.
이처럼 소가 씨를 비롯한 도래인 씨족이 일본 황실을 위협하자 나카노오에 황태자는 645년 정변으로 소가 씨를 멸문하였으며, 수도를 아스카에서 나니와()로 천도하고 이듬해 다이카 개신에 관한 조칙을 공포하였다. 이후 임신(壬申)의 난(, 672년)을 거쳐, 681년 덴무 천황이 최초로 율령 반포를 준비한 이래 8세기에 접어들어서 당나라의 율령을 기반으로 한 일본식 율령의 본격적인 편찬이 시작되고 701년 (다이호 원년)에 다이호 율령을 반포하여 첫 결실을 거둔다.
나라 시대.
이리하여 천황을 정치적·종교적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의 율령국가(律令國家)가 형성되었다. 다이호 율령은 이후에 후지와라노 후히토 등에 의해 누차 손질되어오며 10세기까지 일본에서 최고 법전의 지위를 유지한다.
헤이안 시대.
8~9세기의 나라 시대에서 헤이안 시대 초기의 문화는 대륙 문화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으나 헤이안 초기에는 여러 가지 가나가 만들어졌고 정치적으로도 율령국가가 변질하여 섭관정치, 이어 인세이가 장원(莊園)을 경제적 기반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한편 이전부터 율령 반포에 참여하는 등 일본 왕실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후지와라 씨는 9세기 초에 이르러 소가 씨처럼 황실의 외척이 되어 권력을 장악하고 전횡하기 시작했다. 비록 간무(桓武)와 사가(嵯峨) 두 천황이 귀족을 누르고 절대 왕권을 행사한 적이 있었으나 사가 천황 이후에 후지와라 씨는 본격적으로 정치적 두각을 드러내게 된다. 858년, 후지와라노 요시후사()는 조카이자 사위인 몬토쿠 천황이 사망하자 어린 외손자인 세이와 천황을 천황으로 즉위시키고 자신은 섭정()이 되어 정권을 독점하였다. 요시후사 이후에도 후지와라노 모토쓰네가 관백()이 되어 다시 권력을 잡았다. 이처럼 후지와라 씨는 천황이 어리면 섭정직을, 천황이 성인이 되면 관백직을 번갈아가며 권력을 독점하였다. 이를 섭관정치라 하며, 11세기 후반 시라카와 천황의 인세이가 시작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중세.
가마쿠라 막부.
11세기 이후 일본은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로 변모하였으나 지방 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정도로 막강한 게 아니었으므로 지방에서 주민 스스로 사회 질서를 유지해야만 했다. 헤이안 시대 후반, 지방에서는 호족과 부농들이 자신들이 개간한 농지를 사유화하고 이를 지키려고 스스로 무장했는데 이게 발전하여 무사() 계층이 되었다. 처음에는 지방 호족들을 위해 움직이던 무사들은 점차 실력을 인정받아 일본 황실에서 탈락해 지방으로 내려온 방계 후손을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한편 무사 성장과 더불어 11세기 후반 후지와라 씨와 무관한 고산조 천황이 대대적으로 장원을 정리하고, 1086년 시라카와 천황이 인세이를 통해 번잡한 법령을 무시하고 빠른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상황 측과 재위 중인 천황 측이 서로 권력 대결을 벌이는 상황도 일어났다. 그리고 한 세기에 달하는 원정 기간 동안 계속된 암투 속에서 절대적 세력으로 성장한 무사 계층 사이 긴장은 결국 왕실과 귀족들이 미나모토 씨와 다이라 씨를 앞세워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을 통하여 내란을 치르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초래하였다. 두 차례의 난 끝에 미나모토 씨를 거의 절멸시킨 다이라 씨의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권력을 잡았다가 오래지나지 않아 병사하고, 남은 다이라 씨 또한 미나모토 씨의 후손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의하여 궤멸되고 말았다.
다이라 씨를 섬멸하고 정치적으로 입지를 다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12세기 말 가마쿠라()에 무사 계층이 정치하는 막부 체제를 만들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으나, 요리토모 사후 자손들의 대가 끊기면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창시한 가마쿠라 막부는 호조 씨의 싯켄 정치를 통해 명맥을 이어나갔다. 호조 씨의 싯켄 정치 체제는 원 세조 쿠빌라이의 일본 정벌을 막아냄으로써 크게 고양되었으나, 얼마 못 가 포상 문제로 체제가 요동치다가 지방 무사(武士)의 파악에 실패하여 결국 지지 기반을 상실하면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자 1333년 고다이고 천황은 미나모토 씨의 후손이라고 주장해 오며 싯켄 정부를 배신한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함께 가마쿠라를 공격하여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다. 이어 천황 중심의 전제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고다이고 천황에 불만을 품은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1336년 7월 고다이고 천황을 몰아내고 반대파인 고묘 천황을 앞세워 도피한 고다이고 천황의 요시노 정부와 맞서게 된다. 이를 남북조 시대라 하며, 1392년 10월 남조의 천황이 북조의 천황에 양위하는 형식으로 흡수되기까지 57년간 지속되었다. 이에 앞서 고묘 천황으로부터 세이이타이쇼군 직위를 하사받은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14세기 중엽 겐무 식목 17조를 제정하고, 교토 교외의 무로마치에 쇼군의 저택을 두어 무로마치 막부가 시작되었다.
무로마치 막부.
무로마치 막부는 남북조 시대를 종식시킨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 (足利義満) 대에 이르러 명(明)과 국교를 회복하이 성행하면서 무로마치 문화를 이룩하였다. 이 시대에는 구케(公家)와 부케(武家)의 문화가 융합하여 동산문화힉文化)가 번성했다. 그러나 아시카가 요시미쓰 사망 이후, 슈고(守護)가 영주화(領主化)하여 성장한 슈고 다이묘들이 차기 쇼군 계승 후보들을 앞세워 암투를 벌이면서 막부의 체제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결국 1467년에 발발한 오닌의 난과 더불어 일본은 각 지방의 다이묘들이 난립하여 센고쿠 시대로 돌입하였다.
센고쿠 시대.
센고쿠 시대 초반에는 여전히 각 지역에서 유력자였던 슈고 다이묘가 위세를 떨쳤으나, 곧 슈고 다이묘들 대신 장원을 경영하며 실력을 키운 슈고다이와 고쿠닌들, 그리고 호조 소운이나 사이토 도산과 같이 미천한 신분이나 대중의 지지를 얻은 사람들도 슈고 다이묘들을 타도하고 지역의 새로운 지배자로 부상하였다. 센고쿠 다이묘라고 불린 이들은 오닌의 난 이후 5~60년 사이에 슈고 다이묘들을 거의 압도하여 센고쿠 다이묘들이 각지에 할거(割據)하는 센고쿠 시대가 오고, 고대 귀족은 몰락하여 막부의 권력이 쇠퇴했다. 16세기 중엽 기독교와 총이 전해졌는데, 기독교는 선교사들의 희생적인 포교로 침투되었고, 총은 센고쿠 다이묘의 전술·축성법(築城法) 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 과정에서 16세기 후반부터 두각을 드러난 우에스기 겐신, 다케다 신겐, 호조 우지야스, 오다 노부히데, 모리 모토나리 등이 크게 세력을 불려 경쟁하였으나, 결국 오다 노부히데의 아들인 오다 노부나가와 그의 수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고 새로운 지배체제가 탄생함으로써 센고쿠 시대는 막을 내린다.
쇼쿠호 시대.
1590년 최종적으로 간토의 호조 씨를 패망시켜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반대파 다이묘들의 불만을 억제하고 명나라와 인도를 지배하겠다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몇 번의 도발을 거쳐 1592년 여러 다이묘들의 15만 8천여명의 부대를 이끌고 명나라를 공격한다는 구실로 조선을 침공하였다. 초반에 일본군은 한성을 점령하고 나아가서는 평양성까지 지배 관할에 둠으로써 조선을 궁지에 몰아넣었으나, 한반도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과 몇몇 관군 부대의 저항, 명나라의 지원으로 점차 위기에 몰렸으며, 1598년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함으로써 일본군의 철군에 따라 끝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임진왜란·정유재란이 끝난 1598년 이후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의 핵심 세력이었던 이시다 미쓰나리의 문관 계층과 지방의 유력한 무장들이 모인 가토 기요마사 등의 무장 세력이 각각 서군과 동군이 되어 후계 권력 장악을 두고 크게 다투기 시작했다. 이들은 1600년 미노(美濃)의 세키가하라에서 격돌하였고,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 승리하였다. 최후의 패자(覇者)로서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서군에 가담한 다이묘들을 처벌하고, 통일국가를 재건하여, 1603년에는 쇼군직에 올라 에도 막부를 개창한다. 또 1614년에서 1615년 사이에 걸친 오사카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비롯한 잠재적 적대 세력을 섬멸하고 도쿠가와 씨의 통치 체제를 확립시킨다.
에도 막부.
에도 막부(1603–1868)는 바쿠한(幕藩) 체제 밑에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을 고정하고, 기독교 금지를 구실로 쇄국(鎖國)을 행하고, 후에는 유교적 교화(敎化)도 이용하면서 전국 지배를 강화했다. 태평 무드의 지속은 교통·상공업의 발전과 시정인(市井人)의 대두, 화폐 경제의 성립, 다수의 도시 출현을 촉진시켰고, 에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겐로쿠 문화(元祿文化), 화정기(化政期)의 문화를 번성케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20년에 걸쳐 안정시킨 막부를 이어받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중신들에게 유교 사상을 철저히 연구할 것을 지시했고, 한편으로 도쿠가와 미쓰쿠니 등은 《대일본사》(大日本史)와 같은 역사서를 편찬하는 등 문치(文治)를 지향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5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 대에 에도 막부는 겐로쿠 호황이라고 부르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경제의 실권을 쥔 도시민의 힘은 한편으론 무사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농민의 궁핍화와 거듭되는 재해는 농민폭동을 빈발하게 하여 바쿠한 체제는 내부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심각한 낭비와 더불어 1657년 발생한 메이레키 대화재 이후 겐로쿠 호황으로 쌓인 탄탄한 재정은 점차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금·은화의 가치를 떨어뜨려 새로 화폐를 주조하여 그 차익으로 재정을 충당하였지만 이로 인한 화폐 가치의 저하와 함께 급등한 물가로 서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노부는 겐로쿠 화폐 대신 양질의 새로운 화폐인 쇼토쿠 화폐를 주조하고 금은의 유출을 막기 위해 쇼토쿠 신령을 발표, 나가사키 등의 무역항에 들어올 수 있는 외국 선박 수와 무역액을 크게 제한·삭감하는 등 겐로쿠 호황 직후에 일어난 경제적 동요를 막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겐로쿠와 쇼토쿠 시대의 짧은 호황을 지나면서 견고했던 막부 체제는 점차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에노부 대에 겐로쿠 화폐를 대신할 화폐가 주조된 이후 몇대에 걸쳐 계속 화폐의 질과 주조량을 변화시켜가면서 재정을 보충하고자 했고 직할령의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기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이러한 재정난 속에서 기이 도쿠가와 씨 출신으로 제8대 쇼군이 된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이에야스 시대의 정치 제도를 바탕으로 교호 개혁을 단행하였고, 제9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 대에는 다누마 오키쓰구 등 다누마 씨를 중심으로 하여 재정 회복을 꾀하였지만 결국 당대에 일어난 기근과 같은 자연 재해로 인하여 실패, 결국 실각하게 되었다. 그러자 고산케 계층 등은 이에 대한 책임을 다누마 씨에게 물어 실각시켰다.
19세기 중기 이후는 구미(歐美) 열강이 동양으로 진출하여 일본에게 개국을 요구했고, 하급 무사에 의한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 막부 타도 운동이 격화하여 결국 260여년에 걸친 에도막부는 쓰러지고 메이지 유신을 맞게 되었다.
다누마 씨의 뒤를 이은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후다사시 등 고리대금업자로부터 차용한 빚을 모두 파기시키는 기연령을 발동하고, 당시의 풍속에 대하여 엄격한 규제 정책을 시행하는 등의 간세이 개혁을 시행하였지만, 이에시게의 뒤를 이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와 대립하다가 실각하였다. 이에나리는 분카와 분세이 시대에 걸쳐 오고쇼 자리에서 거의 50년 동안 실권을 잡으면서 쇼군 권위의 선양과 막부의 안정을 도모하였으나, 1833년부터 1839년까지 이어진 덴포의 기근을 거치면서 신뢰를 잃은 막부는 조슈, 사쓰마 등지 출신의 하급 무사들이 개혁을 추진하면서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편 같은 시기 중국으로의 진출을 위해 태평양의 중간 기착지를 필요로 했던 미국은 1853년 매슈 페리 동인도 함대 사령관을 제독으로 일본에 파견해 개방을 강요하였다. 결국 1854년 '미일 화친 조약'을 체결한 것을 시작으로 막부는 쇄국 체제를 풀고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결국 이에 대한 조슈와 사쓰마를 비롯한 여러 번들의 막부에 대한 공격으로 인하여 막부의 권위가 붕괴하기 시작하자 막부에서는 조정과의 융화를 꾀하고자 고부갓타이()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손노조이를 주장하던 조슈 출신 무사 세력은 천황을 통해 서양에 대항하는 '조이'()를 추진할 것을 주장하며 막부를 압박하였고, 결국 막부가 이를 수용하자 조슈에서는 일방적으로 외국선을 포격하고, 사쓰마에서는 체류 중이던 영국인이 사무라이에게 살해되는 나마무기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자 영국, 미국을 비롯한 서양 4개국은 시모노세키를 포격하고, 사쓰마에서는 영국이 사쓰마와 무력 마찰을 일으키는 등 막말의 일본은 서구 열강에 의하여 계속 요동치는 상황에 처했다. 조슈 정벌과 사쓰에이 전쟁을 거치면서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 하급 무사들은 최종적으로 막부 자체를 없앨 것을 주장하며 '도바쿠'(討幕,토막) 운동을 전개하였다. 1866년에는 도사(土佐) 출신의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사쓰마와 조슈 간의 비밀 군사 동맹이 성립하고, 막부에 우호적인 고메이 천황의 뒤를 이어 도바쿠 세력에 의해 메이지 천황이 즉위하면서 막부를 크게 압박하자 결국 1867년 10월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을 통해 쇼군의 권력을 천황에게 되돌리게 되어 메이지 천황은 같은 해 12월 9일 '친정'(親政)을 선포한다.
메이지 유신.
1868년 왕정 복고를 표방한 메이지 천황은 왕권 선양을 위한 혁신을 꾀했는데 교토조정의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구케(公家)와 제후(諸侯), 그리고 하급 무사들을 중심으로 구 바쿠후 세력을 타도하고1868년 7월 에도 막부가 위치한 에도(江戶)를 도쿄로 바꾸고 이듬해에는 교토의 고쇼에서 도쿄의 고쿄로 천도(遷都)했으며, 다양한 이유로 쉽게 연호가 바뀌던 것을 메이지 천황 대에 이르러서는 한 대에 한 연호만 쓸 수 있도록 한 일세일원제가 채택되는 등 모든 체제를 일신하여 중앙집권제를 강화했다. 정부는 부국강병책에 의해 식산흥업정책(殖産興業政策)을 추진하고 군대·경찰을 비롯한 전신·철도·각종 공장 등 관영사업을 개시했다. 또 기도 다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 등의 주도로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등 서남웅번(西南雄藩) 세력들이 우선 판적봉환을 단행하였고, 1869년 6월에는 전국의 번들이 판적을 봉환하게 되었다. 1871년에는 이에 대한 반발 세력을 제압하고 더 강력한 중앙 집권제의 확립을 위해 서남웅번의 병력 약 1만 명을 중앙군으로 편성하여 군사력을 확보하고, 같은 해 7월 폐번치현을 단행하여 행정 구역을 부현제()로 바꾸고 부지사와 현령(県領)은 중앙에서 임명해 파견하도록 하였다. 이어서 형식적으로나마 신분제를 철폐하여 높은 왕족(상경), 다이묘, 사무라이 계층은 귀족층으로 통일되고, 그 이하 사농공상 순의 신분층은 평민()으로 삼는다고 발표하여 불완전한 사민평등() 조치를 단행하였다. 1877년의 서남전쟁(西南戰爭)을 최후로 종래의 불평 사족(不平士族)들의 반란을 종식시켰다.
자유민권운동과 국회 개설.
신분 개혁 이후에 일본에서는 입헌 정치에 대한 요구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874년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이 애국공당을 결성해 민선 의원 설립 건백서를 제출한 것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자유 민권 운동이 일어났다. 이에는 서양의 문물이 유입되면서 같이 전래된 민주주의 정치 방식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이 확산된 것과 너무 강력한 중앙 정부에 의해 자치권마저 부정당한 전통적인 향촌 사회의 반발심도 작용하였다. 1878년 정부는 삼신법()을 제정해 부분적으로 지방제를 개편하여 이들의 반발심을 잠시 무마시키고자 하였으나 같은 해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정부 요직자들이 사망함으로써 정치권의 중심이 공백에 빠지자 1881년 10월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서남웅번 출신의 무사들이 정부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점진적인 국회의 개설과 독일식의 강력한 군주권을 골자로 한 헌법 제정 방침을 정하고 1890년까지 국회를 개설시킨다는 '국회 개설의 칙유'(勅諭)를 발표하여 민권파의 강력한 주장을 무마시켰다. 그리고 1889년 2월 11일에 초안을 몇 번 손질한 대일본 제국 헌법(메이지 헌법)을 반포하여 근대기 일본은 비록 거의 형식적이었지만 입헌 국가로 도약하였다. 1890년에 의회 개설에 의해 천황제의 지배체제가 완성되었다.
제국주의화와 한국 침략.
국회 개설과 더불어 공업의 발흥으로 경제적으로 큰 발전을 본 일본은 한국과 중국으로의 정치 · 경제적 침투를 통해 점차 제국주의를 형성해 나갔다.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를 이김으로써 일본은 타이완을 점령했고, 그 배상금을 기초로 하여 금본위제(金本位制)를 수립,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정비하였다. 또한 이 전쟁으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확보한 일본은 조선 자체에 대한 종속화를 꾀했지만 번번이 조선의 대규모 민족 저항과 부동항(不凍港)을 얻기 위해 조선에 진출하고자 했던 러시아와의 충돌로 인하여 실패했다. 또 조선 왕실도 박영효 등 친일 세력을 추방하는 등 일본의 일방적인 조선 침략에 대한 항의를 표시하자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1896년 경복궁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도록 하였는데 조선 의병(義兵)의 대규모 저항과 고종이 시위의 의미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환궁을 거부하였고, 오히려 일본은 조선에서 입지를 상실하며 국제적인 비난 속에 '경쟁국'이었던 러시아의 입지를 강하게 만들었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계기로 한국에서 입지를 굳힌 러시아는 만주(滿洲)의 러시아령에서 병력을 증강시켜 한반도에의 침투를 강화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러시아와 한반도와 만주의 권익을 둘러싸고 교섭을 진행하였지만 타협을 보지 못하자 1904년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해 러일 전쟁을 치렀고,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영국·미국의 지지와 쓰시마 해협에서의 결정적 승리로 러시아를 축출하고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해 다시금 정치·경제적 침투를 감행하였다. 러일 전쟁 승리 후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은 더욱 노골화하였고, 영국과 미국 간의 밀약으로 조선 지배를 강대국으로부터 인정받은 일본은 대한제국과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 보호국화하여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어서 1907년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면서 한일신협약을 체결해 내정권을 박탈, 군대 또한 강제 해산시켰다. 그리고 1910년 8월 23일 통감부를 '총독부'(總督府)로 바꾸고 육군 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초대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조선총독부와 한반도 지배.
1910년 8월 22일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를 위협하여 국권을 강탈하고, 한반도의 완전한 지배를 위해 대한제국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했던 통감부를 일본 천황이 직접 임명한 총독이 관리하는 조선총독부로 바꾸었다. 또 친일파이거나 일본어에 능통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한제국 관료들의 자리는 일본인들에게 배분되었다. 처음에 일본은 현역 군인을 총독으로 임명하고 군인 출신인 헌병 계층에게 치안 임무를 위임하여 조선인들의 생활을 감시하고 항일 투쟁을 강압적으로 짓밟는 무단 통치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무단 통치에 대항하는 항일 투쟁은 계속 발생하였다. 1919년 3월 1일에는 전국적인 단위로 3·1운동이 일어나, 평화적인 방법으로 일본에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였지만 조선총독부는 무자비한 방법으로 탄압하였다.
3·1운동을 무자비한 방법으로 가까쓰로 진압한 일본은 사이토 마코토를 총독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문화 통치', '산미 증식' 등을 표방하며 처음에는 유화책을 펼치다가 곧 경찰의 병력을 4배 이상 늘리고, 집회와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였으며 친일파의 양성을 꾀하였다. 또한 산미 증식 정책을 통해 쌀을 대량으로 약탈해갔다. 그 과정에서 한민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군 등을 조직하며 계속 저항해나갔다. 1925년 조선총독부는 일본 본토와 같이 치안 유지법을 한반도에도 적용하여 한민족의 독립 운동, 특히 사회주의 독립 운동을 강하게 탄압하였고, 만주사변 이후에는 '민족 말살 정책'을 내세워 한국어 등 한민족과 관련된 고유 교육 또한 금지시키고 징용과 징병, 위안부를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근현대.
다이쇼 시대와 쇼와 초기.
1911년에 성립된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은 행정 및 재정의 정리와 감세를 추진하는 긴축(緊縮)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신해혁명에 위협을 느낀 제국 육군은 한반도에 주둔시킬 제국 육군 제2사단의 증설을 정부에 강하게 요구하였고, 정부는 내각회의를 거쳐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대하여 제국육군대신 우에하라 유사쿠가 사표를 내는 사건이 벌어져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이 총사직하고, 뒤를 이은 제3차 가쓰라 내각은 일본 천황을 앞세워 의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의회를 경시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자 미노베 다쓰키치, 입헌국민당의 이누카이 쓰요시, 입헌정우회의 오자키 유키오 등이 중심이 되어 족벌(族閥)의 타파와 헌정옹호를 내건 호헌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쓰라 다로와 이하 내각이 성립 50일만에 퇴진하는 다이쇼 정변이 발생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1918년)이 발발하자 일본은 영일 동맹을 이유로 연합국측에 가담하여 참전했다. 그 진의는 동아시아 지역에 있어서의 일본의 지위를 더 높이고 국제적인 발언권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독일령이었던 중국 산둥반도의 교주만과 독일령 남양군도를 점령하였다. 이 지역에서의 이권을 할양받는 것을 영국과 프랑스가 승인하는 조건으로 지중해에 소규모 함대만을 파견하는 등 독일과의 직접적인 전투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산둥 반도를 점령하고 나서, 일본은 중국에 대해 만주와 산동반도 등에 대한 일본의 이권을 반영구화하고, 남만주와 내몽골 일부를 일본에 조차하는 것을 요지로 하는 등 21가지 특혜조건을 요구(1915년 1월)하였고, 중국은 이를 수용(5월)할 수 밖에 없었다. (→21개조 요구) 이와 같이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5·4 운동(1919년)과 같은 격렬한 배일(排日) 여론에 밀려 실패하였다. 일본이 이와 같이 아시아의 독보적 강대국으로 인식되면서 급부상하게 되는데, 이 무렵 일본제국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1911~25년)로 경제호황을 누렸다. 한편, 러시아 혁명(1917년)에 뒤이어 일어난 러시아 내전(1917~22년)에서 일본은 러시아 백군을 도와 7만 2천여명의 병력을 시베리아에 파견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이와 같이 다이쇼 시기의 중국과 시베리아 지역에 대한 침략 활동은 번번히 실패하였다.
이러한 침략 활동 실패에도,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 자본주의는 크게 발전하여 미국·영국에 이은 강국으로 상승했고, 베르사유 조약에서 대전 중 획득한 일본의 이권을 인정받었다. 이로써 일본은 경제 불황과 재정 위기를 모두 극복하고 값싼 공장제 상품을 아시아 지역으로 수출하여 막대한 무역 이익을 얻었지만 오래지 않아 유럽 각 나라 생산력 회복으로 말미암아 수출이 줄면서 적자로 돌아섰고, 1923년 9월 1일에 일어난 간토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게이힌의 상공업 지대가 초토화되면서 다시 불황이 찾아온다. 1929년 발생한 세계 대공황으로 일본 자본주의 결함이 크게 드러나는 등 불황이 한층 더 깊어지자 극우 보수 세력과 청년 장교들은 국민 불안감을 앞세워 암살과 쿠데타를 일으키고, 일본 민간 의회 정부는 전복되었다. 일례로 1930년 11월, 만주 침략에 반대했던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는 우파 청년 사고야 도메오(佐郷屋留雄)의 총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제국주의적 무력으로 중국을 침략했고, 1931년 9월에 관동군 주도로 만주사변을 일으켜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1931년 4월 14일 ~ 1931년 12월 13일)을 무시하고서 만주 전역을 점령하여 청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 푸이를 꼭두각시로 앞세워서 만주국을 건국하였다.
그러나 만주국에 대한 중화민국을 비롯한 세계 여론이 부정적으로 흐르자 군부는 국제연맹을 탈퇴하도록 정부를 압박했고, 일본은 사실상 고립 외교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1931년 12월 13일 ~ 1932년 5월 16일)이 만주에서 일본군을 철수시키려는 하자 1932년 5월 15일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를 암살했고, 후임으로 군인 출신 사이토 마코토가 수상(1932년 5월 26일 ~ 1934년 7월 8일)이 되어 '군·정·관에 타협을 통한 거국일치'를 표방함으로써 정당내각은 단절되고, 군부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쇼와 중기.
그러나 사이토 마코토 내각 이후에도 육군 내의 여러 계파의 도전은 계속되어 급기야 1936년 2월 26일 청년 장교들이 내대신, 대장대신 등을 암살한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서 군부의 영향력은 막강해져 히로타 고키 내각 때 군부대신의 현역제가 부활, 사실상 군부가 내각을 좌우하게 되었다. 1936년에는 독일과의 군사동맹을 체결했다. 또 히로타 고키 내각은 화북(hua2 bei2 )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을 일으켜 그 구실로 중화민국을 선전포고 없이 공격하는 중일 전쟁을 일으켰다. 처음에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전쟁의 범위를 확대시키지 않고자 하였지만 곧 전쟁은 화중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1937년 12월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여 난징과 그 주변에서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전시 체제의 장기화에 대비하여 1938년에 국가총동원법을 제정, 일본 열도 내 뿐만이 아니라 한반도 식민지에서의 군부의 경제적 수탈에 기여하였다.
이렇게 중·일 전쟁이 장기화 될 무렵 나치 독일이 이탈리아, 일본과 추축 동맹을 체결하고, 1939년에 폴란드를 공격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처음에 일본은 유럽의 전쟁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방하였으나, 프랑스·네덜란드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하던 1940년에 독일·이탈리아·일본은 군사동맹을 맺고, 1940년에는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가지고 있던 동남아시아의 식민지들을 빼앗기로 하는 남진 정책을 취하기로 결정하였다. 미국·영국·중화민국·네덜란드 등 4개국은 이에 대하여 이른바 ABCD 포위망(America·British·China·Dutch)을 형성하여 석유 등 중요한 전쟁물자에 대해 수출을 금지하여 일본을 경제적으로 압박하기로 결의하였다. 일본은 처음에 미국과의 원만한 교섭을 통하여 이를 해결코자 하였으나 협상이 제대로 진전되지 못하자 고노에 후미마로의 제2차 내각은 퇴진하고 대신 통제파의 도조 히데키 내각이 조직되어 1941년엔 일·소 중립조약을 체결하고, 1941년 12월 1일 개전을 결의하고 같은 해 12월 8일 미국 해군이 주둔하던 하와이 진주만을 급습하고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군에 선전포고하여 태평양 전쟁을 시작하였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표방하며 처음에 말레이 반도, 버마와 타이,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필리핀 등을 점령하는 등 연합군에 타격을 가했다. 그러나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일본이 연패하여 전세가 역전되었다. 반격에 성공한 미국은 일본의 점령 지역을 탈환하였으며 1944년 7월에는 사이판섬을 점령하여 전초 기지로 삼고, 일본 열도의 주요 도시에 무차별 폭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전세가 일본에게 불리하게 흐르자 도조 히데키 총리는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으며, 그 뒤를 고이소 구니아키와 요나이 미쓰마사의 협력 체제인 고이소 내각이 계승했지만 1945년 6월 오키나와섬이 함락되었고, 7월에는 일본군의 항복을 권유하는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어 전세는 계속 불리해져만 갔다. 하지만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묵살하였고, 결국 같은 해 8월 8일 소련이 참전하고 8월 6일과 9일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자 8월 15일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쇼와 천황이 직접 '항복 선언'을 발표하여 전쟁은 종결되었다.
쇼와 후기.
일본의 항복 이후 일본 열도에 진주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은 포츠담 선언에서 결정한 "일본의 전후 처리"를 기초로 하여 점령 정치를 실시하였다. 1945년 9월 도쿄에 연합국군최고사령관 총사령부 (GHQ)가 설치되었고, 일본 제국이 가지고 있던 식민지들은 모두 해방되거나 타이완이나 만주국 같은 경우는 원래대로 중국의 통치 하에 복귀하도록 하였다. 점령 통치는 사실상 미국의 단독 점령의 가까운 형태로 전개되어 그 기본 방침은 민주화의 추진과 군국주의·일본식 제국주의의 배제가 있었다. 그러한 방침을 골자로 하여 같은 해 10월에 여성, 특히 부인(婦人)에 대한 해방과 노동 조합의 허가, 교육의 민주화, 압제적이고 전근대적인 제도의 폐지, 경제의 민주화에 관한 5대 개혁 지령을 발표하여 일본군의 무장 해제, 전쟁을 지휘한 수뇌부의 체포, 치안유지법의 폐지와 정치범의 석방, 이른바 인간선언을 통한 일본 천황의 신격화의 부정, 전쟁을 지원한 대기업들의 해체 등이 이루어졌다.
이어 1946년 11월 3일에는 GHQ의 권고로 기존의 일본 제국 헌법을 폐기하고 민주주의를 기초로 한 새 헌법이 발표되었다. 새 헌법은 주권재민, 평화주의에 따른 군대의 미보유, 인권의 보장, 국회 중심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민법과 형법 등과 같은 하위 법률들도 대폭 개정되어, 일본제국은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민주주의 국가로 재출발했다. 또 1950년 한국 전쟁의 발발로 일본은 미국의 병참 기지가 되었고, 대량의 군수 물자가 생산되는 등 일명 한국 전쟁 특수 경기(特需景氣)로 호황을 누리며 전쟁 이전의 경제력을 회복하고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발효와 함께 주권 또한 회복하여 1956년 유엔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국력의 회복은 다수의 일본인들에게 일본의 부흥과 세계로의 자신감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는 1964년 도쿄 올림픽과 1970년 오사카 만국 박람회를 치르면서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외교적, 군사적으로 일본의 대미 의존도가 크게 높아지고 1960년 미일 안보 조약의 개정에 따른 불평등 주장이 나오면서 이른바 안보투쟁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한 때 집권 자민당 내각을 총사퇴 시키고 많은 국민들이 안보투쟁에 관심을 가지게 할 만큼 크게 일어났으나 정부와 여당의 경제발전정책 수립과 1968년 벌어진 도쿄 대학에서의 극렬 학생운동과 그 정점이었던 야스다 사건이 터짐으로서 주춤하였으며, 1970년 요도호 사건과 1972년 아사마 산장 사건을 계기로 일부 좌익 적군파에 의한 극렬 투쟁이 결정적으로 다수 국민들의 혐오를 삼에 따라 크게 위축되었다.
한편으로 1955년에 하토야마 이치로를 중심으로 하여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의 보수합동이 이루어져 사회당과 함께 55년 체제를 형성, 보수정당이 절대 우위를 차지함으로써 근 40년간 자유민주당의 장기 집권이 이루어져 특정 정당이 오랜 기간 집권함으로써 각종 부작용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헤이세이 시대와 21세기.
1970년대에 이룬 경제의 고도 성장은 1980년대에 이르러 '버블 경제'라고 부를 정도로 일본 경제를 크게 번성시켰다. 그러나 과도한 주가의 증가와 부동산 매입으로 인해 1990년부터 부동산과 주식 가격의 폭락이 진행되어 많은 기업과 은행이 도산하면서 10년 이상 0%의 성장률을 기록하는 불황 상태에 빠졌다. 그로 인하여 지지를 상실한 자유민주당은 한 때 10개월 정도 정권을 상실하기도 하였다가 진보 정당과의 연정을 거쳐 계속 55년 체제의 집권 골격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2009년 8월 30일에 치러진 제45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자유민주당에 압승을 거둬 전후 최초로 완전한 정권 교체 가 이루어져 2009년 9월 16일부로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이 성립하였고, 2010년 6월 하토야마의 사퇴 후 간 나오토 내각이 성립되어 이후 2011년 9월 2일에 노다 내각에 정권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정권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이래 보여준 민주당 내각의 대처와 경기 침체에 대한 반발로 인해 2012년 중의원 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은 참패를 당하고, 자유민주당이 다시 원내 제1당으로 부상하였다. 2012년 12월부터 2019년까지, 자유민주당 소속의 아베 신조가 총리를 지내고 있다. |
3225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25 | MPEG | MPEG(엠펙)는 영문 Moving Picture Experts Group의 약자이다. 국제표준화단체로서의 공식 명칭은 ISO/IEC JTC1/SC29/WG11이다.
MPEG은 ISO 및 IEC 산하에서 비디오와 오디오 등 멀티미디어의 표준의 개발을 담당하는 소규모의 그룹이다. 1988년 캐나다의 오타와에서 첫 모임을 갖은 이래, 현재는 350여명의 다양한 산업계와 학계의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연간 4회의 표준화 총회를 가지며, ITU 산하의 비디오 압축 표준화 단체인 VCEG과 함께 Joint Video Team (JVT)를 구성해 H.264/AVC 표준을 공동 제정하고 있다. (이 표준은 이 공동 표준화를 통해 개발되어 ISO와 ITU 양 측 모두에서 공히 표준으로 인정된다.)
MPEG은 다음과 같은 압축 포맷과 부가 표준을 만들었다.
MPEG은 MPEG-21 이후 빈번히 창안되는 새로운 표준 기술들을 각 분류별로 통합하고자, 아래와 같은 기술 분류별 표준을 창안하여 현재 기술 표준화에 적용하고 있다.
MPEG의 작동원리.
영상 압축.
MPEG 영상 코덱은 변환 코덱을 이용하는 손실 압축 방식을 사용한다. 손실 변환 코덱에서, 그림과 소리의 샘플은 작은 조각으로 나뉘고, 주파수 공간으로 변환되어 양자화된다. 이렇게 조작된 값들은 다시 엔트로피 부호화된다.
MPEG-1, MPEG-2, MPEG-4 등의 동영상 코딩 시스템에는 움직임 보상 등의 과정을 이용하여, 연속되는 두 그림 또는 근처의 그림들 사이의 차이를 경제적으로 전송함으로써 압축이 이루어진다.
MPEG은 스트림 포맷과 디코더(복호기) 표준만을 정한다. 인코더는 표준화되어 있지 않으며, 유효한 비트 스트림을 만들기 위해 참조할 수 있는 예가 제공된다. 다시 말하면, MPEG-4 디코더는 어떤 인코더로 만들어졌는지에 상관없이 모든 MPEG-4 스트림을 디코딩할 수 있다. |
3226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26 | MPEG-2 | MPEG-2(엠펙 투)는 MPEG(Moving Picture Expert Group)이 정한 오디오와 비디오 인코딩(부호화)에 관한 일련의 표준을 말하며, ISO 표준 13818(13818-1은 시스템, 13818-2는 비디오 부호화, 13818-3은 오디오...)로 공표되었다. MPEG-2는 일반적으로 디지털 위성방송, 디지털 유선방송 등의 디지털 방송을 위한 오디오와 비디오 정보 전송을 위해 쓰이고 있다. 또, MPEG-2의 표준을 약간 변형한 인코딩 포맷은 상업 DVD의 표준으로 돌비 디지털, DTS와 함께 사용되고 있다.
MPEG-2 13818-2 비디오 표준은 MPEG-1과 비슷하지만, 텔레비전 방송에서 사용하는 비월주사 방식의 영상을 지원한다. MPEG-2 비디오(부분 2)는 저속 비트율(1 Mbit/s) 환경에는 부적합하지만, 초당 3 메가비트 이상을 요구하는 MPEG-1보다는 향상된 압축률을 보이고 있다. MPEG-2의 MPEG-1과 구별되는 특징으로는 데이터 유실이 많은 전송 환경에도 적합한 트랜스포트 스트림이 정의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으며, 이는 현재 디지털 방송에 사용되고 있다. MPEG-2는 원래 MPEG-3로 개발하려던 HDTV(고선명 텔레비전) 전송의 표준 또한 포함한다. 또한 MPEG-1과도 호환성도 보장되어 표준을 따르는 MPEG-2 디코더는 MPEG-1 스트림도 재생할 수 있다.
이 부분의 표준은 ITU-T의 비디오 코딩 전문가 그룹(Video Coding Experts Group, VCEG)과 ISO/IEC의 동화상 전문가 그룹(Moving Picture Experts Group, MPEG)이 공동으로 표준화를 진행하였으며, 따라서 ITU-T의 H.262와 MPEG의 13818-2는 동일하다.
MPEG-2 13818-3 오디오 표준은 MPEG-1 오디오 표준에서 발전되어 채널의 확장을 하는 MC (다중 채널)과 낮은 표본화 주파수를 제공하는 LSF (낮은 샘플링 주파수:Low Sampling Frequency)(24 kHz, 22.05 kHz, 16 kHz)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두가지 모두 MPEG-1 오디오를 복호화할 수 있는 하위 호환성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알고리즘 측면에서는 추가된 내용이 없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MPEG-1과 동일한 압축율을 가진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MPEG-2에서는 압축율을 높이는 대신, 하위 호환성을 지원하지 않는 AAC (고급 오디오 코딩)를 13818-3이 표준화 된 후 13818-7로 표준화하고 있다. AAC에는 기존 MPEG 오디오에서 사용되지 않던, LTP, TNS, 예측 도구가 추가되었으며 레이어로 구분하던 MPEG-1,2와는 달리 도구의 집합인 프로파일로 구분하여 정의하고 있다. (덜 복잡함, 조절할 수 있는 샘플 속도)
기술.
MPEG-2 표준.
DVD / DVB에서 사용되는 변경된 표준을 제외한 MPEG-2 비디오와 MPEG-2 오디오에 대한 일반 정보.
간략한 MPEG-2 비디오 인코딩 절차.
MPEG-2는 "오디오 신호를 비롯한 동영상의 일반적인 인코딩(부호화)"을 위한 규약이다. 부호화된 비디오 스트림은 화면 내 예측(Intra), 전방 예측(Predictive), 양방향 예측(Bidirectional)의 세가지 프레임들의 배치를 규정한 GOP(Group of Pictures) 구조로 구성된다. 일반적으로 부호화할 원본은 소리가 포함된 일정한 해상도의 영상이 초당 25(CCIR규정) 프레임 또는 초당 29.97(FCC규정) 프레임의 속도로 바뀌는 동영상이다.
MPEG-2는 비월주사(interlaced scan)와 순차주사(progressive scan) 두 가지 방식의 비디오 스트림을 모두 지원한다. 순차주사 방식에선 부호화의 기본 유닛이 프레임(한 장의 영상)이 되고, 비월주사 방식에선 필드(한 장의 영상의 홀수줄, 혹은 짝수줄만으로 이루어짐)이다. 아래 설명에서 "픽처" 혹은 "정지 영상"이라고 말한 것은 각각의 기본 유닛(즉 필드나 프레임)을 가리킨다.
MPEG-2 스트림은 단일 영상을 부호화한 데이터 프레임의 연속이다. 각 정지영상을 부호화하는 방법엔 화면 내 예측(I), 전방 예측(P), 양방향 예측(B) 세 가지가 있다.
각 비디오 이미지는 루미넌스(명도) 성분 Y 와 두 개의 크로미넌스(색차) U, V 채널로 우선 나뉜다. 각각에 대해 공간적으로 "매크로 블록(macroblock)"이라 불리는 16x16 크기의 격자로 나뉘며, 이 매크로 블록이 부호화의 기본적인 조각이 된다. 매크로 블록은 8x8 크기의 "블록" 4개가 합쳐진 것이다. 원본 이미지의 색상 샘플링 포맷에 따라 한 매크로 블록이 8x8 크기의 색차 정보 블록을 가질지, 아니면 16x16을 가질지가 결정된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쓰이는 포맷에서는, 한 색상이 매크로 블록 하나(16x16)당 한 개의 크로미넌스 블록(8x8)만을 갖게 되어, 하나의 매크로 블록은 4개의 명도 정보(Luminance) 블록, 1개의 U블록, 1개의 V블록으로 총 6개의 블록을 갖게 된다.
I 픽처의 경우 이미지 데이터는 다음 문단에서 설명하는 인코딩 절차를 바로 거치게 되며, P (혹은 B) 픽처의 경우엔 우선 "움직임 보상"(motion compensation)이라 불리는 과정을 거쳐 이전 영상(B의 경우엔 이전과 이후의 영상)과의 관련성을 검색하여 이용한 후 다음 인코딩을 진행하게 된다. 움직임 보상에선 P (혹은 B) 픽처로 만들어질 영상의 각 매크로 블록이 이전(B의 경우엔 이후도 포함) 영상의 어느 부분과 가장 관련성이 높은가를 알아내어 그 부분과의 공간상의 변위인 "움직임 벡터"(motion vector)와 두 영상간의 차이가 다음과 같이 부호화되어 전송되게 된다.
각 블록은 8x8 이산 코사인 변환(discrete cosine transformation)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변환으로 얻어진 각 계수들은 미리 정해진 값들로 나누어 양자화 되고, 지그재그로 재배열 된 후 영에 대한 RLC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허프만 코딩으로 부호화를 마친다.
I 픽처 인코딩은 공간적인 반복성에 대한 것이고, P 와 B 픽처는 시간적인 반복성에 대한 것이다. 다시 말해, 동영상을 이루는 이어지는 두개의 정지영상은 서로 상당히 비슷하며, 그래서 P 픽처는 보통 I 픽처의 10%, B 픽처는 2%의 크기로 부호화된다.
이 세 가지 프레임으로 이루어지는 일련의 프레임들은 GOP(Group of Pictures)라 불리는 구조를 이룬다. 다양한 구조의 GOP가 가능하지만 많이 쓰이는 것은 I_BB_P_BB_P_BB_P_BB_P_BB_의 순서로 15개의 프레임이 하나의 GOP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12개의 프레임으로 만들어진 GOP구조도 자주 쓰인다. GOP 구조의 I, P, B 프레임의 구성 비율은 비디오 스트림의 성격, 출력 스트림이 가져야 하는 대역폭(bandwidth)등에 따라 정해진다. 인코딩에 걸리는 시간도 비율을 결정하는 한 요소이다. 이를테면 실시간으로 전송해야 하는 생방송의 경우에 인코딩에 동원되는 자원은 한정되어 있으며, B 픽처가 많이 들어간 스트림은 I 픽처만으로 이루어진 스트림에 비해 인코딩에 3배 정도의 시간이 들 수 있다.
MPEG-2 인코더의 출력 비트율은 일정해야 하거나, 정해진 최대 비트율을 갖고 변할 수 있다. 가변 비트율의 예로 10.4 Mbps를 최대 비트율로 갖는 DVD 영화를 들 수 있다. 일정한 비트율을 얻기 위해서 양자화의 수준을 변경시킬 수 있다. 그러나 양자화가 심하게 될 경우엔 전송된 스트림이 디코딩 된 화면에 격자모양이 나타날 수 있다. 이 현상은 비트율이 내려갈수록 더욱 심각해진다.
MPEG-2 오디오 부호화.
MPEG-2는 또한 새로운 오디오 인코딩 방식을 도입한다. 이는
DVD의 MPEG-2.
DVD 표준에는 다음과 같은 제한 사항이 더해진다.
DVB에서의 MPEG-2.
DVB-MPEG에 더해진 제한 사항. |
3227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27 | 갈리아 전쟁 | 갈리아 전쟁( : Bellum Gallicum, ) 은 기원전 58년에 시작해 기원전 51년에 끝난 로마 공화정과 갈리아 부족간의 전쟁이다.
기원전 5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키살피나, 일리리아, 프로빈키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로마는 당시 갈리아의 독립 켈트족 부족국가들과 교역 및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이두이족은 당시 세콰니족, 헬베티족, 게르만족의 압박을 심하게 받고 있었다. 헬베티족은 대서양에 면한 산토니족의 영토로 이주하기 위해 프로빈키아 속주를 지날 것을 카이사르에게 요청했으나 거절당해 하이두이족과 세콰니족의 영토를 지나려 했다. 이에 하이두이족이 카이사르에게 도움을 요청해 전쟁이 시작되었다.
카이사르는 이후 7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갈리아 전역을 장악하고 로마의 속주로 만들었다. 전쟁 자체는 8년째, 기원전 51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알레시아 공방전의 결과로 전쟁은 실질적으로 끝났으며, 기원전 51년은 전후처리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갈리아 전쟁에 대한 1차 사료로는 카이사르의 저작 《갈리아 전쟁기》가 남아 있다.
전쟁 상황.
전쟁 1년째: 기원전 58년.
기원전 58년 카이사르가 갈리아 키살피나, 프로빈키아, 일리리아의 3개 로마 속주의 총독으로 임지에 도착했다. 게르만족에게 밀려난 헬베티족은 스위스 레만호 동쪽연안에서 아르모리카 지방으로 민족의 대이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하이두이족에게 길을 내달라고 하고 카이사르에게 통과를 요청했으나 카이사르는 허가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헬베티족의 12만 명정도가 라인강을 건너오자 하이두이족과 공동으로 전쟁을 개시했다. 손 강 유역에서 헬베티족을 기습하고, 달아나는 헬베티족을 쫓아 비브락테 전투에서 승리하고 강화를 맺었다.
헬베티족과 전투 이후 갈리아인들은 게르만 부족 중 하나인 수에비족을 물리쳐 달라고 카이사르에게 부탁했다. 카이사르는 수에비족의 수장 아리오비스투스와 협상을 시작했으나 브장송에서 협상을 결렬되고 수에비족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카이사르는 브장송에 겨울 숙영지를 짓고 라인강을 로마의 방위선으로 결정했다.
전쟁 2년째: 기원전 57년.
기원전 57년 카이사르는 다시 한번 갈리아인들 사이의 내부부족의 투쟁에 개입했다. 로마군은 갈리아 북동부 경계선까지 진출하여 레미족과 동맹을 맺고 벨가이의 여러부족과 전투를 벌였다. 벨가이인(현재의 벨기에)은 약 30만 명으로 수에시오네스족의 족장 갈바를 중심으로 로마군에 맞섰다. 카이사르는 센 강을 건너 벨가이인들과 여러차례 전투를 벌였다. 카이사르는 수에시오네스족을 물리치고 벨로바키족, 암비아니족과 차례로 강화를 맺은 다음 지금의 벨기에 영토인 갈리아 북동부를 평정하였고 크라수스의 아들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에게 대서양 연안의 부족을 평정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갈리아 전체가 평화로워 졌고 카이사르는 겨울 숙영지를 갈리아 중서부 (현재의 오를레앙)에 잡았다.
전쟁 3년째: 기원전 56년.
카이사르는 제1차 삼두정치의 주인공들인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차례로 만난 이른바 "루카회담"에서 다시한번 삼두정치의 방향을 정하였다.
그 사이 베네티족을 비롯한 갈리아 서부의 부족들이 로마에 반기를 들었고 카이사르는 브르타뉴 지방으로 이동했다.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로마 해군 선단이 베네티족의 함대 220척을 격파하여 베네티족을 완전히 괴멸시켰다.
한편 카이사르의 부하 장수들도 곳곳에서 카이사르대신 전과를 올렸다. 라인강에서는 티투스 라비에누스가, 노르망디는 사비누스, 아키텐에서는 청년 크라수스가 각각 승리하였다. 카이사르는 노르망디에서 겨울 숙영지를 설치했다.
전쟁 4년째: 기원전 55년.
기원전 55년 카이사르는 라인강으로 진격하여 우시페테스족과 텐크테리족을 쳐부수었다. 오늘날의 독일 본과 쾰른사이의 중간지점에서 다리를 놓아 처음으로 라인강을 넘어 수감부리족을 공격하고 우비족과 화평을 맺었다.
이후 서부로 방향을 돌려 제1차 브리타니아 원정에 나섰다. 그때까지 브리타니아는 일부 지방을 제외하고는 로마에게 미지의 땅이었다. 카이사르는 도버해협을 건너 브리타니아로 건너갔는데 해안가에서 브리타니아인들의 공격을 받았고 격전을 치렀지만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하고 다시 갈리아로 돌아왔다.
한편 카이사르는 아버지 크라수스를 따라 시리아로 원정을 떠나는 크라수스에게 기병 1,000을 주어 보내고 아미앵에서 겨울을 보냈다.
전쟁 5년째: 기원전 54년.
기원전 54년 카이사르는 제2차 브리타니아 원정을 계획하였다. 그전에 트리베리족을 복속시키고 브리타니아를 침공했다. 브리타니아인들은 게릴라 전술로 공격했고 카이사르는 템즈강을 건너 쳐들어가서 브리타니아의 카시벨라우누스와 강화를 맺고 가을에 갈리아로 돌아왔다.
한편 그 해, 갈리아에서는 밀의 수확이 예년에 훨씬 못미쳤다. 카이사르는 군단을 여덞개로 분산하여 겨울을 보내기로 하고 각각 부하장군들에게 나누어 월동했는데 그중의 한군데에서 15개 대대 9,000명의 병사가 에부로네스족의 족장, 암비오릭스의 계략에 말려들어 몰살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네르비족과 아투아투키족도 로마에 반기를 들었고 6만 명의 벨가이족 군대가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겨울 숙영지를 포위하고 공격했다. 카이사르는 즉각 군단을 모아 키케로를 구하러 달려갔고 반란부족을 격파했다. 카이사르는 다시 아미앵에서 겨울을 보냈다.
전쟁 6년째: 기원전 53년.
카이사르는 반란을 일으킨 네르비족을 제압한 후 파리에서 갈리아 부족장 회의를 주재하였다. 이때 참석하지 않은 부족을 반란부족으로 간주하여 압박했고 결국 세노네스족과 카르누테스족의 복종을 받았다. 이로써 배후를 강화한 카이사르는 역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던 트레베리족을 라비에누스에게 격파하게 하고 합류하였다.
카이사르는 다리를 만들어 두 번째로 라인강을 넘어갔으나 깊숙이 추격하지는 않았다. 게르만족과 전면전을 벌이지 않고 다시 돌아와 진지를 짓고 6,000명을 라인강 서쪽에 에 주둔시켰다. 암비오릭스를 쫓아 북쪽으로 추격했으나 결국 붙잡지는 못하고 돌아와 랭스에서 부족장 회의를 다시 주재하고 반란군 주동자를 처형하였다.
전쟁 7년째: 기원전 52년.
기원전 52년 카르누테스족이 오를레앙의 로마인을 살해하고 로마에 반기를 들었고 아르베르니족의 족장이된 베르킨게토릭스가 갈리아 부족의 총궐기를 호소하여 갈리아 부족 대부분이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 카이사르는 프로빈키아에서 갈리아 중부로 달려가 모든 군단을 모아 반기에 맞섰다. 카이사르는 보르주에서 농성하는 갈리아군을 격파하지만 게르고비아에서는 성공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이 틈을 타서 갈리아 부족은 카이사르에게 전투를 걸었지만 카이사르는 이들을 격파하였고 베르킨게토릭스는 알레시아 요새에서 6만 명의 병력으로 농성하였다.
카이사르는 알레시아에 포위망을 구축하지만 갈리아 부족 연합의 20만이 넘는 대군이 포위망을 다시 포위하여 안팎의 적을 상대해야했다. 9월에 벌어진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카이사르는 격전을 치르고 갈리아부족 포위군을 격파하였다. 베르킨게토릭스는 무기를 버리고 카이사르에 투항하였다. 카이사르는 군단을 다시 여덟 군데로 나누어 겨울을 나게하고 자신은 하이투이족의 영토에서 숙영했다. 이로써 사실상의 갈리아 전쟁은 막을 내렸다.
전쟁 8년째: 기원전 51년.
그 겨울 동안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기》 7권을 간행했다. 전쟁 8년째에는 알레시아 공방전이후 전후처리를 하여 모든 부족을 로마에 복속시켰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로마화하고 속주세를 정액제로 바꾸었다. |
3228 | 75578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28 | 로마 | 로마()는 이탈리아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로, 라치오주의 주도이며, 테베레 강 연안에 있다. 로마시의 행정구역 면적은 1,285.31 km2이고, 대도시의 인구는 400만이 넘지만 밀라노나 나폴리 대도시에 비해 면적이 3~4배 넓은 편이고 되려 로마시의 면적과 밀라노와 나폴리의 대도시의 면적이 비슷하므로 세 도시 모두 300만 정도로 비슷한 규모의 도시라 볼 수 있다.
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로마 건국 원년은 기원전 753년으로 2,500여년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얘기되지만, 인류는 3000여년 전에 이 지역에 정착하여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초기 로마는 라틴인, 에트루리아인, 그리고 사비니인으로 구성되었다. 한때는 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도시로서 로마 제국의 수도였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중심지였으며, 그 역사 덕분에 유럽 문명 사회에서는 로마를 가리켜 ‘세계의 머리("Caput mundi")’, ‘영원한 도시("la Città Eterna")’라고 부른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로 로마시는 서서히 교황의 정치적 영향을 받게 되었다. 서기 8세기부터 1870년까지 로마는 교황령의 수도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통일 이후 1871년에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이탈리아의 수도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여름에는 고온건조하다. 원래는 로마의 일부였으나 교황령으로써 독립한 바티칸 시국이 자리잡고 있다. 법적으로는 엄연히 다른 나라이지만 역사·종교·문화적으로 이탈리아, 특히 로마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지역은 거리가 좁고 대부분이 테베레 강가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로마의 과거의 영광의 흔적인 기념 석조물의 대부분은 이 지역에 있다.
이름.
고대 로마의 기원 설화에 따르면, '로마'라는 이름은 도시의 첫 번째 왕이자 설립자인 로물루스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오히려 학자들은 로물루스라는 이름이 도시 로마의 이름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을 따지고 있으며, 그 외에도 다른 학설들이 존재한다.
역사.
로마가 세워지기 전.
로마에서 무려 14,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나온 바 있다. 후대에 출토된 석기, 무기들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다만 이보다 나중에 만들어진 유적들의 잔해들이 워낙 조밀하게 모여있기 때문에,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의 유적 연대 구분을 어렵게 하는 부분이 있다. 당시에는 팔라티노 언덕 위에 소규모의 마을들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형태로 작은 부락이 이루어져 있었으며, 도시의 형태를 완전히 갖추지는 못했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 사이에 팔라티노 언덕 위에 있었던 가장 큰 마을을 중심으로 주변 소규모 부족들이 연합하여 점진적으로 로마로 발전해나갔다는 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연합은 도시의 규모를 키워 농업, 수공업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고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지들과의 무역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발견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신화에서 나온 것처럼 로물루스가 기원전 8세기에 도시 로마를 처음으로 세웠다는 학설도 존재하고 있다.
로마의 설립.
고대 로마의 전설에 따르면, 로마는 기원전 753년 4월 21일, 고대 그리스의 영웅인 아이네아스의 후예이자 전쟁의 신 마르스의 쌍둥이 아들로 태어난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테베레 강가 동쪽에 위치한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인 팔라티노 언덕 위에 건설했다(로물루스와 레무스는 테베레 강가에 버려져 늑대 젖을 먹고 자랐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이후 형제 사이 불화로 싸움이 일어났고, 형인 로물루스가 동생 레무스를 죽이고 도시의 주도권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 후 로물루스는 자기의 이름을 따서 도시 국가의 이름을 로마라고 했고, 로마의 건국 시조로 추대받고 있다. 다만 고고학적으로는 이 땅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때는 전설에서 말하는 것보다 더 빠르며, 기원전 8세기 혹은 9세기경, 북방에서 이탈리아 반도로 이주해 온 민족이 테베레 강 하구에 정착한 게 로마의 시초로 추정하고 있다. 기원전 8세기부터 시작되는 철기 시대 유적은 팔라티노 언덕에서 발견되었지만 전설과 사실은 꼭 일치하지 않는다.
로마는 라틴족의 도시 국가 건설로 출발했다는 게 사실로 여겨지고 있다.
로마 제국.
로물루스의 건국 이후 244년 동안 7명의 왕이 통치한 로마 왕정체제를 이뤘다. 기원전 509년에 마지막 왕이 폐위되었고, 이후 로마는 귀족들에 의해 주도되는 로마 공화정체제로 약 450년간 운영되었다. 로마는 기원전 2, 3세기에 세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년-기원전 146년)과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212년-기원전 168년)으로 지중해를 장악했고, 지중해의 가장 강력한 맹주로 떠오르게 된다. 이후 권력층 사이에 권력투쟁이 두드러지면서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사이에 내전(기원전 88년-기원전 80년)이 발발했으며, 이후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기원전 73-기원전 71)과,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의 제1차 삼두정치(기원전 59-기원전 54)가 뒤따르며 격변이 일어나게 된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기원전 58년-기원전 51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내전(기원전 49년-기원전 45년)의 승리를 통해 종신 독재관으로 권력을 잡지만, 기원전 44년 공화정 지지파인 브루투스등에 의해 암살당한다.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에 의한 제2차 삼두정치(기원전 43-33)가 뒤따랐지만,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을 통해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유일의 권력자가 되어 로마제국시대를 열었다.
기원전 27년부터 서기 68년까지 100여년간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네로 황제의 자살로 막을 내리고, 네 명의 황제의 해라 불린 서기 68년 내전의 승자인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플라비우스 왕조(서기 69-96)가 열린다. 플라비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암살 이후, 로마제국의 황금기인 오현제 시대(96년-169년) 또는 팍스로마나 시대라 불리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뒤따랐다. 제국 최고의 명군으로 평가받는 트라야누스 황제시기(98년-117년)에, 로마제국의 영토는 최대가 된다. 이 시기 로마는 인구 수는 100여만명이 넘어가며,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한다.
192년, 콤모두스 황제의 암살이후 내전이 벌어지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승리하면서 세베루스 왕조(193년-235년)를 열게 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235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의 암살 이후, 40여년간 20여명의 황제가 암살되고 바뀌는 혼란의 군인 황제 시대가 열리는데,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사두 정치를 창안하여 제국의 위기를 막으려 했다. 50여년간의 사두 정치 체계이후,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때 현 이스탄불 위치에 있는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명하고 천도하였고, 395년에 로마제국은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 사후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갈라지게 된다.
로마제국의 수도는 사두 정치 체제때 로마시를 벗어나 지금의 밀라노인 메디올라눔, 현 터키지역의 니코메디아, 현 독일지역의 트리어, 현 세르비아지역의 시르미움 네 군데로 나눠 제국을 통치하였고, 이후 동로마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서로마제국은 이후 라벤나로 천도하면서, 로마시는 정치적 중요성을 잃게 된다.
4, 5세기에 훈족이 서쪽으로 이동하고, 서고트족이나 반달족의 약탈을 받으며 서로마제국은 쇠약해지기 시작한다. 410년에 서고트족에 의해 로마가 함락(로마 약탈 (410년))되고, 455년에는 반달족에 의해 로마가 다시 함락(로마 약탈 (455년))된다. 476년, 게르만 용병 장군 오도아케르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키고, 결국 서로마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르네상스의 중심지.
6세기 이후 동고트 왕족을 정복한 동로마 제국과 랑고바르드 왕국 등 몇몇 게르만족 왕국의 지배를 거쳐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샤를마뉴의 기부장에 따르면 800년 샤를마뉴가 로마 교황청에 로마의 지배권을 주었다고 하나, 오늘날에는 이 문서가 위조된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15세기 중반 이후, 교황령의 수도로서 다시 번창해진 로마는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교황 니콜라오 5세의 치세에는 성벽 개수, 궁전 건설, 교회 수복 공사 등이 이루어졌다. 그에 따라 유명한 예술가나 건축가들이 대거 로마에서 활동하게 되었으며, 15세기 말엽에는 미켈란젤로, 브라만테, 라파엘로 등의 거장들이 교황을 위해 예술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1527년 신성로마제국의 루터교 용병들의 침략을 받아 황폐화되면서(이른바 로마 약탈 사건) 르네상스 시대는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아울러 가옥들이 어수선하고 밀집한 형태를 띤 중세의 도시가 근대화 되기 시작한 때는 16세기 말의 교황 식스토 5세의 시대로, 포폴로 광장에서 도시 중심부로 이어지는 세 개의 도로를 닦았으며, 광장과 샘도 만들어 찬란했던 로마의 모습을 되살려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공사가 끝난 때도 이 시대이다. 대응 종교 개혁 시대 로마의 특징인 바로크 양식은 17세기의 건축물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 시대에 베르니니나 보로미니와 같은 조각가와 건축가들이 로마의 외관을 바꾸어갔다. 18세기에는 교황의 통치 아래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스페인 계단 등에서 볼 수 있는 18세기 전반의 로코코 양식의 건물은 이윽고 신고전주의라는 독특한 건물로 대체되었다. 1797년 나폴레옹 1세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점령, 다수의 귀중한 미술품을 약탈하였다.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한 후 빈 회의의 결정에 따라 로마는 다시 교황령이 되었다.
현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항공기의 발달 덕분에 대한민국을 포함한 아시아나 미국 등 비유럽 지역에서도 다수의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파리나 런던, 마드리드 등과 더불어 유럽을 대표하는 관광도시로서 사랑받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로마는 급격히 성장하여, 밀라노를 제치고 이탈리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정치, 행정적 기능이 집중된 행정수도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본부격인 로마 교황청이 소재한 바티칸 시국이 위치하고 있으며, 국제기관의 관청이 다수 진출해 있는 등 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아베베가 맨발로 뛴 것으로 유명한 1960년 하계 올림픽이 이 곳에서 개최되었다.
행정.
지역 정부.
로마는 '로마 카피탈레 (Roma Capitale, 수도 로마)'란 이름으로 특별 코무네 지위에 올라 있으며, 이탈리아 전 코무네 8,101개 중에서 면적과 인구 모두 제일 큰 코무네이다. 로마 코무네 행정청은 역사상 로마 행정부의 소재지였던 카피톨리노 언덕의 세나토리오 궁전에 자리해 있다. 흔히 로마의 지방 정부를 가리킬 때 이 언덕의 이탈리아어 이름인 '캄피돌리오'라고 부르기도 한다.
행정 구역 및 역사.
로마는 1972년부터 '무니치피오' (municipio, 복수형은 무니치피 (municipi), 2001년까지는 시르코시치오니 (circoscizioni))라는 이름의 행정 구역으로 세분화됐다. 무니치피오는 시내 분권화를 확대한다는 행정 근거를 이유로 설치됐다. 각 무니치피오는 주민이 뽑은 대표와 네 명의 의원이 5년씩 행정을 맡는다. 무니치피오들은 반대로 행정상에 적용되진 않으나 예로부터 전해오는 로마의 각 구역들의 경계와 겹치는 경우가 꽤 많다. 로마의 무니치피오는 처음엔 20개였다가 하나를 제해 19개로 줄었으며, 2013년에는 15개로 다시 축소됐다.
로마는 앞서 언급했다시피 각기 다른 형태의 비행정 구역으로도 나뉜다. 역사 중심부 지역은 22개 리오네로 세분되며, 프라티와 보르고만 제외하면 모두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내에 자리해 있다.
리오네는 고대 로마의 각 지역에서 출발해 중세에 리오네로 발전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르네상스 시대 교황 교황 식스토 5세 시기에는 다시 14개 지역에 이르렀고, 마침내 1743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각 리오네의 경계를 획정했다.
나폴레옹 점령 시기에는 새로운 행정 구역이 잠깐 적용됐으며, 이후 체계상의 큰 변동은 없었다. 그러다 1870년 이탈리아의 세번째 수도로 로마가 되었고, 신수도의 필요성은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안팎의 도시화와 인구 폭증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1874년에는 새롭게 도시화된 지구였던 몬티 리오네에서 15번째 리오네인 에스퀼리노가 갈라져 나왔으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나머지 리오네들도 속속 생겨났다 (마지막은 1921년 신설된 프라티 리오네로, 교황 우르바노 8세 성벽 외곽에 있는 유일한 리오네였다). 이후부터는 로마 시의 새로운 행정 구역명으로 '콰르티에레 (quartiere)'가 사용됐다. 오늘날 모든 리오네는 제1무니치피오의 일부로 속해 있으며, 이 때문에 제1무니치피오는 역사 중심부 (Centro Storico)의 범위와 완전히 일치한다.
광역 및 지방 정부.
로마는 2015년 1월 1일부로 로마 수도 광역시의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이 로마 수도 광역시는 로마 광역권에 북쪽으로 치비타베키아까지 뻗어나갔던 구 로마현을 대체했다. 로마 수도 광역시의 면적은 총 5,353제곱미터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크며, 리구리아주에 맞먹는다. 이와 더불어 로마는 라치오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행정 수도.
로마는 이탈리아의 수도이며 이탈리아 정부의 소재지이다. 이탈리아 공화국 대통령과 이탈리아 공화국 총리의 공식 소재지, 이탈리아 의회의 양원 의사당 소재지, 그리고 이탈리아 헌법재판소 소재지는 모두 로마의 역사 중심부 내에 있다. 국가 행정기관들 역시 시내 전반에 걸쳐 있으며, 대표적으로 올림픽 스타디움 부근 파르네시나 광장에 자리한 이탈리아 외교부 청사를 들 수 있다.
스포츠.
축구는 로마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이다. 로마는 1934년과 1990년 FIFA 월드컵의 결승전을 개최한 적이 있다. 이 두 결승전이 열렸던 스타디오 올림피코는 로마의 스포츠 문화를 대변하는 경기장이자 세리에 A에 속한 AS 로마와 SS 라치오의 홈 경기장이다. AS 로마에서 프란세스코 토티 선수와 다니엘레 데 로시 선수는 모두 로마 태생이며 특별히 인기가 많다. 아틀레티코 로마는 레가 프로 프리마 디비시오네에서 마이너 팀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홈 경기장은 스타디오 플라미니오이다.
로마는 1960년 하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빌라 보르게세나 카라칼라 욕장 등의 고대 유적을 경기장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올림픽 경기를 위해서 올림픽 스타디움, 빌라지오 올림피코 등을 새로 만들었다.
럭비 유니온은 더 많은 영역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스타디오 플라미니오 경기장은 2000년부터 식스 네이션스에서 활동하는 이탈리아 럭비 국가대표팀의 홈구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로마는 유니오네 럭비 카피톨리나, 럭비 로마, S.S. 라치오 같은 지방 럭비 팀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매년 5월이 되면 로마는 포로 이탈리코 클레이 코트에서 ATP 월드 투어 마스터스 1000의 테니스 토너먼트 대회를 개최한다. 사이클은 제2차 세계 대전 기간까지만 해도 인기가 있었으나, 요즘에는 그 인기가 식은 상태이다. 로마는 1989년과 2000년에 지로 디탈리아 결승전을 두 번 개최한 적이 있다. 로마는 그 외의 스포츠 팀들, 예로 들어 농구 (비르투스 로마), 배구 (M. 로마 발리), 핸드볼, 워터 폴로 팀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자매 도시.
로마 시는 1956년부터 파리 시와 독자적으로 파트너 도시 결연을 맺었다.
로마의 자매 도시는 다음과 같다. |
3229 | 330776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29 | 토머스 핀천 | 토머스 핀천( 1937년 5월 8일 - )는 미국의 소설가이다. 20세기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 사조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명이며, 언론과의 접촉을 극도로 기피하여 사생활이 거의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세번째 소설 《중력의 무지개》로 1974년 전미도서상을 수상했다.
생애.
1937년 5월 8일 뉴욕주 롱아일랜드 글렌코브에서 토머스 러글스 핀천 시니어(1907-1995)와 캐서린 프랜시스 베넷(1909-1996)의 세 자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뉴욕주 오이스터베이에 있는 오이스터베이 고등학교를 다니며 "올해의 학생(student of the year)"상을 받기도 했고 학교 신문에 단편소설 여러 편을 기고하기도 했다.
1953년 16세에 코넬 대학교에 입학해서 물리공학(engineering physics)을 전공하다가, 2학년을 마치고 미 해군에 입대했다. 1957년 대학으로 돌아와서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꿨고, 1959년 3월 첫 단편소설 〈이슬비"The Small Rain"〉를 학내 문예지 《Cornell Writer》에 발표했다. 이 작품은 단편소설집 《늦게 배우는 사람"Slow Learner"》에 수록되어 1984년에 재발간되었다. 핀천은 성적우수자 모임인 파이베타카파 클럽의 회원이었고, 1959년 6월 우등 졸업으로 영문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졸업 후 시애틀에 위치한 보잉사에서 기술자료 작성자로 일하면서 1960년 2월부터 첫 장편소설 《브이》를 쓰기 시작했다. 보잉에서 지대공 미사일 등 무기에 관한 기술문서를 작성한 경험은 《브이》와 《제49호 품목의 경매》,《중력의 무지개》등의 창작에 큰 영향을 미쳤다. 《브이》는 1962년 9월에 탈고하여 1963년 출간되었고, 1964년 윌리엄 포크너 재단이 수여하는 '주목할만한 처녀작'(William Faulkner Foundation Award for notable first novel)상을 수상했다.
보잉을 퇴사한 뒤, 뉴욕과 멕시코 등지를 옮겨다니다가 캘리포니아에 정착하여 1970년대 초까지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4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대학원에 수학 전공으로 지원했지만 탈락했다. 1966년에는 직접 경험한 '와츠 폭동'(Watts Riots)에 대한 기고문 〈A Journey Into the Mind of Watts〉을 《뉴욕 타임즈 매거진》에 기고했다.
1966년 두번째 장편소설 《제49호 품목의 경매》를 발표했고, 이 작품은 출간 직후 'Richard and Hilda Rosenthal Foundation Award'을 수상했다.
1973년에는 핀천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대작 《중력의 무지개》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비견되는 높은 평가를 받았고, 핀천은 이 작품으로 1974년 전미도서상을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와 공동수상했다. 같은 해, 퓰리처상 선정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수상작으로 선정되었지만, 이사회가 "읽기 힘들고", "너무 복잡하여 따분하고", "군더더기가 많고",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 1974년 퓰리처상 픽션 부문은 수상작 없이 넘어갔다.
1984년 단편집 《느리게 배우는 사람》을 발표했다. 이후 《바인랜드》(1990), 《Mason & Dixon》(1997), 《Against the Day》(2006)을 차례로 발표했다. 2009년 출간한《Inherent Vice》은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인히어런트 바이스》로 영화화되었다.
1990년대 초반, 자신의 저작권 대리인인 맬러니 잭슨과 결혼했고, 슬하에는 아들 잭슨 핀천이 있다.
비밀스러운 사생활과 대중의 관심.
핀천은 언론과의 접촉을 피하고 얼굴을 드러내기를 싫어하는 성향으로 유명하다. 수십년에 걸친 활동기간동안 공식적으로 사진 촬영을 한 적이 한번도 없으며, 공개된 몇 안되는 사진들은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사진이 대부분이다. |
3230 | 33077764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30 | V. | 《V.》(브이.)는 토머스 핀천의 첫 장편 소설이다. 유럽 역사를 거쳐 등장하는 '브이.'라는 존재의 정체를 파헤치려는 허버트 스텐실의 노력을 그린 작품이다.
《V.》는 수많은 등장인물과 다양한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테마의 축을 이루는 것은 20세기 초반의 '역사의 비인간화'를 상징하는 여러 역사적 사건과 이들 사건 속에 관찰자로서 계속 등장하는 '브이.'라는 여인(?)의 관계를 밝히려는 스텐실의 노력이다. 꽤 취약한 인과관계(브이. 라는 이니셜) 속에서 연관성을 찾아내려는 스텐실의 노력은 소설의 또 하나의 테마를 보여 주는데 그것은 역사 혹은 인간의 존재에 패턴 혹은 계획이 존재하는가 혹은 모든 사건이 서로 무관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스텐실의 노력에 대비되는 것이 기계치인 베니 프로페인(프로페인은 '불경스런'이라는 의미)의 폐인과 같은 삶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의 비인간화를 경계하면서도, 그 치명적 영향을 두려워하여 인간적 접촉과 그에 수반한 감정을 거부한다. |
3263 | 62499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63 | 특수 상대성이론 | 특수 상대성이론(特殊相對性理論, , ), 또는 특수상대론(特殊相對論, )은 빛의 속도에 견줄 만한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들을 다루는 역학 이론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고속의 물체에 대하여 기존의 뉴턴 역학의 갈릴레이 변환을 대체하고, 갈릴레이 변환과 달리 고전전자기학의 맥스웰 방정식과 일관적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갈릴레이 변환 대신 로런츠 변환을 채용한다. 이 이론에서는, 갈릴레오가 주장한 것처럼 모든 관성계가 동등하지만, 전자기학의 맥스웰 방정식과 일관하게 광속이 모든 관성계에서 동등하다. 즉, 빛 (혹은 다른 질량이 없는 입자)의 속도는 이를 방출하는 물체와 관찰자 사이의 상대운동에 무관하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여러 가지 놀라운 예측을 하는데, 이 예측들은 전부 실험에 의해 검증되었다. 로런츠 변환을 도입함에 따라, 시간과 공간을 운동학적으로 더 이상 구별하여 생각할 수 없다. 헤르만 민코프스키는 이 둘을 더하여 시공간이라는 하나의 개체로 생각하고 기하학적으로 다루는 민코프스키 공간을 도입하였다. 이에 따라, 시간과 공간 중 하나에만 의존하는 측정량 (예를 들어 길이, 시간 간격 등)은 서로 다른 관성계에서 서로 다른 값을 가진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에 해당하는 값들을 합쳐서 4차원 벡터로 나타내면 다루기 쉽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는 어떤 일반적 속도 상수(광속)가 존재하므로, 이를 이용하여 질량과 에너지를 관계지을 수 있다. 이론에 따르면, 어떤 계의 질량은 그 계의 운동량 중심의 (순간적인) 관성계에서의 에너지와 같다 (E = mc2). 이를 질량-에너지 등가성이라 한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뉴턴 역학과 같이) 상대성 원리를 오로지 관성계에 대해서만 적용한다. 즉, 가속계는 관성계와 실험적으로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후에 발견된 일반 상대성 이론은 중력을 고려하면 가속계가 관성계와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정확히 말하면, 가속계와 관성계를 구별할 수 없다.) 그러나 강한 중력장이 없는 경우, 특수 상대성 이론은 물리적 현상을 정확히 기술한다. 다루어지는 속도가 빛의 속도에 비해 훨씬 작은 일상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특수 상대성 이론의 예측은 뉴턴 역학의 예측과 일치한다고 한다.
가정.
특수 상대성 이론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가정에서 시작한다.
관성계는 동등하다.
진공에서의 빛의 속력은 어느 관성계에서나 일정하다.
첫 번째 가정은 어느 관성계(속도가 일정한 계)에서든 물리 법칙은 동등하게 적용된다는 뜻이다. 비록 땅에서 볼 때 시속 100 km로 가는 차가 같은 방향으로 시속 50 km로 가는 기차 안에서는 시속 50 km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구체적인 값의 차이와는 달리 두 관성계 모두에서 물리 법칙, 즉 관성의 법칙, 운동량 보존의 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 등은 동등하게 적용된다. 이렇게 모든 관성계에 적용되는 물리 법칙이 같으므로 물리 법칙의 차이를 이용해서 두 관성계를 구분할 수 없다. 따라서 두 관성계는 동등하고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비해 더 '진정한 기준관성계'에 가깝지 않다.
두 번째 가정은 어느 관성계에서 관측하든지 빛의 속도는 동일하게 관측된다는 것이다. 기존의 갈릴레오 변환에서는 관성계 A에 대해 "u"의 속도로 움직이는 관성계 B에서 관측한 어느 물체의 속도가 "v"일 때 관성계 A에서 관측한 물체의 속도는 "u+v"이다. 하지만 이 변환은 빛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즉 관성계 A에 대해 "u"의 속도로 움직이는 관성계 B에서 관측한 빛의 속력이 "c"일 때 관성계 A에서 관측한 빛의 속력은 "u+c"가 아닌 "c"이다.
동시성의 상대성.
특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동시성은 좌표계에 따라 상대적이다. 즉 "동시"라는 것은 좌표계에 따라서 다르게 관측된다는 것이다. 한 좌표계에서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라 관측되었더라도 다른 좌표계에서는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관측될 수 있다.
이 현상의 가장 유명한 예는 다음과 같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버스가 있고 버스의 앞면과 뒷면의 정확한 중앙에 전등이 하나 놓여 있다. 이 전등이 꺼져 있다가 갑자기 켜진다고 하자. 이때 전등에서 나온 빛이 버스의 앞면에 도달하는 사건을 A, 뒷면에 도달하는 사건을 B라 하자. 그러면 버스 안에 있는 사람은 A와 B가 동시에 일어났다고 관측할 것이다. 그 이유는 전등이 앞면과 뒷면의 정중앙에 있기 때문에 앞면과 뒷면으로 향한 빛의 진행 거리가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버스 외부에서 보면 B가 A보다 먼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외부에서 보면 빛은 앞과 뒤를 향해 같은 속력으로 진행하지만 뒷면은 빛을 향해 가까워지고, 앞면은 빛에서 멀어지게 된다. 따라서 뒷면으로 향한 빛이 앞면으로 향한 빛보다 먼저 도착하게 된다. 즉 두 관찰자의 동시가 일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만 적용되는 성질이 아니라 어떠한 두 사건에 대해서도 성립하는 일반적인 법칙이다. 또한 이 성질은 시간 팽창과 길이 수축을 설명하는 데 기본적인 바탕이 된다.
시간 팽창.
시간 팽창(Time dilation)은 어떤 관성계에서 상대속도를 가지는 다른 관성계를 관측할 때 시간이 팽창된 것으로 관측되는 것을 뜻한다. 즉 관성계 A에서 움직이는 다른 관성계 B를 보면 B의 시간이 상대적으로 느리게 가는 것으로 관측된다. 물론 모든 관성계는 동등하기 때문에 역으로 다른 관성계 B에서 관성계 A를 관측하면 A의 시간이 상대적으로 느리게 가는 것으로 관측된다.
정확히는 A에서 관측한 B의 시간이 다음과 같이 보인다.
여기서
이 두 관측 결과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관성계 A에서 B의 시간을 관측하기 위해서는 측정 시작 시각과 끝 시각을 각각 측정해서 두 차이를 구해야 한다. 그런데 B는 움직이고 있으므로 측정 시작 시각의 B의 위치와 끝 시간의 위치 두 곳에 각각 시계를 놓아야 한다. 이때 측정 전에 두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이 같아야 한다. 이렇게 두 시계의 시각을 같게 조정하는 것을 동기화()라 한다. 그러나 A에서 두 시계를 동기화하였더라도 이것을 B가 관측했을 때는 동시성의 상대성에 의해 두 시계가 다른 시각을 가리키는 것으로 관측된다. 따라서 B가 관측하기에는 A가 잘못된 실험을 하는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B의 시간이 A보다 느리게 간다는 A의 관측 결과는 B에게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B에서 A를 관측하는 경우에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실험이 필요하다. A에서 B를 관측할 때는 A에 동기화된 2개의 시계와 B에 하나의 시계가 필요했지만 B에서 A를 관측하는 경우에는 B에 동기화된 2개의 시계와 A에 하나의 시계를 사용해 실험을 한다. 즉 A와 B는 서로 다른 실험을 하는 것이고 따라서 두 결과는 상호 모순적이지 않다.
길이 수축.
길이 수축(Length contraction)은 어떤 관성계에서 상대속도를 가지는 다른 관성계를 관측할 때 길이가 수축된 것으로 관측되는 것을 뜻한다. 즉 관성계 A에서 움직이는 다른 관성계 B를 보면 B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아진 것으로 관측된다. 물론 모든 관성계는 동등하기 때문에 역으로 다른 관성계 B에서 관성계 A를 관측하면 A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아진 것으로 관측된다.
정확히는 A에서 관측한 B의 길이가 다음과 같이 보인다.
여기서
이 두 관측 결과 역시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길이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물체의 양 끝 지점의 위치를 동시에 측정해서 그 차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A에서 두 지점을 동시에 측정하였더라도 이것을 B가 관측했을 때는 동시성의 상대성에 의해 양 끝을 다른 시각에 측정한 것으로 관측된다. 따라서 B가 관측하기에는 A가 잘못된 실험을 하는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B의 길이가 짧아졌다는 A의 관측 결과는 B에게 맞지 않는 것이다.
로런츠 변환.
시간 팽창과 길이 수축은 기존의 갈릴레이 변환으로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는 갈릴레이 변환 대신 로런츠 변환을 쓴다. 만일 어떤 사건이 formula_10계에서 formula_11의 시공간 좌표를 갖고, formula_10에 대해 formula_13의 상대속도를 가지는 formula_14계에서 formula_15의 좌표를 갖는다면, 이 두 좌표들 간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이 변환의 특징은 변환 후에도 빛의 속도는 formula_5로 일정하다는 것이다. 이는 맥스웰 방정식에서 빛의 속도가 좌표계에 관계없이 일정하다고 예측한 사실과 일치한다. 따라서 고전역학의 갈릴레오 변환과 전자기학의 맥스웰 방정식을 모순 없이 결합시켜주는 변환으로 평가된다.
상대론적 운동량과 에너지.
고전 역학에서의 운동량인 formula_21는 더이상 상대론적 속도에서 보존되지 않는다. 그 대신 상대론적 운동량이 보존되는데 그 크기는 다음과 같다.
이 식에서 formula_23라고 하면 고전적인 운동량인 formula_21이 된다.
또한 고전적인 운동에너지인 formula_25 역시 상대론적 속도에서는 성립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식으로 정의된다.
이 식 역시 formula_23일 때 고전적인 운동 에너지인 formula_25이 된다.
질량-에너지 등가성.
그러나 실제로 보존되는 에너지는 운동에너지가 아닌 총에너지 formula_29이다. 이 중 운동에너지가 아닌
을 정지 에너지라 부른다.
그러나 이는 질량과 에너지가 자유롭게 변환 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 이는 질량과 에너지는 완전히 동등하다는 의미로 다시 말해 질량 formula_31의 정의에 가깝다. 이 때의 질량 formula_31을 정지 질량이라 한다. 보다 엄밀한 정지 질량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정지 질량은 어느 관성계에서도 일정하다. 따라서, 오늘날 일반적으로 상대성 이론에서 "질량"이라 하면 정지 질량을 일컫는다.
역사.
맥스웰 방정식에 따르면, 전자기파는 특정한 속도를 지닌다. 1905년 이전에는 학자들은 전자기파가 에테르라고 불리었던 매질 위에서 전파되며, 전자기파의 속도는 에테르에 대하여 상대적인 속도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1887년에 행해진 마이컬슨-몰리 실험은 에테르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였다.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1889년에 조지 피츠제럴드()는 물체가 높은 속도로 움직일 때는 그 길이가 축소된다고 제안하였고, 이에 기반하여 헨드릭 로런츠와 조지프 라모어는 오늘날 로런츠 변환이라고 불리는 변환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 효과들을 에테르에 의한 전기적 효과라고 취급하였다.
1902년 앙리 푸앵카레는 "과학과 가설"이라는 유명한 책에서 공간, 시간, 동시성의 상대성에 대한 고찰을 하였고, 상대성 원리의 반례는 관찰될 수 없으며 에테르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견을 펼쳤지만 동시에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관계된 여러 언급과 함께 에테르 개념을 뒷받침하는 몇가지 주장도 하였다.
1905년 6월 앙리 푸앵카레는 로런츠의 작업에 존재하였던 논리상의 간극을 없애는 논문을 제출하였다. 그는 로런츠의 전기동역학 방정식이 완전히 로런츠-공변이 아님을 보였다. 그럼으로써 그는 그 변환의 군론적 성질을 밝혔고, 전하 밀도와 전류 밀도에 대한 로런츠 변환 공식을 수정하였다. 푸앵카레는 이때 "로런츠 변환"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고,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대칭적 형식을 제시하였다. 그는 길이 수축을 설명하고 전자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푸앵카레 응력"이라고 부른 비-전기적 결합력을 도입하였다. 그는 비-전기적 힘에까지 로런츠-불변성을 확장하여, 중력파를 포함한 로런츠-불변 중력 모델을 묘사하였다.
결국 푸앵카레는 (아인슈타인과는 독립적으로) 그의 6월 논문을 상당히 확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변환들이 최소 작용의 원리에서 도출됨을 보였고 푸앵카레 응력의 몇 가지 성질들을 밝혔다. 더 나아가 로런츠 변환의 군론적 성질들을 더욱 자세히 증명하여 로런츠 군이라는 용어를 만들었으며, formula_34 라는 값이 로런츠 변환에 대해 불변임을 보였다. 중력 이론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로런츠 변환이 단지 사차원 공간에서의 회전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였으며, 사차원 벡터를 사용하였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1905년 논문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역학에 대하여〉()에서 로런츠 변환 및 관련된 공식들이 시공간의 근본적인 성질임을 두 개의 기본 가정 아래 증명하였다. 같은 해에 아인슈타인은 질량-에너지 등가성에 대한 논문 〈물체의 관성이 그 에너지 함량에 관계있는가?〉를 발표하였다. 이 두 논문은 오늘날 특수 상대성 이론의 시초로 평가된다.
이후 독일의 수학자 헤르만 민코프스키가 물리적 장소를 나타내는 3차원과 시간을 나타내는 1차원을 통합하여 비유클리드 기하학적 4차원 공간인 민코프스키 시공간을 제안하였고, 세계선(world line), 고유시간(proper time)등을 도입하였다. 민코프스키는 앞으로 시간과 장소를 따로 보는 기존 관점은 사라지고 오직 4차원 통일체만이 본질적으로 남을것이라고 하였다. 민코프스키의 주장이 알려진 초창기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굳이 민코프스키 공간이라는 추상적 구조를 시공간 묘사에 쓰는것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았으나, 일반상대론을 연구하며 결국 일반상대론의 시공간은 휘어진 민코프스키 공간으로 묘사됨을 알고는 민코프스키의 생각이 필수적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민코프스키 시공간은 또한 양자장론의 발달할 수 있는 초석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
3264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64 | 태국의 역사 | 이 문서는 태국의 역사에 대해서 서술한다.
선사 시대.
동남아시아의 인류 거주사는 50만 년이 넘는다. 최근 이루어진 반치앙 유적(Ban Chiang)의 고고학 조사 등의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4000년에 이미 오늘날의 태국에 초기 청동기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와 함께 벼농사의 발달은 사회적·정치적 조직화를 촉진시켰다. 이와 같은 연구 결과는 이러한 발달이 이곳에서 중국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 지역에 전파되었음을 시사한다.
타이족은 언어학적으로 중국 남부에 있는 여러 집단과 관련이 있다. 6세기와 7세기에 거쳐 중국 남부에서로부터 동남아시아로 집단 이주가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타이족이 남하하기 전에 이 지방에는 선주민인 말레이족, 몬족, 크메르족 등의 문화가 꽃을 피웠다.
수코타이 왕국.
타이인들은 13세기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크메르 제국 지배하에 있던 1238년 수코타이에서 타이 족장들이 크메르를 타도하고 타이인의 왕국을 세웠다고 한다. 수코타이 왕국은 람캄행 왕 시절 오늘날의 타이 지역 거의 전부를 지배하게 되었지만, 그의 죽음과 함께 쇠퇴의 길을 걷다 1365년에 아유타야 왕조의 시암 왕국에 넘어갔다. 아유타야 왕조는 1700년대까지 타이 남부와 중부 지역을 지배한다.
수코타이 왕국이 쇠퇴하자 1350년 차오프라야 강가에 오늘날 타이 왕국의 전신인 시암 왕국이 세워졌다. 수코타이 왕국 시절에도 타이 북부에는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란나타이 왕국이 융성했으며 독립 왕국으로 유지해오다, 1558년 버마와 아유타야와 번갈아 가며 식민통치를받으며, 오랜 기간 동안 존속되다 결국에는 아유타야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시암 왕국.
아유타야 왕조.
아유타야 왕조의 첫째 왕 라마티보디 1세는 타이 역사에 두가지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첫째는 소승 불교를 국교로 제정하고 융성하게 해 힌두교 왕국인 이웃 크메르 제국와 구별되게 한 것이고 둘째는 같은 이름의 힌두교 법률서와 타이의 전통 풍습에 기초해 다르마샤스트라(Dharmashastra)라는 법률을 제정한 것이다. 다르마샤스트라는 19세기까지 타이 법률의 기초가 되었다. 16세기 포르투갈인들을 시작으로 아유타야 왕국은 서양과 접촉을 조금 가졌지만 1800년대까지는 이웃하는 나라들과 인도, 중국 등과의 관계가 우선되었다.
차크리 왕조.
4백 년 이상 계속된 아유타야 왕조는 1767년 버마의 침략으로 수도가 불타고 6개 부분으로 분열되는 운명을 맞았다. 이때 딱신(Taksin) 장군이 타이 왕국을 재통일하여 톤부리에 새로 수도를 정하고 1769년 스스로 왕이 되었다.(톤부리 왕국) 그러나 전해진 바에 의하면 딱신은 정신 이상자가 되어 톤부리 왕국은 1대로 끝나고 1782년 차크리(Chakri) 장군이 라마 1세로 즉위, 차크리 왕조의 첫째 왕이 되었다. 같은 해 그는 톤부리에서 차오프라야 강 건너편에 있는 방콕에 수도를 건설했다.
라마 1세를 이어 왕이 된 후계자들은 1826년 영국이 이웃 버마에서 승리한 일을 계기로 유럽 식민주의의 대두에 대응해야 하는 새로운 과제를 안았다.
타이는 1826년 영국과 맺은 친선·통상 조약(Treaty of Amity and Commerce)으로 최초로 동남아시아 지역 서양 열강의 등장을 인정했다. 1833년에는 미국과 시암(1939년 이전과 1945년-1949년에 사용되었던 타이의 옛이름) 간에 외교관계가 시작되었다. 그 후 몽꿋(라마 4세, 1851년-1868년)와 그의 아들 출라롱꼰(라마 5세, 1868년-1910년) 즉위 하에서 시암은 서양 열강과 친선 관계를 굳게 다졌다. 타이인들은 이들 왕들의 능력 있는 외교력과 타이 정부의 근대화 개혁 때문에 타이가 남아시아·동남아시아를 통틀어 식민지화 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한 유일한 나라로 남을 수 있었다고 여긴다. 이는 타이의 오늘날 국명인 프라텟 타이(1939년-1945년에는 비공식 국명으로 사용, 1949년 5월 11일 공식 국명으로 제정)에서도 볼 수 있는데 프라텟은 '나라', 타이는 '자유로운'이라는 뜻이다.
1909년의 영국-시암 조약은 시암과 영국령 말라야 사이의 국경을 정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국경이 되었다. 이때 말라야의 토후국 파타니와 케다의 일부였던 파타니(Pattani) 주와 얄라(Yala) 주, 나라티왓(Narathiwat) 주, 사툰(Satun) 주가 타이령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입헌 군주국으로 발전하였다.
의원내각제 시대.
1932년 시암 쿠데타로 인해 타이의 정부는 절대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바뀌었다. 쁘라자띠뽁(라마 7세)은 처음에는 이 변화를 수용했지만 후에 당시 10세였던 조카 아난다 마히돌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쁘라자띠뽁은 퇴위하면서 지배자의 의무는 특정 소수뿐만이 아니라 온 국민을 위해 통치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아난다 마히돌(라마 8세)는 1946년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공식 견해는 자신의 총을 청소하다가 실수로 발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동생으로 왕위를 이은 푸미폰 아둔야뎃(라마 9세)는 타이 역사상 재위 기간이 최장인 군주이며 타이 국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다. 타이는 명목상 입헌 군주국이나 1992년까지는 수차례 루앙 피분송크람과 사릿 타나라자타 등의 군사 정권의 지배를 거의 계속 받아왔으며 그 간간히 있던 민주 정부는 대개 단명해왔다. 1992년 선거 이후 타이는 명실공히 민주주의 국가이며 헌법에 따라 정권이 바뀌어 왔다.
제2차 세계 대전 모든 동남아시아는 일본군에 점령당하였으며, 타이 남부까지 일본군에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1945년 일본 패망 이후 타이에서 미국과 영국을 지지했던 이들인 '사리 타이(Saree Thai)'에 힘입어 타이는 미국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버마,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에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자 타이는 그 지역 공산주의 확산을 방지하는 데 힘을 쏟았다. 최근에는 동남아시아 지역 협력체인 아세안(ASEAN)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2006년에는 2006년 타이 쿠데타가 일어나 정국이 혼란해지고, 2008년에는 2008년 타이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
3269 | 10645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69 | 굴 | 굴은 바다에서 사는 굴과의 연체동물 가운데 먹는 것의 총칭이다. 바위에 붙어 살기 때문에 석화(石花)라고도 한다. 조개껍데기 속에는 부드러운 몸체가 있다. 아가미는 음식물을 모아 위에서 소화하도록 하며, 안쪽의 내전근으로 껍질을 여닫는다.
굴은 익혀서 먹기도 하지만 생으로도 먹는데, 중세 유럽에는 미약으로 알려져 있었다. 음식으로서 작용에 대해 자세히 서술한 책으로는 M. F. K. Fisher가 쓴 《Consider the Oyster》라는 책이 있다.
한편 굴은 미국 공익과학센터(CSPI)가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자료를 토대로 열거한 가장 위험한 음식에서 4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는 굴이 노로바이러스나 비브리오에 쉽게 오염되기 때문이다.
굴은 영양가가 풍부해 '바다의 우유'라고도 불린다. 가을부터 겨울 동안에 영양가가 높고 맛이 좋다.
영양 성분과 효능.
굴에는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하다. 비타민A, B1, B2, B12, 철분, 동, 망간, 요오드, 인, 칼슘, 아연 등이 많다. 참굴의 경우 먹을 수 있는 부분 기준 100g 당 인이 115mg, 철분이 75mg이다. 굴의 당질의 대부분은 글리코겐인데, 이 성분은 소화 흡수가 잘 되어서 어린이나 노약자, 환자 등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식품으로 권장된다.
옛날부터 빈혈과 간장병 후의 체력회복에 좋은 강장식품으로 여겨져 왔다. 한방에서는 땀을 흘리지 않게 하고 신경쇠약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여기며, 뇌일혈과 불면증에 좋다고 한다. 굴껍질은 간장 및 장질환과 두통에 가루내어 달여 먹으면 특효가 있다고 한다.
양식.
식용에 이용되는 굴의 종류에는 참굴·아메리카굴·포르투갈굴·호주굴·봄베이굴·갓굴·토굴·유럽굴·올림피아굴 등이다. 굴양식은 옛날부터 중국에서 이루어져 왔으며, 기원전 1세기에 나폴리에서 양식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성숙한 굴은 내만의 수온이 2-5°C로 되는 5-8월이 산란기이다. 수중을 부유하고 있는 유생은 0.4mm 정도로 자라면 바위에 부착하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를 보아 굴껍데기나 큰가리비의 조가비를 연결한 부착기를 바닷속에 넣어 치패(稚貝)를 부착시켜 채묘(採苗)한다. 부착된 치패는 4~5일 정도 경과하면 깨알 정도로 커지는데, 이것을 종(種)굴이라고 한다.
수하식 양식은 종굴이 언제나 바닷속에 잠겨 있으므로 간조시에 노출되는 바위의 굴보다 성장이 빠르다. 굴의 부착성을 이용하여 조개껍데기 등의 부착기에 붙인 다음, 이 부착기를 다시 긴 줄에 꿰어 뗏목·뜸에 매달아 수하시켜 양식한다. 양식생물을 부착시키기 위해 부착기를 꿴 줄을 수하련(垂下連)이라 하며, 현대식 양식은 대부분 이 방법을 쓴다. 수하식 양식에는 말목식·뗏목식·로프(밧줄)식 등이 있다.
말목식(또는 간이 수하식)은 물이 얕은 연안에 말목을 박고, 그 위에 나무를 걸쳐서 수하연을 매달아 양식하는 방법인데 시설이 간단하여 굴의 종묘생산에 많이 이용된다. 뗏목식은 대나무·쇠파이프 등으로 뗏목을 만들고 그 아래에 합성수지로 만든 뜸통을 달아서 부력을 크게 한 것에다 수하연을 매단 것인데, 이 방법은 시설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굴 양식이 시작된 초기에는 많이 쓰였으나 현재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로프식은 연승식(連繩式)이라고도 하는데, 수면에 로프를 뻗쳐 뜸통을 달아 뜨게 하고, 양끝을 닻으로 고정시킨 다음, 이 로프에 수하연을 매단 것이다. 파도에 견디는 힘이 크기 때문에 내만(內灣)뿐 아니라 비교적 외해에도 설치할 수가 있다.
비가 많이 와서 바다에 민물이 많이 유입되면 산소가 모자라 굴이 말라죽는 현상(빈산소수괴)이 홍합, 멍게, 미더덕 양식장 뿐 아니라 굴 양식장에서 발생한다.
생산과 유통.
한국에서 통영은 전체 생산량의 70%를 차지하고 있으며 마른굴, 훈제굴의 형태로 미국과 일본 등으로 매년 수출된다. 중국에서 인기를 끌어 통영굴의 중국수출이 증가하고 있다.
식재료.
걸리버 여행기의 작가 조나단 스위프트는 "굴을 처음 먹어본 사람은 매우 용감한 사람이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선사시대부터 굴을 먹었다는 흔적은 굴 무덤이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서양에서는 굴은 특이하게도 각 달의 영어 이름에 R 자가 들어갈 때만 먹는다. 9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R 자가 들어가지 않은 5월부터 8월까지는 먹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옛날부터 굴은 보리가 패면 먹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수온이 오르면 맛이 없고, 특히 7~8월은 굴의 산란기로 독소가 나오기 때문이다. 날이 추워지는 11월부터 1월까지는 굴 맛의 절정기다.
한식.
한국에서는 생굴로 많이 먹는다. 물에 살짝 헹구어 초장에 찍어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밖에 굴국밥으로 만들어 먹기도 하며, 굴구이, 굴튀김, 굴전, 굴무침 등도 인기 있는 안주이다. 젓갈로 무쳐먹기도 하는데 이를 어리굴젓이라고 부른다. 어리굴젓은 충청남도 서산에서 생산된 것이 가장 유명하다. |
3271 | 94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71 | 갈리아전쟁 | |
3272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72 | 아이스킬로스 | 아이스킬로스( 기원전 525년/524년 - 기원전 456년/455년)는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비극 작가이다. 비극예술의 창조에 기본적인 형태를 부여한 80여편의 작품을 만들었다. 현존하는 것으로는 7편의 작품과 다수의 단편 등이 있다.
생애.
기원전 525년/524년 아테나이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엘레우시스(오늘날의 엘레프시나)에서 귀족인 에우포리온()의 아들로 태어났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기원전 471년에서 기원전 469년 사이에 히에론 왕의 초청으로 시켈리아 섬의 쉬라쿠사이로 여행하여 그 곳에서 비극 《페르시아인들》을 상연하였다. 아이스킬로스는 기원전 456년 겔라에서 사망하기전 또 한 차례(기원전 458년?) 쉬라쿠사이로 건너간 것으로 추측된다. 사튀로스극을 포함 약 90편의 비극을 쓴 것으로 전해지나 현존하는 비극은 학교의 교재로 사용되었던 일곱 편 뿐이다. 아이스킬로스는 기원전 499년 24세의 나이로 비극 경연 대회에 처음으로 참가하나, 나이 40세가 되던 기원전 484년에야 비로소 첫 승을 이룬다. 그는 평생 13회 우승하였다. 그는 아테나이를 떠나 시켈리아의 겔라에서 살다가 그 곳에서 70세로 기원전 456년/455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아테나이를 떠난 까닭은 전해지지 않는다.
업적.
그는 비극 배우의 수를 1명에서 2명으로 늘렸으며, 장식 회화와 도구를 무대장치로 사용하였다. 또한 가면·가발·신 등을 창안하였고, 비극의 3부작 제도를 완성하였다.
그의 주요 공헌을 보면, 비극에서의 합창시의 형식이나 배열을 정비하여 극의 악곡적 구성과 극적 리듬의 통합에 성공했다는 점과, 운율적인 극대화의 기본적 격조를 낳았다는 점, 그리고 비극의 테마로서 제신이나 기괴한 신령에 얽힌 얘기를 즐겨 다루어, 테마에 어울리는 장대하고 화려한 연출방법을 만들어냈다는 점 등일 것이다.
아이스킬로스 비극의 합창대는 어떤 작품에서나, 중대한 위기나 불안에 떠는 군중으로서 극적으로 위치가 주어지고 있으며 합창가는 신을 부르거나 혹은 신을 칭송하는 종래의 제사적인 형태와 기능을 지니면서 동시에 극의 참가자로서의 합창대의 집단적 표현이 되고 있다. 그리고 배우는 그러한 집단을 대표하는 경우도 있고, 또한 그와 반대로 그 적대자가 되는 수도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랜 비극 <페르시아인들>은 배우의 대화에서 운율형식이 일정하지 않아, 장면에 따라서는 이암보스 형식이거나 토로카이오스 형식으로 변하기도 한다. 이것은 작품이 작가의 실험단계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극 구성의 그 자체에도 서로 모순되는 세 가지 면이 은연 중에 병존한다. <페르시아인들>은 말하자면 보고극, 즉 어느 정도 사실적으로 조건이 갖춰진 페르시아 왕궁이란 곳에 중대사건이 보고되고, 그 보고의 서사성에 극적 긴박감이 주어진다는 구성과 망령극, 즉 망령 출현이라는 형태로 사실성을 버리고 초시간적인 수준으로 상상력을 비약시키는 구성이 1편 가운데에서 동시에 사용되고, 또한 마지막으로는 극이란 사건의 당사자가 패배의 슬픔을 서정적으로 노래한다는 취향으로 끝나고 있다. 하나의 극적 사건을 몇 개의 다른 시점(視点)의 수준에서 다뤄 입체적인 깊이를 주고 각각의 시점 사이에 긴장감을 자아내는 그리스 비극 특유의 드라마투르기는 아이스킬로스의 이와 같은 대담한 몇몇 실험이 모태가 되어 서서히 완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그가 비극예술에 대해 품었던 원대한 포부는 3부작 형식으로서 나타난다. 그에게 있어 드라마란 우주의 신비에 대한 시인의 의미 부여이며 또한 인간사회를 움직이는 이상의 탐구이기도 하여, 이 시야를 포괄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연속 테마에 바탕을 둔 3편의 극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그 구상을 훌륭히 구현시킨 <오레스테이아> 3부작(<아가멤논>·<코이포로이>·<에우메니데스>)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
3274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74 | 아가멤논 | 아가멤논()은 그리스 신화의 등장인물로, 미케네 왕국의 와낙스(왕중왕)이다. 그는 아트레우스 왕과 아이로페 왕비의 아들로 메넬라우스의 형제이자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남편이며 이피게니아, 엘렉트라 또는 라오디케, 오레스테스와 크뤼소테미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아가멤논이라는 이름의 인물이 역사상 실재했는지 정확한 답을 내릴 수 없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아가멤논이 처음으로 등장한 후 그를 둘러싼 일화와 전설은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즐겨 다룬 소재 가운데 하나다. 여러 전설들은 아가멤논을 미케네와 아르고스의 왕으로 만들었다.
아가멤논 둘러싼 많은 이야기는 그의 족보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아가멤논은 아트레우스 장남이자 메넬라오스의 형이며,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여러 도시, 특히 아르고스, 미케네, 코린토스 등 지배하는 왕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 동맹군의 총지휘관으로서 120척의 전함이 그의 지휘하에 있었다고 한다. 메넬라우스의 아내 헬레네가 트로이의 파리스에 의해 납치되자, 아가멤논은 그 결과로 벌어진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의 연합군을 지휘했다.
아가멤논은 트로이와 전쟁에서 승리하고서 여러 차례 고비를 넘기고 귀향하지만, 바로 그날 잔치에서 장녀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 일에 원한 품은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역으로 배반당했다.
이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오뒷세이아 11. 409-11에 따르면, 트로이에서 돌아온 아가멤논은 자신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정부, 아이기스투스에 의해 살해당한다.
오래된 이야기에서는 살해 장소가 특정되어 나온다면 보통 아가멤논의 궁전에서 거주하지 않은 아이기스투스의 저택으로 나오며, 아가멤논 추종자들의 사망과 매복 역시 언급된다. 후대의 이야기에서는,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직접 남편을 남편의 저택에서 살해했거나 아이기스투스와 함께 범행을 저질렀다고 나오기도 한다.
어원.
그리스어로 그의 이름은 Ἀγαμέμνων인데 이 이름은 "흔들리지 않는", "불굴의"라는 의미이다. 이 이름은 ἄγαν, "매우"와 μέδομαι, "숙고하는"이라는 뜻으로 구성된 Ἀγαμέδμων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가문의 족보.
제우스 ㅜ 플루토
탄탈로스 ┬ 디오네
펠롭스 ┬ 히포다메이아
티에스테스 아트레우스 ─┬─ 클레올라 ──────────┬ 펠로페이아
펠로페이아 플레이스테네스 아가멤논 메넬라오스
크리소테미스 |
3282 | 66951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82 | 네티켓 | 네티켓(Netiquette) 또는 인터넷 예절 혹은 인터넷 예의는 인터넷 공간에서 지켜야 할 예의범절이다. 영어 네티켓은 네트워크(Network)와 에티켓(Etiquette)의 합성어이다.
네티켓은 법적 제재에 의존하는 타율적 해결보다는 네티즌 스스로 자율적으로 사이버공간의 문제를 미리 방지하고 이성적으로 해결해 나가자는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 (인터넷 공간은 절대로 가상의 익명 공간이 아니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종류.
네티켓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네티켓 십계명.
https://web.archive.org/web/20140319070422/http://www.i-museum.or.kr/sub04/04/netiquette_read2.jsp
1994년 미국 플로리다대학교의 버지니아 셰어 교수가 제시한 '네티켓의 핵심원칙(아래)`이
네티켓을 지키지 않게 되면 생길 수 있는 일.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
3289 | 33098564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89 | 기원전 57년 | |
3290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90 | 기원전 56년 | |
3291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91 | 기원전 55년 | |
3292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92 | 기원전 54년 | |
3293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93 | 기원전 53년 | |
3294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94 | 기원전 52년 | |
3295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95 | 기원전 51년 | |
3296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96 | 기원전 50년 | |
3297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97 | 기원전 49년 | 사망.
전한 선제 |
3298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98 | 기원전 48년 | 사망.
로마의 장군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
3299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99 | 기원전 47년 | |
3300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00 | 기원전 46년 | |
3301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01 | 기원전 45년 | |
3302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02 | 기원전 44년 | 사건.
카이사르 혜성이 관측되다 |
3303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03 | 기원전 43년 | |
3304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04 | 기원전 42년 | |
3305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05 | 기원전 41년 | |
3306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06 | 기원전 40년 | |
3307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07 | 기원전 39년 | |
3308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08 | 기원전 38년 | |
3309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09 | 기원전 37년 | |
3310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10 | 기원전 36년 | |
3311 | 66951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11 | 기원전 35년 | |
3312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12 | 기원전 34년 | 사건.
이곳을 다물도라 함. |
3313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13 | 기원전 33년 | |
3314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14 | 기원전 32년 | |
3315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15 | 기원전 31년 | |
3316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16 | 기원전 30년 | |
3317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17 | 기원전 29년 | |
3318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18 | 기원전 28년 | |
3319 | 70058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19 | 기원전 27년 | |
3320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20 | 기원전 26년 | |
3321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21 | 기원전 25년 | |
3325 | 7174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25 | 일식과 월식 | |
3326 | 3261953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26 | 일식 | 일식(日蝕, , )은 달이 태양의 전부 또는 일부를 가리는 천문현상을 말한다. 지구 표면에서 볼 때의 태양과 달의 시직경이 비슷하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궤도면(황도)과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궤도면(백도)이 거의 일치하여 달이 지구 주위를 돌면서 태양의 앞쪽으로 지나 태양을 가리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 때를 일식이라고 한다. 태양이 달에 완전히 가리면 개기일식(皆旣日蝕), 일부만을 가리면 부분일식(部分日蝕), 해와 달이 겹쳐졌으나 달이 해를 전부 가리지 못해서 반지 모양으로 가려지면 금환식(金環蝕) 또는 금환일식이라 한다.
일식은 태양과 달이 합을 이루는 초하룻날에 볼 수 있지만, 매달 일어나지는 않는다. 달의 궤도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또는 지구에서 볼 때 태양이 지구를 도는) 천구상의 궤도인 황도와 달이 지구를 도는 궤도인 백도는 5도 이상 기울어져 있어서, 달이 드리우는 그림자는 종종 지구를 빗겨 간다. 또한, 달은 타원의 궤도를 돎으로 지구에서 멀어졌을 때 달의 시직경이 태양을 전부 가리지 못할 정도로 작아질 수 있다. 일식은 매년 최소 2회에서 5회까지 발생하며, 그중 개기일식은 2회를 넘지 않는다. 그러나, 지구상의 한 지역에서의 개기일식은 드문데, 이는 일식이 지표면 위로 달의 그림자 또는 본그림자가 지나는 좁은 길을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일식은 자연적인 현상이지만 일부 고대나 근대 문화에서는 초자연적 원인에 의해 일어나거나 불길한 징조로 여겨지기도 했다. 천문학적인 이해가 없는 사람들에는 대낮에 해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기에 두려워할 수 있다.
일식 때 태양을 직접 바라보는 것은 눈에 영구적인 손상을 줄 수 있으므로, 일식 관측에는 특별한 보호 장비(태양 안경 등)나 간접적으로 관측하는 기술이 사용된다. 개기일식에서 완전히 가려진 태양만을 보는 것은 기술적으로는 안전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식의 상태를 식별하는 데 익숙하지 않기에 위험이 있다. 고정된 장소에서 그러한 상태는 2시간여의 총 시간 동안 최고 7.5분 동안만 지속된다. 먼 곳까지 예상된 일식을 관측하기 위해 여행하는 사람들에는 '일식 추적자'(eclipse chasers) 또는 '반그림자 애호가'(umbraphiles)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분류.
일식은 식이 최대로 진행되었을 때의 상태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달의 궤도는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궤도보다 약 5° 기울어져 있어서 일식과 월식은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다. 일식이나 월식은 지구와 태양과 달이 거의 일직선을 이루었을 때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달이 지구에 가까울 때 일식 현상이 일어나면 달이 태양을 완전히 숨기게 되어 이른바 개기일식(皆旣日蝕)이 된다. 그러나 달이 지구보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일식 현상이 일어나면 달은 태양을 다 가리지 못하여 주변이 반지처럼 남는 금환식(金環蝕)이 된다.
개기일식에서는 달그림자가 원뿔 모양으로 늘어나 그 꼭짓점이 지구 표면에 도달한다. 이 그림자를 본영(本影)이라 한다. 이 지점에서 보면 개기일식이 된다. 본영의 바깥쪽에 있는 넓은 반영(半影) 부분에서 보면 달의 중심이 태양의 중심에서 빗나가 있어 이른바 부분일식을 볼 수 있다.
달의 궤도 운동에 의해 개기일식을 볼 수 있는 지점은 지구 표면 위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옮겨간다. 그림자의 중심이 지나가는 지점에서 관측할 때, 달은 서쪽에서 태양을 뒤쫓아와 태양의 모양이 이지러지기 시작하여 부분일식이 되며, 이 부분일식이 점차 깊어져 개기일식이 되고, 그것이 끝나면 다시 태양이 서쪽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다시 부분을 가리게 된다.
개기일식이 이어지는 시간은 길어도 7분 30초 정도이다. 개기일식이 되면 눈부신 태양 반구가 달에 가려지기 때문에 태양의 상층 대기인 채층(彩層)이나 그 위쪽으로 확산되는 코로나를 관측할 수 있다. 금환식 때는 달 그림자 본영의 꼭짓점이 지구 표면에 도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연장선상의 지점에서 보는 것이 되므로, 달이 태양보다 작아 보이는 금환식이 된다. 반영이 넓은 지역에서 부분 일식을 볼 수 있는 것은 개기일식의 경우와 같다. 금환식에서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감에 따라 달이 오른쪽(서쪽)에서 태양을 쫓아 추월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멀어지고, 태양까지의 거리가 다소 가까워지면 달의 시지름이 태양의 시지름보다 상대적으로 작아지는데, 이때 달이 태양의 광구(光球)를 완전히 가리지 못하므로 본영(本影)이 지표에까지 닿지 못하여 금환식현상이 생긴다. 달그림자는 지표 표면을 서에서 동으로 이동해 간다. 본영이 지구 전체로 보면 최초로 상륙하는 것은 일출 지점이며, 이 지점에서는 달과 지표와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본영의 꼭짓점이 지표에 도달하지 않고 금환식이 된다. 그러나 본영이 동쪽으로 옮겨가서 낮에 일식이 일어나는 지점에 접어들 무렵에는 지구의 반지름 정도 되는 달과 지표 사이의 거리가 좁아지게 되므로 본영의 꼭짓점이 지표에 도달하여 개기일식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본영이 동쪽으로 옮겨가서 지구 전체적으로 일식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지점에 이르면 일식은 그 지방의 일몰 전에 일어나 다시 금환식이 된다. 이와 같이 하나의 일식이 지역에 따라 개기일식이 되거나 금환식이 되는 경우를 금환 개기식이라 한다. 또 달이 태양을 추월하여 일식이 일어날 때 달이 태양의 북쪽 또는 남쪽을 통과하면 개기일식이나 금환식은 일어나지 않고 부분 일식으로 끝나 버리는 경우도 있다.
발생.
개기 일식은 전지구적으로는 약 18개월에 한 번씩 일어나지만, 특정한 장소에서 개기 일식이 일어날 확률은 평균 370년에 한 번 꼴이다.
지상전체로 볼 때, 한 해를 기준으로, 일식은 적어도 2회, 많으면 5회까지 일어날 수 있다.
발생 원인.
달은 태양보다 400배 더 작다. 그러나 태양은 달보다 400배 정도 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달이 태양과 겹쳐지면 일식이 일어나는 것이다.
중력.
역
1919년 아서 에딩턴경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른 중력장에서의 빛의 굴절을 일식을 통하여 관측하였다. 오늘날에는 중력 이상이 일어난다는 주장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경제학자 모리스 알레는 진자가 일식기간 이상하게 움직이는 사실을 관측하여 알레 효과(Allais effect)라는 이름이 붙었다. 오늘날 중력을 달이 가리는 중력 가리움이 있다면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보고 이것이 사실인지 연구하고 있다.
점성술.
1999년 8월 11일, 20세기 마지막 개기일식과 관련, 유명 스페인 디자이너이자 점성술사로도 알려진 파코 라반은 일식이 시작되면 우주정거장 미르가 파리로 추락할 것이라고 했다. 예언이 빗나가자 사과했다. 독일의 주식시장 점성술사인 우베 크라우스는 "일반적으로 개기일식은 시장을 불안하게 한다"고 말했다. 또한 미국의 투자분석가인 아치 크로포드는 "세기말에 일어나는 개기일식으로 인해 주가가 폭락할 가능성이 있다"라고 전망했지만, 예언은 빗나갔다.
2009년 7월 22일, 중국과 인도의 개기일식과 관련, 뭄바이의 한 점성술사는 인도에서 카슈미르 지방의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이슬람교 원리주의 무장세력이나 국제테러조직 알 카에다에 의한 공격이 발생해 명망있는 정치지도자가 암살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일식을 불길하게 여기는 힌두신화의 영향으로 인도에서는 제왕절개 수술을 예정했던 임산부들의 수술날짜 변경 의뢰가 잇따랐다.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역사에 비춰보면 일식이 빈번하게 출현했던 시기에 폭동이나 전쟁, 그리고 자연재해가 발생할 확률은 95%"라는 주장을 담은 게시물이 급속도로 퍼졌다.
2017년 8월 21일, 미국의 개기일식과 관련, 크로포드 퍼스펙티브의 편집자 아치 크로포드의 뉴스레터에 따르면 2008년 1월 러시아에서 일식이 있었고, 6일이 지나 러시아는 과거 소비에트 연방 소속이었던 조지아와 전쟁을 치렀다. 크래포드는 오는 21일 예정된 개기일식을 두고 "호전적인 반응이 즉각 나타날 것"이라며 "좋든 싫든 간에 역사적인 사건이 미국과 관련해서 발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크로포드는 기술적 분석과 행성 주기 등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투자자문업자다. |
3327 | 3261954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27 | 월식 | 월식(月蝕, , )은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들어와 보이지 않는 현상이다. 월식은 태양 - 지구 - 달의 위치로 배열될 때 일어나게 되며 이때 달의 위상은 보름달인 망이 된다. 월식은 달이 지구의 본 그림자 속에 들어갈 때 관측되는 개기 월식()과 달이 지구의 본 그림자와 반 그림자 사이에 위치할 때 관측되는 부분 월식으로 나뉜다. 이 때, 지구의 그림자에 들어간 달표면에서는 개기 일식이 일어난다. 월식은 일 년에 2번 이상은 일어난다. 월식은 지구의 밤인 곳 어디에서나 볼 수 있기 때문에 월식이 자주 관측된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월식이 일어날 때의 그림자가 지구의 그림자이며, 이것은 지구가 둥글다는 증거라고 하였다.
붉은 달.
개기월식이 일어날 때 달이 붉은색으로 보이게 되는 것은 지구 대기에 의한 산란 때문인데, 태양에서 나온 빛 중 파장이 짧은 푸른 빛이 산란되고 결과적으로 파장이 긴 붉은 빛이 달에 반사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월식이 일어날 때 달의 위상이 이지러지는 방법은 보통 초승달이나 상현달과는 전혀 다른 모양이다. |
3328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28 | 이산 코사인 변환 | 이산 코사인 변환, DCT(discrete cosine transform)는 이산 푸리에 변환(DFT)과 유사한 변환이다. 이산여현변환(離散餘弦變換)이라고 하기도 한다. 수식적으로는 길이가 두 배이고 실수값을 가지는 짝함수에 DFT 연산을 수행하는 것과 동일하다. 실수값을 가지는 짝함수의 푸리에 변환도 실수값을 가지는 짝함수이기 때문이다. 입력/출력 데이터를 반 샘플 정도 이동시키는 등 8가지의 변형이 있는데 그중에서 4가지가 널리 사용된다.
가장 널리 쓰이는 변형 DCT 알고리즘은 type-II DCT인데, 이것을 그냥 "DCT"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이것의 역변환이 type-III DCT인데 마찬가지로 단순히 "역DCT"혹은 "IDCT"라고 부른다.
DCT와 연관된 변환은 두 가지가 있다. 이산 사인 변환 (DST)은 실수 값을 가지는 홀함수의 DFT와 동일하며, 변형 이산 코사인 변환 (MDCT)은 다른 하나는 겹치는 데이터를 사용한다.
응용.
실수 신호에 대하여, 변환 결과물이 복소수로 나오는 DFT와는 달리 실수로만 결과물이 나오기 때문에, 처리하기가 간편하여 신호처리 및 영상처리에 널리 사용한다. 특히 신호의 에너지 성분 대부분이 저주파 성분 일부에 집중되는 '에너지 집중 현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손실 압축에 널리 사용한다. 예를 들어, JPEG 영상 압축, MJPEG, MPEG, 디브이 동영상 압축등에서 DCT를 사용한다. "N" × "N" 블록에 2차원 DCT-II을 적용하고, 결과값을 양자화하고 엔트로피 부호화한다. 이때, "N"값은 보통 8이며 이 블록의 행과 열에 DCT-II 공식을 적용한다. 결과값은 8 × 8 변환 계수 행렬이며, (0,0) 원소는 (주파수가 0인) 직류 성분이고 나머지 성분은 점점 주파수가 커지는 순서로 배열된다.
변형 이산 코사인 변환 (modified discrete cosine transform, 줄여서 MDCT)는 AAC, Vorbis, MP3 등의 오디오 압축에 사용한다. DCT는 편미분 방정식을 푸는데도 사용할 수 있다.
엄밀한 정의.
이산 코사인 변환은 역함수가 존재하는 선형함수 "F" : R"N" → R"N"이다. (R은 실수의 집합이다.) 또는 "N" × "N" 정사각행렬로 나타낼 수도 있다. DCT의 정의는 약간씩 다를 수 있다. 아래 공식 중 하나를 이용하여 "N"개의 실수 "x"0, ..., "x""N"-1가 "N"개의 실수 "f"0, ..., "f""N"-1로 변형한다.
역변환.
DCT-I의 역변환은 DCT-I에 2/("N"-1)을 곱한 것이다. DCT-IV의 역변환은 DCT-IV에 2/"N"을 곱한 것이다. DCT-II의 역변환은 DCT-III에 2/"N"을 곱한 것이며, DCT-III의 역변환은 DCT-II에 2/"N"을 곱한 것이다.
DFT과 마찬가지로, 관습적으로 변환 공식 앞에 일정한 수를 곱해서 정규화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따르지 않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역변환 공식 앞에 곱하는 수를 없애기 위해서 변환 공식 자체에 formula_1를 곱하기도 한다.
계산.
공식을 그대로 적용하면 O("N"2)의 연산이 필요하지만, 고속 푸리에 변환(FFT)과 마찬가지로 계산 과정을 분해하여 O("N" log "N")만큼의 연산으로 계산할 수도 있다. O("N")만큼의 전처리 및 후처리 과정을 통해 DCT를 FFT로 변환하여 계산할 수도 있다. |
3329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29 | 탈레스 | 탈레스(, Thales, 기원전 6세기(대략 기원전 625년~기원전 624년 경~대략 기원전 547년~기원전 546년 경)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밀레토스 학파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칭했다. 그리고 현재의 사람들한테 탈레스는 최초의 철학자, 최초의 수학자, 최초의 고대 그리스 7대 현인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확실하진 않지만, 탈레스가 피타고라스의 스승이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운동 경기 관람 중에 탈수증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사망지는 알려지지 않음.)
탈레스의 생애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지만, 믿을 만한 고대 저술가들의 이야기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탈레스는 소아시아 이오니아 지방의 밀레토스라는 도시 출신이며, 여러 분야에서 학식이 넓었다고 한다. 탈레스는 이집트 여행의 영향으로, 수학과 천문학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수학과 천문학에 관련된 업적들이 아주 많은데,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천문학을 이용해서 기원전 585년에 일어나는 일식을 예언한 것이 있다. 또한, 수학의 기하학적 방법을 빌어서 이집트에서도 가장 큰 피라미드라고 알려져 있는 쿠푸 왕의 대피라미드의 높이를 측정한 업적도 유명하다.
철학자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 따르면, 밤에 별을 보면서 걷다가 우물에 떨어졌는데, 이것을 본 영리한 트라키아 하녀가 "하늘의 이치를 알려고 하면서 바로 앞의 우물은 보시지 못하는군요!"라고 비웃었다는 일화가 있다고 한다.
탈레스에 관해서는 이런 일화도 있다. 어느 날, 탈레스의 친구가 "이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 돈 있는 사람들만 잘 살고, 돈 없는 사람들은 못 사는 더러운 세상 같으니라고!"라고 말하자, "친구! 돈을 잘 벌 수 있는 방법은 널려 있어. 머리를 한 번 써보라구."라고 탈레스가 되받아쳤다. 그러자 그 친구는 "넌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겠지? 어디 내가 여행을 다녀올 때까지 돈을 많이 벌어 보게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탈레스는 그 말을 듣고, 돈 버는 일에 몰두하게 됐다. 그리고 친구가 돌아와서 보니, 탈레스는 친구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돈을 갖고 있었다. 과연 탈레스는 무슨 방법을 썼을까? 당시에는 올리브가 아주 귀한 것이었는데 쓰는 용도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구가 여행을 떠난 후, 올리브의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것을 유심히 관찰한 탈레스는 올리브의 생산량이 좋을 때와 좋지 않을 때는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탈레스는 마을을 돌아 다니면서 기름 압축기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마당만 차지하는 기름 압축기를 기꺼이 팔았다. 올리브가 풍작일 때, 탈레스는 마을의 거의 모든 압축기를 소유하고 있었다. 탈레스는 기름 압축기를 사람들한테 빌려 주면서, 큰 돈을 벌 수 있었던 거라고 한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따르면,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주장했으며, 따라서 만물이 모두 물로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땅도 물 위에 떠 있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탈레스에 관해서 그의 견해를 체계적으로 세워보기에는 알려진 바가 너무나 적다고 한다. 그러나 그 외에도 밀레토스 학파에 대해서는 더 많은 바가 알려져 있다. 그의 생각은 아낙시만드로스가 이어받아, "가장 1차적인 만물의 근원"을 찾으려 했으며, 아낙시만드로스의 친구인 아낙시메네스는 만물의 근원을 "공기"라고 주장하게 된다.
한편,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탈레스가 직접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또한, 전기 발생 실험을 최초로 행한 사람이 바로 탈레스라고 한다. 여담으로,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 도자기가 진열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어서 확실하지는 않다고 한다.
탈레스의 정리.
탈레스가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기하학의 정리 5가지가 있는데, 이것을 믿을 수 있는 저술가들의 글을 통해서 추측해 보면 다음과 같다. |
3330 | 529523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30 | 이광수 | 리광수(李光洙, ~ )는 일제강점기의 언론인, 문학가, 시인, 평론가, 번역가이며 애국 계몽 운동가의 공로가 있으나, 최남선과 함께 거론되는 변절한 친일파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조선 목조의 차남 안원대군의 후손이기도 하다. 자는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고주(孤舟)·외배·올보리·장백산인(長白山人)이며, 필명으로 춘원생, 경서학인(京西學人), 노아자닷뫼당백, Y생, 장백, 장백산인 등을 사용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 운동에 참여, 신한청년당과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지 신한청년(新韓靑年)에도 주필로서 참여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에서 언론인 활동으로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또한 문학 번역가로도 활동하며 영미권의 작품을 한국어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순한글체 소설을 쓰는 등 소설 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기도 한 인물로 평가되며, 소설가로는 구한 말과 일제강점기 시대 동안 '만인의 연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청소년 남녀 문인들의 우상이었고,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다.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이후 일본 유학 중에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하였다.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망명, 1919년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그후 독립운동지 신한청년 등에서 주필을 역임하였다.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대한의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에 홍보하려 노력하였으며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활동했다. 하지만 허영숙이 상하이로 찾아와 귀국을 종용하자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접고 1921년 3월 귀국하여 허영숙과 결혼하였다. 1922년 5월 개벽지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도덕적 타락'이 한민족의 쇠퇴의 원인이라며 비판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재생(再生)》, 《마의태자(麻衣太子)》, 《단종애사(端宗哀史)》, 《흙》 등 많은 작품을 쓰며 독립운동을 계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반년 간 투옥되었었는데, 이후 친일 성향으로 기울어져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이 되어 전선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하였다. 1940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창씨와 나」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고, 창씨개명 정책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이외에도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 「지원병 장행가」, 「지원병훈련소의 하루」 등을 발표하고, 일본어 산문집 「동포에 부침」이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간행되었다. 1941년 9월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지지하였고, 영미타도대강연회에서 ‘사상 함께 영미를 격멸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특히 일본제국의 징병제를 선전하고 긍정하는 내용의 글과 연설을 한 것이 가장 눈에 띄는데, 그는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징병제도 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으며, 『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1943년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으로 활동하였고 같은 달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주재의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결전태세즉응(決戰態勢卽應) 재선(在鮮)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으며, 8월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란 제목으로 강연, 1945년 2월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 및 대의당(大義黨) 위원이 되었다.
해방 이후 백범일지의 교정, 윤문과 안창호의 일대기 집필을 직접 맡아 주관하기도 했다. 1949년 반민특위에 기소가 제기됐으나 석방되었고, 1950년 6월 한국 전쟁 때에 서울에 있다가 북한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그간 생사불명이다가 1950년 만포에서 병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생애.
생애 초반.
출생과 가계.
이광수는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신리 940번지 익성동에서 아버지는 전주이씨 안원대군의 후손인 이종원(李鍾元)과 어머니 충주 김씨(忠州金氏)의 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형 세명은 모두 요절하여 사실상의 독자가 되었다. 아버지 이종원은 42세였고 두 번 상처한 후 재혼한 상태였으며, 어머니 충주 김씨는 세 번째 부인이었다.
이광수의 가계는 조선 태조의 고조부인 조선 목조의 장남 안원대군 진(珍)의 22대손이 된다. 조선 건국 후 안원대군(安原大君)으로 추증된다. 그 뒤 21대조 사마 시(施)는 종정경 평해군(平海君), 20대조 행 원주병마만호(行原州兵馬萬戶) 희무(希武)는 종정경 윤산군(崙山君), 19대조 진사 춘흥(春興)은 종정경 동남군(潼南君)인데 이들은 모두 생전에 왕족을 지낸 것이 아니고, 조선 건국 후 한참 지난 1872년(고종 9)에 왕족의 예로서 군으로 추증된 벼슬들이다.
그의 가계는 이후 농민처럼 지내다가 6대조 때부터는 아들이 하나라서 4대 독자였고, 할아버지 리건규가 아버지 형제를 보았다.
어릴적 이름은 보경(寶鏡)이다. 그가 태어날 때 아버지 종원은 꿈에 늙은 승려 한 사람이 거울을 주고 가는 꿈을 꾸고 그를 낳았다 하여 이름을 보경이라 하였다. 춘원이라는 아호(雅號) 외에 고주(孤舟)·외배·올보리라는 별호도 있다.
할아버지 건규(建圭)는 증조부가 학행과 효자 정려를 받았으므로 음서로 통덕랑을 지냈지만,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시와 글씨와 술을 즐기다가 기생 한 명을 첩으로 들인 뒤 주막집을 차렸다. 아버지 이종원은 초시에는 합격했지만 소과와 대과에 연속으로 실패하면서 술로 세월을 보냈다.
평안도 정주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평안도 의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그 후 집안의 가난과 세를 댈 돈이 없어 이광수가 유아기 중후반일 무렵 정주군 내에서만 9번 이사를 다녔다. 그위 위로 형이 세 명 있었으나 모두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3세를 넘기지 못하고 요절하였으므로 유년기에 심한 기침과 발작을 한 것을 본 일가들은 그가 일찍 죽을 것이라 예상하였으나 한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5,6세가 되도록 잔병치레가 심하여 부모의 간호를 받거나 의원이 그의 집을 자주 출입하였다.
5세에 한글과 천자문을 깨치고 8세에 동네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일찍부터 글을 떼고 기억력이 남달리 좋아 신동 소리를 들었다. 처음 이름은 보경이라 하였다가 뒤에 광수로 개명하였다.
소년기.
그에게는 이복형제들이 여러 명 있었고, 친형제로는 위로 친형 세 명이 요절하였고, 여동생 두 명이 있었다. 부모를 잃은 뒤 이복형제들과는 연락이 끊겼고, 친 여동생 중 3년 연하인 애경은 만주 영구에 사는 사람과 결혼해서 살다가 1936년에 사망했고, 여동생 애란은 부모를 잃은 뒤 어떤 집의 민며느리로 들어갔다가 결혼 이듬해에 죽었다.
5세에는 천자문을 깨우치고 소학과 명심보감까지 읽어내려갔으며 외할머니에게 《덜걱전》, 《소대성전》, 《장풍운전》 등을 읽어드릴 정도로 명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가정 형편으로 좋은 학교를 보낼수 없어 8세경에는 동리의 글방에서 《사략》, 《대학》, 《중용》, 《맹자》, 《고문진보》 등을 배웠으며 한시와 부(賦)를 지었다. 그 뒤 한시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신동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집은 지독하게 가난했다. 어머니가 뽕나무 잎을 도둑질해서 키웠다 고도 한다. 가난한 집안 환경과 말수 적고 병약한 그는 혼자 사색을 하거나 책을 읽는 것으로 소일하였다. 그의 몇 안되는 친구로는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후일 시인이 된 백석(본명은 백기행), 근처 곽산면 출신 김소월 등이 있었다.
열 살에 담배장사를 시작했던 이광수는 평생 고아 콤플렉스에 시달리기도 했다. 더구나 그의 어머니가 삼취부인이라는 점을 들먹이면서 그를 무시하며 괴롭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청소년기.
불우한 청소년기.
가세가 기울자 담배 장사를 하던 중, 그의 부모는 이광수가 11세가 되던 해(1902년 8월)에 전염병 콜레라로 별세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이후의 그의 성장 과정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누이동생 둘과 고아가 되어 외가와 재당숙 할아버지 집을 오가며 자랐다. 그의 집안은 태조 이성계의 방계 후손이었지만 춘원 스스로 왕족이라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태조의 직계 후손도 아니라서 왕족으로서의 예우도 받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성리학에 대한 상당한 비판적인 의식을 지니게 된다.
고아가 된 그는 재종조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동생들을 두고 재종조부 집을 나와, 경성부 근처에서 육체노동과 상점의 종업원 등을 전전하였다. 어려서 폐렴과 결핵을 얻었는데 병원에 가서 고칠 비용도 없고 치료시기를 놓치면서 평생 병약했다. 가난의 설움을 속 깊이 느꼈으며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이광수에 대한 주변의 멸시와 무시, 무심한 어른들의 막말과 욕설은 그에게 심한 상처와 좌절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육체노동과 상점 종업원 등을 전전하던 그를 딱하게 여긴 어느 천도교인이 그를 위로하였고, 그 호의에 깊이 감명받은 그는 천도교에 입교를 결심한다.
중학교 입학.
그 뒤 이광수는 우연히 문필과 관련이 되는 직업에 종사하였으며, 1903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박찬명 대령의 집에 기숙하면서 도쿄와 한성부에서 오는 문서를 베끼고 배포하는 일을 했다. 그 뒤 재능을 인정받아 천도교의 서기일을 맡아 보기도 했다.
이 무렵 경성부에서 열린 이승훈과 안창호, 유길준의 초빙 강연을 듣고 감화된 그는 이승훈, 안창호, 유길준의 연설, 어록 등을 입수하여 탐독하곤 하였다. 그는 후일 자신의 사표이자 민족의 사표로 이승훈, 안창호, 유길준을 손꼽기도 했다.
1904년(광무 8년) 일본 관헌이 천도교(동학)을 탄압하자 진남포에서 배편으로 제물포(인천)를 거쳐 상경했다. 1905년 천도교와 관련된 일진회(一進會)의 유학생 자격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바로 타이세이 중학교(大城中學)에 입학하였으나 그에게 학비를 대줄 사람이 없어 학비곤란으로 이해 11월에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학비 조달이 여의치 않아 11월에 일시 귀국했고, 경성부로 올라갔다. 몸이 병약하여 고된 일을 하기 힘들었던 그는 경성부의 상점 종업원 등으로 일하면서 학비를 모았다. 1906년 2월 학비를 장만한 뒤 다시 일본으로 가 그해 3월 복학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폐렴과 결핵 등의 질병을 앓았는데 치료시기를 놓쳐 평생 고생하였다.
일본 유학 시절.
일본 유학 초기.
김성수와 송진우의 주선으로 일본 도쿄시내에 있던 개신교 목사의 집을 알려주었다. 이광수는 배편으로 일본에 건너간 뒤 개신교 목사댁에서 지냈다. 일본인 목사의 집에서 하숙하는 동안 일본인 목사는 매일 새벽과 저녁때 '하나님, 대일본제국을 위해 도와주소서'하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이후 그는 하나님과 정의, 도덕이란 존재하는가에 대해 깊이 회의하게 되었다. 또한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고,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제국주의를 하나님이 구제하지 않는가, 과연 정의란 존재하는가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기독교를 믿지 않았다.
1906년 3월 타이세이 중학교(大成)에 입학하여 유학생활을 하였고, 홍명희·최남선 등을 만나 사귀었다. 타이세이 중학교 재학 중 그는 문일평, 홍명희 등과 함께 재일본 조선인 유학생 모임인 소년회(少年會)를 조직하고 회람지 '소년'을 발행하면서 시와 소설, 문학론, 논설 등을 발표했다. 같은 해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세운 메이지 학원 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공부했다. 이때 일본에서 만난 홍명희와 친하게 지내며 그로부터 영향을 받고 톨스토이를 소개받았다고 한다. 이어 일본 유학 중 프리드리히 니체의 무신론과 불가지론, 에른스트 헤켈의 적자생존론과 찰스 다윈의 진화론 등을 접하고 두루 섭렵하였다.
일본 유학과 문단 데뷔.
1907년 메이지 학원(明治學院)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학하였다. 이때 미국에서 귀국하던 안창호가 도쿄에 들러 행한 애국연설을 듣고 크게 감명받고 독립, 계몽 운동에 투신할 결심을 하였다. 장로교 선교사들이 복음주의 신학을 고집하여 세운 메이지 학원의 분위기에 처음에는 쉽게 적응하지 못하였으나, 적응해감에 따라 청교도 생활을 흠모하게 되고 서양선교사들의 성서공부 시간에 익힌 기독교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기도 하였다. 1907년 12월 황성신문에 정육론 (情育論)을 발표하였고, 1908년에는 국내에 최남선이 설립한 신문관(新文館)에 참여하여 작품과 시집을 발표하였으며, 그해 톰 아저씨의 오두막의 한국어 번역본인 검둥의 설움을 신문관을 통해 간행하였다. 1909년에는 '방랑'이라는 소설을 썼다.
또한 홍명희, 문일평, 안재홍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1908년 소년회(少年會)를 조직하고 1908년 11월 1일 회람지 <소년>을 발행하면서 시, 소설, 문학론, 논설 등을 쓰기 시작하였다. 소년지와 소년회가 1911년 일제의 압력으로 폐간될 때까지 그는 유학생활 틈틈이 작품과 논설을 발표하곤 했다. 1909년 11월 7일에는 소설 〈노예 (奴隷)〉를 발표하였다.
일본 유학 중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를 존경했다. 후쿠자와는 일찍이 김옥균과 박영효와 같은 우리나라 개화파의 스승이었고, 이광수는 “하늘이 일본을 축복하셔서 이러한 위인을 내려셨다”고 부러워했다. 이광수는 후쿠자와를 가리켜 "하늘이 일본을 축복해 내린 위인"이라며 스스로 ‘한국의 후쿠자와’를 꿈꿨다. 의병장 신돌석이 조선인의 밀고로 잡혔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민중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탐욕을 부린 것이라 판단, 교육의 필요성을 확신하게 된다.
교육, 문학 활동.
문학, 언론 활동.
1909년 11월 18일에 일본어로 된 소설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뒤, 며칠을 밤새워서 또 다른 작품을 써서 11월 24일에는 소설 〈호 虎〉를 발표하였다. 1909년 12월에는 〈정육론 情育論〉을 지어 한국 국내의 《황성신문》에 송고, 발표하였다. 그의 일본어 시 사랑의 노래는 일본 잡지 '부의 일본'에 게재되어 일본유학생간에 그의 문명은 점차 높아갔다.
1910년 3월 23일부터 24일까지 이틀 동안 총 4회에 걸쳐 쓴 여행기 '여행의 잡감'(旅行의 雜感)을 발표하였다. 춘원은 당시 본명 대신 이보경(李寶境)이라는 이름과 고주(孤舟)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여기서 춘원은 일본과 조선의 풍경을 대비하면서 조선의 소년들에게 "일어나라, 우리 소년 제군!"이라고 촉구한다.
춘원의 여행기를 실은 '신한자유종' 3호는 1910년 4월 1일 일본 도쿄에서 발간됐다. 여행기에는 일본을 떠나는 심정과 다시 보게 된 조선의 풍경에 대한 춘원의 복잡다단한 감정이 교차되어 있다. 일본 유학 직후 그는 신한소년회라는 유학생 소년 친목모임에도 가입하여 활동한다. '신한자유종'을 펴낸 것으로 알려진 신한소년회는 일본에 유학 가 있던 어린 소년들이 각자 손으로 쓴 원고를 서로 필기하며 돌려 있는 습작 모임이었다.
1910년 '나(余)의 자각한 인생'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그는 '국가의 생명과 나의 생명과는 그 운명을 같이하는 줄을 깨달았노라… 나는 이름만일 망정 극단의 크리스천으로, 대동주의자로, 허무주의자로, 본능만족주의자로 드디어 애국주의에 정박하였노라.'고 하였다.
1910년 《소년》에 신체시 〈우리 영웅〉을, 《대한흥학보》 제11호에 평론〈문학의 가치〉와 단편소설 〈무정〉을 발표했다. 같은 해 1910년 3월, 메이지 학원 5학년을 졸업한 뒤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하였다.
오산학교 교사 시절.
1910년 3월 다시 출국하려 했으나 남강 이승훈의 추천으로 정주 오산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그가 오산학교의 교사로 있을 때 김소월 등의 담임을 맡기도 했다. 오산학교에는 그 외에도 유영모, 1913년에 신규 교사가 된 조만식 등이 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오산학교의 교가(校歌)를 직접 작사하기도 했다. 교사 활동을 하며 순 한글체 문장으로 된 단편소설 《무정》을 《대한흥학보》에 발표하였다. 소설 《무정》은 예상하지 않았던 히트를 쳐서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의 무정을 중심으로 서울에서는 찬반의 시비가 분분했으나 그의 자유 연애 사상은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1910년 계몽단체 광문회(光文會)의 회원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광문회에는 박은식, 주시경, 김두봉, 장지연, 홍명희, 변영만, 정인보, 한용운, 오세창, 이광수, 안재홍, 현제명, 안창호 등 제제다사들이 모여 우국의 열정으로 시국담론·민족자결결의를 다진 한국근대정신 발원지이기도 하다.
1910년 시 옥중호걸을 발표하였다. 1910년 7월 중매로 만난 1년 연하의 수원 백씨 백혜순(白惠順)과 혼인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애정 없는 결혼을 후회하며 실망의 나날을 보냈다. 이후 그는 결혼할 자유와 이혼할 자유를 허락해야 한다는 발언을 하고 다녔다. 또한 이혼은 조선시대의 출처가 아니라 개인의 행복과 보다 나은 삶을 찾아가는 하나의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무의미한 결혼 생활을 억지로 유지하는 것은 서로간의 피로이자 무의미한 시간 낭비임을 강연과 칼럼을 통해 역설하였다.
한일 합방 후 망명 길에 평북 정주에 들른 단재 신채호를 오산학교 교사 이광수가 찾아갔다. 신채호는 허리를 구부리지도 고개를 숙이지도 않은 채 세수를 하느라 옷이 다 젖고 있었다. 그가 의아스러워하면서 묻자“일본놈들에게 고개 숙이는 것도 분한데 세숫대야에까지 고개를 숙이겠는가.”라고 답하였다. 1910년 10월 이광수는 한일합방에 좌절하여 모든것을 포기하고 산에 들어가려고 오산학교 교사직을 사퇴하려 하였으나, 학생을 길러내어 국가의 대계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이승훈의 만류로 남아 있었다.
오산학교 교감 시절.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이승훈이 구속되자 오산학교 학감(교감)으로 취임하여 임시 교장으로 온 로버트 목사와 함께 오산학교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다. 이어 김기홍 등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불태운 오산학교 교사를 재건하여 학교를 부활시킨다.
1911년 백남훈(白南薰), 신익희, 김도연(金度演), 정노식(鄭魯湜), 전영택(田榮澤) 등과 비밀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학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조선독립을 위해 투신하기로 맹세하면서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물에 타 마신다.
그 해 최남선이 주관하는 잡지 《소년》에 단편을 발표하면서 문필활동을 시작했다. 1912년 나라를 잃은 슬픔과 자신의 장래에 대한 번민으로 건강을 많이 상하였다. 그는 오산학교의 국어 교사와 문학 교사였는데, 학생들에게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말하였고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는 없다는 것을 수업시간에 설파하였다. 또한 톨스토이와 찰스 다윈, 토머스 헉슬리, 에른스트 헤겔을 언급하면서 학생들에게 생물 진화론과 변증법, 유물론, 무신론, 적자 생존설 등을 가르치기도 하여 기독교계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일부 기독교선교사들은 오산학교에서 이광수를 해임시킬 것을 요청했으나 옥중에 수감 중인 이승훈의 반대로 해임을 면하였다.
1913년 미국의 여성 작가 해리엇 비처 스토(Harriet Beecher Stowe)의 〈검둥이의 설움〉을 한글로 처음 번역하여 신문관에서 간행하고, 시 《말 듣거라》 등을 《새별》에 개제하였다.
오산학교 퇴직과 복직.
그러나 이광수가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진화론과 프리드리히 니체, 에른스트 헤겔, 적자 생존론, 톨스토이를 가르친 것이 빌미가 되어 오산학교 임시 교장인 로버트 목사와 의견 충돌이 일어나 싸우게 되었고, 결국 1913년 11월 오산학교를 떠나게 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느 학생의 학부형이 교장인 로버트 목사에게 이를 항의했고 이것이 알려지면서 로버트 목사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1913년 여름 웅천의 어떤 강연회에 연사로 초청되어 다녀오는 동안, 오산학교의 학생 몇 명이 이광수 배척운동을 했고, 학부형들이 동참하면서 확산되었다. 그가 톨스토이주의를 선전하는 이단자라는 점과, 니체와 헤겔 같은 위험한 사상을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이 춘원 배척운동의 명분이었다.
1913년 11월 세계여행을 결심하고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조선을 떠나 만주로 가 상하이에 잠시 머무르기도 하였다. 11월 그는 만주와 상해, 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상하이에서 홍명희, 문일평, 조소앙, 송상순 등과 함께 지내다가 1914년 6월 출국했다. 그러나 1914년 8월 오산학교에 복직했다.
1914년 10월부터는 최남선이 창간한 잡지 <청춘 (靑春)>의 필진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단편, 장편소설과 글, 칼럼 등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청춘지는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1918년에 폐간되고 만다.
세계 일주와 일본 유학.
이광수는 1914년 초 한 달간 안정근의 집에 머문 일이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출국을 준비한다. 안정근에게 여비를 받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1914년 6월 신규식의 추천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을 맡기로 하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미국으로 향했으나 그해 8월 러시아 치타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행을 단념하고 귀국했다. 오산학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다. 1915년 김병로(金炳魯), 인촌 김성수(金性洙), 전영택(田榮澤), 신석우(申錫雨) 등과 교유하는 한편, 인촌 김성수의 후원으로 9월 다시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1915년 9월 오산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유학, 도쿄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했다.
일본 유학 중 그는 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여성 허영숙(許英肅)과 연애하였다. 그런데 허영숙과 연애하는 도중에 미술학교에 유학 중이던 나혜석과도 연애하게 된다. 두 여성과 연애하던 중 나혜석과의 결혼을 희망하였으나 자신의 친구이자 나혜석의 오빠인 나경석의 강한 반대로 무산되고 만다. 그가 고향에 부인 백혜순이 있는 유부남인데다가 다른 여자인 허영숙과 사귄다는 점 때문이었다.
1916년에는 평론 문학이란 하오를 발표했으며 소설과 시 외에도 자신과 타 작가의 작품을 평론하는 등의 문학평론작도 발표하였다.
와세다 대학 재학 시절.
1916년 9월 와세다 대학 본과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대학 입학 초 그는 여가시간에 광범위한 독서를 하였다. 한편으로 계몽적 논설을 국내에 보내 《매일신보》에 연재하여 명성을 쌓았고, 1917년 1월 1일부터 6월 14일까지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했다. 소설 무정(1917)이 매일신보에 연재된 이후 다음해 1918년 단행본으로 발간되어 1만부가 팔렸다. 연이어 이어서 '소년의 비애', '윤광호', '방황' 등을 탈고하고 《청춘》지에 발표하였다.
1916년 도쿄미대 출신의 김관호가 졸업작품 해질녘으로 일본 문전(文展)에서 특선을 차지한 소식을 접하자 춘원 이광수는 '조선인의 미술적 천재를 세계에 표하였다'는 글을 특별 기고해 이를 극찬했다.
"'해질녘'은 대동강에서 목욕하는 두 여인을 그린 누드화이다. 보랏빛으로 물든 석양의 능라도 풍경은 인상파 화풍으로 아련하게 묘사하고 풍만한 두 나부(裸婦)의 뒷모습은 몽환적인 낭만파 화풍이다."
당시 매일신보는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면서 춘원 이광수의 흥분에 가득 찬 관람기를 게재했다. '아! 특선, 특선이라! 특선이라면 미술계의 알성 급제다… 장하도다 우리 김군!' 그러나 신문은 '벌거벗은 그림인고로' 게재하지 못함을 양해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는 춘화를 그렸다며 폄하했고, 이광수가 그런 춘화를 격찬했다며 비방이 가해졌다. 이광수는 그림은 그림이며 그림을 보고 음란하다고 비판하고 반입은 커녕 보도도 못하게 할만큼 사회가 고루하다며 개탄하였다.
귀국과 망명.
자유 연애론, 무정 발표.
1917년 3월 와세다 대학교 철학과에 특대생으로 진급했으나 결핵을 앓아 고생했고, 격심한 과로 끝에 결핵과 폐질환이 심해졌다. 이때의 친구로는 안재홍, 송진우 등이 있었다. 그는 자유 연애론을 주장, 결혼할 자유, 연애할 자유가 있음을 역설했다. 그는 자유로운 연애와 결혼을 할 권리가 있음을 전제하고, 부모의 동의, 허락이 없더라도 연애하고, 결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1917년부터 매일신보에 연재한 장편 소설 무정은 청년층과 지식인층 사이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어 화제가 되었다. 많은 청년들이 그의 집에 찾아와 팬이라며 서명을 받아가는가 하면, 이광수를 만나기 위해 그의 집 근처에서 노숙을 하거나 여관에서 생활하며 난처한 이광수가 그들을 설득한 뒤 돈을 손에 쥐여서 되돌려보내기도 했다. 작품 무정에서도 그는 낭만주의적인 사랑과 자유 연애를 옹호하였다.
1917년 1월 1일∼6월 4일 매일신보에 연재될 당시에는 화제만큼이나 논란도 컸다. '부도덕한 작품'이라는 중장년 독자층의 비난을 반박하는 연설회가 열리기도 했다. 유림은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에 무정의 신문 연재를 중단시켜 달라는 진정서를 보내기도 했다. 이후에도 새로운 시대사조를 반영해 청년남녀의 신연애관과 이에 따른 번민과 갈등을 옮겨놓은 장편이 잇따라 선을 보였다.
자유연애를 다룬 '무정'이 매일신보에 연재되는 동안 여학생들의 편지가 쏟아졌다. '영채가 불쌍하다', '형식이 영채를 버리면 안 된다'는 동정과 호소였다. 중추원 양반들은 '이광수란 어미 아비 없이 자란 상놈의 자식'이라며 연재를 중단하라는 진정서를 냈다. 가정 교육이 안된 상놈의 작품이 어린 자녀들의 도덕과 인륜을 흐리게 만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성리학자들의 항의 전화와 규탄 집회도 계속되었다. 그런데 월 5원이던 춘원의 고료는 10원으로 뛰었다. 훗날 김동인이 동아일보에 소설 '젊은 그들'을 쓸 때 편집국장이던 이광수는 “작가의 자존심은 죄다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독자 본위로 써 달라.”고 주문했다.
1910년대 이광수의 ‘무정’은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이자 연애소설이고 춘원의 출세작이었다. 이전에도 조선 사회에 장편 소설과 신문에 연재되는 장편 연재 소설은 존재하였지만, 그의 작품 무정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장편소설'로 평가된다. 매일신보의 연재를 마친 뒤 회동서관에서 무정을 정식 출간하였다.
작품, 강연 활동.
문필 활동을 통해 이광수는 기존의 도덕과 윤리에 대한 강렬한 비판자로 등장하여, 근대주의적인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역설했으며, 그러한 주장은 철저하게 진화론적인 사고에 토대를 두었다. 그는 초기의 작품과 칼럼, 강연을 통해 허위와 이름뿐인 유교의 허례허식과 권위주의적인 문화를 조롱하였다. 장편 무정(1917)을 비롯하여, 장편 개척자 (1918), 단편 무정 (1910), 어린 벗에게(1917), 윤광호 (1918), 논설 자녀중심론(1918), 위선 수가 되고 연후에 인이 되라(1917) 등이 이 시기의 주요 저작들을 통해 사회 부조리를 지적하였다.
그는 작품과 강연을 통해 인간은 소중한 존재라는 점과, 여자도 사람이며 여성의 해방을 주장하였다. 여자의 해방은 가정의 집안일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여자의 해방은 자유 연애로서 이룩할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이에 유교 사상가와 조선 선비들은 풍속을 해치고 인륜을 어지럽힌다며 비난을 가하였다. 그는 성리학이 7백년간 조선 사회에서 허례허식과 위선, 이름 뿐인 도덕과 겉치레만 남겼고, 나만이 옳다는 관점은 당쟁과 배척의 원인이 되었다고 공격하였다.
성리학자들과 시골 선비들의 비난은 계속되었고, 그들은 그가 유년 시절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것을 문제삼아 '상놈', '호로자식' 등의 극언을 퍼붓는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그는 계속 인간은 평등하며, 남녀는 평등하며, 사람이 귀중한 것이라는 견해를 설파하고 다녔다.
귀국과 애정 도피.
격심한 과로로 폐질환과 결핵이 악화되었으나 병원 진료비가 없어 휴학하고 1917년 말 요양차 귀국, 《매일신보》 특파원 자격으로 한반도 남부지역 오도답파여행(五道踏破旅行)을 다녔다. 1917년 장편 소설 개척자를 《매일신보》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청년층의 호평을 받았다.
1918년 폐병이 재발하여 쓰러졌으나, 허영숙(許英肅)의 헌신적인 간호로 건강을 되찾았다. 비록 폐병은 완쾌돼지 못하였지만 허영숙의 극진한 간호에 감격한 이광수는 그와 결혼을 약속한다.
그런데 가부장제도와 중매 결혼에 심각한 회의를 품던 이광수는 가부장제도를 비판하고 자유로운 결혼 생활을 말하고, 아버지와 할아버지 중심의 가정에서 가족 구성원 모두의 발언권을 동등하게 부여해야 한다는 것과 애정 없는 결혼을 유지할 이유는 없으며 애정이 있는 결혼이라고 해도 애정이 사라진다면 언제든 이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소문이 확산되면서 곤욕을 당했다. 또한, 그 해에 전통적인 부조중심의 가부장적인 가족제도를 비판하고, 봉건적인 사회제도를 비판하는 《신생활론》, 《자녀중심론》등의 논문을 발표하고, 가족 간의 평등한 발언권을 말하여 다시 많은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는 여성에게도 자유와 권리가 소중하다는 주장을 했고, 여자가 해방되는 길은 오직 가사에서 해방되는 것과 자유 연애에 있음을 천명하여 다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백혜순과 이혼에 합의한 뒤 1918년 10월 여의사 허영숙과 장래를 약속하고 제물포항에서 배를 타고 베이징으로 애정도피를 떠났다. 이 애정도피 사건으로 그는 교사라는 사람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타락, 음란,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세간의 질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독립 운동과 사회계몽 활동.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활동.
독립운동 준비.
1918년 백혜원(19살)과 이혼하고 4년 연하의 양천 허씨 허영숙(許英肅)과 재혼하였다. 허영숙은 일본 유학 당시 만나 연애하던 여성이었다. 그러나 1918년 11월 중순경 우드로우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 14원칙에 의거한 파리강화회의가 열리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였다가, 다음달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하였다. 출국 직전 그는 윤치호를 찾아가 대표자 파견을 도와달라고 부탁하였으나 윤치호는 그에게 여비만 주고, 운동 참여를 거절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몇몇 동지들을 만나보고 그 길로 다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간다. 일본 체류 당시 그는 글을 잘 지어서 유명하였다. 당시 유학생의 한 사람인 최태영은 후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 '2.8 선언'은 이광수가 썼는데 춘원은 글을 잘 써서 당시 이미 유명했지요.'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1918년 12월부터 그는 2·8 독립 선언을 치밀하게 준비, 주도하였다. 상하이와 도쿄에 있던 유학생, 청년 독립운동가들과 2·8 독립운동 사건을 모의하면서 연락차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가담하였고, 여운형을 당수로 삼아 조직된 신한청년당에도 관여하였다. 도산 안창호선생의 민족주의 운동에 감화를 받아 일본 와세다 대학교를 중퇴하고, 1919년 2월 백관수(白寬洙), 김상덕, 최팔용(崔八鏞), 김도연, 송계백(宋繼白) 등과 재일 조선 청년 독립단(在日朝鮮靑年獨立團)을 조직하였다. 또한 여러 선전 홍보물 등을 발간, 인쇄하여 양심적인 지식인 계층의 각성과 협력, 참여를 적극 호소하였다.
2.8 독립 선언.
상하이에서 그는 김규식, 신채호, 신성모, 신규식, 신익희, 윤보선 등의 청년 지사들을 만났다. 한편 신채호에게 영어를 가르치던 김규식이 문법문제를 고집하다가 뜻만 알면 그만이 아니냐는 신채호와 심하게 싸운 뒤, 그가 대신 신채호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김규식은 상하이에서 신채호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신채호는 영어를 읽을 때마다 한국어의 조사(助詞)를 꼭 넣었다. 'I는 am a boy'라고 하는 식이었다. 문장마다 '하여슬람'이라며 한문 읽듯 토도 달았다. 김규식은 매번 "발음을 똑바로 하라"고 신채호에게 야단쳤다. 신채호는 "발음은 쓸데없으니 뜻만 가르쳐달라 해도 까다롭게 군다"며 투덜댄 뒤 영어 선생을 소설가 이광수로 바꿨다. 상하이에서 만난 인사들 중 김규식과는 호형호제 하면서 친하게 지냈다. 같은 불우한 환경에 멸시와 고난을 받고 자란 점 등에 대해 동병상련을 느꼈고 김규식은 더욱 그를 친동생처럼 각별하게 챙겨주었다.
1919년 1월 신한청년당 당원으로 일본에 파견, 상하이를 출발하여 베이징을 거쳐서 일본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에서 재일본 한국유학생들을 만나고 2월 8일 2·8 독립 선언의 선언문을 기초 하였다.
그는 도쿄에서 조선유학생들과 독립운동 거사에 관한 모의를 하고 스스로 도쿄의 조선유학생들이 발표한 독립선언문을 작성한다. 2월 8일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인 신익희, 최팔용, 김도연, 김준연, 안재홍, 윤치영, 나혜석, 김상덕 등과 함께 2·8 독립 선언을 발표한다.
학생 시위대는 춘원 이광수가 기초를 세운 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을 낭독한 뒤 거리행진을 벌이려 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막아섰고 양측 사이에는 격투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최팔용 등 시위 학생 60여 명이 체포됐다.
경찰이 들이닥치자 그는 변장하고 재빨리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조선의 독립은 전체 조선민족의 의사라는 것을 세계 만방에 알리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다. 중국에 도착하자 그는 영자신문 차이나 프레스(미국계)와 데일리 뉴스(영국계)를 찾아가 동경 조선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운동을 알려 세계에 보도케 한다. 춘원은 그 두뇌의 뛰어남으로 해서 후일 임시정부에서도 큰 비중을 두게 된다. 다시 도쿄로 돌아온 그는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조선반도 내에서 사건을 일으켜야 한다는 김규식의 발언에 적극 호응, 공감하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칼럼과 전단지를 익명으로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이후 임시정부 활동에 가담한 이광수의 와세다 대학 학적부 이름은 검은 줄로 지워져 있었는데 퇴학사유란에는 “학비미납”이라는 내용의 일본 한자로 적혀 있었다. 이광수와 최팔용, 송계백 등 2.8 독립 선언 주동자 3인의 학적부는 1996년 케이블 TV Q채널의 취재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담당PD인 김권재는 '다니구치 구나오 와세다대학 교무과장이 학칙상 공개가 불가능하지만 이들이 한국의 독립운동에 기여한 역사적 인물이므로 특별히 공개한다며 보여주었다.'고 밝혔다.
3월 1일 국내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은신해 있다가 변장을 하고 중국인을 가장하여 상하이로 되돌아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1919년 4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설립에 참여하였고, 임정 공보국장으로 임정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사장을 겸하며 임시정부의 선전활동을 담당했다. 또한 겸임 《독립신문》 주필과 신한청년당 기관지 《신한청년》 주필로도 활동하였다. 상하이에 와서 그는 다시 홍명희를 만났다.
1919년 5월 안창호가 상하이로 오자, 다시 안창호를 만나 그의 민족운동에 크게 공명하여 안창호를 보좌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창립 발기인이 되고,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 주필에 취임하고 애국적 계몽의 논설을 많이 쓰면서 안창호의 인도로 주요한(朱耀翰), 박현환 등과 독서·정좌·기도를 함으로써 수양생활에 힘썼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을 하면서 상하이에 있을 때 그는 실력양성을 부르짖으며 “독립국민의 자격자를 키우라.”라는 안창호의 권고에 감화하여, 이광수는 1920년 흥사단에 가입하고 문학 활동과 저술을 통한 국민계몽을 하기도 했다.
1919년부터 그는 잡지 《독립》지를 발행하였고, 사장 겸 주필이었고, 또한 임시정부 사료 편찬위원회 주임이었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해 임시정부의 사실을 알렸으며 대한민국의 자주성과 우수한 민족문화를 소개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고, 출판부장으로 주요한을, 기자로는 조동호 등을 영입하였다. 《독립》은 창간 후, 주 2~3회 발간하였으나 자금난이 심해지자 그는 1925년 189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하고 말았다. 그는 국내에 보내는 선전 홍보물을 통해 국내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독립 운동 참여를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그는 실천하지 않는 지식인,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은 무지한 자들만 못하다, 배움의 의미를 알 수 없다며 분노하였다.
1920년에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아온 소년 김산 등을 만났다. 그러나 김산은 곧 무정부주의자와 의열단 등과 가까이 지내게 된다. 1920년 2월 김일엽, 나혜석 등이 여성잡지 신여자지를 창간하자, 이광수는 김일엽, 나혜석, 김명순, 정칠성, 박인덕 등과 함께 신여자지의 필진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신여자지는 재정난으로 4호를 끝으로 폐간되고 만다.
임정 일에 대해서 그는 많은 일에 적극적인 활동, 발언을 하여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919년 9월 임정 통합 개편때는 공보국장직을 사직하고 임정 사료편찬위원의 한 사람으로 역사서 편수를 담당하였다. 1920년 7월 국내에서 간행된 잡지 《폐허 (廢墟)》지의 동인으로 참여, 원고를 국내로 송고, 택배로 부쳐서 발표하였으나 폐허지는 반일사상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총독부에 의해 곧 폐간당하고 만다.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론.
그러나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조선인 대표들은 출입조차 거부당했다. 이광수가 기대한 것처럼 조선독립은 쉽사리 실현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독립의 기회는 찾아올 것 같지가 않았다. 일본은 패전국이 아니라 연합국의 한 나라요, 승전국 측에 속해 있었으며, 국력도 나날이 강해지고 국제적 지위도 날로 높아져갔다. 그러한 일본으로부터 조선이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거의 희망이 없는 일로 보였다. 이광수는 조선 사회에 만연한 요령과 술수, 위선, 속임수 등에 좌절, 절망하였다. 요령과 술수, 속임수를 걷어내지 않고는 독립을 할 수가 없으며, 독립한다손 치더라도 그러한 독립은 오래 갈 수 없다며 절규했다.
이광수는 정신적으로 점점 지치기 시작하였다. 약 1년간은 도산 안창호와 함께 방을 얻어 자취생활도 하고 또 이리저리 생활의 방편을 찾아서 중국신문에 구직광고를 내기까지 했다. 생활고와 함께, 국내에 밀파되었던 비밀요원들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에 무관심한 민중들의 현실을 접하면서 실망하였다.
1920년에 이광수는 흥사단 상하이 조계의 임시 반장을 맡기도 하는데, 1920년 여름 방학 무렵 일본에서 허영숙이 이광수를 찾아왔다. 허영숙의 상하이 임시정부 방문은 당시 상해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논란거리를 만들었다 한다. 월탄 박종화는 그의 '일기'에서 이광수가 이때 허영숙으로 인해 조선총독부에 매수당한 것은 아닌가 의심하는 기록을 남겼다. 조선총독부의 사주를 받은 허영숙이 이광수에게 '총독부의 신변보장을 언질 받고' 이를 설득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품기도 했다. 박종화에 의하면 이 소문이 확산되면서 허영숙의 첫 애인 진학문은 충격을 받고 홧김에 일본 여자와 결혼해버렸다고 한다.
그의 생활이 어려워진 것과 함께 임정의 재정형편도 점차 어려워졌다. 1920년말 재정난으로 사료편찬위원회가 해산되고 독립신문도 속간이 어렵게 되었다. 이광수는 임정으로부터 제네바 주재 대표로 선임되었으나 여비 사정으로 떠나지 못했다. 건강이 악화되어 안창호의 적극 주선으로 병원에 입원한 일도 있었다. 이 무렵부터 이광수는 점점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희망 없는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인지 어떤지에 관해 그는 점차 깊은 회의에 빠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부의 파벌 다툼과 독립운동 단체와 파벌 간의 이권다툼 등도 점차 그에게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감과 환멸감을 강화시켰다.
귀국 직전.
이광수와 홍명희, 조소앙은 상하이에서 궁핍한 생활을 계속 지내왔는데, 2년 뒤인 1921년 3월 이광수는 도저히 상하이 생활을 못하겠다고 선언하고는 귀국길에 오른다. 폐병의 악화와, 국민대표자대회 등 임정 요인과 독립운동가들간의 파벌다툼과 의욕 상실 등이 원인이었다. 1921년 2월 이광수가 안창호에게 귀국할 뜻을 보이자 안창호는 적극 만류하였다. 그러나 이광수는 그의 만류를 듣지 않고 귀국한다.
한편 국민대표자대회는 임정과는 다르다며 국민대표자회의에 참여하라는 설득들도 있었지만, 춘원은 모두 사양하고 귀국을 택한다. 안창호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보내주었다. 그가 상하이를 떠날 때는 안창호와 신채호 만이 마중나와 그를 배웅하였다.
1921년 4월말 단신으로 상하이항을 떠나 배편으로 개성으로 귀국, 열차를 타고 가던 중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검문검속을 하던 일본인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나 혐의가 없어 곧 풀려났다. 그가 불기소 처분을 받고 풀려나자 이때부터 시중에는 그가 변절자라는 의혹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해 4월 허영숙과 정식으로 혼인하였다. 귀국 직후 일제나 총독부의 식민 통치에 별반 저항없이 살아가는 민중들의 모습에 그는 환멸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 뒤 재정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던 이광수는 1921년 11월부터 1922년 3월까지 《개벽》에 논문 〈소년에게〉를 연재해 출판법 위반 혐의로 종로경찰서에 입건되었다가 풀려났다. 1922년 종학원 교사로 초빙되어 철학, 윤리학, 심리학, 종교철학, 논리학 등을 강의했고, 경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는 영어를 가르쳤다. 이 무렵 《원각경 圓覺經》을 탐독하면서 단편 〈할멈〉, 〈가실 (嘉實)〉을 집필하였다.
불운한 개인사.
이광수는 가운이 기울어짐에 따라 가난을 체험하면서 청일 전쟁을 겪었고, 어린 나이에 부모와 할머니를 여의고 재종조부의 손에 양육되었다. 또한 동학당인 천도교도가 되면서 천도교의 일을 본 탓으로 일본헌병에 쫓겨 고향을 떠났고 일본, 미국 유학의 꿈도 좌절되었다. 그는 오산학교 교원시절에는 경술국치의 망국인의 설움을 겪었고, 방랑시절 시베리아의 치타에서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들었으며, 그 종말을 사랑의 도피처인 북경에서 알았다.
중매로 만난 본부인 백혜순과는 사랑없는 결혼 생활에 회의감을 겪고 이혼을 결심, 합의하에 이혼하였지만 그에게 가해진 것은 조강지처를 버린 인간, 타락한 인간, 향락과 음란의 상징이라는 꼬리표였다. 또한 결혼할 자유가 있고, 이혼할 자유도 있다는 그의 견해와 그가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점 등을 들어 그를 멸시하였다. 그리고 이광수의 생모 충주 김씨가 세 번째 부인(3취 부인)이라는 점을 들어 그는 서자로 취급당하고 무시당했다. 또한 1919년 1월부터 국내의 지식인들과 민중들에게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적극 호소했지만 이 역시 무시되었다. 어려서부터 폐렴과 결핵, 손발 동상 등의 질병을 앓았는데 치료시기를 놓쳐 평생 고생하였다. 후처가 된 백혜원의 극진한 간호로 위기를 여러번 모면하였다. 그러나 동료 문인들이나 독립운동가들은 백혜원이 그를 타락시켰다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춘원은 허영숙과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맏아들 봉근은 여덟 살 때 잃었다. 두 번의 결혼에서 얻은 자녀들은 대부분 요절하였고 아들 이영근, 딸 이정화 등만이 살아남았다. 춘원은 아이들에게 더없이 자상한 아버지였던 듯하다. 틈만 나면 허생전, 율곡선생, 원효대사 이야기를 해주었고 아이의 친구들이 놀러오면 함께 끼어 노래를 부르고 윷놀이도 했다. 그래선지 아버지와 엄마 사이에 다툼이 있으면 아이들은 늘 아버지 편이었다.
귀국과 방황.
귀국 직후 폐질환으로 요양하였으나, 병세가 완화된 뒤에는 독립운동의 실패와 임시정부의 혼란, 협력해서 살아가는 민중들의 모습 등을 보며 정신적으로 방황하였다. 1921년말과 1923년 두 차례에 걸쳐 이광수는 금강산을 방문하고 기행문인 금강산유기를 지었다. 여기에는 장안사, 유점사 등 한국전쟁 때 유실된 사찰과 사라진 기암괴석의 존재를 정밀하게 묘사하였다. 1922년 1월 9일 박종화, 현진건, 이상화 등과 함께 잡지 《백조 (白潮)》지의 필진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경 아내 허영숙이 상하이에 이광수를 찾아왔을 때 아내와 함께 돌아오다가(일설에는 홀로 돌아왔다고도 한다.) 선천(宣川)에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가 불기소처분으로 풀려난 뒤에는 변절자로 비난받았다. 이에 대해 이광수가 상하이에 가기 전부터 총독부와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는 의견과 이광수와 상해 임시정부를 이간질하려는 총독부의 책략이라는 의견이 있다.
1922년 그는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문인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을 찾아갔다. 그는 박한영의 지도로 마음을 다스리는 법과 서예와 한시(漢詩) 짓는 법을 배웠고, 그의 불교전문강원에도 출입하며 설법을 들었다. 1926년 무렵 박한영은 서울 안암동 개운사 대원암에 개설한 불교전문강원에서 신석정, 서정주, 이광수, 조지훈, 김달진 등을 지도했으며 3000수에 이르는 한시를 남겼다. 서정주는 "매우 견디기 어려운 한밤중에 홀로 깨어 고민하는 때의 언저리쯤에는 반드시 다시 이 분의 깊은 도애(道愛)를 돌이켜 생각하곤 어머니의 품속에 파묻히는 아이처럼 파묻히어 새로 살 힘을 얻는다"고 회고했다. 이광수는 일시적으로 승려가 되려고 했지만 박한영은 그대는 중노릇 할 사람은 아니라며 설득해서 되돌려보낸다. 심리적 안정을 회복한 그는 이후 문필 활동과 사회 활동에 전념한다. 귀국 이후 그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등에 기사를 쓰거나 칼럼과 논설과 소설을 송고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22년 초부터 경신학교의 교사로 출강하며 영어를 가르쳤다.
언론, 사회 활동.
1922년 흥사단의 측면 지원 조직인 수양동맹회를 조직하였다. 1922년 3월 잡지 《개벽》에 발표한 〈소년에게〉의 내용이 출판법위반혐의를 받아 종로서에 연행된 바 있었다. 이후 그는 요시찰 인물로 조선총독부 경무국 당국의 관리 대상이 되어 감시, 내사당했다. 그 뒤 1922년 9월 30일 밤에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와 첫 면담을 가졌으며, 그때부터 사이토의 정치참모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와 빈번히 접촉하였고, 그들의 주선으로 월수당 3백 엔을 받는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입사한다. 그러나 얼마 뒤 퇴사한다.
1922년 흥사단의 국내 지부인 흥사단 원동위원부 창립을 주관하였다.
1922년 주요한 등과 함께 안창호의 연락을 받고 경성부에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와 평양에 동우구락부 (同友俱樂部)의 발족을 지시했다. 안창호는 단체의 기준과 회원 자격, 단체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이광수와 주요한 등에게 지시하고 거사자금을 보내 설립에 착수하게 하였다.
1923년 5월 김성수와 송진우의 권유로 다시 《동아일보사》에 입사할 것을 권고받았다. 이광수는 그들의 후원을 받아들여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객원논설위원이 되었다. 5월 16일 동아일보 사회부 촉탁기자가 되었다.
동성애 허용론 논란.
그는 여자도 인간이며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여자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결혼과 가족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이는 유교학자들의 분노를 초래했다. 또한 1918년부터 그는 칼럼과 논설에서 동성애에 대한 것도 다루기 시작했다. 그는 동성애 역시 존중받아야 될 사랑이며, 사랑할 권리가 있고, 사랑할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동성애 옹호론을 작품에도 일부 반영하였다. 후일 2007년 서울대 인문학연구소의 한국문학자 미국 출신의 가브리엘 실비안은 이광수 문학에 나타난 '동성애'를 연구한 논문이 함께 게재됐다. 여기에서 실비안씨는 이광수 문학에 나타난 동성애 코드에 대한 기존 이론을 재검토하며 “이광수야말로 동성애 담론이 보편화하기 이전에 동성애를 반감 없이 다뤄온 작가”라고 주장했다.
그는 시중의 동성애에 대한 편견에 대해, 동성애는 정신병이 아니라고 하였다. 동성애를 정신병이나 광증의 일부로 보던 조선 사람들에게 그의 동성애 옹호는 충격을 주었다.
계몽 운동과 문필 활동.
민족개조론 발표.
그는 일찍이 나태하고 게으르며 무기력한 이 민족의 성격을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으르고 무기력하며, 나약하며 공짜를 바라며, 허황되다, 요령과 술수에 능하다, 그리고 속임수와 눈가리기에 능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이러한 습성으로는 서로간의 신뢰도 어렵지만,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는 것은 어렵다고 하였다. 일부 국민들의 의지만으로 독립이 달성되는 것은 아니며,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지 않고는 어느 나라도 조선의 독립을 도와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922년 잡지 《개벽》 5월호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자치운동론'을 내세워 이때부터 차츰 총독부로부터 타협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이 글을 통해서 이광수는 '삼일운동이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난 이후, 우리 민족이 추구해야 할 방도는 일제에 대항하는 독립투쟁이 아니고 독립을 쟁취하고 유지할 만한 실력을 먼저 기르는 민족개조운동, 자치운동론'이라고 주장했다. 〈민족개조론〉의 타협적인 내용은 곧 민족진영 인사들의 감정을 자극, 논란을 일으키면서 문필권에서 소외당하였다. 그러나 이광수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그의 〈민족개조론〉은 실력 양성론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식민지통치를 인정하는 범위내에서 자치를 얻자는 자치운동의 이론적인 뒷받침이 되었다.
이광수가 잡지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했을 때 그 반응은 일파만파의 충격이었다. 이광수의 집에 칼을 든 청년들이 난입했으며 개벽사의 기물들이 파괴되었고, 이광수를 강사로 초빙했던 사람까지 습격당했다.
민족 개조론의 발표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의 사주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민족개조론 또한 총독부 사주에 의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를 유랑했던 젊은 시절 동포들의 비참한 삶과 지도자들의 이전투구를 보고 착상한 것이며, 정신적 대부인 도산의 “점진적 개혁”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반론도 있다. 그는 조선 사회는 요령과 기만, 허위가 판치는 사회이며, 이런 사회, 이런 시민 의식으로는 백년이 지나도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견해에는 공감 보다는 감정적인 반론과 공격이 계속되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 재직.
1923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되었다. 작가가 기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혐오감을 갖고 있었던 김동인은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광수에게 “비상한 노력 끝에 위선적 탈을 썼다”고, 또 동아일보 기자가 된 주요한에 대해서는 “요한이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파멸을 뜻한다”고 지면을 통해 독설을 퍼부었다. 생계를 위해 기자가 된 일을 두고 김동인 등은 변절이라 했는데, 그는 작가는 순수하게 소설, 시 등의 작품에만 전념해야 된다는 지론을 펼쳤다. 그러나 김동인도 1932년에 기자가 된다.
1923년 중반에는 도산 안창호를 모델로 한 장편 소설 《선도자 (先導者)》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다가 조선총독부의 간섭으로 송진우, 김성수 등이 소환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결국 111회 중편완(中篇完) 부분에서 연재중단되었다. 1923년 가을, 실의에 빠진 그는 금강산을 순례하면서 보광암의 주지인 월하노사(月河老師)라는 늙은 불교승려의 인도로 《법화경 法華經》을 접한다. 이후 그는 《법화경 法華經》을 한글로 해석하기도 하였으며 법화경에 널리 심취하게 되었다.
1924년 1월 2일부터 6일까지 《동아일보》에 사설 〈민족적 경륜〉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에서 ‘(일본의 국법이) 조선 내에서 허하는 범위 내에서’라는 단서를 달았다. 이에 대해 일본의 국법이 허하지 않는 한국의 독립을 부정하는 논설이라는 비판이 있다. 이후 이광수 주도의 타협적인 자치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광수가‘민족적 경륜’이라는 논설을 발표한 것이 기폭제가 됐다. 이 논설의 요지는‘일본 법률의 범위 안에서 정치 산업 교육의 3대 정책을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사설 '민족적 경륜'이 물의를 일으켜 동아일보에서 스스로 퇴사했다. 그러나 김성수와 송진우의 배려로 1924년 2월 동아일보의 기자로 다시 복귀했고 동아일보에 〈허생전〉을 연재하다가, 같은 해 11월부터 장편소설 〈재생〉을 동아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여기자인 최은희를 발탁하였다. 최은희가 기자로 발탁되게 된 데는 춘원 이광수와의 인연, 그리고 기자 덕목으로서 차고 넘칠 무한한 배포가 작용했다. 최은희가 동경 일본여대 3학년 재학 중인 1924년, 여름방학을 맞아 춘원의 집을 찾았을 때 일이다. 최은희는 춘원의 부인이자 산부의과 의사인 허영숙과 가까운 사이였다. 허영숙은 한 부호로부터 진료비 85원 10전을 떼어 먹힐 처지였고, 최은희는 청부사를 자임했다. 최은희는 채무자 집에 찾아갔으나 그가 외출하고 없자 마루에 돗자리를 펴 낮잠을 자거나 냉면을 배달시켜 먹었다.
최은희는“의료규정을 알아보시고 부당하거든 고소하세요.”라며 귀가한 부호에게 쏘아 부쳤고, 강짜를 부리다가 차츰 진료비를 깎는 쪽으로 타협하려던 이 악성 채무자에게 “내가 종일 이 집에서 치마에 묻힌 먼지는 털고 갈망정 단돈 10전도 못 깎아 드리겠소”라며 결국 돈을 온전히 다 받고 일어섰다. 마침 그 때 조선일보가 ‘부인 기자’(여기자라는 의미)를 급구했고, 이광수는 이상협 편집고문에게 최은희의 진료비 추심 청부 일화를 들려주며 “그만한 배짱과 수완이면 넉넉하고 부인과 왕래 편지를 보니 문장도 신문기사보다 낫다”고 천거했다.
이후 1933년 8월 29일까지 사설과 횡설수설, 소설(13편), 시, 시조, 동화, 수필, 평론, 서평, 기행문, 번역물 등 하루 원고지 70장 이상을 동아일보 지면에 발표했다.
사회 변화론 설파.
안창호, 윤치호 등의 감화를 받은 그는 안창호를 찾아 가르침을 청했고, 이후 그를 도와 흥사단의 국내 조직과 1922년 수양동우회의 모태인 수양동맹회 등을 결성하였다. 그는 수양동맹회를 흥사단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조직이자, 국내외 흥사단의 연락 기관 겸 흥사단 국내조직의 측면 지원 단체로 운영하였다.
이광수는 흥사단의 국내조직으로 1922년 수양동맹회를 결성했는데, 그 전문(前文)에서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주의(主義)”라고 발표하였다.
1923년과 1924년 그는 계몽 활동과 강연을 통해 여자들도 남자와 똑같은 인간이며 기존의 조선 사회는 이러한 여자들의 권리와 권익을 심하게 무시하거나 착취해 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자들에게도 자유가 부여되어야 하며 여자의 자유는 결혼과 가정으로부터의 탈출이 선행되어야 하며, 자유 연애를 통해 여자의 해방,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고 내다보았다. 이광수는 또 조선의 자녀는 오직 부모를 위한 꼭두각시 인형이라며 비판했다. 이광수는 "조선의 자녀는 오로지 부모(父母)를 위해서만 살았고, 또 부모를 위해 일했고 죽는, 부모 중심의 삶을 강요받았다. 한번도 한 인간으로서의 행복, 개인적 행복을 위한 교육의 자유와 혼인의 자유까지 부모에게 박탈당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며 지적했다. 그러자 유림들은 신체발부는 수지부모인데 부모가 하라는 것은 무엇이든 하는 것이 옳다며 이광수를 공격했다. 도리어 이광수가 유년기에 고아가 된 것을 지적하며 호로자식의 궤변이라고 비방했다.
또한 그는 1920년대 경성부에 확산된 전화기를 보고 멀지 않은 미래에 전화기 역시 전국 각지로 확산될 것이며, 쉽게 소지하고 다닐 수 있는 전화기도 등장하리라 보았다. 그는 라디오가 보급된 뒤 텔레비전 역시 널리 보급될 것이고, 미래에는 일방적으로 시청하는 라디오나 텔레비전이 아니라 기계를 매개로 하여 직접 대화가 가능한 시대도 올 것이라 예상하였다.
1924년 초부터 문학잡지 발간을 계획한 그는 여러 부호들을 찾아다니다가 방인근과 경주 최부잣집 등의 지원으로 《조선문단》의 창립발기인이 되어 창립을 주재했으며 주요 필진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여성에게 교육 기회를 부여하자, 자녀는 부모의 노리개가 아니라는 그의 주장에 당시 사람들은 반감을 품었고, 후원자를 얻기 어려웠다. 〈재생〉연재를 끝낸 1925년초 다시 동아일보에 〈춘향전〉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계몽론에 대한 비판.
이광수는 문학을 통해 사회를 계몽, 변화, 개조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문학을 통한 사회 계몽, 변화 시도에 대해 김우진은 이를 비판하였다. 작가 김우진은 다이쇼 시대 개인의 자아실현을 목표로 삼았던 시라카바(白樺)파 문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희곡 〈정오〉 〈이영녀〉 〈두데기 시인의 환멸〉 등에서 사회적 억압과 통제의 현실을 폭로하고, 인습과 도덕을 극복한 초월적 개인을 형상화하면서 '자유로운 개인'이자 '공적 인격체'인 '시민'을 발견한다.
김우진은 1926년 쓴 평론 〈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에서 당대 최고의 문인 이광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김우진은 "조선이 지금 요구하는 것은 형식이 아니오, 미문(美文)이 아니오, 재화(才華)가 아니오, 백과사전이 아니다"라면서 "거칠더라도 생명의 속을 파고드는 생명력, 한 곳 땅을 파면서 통곡하는 부르짖음이 필요하다"며 그의 계몽론을 비판했다.
수양 동우회 조직.
동우구락부를 운영하면서 그는 미국에 있던 안창호, 흥사단, 대한인국민회 등과 연락하고 국민회 회보를 입수하여 확산시켰다. 또한 동우구락부 회원의 자격에 여자도 가입할 수 있음을 천명하고, 남자 회원과 여자 회원간에 차별을 두지 아니하며 남녀 모두 같은 한 사람의 회원이자 동지로 대우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1925년 다시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으로 복귀했다. 1925년 7월 대구의 언론인 김승묵이 잡지 《여명 (黎明)》을 창간하자, 《여명 (黎明)》지의 동인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여명》 지는 1927년 1월에 폐간되었다.
한편 1925년 동아일보는 춘향전의 개작을 신춘문예의 공모작으로 걸었는데 당선작이 없자 이광수의 '일설 춘향전'을 1925년 9월 30일부터 1926년 1월 3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됐다. 수십 편의 춘향전 개작 공모작 중에서 뚜렷한 작품이 없자 동아일보는 다음해 9월 24일 당선작이 없어 춘원 이광수에게 집필을 의뢰했음을 사고로 밝혔다.
1925년 봄부터 안창호의 지시에 따라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를 통합하여 통합조직을 결성하기 위해 노력, 수양동우회로 발족시키는데 힘을 쏟은 끝에 1926년 1월 8일 수양동우회를 탄생시켰다. 수양동우회는 '인격수양과 민족문화 건설'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실질적인 모든 사업과 실천 내용은 흥사단의 국내 조직 역할 단체였다.
수양동맹회를 동우구락부와 합하여 동우회로 확대 개편한 직후인 2월에는 수양동우회의 기관지 《동광》을 창간하여 주요한과 함께 잡지를 주재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수양동우회의 조직을 의심하고 안창호의 국내 대리인으로 의심하자 그는 동우회는 사회 계몽 단체임을 들어 독립운동 단체가 아니라고 변명하여 의심의 눈초리를 벗어났다.
1926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하였다.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서 수학하고 중퇴한 학력을 인정받아 무시험 전형으로 입학했다. 이 때 재학번호(학번)가 1번으로, 경성제국대학 제1호 학생인 셈이다. 1927년 작품 《마의태자》를 발표하고 이어 1928년 《단종애사》를 발표하였다. 1929년에 YMCA 근처에 생긴 멕시코 다방은 이광수와 복혜숙이 자주 다니던 곳이었다. 이후 해방때까지 그는 멕시코 다방의 단골 손님이었다. 그는 다방에서, 혹은 산사에서 문학적 영감을 얻곤 했다.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
1920년대에 와서 그는 조선총독부가 조선역사 교육을 금지시키는 것에 반발, 단재 신채호의 저서와 문건을 입수하여 한글로 번역하여 보급하는 한편 자신이 직접 역사 관련 칼럼과 소설, 시, 희곡 등을 짓기로 결심한다. 1926년부터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야간반 학생으로 다녔지만 폐병이 심해지자 작업도 힘들어졌고, 1926년 9월 경성제대 1학년 2학기 초에 휴학을 하게 되었다. 이후 집에서 요양하며 집필활동에 전념하였다.
1926년 11월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했다. 1928년 장편소설 〈마의태자〉를 발간했다. 바로 단종애사를 지었는데 이듬해 1929년 단종애사는 대중의 인기를 크게 얻었다. 이광수는 장편 '단종애사'에서 세조가 단종을 쫓아내고 집권한 역사를 다뤘다. 그는 사육신(死六臣)이 처형당한 날 신숙주의 아내 윤씨가 목숨을 끊었다고 썼다. 변절한 남편이 부끄럽다며 다락방에 올라가 목을 맸다고 묘사했다. 이광수는 18세기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실린 야사(野史)를 바탕으로 삼았다.
그러나 실제는 세조실록 2년 1월 23일자엔 신숙주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떴다는 기록이 나온다. '대제학 신숙주의 처 윤씨의 상(喪)에 조효문을 보내 호상하게 하다.' 윤씨가 숨진 것은 사육신 사태가 일어나기 다섯 달 전이었다. 그때 신숙주는 세조의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 있었다. 신숙주 아내를 둘러싼 야사는 정사(正史)와 전혀 다른 허구였던 셈이다.
1928년 3월 다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복학하였다, 그러나 폐병과 과로 등으로 몸이 약해지면서 3학년 2학기를 마치고 1930년 1월 경성제국대학을 중퇴하고 만다. 1930년 봄, 주요한, 정지용, 주요섭 등과 함께 방정환의 잡지 《어린이》지의 필진으로 참여한다.
1930년 독립운동가의 가족들의 생활상을 묘사한 소설 《혁명가의 아내》를 발표하였다. 1931년 6월 26일부터 조선일보에 소설 《이순신》의 연재를 시작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의 생활상을 묘사하는 한편 이순신의 일대기를 발표하여 항일 의식을 고취시켰다. 조선총독부는 그의 작품을 검열하고 그의 집 주변을 내사하기 시작한다. 1932년 동아일보에 소설 《흙》을 연재하였다.
소설 《흙》은 계몽운동가 이종준(李鍾駿)의 맏딸을 모델 로 한 실화소설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 《흙》 역시 청년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신문에 연재됐던 이광수의 소설 '흙'의 주인공 허숭을 보면서 정주영은 한때 변호사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정주영은 두 번 연속 변호사 시험에 낙방하고 결국 열아홉이 되던 해 서울로 상경한다. 이광수의 작품들이 당대 청년층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본 조선총독부 당국은 그의 작품 내용을 검열하기 시작하였다.
단종애사 발표.
1928년 발표한 단종애사는 무정 이후 작품들 중 무정, 흙 등과 함께 전국적인 인기를 얻은 작품 중의 하나이다. 같은 무렵 친구이자 경쟁자인 홍명희는 소설 임꺽정을 발표하여 경쟁하게 된다. 조선일보는 1928년 11월 17일 실린 '임꺽정' 연재 예고 기사에서 "세계적 명작 알렉산더(알렉상드르) 뒤마의 '암굴왕'보다도 더욱 그 구도가 크거니와 홍명희 선생의 필치는 오히려 뒤마류의 것보다도 훨씬 장대할 것을 미리 말씀합니다"라고 광고했다.
'임꺽정'은 동아일보를 긴장시켰다. 동아일보는 '임꺽정' 연재 예고가 나간 직후 이광수의 '단종애사(端宗哀史)' 연재를 예고하면서 맞불을 놓았다. 양대 민간지에서 문단의 양 거두가 승부를 겨루게 된 것이었다. 두 소설 중 어느 쪽이 더 인기를 끌었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김을한은 "임꺽정이 연재되는 동안 조선일보는 처음으로 동아일보의 연재소설을 능가할 수 있었다"('한국언론인물지')고 회고했다.
단종애사를 통해 사람들은 단종을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를 받는 백성으로, 사육신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조선총독부에 협력한 중추원 고관들을 한명회, 신숙주로, 조선총독부와 일본 천황을 찬탈자 수양대군으로 해석하였다. 작품은 크게 공감대를 형성하여 많은 남녀노소가 애독하였다.
동아일보에 연재된 단종애사가 막을 내린 다음날은 특별히 동아일보 신문 기사에 단종애사가 끝난 것을 보도하기도 했다.
한편 김동인은 수양대군의 관점에서 쓴 소설 대수양을 짓기도 했다. 후일 이광수 역시 세조의 입장에서 쓴 장편소설 세조대왕을 쓰기도 했다.
언론 활동과 브나로드 운동.
1930년초 경성부 홍지동에 별장 춘원헌을 구입하여 별장으로 활용하며 집과 별장을 오갔다. 홍지동의 별장 춘원헌은 후대에 세워진 영인미술관 근처에 있으며, 현진건의 집터와 박종화가 살던 가옥이 주변에 있다. 이곳에 체류하며 박종화 등을 만나 문학과 시사, 정치에 대한 담론을 하기도 했다. 박종화와의 오랜 대화 틈틈이 얻은 공통된 결론은 교육을 통한 계몽이었다.
1930년부터 김성수, 송진우 등과 함께 농촌 계몽 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을 주도하였다. 경기도 양주의 어느 농촌을 방문했다가 농촌의 문맹자가 많은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그는 농촌 계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문인들을 찾아다니며 농촌 계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대학생들에게 농촌 계몽운동에 나서줄 것을 권고하도록 부탁하였다. 그는 문인으로서 브나로드 운동의 대표적 인물이기도 하였다.
1931년 춘원 이광수가 잡지 '동광' 대담에서 구한말 개화파 주역이던 박영효에게 개화사상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물었다. 이에 박영효는 "신사상은 박규수의 집 사랑방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이때 비로소 박규수의 사랑방 모임이 온 천하에 널리 알려진 순간이었다.
1931년 그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의 겸임 국어국문학 강사로도 초빙되었으며, 각 학교의 문학 강연에도 출강하였고 방송과 개인 교습 등으로 문인을 길러내기도 했다. 우연히 그를 찾아온 소년 피천득에게도 문학인의 길을 가도록 이끌어주기도 했다. 후에 피천득은 "나를 문학의 길로 이끈 이광수 선생은 재주가 많고 착하셨지만, 바보같은 분이기도 했다. 고 회상하였다. 또한 1924년 작가 채만식을 추천하여 〈세 길로〉라는 작품으로 조선문단을 통해 등단시키기도 했다. 한편 10세에 모친을 여읜 뒤 삼촌 집을 전전하던 피천득을 잠시 받아주어 자신의 집에 기거하게 하기도 했다.
브나로드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 확산되면서 그는 자신의 작품인 <흙>에 이를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1932년 4월부터 다음 해 7월까지 춘원 이광수는 장편소설 '흙'을 동아일보에 연재하면서 주인공 허숭의 입을 통해 젊은 지식인들의 참여를 호소했다.
그는 직접 자신의 작품 흙과 칼럼, 강연을 통해서 의식있는 젊은이들이 열정을 갖고 농촌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민중의 틈으로 파고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브나로드 운동은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고 젊은이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계속되었다. 1930년부터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브나로드 운동과 농촌 계몽을 주제로 한 장편·단편 소설과 시를 모집하였는데, 이중 대표작은 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심훈(沈熏)의 《상록수 (常綠樹)》였다.
언론, 사회 활동.
미스코리아 심사 위원.
그는 1931년 5월에 개최된 한국 최초의 미스코리아 대회의 심사위원이기도 했다. 1931년 『삼천리』라는 잡지에서 주최한 ‘반도의 대표적 려인(麗人) 미쓰 코레아 삼천리 일색(一色)’을 뽑는 사진공모전에 심사위원의 한사람으로 참여, 최정원(崔貞嫄) 등을 선발하였다.
당시 삼천리사(社)는 “구라파에 전 구라파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미인이 있고 각국에도 그러한 모양으로, 우리 반도에도 전 조선을 대표할 려인 한 분을 찾아” 보자며 “고상전아(高尙典雅)하고 아름다운 미모에다가 균제된 체격, 만신(滿身)이 예지와 총명에 찬 듯한 근대적 려인”을 뽑겠다고 광고를 냈다(『삼천리』, 1931.5). 삼천리 지의 고정필진인 이광수 역시 심사위원의 한사람으로 위촉되었다.
당시 삼천리지는“18세 이상의 조선 여성, 3년 이내의 사진일 것”을 응모자격 조건으로 걸고, 심사는 '심미계(審美界)의 권위'를 지닌 이광수, 염상섭, 김억, 안석주, 이승만(李承萬), 허영숙, 나혜석, 김원주, 최승희 등을 선정했다. 1931년 10월 그는 삼천리사 주최 미스코리아 선발 대회 심사위원의 한사람으로 총 326명의 응모 사진 중 특선 1명 포함해 14명의 입상자를 선정해 발표하였다.
이순신전 집필과 대중화.
1931년 1월초 이광수는 우연히 이순신 가문의 후손에게 엄청난 양의 빚이 있다는 소문을 접하게 된다. 이광수는 이순신 유적지 보존 운동에 동참하게 된다. 1931년 아산 이순신 장군 묘역이 경매 처분될 위기에 이르자 동아일보는 사설과 기획기사를 연속 보도해 이순신을 재조명하고 유적을 영구보존하자는 운동을 주도했다. 윤치호는 거금을 들여 이순신 묘역과 사당, 위토가 일본인 손에 매각되는 것을 막으려 노력하였다.
이광수는 경성과 평양, 대구, 부산을 돌아다니며 강연과 연설을 통해 이순신 유적지를 지켜줄 것을 호소하였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춘원 이광수는 동아일보 기사에도 이를 반영, 충무공 유적지를 탐방하는 연재 기사를 직접 썼고, 소설 '이순신'을 집필하였다. 또한 1931년 5월초, 이광수는 동아일보 기사와 사설 등을 통해 아산 이순신 묘소의 위토가 경매에 부쳐질 위기에 처한 것을 상세히 보도했다. 이순신 유적지 보존기금 마련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자 그는 이순신의 일대기를 직접 소설로 쓰기로 하고 집필에 들어갔다.
그는 1931년 5월 25일에 결성된 충무공 유적보존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이광수는 1931년 5월 21일∼6월 10일 현지 사정을 기행문 형식으로 실었고, 6월 26일부터는 장편소설 ‘이순신’을 연재했다. 소설 이순신전에서 이광수는 이순신을 자기희생적이며 충성스러운 애국자로 묘사했다. 이를 두고 훗날 대한민국 국방대학 국가안전보장문제연구소 연구기획실장 노영구는 “영웅은 영웅이되 충의(忠義)를 강조하며, 인격의 힘으로 열등한 민족을 개조하는 영웅으로 그려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순신을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비판과, 의도적으로 이순신과 조선 대신들의 대립구도로 엮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문학 활동 및 사회 활동.
1931년부터 장편 소설 이순신을 집필하였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소설인데도 군관에서 말단 수병에 이르기까지 작품 속 등장인물이 모두 실존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은 당연히 조선과 왜국의 대결이었는데, 이광수가 이를 ’이순신 대 원균 등 이순신을 모함한 장수와 대신들’의 대립구도로 바꾸어 놓았다”는 김탁환 교수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32년 1월의 이봉창의 투탄 사건을 애석히 실패했다 하고, 그해 4월의 윤봉길의 투탄 사건을 쾌거라고 주장했다가 헌병의 귀에 들어가 총독부 경무국으로 소환당했다. 6월 안창호가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인천항에 도착하자, 자동차로 인천항에 가서 안창호의 호송 차량을 경성까지 따라갔다.
안창호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자 크게 낙심, 서대문형무소에 가서 안창호를 자주 면회하였다. 안창호의 재판비용과 석방, 구명운동에 나서는 한편 윤치호, 김성수 등을 찾아가 안창호의 출옥을 도와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는 안창호가 심장과 간장 등이 좋지 않음을 들어 병보석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고, 안창호는 징역 4년의 언도를 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주요한, 주요섭, 김동원, 조병옥 등과 연락하며 수양동우회를 운영해 나갔다.
또한 당대의 화려한 자유 연애관으로 비판받던 나혜석, 박인덕과도 자주 만나 교류하였고, 만년에 나혜석이 병으로 고생할 때도 자주 문병을 가기도 했다. 그는 시중에서 나혜석과 박인덕을 비난, 비판하는 것을 위선이라며 조롱하였다. 자신은 불륜과 외도를 하면서 자기 남편과 부인에게, 자신의 여동생과 누이에게는 정결과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며, 자신들은 혼전, 혼후의 문란한 행위를 하면서도 가족들에게만 순결함과 지조를 요구한다며 위선과 기만이 만연한 사회라며 조소하였다. 기존의 유림과 기독교 등의 종교계에서는 그가 탈선과 타락을 부추긴다며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의 수많은 작품은 민족주의와 평등주의, 인도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갱생의 이상을 담고 있어, 당시의 개화된 청년층에 큰 감명을 주었다.
조선일보 부사장.
1932년 7월 30일 문인 친목단체인 조선문필가협회 발기인 및 집행위원을 맡았다. 1933년 열차로 시베리아 여행을 다녀왔다. 1933년 8월 동아일보사 편집국장을 그만두고 같은 달 28일 조선일보 부사장에 취임해 1934년 5월까지 활동했다. 9대 사장에 취임한 방응모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광수와 경제부장 서춘 등 유능한 언론인을 스카우트해 조선일보 혁신에 나섰다. 보다 좋은 조건이라 생각한 그는 방응모의 제의에 응한다.
1933년 7월 19일 조선일보의 제9대 사장에 취임한 방응모(方應謨)는 한 달 후 동아일보에서 이광수와 서춘(徐椿)을 스카우트해 각각 부사장과 주필(主筆)에 임명하였다. 9월 27일 이광수는 조선일보에 소설 '유정 (有情)'을 연재하였다.
이광수는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 겸 취체역(이사), 조선일보의 편집국장, 학예부장, 정리부장 등 5개 직책을 동시에 맡아 '조선 신문계의 무솔리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1934년 5월에 조선일보 부사장직에서 물러났으나 조선일보의 이사직은 1950년까지 유지하였다.
1934년 이광수는 조선일보에 실은 글에서 "아랫목에 '뜻뜻이' 등을 굽고 있는 생활은 암만 해도 투쟁보다도 은둔을 의미한다."는 견해를 펼쳤다.
수양동우회 사건 전후.
사회 계몽론.
1930년대에 이르러 자유 연애 등이 유행하였다. 이광수는 "일반 민중이 도덕적 이상이 퇴폐해서 인생의 의무라든가 사업이라든가 하는 높은 희구를 버리고 오직 성욕과 호기심만 따르게 되니, 에로란 성욕적 흥미를 만족시키는 관념군이요 그로란 호기벽을 만족시킬 만한 관념군"이라고 해석했다('동광' 1931년 1월 1일자). 에로와 그로의 관념론도 좋지만 큰 뜻을 품는 대의지사가 점차 줄어들어감을 애석해하며 한탄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려와 조선 왕조시대 1천년의 지나친 엄숙주의는 민중들의 진취적인 기상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박탈하고 삭막한 사회를 만들었다며 억지로 엄숙한 사회분위기를 조장하는 것은 반대하였다.
1930년대에는 유성기(축음기)와 라디오가 각지로 보급되었고, 유행가가 확산되었다. 이 무렵부터 인기있는 곡은 유행가라 하여 시중의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유행가는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노래들 뿐이었다. '장백산인(이광수)'은 이 범람하는 '유행가'를 '전염병'이라며, "근년에 조선에 유행되는 가요는…'부어라 먹자 두들겨라'식이 아니면 주색의 방종한 향락을, 검열관이 허하는 한에서 고취하는가 십흔 것들…"이라고 비판했다.(1934년 4월 19일자) 그는 유행가라는 노래들이 전부 남녀간의 사랑만을 노래한 곡들이 많지 다른 내용은 없다며 식상한 점 역시 비판하였다. 그럼에도 대중가요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
1934년 그가 참여하던 어린이잡지인 《어린이》지가 경영난과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결국 123호를 끝으로 폐간하고 만다. 1935년 안창호가 가출옥하자 두부를 사들고 서대문형무소로 가서 영접하였다. 그해 조선일보에 <이차돈의 사>를 연재하였다.
그는 시와 작품들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와 조선총독부를 가해자로, 한국인을 피해자로 역할을 상정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손녀 둘을 데리고 살던 할머니는 곱상의 손녀는 부잣집으로, 밉상의 손녀는 가난한 집으로 예웠다. 가까히 사는 곱상의 손녀가 할머니를 모셨는데 구박이 심하고 굶기다시피하여 밉상의 손녀를 찾아가다 고개 마루에서 기진하여 숨진다. 맘씨 고운 밉상의 손녀가 찾아와 보리밭가에 묻어드렸고 이듬해 그 무덤에서 피어났다는 것이 할미꽃의 기원 설화였다. 춘원은 가난하고 무력한 이 피해 이미지를 보리밭가 찌그러진 무덤에 핀 할미꽃에 투영하였다.
역사란 가해·피해의 대결구도로 꾸려져 내렸는데 할미꽃은 한국인에게 있어 피해편을 대변하고 상징하는 꽃이다. 그는 조선의 역사와 신화, 민담을 시와 소설로 풀어냈고, 이순신은 조선의 독립운동가, 이순신을 모함하는 대신은 일제와 총독부에, 사육신을 조선의 독립운동가에 신숙주와 한명회를 일제와 총독부에 비유하였다. 1930년대 초, 그의 작품의 뜻을 해석하기 시작한 조선총독부는 그를 위험한 반체제 문인으로 규정하고 감시하게 된다.
체포와 수감 생활.
1936년 6월 1일 경성일보사 초대사장이자 조선 언론정책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아베 미쓰이에의 흉상 건설을 위한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37년 조선총독부에서 신사 참배에 협조를 부탁받았으나 거절하였다.
1937년 일본을 방문, 이때 일본의 유명한 기생집인 명월관을 방문했다. 춘원 이광수도 도쿄 명월관을 방문한 기록을 조광 1937년3월호의 ‘동경문인회견기’에 남겼다. 와세다대 은사였던 요시다 교수와 야마모토 개조사 사장 등 문인들과 일본식 고급요정에서 저녁을 함께한 춘원은 조선 요정에 가보고 싶다는 주위 권유에 따라 2차로 명월관을 찾는다.
그는 종종 명월관을 찾아 술과 노래를 즐기곤 했다. 황태자 이은 부부와 이광수는 도쿄 명월관을 자주 이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그는 커피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귀국 직후,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흥사단 사건)으로 안창호와 함께 경성부에서 체포,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조직원을 불라는 고문을 당했지만 그는 조직원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 건강했던 그는 독방에 수감되었고, 안창호와 함께 병 보석으로 출감할 때까지 형무소에서 6개월간 수감, 영어생활을 하였다. 1938년 초 6개월 만에 병으로 보석되었으며, 이 무렵에 《사랑》, 《세조대왕》 등을 집필하였다.
이상주의에서 현실주의로 변화.
이광수의 사상, 세계관은 작품으로도 투영되었는데 1910년 데뷔 이후 초기에는 기독교적 경건함과 애국 계몽주의적인 경향을 띄었다. 이광수의 초기작품들은 인간의 개성과 자유를 계몽하기 위하여 자유 연애를 고취하고, 성인이 된 자녀의 결혼에 부모가 개입하는 것의 부당함을 주장하였으며, 조혼의 폐습을 거부하였는가 하면, 족보를 없애고 위선적인 문벌 사회와, 유교의 학통과 학풍 등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으로 그는 인륜을 어지럽히고 금수화를 획책하는 인간이라는 비방에 시달려야 했다. 무정에서는 서양의 교육을 불신하는 국내 사람들을 조롱하며 신 교육을 받아야 된다는 점을 지적하였고, 개척자에서는 과학사상에 대한 불신을 버릴 것을 역설하였으며, 흙에서는 농민계몽 사상을 고취하면서 민족주의사상을 계몽하였다.
처음에는 기독교적 시민윤리와 사회 계몽을 역설하였지만 인간의 이중적인 본질에 갈등, 번뇌, 환멸감을 느끼면서 점차 현실지향적으로 변해갔다. 그 자신도 1930년대의 한 작품을 발표할 때 "동시대 최선의 세계관을 선택하고 동시대와 인물의 중심계급을 전형화하였다."고 하기도 하였는데, 1930년대에 갈 수록 퇴폐적인 문학이나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지는 극단적 문학관을 지양하였다.
그는 처음 사회 계몽과 개혁을 설파하였으나 사람들은 호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낭만주의자나 공상주의자라고 비판하거나, 단지 소설과 역사 소설에만 관심을 갖는 민중들을 보고 점차 실망하게 되었다. 1930년대에는 종종 남녀간의 애정, 정사 관계 등의 단편작과 시를 발표했는데 1919년의 베이징 애정도피와 연관시켜서 그를 비방하곤 하였다.
재판과 좌절, 전향.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전국에서 총 181명이 체포돼 이중 42명이 재판에 회부됐고 이광수, 조병옥 등 11명에게 징역이 선고됐다.
1938년 3월 10일 자신의 스승격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도산 안창호가 병사하자, 이광수는 커다란 충격과 실의에 빠졌다. 홍난파와 현제명의 이탈을 비판하면서 인간 사회의 신뢰와 의리라는 구호에 대한 회의와 환멸감을 느끼게 된다. 1910년 문단 등단 초반부터 이미 유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도덕, 정의 등의 존재를 의심하던 그는 정의와 가족간의 의리, 애정에 대해서도 심히 의심, 회의하게 되었다.
그는 죽은 안창호의 곁을 떠난 홍난파와 현제명 등을 비판하였지만 자신도 심적인 고통으로 방황하며 재판을 받던 중 불면증과 신경증이 심해지자 병보석을 신청한다. 그 해 11월 3일 병보석 상태에서 수양동우회 사건의 예심을 받던 중 전향을 선언했다. 그리고 바로 병보석이 받아들여져 보석신청 후, 집행유예로 출감하였다. 출감 직후 그는 한동안 방황하다가 1939년 1월 이후 조선신궁을 참배하였다.
안창호와 유길준을 절세의 애국자라고 확신하던 그는 윤치호와 자주 교류하며 실력 양성론에 대한 확신을 다져나갔다. 훗날 이광수는 윤치호에 대해 “8개 국어를 하는 어학의 천재로서 영어는 서양인보다 더 잘 한다”고 술회했다.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그는 사고방식과 의식의 계몽이 없이는 절대로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크게 상심한 이광수는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당시 대처승이었던 청담(靑潭) 순호(淳浩)를 만났다가 그와 불교의 교리를 두고 논쟁을 벌이게 된다.
순호를 만나서는 일주일간 불교사상에 관한 격론을 펼친 끝에 순호는 춘원이 불교에 귀의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변절과 친일 행적.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 년 만에 병보석되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 행위로 기울어져 1939년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으로 되었으며 같은 달 20일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 협회 주체 전선(戰線)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하였다. 1940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창씨(創氏)와 나」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고,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3월부터 7월까지 『녹기(綠旗)』에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를 연재하였으며, 9월 직접 작사한 노래 「지원병 장행가(壯行歌)」가 경성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방송되었다. 12월에는 『국민총력』에 지원병훈련소 참관기인 「지원병훈련소의 하루」를 발표하였고, 황도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41년 일본어 산문집 『동포에 부침』이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간행되었다. 8월 임전대책협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41년 9월 3∼5일자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지지하였다.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전시생활부장으로, 영미타도대강연회에서 ‘사상 함께 영미를 격멸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징병제도 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으며, 『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6월 조선문인협회 주최의 ‘일본 군인이 되는 마음가짐’을 듣는 좌담회,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하였다. 1943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 이사로 선출되었고,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과 연사로 활동하였다. 같은 달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6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결전태세즉응(決戰態勢卽應) 재선(在鮮)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다. 8월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으며, 11월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하였다. 1945년 2월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과 대의당(大義黨) 위원이 되었다.
총독부 정책에 협력 문제.
1938년 12월 14일 전향자 중심의 좌담회 '시국유지원탁회의'에 참석하여 강연을 한것을 시작으로 적극적인 친일 행위에 나섰다. 이어 이광수는 '민족 감정과 전통의 발전적 해소를 단행하자'고 주장하면서 “의례 준칙의 일본화”와 “생활 방식의 일본화”를 역설했다. 그로 말미암아 이때부터 이광수는 '이광수'(李狂獸)라는 빈축을 사게 되었다. 형식적이던 당시 사회의 도덕, 인륜의 구호에 염증을 느끼던 그는 이해관계에 따라 사람을 만나고, 이익이 되지 않으면 떠나버리는 친구, 가족 등의 인간 관계에 대한 환멸감을 갖게 되었다. 동시에 시중의 비난 역시 속된 위선자들의 비판에 불과하다며 일축,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름뿐이고 실천하지 않는 헛된 도덕과 인륜의 구호만이 난무한다며 현실을 조소하였다. 이후 1930년대 초에 구입한 홍지동의 별장 춘원헌에 한동안 칩거해 있기도 하였다.
그 해 1939년 3월 14일 '북지(北支)황군 위문 사절' 후보 선거 실행위원을 맡는 등 문단사절 파견을 주도하였고, 7월 잡지 《삼천리》에 '문단사절의 의의'를 발표해 '조선민족이 일본국민이라는 견지와 감지(感地)에서 문예를 창작하거나 평론하려는 국민주의의 문인이나 문학은 조선에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지나사변을 계기로 조선민족의 황민화라는 대변혁이 일어났다. 이번 문단사절은 실로 이 변혁을 문단의 입장에서 표시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한편 그에게는 수많은 협박 편지와 협박 전화가 쏟아졌고, 그의 주변에는 최남선 등의 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떨어져나갔다.
1939년 6월 30일 그는 조선총독부 도서과가 주최한 간담회에 참석했다. 조선총독부의 외곽단체로 1939년 11월 3일 발족한 문인단체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에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11월 20일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서 협회 주최 전선(前線)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했다. 12월 3일 남대문통 금천대 회관에서 열린, 조선문인협회 결성 피로를 겸한 사업계획협의간담회를 주도했다.
창씨개명 전후.
1939년 조선총독부에서 창씨개명 시행을 발표하면서 조선인 사회는 논란이 일어났고, 이광수 등은 창씨개명을 공식 지지, 자발적으로 동참할 것을 선언하기도 한다. 1939년 12월 12일 이광수는 경성일보에 창씨개명에 적극 동참하자는 취지의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그의 창씨개명 지지 주장에 무수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창씨개명은 불가피한 일이며 일본과 조선총독부는 우리가 원하지 않더라도 강제로 창씨개명하도록 조처할 것 이라고 답하였다.
39년 12월 20일 오후 4시부터 서울 반도호텔에서 매일신보의 후원으로 공개 원탁회의가 열렸다. 일본인 측에서는 유가미, 매일신보의 이노우에, 그리고 몇몇 인사들이 참석했다. 조선인 측에서는 한상룡, 장덕수, 이광수와 윤치호가 참석했고, 최린이 사회를 보았다. 매일신보 주최 원탁회의의 내용은 "어떻게 하면 요즈음 젊은이들을 건전한 사고와 행동으로 이끌 수 있을까" 하는게 토론 주제였다.
이때 이광수는 창씨개명 문제에 대해 명확한 견해를 피력했다.
또한 이 회의에서 임진왜란 이후부터 상민이 재산을 모아 양반의 족보를 돈주고 사서 혈통을 위조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 토론이 신문지면과 언론에 보도되면서 이광수는 다시한번 성토의 대상이 되었다.
1940년 1월부터 조선총독부 미나미 지로 총독은 창씨개명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주제의 담화문을 발표했고 이는 조선 사회에 논란이 되었다. 1월 4일 미나미 지로 총독은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고 천명했다. 그런데 그가 뒤이어 조선인들이 창씨개명하면 흐뭇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시사하는 바람에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총독에게 아부하는 조선인 지식인들은 당연한 것이라며 총독을 추켜세웠다.
그는 총독의 은혜를 찬양하지는 않았지만 창씨개명의 취지에 적극 찬성하고 지지를 보냈다. 그리고 앞장서서 창씨개명하였다. 이후 그에게는 무수한 협박과 투서, 비난이 쏟아졌다. 윤치호는 그에게 창씨개명을 적극 지지한 것은 섣부른 행위라며 경고를 보내기도 했다.
창씨 개명 이후.
1940년 2월 20일 매일신보 사설란에다가 이광수는 香山光浪(가야마 미쓰로)이라는 창씨개명을 발표하고, 다음과 같이 창씨개명을 적극 옹호하는 한편, 자신의 창씨개명을 합리화했다.
그가 창씨개명을 단행하다 다시 그의 집 앞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와서 돌과 인분, 쓰레기 등을 던졌다. 하루는 벽초 홍명희가 한용운을 찾아가 “최린, 이광수가 창씨개명을 했답니다. 이런 ×자식들 때문에 민족적 악영향이 클 것이니 청년들을 어떻게 지도한단 말입니까”라며 흥분했다. 그러자 한용운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그 자들을 과대평가하고 있소. 만약 말을 할 줄 아는 개가 있다면 당신에게 크게 항의할 것이요.”창씨 사건 뒤로 한용운은 그와 절교하여 한번도 만나주지 않았다.
1940년 2월 22일 조선문인협회 '문사부대'로 지원병 훈련소에 1차로 1일 입영견학을 했다. 또한, 이 무렵 소설 〈무명〉으로 일본의 모던일본사가 주최하는 조선예술상을 수상했다. 8월 6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주최로 '내지'작가인 기쿠치 칸, 고바야시 히데오, 나카노 미노루 등이 중심이 돼 반도호텔에서 열린 문예좌담회에 참가했다. 9월 29일 경성 중앙방송국 제2방송(조선어방송)에서 이광수가 작사한 노래 〈지원병행가〉가 방송되었다. 10월 12일 조선문인협회 '문사부대'로 지원병훈련소에 2차 1일 입영견학을 갔다왔다. 12월 25일 황도학회가 만들어질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0년 6월 3일 이광수의 집을 방문한 윤치호는 그의 부인에게서 "자기 남편이 창씨개명한 후 1천 통 이상의 편지를 받았는데, 하나같이 욕설을 퍼붓거나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협박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6월 무렵에도 그는 하루 평균 5통 이상의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한편 조선총독부에서도 조선 지식인들에 대한 살생부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일본 관헌이 작성한 3만8000명의 조선 지식인 살생부'의 존재를 알게 된 그는 충격에 빠진다. 1941년 양주군의 봉선사에 내려가 암자 관무헌에 거처, 외부 출입을 줄이며 4년간 은둔생활을 하다시피 했다.
자치권 획득 노력.
1940년 맨 먼저 창씨개명을 한 이광수는 1948년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수감된 뒤 ‘일제에 협력하면서 참정권과 평등권을 얻어 민족을 보존하면 독립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조선총독부에 저항만 할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에 협력하고 호의를 얻어낸 다음, 일본으로부터 참정권과 자치권을 얻어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독립을 달성하자고 주장하였다.
창씨개명에 가장 먼저 앞장서고 동료들에게도 창씨개명을 권고하는 것에 다른 동료 문인들은 못마땅히 여겼다. 이광수는 1940년 경성일보(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일본어로 발행된 신문) 창간을 주도한 도쿠토미 소호에게 일본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창씨개명을 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1941년 중국 난징(南京) 대동아문학자대회에 함께 참석한 소설가 김팔봉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우리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생겨 조선 사람의 문부대신도 육군대신도 나오게 되는 날이면 그때 가서야 일본인이 깨닫고서 이러다가는 일본이 조선인의 나라가 되겠으니 안 되겠다 하고서 살림을 갈라가게 된단 말이오. ...(이하 중략)... 그제야 우리는 삼천리 강토를 되찾아가지고 독립한단 말이요”라고 하였다. 그는 참정권과 자치권을 얻으려면 일단 당국자들에게 신뢰감을 얻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조선총독부와 일본 당국으로부터 참정권을 얻어내고, 그 뒤에 자치권을 얻고, 일본 정부의 조선인 각료와 인재들의 진출 등의 과정을 거쳐서 일본 스스로가 조선을 독립시키게끔 단계적으로 밟아나가자고 역설하였다.
일제강점기 후반.
태평양 전쟁 전후.
1941년 1월 20일 경성 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이광수가 작사한 노래 〈애국일의 노래〉가 방송되는 한편, 일문 산문집〈동포에 부침〉을 발표, 간행하였다. 1941년 수양동우회 사건에 대해 경성고법이 전원무죄를 선고했으나 최윤세와 이기윤은 이미 감옥에서 숨지고 김성업은 불구가 된 뒤였다. 또한 그가 사표로 받들던 안창호도 이미 사망한 뒤였다. 또한 일부 동료들은 전향하여 친일파가 되거나 총독부 고관에게 뇌물을 바치고 청탁을 하기도 했다. 이 무죄판결은 그를 더욱 절망케 했다.
1941년 5월 5일부터 이른바 '국민연극'을 표방하는 현대극장 부설 국민연극연구소에서 예술개론을 강의했다. 8월 25일에는 임전대책협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9월 7일에는 임전대책협의회가 주관한 채권봉공대 종로대에 참가하여 거리에서 '애국채권'을 팔았다. 9월 11일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한 뒤 10월 18일 조선임전보국단 대구지부 설치를 위한 위원으로 파견되었다. 12월 경성 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시국강연을 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25세면 인생 끝'이라는 노래가 유행하였다. 또한 일본에는 '자신들이 전쟁터에서 다 죽고 나면 일본 땅에 조선인들이 모두 들어와 살 것'이라는 말도 떠돌았다고 한다. 이때 이광수와 최남선은 하루 빨리 일본에 협조해 일본의 시민이 되는 게 살 길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1942년 2월 27일부터 29일까지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저축강조 전진대강연회 연사로 활약했다. 5월 경성일보 귀빈실에서 조병상, 이숙종 등과 일본인 고관들이 모인 좌담회에 출석하여 황민화를 찬양했다. 5월 15일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징병제도 대연설회에서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연재로 연설했다. 6월 10일 조선문인협회 주최로 부민관에서 열린 '일본군인이 되는 마음 가짐'을 듣는 좌담회에 참석했다. 11월 3일부터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했다. 12월 8일 '대동아전 1주년 기념 국민시 낭독회'에서 시를 낭독했다.
1943년부터 그는 여러 학병 권유의 글과 연설을 언론과 방송 등을 통해 번갈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43년 2월 25일부터 8월 3일까지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국민개병가' 현상모집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4월 17일 조선총독부의 지시하에 김용제(金龍濟)·최재서(崔載瑞)·김기진(金基鎭) 등과 같이 주도해 조선문인협회, 조선하이쿠협회,조선센류협회, 국민시가연맹 네 단체가 통합해 결성한 조선문인보국회(文人報國會)를 결성하여 조선문인보국회의 이사에 선출되었다. 8월 18일 경성 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이광수가 작사한 노래 〈희망의 아침〉이 방송되었다. 8월 16일 아서원에서 열린 조선문인보국회 제1회 이사회에 참석했다.
요양 생활.
1943년 학생이던 시인 황금찬은 일본 도쿄에서 이광수를 만났다. 황금찬이“지금 우리말도, 우리 글자도 없는데, 그래도 문학을 해야 하냐”고 묻자, 이광수는 “문학은 해야 한다. 비록 우리의 언어를 빼앗겼지만 사람까지 빼앗기진 않았다. 일본말로 글을 썼더라도 그 글을 쓴 사람은 한국인이 아닌가”라며 강한 민족의식을 드러냈다고 한다.
1944년 1월 조선총독부에서 중추원참의직을 제안하였지만 덕망있는 인사를 앉히라며 극구 사양하였다. 결핵과 폐렴, 간염 등으로 고생하던 이광수는 1944년 3월 은둔생활을 위해 경성부의 집을 청산하고 양주군 진건면 사릉리 주변에 땅을 사고 진건면 사릉3리 520에 집을 지은 뒤 그곳으로 가서 짓고 농사를 시작했다. 당시 동네 사람들은 춘원을 친일파이기보다는 문인으로 존경했다. 또한 신식 교육을 받은 지식인과 여성들은 그를 “춘원 선생님”이라며 존칭을 붙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해 말 경성부에서 아이들과 내려온 부인 허영숙은 “경성에서는 ‘친일파 이광수타도’라는 구호가 나붙고 험악하니 다른 곳으로 피신하라”고 하였다.
1943년 11월부터 1944년 1월까지 조선문인보국회가 주관한 “결전소설과 희곡 현상모집”에서 심사위원을 맡았다. 11월 4일부터 7일까지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과 연사로 활동했다.
1943년 11월 8일부터 14일경까지 작가 최남선, 기업인 김연수, 친일파 정치인 이성근(李聖根) 등과 함께 부산항을 출발, 일본에서 학생들에게 지원병을 권유하는 '선배격려대원'으로 연설했다.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는 1943년 11월 24일 일본 도쿄 메이지 대학에서 조선인 전문·대학생들에게 학병에 지원하라는 강연을 했다. 당시 도쿄에서 발행된 잡지 ‘조선화보’(1944년 1월호)에서 아동문학가 마해송의 사회로 진행된 육당과 춘원의 대담 내용이 기록되었다. 이 대담에서 춘원은 강연회에 대해 “일종의 극적 광경이라고나 할까. 황국을 위해 전장에 나가 죽자는 생각이 모두의 얼굴에 드러났더군요”라며 “그때의 압권은 최(남선) 선생님의 강연이 아니었을까요”라고 말했다. 육당은 “적어도 천오백 명은 모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며 “일찍이 없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지요”라고 화답했다.
최남선은 “어떤 학자는 ‘(일본)무사도의 연원은 신라의 화랑이 그 토대였다’라는 것을 생각할 정도”라며 한일 양국 공통의 상무(尙武) 정신을 역설했고, 이에 이광수는 “저 ‘화랑’의 사상이란 오늘날 막 바로 부활시켜도 좋다고 생각합니다”며 동조했다. 그는 1943년 12월에도 일본에 체류하며 도쿄에 파견되어 일본 유학생들의 학병 지원 권고 강연을 하고 돌아왔다.
광복 직전.
1944년 2월 26일 경성 종로서가 주도한 총후 황민등에서 실무위원을 맡았다. 1944년 6월 18일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이 됨과 동시에 같은 날 열린 결전태세즉용 재선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고, 8월 17일 적국 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라는 제목 아래 문학도 결전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했다. 그 뒤 다시 양주군 진건으로 내려와 요양하였다.
1944년 11월 11일부터 14일까지 중국으로 건너가 일본 제국의 괴뢰정부 왕징웨이 정권의 수도 난징에서 열린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했다. 한편 조선 총독부는 그에게 중추원 참의직을 제안하였지만 자신이 이 직책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명성은 사라질 것이라며 극구 사양하였다.
당시 미군 극동군사령부는 당시 그를 조선의 유력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평하였다. 미군정은 조선인 지도자들에 대한 보고서에 그에 대한 평을 남겼다.
1945년 1월 4일부터 17일까지 전쟁협력단체인 대화동맹大和同盟이 주도한 처우감사 총궐기 재성유지협의회 운동준비위원으로서 '처우감사총궐기전선대회'에 참여해 강연했다. 2월 11일 대화동맹(大和同盟) 준비위원 겸 이사를 맡았다. 같은 해 2월경 일본 신태양사(구 일본모던사)가 주관하는 제6회 조선예술상 문학부문 심사위원을 맡았다. 한편 조선총독부가 불령선인들을 전부 체포해서 집결시킨 뒤 총살시킨다는 소문을 듣고 1945년 3월 잠시 은신해 있기도 했다. 그 해 4월 조선총독부에서 특별히 중추원 참의직을 제안하였지만 사양하였다. 6월 8일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으로 활동했으며, 6월 24일 정치깡패이자 제국의회 의원 박춘금이 당수인 대의당의 위원에 선임되었다.
일제 후반의 문학 작품.
태평양 전쟁 무렵 이광수는 시, 소설, 평론,좌담 등 다양한 영역에서 천황제와 황국신민화 찬양,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 정당화와 전시동원 독려, 그리고 문학을 통한 보국 등을 적극 선전하는데 주력했다.
작품으로는 1939년 2월호 동양지광 잡지에 발표한 시 <가끔씩 부른 노래>를 시작으로 1940년 <의무교육과 우리의 각오>, 1940년 4월 조선일보에 <내선일체와 조선문학>을 발표했다. 1940년 11월에는 <지원병 훈련소의 하루>(국민총력), 1942년 12월 <대동아 일주년을 맞는 나의 결의>(국민문학) 등을 발표했고, 1943년 2월에는 춘추지에 <폐하의 성업에>를, 1945년 1월 18일에는 매일신보에 <모든 것을 바치리> 등 103편의 시, 논설 등을 기고하였다. 또한 <조선의 학도여> 등의 시, <그들의 사랑> 등의 소설, <성전 3주년> 등의 수필을 발표하였다. 1943년 3월 이후 은둔생활과 농사, 요양 등을 하며 가끔 강연회에 참석하였고 이후 광복 직전까지 거의 작품활동을 하지 않는다.
전향 이후 이광수의 친일논설집은 1941년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 내용면에서는 중국과의 사대관계 단절 위에 일본과 유대강화를 필연적으로 보는 내선일체론, 후방에서 천황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는 총후봉공론, 후천개벽을 곧 일본이 아시아를 지배하는 시대로 파악하는 대동아 공영론 등 이광수 친일론의 골격을 담고 있다. 글 곳곳에 어쩔 수 없이 쓰게 된 것을 내비치는 고민을 담고 있어 그 내용을 곧 이광수의 본심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특히 소극적 친일론에서 적극적 친일론으로 돌아선 이광수의 논설을 듬뿍 담고 있지만 여전히 그것이 정말 그의 본심이었는지의 의문이 글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때 발간된 친일논설집은 1997년 작가 이경훈 등에 의해 현대어로 번역되어 재출간되기도 했다.
1945년 3월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인 불령선인, 지도자들을 압송하여 처형한다는 소식을 듣고 피난가려다가 다시 발걸음을 되돌려 양주군 진접면 초막으로 되돌아왔다. 그해 8월 양주 진접에서 광복 소식을 접하게 된다.
8월 15일 김동인과 함께 광복 소식을 접하게 된다.
“1945년 8월 보름날 정오에 일본천황 유인이 울음 섞인 소리로 온 일본인에게 부득이 항복한다는 포고를 할 때, 라디오 앞에 외배(이광수)도 울면서 그 방송을 들었다. (김동인의 증언)”
그는 일제 식민지가 오래갈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광복은 그에게 충격이 되었다.
광복 이후.
해방 정국에서의 활동.
8월 15일 춘원은 광복 후 봉선사로 돌아와 차와 경전의 향기가 가득한 다경향실(茶經香室)에 머물렀다. 1921년에 결혼했던 아내 허영숙과는 1946년 5월 21일에 합의 이혼하였는데, 서울신문은 이 소식을 전하며“장차 이광수가 전범으로 걸려들 때를 걱정하여, 자식과 재산의 보호를 위해서 취하는 잇속 빠른 길이 아닌가 보고 있다.”(1946년 6월 13일자)라며 비판하였다.
해방 직후에도 일제하에 출간됐던 심훈의 《상록수》와 함께 이광수의 《무정》 등은 재출간되었고, 여전히 “없어서 팔지 못할 정도로” 대중의 인기를 끌었지만 1945년 9월부터 그는 일제 말의 전향 선언으로 친일파라는 비판을 받았고, 그의 작품에 대해서도 일찍부터 남녀간의 연애, 정사에 대한 단편, 장편과 시들도 있어 사회를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유림의 비난을 받는 등의 수난을 당했다. 그는 서울 시내의 허름한 쪽방을 전전하며 생활하였으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칼럼과 기사 외에 송진우와 김성수가 보내주는 생활비에 의존하였다.
불운한 생활 와중에 윤치호의 병문안을 다녔고, 병원에 입원과 통원진료를 반복하던 나혜석을 찾아 위문하였으며 그 해 12월에 윤치호가 사망하자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한편 윤치호에 대한 투석, 규탄 시위 등을 이광수는 직접 지켜보았고, 병중에 외출을 나선 이광수를 향해 야유를 퍼붓고 돌과 휴지를 던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광수의 가족들에게도 비난과 멸시가 가해졌다.
1946년 9월 2일 월요일 새벽, 이광수는 6촌 동생이자 승려였던 이학수의 주선으로 봉선사로 숨었고(봉선사 주지였던 이학수는 당시 조선불교 경기교무원장으로 있었다) 이학수의 도움으로 광동중학교에서 영어와 국어, 작문 교사로 영어, 국어, 작문을 가르치며 다시 대외활동을 시작한다. 이때 이광수는 현제명이 작곡한 광동중학교 교가에 가사를 붙였고, 1976년 5월 29일 봉선사와 광동중학교 입구에 이광수 기념비가 세워졌다. 1947년 1월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로부터 안창호의 평전 집필을 의뢰받고 《도산 안창호》(1947. 5)를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이름으로 출간했다(당시 친일에 대한 비판 여론 때문에 그의 이름을 쓸 수 없었으므로 책에 “춘원”의 이름이 사용된 것은 1950년에 간행된 제3판부터였다). 이때부터 다시 글쓰기에 몰두하여 1947년 6월 《꿈》을 면학서포에서 간행했고, 그 해 김구의 자서전인 《백범일지》가 출간될 때 윤문 작업에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반민특위 구속까지.
1948년 1월 이후 한반도의 정가에서는 남북협상론과 단독정부 수립론이 제기되었는데, 이광수는 정부 수립론에 대한 의견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이나 언급을 회피하였다. 1947년 12월과 1948년 10월에는 자신의 성장과정을 주로 여성체험과 관련하여 표현한 〈나-소년편〉과 〈나-스무살고개〉를 간행했다. 1948년 6월에는 1946년 10월부터 1947년 2월까지 자신의 생활세계와 내면세계를 면밀하게 기록한 글에 당시 좌익을 '상쟁(相爭)의 논리'라며 비판하는 《내 나라》 등 3편의 논문을 추가한 《돌베개》를 생활사에서 간행했다. 1948년부터 이광수는 장덕수를 추모한 전기문 '설산과 나'를 저술하였는데, 이광수는 장덕수를 “설산은 호 그대로 개방적이요, 결백하고 어린애와 같이 표리가 없는 사람” 이라며 추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서 이광수, 최남선 같은 이데올로그형 협력자들은 배제됐고, 정부 수립 이후에도 격렬한 성토의 대상이 되었던 이광수는 12월,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한 경위와 친일의 역사철학적 맥락을 전면적으로 밝힌 《나의 고백》(춘추사)을 간행했다. 이 책에서 민족의식이 싹트던 때부터 일제 말기까지 자기의 행위를 '민족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서술한 후, 일제 말기의 친일 행위 역시 "애국자로서의 명예를 희생하더라도 민족보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다."고 강변했다. 《나의 고백》에는 친일에 대한 변호 외에도 〈친일파의 변〉이라는 부록이 있는데, 〈홍제원 목욕〉, 〈삼학사〉, 〈관공리는 반민족자였던가〉, 〈미국인의 친일파관〉, 〈대한민국과 친일파〉 등의 글에서 이광수는 병자호란 당시 끌려갔던 여성들을 〈홍제원 목욕〉이라는 지혜를 통해 감싸안았듯이 친일했던 사람들을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1949년 1월부터 이광수는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게 되었고 반민특위의 2차 검거(문화계)가 시작된 첫날인 1949년 2월 7일에 전격 구속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수감되었다. 1차 심문이 끝난 후 조사관에게 약속한 대로 친일에 대한 고백서를 썼다. 같은 날 같은 죄목으로 검거된 최남선이 “민족의 일원으로서 반민족의 지목을 받음은 종세에 씻기 어려운 대치욕”이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른바 《자열서》를 쓴 반면, 이광수는 시종 《나의 고백》에서 보인 자세를 그대로 견지했다. 자신이 태평양 전쟁 무렵 협력을 주장한 것에 대해 이광수는 "일제에 협력하면서 참정권과 평등권을 얻어 민족을 보존하면 독립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해방이 1년만 늦었어도 조선 사람들은 황국신민의 대우를 받았을 것입니다. 창씨개명 안한 사람, 신사참배 안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우리 국민은 문맹자도 많고, 경제자립도 어려워 일본과 싸워 이길 힘이 없습니다.",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소. 내가 걸은 길이 정경대로(正經大路)는 아니오마는 그런 길을 걸어 민족을 위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오."라고 변명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일본 관헌이 작성한 3만 8천 명의 조선 지식인 살생부와 자신을 바꾸려했다"고 항변하였다(다만 그 '살생부'에 관한 구체적인 증거는 현재까지 나오지 않았다).
한편 이광수의 셋째 아들 이영근(당시 중앙중학 6학년)이 반민특위 위원장에게 "아비는 폐병 3기, 신장결핵 등으로 사선(死線)에서 방황한 적이 있습니다."라며 아버지에 대한 보석 신청과 함께 자신을 대신 수감해 달라는 내용의 혈서를 투서하였고 이광수는 1949년 3월 4일 '고혈압증' 등의 사유로 특별히 병보석으로 출감되었고 석방 이후 다시 봉선사로 돌아와 틈틈이 글을 쓰며 생활하였다.
납북과 최후.
이후 조선일보의 논설위원이 되어 칼럼을 송고하던 중 폐렴과 결핵 등의 악화로 양주군 진건면으로 내려와 요양하는 한편 칼럼, 강연 활동에 초빙되어 전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7월 3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 결성준비위원회(약칭 민강위)에 참석하고, 8월 20일에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위원으로 뽑혔다. 그는 여기서 김규식을 지지하였다. 1950년 1월 다시 장편소설 《서울》을 태양신문에 연재했으나, 좌익에 대한 과도한 비판이 문제가 되어 감정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연재를 중단했다. 같은 해 3월에는 유작 《운명》을 집필했고, 5월에는 《사랑의 동명왕》이 한성도서에서 간행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사흘 전인 6월 22일, 자택에서 고혈압과 폐렴으로 쓰러졌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게 7월 5일에 효자동 집이 차압당하고, 6일에 내무서로 연행되었다. 7월 12일, 이광수는 김규식, 김동원, 안재홍, 방응모, 정인보 등과 함께 납북되었다. 평양에서 강계로 이동되던 도중 지병인 폐결핵에 동상까지 겹쳐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친구 홍명희가 김일성의 허락을 얻어 강계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자신의 숙소로 데려갔다가 인민군 병원으로, 다시 강계군 만포면 고개동의 큰 병원으로 옮겼지만 결국 이광수는 1950년 10월 25일 지병인 폐결핵의 악화로 승용차 안에서 향년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그의 시신은 오랜 친구인 홍명희, 안재홍, 평소 그의 작품을 애독하던 김원봉 등에 의해 장례식을 치르고 자강도 강계군 만포면의 야산에 안장되었다. 6․25 전쟁 후 허영숙은 식솔들을 이끌고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하였다. 그가 일제강점기에 총독부의 시책에 협조하는 글을 쓴 점을 두고 비판이 가해졌고, 그가 한국 전쟁 당시 납북된 것을 두고도 말이 많았다. 유교적인 가치관을 비판하고 여성 해방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퇴폐적이고 향락적이라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한 정치적으로 안창호, 김구, 김규식을 지지하여 오래도록 재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1950년대 후반부터 동료 문인들인 박종화, 이희승, 최현배, 최남선 등에 의해 복권이 시도되었고, 1957년 11월 23일 사상계사 주최로 '육당,춘원의 밤'이 개최되었다. 1959년 12월 '춘원선집'(광영사)가 발간되었다. 1963년 11월 '이광수전집'(삼중당)이 완간되어 13일에는 흥사단, 삼중당 주최로 '이광수전집 완간기념강연회'가 열렸다. 1970년대에 이르러 이광수의 작품과 활동에 대한 조명, 복권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71년 10월 신선 '이광수 전집'이 간행되었다. 북한에서도 1980년 이후 그에 대한 조명과 평가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그의 이름이 붙은 '평양 리광수고등중학교'가 개교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 그가 한국 전쟁 중에 사망했다는 소식이 소련과 미국 등의 교포를 통해 한국 내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한때 그가 1970년대까지 북한에 생존했다는 설이 제기되었으나 1991년에 그의 셋째 아들 이영근이 북한측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1950년에 사망한 것을 확인하였다. 만포면의 야산에 안장된 이광수의 묘는 홍명희, 안재홍 등의 사후 버려졌다가, 1980년대 중반 주택 개발 문제로 그의 시신을 찾으라는 북한 당국의 지시로 인민군 병사들이 주택의 지반을 파헤친 끝에 시신을 찾아내 신미리 특설묘지로 이장하였다. 평양특별시 룡성구역 룡궁1동 산기슭의 특설묘역으로 다시 개장되었다.
그가 머무르던 경기도 남양주시 봉선사에 그의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시랑리에는 그의 시비가 세워졌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에 있는 그의 자택은 2004년 9월 4일 등록문화재 제87호로 지정되었다.
2005년 이광수의 작품《무정》 영문판이 그의 손녀 이성희에 의해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작품.
소설, 전기, 시집, 평전, 수필 외에도 서예에 능하여 많은 서예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소설.
기타 불교 소설로 《원효대사》, 《이차돈의 사》, 《마의태자》 등도 썼다.
문학 세계.
사상을 접하면서 이광수는 마태오 복음서를 읽고 세례자 요한의 행위를 그대로 모방하고 싶어했을 정도로 감동받았으며, 레프 톨스토이의 작품, 기독교 사상이 나타나 있는 예술론에 심취하여 이같은 기독교 정신을 자신의 작품 속에도 구현하려 하였다.
이광수는 1920년에 《금일 조선 야소교회의 문젯점》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이광수가 당시 조선교회의 문제점을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비판할 수 있는 안목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의 작품에 기독교적 사상이 깃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송영옥에 따르면 기독교적 사상이 깃들어 있지만, 그는 기독교 사상을 교리로서가 아니라, 독자의 정서에 호소하고 고양된 정서의 감동을 통하여 깨닫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이광수의 작품 ‘만주에서’의 화자는 한강,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을 연달아 언급한다. 그런 화자의 시점은 자연 그대로의 풍경을 관찰하는 시점이 아니라 풍경을 파노라마처럼 펼치며 달리는 기차와 매개된 시점이다. 그 중 강(江)의 자연적 위치보다는 경의선 철도의 노선에 바탕을 둔 시점이다. 근대인에게 자연은 재구성되고 정복된 존재다. 기차를 타고 누빌 수 있는 땅, 과학기술과 시장 메커니즘에 의해 새롭게 재조직된 자연은 바로 인간이 정복한 식민지로서의 자연이다.
상하이로부터 귀국한 후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조선일보 부사장 등을 지내면서 신문에 장편소설 《흙》 등을 발표하였다. 작품 흙에는 브나로드 운동의 활동상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작품 흙에서는 주인공 허숭 등이 '잉글리시 브랙퍼스트' 스타일로 아침을 먹는 장면 등 서구식 생활을 소개하기도 했다.
춘원 이광수의 작품 '꿈'은 바로 낙산사에서 있었던 한 스님의 사랑을 관음상과 교감시킨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 '조신의 꿈' 설화에서도 힌트를 얻기도 했다. 그의 작품 꿈은 무용가 김복희의 '꿈 탐욕이 그리는 그림' 등에 영향을 주기도 했고, 1990년에는 영화감독 배창호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이순신관.
후대의 작가 김탁환은 이순신을 쓰면서 이순신의 적은 원균이 아니라 왜 수군 장수였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부각시킨다. 김탁환은 작가의 말에서 “임진왜란을 바라본 구도는 조선 조정의 당파싸움 및 수군 내부의 쟁공과 반목 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정작 적이었던 왜군에 대해서는 거의 주의를 두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김탁환은 “이것은 조선 수군과 왜 수군의 대립 구도 대신 이순신 대 이순신을 모함하고 핍박한 장수와 대신들을 대립구도로 택한 춘원 이광수의 소설 ‘이순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구도에서는 조선과 왜군의 대립을 조선인 내부의 대립으로 치환시키려는 민족개조론의 발상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로맨스 작품의 시조.
그는 작품에서 남녀간의 사랑과 낭만을 다루었다. 이광수가 '무정'에서 힘주어 강조한 것은 정(情)이고, 그것은 후대에 김동리나 박완서에게, 심지어 최근 젊은 작가들에게까지 이어져 변주되어 왔다.
20세기의 한국의 소설, 작품, 드라마, 영화 등에는 남녀간의 사랑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주를 이루었다. 작품에서는 두 남녀 주인공은 그토록 그리워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만나서 손만 잡고 잔다. 이는 20세기 초 이광수의 소설들에서부터 시작된 장면이다.
사상과 신념.
그는 식민 통치의 억압과 현실의 부조리, 구 사상과 새로운 서구의 민주주의 사상과의 갈등, 유교적 가치관과 기독교 사상의 대립, 혹은 유교적 권위주의와 서구식 시민 민주주의 간의 갈등을 있는 그대로 자신의 작품에 투영하였으며, 넓게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의 억압과 폭력에서부터 가깝게는 가족과 친구, 주변인들에 의한 정신적, 육체적 폭력을 고발하였다. 그리고 권위와 관습이라는 이름 하의 폭력을 적극 지적하고 비판하였다. 그는 이를 방대한 양의 소설, 논문, 칼럼과 논설문, 시가, 수필류, 기행문 형식으로 표현하였다.
민족 개조론.
이광수는 늘 "(거짓말 잘하고 남을 속이고 하는) 민족성을 개량하고 조선민족의 내실을 철저히 다지자"고 주장하였다. 이광수는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원인을 게으름, 나태함, 안일함, 위선, 허례허식 등으로 보았다. 그는 서구와 일본처럼 근면함, 성실성, 진솔함, 자유주의적인 가치관을 몸에 익히고 생각을 바꿔야만 독립의 첫 걸음을 뗄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한국인들의 요령과 술수, 시기심, 거짓말 등이 만연하다며 이러한 습성을 버리지 않고는 독립을 이룩할 수 없으며, 독립하더라도 독립국가를 유지할 수 없으리라고 봤다.
그는 이렇듯 열등한 민족성을 지닌 조선인들이니 당장 독립하는 것은 시기상조요, 민족성부터 개조해야 독립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신돌석을 밀고한 조선인부터 한일 합방 이후 다수의 조선인들이 일제 체제에 협력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점 등은 독립운동에 대한 환멸을 불러왔다. 또한 시기심과 술수와 요령, 거짓말이 만연한 것이야 말로 조선인의 가장 열등한 습성이라며 이러한 습성을 고치고 진실되고, 참될 것을 계속 호소하였다. 이광수가 잡지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한 직후 이광수의 집에 칼을 든 청년들이 난입했으며 개벽사의 기물들이 파괴되었고, 이광수를 강사로 초빙했던 사람까지 습격 당하기도 했다. 이광수는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손해를 보는 지름길이라며 이를 한탄하였다.
이를 두고 언론인 김대중은 '춘원 이광수가 쓴 '민족개조론'을 읽으면 우리는 모두 슬퍼지기 마련이다. 우리 민족이 그렇게 비참하고 천박했었는가 하는 점이 슬프고, 그래서 나라를 빼앗긴 것이 슬프고, 옳은 소리를 옳지 못한 시기에 내놓은 작가의 시대착오가 슬프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 글의 시대적 상황과 배경을 가리고, 또 그 글을 쓴 작가의 이름을 가리고 다시 읽어보면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도 있다. 민족을 '개조'하기보다 민족을 '개선'하는 길을 찾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고 평하였다. 작가 이인화는 '그 논문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수의 세론을 두려워하지 않고 한 사회가 가질 수 있는 극한의 비전을 제시했던 작가 이광수의 용기에 진정한 외경의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하였다. 또한 김대중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읽어보면 우리는 그의 글에서 오늘의 고민을 발견할 수 있다.'며 '그가 그 글을 쓴 시점과 상황이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어도 그의 민족개조론에는 시대를 초월하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광수는 정신적으로 진실되고 참될 때만이 조선이 진정으로 독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1920년대에 이광수는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론을 품게 되었다. 1930년대에 가서는 독립무용론을 주장했다. 이때의 이광수는 3·1 운동을 '무지몽매한 야만인종이 지각없이 (남들이 하자 하니까) 따라서 한 것'이라 하고 식민지하에서의 모든 활동은 비정치적이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2년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을 낸 이후 한국사회와 한국인들에 대한 평가나 한국인론, 한국사회론은 늘 격렬한 논쟁을 촉발하는 강한 인화성을 보여왔다.
또한 춘원 이광수는 “주정 잘하기로 첫째가 아라사(俄羅斯), 둘째가 일본, 셋째가 조선사람”이라고 지적했다.
실력 양성론.
그는 민족의 정신 개조와 함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민족의 독립을 달성할 수 있는 기틀이라 보았다.
1924년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5회에 걸쳐 발표한 ‘민족적 경륜(經綸)’은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조선에 새로운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그 새로운 문화는 바로 정치, 산업, 문화의 근대화였다.
조선에 새로운 문화가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정치적, 산업적, 교육적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광수는 교육, 정치, 산업 운동이 연합해서 일어나야 하는데 이 중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교육 운동이라고 봤다.
그는 독립 이전에 실력 양성이 우선이라고 보았다. 실력이 없이 의지만 갖고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여성 해방론.
그는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고 주장했다. 봉건적인 유교 사회에서는 여자들의 권리와 가치를 존중해주지 않았으며, 여자도 인간이고 따라서 여성을 해방시켜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여자가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은 가정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자유로운 연애와 자유로운 성관계를 포함한 자유 연애는 여성의 완전한 해방을 이룩할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했다. 이에 보수적인 유학자들은 그가 고아인 점을 언급하며 상놈이 주장하는 못된 사상이라며 비방하고, 각 언론에 그의 작품이 실리지 못하게 전화항의나 방문 등을 통해 압력을 넣기도 했다.
그의 작품 중 무정 등은 이러한 여성해방론을 반영시킨 작품이었다. 이광수는 당시 전 조선 청년의 지적 표상이요, '전 조선 여성의 연인'이라 일컬어질 만큼 인기 정상에 올라있는 작가이기도 했다.
자유주의론.
그는 자유주의를 제창하였다. 그는 일본 유학 중 접한 미국과 유럽의 자유주의 사상에 탄복하고 이를 조선 사회에 알리는데 노력하였다.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는 열등감과, 고아인 그에 대한 부모 없는 자식이라는 지속적인 냉대와 멸시, 어머니 김씨가 세 번째 부인으로 사실상의 서자 취급을 받은 점 등은 그로 하여금 조선 사회의 인습에 저항하거나, 조선 사회의 기성 가치관에서 자유롭게 해 주었다.
그는 여성이 가정에서 해방되고, 자유롭게 연애하여 여성이 해방되는 것과 조선 사회에 잔존하는 양반, 상민의 신분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봉건의 늪에서 민족을 구제하고자 했던, 그 열의가 너무나 강렬해서 분별지마저 상실했다는 시각도 있다.
소 예찬론.
이광수는 늘 젊은이들에게 소처럼 살아야 된다고 하였다. 그는 성실성을 인간의 최고의 미덕이라 예찬했다. 춘원 이광수는 수필 '우덕송(牛德頌)'을 썼을 만큼 소를 좋아했다. '그의 느리고 부지런함, 그의 유순함. 그러면서도 일생에 한두 번 노할 때에는 그 우렁찬 영각, 횃불 같은 눈으로 뿔이 꺾이도록 맥진(驀進)함, 그의 침묵함….'이라 하여 소의 정직함과 성실함을 예찬하였다. 또한 춘원 이광수는 '아이들에게도 순순히 끌려가는 모습이 예수와 닮아 거룩해 보이기도 하는' 소의 우직함을 칭찬한다. 그는 소의 성실성과 우직함을 예찬, 강조하였다.
탈권위주의적 인간관.
소파 방정환을 만나 어린이도 인간이라는 말을 듣고 감화된 그는 평생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반말을 쓰지 않고 존댓말을 썼다. 또한 자신보다 10세, 20세 이상 연하인 사람들과도 친하게 지내며 형님, 아우님 하기도 했다. 그가 한때 사귀었던 나혜석의 조카인 나영균은 해방 직후에 그를 만났는데 그가 반말을 쓰지 않고 정중하게 인사한 것을 회고하기도 했다.
"춘원은 내가 인사하면 어린 나에게도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절을 했어요. 말소리와 표정이 언제나 부드러웠고 눈동자 빛깔이 엷어 꼭 서양사람 같았죠."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10세, 20세 이상 어린 사람에게도 함부로 반말을 하지 않았고, 또한 젊은이들의 의견이라 하여 무조건 반박하거나 비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를 두고 그를 줏대없다, 체신없다는 비난이 가해졌다. 또한 이광수는 조선 사회가 지나치게 엄숙함만을 강조한다며 이것 역시 가식적인 조선의 한 모습으로 규정했다.
자유 연애론.
그는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며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 외에도 소설과 작품을 통해 남녀간의 평등과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점과 여자에게도 욕망과 애정, 성욕 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설파하면서 사회를 타락시킨다는 비난
과 함께 1920년대, 30년대, 40년대 뭇 여성팬들의 인기와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는 연애는 남녀 본연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며 자유로운 연애를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인생의 연애는 예술이요, 남녀간의 예술은 연애'라 주장했는데 이는 김동인의 소설 김연실전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다. 춘원은 조선 사회가 비인간적으로 여성을 괴롭히고 억압하고 학대해왔다 전제하고, 봉건 제도의 압제와 유교 이념의 억압 하에 수백년을 신음하고 시달려 온 여성의 해방은 자유로운 연애로서 완성시킬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나혜석, 김일엽의 연인이었고, 김명순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1917년-1918년 무렵에는 잠시 나혜석의 연인이었고 1930년에는 김일엽과도 잠시 사귀기도 했다.
그는 나혜석이 정조 취미론과 이혼 고백장 등으로 지탄을 받을 때도 그를 도와주었고, 김일엽의 자유 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적극 옹호하였다. 또한 김명순의 후견인으로 그를 문단에 발탁하였으며 이병도의 집에 머무르도록 주선해주었고,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는 당시 사회에서 이들의 자유연애를 비난할 때마다 이들의 자유 연애론을 인간 본연의 감정이며 솔직한 자기 표현이라며 옹호하였다.
문인 발굴, 육성.
이광수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자신이 김성수, 송진우 등과 중앙학회, 윤치호 등의 후원으로 유학 생활을 한 것을 늘 인식하고 있었고, 일본 유학 시절부터 젊은 중고등학생 문인, 청년 문인들을 발굴하여 소개하고, 지도, 후원하였다.
시인 구보 박태원도 춘원(이광수)에 의해 여러 지면에 시를 발표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소학교에 다니던 소년 피천득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발굴하였다. 이광수는 그를 금아(琴兒), 즉 거문고소년으로 불렀다. 소학교 4학년 때 월반해 제일고보(경기고)에 다니던 소년의 재능을 맨 먼저 알아본 이도 춘원이었다. 금아라는 호는 춘원 이광수가 가야금을 잘 탔다는 그의 어머니를 떠올려 지어줬다. 이후 피천득은 금아를 자신의 아호로 평생 사용하였다.
1930년대 열린 시 창작 대회에서 김영랑은 화려하게 핀 모란을 보며 시를 썼지만 마음에 안 들었던지 쓰레기통에 던지려 하자 춘원 이광수가 왜 그걸 버리느냐며 시를 낭송해 박수를 받았다. 그는 여러 신진 문인과 작가, 시인들을 발굴했고, 형편이 어려운 문인들의 작품 활동을 적극 지원, 독려하였다.
청년들에게 영향.
1936년 연희전문을 수석으로 졸업한 송방용은 바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춘원 이광수의 소설 '흙'을 읽고 농촌 계몽 운동을 펼치고 싶어서였다.
고려대학교 교수 김용준은 그의 책을 읽고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였다고 생각된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당시 종로 네거리에 있었던 화신상백화점 4층 서적부에서 춘원 이광수의 소설 <그의 자서전>이라는 책을 사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줄거리는 다 잊었지만 친구의 부인과 불륜의 사랑에 빠져 친구의 부인과 애정도피 생활을 하는 말하자면 평범한 애정소설이었다고 기억되는데 그들이 애정도피 생활을 하게 되는 만주 간도의 한국인 마을의 배경이 나에게는 너무나 낯설은 광경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천황폐하의 적자(赤子)로서 천황폐하를 위해 내 생명을 새털과 같이 바치는 일이야 말로 남아로서 가장 보람있는 삶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고 충직한 황국신민이었던 홍안의 소년에게는 그 소설에 전개되는 조선 사람들의 생활 배경에서 분명히 황국신민의 세계와는 어딘가 분명히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 것이었다. 어떻든 나는 이 소설을 읽은 후부터 춘원의 소설을 탐독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역사소설을 많이 읽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느덧 매주 담임선생에게 제출하는 일본어 일기 외에 한글의 일기장이 따로 생겼다.'고 하였다.
대학을 중퇴하고 실의에 빠진 채만식의 문학적 재능을 알아보고 발탁한 것도 이광수였다. 일본 와세다 대학 부속 제일고등학원 문과를 중퇴한 채만식은 1924년 단편 ‘세길로’가 이광수에 의해 조선문단에 추천되면서 소설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그는 채만식의 사람됨됨이를 높이 평가해 그를 동료 문인들에게 널리 소개해주었다. 자신의 작품 애욕의 피안 등을 읽고 작품평을 한 신인 박태원을 건방지다는 혹평 대신 문단에 추천하기도 했다.
3·1 운동에 참가해 모진 고초를 겪은 추계 최은희를 추천하여 조선일보에 입사, 최초의 여기자로 필명을 날리게 했다.
그의 작품은 일본인들과 중국인, 외국 교포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안창호의 측근인 구익균은 그의 작품이 일본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진술했다. '일본 사람들도 춘원을 숭배했어. 이광수 문학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사후 영향력.
사후에도 그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승려 법정은 자신의 사촌 동생에게 이광수의 책들을 추천하였다. 사촌동생들에게 보낸 편지 중 하나에서 법정은“좋은 책을 많이 읽어라. 춘원(이광수)님 지은 것은 대개가 믿고 읽을 만하다. 내 책장에서 읽을 만한 것을 골라사 읽고 잘 보존하여라. 나플탈렌을 넣어두면 좀이 들지 않을 것이다.(1958년 5월 13일)”라고 하였다.
대학 시절 이광수의 집에 드나든 문학청년이던 법철학자 이항녕은 후일 소설 '교육가족', '청산곡'과 수필 '객설록' 등의 작품을 썼다. 기업인이자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은 그의 작품 흙을 읽고 변호사가 될 꿈을 품기도 했다.
후대의 작가인 양귀자 역시 그의 작품 유정을 보고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양귀자는 후일 '초등학생때 외삼촌 책꽂이에서 이광수 전집을 발견, '유정'을 읽고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흐느껴 울었다. 너무 좋아서 말이다. 이런 세계도 있구나, 소설만 있다면 이 괴로운 세상(학교 가기가 끔찍히 싫었단다)도 얼마든지 살아나갈수 있겠구나'라고 했다 한다.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지낸 현재(鉉齋) 김흥호(金興浩)는 1948년 춘원 이광수의 소개로 다석 유영모(柳永模)를 만나고 6년간 사사하였다.
국민성 비판과 자치론.
1922년 동아일보에 발표한 논문 민족개조론과 1924년에 발표한 동아일보 사설 <민족적 경륜>을 통해 그는 한국인의 위선, 편협함, 정직성의 결여, 무질서, 잔꾀, 요행을 바라는 심리, 음험한 술수 등을 지적했다.
민족 개조론에 이어 민족적 경륜은 당시의 국민적 감정을 자극했고, 종교계까지 가세하여 그를 비난하자 물의를 일으켜 결국 동아일보를 일시적으로 퇴사하게 되었다. <민족개조론>과 <민족적 경륜>에서 그는 나라 잃은 원인을 그는 당파 싸움과 한국인의 위선, 편협함, 정직성의 결여, 무질서, 잔꾀, 요행을 바라는 심리, 음험한 술수 등 국민성 자체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교육을 통해 계몽하고 민족운동을 문화운동으로 전환할 것과 독립이 어렵다면 치권이라도 획득하여야 된다며 자치제에 대한 강력한 희망의 의지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의 조선 사회는 사기, 협잡, 위선이 만연한 사회라고 규정했다. 또한 신의가 없고, 이조 당쟁의 악습을 답습하여 끼리끼리 파벌 짓기를 좋아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상태를 개선하지 않고는 독립이 불가하며 독립을 하더라도 유혈사태나 큰 갈등이 수시로 발생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정치적 독립 이전에 국민의 수준을 향상시키고, 서로간의 신뢰하는 사회로 거듭나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한국인 단일민족설.
그는 1930년대 초, 한국인은 단일민족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하였다. 1933년에 쓴 이광수의 ’조선민족론’의 일부에서 “조선 민족이 혈통적으로, 문화적으로 대단히 단일한 민족이라는 것은 우리 조선인 된 이는 누구나 분명히 의식하여 일점의 의심도 없는 바다.”라고 발표했다.
이전에도“2천만 민족은 동일한 단군의 자손”이라는 식으로 단일 혈통을 강조한 표현이 간간이 신문 등지에 보이기는 하지만, 거꾸로 한국인이 단일민족이 아니라 다종족으로 구성됐다는 주장도 제기될 정도로 단일민족설은 드문 주장이었다.
단재 신채호는 1908년에 발표한 ’독사신론’에서 동국민족(한국인)이 부여족을 주 종족으로 하는 6종족으로 구성됐다고 주장했고, 박은식은 ’몽배금태조(꿈에 금나라 태조를 뵙다)’에서 조선족과 만주족이 모두 같은 단군의 자손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광수는 신채호의 6종족론을 비판, 조선인은 다같이 단군이라는 한 조상에서 갈라진 단일 민족이며 단일 인종으로 규정하였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한국학 교수 신기욱은 그를 한국형 파시즘과 권위주의의 뿌리가 되었다고 지적했다. 신기욱은 '1930년대 이광수의 ‘조선민족론’에는 전체주의를 강조하는 파시즘적 요소가 있다. 이광수 식의 민족주의는 해방 이후 이승만, 박정희로 연결되면서 한국적 권위주의의 뿌리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하였다.
문학 계몽론.
1910년대에는 이광수 이해조 등에 의해 계몽주의 문학이 주도되었다. 그는 소설과 시 등 문학작품이 시대의 정신, 시대의 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자유연애론, 자유주의, 개화, 계몽 등 소설과 시를 통해 계몽주의적인 가치관을 드러냈다. 그는 시와 소설, 희곡 등 문학작품을 통해서 대중을 계몽해야 한다는 점과 문학작품의 대중화를 통해 계몽해야 된다고 확신하였다.
1919년 김동인은 이광수 등의 계몽주의에 반기를 들고 순수문학 운동을 전개 하기도 했다. 김동인은 문학은 어디까지나 예술 작품일 뿐이며 정치성을 띄워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광수는 문학 작품 역시 그 시대 문화의 하나이니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전혀 도입하지 않을수는 없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김동인은 이광수의 계몽주의 문학에 맞서 사실주의 수법을 썼으며, 신경향파와 프로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하고 순수 문학 운동을 벌였다. 김우진도 이광수의 문학 계몽론을 비판하고 자연주의적인 것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시대상의 반영.
그는 자신의 소설과 칼럼, 시에는 당대 사회 문제를 반영하거나 언급하였다. "세말이 되면 진고개와 종로에서 장, 단스 같은 것을 일등상으로 걸어놓고 경품부 대매출을 한다. 그때마다 안해는 장이 빠지기를 바라고 물건을 삿다. 그러나 뽑는 것마다 타울수건, 화저까락 따위요, 바라는 장은 아니 빠졌다.(동광 1932년 1월 25일자)" 이광수(李光洙)가 그린 자개장 당첨을 꿈꾸며 물건을 사들이는 아내 모습이다.
그는 이상도 좋지만 당대의 시대상, 현실 문제, 현실의 모순 등을 다루지 않는다면 그는 참된 작가로 보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과 당면 문제를 다루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소설이 구전과 민담으로 전해지는 소설과 시문, 풍경 등에 대한 것이 주류였다. 그 역시 자신의 작품에 현실이 반영되었음을 밝혔다. 무정에는 '노일전쟁과 새로운 사회상에 눈뜬 조선'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라 했고, 개척자는 '한일합방으로부터 대전(大戰) 전까지의 조선', 재생은 '만세운동 이후 1925년경의 조선', 군상 群像은 '1930년대의 조선의 기록'이라고 스스로 밝히기도 했다.
현대미에 대한 관점.
춘원 이광수는 이상형인 여성의 기준을 밝히면서 “체격이 팔다리나 몸통이 자로 잰 듯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게 바로 맞고, 몸 쓰는 것, 걷는 것 등 모든 동작이 날씬하여 남의 눈에 조금도 거슬리게 보이지 않고... (이하 중략)... 또 취미와 그 정신이 아울러 고상하다면 그야말로 내가 찾는 미인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얼굴은 둥글둥글한 타원형의 윤곽에다가 눈은 어디까지든지 크고 처진 듯하며 코나 귀가 복스럽게 예쁘고 살결이 하얀 분”이어야 한다며 얼굴 생김새에 대한 여러 가지 기준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남사스럽고 음란하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가 자신의 이상형인 여성을 공개적으로 밝히자 다른 작가, 문인, 시인, 예술가들도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거나 언론에 발표하기도 했다. 소설가 현진건은 “첫째로 키가 조금 큰 듯하고 목선이 긴 여자가 좋다. 제아무리 얼굴이 예쁘장하고 몸맵시가 어울려도 키가 땅에 기는 듯하고 목덜미가 달라붙은 여자는 보기만 해도 화증이 난다”며 노골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이광수의 공개발언 이후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형 여자, 이상형 남자에 대한 의견이 나타났다. 중추원의 귀족들과 일부 유학자들은 그가 상스럽고 음란한 사상을 부추긴다면 비난하였다.
근대화에 대한 관점.
그는 조선 사회를 개선하려면 문명화, 근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조선 사회의 새로운 문화의 하나로 철도와 열차를 지목했다.
"'도회의 소리?' 그러나 그것이 '문명의 소리'다. 그 소리가 요란할수록 그 나라는 잘 된다. 수레바퀴소리, 증기와 전기기관소리, 쇠마차소리… 이러한 모든 소리가 합하여서 비로소 찬란한 문명을 낳는다.(이광수 ‘무정’)"
그는 인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장점을 취하고 사회를 개선시키는 것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에서 기차역은 주인공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무대다. 그의 작품 무정을 두고 "철도가 작품의 한가운데를 횡단하고 있다. (작품에서) 기차는 근대성의 상징"이라는 분석도 있다. 또한 작품 흙에서는 주인공들이 서양식 아침 식사를 하는 것을 묘사하여 서구 문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등산 활동.
이광수는 1936년 '계명'이라는 잡지에 남긴 기고문을 통해 백두산 등반에 대한 소감을 남겼다.
“세상에 백두산만한 명산도 없지만, 백두산만큼 매몰된 명산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 주인인 조선인에게 가장 심하게 백두산이 대접받지 못함이 가장 애닯습니다. 백두산이란 이름을 모르는 이야 없겠지만 또 백두산이 우리 민족에게 소중한 산인 줄 모르는 이야 없겠지만 한 걸음 나아가 백두산의 국토적 성질, 민족적 관계, 자연 및 인문상 실제적 사정에 대하여 묻는다면 우리가 가진 지식이 너무 작고 부족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알아야 할 까닭조차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알고자 하는 노력도 있을 까닭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두산을 우리가 이렇게 알아야 옳으며, 또 이렇게 알아도 그만이리까?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이광수‘계명’1936)”
금강산을 오른 뒤에는 '나는 천지창조를 목격하였다/ 신천지의 제막식을 보았다.'며 그 절경을 칭찬하였다. 춘원 이광수는 '금강산유기'를 통해 내금강의 빼어난 경관을 묘사하였다.
산을 좋아한 그는 여러 산을 등산하였지만 그는 백두산을 비롯한 일부 산에 대해서는 등산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이광수는 등산을 좋아하여 전국 각지의 명산을 찾아가 등산, 답사하였다.
논란과 의혹.
소설 원효대사의 작품성 논란.
2006년 소설가 한승원은 이광수가 전쟁 독려의 목적으로 작품을 지었다고 비판했다. 작가 한승원은 “이광수는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연재한 '원효대사'에서 원효가 신라 젊은이들에게 ’성스러운 전쟁에 기꺼이 몸을 던져라’라고 부르짖게 했다”며 “춘원의 '원효대사'는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에 기꺼이 참여하도록 충동질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는 원효의 삶과 사상을 오독(誤讀)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광수작 '원효대사'의 작품해설을 쓴 동국대학교 명예교수인 국문학자 이병주는 "일제가 춘원에게 '원효대사'의 집필을 허락한 것은 원효가 승병(僧兵)을 일으켜 나라에 충성한 불요불굴의 정신을 비상체제하의 한인(韓人)에게 알려 이른바 '국가총동원'의 선정성을 노린 것이었다."면서도 "이광수는 이를 역이용해 한민족의 민족정기를 불러일으키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삼았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2006년 4월 원효대사의 재출간 문제를 놓고 화남출판사 편집주간 이승철 시인과 한승원 작가 사이에 논쟁이 오갔다. 한승원 작가가 "원효의 사상을 오독한 것"이라며 이광수의 소설을 비판한 것에 대해 이승철 주간은 "어떤 이유로도 출판의 자유는 침해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원효의 사상은 여러 작가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고 반론을 제기하였다.
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김준태 시인은 “리광수가 문학적으로 원숙기에 접어들어 쓴 이 소설은 그가 작가로서 야심을 저버리지 않고 창작에 전력투구했다는 것을 엿보게 한다”면서 “소설 ’원효대사’의 한계는 주인공 ’원효의 한계’가 아니라 일제강점기를 살다간 춘원 이광수의 한계였다”고 지적했다.
적극적 친일 문제.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2년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들어 있으며, 당시 총 103편의 친일 작품명이 공개 되어 친일 문학인으로 선정된 42인 가운데 가장 많은 편수를 기록했다.
그 중 하나의 시를 예로 들어 보자.
"《새해》
씩씩한 우리 아들들은 총을 매고
전장으로 나가고, 어여쁜 우리 딸들은 몸뻬를 입고 공장으로 농장으로 나서네.
말 모르는 미소까지도 나랏일 위해 나서지 않는가. 천년화평, 도의 세계를 세우랍신 우리 임금님의 명을 받자와 예, 예하고 집에서 뛰쳐나오는 무리. 이날 설날에 반도 삼천 리도 기쁨의 일장기 바다. 무한한 영광과 희망의 위대한 새해여."
그러나, 일부 이광수를 옹호하는 측에서는“항일 민족주의자로서 35-36년을 살고 47세경부터 일제 패망 때까지 약 6년간을 친일로 살았다.”는 점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이광수의 친일 활동은 어쩔 수가 없었으며 동료 지식인을 구출하기 위한 행동이였고, 이광수는 사실 거짓 친일, 실제는 독립 염원"이라고 주장하면서 '이광수는 민족의 양심수'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1909년 〈사랑인가〉를 탈고한 시점에서 이미 친일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1948년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군상' 보고서에 따르면, 이광수는 '광병적(狂炳的) 친일 급 열렬 협력자'로 평가되었다.
한편 소설가 복거일은 '이광수가 개인의 영달을 위해 친일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친일 의혹에 대한 반론.
2007년 10월 원로 문학평론가 김우종은 문학계간지 《휴먼메신저 가을호》에 발표한 논문 '우리가 사랑하다 버린 선구자'에서 “친일에 대한 이광수의 업보는 남들에 비해 너무 많은 대가를 치렀다”며 “수십년 간에 걸친 그의 항일운동과 문학적 업적을 제대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며 친일 의혹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였다.
문학평론가 김우종은 우선 해방 정국에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이광수를 친일혐의로 구속 투옥한 것에 대해 “친일인사 다수 중에서 특히 죄질이 나빴던 문인은 빠지고 이광수 등 선배 문인만 기소한 것은 잘못이며 독립운동가에 대한 참작 없이 구속투옥에 의한 재판을 진행한 것은 결코 공정한 처사가 아니었다”며 “힘 없는 사람들만 처벌했다는 점에서 큰 과오가 있으며 법이 대중적 인기 논리에 편승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정신분석학자 이중오는 민족개조론을 친일의 증거로 지목하는 견해에 대해서도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에 의하면 민족개조론은 하나의 텍스트로 접근하는 한 어떤 친일의 흔적도 찾아낼 수 없다고 단정한다. 이광수 대신 도산 안창호 이름으로 출간됐다면 그 논문은 지금 다른 운명을 맞고 있을 것 이라며 이광수 비판론에 반론을 제기하였다. 또한 다른 문인들은 무책임하게 친일 의혹을 회피하고 그에게 책임을 전가했다고 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친일 문인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이광수라는 희생양을 통해 누구도 주지 않는 면죄부를 강탈해 간 친일파 지성인들의 책동'이라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이중오는 “그가 ‘왜 친일을 했을까’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그를 친일 인사의 대명사로 인식하는 흑백논리만 있을 뿐, ‘인간 이광수’에 대한 이해는 없는 것이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적극적 친일론에 대한 반론.
2009년 단국대학교 김원모 교수는 "이광수의 친일은 민족의 보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겉으로는 친일을 했지만 내면으로는 철저히 독립을 원했다."고 주장하였다. 김 교수는 춘원이 도쿠토미 소호에게 1940년 일본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창씨개명의 이유를 밝힌 편지를 1989년 발견했다. “처음엔 편지 내용에 수치심을 느꼈죠. 하지만 자료를 뒤져 연구를 계속하면서 친일과 관련된 이광수의 다른 면모를 이해하게 됐습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김원모는 이광수 친일연구와 관련해 “친일인명사전’의 편찬처럼 좁은 대롱으로 대상을 보듯 실증 연구 없이 일제강점기 인물의 한 면만 편협하게 부각해 매국노로 매도하는 학계의 분위기는 잘못됐다”고 밝혔다.
김재용 원광대 교수는“이광수의 삶을 볼 때 친일 행적이 진심이 아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이광수는 1937년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하자 조선 독립의 가능성이 없어졌다고 보고 일본 민족과 조선 민족이 일본의 국민으로 동등하게 사는 것이 우리 민족의 살길이라고 본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 하였다.
독립운동 연장선론과 그 반론.
2007년 문학평론가 김우종은 이광수의 친일 행위 중 일부는 친일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연장선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때 문학계간지 《휴먼메신저 가을호》에 발표한 논문 '우리가 사랑하다 버린 선구자' 김우종은 이광수의 친일 행위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광수가 친일 활동을 시작한 시점으로 간주되는 《개벽》에 발표된 ’민족개조론’에 대해 김씨는 “(거짓말 잘하고 남을 속이고 하는) 민족성을 개량하고 조선민족의 내실을 철저히 다지자고 주장한 것이었다”고 강변하며 “이것을 일제에게 식민 통치의 구실을 주었다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라고 말했다. 또한 “’민족개조론’이 발표되기 넉달 전 베이징에서 안창호를 만나 흥사단 운동에 관해 협의하고 1923년에 함께 조직한 것이 수양동맹회였다”며 “민족개조론의 내용과 안창호의 준비론을 비교해보면 이 논문은 안창호의 독립운동노선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우종은 이광수가 어린 시절 동학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일본 유학생 시절 3.1 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 '2.8 독립 선언문'을 주도적으로 작성했다는 점 등을 거론하며 “수십년 간에 걸친 항일투쟁의 노력과 문학적 업적은 친일행적을 상쇄하는 바가 있다”고 거듭 변호했다.
이에 대해 김재용 원광대 국문과 교수는 “1938년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이광수는 우리 민족이 살 수 있는 길은 ’독립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모두 일본국민이 될 것을 주장했다”며 “1940년에는 자신의 이름마저도 일본식 이름으로 바꿨다. 그의 행적은 모두 기록으로 남아있다”고 반박했다. 김 교수는 특히 이광수의 문학적 성과와 항일투쟁의 노력이 친일 행적을 상쇄한다는 김씨의 주장에 대해서도 “당시 이광수보다 지명도가 높았던 홍명희는 일제의 종용에 결코 굴하지 않았다”며 “공과(功過)를 다 같이 다뤄야지 공 때문에 과가 지워지거나 과 때문에 공이 지워지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허영숙에 의한 매수론.
그의 부인 허영숙이 조선총독부가 매수한 밀정이고 허영숙이 그를 포섭했다는 의혹은 소설가 박종화 등을 통해 제기되었다. 이후 부인 허정숙이 밀정, 조선총독부에 포섭되었느냐 여부 역시 논란 중에 있다.
한편 문학평론가 김우종은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이광수의 갑작스런 귀국도 인간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이광수는 일제 총독부의 밀사로 의심받던 아내 허영숙을 만난 뒤 돌연 귀국, 변절자로 의심받았다.
김우종은 “이광수에게 있어 허영숙은 아내 이상의 존재였다. 이광수가 일본에서 폐결핵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의사였던 허영숙이 살려주지 않았다면 당시 집필 중이던 ’무정’도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라며 “그의 개인적 환경을 일체 무시하고 비난만 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또 “조선문인협회가 일제 총독부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일본인까지 회원으로 참여해 그들의 지휘 감독 하에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이광수의 친일은 자발적인 것으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부연했다.
위장 이혼 논란.
해방 후 1946년 이광수는 허영숙과 이혼을 하는데,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그가 일제강점기 시대에 축적한 부동산과 같은 재산을 몰수당하지 않기 위한 위장이혼이었다고 비판한다. 또 일각에서는 친일파로 몰린 자신 때문에 가족이 피해 받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족 관계.
후일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을 지낸 백두진은 그의 두 번째 부인 허영숙의 친정 조카사위였다.
평가와 비판.
그는 한국 '현대소설의 아버지'라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후반의 행적을 두고 논란의 여지가 존재한다.
당대의 평가.
일제강점기 후반의 미군은 그의 교육을 잘 받았다는 점과 소년 활동에 적극적이다는 점을 주목했다. 미군은 그에게 '교육을 잘 받았다. 한국의 대표적 작가이자 언론인의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안창호와 긴밀한 관계다. 조선문인협회 회장이며, 소년회 활동에 적극적이다. 1930년대 붙잡혀 투옥된 바 있으며, 일제에 의해 고문을 당했다. 석방된 후 일제에 협력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며, 이로 인해 이전까지 쌓아 왔던 영향력을 잃게 됐다.'고 평가하였다.
긍정적 평가.
이광수는 최남선과 함께 언문일치의 신문학 운동을 전개하여 한국 현대 문학의 여명을 이룩한 공헌자로 높이 평가되며, 근대 문학과 현대 문학 사이를 이어주는 중간고리, 역사 소설의 대중화에 기여한 작가로로 평가된다. 이광수는 한국근대문학사에서 선구적인 작가로서 계몽주의, 자유주의, 민족주의, 현실주의, 인도주의적인 작가로 평가받는다. 단순히 대중에게 영합하지 않고 애국적인 작품, 역사 소설 외에도 가부장제, 조혼풍습 등을 비판하고 사회 계몽과 신교육, 과학 기술 문명을 수용할 것을 주장한 점과 자유 연애론 등 다양한 사상과 신념을 작품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그것은 시대분위기와 사회적 조건 그리고 개인의 취향에 의한 결과라는 반론도 있다.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이다. 계몽주의·민족주의 문학가 및 사상가로서 한국 근대 정신사의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있다.
숭실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인 한승옥은 그의 작품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이라며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이광수는 문장을 쉽게 쓰는 탁월한 재능을 지닌 분이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도, 초등학교만 나와도, 읽을 수 있다. 역사 소설을 봐도 정사는 물론, 야사와 민담까지 아우르고 있다. 불교용어가 많이 나오지만, 어려운 말을 쉽게 풀어쓰는 능력을 가졌다. 그것은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가 요새 태어났다면 세계적인 문호가 됐을 것이다. 요즘 작가들이 단명한 것은 공부를 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요즘 학생들은 이광수라면 무조건 싫어한다. 80년대에는 친일파라고 싫어했는데, 90년에 들어와서는 아예 읽을 생각조차 않는다. 대학 국문과에서도 문학사나 작가론에서 스쳐지나갈 뿐 비중있게 다루지 않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한승옥은 "친일 여부를 앞에 놓지 말고 문학 자체를 봐야 한다. 이광수의 복합적인 면, 인간적인 점을 조명해야 한다. 이광수처럼 드라마틱한 사람도 없다. 그의 시대로 들어가서 장단점을 재평가해야 한다.‘무정’이 현대소설의 효시라는 사실은 앞으로도 변함 없을 것이다. 춘원은 장편을 주로 썼는데, 작가는 본래 장편소설에서 역량이 드러나는 법이다. 기회가 닿으면 제대로 된 이광수 평전을 쓰고 싶다. 이제는 이광수 문학상이 나올 때도 된 것 아닌가."라며 맹목적인 비판을 비판하였다.
작가 이인화는 "이광수야말로 시대정신이 '근대의 초극'이 아니라 '근대의 재평가'로 돌아설 때마다 끊임없이 재론될 전형적인 근대인이다."라고 평하였다. 또한 '이광수가 사회의 밑바닥에서부터 시대의 닦달을 겪으며 기어올라간 성취의 드라마는 필자에게 가장 좋아하는 것에 각고면려를 쏟아부어 자신을 완성할 수 있는 근대의 자유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일제 말기의 친일행적이 가져온 그의 불행한 말년은 근대가 부여한 자유의 공포를 가르쳐주었다.'고 하였다.
국민대학교 교수 방민호는 "이광수의 산문은 종교적인 깊이가 있다."고 평하였다.
기독교운동가인 함석헌은 '육당, 춘원의 밤은 지나가다'라는 글에서“육당, 춘원이 무엇인가?… 이 나라가 기울어지려 할 때, 이 민중이 고난에 빠지려 할 때, 그 불평을 잘 울라고 하늘이 세웠던 이들 아닌가? 그들은 참 잘 울었다. 그 소년 잡지, 그 역사, 그 단군론, 그 백두산 참관, 그 백팔번뇌, 그 무정, 그 개척자, 그 단종애사, 이순신, 원효, 이차돈, 그것이 다 이 민족을 위해 울고 이 나라를 위해 슬프게 힘있게 우렁차게 운 것 아닌가?” 춘원보다 10년 아래인 함석헌은 “그들을 위해 분해하고 아끼고 의아해 하는 것은 그렇게 울던 그들이 내처 힘있게 울지 않고 중도에 그 소리가 그만 막혀버렸기 때문”이라고 안타까워 하였다.
작가 겸 시인인 피천득은 "나를 문학의 길로 이끈 이광수 선생은 재주가 많고 착하셨지만, 바보같은 분이기도 했다."고 평하였다.
고려대학교 교수 김용준은 '철학과 현실' 가을호에 “(춘원 이광수는) 나를 충직한 황국신민으로부터 한국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김용준은 그를 친일파로 볼 수만은 없다고 평하였다. '때론 춘원 이광수를 친일문인 운운하여 그를 매도하는 신문기사를 대할 때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나는 춘원을 나무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글쎄, 그의 친일행각을 옹호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에 앞서 그는 나를 충직한 황국신민으로부터 한국사람으로 만들어 준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미국의 한국학자 가브리엘 실비안은 "이광수야말로 한국 사회에 동성애 담론이 보편화하기 이전에 동성애를 반감 없이 다뤄온 작가"라며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교수 한승조는 최남선ㆍ이광수 선생처럼 민족문화를 위해 노력한 분들을 크게 이해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부정적 평가.
평론가 김현은 '이광수는 만지면 만질수록 그 증세가 덧나는 상처와도 같다. 한국 현대문학사에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족적을 남겼지만, 그의 친일 행위로 한국 정신사에 감출 수 없는 커다란 흠집을 만든 사람 또한 이광수이기 때문이다.'라고 평가했다. 한편 당면한 사회적 갈등에 철저히 대응하기보다는 이상적인 설교에만 치중하였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역사문제연구소는 그에 대한 호평은 시장성 거품이라 비판했다. 소비 지향성 경제의 거품에 들떠서 '이광수가 친일은 했어도 소설은 훌륭했다', '서정주가 역사적 과오는 범했지만 시는 좋다'는 식의 미학적 착시현상이 90년대 한국문학을 흐렸다는 것이다.
작가 공임순은 이광수의 소설 '이순신'에 대해 '이순신은 무능하고 부패한 조정과 나약하고 무기력한 백성과 대조적으로 외롭고 고독한 영웅으로 그려진다. 이런 순결 지상주의는 이순신을 단 하나의 민족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대신, 조선의 역사 전체를 오욕과 부정의 역사로 경계짓기 때문이란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수주의와 파시즘, 역사 왜곡과 미화 등의 부작용을 낳았다는 비판도 있다.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조선의 대중들을 길들이려 한 기득권층적인 논설이라는 비판도 있다.
기타 시각.
소설가 김원일은 “일제 말기에 그가 보인 친일행각은 따지더라도 그의 문학은 우리의 자산으로 존중을 받아야 한다”면서 “인간의 흑백논리로 단칼에 재단해서는 안된다”고 평하였다.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교수 박노자는 이광수를 양면적인 인물이라 보았다. 그에 의하면 춘원 이광수는 두 얼굴의 지식인이라 한다. 춘원은 간디에 대한 예찬을 통해 톨스토이의 화두인 평화와 비폭력을 옹호했지만, 한편으로는 ’힘이 있는 자만이 자유와 개성을 논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사회진화론의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을 신조로 삼은 인물이었다. 박노자는 이런 춘원의 두 얼굴이 민족을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는 ’근본단체’로 본 데서 연유한다고 말한다. 그는 춘원이 근대를 배우면서 독립적인 개인의 존엄성과 권리, 개인의 생명과 자존 같은 부분을 거의 처음부터 제외했기 때문이라며 “’계급’을 아예 ’이기적 욕망의 결과물’로만 치부해 배제하고 ’개인을’ 개인 그 자체가 아닌 하나의 부속으로만 인식하는 거대 담론으로부터 출발한다면 이와 같은 비극적 결과는 거의 필연적”이라고 주장한다.
경희대학교 교수 허동현은 그를 민족주의자로 봤다. 춘원이 한결같이 국가주의 내지는 민족주의 가치를 추구했으며 기독교나 불교를 비롯한 여러 사상은 민족과 국가에 유익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취사선택됐던 종속적 가치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허동현은 그 근거로 춘원이 1910년에 쓴 '나(余)의 자각한 인생' 중 한 구절을 제시한다. 그는 ’국가의 생명과 나의 생명과는 그 운명을 같이하는 줄을 깨달았노라… 나는 이름만일 망정 극단의 크리스천으로, 대동주의자로, 허무주의자로, 본능만족주의자로 드디어 애국주의에 정박하였노라’라는 구절을 통해 춘원이 사회진화론의 세례를 받기 훨씬 이전부터 관념적인 '민족'이나 '국가'를 최고의 가치로 삼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허 교수는 춘원이 종교적 사랑을 예찬하면서 한편으로는 일그러진 근대를 찬양한 야누스적 존재라기보다는 ’민족’이라는 실에 자신이 삶의 궤적에서 만난 다양한 사조라는 구슬들을 꿴 일관된 민족주의자로 보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작가 김현주는 “이광수의 미적 기획을 전체주의 정치학의 표현”이라 평하였다.
다른 작가와의 비교.
한신대학교 교수 서영채는 그와 염상섭을 비교하였다. 서영채는 '민족계몽주의를 지향했던 이광수의 문학이 공동체의 자기보존을 궁극적 목적으로 한다면, 염상섭의 문학은 자아의 진정성에 대한 추구를 형상화함으로써 근대성의 또다른 원천으로 존재한다.'며 차이점을 지적하였다. 김윤식은 루쉰의 사상을 비슷한 시기에 근대화란 주제에 몰두한 이광수의 사상형성과정과 비교하기도 했다. |
3331 | 1945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31 | 바로크 | 바로크(, , , , )는 서양 예술사에서 시대를 구분하는 용어이자 예술 사조의 한 유형이기도 하다. 어원은 ‘일그러진 진주’를 의미하는 포르투갈어 '의 프랑스 전사인 '에서 유래했다. barocco 라는 이탈리아어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는데, 뜻은 왜곡된 삼단논법, 혹은 불협화음으로 인한 비정상적인 소리를 의미한다. 바로크의 예술적 표현 양식은 르네상스 이후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서양의 미술, 음악, 건축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양식의 변천에 따라 바로크의 시대는 전기, 중기 그리고 후기로 나뉜다. 예술적 경향에서 보면 후기 바로크 시대는 곧 로코코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라고 볼 수 있다.
유명한 음악도 많이 있다. 예를 들어 미뉴에트 같은 음악이 있다. 파격적 효과, 감각적 풍요, 생동감 있는 동적 표현, 화려하고 풍부한 장식 등이 주요 특징이다. 르네상스 양식의 균형과 조화에 반하여, 최소한의 질서 안에서 우연과 자유분방함이 강조된다.
18세기에 들어와서도 바로크는 로코코 양식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배경.
1. 반종교 개혁운동
종교개혁으로 인해 약화된 지상의 가치, 인간이 지닌 감정, 상상력 등에 대한 가치를 반종교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였다.
2.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으로 인한 정치 체계의 변화
수공업과 상업에 바탕을 둔 부르주아들이 과거 귀족들의 경제적 수준에 버금가는 부를 이루었고, 이들이 절대 군주를 지지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화려하고 장식적인 바로크 예술 형태를 권력의 상징으로 간주하였다.
회화.
바로크 미술은 역동적인 형태를 포착하는 것과, 빛과 어둠의 대비를 극대화시키는 데에 중점을 둔다. 흔히 바로크 미술의 시작 지점은 로마이고, 최초의 바로크 미술가는 카라바조라고 간주되고 있다. 미술사에서 바로크는 미술의 모든 장르와 하나의 시대를 한꺼번에 포함하는 마지막 양식이다. 바로크 이후로 미술사에서는 동시대에 여러 가지 미술 사조가 등장하며, 각각의 장르에 따라 서로 다른 양식을 보이기도 한다.
조각.
조각에는 이탈리아의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대표적인 작가로, 이들은 동적, 환각적인 표현으로 '성 테레사의 도취'나 '성 베드로 성당'의 내부장식과 광장의 콜레네이드를 완성하여 바로크 최대의 조각가로 군림하였다.
문학.
프랑스 문학사에서는 플레야드 말기부터 17세기 중엽까지의 시대를 ‘전(前)고전주의 시대’라 불러온 데에 대하여 이 시대에 고전주의로 향하는 경향을 이탈한 문학을 오히려 이 시대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아, 이것을 ‘바로크 문학’이라 하여 고전주의에 대치시키는 움직임이 근년 문학사가들 사이에 일어났다.
문학에 있어서 바로크의 특징은 ⑴ 안정보다 움직임의 중시, ⑵ 단념보다도 격한 감각의 존중, ⑶ 장식성의 우월, ⑷ 기발한 비유·대조·과장과 파격적 구문의 사용 등이다. 시에서는 도비네, 장 드 스퐁드(1557-1597), 초기의 말레르브, 극에서는 로베르 가르네(1544-1590)와 로트루(1609-1650), 초기의 코르네유 등에 이 경향이 있다고 한다.
연극.
순식간에 로맨틱한 정원에서 궁전으로 바뀌는 무대 장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식 플랏에서 처음 고안되었다. 이러한 무대 장치로 연극에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표현 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브로드웨이 연극 등 상업적 연극에서 보이는 드라미틱한 무대 장치는 바로크 시대의 연극에서 기원하였다.
영화 바텔, 파리넬리와 바르셀로나 리세우 대극장에서 상연된 오페라 오르페우스는 바로크 시대의 스타일을 잘 표현하고 있다. |
3332 | 32923731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32 | 지리산 | 지리산(智異山)은 경상남도의 하동군, 함양군, 산청군, 전라남도의 구례군, 전라북도의 남원시 등 3개 도, 5개 시군에 걸쳐있는 산이다. 1967년 최초의 대한민국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483.022㎢의 가장 넓은 면적을 지닌 산악형 국립공원이다. 둘레가 320여km나 되는 지리산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봉우리가 천왕봉(1,915m),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을 중심으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며, 20여 개의 능선 사이로 계곡들이 자리하고 있다.
지리산은 백두대간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지리산의 뜻은 다름을 아는 것, 차이를 아는 것, 그리고 그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뜻으로는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또 백두산의 맥이 흘러 내려왔다고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불렸다. 1967년 12월 29일 대한민국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지리산은 예로부터 영산으로 추앙받아 왔으며, 이에 따른 고찰이 많고 근·현대 문화재도 많이 남아 있는 중요한 산이다.
역사.
서산대사의 횡령암기에는 반야봉 좌우의 두 봉우리인 황령과 정령에 한나라 소제 3년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난을 피하여 지리산에 와서 도성을 쌓고 고개의 이름을 두 장수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학계에서는 정설로 인정되지 않지만 달궁 계곡 근처에 이 기록을 뒷바침해 주는 지명들이 구전되어 내려온다. 지리산은 쫓겨온 자들의 땅이었다. 항일의병, 동학혁명군, 항일빨치산, 한국전쟁의 빨치산도 이곳에 몸을 숨겼다.
산의 지리.
지리산은 행정 구역 상으로 3도, 1시 4군, 15면 경상남도 함양군과 산청군, 하동군, 전라북도 남원시, 구례군에 걸쳐 있다.
남한에서 한라산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최고 높이는 1,916.77 m (천왕봉)이다. 산이 차지하는 총면적은 483.022 km2(서울시 면적의 3분의 2)이며, 둘레는 320 km에 달한다.
봉우리.
천왕봉, 반야봉, 노고단 등을 잇는 25.5km의 주능선 상에 토끼봉, 명선봉, 영신봉, 촛대봉 같은 1,000m를 넘는 준봉들이 자리를 하고 있다.
계곡.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 칠선계곡, 한신계곡, 뱀사골, 피아골, 한수골, 도장골, 목동골, 대성골 등의 계곡이 지리산에 안기워 있다. 이 계곡들의 물이 각각 남북으로 흘러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이 되어 함양과 산청으로 흐르고, 또 하나는 마이산에서 흘러온 물을 만나 섬진강이 된다. 뱀사골 계곡의 폭포가 있는 곳은 국내에서 수심이 가장 깊은 곳으로 유명하다.
문화재.
고찰.
지리산의 산자락에는 화엄사, 연곡사, 구례 천은사, 쌍계사, 실상사, 대원사, 칠불사, 벽송사와 같은 이름난 사찰이 있다.
생태계.
식물.
지리산에는 대략 1500종류의 식물이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대한민국에서 한라산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종류의 식물이 자라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특산식물도 있다. 환경부가 멸종위기야생식물로 지정해 보호되고 있는 가시오갈피나무, 깽깽이풀, 기생꽃, 세뿔투구꽃, 자주솜대, 천마, 히어리 등이 있다.
이처럼 풍부한 지리산 식물들 가운데는 북방계 식물 또는 고산식물로 분류할 수 있는 구름병아리난초, 금강애기나리, 기생꽃, 너도바람꽃, 땃두릅나무, 만병초, 산오이풀, 자주솜대, 참바위취, 회목나무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지리산을 대표할 만한 식물들로 다른 산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이곳이 이들의 분포의 남방한계선에 해당하므로 의미가 있다. 북방계 식물들이 지리산 높은 곳에 자라고 있는 것은 빙하기 때 남쪽으로 내려왔던 북쪽 식물들이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고산지역에만 살아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리산에서 처음 발견되어 '지리'또는 '지리산'이 붙은 식물들도 있다. 하지만 지리산에서 처음 발견되어도 '지리'또는 '지리산'이 붙지 않은 식물도 있다.
지리산에 다양한 식물이 살 수 있는 것은 독특한 조건을 갖춘 식물생육지들이 많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생육지는 고산능선으로서 해발 1500m 이상의 지역에 길게 형성된 능선에 특별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주릉 곳곳에 발달한 바위봉우리나 초원에는 귀한 식물이 많다.
왕등재 부근의 해발 1000m 지역에서 발견된 대표적인 슾지 왕능재늪은 감자개발나물, 닭의난초, 동의나물, 방울새난, 세모부추, 숫잔대, 애기부들등 습지식물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해충방제.
소나무 재선충에 감염된 나무가 1그루 발견된 이후 실시된 특별예찰 결과 추가 감염목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물.
지리산은 여러 동식물의 낙원으로서 지리산 국립공원의 야생동물의 종류는 89종으로 이중 텃새가 37종, 여름새가 33종, 겨울새가 12종, 통과새가 7종이다. 우점종은 어치이고 붉은머리오목눈이, 박새, 노랑턱멧새, 동고비, 쇠박새, 직박구리 순으로 우점도가 높다. 천연기념물로는 큰소쩍새, 소쩍새, 붉은배새매, 올빼미, 새매, 재두루미 등 7종이 관찰된 적이 있다. 희귀조류 중 나무발발이는 관찰 기록만 있고 바위종다리는 저지대에서 관찰된 적이 있다. 평지에서 번식하는 종으로 알려져 있는 검은딱새, 붉은뺨멧새가 노고단 1,500m 고지에서 번식하고 있다.
지리산은 야생동물 서식에 알맞은 울창한 수림과 먹이가 충분하기 때문에 야생동물에게는 낙원이다. 지금까지 학계에 조사, 보고된 지리산 서식동물은 포유류가 15과 41종, 조류가 39과 165종, 곤충류가 215종 등 총 421종이다. 포유류의 경우에는 멧돼지나 고라니, 너구리, 청설모등 포유동물이 많이 서식한다. 대한민국의 여러 멸종위기 동물이 서식하는 장소이다. 하늘다람쥐, 삵, 담비, 수달, 반달가슴곰이나 아무르표범등이 서식한다. 이들은 대부분 촬영된 지리산북부사무소 야생동식물보호단이 서식지 인근에 10여대의 무인센서카메라를 설치, 2004년부터 2년여간 활동 장면을 찍은 것들이다. 이 가운데 하늘다람쥐는 지리산에서 처음으로 서식이 확인되었으며, 이들이 발견되는 것은 원시림, 계곡의 수질이 복구되고 있다는 증거라는 분석이 있다.
또한 지리산은 국립공원관리단이 반달가슴곰 복원사업을 시작한 곳이다. 지금까지 방사된 곰의 숫자는 28마리이며, 6마리는 폐사하고 4마리는 적응을 하지 못해 회수되었다. 하지만 나머지는 겨울나기를 성공적으로 하고 번식을 하는 등 야생화 하고 있다는 조짐이 있다. 50마리 이상이 야생화에 성공했을 때 전국 각지에도 복원사업을 실시한다는 계획이다.
옛날에는 지리산에 아무르표범(한국표범)이나 시베리아호랑이(한국호랑이)가 살았다고 하나 거의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목격담과 발자국 흔적으로 인해 적은 수나마 생존할 가능성이 높다.
등산로와 대피소.
지리산은 주릉이 동서방향으로 25.5km를 뻗어있고, 1000m가 넘는 준봉들을 잇는 능선은 전체적으로 완만하고 샘이 많아 좋은 등산로이다. 또한 깊은 계곡이 있어 남북 방향으로는 계곡에서 시작하는 등산로가 많다. 가장 높은 봉우리인 천왕봉을 직접 오르는 길은 동쪽의 중산리와 백무동을 거치는 길이다. 서쪽 지역은 계곡이 아름다운 뱀사골과 길이 뚫려 접근하기 쉬운 성삼재-노고단 코스이다.
주릉을 종주하는 코스는 고전적으로는 화엄사에서 대원사까지의 길인데, 근래에는 성삼재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화엄사-대원사 산행길은 대략 2박 3일에서 3박 4일이 걸리는 길로,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7km까지는 힘든 편이나 노고단에서 화개재까지는 큰 어려움은 없다. 토끼봉의 가파른 비탈을 올라 연하천에서 1박을 하고, 벽소령과 세석을 지나 장터목에서 2박을 한다. 마지막날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고 하산한다. 최근에는 인월 덕두산이나 바래봉에서 시작해 산청 웅석봉까지 4박 5일(혹은 5박 6일)에 걸쳐 종주에 나서는 이들도 있다.
중산리를 시작해서 천왕봉에 이르는 산길은 천왕봉을 가장 빠르게 오르는 길로 가장 인기 있는 산행코스여서 봄, 가을 입산금지 기간에도 산행이 허용된다. 중산리에서 장터목으로 가는 유암폭포 코스와 장터목을 거치지 않는 법계사 코스가 있다. 칼바위까지는 경사가 급하다. 칼바위에서 장터목 코스와 법계사 코스가 갈라진다. 법계사 코스는 가깝기는 하지만 로타리 산장에서 천왕봉까지는 경사가 급하나, 일출을 보려면 이 길을 택해야 한다. 법계사 코스는 5.4km로 약 4시간이 걸린다.
그 외에도 백무동을 기점으로 하는 한신계곡 코스, 쌍계사를 기점으로 하는 삼신봉 코스, 뱀사골을 기점으로 하는 뱀사골계곡 코스, 피아골을 기점으로 하는 피아골 코스, 산동면을 기전으로 하여 만복대에 오르는 코스 등이 있다.
최근에 5, 6월과 9, 10월에 제한적으로 개방하는 칠선계곡 코스가 있다. 칠선계곡 코스는 지리산의 계곡중 하나인 칠선계곡을 따라 진행한다. 남한의 3대 계곡중 하나로 설악산의 천불동 계곡, 한라산의 탐라 계곡과 함께 선정된다. 계곡은 천왕봉의 서북쪽에서 발원하여 폭포 7개소, 소 33개소를 거쳐 약 18km 정도 흐르다가 임천에서 다른 계곡들과 합류한다. 등산로는 9.7km로 함양군 마천면 추성마을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비선담까진 4.3km로 상시개방구역이기 때문에 정비가 잘 되어있고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편이다. 하지만 비선담에서 통제소가 나오고 이 때부터 등산 난이도가 급격하게 올라가며 본격적으로 칠선계곡 등산을 시작한다. 계곡 옆을 따라 올라가거나 건너기 때문에 풍경이 시원하고 좋지만 정비되어있지 않고 가파른 돌길을 계속해서 지나가게된다. 그렇게 3.7km를 올라가게되면 해발 1310m에 위치한 마지막 폭포, 마폭포에 도달하며 이 곳에서 마지막으로 식수를 보충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 천왕봉까진 1.7km이지만 해발을 605m를 끌어올려야하기 때문에 약 35%의 급경사를 타게된다. 이렇게 약 1.4km를 급격하게 치고 오르게되면 철계단이 나타나는데 이 철계단을 오르게되면 비로소 천왕봉에 도달하게 된다. 천왕봉 당일치기 등정코스중에 가장 난이도가 높다.
벽소령 대피소.
벽소령 대피소는 지리산 국립공원내에 있는 대피소로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산4에 위치하고 있다.
비교적 최근인 1996년에 지어진 대피소로 120명이나 수용할 수 있어 규모가 큰 편(449.0m²)에 속하나, 샘터가 500m가량 아래로 내려가야 있어 주릉에 있는 대피소 중에 가장 물을 구하기 어렵다.
연하천 대피소.
연하천 대피소는 지리산 국립공원내에 있는 대피소로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 산120에 위치하고 있다. 1982년에 건축하였으며, 면적은 72.00m²이고, 40명을 수용할 수 있다.
노고단 대피소.
노고단 대피소는 지리산 국립공원내에 있는 대피소로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 좌사리 110-2에 위치하고 있다. 1987년 건축한 제1대피소(381.0m²/140명 수용) 외에 1994년 제2대피소(315.0m²/50명 수용)를 추가로 건축하였다.
피아골 대피소.
피아골 대피소는 지리산 국립공원내에 있는 대피소로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산368에 위치하고 있다. 1984년에 건축하였으며, 면적은 81.00m²이고, 50명을 수용할 수 있다.
뱀사골 대피소.
뱀사골 대피소는 지리산 국립공원내에 있는 대피소로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 산120에 위치하고 있다. 1985년에 건축하였으며, 면적은 157.0m²이고, 80명을 수용할 수 있다.
2007년 3월 25일자로 폐쇄되었다.
2007년 12월말 현재 철거공사 중이다.
세석 대피소.
세석 대피소는 지리산 국립공원내에 있는 대피소로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 산325에 위치하고 있다. 종전에 있던 대피소를 1995년에 새로 지었는데, 최근에는190명이나 수용할 수 있어 지리산 국립공원내 대피소 중에 가장 크다(면적 653.0m²) 넓은 세석평전에 위치하고 있는데 주릉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물을 구하기가 쉬워 찾는 사람이 많다. 세석평전에서 북쪽으로 넘어가면 한신계곡이 시작되어 백무동이 있는 마천지구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남부능선이 시작된다.
장터목 대피소.
장터목 대피소는 발전기를 돌려서 전기를 생산하기 때문에 이용객에게 전기가 제공된다. 하지만 그 양이 넉넉하지는 않아서 개인 침상까지 전기가 제공되지는 않고 중앙 홀에서만 제공된다.
그리고 침상은 개별적으로 독립된 침상이 아니라 다닥다닥 붙어있다. 때문에 비교적 자리가 넓은 구석 자리가 선호도가 높은 편이다.
화장실이 수세식은 아니지만, 2019년 겨울에 재래식 화장실에서 신식 화장실로 바뀌는 공사가 진행되어 비교적 깨끗하다.
로타리 대피소.
로타리 대피소는 1978년, 로타리클럽 회원들이 기금을 모아 만든 대피소로 2000년, 로타리클럽에서 환경부에 기부 채납하였고, 현재는 국립공원공단이 관리하고 있다.
치밭목 대피소.
치밭목 대피소는 경상남도 산청군에 위치한 국립공원 대피소로, 수용 인원은 60명이다. 천왕봉~대원사 구간에 위치해있으며, 이곳으로 오는 등산 코스의 난이도가 매우 높기로 유명하다.
전기 이용이 가능하지만 세석대피소처럼 개인 침상에서의 전기 이용은 불가능하고, 중앙 홀에서만 전기 이용이 가능하다. 이곳은 개인 침상이 갖춰져 있다. |
3334 | 32843259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334 | 불확정성 원리 | 불확정성 원리(不確定性原理, )는 양자 역학에서 맞바꿈 관측량(commuting observables)이 아닌 두 개의 관측가능량(observable)을 동시에 측정할 때, 둘 사이의 정확도에는 물리적 한계가 있다는 원리다. 불확정성 원리는 양자역학에 대한 추가적인 가정이 아니고 양자역학의 통계적 해석으로부터 얻어진 근본적인 결과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위치-운동량에 대한 불확정성 원리이며,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위치가 정확하게 측정될수록 운동량의 퍼짐(또는 불확정도)은 커지게 되고 반대로 운동량이 정확하게 측정될수록 위치의 불확정도는 커지게 된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임의의 양자상태에서 위치의 평균에 대한 제곱평균제곱근(RMS)편차 (X의 표준편차)는
운동량의 평균에 대한 제곱평균제곱근 편차 (P의 표준편차)는
두 표준편차의 곱은 다음과 같다.
즉, 위치와 운동량의 표준편차의 곱은 디랙 상수의 절반보다 같거나 크다.
물리적 의미.
양자역학의 물리적 의미를 해석하는 데에는 여러 관점이 있다. 아래는 기본적으로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 따라 불확정성 원리의 의미를 서술한 것이다.
'불확정성 원리'란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아낼 수 없고, 두 측정값의 부정확도를 일정 이하로 줄일 수 없다는 양자역학적 원리이다. 고전역학의 예측과는 달리, 양자역학에서는 위치와 운동량이 동시에 확정적인 값을 가질 수 없으며 위치의 불확정성과 운동량의 불확정성이 플랑크상수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 이는 입자계로부터 동일한 측정의 과정을 여러 번 거친 통계에 대한 진술이지, 단순히 입자계를 한번 측정하여 얻어지는 결과가 아니다. 양자현상은 특정한 시도에 의해 그때그때 얻어지는 결과물에 대한 예측이 아니며, 여러 번의 관찰로부터 얻어지는 기댓값과 같은 통계적인 예측만을 할 수 있다. 불확정성 원리는 이러한 양자현상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물리적인 원리이다.
불확정성 원리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관계에만 성립하는 것만이 아니라 양자역학의 일반적인 관측에 적용될 수 있다. 양자현상의 관측량들은 연산자에 의해 얻어지는데, 각 연산자들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교환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 교환법칙이 성립하지 않는 두 연산자를 '교환(맞바꿈) 관계에 있지 않다'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두 연산자에 대해서는 불확정성 원리가 성립한다. 앞서 언급한 위치와 운동량은 교환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에 위치와 운동량의 측정은 불확정적인 것이다. 반면 3차원 공간에서의 위치와 운동량을 측정할 경우엔, 다른 두 방향에서의 위치와 운동량은 서로 교환 가능한 관계이므로 그것들에 대해서는 불확정적이지 않게 (정확하게) 관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직교좌표계에서의 관측을 생각해보자. x축 상의 위치를 측정하는 행위는 x축상의 운동량에 영향을 주지만, 이 관측은 y축과 z축 상의 위치와 운동량 관측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으며 모든 관측에 불확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처음의 결과가 실험 오차에 의한 것이었다면 x축상의 위치와 y축상의 운동량의 측정 역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야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부분이 바로 기술적 한계와 불확정성 원리가 구별되는 부분이다.
또한 불확정성 원리는 관측 행위의 순서가 관측하고자 하는 상태에 영향을 주는 양자현상의 특징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교환관계에 있지 않은 두 연산자에 의한 관측을 연속적으로 수행하는 경우, 즉 한번의 관측을 수행한 후 다른 관측을 수행할 때 두 관측 순서를 바꾸면 각각은 다른 결과가 얻어지게 된다. 이것은 처음의 관측에 의해 상태가 변화하게 되어 다음 관측에서는 처음과 같지 않은 상태에 대해 측정을 수행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렇게 초기 상태가 관측에 의해 다른 상태로 바뀌는 것을 파동 함수 붕괴 ()라고 말한다. 양자 현상의 상태는 파동함수로 표현되므로, 그 파동 함수가 변화했다는 것은 수학적 계산에 의해 전과 같은 관측량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역사.
1924년부터 코펜하겐의 보어 연구소에서 원자의 구조에 대해 연구하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1925년 5월, 문제를 단순화시켜 복잡한 수소원자가 아닌 가상적인 조화 진동자를 설정하여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하고자 했다. 그는 조화 진동자에서 고전적인 다주기 체계에 상응하는 위치 좌표를 푸리에 급수로 전개하여 이에 대한 수학적인 형식화를 추구한 결과, 그가 시도한 새로운 방법이 에너지 보존법칙을 만족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925년 6월, 휴양지인 헬골란트 섬에서 최초로 양자 현상에 대한 새로운 역학을 정립해냈다. 이후 하이젠베르크는 양자 현상 내에서는 물리량들과 연관시킨 수학적 대상 두 개를 함께 곱함으로써 얻어지는 답이 곱이 수행되는 순서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독특한 특성을 발견했다. (현대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면 여기서 말하는 물리량과 연관된 수학적 대상은 연산자이며, 두 연산자 사이에는 교환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 수학적 특징은 당시의 물리학자들에게 친숙하지 않았던 것이어서 쉽게 받아들여지진 않았고 하이젠베르크 자신 역시 그것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때 막스 보른은 1925년 하이젠베르크의 논문에 담긴 비교환적 양들이 수학자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행렬임을 인식할 수 있었고, 하이젠베르크의 연구 내용을 파스쿠알 요르단()과 함께 행렬로 표현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하이젠베르크가 정립한 새로운 역학은 행렬역학이라 명명되었다. 1926년 3월, 하이젠베르크는 행렬역학의 비교환적 성질이 불확정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당시 닐스 보어는 '불확정성'을 '상호보완성'이라고 표현했다), 미시적인 자연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노력한 결과, 1927년 3월에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하였다.
후에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이 불확정성 원리를 창안할 수 있었던 것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아인슈타인은 "관찰이란 현상과 그것에 관련된 자연법칙을 알고 있을 때만 의미가 있으며, 관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해주는 것이 이론이다."라고 말했는데, 하이젠베르크는 이러한 관점하에 새로운 현상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결과 불확정성 원리에 대한 기본적인 착상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계기를 제공한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비결정론적인 특성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불확정성 원리에 대한 수학적인 논증을 완성한 하이젠베르크는 이후 사고 실험을 통하여 빛과 물질의 파동, 입자의 이중성이 불확정성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했다.
하이젠베르크의 1927년 논문은 formula_4와 formula_5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명시하지 않았고, 다음과 같은 형태였다.
같은 해 7월에 미국의 얼 케너드()가 오늘날과 같이 formula_4와 formula_5를 관측가능량의 표준편차로 정의하고,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부등식
을 증명하였다.
하이젠베르크의 현미경.
현미경으로 입자를 관측하는 사고 실험인 하이젠베르크의 현미경()은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리를 설명하는데 사용했던 대표적인 방법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현미경에 사용하는 빛의 파장이 짧을수록 상을 형성하는 해상도가 높다는 사실을 토대로, 원자 속 전자의 위치를 정밀하게 측정하기 위해서는 관측에 사용되는 빛은 감마선 정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원자 속의 전자를 관측하기 위해 감마선과 같이 짧은 파장(높은 진동수)의 광자를 쏠 경우, 감마선 광자가 가진 운동량은 매우 커서 원자가 전자를 잡아두는 에너지를 초과한다. 따라서 이 경우 전자의 위치는 정확히 관측되지만, 광자는 전자에 큰 임의의 운동량을 전달하므로 컴프턴 효과에 의해 전자의 운동량은 부정확하게 측정된다. 반대로 전자를 관측하기 위해 긴 파장(낮은 진동수)의 광자를 쏠 경우 광자의 충돌이 전자의 운동량에 큰 영향을 주지 않지만, 전자에 의해 크게 산란된 광자는 관측자에게 전자의 위치를 정확히 전달해 줄 수 없다. 위의 두 상황에 의해,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도 과정.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대한 발견적 논의.
작은입자가 x축 방향으로 놓인 폭이 a인 슬릿을 통과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경우 x축으로의 불확정성은 formula_10가 된다. 이 입자는 드브로이의 물질파에 해당되는 파동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슬릿을 통과한 입자의 파동은 회절하게 되고, formula_11인 곳에서 첫 번째 간섭무늬가 나타나게 된다. 이 경우 전자가 발견될 확률은 회절된 파동함수의 제곱에 비례하기 때문에, 입자의 확률적 분포가 절반각인 formula_12에 해당되는 영역 안으로 제한될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운동량의 불확정도는 다음과 같다.
이때 드브로이의 물질파 관계식으로부터 운동량 formula_14이므로 위치와 운동량의 불확정도는 다음과 같다.
이 과정은 일반적인 수학적 증명이 아니라, 위치와 운동량 불확정성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설명하는 발견적 논의(heuristic argument)이므로 그 결과는 정성적이다. 즉, 위 식의 우변인 h는 수학적으로 엄밀한 불확정도가 아니다.
일반화된 불확정성 원리.
임의의 관측량 A에 대한 분산은 다음과 같다.
마찬가지로 관측량 B의 분산은 다음과 같다.
이에 대해 코시-슈바르츠 부등식을 적용하면 다음의 식을 얻는다.
한편, 임의의 복소수 z는 복소수의 일반적인 성질에 의해 다음의 식이 항상 성립한다.
따라서 우변의 formula_20에 위의 관계를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위 식 우변의 괄호 안의 내적을 계산하면 다음과 같다.
마찬가지로,
그러므로 부등식 괄호 안의 내적은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위 계산결과는 다음과 같이 두 연산자에 대한 교환자 표기법으로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다음의 식을 얻게 된다.
이것이 일반화된 불확정성 원리이다.
여기서 formula_33는 임의의 연산자이므로 교환자가 0이 아닌 두 연산자에 대해서는 불확정성 원리가 성립한다. 따라서 하이젠베르크의 위치-운동량 불확정성은 일반화된 불확정성의 특정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위치-운동량 불확정성 원리.
1차원(x축) 공간 상에 존재하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측정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양자역학에서 운동량을 측정하는 연산자는 다음과 같다.
위치와 운동량 연산자의 교환자는 다음의 과정을 통해 계산된다.
이것을 일반화된 불확정성 원리에 대입하면 다음과 같다.
양변에 제곱근을 취하면 다음과 같다.
이것이 하이젠베르크의 위치-운동량 불확정성 원리이다.
위치-운동량 불확정성 원리의 보완.
불확정성 원리는 양자역학에 대한 추가적인 가정이 아니며 양자역학의 기본 가정으로부터 유도되는 하나의 결과이다. 하이젠베르크의 위치-운동량 불확정성에 대한 보다 엄밀한 전개로써
2003년 1월에 나고야 대학교의 오자와 마사나오(小澤正直) 교수는 측정의 한계, 측정 행위에 의한 교란과 양자 자체의 성질에 의한 양자의 움직임을 엄밀하게 구별하는 식을 제안했다. 본래의 하이젠베르크의 위치-운동량 불확정성
은 물리량 formula_39와 그것을 측정하는 결과 연산자 formula_40와의 차이에 대한 제곱평균제곱근을 의미하는 formula_41와
측정 도중의 formula_39의 변화량(요동)의 제곱평균제곱근을 의미하는 formula_43를 도입하면
와 같게 되는데, 오자와는 보다 일반적인 위치-운동량 불확정성 원리의 보완식으로써 두 개의 항이 추가되는
을 제시하였다. 이 식에 따르면 작은 양자에 대하여 기존의 위치-운동량 불확정성의 '측정의 한계'를 넘는 측정이 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이후 빈 공과 대학교와 나고야 대학교의 공동 연구에 의하여 특정 조건에서 놓인 중성자의 두 종류 스핀 값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하는 실험으로써 증명되었으며, 2012년 1월 15일 《네이쳐 피직스》에 개재되었다.
에너지-시간 불확정성 원리.
임의의 관측량 formula_46의 기댓값을 시간에 대해 미분하면 다음과 같다.
슈뢰딩거 방정식을 적용하면
이므로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formula_50는 헤르미트이므로 ,
따라서 임의의 관측량formula_52와 그것에 대한 연산자 formula_53, 해밀토니안 formula_54 사이에는 다음의 관계가 성립한다.
연산자formula_53가 시간에 무관하다고 가정하면 마지막 항은 0이 된다.
이제 위 식을 일반화된 불확정성 원리를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위 식의 양변에 제곱근을 취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에너지와 시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다음의 관계식을 얻을 수 있다.
이 식이 바로 에너지-시간의 불확정성 원리이다.
주요 반론.
보어-아인슈타인 논쟁은 아인슈타인이 당시 점차 표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 대해 여러 차례에 걸쳐 이의를 제기하고, 이에 대해 닐스 보어가 반박한 사건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제5차(1927년) 솔베 회의에서 언급된 '아인슈타인의 슬릿'과 제6차(1930년) 솔베 회의에서 언급된 '아인슈타인의 박스'가 불확정성원리에 대한 대표적인 반론이다.
또한 양자역학의 측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정교한 사고실험인 'EPR 역설'(1935년)이 있다.
아인슈타인의 슬릿.
'아인슈타인의 슬릿'은 아인슈타인의 사고실험으로서,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에 대한 보어의 반론은 다음과 같다.
아인슈타인의 상자.
아인슈타인의 상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고안한, 에너지-시간 관계의 불확정성에 대한 사고 실험이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에 대한 닐스 보어의 반론은 다음과 같다.
보어는 이 효과가 불확정성 관계에 정확하게 일치함을 보일 수 있었고,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에 의해 반박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모순성보다는 불완전성의 문제에 집중하였다.
EPR 역설.
"Can Quantum-Mechanical Description of Physical Reality Be Considered Complete?"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발표된 EPR 역설은 1935년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로젠에 의해 발표되었다(EPR이란 명칭은 세명의 앞글자를 딴 것이다). 물리계는 측정하기 전에 이미 물리적 성질들을 실제로 가지고 있다는 국소적 실재론 관점을 고수하던 아인슈타인은 포돌스키, 로젠과 함께 이를 입증하기 위한 정교한 가상실험을 설계했다. EPR측은 어떠한 물리적 영향력도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전달될 수 없다는 '국소성의 원리'를 근본 원리로 가정하고 있다. 양자역학의 전통적인 입장에 따르면 측정에 의한 파동함수의 붕괴는 거리에 관계없이 먼 곳에 순식간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action-at-a-distance)이므로, 양자역학은 국소성의 원리에 어긋나는 역설적인 상황을 발생시키게 된다. 따라서 양자역학은 불완전 체계이며, 물리계의 상태를 완벽하게 알아내기 위해선 파동함수 이상의 '숨은 변수'가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4년 존 벨은 EPR 역설을 검증할 수 있는 실제 실험을 고안했다. 벨은 실험의 결과가 '벨의 부등식'을 판별한다고 말했는데, 부등식이 성립한면 EPR측의 주장이 옳은 것이고 부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양자역학의 체계가 유지되며 어떠한 숨은 변수도 허용되지 않음이 밝혀지는 것이었다. 이후 벨부등식을 입증하기 위한 다양한 실험을 수행한 결과, 부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져 양자역학의 비국소적 특징이 밝혀짐과 동시에 양자역학의 체계가 유지될 수 있었다.
벨의 실험과는 별개의 방법으로 EPR이 주장한 나타난 양자역학의 비국소적 특징을 설명할 수도 있다. 만약 EPR측의 주장처럼 파동함수의 붕괴가 유한한 속도로 일어난다면 국소성의 원리보다 더 우선시되는 원리인 '각운동량 보존법칙'이 깨어지게 된다.(이렇게 될 경우 물리화학에서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따라서 파동함수의 붕괴는 순간적으로, 즉 비국소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