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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문자
그리스 문자() 또는 희랍 문자(希臘文字)는 그리스어를 쓰는 데 사용되는 자모 문자이다. 현대 서유럽과 동유럽의 거의 대부분 국가 문자에 영향을 끼친 문자이다. 자음과 모음이 따로 있는 자모 문자 중 가장 오래된 문자로, 자모 문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 ‘알파벳(alphabet)’은 그리스 문자의 첫 두 글자인 알파와 베타에서 왔다. 기원전 9세기경 발달하여 현재까지 그리스어 표기에 사용된다. 그 밖에 그리스 숫자를 비롯, 원주율 등의 여러 수학 기호, 물리학의 여러 입자 이름, 항성의 이름 등 다양한 용도로도 쓰인다. , , , , , , , , , , , , , , , , , /ς, , , , , , . 그리스 문자는 페니키아 문자에서 비롯되었으며, 오늘날 널리 쓰이는 로마 문자와 키릴 문자의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익히 알려진 그리스 문자 형태는 이오니아 지방에서 사용되던 형태로 아테네와 그 연맹 도시들이 그리스 문명의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특히 헬레니즘 시기를 거치면서 이오니아 지방, 특히 아티카 변형이 소아시아와 그리스 일대와 아프리카 북부까지 널리 쓰이게 되었다. 로마 문자는 서부 그리스 문자 변형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확히는 서부 그리스 문자 변형을 받아들인 에트루리아에서 들어온 것이다. 키릴 문자는 사실상 포교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그리스 문자와 그리스 문자의 영향을 받은 슬라브 토착 문자를 혼합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종류. 그리스 문자와 그 기원은 아래와 같다. 옛 문자. 아래 문자는 표준 그리스 문자는 아니지만, 예전, 혹은 일부 방언에서 사용되었던 문자이다. 와우, 코파, 삼피는 그리스 숫자에서도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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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포스
시시포스(, )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인물이다. 시지푸스, 시지프스, 시지프 등으로 표기하고 불리기도 한다. 그는 코린토스 시를 건설한 왕이었다. 영원한 죄수의 화신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잘 알려져 있다. 현대 작품으로는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 《시지프 신화》가 있다.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의 코린토스 왕국에서는 그를 전설적인 시조로 받들었다. 전설에 따르면 테살리아의 왕 헬렌의 아들, 혹은 후손이었던 아이올로스와 에나레테의 아들이라 한다. 다른 설에는 그의 아버지가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라고도 한다. 플레이아데스 메로페의 남편으로서 에피라(코린토스)를 건설해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기록에 따르면 오디세우스의 아버지라고도 한다(오디세우스의 어머니 안티클레아가 라에르테스와 혼인하기 전). 시시포스는 꾀가 많은 것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욕심이 많고 속이기를 좋아했다. 여객과 방랑자를 살해하기도 했다. 시시포스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가 그를 데리러 오자 오히려 타나토스를 잡아 족쇄를 채워 한동안 아무도 죽지 않았다. 결국 전쟁의 신 아레스가 와서 타나토스를 구출하고 시시포스를 데려갔다. 하지만 시시포스는 죽기 전 꾀를 내어 아내에게 죽으면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일러뒀었다. 그래서 저승에서 제사를 받지 못하자 저승의 신 하데스에게 아내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설득하기 위해 이승으로 다시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코린토스에 가서는 저승에 돌아오기를 거부해, 나중에 헤르메스가 억지로 돌려보냈다. 그는 저승에서 벌로 큰 돌을 가파른 언덕 위로 굴려야 했다. 정상에 올리면 돌은 다시 밑으로 굴러내려가 처음부터 다시 돌을 밀어 올리는 일을 시작해야 했다("오디세이아", xi. 593-600). 그가 이 벌을 받은 정확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혹자는 그가 신들의 비밀을 인간에게 알린 벌이라 하고 다른 이들은 그가 여행하는 이들을 살해한 벌이라고 한다. 한편 플레이아데스 7자매는 사후에 하늘로 올려져 별자리가 되었는데, 그중 신과 연애했던 6명은 빛을 발하였으나 인간 시지포스의 아내였던 메로페만이 부끄러워서 빛이 약하다는 전승도 있다. 또한 시시포스의 아들인 글라우코스는 벌로 불임하는 저주를 받았다는 설과 말에게 잡아먹혔다는 전승도 있다. 평가. 알베르 카뮈는 그가 바위를 굴러 올렸으나 떨어질 줄 알고도 바위를 굴리는 것과 밀어 올린 바위가 굴러떨어졌을 때 다시 바위를 올리려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인간승리라고 평가했다. 카뮈는 이러한 행위를 부조리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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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역설
논리학에서 러셀의 역설(-逆說, )은 버트런드 러셀이 1901년에 발견한 역설이다. 고틀로프 프레게의 《산술의 기본 법칙》과 게오르크 칸토어의 소박한 집합론 따위의 논리 체계가 모순을 지닌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칸토어의 집합론에서 자기 자신의 원소가 아닌 모든 집합들의 집합을 정의하고 이 집합이 자기 자신의 원소인지 여부를 물으면, 이에 대한 긍정과 부정 가운데 어느 하나를 가정하더라도 모순이 유도된다. 형 이론과 공리적 집합론이 도입되면서 해결되었다. 정의. 러셀의 역설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전 대부분의 논리 체계가 함의한 모순이다. 몇 가지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소박한 집합론. 칸토어의 집합론이나 주세페 페아노의 집합론을 가정하고, 다음과 같은 집합을 생각하자. 즉, 임의의 formula_2에 대하여, 이다. 특히, formula_4인 경우 이며, 이는 모순이다. 다시 말해, 만약 formula_6라고 가정하면, formula_7의 정의에 따라 formula_8이므로 가정에 모순되며, 반대로 만약 formula_8라고 가정하여도 formula_7의 정의에 따라 formula_6이므로 가정과 모순이다. 프레게의 《산술의 기본 법칙》. 프레게가 저술한 《산술의 기본 법칙》의 논리 체계를 가정하자. 이 논리 체계에서 논리식의 변수는 논리식으로 직접 치환될 수 없으나, 논리식의 값렬(-列, )로는 치환될 수 있으므로, 러셀의 역설을 함의한다. 구체적으로, 1개의 자유 변수를 갖는 논리식 formula_12의 값렬 formula_13는 다음과 같은 공리로 정의된다. 《산술의 기본 법칙》의 논리 체계에서, 1개의 자유 변수를 갖는 논리식 formula_12, formula_16에 대하여, formula_17는 논리식이 아니지만, formula_18는 새로운 논리식이다. 이제, 다음과 같은 논리식 formula_16를 생각하자. 이는 1개의 자유 변수 formula_2를 갖는 논리식이다. 그러면 이며, 이는 모순이다. 다시 말해, 만약 formula_23라고 가정하면, formula_16의 정의에 따라 이며, 특히 formula_26이므로 formula_27이다. 이는 가정 formula_23과 모순이다. 반대로, 만약 formula_27라고 가정하면, 값렬의 정의에 따라 이며, 다시 formula_16의 정의에 따라 formula_23이다. 이는 가정 formula_27과 모순이다. 기타. 논리식의 변수를 논리식으로 치환할 수 있는 논리 체계의 경우, 단순히 1개의 자유 변수 formula_12를 갖는 논리식 을 생각하면 모순 을 얻는다. 역사. 러셀은 1901년 5월이나 6월에 칸토어의 논문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이 역설을 발견하였다. 러셀은 1902년에 프레게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프레게의 《개념 표기법》의 논리 체계에서 “자기 자신을 술어로 가할 수 없다는 술어”를 정의할 경우 모순이 유도된다고 지적하였다. 러셀에게 보낸 회신에서 프레게는 그 역설이 《개념 표기법》에 적용될 수 없다고 정정하면서도, (《개념 표기법》을 확장한) 《산술의 기본 법칙》 속의 역설로 수정될 수 있음을 설명하였다. (《개념 표기법》에는 “변수를 함수로 치환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는 짧은 주해가 있으며, 이와 관련된 자세한 설명은 프레게의 1891년 논문 《함수와 개념》()에 등장한다.) 에른스트 체르멜로도 비슷한 시기에 이 역설을 독립적으로 발견하였다. 러셀의 역설과 소박한 집합론. 칸토어가 세상에 내어 놓은 집합론은 러셀의 역설과 같은 서술이 논리적으로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별할 수 있는 강력한 수학이론이다. 이러한 소박한 집합론에서 아무 원소를 포함하지 않는 공집합을, ψ = { } 로 표시하는데, 이러한 공집합을 표현할 수 있는 서술 방법은 무한히 많다. 예를 들어 { x | x=1 and x≠1 } = ψ, 러셀의 역설에서 가정하는 집합은 수학적 대상은 아니지만, 소박한 집합론에서 공집합의 원소는 될 수 있다. 공집합에 자신을 원소로 포함시키는 과정을 되풀이하면, ψ, {ψ}, {ψ, {ψ}},….  되고, 자연수가 도출된다. 다른 수학이론의 기초가 되고, 함수를 정의할 수 있으면, 또한 무한한 대상들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제공한다. 그래서, 수학자 힐버트는 칸토어의 집합론이 이끄는 세계를 수학자의 낙원이라고 묘사했다. 소박한 집합론에서 ‘소박한’은 후대 수학자들이 칸토어가 발견한 집합론을 공리 집합론과 구분 짓기 위해 붙인 것이다. ‘naïve’ 란 단어를 ‘소박한’이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했지만, ‘덜 성숙된’, ‘생각이 얕은’ 이런 느낌의 단어이다. 칸토어의 집합론에 그런 단어를 붙여 부르는 것이 옳은지는 의문이다. 천재 칸토어는 집합론을 세상에 내어 놓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제논의 역설 이후 금기 시 되어온 무한의 개념을 집어 들었다. 당연히 엄청난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무한한 집합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당시 수학자들로부터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동년배인 수학자 푸앙카레는 칸토어의 집합론과 무한 수를 심각한 수학 질병이라고 불렀고, 칸토어에게 중요했던 선배 수학자 크로네커는 그를 과학 사기군, 배교자, 젊은이를 지적 타락으로 이끄는 자라고 매도했다. 철학자들도 이러한 비난에 가세했고, 성직자들은 그의 시도를 신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여겼다. 그리고, 러셀의 역설과 베른의 역설과 같은 역설들이 쏟아져 나온다. 한편, 그의 당대 일부 수학자들은 칸토어 집합론의 공리화를 시작한다. 유클리드의 원론(elements) 에 나오는 그 공리화 방법론을 집합론에 도입한 것이다. 집합론을 체계화 시킨 측면도 있지만, 러셀의 역설을 비롯한 역설들이 주장하는 칸토어 집합론이 지닌 모순들을 극복하기 위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문제의 소지도 있다. 오직 이러한 역설들을 극복하기 위해 도입된 계급의 공리(Axiom of class)는 그 필요성이 의문일 뿐만 아니라, 칸토어의 집합론에 심각한 제약을 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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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토요일(土曜日)은 금요일 뒤의 날, 일요일 앞의 날이다. 이름. 일부 게르만어파 언어에서 토요일은 '사투르누스의 날'(, )을 어원으로 하고 있는데, 사투르누스는 토성을 상징하는 신이므로, 대한민국과 일본에서는 '토요일'로 불린다. 나머지 대부분의 경우 북게르만어 즉 노르만어 위주로는 lördag이라고 한다. 그러나 게르만어의 중심인 독일어는 Samstag[zámsta:k]라고 다르게 부른다. 잠(Sam)이라는 위인/신이 있는가 혹은 아래 라틴어파 sabato 특히 불어를 접해 들어온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이 있다. 남부 유럽 언어 및 동남아 언어에서 '토요일'이란 낱말은 안식일(샤밭)을 어원으로 하고 있다. 그 예로는 그리스어 , 이탈리아어 , 인도네시아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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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중국해
동중국해(東中國海) 또는 동지나해(東支那海)()는 제주도 남쪽부터 타이완에 걸쳐있는 서태평양의 연해이다. 일본에서는 히가시시나카이(東支那海, )라고 부르며 한국에서 동지나해로 불렀다가 최근에는 동중국해라고 부른다. 지나는 영문 차이나를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는 동해()라고 부른다. 수역의 정의. 타이완 해협을 통해 남중국해와, 대한해협과 제주도 북동쪽 해역을 통해 동해와, 제주도 서쪽 해역을 통해 황해와 이어져 있다. 국제 수로 기구에서 1953년 발간한 《해양과 바다의 경계》(Limits of Oceans and Seas) 제3판에 따르면, 동중국해는 동쪽의 규슈와 난세이 제도를 따라 그은 곡선을 경계로 필리핀 해와 나뉜다. 북동쪽은 제주도 동쪽 끝부터 일본의 후쿠에섬 남쪽 끝과 규슈까지 이은 직선을 경계로 동해와 접한다. 북서쪽은 제주도 서쪽(북위 33°17')부터 중국 대륙의 양쯔강 하구까지 이은 직선을 경계로 황해와 접한다. 남서쪽은 타이완섬 북쪽 끝과 푸젠성의 동쪽 해안(북위 25°24')을 이은 선을 경계로 남중국해와 접한다. 해역의 크기는 약 1,249,000 km2이다. 자원 분쟁. 동중국해 해역의 천연 가스 개발을 둘러싸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일본, 대한민국, 중화민국 사이에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은 동중국해의 배타적 경제 수역(EEZ)의 경계로 중일 중간선을 주장하는 반면, 중국은 오키나와 해구를 주장하고 있다. 중국이 중일 중간선 서쪽 약 4킬로미터 지점에서 천연가스 채굴시설 준샹, )를 건설하자 일본은 중간선 동쪽의 천연가스까지 흡수될 수 있다며 개발 중단을 요구했다. 이후 양국은 2008년 6월 중간선을 포함한 해역의 공동 개발에 합의했고, 춘샤오 개발에 일본 기업이 투자하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구체적인 교섭이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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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드쿤 크비슬링
비드쿤 아브라함 레우리츠 욘쇤 크비슬링(, 1887년 7월 18일 ~ 1945년 10월 24일)은 노르웨이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다. 텔레마르크주 출생이며 1942년 2월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노르웨이 정부가 런던에 망명해 있는 동안 독일 점령하의 노르웨이에서 총리직을 지냈다. 종전 후 반역죄로 총살되었다. 크비슬링은 노르웨이의 퓌러(Führer; 히틀러의 칭호)로 불렸다. 그는 오슬로의 뷔그되위(Bygdøy)에 있는 별장에서 살았는데, 북유럽 신화에서 딴 기믈레(Gimle)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생애. 크비슬링은 노르웨이의 군사사관학교 생도 중 가장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 후 노르웨이군에서 소령까지 진급했다. 소련에서 1920년대 기근 당시 그곳에서 난민 구제 사업을 하던 탐험가 프리티오프 난센(Fridtjof Nansen)과 함께 일하기도 했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는 농민당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노르웨이의 헌법 기념일인 1933년 5월 17일 크비슬링은 지방 검사 요한 베른하르드 요르트와 함께 민족협동당(Nasjonal Samling)을 창당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정당을 본따서 반(半)민주주의 노선을 취한 지도자 중심의 정당이었다. 크비슬링이 당에서 히틀러가 나치당에서 맡은 역할을 한다는 계획이었다. 민족 단일당은 처음에는 어느 정도 지지를 받았으나 1935년을 전후하여 노골적인 친독 반유대 노선을 취하기 시작하자 지지는 줄어들어 독일의 침공 당시 당원수는 2천 명 정도에 불과했다. 독일이 1940년 4월 9일 노르웨이를 침공하자 왕과 정부가 북쪽으로 피난간 혼란을 틈타 크비슬링은 세계 최초로 라디오 뉴스 시간에 쿠데타를 선언한 이가 되었다. 크비슬링은 히틀러와 전해에 면담한 바 있어 독일이 자신을 지지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독일은 노르웨이를 직접 지배하기를 원하여 크비슬링이 수립한 정부는 닷새 만에 해체되고 요제프 테르보펜(Josef Terboven)을 노르웨이의 국가판무관(Reichskommissar)으로 앉혔다. 테르보펜과 크비슬링의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테르보펜은 높은 자리에 노르웨이인을 앉히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겼는지 1942년 크비슬링을 정부수반(총리에 해당)으로 임명, 1943년 2월 1일부터 직책을 맡게 했다. 크비슬링은 노르웨이가 독일 점령 하에서 벗어난 뒤 다른 두 명의 민족 단일당 지도자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총살되었다. 망명 정부는 나치 독일의 점령기간 동안의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종전 후 재판을 대비해 사형 제도를 부활시켰었다. 이 때문에 후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크비슬링'이 반역자의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이 신조어는 이미 크비슬링 생전에도 사용되었다. 일례로 당시 "베를린을 방문한 비드쿤 크비슬링"이라는 제목의 풍자 만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크비슬링은 자신의 이름을 말했는데 히틀러는 '저는 반역자입니다'라는 뜻으로 이해했다는 풍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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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비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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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롬쇠
트롬쇠(Tromsø)는 노르웨이 북부 트롬스주(Troms) 에 위치한 도시이다. 2012년 현재 72,066 명의 주민이 있다. 트롬쇠 시의 면적은 도심 바깥의 넓은 지역까지 포함해서 2558 km2이다. 트롬쇠는 노르웨이에서 일곱 번째로 큰 도시로 북극권 트롬쇠위아섬(Tromsøy)에 위치해 있다(북위 69° 40' 33", 동경 18° 55' 10"). 세계에서 최북단에 있는 대학교인 트롬쇠 대학교가 있어 세계 최북단의 대학 도시로 알려져 있다. 역사. 트롬쇠는 1250년 세워져 1794년 도시 헌장을 받았다. 19세기 후반에는 북극해의 주요 무역 기지가 되어 많은 북극 탐험대가 이곳으로부터 출발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노르웨이 정부가 대피해 와 잠시 정부 소재지가 되기도 했다. 오늘날 트롬쇠는 의료산업 관련 소프트웨어와 원격치료 관련 프로그램의 분야에서 국제적인 기지로 부상하고 있다. 문화. 노르웨이 리그에 참가하는 축구 구단으로 트롬쇠 I.L.과 트롬쇠 U.I.L.이 있다. 수많은 북극 탐험대들이 트롬쇠를 출발지로 삼아 '북극의 관문'이라고도 한다. 트롬쇠 주민들이 터득한 북극의 조건에 대한 실제 지식은 로알 아문센(Roald Amundsen), 움베르토 노빌레(Umberto Nobile), 프리티오프 난센(Fridtjof Nansen) 등 여러 탐험가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며 이들은 대원들을 트롬쇠에서 모집하기도 했다. 북극권에 위치한 관계로 5월 21일부터 7월 23일까지는 해가 지지 않는다(백야 현상). 매년 6월에 백야 마라톤을 개최한다. 최근에는 1월에 북극야 하프 마라톤을 개최하기 시작했다. 트롬쇠에서 발행되는 신문으로는 '블라데 트롬쇠(Bladet Tromsø)'와 '노르뤼스(Nordlys)'가 있다. 백야. 하지 때에 이곳 트롬쇠 지역에서도 백야 관측이 가능하다. 저녁 무렵 태양이 서쪽으로 점점 높이가 낮아지다가 자정 때에는 태양이 북쪽의 낮은 하늘을 거쳐서 북동쪽으로 떠오른다. 인물. 트롬쇠 출신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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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네 말린
레네 말린 페데르센(Lene Marlin Pedersen, 1980년 8월 17일 태어남)은 레네 말린(Lene Marli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노르웨이의 가수이다. 노르웨이 북부의 트롬쇠 출신이다. 1998년 〈언포기버블 시너(Unforgivable Sinner)〉라는 곡을 싱글로 내 데뷔한데 이어 1집 《플레잉 마이 게임(Playing My Game)》을 냈다. 1999년 MTV 유럽 시상식에서 북유럽 최고 그룹/가수상을 수상했다. 2003년에는 2집 《어나더 데이(Another Day)》를, 2005년에는 3집 《로스트 인 어 모먼트(Lost in a Moment)》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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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톨스토이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백작( , , , 1828년 9월 9일 ~ 1910년 11월 20일)은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시인, 개혁가, 사상가이다. 사실주의 문학의 대가였으며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전쟁과 평화》(1869년), 《안나 카레니나》(1877년)가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러시아 문학과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생애. 톨스토이는 1828년 9월 9일에 러시아 남부 툴라 근처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태어났다. 니콜라이 일리치 톨스토이 백작과 마리야 톨스타야 백작부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자랐다. 카잔 대학교 법학과에 다니다가 중퇴했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생각을 억압하는 대학교 교육 방식에 실망을 느껴서라고 한다. 그는 부모의 유산 가운데 자신의 몫이 된 야스나야 폴랴나로 돌아간다. 영지에서 농노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계몽 실험을 벌이던 톨스토이는 1848년에 다시 고향을 떠난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는 방탕한 생활에 빠져 빚을 많이 졌다.(급기야 1855년에는 도박 빚 때문에 야스야냐 폴랴나의 저택을 매각하고 말았다.) 그러다 1910년 11월 7일,그는 어느 간이역에서 "진리를 영원히 사랑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젊은 시절의 톨스토이는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쾌락주의자였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이다. 톨스토이의 주요 작품으로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 등의 장편 소설과 《이반 일리치의 죽음》, 《바보 이반》 등의 중편 소설이 잘 알려져 있다. 작품세계. 리얼리즘. 톨스토이는 ‘인간의 심리 분석’과 ‘개인과 역사 사이의 모순 분석’을 통하여 최상의 리얼리즘을 성취해 냈다. 이 작가는 일상의 형식적인 것을 부정하고 인간의 거짓, 허위, 가식, 기만을 벗겨내고자 했다. “톨스토이 이전에는 진정한 농민의 모습이란 없었다”는 레닌의 말처럼, 톨스토이는 러시아 제국에서 혁명이 준비되고 있던 시기를 적확(的確)하게 묘사하면서, 그의 문학과 사상을 사회혁명에 용해시켰다. 나아가서 전 인류의 예술적 발전을 한 걸음 진전시키는 데 그의 문학과 사상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두 개의 톨스토이. 톨스토이의 작품에는 ‘삶을 사랑하는 톨스토이’와 ‘청교도적 설교자로서의 톨스토이’라는 ‘두 얼굴의 톨스토이’가 있다. 톨스토이의 세계에서는 두 얼굴을 가진 분열된 자아가 계속해서 서로 싸운다. 후기로 갈수록 톨스토이는 ‘삶을 사랑하는 시인’에서 ‘인생의 교사’이자 ‘삶의 재판관’이 되기를 갈망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 얼굴을 가진 분열된 자아가 계속해서 서로 싸우는 그의 세계를 이원론적으로만 볼 수도 있지만, 주제적으로 긴밀하게 얽혀 있는 전일성이 드러난 세계로도 파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작가·사상가로서 톨스토이를 이분법적 사고로 나누지 말고, 영적인 탐구심에 기초한 도덕적 태도의 통일성에 기초해서 그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그의 창작 세계의 전일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구원. 톨스토이는 삶과 죽음, 육체와 정신, 사랑과 진리에 대한 관념들을 일반적·보편적 형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예술가이자 인생의 교사로서 이런 관념들에 대한 해답을 인류에게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톨스토이의 예술 세계에서는 자족적 관념이 만들어내는 자기 완결적 순환 구조를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관념을 통하여 그리고 그 관념의 실천을 통하여 절대적 자각자로서의 자기완성에 이르고자 하고, 자기 구원과 인간 구원에 도달하고자 했다. 활동. 비판적 지식인. 그 자신은 백작의 지위를 가진 귀족이었으나, 《바보이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의 집필을 통해 러시아 귀족들이 너무 많은 재산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민중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음을 비판하는 문학 활동을 하여, 러시아 귀족들의 압력으로《참회록》과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출판 금지를 당했다. 하지만 독자들은 필사본이나 등사본으로 책을 만들어서 몰래 읽었고, 유럽, 미국, 아시아에 있는 출판사들이 그의 작품을 출판하여 외국에서는 그의 작품이 유명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민중들에게 무관심한 교회(러시아 정교회)를 비판하여 교회로부터 미움을 받고 1901년 러시아 정교회의 교리감독기관인 종무원으로부터 파문당했을 정도로 톨스토이는 교회와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지식인으로 활약하였다. 행동하는 지식인. 톨스토이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내용은 몸으로 실천하는 지식인이어서, 귀족들의 방해로 폐교되기는 했지만 1860년 고향 툴라에서 농민학교를 운영하여, 부모의 강요로 아동노동을 하는 게 전부였던 농민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재미있게 놀기도 하게 해주었다. 당시 부모들은 처음에는 일할 사람이 없어질 것을 걱정하여 자녀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싫어했지만, 톨스토이가 진심으로 농민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는 아이들을 기꺼이 학교에 보냈다. 농민학교는 자유로웠는데, 이는 자유로운 교육을 통해서 진짜 교육이 진행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1871년에는 직접 교과서를 쓰기도 했는데, 농민과 귀족이 평등하게 교육받도록 한 내용 때문에 자기들보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농민을 멸시하는 귀족들은 농민들과 평등한 교육을 받을 수 없다며 거센 반발을 일으켰지만, 자신들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한 농민들에게는 칭찬을 들었다. 기독교 신앙. 톨스토이가 1894년에 저술한 <하나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에서 그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을 돕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 개개인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과 선포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 고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그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핵심이었다. 또한 그는 죽기 전 며칠 전인 1910년 11월 1일 자신의 딸 사샤에게 보내는 편지에 "하나님은 한계가 없으시다. 모든 사람들은 그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뿐이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존재한다..."고 말했다. (“God is the limitless All of which man realises himself to be a limited part. The truth exists only in God…”) 또한 그는 기독교의 영성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가난한 사람과 죄인들까지 모두 사랑하며,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는 복음서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실제로 그의 단편소설인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도 있다》는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마태복음서 25장 40절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불을 놓아두면 끄지 못한다》라는 단편소설은 폭력은 문제를 더 심하게 만들 뿐,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 평화주의와 기독교 아나키즘의 대표적 인물이기도 하다. 극작가로서의 활동. 톨스토이는 1850년대에 이미 이반 투르게네프나 알렉산드르 오스트롭스키의 영향을 받아 극작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근대 연극사에서 유명하게 한 것은 주로 <어둠의 힘>(1886), <교육의 열매>(1891), <산송장>(1911) 등의 작품이라 하겠다. <어둠의 힘>은 실화에 의거해 러시아 농민의 음산한 생활을 그린 것으로 자연주의 희곡으로 뛰어난 작품이며 러시아에서는 상연이 금지되어 프랑스에서 초연했다. <교육의 열매>는 시골 귀족의 무의미한 생활을 풍자한 것. <산송장>은 기독교적 자기 희생과 결혼법의 문제를 다룬 희곡으로 유럽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소설 <안나 카레니나>와 <부활>은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각색, 상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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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칸토어
게오르크 페르디난트 루트비히 필리프 칸토어( , 1845년 3월 3일 ~ 1918년 1월 6일)는 러시아에서 태어난 독일의 수학자이다. 무한 집합에 대한 연구로 현대 수학의 기반이 되는 기초적 집합론을 창시하였다. 생애. 유년. 1845년 3월 3일 (율리우스력 2월 19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독일인 가족에게 태어났다. 칸토어는 6명의 자녀 가운데 맏이었다. 아버지는 주식 투자가였고, 외할아버지 프란츠 뵘()은 러시아 제국 오케스트라의 단원이었다. 칸토어 가족은 1856년 칸토어가 11세 되었을 때 아버지의 병으로 인하여 러시아의 겨울을 피해 독일 비스바덴으로 이사하였고, 그 뒤 곧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이사하였다. 칸토어는 1860년 다름슈타트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1862년에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863년에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전학하여 레오폴트 크로네커와 카를 바이어슈트라스, 에른스트 쿠머 등의 강의를 수강하였다. 1866년 여름은 괴팅겐 대학교에서 보냈다. 1867년에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수론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869년에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하빌리타치온을 수여받았고, 연구원()이 되었다. 성년. 1872년에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조교수가 되었고, 1874년에 발리 구트만(Vally Guttmann)과 결혼하여 총 6명의 자녀를 두었다. 1879년에 34세의 나이에 정교수로 승진하였다. 칸토어는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이전하려 하였으나, 베를린의 레오폴트 크로네커는 칸토어를 매우 싫어하였으므로 이는 무산되었다. 크로네커는 수학의 구성주의를 지향하였는데, 칸토어의 집합론은 구성주의와 철학적으로 정반대되었기 때문이었다. 1881년에 칸토어는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 교수직을 리하르트 데데킨트에게 수여하려 하였으나 데데킨트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후 칸토어와 데데킨트는 1882년에 모든 서신을 중단하게 되었다. 칸토어는 예스타 미타그레플레르와도 서신을 교환하였으나, 미타그레플레르는 1885년에 칸토어의 논문의 철학적 함의에 반감을 표의하였고, 이 때문에 칸토어와 미타그레플레르와의 관계 또한 중단되었다. 말년과 사망. 칸토어는 1884년에 여러 수학자들과 비판을 주고받다가 깊은 우울증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퇴원한 뒤 칸토어는 수학을 기피하고 철학과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문학에 광적인 관심을 보였다. 그는 특히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들이 사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이라는 가설에 매우 집착하였으며 수시로 관련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후 회복한 칸토어는 1891년에 대각선 논법을 발표하기도 하였으나 신경증은 계속하여 재발하였고 1899년과 1903년에 다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할레 대학교는 칸토어가 정신병원에 입퇴원을 반복하는 와중에도 교수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의 병은 특히 말년에 심해져 여러 망상적인 주제에 집착하기에 이르렀는데, 그는 스스로를 신성한 임무를 가진 자로 여기고 (실제로 크로네커에게 공격받은 전력이 있지만) 다른 학자들이 자신을 중상모략하고 있다며 이상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1904년 쾨니그 줄러에 의해 칸토어의 집합론의 핵심 개념이었던 정렬 정리의 "반증"이 발표되자 (이후 오류가 발견되었지만) 칸토어는 큰 충격을 받아 '신의 존재를 의심'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칸토어는 이후 매 2~3년마다 입원을 반복하였다. 결국 1913년에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은퇴한 칸토어는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 시기 동안 궁핍과 영양 부족에 시달렸다. 1917년에 마지막으로 할레의 정신병원에 입원한 칸토어는 계속해서 아내에게 퇴원시켜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다가 1918년 1월 6일 심장마비로 병원 내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묘비에는 "수학의 본질은 그것이 갖는 자유로움에 있다(Das Wesen der Mathematik liegt in ihrer Freiheit)"는 그가 언급한 말이 쓰여 있다. 주요 업적. 칸토어는 무한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집합론의 기초를 세우는 데에 있어서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된다. 그는 집합 사이의 일대일 대응의 중요성을 확립하고, 집합의 크기에 대한 연구로 무한 집합과 정렬 집합을 정의하였다. 칸토어는 무한 집합끼리도 그 크기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대각선 논법을 통해 자연수보다 실수의 개수가 더 많음을 증명하였다. 또한 칸토어의 정리는 집합과 멱집합 사이에 일대일대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무한의 무한성"의 존재를 암시한다. 초한수에 관한 칸토어의 이론은 당대 유명한 수학자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으나, 현대의 대다수 수학자들은 그의 초한수에 대한 결과를 받아들이며 칸토어의 이론은 현대의 수학기초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다비트 힐베르트는 "아무도 우리를 칸토어가 만들어낸 낙원에서 쫓아낼 수 없다"(Aus dem Paradies, das Cantor uns geschaffen, soll uns niemand vertreiben können.)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연속체 가설을 고안하여 직관적으로 참이라 믿고 수년 간 그 증명에 힘을 쏟기도 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후 연속체가설은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 체계에서 반증과 증명이 불가능하여 독립적임이 각각 쿠르트 괴델과 폴 코언에 의해 증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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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틀로프 프레게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고틀로프 프레게( , 1848년 11월 8일 ~ 1925년 7월 26일)는 독일의 수리논리학자이자 철학자이다. 근대 수리철학과 분석철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생애. 1848년 11월 8일에, 당시 공식적으로 스웨덴-노르웨이 제국에 속해 있었지만 독일 통치 아래 있던 도시 비스마르()에서 태어났다. (비스마르는 1908년에 공식적으로 메클렌부르크에 반환되었다.) 비스마르의 김나지움을 1869년에 졸업하였고, 김나지움의 교사 구스타프 아돌프 레오 작세()는 프레게의 수학적 재능을 알아보고 예나 대학교에 입학할 것을 권고하였다. 프레게는 1869년에 예나 대학교에 입학하여 4학기를 공부하였고, 1871년에 괴팅겐 대학교로 전학하여 1873년 12월에 사영기하학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874년에 예나 대학교에서 하빌리타치온을 마치고, 예나에서 수학 개인 강사로 일했다. 1887년 3월 14일에 마르가레테 카타리나 소피아 아나 리제베르크(, 1856년 2월 15일 ~ 1904년 6월 25일)와 결혼하였다. 1879년에 예나 대학교의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1879년에 《개념 표기법: 순수 사고의 산술적 형식 언어의 모형》()을 출판하였고, 이 책에서 술어 논리를 최초로 도입하였다. 1884년에는 《산술의 기초: 수의 개념의 수리논리학적 탐구》()를 출판하여 수의 개념의 심리주의적 정의를 비판하였다. 1893년에 《개념 표기법으로부터 유도된 산술의 기본 법칙》() 1권을 출판하였고, 1896년에 예나 대학교의 정교수()로 승진하였다. 1903년에 《산술의 기본 법칙》2권을 출판하였다. 1917년 또는 1918년에 예나 대학교에서 은퇴하였다. 그는 말년에 들어 수학에 관한 활동을 거부하고 의회민주주의, 자유주의, 가톨릭교, 외국인 등을 비판하는 극단적인 글들을 저술하였다. 다만 일상생활에서는 이러한 정치적 성향을 드러낸 적이 없으며 오히려 외국인 동료들과 가까이 지내기도 하였다고도 전해진다. 1925년 7월 26일에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의 작은 마을 바트클라이넨()에서 사망하였다. 업적. 《개념 표기법》. 1879년에 출판된 책 《개념 표기법: 순수 사고의 산술적 형식 언어의 모형》()에서 프레게는 기존에 알려진 명제 논리를 술어 논리로 확장하였고, 명제 논리와 술어 논리를 표현하는 형식적 언어를 고안하였다. 프레게의 표기법은 다음과 같다. 버트런드 러셀의 기술 이론(theory of description)과 버트런드 러셀과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수학 원리》의 중요한 핵심이 되는 양화(quantification)가 바로 술어논리를 표현하기 위하여 고안한 프레게의 개념이다. 그의 업적은 당시에는 거의 인정받지 않았으나, 그의 생각에 영향을 받은 주세페 페아노, 버트런드 러셀 등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에드문트 후설도 프레게의 영향을 받았다. 《산술의 기본 법칙》. 프레게는 수학이 논리학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논리주의의 초기 주창자 중에 하나였다. 프레게는 1884년에 출판된 《산술의 기초: 수의 개념의 수리논리학적 탐구》()에서 기존의 심리주의적 수의 개념을 비판하였고, 수의 개념이 종합적() 개념이 아니라 해석적() 개념이라고 주장하였다. 《개념 표기법으로부터 유도된 산술의 기본 법칙》(, 1권 1893년, 2권 1903년)에서 프레게는 논리학으로부터 산술을 유도하려고 시도하였다. 1판이 출판된 뒤, 버트런드 러셀은 프레게의 공리계가 러셀의 역설을 함의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프레게는 이미 완성된 2권에 이 역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토하는 부록을 추가하였다. 언어철학. 프레게는 언어철학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고, 특히 고유명사의 뜻과 지시체() 사이의 차이에 관해 논의하였다. 주요 저서. 마지막 3편의 논문은 합쳐 《논리 연구》()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계획이었으나, 프레게 생전에 출판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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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프리드 히치콕
앨프리드 조지프 히치콕 경(, 통용 표기: 알프레드 히치콕, 1899년 8월 13일 ~ 1980년 4월 29일)은 영국과 미국의 영화 감독, 영화 제작자이다. ‘서스펜스의 대가’라는 칭송을 받고 있으며, 그의 영화는 공포 영화 장르가 많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죄 없는 사람들이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고 있으며, 이런 영화는 사소한 실수가 불러일으키는 것을 일깨우게 한다. 그는 감독 외에도 제작, 각본, 편집, 미술에 능하였다. 최초의 스타 감독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현기증》, 《싸이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이창》, 《오명》 등이 있다. 대부분의 그의 대표작들은 아카데미상을 한 번도 받지 못하였으며 그의 작품들 중에 작품상을 받은 작품은 《레베카》가 유일하다. 생애. 성장 과정. 히치콕은 1899년 농산물 가게를 운영하는 부부의 막내아들로 런던의 레이턴스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윌리엄(William)은 어부 출신의 야채상인 조지프(Joseph)와 일용직 노동자의 딸 앤 머호니(Anne Mahoney)의 9남매의 자식들 중 한 명이었고 어머니 에마(Emma)는 경찰관 존 웰런(John Whelan)의 딸이었다. 히치콕은 1910년부터 스탬퍼드힐()에 있는 예수회 소속 성 이그나티우스 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이 학교의 엄격한 규율과 그에 따른 체벌은 10대 시절의 히치콕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13년 학교를 마친 히치콕이 아직 뚜렷한 진로를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아버지 윌리엄이 1914년 신장염으로 사망했다. 히치콕은 전신회사에서 기술자로 일하게 되었으나 이 직업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상관의 도움으로 광고부로 이직한 히치콕은 영화와 문학에 심취했다. 주로 영국 탐정소설을 읽었지만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에 매료되어, 훗날 자신이 공포영화를 만들게 된 것은 포의 작품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술회했다. 영화계 입문. 히치콕은 영화사에서 자막을 도안하는 일을 하면서 영화계에 입문하였고, 그곳에서 영화 제작 기술을 익혔다. 1922년 히치콕은 시모어 힉스(Seymour Hicks)와 함께 공동으로 영화 《항상 부인에게 얘기하세요》(Always Tell Your Wife)를 감독했고, 본격적으로 영화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첫 작품 《기쁨의 정원》(The Pleasure Garden)과 두 번째 영화 《마운틴 이글》(The Mountain Eagle)은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평범한 일상 속에 갑작스럽게 악이 침투한다는 히치콕 특유의 설정을 바탕으로 한 세 번째 영화 《하숙인》(The Lodger)에 이르러서 히치콕은 자신의 독특한 연출 스타일을 탄생시켰다. 영국 영화계에서 주목받는 신인 감독으로 자리잡은 히치콕은 1926년 1월 2일 영화 편집자 앨마 리빌()과 결혼했고, 브리티시 인터내셔널 픽처스(British International Pictures)에 스카웃되었다. 이 회사에서 만든 첫 번째 영화 《링》(The Ring)은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이전의 영화들과는 달리, 히치콕과 엘리엇 스태너드()가 시나리오를 집필했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실험적인 기법이 도입되었다. 《링》은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으나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후 유성영화의 시대가 열리면서 히치콕은 연극 대본을 원작으로 하는 자신의 영화 《협박》(Blackmail)에서 부분적으로 소리를 집어넣었고, 이 영화는 평단과 관객 양쪽에서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히치콕은 영화제작사 측의 '무대에서 성공을 거둔 연극작품을 영화화하려는 경향'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부인 앨머와 밸 밸런타인()이 공동으로 시나리오를 집필한 《부자와 이방인》(Rich and Strange)과 히치콕 본인이 제작한 영화 《캠버 경의 여인들》(Lord Camber's Ladies)의 연이은 실패로 히치콕은 브리티시 인터내셔널 픽처스와 결별했다. 범죄 스릴러. 고먼트 브리티시(Gaumont-British) 사와 재계약한 히치콕은 자신이 바라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일련의 범죄 스릴러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다.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The Man Who Knew Too Much), 《39계단》, 《비밀 첩보원》(Secret Agent), 《사보타주》(Sabotage), 《젊음과 순수》(Young And Innocent) 등 히치콕의 영국에서 만든 영화 중 대표작들이 이 시기에 발표되었다. 미국 진출. 30년대 후반 히치콕은 미국 진출을 결정지었고, 1938년 7월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인 미국의 제작자 마이런 셀즈닉(Myron Selznick)의 동생 데이비드 O. 셀즈닉과 계약했다. 감독들에게 일일이 세세한 부분까지 지시를 내리는 셀즈닉과의 공동 작업은 곧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치콕의 할리우드에서의 첫 영화 《레베카》는 아카데미상 작품상, 촬영상을 받으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히치콕은 자신의 장기인 서스펜스 영화 《의혹》(Suspicion), 《의혹의 그림자》 외에도 코미디 《스미스 부부》(Mr. & Mrs. Smith), 첩보 영화 《파괴 공작원》(Saboteur) 등 제작자 측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영화를 만들었다. 《패러딘 부인의 사랑》(The Paradine Case)을 끝으로 히치콕은 셀즈윅을 떠났다. 영화사 설립. 제작자로부터 독립해 자신의 영화 제작사 트랜스애틀랜틱 픽처스(Transatlantic Pictures)를 세운 히치콕은 첫 컬러 영화 《로프》(Rope)를 발표했고, 이어서 《염소자리 아래서》(Under Capricorn)를 만들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영화사는 문을 닫았고 인기 배우를 기용하여 제작한 다음 작품 《무대 공포증》(Stage Fright)도 실패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히치콕은 주식과 부동산 투자, 각종 방송과 강의에 출연함으로써 부와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히치콕은 신인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의 판권을 사들여 영화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을 만들어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 이 즈음부터 히치콕은 《다이얼 M을 돌려라》, 《이창》, 《현기증》,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싸이코》, 《새》 등 그의 대표작들을 발표했다. 이후에 발표한 《찢어진 커튼》(Torn Curtain), 《토파즈》(Topaz)는 이전만큼의 좋은 결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히치콕은 일흔을 넘긴 나이에 다시 메가폰을 잡고 1972년 《프렌지》(Frenzy)를 발표해 흥행했다. 평소 과체중에 음주가 잦았던 히치콕은 점차 건강이 악화되었고, 자신의 마지막 영화 《가족 음모》(Family Plot)를 발표했다. 그는 차기작을 준비할 생각이었으나 더 이상 기력이 남아있지 않다는 걸 깨닫고 영화일에서 은퇴했다. 1980년 4월 16일 미국 영화연구소 시상식에서 한 연설이 그가 마지막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장면이었다. 같은 해 4월 29일 히치콕은 로스앤젤레스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영화 기법. 맥거핀. 히치콕의 영화에는 맥거핀이라는 요소가 자주 등장한다. 맥거핀이란 영화의 플롯 진행에 있어서 특정한 내용이나 인물에 관해 관객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내용상 무언가 중요한것임을 암시하지만 실상은 플롯의 진행에 있어 아무런 관련성도 없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히치콕은 맥거핀을 관객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하나의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트뤼포는 히치콕에서 맥거핀에 대해 질문했고 이에 대해 히치콕이 든 예는 오명에서의 와인병이었다. 히치콕은 맥거핀이란 관객과 등장인물들의 관심을 끄는 그 무엇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레이터인 감독의 관심 밖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와인병에 든 우라늄 가루’는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설명을 덧붙인다. 맥거핀에 대한 일화로 히치콕은 트뤼포에게 《오명》(Notorious)의 일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히치콕은 제작자들을 상대로 맥거핀이 되는 우라늄 가루에 대해 설득하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고 성토했다. 프로듀서들은 원자폭탄을 만드는 물질이 왜 사랑이야기에 들어가야 하는지 전혀 납득하지 못했다. 결국 《오명》의 시나리오는 대부분의 프로듀서들로부터 거절됐고 히치콕은 이 영화의 제작과 맥거핀을 고집하기 위해 스스로 나서서 제작비를 충원했다. 맥거핀에 대한 히치콕의 신념은 확고했다. 맥거핀은 관객이 중심이 되는 히치콕의 영화에서 관객을 통제하는 장치였다. 따라서 극의 서스펜스를 위해서 맥거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에서 첩보활동을 위해 나치 비밀조직의 수장 알렉스 세바스찬과 결혼까지 불사한 알리시아는 안주인으로서 세바스찬의 집으로 들어가 살게 된다. 그녀는 저택의 거실 장식장에 있던 와인병 하나를 두고 나치 조직원들끼리 냉랭한 기류가 형성되는 것을 눈치챈다. 이 와인병은 그들 사이에서도 일급비밀인 중대한 것으로 보인다.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데블린은 알리시아와 함께 와인창고로 들어가기로 한다. 그는 알리시아에게 세바스찬이 결혼 축하파티를 열도록 청하라고 종용한다. 파티 당일, 세바스찬의 결혼기념 파티에 초대되어 온 데블린은 알리시아와 함께 지하창고에 잠입해 와인병을 찾는다. 그는 실수로 와인병 하나를 깨뜨리고 안에 들어있던 검은 색 모래입자들은 바닥에 쏟아진다. 숨막힐 듯 조여오는 서스펜스의 순간. 두 사람이 우라늄 가루와 병조각의 흔적을 치우는 동안 세바스찬은 하인을 데리고 파티에 쓸 술을 가지러 지하창고로 내려간다. 이 일로 세바스찬은 알리시아가 나치조직의 비밀을 캐기 위해 위장 결혼한 미국의스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어머니에게 아내의 처분을 두고 의논하고 결국 두 사람은 작당해서 알리시아를 독살하기로 한다. 이렇게 검은색 가루가 든 와인병은 사건이 진행되는 모터의 역할을 한다. 관객에게 관심사는 데블린과 알리시아의 불가능해보이는 사랑의 감정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있다. 관객은 와인병에 호기심을 기울이게 되고 나중에 와인병이 깨져 버리면서 사건은 더 발전하지만, 중요한 점은 관객은 더 이상 와인병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된다. 와인병은 깨어져 관심을 끈 순간, 그것으로 본래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원자폭탄을 제조하는 데 꼭 필요한 우라늄 입자가 든 와인병’ 은 나치의 구체적인 계획과 미국의 첩보활동이라는 서브 테마에 관심을 두게 유도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와인병은 이야기를 진전시키고 중간에 사라져버리는 맥거핀이라 할 수 있다. 1958년에 만들어져 큰 성공을 거둔 작품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서 맥거핀은 두 가지가 있다. 그것들은 관객과 등장인물들의 주의를 끄는 사람과 사물로 나타난다. 주인공 로저 O. 쏜힐(캐리 그란트)은 악당들로부터 아무 잘못없이 캐플란으로 오인이 되어버린다. 쏜힐은 캐플란이 과연 누구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유엔빌딩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살인누명까지 쓰게 되고 도주자 신분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는 미국을 횡단하며 갖은 모험을 겪게 된다. 그런데 쏜힐의 도주라는 사건의 발단이 되는 ‘캐플란’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 조직내에서 일명 ‘교수’라 불리는 CIA 요원은 회의중 반담이라는 악당의 조직에 잠입시킨 요원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지어낸 인물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캐플란이 맥거핀이었다는 사실은 영화 시작 45분이 경과한 후 간단하게 밝혀진다. 관객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는 쏜힐이 캐플란을 만나기 위해 기차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 서스펜스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기차안에서 만난 이브 캔달이라는 묘령의 여인의 도움을 받아 경찰과 반담무리들의 눈을 속인다. 이브는 쏜힐에게 캐플란의 전언이라면서 황야 한 가운데로 가서 기다리라고 한다. 그러면 캐플란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캐플란을 쏜힐은 결코 만날 수 없다. 이 영화에서 사용된 또 하나의 맥거핀은 손에 들 수 있는 작은 고대 조각상이다. 이것은 이브가 반담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빼앗아서 도주하는 물건으로 나온다. 하지만 반담이 경매장에서 낙찰받은 고가의 유물로만 나올 뿐, 구체적으로는 언급되지 않는다. 러쉬모어산으로 도주한 이브와 쏜힐은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까지도 조각상을 악당들에게 넘겨 주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조각상이 땅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 관객은 그 안에 마이크로 필름조각이 들어있는 것을 보지만 그것은 잠시 화면에 잡힐 뿐이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것이 기밀정보를 담은 것이라는 암시에 그칠 뿐 그 내용에 대해서 히치콕은 영화에서 전혀 다루지 않는다. 쏜힐은 이브를, 이브는 이 조각상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다는 사실 자체는 서스펜스를 낚는 미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카메오 출연. 히치콕의 영화는 또한 감독 자신이 영화 속 어딘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유명하며, 그것을 찾는 것 또한 한 재미가 된다. 영화의 등장방법은 지나가는 행인등이나 때로는 영화속 신문기사에 등장하기도 한다. TV드라마 사회. 히치콕 감독은 《히치콕 극장》시리즈(, 1955년-1961년)의 사회,작품의 원작과 주제선정,감수를 맡았는데, 이 프로그램은 1958년 그 해의 최고 방송 시리즈로서 골든 글로브상을 받았다. 후에 드라마의 인기가 높아지자 1961년부터 방영 시간이 30분에서 한시간으로 늘어났다. 제목도 《Alfred Hitchcock Hour》로 바뀌었다. 영화업계가 새로운 매체인 TV와의 경쟁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 히치콕은 TV시리즈에 출연함으로써 자신의 인기를 높였고 이름을 알렸다. 추리소설 잡지 창간. 히치콕 감독은 1956년 12월 추리소설 잡지 《앨프리드 히치콕 미스터리 매거진》()를 창간하였다(실제로 히치콕 감독은 잡지의 편집 등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으며 단순히 이름과 초상권을 대여해준 것 뿐이었지만 이 잡지로 인해 그는 연간 10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초기에는 콘텐츠가 평범해서 금방 사라질 것으로 보았으나, 우수작가들의 참여로 콘텐츠의 수준이 높아지고, 대중들에게 작품성을 인정받으면서 꾸준히 간행되고 있다. 1997년에는 코지(Cozy)장르(한정된 공간에서 범죄가 벌어지는 설정의 미국 추리소설장르, 하드보일드에 상대되는 용어)의 《누가 머피 부인의 차우더에 독을 넣었는가?》()를 선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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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 , , 1878년 12월 18일 ~ 1953년 3월 5일)은 러시아의 정치가, 공산주의 혁명가, 노동운동가이자 소비에트 연방의 군인·정치인·작가·시인ㆍ언론인이다. 스탈린은 1923년 4월 30일부터 1924년 1월 21일까지 소비에트 연방 레닌 시대의 제2인자 겸 실권자였으며 1924년 1월 21일부터 1953년 3월 5일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 권력자였다.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조지아 출신으로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를 꿈꿨으나, 공산주의 혁명 사상에 감화되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고, 공산주의 운동가·노동운동가가 되었다. 1924년 4월 3일부터 1953년 3월 5일까지는 소비에트 연방의 서기장을 지냈다. 1941년 5월 6일부터 1945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총리를 지내고 1945년 다시 총리에 재선되었으며, 1941년 7월 19일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국방상을 겸하였다. 1945년 6월 27일부터 1953년 3월 5일까지는 소련군 대원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인 1939년에는 나치 독일과의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독일이 1941년 침공하여 발발한 독소전쟁 초기에는 제대로 된 군사정책을 발휘하지 못하여 수도인 모스크바까지 위협받았으나, 모스크바 공방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를 계기로 전세를 역전시켜, 결국 나치 독일군의 항복과 함께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철저한 정적 숙청과 동지들마저 반혁명 혐의로 숙청하여 그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경제발전과 계속된 승전 등의 성과를 바탕으로 철저히 우상화되었으나 죽음 이후,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강력한 비판을 받고 격하당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에는 공산주의의 변질과 정적 숙청을 자행한 독재자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소련 붕괴 이후 사람들이 삶이 어려워지고 국가 위상이 곤두박침에 따라 스탈린을 그리워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집권 이전에는 '선생님'이라는 애칭이 있었으나, 집권기간 중 스탈린은 '만능의 천재', '빛나는 태양', '삶의 지주', '위대한 조직자', '위대한 지도자', '위대한 선생이며 친구'로써 찬양을 받았고, 한때는 러시아 정교회의 부주교로부터 공공연히 '우리의 아버지'로도 불렸다. 사후에는 공산주의를 변질시킨 독재자로 재평가받고 '조지아의 인간 백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의 수많은 가명 중 하나인 '스탈린'이라는 가명은 '강철'을 뜻하며, 트빌리시 신학교 시절의 필명으로 쓰던 것이 굳어져서 본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스탈린의 본래 이름은 조지아어로 이오세브 베사리오니스 제 주가슈빌리(, )이며, 소소()는 그의 초명인 동시에 애칭이었다. 생애. 초기 생애. 출생과 가정 배경. 스탈린은 1878년 12월 18일 당시 러시아 제국의 일부이던 조지아의 고리에서 구두 제화공과 신기료 장사를 하던 아버지 베사리온 주가슈빌리()와 재봉사이던 어머니 에카테리네 겔라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스탈린 전기의 저자인 로버트 서비스에 따르면 1938년 소련에서 출판 된 스탈린 전기는 그의 생애를 1879년 12월 21일로 표기해 놓고 있으나, 그가 그루지야에 가서 지역 교구의 문서를 확인해 본 결과 그의 출생일은 1878년 12월 18일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알콜중독자에 술주정꾼인 아버지 베사리온을 두었던 그는 어린 시절 무자비한 구타, 폭행을 겪으며 자랐다. 아버지 베사리온은 불같은 성격이었으며 경제적으로 무능력하였다. 베사리온은 구두 장사가 잘되지 않자 알콜중독에 걸려 계속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어머니 에카테리네는 아버지 베사리온에게 수시로 폭행당했는데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는 것을 보고 분개한 스탈린은 아버지에게 대들며 칼을 던졌다고 딸 스베틀라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이후 아버지의 보복을 두려워 겁을 먹었던 스탈린은 아버지의 화가 풀릴 때까지 이웃집에서 머물렀다. 유년기. 7살(1886)에 그는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러나 천연두를 손과 바늘로 짠 탓에 그의 얼굴은 곰보가 되었다. 후에 소련의 사진들은 스탈린의 천연두 자국을 모두 편집, 삭제하였다. 기억력이 좋고 영민했던 그는 독서와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체력이 강했다 하나 약체에 발육부진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엄청난 의지력을 가졌던 그는 일찍부터 본심을 감추고 때를 기다리는 법을 터득했다. 또한 피의 복수를 하는 캅카스인의 전통대로 자기를 모욕한 자들에 대한 장기적인 복수를 꾀하는 데 있어 아무에게도 꺾이지 않을 집념을 키워 나갔다. 아버지를 경멸하고 증오했던 그는 주변의 친구들과도 원만하게 어울리지 못했다. 오직 독서만이 그의 외로움을 달래는 길이었는데,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 신자였던 어머니는 아들이 성직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신앙심 깊고 영리한 스탈린은 어머니의 기대와 바람대로 10살(1889) 때 교회 소학교에 입학했다. 학창 시절. 교회소학교 시절. 스탈린은 일찍부터 어려운 환경에서 생활하였다. 1888년(9살) 그는 교회 소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구두공장에 취직한 아버지가 어린 스탈린을 강제로 구두공장에 취직시켜 돈을 벌게 하였다. 어머니는 지역 유지들을 찾아다니며 호소하여 구두 공장에 찾아가 아들을 되찾아왔다. 어머니의 기대와 노력 덕에 스탈린은 성직자 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었다. 당시 러시아 교회 학교들은 조지아 민족들에게 러시아인이 되는 교육을 강요하였다. 스탈린은 교육 과정과 수업 내용에 대해 강한 반발과 교사들, 제도에 대한 반항심을 갖게 되었다. 12살(1891)에 2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에 치이는 교통사고를 당하였다.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이후 스탈린은 왼쪽 팔이 영구히 불구가 되었고, 청년기 때는 병역도 면제될 정도였다. 발육부진으로 키는 160cm를 약간 넘었다. 스탈린은 고리 시내에 있는 교회학교에서 러시아어를 배웠고 외부에서는 러시아어를 사용했다. 그의 러시아어는 약간 불완전하여 항상 후음성의 조지아어 액센트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집에서는 조지아어만을 사용하였다. 1894년(15살) 초 스탈린은 최고 성적으로 종교학교를 졸업하였다. 티플리스 신학교 시절. 1894년 15살에 그는 장학금을 받고 조지아의 트빌리시에 소재한 트빌리시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트빌리시 신학교는 조지아 정교회에서 운영하는 신학교였다. 트빌리시 신학교에서 스탈린은 성직자 교과목 외에 문학과 역사, 라틴어, 수학, 그리스어 등 폭넓은 교육을 받았고, 성적은 우수하였다. 트빌리시 신학교 1학년 재학 중 스탈린은 지역 신문에 시를 발표했는데, 그루지아 문인들과 지역 유지들을 감동시켜 격찬을 받았다. 그가 시에서 다룬 주제는 대지와 자연, 민족정신 등이었다. 신학교 2학년 이후 그는 조지아를 지배하고 있는 러시아에 반감을 가지고 민족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 러시아인을 만드는 교육을 강요하는 스승들과 마찰이 잦았다. 하지만 카를 마르크스, 플레하노프, 블라디미르 레닌 등의 공산주의 서적을 접하면서 종교와 민족보다는 마르크스주의를 중시하게 되었다. 동시에 제국주의와 종교적 질서에 대한 혁명을 꿈꾸게 되었다. 가정 환경이 어려웠음에도 재학 중 성적이 우수하여 장학금을 받았다. 신학교 성적은 좋은 편이었으나, 재학 중 그는 국제 공산주의의 최고 이론가인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등이 쓴 저서와 다른 금서들을 비밀리에 탐독하다가 신학교에서 그는 불량 학생으로 낙인찍혔고 비밀 결사조직인 '메사메 다시()'에 가담하기도 했다. 신학교 졸업 전 해인 1899년 말 스탈린은 기말고사 시험을 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티플리스 신학교에서 퇴학당했다. 당시 신학교의 문서에는 그가 수업료를 낼 수 없어서 퇴학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그가 마르크스주의에서 세계를 다르게 해석하는 방식을 발견하여 미련 없이 성직자의 길을 포기하고 혁명가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혁명 활동을 하다가 퇴학 처분을 당하였으나, 아들을 끔찍하게 사랑했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몸이 쇠약해져 중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사제가 되기를 바랐으나 혁명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어머니의 뜻을 저버렸다. 신학교를 떠난 직후 스탈린은 레닌의 저작과 관련 서적들을 폭넓게 읽었고 마르크스주의 혁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노동활동과 혁명에 투신. 1899년 12월 스탈린은 트빌리시 천문대에 채용되어 천문대 서기로 수개월간 근무했다. 트빌리시 천문대의 공무원은 그가 정치 이외의 분야에서 월급을 받고 일한 유일한 직업이라 한다. 그가 육체 노동은 전혀 한 적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조지아의 유대인 재벌인 로스차일드 일가가 소유한 정유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1900년(21세) 지하 정치운동에 가담하고, 지하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00년부터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며 그는 캅카스 지방의 주요 공단 지대에서 노동자의 시위와 파업을 선동했으며, 탁월한 언변으로 노동자들을 시위에 앞세웠다. 하지만 스탈린 자신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노동자들을 시위에 앞세워 경찰과 유혈 충돌을 벌이게 하는 데 지나치게 열성을 보이면서 동료 공산주의 혁명가들로부터 반감을 사기도 했다. 그는 인간을 도구로 이용하려 든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제국 정부의 탄압으로 이러한 비난은 조직 내부의 단결을 저해한다는 논리로 대응한다. 이후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 혁명당인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였고, 그가 존경하고 탐독하던 블라디미르 레닌을 만났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당이 멘셰비키파와 볼셰비키파로 분당하게 되자, 스탈린은 보다 혁명운동에 보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이었던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이후 러시아 제국의 비밀경찰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1902년 4월(23세)부터 1903년 3월(24세)까지 스탈린은 혁명 활동을 하다가 7번 체포되어 투옥과 추방을 되풀이했다. 1902년에서 1903년 무렵 연인 에카테리네 스바니제()를 만났는데, 스바니제는 러시아 육군 군복제조사 미싱공으로 일하였다. 시짓기와 작문 재주가 탁월했던 스탈린은 연인에게 잘 보이려고 노래를 부르고 시도 읊었다고 한다. 1903년 레닌이 이끌던 볼셰비키당에 정식으로 입당했고, 곧 차르의 비밀경찰의 추격을 받았다. 혁명활동. 볼셰비키 지도자. 1903년말 스탈린은 캅카스 지역 볼셰비키의 주요 인물이 되었으며, 전업혁명가로서 여러 비합법적인 혁명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런 활동에는 파업 선동, 정부 비판, 사회 부조리 지적, 민병 조직, 민중 선동뿐 아니라 자금확보를 위한 은행강도, 반대파 요인 암살, 테러, 몸값 납치 같은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1905년 핀란드 탐페레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정책 결정 회의에 참석하였고, 이후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정책 결정 회의에는 한번도 빠지지 않고 꾸준히 참석했지만 회의에서 강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1905년 무렵 스탈린은 조지아 볼셰비키의 지도자가 되었다. 조지아 볼셰비키의 지도자가 된 그는 열정적으로 글을 쓰고, 논쟁하고, 각종 시민사회 단체들을 조직하였다. 1905년 그는 동료에게 은신처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고 거기에서 첫사랑 에카테리네 스바니제(애칭은 카토)를 다시 만났다. 1906년 스톡홀름 회의에 참석했다. 스바니제와의 꾸준한 교제 결과 스바니제의 마음을 움직여 1906년 7월 스탈린은 스바니제와 결혼하였고, 후에 아들 야코프를 얻었다. 신혼여행도 없고 미래도 불투명했지만 마냥 행복했다. 스탈린의 한 혁명 동료는 신혼 초기의 스탈린에 대해 “혁명에만 몰두하던 그가 아내에게만은 부드럽고 세심하다는 사실에 놀라곤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가난과 외로움으로 고생했던 예카테리나는 결국 병이 들어 사망했다. 아내 카토가 고생하며 늘 그가 경찰에 붙잡히지 않기만 기도한 것을 전해들은 그는 크게 상심하였다. 그는 "첫 아내의 죽음 이후로 나는 모든 인간성을 버렸다."란 말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곧 1907년 스탈린은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정책 결정 회의에 참석했다. 조직 확장 노력. 그는 볼셰비키 조직 확장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이른 새벽부터 자정까지 인쇄물과 홍보 팜플렛을 다량으로 인쇄하여 도심에 뿌리고, 각지를 다니며 홍보와 연설, 강연 등을 통해 볼셰비키가 민중을 구제하기 위한 집단임을 선전했다. 이는 비가 오거나, 대량 폭설로 교통이 막히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러시아 각지를 순행하는 것으로 열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선전, 홍보 등으로 인력과 조직을 끌어모으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1907년 6월 25일(음력으로는 6월 12일) 스탈린은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티플리스 시내에서 대규모의 수송방해작전을 획책 하는 데 기여했다. 은행 강탈은 성공하여 대량의 현금을 확보했고, 며칠 뒤 가족을 이끌고 아제르바이잔 바쿠로 피신했다. 1903년부터 그가 시베리아로 망명하던 1913년까지 스탈린은 볼셰비키 세력 확장을 위해 노력했다. 전국에 지하당을 조직하고 당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담한 강도 행각도 서슴지 않았다. 계속 성공에 성공을 거듭한 스탈린의 은행강도 행각은 농촌과 중소 도시 은행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의 대도심의 대형 은행과 현금 수송 차량까지도 성공적으로 탈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여러 번 체포되었는데, 그때마다 탈출에 성공해 전제 러시아의 비밀경찰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호송 차량에서 뛰어내려 도망치기도 했고, 경찰과 격투를 벌여 때려눕히고 도주하기도 했다. 스탈린의 현상금을 내걸은 포스터가 걸리기도 했지만 역시 그는 체포되지 않고 각처를 은신해 다녔다. 첫 아내와 사별, 성격의 변화. 첫 아내 스바니제와의 비극적인 사별은 스탈린의 냉혹하고 난폭한 성격을 한층 더 강화시켰으리라 추정된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이 정치 자금 확보를 위한 은행 강도를 금지하자, 스탈린은 이에 항의하여 잠시 사임하였다. 이후 현금수송차에 대한 대규모 강탈을 지휘하였는데, 이때 40여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스탈린은 다시 바쿠로 도피했는데, 여기서 1908년 12월 부인 스바니제가 발진티푸스에 걸려 사망하였다. 냉혹한 혁명가가 되기 전 그는 매력적이고 유머 감각이 뛰어난 청년이었다. 에카테리네 스바니제에게 잘 보이려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고 시도 읊었다. 바보 연기로 주변을 웃기기도 했다. 결혼한 지 16개월 만에 아내 스바니제가 트빌리시에서 발진티푸스로 숨지고 말았다.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스탈린은 급히 아내에게 달려왔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숨을 거뒀다. 스탈린은 아내의 눈을 감겨준 뒤 끌어안고 오열하다가 결국 실신했다. 그는 직접 관을 준비해 아내의 장례를 치렀다. 어머니 겔라제의 일기에는 스탈린은 아내의 장례식이 있던 날 그 자리에서 오열하다 실신했다고 한다. 첫 아내인 스바니제의 비극적인 죽음은 스탈린의 냉혹한 성격을 더욱 강화시켰다. 스탈린은 술에 취하면 곧잘 병중인 스바니제를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을 동료들에게 곧잘 털어놓기도 했다. 그녀가 죽자 스탈린은 심히 오열했는데 어머니 겔라제 역시 그가 그렇게 슬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는 내용을 자신의 일기에 기록해두기도 했다. 스바니제가 남긴 유일한 혈육인 야코프는 1920년대 말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했는데, 스탈린은 그를 약골이라고 부르면서 경멸하였다. 스바니제를 잃고, 바쿠에서 체류하며 스탈린은 아제르바이잔인과 페르시아인 무슬림, 수백명의 흑인들까지 포섭, 게릴라 단체를 조직하여 파르티잔 운동을 시작했고, 노동자 파업과 각종 집회, 선전 선동을 기획하였으며 많은 수의 러시아 차르의 지지자들을 살해하는 등 파르티잔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몸값 납치, 강도, '보호료' 뜯기, 위조 화폐 제작 등의 범죄적인 활동으로 자금을 확보하였다. 체포와 피신, 언론 활동. 스탈린은 결국 경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에 7번이나 추방되지만 마지막 세 번을 제외하면 그때마다 탈출하였다. 그러나 그가 받은 형량 선고가 가벼운 데다가 번번이 쉽게 은신하고 도피했기 때문에, 동료 공산주의혁명가들로부터 '제국경찰의 보수를 받는 프락치'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1912년 2월 당시 러시아 국외에 체류중이던 레닌이 멘셰비키파와 최종적으로 결별한 볼셰비키당을 조직하면서, 제1차 중앙위원회에 그를 신입 위원으로 선출하였다.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그는 볼셰비키당 내에서 주목받게 되었다. 1912년 4월 스탈린은 풀려나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와서 잡지 프라우다를 창간하였다. 평소 과묵하고 그다지 말주변이 없는 스탈린은 당의 공식 신문인 프라우다의 초대 편집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강철의 인간'이라는 뜻인 "스탈린" {스탈(стал)은 러시아어로 강철을 뜻한다. 쿠르스크 전투에서의 반격 암호로 쓰이기도 했다.}이라는 가명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 이름으로 당의 출판물에 기고하고, 언론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제국 경찰의 체포령이 떨어졌을 때 기민한 피신과 체포 뒤에도 성공적으로 탈출하는 것에 대한 당내 첩자 의혹, 제국 비밀경찰 의혹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런 의혹 속에서도 레닌은 1912년 스탈린을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서 활동하도록 승격시켰다. 레닌의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의 후광 덕에 스탈린에 대한 각종 의혹은 해소되거나 서서히 묻혀져갔다. 그러나 뒤에 레닌은 임종 직전 자신의 스탈린 후원을 크게 후회하였다 한다. 스탈린은 프라우다를 간행하면서 각종 학술 용어 보다는 지역과 하층민들이 두루 읽을 수 있도록 비전문 용어와 지역지부에서 간행되는 신문에는 지역 방언의 활용 등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의 마케팅 효과는 성공을 거두어 프라우다의 구독, 배달은 타타르와 중앙아시아까지 확장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스탈린은 징병대상자가 되지만, 12세 때 당한 교통사고로 인한 왼쪽 팔의 장애 때문에 병역 면제되었다. 정치 활동. 망명과 귀국. 1913년 스탈린은 시베리아로 망명하였으며, 이후 각지를 전전했다. 이 기간 중 그는 황실과 귀족에 대한 적개심과 원한을 키워나갔다. 1917년 3월 니콜라이 2세가 제위에서 퇴위된 후에야 러시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17년 2월 혁명이 벌어져 제정이 무너지고 케렌스키의 임시정부가 출범하였다. 당시 스탈린은 차르 니콜라이 2세를 비롯한 황제의 가족은 물론 황족들을 사형에 처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차르와 그 가족의 처형에는 일부 공감하였으나, 귀족과 황족까지 처형하는 것을 놓고는 케렌스키의 임시정부, 그리고 볼셰비키에서 조차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를 망설이며 주저하였다. 3월 초 스탈린은 처음에는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이를 반대하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알렉산드르 실랴프니코프를 프라우다의 편집에서 추방하였다. 그러나 곧 4월의 당 회의에서 레닌의 견해를 듣고 그의 '4월 테제'를 재빨리 지지하였고, 입장을 바꾸어 임시정부를 전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볼셰비키 당원 중 앞장서서 혁명으로서 임시정부를 접수하고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하였으나, 블라디미르 레닌은 아직 때가 아니라며 서서히 장악하자며 만류하였다. 10월 혁명과 공산주의 국가 수립. 1917년 4월에 스탈린은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때 임시정부에 의해 체포령이 내린 레닌이 해외로 도피하는 것을 돕기도 하고, 유혈극을 피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포위된 볼셰비키 당원들에게 항복할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레닌은 핀란드로 피신시키고 스탈린은 혁명의 혼란기에 일시적으로 숨어 있었다. 1917년 3월 25일 시베리아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온 스탈린은 프라우다의 편집 책임을 다시 맡았다. 스탈린은 레닌이 없는 볼셰비키 당을 지도하면서 위태로운 순간을 넘겼으며, 불안정한 권력을 승계한 중산층 자유주의자들의 임시정부에 볼셰비키가 협조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레닌의 영향을 받아 스탈린은 임시정부에 대한 협조적 의사를 번복, 볼셰비키당이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보다 호전적인 생각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한편 스탈린은 제정의 압력을 피해 핀란드에 출국중이었던 레닌의 귀환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결국 돌아오게 하였다. 한편 10월 임시정부는 독일군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위협하자 체포되었던 볼셰비키 당원을 석방시켜 방위전에 참가시키려고 하였다. 볼셰비키는 이를 이용하여 임시정부를 전복할 혁명을 꾸몄다. 레닌, 레프 트로츠키, 스탈린을 비롯한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스모르니 학원에서 열린 회의에서 이를 가결하였고 11월 7일(율리우스력으로는 10월 25일) 케렌스키가 전선을 방문한 틈을 이용하여 실행에 옮겼다.(10월 혁명) 이는 별다른 희생 없이 성공했고, 11월 8일 임시정부 각료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1917년 11월 당시, 11월 혁명이 일어났을 때 스탈린은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했지만, 레프 트로츠키의 역할만큼 눈에 띄지 못했다. 트로츠키는 이후 그의 최대 라이벌로 성장했다. 내전 기간 중(1917-1919).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집권한 직후, 스탈린은 인민위원회 내무인민위원(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17년 인민위원회 인종문제담당 인민위원(인종문제담당 장관)을 겸임하였다. 곧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세력(하얀 군대)이 일어나 러시아 내전이 개시되었다. 레닌은 5명으로 구성된 볼셰비키당 정치국을 신설하였으며, 여기에는 스탈린과 트로츠키가 포함되어 있었다. 레닌은 스탈린을 볼가 강변의 차리친 시의 수비를 위해 보냈고, 1918년 5월 차리친에 도착했다. 스탈린은 붉은 군대의 유력 지휘관이었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세묜 부됸니와 친구가 되어 군사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당시 국방인민위원을 맡아 붉은 군대를 총지휘하고 있던 트로츠키의 정책에 자주 반대했다. 내전 중 스탈린을 포함한 붉은 군대 지도자들은 승리를 위해 잔인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작농을 협박하여 식량을 강탈하는가 하면 식량징발에 반발하는 마을을 불태우도록 했고, 서부 전선에서의 대량 탈영을 막기 위해 탈영자들을 공개처형할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1919년 스탈린은 국가정보통제담당 인민위원(보안담당 장관)에 임명되어, 인종 문제 담당 인민위원과 국가 정보 통제 담당 인민위원을 겸임하였다. 그해 스탈린은 옛 공산당 동료의 딸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Nadezhda Alliluyeva)와 재혼했다. 시를 짓는 재주가 있던 그는 평소 냉정한 합리주의자였으나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와 연애하면서 갑자기 낭만주의자, 낙천주의자로 변신하여 동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는데, 스탈린은 크렘린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소련-폴란드 전쟁(1920-1921). 소련 내전이 마무리될 무렵, 볼세비키는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 독립한 폴란드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폴란드-소비에트 연방 전쟁) 스탈린은 남부 전선의 사령관으로서 폴란드의 도시인 리보프를 향한 공세를 명령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레닌과 트로츠키는 더 북쪽에 있는 바르샤바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트로츠키는 바르샤바 전투에서 폴란드 지휘관 부아디스와프 시코르스키의 군대와 교전했다. 그러나 리보프에 있던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지원하는 것을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트로츠키와 스탈린 모두 후퇴하여 리보프와 바르샤바는 모두 점령하지 못했고, 스탈린은 비판에 직면하였다. 스탈린은 1920년 8월 모스크바로 돌아와 자신을 변호하고 군사지휘를 사임하였다. 9월 22일 제9차 당대회에서 트로츠키는 공개적으로 스탈린을 비판하였다. 1923년 인종문제담당 인민위원직과 국가통제인민위원직을 사퇴했다. 후에 스탈린은 1920년의 실패를 가져온 이들에게 철저히 복수했다. 그리하여 후에 자신을 비판한 트로츠키를 암살하고 1939년 나치와의 협정을 통한 폴란드 침공으로 르보프를 소련영토로 만들고 그때 포로로 잡은 폴란드 군 장교들을 대규모로 처형하였다.(카틴 숲의 학살). 후에 연합국의 수뇌부가 모인 얄타 회담에서도 리보프는 전후에도 반드시 소련영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전위대를 잘 조직했던 그는 트로츠키와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등 사적인 조직 업무에 관심이 없는 라이벌들의 헛점을 공격하며 당내 입지를 굳혀 나갔다. 1921년부터 소련의 국가 원수인 레닌이 병석에 누워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스탈린은 정책을 추진하면서 병든 레닌의 의사를 무시하고 능멸하였다. 레닌은 죽기 1년 전 스탈린을 서기장직에서 해임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유언'을 썼는데, 이는 레닌 사망 직후와 스탈린 자신의 사망 직후에 스탈린을 비판하기 위한 자료로 널리 선전되었다. 집권 기간.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의 폭력적 정치수단, 지나친 러시아주의 그리고 관료주의적 성향은 스승인 레닌에 의해 비판받기도 하였다. 레닌은 특히 그의 유명한 유언장에서 "스탈린에 최고 지도자 자리를 주지 말라."고 할 정도로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으나, 1924년에 이르러 이미 거의 모든 내부 정치 조직체는 스탈린의 지배권하에 들어갔다. '레닌의 유언'문서는 레닌이 친필로 직접 작성한 것이라 스탈린의 당내 지위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지만, 스탈린은 용의주도함 때문에 레닌의 유언을 은폐하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평가절하시킬 수 있었다. 1920년대 말에 스탈린은 레닌 이후 소련 공산당의 두뇌로써, 국제 공산주의 혁명을 주장하던 레온 트로츠키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했다. 1924년 1월 21일 레닌이 죽은 후 스탈린은 그를 성대한 장례식을 치른 뒤 준(準)비잔틴식으로 우상화했다. 레닌주의의 대제사장이 된 스탈린은 경쟁자들을 축출한 후 최고권력자로서의 입지를 굳혔고, 자신의 우상화도 함께 추진했다. 1925년 차리친 시를 스탈린그라드(지금의 볼고그라드)로 개명하였다. 경쟁자 이전에 견해가 달랐던 트로츠키와는 수시로 충돌했는데, 국적과 국경을 초월한 국제 노동자, 무산자 연대를 통해 전 세계의 공산주의화를 이룩해야 공산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는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에 맞서 그는 소련 단독으로도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고, 한 국가를 공산주의화 시킨다는 일국공산주의론을 확립했다.(스탈린주의 참조) 권력투쟁 과정에서 스탈린의 용의주도함과 치밀함을 간파하지 못한 트로츠키는 망명하였다. 한편 이론가 빅토르 세르주는 강화되어 가는 스탈린의 독재를 비난했다. 빅토르 세르주는 스탈린주의자들로부터 트로츠키파로 분류되기도 했다. 1928년 강화돼가는 스탈린의 독재를 비판한 이론가 빅토르 세르주를 공산당에서 출당하고 5년 뒤에는 투옥시켰다. 집권과 군부 장악. 집권 직후 스탈린이 집단화와 산업화, 중공업을 통한 경제발전을 선언하자 소비에트 연방 사회 일각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우파 자본주의 세력은 레닌의 죽음으로 혼란해진 틈을 타 공산주의 정권을 타도할 계획을 세운다. 정보원들을 통해 자본주의 세력의 움직임을 간파한 그는 우파 인사들의 집회장소를 급습하여 체포, 숙청한다. 또한 1924년부터 레닌의 유지 계승, 트로츠키파 지지자에 의한 스탈린 암살 비밀조직들이 비밀리에 조직됐다가 적발되면서 스탈린의 의심과 분노는 한층 극에 달하게 된다. 1925년 이후부터 반대파 인사에 대한 가혹한 숙청이 계속되었고, 1930년 이후에는 그의 반대파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또한 그는 소련군 내부의 장군급 인사를 단행한 뒤, 군 장군을 숙청한다. 특히 1937년 6월까지 비밀재판을 통해 투하체프스키와 스베친, 트리안다필로프를 비롯한 그의 동료들은 스탈린 체제에 위협하는 인물로 인식되어 숙청되었다. 이들은 모두 소련군의 군사전략가들이었는데, 이들의 숙청과 동시에 스탈린은 작전술에 대한 연구를 금지시켰다. 이들 소련군 초기 군사연구가들의 작전술은 스탈린이 죽고난 뒤에야 재개된다. 장군들을 숙청, 처형시킨 후 스탈린에게 충성을 맹세한 새로운 장교들을 장군으로 승진 발탁한다. 투하체프스키와 스베친, 트리안다필로프와 그의 동료들 등 소련군 초기 핵심 군사이론가들에 대한 처형과 숙청, 장군들에 대한 숙청 등은 그들이 만들고 연구했던 보고서와 군사이론서들까지도 반민중적 불온사상으로 규정되어 금서가 되었으며, 그들의 이론들은 토론과 적용조차 금지되었다. 그러나 핀란드 침공작전의 실패와 2차 대전 초기의 독일의 기습공격과 모스크바까지 패퇴하는 참담한 결과를 불러온다. 이들의 이론을 활용하지 못한 점이 패퇴의 원인이라는 견해가 나타나면서 기갑, 기계화 부대를 통한 작전술 이론의 필요성이 다시 제기되었으나 스탈린의 연구 금지와 의심으로 아무도 공식적으로는 이를 언급하지 못했다. 그는 중견 장교들과도 꾸준히 면담했는데, 이는 그들을 통해 장군들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1938년까지 대략 2백만 명 정도를 숙청했고, 이 중 20만 명 정도는 해외 유학파, 당 중앙위원과 현역, 예비역 군 장군, 기술관리들을 포함한 고급인력들이었다. 이후 그는 내부에서 적을 만들고 그 적을 숙청하여 권력을 공고히하고 측근과 군부의 충성심을 유도했다. 경제 개발 정책. 1928년 스탈린은 시장경제를 부분 수용했던 레닌의 준 자본주의적인 신경제정책을 버리고, 국가가 직접 기간산업을 관리하는 국영산업화 정책을 채택 하여 일련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 추진했다. 기간 산업을 국영화함과 동시에 경제 정책을 국가 주도로 통제하는 형태로 경제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스탈린은 농민들을 도시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도시로 떠나지 않던 농촌의 약 2,500만 세대가 2, 3년 내로 집단농장이나 국영농장에서 집단 생활을 하도록 강요당하였다. 이에 필사적으로 반발 저항하던 농민들은 소련군과 비밀경찰로부터 공격을 받고 체포, 사살되었다. '쿨라크'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이들, 스탈린의 경제개발 정책에 비협조적이던 농민들은 집회·시위를 벌였으나 경찰과 군대에 의해 체포되어 도시로 강제추방되거나 총살당하였으며, 일부는 수감자의 폭증으로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던 집단수용소에 수감되어 극심한 악조건 속에서 강제노동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레닌의 신경제 정책을 5개년 경제 개발 계획으로 대체해 산업화와 특히 농업 생산물의 공동생산 체제를 도입함으로써, 후에 공산주의의 한 취약점으로 꼽히게 되는 강제 노동 생산 즉, 생산성 없는 경제 활동의 첫 장을 열었다. 그러나 강제 산업화와 노동 생산은 제정 러시아 사회에서 가난과 억압을 받던 러시아 민중들에게 옛 소련의 산업화를 통한 부강한 나라 건설이라는 희망을 주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산업화와 근대화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한편 1932년 혁명 기념 만찬에 참석했다가 만취 상태로 공개 석상의 여러 사람 앞에서 후처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모멸감을 느낀 나데즈다는 바로 파티장을 뛰쳐나갔고, 그날 밤 스탈린의 인간적인 결점과 정치적 실패를 비판하는 서신을 남기고 자살했다. 두 번째 아내의 자살 이후 스탈린은 신혼 살림을 차렸던 아파트를 떠나, 크렘린의 다른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리고 다시는 그들이 함께 살았던 곳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나데즈다의 자살로 충격을 받은 그는 정치국 회의에서 정치국 위원직을 사퇴하려 했으나 정치국 위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만류로 번복하였다. 그러나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화되고 격무에 시달리자 그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폭력과 폭언을 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었고, 여성들을 가까이하기도 했다. 반면에 그의 딸 스베틀라나에게는 아들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편애를 하게 된다. 급격한 산업화와 함께 그는 당시 소련 국내 생산품의 사용을 유도하였고, 수입품 억제와 함께 수출산업 육성과 자국제품 수출 증대에 힘썼다. 그러나 산업화 과정에서 엄청난 실패와 기계 고장 등의 부작용들도 수반되었으며, 이는 반대파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고, 각종 시위에 직면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반발을 무마하고자 강경 진압을 하는 한편, 회사 간부·산업 관리인들을 비판, 규탄하고 그들의 경영 잘못으로 몰아 여론재판에 계속 회부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피고들은 겁에 질려 허위자백을 하고 희생됨으로써 그의 경제실책으로 야기된 재앙을 대신 짊어지는 희생양이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경제정책은 상당부분 효과를 거두어 수출력과 생산력을 향상시켰다. 1928년에서 194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강철은 5배, 전력은 8배, 시멘트는 2배, 석탄은 4배, 석유는 3배로 생산고가 늘어났고 철도를 포함한 수송수단은 4배로 늘어났다. 즉, 스탈린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들은 농업 중심의 후진국을 급속도로 근대화·산업화·도시화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며, 그는 소련 국내외에서 폭넓게 인정받았다. 스탈린의 잠재적 경쟁자이자 동지였던 아돌프 히틀러에게, 그리고 허버트 조지 웰스, 조지 버나드 쇼 등 유명 작가들과 예술인, 당대의 열광적인 외국인 목격자들에게도 널리 인정받았다. 뿐만 아니라 스탈린은 경제정책과 동시에 교육 분야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90% 이상이나 되던 소련의 문맹률이 교육 정책을 통하여 1%까지 감소하였고, 또 다른 지식층을 양성하였다. 한편 스탈린은 예술 공연에도 정책적으로 개입하였다. 1934년 1월 <레이디 맥베스>가 소련에 상륙, 초연과 함께 흥행을 거두었다. 스탈린은 1936년 <레이디 맥베스>를 직접 보러 극장을 찾았다가, 레이디 맥베스 관람 중 극중 노골적인 성적 묘사와 치정 살인 부분이 나오자 이를 불쾌히 여겨 1막이 끝나자 역정을 내면서 자리를 떴다. 며칠 뒤 소련의 최대 일간언론이자 당의 충실한 기관지인 <프라우다>에는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를 강하게 비난하는 글이 실렸고, <레이디 맥베스>는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상영금지조치되었다. 반 혁명 재판과 권력 강화(1936 ~ 1939). 그러나 성급한 산업화는 농업과 환경을 파괴하여 홀로도모르와 같은 재앙을 불렀고, 집단농장화로 성과 없는 농업생산에 회의적이던 농민들의 생산물 수는 감소했고, 우크라이나에는 대기근이 발생하여 식량사정을 악화시켰다. 하지만 스탈린은 기근 지역에 급송해야 할 식량을 계속 수출했다. 이 때문에 당과 군대 내에서 정치적 반대파가 많아졌다. 이때 대중적 인기를 가지고 있었던 레닌그라드시 지구당의 당서기였던 세르게이 키로프가 암살당하자, 이를 트로츠키의 음모로 선전하였고, 이른바 트로츠키주의자를 뿌리뽑는다는 명목하에 스탈린에게 도전했거나 도전할만한 자들에 대한 대숙청이 시작되었다. 스탈린이 이의 배후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1956년 제20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 당 제1서기가 스탈린 격하연설 도중 '스탈린 자신이 숙청을 단행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었다'고 암시한 바 있다. 이 숙청 작업을 담당한 곳은 내무인민위원회(NKVD)였으며, 당내는 물론 군부나 심지어는 내무인민위원회 내부에서도 숙청작업이 광범위하게 실시되었다. 군부에서는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원수를 비롯한 여러명의 장군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934년 12월 1일 스탈린에 맞먹을 만큼의 권력을 가졌던 세르게이 키로프가 암살당했는데, 키로프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의 권력과 인기가 높아짐을 두려워한 스탈린의 사주한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세르게이 키로프가 암살되자 이에 연루된 암살자 레오니드 니콜라예프와 옛 혁명 주역이던 지노비예프, 카메네프가 체포되어 고문당한 뒤, 재판정에 끌려나와 허위자백을 하고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총살당했다. 1934년 제17차 당 대회에서 뽑힌 중앙 위원과 후보 위원 139명 중 98명을 처형했고 17명을 강제 수용소로 쫓아냈으며 제17차 당 대회 대의원 1961명 중 무려 1108명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 1937년 1월과 1938년 3월 또다시 대규모의 마녀재판을 감행했는데 트로츠키를 따르던 31명의 사람을 처형하고 심지어 1936년과 1938년에는 이전에 숙청을 지휘했던 전직 내무인민위원장인 겐리흐 야고다와 니콜라이 예조프가 도리어 반혁명분자로 몰려 처형되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그가 자신을 암살하면 회고록을 폭로하겠다고 꾸준히 협박하여 스탈린의 정적숙청의 칼날을 피해갔다. 1937년 6월 한 달에만 미하일 투하체프스키를 포함해 8명의 장군을 간첩 혐의로 처형한 것을 비롯해 육군 원수, 군 사령관, 군단장, 사단장, 여단장 등 1500명을 처형했는데 이 수가 붉은 군대 간부 최고 군사회의 멤버의 75%에 달했으며 원수 5명 중 4명, 군사령관 15명 중 13명, 군단장급 85명 중 62명, 사단장급 195명 중 110명, 여단장급 406명 중 220명, 연대장급 고급 장교 중 70% 이상이 숙청당했다. 대숙청은 점점 절정으로 치달아 1938년 바실리 블류헤르과 니콜라이 부하린, 야코프 페테르스, 1939년 알렉산드르 예고로프와 카를 라데크, 1940년 알리 쇼겐추코프와 니콜라이 예조프, 1950년 그리고리 쿨리크 등까지 강타했다. 특히 스탈린의 혁명동지이기도 했던 니콜라이 부하린(Nikolaj Bukharin)의 경우 130개 항목의 죄명으로 법정에 기소당했는데, 이는 고문에 의한 자백들이었다. 부하린은 '고난받는 인민대중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자본주의적, 퇴폐적인 생활을 향유한 부도덕한 이중인격의 가식적인 인물이었고 사치를 일삼았다는 분위기를 풍긴다'는 이유로 스탈린에 의해 고소당하였다. 이외에도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는 초기 작품 《저녁(ВЕЧЕР)》(1912), 《Anno Domini MCMXXI》(1922) 등으로 당국으로부터 부르주아적이란 비판을 받고 활동을 거의 중단당했다. 196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던 레프 란다우는 UPTI 사건으로 조사받은 뒤 모스크바를 탈출했으나 1938년 5월 27일 구속되어 내무인민위원회에 유형당했다. 이후 1939년 5월 29일 동료 표트르 카피차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1990년대 이후 서방의 학자들은 대숙청의 진상을 밝혀냈다.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희생된 사람들은 NKVD의 문서에 따르면 감옥에서 처형된 사람이 68만 명이 넘었다. 당시 굴라그 수용소에 수감된 이들의 숫자는 1937년 1월 1일 80만 명에서 1939년1월 1일에는 130만 명으로, 2년간 50만명이 증가했으며,굴라그 죄수의 40%는 ‘반혁명’ 범죄로 기소됐고, 22%는 ‘사회적으로 해롭거나 위험한 분자’로 분류됐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일반 범죄자였다고 한다. 1939년 열린 제18차 당대회에 참석, 그는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에 관련된 문제를 제기하였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팽창하면서 위협을 느낀 그는 서방국가들과 반(反) 히틀러 동맹을 결성하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거절당했다. 스탈린은 1939년 8월 히틀러와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유럽 대륙을 전전하다가 1937년 멕시코로 망명한 레프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독재성과 레닌의 유언을 들어 그를 비판했는데, 이것이 국제 공산주의자 사이에서 자신의 반대 여론으로 확장될 것을 두려워한 멕시코에 자객을 보내 트로츠키의 암살을 계획했다. 트로츠키 암살 계획은 성공하여 1940년 8월 20일 트로츠키는 멕시코 시티 남부 코요아칸의 자택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 라몬 메르카데르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는 스탈린 사후 1972년 트로츠키의 암살(The Assassination Of Trotsky)이라는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소련 총리(1941~1945). 1939년 8월 스탈린과 조약을 체결한 것으로 용기를 얻은 독일의 히틀러는 폴란드를 공격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새로 동맹국이 되기는 했지만 스탈린은 결코 믿을 수 없는 국가였던 독일이 서방국가들과 교전하고 있는 동안 소련 내의 산업화를 추진하는 한편 서부전선 강화를 최우선 과제로 추진해 나갔다. 이후 폴란드 동부와 발트3국, 루마니아의 일부를 병합하여 편입시켰다. 한편으로는 핀란드를 공격하여 승리하면서, 핀란드에 영토 할양을 강요하기도 했다. 1941년 5월 스탈린은 독일이 소련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스스로 소비에트 연방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했다. 1941년 소비에트 연방의 서기장 스탈린은 연방의 총리를 겸했다. 이 해에 동방으로 팽창하려던 독일의 히틀러와 전쟁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의 핀란드 침공(겨울전쟁)의 경우 초기에 소련은 핀란드에게 최대한 양보를 하는 입장을 보였다. 초기에는 소련이 핀란드에게 상호원조협정 체결을 제안했다. 그에 대한 핀란드의 거부 이후 소련은 핀란드 국경선을 이동하여 두배 정도 규모의 영토를 교환하여 해군기지 설치를 위한 땅을 임대해달라는 역제안까지 했으나 핀란드는 이 제안까지도 거부했다. 이렇게 해서 겨울전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스탈린 전기를 집필한 스티븐 코트킨(Stephen Kotkin)은 《스탈린, 히틀러를 기다리다 1929-1941(Stalin Waiting For Hitler 1929-1941》에서 핀란드 침공이 ‘도덕적으로는 옳았지만’ ‘지정학적으로는 잘못되었고’, 협상과 타협에 대한 스탈린의 의지를 더 진지하게 받아들였어야 했던 핀란드인들에 의해 이 전쟁이 ‘막아질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1940년 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 등 북유럽 3국이 소비에트연방 편입 문제를 놓고 국민투표를 했다. 그런데 투표 하루 전에 만장일치라는 투표 결과였다. 이는 분명한 조작이었지만, 당시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소련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를 거절했다. 소련 국내에서는 이를 '전 인민의 위대한 지도자' 스탈린이나 행할 수 있는 기적으로 받아들여져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다. 발트 3국의 소련 합병은 얄타 회담 이후 더욱 분명하게 정해졌으며, 이후 1991년 무너질 때까지 소련의 영토로써 인정된다. 현재 발트 3국은 소련의 합병이 분명한 "불법"이라고 주장하면서 소련에 속해있던 시기를 '강제 점령기'로 규정하고 있다. 1941년 4월 13일 스탈린은 일본의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와도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독소 전쟁. 1941년 6월 22일 히틀러가 정당한 이유 없이 소련을 기습 공격한 이후 독일군은 소련 영토 깊숙이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왔다.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 대략 1200대 이상이나 되는 소련군 항공기가 지상에서 파괴되었고, 수십만명의 소련군이 독일군의 포로로 붙잡혔다. 신뢰하지는 않았으나 독-소 불가침 조약에 입각하여 영국을 굴복하기 전에는 소련을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히틀러의 기습공격에 충격을 받았고 공황상태에 빠졌다. 흐루쇼프는 그가 한동안 무력증에 빠졌음을 증언했으나, 스탈린은 바로 기력을 회복하고 스스로 소련군 최고사령관이 되고, 소비에트 연방의 국방위원회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941년 겨울 독일군이 소련 국경을 깊숙히 쳐들어와 모스크바를 위협하였으나, 그는 피신권고를 물리치고 수도 모스크바에 머무르면서 일대 반격을 위한 준비작업을 지시했다. 1941년 7월 19일 소비에트 연방의 인민위원회 국방담당 인민위원에 취임했다. 1941년 독소 전쟁 발발을 틈타 체첸인들이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반(反)소련 게릴라 활동을 벌이기 시작하여 큰 피해를 입히게 되었다. 1941년 11월 7일 이오시프 스탈린은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혁명 기념 퍼레이드를 그대로 진행했고,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곽까지 들어왔음에도 크렘린을 끝까지 사수했다. 산업화 시기 중공업 위주의 성장을 했던 스탈린의 소련은 독소전쟁이 터지자 탱크와 비행기를 비롯한 군수문자를 초고속으로 대량생산해냈다. 1941년 7월부터 11월까지 총 1523개 공장(이 가운데 군수 공장이 1360개)이 볼가 강 유역과 시베리아 그리고 중앙아시아로 이전했고, 여기에는 총 150만 대의 철도 차량이 동원되었다. 중공업 시설 대규모의 이전과 재조직은 인내력과 조직력의 측면에서 놀라운 성과였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미국이 연합군 편에 서게 되자 미국의 수많은 물자가 소련으로 들어가게 됐고,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받은 물자를 아주 유용하게 사용했다. 모스크바 공방전 승리 이후 소련군은 1942년 겨울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1943년 여름의 쿠르스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스탈린이 총지휘하는 소련군은 독일군과 맞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대세는 역전되어 쿠르스크 전투 이후의 독일군은 반격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후퇴하게 되었다. 1943년 12월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에서 개최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처칠 등 연합국 수뇌들의 회담에 참석하였다. 1944년 여름 영미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이후 스탈린이 총 지휘하는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이라 하여 동부전선 전역에서 독일군을 격퇴시켰다. 2차 대전 후반. 체첸의 반발이 가라앉자, 스탈린은 체첸의 독립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1944년 봄, 비밀리에 체첸인들을 전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주 과정에서 반발하는 자는 사살했고, 체첸인구의 10%가 강제 이주 당시 사망했다고 한다. 타인을 신뢰하지 않던 그는 몇번의 쿠테타 이후 동료들을 믿지 못했고, 특히 군대를 불신하여 장군을 다수 죽였으며, 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군이 고전하는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전쟁 초기에 그는 아돌프 히틀러처럼 군사 업무에 수시로 관여하고 전화를 이용한 부적절한 지령으로 군사업무에 간섭하다가, 점차 군사적인 결정을 현지의 지휘관들에게 위임하였다. 2차 대전 종전. 1945년 루스벨트, 처칠과 함께 얄타 회담을 추진했다. 스탈린은 이 회담에서 대단한 협상가로서 이 외국 정치가들의 의중을 파악하고 협상했는데, 그의 우수한 협상 기술을 당시 영국의 외무부 장관 이든이 칭찬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연합군 측의 승리로 독소 전쟁의 최종 승리는 당연 스탈린의 차지가 되었다. 일본의 항복 직전 8월 초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도움 요청으로 일본의 식민지에도 소련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10여 일 만에 일본은 항복했고, 스탈린은 아시아에서도 소련의 몫을 요구하였다. 국제사회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소련의 성과가 없다고 주장했으나 스탈린은 소련군 부상자와 사망자가 수천 명임을 들어 대가를 요구하였다. 1945년 소비에트 연방의 총리에 재선출되었다. 1945년 6월 27일에는 소련군 대원수에 취임하여 소련군의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1945년 여름 미국으로부터 연합군 파병에 동참을 제안받자 그는 수락하였다. 뒤에 미국 내부에서는 그를 끌어들인 것에 부정적인 여론이 조성되었고, 8월 15일 일본 항복 직후, 미국은 소련군이 2차 대전 종결에 끼친 영향이 없다고 비난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7월과 8월에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2천여 명의 병력 손실을 예로 들며 소련군 역시 2차 대전 해결에 기여했음을 강변했다. 1946년 2월 25일 소련 인민위원회 국방담당위원직에 세묜 티모셴코를 임명했고, 1947년 3월 3일에는 자신이 겸하던 국방부장관직에 니콜라이 불가닌을 임명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자 그는 스탈린 평화상을 제정하여 외국의 국가 원수와 및 내빈에게 수여했다. 생애 후반. 종전 직후. 1946년 이후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을 수시로 소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자 자격을 심사했다. 최종 결론은 김일성이었다. 또한 스탈린은 이 무렵부터 아돌프 히틀러가 숨어서 자신을 암살하려 한다고 생각하여 1950년까지 히틀러를 잡아내서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히틀러는 이미 자살하고 없었지만, 스탈린의 이 명령을 어길 수 없었던 NKVD는 히틀러를 찾아내 죽이기 위해 아르헨티나까지 찾아가기도 했다. 한편 1945년과 1948년 그는 노벨평화상 후보로 확정된 일도 있었다. 1947년 북유럽 3국에서 개최된 최고 소비에트 선거에서 스탈린은 140%의 득표율을 얻었다. 민망했던 선거당국은 선거 다음 날 스탈린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표명하려고 이웃 선거구 유권자들이 투표에 참여했기 때문이라는 해명을 내놓았다.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는 계속 간섭거부를 추진했고, 1948년 유고슬라비아는 티토주의를 표방하며 소련 진영으로부터 이탈함으로써 스탈린이 주도하는 단일체로서의 세계공산주의, 일국공산주의 정책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연방 내 다른 14개의 피지배 국가들이 티토주의의 선례에 따라 분리 독립운동을 하는 것을 염려한 그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소비에트 연방 내 각국(각공화국)에서 여론 재판이 일어나도록 배후 조종하고, 1930년대 소련의 대숙청 때와 같은 조작을 하여 공산 위성국 지도자들이 스스로 티토주의자임을 자백하게 만들어 다수의 위성국 지도자들을 재판에 회부하여 처형시켰다. 경공업의 생산력 증대 외에 그는 물리학자들에 대한 지원을 늘렸다. 과학원의 우주 탐사 프로젝트를 수립 계획하고 적극 관심을 갖고 지원하였으나, 우주선의 발사는 그의 생전에는 볼 수 없었다. 비록 스탈린의 생전에는 우주 탐사를 볼 수 없었으나,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했다. 반공주의자이며 그를 심히 경멸하였던 비오 12세는 친서를 써서 특사편에 보내 핵 전쟁만은 중단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전후재건.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소련은 경제적으로 많은 타격을 받았다. 2500~2700만 이상의 인명손실을 감당했던 소련의 전쟁 피해는 참혹했다. 독소전쟁 기간 동안 무려 2500만 명의 인구가 살 집을 잃었고, 1700여 도시와 소읍, 7만 이상의 촌락, 3만 2000개의 공장, 6만 5000km의 철도, 약 10만의 콜호스와 소프호스가 파괴 또는 소실됐고, 5천 개에 가까운 국영농장이 나치독일군에게 약탈당한 상태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받은 피해를 금액으로 환산하자면 총 2조 6천억 루블이나 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동맹관계는 깨졌고, 그들은 서로 경쟁하게 되었다. 따라서 미국과 서방은 소련의 전후재건을 돕지 않았었다. 전쟁이 끝나고 난 이후 소련은 전후 재건에 나섰다. 제4차 5개년계획 마지막 연도인 1950년에는 공업 생산고가 전쟁 전인 1940년 수준을 73%나 상회할 만큼 빠른 경제회복과 성장을 보였다. 경제개발 2년차인 1947년 소련의 경제는 빠르게 회복되었고, 그 결과 외국에 거의 의존하지 않고도 자체생산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으며, 다소 뒤진 소비재 부문도 꾸준히 성장하여 1947년 전시에 시행되던 배급제가 폐지됐다. 배급제 폐지에 있어서 소련은 영국보다 7년이나 더 앞섰다. 1946년부터 1955년까지 두 차례 5개년 계획기간에 소련의 공업생산은 서방측의 계산으로도 연평균 12~14%의 고도성장을 기록했는데, 이는 서방세계의 성장속도를 두 배 이상 뛰어넘는 수치였다. 당시 전력생산도 크게 늘었는데, 1954년에는 세계최초의 원자력 발전소가 세워지고, 세계 최대의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를 비롯해 수천 개의 발전소가 건설되어, 모든 산업에 충분한 전기를 제공해줄 수 있게 됐다. 한국 전쟁 개입. 1949년 3월 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회담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침공과 통일에 관해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였다. 스탈린은 인민군이 대한민국 군사력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답변하고 대한민국에 미군이 아직 주둔하고 있음(소련군은 1948년 12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철수)과 미-소간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를 상기시켰다. 또한 스탈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한민국에 대한 공세적 군사활동은 대한민국의 북진 침략을 물리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1950년 1월 17일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에게 침남(侵南)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 대화에서 김일성은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다음에는 대한민국(남조선)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기강이 세워진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일성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년 3월의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 1월 30일, 스탈린은 서명한 전보를 평양으로 타전했다. 전문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큰일'에 관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접견해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으며 그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4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하였다. 다만,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공쪽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 5월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공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스탈린은 처음에는 김일성의 침남을 반대했다. 1949년 갑자기 대한민국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한 것을 언급하며 혹시 모를 미국과 자본주의 진영의 함정이라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그러나 무려 48회에 달하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끝까지 남침을 고집한 탓에 스탈린이 이를 허락했는데 그렇게 발발한 한국 전쟁은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스탈린은 공식적으로는 한국 전쟁 관여를 부인하였지만 포스트 냉전 시대 연구에 의하면 김일성이 한국 전쟁을 감행하게 된 배경에는 스탈린의 명시적 허가와 지원이 있었다고 본다. 다만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무려 48번이나 시도했다는 점으로 미뤄보면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침남을 지시한 입장은 아니고 김일성이 침남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못해서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라고 봐야 옳다. 김일성이 침남을 끈질기게 고집했을 때 스탈린은 애초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제관으로 임명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닫고 김일성에게 한반도 북부의 통치를 책임지게 한 것을 크게 후회했으나 때는 늦었다. 김일성이 파견되자마자 한반도 북부지역에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 이후였기 때문이였다. 한국 전쟁 중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적이 있었던 그는 뇌질환과 중풍 증세로 손과 발을 쓰는 것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병세가 깊어지고 체력이 소모되었음을 알고는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의심과 망상증세가 한층 강화되었다. 모스크바와 소련의 대도시에는 오직 스탈린 자신만이 리모콘과 장비로 열 수 있는 건물이 건립되었는데, 그 건물들에는 같은 모양의 방이 여러 개가 있어 아무도 스탈린을 쉽게 찾기 어려운 구조였다. 또한 그는 비행기와 헬리콥터에 탑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장거리 여행도 열차로 했다. 말년과 독살설. 1953년 3월 1일 스탈린은 공산당 간부인 니키타 흐루쇼프 등 공산당 정치국원 4명과 만찬을 하던 도중에 쓰러졌다. 스탈린은 자신을 암살한 거라 염려하여 자신의 비밀별장에 데려다 달라고 명한다. 그리고 별장에 도착한 뒤 그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4일 만인 3월 5일 숨졌다. 3월 4일에는 별장의 비밀 방에서 식사를 시켰으나, 그 날의 식사는 먹지 않고 첫 번째 비밀 방에 방치해두었다. 그의 정확한 사망 시간은 알 수 없다. 집권기간 동안 사적으로 뇌물을 받거나 축재를 하지 않았다. 비교적 청렴한 생활과 종교를 부정하는 다른 공산주의자들과는 달리 러시아 정교회에 호의적이었다는 점 역시 그의 정적들로부터 그에 대한 비판을 신중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죽기 직전, 스탈린은 자신의 건강상태를 폭로하거나 암살할 것을 우려하여 자신의 주치의들을 숙청하였다. 이 때문에 주치의들이 체포, 고문 등으로 끌려가면서 스탈린 자신이 발작을 일으켰는데도 손을 쓸 수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공식 발표된 스탈린의 사망 원인은 뇌졸중이었다. 그러나 세간에는 독살됐다는 소문이 확산되었다. 일설에는 목이 졸려 죽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확인된 것은 없다. 사망 장소는 자신의 관저였는데, 그곳의 위치는 자신을 암살할 것을 우려한 스탈린이 찾지 못하도록 깊숙하고 복잡한 곳에 위치한 숲속에 별장을 지은데다가 주택도 암살방지를 위해 미로처럼 복잡한 형태로 되어 경비원들조차 스탈린의 위치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병원에 옮길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결국 사망 후 3일이 지난 3월 8일에 식사담당 파출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사후. 1953년 스탈린이 죽자 김일성은 장문의 애도문을 소련에 보냈다. 사후 시신은 미이라화되어 레닌 묘 옆에서 보존되다가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시에 화장되어 크렘린 벽묘지에 묻혔다. 스탈린은 사후 1956년 초 제20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에 의해 비판받은 뒤 격하당하였다. 이후 스탈린의 동상, 흉상, 초상화, 비석 등 각종 기념물들은 철거되어 사라졌다. 스탈린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스탈린그라드가 됐던 차리친 시는 1962년 이후 볼고그라드(Volgograd)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스탈린비판’은 복잡한 반응을 일으켜 '중 ·소논쟁', '헝가리사건' 등과 소련-중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의 관계에 금이 가는 등의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흐루쇼프가 실각하면서 스탈린 격하논쟁은 주춤해지다가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스탈린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영웅에서 독재자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러시아와 독립국가 연합 14개국의 경제 사정이 악화되면서 경제발전과 부국강병을 달성한 스탈린에 대한 향수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스탈린은 조지아 출신이었지만 러시아에서도 그에 대한 존경심은 각별하였다. 2008년 8월 러-조지아 전쟁 당시 러시아군이 스탈린의 고향인 조지아에 진입했을 때 다른 시설은 무수히 파괴됐지만 스탈린의 생가와 스탈린 박물관은 손상되지 않았다. 암살 의혹. 1990년대 초 소련이 붕괴되고 여러 소련 내 기밀문서들이 비밀 해제되자 라브렌티 베리야가 독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2000년대 이후 소련사 연구자들 중 스탈린 전문가들은 스탈린의 독살설을 다시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2003년 3월 5일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의 역사학자 블라디미르 나우모프와 미국 예일대학의 소련연구가인 조나단 브렌트는 공동저서 '스탈린의 마지막 범죄'에서 독살설을 주장하고 있다. 나우모프와 브렌트에 의하면 스탈린 독살의 용의자로 공산당 정치국원이었던 라브렌티 베리야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스탈린 사망 후 베리야는 "내가 그를 해치우고 모든 사람을 구했다"며 자랑한 내용을 니키타 흐루쇼프 회고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이 책은 정치국원 4명이 모두 공모했을 수도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1953년 스탈린 사망 당시 의료진의 보고서 초안에는 스탈린이 숨지기 전 광범위한 위장 출혈을 보였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3개월 뒤 공개된 공식 보고서에는 병명에 관련된 내용이 삭제되었다. 당시 크렘린에서 근무하던 경비병 한 명도 베리야로부터 병세에 대해 함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증언하였다. 스탈린의 음식에 과다 복용할 경우 장기출혈을 일으킬 수 있는 항응혈제 '와파린'이 섞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편 독살설 외에 침실에서 목졸려 죽었다는 설도 있다. 흐루쇼프는 베리야가 그를 암살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평가와 비판. 긍정적 평가. 스탈린의 치하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농업국에서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산업국으로 탈바꿈했고, 결과적으로 이는 소련이 독소 전쟁에서 승리하고 전후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기반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모스크바 사수 및 연합국 지위 획득 역시 그의 치적으로 기록된다. 또한 독소 전쟁에서 초반의 패배에 큰 책임이 있긴 하지만, 모스크바 전투나 스탈린그라드 전투 그리고 쿠르스크 전투를 포함하여 여러 가지 정치적, 군사적인 정책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승리할 수 있도록 기여하였다. 또한 서방 연합국과의 흥정을 통해 중앙유럽에 대한 소련의 영향권을 확인함으로써 전후 미국과 함께 소련이 초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하였다. 경제적으로는 국가 중심의 통제 경제와 중소 수공업을 양성하면서 대량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소련의 경제를 살린 인물로 평가된다. 사상적 측면에서는 레닌주의를 더욱 구체화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교리적인 혁명이론으로 전개하였다. 소련은 물론 다른 국가의 공산주의자들은 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스탈린적 해석을 학습하였고, 이를 혁명의 전략전술로 논리로 삼았다. 스탈린의 생전에 편찬된 《볼셰비키당사》의 제4장 〈변증법적유물론과 사적유물론〉은 스탈린주의의 핵심적문서임과 함께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로동당 정권의 주체사상의 핵심적 사상적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베트남의 호찌민은 그를 "세계혁명의 총사령관"이라 불렀다. 그는 "세계 혁명의 총사령관 스탈린, 아시아 혁명의 총사령관 마오쩌둥"이라 했다. 한편 무모하게 추진해서 막대한 사상자를 내기는 했지만, 스탈린이 강력하게 밀어붙인 기간산업의 국영화로 소련 국내의 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산업화 정책으로 농업이 주류이던 소련을 산업화했으며 소련의 산업화를 완성시켜 독일에 반격할 수 있는 전력을 마련했다는 평가도 있다. 소련 붕괴 이후에도 현재 러시아에서는 그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부정적 평가보다 높으며 그의 고향 조지아에서도 국가적, 민족적 영웅으로 칭송된다. 조지아의 역사 교과서는 스탈린을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즘을 종식시키고 소련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인물"로 기술하고 있다. 일부 러시아 국민들 중에는 스탈린을 생각하면서 피와 편집증, 잔혹함이 아니라 승리와 힘, 무사무욕, 국가의 존재이유를 떠올린다. 또한 러시아의 청년 층 중 일부는 스탈린을 나치를 물리친 강력한 군주로도 기억된다. 1990년 이후 러시아의 경제사정이 악화되면서 스탈린을 그리워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고르바초프나 보리스 옐친 등은 당초 스탈린에 대한 찬양을 제재하였으나 스탈린에 대한 국민들의 향수 여론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하였다. 2000년대 이후에는 모스크바를 사수한 전쟁 영웅, 산업화를 통해 소련의 국가적 기틀을 마련한 영웅으로 재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스탈린의 재평가를 놓고 그의 인권 탄압과 정적 숙청에 관련된 비판과 잡음이 일고 있다. 2019년 러시아에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의 70%가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러시아의 영웅 논란. 또 스탈린은 조지아인임에도 2008년 5월의 한 온라인 투표에서 '위대한 러시아인' 3위에 올랐다. '러시아를 상징하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러시아 국영 TV채널 '로시아' 방송은 2008년 5월 러시아 역사연구소와 함께 '이미아 로시아'(러시아의 이름)라는 프로젝트를 개시했다. 영국 BBC 방송의 ‘위대한 영국인’이란 프로그램을 본뜬 것으로 러시아인들의 민족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제작됐다. 경제 사정의 악화와 중산층 붕괴 등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다잡고자 로시아 방송과 역사문제연구소는 프로젝트를 기획하였으며, 다양한 각계 각층의 인사들의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러시아를 상징하는 인물을 찾는 이 프로젝트의 첫 단계에서 인터넷과 문자메시지, 전화 투표로 다양한 시대의 인물 500명이 선정됐다. 두 번째 투표 단계에서 50명으로 대상의 폭이 한층 좁아졌다. 9월 최종 결선 진출자 12명이 선정되면서 인기투표와 토론은 한층 치열해졌다. 여러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12명의 심사위원단이 구성됐고 각 심사위원은 12명의 인물 중 1명을 맡아 해당 인물을 대변했다. 프로그램은 12월 28일 최종 결과 발표와 함께 막을 내렸다. 1위는 알렉산드르 네브스키 왕자, 2위는 표트르 스톨리핀 총리, 3위는 스탈린이 차지했다. 역사학자 엘레나 얌폴스카이아는 스탈린이 러시아인의 3대 영웅의 하나로 꼽힌 것은 "민주주의의 이름하에 자행돼 온 자본가들의 독재와 물질만능주의에 따른 정신적 피폐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불만과 회의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그에 의하면 "(러시아) 사람들은 스탈린을 생각하면서 피와 편집증, 잔혹함이 아니라 승리와 영광, 무사무욕, 민족의 존재이유를 떠올린다"고 지적했다. 스탈린은 러시아 등 구 독립국가연합의 젊은이들이 열광적으로 존경하는 인물의 하나이기도 하다. 젊은 세대들이 스탈린을 독일을 물리친 강력한 서기장으로 기억하고 있는 점도 스탈린이 영웅대접을 받는 이유다. 이에 대해 결론적으로 스탈린 이후 민주주의 정부는 국민들에게 만족감보다는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가 계속되고 국민 영웅으로 여겨질 정도까지 불만을 가중시켜온 셈이라는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러시아인들의 스탈린에 대한 존경심은 2008년 8월 남오세티야 전쟁에서도 증명됐다. 러시아군이 스탈린의 고향인 조지아를 침략했을 때 다른 시설은 무수히 파괴됐지만 스탈린 박물관은 손상되지 않았다. 부정적 평가. 집권 과정, 집권 이후에 많은 정적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것으로 악명을 떨쳤고 비판을 받았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독재자 또는 살인마라는 비판도 있다. 나오미 울프는 스탈린이 히틀러를 연구했다고 하였다. 스탈린은 생전에도 제4인터내셔널의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다른 공산주의자들에게 그 관료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소련을 관료국가로 만들었다"면서 강도높게 비판받았으며, 사후에는 생전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벌인 숙청들로 거세게 비판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공범이라는 시각도 있다. 러시아의 언론 노바야 가제타는 지난달 스탈린의 손자로부터 피소됐다는 사실을 공표한 뒤 사설을 통해 "진실은 가끔 위험한 것"이라며 "무시한다고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범죄를 숨기는 것은 공범이다. 스탈린은 2차대전 초기 히틀러가 저지른 범죄의 공범자였다"고 지적했다. 비정상적으로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새디스트였고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비판도 있다. 의혹과 논란. 성적으로 롤리타 콤플렉스 취향으로 어린이를 좋아했다는 설도 있다. 그의 딸 스베틀라나 이오시포브나 알릴루예바가 남긴 회고에 의하면 스탈린은 사망 직전 병적으로 소년들, 소녀들의 사진을 수집했다고 한다. 한편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급사하자 암살 배후로 지목, 얄타 회담에서 루즈벨트에게 독이 든 차를 먹였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마리아 유디나. 스탈린은 개인적으로 마리아 유디나라는 피아니스트를 사랑하였다. 그러나 유디나는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다. 유디나는 레닌 이후 정권을 잡은 독재자 스탈린의 예술인들에 대한 억압정책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쇼스타코비치를 비롯한 동료 예술인들을 변호하는데 앞장섰다. 반체제 인사들을 옹호하는 등 마리아 유디나의 이런 태도를 스탈린이 가만 두고 있을 리가 없지만 유디나에겐 극히, 정말 극히 예외적으로 강제수용소에는 보내지 않고 그가 지속적인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 이유는 스탈린이 유디나의 연주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유디나가 연주하는 모차르트(확실히 모르겠지만 피아노 협주곡 23번일 것이다.)의 방송실황을 듣고 있던 스탈린이 그의 연주에 매우 감동하여 당장 녹음 테이프를 구해오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만큼 스탈린이 유디나를 좋아했고 존경하였기에 유디나에 대해서는 최대한 배려를 해주었다는 이야기다. 유디나는 스탈린에게 정면도전도 불사했던 몇 안 되는 용감했던 예술가 중의 하나였으며 이에 국립 음악원 교수직에서도 해직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그만큼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치고는 지나치게 적은 수의 음반만을 남긴 것으로 보아, 그의 연주와 녹음 활동에 정치적 압박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는 시각이 있다. 스탈린이 유디나를 배려한 것에 대해서도 볼세비키 혁명 당시부터 있었던 유디나의 혁명 과정에서의 업적들과 그의 대중적인 인기, 위치 등을 모두 고려했을 때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더 큰 반발이 있을 것이란 점을 인식한 정치적 계산이 있었을 것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개인 숭배화. 집권기간 중 스탈린은 우상화를 추진해 나갔다. 스스로 '만능의 천재', '빛나는 태양', '삶의 지주', '위대한 선생이며 친구'로서 찬양을 받았고, 러시아 정교회 부주교로부터 공공연히 '우리의 아버지'로 찬양받았다. 스탈린의 초상화나 동상이 소련 내 곳곳에 걸리거나 세워졌고, 스탈린 개인에 대한 숭배가 만연했다. 한편 스탈린 평화상을 제정하여 고위 정치인에게 수여하기도 했다. 각지에 세워진 스탈린의 동상과 휘호, 상징물은 니키타 흐루쇼프의 재임기간과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재임기간 중 철거되었다. 러시아 정교회와의 관계.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는 모든 종교는 탄압의 대상이었지만,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스탈린은 자신을 포함한 소련 인민들의 대다수가 비공식적으로 믿고 있던 정교회를 이용해, 민족주의를 불러 일으키기 위해 정교회를 부흥시켰다. 그리하여 정교회의 총주교가 크렘린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1925년 이래 선출되지 않았던 모스크바 총주교직이 스탈린의 제안으로 다시 선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스탈린의 명령으로 크리스마스나 부활절과 같은 교회력도 부활되었고, 혁명 후 폐쇄되었던 수많은 정교회 성당이나 수도원의 문이 다시 열렸다. 이 때문에 어떤 러시아 정교회는 스탈린을 정교회를 부활시킨 은혜로운 자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최근에 정교회의 일부 성직자들에 의해 공산주의자였던 스탈린을 시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자를 인정할 수 없다는 반대파가 반발하고 있다. 아시아 민족 강제 이주. 소련은 일본의 국력이 강해지자 일본 민족과 비슷해 보이는 황인종을 강제 이주시켰다. 일본의 도움으로 만주국이 독립하자 본래 만주 민족의 땅인 연해주에 대한 영토 반환 분쟁을 대비해 1937년부터 시베리아, 연해주 등에 살고 있던 모든 황인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 강제 이주로 수많은 동양인들이 희생되었으나, 소련은 시베리아와 연해주, 사할린 섬 등에 대한 영유권을 공고히하여 중국, 일본, 한국과의 영토 분쟁을 피할 수 있었다. 한국 전쟁. 1953년 3월 6일, 스탈린이 사망한 다음 날 저녁 공산군들은 모든 전선에서 불꽃과 신호탄을 하늘에 올렸으며 각 병사는 스탈린에 대한 고별인사로 동시에 공중을 향하여 조총 사격을 하였다. 스탈린의 사망은 동서해빙과 외부 세계에 대한 소련 지도층의 새로운 접근 방식과 태도 변화를 초래했다. 김일성은 대한민국에서 미국이 손을 떼고 일본으로 철수할 것이라는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미국이 진심으로 전쟁을 시작하자 전황을 엄청나게 불리한 상황에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 소식을 접한 김일성은 드디어 전쟁 종결과 평화 달성의 주도권을 잡을 시기가 왔다며 좋아했다. 스탈린은 전쟁을 종결하자고 하였으나, 김일성이 자신의 경고를 듣지 않자 지원을 감소시켰다. 또한 김일성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고 확신하여 경계하게 된다. 1953년 3월 19일 스탈린은 소련 각료회의에서 한국 전쟁을 계속 수행하는 것은 소련과 중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이익에 배치된다며 이른 시일 내에 정전협상을 마무리지을 것을 결정했다. 학살 논란. 1940년에 발생한 폴란드 카틴 숲의 학살의 배후는 스탈린이 지시했지만, 스탈린을 영웅시하는 기류가 확산됨에 따라 학살에 스탈린은 연관이 없다는 견해가 러시아의 좌파계열 학자들로부터 제기되고 있었다. 2009년 러시아 언론 노바야 가제타는 스탈린이 학살을 지시했을 것이라는 내용의 보도를 내보냈다. 2009년 4월 스탈린의 손자 예브게니 주가슈빌리는 스탈린이 폴란드 장교 수천 명의 학살을 직접 지시했다는 노바야 가제타의 보도에 대해 스탈린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러시아 검찰에 고소, 기사 철회와 함께 천만 루블, 우리 돈으로 4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러시아의 우익 성향 언론 노바야 가제타는 2009년 4월 기밀해제된 서류 중에서 자료들을 발췌, 4월 22일 “최근 기밀해제된 서류에서 스탈린이 소련 자국민과 외국인 수천명에 대한 살생부에 서명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스탈린이 민간인 처형을 직접 지시했다는 내용의 보도를 내보냈고, 스탈린의 개인 서명이 담긴 처형허가증을 발견해 기사화했다. 주가슈빌리의 변호인인 유리 무킨은 이날 법정에서 “스탈린은 많은 사람들에게 정직하고 공정한 지도자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주가슈빌리 본인은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다. 노바야 가제타 측 변호인인 젠리 레즈니크는 “스탈린이 수만 명의 사람을 죽인 것은 널리 인정된 사실”이라고 반박했다. 스탈린 명예훼손 재판은 러시아 및 구 소비에트 연방 국가에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법정은 관객들로 가득찼고, 법정 밖에는 스탈린의 지지하는 진보성향의 사람들 모여들었다 모스크바 법정 밖에서 스탈린 지지 집회를 벌이던 한 여성은 “스탈린 시대에 이 나라는 존경받았다”면서 “지금 우리는 가난뱅이지만 당시에는 다른 국가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고 말했다. 러시아 내 우익성향 단체들은 이번 소송을 공산주의의 향수에 젖은 좌익들이 역사상 가장 잔혹한 독재자를 호의적으로 그려내려는 섬뜩한 시도라고 비판했다. 2008년의 구 소련 내 한 초등학교의 역사 교과서는 스탈린이 2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의 승리를 이뤄냈다면서 그를 “유능한 지도자”라고 기술했다. 모스크바의 한 지하철 역에 스탈린의 업적을 기념하는 동판이 등장했다. BBC는 러시아가 소련 시절의 공포를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의 인권운동단체 '메모리얼'의 역사학자인 니키타 페트로프는 “스탈린의 손자가 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스탈린에 대한 명예회복 시도”라며 “이는 과거를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수정하겠다는 것”이라며 스탈린 명예훼손 소송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예브게니 주가슈빌리는 노바야 가제타의 보도에 대해 “이 문서 자체가 거짓”이라며 날조 의혹을 제기하였고, “스탈린은 직접적으로 누구에 대해서도 처형을 명령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예브게니 주가슈빌리는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2009년 10월 모스크바 법원은 스탈린의 폴란드 장교 학살설을 보도한 노바야 가제타의 무죄판결을 내렸고 예브게니 주가슈빌리는 패소하였다. 기타 의혹. 레닌이나 트로츠키 등의 주변에 자신의 정보원을 심고 이들로부터 정보를 빼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기타. 1917년 12월에 창설된 체카(Cheka, 반혁명 태업단속 비상위원회)를 개조하여 특무기관인 국가보안위원회(KGB, Komitet Gosudarstvennoy Bezopasnosti)를 조직했다. 그는 국가보안위원회(KGB)를 특무기관이자 친위조직으로 활용했다. 고소 공포증이 있던 그는 비행기나 헬리콥터 탑승을 꺼렸다. 추락사고를 가장한 암살을 염려한 그는 고층 건물에 오르기도 꺼렸고, 장거리 여행도 주로 열차를 이용했다. 그의 총리 관저에는 비슷한 모양의 방을 3, 4개 이상 더 만들고, 내부에서 리모콘으로 작동하게 되는 자동문 시스템을 개발하기도 했다. 업무 평가에 있어서 그는 치밀하고 꼼꼼하여 그는 수많은 인민위원회 위원들과 장관들로부터 수많은 서류를 일일이 직접 보고받았다. 각부 장관들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고 결재하고 계산하며 업무를 추진했다. 작고 왜소하고 약한 체구에도 과중한 격무를 무난히 소화하였으며 새벽 3시~4시까지 정무를 보고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 정무를 주관했다. 일설에는 그가 오전 10시~11시 무렵에 늦게 일어났다는 주장도 있다. 스탈린은 독서를 좋아하여 업무가 없는 때는 독서로 소일했다. 마르크스, 엥겔스, 헤겔 등의 유물론과 자본론, 변증법은 물론 찰스 다윈과 헉슬리의 적자 생존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등의 내용을 거의 대부분 이해, 암기하고 있었고, 베른슈타인을 개량주의 타협론이라 비판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 붉은 군대의 중전차 IS-2호는 그의 이름을 따서 스탈린 호라고 지어졌다. 후에 그는 바트당을 조직한 사담 후세인,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 리비아의 카다피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성격, 취향. 성격이 치밀하여 꼼꼼하고 메모하기를 좋아하였으며 기억력이 비상하였다. 자아도취에 빠졌고 무자비한 면모를 보였다. 1945년 5월 7일 독소 전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둔 뒤에 스탈린 우상화가 만연하였고, 공공기관이나 광장, 거리 등에 그를 찬양하는 기념물과 작품이 조성되었다. 1949년에는 그가 베를린을 정벌한 뒤 세계 시민의 환호를 받으며 비행기로 베를린에 도착하는 영화가 상영되기도 했다. 남녀 어린이의 사진을 유난히 좋아하였고, 딸 스베틀라나는 이를 기록에 남기기도 했다. 보드카와 와인에 중독. 어떤 역사학자들은 그가 수많은 사람들을 암살시킨 정신질환적 증세의 배후에는 그가 가진 알코올중독증이었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윈스턴 처칠과 공통점이 있는 데, 광란의 술파티를 즐긴 것이다. 문화에 나타난 스탈린. 생전의 스탈린은 구세주와 영웅으로 묘사됐는데 사후에는 의심 많고 잔인한 독재자로서 많이 표현된다. 소련 시기에 씐 소설에서 스탈린은 대부분 간접으로 묘사된다.(예: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등) 스탈린의 사망 이후 그는 독재자, 특히 공산주의 독재자로서 묘사되었고 소련을 다루는 많은 소설에서 그려졌다. 1949년에 발표된, 그의 독소전쟁 승리를 과장해 확대한 선전영화 〈베를린 함락〉(Падение Берлина)에서 그는 베를린을 함락하고서 비행기로 베를린에 도착해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전 세계 인민들에게 환영받는다는 설정으로 막을 내린다. 2009년 스탈린이 인민군 특수부대를 구성하여 화성에서 온 외계인을 대적한다는 게임 〈스탈린 대 화성인〉(Stalin VS martians)이 출시되기도 했다. 그 밖에 게임 〈커맨드 앤 컨커〉(Command & Conquer)에도 등장한다. 가계. 그의 아들 중 소련군 대위로 복무하던 야코브 주가슈빌리가 독일군에 붙잡혔고, 독일은 스탈린그라드에서 포로로 잡힌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와 포로교환을 추진했으나, 스탈린은 "원수와 대위를 어떻게 교환하느냐"며 요구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 야코프는 처형당했다. 한편 파울루스 원수는 "원수는 보잘 것 없는 사병(아돌프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 때 독일 민족을 위해 일개 사병으로 자원 입대함)을 위해 죽을 수 없다"라며 조국을 배신했다. 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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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바흐의 추측
골드바흐의 추측(Goldbach's conjecture)은 오래전부터 알려진 정수론의 미해결 문제로, 2보다 큰 모든 짝수는 두 개의 소수(Prime number)의 합으로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하나의 소수를 두 번 사용하는 것은 허용한다. 기원. 1742년 6월 7일에 프로이센 수학자 크리스티안 골드바흐(Christian Goldbach)는 레온하르트 오일러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은 추측을 제안하였다. 그는 편지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 두 번째 추측을 했다. 그는 1을 소수로 취급했지만 후에 이 개념은 폐기되었다. 이 두 추측은 동치이지만 당시에 이슈가 되지는 못했다. 골드바흐의 마지막 문장은 오늘날의 개념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오일러는 1742년 6월 30일에 답장을 보내 골드바흐와 한 예전의 대화를 떠올리면서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골드바흐의 원래 추측을 포함한다. 모든 짝수가 두 소수의 합으로 표현가능하다면, 홀수의 경우 3을 더하면 되고, 짝수의 경우는 2를 더하면 세 소수의 합으로도 표현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골드바흐의 추측의 종류. 위 추측을 강한 골드바흐의 추측(strong Goldbach conjecture)이라고 부르고 최초에 골드바흐가 제시했던 '5보다 큰 모든 정수는 세 소수의 합으로 표현가능하다'는 주장은 약한 골드바흐의 추측(weak Goldbach conjecture)이라고 불린다. 강한 골드바흐의 추측이 참이라면, 약한 골드바흐의 추측은 당연히 참이 된다. 강한 골든바흐의 추측을 짝수 골드바흐 추측(even number Goldbach conjecture), 약한 골든바흐의 추측을 홀수 골드바흐 추측(odd number Goldbach conjecture)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골드바흐 숫자. 예를 들어, 50까지의 짝수는 위와 같이, 두 개의 소수의 합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짝수에서 가능한지는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확인된 수치적 결과. 컴퓨터로 직접 계산하여 짝수가 두 소수의 합인지 확인하는 시도가 예전부터 있었다. T. Oliveirae Silva는 formula_1 이하에서 골드바흐의 추측이 참임을 확인했다. 골드바흐의 추측은 반드시 두 소수의 합으로 표현하는 방법이 유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소수 한 쌍의 합으로 표현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고, 같은 두 수를 쓸 수도 있다. 쌍둥이 소수 추측과의 관계. 쌍둥이 소수 추측 (twin prime conjecture)과 골드바흐의 추측은 구조적으로 유사성이 있다. 쌍둥이 소수 추측은 formula_4와 formula_5가 모두 소수인 수가 무한히 많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formula_6가 정확히 두 개의 소인수를 가지는 수가 무한히 많다는 추측이다. 골드바흐 추측은 4이상의 모든 짝수에 대해 두 소수의 합으로 표현가능하다는 것, 다시 말해서, 모든 4 이상의 짝수 formula_7에 대해 formula_8가 두 개의 소인수를 가지는 1과 formula_9 사이의 k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추측이다. 이러한 구조적 유사성 때문에 두 추측은 같이 다루어져 왔으며, 지금까지 검증된 수치적 자료들도 이를 뒷받침 하는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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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영화제
칸 영화제(, )는 세계 3대 국제 영화제 중 하나로서 국제 영화계의 '메카'로 통한다. 1946년 9월 20일 ~ 10월 5일 처음으로 개최된 이래, 프랑스 남부 칸에서 보통 매년 5월에 열린다. 수상 부문은 황금종려상, 감독상, 각본상, 남·여자배우상 등이 있다. 영화제의 작품의 특성은 영화감독의 재능과 실험성에 초점을 두어 대중성과 작품성의 조화를 꾀하고 있다. 2014년 7월 1일, 프랑스의 유로 TV 방송국 카날 플러스의 공동설립자이자 전 회장인 피에르 레스퀴르가 집행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또, 이사회는 질 제이콥스를 명예 집행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개요. 칸 영화제는 베를린 영화제, 베니스 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 중의 하나이다. 병설되어 있는 국제 전시장도 MIFED, American Film Market와 대등한 세계 3대 시장으로 손꼽힌다. 전시장에는 800개사, 수천명의 영화 제작자(프로듀서), 바이어, 배우 등이 모여, 세계 각국에서 모이는 영화배급사에 신작 영화를 파는 프로모션의 장소가 되고 있다. 특히, 세계 3대 영화제와 세계 3대 시장이 동시에 개최되는 것은 칸느 뿐이기 때문에 전 세계 언론매체로부터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으며, 매회 전 세계에서 수많은 배우, 영화 제작자가 참석한다. 개최 기간 동안 주전시장을 시작으로 각 영화관에서 영화가 상영되고, 전시회는 각 제작사의 부스에 설명회 파티가 열린다. 앞으로 개봉되는 영화는 물론, 예고편 밖에 할 수 없는 영화와 아직 대본조차 할 수 없는 기획 단계의 영화까지 판매된다. 이 시장은 앞으로의 블록버스터 영화를 예측하고 구매를 결정하는 장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역사. 1930년대 후반,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의 개입으로 정치색을 강화했던 《베네치아 영화제》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개최된 것이 이 칸 영화제의 시작이다. 1939년 개최 예정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중단되었다. 종전 후 1946년 정식으로 시작되게 된다. 그러나 1948년부터 1950년까지는 예산 문제로 개최되지 않았고, 1951년에 다시 개최되었다. 이때부터 팔레 데 페스티발(Palais des Festivals et des Congrès)이 대회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1968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5월 혁명이 일어나 루이 말, 프랑수아 트뤼포, 클로드 베리, 진 가브리엘 아루비콧코, 클로드 를루슈, 로만 폴란스키, 장뤼크 고다르의 요청으로 영화제가 중단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프로그램. 칸 영화제에는 여러 섹션이 존재한다. 상. 최고상은 《황금 종려상》(Palme d'Or, Golden Palm)라고 하며, 20개 내외의 후보작 중에서 선정된다. 두 개 이상의 작품이 선정된 해도 있다. 처음에는 최고상을 "GP"(Grand Prix du Festival International du Film 국제 영화제 그랑프리)라고 했었는데, 1955년에 트로피 모양을 딴 "황금 종려"를 정식 명칭으로 "그랑프리" 상으로 삼았다. 1965년 최고 상품의 정식 명칭을 "GP"로 변경했다가, 1975년 다시 "황금 종려"라고 변경했다. 오랫동안 칸느에서 "그랑프리"는 최고상의 정식 명칭 또는 별칭이었지만, 1990년 심사위원 특별상(Grand Prix Spécial du Jury)에 "그랑프리"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혼란을 초래했다. 심사 위원은 유명 영화인과 문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문별로 심사 위원들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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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내셔널가
국제가(國際歌) 또는 인터내셔널가(, , )는 노동자 해방과 사회적 평등을 담고있는 민중가요이다. 개요. 프랑스어 원 가사는 외젠 포티에(Eugène Pottier, 1816년 ~ 1887년)에 의해 1871년 파리코뮌이 시기에 쓰여졌고 피에르 드제테르(Pierre De Geyter, 1848년 ~ 1932년)가 1888년에 곡을 붙였다. 참고로 작사자인 외젠 포티에는 철도 노동자였고, 피에르 드제테르는 가구세공인으로, 작사자와 작곡자 모두 노동자 출신이다. 프랑스 국가(國歌)인 라 마르세예즈가 '프랑스 혁명' 이후 면면히 계승되어온 '자코뱅식 애국주의' 전통을 상징한다면, 인터내셔널가는 자코뱅주의와 더불어 프랑스 정치사에 큰 영향을 미쳐온 '사회주의 전통을 상징하는 노래'로 애창된다. 인터내셔널가가 처음 유래되어 만들어진 파리 코뮌은 급진적인 자코뱅주의와 사회주의가 결합된 정치 운동이었다. 인터내셔널가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노래 중 하나이며, 러시아어판은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이자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의 당가로 채택되어 1922년부터 1944년까지 쓰였다. 1943년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의 서기장인 이오시프 스탈린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코민테른을 해체하면서 새 당가와 국가를 채택하게 되었는데 1944년 이후에는 인터내셔널가 대신 소비에트 연방 찬가로 대체되었다. 여기서 '인터내셔널'은 단순히 '국제적'이라는 뜻이 아닌, 사회주의자들의 국제기구인 제1인터내셔널을 의미한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겪으면서 소비에트 연방의 공산주의와 서유럽의 공상주의가 갈라선 이후로는 인터내셔널은 무의미해졌지만, 인터내셔널가는 소련 공산당과 코민테른에 의해 전승되어 오늘날까지 각국 공산당의 당가로 불리고 있다. 원곡은 프랑스어이지만, 러시아 혁명 이후 수십 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언어별로 다양한 가사가 존재한다. 한국의 인터내셔널가. 한국에는 일제강점기 1920년대때 조선공산당이 인터내셔널가를 일역한 일본의 '국제가'를 조선어로 직역, 번역되어 불린 것이 시초다. 이 가사는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인터나쇼날', '국제가', '국제공산당가'라는 제목으로 불리고 있으며, 주로 의전용으로 사용된다. 한편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좌익과 연관된 모든 것들이 금기시되어 인터내셔널가 또한 잊혀졌다. 그러다가 1980년대 민중음악 활동가들이 외국에서 악보를 다시 들여오며 복원되었다. 그 뒤에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시기 노동운동 노래패를 통해 현재 대한민국에서 부르는 인터내셔널가 가사가 확립되었다. 그래서 대한민국과 북한의 인터내셔널가 가사는 서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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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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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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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동음이의)
톨스토이(Толсто́й, Tolstoy/Tolstoi)는 러시아의 성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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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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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되시 팔
에르되시 팔(, , (책 《우리 수학자 모두는 약간 미친 겁니다》에서 "폴 에어디쉬"라고 표기하기도 했다.), 1913년 3월 26일~1996년 9월 20일)은 헝가리의 수학자이다. 그는 이산수학, 정수론, 조합론, 그래프 이론 등의 분야에서 방대한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이산수학 분야에서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고 제시하여 오늘날까지도 큰 영향력을 남기고 있다. 에르되시는 생애 동안 1,500편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수학 논문을 저술하였다. 또한 에르되시 수라는 상징적인 용어에서 볼 수 있듯, 에르되시는 공동 연구를 즐겨 수백 명의 다른 수학자들과 만나 함께 논문을 쓰던 사교적인 수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면서 평생을 수학 연구에 매진하였으며, 1996년 심장마비로 사망하기 몇 시간 전까지 바르샤바의 학술회의에서 문제를 풀고 있었다. 생애. 유년. 에르되시는 1913년 3월 2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에르되시의 아버지 에르되시 러요시()와 어머니 어너() 둘 다 고등학교 수학 교사였다. 아버지의 성은 원래 엥글렌데르()였는데, "에르되시"로 개명하였다. 에르되시는 누나가 둘 있었으나 그가 태어나기 전에 성홍열로 죽어서, 외동아들로 자랐다. 1914년에 아버지 에르되시 러요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공격해 온 러시아 제국 군대에 포로로 잡혀가 6년 동안 시베리아에서 전쟁 포로로 있었다. 에르되시의 어머니는 남편과 두 딸을 잃은 후 에르되시에 극도로 집착해, 에르되시는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가정 교사의 교육을 받았다. 집에 혼자 남겨지는 일이 잦던 에르되시는 수학 서적을 읽으며 스스로 공부했고, 4살 때에 혼자서 이미 알려져 있던 소수의 몇몇 성질을 발견해 냈다고 한다. 1920년에야 풀려나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이후 아들에게 수학과 영어를 가르쳤는데, 이때 에르되시가 익힌 영어의 독특한 억양은 생애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당시 헝가리의 유대인 대학 입학 제한에도 불구하고, 에르되시는 국가 시험 수상을 이유로 1930년에 외트뵈시 로란드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1934년 21세의 나이에 페예르 리포트() 아래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성년. 1934년에 에르되시는 헝가리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피하여 영국 맨체스터에 연구직을 얻어 망명하였다. (에르되시의 아버지와 두 명의 삼촌은 홀로코스트 동안 처형당했다.) 1938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자리를 얻었지만, 종신 재직권을 수여받지 못했다. 이 무렵부터 그는 그의 삶을 특징짓는 떠돌이 연구 생활을 시작하였다. 에르되시에 대한 기록은 그가 순진하고 아이같은 독특한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말한다. 일례로, 1941년 그는 다른 수학자와 열띤 토론을 하다가 미국 롱아일랜드의 군사 통신 시설을 모르고 지나쳤는데, 이들은 스파이 혐의로 붙잡히고 이 사건은 연방수사국의 기록 파일에 올려졌다. 또한 그는 어떤 직장에서도 오래 일하지 않고 수시로 각지를 떠돌아다녔는데, 그의 명성과 천재성으로 어느 대학에서든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그는 누구든지 그의 마음에 드는 주제를 가진 수학자라면 함께 논문을 썼고, 결과적으로 그는 거의 1500개의 공동 논문을 쓴, 역사상 공동연구를 가장 많이 한 수학자가 되었다. 그와 공동 저자로 묶인 수학자들이 너무도 많아 이러한 관계를 정리한 에르되시 수라는 말까지 만들어졌다. 이와 같이 에르되시는 혼자서는 논문을 거의 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누구보다도 수학을 ‘사회적 활동’으로 만든 수학자라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초, 에르되시의 연방수사국 기록은 그가 매카시 수사의 주목을 받게 하였다. 이 때문에 에르되시는 갑자기 미국행 귀국 비자를 거부당했고, 이후 10년 동안 많은 시간을 이스라엘에서 지내는 수 밖에 없었다. 1960년대 초 그는 다시 미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수차례 청원을 내서, 1963년 11월에 다시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에르되시는 죽음을 표현할 때 "떠난다"는 말을 썼고 "죽는다"란 말은 수학을 그만두는 것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했다. 그는 아이들을 엡실론(epsilon, 수론에서 무한소를 의미함)이라고 불렀고 아이들을 좋아했다. 그는 1983년/1984년 5만 미국 달러 상금의 울프상 수학 부문 등 많은 상들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단촐하게 살았으며 재산을 학생들을 돕거나 문제 풀이 상금으로 내거는 데에 쓰고는 했다. 1971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그는 암페타민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하루 최대 4-5시간밖에 자지 않고 극도로 오랜 시간 연구를 계속한 것으로 유명하다. 1979년에 이를 걱정한 에르되시의 친구 로널드 그레이엄이 그에게 한 달 동안 약을 먹지 않고 버티면 500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에르되시는 이 내기를 이겼지만 약물을 복용하지 않는 동안 연구를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이 바보같은 내기 때문에 인류의 수학 발전이 한 달 늦춰졌다"고 불평했다. 내기가 끝난 직후 에르되시는 다시 리탈린과 암페타민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30년간, 에르되시는 "공식적으로" 이스라엘과 미국, 영국의 몇 대학에 자리를 갖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는 어느 한 곳에도 머무르지 않고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대학들을 전전하며 방랑자로 생활하였다. 말년. 에르되시는 말년까지 활발한 연구 활동을 계속하였다. 1996년 9월 20일에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학회가 끝난 몇 시간 후 심근 경색으로 인하여 8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에르되시는 평생 독신이었으며 자녀를 두지 않았다. 에르되시는 부다페스트의 코즈머 가(街) 유대인 공동 묘지()에서 부모 옆에 매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농담이 적혀 있다. 업적. 에르되시의 수학적 업적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으며 그 양도 많다. 기본적으로 그는 이론이나 틀을 짜는 수학자가 아닌, 특별히 어렵다고 여겨지는 문제들의 해결사였다. 그는 특히 조합론, 그래프 이론, 수론 분야의 문제들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단지 문제를 푸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아름답고 기초적인 풀이를 얻고자 했다. 증명은 결과가 왜 참인지에 대한 직관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여러 단계의 복잡한 수순으로 이루어져 통찰력에 도움이 되지 않은 증명은 의미가 적다고 생각했다. 에르되시의 증명의 특징은 복잡한 문제를 아름답고 시각적인 방법으로 푼다는 점이다. 그는 1951년 수론 분야의 여러 논문으로 미국 수학회에서 수여하는 콜 상()을 수상했다. 어록. 에르되시는 항상 재치있는 어구들을 만들었는데 그 중 유명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에르되시는 수학적으로 아름다운 증명을 볼 때마다 “그 책에 있는 증명이군!(This one's from "The Book"!)”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 책’이란 신이 수학 정리에 대한 가장 명쾌하고 최적인 증명을 써 둔 상상 속의 책이다. (에르되시의 전기의 번역본에서 ‘신의 책’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1985년에 그는 한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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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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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저위붕 작전
베저위붕 작전() 또는 베저 작전은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스칸디나비아의 중립국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한 작전이다. 암호명 "베저위붕"은 독일어로 "베저강 훈련"을 뜻한다. 1940년 4월 9일 새벽, 독일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략하였다. 나치는 프랑스와 영국이 이들 국가와 손을 잡거나 점령하여 독일을 공격하는 교두보로 삼을 계획(이는 실제로 공공연하게 논의되고 있었다)을 세우는 것에 대한 대비라며 침략을 정당화했다. 이들이 도착하자마자 두 나라 주재 독일 대사들이 양국 정부에 독일군이 영국과 프랑스의 침략 야욕으로부터 양국의 중립을 보호하기 위해 왔다고 통보했다. 독일의 덴마크 침공. 덴마크는 독일의 입장에서 볼 때 전략적으로 그리 중요한 곳은 아니었다. 노르웨이에 대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징검다리였으며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얼마만큼 관리가 필요했다는 것뿐이었다. 덴마크는 작고 평지로 이루어져 독일군의 작전 수행에는 딱 알맞은 곳이었다. 그럼에도 새벽 초 덴마크군 몇몇 연대가 독일군에 대해 저항을 하여 열 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덴마크 정부는 순식간에 내정에 간섭받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항복하였다. 사실 독일 대사가 덴마크 정부를 찾아와 독일군의 진주를 허락하라고 요구하기도 전에 이미 독일군은 국경을 넘은 상태였다. 하지만, 덴마크가 별다른 저항없이 순순히 항복한 관계로, 1943년 여름까지는 독일 점령은 매우 관대했다. 그리하여 덴마크의 유대인들에 대한 체포와 추방도 지연이 되어 그들은 거의 모두 스웨덴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덴마크에서 추방된 유대인의 수는 500명을 넘지 않고 50명 미만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당시 덴마크의 왕이었던 크리스티안 10세는 매일 코펜하겐을 국왕의 정복을 입고 산책하면서 침묵으로 항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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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의 국기
케냐의 국기는 1963년 12월 12일 독립과 동시에 지정되었다. 국기의 디자인은 케냐의 독립 운동을 주도한 케냐의 정치 단체인 케냐 아프리카 민족동맹(Kenya African National Union)의 기를 바탕으로 한 디자인이다. 검은색, 빨간색, 초록색 가로 줄무늬 사이에 얇은 하얀색 가로 줄무늬 2개가 그려져 있으며 국기 가운데에는 마사이족의 방패와 창이 그려져 있다. 검정, 빨강, 녹색은 각각 흑인, 피, 자연을 상징하는 범아프리카색이다. 흰색은 평화를 뜻하며, 마사이족의 방패와 창은 자유의 수호를 나타낸다. 규격과 색상. 케냐의 국기 규격과 색상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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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도범함수 이론
밀도범함수 이론(Density functional theory, DFT)은 물질, 분자 내부에 전자가 들어있는 모양과 그 에너지를 양자역학으로 계산하기 위한 이론의 하나이다. 이를 통해 어떤 분자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 특정 분자의 모양과 성질 등등을 예측할 수 있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과학 계산들 중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양자역학 계산 분야 중 하나이다. 그러나, 상사 구조를 갖는 다체 문제에 어디든 적용할 수 있으므로, 최근 전자구조와 별 상관 없는 많은 통계물리학에 사용되기도 하다. 역사. 엔리코 페르미가 기본적인 이론을 도입하였다. 월터 콘() 등이 이를 개량하고 발전시켰다. 콘은 이 공로로 199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다. 개론. 물질의 성질을 공부하려면 {많은 원자핵}+{많은 전자}문제, 즉 다체 물제를 풀어야 한다. 그러나, 단순한 원자가 아닌 복잡한 분자(혹은 고체 등)에 대한 문제를 풀기는 이론상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므로 몇 개의 근사 방법이 필요하다. 첫 번째 근사는 보른-오펜하이머 근사(Born-Oppenheimer approximation)로 전자보다 수천배 이상 무거운 핵을 고정된 것으로 보고 핵에 의한 전기장 안에서 전자의 운동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즉, 많은 전자로 이루어진 시스템 문제를 푼다는 것이다. 밀도범함수이론에서는 많은 전자 문제를 단순히 전자들의 파동함수들대신 전자 밀도함수로 대체함으로 손쉽게 계산하도록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공간상의 어떤 점에 전자가 있을 때 이 전자가 느끼는 퍼텐셜은 다른 모든 곳에서 오는 것을 밀도함수를 통한 평균장으로 볼 수 있다.(Mean Field Theory/Approximation). 이때 전자의 밀도 함수는 전자의 파동 함수들을 절댓값을 구해 제곱해서 채워진 준위까지 더해준 것으로 정의된다. 밀도범함수의 출발은 원자핵+전자 시스템을 풀기위해 시작됐지만 이론상 많은 동일한 형태의 입자/장 상호작용을 하는 다체 문제면 적용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전위. 이상의 논의로부터, 시스템의 전위는 으로 나타난다. 이 중 마지막에 교환-상관 퍼텐셜은 아무도 정확히 어떤형태를 가지는지 모르고 보통의 경우 양자몬테카를로 계산값과 장론의 결과를 근사적으로 잘 맞추는 형태로 시도하게 된다. 그리고 국소 전자 밀도에만 의존하는 교환-상관 퍼텐셜 범함수를 사용하게 되면 국소 밀도 근사(local density approximation)라고 하고, 선형 근사를 쓰게 되면 일반화된 기울기 근사(generalized gradient approximation)이라고 한다. 많은 경우 국소 밀도 근사만으로 계를 잘 설명할 수 있지만, 전하 이동이 큰 계에서는 잘 맞지 않는다. 기술적으로, 공간상의 어떤 점에서 함수 값을 구할 때 모든공간의 정보를 필요로한 경우 이를 "논로컬(non-local)"하다고 말하고 해당점의 정보만 필요한 경우를 국소적()이라고 한다. 위의 퍼텐셜에서는 외부요인에 의한 퍼텐셜은 local혹은 non-local할 수 있고, 하트리 퍼텐셜은 확실히 non-local하며, local density approximation을 사용했을때는 교환-상관 퍼텐셜은 local하고 generalized gradient approximation을 사용했을 경우, 즉, 1차미분 기여도를 포함했을 때에는 semi-local하다고 한다. 수학. 호헨버그(Hohenberg) 와 콘(Kohn)의 정리: 콘-샴(Kohn-Sham) 정리: 정확한 바닥 상태 밀도 함수는 콘-샴 방정식이라고 하는 슈뢰딩거 방정식과 흡사한 방정식을 풀면 구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해밀토니언 formula_6는 여기서 formula_8은 전자 질량이다. 푸는 법. 정리하면 보통 계산을 위해서는 처음에 밀접 결합 근사 등으로 "적당히" 파동 함수를 근사하고 1, 2, 3의 과정을 거치면 처음에 대입한 파동 함수보다 더 나은 파동 함수를 얻는다. 다시 이것을 초기 예상값으로 하여 재계산을 거듭한다. 실제에서는 적당히 (상당히 보수적으로) 이전 단계의 초기 예상값과 계산 결과값을 잘 섞어서 초기 예상값으로 사용한다. 즉 self-consistent 방법으로 풀이한다. 쉬운 설명. 전자들이 돌아 다니는 분자들에서 전자들이 얼마나 불안하고 빨리 돌아다니고 있는지 그 에너지를 구하려면 양자 역학적으로 묘사해야 된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 이해하고 계산하려고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양자 역학 계산을 수십 개 수백 개 전자에 대해 하려 한다면(아주 단순한 분자인 부탄 가스 분자 2개만 있어도 전자 숫자가 백개에 이른다.) 그것은 너무나 긴 시간을 소모하는 일이다. 그래서 고안된 방법 중 하나는 전자 하나 하나의 움직임을 쫓아가지 말고 전자 무더기를 한 덩어리로 따져 보는 것이다. 전자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에는 덩어리가 많이 쏠려 있고, 전자가 덜 출몰하는 지역에는 덩어리가 조금밖에 없는 울퉁불퉁한 도넛의 모양으로 전자들을 그려본다. 전자 하나 하나를 따지지 않고, 도넛으로 된 전자 덩어리만 생각해도 에너지를 구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도넛으로 된 전자 덩어리의 모양과 에너지와의 관계를 표시하는 수식이 KS 방정식이다. 이 전자 덩어리의 모양을 구하는 방법인 Hartree-Fock의 자체-일관성 장(SCF; self-consistent field) 방법은 다음과 같다. 아무렇게 도넛을 만들어 놓고 방정식(전자들이 만족해야 할 조건식)을 얼마나 만족시키는지 계산해 본다. 실제 전자의 식과 많이 다른 값이 나온다면 도넛의 어떤 부분을 수정하여 모양을 조금씩 바꾼다. 잘 바꾸었다면, 이전보다는 더 실제와 근사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조건식이 상당히 잘 맞을 때까지 바꾸어 나가면, 우리가 원하는 전자 덩어리 모양과 제법 비슷한 상태를 얻을 수 있다. 밀도범함수론에서 가장 신경 쓸 필요가 있는 교환 에너지(exchange energy)를 구하는 범함수란,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한다. 왼쪽에 있는 전자 하나가 발에 땀나게 오른쪽으로 뛰어가고, 오른쪽에 있는 전자 하나가 열심히 뛰어서 왼쪽으로 가서 두 전자가 자리를 살짝 바꾼 경우를 따져 보자. 두 전자는 열심히 뛰어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두 전자가 정확히 자리를 바꾸기만 한 경우에는, 전자가 분명히 많이 움직여서 에너지를 갖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이고, 이것은 양자 역학에서는 전자가 움직이지 않았다는 말과 다를바 없게(!) 평가되어야 한다. 즉 이런 "자리만 바꾸기"가 많이 일어난다면, 움직였다고 한들 움직이지 않은 것이나 다를바 없는 것들이 많았으므로, 실제 에너지는 더 낮아져야만 한다. (양자 역학적으로, 그런 것은 움직인 것이 아니다.) 밀도범함수 이론은 전자들이 선풍기의 날개나 헬리콥터 날개처럼 매우 빨리 돌아다녀서 멀리서 보면 마치 덩어리처럼 보인다는 식으로 전자를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전자끼리 자리만 바꾼 경우에는 움직이지 않은 것으로 치는 것을 따로 계산해 주어야 한다. 이런 자리만 바꾼 경우가 얼마나 있는지를 도넛의 모양을 대강 보고 짐작해 주어야 하며, 이 짐작을 하는 방법이 바로, "교환 에너지 범함수"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코릴레이션(상관성) 에너지 라는 것도 동시에 고려해 주므로, 교환 코릴레이션(상관성) (exchange correlation) 범함수라는 것을 사용하게 된다. 좋은 교환 코릴레이션 범함수를 구하는 방법은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 대강 만들어내는 것이고, 기존의 방법들에서 나온 결과를 참조시켜 작동하도록 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B3LYP라는 범함수가 대체로 모든 경우에 큰 오류가 없다고 평가받고 있다. 소프트웨어.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고 백 번 보는 것보다 한 번 해 보는 게 좋다는 말이 있듯이 밀도범함수이론을 컴퓨터에서 돌려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대개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혼자서 또는 팀을 짜서 구현하는 것이고 두 번째 방법은 남이 짜 놓은 것을 가져다가 잘 쓰면 된다. 후자의 경우를 먼저 살펴 보면 ElectronicStructure.org/software 에 자유 소프트웨어를 구할 수 있는 다수의 링크가 있다. (화학쪽 소프트웨어로는 NWChem과 GAMESS 가 있다.) 대부분의 소프트웨어가 기본적으로 운영 체제는 유닉스나 리눅스로 가정하고 있고, 다른 많은 과학 소프트웨어 배포본이 그렇듯이 포트란 소스가 있고 이걸 컴파일해서 쓰는 형태이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상용 포트란 컴파일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분명히, BLAS나 LAPACK 같은 수학 라이브러리가 필요할텐데 netlib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컴파일된 프로그램을 돌리기 위해서는 작은 문제가 아니라면 슈퍼 컴퓨터나 리눅스 클러스터가 필요하다. 이는 다란 메모리가 필요하고 따라서 받아들이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문제이기 때문에 N 순의 알고리즘이 적용되어 있지 않다면 O(N^3)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소스 코드를 수정하는 것은 쉽지는 않겠지만 읽는 것으로는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다음에 전자의 경우를 살펴 보겠다. 구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항은 기저를 결정하는 일이다. (기저는 힐베르트 공간을 생성하는 완전한 세트이기 때문에 기저가 바뀌면 representation, 쉽게 말해서 수식이 바뀌기 때문이다.) 흔히 쓰이는 기저집합은 평면파(plane wave)와 local orbital (가우시안을 사용한다 해서 가우시안-Gaussian-이라고 하는 유명한 소프트웨어가 있음.)가 있다. 그 다음 결정할 일은 all electron을 할 건지 pseudopotential을 쓸 것인지 또 교환상관 퍼텐셜은 어떤 것을 쓸 것인지를 결정한다. 이제 굵은 가지는 결정되었고 세부 사항으로 어떤 플랫폼에서 돌릴 것인지 어떤 수학 라이브러리를 쓸 것인지 결정하고 코드를 쓰면 되겠다. (숙련된 프로그래머라면 대략 몇 달 만에 겨우 돌아가는 코드를 짤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그 코드가 쓸만하게 될 때까지는 수년~수십 년이 걸릴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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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
이소룡(, , , , 1940년 11월 27일~1973년 7월 20일)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활동한 중국계 미국인 무술 배우이자 철학가, 무술가, 영화 감독, 각본가 이며, 절권도의 창시자이자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무술가이자 문화적 아이콘으로 평가된다. 그는 영화배우인 브랜든 리와 섀넌 리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는 생전 체격은 172cm, 62kg(변동은 있었다)이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출생하였으며 홍콩에서 성장하였다. 그가 홍콩과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영화는 기존 홍콩 무술 영화를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덕분에 지금도 홍콩 액션 스타 계보의 원조격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제작한 영화는 이후 홍콩 뿐 아니라 세계 무술 영화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생애. 1940년 11월 27일 샌프란시스코 차이나 타운의 중국 병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리하이취안(李海泉,이해천, 1901년~1965년)은 중국인이었으며, 신자였던 어머니 (何愛瑜,하애유, 1907년~1996년)는 중국인과 독일계 백인의 혼혈인이다. 이소룡이 생후 3개월이었을 때 부모와 홍콩으로 돌아갔다. 엽문을 스승으로 섬김. 이소룡은 홍콩에서 무용을 떨치던 그의 스승인 엽문을 사사(師事)하여 영춘권을 배웠고, 공력권, 홍가권, 권투, 펜싱 등을 배웠다. 아울러 한국인 태권도 고수 이준구 사범과 교류하면서 태권도의 발차기를 배워 자신의 절권도를 정립하는데 도움을 받았다. 미국행. 이소룡의 신변을 걱정하던 부모는 이소룡을 미국으로 보내 자신들의 오랜 친구와 지내게 하기로 결심했다. 이소룡은 단돈 $100을 지니고 미국으로 향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잠시 지낸 후 이소룡은 시애틀로 옮겨 역시 아버지의 친구였던 루비 초우(Ruby Chow) 밑에서 일하게 된다. 1959년 이소룡은 시애틀에서 에디슨 기술 고등학교(Edison Technical School)를 졸업했다. 그는 워싱턴 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에 진학하여 철학, 연극, 심리학 등을 공부한다. 1964년에 결혼하게 되는 미래의 배우자 린다 에머리를 만난 것도 바로 워싱턴 대학에서다. 결혼. 그는 린다 사이에 브랜든 리(1965년~1993년)와 섀넌 리(1969년~) 두 자녀를 두었다. 영화 배우가 되었던 브랜든 리는 1993년 영화 《크로우》를 촬영 도중 총기오발사고로 사망했으며, 섀넌 리는 1990년대에 몇몇 저예산 영화에 출연하였다. 이름. 이소룡이 출생했을 때 붙여진 광동식 이름은 진번(振藩)이었다. 그가 태어나자 메리 글러버 박사가 '브루스(Bruce)'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당시 그의 어머니는 영어 이름을 준비해 놓지 않은 상태여서 그 이름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소룡의 영어 이름은 그가 라사이 칼리지(La Salle College)에 입학하기까지는 가족들 사이에서 불리지 않았다. 경찰 연행 사건. 이소룡이 19살이던 1959년 4월에 싸움에 휘말려, 상대방을 크게 다치게 하여 경찰에 연행되었다. 연기 경력. 아역출연. 이소룡의 아버지는 유명한 광둥 경극 배우였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주 어린 나이부터 영화를 접하게 되었고, 생후 3개월에 《금문녀》라는 영화로 데뷔하였다. 그가 18세가 되었을 때 이미 그는 스무 편의 영화에 출연한 상태였다. 텔레비전 시리즈 출연. 미국에 체류하던 시절인 1958년에서 1964년까지 그는 오직 무술만을 연마하며 영화계와는 떨어져 지낸다. 하지만 1964년 롱비치 가라데 토너먼트에서 이소룡이 보인 고도의 무술 시범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무술가였던 윌리엄 도지어(William Dozier)의 눈에 띄게 된다. 도지어는 곧 이소룡을 불러 오디션을 치르는데 그의 전광석화 같은 동작은 제작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결국 TV 시리즈 《그린 호넷》("The Green Hornet")에서 밴 윌리엄스(Van Williams)와 더불어 가토(Kato) 역을 맡게 된다. 이 시리즈는 1966년부터 1967년까지 한 시즌만을 상영하고 종료되었다. 말로우. 1969년 이소룡은 처음으로 미국 영화 《말로우》("Marlowe")에 출연하였다. 그는 폭력배로 출연하여 사립 탐정인 필립 말로우(제임스 가너 분)를 위협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말로우를 걷어 차려다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죽는 역을 연기했다. 롱 스트리트. 1971년 이소룡은 TV 드라마 《롱스트리트》("Longstreet")에 4개의 에피소드에 걸쳐 무술 선생으로 출연하게 된다. 이후 이소룡은 자신의 아이디어로 《"The Warrior"》라는 시리즈를 제안하게 되는데, 일설에 의하면 이소룡의 이 아이디어는 《쿵후》("Kung Fu")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고 하는데,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워너 브러더스는 이소룡의 노력에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소림사 무술가의 역할은 무술가가 아닌 데이비드 캐러딘에게 주어진다. 그 이유는 당시 중국인이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작품은 미국 대중이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라고 한다. 홍콩 골든 하베스트에서의 활동. 미국 상영물에서 자신의 조연적 역할에 만족하지 못한 이소룡은 홍콩으로 돌아가는데, 골든 하베스트 (Golden Harvest) 대표 추문회(鄒文懷; Raymond Chow)로부터 영화 출연 계약을 제시 받게 된다. 이소룡은 1971년 개봉작 《당산대형》(唐山大兄; "The Big Boss")에서 첫 주연을 맡는데, 이 영화는 아시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순식간에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는다. 이후 그는 다시 두 개의 성공작을 찍게 되는데, 바로 《정무문》과 《맹룡과강》이다. 특히 《맹룡과강》에서는 그가 극작가, 감독, 주연, 그리고 무술 안무까지 총괄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1964년 미국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의 시범을 통해 그는 가라데 챔피언이었던 척 노리스를 만났었다. 이 인연을 계기로 《맹룡과강》에서 로마, 콜로세움의 최후 결투 씬으로 그를 출연시키게 된다. 용쟁호투. 1973년 이소룡은 골든 하베스트사와 워너 브러더스사의 최초의 공동 제작 작품인 《용쟁호투》의 주연을 맡게 된다. 이 영화로 인해 이소룡은 미국과 유럽에서도 큰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소룡은 이 때 알게 된 당시 엑스트라 배우인 청룽(성룡)을 후원해 준다. 하지만 이 작품의 촬영이 종료되고 몇 달 후, 그리고 불과 개봉 3주 전에 이소룡은 갑작스레 사망하고 만다. 《용쟁호투》는 그해 최고 수입을 올린 영화가 되었고 이소룡을 무술의 전설로 남기게 된다. 《용쟁호투》의 제작비는 1973년 당시 US$ 850,000였다.. 지금까지 《용쟁호투》는 전 세계에서 2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더군다나 《용쟁호투》라는 영화를 모티브로 해서 《더블 드래곤》이라는 비디오 게임도 만들어졌다. 《용쟁호투》의 감독인 로버트 클라우스(Robert Clouse)는 이소룡이 각본을 쓰고 연출하려다 못다 끝낸 《사망유희》를 완성시키려 시도했다. 이소룡은 이미 《사망유희》를 위해 40분 이상의 촬영을 마친 상태였다. 로버트 클라우스는 1978년 새로운 줄거리와 캐스팅을 가지고 대역과 이소룡의 다른 영화 장면을 사용하여 완성시킨다. 하지만 이 짜깁기 영화는 이소룡이 찍은 40분 중 15분만을 포함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대역을 사용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빠진 나머지 촬영분은 22년 후 발견되어 다큐멘터리 《""》에서 공개되었다. 척 노리스와의 인연. 1964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롱비치에서 있었던 무술 시범을 관람하기 위해 이소룡이 나타났는데 그 곳에서 무술 시범을 하는 척 노리스를 만났다. 이소룡은 노리스의 무술 시범에 감탄하여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에 같이 출연하자는 제의를 했고 노리스는 이를 흔쾌히 응했다. 이 후 두사람은 절친이 되었으며 노리스는 이소룡의 영화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1940년 생 동갑내기였기 때문에 마음이 잘 통했다. 때문에 영화를 촬영할 때 호흡을 맞추기도 쉬웠다고 한다. 성룡과의 인연. 영화 《용쟁호투》에서 이소룡은 많은 적들을 차례로 때려눕히게 되어 있었다. 당시 성룡은 엑스트라였으며 영화 용쟁호투가 액션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스턴트맨을 별로 사용하지 않아 엑스트라가 스턴트까지 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성룡은 이소룡에게 맨 마지막으로 매를 맞고 쓰러지는 역할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소룡은 성룡을 잘못 때려 크게 다치게 했다. 너무나 미안해 했던 이소룡은 성룡에게 여러 번에 걸쳐 사과를 되풀이했다. 그 이후 이소룡은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어 성룡을 연기자로서 대성시키는 계기를 만들어줬다고 한다. 그래서 성룡은 이소룡을 잊을 수 없는 은인 중의 은인이라 회고했다. 물론 이소룡 입장에선 얼굴 좀 익은 귀여운 엑스트라 중 한명이였겠지만, 당시 무명이던 성룡 입장에선 이런 인연이 각별하게 와닿았을듯 하다. 죽음. 이소룡의 죽음은 1973년 5월 10일의 사건에서 어느 정도 예견되었다. 이소룡은 골든 하베스트 스튜디오에서 《용쟁호투》 더빙 작업 도중 갑자기 쓰러지게 된다. 전신 발작과 뇌부종으로 그는 긴급히 홍콩 침례교회 병원(Hong Kong Baptist Hostpital)에 실려가는데 의사들은 마니톨(Mannitol)을 투여하여 그를 살릴 수 있었다. 이 증상들은 이후 그가 사망한 날 다시 나타나게 된다. 1973년 7월 20일 홍콩, 이소룡은 제임스 본드였던 조지 라젠비와의 저녁 약속을 앞두고 있었다. 이소룡은 그와 이후에 영화를 제작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소룡의 배우자인 린다에 의하면 이소룡은 골든 하베스트사 제작자인 레이먼드 초우와 2시에 만나 《사망유희》 제작에 대해 의논하였다. 레이먼드 초우와 이소룡은 4시까지 함께 있다가, 이소룡의 친구이자 대만 여배우였던 베티 팅 페이(Betty Ting Pei)의 아파트로 운전하여 갔으며, 세 사람은 페이의 집에서 극본을 검토했다. 초우는 저녁 식사 약속을 위해 떠났다. 잠시 후, 이소룡은 두통을 호소했고, 팅 페이는 아스피린과 근이완제가 포함되어 있는 이쿠아제식(Equagesic)이라는 진통제를 건네줬다. 오후 7시 30분 경, 이소룡은 잠이 들었다. 이소룡이 약속된 저녁 식사에 나타나지 않자, 초우는 팅 페이의 아파트로 돌아왔지만 이소룡은 깨어나지 않았다. 의사를 불러 10분간 소생을 시도한 후 실패하자 이소룡은 구급차에 실려 퀸 엘리자베스 병원(Queen Elizabeth Hospital)로 후송된다. 하지만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숨져 있었다. 외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뇌는 크게 부어올라 있었다.(1400에서 1575그램으로). 이소룡은 겨우 향년 33세였다. 부검. 부검 결과 체내에 이쿠아제식과 미량의 대마초 성분이 검출되었다. 2005년 10월 15일 인터뷰에서 초우는 이소룡이 Equagesic의 근육 이완제 - 진통제에 일반적으로 들어가는 성분인 - 에 예민 반응을 일으켜 사망했다고 설명했다. 이소룡의 공식 사인은 '과실사(death by misadventure)'로 발표되었다. 하지만 이소룡이 처음 쓰러졌을 때 그를 치료한 랭퍼드(Langford) 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0만건 이상의 부검의 경력을 가진 R. D. 티어(R. D. Teare) 교수는 이소룡의 죽음 건에 배치된 최고의 권위자였다. 그는 대마 성분의 검출은 우연에 불과하며 그것이 이소룡의 죽음을 야기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책임하고 비이성적"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결론은 성분에 대한 과민 반응에 의한 뇌부종으로 인한 사망이었다. 피터 우 박사(Dr. Peter Wu)의 초기 소견은 이소룡의 사인은 대마와 이쿠아제식 둘 다에 의해서라는 것이었지만, 이후 그는 대마에 의한 사망이라는 소견에는 무리가 있다고 입장을 바꿨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사망 원인을 두고 왈가왈부가 이어지는 것은 그만큼 이소룡이란 대스타가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이 안타까운 팬들이 많다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장례. 이소룡 사후 그의 아내 린다는 시애틀로 돌아와 레이크 뷰 공원묘지(Lakeview Cemetery) 276번에 안장했다.. 스티브 맥퀸, 척 노리스 등이 운구를 맡았다. 이소룡의 전설적인 위치, 젊은 나이에 괴이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은 그의 사인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삼합회에 의한 살해, 그리고 그의 가족이 저주를 받았다는 저주론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저주론"은 20년후 그의 아들 브랜든 리마저 28세의 나이에 영화 《크로우》 촬영 도중 총기오발사고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더욱 널리 퍼지고 있다. 크로우는 그의 아버지 이소룡의 마지막 영화였던 《사망유희》와 마찬가지로 브랜든 리의 사후에 개봉되었고 컬트의 지위를 얻게 된다. 브랜든 리는 그의 아버지 곁에 묻히게 된다. 그 외. 이소룡의 근육은 벌크(크기)는 떨어지는 대신 극단적으로 데피(밀도)가 발달한 몸매를 가졌었다. 특히 보디빌더들도 감탄할 정도로 벌크 대비 넓은 광배근은 지금도 회자되는 부분. 밑가슴의 질감도 대단하다. 성룡, 홍금보 등과 함께 영화사 골든 하베스트 소속 배우 중 하나인 그가 찍은 작품으로는 《당산대형》,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 《사망유희》 등이 있다. 《사망유희》는 제작 도중 이소룡이 사망하여 한국 출신인 김태정을 대역으로 하여 완성되었다. 이소룡의 마지막 기획 작품은 후에 왕우가 타이틀롤을 맡은 《직도황룡(直搗黃龍;The Man from Hong Kong/ 한국개봉명: 스카이하이)》이다. 골든 하베스트와 호주의 합작 형식으로 제작되었으며, 사망유희 제작 후 이소룡의 차기작으로 예정되었었다. 이소룡의 죽음으로 왕우가 대신 주연을 하였으며 제임스 본드 배우로 당시 유명했던 조지 레이전비가 출연한다. 미국의 연예 전문 잡지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인터넷 판에서 보도한 '탁월한 액션 배우 25명'에서 11위를 차지했다. 아들 '이국호'는 대가 단절되었지만 딸 '이향응'은 슬하에 '렌 키슬러(2003년~)'라는 딸을 두었다. 렌 키슬러는 이소룡의 외손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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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트륨
나트륨(, ) 또는 소듐( 미국식: [soʊdiəm], 영국식: [səʊdiəm])은 알칼리 금속에 속하는 화학 원소로 기호는 Na(←)이고 원자 번호는 11, 원자량은 22.9898 g/mol이다. 자연상태로는 생성되지 않으며, 화합물로부터 추출이 가능하다. 명칭. 독일어식 표기인 나트륨으로 불리다가 IUPAC 공식 표기인 소듐()을 따라서 대한화학회에서는 공식 명칭을 소듐으로 개정하되 당분간은 나트륨도 혼용 가능하도록 결정하였다가 2014년부터 대한화학회에서 나트륨과 소듐 복수 표준에서 소듐만 인정하기로 변경하였다. 현재의 국립국어원 지정 표준어는 나트륨이다. 문화어에서는 나트륨을 사용하다가 1970년경 나트리움으로 개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트륨"이란 이름은 이집트의 소다 광산이 있는 나트론(Natron)에서 유래했다. "소듐"이란 이름은 아라비아어의 소다(Soda)에서 유래하였으며, 1807년에 영국의 험프리 데이비가 수산화나트륨을 전기분해하여 발견하였다. 성질. 물리적 성질. 무르고 금속 광택이 있는 금속으로 노란 불꽃을 내며 산화된다. 나이프로 몹시 쉽게 잘리며 잘린 단면은 즉시 산화되어 흰색의 산화나트륨, 수산화나트륨, 탄산나트륨 등으로 덮인다. 화학적 성질. 반응성이 강하여 공기중에 보관할 수 없고 좌측 그림과 같이 보관하여야 한다. 공업용 나트륨의 경우 큰 주괴 형태로 운송되고 거래되기도 한다. 알칼리 금속 중에서는 반응성이 아주 큰 편은 아니기에 겉에 케로센을 발라 밀봉하여 보관할 수 있다. 순도 높은 나트륨 금속은 진공이나 아르곤 대기 하에서 보관해야만 한다. 연성과 전성이 크기에 포일 형태로 쉽게 제조할 수 있으나 대기와 접촉시 급속히 산화하며 때때로 불이 붙기 때문에 거의 생산하지 않는다. 에탄올, 이소프로판올 등과 온순한게 반응하여 알콕사이드(alkoxide) 화합물을 생성한다. 습기 높은 공기 중에서는 생성된 수산화나트륨 탓에 수증기를 빨아들이며 때때로 폭발한다. 밀폐된 공간에서 열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단열하여도 어느 순간 갑자기 폭발할 수 있다. 건조한 대기 하에서는 어느 정도 안정한 편이다. 소량의 물과 반응시키면 쉽게 불이 붙는다. 다량의 물과는 수산화나트륨을 생성하고 수소를 방출하며 격렬히 반응하다 불타는 용융된 나트륨 방울을 튀기며 폭발한다. 폭발의 원인은 쿨롱폭발로 알려져 있다. 강력하고 값싼 환원제로 유기화학에서 종종 사용된다. 다른 금속들을 소량 환원하는데도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3주기 1족의 알칼리 금속으로 1개의 원자가 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1가 양이온이 되기 쉽다. 나트륨의 특성. 지구 지각 내 원소 함량에서 6번째에 속하지만 높은 반응성으로 인하여 금속임에도 불구하고 화학식으로 나타낼수 있으며, 홑원소 물질로는 존재하지 않고 대부분 장석이나 염화나트륨과 같은 형태로 존재한다. 생산. 세계 각지의 암염이나 소다회, 또는 바닷물에서 전기분해로 얻는다. 나트륨 금속의 가격은 알칼리 금속중에서 가장 낮기 때문에 유용한 환원제로 종종 선택된다. 공업용 나트륨은 주로 주괴(ingot) 형태로 만든다. 나트륨 화합물. 소금. 생명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성분인 소금(염화나트륨, NaCl)의 구성 요소로서 주로 바닷물 속에 용해되어 있으며 일부는 암염 등의 형태로 육지 및 지하에도 존재한다. 해수의 염류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탄산나트륨. 탄산나트륨(Na2CO3)은 무기화합물의 한 종류로, 탄산과 수산화나트륨의 염이다. 유리에 주로 포함되어 있어 빛의 통과시, 자외선을 차단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기타 화합물. NaOH(수산화나트륨, 가성소다), NaNO3(질산 나트륨), Na2S(황화 나트륨), Na2SO4(황산 나트륨) 등이 있다. 이들 나트륨 이온(Na+)이 포함된 염들은 물에 잘 녹는다. 용도. 생물. 액체나 세포의 삼투압을 일정하게 보존하고, 나트륨 이온은 칼륨 이온과 함께 신경 내부에서 신호의 전달에 사용된다. 이러한 생리적인 메카니즘의 조절에 관여하는 세포내에서의 나트륨-칼륨 펌프는 물질대사에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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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텔레비전
디지털 텔레비전(Digital Television, DTV)은 기존의 텔레비전에서 아날로그 신호를 사용했던 것에 반해, 디지털 신호를 이용하여 동영상과 소리를 방송 및 수신할 수 있는 방송 시스템을 말한다. 디지털 텔레비전은 디지털 방식으로 압축되고 변조된 데이터를 이용하므로, 디지털 텔레비전용으로 설계된 텔레비전 수상기나 셋톱박스를 통해서만 시청할 수 있다. 디지털 텔레비전은 기존의 텔레비전에 비해 몇 가지 장점을 가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채널이 차지하는 대역폭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멀티캐스팅(한 채널에 여러 프로그램을 동시에 방송하는 기능), 전자 프로그램 가이드, 대화형 텔레비전 등의 특수한 서비스들도 가능하다. 디지털 텔레비전은 아날로그 텔레비전보다 나은 수준의 화질과 음성을 제공한다. 하지만 디지털 텔레비전의 영상 기술은 아직 초기 단계이므로 아날로그 텔레비전이나 영화 필름에서 나타나지 않는 화질상의 문제점들을 개선할 여지가 많이 남아있다. 이것은 현재 사용되는 대역폭 및 (MPEG-2와 같은) 압축 알고리즘의 제한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이지만, 16/35mm 필름과 같은 원본 영상과 세밀하게 비교해 보지 않는 이상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정도는 아니다. 개요. 디지털 TV는 아날로그 TV와 같은 대역폭 (6 MHz 혹은 7 MHz)에서 더 많은 채널을 수신하고 HD 급 방송을 볼 수 있다. 디지털 신호는 아날로그 신호가 가지고 있던 "고스트 현상" 이나 "스노우 노이즈", 그리고 오디오의 고정 노이즈와 같은 증상을 제거하여 깨끗한 방송을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수신율이 낮은 곳에서는 MPEG 압축 방식에 의해 "블로킹" 과 같은 새로운 증상이 나타나거나, 아날로그 TV에서는 약간의 노이즈와 함께 시청이 가능했던 방송들을 전혀 시청할 수 없거나 하는 경우가 발생된다. 방송사에서 결정한 기술적인 표준에 정의된 철학과 오류 정정 수준에 따라 디지털 TV는 완벽하게 동작하거나 전혀 동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HD급 디지털 TV로의 전환 과정에서 화면의 가로세로비 형식을 4:3에서 16:9 로 전환하는 문제가 있다. 이로 인해 TV 화면의 형식이 영화나 사람의 시각에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기존의 화면에서는 "레터박스" 라고 하여 4:3 형식의 화면의 위아래에 검은 띠를 넣어서 화면의 가로세로비를 16:9 로 맞추었다. 디지털 방송 시장. 지상파. 디지털 지상파 텔레비전은 각개국에서 개발 단계에 있다. 위성파. 디지털 텔레비전은 이미 가능한 대역폭 내에서 수많은 채널을 서비스하고 있는 위성파 텔레비전 시장에서 살아 남았다. 미국과 영국의 디지털 위성파 텔레비전의 사업 모델은 케이블 TV와 유사하다. 디지털 위성파 텔레비전 사업자들은 pay-TV 와 같이 많은 수의 채널들을 패키지로 묶어 서비스하려는 경향이 있다. 위성 방송은 지상파 방송에 비해 더 넓은 RF 대역폭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채널의 수와 고화질의 방송을 제공할 수 있다. 케이블. 이미 기존의 아날로그 케이블 셋톱박스가 공급된 곳에서는 디지털 방송을 수신하기 위해 셋톱박스의 교체가 필요하다. 사용자 입장에서 주된 이점으로는 단순히 화질이 좋아진 것과 채널이 늘어난 것이지만, (케이블 사업자가 셋톱박스 하드웨어와 미들웨어 소프트웨어를 선택하는 것에 따라) 아날로그 방송에 비해 더 많은 기능이 추가될 수도 있다. 종종 부가 정보가 포함된 (일주일 단위의) TV 가이드를 보거나, 특정 프로그램을 예약한 뒤 시간을 알려 주거나, 부모가 아이들이 볼 방송의 등급을 제한하는 등의 기능이 포함되기도 한다. 케이블 사업자들은 또한 디지털로 방송되는 영상물을 DES 와 같은 방식으로 암호화하여 더 나은 등급 제한 기능을 제공하거나 불법적인 접근을 방지하기도 한다. 더 진보된 케이블 네트워크에서는 상호대화형 기술을 사용하여 디지털 TV 용 셋톱박스에서 사업자 측에게 사용자의 정보를 넘겨주는 양방향 데이터 통신이 가능하다. 이로 인해 웹 형식의 상호대화형 서비스(VOD (Video-on-Demand), 게임, 투표 ...)를 제공할 수 있다. 기술사항. 방송 형식. 모든 디지털 방송은 표준 해상도 텔레비전(SDTV)과 고해상도 텔레비전(HDTV) 화면을 전송할 수 있다. 초기의 SDTV 텔레비전 방송 표준은 아날로그였으며, 디지털 SDTV 텔레비전 방송은 아날로그 방송과의 호환성을 위해 그 구조를 사용한다. 국가별 도입현황. 대한민국. 디지털 위성 방송으로는 대한민국의 유일 유료 위성 방송사인 KT스카이라이프가 서비스를 하고 있다. H.264방식을 이용해 여러 개의 채널에서 HD급 화질로 방송하고 있지만 대다수는 SD로 방송되고 있다. 산간 도서 지역의 난시청 해소를 위한 무궁화 위성 3호와 무궁화 위성 5호의 무료수신일 경우 KBS1을 제외한 전 채널이 SD로 공급되고 있으며 일부 채널에 대한 HD전환은 현재 논의 중 이긴 하나 결정된 바가 없다. 케이블 사업자도 OpenCable기술을 사용하여 디지털 케이블 방송을 하고 있다. 디지털 케이블 방송사업자로는 CJ헬로비전, (옛Qrix), HCN, 딜라이브 (구:C&M), CMB, 티브로드, 딜라이브 (구:GS) 등이 있다. 이 역시도 소수의 채널을 HD로 방송하나 대다수의 채널은 SD로 방송된다. 참고로 지상파 아날로그 방송이 2012년 12월 31일에 종료돼도 케이블의 아날로그 방송은 2015년부터는 아날로그 송출을 중단하고 (DTV에서) 디지털로 송출하는 방식으로 완전히 전환되었다. IPTV로는 KT의 올레 TV, SK브로드밴드의 B TV, LG유플러스의 U+ TV 사업자 방송들이 있으며 이들 모두 디지털로 방송 중이며 각 셋톱박스를 이용해 해상도를 정할 수 있다. (ATV: 480i, SDTV: 480p, HDTV: 720p, Full HDTV: 1080i를 권장한다.) 일본. 지상파 디지털 텔레비전 방송을 줄여서 '지데지'(地デジ)라고 부르는 일본에서는 2011년 7월 24일, 지상파 아날로그 TV 방송이 완전 종료되고 ISDB방식의 지상파 디지털 TV 방송 체제로 완전 전환되었다. 일본 최초의 디지털 TV 방송으로 기록된 1996년에 CS방송 스카이 퍼펙TV와 2000년에 BS 디지털 방송에 뒤이은 쾌거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일본은 1989년에 NHK가 BS방송을 활용한 아날로그 하이비전 서비스를 제공했지만, 미국이나 유럽의 디지털 HD방송에게 시장을 선점당하는 시행착오를 경험한 바 있다. 먼저 1단계는 NHK가 BS 방송 중 일부를 활용하여 하루에 1시간 정도의 실험적인 하이비전 방송을 시도하였다. 2단계에는 NHK와 6개 민방이 연합하여, 하루에 8시간 동안 하이비전 프로그램을 제공하였고, 이후 17시간으로 1일 방송시간이 확대하였다. 3단계에는 NHK와 6개 민방이 중심이 되어 디지털 BS방송을 시작하였고, 2003년 12월부터 지상파 디지털 방송이 서비스를 개시하였지만, 프로그램의 경우 프라임 타임에 NHK는 90% 이상이 HD로 제작되었고, 민영 방송사들의 약 50%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다. 2006년 말까지 전국 디지털 TV 방송이 서비스를 완성하였으며, 그 뒤에 2011년 7월 24일에 디지털 TV 방송을 전환하였다. 단, 도호쿠 지방 3개 현(이와테현·미야기현·후쿠시마현 등)의 경우 지진 해일의 여파로, 아날로그 송출 중단 시기가 2012년 3월 31일로 순연되었다. 영국. 영국엔 세가지 형태의 디지털 텔레비전 방송이 있다. 그 세가지는 다음과 같다. 스카이 UK(Sky UK)로 불리는 영국 Sky 방송이 제공하는 위성방송, 버진 미디어(Virgin Media; 예전의 텔레웨스트와 NTL)가 제공하는 디지털 케이블 방송, 프리뷰(Freeview)로 불리는 무료 공중파 지상파 방송서비스이다. 최초로 출범한 디지털 지상파 방송인 ONdigital (후엔 ITV Digital로 불림)은 실패하고 방송사는 파산했다. 2002년 프리뷰(Freeview)가 ITV Digital을 대체했다. 프리뷰는 동일한 DVB-T 방식을 사용하였으나, 오류 정정 수준을 크게 높여서 전 사업자를 파산으로 몰고간 수신률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또한 유료 방송서비스를 기조로 하는 대신, 프리뷰는 기존의 5개 아날로그 무료 공중파와 새로운 20개 디지털 채널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모든 서비스는 SD급으로 전송되고 있다. 정부는 2010년까지 아날로그 방송을 중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미국. 2009년 6월 12일부터 전국에서 소출력 방송사를 제외한 모든 아날로그 텔레비전 방송이 중단되었으며 미국 국민들은 디지털 방송 수신기와 같은 금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쿠폰을 받기도 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첫 번째로 디지털 전환을 완료한 국가로 기존의 아날로그 브라운관 텔레비전 보유자들의 대한 처우도 원만하게 해결되며 이러한 과정은 대한민국의 디지털 전환의 모델이기도 하다. 캐나다. 캐나다 방송통신위원회(CRTC)는 미국과 동일한 디지털 표준을 채택했으나, 디지털 방송으로의 전환 일자를 정하지 않고, 시장에 의한 자연스러운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2009년 9월 현재 캐나다 방송사들이 디지털 방송 송출을 확대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큰 도시들에서는 디지털 방송을 하고 있으나, 그 외에서는 디지털 방송이 되지 않는 이유는 가 바로 그 이유다. 미국 방송 대체란, 캐나다 방송국이 동시간대의 미국 방송국의 프로그램을 재송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2011년 8월 11일에 (극한 지역 제외) 아날로그 방송 송출을 끝낸다. 2009년 1월 현재 토론토에서는 아날로그로 방송하는 모든 방송사들(TV Ontario 제외, 하지만 디지털 방송이 예정됨)이 디지털로도 방송하고 있다. 밴쿠버에서는 거의 모든 방송사들이 디지털로 방송하고 있다. 그 외 몬트리올, 오타와 등에서는 CBC가 디지털로 방송하고 있다. 캘거리에서는 과 가 디지털 방송을 하고 있다. 에드먼턴에서는 이 디지털 방송을 하고 있다. 2009년 9월 현재 전체적으로 밴쿠버, 토론토, 캘거리에서만 대형 방송사들이 디지털 방송을 하고 있다. 또한 토론토, 밴쿠버와 같은 미국 국경과 가까운 도시에서는 미국에서 송출되는 디지털이나 아날로그 방송도 수신할 수 있다. 그리고 2012년 5월 31일까지 극한 지역과 모든 지역의 방송사들이 아날로그 방송 송출을 완전히 종료 후 완전 디지털화를 완료화였다. 오스트레일리아. 모든 대도시의 텔레비전 방송국과 지역 방송국은 현재 아날로그 PAL G/K방식과 디지털 DVB-T 방식으로 동시송출하고 있다. SD급이 가장 일반적인 해상도이다. 법적으로 모든 방송은 100% SD급으로 송출되어야 하며, 이 중 일주일에 20시간 이상은 HD 해상도로 동시 송출하여야 한다. 상업방송의 다채널 방송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예를 들어 스포츠 중계방송이 시간관계상 계속될 수 없으면, 부가채널로 중계되며, 원 채널은 정규방송을 내보낸다.)중지되면, 금지되어 있다. 스페셜 방송 서비스사(SBS)는 부가채널(월드 뉴스 채널)을 갖고 있으며, 호주 방송 회사(ABC)도 2003년까지 ABC 키즈와 Fly TV 채널을 갖고 있었다. 정보방송을 하기 위해선 방송사는 해당 허가를 받아야 한다. 2003년 12월 호주 최초의 디지털 전용 방송사가 탄생했다. 태스매니아 디지털 텔레비전국은 네트워크 텐의 태스매니아 지부로 시작되었다. 이 채널의 도입으로 디지털 텔레비전 방송은 여타지역과는 달리 호버트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2008년(이 시한은 재고될 것이다.)까지 모든 방송사가 디지털 방송만 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현재 아날로그 텔레비전 주파수는 다른 목적으로 쓰이도록 비워질 것이다. 2007년까지는 더 이상의 무료 공중파 방송은 허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시한은 2005년 재고될 예정이다. 핀란드. 현재, 디지털 텔레비전 방송은 아냘란코스키(Anjalankoski) 등의 모든 지역의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 가시청권에서 볼 수 있다. 또한 바사(Vaasa) 지역의 방송국은 핀란드 방송 회사(YLE) 채널을 방송하고 있다. 또한 대도시에 위치한 다수의 케이블 회사가 기본방송과 유로방송을 디지털로 서비스하고 있다. YLE TV1, YLE TV2, MTV3, Neolonen으로 구성된 기본 채널에 더하여, 24시간 뉴스 채널, 스포츠 채널을 시청할 수 있다. 이 모든 채널을 무료다. 그러나 새로 생기는 채널 중에 유료채널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 2007년 9월 1일, 아날로그 방송 송출은 중지되었다. 독일. 2003년 두 단계를 거쳐서 베를린과 그 주변 브란덴부르크 지역의 지상파 아날로그 방송이 완전히 DVB-T 형식의 디지털 방송으로 바뀌었으며 2008년 11월 25일 디지털 전환이 완료되었다. 2000년대 초부터 독일의 30여개 이상의 텔레비전 방송사들은 위성신호를 아날로그와 디지털(DVB-S 방식)로 송출했다. 2003년에 디지털로만 송출하는 방송은 독일 유일의 유료방송인 프리미어(Premiere)였으며, 프리미어 방송은 너무 이르게 디지털 방송에 암호를 걸어 소유권을 보호하려 했기 때문에 심각한 금전적 위기를 겪었다. 케이블 방송은 아직도 프리미어(DVB-C 방식)와 아날로그 밴드를 얻지 못한 몇 군소업체를 제외한 대부분이 아날로그 형태이다. 이런 상황은 이전까지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던 도이체 텔레콤이 기반시설을 매우 천천히 매각하였으며, 매입사가 케이블 방송에 새로운 투자를 거의 하지 않은 것에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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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999년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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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량살상무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량살상무기(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의 大量破壞兵器, )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면서 국제 문제로 대두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보통 북핵 문제(北核問題)라고 약칭한다. 넓은 범위에서 핵무기 뿐만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보유한 생화학 무기도 이 문제에 포함된다. 핵무기. 경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핵 확산 금지 조약에 1985년에 가입했으나 완전한 사찰을 막아 핵개발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황장엽 조선노동당 전 비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96년에 파키스탄과 협정을 맺고 우라늄235로 핵무기를 만드는 제조기술을 넘겨받은 뒤 본격적으로 핵무기를 만들기 시작했다"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93년께 연료봉 1800개 중 절반을 재처리했다"고 말했다. 지하 핵실험 준비가 1993년 당시에 완료됐다고 주장했다. 1992년 4월 24일,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동방연구소의 겐나디 추프린 부소장은 시사주간지 모스크바 뉴스 최신호에 기고한 글에서, 최근 기밀해제된 KGB 보고서에서, 소련은 1990년대 초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핵폭탄을 개발한 것으로 파악했으며, 이를 묵인해왔다고 한다. 황장엽은 1997년 망명 직후 인터뷰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상식화되어 있고 지난 85년 소련 측이 핵개발을 문제 삼자 조선노동당에서 이를 묵살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 개발계획이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음을 밝혔다. 1985년 당시 소련측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개발을 문제삼은 이 내용은 지난 1994년 러시아 관계자들에게도 나온 이야기였다. 1994년 러시아 국가안보 연구소 블라디미르 쿠마초프 고문에 의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그들 미사일의 사정거리를 늘리기 위해 독자적으로 완성한 발사 차량을 가지고 있으며 소련도 85년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핵무기 개발을 시작했음을 알았고 그로 인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있던 핵전문가들을 본국으로 송환했다"고 밝혔다. 1994년 7월 27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이미 핵무기를 5개나 보유하고 있으며 핵무기를 5개나 더 개발한 뒤 이를 국제사회에 발표하고 미국에 알릴 예정이라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탈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 교원 강명도씨와 김일성대학 상급교원 조명철씨가 귀순기자회견에서 밝혀 큰 충격을 안겼다. 그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핵탄두개발과 함께 핵탄두를 탑재할 로켓개발에 열중하고 양산체제로 들어갈 것이며 심각한 경제난과 식량난을 타개할 방법은 핵무기의 완성뿐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핵무기 5개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충분하지 않으며 공개될 경우 국제적 압력으로 더 이상의 핵개발이 불가능해질 것으로 판단한다고 밝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권력 3위인 강성산 정무원총리의 사위인 강명도씨는 김정일 체제에 대한 학자적인 반감이 귀순동기라고 밝혔다. 이러한 강씨의 회견에서 국내 언론들은 믿을 수 없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5개나 보유한 것이 가능한가라는 반응을 보였고 미국과 일본도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당시 월리엄 페리 미국 국방장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핵무기를 1개~2개즈음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발표하고 미국 PBS와의 인터뷰에서도 이같이 밝혔다. 당시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 개발에 대해서 미국 정부는 아주 단호하고도 강경한 입장을 취하겠다고 경고하면서 결코 묵인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핵무기를 손에 쥐면 이를 써버릴 위험이 높은 정권이기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 개발은 엄청난 악몽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클린턴 대통령은 머지않아 이란과 이라크가 핵 개발에 성공해 미국에 대항할 것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 개발이 최악의 상황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핵개발의 가능성만 보이더라도 곧 일본이 재무장을 하게 돼 이 지역의 안정이 크게 위험해 지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클린턴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핵을 개발해 사용하려 한다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후가 될 것이다"라며 강력 경고했다. 1993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핵 확산 금지 조약을 탈퇴할 것이라 공언하는데, 이를 1차 북핵 위기라고 부른다. 이 위기는 1994년 북미 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는 대가로 미국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핵무기를 이용한 공격을 하지 않는 공식적인 평화 협정을 체결하며, 북미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고, 핵발전소의 대체수단인 경수로 발전소 제공 하며, 핵발전소를 중지하는 조건으로 대체 에너지인 중유를 제공 한다는 조건의 제네바 합의로 잠정 해소 되었다. 그러나, 미국 공화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합의는 공산국가와의 회의책이라며 반대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경수로 발전소 지원을 위한 자금 지원을 미국 의회는 불허하였다. 제네바 합의의 핵심 이행 사항인 경수로 발전소 걸설 지연에 대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지속 항의를 하였다. 당시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낸 미국 클린턴 행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경수로 프로젝트가 마쳐 지기 전에 붕괴 될 것을 예상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권이 붕괴전까지 핵 개발을 중단하도록 하기 위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합의를 하였다고 실토하였다. 미국이 경수로 발전소 건설을 추진하지 않았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원자로 가동을 8년 간을 중지할 수 있었으며, 2002년 영변 원자로 재가동과 다음 해 핵 확산 금지 조약의 탈퇴로 제네바 합의는 파기되고 2차 북핵 위기를 맞는다.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국제사회의 비난과 제재에도 독자적으로 핵 개발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2006년 10월 9일 풍계리 핵 실험장에서의 핵 실험이 성공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미국 지질조사국과 일본 지진 당국은 리히터 규모 4.2의 지진을 검출하여 북의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2007년 2월 13일 6자회담이 진행되어 '2.13합의'가 맺어졌다. 합의 주요 내용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시설 폐쇄, 핵 불능화, 핵사찰 수용, 및 중유 100만톤 상당의 에너지 지원 등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영변의 원자력 발전 냉각탑을 폭파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2.13 합의사항은 이행 시한을 넘기고 지켜지지 않았다.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여러차례 핵 실험을 진행하였다. 이명박 정부 시기, 박근혜 대통령 임기 초인 2013년에 1차례, 이어서 2016년에 무려 2차례나 진행하였다. 특히, 2016년에는 수소탄 실험 성공 발표에 이어서, 관측하는 기관에 따라 20kt ~ 30Kt까지 추정되는 강력한 핵 실험을 진행하였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탄도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에 핵탄두를 탑재할 가능성을 내비쳐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2015년부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탄도미사일(SLBM)에 핵탄두가 탑재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이유를 경제지원을 획득하기 위한 목적, 대미 수교 협상용으로 보는 시각, 또는 미국을 위협하여 한미동맹을 폐기하게 만들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킴으로써 한반도 적화통일을 달성하기 위함이라는 시각이 있다. 핵물질 밀수. 1992년 4월 2일, 러시아 시사주간지 코메트산트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CIS에서 핵개발에 사용되는 56 kg의 플루토늄을 밀반출해갔다는 정보를 방사능물질 전문 밀매업자로부터 직접 입수했다. 러시아 해외정보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1992년에 옛 소련으로부터 핵무기 60개를 생산할 수 있는 56∼200 kg의 플루토늄을 밀반입했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1994년 8월 26일, 독일 수사당국이 지난 5월 플루토늄-239를 숨겨 갖고있다 붙잡힌 무기밀매상 아돌프 예클레에 대한 집중수사를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연계를 보여주는 위임장 등 관련 증거서류를 찾아냈다. 예클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부터 무기급 핵물질 구입을 위해 1억 달러까지 처리할 수 있는 전권 위임장을 소지하고 있었다. 1994년 기준으로, 플루토늄 1 kg 당 암시장 거래가가 25만∼30만 달러를 호가하고 있다. 1억 달러면 플루토늄 400 kg을 살 수 있다. 1995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플루토늄 밀반입 계획은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성은행이 유럽의 한 은행계좌를 통해 독일의 중개상에게 보내는 5000만 달러 송금 명세서가 미국 정보당국에 확인됨으로써 밝혀졌다. 2005년 3월에 김명철이라는 조총련 출신의 사람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관계자가 80년대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플루토늄을 300kg정도 보유하였다고 주장했다. 2017년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플루토늄 보유량은 50kg 정도로 밝혀졌다. 핵물질 생산능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무기급 플루토늄 또는 무기급 고농축 우라늄을 생산하는 시설 및 추후 예상되는 시설은 다음과 같다. 2013년 기준으로 서방의 전문가들이 고려하는 핵물질 생산시설은 위의 6기이다. 모두 완공되었을 경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매년 274 kg의 플루토늄과 80 kg의 고농축 우라늄을 생산할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20kt급 원폭 1기를 생산하는데 드는 핵물질의 양은 플루토늄 3-6kg, 고농축 우라늄 5-16kg정도이다. 2014년 대한민국 국방부 국방백서는 자체 생산한 플루토늄 40여 kg을 보유했다고 추정한다. 현재는 50kg으로 늘었다고 추정된다. 영변 5메가와트 원자로에서 매년 플루토늄을 얼마나 생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언론보도가 자주 바뀌었다. 초기에는 매우 대량의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다고 하다가, 2016년에는 고작 5 kg을 생산할 수 있다는 보도의 흐름이다. 그러나 어떤 보도에서 핵전문가는, 1년간 원전을 가동해 폐연료봉 8천개를 재처리하면, "아무리 적어도 최소한" 핵폭탄 하나는 분명히 만든다는 뉘앙스로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핵폭탄 하나에 5-7 kg 정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다른 보도들의 5 kg 추출론은 이 보도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즉 과학적으로 정밀하게 계산하여 추측한 "최대" 생산량이 아니라, 아무리 적어도 최소한 핵폭탄 한발은 만들지 않겠느냐는 전문가의 말을 와전하여, 최대한 5 kg 추출이 가능하다고 보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 NRDC는 고급기술일 경우 플루토늄 1 kg이면 핵출력 1 kt인 핵분열탄을 만들 수 있다고 본다. AGM-69 SRAM의 W69 핵탄두는 핵분열탄시 17 kt, 핵융합탄시 210 kt으로 12.35배 핵출력을 증폭시킬 수 있다. 즉, 고급기술일 경우 플루토늄 1 kg이면 핵출력 1 kt인 핵분열탄을 만들 수 있고, 이를 이용해 핵출력 12.35 kt 수소폭탄을 만들 수 있다. 미국 국방부 산하 국방위협감소국(DTRA)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10kt급 핵폭탄을 서울에 투하할 경우 최소 18만 명의 사망자와 16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한다. 플루토늄 보유량. 1992년 4월 러시아 시사주간지 코메트산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CIS에서 핵개발에 사용되는 56kg의 플루토늄을 밀반출해갔다는 정보를 밀매업자로부터 직접 입수했다고 보도했다. 핵미사일 분해 작업을 하는 일부 러시아 장교들이 방사능 물질을 kg당 5만 루블에 밀매하고 있으며, 밀수출업자들은 이를 해외에서 kg당 75만달러에 되판다. 고철을 실은 차량과 철도편으로 수송되고 있으며, 이런 방식으로 최근 2개월간 블라디보스토크와 중국 국경을 거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들어간 플루토늄은 56kg에 이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2005년 국가정보원은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지난 2003년에 4600여개의 폐연료봉을 재처리해 20~24kg의 플루토늄을 추출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8000개 재처리시 41kg라는 의미이다. 2006년 국정원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폐연료봉 2500개를 재처리했을 경우 추출가능한 플루토늄 량이 25∼30㎏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8000개 재처리시 96kg이란 의미이다. 2003년 합참 전략기획본부의 신재곤 전략분석과장(육군 대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방사화학실험실을 가동해 제네바 합의 이후 보관중인 폐연료봉 8000개(50t)를 재처리한다면 4∼5개월 안에 핵무기 3∼5개 제조분량의 고순도 플루토늄 24∼32kg을 추출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2016년 영변 5메가와트 원자로가 완전히 가동되면 해마다 6 kg의 플루토늄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2016년 김동엽 경남대 교수는 "통상 5MW 원자로에 연료봉 8000개가 들어가니까 많이 처리하면 (매년) 플루토늄을 10 kg까지 확보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2016년 8월 22일, 미국 ISIS는 IAEA 보고서 등을 인용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2016년 올해 재처리를 통해 추출한 플루토늄의 양을 5.5∼8㎏으로 추정했다. 고농축 우라늄 보유량. 2001년 8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카자흐스탄 우스티 카메노고르스크의 우브 공장과 세미팔라틴스크의 아크좌일라우 공장 등지에서 제조한 고농축우라늄 32㎏을 수입했다. 1994년 이후 매년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로부터 핵물질과 핵기술을 수입했으며, 2002년까지 핵무기 10개 분량의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수입했다. 세계일보가 카자흐스탄 고위 관계자로부터 러시아어로 된 A4용지 4쪽의 극비 보고서를 단독 입수했으며, 우즈베키스탄 주재 한국 대사관을 통해 한국과 미국 정부에도 전달되었다. 당시에는 HEU 25 kg이 20 kt 핵폭탄 한발로 계산했기 때문에, HEU 250 kg으로 추정된다. 2017년 7월, 미국 국방정보국(DIA)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고농축우라늄(HEU) 758 kg과 플루토늄 54 kg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소형화 기술. 미국 국방정보국(DIA) 국장은, 핵 무기를 500㎏ 이하로 소형화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포동 2호 미사일에 핵 탄두를 탑재할 능력을 갖춰 미국 본토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03년 리비아가 비핵화를 선언하면서, 중국어로 된 소형 핵탄두 설계도가 발견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 중국산 소형 핵탄두 설계도를 입수했을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리비아 관리들은 미국 조사관들에게 국제 핵무기 암시장의 일원인 중개상으로부터 5,000만 달러를 주고 이 중국어로 된 소형 핵탄두 설계도를 구입했다고 밝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핵탄두 소형화가 상당히 진전되고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소형 핵탄두를 만든 상태라는 의견도 있다. 투발 체계. 핵 개발 초기 단계에 이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70mm 장사정포(사정거리 53km), FROG-5/7 지대지 로켓(사정거리 55-70km), SCUD-B/C형 미사일(사정거리 300-500km), 노동,대포동 미사일(사정거리 1300km 이상)과 각종 폭격기 등의 다양한 잠재적 핵 투발수단을 보유한 상태였다. 이에 더 나아가 수 차례의 인공위성 발사 시험을 통해 대륙간 탄도 미사일인 KN-08(화성 12호)의 성능 개량을 추진해왔다. Mars-12는 2017년 5월 14일 시험되었으며, 2111.5km의 정점을 가지며 787km 떨어진 곳에 상륙했다.2017년 9월 15일 시험에서 3700km의 비행 거리를 보였습니다. 잠수함은 발사 탄도 미사일을 발사했다. 북극성 1 호는 2016년 8월 24일 높은 각도로 550km 떨어진 곳에서 착륙했다. 2017년 7월 4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 화성-14형 발사에 성공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이 날 시험 발사는 최대 고각발사 체제로 진행되었고, 미사일은 정점고도 2,802km를 찍고 933km를 비행하였다고 알려졌다.또 다른 미사일 시험은 2017년 7월 28일에 수행되었다.이 미사일은 3700km의 최고점을 갖고 998km에 상륙했다. 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미사일은 북아메리카 본토를 공격할 수 있다. 그리고 2017년 11월 29일 새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사정거리 13000km에 달하는 화성 15호 미사일을 발사하여 미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2018년 2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건군절 열병식에서 화성 14호과 화성 15호 미사일을 등장시켜 미국에 대한 타격 위협능력을 보여주었다. 보유량. 2004년 10월, 미 랜드 연구소의 브루스 베넷 박사는 한국국방연구원(KIDA)이 최근 발간한 영문저널 'The Korea Journal of Defense Analysis' 2004년 가을호에 기고한 연구보고서에서 러시아 해외정보국 보고서를 인용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92년 옛소련으로부터 핵무기 60개를 생산할 수 있는 56∼200㎏가량의 플루토늄을 밀반입했다고 밝혔다. 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플루토늄 5 kg 이면 100 kt 수소폭탄 한 발을 제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계산이면, 플루토늄 200 kg이면 100 kt 수소폭탄 40발이다. 구소련으로부터 밀반입한 것을 제외하고, 한국 정부는 2016년 말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고농축우라늄(HEU) 보유량을 758㎏, 플루토늄 보유량을 54㎏으로 추정했다. 최대 60기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분량이다. 그러나, 정부나 언론의 핵무기 수량은 계산방법에 있어서 문제가 좀 있다. 구소련 밀반입 200 kg을 더하면, 플루토늄 254 kg이다. 서균렬 교수의 5 kg으로 100 kt 수소폭탄 한발을 고려하면, 플루토늄 254 kg으로 100 kt 수소폭탄 50발을 만들 수 있다. HEU는 보통 플루토늄 보다 2배 정도 더 필요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HEU 758 kg이면 100 kt 수소폭탄 75발이다. 따라서 2016년 한국 정부가 평가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HEU, 플루토늄 보유량이면, 100 kt 수소폭탄 125발이라고 계산할 수 있다. 2015년 2월 25일, 미국 존스홉킨슨대 초빙연구원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전문 웹사이트인 38노스를 운영하는 조엘 위트 교수는 2015년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보유한 핵무기 규모가 10~16개에 달한다는 전제하에, 2020년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개발 예측 경로를 저성장·중간성장·고성장 시나리오로 나눠 예측했다. 2020년 7월 30일, 미국과 러시아가 합의한 새로운 핵무기 계산 모델이 나왔다. 세계 안보 전문 월간지 제인스 인텔리전스 리뷰(JIR) 최신호에 실릴 예정인 새로운 핵무기 계산법은 미국 전 에너지부 핵무기 엔지니어 로버트 켈리와 러시아의 핵물리학자 비탈리 페드첸코가 설계했다. 이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고농축 우라늄을 수소폭탄 제조에 쓰고 있다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가진 핵무기는 10~20개 정도일 것"이라고 했다. 이는 미 국방부 산하 국방정보국이 추정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보유 핵탄두 60개의 3분의 1 이하다. 2020년 8월 18일, 미국 국방부 육군부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술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무기는 20∼60개며, 매년 6개를 새로 생산할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보고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올해 안에 핵무기를 최대 100개까지 보유할 수 있다는 보고도 나왔다고 덧붙였다. 조엘 위트 교수의 2015년 보고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화학무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미국과 러시아 다음으로 대규모의 화학 무기를 보유한 세계 3위의 화학 무기 국가이며, . 살상 무기인 신경 작용제 VX를 포함하여 최소한 2500 ~ 5000 톤의 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생물무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탄저균, 장티푸스, 이질, 콜레라, 페스트, 브루셀라증, 야토병, 발진티푸스, 천연두, 유행성출혈열, 황열병, 보툴리눔 독소, 황우 독소 등 13종의 균체를 10여개 시설에서 최대 5,000톤 가량 보유하고 있다. 탄저균 100 kg을 대도시 상공 위로 저공비행하면서 살포하면 100~300만 명이 사망할 수 있으며, 이는 1메가톤(Mt)의 수소폭탄에 맞먹는 살상 규모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54년부터 미생물연구소를 설립운영하면서 탄저균, 천연두, 페스트, 콜레라, 보툴리늄 독소는 무기화가 완료되었으며, 실제 사용 가능성이 가장 높은 생물학무기는 탄저병과 천연두로 알려졌다. 미국 랜드연구소 브루스 베넷 박사는 "맑은 밤 30km2 면적인 서울 지역에 탄저균 10kg을 살포했을 경우 최고 90만 명이 사망할 것"이라고 본다. 중국의 역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미사일 개발에는 중국이 매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1991년 7월 북조선이 중국 감숙성 은천 미사일 기지에서 사정거리 800km의 중거리 다탄두(MIRV) 탄도 미사일을 시험발사하는데 성공했다. 중국의 원조로 개발한 것으로서, 발사시설은 중국이 대여했다. 북조선은 1988년 이후 90명의 과학자를 은천 핵로켓기지에 파견, 중국으로부터 핵실험 기술 및 미사일발사 기술을 배웠다. 미사일 실험을 성공한 것으로 보아 핵실험 기술 습득도 완료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거리 미사일 개발을 위해 230명의 육해공군 무기 전문가들을 중국 요동반도 다롄에 있는 다롄 해군 기지에 파견해 연수중이라고 일본 월간 센타쿠지가 1991년 12월 6일 보도했다. 1992년 4월 러시아 시사주간지 코메트산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CIS에서 핵개발에 사용되는 56kg의 플루토늄을 밀반출해갔다는 정보를 밀매업자로부터 직접 입수했다고 보도했다. 핵미사일 분해 작업을 하는 일부 러시아 장교들이 방사능 물질을 kg당 5만 루블에 밀매하고 있으며, 밀수출업자들은 이를 해외에서 kg당 75만달러에 되판다. 고철을 실은 차량과 철도편으로 수송되고 있으며, 이런 방식으로 최근 2개월간 블라디보스토크와 중국 국경을 거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들어간 플루토늄은 56kg에 이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북조선은 그동안 리비아에서 발견된 중국 DF-2 핵미사일의 핵탄두 설계도를 입수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대니 B. 스틸먼은 저서 The Nuclear Express에서, ‘중국의 친구들’이 북조선은 중국의 CHIC-4 설계도를 개량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하였다고 소개하였다. 중국 DF-2 핵미사일의 CHIC-4 핵탄두는 폭발력 12 kT, 무게 1,500 kg이다. 신의주와 단둥은 압록강 철교로 이어져 있는데, 이 다리를 통해 트럭으로 수많은 미사일 부품, 핵무기 부품이 수출입 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리팡웨이. 리팡웨이는 1972년생 중국인 비밀무기상이다. FBI 홈페이지에 500만 달러의 현상수배범으로 올라와 있다. 미국은 중국에 리팡웨이 신병인도를 요청했지만 중국이 거부했다. 이란국방산업기구(DIO), 방산기업인 샤히드 헤마트 산업그룹(SHIG), 샤히드 바게리 산업그룹(SBIG)에 첨단 무기 부품을 수출했다. 단순한 무기중개상이 아니라 광섬유 자이로스코프 같은 첨단 미사일 부품들을 직접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다롄에 본사를 둔 림트(LIMMT)라는 회사가 12개의 자회사를 거느리고 이란에 최첨단 미사일 부품과 핵개발 부품을 판매중인데, 로버트 아인혼 전 미 국무부 비확산·군축담당 차관보가 "칸 박사 다음가는 거물"이라고 말한다. 압둘 카디르 칸 박사는 1990년대 이란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핵개발 부품을 판매했다. 리팡웨이는 이란에만 최첨단 미사일 부품과 핵개발 부품을 판매하고 있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관련되어 있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상당히 의심받고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산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제재위원회 전문가 패널은 2012년 6월 공개한 보고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불법 화물이 중국 다롄항으로 운반돼 다른 배에 옮겨 실린 뒤 이란으로 이동한다고 지적했다. 다롄은 리팡웨이의 본거지이다. 리팡웨이의 조부가 한국전쟁 당시 인민해방군 대령으로 참전했다고 한다. 고위 장교의 자손들이 계속 관련 공직에 채용되는게 전세계의 일반적인 관행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리팡웨이가 중국 국가안전부의 비밀요원일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하게 한다. 이런 리팡웨이의 장기간의 대규모 무기 밀매와, 미국 정부의 신병인도 요청 거부 등은, 중국 정부가 이란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미사일 개발과 핵개발 지원과 관련되어 있다는 의심을 하기에 가능한 정황 증거들로 여겨진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무수단 미사일 19발을 다렌항에서 이란 화물선으로 환적하는 방식으로, 이란에 수출했다. 2018년 5월, 북미 정상회담 직전에, 김정은이 다롄을 방문, 시진핑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김정은이 리팡웨이를 직접 만나야 할 만큼 중요한 무기밀매 계약을 하러 갔다는 것을 충분히 의심할 수 있다. 국제적 대응. 2017년 9월 9일, 독일 앙겔라 메르켈 수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문제 해결에 이란식의 타결을 제안하며 유럽의 국가 중 독일이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헨리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과 2017년 10월 10일 백악관에서 중국과 협상을 통한 북핵문제 해결책을 논의하였으며, 제임스 메티스 미국 국방장관과 항공모함 준비 상태 확인과 휴전선 인근의 서울 시민의 인명살상을 최소화하는 군사적 옵션도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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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확산방지조약
핵무기의 비확산에 관한 조약(核武器-非擴散-關-條約, Treaty on the Non-Proliferation of Nuclear Weapons), 약칭 핵확산방지조약(核擴散防止條約, Non-Proliferation Treaty - NPT, (核武器 傳播 防止 條約))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나라가 핵무기를 갖는 것과 핵무기 보유국이 비보유국에 핵무기를 제공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약으로, 핵확산 금지 조약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개요. 1966년 후반부터 미·소의 타협이 진전되어 1967년 초에는 미·소 간에 기본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미·소 초안의 심의를 맡았던 제네바 군축위원회에서는 비핵보유국이 특히 비판적이었다. 그들은 문제점으로 핵의 평화적 이용도 금지된다는 것, 핵보유국의 핵군축의무가 명기되어 있지 않다는 것, 비핵보유국의 핵활동에 대한 사찰이 내정간섭 수준이라는 것, 비핵보유국은 아무런 안전보장도 받을 수 없다는 것, 기한이 너무 길다는 것 등을 지적하였다. 미국과 소련 그리고 비핵보유국가의 논쟁은 1968년 6월 19일 미, 영, 소 3국이 '적극적 안전보장'을 유엔안보리에 제출, 발표함으로써 NPT의 구성이 완료가 되었다 그러나 미·소 양국은 약자인 이들 비핵보유국에게 조약을 강요한면이 없지 않다. 그 결과 1969년 6월 12일 유엔 총회는 95:4, 기권 13으로 이 조약의 지지결의를 채택하였다. 핵무기 보유국인 서명국 전부와 나머지 40개국의 비준을 필요로 하는 이 조약의 발효는 미·소의 비준서 기탁이 끝난 1970년 3월 5일 이루어졌다. 2010년 6월 현재 가맹국은 미국·러시아·중국·영국·프랑스 등 핵보유국을 비롯한 189개국이다. 조약은 매 5년마다 핵확산금지조약의 평가회의를 통해 재검토된다. 본디, 핵 확산 금지 조약은 25년 기한이었으나 1995년 5월 11일, 뉴욕에서의 평가회의에서 서명국이 합의하여 조약을 조건없이 무기한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구성. NPT는 서문과 11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용은 1. 핵의 비확산 2. 핵무기 군비 축소 3. 핵 기술의 평화적 사용의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NPT의 조약의 목적은 핵을 보유하지 않은 국가들의 핵 보유를 막고, 핵 보유국 내에서는 핵무기 증가, 핵무기 기술발전, 핵실험 등을 방지하며,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추진하기 위해 체결된 것이다. 대한민국은 1975년 4월 23일 86번째 정식 비준국이 되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85년 12월 12일에 가입을 했으나, 1993년 3월 12일 탈퇴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규약에 따라 탈퇴 선언 발효에 필요한 3개월이 지나기 직전인 1993년 6월 11일 조미공동성명에 따라 탈퇴를 일방적으로 유보하였다. 이후 2차 북핵위기가 가열되던 2003년 1월 10일에 유보하였던 탈퇴 선언을 재발효하여 NPT에서 탈퇴하였다. 조약의 한계. NPT는 조약당사국을 핵국가와 비핵국가로 구분하며, 비핵국가에 대해 어떤 경우에도 핵무기를 제조, 획득, 관리하거나 이양받을 수 없도록 규정하는 반면, 핵국가에 대해서는 핵무기 이양이나 개발지원만을 금지할 뿐이다. 핵군축에 관한 조치나 조약에 대해서도 아무런 성과가 없으며, 핵확산금지나 핵무기의 완전한 부재도 전혀 실현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NPT는 핵보유 국가가 비핵국가의 핵무장을 막기 위한 정책 위에 기초하고 있으며, 불평등조약이라는 것은 모든 가입국에게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러한 불평등조약이 체결된 것은 어떤 경우에든 핵확산을 막음으로써 인류와 지구의 공멸을 피해야 한다는 일부 시민단체의 주장을 이용해 핵 강대국들이 억지로 조약을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핵국가들 사이에서는 핵보유국들이 핵무기 감축을 전혀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이 잠재되어 있다. 게다가 조약의 비당사국들은 오히려 NPT의 틈새를 이용하여 핵국가와 비핵국가 사이에서 이익을 추구해왔으며 핵개발에 앞장서 왔다. 인도와 파키스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그 어떠한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핵실험을 하여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였으며, 이스라엘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외에도 이란, 태국, 브라질, 독일 등은 핵개발 의혹을 받고 있다. NPT는 핵국가와 비핵국가 간의 차별적 구도 위에 세워진 조약이다. 핵확산을 막기 위해 비핵국가들은 핵무기 개발이나 획득이 절대 금지되고 안전조치제도에 의한 사찰을 받아야 하는 반면, 핵국가들은 단지 점진적인 핵무기 감축에 노력하는 것만이 요구되고 있다. 대다수 비핵국가들은 이 조약에서 요구하는 대로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고 평화적 핵활동에만 전념하고 있으나 핵국가들은 안전조치라는 명목으로 비핵국가들의 모든 연구 활동을 감시하는 한편, 자국들이 보유한 핵 무기의 감축을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조약의 탈퇴. 조약의 제 10조 1항을 보면, '각 당사국은 당사국의 주권을 행사함에 있어서 본 조약상의 문제에 관련되는 비상사태가 자국의 지상이익을 위태롭게 하고 있음을 결정하는 경우에는 본 조약으로부터 탈퇴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각 당사국은 동 탈퇴 통고를 3개월 전에 모든 조약 당사국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행한다. 동 통고에는 동 국가의 지상이익을 위태롭게 하고 있는 것으로 그 국가가 간주하는 비상사태에 관한 설명이 포함되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가입국. 전 세계 대부분 국가가 가입돼 있으나 핵보유국인 프랑스와 중국은 미·소 위주의 성격에 반발해 최초에는 가입하지 않았다가 1992년이 돼서야 가입했으며,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쿠바 등이 미가입국으로 남아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93년 3월과 2003년 1월 탈퇴를 선언하였다. 국제 원자력 기구 (IAEA)는 이 조약에 가입된 비핵무장 국가만을 대상으로 원자력시설 감시를 정기 및 수시로 실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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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학
분류학(分類學, ) 또는 생물 분류학은 지구상에 살고 있는 생물의 계통과 종속을 특정 기준에 따라 나누어 정리하는 생물학의 한 분야이다. 분류학이 추구하는 목적은 크게 다음과 같이 간추려 볼 수 있다. 분류학의 유래. 오늘날 알려지고 남겨진 문헌을 근거로 할 때 생물 분류학의 기원은 기원전 4세기의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인 플라톤의 "둘로 나누기 방법"(Dihairesis)을 처음으로 동물의 분류에 사용하였는데 이를테면 동물을 온혈 - 냉혈동물로 나누고 여기서 온혈동물을 다시 깃털을 가진 동물과 깃털이 없는 동물 등으로 나누어 동물학을 미흡하나마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연구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테오프라스토스는 이와 같은 분류 방법을 식물계에 확장 응용하였으며, 이 분류방법은 그가 이끄는 페리파테토스학파에 의해 계속 연구 발전되었다. 약 2300년 전에 세워진 이와 같은 분류방법은 놀랍게도 18세기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쓰였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생물분류법은 스웨덴의 식물학자 칼 폰 린네에 의해서 비로소 커다란 혁신을 하게 되었다. 이후 몇몇 국제 학술회의를 거쳐 린네에 의해 체계화되고 정의된 분류법을 바탕으로 오늘날 국제 학술상 통일적으로 쓰이고 있는 생물분류법이 정립되었다. 린네의 분류법. 린네가 착안한 분류법의 핵심은 생물의 종과 속을 구분함과 더불어 이들의 소속관계를 체계적으로 밝히는 데에 있으며, 형식상 다음과 같은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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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베디드 오픈타입
임베디드 오픈타입(Embedded OpenType, EOT) 글꼴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웹 페이지에 임베디드 글꼴로 사용할 목적으로 설계한 오픈타입 글꼴의 축소형이다. 확장자는 ".eot"이다. 웹 임베디드 폰트 툴. 웹 임베디드 폰트 툴(Web Embedded Fonts Tool, WEFT)은 마이크로소프트의 동적 웹 글꼴 유틸리티이다. WEFT는 마이크로소프트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웹 페이지와 연결된 동적 글꼴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대부분의 글꼴을 WEFT를 사용해서 첨부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 글꼴들은 디자이너에 의해서 첨부할 수 없음으로 디자인되기도 한다. 또한 문제가 있는 글꼴들은 사용할 수 없다. 비영어권 웹 사이트에서 주로 사용되는 기술이고, 한국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인터넷 익스플로러 이외의 브라우저를 사용하면 글꼴을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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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
수영(水泳) 또는 헤엄()은 팔, 다리를 움직여 수면 또는 수중을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스포츠 경기 종목뿐만 아니라, 물놀이나 다이빙 등의 행위를 총칭하는 말로서 흔히 사용된다. 물 속에 떠 있으면서 여러 가지 동작으로 물을 헤치고 나아가는 동작으로서 수영은 원시 시대부터 교통 수단의 하나로 실시되었고, 그 후에 전투나 직업과 연관되어 발달하던 것이 19세기에는 경영(競泳)을 중심으로 성행되었다. 1900년대 초에는 크롤 수영법도 고안되었다. 목적. 수영의 목적은 레구래이셔눨, 건강, 경영, 직업(군사, 프로스포츠), 여행, 생존 등이 있다. 수영의 종류. 수영은 다음의 종류를 포함한다. 경기 규칙. 경영의 출발시에는 3회 이상 혼자서 플라잉하면 실격된다. 폭 2m의 자기 코스에서 나가거나 다른 선수를 방해하면 실격된다. 턴하는 곳에서는 한 손 혹은 두 손이 벽에 닿아야 한다. 예선 기록이 가장 빠른 선수는 가운데 레인을 배정받는다. 수영법이나 턴하는 방식이 규정에 어긋나면 실격이 된다. 역사. 수영은 선사시대부터 기록되어 왔으며 수영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약 7,000년 전 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록의 경우 기원전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초의 기록으로는 길가메시 서사시,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성경(에스겔 47:5, 사도행전 27:42, 이사야 25:11), 베오울프 등이 포함된다. 경기로 실시된 것은 19세기 영국에서이다. 1896년 제1회 근대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실시되었다. 한국의 경우 1916년에 수영 강습회가 개최되었고, 1929년에는 제1회 전조선수영대회가 열렸다. 1970년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조오련 선수가 금메달 2개를 따내 '아시아의 물개'라고 불리며 일대 금자탑을 세우기도 하였다. 아직 세계 무대에서는 성과가 좋지 않으나, 아시아 무대에서는 일본·중국에 이어 좋은 성적을 올려 왔다.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금메달 2개, 1990년 대회 금메달 1개, 은메달 2개, 동메달 4개, 1994년 대회 금메달 2개, 동메달 2개 1998년 대회 은메달 2개, 동메달 7개, 2002년 대회 금메달 1개, 은메달 5개, 동메달 10개를 획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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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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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고대 로마(, , )는 기원전 8세기경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지중해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이룬 고대 문명으로 고대 그리스, 오리엔트, 셈족, 서유럽 켈트, 게르만 등 문화의 용광로였다. 고대 로마의 문화, 법, 군사 체제는 서구 유럽, 동구권을 막론하고 현대 사회의 법, 정치, 전쟁, 예술, 문학, 건축, 기술, 언어 분야의 기틀이 됐다. 고대 로마는 수백 년 동안 확장을 거듭하며 왕정에서 과두 공화정으로, 또 점차 제정으로 변모했다. 기원전 7세기경 로마는 지역 중심지로 번영하던 도시 국가로 왕정 체제였다. 기원전 509년에는 왕정이 무너지고 귀족과 평민 계급이 공화정을 세웠다. 로마인들은 평민과 귀족 간에 200여 년 이상 투쟁과 타협을 반복하며 로마 특유의 과두정 체제를 점진적으로 이루었다. 내부의 신분 투쟁 가운데도 로마는 외적들을 복속시키며 마침내 기원전 272년경 게누아(제노바)에서 이탈리아 최남단까지 거대한 동맹 체제를 수립했다. 로마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150여 년간 여러 정복 전쟁을 통해 갈리아, 카르타고 등을 정복하고 지중해 전역을 제패했다. 로마 제정은 기원전 1세기 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씨를 뿌리고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제정 초기의 로마 제국은 '팍스 로마나'로 불리는 태평성대를 구가하며 라틴어 문학 등 그레코-로만 문화의 전성기를 이뤘다.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98년~117년)에 로마 제국은 북으로는 스코틀랜드에서 남으로는 아프리카 수단까지, 서로는 포르투갈의 대서양 연안에서 동으로는 카프카스 지방까지 최대 판도를 이룩했다. 오늘날 면적으로 환산하면 현재 미국 면적의 2/3에 달하고 인구도 현 미국의 절반에 약간 안되는 정도로 추산된다. 로마 제국은 기독교 공인 후 교황 선출 문제를 기화로 서로마, 동로마로 분할됐으며 이민족의 침략으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서기 5세기 경 서로마 제국은 멸망 후 게르만족의 여러 독립 국가로 갈라져 프랑크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등 로마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여타 서유럽의 정치 세력들이 나타난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1453년 오스만 제국에 멸망한다. 역사적 배경. 기원전 약 10세기를 전후로 하여,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에 정착하여 살던 여러 부족은 약 2-300년에 걸쳐 서로 교류하거나 전쟁을 벌였으며 융화와 추방을 반복했다. 고대 로마 문명의 초기 역사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하고 있다. 기원전 8세기 경 라티움에는 라티움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었다. 이 땅은 티베리스 강 이남 중부 이탈리아 서해안에 자리잡아 물이 넉넉하고 비옥한 평야였다. 이들은 후기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 시대에 인도-유럽어족이 이탈리아 반도 곳곳에 흩어질 때 형성된 일개 이탈리아어파 집단이었다. 이들은 분명 농경과 목축으로 먹고 살았을 것이며, 손으로 짠 투박한 옷을 입었고, 손으로 조야한 도자기를 만들어 썼는데, 이들의 집은 화로와 대문 밖에 없는 원형 나무 오두막이었다. 몇몇 보석 장신구와 청동 혹은 철 연장을 제외하면 이들은 해외에서 물건을 수입해서 쓴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들은 기원전 753년에 로마라는 이름의 도시가 로물루스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로마의 기원 전설은 거의 대부분 비역사적인 허구이므로, 지리적 혹은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검증이 필요하다. 기원전 750년경에는 팔라티누스 언덕을 비롯한 로마의 여러 언덕에 농촌 촌락들이 들어섰는데, 이들 산지 촌락들은 저마다 독특한 방언과 관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의 대다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미개한 상태였는데, 이 곳에 복합 문명이 발달하게끔 깊은 영향을 준 두 집단이 있다. 하나는 라티움에서 테베레 강을 건너 에트루리아에 정착한 에트루리아인들이었고, 다른 한 집단은 기원전 8세기 중엽에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마그나 그라이키아)에 정착한 그리스인들이었다. 이들은 이후 이탈리아를 통일하게 될 도시 로마의 발전에 있어 각별히 중요한 민족이었다. 역사. 왕정. 왕정 시대는 공화정 이전 시대로 기원전 753년부터 508년까지이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 4월 21일에 로물루스가 세운 것으로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이 날짜는 기원전 1세기 말에 로마의 역사가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설정한 것으로, 그는 구체적인 과학적 증거 없이 고대 로마에 관한 신화들과 전설들을 연구하여 이 날짜를 도출했다. 현대 학자들은 로마에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75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확증하고 있다. 기원전 7세기 말에 에트루리아인들은 이 지역에 귀족·왕족 계급을 이루어 피지배층을 정치적으로 다스린 것으로 보인다. 에트루리아인들은 기원전 6세기 말경에 이곳의 지배권을 잃은 것이 확실하며, 이 시점에 라티움과 사비니 부족이 권력 집중을 억제하는 공화정 체제를 세웠다. 공화정 시대. 에트루리아가 캄파니아에서 패배하고, 라티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게다가 산지 종족들이 라티움(latium)을 침공하는 등 몇 차례에 걸친 군사적 패배로 로마에 사회·정치적 위기가 일어나면서 왕정이 몰락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은 연대 목록(fasti)에 기록된 기원전 509~507년을 왕정 몰락의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 초기에는 군사 위원회 (military tribune)에 의한 공동통치의 형태였다가 독재관을 자주 선출하는 문제가 생기자 2명의 집정관 제도로 바꾸었다. 로마의 정체는 견제와 균형, 권력 분점으로 구성된다. 가장 중요한 정무관은 두 집정관으로 군사 통솔권인 명령권(imperium)을 통해 집행 권력을 함께 행사했다. 집정관직은 오랜 기간의 실험과 발전을 거친뒤에야 비로소 정착된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5세기 중엽쯤에는 공화정의 고위 정무관직을 집정관이라 하였다. 집정관은 원래 귀족들의 자문 회의였던 원로원과 협조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원로원은 양적으로 확대되었다. 공화정의 다른 정무관으로는 법무관, 조영관, 재무관이 있었다. 정무관직은 원래 귀족 출신으로 제한되었으나 나중에는 평민에게도 개방되었다. 공화정의 민회로는 왕정 시대에 기원을 두며, 전쟁과 화의 여부를 결정하고 요직 관리를 선출하는 켄투리아회("comitia centuriata"), 하위직 주요 관리를 선출하는 트리부스회("comitia tributa")가 있었다. 로마는 점차 에트루리아 등 이탈리아 반도의 다른 나라를 정복하게 되었다. 그중 베이 점령은 라티움 밖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징표가 되었으며 그 이후 로마는 이탈리아 내에서 팽창을 거듭한다. 이후 삼니움 족의 캄파니아 침입에 개입하여 3차 삼니움 전쟁을 치루었고 여기서 승리한 로마는 중부 이탈리아의 패자가 된다. 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앞두고 로마의 지배권에 마지막 도전장을 던진 세력은 그리스 식민시 타렌툼이었다. 기원전 281년 타렌툼은 에페이로스의 피로스를 끌어들여 로마와 싸웠으나 결국 패배했다. 로마는 정복을 통해 전략 요충지에 로마의 식민지 건설하여 이탈리아에 안정적인 지배권을 확립했다. 기원전 3세기 후반에 로마는 3차에 걸쳐 포에니 전쟁(BC 264 - BC 146)에서 카르타고와 격돌했다. 1,2차 포에니전쟁에서는 초반에 카르타고가 우세했으나 결국은 로마가 승리하면서 로마는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해외 영토인 시칠리아나 에스파냐 등지를 정복한다. 후에 3차 포에니전쟁에서는 카르타고가 로마와 맺은 협약을 위반하여 로마의 침공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카르타고는 완전히 멸망하여 폐허가 되고 만다. 이로서 로마는 서지중해의 패권을 거머쥐었다. 기원전 2세기에는 마케도니아 왕국와 셀레우코스 왕국을 물리치면서 지중해 세계를 제패했다. 해외 팽창은 내분을 불렀다. 원로원 의원은 로마 속주의 부를 통해 부유해졌지만 주로 소농 출신의 병사들은 고향을 오래 떠나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땅을 지키지 못했으며, 임금 노동 대신 외국 노예에 크게 의존하게 되어 대농장이 발달했다. 전리품 수입 덕분에 새로 확보한 속주에서 상업이 발달하였고, 세금 징수 할당 제도로 신흥 상인 계급인 기사 계급은 경제적 이익을 거머쥘 기회를 얻었다. 클라우디우스 법(lex Claudia)으로 원로원 의원의 상업 행위가 금지되면서 이론상 원로원에 진출할 수 있었던 기사 계급은 정치 권력에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된다. 원로원은 끊임없이 정쟁을 일삼아 계속 토지 개혁에 발목을 잡았고, 기사 계급에 정치 발언권 확대를 거부했다. 원로원의 정적들끼리 도시 실업자 출신의 폭력조직을 조종하여 완력으로 유권자를 위협했다. 이런 상황은 기원전 2세기 말 평민에게 주로 귀족이 소유한 토지를 재분배하려는 토지 개혁 입법을 시도한 그라쿠스 형제 시대에 극에 달했다. 두 형제는 살해당했는데, 여기에 원로원은 불만을 품은 평민과 기사 계급을 달래고자 그라쿠스 형제가 추진한 개혁의 일부 입법을 통과시켰다. 또 이탈리아 동맹국에 로마 시민권 확대를 거부하면서 기원전 91~88년에 동맹국 전쟁이 일어났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병사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잃고 점차 사병화(私兵化)되었으며, 유력한 장군이 국가와 원로원을 장악하게 된다. 이로써 마리우스와 그의 부하 술라는 내전을 벌였으며, 술라가 기원전 82년 콜리네 문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결국 기원전 81년~79년에 술라가 독재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술라는 무너져가던 공화정을 부흥시키려 개혁을 하고 독재관에 취임한 지 2년 만에 자진 퇴임한다. 그러나 술라가 죽으면서 로마는 다시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기원전 1세기 중반에는 마리우스의 처조카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술라의 부하인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크라수스 세 사람이 제1차 삼두정치를 이루어 공화국을 농단했다. 이후 기원전 53년에 파르티아와 벌인 카르하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전사하면서 삼두정치는 카이사르와 원로원파로 돌아선 폼페이우스로 나뉘어 전개된다. 기원전 58년부터 7년에 걸쳐 갈리아를 정복한 후에(갈리아 전쟁) 원로원과 대립하던 카이사르는 기원전 49년에 루비콘 강을 건너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원로원파 군대와 내전을 일으킨다(카이사르의 내전).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압승을 거두고, 탑수스 전투와 문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격파한 카이사르는 결국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로마의 종신 독재관이 되어 각종 개혁을 실시하였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독재 의혹을 받다가 공화제 헌정을 복원하려는 정적(브루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에 암살당한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은 정권을 잡지 못하였고,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수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의 제2차 삼두정치를 이루며 권력을 잡는다. 그러나 이 정치적 동맹은 권력 투쟁으로 기운다. 레피두스는 추방되며,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며,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격퇴하여 로마의 유일 지배자가 되었다. 제정 시대. 내전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고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잡았지만, 공화정을 가장했다. 이때의 통치체제를 원수정이라 하며(사실상 제정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프린켑스(제1의 시민)라 칭한다(이렇게 아우구스투스가 독재관을 거부하는 등 조심스럽게 행동한 것은 양아버지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 때문이기도 하다).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티베리우스는 심각한 반대 없이 권좌에 올라 아우구스투스에 이어 본격적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이루었고, 이 왕조는 티베리우스 사후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의 치세를 거쳐 기원후 68년 네로가 자살할 때까지 이어진다. 이후 1년간 로마는 내전상태에 돌입하면서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가 즉위한다. 후에 시리아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가 자기 군단의 지지를 받아 로마에 입성하여 비텔리우스를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플라비우스 왕조의 시대를 개창한다. 제정 시대에도 영토 확장은 이어졌으며 안정을 유지했지만, 흔히 저열하고 타락했다고 평가받는 황제도 몇몇 있었다(가령 혹자는 칼리굴라를 정신이상자로 보기도 하며(즉위 후 얼마지나지 않아 정신병이 걸려 폭정을 일삼았다). 네로는 국가 정사보다 개인 관심사에 더 몰두하며 잔인했다는 평판을 받는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서 네로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플라비우스 왕조가 뒤를 잇는다.(AD 69 - AD 96)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암살이후에 로마 번영의 시작을 알린 오현제 시대(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서 콤모두스)에 제국은 영토나 경제ㆍ문화면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대략 80년간 지속되면서 이시기에 로마는 대내외적으로 안정을 이루었고,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 시대에 제국은 번영했다. 트라야누스 재위시에는 다키아(오늘날의 루마니아)의 정복과,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통하여 제국의 영토는 최대가 되며, 그 지배 지역이 650만km2에 이르렀다. 트라야누스 사후 즉위한 하드리아누스는 정복전쟁을 중단하고 제국을 순찰하면서 국경 수비를 강화하는데 힘쓴다. 193년에서 235년 사이는 세베루스 황조의 치제(흔히 말하는 군인황제시대)로 헬리오가발루스같은 무능한 지배자도 나타났다. 게다가 군대가 제위 계승에 영향력을 더욱 행사하게 되면서 오랜 기간 ‘3세기의 위기’라는 혼란기(49년간 20여명의 황제가 교체됨)로 접어들었다. 이 위기는 유능했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일단락지었으며, 293년에 제국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각각 두 공동 황제와 부제(副帝)가 지배하는 사두 체제를 도입했다. 여러 공동 황제는 50년 이상 서로 대립하며 권력 투쟁을 벌였다.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비잔티온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명(현 이스탄불)하고 로마 제국의 새 수도로 삼았다. 제국은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인 395년에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영구히 갈라졌다. 4세기가 넘도록 서부 지역은 끊임없이 이민족의 침략에 시달리면서 점차 쇠퇴 일로로 치달았다. 4세기에 훈족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서고트족이 밀려나 제국 국경 안쪽에 피난처를 구하게 되었다. 401년 알라릭 1세가 이끄는 서고트족은 로마 시를 약탈했다. 반달족은 로마 속주인 갈리아, 히스파니아, 북아프리카를 침략하고 455년에 로마를 약탈했다. 476년 9월 4일 게르만 장군 오도아케르는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켰다. 1200여 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로마의 서부 지역 지배는 막을 내렸다. 동로마 제국도 마찬가지 위기를 겪었지만 서쪽보다는 나은 처지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잠시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를 수복했으나 유스티니아누스가 죽고 몇 년이 채 안 되어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에 미쳤던 동로마의 세력 범위는 줄어들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치명적인 전염병 등으로 동로마 제국은 또한 이슬람의 발흥에 위협받았으며, 이슬람 세력은 시리아와 이집트의 영토를 곧 정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직접 위협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8세기경 이슬람의 확대를 막아냈으며, 9세기 초에는 정복당한 땅의 반환을 다시 요구했다. 기원후 1000년에 동로마 제국은 전성기를 이루었다. 바실레이오스 2세는 불가리아와 아르메니아를 재정복했으며, 문화와 교역이 번영했다. 그러나 이 정복 이후 제국은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패하면서 팽창에 제동이 걸렸다. 이 사건은 결국 제국의 쇠퇴로 이어진다. 수백년간 내분과 터키의 침략으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는 1095년 서방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서유럽에서는 로마 가톨릭의 교황인 우르바노 2세가 클레르몽 공의회를 소집하여 십자군을 조직하여 동로마 제국에 파견한다. 수십년이 흘러 파견된 제4차 십자군 당시 이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면서 제국내의 물품을 약탈하고 동로마 제국은 잠시동안 분열되어 몇몇 후계 국가들(니케아 제국, 라틴제국, 트레비존드 제국, 에피로스 공국)이 들어서다가 결국 니케아 제국이 최종 승자가 되어 동로마 제국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제국 군대가 수도를 수복한 뒤 제국은 에게 해 해안에 국한된 그리스 국가로 전락하고 만다. 이후 즉위한 황제들은 아무도 제국을 부흥시키지 못하고 결국 동로마 제국은 1453년 5월 29일 오스만투르크의 메메드 2세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당하면서 멸망하였다. 사회. 수도 로마는 당대 최대의 도시로 인구는 백만 명에 이르렀으며(이는 19세기에 당대 세계 최대의 도시였던 런던의 인구와 맞먹는다) 최대 추정치는 140만, 최소 추정치는 45만 명이다. 로마의 공공 장소는 발걸음 소리와 마차 바퀴가 덜걱거리는 소리(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낮에는 도성에 마차가 드나들지 못하도록 금한 바 있다)로 시끄러웠다. 역사가의 추정에 따르면 고대 로마의 인구 20% 정도가 도심지에 살았으며(로마가 지배하는 이탈리아 전체로는 기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25–40%이다), 1만 명 이상이 군사 정착촌에 거주하여 전근대 기준으로 매우 높은 도시화율을 보였다. 대부분의 도심지에는 포룸과 신전과 비슷한 양식의 더 작은 건물들이 있었다. 계급. 로마 사회는 대단히 위계적이며 계급을 의식하는 사회였다. 최하층은 노예(servi), 그 위로는 피해방인(해방노예, liberti), 그리고 위에는 자유 시민(cives)이 있었다. 자유 시민은 또 일정한 계층으로 분류되었다. 로마 역사 초기 계층은 로마 창건을 이끈 100명의 가부장 출신의 귀족과 나머지 평민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나중에 공화정 시대에 이 구분의 중요성은 떨어지게 되는데, 일부 평민 가문이 부유해져 정계에 진출했으며, 귀족 계급이 몰락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귀족이건 평민이건 누구나 자신의 가족에서 집정관에 오르면 신귀족(nobilis, 新貴族)으로 인정받았다. 가령 가이우스 마리우스나 키케로는 이런 유형의 신인(新人, novus homo)으로 이들의 후손은 귀족이 되었다. 그러나 혈통 귀족인 경우 지속적으로 상당한 명성을 유지했으며, 여러 종교 관직에 임명될 수 있는 자격자는 공화정 말기까지 귀족 출신으로 제한되었다. 계층 구분은 원래 군역 할당에 기반을 두었는데, 감찰관이 정기적으로 재산에 따라 각 시민을 특정 계층으로 분류했다. 가장 부유한 집단은 원로원 계급으로, 정계와 군사를 장악하고 있었다. 다음으로는 기사 계급(equites)으로 원래 이들은 군마(軍馬)를 부담할 수 있는 집단을 일컬었으며, 나중에는 유력한 상인 계급을 형성하게 된다. 하위 계급은 원래 군사 장비 구입 수준에 따라 정해졌으며, 최하로는 군에 입대시킬 아들외에는 재산이 전혀 없는 무산자(proletarii, 무산자를 뜻하는 프롤레타리아가 바로 이 말에 뿌리를 두고 있음)가 있었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전에 이들은 군대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 부나 사회의 인식 면에서 피해방인보다 약간 높은 집단으로 정도로 기록되기도 했다. 공화정 시대에 투표권의 비중은 계층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시민들은 선거 지역구격인 "트리부스(tribus)"에 등록되어 있었다. 부유한 계층의 트리부스는 재산 수준이 낮은 트리부스보다 인원 수가 적었으며, 무산자 계층 전체에는 트리부스가 겨우 하나밖에 할당되지 않았다. 투표는 계급 순서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전체 트리부스의 과반에 이르면 투표가 종결되었으므로, 가난한 계급은 아예 투표를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로마는 일부 동맹국에는 라티움인의 권리를 보장했는데, 이 권리는 완전한 로마 시민권과 외국인(peregrini)의 중간 수준의 신분을 의미했으며 로마법이 이 지위를 성문적으로 보장했고, 이들 나라의 최고 정무관들은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라틴인의 권리에는 여러 층위가 있는데, 주된 구분은 "투표권이 있는 시민권"(cum suffragio, 로마의 트리부스에 등록되어 트리부스 민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와 "투표권이 없는 시민권"(sine suffragio, 로마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으로 나눌 수 있다. 일부 로마의 이탈리아 동맹국은 기원전 91~88년의 동맹국 전쟁 이후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기원후 212년 카라칼라의 칙령으로 제국내의 모든 자유 시민에게 로마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여성은 남성 배우자와 어느 정도 동등한 기본권이 있었으나, 완전한 시민으로 인정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투표를 하거나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가족. 로마 사회의 기본 단위는 가족(가구)였다. 가족의 개념에는 가부장(pater familias)과 아내, 자녀, 다른 친척이 포함되었다. 상류층에서는 노예와 하인도 가족의 일부를 이루었다. 가부장은 다른 가족 구성원에 대해 절대권(patria potestas, 가부장권)을 행사했다. 가부장은 결혼(보통 돈 때문에)과 이혼을 결정할 수 있었고, 자식을 노예로 팔 수 있었으며, 자손들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할 수 있었고, 심지어 생사 여탈권까지 있었다(그러나 기원전 1세기 이후에는 이 생사여탈권이 금지된다). 가부장권은 성인 아들과 그 가족에 대해서도 행사할 수 있었는데, 아버지가 살아있는 한 그 아들은 가부장으로 인정받지도, 자신의 재산도 가질 수 없었다 로마 역사 초기에 딸은 결혼하면 남편의 가부장 수권(手權, manus)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공화정 말기에 이르면 이런 관습은 낡은 것이 되어, 여성이 친정을 자신의 진정한 가족으로 계속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남성 계통을 기준으로 혈통을 인정했으므로, 모든 자녀는 남편의 가족에 속했다. 서로 혈연관계가 있는 여러 가족의 집단을 씨족(gens)라고 했다. 가족은 혈통이나 양자 입적으로 구성되었으나 정치적ㆍ경제적 연대이기도 했다. 특히 공화정 시대에 일부 유력 가문(gentes maiores)은 정계를 지배했다. 고대 로마에서 결혼은 특히 상류층 사이에서는 낭만적인 결합이기보다는 경제적·정치적 결합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가부장은 보통 딸이 12살에서 14살 사이 나이일 때 사위를 구했다. 신랑은 대개 신부보다 나이가 많았다. 상류층에서는 여자가 어린 나이에 결혼한 데 반해, 하류층 여성은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결혼했다고 한다. 교육. 공화정 초기 로마에는 공립 학교가 없었다. 따라서 소년들은 부모나 노예 교사(paedagogi, 그리스에서 기원한 것이다)에게서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이 시대 교육의 일차적인 목적은 젊은이에게 농업, 전쟁, 로마의 전통, 공무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어린 소년은 아버지와 함께 종교ㆍ정치 활동을 하면서 사회 생활을 다양하게 익혔다. 귀족 자제는 16세 나이에 유력 정치인 밑에서 정치를 배웠으며, 17세부터 군대에서도 활동했다(이런 관습은 제정 시대에도 일부 귀족 가문 사이에서 계속되었다). 기원전 3세기에 헬레니즘 나라를 정복하면서 그리스 문화가 유입되어 교육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지만 그리스의 교육 방식과는 여전히 달랐다고 한다. 부모가 여력이 있으면 7살 나이의 소년과 일부 소녀들을 집 밖의 사립 학교(ludus)로 보냈다. 이들이 11살이 될 때까지 교사(litterator 또는 magister ludi)가 기본적인 읽기, 쓰기, 셈법, 때론 그리스어까지 가르쳤다. 12살부터 학생은 중등 학교에 가서 교사(grammaticus)에게서 그리스어와 로마 문학을 배웠다. 16세 나이가 되면 몇몇 학생은 수사학 학교에 갔다(이곳 교사(rhetor)는 대개 그리스인 출신이었다). 이 정도의 교육 수준은 법조인을 지망하는 학생들이 준비했으며, 이들은 로마의 법을 암기해야 했다. 학생들은 종교 축제나 장날 외에는 매일 학교에 갔으며, 여름 방학도 있었다. 정치. 원래 로마는 각 부족에서 서로 돌아가며 선출한 왕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왕권의 정확한 속성은 확실하지 않다. 초기 로마 국가의 통일과 권력과 권위의 살아있는 상징은 왕이었다. 다만 군사 분야에서는 왕은 절대적인 명령권(imperium)을 행사했다. 또 국가 종교의 수장이기도 하였다. 원로원은 왕을 위한 자문 기구였으며, 쿠리아회는 임금이 입안한 법을 정하고 비준할 수 있는 민회였다. 공화정기의 신분 투쟁으로 로마는 로마 특유의 민주정과 과두정이 혼합되었다. "의 어원이 된 "는 '공공의 일'을 뜻하는 말이었다. 로마법은 전통적으로 민회에서만 표결로 투표할 수 있었다.(트리부스회) 마찬가지로 공직 출마자도 인민이 선출했다. 그러나 로마 원로원은 자문 기능을 하는 과두적인 정치 기구였다. 공화정에서 원로원에는 강력한 권위(auctoritas)가 있었으나 기능상 자문 기구이므로 입법권은 없었다. 그러나 원로원 의원들은 매우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원로원의 집단적인 의지에 맞서기는 힘들었다. 원로원 의원은 감찰관이 명문 귀족 중에서 임명했는데, 감찰관은 "부도덕한" 행실을 한 의원을 면직할 수도 있었다. 가령 뇌물을 받는다거나 혹은 소 카토가 감찰관이던 시절에 공공 장소에서 자신의 아내와 포옹하는 행위가 바로 그런 경우에 속한다. 나중에 독재관 술라의 개혁으로 재무관은 자동적으로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로마 공화정에는 엄격한 관료제가 없었으며, 세금도 징세 청부를 통해 거두었다. 재무관, 조영관, 혹은 장관(praefectus) 등 정무관은 본인 돈으로 공무를 처리했다. 시민 개인에게 너무 많은 권력이 집중되지 않도록 정무관은 1년 임기로 선출되었으며, 동료 정무관과 권력을 분할하도록 하였다. 가령 평상시에는 최고 권력은 집정관 두 사람이 함께 보유했다. 비상시에는 임시 독재관을 임명할 수 있었다. 공화정 시대에 행정 체제는 필요할 때마다 수차례 개정되었다. 결국 로마가 크게 팽창하면서 공화정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제정 성립으로 이어진다. 제정 초기는 정부는 공화정의 형태를 가장하였다. 로마 황제는 그저 "제1시민"(priceps)일 뿐이었으며, 원로원은 과거 민회가 보유하던 입법권과 모든 법적 권한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황제의 권력은 점차 전제 권력으로 발전했으며, 원로원은 황제가 임명하는 자문 기구로 전락하였다. 로마 제국은 공화정 시대의 행정 체제를 물려받지 않았는데, 공화정에는 원로원 외에 영속적인 행정 기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최고위 행정가와 원로원 의원, 자신의 친구, 전문 법률가 등을 모아 조언을 구하였으며, 원로원 의원, 기사, 피해방인, 심지어 노예까지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공무원으로 기용하여 곡물, 수도, 치안, 법, 재정 등 일종의 행정 조직을 구성하였다. 법. 고대 로마의 법리와 사법은 12표법(기원전 449년)에서 시작하여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로마법대전으로 이어진다. 로마법은 동로마 제국 시대에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으로 존속했으며, 서유럽 법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넓은 의미로 볼 때 로마법은 17세기 말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적용되었다. 고대 로마법의 주된 구분은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시우스 법전에 수록된대로 시민법(Ius Civile), 만민법(Ius Gentium), 자연법(Ius Naturale)이다. 시민법은 로마 시민에게 적용되는 주요 보통법이다. 도시 법무관(Praetor Urbanus)은 시민들의 송사에 대해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다. 만민법은 외국인들이나 외국인과 로마 시민 사이에 적용되는 주요 보통법이다. 외국 법무관(Praetor Peregrinus)은 외국인과 로마 시민 사이의 송사에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법(Ius Naturale)은 일반적인 의미의 자연법을 포함하며, 외국인과 로마 시민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법이다. 군사. 초기 로마의 군대는 추첨에 의한 징병제이었다. 그러던 것이 국가 로마의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지원제로 바뀌었고(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후), 마침 고도성장기의 로마에서 증가하고 있었던 실업자의 구제책으로 환영받았다. 로마가 제정으로 바뀌면서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내전으로 엄청나게 커져 있던 군대의 규모를 줄이고,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편성하던 방식을 바꿔 상비군 제도로 개편했다. 이 제정 로마의 상비군은 국경 바깥의 이민족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대부분 국경 부근에 배치되었다. 문화. 일곱 언덕이 자리잡은 로마 시는 고대 로마의 중심지였다. 이 도시에는 콜로세움, 트라야누스 포룸, 판테온 등 아치를 활용한 장대한 건물이 많았다. 분수에서는 수백 마일 길이의 수도관을 타고 운반되어 온 신선한 식수가 솟았으며, 극장, 체육관, 그리고 도서관과 가게, 시장, 상하수도를 갖춘 로마식 목욕탕도 있었다. 고대 로마의 지배 영역 널리 전원 별장(villa)와 같은 가옥 구조를 볼 수 있었다. 수도 로마 시에는 팔라티누스 언덕의 궁궐이 있었으며, 하층 평민이나 중류 기사 계급은 도심지의 아파트(insulae)에 살았다. 이런 곳은 상류층 지주들이 임대료 수입을 얻기 위해 지은 곳이기도 했는데, 콜레기움(collegium)이나 선술집(taberna)이 생활의 중심이었다.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은 무료 곡물 배급을 받으며, 검투사 경기를 즐겼으며, 상류 귀족의 피호민으로 필요할 때 도와주고 지켜주는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언어. 로마인의 모국어는 라틴어로, 이 언어는 이탈리아어파에 속하며 문법상 낱말 배열이 상당히 자유롭고, 어간에 붙는 접사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라틴어 문자는 그리스 문자에 기반을 둔 에트루리아 문자에서 나왔다. 현존하는 라틴 문학은 대부분 기원전 1세기부터 쓰인 매우 정제된 문어인 고전 라틴어로 되어 있으나, 실제 구어는 민중 라틴어로 고전 라틴어와는 문법과 어휘가 다르며 심지어는 발음까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라틴어는 로마 제국의 주요 언어였지만, 로마인이 공부한 대부분의 문학이 그리스어로 되어 있었으므로 교양있는 상류층은 그리스어도 구사했다. 또 제국의 동부 지역에서는 후대 동로마 제국 시대까지 그리스어가 라틴어 대신 제1언어였으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죽은 뒤 그리스어는 동로마 제국 정부의 공식 언어가 되었다. 로마 제국이 확장되면서 라틴어도 전 유럽으로 퍼졌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민중 라틴어가 여러 지역에서 방언으로 갈라져, 수많은 로망스어로 발전하였다. 종교. 초기 로마 종교는 최소한 신에 대해서는 글로 쓰여진 이야기가 없으며, 기본적으로 하나의 신념 체계라기보다는 숭배의례이며 의식(儀式)에 가까웠다. 그리고 종교의 목적은 의식을 통해 신을 불러내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며 보답을 약속하는 일종의 거래였다. 그리스 신화와 달리 로마의 신은 인격화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문, 경계, 꽃, 곡물 등에 서린 정령(numen)을 숭배하였다. 로마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나 장소, 사물에 신성한 혼(genius)이 있다고 믿었다. 공화정 시대에 로마 종교는 사제직을 갖춘 엄격한 체제를 갖추게 되었으며, 사제들은 원로원 의원 출신이었다. 국가 사제단(Collegium Pontificum)은 종교 제문을 보관하고 종교 의식을 감독하였으며, 가장 높은 성직자는 최고 제사장(pontifex maximus)으로 국가 종교의 수장이었다. 사제(flamen)는 여러 신의 의식을 치렀으며, 복점관(augur)은 점을 쳤다. 렉스 사크로룸(rex sacrorum)은 왕이 축출된 뒤 왕 대신 종교 권한을 얻었다. 그리스 문화를 점점 접하게 되면서 옛 로마의 신은 점차 그리스의 신과 동일시되었다 그리하여 유피테르는 제우스와, 마르스는 아레스와, 넵투누스는 포세이돈과 같은 신으로 여겨졌다. 또 로마의 신은 각자 동일시된 그리스 신의 신화와 속성도 이어받게 되었다. 제정 시대에 로마 사람들은 정복당한 민족들의 신화도 흡수하여, 외국신을 모시는 신전 옆에 전통적인 이탈리아 신전이 있는 경우도 생겼다. 최초의 기독교 박해는 기원후 64년 네로 시대에 로마 대화재의 주범으로 그리스도 교도를 수색하면서 잔인한 고문과 태형을 가한 것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 기독교 박해는 극에 달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에 기독교는 로마 정부의 지원을 받았으며,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기원후 391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칙령으로 제국 내에서 기독교 외의 모든 종교 숭배가 금지되었다. 예술. 로마의 회화는 그리스의 영향이 보이며, 남아있는 작품은 대개 시골 별장의 천장과 벽을 꾸미는 프레스코화이며, 라틴 문학 이야기를 다룬 나무나 상아 등에 그린 그림도 있다. 폼페이에서 로마의 그림 몇 점이 출토되었는데, 이를 통해 예술사가들은 로마의 회화사를 네 시기로 구분한다. 로마 회화의 첫 번째 양식은 기원전 2세기 초에서 기원전 1세기 초중반까지 유행했다. 이 양식은 주로 대리석이나 쌓은 돌을 모방한 것으로,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을 묘사한 것도 있다. 두 번째 양식은 기원전 1세기 초로, 건축물이나 풍경을 3차원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하려 하였다. 세 번째 양식은 아우구스투스 시대(기원전 27년 ~ 기원후 14년)에 있었으며, 이전의 사실주의를 거부하고 단순한 장식을 선호했다. 작은 건물 모습, 풍경, 추상적인 디자인을 단색 배경 가운데에 놓았다. 네 번째 양식은 기원후 1세기에 시작했는데, 신화의 장면을 묘사하며, 건축물 모습이나 추상적인 문양도 남아 있다. 젊고 고전적인 비례를 쓰던 시기에 흉상 조각은 나중에 사실주의와 이상주의의 혼합으로 발전했다. 안토니누스 황조와 세베루스 황조 시대에 더욱 화려해진 머리와 수염이 유행하였다. 부조 조각도 발전했는데, 보통 로마의 승리를 묘사하고 있다. 라틴 문학은 그 기원부터 그리스 작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현존하는 몇몇 초기 작품을 보면 초기 로마의 군사적 승리를 묘사한 서사시의 내용을 담고 있다. 공화정기 로마가 팽창하면서 저자들은 시, 희극, 역사, 비극도 쓰게 되었다. 폼페이와 헤라클라네움에서 찾은 낙서, 유곽, 회화, 조각을 보면 로마 사람들은 대단히 성에 개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음악. 로마의 음악은 주로 그리스의 음악에서 나왔으며, 로마인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추수나 베짜기, 결혼식이나 장례식, 사랑이나 풍자 등 일상 생활과 관련된 여러 가지 노래가 있었으며, 부유한 가정에서는 저녁 식사 때 음악이 연주되곤 하였다. 로마 군대에서는 투바(tuba, 긴 트럼펫)나 코르누(cornu, 프렌치 호른과 비슷하다)같은 악기를 써서 여러 가지 명령을 전달했으며, 부키나(bucina, 호른이나 트럼펫으로 추정)나 리투스(lituus)는 의전 행사에 쓰였다. 투바와 코르누를 비롯하여 물 오르간은 원형 경기장에서 검투 막간에 쓰여 전차 경주와 검투의 흥분을 고조하였으며, 극장에서도 물 오르간과 티비아이(tibiae, 로마식 아울로스에 해당하는 더블 파이프)이 쓰였다. 무언극도 로마의 인기있는 오락이었으며, 합창, 기악, 무용과 함께 정기적으로 협연하였다. 제사나 축제 음악 등 종교 의식에도 대부분 음악을 이용하였는데, 희생 의식에는 도살되는 동물의 울부짖음을 숨기기 위하여 티비아이를, 주신(酒神) 바쿠스 제의에는 심벌즈와 탬버린을 썼으며, 여러 의식에서 방울을 쓰거나 성가를 불렀다. 고대 저술가들은 유명한 대연주가, 큰 합창단, 오케스트라 및 웅대한 음악 축제와 경연 대회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로마의 직업 음악가들은 협회를 만들어 공적인 행사와 사적인 연회에 연주자를 보냈으며, 인기있는 연주자에게 엄청난 연주비가 지불되는 것도 드물지 않았다. 여러 황제들이 음악을 지원하고 육성하였는데, 심지어 네로는 음악가로서 명성을 얻고자 하였으며 경연 대회에 직접 참가하기도 하였다. 어떤 음악사가는 음악이 거의 모든 공공 행사에 쓰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또 음악은 오락 및 교육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키케로나 퀸틸리아누스와 같은 저술가들은 교양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음악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기원후 3~4세기에 걸쳐 제국이 경제적으로 쇠퇴하자 이전의 큰 규모의 음악 활동은 중단되었다. 현재 고대 로마의 음악에 대해 그리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여러 그림, 일부 악기, 수천 건의 문헌이 남아있지만, 로마 시대의 라틴어 악보는 남아있지 않다. 음악사가들은 로마의 음악가가 음악 연주나 이론에 중요한 기여를 했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오락 활동. 로마의 젊은이는 뛰기, 레슬링, 권투, 경주 등 여러 가지 놀이와 체육을 즐겼다. 시골에서 부유층은 낚시와 사냥도 즐겼다. 로마에는 핸드볼과 비슷한 구기 종목도 있었다. 주사위 놀이, 보드 게임, 도박도 매우 인기 있는 오락거리였다. 여성들은 이런 활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부자들은 저녁 잔치에서 음악, 춤, 시 낭송과 같은 오락을 즐겼다. 평민들은 클럽이나 모임에서 비슷한 잔치를 열기도 했는데, 보통 오락을 즐기는 저녁 식사란 후원을 받아 선술집에서 여는 모임을 뜻했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장난감을 가지고 혹은 목마 넘기를 하며 놀았다. 검투는 인기있는 오락이었다. 검투사는 죽거나 혹은 여러 가지 시나리오에 따라 갖가지 무기를 들고 ‘첫 피’를 볼 때까지 싸웠다.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검투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렀는데, 황제의 손짓으로 경기의 결과를 마무리지었다. 영화에 나오는 모습과 달리, 여러 전문가들은 검투사를 죽이라는 손 동작은 ‘엄지손가락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그 손짓이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확실히 모르지만, 어떤 전문가는 승자 쪽으로 주먹을 들어올렸다가 엄지 손가락을 위로 올려서 패자의 죽음을 명령했으며, 엄지 손가락을 들지 않고 주먹을 들어올리면 살려주라는 뜻이었다고 보고 있다. 동물을 보여주는 것도 인기 있었는데, 외국의 동물을 데려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거나, 투수사와 싸움을 시키기도 하였다. 죄수나 검투사를 무장하거나 맨몸으로 경기장에 놓고 동물을 풀기도 하였다. 대경기장(circus maximus)도 로마에서 인기있는 장소였는데, 주로 경마나 전차 경주를 벌이는 곳이며, 경기장에 물을 채워 가상 해전을 벌일 수도 있었다. 이곳에는 그 밖에도 여러 가지 행사가 많았다. 이 경기장은 385,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므로, 로마 시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이곳에 왔을 것이다. 대경기장의 경주로 한가운데에는 각각 일곱 개의 커다란 달걀과 일곱 개의 돌고래가 있는 신전이 둘 있었는데, 선수가 한 바퀴 돌때마다 일곱 중 하나씩 없애서 횟수를 표시했다. 스포츠 말고도 대경기장은 시장과 도박판이기도 했다. 황제 등 정부 고위인사도 대경기장 경기를 관람했는데, 경기장에 참석하지 않는 일은 무례한 일로 여겨졌다. 고위 인사, 기사, 그 밖에 경기와 관련된 사람들은 가장 높은 곳의 예약석에 앉았다. 황제가 특정 팀을 좋아하는 것도 부적절한 일로 여겨졌다. 대경기장은 기원전 600년에 생겼으며, 천년이 넘도록 이어지다 기원후 549년에 마지막 경마 경기가 치러진 후 문을 닫았다. 기술. 고대 로마는 인상적인 기술적 업적을 남겼으나 그 성과는 중세 시대에 잊혀지고 말았다. 로마의 여러 실용적인 기술 혁신은 이전의 그리스의 것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로마의 공학 기술은 군사 관련 기술과 더불어 로마의 우수한 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분야이며, 도로, 교량, 수도관, 목욕탕, 극장, 경기장을 건설하는데 기여했다. 콜로세움, 퐁 뒤 가르, 판테온 등 여러 유적이 아직도 로마의 공학과 문화의 증거로 남아있다. 로마는 건축으로 유명하였다. 로마 건축은 그리스 건축과 더불어 고전 건축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로마 건축은 그리스와 여러 가지 차이가 있는데, 로마는 그리스의 엄밀하고 정격적인 설계와 비례를 차용했다. 그러나 새로운 기둥과 주두의 배열 방식(오더)인 복합식(composite order)과 토스카나식(Tuscan order) 그리고 에트루리아의 아치에서 배워온 돔 외에는 공화정 말기까지 별다른 건축적 성과가 없었다. 기원전 1세기경 로마에서 콘크리트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콘크리트는 기원전 3세기 후반에 발명되었다. 이것은 화산회로 만든 강력한 시멘트로, 대리석을 밀어내고 로마의 주요 건축 자재가 되었으며, 여러 건축 방식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기원전 1세기에 비트루비우스가 아마도 역사상 최초의 완벽한 건축 저작인 건축론을 썼다. 기원전 1세기 말에 로마는 기원전 40년경 시리아(혹은 이집트)에서 발명된 취관(glassblowing)를 이용하게 되었다. 모자이크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그리스 원정 당시 견본을 가져오면서 전래되었다. 콘크리트 덕분에 튼튼한 포장도로인 로마 도로를 깔 수 있게 되었는데, 상당수 로마 도로는 로마가 멸망한지 천 년 뒤에도 계속 쓰였다. 광대하고 효율적인 제국 전역의 도로망은 로마의 패권과 영향력을 크게 증대시켰다. 로마 도로는 전체적으로 5만 마일에 달하였고, 변방의 도로는 군사공병 기술자가 축조하였는데 오늘까지도 건재하다. 비트루비우스 저서 12권 1장에 있는 공법을 보면, 맨 아래 기초로 큰 돌층과 부스러기층을 번갈아 깔고, 그 위에 모래층을 펴고, 맨 위에는 다각형 큰 돌의 상부를 갈아서 평평하게 만들어 덮는 것이라고 한다. 원래 로마 도로는 로마 군단이 신속하게 이동하기 건설한 도로였다. 그러나 이 대로는 로마가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데에도 일익을 담당했으며, 교역의 중심지인 로마의 위상을 굳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나왔다. 로마 정부는 역참 제도를 운영하여, 도로 일정한 간격마다 여행자들이 쉴 곳을 제공했으며 필요한 지역에 다리를 건설하여 24시간에 800km를 이동할 수 있는 파발 체제를 마련했다. 로마는 수많은 수도관을 건설하여 도시와 산업 지역, 농경지에 물을 공급했다. 로마 시에는 총 길이가 350km에 달하는 11개의 수도관이 있었다. 수도관은 대부분 지하에 매설되어 있었으며, 아치 수도교는 매우 적었다. 때로는 50m 높이 차가 있는 수도관이 연결되기도 했는데, 이 경우 사이펀으로 물을 끌어올렸다. 로마인은 위생 분야에서도 큰 발전을 이루었는데, 특히 위생과 사교 목적의 공공 목욕탕(termae)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로마의 여러 가옥에는 수세식 변기와 상수도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도시에 대하수도("cloaca maxima")가 있어 늪지를 배수하고 티베리스 강으로 폐수를 처리했다. 어떤 역사가들은 상하수도의 납으로 된 수도관 때문에 납 중독이 퍼져 출산율이 저하되고 로마 사회가 쇠퇴하면서 로마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추론하기도 했다. 그러나 납 함유량은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수도관은 폐쇄되지 않아 계속 물이 흘러 각 가정과 공공 시설의 배수구로 빠져나갔으며, 수도 꼭지는 많이 쓰이지 않았다. 복지. 고대 로마에서는 결식하거나 결식할 위험이 있는 식량빈곤층들에게 식량배급권을 지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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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curid=2566
율리우스 시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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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생물학
진화생물학(進化生物學)은 문자 그대로 지구 상의 생물의 진화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현대 생물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분과중의 하나이다. 진화란 생물의 다양성을 형성해가는 과정을 뜻하며, 그 과정을 연구하는 것이 진화생물학의 핵심이다. 진화학이란 생명의 역사에 관한 학문으로, 그 시작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으로 볼 수 있다. 현재는 진화가 관찰되는 사실이라는 것이 밝혀진 상태이며, 진화의 속도와 방향을 결정하는 요인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진화는 생물의 역사만을 다루므로 생명의 기원은 화학진화라는 다른 분야에서 다루고 있다. 진화생물학은 화학진화를 포함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는 종종 오해를 낳지만, 화학진화는 생화학의 분야로서 진화생물학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연구가 진행된다. 생물 진화의 설명. 진화(evolution)는 포괄적으로는 생명의 변화를 말한다. 과거와 현재의 생명체가 어떻게 다른가를 설명하고 왜 달라졌는가를 설명하는 분야가 진화론이라고 할 수 있다. 진화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핵심적인 내용을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과거에는 다음과 같은 의문점들이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는 유전적 정보증가, 즉 다양성의 증가와 군체 형성 등으로 이미 해결된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생물의 진화과정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이 과정은 일반적으로 동일한 시간 단위 안에서 이루어지지는 않으며, 급격한 외부 요인은 진화를 가속한다는 것이 화석을 통해 알려져 있다. (캄브리아기 생물 대폭발 (cambrian explosion), 페름기 및 백악기 대멸종 등) 진화를 이해하기 위한 개념 설명. 자연 선택. 다양한 유전자를 갖고 있는 유전자 집단에서는 특정한 환경 아래에서 유리한 유전자와 그렇지 않은 유전자가 있을 수 있다. 만일 '유리한 유전자'가 그 유전자를 가진 개체의 생존 및 번식능력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 다음 세대의 유전자 집단에는 '유리한 유전자'의 수가 더 많아질 것이다. 이때 '유리한 유전자'가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유리한 유전자'란, 단순히 자손을 많이 남기는 데 유리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결정된다. 비록 개체에는 해를 끼치는 유전자일지라도 자손을 남기는 데 유리하다면 그것은 자연 선택에 유리한 유전자이다. 이 개념은 멘델의 우열 개념과 함께 자주 오용되어 왔으므로 이해할 때 주의해야 한다. 또한 라마르크스가 주장한 것으로 유명한 용불용설과 획득형질 유전설과는 다른 계념이다. 자연 선택은 무작위적 선택이 강조되지만 그것과 다르게 용불용설은 무언가를 하고 싶은 의지대로 진화해 간다는 생각이므로 다른 개념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용불용설을 완전히 틀렸다고 보는 것은 잘못되었을 수 있다. 돌연변이. 유전자는 바뀔 수 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방사선, 화학물질, 단순한 복사과정의 실수 등에 의해 유전자가 바뀔 수 있으며, 이러한 유전적 변이는 외부의 압력 - 선택압 - 이 가해지지 않는 한 유전자 집단 안에 계속 축적된다. 돌연변이는 해로울 수 있으며, 생명체는 이러한 돌연변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세포 내 복구장치 및 발생 과정에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고는 있으나, 확률적인 문제로 돌연변이는 계속 축적된다. 종의 분화. 돌연변이로 축적되는 유전자 집단 내의 유전적 다양성은 자연선택의 도움으로 세대가 지날수록 앞 세대와는 다르게 바뀐다. 또한 이러한 유전자 집단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서로 섞이지 못할 수 있으며 이런 경우 한 유전자 집단과 다른 유전자 집단 안의 유전적 변이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될 가능성이 높다. 서로 다른 선택압이 가해진 두 유전자집단은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유전적으로 섞일 수 없게 되며, 이렇게 된 경우를 '종의 분화'라고 표현한다. 현대 진화 이론. 여러 생물학 분야에서 연구·종합한 현대 진화 이론은 대략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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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매카시
조지프 레이먼드 매카시(Joseph Raymond McCarthy, 1908년 11월 15일 ~ 1957년 5월 2일)는 미국의 공화당 정치인으로 위스콘신주 상원을 지냈다. 상원 의원 재직 동안 그는 공산주의자들이 정부를 포함한 미국 사회의 모든 분야에 침투해 있다는 주장으로 파장을 일으켰다. 반공 정서가 극에 달한 시대, 소위 적색 공포기이던 1950년부터 1954년까지 이어진 그의 근거없는 공산주의자 지목(매카시즘)으로 불필요한 조사들이 이어졌고 실제로 교수, 언론인, 군인, 정치인 등이 공직에서 추방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광풍은 이후 신뢰를 잃고 각계의 비판을 받다가 1954년 말 그에 대한 비판 결의가 채택되면서 막을 내렸다. 초기 생애. 위스콘신주 그랜드슈트에서 농부 티머시 토머스 매카시와 브리짓 티어니에게 태어났다. 매카시 가족은 아일랜드계로 독실한 로마 가톨릭 집안이었다. 7명의 자녀 중 하나인 조지프는 애플턴과 마나와 외부에 있는 농장들에서 자라왔고 한 방의 언더힐 시골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14세의 나이에 8학년을 완료하고 독립하여 자신 소유의 양계장을 운영하고 캐시-웨이 식료품점을 관리하였다. 1929년 20세의 나이로 그는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여 마나와의 리틀 울프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고교과정을 마무리했다. 1930년 마케트 대학교에 입학하여 5년 후에 법학 학위와 함께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 중에 그는 식품점 종업원 등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벌었다. 변호사가 된 매카시는 처음에 워파카, 그러고나서 쇼워노 지역에서 일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강한 찬양자인 그는 대공황이 있던 동안 1930년대에 루스벨트가 개발한 프로그램 뉴딜의 구호 프로그램들을 지지하였다. 매카시는 3번이나 루스벨트를 위하여 투표하였다. 3년 후에 매카시는 순회 판사로 선출되었다. 30세의 나이에 그는 위스콘신주 역사상 최연소 순회 판사였고 융통성이 있어 많은 현지 변호사들은 그와 일하기를 좋아하였다.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매카시는 나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해병대에 입대하였다. 그는 중위로 임명되어 첩보 기관에 할당되었으며 그의 직업은 공군 조종사들로부터 태평양 지역에서 적군들에 관한 자료를 모으는 것이었다. 그는 임무에 대한 자신의 헌신으로 수훈 비행 십자장과 에어 메달이 수여되었다. 그는 후에 정치 운동들에서 자신의 공적을 이용하려고 하여 전쟁 중에 선박 낙하로 다리 부상을 입었다고 주장하였다. 1944년 7월 매카시는 위스콘신주로 돌아와 현직이던 상원의원 알렉산더 와일리를 상대로 공화당 후보 예비 선거에 뛰어들었으나 참패하였다. 상원으로 선출. 1946년 매카시는 다시 공화당 상원 후보 선거에 도전하여 또다른 공화당 현직 상원의원 로버트 M. 라폴레트 주니어를 상대로 승리했고, 보수주의적 공화당 위원회에 의하여 지원되어 후보 지명을 받았다. 선거 운동 중에 민주당 후보 하워드 J. 맥머리를 상대로 매카시는 맥머리를 공산주의적 성향이 있다며 공격했고, 당시 미국 의회의 상하원 모두 공화당이 압승하는 가운데 그 역시 71개의 군들 중에 70개를 이기며 상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38세의 나이에 매카시는 상원의 최연소 의원이었고, 경솔한 행동으로 비판을 받는 일도 있었다. 그는 공화당 내에 많은 적들을 만들었으나 측근 집단도 이루었다. 반공주의 운동. 재선이 다가올 때 매카시는 자신을 추천할 지지기반이 없는 것을 알았고 위스콘신주에 의해 탈세와 윤리 위반으로 조사받을 위기에까지 처했다. 1950년 1월 만찬회에서 매카시와 동료들은 대중의 호의를 끌기 위해 강력한 반공주의 운동을 택할 것을 결심하였다. 2월 9일 매카시는 웨스트버지니아주 휠링에서 자신의 유명한 연설을 하였다. "여러분, 국무부는 공산주의자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공산당의 당원으로서 국무부에서 일하고 정책을 만든 자들 205명의 이름이 제 손에 들려 있습니다." '휠링 연설'을 위한 본문의 대부분은 강경 보수주의 성향의 '워싱턴 타임스-헤럴드'에서 온 한 신문 기자에 의하여 준비되었다. 사실 명단의 근거로 들어진 국무장관의 조사는 로버트 번즈가 쓴 편지인데 편지에는 공산당원이나 명단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지 않았다. 당시 국공내전의 공산당 승리와 소련의 원자폭탄 시험 등으로 미국에는 공산주의의 확산에 대한 경계심이 만연해 있었으므로 매카시의 시간적 조절은 효과적이었다. 또한 3주 전 재판에서 전 국무부 관계자 앨저 히스가 루스벨트 행정부에서 지낸 동안 스파이 활동을 했다고 판결된 상황이었다. 매카시즘. 그의 주장으로 인해 사회의 파장은 엄청났으나, 대부분은 쉽게 반박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민주당원들은 매카시의 비난들을 멈추는 데 일찍이 협의를 이루어, 밀러드 타이딩스 상원의원은 매카시의 비난에 대한 조사를 앞장서 오류를 찾아냈다. 그러나 매카시는 능숙하게 청문회를 개인적 심판장으로 사용하였고, 조사 도중에 난관에 처한 매카시는 필립 C. 제섭을 소련 스파이를 지낸 좌익 지식인 오언 래티모어와 공산주의자에 대해 우호적인 모습을 보인다며 기소하였다. 1951년에도 이러한 기소는 이어졌고 그동안 매카시의 언어는 점점 무모해졌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극동에서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불복종으로 해임한 이후 그해 6월 매카시는 트루먼을 "술고래"라고 비하했다. 더욱 나가서 매카시는 국방부 장관 조지 마셜이 다양한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하였고, 마셜은 곧 장관직으로부터 사임하였다. 그의 비판은 국무장관에 대해서도 이루어졌다. 1953년 공화당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재임하고 여러 강경 공화당원들이 의회를 차지하면서 매카시는 정부 운영 상원 위원회와 수사 위원회의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매카시는 젊은 변호사 로이 콘과 가까이 하며 그의 지식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달만에 매카시는 아이젠하워 행정부도 공격하며 대립하기 시작했다. 육군에 대한 공격. 1953년 가을에 매카시는 뉴저지주 포트먼머스에 있는 육군 통신단 센터이 공산당 스파이와 연관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1954년 4월부터 6월까지 상원의 "육군-매카시 청문회"가 열렸고, 아이젠하워의 요청으로 이는 텔레비전 방송으로 공개되었다. 시청률은 미국 텔레비전들의 3분의 2에 이르렀다. 매카시는 증인들에게 공격적인 발언을 하면서 청문회를 진행하였고 이를 계기로 매카시에 대한 대중의 여론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육군의 참모 대리 조지프 웰치에게 인신공격을 한 것이 큰 논란이 되기도 했다. 비난 결의. 1954년 6월 11일 버몬트주의 공화당원 랠프 플랜더스 상원의원은 매카시에 대한 비난 결의안을 제기하였다. 민주당 소속 의원대표 린든 B. 존슨은 공화당 온건파와 함께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여 의원들과 육군 장성들에 대한 모욕 혐의를 조사하였고, 결국 비난 결의안은 채택되어 매카시즘은 막을 내린다. 말년. 매카시는 순식간에 대중의 관심을 잃었고, 의원직을 유지할 수는 있었으나 동료들과 아이젠하워 행정부에게 완전히 버림받은 상황에서 마지막 세월을 보냈다. 절망으로 가득찬 그는 매일 아침 늦게 일어나 하루종일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며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었고 사람들과도 잘 만나지 않았다. 1957년 매카시 부부는 한명의 아이를 입양하였으나 그 외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는 술에 빠져 지내던 것으로 추정되며 1957년 5월 9일 48세의 나이에 급성 간염으로 사망하였다. 평가. 매카시 시대에 적극 동조한 유명인으로는 유명한 반공주의자들인 로널드 레이건, 엘리아 카잔, 월트 디즈니를 꼽을 수 있으며, 반대로 피해자로는 영화인 찰리 채플린, 극작가 아서 밀러, 레너드 번스타인, 시인 및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이름은 매카시즘이라는 단어에서 극단적 반공주의를 비판적으로 이르는 대명사가 되었다. 한편 일부 학자나 강경 보수주의 진영에서는 그에 대한 재평가를 주장하기도 한다. 역사학자 존 얼 헤인즈(J. E. Haynes)는 그가 지적한 159명의 대상 중 9명이 실제 소련 스파이였음을 지적하였는데, 이외에 상당수가 실제로 보안상 위험한 인물이었을 수는 있으나 대다수는 보안적으로도 문제시될 부분이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고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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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 멘델레예프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멘델레예프( , , 1834년 2월 8일 - 1907년 1월 20일)는 러시아의 화학자이다. 주기율표를 최초로 작성한 이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생애. 멘델레예프는 시베리아 서쪽에 있는 토볼스크현 Verkhnie Aremzyani에서 11, 13, 혹은 17명의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그 수는 출처마다 다르며, 정확한 수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태어난 해에 그의 선생님이었던 아버지 이반 파블로비치 멘델레예프(Ivan Pavlovich Mendeleev)가 시력을 상실하여 그의 어머니 마리아 드미트리브나(Maria Dmitrievna Mendeleeva)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다. 그녀는 그녀 가족의 유리공장을 다시 세워 살림을 꾸려나간다. 1847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유리공장이 화재로 파괴되는 등 일련의 시련을 겪는다. 멘델레예프가 15세이던 1849년 그의 어머니는 멘델레예프에게 고등교육을 시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남은 두 자녀(멘델레예프와 리자)를 데리고 시베리아에서 모스크바로 건너가 정착했다. 멘델레예프는 모스크바에 있는 대학에 지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곧 그의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죽은 남편 친구의 도움을 받아 Main Pedagogical Institute에 들어가게 된다. 그가 이 기관에 들어간지 10주가 안되어 그의 어머니가 사망하고, 2년 후 그는 결핵 진단과 함께 단지 수개월 정도 살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1869년 3월 6일, 러시아화학회에서 그는 주기율표에 관한 자신의 논문을 처음으로 공식 발표했다. 그는 원소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나열하여 발견되지 않은 원소의 성질까지도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실제로 멘델레예프가 예측한 원소들의 성질과 실제 원소의 성질이 맞아떨어진 사례가 몇 개 존재한다. 로타르 마이어도 거의 같은 시기 거의 유사한 주기율표를 생각해 내었으나 발견되지 않은 원소의 성질을 예측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주기율표 101번째 원소는 그의 이름을 따 멘델레븀이라 불린다. 멘델레예프는 1906년 노벨 화학상 수상 후보에 올랐지만 그 상은 프랑스의 무아상이 수상했고 멘델레예프는 끝내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한 채 1907년 생을 마감했다. 왜냐하면 노벨상을 수상하려던 해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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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기원전 100년 7월 12일 ~ 기원전 44년 3월 15일)는 로마 공화국의 정치가, 장군, 작가이다. 그는 로마 공화국이 로마 제국으로 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치적으로 카이사르는 민중파의 노선에 섰다. 기원전 60년대 말에서 5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소위 제1차 삼두 정치라는 초법적 정치 연대를 이루어 수년간 로마 정계를 장악하였다. 이들 파벌은 자신들끼리 권력을 분점하고자 하여, 원로원 내에서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등 벌족파의 반대를 받았으며,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이에 가세하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기원전 58년 ~ 52년)하여 로마 제국의 영토를 북해까지 넓혔으며, 기원전 55년에는 로마인 처음으로 브리타니아 침공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공훈 덕분에 카이사르는 강력한 세력가로 입지를 굳혀 폼페이우스를 위협하게 되었으며, 카라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전사하면서 삼두정의 두 정치가 사이에 긴장이 높아졌다. 이렇듯 로마 정계가 재편되면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서로 대치하게 되었으며,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대의를 내세웠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단으로 하여금 루비콘 강을 건너게 하는 결단을 내려 기원전 49년에 내전이 일어났으며, 파르살루스 전투, 탑수스 전투 등에서 승리한 카이사르는 로마 세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등극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뒤 그는 로마의 사회와 정치에 광범위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는 공화정의 귀족 정치를 고도로 중앙집권화하였으며, 급기야 자신을 종신독재관으로 선언하였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에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일군의 원로원 의원들이 공화정을 복고하고자 음모를 꾸며 카이사르를 암살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내전이 일어났으며, 결국 카이사르의 양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영속적인 전제정을 성립하였다. 카이사르가 죽은 지 기원전 42년에,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공식적으로 로마의 신으로 축성하였다. 따라서 그의 사후 그의 공식명칭은 신격 카이사르가 되었다(Divus Caesar). 또한 그 이후부터 로마 황제가 죽었을 경우 후임자가 그를 신격화시키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카이사르의 삶은 본인이 쓴 전쟁 기록(갈리아 전기, 내란기)을 통해 상당 부분 알려져 있으며, 정적임과 동시에 오랜 친구였던 키케로와의 서신과 그의 연설, 살루스티우스의 기록, 카툴루스의 시 등 당대의 다른 사료도 남아 있다. 또 아피아노스, 수에토니우스, 플루타르코스, 카시우스 디오, 스트라본 등 여러 후대 역사가들의 기록도 그의 삶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생애. 유년기. 카이사르는 귀족인 율리우스 씨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율리우스 씨족은 베누스 여신의 아들이라는 전설상의 트로이아 왕자 아이네아스의 아들 율루스의 후손을 자칭하는 집안이었다. 그의 코그노멘(cognomen, 가문 이름) "카이사르(Caesar)"도 대대로 물려받은 이름인데, 그 어원에 대해서는 크게 4가지 설이 있다. 대 플리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조상 가운데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난 사람이 있어서 ‘자궁에서 잘라온(ab utero caeso)’이란 뜻으로 카이사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주장했다. 황제 역사(Historia Augusta)에는 다른 설명이 나오는데, 카이사르의 굵은 머리카락()이나 밝은 회색 눈() 때문이라거나 혹은 그의 선조가 2차 포에니 전쟁에서의 전투 중 코끼리(무어말 "caesai")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카이사르는 코끼리를 새긴 동전을 주조하였는데, 그가 자신의 이름에 대한 해석 가운데 코끼리와 관련된 해석을 좋아했다는 점을 암시한다. 한편 카이사르 자신이 제왕 절개 수술로 태어났다는 오해가 있는데, 이는 적어도 서기 10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전에도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지닌 사람이 있었으며, 카이사르의 시대에 제왕 절개 수술은 오직 죽은 여자에게만 실시하였는데, 카이사르의 어머니인 아우렐리아는 그를 낳고도 장수하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은 유서깊은 계보를 지녔으나, 정치적으로 별다른 영향력이 없었으며, 가문에서 배출한 집정관 수도 세 명에 불과하였다. 카이사르의 아버지인 동명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공화정에서 두 번째로 높은 법무관직까지 올랐으며, 아시아 속주 총독을 지냈는데, 아마도 매형이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영향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어머니 아우렐리아 코타는 여러 집정관을 배출한 영향력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또 카이사르의 가정 교사는 갈리아 출신의 웅변가이자 문법가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니포였다. 카이사르는 누이가 둘 있었는데 모두 이름이 율리아였다. 카이사르의 유년기에 대해서는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수에토니우스나 플루타르코스의 카이사르 전기에 보면, 내용이 10대 때부터 시작하며, 두 책의 시작부는 모두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카이사르의 유년기는 혼란한 시절이었다. 기원전 91년에서 88년 사이에 로마와 이탈리아 동맹국들이 로마 시민권 문제를 놓고 동맹국 전쟁을 벌였으며, 그러는 사이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의 동부 속주를 위협하였다. 로마 정계는 벌족파(optimates)와 민중파(populares)로 갈라져 있었는데, 엄밀히 말해 두 파벌은 각자 공통적인 대의가 없어서 정당이나 정파와는 다르다. 벌족파는 원로원의 전통적이고 헌정상의 경로를 통해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는 정치가들이었으며, 민중파는 전통적인 과정 대신 유권자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정치가들이었다. 카이사르의 숙부인 마리우스는 민중파 정치인이었으며, 그의 부하였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벌족파였는데, 카이사르의 유년기 때 두 정치가의 대립으로 내전이 일어났다. 마리우스와 술라 모두 동맹국 전쟁에서 두각을 드러내었다. 두 사람 모두 미트리다테스 정벌 전쟁에 지휘권을 원하였으나, 당초 술라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으나, 호민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가 선거구 개혁과 미트라다테스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넘기는 법안을 통과시켜버렸다. 이후 폭동이 일어났고 로마에서 탈출한 술라는 로마로 진군하여 자신의 지휘권을 주장하며 술피키우스를 처형하고 마리우스파를 축출하였으나, 술라가 원정을 떠난 사이에 마리우스가 임시로 모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그와 그의 정치적 동맹자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는 도시를 장악하고, 술라를 공적(公適)으로 선언하였으며, 마리우스 군대는 술라 지지자들을 잔혹하게 복수하였다. 기원전 86년 초에 마리우스가 세상을 떠났으나, 킨나를 중심으로 한 그의 지지자들이 계속 정권을 잡았다. 기원전 85년 어느날 아침에 카이사르의 아버지가 신발을 신는 중에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갑자기 죽자 카이사르는 16살의 나이에 가장이 되었다. 이듬해 그는 유피테르의 고위 사제인 플라멘 디알리스(Flamen Dialis)로 지명되었는데, 전임자인 메룰라가 마리우스의 숙청 당시 죽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제직에 오르는 사람은 귀족일 뿐 아니라 귀족과 결혼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는 기사 출신 가문의 평민 여자인 코수티아(Cossutia)와 어릴 때 맺은 약혼을 파기하고, 당시 민중파의 영수였던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하였다. 이때 미트라다테스와 협정을 맺었던 술라가 돌아와 마리우스 지지자들에 대항한 내전을 종결하였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작전을 수행한 뒤 그는 기원전 82년 11월 1일에 콜리나 대문의 전투로 로마를 장악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독재관에 임명하였는데, 전통적으로 6개월 동안 단 한 번 재직하는 독재관직과 달리 술라의 독재관직에는 임기 제한이 없었다. 마리우스의 상은 모두 파괴되었으며, 마리우스의 시신은 무덤에서 파내어 부관참시되어 티베리스 강에 던져졌다. 당시 킨나는 항명을 일으킨 자신의 병사들에게 이미 살해된 상황이었다. 술라의 처벌자 명단 공개로 그의 정적 수 백명이 죽거나 추방되었다. 마리우스의 처조카이자 킨나의 사위였던 카이사르 역시 명단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유산과 사제직, 아내의 지참금 덕분에 처형을 면하였으나, 아내 코르넬리아와 이혼하기를 거부하여 잠적하는 수밖에 없었다. 술라파가 있던 모계쪽 집안과 베스타 여사제의 관여 덕분에 그에 대한 위협은 취소되었다. 술라는 망설이며 결국 사면에 승낙하였는데, 카이사르 속에 수많은 마리우스가 있음을 보았노라고 말한 바 있다. 청년 시절. 도주했던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오는 대신 군 입대를 택하여, 아시아 속주에서는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 휘하에서, 킬리키아에서는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밑에서 복무하였다. 역설적으로 카이사르가 군 경력을 쌓을 수 있었던 연유는 사제직을 잃은 덕분이었는데, 플라멘 디알리스 사제는 말을 만지거나 자신의 침대가 아닌 곳에서 사흘 밤을 자거나 로마 바깥에서 하룻밤을 자거나 군대를 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미틸리니 공성전에서 공을 세워 시민관을 수여받았다. 비튀니아 임금 니코메데스 4세의 함대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던 중 카이사르는 궁정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어 왕과 동성애 염문이 돌았으며, 이후에도 이 소문은 계속 그를 따라다녔다. 기원전 80년, 독재관에 오른 지 2년 만에 술라는 사임하고, 다시 집정관제를 복원하였으며, 집정관에 재직한 뒤 정계에서 은퇴하여 사인(私人)으로 물러났다. 나중에 카이사르는 술라가 독재관직을 포기한 일을 두고 "술라는 정치의 가나다도 모른다"고 비웃었다. 2년 뒤인 기원전 78년에 술라는 세상을 떠났으며, 국장이 열렸다. 술라의 사망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로마에 돌아와도 안전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유산을 몰수당한 터라 재산이 없던 카이사르는 로마 시에서 하층민들이 사는 수부라에 평범한 집을 얻었다. 그가 로마로 돌아올 때 반술라파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반란을 시도하였으나, 레피두스의 지도력을 신뢰하지 않은 카이사르는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변호사로 나섰다. 그는 빼어난 웅변에다 인상적인 제스처와 높은 목소리를 갖추었으며, 금품 강요와 부패로 악명 높던 전직 총독들을 가차없이 고발하여 유명해졌다. 키케로도 그를 칭찬하며 "이제 나와보라, 어느 웅변가가 그대를 능가하겠는가?"라고 말한 바 있다. 수사학을 완성하기 위해 기원전 75년에 그는 로도스섬으로 유학하여 일전에 키케로를 가르친 바 있는 아폴로니우스 몰론 밑에서 공부하였다. 에게 해를 지나던 중, 카이사르는 킬리키아 해적에 잡혀, 도데카니사 제도의 파르마쿠사 섬에 갇히게 되었다. 잡혀있는 동안 카이사르는 거만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카이사르는 포로로 잡혀있을 때 해적들을 십자가형에 처하겠다고 공언하였는데, 해적들은 이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해적들이 그의 몸값을 은 20 탈란톤으로 잡자, 카이사르는 50 탈란톤을 요구하라고 고집하였다. 몸값이 지불되자 카이사르는 배를 모아 해적들을 추적해 잡았으며, 이들을 페르가몬에 투옥시켰다. 아시아 총독 마르쿠스 융크투스는 카이사르의 요구대로 이들을 처형하길 거부하고 해적들을 노예로 팔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해안으로 돌아가 자신의 권리에 따라 이들을 십자가형에 처하였다. 그런 다음 로도스로 갔으나, 곧 아시아에서 군사 작전에 불려갔으며, 폰토스의 침략을 막고자 보조군을 모병하였다. 로마로 돌아오는 중에 그는 쿠르수스 호노룸의 첫 단계인 군사 참모(military tribune)로 선출되었다. 이 시기에 스파르타쿠스 전쟁이 일어났는데(기원전 73~71년), 카이사르가 이때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이에 관여했다. 기원전 69년에 그는 재무관에 선출되었으며, 그 해에 마리우스의 미망인이었던 고모 율리아의 장례식 연설을 하였는데, 장례 중에 (술라 집권 이후로 볼 수 없었던) 마리우스의 상을 전시하였다. 그의 아내 코르넬리아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기원전 69년 봄 혹은 초여름에 장례가 끝나고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의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휘하에서 재무관직을 수행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상을 보고는 알렉산드로스가 세계를 제패할 때와 같은 나이에 자신은 이룬 것도 없다는데 불만을 느끼며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재무관직 조기 해임을 요청하여 승인받고 로마 정계로 돌아왔다. 기원전 67년에 돌아와서, 그는 술라의 손녀인 폼페이아와 결혼하였다. 그는 조영관으로 선출되어 마리우스의 승전 기념비를 복구하였는데, 이는 술라파가 아직 정권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물의를 빚었다. 그는 또 술라의 재산 몰수로 이익을 봤던 사람들을 기소하였으며, 공공 사업과 경기에 막대한 돈을 빌려 써서 동료 조영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보다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두 차례 반란 모의에 연루된 혐의를 받기도 하였다. 정계에서 두각을 드러내다. 기원전 63년은 카이사르에게 파란 많은 해였다. 그는 호민관 티투스 라비에누스를 설득하여 벌족파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라비리우스에게 37년 전에 원로원 비상 결의로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하고 자신을 이 사건을 심리할 두 재판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임명하게 하였다. 키케로와 퀸투스 호르텐시우스가 라비리우스의 변호를 맡았으나, 그는 대역죄(perduellio)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인민에게 청원할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였으나 법무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가 야니쿨룸 언덕에 군기를 내려 민회를 산회시켰다. 라비에누스는 다음 회기에 기소를 재청할 수 있었으나, 카이사르의 지시로 재청하지 않아 이 문제는 중지될 수 있었다. 카이사르의 목적은 라비리우스 개인이 아니라, 집정관들이 민회에 대한 상소권도 무시한 채 이른바 국가의 적들을 처형할 때 휘둘러온 원로원 비상 결의의 정당성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는 원로원을 장악하고 있던 주류 세력들이 카이사르와 같은 민중파 정적들에 대하여 궁극적인 방호책으로 삼았던 비상 결의에 반대 여론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라비에누스는 이후 십 년간 카이사르의 중요한 친구가 되었다. 술라가 임명했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가 그 해에 죽자 카이사르는 로마 국가 종교의 수장인 대신관직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에게는 강력한 벌족파 경쟁 후보 두 사람이 있었는데, 집정관을 지낸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였다. 후보들은 서로에게 뇌물 수수 혐의로 고발하였다. 선거일 아침에 카이사르는 어머니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면 대신관에 당선되어 있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선거 운동으로 막대한 빚을 져서 추방되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경쟁 후보들은 뛰어난 경험과 지위를 가졌지만 카이사르가 무난히 당선되었는데, 아마도 두 경쟁 후보가 서로 표를 잠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신관은 신성로(Via Sacra)에 관저가 있었다. 그 해 집정관이었던 키케로는 공화국을 장악하려는 카틸리나의 음모를 알렸으며, 카툴루스 등은 카이사르가 이 음모와 연관이 있다고 고발하였다. 다음 해 법무관으로 선출되었던 카이사르는 이 음모 연루 문제 처리를 놓고 벌어진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였다. 회의 중에 카이사르는 쪽지를 받았다. 그러자 카이사르의 정적인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는 카이사르가 음모자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며 그 쪽지를 크게 읽도록 요구하였다. 카이사르는 카토에게 쪽지를 넘겨주었는데, 당황스럽게도 그 쪽지는 카토의 의붓누이인 세르빌리아에게서 온 연애 편지였다. 반역 음모자를 사형에 처하자는 의견에 대해 카이사르는 설득력 있게 반박하면서 종신 징역에 처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카토의 연설로 결국 음모자들은 처형되었다. 다음 해 이 반란 음모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카이사르는 다시 공범 혐의로 고발되었다. 그러나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이 음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스스로 보고한 적이 있다고 증언하여 문제가 풀렸으며, 고발자 가운데 한 사람과 또 위원회 위원 한 사람이 구금되었다. 기원전 62년에 법무관이었던 카이사르는 당시 호민관이었던 메텔루스 켈레르가 논쟁적인 입법 제안에 지지하였으며, 두 사람은 매우 완고하여 원로원에서 이들을 직무 정지에 처하였다. 카이사르는 계속 법무관직을 수행하고자 하였는데, 폭력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가 자신을 지지하는 대중 시위를 진정시키자 원로원은 그를 복직시키기로 하였다. 그 해에 보나 데아(Bona Dea, "선한 여신") 제사가 카이사르의 관저에서 열렸다. 이 제사에는 남성이 출입할 수 없었으나,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라는 젊은 귀족 청년이 여자로 변장하고 몰래 입회하려고 하였는데, 이는 카이사르의 아내인 폼페이아를 유혹할 목적이 분명하였다. 그는 잡혀서 신성 모독죄로 기소되었다. 재판에서 카이사르는 로마의 유력 가문인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거스르지 않고자 클로디우스에게 불리한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으며, 클로디우스는 막대한 뇌물과 협박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내 아내는 어떤 의심도 받아서는 안 된다"면서 폼페이아와 이혼하였다. 법무관직을 수행한 뒤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이베리아 바깥) 속주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아직도 상당한 빚을 지고 있던 터라 로마를 떠나기 전에 빚쟁이들을 설득해야 하였다. 그는 로마의 갑부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도움을 받았다. 폼페이우스에 반대하는 자신을 지지하는 대가로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의 빚 일부를 지불하고, 나머지 빚에는 보증을 서 주었다. 그렇게 하고도 카이사르의 법무관 임기가 끝나 일반 시민 지위가 되면 빚 때무에 기소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속주로 떠났다. 히스파니아에서 그는 칼라이키족과 루시타니족을 정복하여 그의 군대에게서 임페라토르(최고 군사령관)로 환호받았으며, 채무 관련 법을 개혁하고, 매우 존경을 받으며 총독직을 마쳤다. '임페라토르'로 경례를 받으면서 카이사르는 개선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공화정 최고위직인 집정관직에 출마하길 원하였다. 만일 그가 개선식을 열려면, 행사 전까지 군인 신분으로서 도시 바깥에서 대기해야 하는데, 선거에 입후보하려면 사령관직에서 이임하고 일반 시민 신분으로 로마에 들어와야 했다. 결국 그는 개선식과 선거 출마를 동시에 할 수 없었다. 그는 원로원에 부재중 출마 허가를 요청하였으나, 카토가 이를 막았다. 두가지 사이에서 카이사르는 집정관직을 선택하였다. 첫 집정관 재직과 삼두 정치. 집정관 선거에 카이사르,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몇 년 전에 카이사르와 함께 조영관직을 맡은 바 있다), 루키우스 루케이우스 세 후보가 출마하였다. 선거는 깨끗하지 못했다. 카이사르는 키케로에게 지지를 청하였으며 부유한 루케이우스와 제휴하였으나, 체제의 주류 세력은 보수파인 비불루스를 밀어주었으며, 청렴하기로 유명했던 카토조차도 그를 지지하여 뇌물을 썼다고 한다. 카이사르와 비불루스는 기원전 59년에 임직하는 집정관으로 당선되었다. 카이사르는 이미 크라수스에게 정치적인 빚을 지고 있긴 하였으나, 폼페이우스에게도 손을 내밀었는데, 그는 자신의 퇴역병에게 준 동방의 정착지와 농지를 원로원에서 비준받기 위해 싸우고 있었으나 성과를 얻지 못한 상황이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기원전 70년에 함께 집정관직을 역임한 이래 적대 관계였으며, 카이사르는 만약 자신이 한쪽과 손을 잡으면 다른 한쪽의 지지를 잃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을 화해하고자 하였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세 사람은 충분한 자금과 더불어 공공 사업을 장악할 정치적 영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의 비공식적 정치 제휴를 제1차 삼두 정치라고 하는데, 카이사르의 딸인 율리아와 폼페이우스가 결혼하면서 공고해졌다. 카이사르는 재혼하였는데, 이번 배우자는 다음 해 집정관으로 당선된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의 딸인 칼푸르니아였다. 집정관에 취임하자 카이사르는 현대의 신문격인 악타 디우르나(Acta Diurna)를 광장에 붙였다. 악타 디우르나로 원로원과 민회의 의사록이 그대로 민중에 공개됨으로써 민중파인 카이사르의 입지는 더욱 강해졌다. 또한 공직자가 1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선물을 받지 못하게 하는 율리우스 레페르토리(공직자 윤리에 관한 율리우스 판례법)을 제정하여 공직 생활의 정화를 도모하였다. 카이사르는 빈민에게 공유지를 재분배하는 농지법(lex iulia de agraria)을 제안하였는데, 그라쿠스 형제가 제출하려했던 농지법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카이사르는 그라쿠스 형제와는 달리 기존체제에서 개혁을 실시하려 했기 때문에 보수파를 회유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보수파의 강한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삼두의 강력한 힘을 이용했다. 삼두의 일파인 폼페이우스는 필요할 경우 무력도 불사하며 지지했으며, 크라수스도 마찬가지로 지지하여 삼두 정치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폼페이우스가 불러들인 그의 병사들이 도시에 운집하였으며, 삼두정의 반대자들을 위협하였다. 비불루스는 불길한 전조(前兆)가 있었다고 선언하여 법을 무효화하려 시도하였으나, 카이사르의 무장 지지자들이 그를 포룸에서 쫓아내 버렸다. 비불루스의 릭토르(lictor)들이 들고 다니는 속간은 부러졌으며, 그와 함께 있던 호민관 두 사람이 다쳤고 비불루스 자신도 똥 한 바가지를 뒤집어썼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 그는 집으로 물러나 그 해 내내 틀어박혀 지내다가 이따금 나쁜 전조를 선언하였다. 이렇듯 카이사르의 입법을 방해하려는 시도는 별 소용이 없었다. 로마의 풍자가들은 이때부터 그 해를 "율리우스와 카이사르가 집정관이었던 해"라고 불렀다. 카이사르와 비불루스가 처음 선출되었을 때, 귀족들은 카이사르가 집정관 임기를 마친 다음 해에 맡을 전임 집정관 자리로 속주 총독직 대신 이탈리아의 목초지와 숲을 맡겨서 장래에 그의 권력에 제약을 두고자 하였다. 그러나 피소와 폼페이우스의 도움으로 나중에 이 조치는 취소되고 삼두 정치가 입법시킨 '바티니우스 법'에 따라 카이사르는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이탈리아 북부)와 일리리쿰(발칸 반도 서부)의 총독으로 임명하였으며, 나중에는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도 맡겼고 그에게 4개 군단을 주었다. 집정관 임기를 마치고 그가 맡을 전임 집정관 임기는 단 1년이 아니라 5년으로 정해졌으며, 이 기간 동안 그는 법정 기소가 면제되었다. 카이사르는 푸블리카누스의 속주세 예납제도를 폐지하여 속주세의 공정성을 실현하였다. 또한 폼페이우스가 정복한로마세계의 동방을 재편성하는 법안을 가결시키고 게르만족의 수령 아리오비스투스와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로마인의 친구이자 동맹자'(socius e amicus populi romani)로 임명했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이집트에서 쫓겨난 상태였으므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부하인 가비니우스를 파견하여 그를 왕위에 복귀시켰다. 카이사르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3천 탈렌트를 받았으나 크라수스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이 돈의 절반을 써야했다. 집정관 임기가 끝나자 카이사르는 변칙적으로 정한 직무 때문에 기소되는 것을 가까스로 피하고 서둘러 임지로 떠났다. 갈리아 정복. 카이사르는 여전히 많은 빚을 지고 있었는데, 속주 총독은 착취 나 위험한 군사 원정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휘하에 4개 군단이 있었으며, 임지 중 두 곳 일리리쿰과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는 북방의 미정복지와 접경하고 있는데, 이곳의 독자적인 갈리아인들은 불안정한 상태로 알려져 있었다. 로마의 동맹인 갈리아의 하이두이족(Haedui)은 전에 하이두이의 땅을 정복하고 정착한 아리오비스투스가 이끄는 게르마니아의 수에비족(Suebi) 분견대의 도움을 받은 다른 갈리아 부족에게 패하였으며, 헬베티족이 이주를 위해 대규모로 이동하면서 로마인들이 우려하던 상황이었다. 카이사르는 새로이 두 군단을 조직하고, 프로빈키아 통과를 요청한 헬베티족의 요구를 거절했다. 헬베티족은 하이두이족의 승인을 얻고 그들의 영토를 통과하려 했으나 다툼이 벌어졌고 이에 하이두이족은 헬베티족을 적대하며 동맹국인 로마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때 하이두이족의 족장 둠노릭스는 헬베티족과 연락을 취하다 카이사르에게 발각되었다. 카이사르는 그의 형이자 하이두이족의 족장 디비키아쿠스가 동생을 대신해 용서를 바라자 둠노릭스를 용서했다. 카이사르는 손 강에서 헬베티족을 기습공격했고 큰 손실을 입은 헬베티족은 디비코라는 강화사절을 보냈으나 그는 카이사르가 요구한 인질제공을 거부하여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후 카이사르와 헬베티족은 비브락테 전투에서 맞붙었다. 헬베티족은 밀집대형으로 진격하였지만 로마군이 투창공격을 퍼붓자 방패에 창이 박혀 방패를 버리고 싸워 크게 손실을 입었다. 보이족과 툴링기족이 곧 로마군을 공격했으나 제1열을 헬베티족과 싸우게 하고 제2열은 보이족과 툴링기족과 대적하게 했다. 이렇게 한바탕 치열한 전투에 이루어지고 결국 카이사르가 헬배티족을 격파했다. 카이사르는 헬베티족에게 헬베티아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고 이것이 이루어지자 승자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 갈리아인들의 요청에 따라 게르만족과 대적하게 되자 수에비족의 수령 아리오비스투스와 협상을 시도했다. 그때 로마군에서 게르만인에 대한 공포가 퍼졌으나 카이사르는 몸소 연설로 로마군의 전투 의지를 되찾게 했다. 카이사르는 제10군단을 이끌고 아리오비스투스와 브장송에서 직접 만나 회담을 했고 그 협상은 게르만인들의 도발행위로 인해 결렬되었다. 이후 카이사르는 사절을 보냈으나 그들이 아리오비스투스에게 사로잡히자 그와 전투를 벌였다. 아리오비스투스는 전투에서 질것이라는 게르만 여인의 점에 따라 전투를 바라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적군포로를 심문하여 이 사실을 알아내었고 게르만인들의 전투의욕이 적음을 이용하기로 했다. 카이사르는 게르만족을 더 과감하게 공격했고 아리오비스투스는 어쩔수없이 로마군과의 회전을 준비했다. 게르만족은 배후에 아녀자가 탄 마차를 포진시켰다.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로마군 우익은 적군의 공격을 버텨냈으나 좌익은 적군의 수적우세에 밀리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아끼는 부하이자 크라수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전투에 동원되지 않는 제3열 군사를 이끌고 좌익을 지원했다. 힘을 얻은 로마군의 공격에 게르만족은 다수가 죽고 아리오비스투스는 게르마니아으로 달아났다. 게르만인들의 배후에 강이 있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게르만족이 죽거나 아리오비스투스를 비롯한 소수의 요인들만이 전장을 탈출할 수 있었다. 아리오비스투스의 두 아내와 한 딸은 죽고 다른 딸들은 사로잡혔다. 이 해의 모든 전투를 끝내고 겨울에는 세콰니족 영토로 군대를 물렸는데 이는 즉 카이사르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바깥 영토에 관심을 둔 것이 일시적이지 않다는 뜻이었다. 겨울 동안 갈리아 키살피나에서 신규로 2개 군단을 또 편성하여, 임기 2년째에 카이사르는 처음보다 배가된 군사력을 갖추었다. 이런 자의적인 군 편성은 적법성이 의심스러웠는데, 키살피나 갈리아인은 로마 시민이 아니었기 대문이었다. 작년 카이사르의 군사 활동에 대응하여 갈리아 북동부의 벨가이 부족들이 무장을 시작하였다. 카이사르는 이를 공격적인 행동으로 받아들였으며, 이와중에 레미족은 반군들을 배신하고 카이사르와 동맹을 맺었다. 수에시오네스족장 갈바를 중심으로 통합된 벨가이 동맹군 29만명은 레미족의 영토에 주둔하고 있던 카이사르와 레미족을 향해 귀갑대형을 이루고 진격해왔다. 로마군 진영 근처에 비브락스(Bibrax)라는 이름의 레미족 도시가 있어 벨가이군은 이 도시를 습격했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하지만 비브락스의 상황이 위급해지자 카이사르는 누미디아인과 크레타인으로 구성된 궁수들과 발레아레스 투석병을 비브락스에 구원병으로 보냈다. 벨가이군은 이들의 구원에 힘을 얻은 레미족의 거센 반격에 공성을 중단하고 로마군 진지를 공격했다. 로마군 진영은 강을 끼고 두편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벨가이인의 공격을 받는 쪽은 카이사르가 직접 지휘했고 강 건너편의 지휘는 사비누스가 맡았다. 벨가이군은 강을 건너 사비누스를 공격하려 했지만 카이사르는 진지 안에 있던 다리를 건너 강 건너편에서 접근해오는 적과 싸웠다. 로마군은 물속에서 움직임이 둔해진 벨가이군을 무찔렀다. 벨가이인들은 패전소식과 식량부족에 통합된 벨가이 병력을 각 부족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각 부족으로의 귀환은 소란스러운 것이 패주에 가까워 벨가이인들은 카이사르가 보낸 기병대의 공격을 받고 다시 크게 전사자를 내었다. 카이사르는 적군 연합부대를 크게 격파하자 차차 각 부족을 하나씩 정복하였다. 우선 수에시오네스족을 격퇴하고 벨로바키족과 암바니아족과 강화를 맺었다. 벨로바키족은 부족내의 반로마파가 모두 브리타니아에 도망쳐 버렸다고 주장했다. 로마군은 이어 벨가이에서 가장 강한 전사들을 가진 네르비족과 싸우게 되었다. 그들은 매복해 있었으며 로마군의 군량수송부대에 첩자를 두었다. 카이사르가 그들의 영토에 도착하자 기습공격을 하여 로마군의 허를 찔렀다. 로마 기병대는 이미 격파되었고 카이사르도 한번에 여러 조치를 취해야 했지만 로마군은 카이사르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빠르게 전투를 시작했다. 로마군의 제9군단과 제10군단은 좌익에 포진해 있다가 아트레바테스족을 쳐부수었고 제11군단과 제8군단은 우익에서 비로만두이족을 격파했지만 로마군 중앙의 제12군단과 제7군단은 좌우익이 빠져나가 노출된 곳에서 보두오그나투스가 이끄는 네르비족의 공격을 받았다. 카이사르는 중앙의 병사들 간의 대열이 좁아 전투에 방해가 됨을 알아차리고 대열을 넓힐 것을 명령했다. 방진을 짤것을 지시했고 로마군은 측면과 배후에서 공격해오는 적을 막아낼 수 있었다. 라비에누스가 제10군단을 보내 이들을 지원하러 오자 네르비족은 열세에 빠지기 시작했다. 결국 로마군의 승리로 끝난 이 전투로 네르비족의 전투력은 궤멸되었고 카이사르는 이들에게 볼모제공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어 아투아투키족의 수도인 아투아투카를 공격했고 로마군의 공성기에 놀란 아투아투키족은 항복했다. 카이사르는 그들에게 무기를 버릴 것을 요구했고 아투아투카의 전체 무기 중 삼분의 일 가량만 버려졌다. 아투아투키족은 남은 무기를 들고 로마군을 기습했으나 40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하였다. 카이사르는 5만명이나 되는 아투아투카 주민들을 모두 노예로 팔아넘겼다. 카이사르의 공적에 로마 원로원은 지금까지 유례가 없던 15일 감사제를 올렸다. 그러는 사이 크라수스의 아들 푸블리우스가 지휘하는 1개 군단이 아르모리카 반도(Armorica)의 부족들을 정복하는 작전을 개시하였다. 기원전 56년 봄에 삼두 정치 인사들은 갈리아 키살피나의 루카에서 회합을 열어 만났다. 로마는 혼란에 빠져 있었으며, 클로디우스의 민중 선동으로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의 사이가 나빠진 상황이었다. 회의에서 삼두 정치를 갱신하고, 카이사르의 전임 집정관(총독) 임기를 5년 더 늘렸다.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다시 집정관에 오르기로 하고 이후에는 카이사르처럼 장기 전임 집정관직을 맡기로 하여, 임기를 5년으로 크라수스는 시리아를,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 속주를 맡는 것으로 정하였다. 아르모리카 정복은 카이사르의 부하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베네티족을 해전에서 무찔르면서 완수하였으며, 젊은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갈리아 남서부의 아퀴타니족을 정복하였다. 기원전 56년에 군사 작전을 종결하면서, 해안 저지의 모리니족(Morini)과 메나피이족(Menapii)만 저항하였다. 기원전 55년 카이사르는 게르마니아의 최강의 부족 수에비족에게 밀려 갈리아를 침략한 게르마니아의 우시페테스족(Usipetes)과 텡크테리족(Tencteri) 문제를 교섭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카이사르는 이들에게 우비족(카이사르와 동맹을 맺은 게르만 부족)의 영토를 제공할 것이니 갈리아를 떠나라고 요구했다. 두 게르만 부족은 그 제안을 고려할 것이니 사흘간의 여유를 줄것을 간청했고, 카이사르는 이것이 게르만인의 기병대가 아직 갈리아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려는 수작이라고 생각했다. 카이사르는 물을 보급해야 한다면서 군대를 조금만 전진시키겠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대로 카이사르는 로마군 기병대를 전진시켜 그들에게 게르만인들의 정확한 의도를 알아오게 했다. 게르만 기병의 급습을 받아 기병을 74기나 잃었다. 게다가 이 희생자 중에 피소라는 이름의 카이사르의 갈리아인 친구가 있었다. 교섭이 깨졌다고 판단한 카이사르는 게르만인들을 공격했고, 병력이 43만명이나 되는 두 부족은 전의를 잃고 대부분이 죽거나 일부가 게르마니아로 달아났다. 카이사르는 이들을 추격하여 라인강에 가교를 건설하고, 게르마니아 영토에 진입하여 무력 시위를 하였으며 돌아올 때 다리를 해체하였다. 이 전투가 로마에 전해지자 카토는 카이사르가 강화교섭이 진행되는 상태에서 게르만인을 기습한 것은 부당한 처사이고 따라서 카이사르를 게르만족에게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해 늦여름에 모리니족과 메나피이족을 정복하면서 브리타니아 섬(오늘날의 브리튼)에 건너가서 기원전 57년에 벨로바키의 반로마파가 브리타니아에 달아났으며 지난 해에 브리타니아 사람들이 베네티족을 도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섬에 대해 잘 몰랐으며, 켄트에 상륙 거점을 얻어 어렵게 브리타니아인을 격파하였으나 기병대가 도착하지 못하여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지 못했다. 또한 배가 파손되어 이를 복구해야 했기 때문에 더 나아갈 수 없어서 겨울에 갈리아로 돌아갔다. 다만 브리타니아인들을 다시 격파하고 강화를 맺은 다음, 인질을 요구하여 이들을 갈리아로 보내겠다고 하여 브리타니아를 떠나는 명분을 명확히 했다. 이듬해 그는 더욱 준비하고 더 많은 군대를 이끌고 브리타니아에 돌아왔으며 더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내륙으로 진격하였으며, 트리노반테스족(Trinovantes)의 만두브라키우스 왕과 동맹을 맺고, 그의 적이자 브리타니아 연합군 총사령관인 카시벨라우누스와 전투를 벌였다. 카시벨라우누스는 부족간의 전투에서 명성을 얻은 자로 카이사르의 로마군이 생각보다 강한 것을 알자 게릴라전을 벌였다. 카이사르는 통상적인 것과 다르게 기병을 먼저 보내지 않고 보병과 같이 진격시키게 하여 브리타니아인의 기습공격을 막아내고 곧 반격해 그들을 격파했다. 카이사르가 카시벨라우누스의 본거지를 공격하자 카시벨라우누스는 게릴라전을 벌였으나 로마군을 격퇴하지 못했다. 결국 브리타니아인들은 본거지에서 로마군에게 패하였고 카시벨라우누스는 카이사르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갈리아에서 에부로네스족(Eburones)의 암비오릭스가 이끄는 반란이 퍼져 작황이 나빠지자 카이사르는 겨울 동안 군사 작전에 나서야 했으며, 전쟁은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당시 로마군의 군량이 부족해져 카이사르는 군대를 분할하여 갈리아의 여러 지방으로 분산시켰다. 그 중 군단장 사비누스와 코타가 이끄는 9천명의 로마군은 에부로네스족의 땅에 배치되었다. 에부로네스족장 암비오릭스는 로마군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사비누스와 코타에게 로마군을 공격한 것은 본의가 아니었고 지금 갈리아 각지에서 크게 반란이 일어났으며 자신들이 로마군을 호위할테니 진영지를 떠나고 카이사르와 합류할 것을 제안했다. 그전까지 로마에 우호적이던 암비오릭스의 속임수에 두 군단장은 속고 말았다. 사비누스는 진영지를 떠날 것을 주장했고 코타는 진영지를 지키며 버티는 것이 낫다고 했으나, 결국 사비누스의 뜻대로 진영지를 떠나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진영으로 향했다. 행군 도중에 그들은 기습을 받아 전멸하고 극소수만이 살아남아 라비에누스의 진영지에 도착했다. 암비오릭스의 선동으로 네르비족과 아투아투카족은 퀸투스 키케로의 진영을 공격했고 그 수가 6만면에 달했다. 당시 병이 든 키케로는 적의 십분의 일 밖에 미치지 못하는 병력으로 분전했고 키케로의 구원요청을 받은 카이사르는 7천명의 군대를 급조하여 키케로의 진영지에 도착한 뒤, 적군을 유인하여 격파했다. 많은 수의 갈리아인이 죽었으나 로마군의 손실은 없었다. 카이사르가 키케로의 병사들 중에 다치지 않은 자가 전체의 10분의 1 정도였다. 한편 라비에누스는 트레베리족의 인두티오마루스를 격파하고 죽이는데 성공했다. 카이사르는 게르마니아로 다시 진격하고 암비오릭스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암비오릭스를 무찌르면서 카이사르는 이제 갈리아를 평정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반란음모를 꾸민 카르누테스(Carnutes) 족장 아코를 사형시켰다.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에 있을 때,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딸 율리아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카이사르는 조카의 딸인 옥타비아를 남편 가이우스 마르켈루스와 이혼시키고 폼페이우스와 결혼시켜 그의 지지를 확보하려 하였으나, 폼페이우스는 거절하였다. 기원전 53년 크라수스는 파르티아를 침공하다 카라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로마는 폭력 사태로 치닫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비상 수단으로 1인 집정관에 임명되었으며, 카이사르의 정적인 퀸투스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하고, 장인 메텔루스 스키피오를 동료 집정관으로 삼아 일단 질서를 회복하였다. 이로써 삼두 정치는 결렬되었다. 기원전 52년, 족장을 잃은 카르누테스족은 본거지인 케나붐에서 로마 민간인을 학살했는데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갈리아 중부 아르베르니족(Arverni)의 베르킨게토릭스가 일으킨 반란이 또 한번 크게 번졌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 부족들을 통합하고자 하였으며, 초토화 작전으로 로마군을 무너뜨리려 하였다. 북이탈리아의 카이사르가 중부 갈리아에 있는 그의 군단과 합류하였고, 비투리게스족의 수도인 아바리쿰이 카이사르에게 점령되었지만 반로마군의 총사령관 베르킨게토릭스의 입지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아르베르니족의 수도인 게르고비아로 향했고 이즈음에 로마의 동맹부족이었던 하이두이족이 베르킨게토릭스에게 돌아섰다. 카이사르는 아르베르니족의 근거지인 게르고비아를 공격했으나 별 소득이 없었고 게르고비아를 한 차례 습격하고 철수하려 했다. 그러나 습격한 뒤 퇴각하는 과정에서 선발대에게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베르킨게토릭스는 이들을 공격하여 700명을 전사시켰다. 그중 로마군 백인대장은 46명이나 죽었다. 게르고비아 공략이 실패하자 카이사르는 퇴각했고 베르킨게토릭스는 추격하여 한 차례 회전이 벌어졌다. 갈리아 기병이 세 갈래로 나뉘어 공격했으나 카이사르는 방진을 이루어 이들을 모조리 격파했다. 전투에서 패한 베르킨게토릭스는 만두비족의 도시 알레시아로 들어갔다. 카이사르는 이를 알고 즉시 알레시아를 포위하였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 전역에 지원군을 요구하였고 이에 26만에 달하는 대군이 편성되었다. 이들은 알레시아를 포위한 카이사르의 군대를 다시 포위하였다. 알레시아의 농성군은 7만명으로, 갈리아전력은 총 33만이었다. 반면 카이사르의 로마군은 12개 군단 5만명이었다.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이중포위전 알레시아 전투가 기원전 52년 9월 20일에 시작되었다. 카이사르가 공들여 준비한 공성 작전으로 양쪽의 갈리아군은 완전히 차단되어 농성하는 갈리아인들은 지원군이 도착한 줄도 몰랐다. 전투는 기병전으로 시작되었고, 카이사르의 게르만 기병의 활약에 갈리아 기병은 퇴각했다. 기병전에서 패한 후, 갈리아인들은 공성기를 이용하여 로마군 진지를 공격했으나 재빠르고 유연하게 대처한 로마군에게 패배하였다. 베르킨게토릭스의 사촌 베르카시벨라우누스가 이끄는 6만명의 갈리아 정예병이 다 완성되지 않은 로마군의 북쪽 포위망을 공격해왔지만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를 보내 이들을 막게하면서 포위망 여기저기에 지원군을 보냈다. 북부에서 적이 강하게 공격해오자 카이사르는 신속하게 북부 전선에 도착했다. 카이사르와 베르카시벨라우누스는 치열하게 싸웠고 카이사르는 기병대를 갈리아군 배후로 보내 그들을 격파하였다. 베르카시벨라우누스는 생포되었고 부관은 전사하였다. 6만명의 정예병은 궤멸되었고 나머지 갈리아인들도 각자의 부족으로 패주하였다. 이를 안 베르킨게토릭스는 마침내 로마에 항복하였다. 이듬해에 산발적인 교전이 일어났으나, 이로써 갈리아는 사실상 정복되었다. 전임 법무관 지위의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 전쟁 동안 가장 고참인 군단장이었다. 그 밖에 두각을 드러낸 카이사르의 다른 부관으로는 친척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크라수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형제인 마르쿠스, 키케로의 동생인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 데키무스 브루투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가 있었다. 플루타르코스는 갈리아 전쟁 기간 동안 로마군이 3백만 명의 적과 싸웠으며, 그 가운데 1백만은 죽고, 나머지는 노예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300개 부족이 복속되었으며, 800개 도시가 파괴되었다. 아바리쿰(부르주) 시의 전체 주민 총 40,000명이 살육당하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헬베티인 368,000명이 고향을 떠났으며, 이 가운데 92,000명이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는데, 군 작전 이후 총 110,000명만이 돌아왔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일단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카이사르의 보고는 선전의 목적을 띄고 있었으며, 고대 문헌에서는 보통 숫자를 과장해서 쓰기 때문에 적 전투원의 총 수효는 특히 너무 많은 것으로 보인다. 푸르거-군티(Furger-Gunti)는 헬베티 군대의 병사 수가 60,000명이 넘는 것은 기록된 전술을 고려했을 때 전혀 있을 법하지 않다고 보았으며, 실제 수효는 총 이주민 수가 160,000명에 전투원 수는 40,000명 정도로 추산하였다. 델브뤽(Delbrück)은 전체 주민 수가 100,000 이하일 것이며, 그 가운데 전투원은 16,000명에 불과할 것으로 보았는데, 이렇게 보면 켈트인 군대의 병력은 당시 30,000명 정도였던 로마군의 절반 수준이 된다. 갈리아 전쟁은 서유럽에 로마문화를 전파하는데 막강한 영향을 주었다. 갈리아 전쟁 이후, 갈리아는 빠르게 속주화되었고 로마의 문명을 받아들였다. 전쟁이 끝나고 카이사르는 정복한 전 지역을 "갈리아 코마타(Gallia comata)"라는 하나의 속주로 두었다. 결국 갈리아 일대는 카이사르의 세력기반이 되어 그가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게 일조했다. 내전. 기원전 50년, 폼페이우스가 주도하는 원로원에서는 카이사르에게 전임 집정관 임기가 만료되었으므로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귀환하도록 명령하였다. 또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두 번째로 출마하려는 집정관 선거에 부재중 입후보를 금지하였다. 카이사르는 집정관의 면책권이 없거나 군사력이 없는 상태로 로마에 들어간다면 기소되고 정계에서 밀려나리라고 생각하였다. 기원전 49년 1월 7일, 집정관 가이우스 마르켈루스는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시켰고, 그 전권을 위임받은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불복종과 대역죄 혐의로 고발하였다. 기원전 49년 1월 12일, 카이사르는 단 1개 군단만 이끌고 루비콘 강(이탈리아의 북방 경계선)을 넘어 내전의 도화선에 불을 당겼다. 카이사르가 직접 저술한 「내전기」에서는 루비콘 도하가 단순히 '아리미눔 도착'으로만 적혀있으며, 이때 카이사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적혀있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아테나이의 극작가 메난드로스의 작품에 나오는 구절인 "주사위를 던져라!(ἀνερρίφθω κύβος)"를 그리스어로 인용하였다고 썼다. 수에토니우스는 이 문장을 라틴어로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라고 썼다. 기원전 49년 1월 12일 카이사르는 휘하의 10개 대대 45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루비콘 강을 건넌 후, 제일 먼저 아리미눔에 입성하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는 5개 대대를 떼어줘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아레티움을 공격하고 쿠리오에게는 3개 대대를 주어 아드리아 해를 따라 피사우룸, 파눔, 안코나를 공격하게 했다. 1월 12일 쿠리오는 피사우룸, 1월 13일 파눔, 1월 14일에는 안코나까지 함락시키고 1월 15일 안토니우스도 아레티움에 입성했다. 이에 원로원에서는 현직 법무관 로시우스와 카이사르의 친척 동생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원로원 최종 권고를 전했고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후임자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임명해 2개 군단이 주둔한 카푸아로 떠났다. 카이사르는 로시우스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통해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양자 회담을 벌이고 동시에 군단 해산을 제안하는 내용의 서한을 폼페이우스에게 보냈다. 그리고 1월 17일 폼페이우스는 수도 로마를 버린 채 200명에 달하는 상당 수의 원로원 의원들과 각종 개인 재산과 장인 메텔루스 스키피오, 카토 등과 함께 노예, 하인들을 데리고 남하했으나 국고에 들어 있는 재산은 채 옮기지 못하고 도주했다. 이 때문에 국고 재산은 고스란히 남았고 1월 20일 쿠리오는 아구비움에 입성해 플라마니아 가도의 요충지를 얻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이때 폼페이우스의 답장을 받았으나 그가 제안한 양자 회담을 묵살시키고 자신에게만 군단해산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폼페이우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게다가 그는 폼페이우스가 히스파니아로 떠나는 시기를 밝히지 않는 것은 그가 계속 본국에 군사력을 가지고 머무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한편 폼페이우스 진영에서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지낸 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와 폼페이우스 휘하에서 백인대장을 지내고 오리엔트 원정에도 참전한 루키우스 푸피우스가 아욱시뭄에서 군사를 이끌었으나 주민들의 호응에 실패하고 카이사르는 아욱시뭄 근처 킹쿨룸에서 보급을 해 2월 3일 아욱시뭄에 입성했다. 2월 5일 카이사르는 피르뭄에 입성하고 제12군단도 참여했으며 아스쿨라네움으로 행군했다. 이에 기원전 57년의 집정관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가 10개 대대를 이끌고 지키고 있었으나 카이사르가 오자 도망쳐버려 2월 15일 아스쿨라네움도 쉽게 함락되었다. 그러자 폼페이우스가 급파한 비불리우스 루푸스가 13개 대대가 되는 병력을 모아 코르피니움에 주둔했고 곧이어 아헤노바르부스가 20개 대대를 이끌고 행군해 3.3개 군단에 달하는 33개 대대가 모일 예정이었다. 이에 루푸스는 폼페이우스가 있는 루케리아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폼페이우스는 오히려 더 남쪽인 카노사로 남하하는 문제를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카이사르는 코르피니움 근처의 술모나 주민들의 호응도 얻고 남프랑스 속주에서 갈리아인으로 구성된 22개 대대도 합류해 결국 병사들을 버리고 도망치려던 아헤노바르부스는 붙잡혔다가 카이사르의 배려로 석방되고 2월 21일 카이사르는 코르피니움에도 입성했다. 카이사르의 행동에 대해 키케로는 "아군을 버리는 폼페이우스와 적을 용서하는 카이사르는 얼마나 다른가" 라며 카이사르에게도 편지를 보내 카이사르의 관용을 칭찬했다. 카이사르는 답변했다. “나를 잘 이해해주는 당신이 하는 말이니까, 내 행동에선 어떤 의미의 잔인성도 찾아볼 수 없다는 당신의 말은 믿어야 할거요. 그렇게 행동한것 자체로 나는 이미 만족하고 있지만 당신까지 그리 찬성해주니 만족을 넘어 기쁘기 한량없소.내가 석방한 사람들이 다시 나한테 칼을 들이댄다해도, 나는 그런 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는 않소. 내가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내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거요. 따라서 남들도 자기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오.” 그리고 브룬디시움으로 도망치는 폼페이우스를 추격했다. 결국 폼페이우스는 일행을 이끌고 2월 25일 항구 도시인 브린디시움에 도착했다. 카이사르가 브룬디시움에 도착했을 때, 폼페이우스에게 양자 회담을 통한 강화를 제안했지만 폼페이우스는 지금까지 자신을 따라온 이들을 배신하는 짓을 벌일 수 없다며 강화를 거부했다. 6개 군단 60개 대대로 불어난 카이사르 군단이 오는 가운데 잦은 탈영으로 50개 대대로 줄어든 폼페이우스는 3월 17일 카이사르의 저지선을 뚫고 그리스로 본국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이로써 카이사르는 이탈리아를 무혈제패했지만 폼페이우스를 놓쳐 내전은 장기화되었다. 폼페이우스가 군대를 철수시키려고 해안의 모든 배를 이미 쓸어가버린 터라 카이사르는 해군력이 없었고, 폼페이우스의 7개 군단이 주둔한 이베리아 반도는 평정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히스파니아로 진로를 돌리기로 하였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를 로마의 장관으로 남겨놓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호민관으로 이탈리아 나머지 지역을 맡겨놓고, 카이사르는 파비우스의 3개 군단과 합류하여 히스피니아로 진격했다. 카이사르군은 적의 진채를 공격하였다. 카이사르군은 적의 유인책에 빠져 위기에 빠졌으나 특유의 용맹을 발휘하여 위급에서 벗어났다. 카이사르군은 200명 가량의 적을 전사시켰으나 진채를 빼앗지 못하고 그들도 80명의 카이사르군을 전사시켰다. 갑자기 카이사르의 6개 군단은 세그레 강의 홍수로 고립되었고 군량보급도 차단되었다. 이런 상태로 한달을 버틴 카이사르는 운하를 파서 물길을 바꾸어 고립에서 벗어났고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가 이끄는 9만명의 폼페이우스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식량부족에 빠트리게 했다. 폼페이우스군의 군량이 부족해지자 현지병력의 탈영이 심해졌고 아프라니우스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남쪽으로 도망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폼페이우스군의 도주는 카이사르에게 계속 저지되었으며 그들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폼페이우스군의 일개병사들은 카이사르에게 항복을 바랬고 아프라니우스의 아들마저 카이사르군과의 화해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자 페트레이우스는 화해를 거부하며 병사들의 전의를 다시 일깨웠고, 폼페이우스군 진영에 들어온 카이사르의 병사들을 죽이라고 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식량부족으로 카이사르에게 항복하였다. 카이사르는 아프라니우스 휘하 병사들의 군대해산을 명하고 모두 석방시켰다. 또 다른 히스파니아의 사령관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싸워보지도 않고 카이사르에게 항복했다. 히스파니아 전쟁이 끝나고 카이사르는 법무관 레피두스를 시켜 독재관에 취임했다. 독재관에 취임한 그는 술라가 반역자로 규정하여 살생부에 올라 망명생활을 하는 자들에 대한 추방형을 폐지했다. 카이사르가 히스파니아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카이사르 함대가 아헤노바르부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 - 마실리아 연합함대를 격파하였고 폼페이우스의 편을 든 마실리아는 결국 카이사르군에 항복하였다. 한편, 아티우스 바루스는 아욱시뭄에서 아프리카로 도망쳐 스스로 총독을 자칭한 다음, 정식 총독으로 임명된 퀸투스 아일리우스 투베로가 아프리카에 상륙하지 못하게 막았다. 심지어 투베로의 병든 아들도 아프리카 땅에 상륙하지 못하게 했다. 카이사르의 부장 쿠리오가 이끄는 4개 군단은 시칠리아 점령을 완수한 뒤 아프리카에서 아티우스 바루스가 지휘하는 군대를 공격했다. 바루스군은 패했고 쿠리오는 카이사르군의 병사들로부터 '임페라토르'라고 불리었다. 쿠리오의 군대에 아프리카인들이 퍼트린 역병이 퍼지고 탈영병도 몇 있었지만 쿠리오는 연설로 병사들을 단결시키고 코르넬리우스 진지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누미디아왕 유바를 우습게 본 쿠리오는 유바가 렙티스 사람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회군하였고, 유바왕의 부하 사부라가 소수의 군대를 지휘한다는 거짓 정보에 속아 바그라다스 강 전투에서 4개 군단과 함께 포위당하고 말았다. 쿠리오는 도주를 권하는 장교의 제안을 거부하고 이렇게 외쳤다. "카이사르의 군대를 잃고 카이사르에게 돌아갈 수 없소" 이 말을 외치고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했다. 보병들도 모조리 몰살당했다. 바루스는 유바에게 포로로 잡힌 병사들을 살려주기를 요구했으나 유바는 몇명을 제외하고 이들을 모조리 죽였다.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와 돌라벨라는 카이사르의 명령으로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려 갈리아 군단을 이끌고 폼페이우스군과 맞섰으나 노련한 폼페이우스의 해군장수 리보에게 패하고 이탈리아로 도망쳤다. 이후 카이사르는 스스로 집정관 선거를 열어 두 번째로 집정관에 올랐으며(동료 집정관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였다), 그런 다음 11일 뒤 독재관직에서 사임하였다. 기원전 48년 1월 4일에 그리스에 있는 폼페이우스를 상대하고자 동방으로 향했는데, 배가 부족했기 때문에 카이사르가 직접 이끄는 제1진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제2진으로 나누어 아드리아 해를 건너기로 했다. 제1진은 먼저 출발하여 폼페이우스 해군의 방해를 피하고 대부분의 병력이 그리스에 상륙했다. 그리고 그들은 1월 5일에 오리쿰을, 1월 7일에 아폴로니아를 점령했다. 폼페이우스 해군 총사령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는 카이사르군 제1진의 무사통과에 격분하여 해안경비체제를 강화했다. 심지어 총사령관인 비불루스가 배 위에서 자는 등 임전태세를 편 까닭에 카이사르군 제2진은 출항도 하지 못했다. 이때 카이사르는 압수스 강에서 폼페이우스의 지상군과 대치했으나 수적으로 매우 불리했기 때문에 전투를 치르지 않았다. 동시에 자신의 진영에 머무르던 비불리우스 루푸스를 폼페이우스에게 보내 강화를 제안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수뇌진과의 타협이 실패하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병사들과 타협해 볼 생각으로 휘하 장수인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를 보냈다. 바티니우스의 제안에 폼페이우스군 병사들은 이에 반응하였으나 곧이어 폼페이우스 진영에서 나온 티투스 라비에누스가 바티니우스를 비난하자 병사들은 화가 나 창을 회담장에 던졌다. 이에 몇명의 카이사르의 장수들이 부상을 입었다. 라비에누스는 선언했다. "카이사르의 목을 가져오기 전에는 강화란 없다." 카이사르는 비불루스와 만나 회담을 벌이려 했으나 카이사르를 매우 싫어하는 비불루스는 카이사르를 만나기를 거절하고 리보가 카이사르와 회담을 벌였다. 카이사르는 리보와의 회담으로 강화성사에 기대를 걸었으나 이것도 실패했다. 비불루스는 무리하게 해상에서 생활하다 건강이 나빠져 병사했다. 그가 병사한 후로는 폼페이우스 해군의 감시도 느슨해져서 안토니우스의 제2진도 브룬디시움을 습격한 리보의 군대를 격파하고 이탈리아를 떠나 3월 26일에 에피루스 북부의 항구 닌페움에 상륙하여 리수스를 점령한 뒤 4월 3일에 제1진과 합류했다. 카이사르는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에게 2개 군단과 500기를 주고 마케도니아로 보냈고, 카시우스 롱기누스에게 1개 군단과 200기를 주어 테살리아로, 사비누스에게도 5개 대대와 약간의 기병을 주어 아이톨리아로 보냈다. 그런다음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본진인 디라키움과 페트라를 포위했다. 군사의 수가 적음에도 폼페이우스의 진영보다 보루의 수가 많고 더 긴 포위망을 구축했다. 이렇게 몇 달간 대치한 뒤에 폼페이우스군은 말먹이가 부족해지자 카이사르의 포위망을 공격하였다. 당시 카이사르는 디라키움으로 떠나 카이사르의 진영에는 총사령관이 없는 상태였다. 원래 카이사르가 직접 포위망 북부를, 안토니우스가 남쪽 포위망을 맡았는데 사령관이 없는 북부전선을 루키우스 술라의 조카이지만 카이사르파인 푸블리우스 술라가 지휘했다. 총 여섯군데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폼페이우스군은 카이사르군의 뛰어난 분전으로 단 하나의 포위망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특히 카이사르의 백인대장 스카이바는 200명으로 폼페이우스군 25000명의 공격을 4시간이나 버텨냈으며 스카이바 자신의 방패에는 화살구멍이 120개나 뚫려있었다. 결국 푸블리우스 술라의 구원을 받아 폼페이우스군을 격퇴했으나 술라는 그들을 추격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술라가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비난했으나 술라는 총사령관이 없는 이상 그가 지시하지 않은 것을 행할 수 없다고 말했다. 카이사르 진영에 로우킬루스와 에구스라는 갈리아 트란살피나의 알로브로게스족 귀족 출신 기병 장교가 있었는데, 그들은 휘하 기병들의 급료와 전리품을 강탈하여 부하들의 원망을 샀다. 결국 기병들이 카이사르에게 이들의 부정을 고발하자 카이사르는 형제를 불러 그들을 나무랐다. 전투가 끝나고 벌을 받을 것 같자 이 형제는 폼페이우스에게로 달아났다. 카이사르군의 첫 탈영병이었다. 기원전 48년 7월 10일 폼페이우스는 이들로부터 카이사르군의 정보를 듣고 방어설비가 약한 카이사르의 포위망 남쪽을 공격했다. 폼페이우스는 이곳에서 포위망을 함락시키며 카이사르군 장교인 마르켈리누스가 이끄는 제9군단을 격파하였다. 제9군단의 제1대대에서는 백인대장 6명 중 5명이 죽을 정도로 위기에 빠졌고,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12개 대대의 구원을 받아 간신히 궤멸을 면했다. 이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진영을 공격함으로써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카이사르군이 폼페이우스군이 만든 측벽을 방벽으로 착각하여 그것을 공격하였고 이로 인해 폼페이우스가 구원병력을 데려올 수 있게 시간을 제공하게 되었다. 결국 폼페이우스의 증강된 병력에 두려움과 공황상태에 빠진 카이사르군은 1천명의 사상자를 내며 달아났다. 전투 후,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군 포로를 조롱하고 모조리 죽였다.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폼페이우스가 승리하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본거지인 디라키움 일대에서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그리스 동부에 위치한 테살리아로 유인하면서 7월 24일 도미티우스와 합류했다. 그리고 테살리아의 도시인 곤피스와 메트로폴리스를 점령하자 라리사를 제외한 모든 도시가 카이사르를 지지하였다. 카이사르는 메텔루스 스키피오에게 다시 강화를 제안했지만, 스키피오는 망설이다가 파보니우스의 혹독한 비난을 받고 제안을 거절했다. 폼페이우스는 테살리아에서 스키피오와 합류했다. 폼페이우스의 진영은 승리에 도취되어 전투에 관한 논의보다는 승리 후에 얻을 보상이나 직위, 카이사르파에 대한 처벌 등에 대하여 논쟁을 벌였다. 아헤노바르부스와 렌툴루스 스핀테르와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카이사르가 취임하고 있던 최고 제사장에 자신이 더 적임자라고 논쟁을 벌였다. 렌툴루스는 자신이 가장 고령임을, 스키피오는 자신이 폼페이우스의 장인임을, 아헤노바르부스는 수도에서의 명망을 들며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했다. 아티우스 루푸스는 아프라니우스가 히스파니아에서 카이사르와 싸울때 휘하 병사들을 배신했다고 주장했다. 라비에누스는 결전을 망설이는 폼페이우스에게 결전을 치를 것을 주장했다. "저들이 갈리아와 게르마니아를 정복했던 군대였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때 살아남은 자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정예병사가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또한 이탈리아에서 가을을 보내는 동안 많은 자들이 건강을 잃어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본토에 남겨졌습니다. 게다가 적군이 보유한 최고의 병사들은 디라키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모두 전사했습니다." 양군은 파르살루스 평원에서 만났고 이때 카이사르군은 군단병이 22000명, 기병이 1000기였던 반면에 폼페이우스군은 군단병이 47000명, 기병이 7000기였다. 카이사르는 고지대에 있던 폼페이우스를 평원으로 이끌고 결전 준비를 했다. 이때 카이사르는 병사들에게 연설했다. “잠시 행군을 멈추어라. 그리고 그대들이 매일같이 바라던 적과의 전투를 생각하라! 우리 모두가 오랫동안 기다려 온 때가 찾아왔다. 그대들의 마음은 이미 전장에 있지 않은가?” 폼페이우스는 압도적인 기병력으로 카이사르군을 포위섬멸하는 작전을 구상했다. "나의 작전에 귀를 기울이면 더욱 확고한 신념을 품고 전투에 임하게 될 것이오. 본인은 아군기병에게 양쪽 군대의 간격이 좁아지면 카이사르군의 우익으로 돌아 노출된 측면을 공격하고 후방의 제 3열을 포위하여 카이사르 군대를 혼란에 빠뜨리라고 명령하였소. 그렇게 되면 적은 우리군이 무기를 투척하기도 전에 패주하고 말것이오. 이 작전이 맞아 떨어진다면 우리 군은 군단의 피해도 없고 사상자도 거의 없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소. 우리의 기병이 우세하므로 어렵지 않게 승리할 것이오." 라비에누스는 폼페이우스의 전술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뒤, 전투에서 진다면 진영지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다른 장수들에게도 이 약속을 할 것을 요구했다.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장수들은 이에 따랐다. 폼페이우스의 속셈을 간파한 카이사르는 고참 군단병 2000명으로 제4열 별동대를 편성하여 카이사르군 우익 뒷편에 포진시켰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직 그대들에게 전투의 승패가 달려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카이사르의 제10군단 수석 백인대장 크라스티누스는 비장한 연설을 하였다. "나의 부대에 있던 병사들이여, 나를 따르라. 그대들이 총사령관 앞에서 약속한 성실함과 용맹함을 보여라.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전투가 될것이다. 이 전투가 끝나면 우리들의 총사령관은 지위를 되찾을 것이고, 우리는 자유를 되찾아 고향으로 돌아갈수 있을것이다." 그런 다음 카이사르를 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장군이시여, 나는 오늘 전장에서 쓰러지든 살아남든 장군의 치하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크라스티누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기원전 48년 8월 9일 파르살루스 전투는 카이사르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군단병을 전진시키지 않음으로써 카이사르군이 두배의 거리를 달려오게 하여 그들의 체력을 떨어트리고 전열을 흩어놓으려 하였다. 폼페이우스의 부장 트라아리우스가 제안한 작전이었다. 이는 폼페이우스군이 움직이지 않으면 카이사르군은 무기를 들고 갑절의 거리를 달려가야하고, 따라서 폼페이우스군 앞에 도달하였을 때 지쳐서 대열이 흩뜨려질테니깐 그때 맞아 싸우는 편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이사르군의 갈리아 전쟁 7년의 오랜 전투 경험이 그들이 폼페이우스의 작전에 넘어가지 않게 해주었다. 그들은 중간지점에서 잠시 진격을 멈춰 호흡과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돌격하였다. 그러나 수적으로 우세한 폼페이우스 군단병은 이 돌격을 그럭저럭 버텨냈다. 곧 폼페이우스는 기병에게 출동명령을 내렸고 수적에서 열세인 카이사르 기병은 못 당해내는 것처럼 후퇴했다. 폼페이우스 기병이 카이사르군 배후로 돌아가는 순간 카이사르는 제4열 창병 부대를 출격시켰다. 카이사르의 창병 부대는 정면에서 폼페이우스 기병대를 막아섰고 후퇴했던 카이사르 기병도 적군 기병의 배후를 포위했다. 폼페이우스 기병은 곧 격파되었고 이것을 안 폼페이우스는 전투를 단념하고 전장을 떠났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군단병은 이때까지 카이사르군의 공격을 버티고 있었으나 새 병력을 교체 투입하는 카이사르의 전술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달아났다. 패잔병들은 진영이 있는 언덕으로 달아났으나 카이사르는 즉시 이 언덕을 포위하였다. 폼페이우스 패잔병들은 곧 항복했으며 카이사르는 관용을 베풀어 이들의 귀가를 선선하게 허락했다. 폼페이우스군의 전사자는 6000명에서 15000명, 포로는 총 24000명에 달했으나 카이사르군의 손실은 고작 200명에 불과했다. 다만 카이사르군 백인대장은 30명이나 전사하였다. 이것으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최종 결전, 파르살루스 전투는 카이사르의 압승으로 끝났다. 파르살루스 전투가 끝나고 카이사르는 적군 사령부에 도달했다. 카이사르는 루키우스 렌툴루스를 비롯한 정적들의 탐욕과 사치에 경악하여 이렇게 외쳤다. "모두 그들이 자초한 일이다." 그런 다음 바로 폼페이우스를 추격했다. 한편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뗏목에 불을 붙인 역청과 황을 실어 여러차례 카이사르군에게 보내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파르살루스 전투 소식에 크게 사기가 올라간 카이사르군을 공격하자 이에 격분한 카이사르 고참병은 카시우스의 배를 나포하고 그들을 내쫓았다. 카시우스 휘하 폼페이우스군은 그때까지 파르살루스 전투 결과가 카이사르군이 퍼트린 거짓소식인줄 알았다고 한다. 로마에서 카이사르는 독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부사령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기병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로 도주한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였으며, 이곳에서 폼페이우스는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임금을 조종하는 궁중관료들의 명령을 받은 전직 로마군 장교에게 살해당하였다. 이때 카이사르는 당시 알렉산드레이아에서 프톨레마이오스와 그의 누이이자 부인이며 공동 국왕인 클레오파트라 7세 사이의 권력 투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아마 프톨레마이오스가 폼페이우스를 죽이는 데 관여한 탓에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편에 선 것 같은데, 프톨레마이오스의 내시 포티누스가 선물로 카이사르에게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바치자 카이사르는 이를 보고 울었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군과 전투를 벌였고 그때 그는 그의 배에 불을 붙였는데 그 불이 번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불타버렸다. 그 와중에 폼페이우스 암살 주모자이자 이집트의 실권자인 포티누스는 카이사르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그의 부하이자 군권을 장악한 아킬라스도 공주 아르시노에에게 지휘권을 빼앗기고 처형되었다. 알렉산드리아 시내에서 카이사르와 아르시노에의 부하 가니메데스는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고 그때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아르시노에군과 합류하였다. 전장은 시내를 벗어나 나일 강의 삼각주(델타)로 옮겨졌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에 나일 강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군대를 무찌르고,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지배자로 삼았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는 그 해 봄에 나일 강에서 개선 행진을 열어 알렉산드레이아의 내전에서 승리한 데 축하하였다. 파라오의 배는 400척의 다른 배를 대동하였으며, 카이사르에게 이집트 파라오의 화려한 생활을 보여주었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는 결혼하지 않았는데, 로마법에서는 오로지 로마 시민 사이의 결혼만 인정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마지막으로 결혼할 때까지 무려 14년동안 클레오파트라와 관계를 이어나갔으며(로마인의 시각에서 이는 간통이 아니었다) 카이사리온의 아버지도 카이사르였던 것 같다. 클레오파트라는 한 차례 이상 로마를 방문하였는데, 로마 바깥의 테베레 강을 건너면 있는 카이사르의 별장에서 지냈다. 기원전 48년 말, 카이사르는 독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임기는 1년이었다. 기원전 47년 초 몇 달간 이집트에서 지낸 카이사르는 중동 지역으로 가서 젤라 전투에서 폰토스 왕 파르나케스 2세를 절멸시켰는데, 너무나 빨리 승리를 거두어 그는 과거 폼페이우스가 이런 형편없는 적들과 오랫동안 싸워 거둔 승리를 조롱하였다. 이 승리를 기념하여 그는 원로원에 보낸 서한에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라고 적었다. 그 다음으로 카이사르는 아프리카에 남아있는 폼페이우스의 원로원파 잔당을 처리하고자 떠났다. 당시 아프리카에는 폼페이우스의 장인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카이사르의 숙적 소 카토, 아프라니우스, 라비에누스 등의 폼페이우스 잔당이 쿠리오를 격파한 누미디아왕 유바와 연합하여 카이사르와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아프리카 북동부에 상륙하여 루스피나 전투에서 라비에누스와 싸웠다. 이때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가 지휘하는 누미디아군의 맹공에 큰 위기에 처했다. 이 공격에 카이사르 기병은 반격하지 못하고 적의 포위를 막으려 버티고 있었다. 카이사르 보병과 라비에누스군이 곧 맞붙었고 누미디아군은 투척무기를 던졌고 카이사르 쪽에서도 필룸을 던져 응수했다. 카이사르군이 전투에서 불리해지며 원형진을 이루었다. 이때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군을 향해 '어린 새내기' 군대라고 놀렸다. 이 조롱에 격분한 카이사르 제10군단의 한 백인대장이 투구를 벗어 던지며 라비에누스에게 자신을 알아볼 수 있게 한 다음 카이사르의 정예인 제10군단의 힘을 보여주겠다면서 그에게 창을 던졌다. 라비에누스는 말에 창이 맞자 굴러 떨어졌으며 누미디아군의 엄호를 받으며 퇴각했다. 그러나 전투가 불리하게 흘러가자 몇몇 카이사르군은 두려움에 달아났고 카이사르는 한 기병을 붙잡으며 외쳤다. "적들은 저기에 있단 말이다!" 결국 카이사르는 최대한 길게 진형을 늘어트리며 적을 공격했고 라비에누스의 누미디아군을 흩어놓았다. 페트레이우스가 1500명의 누미디아 기병으로 카이사르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루스피나 전투에서 힘들게 승리한 카이사르는 마우레타니아와 연합하여 유바가 없는 누미디아 본국을 공격하게 했다. 마우레타니아에는 시티우스라는 로마인이 있었는데 카이사르는 그를 회유했다. 카이사르는 탑수스를 공격하였고 스키피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군은 군대를 양분하여 카이사르를 봉쇄했다.(탑수스는 바다에 면한 곶 끝에 위치하면서도 육지쪽에는 석호가 펼쳐져 있는데 2킬로미터의 가늘고 긴 육지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탈출을 막으려면 군대를 양분해야 했다.) 기원전 46년에 카이사르는 탑수스에서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소 카토의 군대를 상대하였는데 스키피오군은 중앙에 보병, 좌우익에 기병, 극좌우익에는 코끼리를 배치하였다. 카이사르는 중앙에 기병을 배치했고, 좌우익에는 보병, 극좌우익에는 제5군단 병사를 배치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자 코끼리들은 제5군단 병사들의 투창에 전선에서 이탈했고 카이사르 기병은 적군 보병을 뚫고 적군 좌우익의 배후를 포위하였다. 전방에는 카이사르 보병이 배후에는 카이사르 기병이 폼페이우스군을 포위하였고 신속히 그들은 궤멸되었다. 이후 유바왕은 도주했고 자마에서 쫓겨나자 동행한 페트레이우스와 동반자살했다. 총사령관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배를 타고 도망치다가 사로잡히는 것을 면하기 위해 자살했다. 아프라니우스와 파우스투스 술라는 카이사르군에게 잡혀 죽었고 라비에누스와 아티우스 바루스는 그와중에 달아나는데 성공했다. 우티카에 있던 카토는 자결하여 카이사르에 대한 저항이자 자유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표출했다. 이에 키케로는 「카토」를 저술하여 카토의 행위를 찬양하였고 카이사르는 「안티 카토」를 저술하여 이를 반박했다. 탑수스 전투에서 이긴 뒤 사르디니아와 코르시카를 시찰하고 본국으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크게 개선식을 치르고 10년 임기의 독재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렇지만 폼페이우스의 아들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히스파니아로 도주하였는데, 카이사르의 옛 부관이자 갈리아 전쟁에서 부사령관을 지낸 티투스 라비에누스도 이들과 함께 있었다. 일레르다 전투 이후, 카이사르에게 평정된 히스파니아는 카이사르파 총독 카시우스의 실정으로 폼페이우스파로 돌아섰다. 카이사르는 이들을 격파하고자 파비우스와 페디우스를 파견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후 히스파니아에 직접 다시 출정한 카이사르는 기원전 45년 3월에 문다 전투에서 마지막 저항 세력을 격파하였다. 기병대를 지휘하던 라비에누스가 카이사르군을 유인하기 위해 기병을 이끌고 뒤로간 것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기병대가 붕괴된 것으로 잘못 보아 군대를 퇴각시킨 것이 패인이었다. 라비에누스는 전사했고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도주하다가 카이사르군에 잡혀 죽었다. 폼페이우스의 둘째아들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만이 히스파니아에서 도주하는데 성공했다. 이런 가운데 카이사르는 세 번째와 네 번째로 기원전 46년의 집정관(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동료 집정관)과 기원전 45년 집정관(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동료 집정관, 그해말 파비우스가 병사하여 이후 보궐집정관은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에 선출되었다. 내전 이후. 카이사르는 아직 히스파니아에서 싸우고 있었으나, 원로원은 그가 부재중인 가운데 영예를 내리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적들을 처벌하지 않고 거의 모두 용서해 주었으며, 그에 대한 대중의 반대도 거의 없었다. 카이사르가 문다에서 승전한 데 기념하며 로마 건국 기념일인 4월 21일에는 대규모 경기와 축하 행사가 열렸다. 플루타르코스는 내전에서 무찌른 적들이 외국인이 아닌 동료 로마인들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로마인들이 카이사르 승리 이후 열린 개선식이 빈약했음을 알았다고 썼다. 이어 그는 기원전 46년 임기 6개월이었던 독재관 임기 규정을 변경, 10년 임기의 독재관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카이사르는 2년 동안 각종 개혁을 실시하였다. 유언장 작성- 기원전 45년 9월에 카이사르는 이탈리아로 돌아오면서 미리 유언장을 썼는데, 자신의 조카손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에게 자신의 이름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상속한다고 썼다. 이어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유언의 공동 집행자로 지명했다. 카이사르는 또 자신이 죽기 전에 옥타비아누스가 죽는다면,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다음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적었다. 복지 정책- 카이사르는 국가에서 곡물의 일정량을 의무적으로 매입하도록 법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카이사르는 곡물 수매에 국가 보조금을 대도록 엄하게 제도화하였으며, 곡물 수령자의 수를 고정하여 줄였는데 모든 수령자는 특별 명부에 기록되었다. 47년에서 44년까지 카이사르는 그의 전역병 약 15,000명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계획을 세웠다. 달력 개정- 카이사르는 대신관으로서 달력을 정비하는 일도 했다. 구 로마력을 철저히 검사한 그의 업적은 매우 오랜 세월동안 영향력을 이어갔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는 1년을 365일로 정하고, 4년마다 윤년을 두었다. (율리우스력은 158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수정하여 오늘날의 그레고리오력이 되었다) 역법 개정으로 로마인에게 어떤 한 해가(아마 현대 역법으로 기원전 46년에 해당할 것이다)이 445일로 길어졌다. 7월의 여러 유럽어 명칭(가령 영어의 'July' 등)은 그를 기념하여 율리우스에서 기원한 것이다. 수도 재개발- 카이사르는 「카이사르의 포룸」을 건설하였다. 포룸 로마눔의 내부에는 로마 최초의 국립도서관과 바실리카 율리아가 지어졌다. 카이사르는 사이프타 율리아, 마르켈루스 극장(훗날, 아우구스투스가 일찍 죽은 조카를 기리기 위해 극장의 이름에 조카의 이름을 붙였다.)도 건설하려 했다. 카이사르는 도심을 확장하기 위해 세르비우스 성벽을 파괴하기도 했다. 카이사르가 완공하지 못한 건축물은 옥타비아누스가 완성했다. 카이사르 이후, 로마황제들은 그를 따라 포룸을 건설 및 발전시켰다. 교사와 의사에게 시민권 지급- 카이사르는 로마의 교육과 의료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교사와 의사에게 시민권을 제공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카르타고와 코린토스 재건- 카이사르는 로마세계의 도시개발을 꾀하여 카르타고와 코린토스를 비롯한 도시들을 재건 및 건설하였다. 이후, 제정시대에 카르타고는 크게 발전하여 아프리카 속주의 주도가 되었다. 금융 개혁- 카이사르는 금융 개혁도 실시하였다. 이자율의 제한을 연리 12% 이하로 정하였고 물가가 폭등한 내전 이전으로 담보물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원로원 체제 약화-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권한을 크게 약화시키는 개혁도 진행시켰다. 갈리아를 비롯한 속주의 유력자들에게 원로원의석을 제공하여 원로원의 정원을 900명으로 늘였다. 이는 키케로나 마르쿠스 브루투스 같이 속주민과의 융합을 싫어하는 보수파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일관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해왔던 원로원 최종권고를 완전히 폐지해 버려, 원로원의 강권을 박탈했다. 사법 개혁- 카이사르는 사법 개혁도 실시하였다. 앞서 말한 원로원 최종권고를 폐지하여 재판도 받지 않고 로마 시민이 처형당하는 것을 금지한 '셈프로니우스 법'을 부활시켰다. 배심원의 자격조건을 40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재산을 가진 사람으로 규정하여 배심원 구성비율을 둘러싼 다툼을 종식시켰다. 카이사르는 재판이 나온 뒤의 항소를 민회가 아닌 종신 독재관인 카이사르 자신에게 제기하도록 바꾸었다. 그리고 정치범에 대한 최고형을 사형이 아닌 추방형으로 규정했다. 교통 규제- 카이사르는 혼잡한 로마의 교통을 규제했다. 낮에 수레가 다닐 수 없게 함으로써 교통의 혼잡함을 없애려 하였다. 그러나 수레가 밤에만 다닐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 법률로 인해 로마 시민들은 밤에 소음을 들으며 잠을 자야했다. 갈리아 키살피나 주민에게 시민권 지급- 카이사르는 북이탈리아의 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제공했다. 이것은 갈리아전쟁 당시 카이사르에게 후방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동시에 카이사르가 생각한 본국의 경계는 북이탈리아를 포함한 것임을 보여준다. 치안 대책- 카이사르는 기존에는 없었던 치안대를 만들어 치안대책을 강구했다. 카이사르 이전에 치안대가 없던 까닭에 로마에 정치폭력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카이사르는 치안대를 만들어 이를 방지하였다. 그 밖의 개혁-그 밖에 늪지를 개척하는 사업과 오스티아 항만 개조, 해방노예 등용을 추진했다. 종신 독재관 취임- 기원전 44년 2월 15일 그는 원로원과 민회로부터 종신 독재관에 임명되었고, 성대한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공화정은 붕괴하고 제정이 사실상 시작되었다. 암살. 기원전 44년 3월 15일(Idus Martias)에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전날 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스카라는 어느 '해방자'로부터 모종의 음모에 대해 어렴풋이 전해 들었으며, 최악의 상황을 우려하여 포룸 계단에서 약간 떨어져서 카이사르 앞으로 갔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마르스 광장에 있는 폼페이우스 극장을 지날 때 원로원 의원 무리가 그를 가로막더니 동쪽 주랑 현관에 붙은 방으로 그를 이끌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다다랐을 때, 원로원 의원인 루키우스 틸리우스 킴베르가 추방당한 자신의 형제를 귀환시켜달라며 청원을 하였다고 한다. 다른 음모자들이 킴베르를 지지하면서 카이사르를 둘러쌌다. 플루타르코스와 수에토니우스 모두 카이사르가 킴베르의 청을 거절하였다고 했는데, 킴베르는 그의 어깨를 잡더니 카이사르의 투니카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킴베르에게 "이건 무례한 짓인야!(Ista quidem vis est)"라고 소리쳤다. 이때 카스카가 단검을 빼내 들어 단번에 독재관의 목을 내리찔렀다. 카이사르는 재빨리 뒤돌아보며 팔로 카스카를 잡았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라틴어로 "카스카, 이 천한 자야, 무슨 짓이냐?"라고 말했다고 썼다. 겁을 먹은 카스카는 그리스어로 "동지들, 도와주시오!"(ἀδελφέ, βοήθει)라고 외쳤다. 순식간에 브루투스를 비롯한 모든 암살자들이 칼을 들어 독재관을 공격하였다. 카이사르는 도망치려 하였으나, 피 때문에 분별을 잃고 발을 헛디뎌 넘어졌으며 주랑 현관 아랫 계단에 무방비로 쓰러지자, 암살자들은 그를 계속 찔러댔다. 에우트로피우스에 따르면, 카이사르를 암살하는 데 60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가담하였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23번 칼에 찔렸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나중에 의사가 부검하기를, 그의 가슴에 두 번째로 찔린 상처 그 하나가 치명적인 일격이었다고 한다. 독재관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는 학자들과 역사가들의 논쟁거리이다. 수에토니우스는 다른 사람들은 카이사르의 마지막 말이 그리스어로 "녀석, 너도냐?"(καὶ σύ, τέκνον)였다고 말했노라고 썼다. 그러나 수에토니우스 자신은 카이사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썼다. 플루타르코스도 카이사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그가 암살자 사이에서 브루투스를 보자 자신의 토가를 끌어올려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고 한다. 영어권 지역에서 가장 잘 알려진 그의 마지막 말은 라틴어로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인데, 이 말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서 나오는 대사에서 나온 말로, 실제로는 라틴어와 영어가 혼용된 문장 "Et tu, Brute? Then fall, Caesar."의 앞부분 구절이다. 이 말은 역사적 사실로서 근거가 없으며, 셰익스피어가 대사에 라틴어를 쓴 것은 당시 카이사르가 수에토니우스가 기록한 것처럼 그리스어가 아닌, 라틴어를 썼다는 주장과도 무관하며, 단지 이 희곡을 쓴 당시 이미 대중적인 구절이었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죽은 뒤에 브루투스는 동료 의원들에게 무언가 말할 듯이 앞으로 걸어 나왔으나, 그들이 건물에서 도망쳤다고 한다. 브루투스와 그의 패거리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나아가 사랑하는 도시를 향해 "로마 사람들이여, 우리는 다시 자유로워졌다!"고 외쳤다. 그러나 연회장에서 도망쳐나온 의원들이 이미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소리쳐 말해서 로마 시민들은 각자 자기 집에 문을 걸어잠그고 틀어박혀 그들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암살 이후. 반란자들은 절대권력자의 죽음에 기쁨을 터뜨렸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죽음이 결국 로마 공화정의 종말로 이어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다. 갈리아 정복 전부터 카이사르를 열렬히 지지했던 로마의 중류층과 하류층 사람들, 특히 카이사르와 함께 많은 전쟁을 치른 고참병들은 소수의 잘난 귀족 무리가 자신들의 우상을 죽인 데 분노하였다. 카이사르와 떨어져 있었던 안토니우스는 로마 민중의 슬픔을 이용하여 이들의 분노를 벌족파들에게 쏟아버리겠다고 위협하였는데, 아마도 자신이 로마의 지배권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서는 놀랍고도 분하게도, 카이사르는 조카의 아들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를 이미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로 정해두었으며, '카이사르'라는 막대한 권위를 지닌 이름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유증을 통해 그에게 유산의 2/3을 지급하였다. 하지만, 유서에는 포로로마노의 시민들에게 자신의 재산에서 한명당 300세스테르티우스를 지급하라는 내용도 있었기 때문에 유산의 2/3은 그리 많지 않은 돈이였다.(300 세스테르티우스는 매우 큰 액수는 아니었으나, 로마 노동자들의 평균 석달치 급료에 해당하는 돈으로 상당히 좋은 선물이었다)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는 위대한 카이사르의 아들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로마 대중 상당수의 충성도 얻게 되었다. 며칠 뒤 로마 포룸에서 카이사르의 장례식이 열렸는데, 안토니우스는 1600여 년 뒤 셰익스피어가 쓴 것처럼("친구들이여, 로마인들이여, 동포여, 들어보시오...") 연설을 하지는 않았으나, 로마의 일반 민중들에게 호소력 있게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여론을 반영한 극적인 찬사를 바쳤다. 게다가 장례 연설 중에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따라 티베리스 강변에 있는 그의 개인 정원은 로마 시민에게 바치며, 모든 로마 시민 등록자에게 300 세스테르티우스씩 선물하기로 발표가 났다. 안토니우스의 장례 연설과 더불어 카이사르의 유증이 알려지면서 대중 사이에서 카이사르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으며, 죽음에 대한 애도와 암살자에 대한 분노도 높아졌다. 장례식장에서 들끓어오른 군중은 카이사르의 유해를 놓은 장례용 장작에 마른 가지와 가구, 심지어 옷가지까지 던졌으며, 이로 말미암아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포룸이 심각하게 피해를 입었다. 그러자 군중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집을 공격하였는데, 이들은 간신히 피해 쫓겨났으며 결국 해방자들의 내전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게 된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다가올 내전의 궁극적인 결과를 예견하지 못하였는데, 특히 카이사르의 후계자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하였다. 카이사르가 죽을 당시 겨우 19세의 나이였던 옥타비아누스는 상당한 정치 감각을 입증하였으며, 안토니우스가 새로운 내전의 첫 단계에서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상대하는 동안, 옥타비아누스는 당초 빈약했던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그리스에 막대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와 싸우기 위하여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전쟁 자금과 병사가 필요하였으며, 카이사르의 이름이 지닌 명분과 정당성도 있어야 했다. 기원전 43년 11월 27일 티티우스 법(lex Titia)이 통과되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카이사르에 충성하던 기병 지휘관 레피두스 세 사람의 제2차 삼두 정치가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 삼두 정치는 기원전 42년에 공식적으로 카이사르를 '율리우스 신'(Divus Iulius)으로 신격화하였으며, 그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신의 아들'(Divi filius)이 되었다. 카이사르가 자신의 관대함 때문에 암살당한 것을 아는 제2차 삼두 정치의 세력자들은 술라 이후에 쓰인 적이 없는 숙청의 공포를 다시 일으켰다. 이들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 대항하여 두 번째 내전에서 45개 군단을 유지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수많은 반대자들을 합법적으로 살해하였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필리피에서 공화정파를 격퇴하였다. 이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정부였던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였는데, 로마를 지배할 발판으로 이집트의 어마어마한 부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에 맞서 세 번째 내전을 벌인다. 이 마지막 내전에서 악티움 해전을 기점으로 옥타비아누스가 승세를 잡게 되고, 결국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는 신적인 이름을 달고 로마 제국의 첫 황제가 되었다. 당초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파르티아와 캅카스, 스키타이를 침공하고, 동유럽을 가로질러 게르마니아에 다시 진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암살되면서 이러한 계획은 좌절되었다. 그의 후계자들은 파르티아와 게르마니아를 정복하고자 하였으나, 영속적인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사후. 카이사르에게는 무덤이 없다. 그의 유해는 포로 로마노에서 화장되었는데, 불길이 꺼져갈 무렵 내린 세찬 비에 유해를 태운재가 씻겨갔기 때문이다. 건강.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근거하여, 간혹 카이사르가 뇌전증을 앓았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 문제를 놓고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으며, 또 특히 기원전 80년대에 술라가 처벌자 명단을 공개하던 당시 그가 말라리아에 걸린 것은 이보다는 더욱 확실하다. 카이사르는 부분적으로 발작 증세를 보였던 것 같은 기록이 네 가지가 있다. 또 그는 아마도 어린 시절에 소발작(absence seizure)을 증세가 있었던 것 같다. 이렇듯 그의 발작에 대한 가장 최초의 기록은 카이사르 사후에 태어난 사람인 수에토니우스의 글이다. 그가 뇌전증 환자였다는 주장에 대해 일부 의학 역사가들은 그의 병이 뇌전증성 발작을 유발하는 저혈당증이라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저서. 카이사르는 생전에 로마에서 훌륭한 웅변가이자 산문 작가로 인정받았으며, 키케로도 카이사르의 수사와 문체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카이사르의 대표작인 갈리아 전쟁기가 "알몸과 같고 순수하며 의복과 같은 미사여구를 죄다 벗어 던져버렸을 때 생겨나는 매력으로 충만해있다"며 이어 "카이사르는 역사를 쓰려는 자들에게 사료를 제공할 작정으로 썼을지  모르나, 그 은혜를 입는 자들은 군더더기를 덧붙여 화려하게 장식한 역사를 쓰는  바보들뿐이고, 사려 깊고 현명한 이들에게는 역사를 쓸 의욕마저 꺽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라고 평가했다. 그의 유명한 작품 가운데는 마리우스의 아내인 아주머니 율리아의 장례 연설과, 키케로의 소 카토 회고에 대응하여 카토를 비난한 글인 안티카토네스(反카토)가 있다. 불행히도 그의 글과 연설문 상당수는 유실되었다.가장 큰 원인은 그의 사후에 그가 신격화 됨에 따라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갈리아 전기와 내란기등 몇몇 문서들을 제외한 그와 관련된 글과 연설문들의 전량 회수 및 폐기를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가 쓴 회고록으로는 갈리아 전기와 내란기가 있는데, 전자는 갈리아 전쟁 당시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서 벌인 군사 작전을 기록하였으며, 후자에서는 이집트에서 폼페이우스가 죽은 직후에 일어난 내전을 다루었다. 또 각각 알렉산드레이아,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에서 수행한 전투에 대해 쓴 알렉산드리아 전기(De Bello Alexandrino), 아프리카 전기(De Bello Africo), 히스파니아 전기(De Bello Hispaniensi) 이 세 저작도 역사적으로 카이사르의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 저자 여부는 불투명하다. 이러한 저서의 줄거리는 당시 전쟁 중이나 직후에 "전선에서 급송한 공문서"로서, 1년 단위로 써서 출간되었다. 카이사르의 저서는 문체면에서 분명하게 단순하고 직설적이나, 사실은 대단히 복잡하고 그의 정치적 주장을 선전하는 방향으로 미묘하게 편향되어 있고 특히 로마나, 이탈리아, 속주의 평범한 소귀족 독자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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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롤라모 카르다노
지롤라모 카르다노 (Girolamo Cardano, 1501년 9월 24일 - 1576년 9월 21일)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죽었다. 수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본업은 의사였다. 점성술사, 도박사, 철학자이기도 했다. 출생과 유년기. 아버지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친구였고, 수학적 재능이 있던 변호사의 사생아로 태어난다. 카르다노의 자서전에는 어머니가 그를 사산시키려 했다고 쓰여 있다. 그의 어머니는 그 외에 3명의 자식을 전염병으로 잃고, 그를 낳은 직후 밀라노에서 파비아로 이주했다. 1520년 파비아 대학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하고, 후에 파도바로 학교를 옮겨 약학을 공부한다. 그는 성격이 특이하고 배타적이어서 친구가 거의 없었고, 졸업 후 직업을 찾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당시 그는 의학을 전공해 의학으로 학위를 받았다. 결혼 후 그는 수학교사가 돼 수학과 물리학을 연구하기도 하고, 시골에서 의사생활을 하기도 했다. 1544년에는 밀라노 대학의 기하학 교수가 됐다. 카르다노는 재판관을 치료해 줌으로써 명망있는 의사가 되고, 돈을 많이 벌게 된다. 또한, 그의 소견은 재판장에서 신뢰를 얻는다. 그는 발진 티프스(typhoid fever)를 처음 발견한 의사이기도 하다. 역학 분야의 업적. ‘천체를 제외하고는 영속적인 운동은 없다’는 주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의사로서의 명성. 천식 치료, 탈장 수술법 개발, 발진티푸스에 대한 최초의 임상 기록을 남겼다. 말년. 카르다노가 살던 시대에는 수학경기가 있었는데 주어진 문제를 가장 빨리 푸는 사람에게 상금이 주어졌다고 한다. 카르다노는 상금을 혼자서 많이 갖기도 했다. 1570년에는 종교재판을 받고 몇달간 수감되기도 했다. 점성술을 퍼뜨린 죄였다. 카르다노는 점성술사이기도 해서 자신이 1576년 9월 21일에 죽는다고 하였고, 자신이 옳다고 증명하기 위해 그는 그날 로마에서 자살을 하였다. 또 카르다노는 영예를 누리며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카르다노의 말년 또한 행복하진 못했다. 아내를 잃고 사랑하는 아들이 처형을 당하는 상황을 견뎌야 했다. 그는 말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아들의 파멸을 지켜보며 나는 결국 노름을 끊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학문보다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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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장쩌민(, 1926년 8월 17일 ~ )은 정치인으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겸 중국공산당 주석(1993년 ~ 2003년)이다. 1993년 3월 국가 주석에 선출됨으로써 당과 정부의 전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삼개대표사상을 발표하였으며, 외교 부문에서는 미국과 유럽과의 친선을 도모하였을 뿐만 아니라 2001년에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가지는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에 앞장서기도 했다. 또한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이 방중했을 때 장쩌민 주석이 시베리아 범 한 쌍을 기증하였다. 초기 생애와 경력. 당시 중화민국 장쑤성 양저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동생 중 하나가 그 당시 불법이었던 공산당에 입당하여 투쟁에서 사망한 후, 어린 장쩌민을, 자식이 없던 그 동생의 집에 양자로 보냈다. 장쩌민은 1943년 상하이 자오퉁 대학에 입학하였으며 1946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지하 활동을 계속하였고, 이듬해 상하이 자오퉁 대학에서 전기공학과를 전공하여 졸업하였다. 1949년 중국공산당이 중국 대륙에 권력을 차지한 후, 장쩌민은 상하이에서 몇몇의 직위들을 취하였는 데 중국공산당 위원회의 서기장, 식품 공장, 비누 공장, 기계 공장의 공장장을 지냈다. 1955년 그는 모스크바에 있는 스탈린 자동차 공장에 연수생으로 보내졌다. 이듬해 귀국 후, 1966년까지 창춘, 우한, 상하이 등지를 옮겨가며 공장관리자 및 공업연구소 책임자로 일하였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곧 당과 공직에서 추방되어 10년 동안 피신생활을 하다가, 1976년 국무원 제1기계공업부 책임자로 복귀하였다. 1980년 국가 수출입관리위원회 부주임·외국투자관리위원회 부주임을 거쳐 전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이 되었다. 1983년 국무원 전자공업부장(장관)에 오르고, 1984년 국무원 전자공업 진흥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1985년 상하이 시장이 되고, 1987년 상하이 시의 당 서기장직도 겸직, 당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중국의 핵심인물로 떠올랐다. 초기 리더십. 장쩌민은 당 안에서 공평하게 상당히 작은 권력 기반과 함께 1989년 국가의 최고 직업으로 올라가 매우 적은 사실상 권력을 가졌다. 그의 가장 신뢰할 수 있던 동맹자들은 권력적인 연상의 당원들 - 천윈과 리셴녠이었다. 그는 덩샤오핑에게 더욱 안정적인 후계자가 자리에 놓일 수 있었을 때까지 단순하게 과도기 인물로 믿어졌다. 양상쿤과 그의 동생 양바이빙 같이 다른 현저한 당과 군사 인물들은 쿠데타를 계획한 것으로 믿어졌다. 장쩌민은 첫 몇년에 자신의 리더십으로 지원자로서 덩샤오핑을 이용하였다. 신보수주의 관점으로 믿어졌던 장쩌민은 "중산계급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경고를 하였다. 하지만 덩샤오핑의 믿음은 중국에 공산주의 통치의 합법성을 지키는 데 단 하나의 해결은 지속적으로 현대화와 경제 개혁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것을 규정하였고, 따라서 자신을 장쩌민과 역경에 놓았다. 1989년 톈안먼 사건이 일어난 후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첫 회의에서 장쩌민은 이전의 시기를 "경제에 완고하고 정치에 연약한" 것으로서 비판하였고, 증가하는 정치적 사상 작업을 옹호하였다. 앤마리 브래디는 "장쩌민은 이념적 작업과 그 중요성을 위한 후각과 함께 장기적 정치 핵심이었다. 이 회의는 중국에서 선전과 정치적 사상 작업에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특정지었다."고 썼다. 곧 후에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는 "선전에 관련된 작업 단위로 들어가는 권력을 포함하고 민주화 운동의 지자자로 지내온 자들의 계급을 정화하는" 더욱 많은 방책들과 권력이 주어졌다. 덩샤오핑은 1992년 장쩌민의 리더십에 관한 비판적이 되었다. 덩샤오핑의 남부 순방 중에 그는 개혁의 속도는 충분히 빠르지 않았고 "중앙적 리더십"이 가장 많은 책임을 가졌다고 미묘하게 제안하였다. 장쩌민은 더욱 신중해졌고 덩샤오핑의 개혁들 뒤에 완전히 집결하였다. 1993년 장쩌민은 중국의 중앙적으로 계획된 사회주의 경제를 본질적으로 정부 규제의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옮기는 데 새로운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만들어냈다. 동시에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자신감을 되찾은 후, 상하이에서 온 많은 자신의 지지자들을 높은 정부 직위들로 승진시켰다. 그 일은 덩샤오핑의 "중국의 형질과 함께 한 사회주의"의 실현을 받아들이는 데 큰 단계였다. 그는 혁명적 당의 연장자들로 구성된 자문 기관 구식의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를 폐지하였다. 그는 1989년 중국공산당 총서기와 중앙군사위원회의 의장이 되었고 1993년 3월 주석으로 자신의 선거에 의하여 이어졌다. 최고 지도자. 1990년대 초반에 톈안먼 사건 이후의 경제 개혁들은 안정화되었고 국가는 철저한 성장 궤적에 있었다. 동시에 중국은 무수한 경제와 사회 문제들을 향하였다. 1997년 덩샤오핑의 국장에서 장쩌민은 연장자 정치인의 찬사를 전했다. 장쩌민은 정치적 부패와 전국의 안정화를 위하여 재빠르게 자라나는 지방적 경제와 함께 중국 만연을 물러받았다. "어떤 지역들은 다른 지역들 전에 부유해질 것이다"라는 덩샤오핑의 정책은 해안 지방과 내부의 성들 사이에 개방 부의 격차로 이끌었다. 새로운 경제적 성장과 중공업의 다수에서 규제 완화는 많은 국유 기업들의 폐업으로 이끌어 "톄판완" (鐵飯碗)을 깼다. 결과로서 실업률이 급등하여 어떤 도시 지역들에서 40 퍼센트 만큼 높이 올라갔다. 증권시장들은 크게 변동하였다. 도시 지역들로 시골 이동의 비율은 어느 곳에 새로웠고 약간은 여태까지 증가한 도시-시골 부의 격차를 해결하는 데 이루어졌다. 공식적 보고들은 10 퍼센트에 부패한 공무원에 의해 움직여지고 학대를 당한 중국의 국내총생산의 퍼센티지에 풍채를 놓았다. 문관과 군사 공무원들로부터 발행된 불법 채권의 혼란스러운 환경은 해외에서 끝난 부패한 부유의 거의에 결과를 가져왔다. 조직 범죄의 재출현과 범죄율에서 급증은 도시들을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환경의 멸망에 부주의한 자세는 지식인들에 의한 목소리를 높인 심화를 우려하였다. 경제에서 장쩌민의 가장 큰 목표는 안정성이었고, 그는 높이 중앙화된 권력과 함께 안정된 정부가 전제 조건이 될 것을 믿어 진행 중인 문제들을 악화시킨 지배의 많은 측면들에서 정치적 개혁을 연기하는 데 선택하였다. 장쩌민은 경제특구와 해안 지방들을 개발하는 데 지속적으로 자금을 쏟아부었다. 1996년에 시작에서 장쩌민은 자신 아래 "리더십의 핵심" 흥행에서 목표가 된 국가 통제의 대중매체에서 개혁의 일련을 시작하였고 동시에 자신의 어떤 정치적 상대들을 압도하였다. 대중매체에서 성격 향상들은 덩샤오핑 시대 동안 크게 눈살을 찌푸렸으며 1970년대 후반에 마오쩌둥 시대 이래 보여지지 않았다. 인민일보와 CCTV의 오후 7시 신문연파는 2006년 후진타오의 대중매체 행정부 변화들이 있을 때까지 남아있던 사실로 각각 장쩌민에 관련된 이벤트들을 정면의 페이지 혹은 중요한 소식으로 가졌다. 장쩌민은 서방 대중매체에서 격의 없어 보였고, 2000년 베이다이허구에서 CBS의 마이크 월리스와 전례없는 인터뷰를 하였다. 그는 카메라의 앞에서 가끔 외국어를 썼으며 항상 유창하지는 않았다. 2000년 홍콩의 기자와 만남에서 홍콩 행정장관으로서 두번째 기간을 추구하는 데 둥젠화를 지지하는 중앙 정부의 명백한 "제국 명령"을 여긴 장쩌민은 영어로 "too simple, sometimes naive" (너무 단순하고, 때때로 순진하다)로서 홍콩의 저널리스트들을 꾸짖었다. 그이벤트는 그날 밤 홍콩의 텔레비전에 보여졌다. 파룬궁에 대한 단속. 1999년 7월 장쩌민은 파룬궁에 대한 단속하는 데 법외부서 610 판공실을 설립하였다. 쿡 앤드 레미시는 이것은 장쩌민이 인기있는 새로운 종교 운동이 "중국공산당과 국가 기구를 조용히 침투하고 있었다"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고 진술한다. 7월 20일 보안군은 자신들이 지도자들로서 식별한 수천명의 파룬궁 결성자들을 체포하였다. 이어진 박해는 파룬궁 결성자들의 대규모 임의 투옥과 강압적인 재교육은 물론 선전의 전국적인 캠페인을 특징으로 어쩌다 사망에 결과를 가져왔다. 외교 정책. 1997년 장쩌민은 미국으로 획기적인 국가 방문에 가 티베트 독립운동에서 중국 민주화 운동의 지지자들까지 항의에서 다양한 관중을 끌어들였다. 그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연설 (그중에 일부는 영어로)을 하였으나 민주화와 자유에 의문들을 탈출할 수 없었다. 빌 클린턴 대통령과 공식 정상 회담에서 불일치 영역들을 거의 무시한 동안 장쩌민과 클린턴이 공통점을 찾으면서 어조가 이완되었다. 클린턴은 1998년 6월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려고 했고 중화인민공화국과 미국은 적이 아닌 세계에서 파트너였다는 것을 단언하였다. 1999년 미군이 이끈 베오그라드 중화인민공화국 대사관 공습 사건이 일어났을 때 장쩌민은 본국에서 가혹한 입장을 취한 것 같았으나 실제로 확실한 행동 없이 항의의 상징적인 몸짓을 한 것 뿐이었다. 장쩌민의 외교 정책은 가장 대부분 수동적이고 비대립적을 위해서였다. 장 크레티앵 전 캐나다 총리와 개인적 친구였던 장쩌민은 해외에서 중국의 경제적 지위를 강화하여 무역이 미국의 경제 영역으로 크게 국한 국가들과 따뜻한 관계를 설립하는 데 시도하였다. 이것에 불구하고 장쩌민의 재직 동안 중미 간에 최소한 3개의 심각한 발적들이 있었는 데 제3차 타이완 해협 위기 (1996년), 나토의 세르비아 공습과 하이난섬 사건 (2001년 4월)이었다. 경제 개발. 장쩌민은 경제에서 전문화하지 않았고 1997년 국가의 경제 관리의 대부분을 총리가 된 주룽지에게 넘기고 아시아 금융 위기를 통하여 직무에 남아있었다. 그들의 합동 리더십 아래 중국 본토는 해마다 8 퍼센트 국내총생산 성장의 평균을 유지하여 주요 세계 경제에서 1인당 경제성장의 최고 속도를 달성하였고, 놀라운 속도로 전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이 일은 시장경제로 전환 과정을 지속하면서 대부분 달성되었다. 중국에 강한 당의 통치는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는 데 중화인민공화국의 성공적인 입찰과 2008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는 데 베이징이 이긴 입찰에 의하여 접합되었다. 삼개대표사상. 자신이 지도자들의 젊은 세대에게 양도하기 전에 장쩌민은 2002년 제16차 중국공산당 대회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주의와 덩샤오핑주의와 더불어 당의 헌법으로 들어가 삼개대표사상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썼다. 비판들은 이것이 장쩌민의 개인숭배에 추가된 또다른 표본인 뿐이었다고 믿었고, 다른이들은 이론의 실용적인 적용을 중국공산당의 미래 지도에서 안내하는 관념으로 보았다. 국제 대중매체에 의하여 모든 직위에서 물러날 것으로 크게 추측된 그의 라이벌 리루이환의 2002년 사임은 장쩌민을 재고하도록 분석가들을 유도하였다. 삼개대표사상의 이론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원칙들로 자신의 전망을 확장시켜 이전 중국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곁으로 자신을 승진시키는 장쩌민의 노력으로 많은 정치 분석가들에 의하여 믿어졌다. 퇴임 이후. 2002년 후진타오에게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직을 넘긴 뒤에도 국가주석직과 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보유하고 있었다. 2003년 3월 국가주석직을 후진타오에게 넘긴 뒤 1년 정도 군권을 장악하고 있다가 2004년 정계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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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1912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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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1923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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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스
아르테미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달과 사냥·야생동물·처녀성의 여신이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다이애나()와 동일시된다. 제우스와 레토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아폴론과는 누나간이다. 올림포스의 12신의 두 번째 세대에 속한다. 곰과 사슴, 활과 화살, 초승달이 대표적 상징물이다. 몸종들과 함께 숲 속에서 사냥을 하며 돌아다니는 야생적인 처녀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달이 비칠 때 그 모습이 나타나는데 그 때는 산짐승과 초목이 춤을 춘다고 한다. 아폴론과 마찬가지로 활을 무기로 들고다니며 그녀의 화살은 순식간에 목숨을 앗아가므로 희생물에게 아무런 고통도 주지 않는다고 한다. 성격이 거칠고 복수심이 강해서 그녀의 진노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 허다하다. 신화. 탄생. 헤라는 레토가 임신한 쌍둥이들이 아버지인 제우스 다음가는 권력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 큰 뱀 피톤에게 레토를 끊임없이 쫓아다니면서 햇빛이 닿는 곳 어디에서도 그의 해산을 어떻게든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출산이 임박하자 레토는 곤경에 처했다. 헤라의 저주를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어느 곳도 레토를 받아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토는 해산할 장소를 찾아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오르티기아 섬에 당도하였다. 레토가 발을 디디자마자 포세이돈이 섬 위로 파도를 솟구치게 하여 햇빛을 막아주었다. 헤라의 출산 금지령에 어긋나지 않자 레토는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를 낳을 수 있었다. 유년기. 아르테미스는 3살이 되자 아버지 제우스에게 선물을 달라고 졸랐는데, 그 선물은 다름 아닌 영원한 처녀성이었다. 그녀는 제우스에게 평생 자신이 처녀로 남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밖에도 아르테미스는 크레타 섬에서 9살 된 시녀들을 골랐으며, 또 키클롭스를 찾아가 활과 화살을 받았다. 아르테미스는 성능을 시험해보고자 화살을 쏘아보았는데, 첫 번째 화살과 두 번째 화살은 나무에 맞았고, 세 번째 화살은 짐승에 맞았으며, 네 번째 화살은 부정한 자들의 도시에 떨어졌다고 한다. 니오베.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 겸손함이 없었던 테베의 왕비 니오베는 "레토는 훌륭한 자식을 2명밖에 낳지 못했지만, 자신은 훌륭한 자식을 14명이나 낳았다."고 뽐내고 다녔다. 이에 진노한 레토는 아르테미스와 아폴론에게 니오베에게 벌을 내리라고 말했다. 아르테미스와 아폴론은 각각 그녀의 딸 7명과 아들 7명을 모두 활로 쏘아 죽였는데, 아폴론이 7 아들을 죽이고, 아르테미스가 남은 딸을 죽였는데, 슬픔을 이기지 못한 남편 암피온은 자살하였고, 니오베는 계속 한 곳에서 흐느끼다 바위로 변해버렸다. 칼리스토. 아르테미스를 섬기는 칼리스토에게 눈독을 들인 제우스는 그를 유혹하기 위해 아르테미스로 변신하여 그와 동침하였다. 얼마 후 칼리스토는 임신하여 배가 볼록해졌고, 이를 눈치챈 아르테미스는 처녀성을 지키겠다는 자신과의 서약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쫓아 내었다. 그 이후, 헤라가 그 사실을 알게되자, 곰으로 모습을 바꾸는 벌을 내렸다. 곰이 된 칼리스토는 아르카스라는 아들을 낳은 후 숲에서 홀로 지냈는데, 어느 날 장성한 아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한눈에 아들을 알아본 그가 아들한테 다가갔지만, 어머니를 몰라본 아들은 겁에 잔뜩 질려 화살을 쏘아 죽이려고 하였다. 이를 본 제우스는 동정심을 느껴 아들을 곰으로 변하게 한 다음 어머니와 아들을 함께 우주로 올려보내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로 만들어주었다. 악타이온. 악타이온이라는 이름의 사냥꾼이 친구들과 숲 속에서 한창 사냥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근처의 동굴 속 연못에서 아르테미스가 목욕을 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고, 이에 분노한 아르테미스는 자신의 몸을 본 악타이온에게 물을 뿌려 사슴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자 악타이온이 데리고 온 사냥개들이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사냥감인 줄 착각하고 달려들었다. 계속 사냥개들을 피해 달아나다 지친 악타이온은 결국 사냥개들에게 붙잡혀 찢겨 죽고 말았다. 오리온. 아르테미스는 자기 못지않은 뛰어난 사냥꾼인 포세이돈의 아들 오리온과 함께 사냥하러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이를 보던 아폴론은 아르테미스가 오리온에게 반하여 처녀로 살겠다는 맹세를 저버릴지 모른다고 우려하였다. 그러던 중 멀리서 오리온이 머리만 내민 채 수영하는 것을 보고, 아르테미스에게 저 멀리 파도에 떠다니는 저것을 한번 쏘아 맞추어보라고 말했다. 그것이 오리온인지 몰랐던 아르테미스는 활을 겨누어 오리온을 쏘아 죽여버렸다. 뒤늦게 사실을 깨달은 아르테미스는 아폴론의 아들이자 후에 의학의 신으로 숭배받게 되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오리온을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제우스가 이를 가로막았다. 그래서 아르테미스는 오리온의 시신을 우주로 올려보내 오리온자리로 만들어주었다. 신약성서의 사도행전. 고대 에베소 주민들은 아르테미스를 유방이 가득한 여신으로 묘사할 정도로 풍요의 신으로 숭배했다.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이가 아르테미스 신앙을 이용하여 아르테미스 신전모형을 만들어 팔았는데, "사람이 만든 것은 신이 아니다"라는 성 바울의 설교를 들은 주민들은 더이상 신전모형을 사지 않았다. 데메드리오는 직공들과 은장이들을 선동하여 바울의 제자들을 끌고 극장안에 들어갔으며, 격분하여 이성을 잃은 이들은 모임을 2시간이나 계속하였다. 성 바울은 이들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제자들과 소아시아의 고관들이 말려서 극장안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시청 서기관은 은장이들에게 "여러분의 모임이 소요죄로 처벌될 수 있으므로,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면 법원과 로마제국의 총독들에게 고소하십시오.아데미 여신을 모독한 것도 아니고, 신전 물건을 절도한 것도 아닌데 이 사람들을 끌고온 것은 경솔한 행동입니다."라고 설득해서 해산시켰다.(사도행전 19장 23절에서 41절,새번역을 인용함) 한글성서의 새번역성서와 개역개정판 성서에서는 아데미라고 음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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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스
아레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쟁의 신이다. 로마 신화의 마르스와 동일시된다. 제우스와 헤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며 헤파이스토스와는 형제지간이다. 올림포스의 12신의 두 번째 세대 <제우스의 차남>에 속한다. 창, 칼, 방패, 놋쇠 갑옷, 전차, 독수리가 대표적 상징물이다. 같은 전쟁신이자 이복누나인 아테나가 전략과 방어를 중시하는 것과는 반대로 전쟁의 광란과 학살, 파괴적인 측면을 상징하였는데, 호전적인 성격과 사나운 성미를 가지고 있어서 다른 신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전투가 벌어지는 곳마다 네 마리의 군마가 끄는 전차를 타며 나타나 무시무시한 소리를 질러 적군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아레스는 본래 트라키아 지방에서 숭배되었던 신으로 전해지며, 그리스의 일부 북부 지역에서만 숭배되었다. 스파르타에서는 중요한 주신으로 숭배되어 초기에는 전쟁 포로를 아레스에게 제물로 바치기도 하였으며, 라코니아의 게론트라이에서 열린 그의 축제 기간에는 여자들이 신성한 숲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와 반면에 테게아의 여자들은 그를 기나이코토이나스(Gynaikothoinas)라 칭하여 제물을 바치고 찬양하였다. 아테네에서는 아레오파고스 기슭에 아레스에게 봉헌된 신전이 있었다. = 특징 및 애정 = 모든 신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부모인 제우스와 헤라, 이복 동생 영웅 헤라클레스(친누이 헤베의 남편) 역시 그를 싫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애인이었던 아프로디테와 불화의 여신인 에리스, 그의 숙부이자 지하 세계의 왕 하데스는 그를 좋아했다고 한다. 신화. 아프로디테. 호전적인 성격임에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아레스는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받았다. 아레스는 아프로디테와 함께 그녀의 남편인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를 피해 자주 밀회를 즐겼다. 한번은 사랑을 나누던 중 헤파이스토스가 미리 설치한 그물에 걸려 다른 신들로부터 망신을 당하였는데, 이런 일이 있은 후에도 계속 교제를 하였다. 서로에 대한 관리도 철저하였는데, 아프로디테가 아도니스에게 반하자 아레스는 멧돼지로 변하여 그를 받아 죽이고, 아프로디테는 에오스가 아레스를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가 사랑하게 되는 인간은 모두 죽는 저주를 내린다. 아레스는 아프로디테와의 사이에서 공포를 뜻하는 포보스와 두려움을 뜻하는 데이모스, 에로스, 하르모니아를 낳았다.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와 에로스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후에 추가된 것이라고도 한다. 전쟁의 동행. 아레스는 아프로디테와의 사이에서 낳은 쌍둥이 형제인 포보스와 데이모스를 전쟁터로 데리고 다니며 살육을 할 때마다 적군에게 공포심을 심어주었다. 불화의 신 에리스와 그의 자식들, 전쟁의 신 에니오, 죽음의 신들 케레스도 이들과 함께 전쟁터를 돌아다녔다. 아레스의 언덕. 아레스는 아테네의 왕 케크로프스의 딸 아글라우로스 사이에서 낳은 딸 알키페를 포세이돈의 아들 할리로티오스가 겁탈하자 그를 때려 죽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포세이돈이 아레스를 고소하여 이해당사자들을 제외한 올림포스 신들로 구성된 재판이 열리게 되었고, 논의 결과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아레스에게 무죄가 선포되었다. 그 뒤 이 재판을 기념하기 위해 재판이 열린 언덕을 아레스의 언덕이라는 뜻의 아레이오스 파고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종교와 살인에 관한 범죄를 심판하기 위한 법정을 아레이오스 파고스에서 열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의 최고 법원을 아레이오스 파고스라고 부른다. 일리아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는 동료 신들과 심지어 부모조차도 아레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전하며 그를 미치광이, 악의 화신, 파괴자, 피투성이의 살인마로 묘사한다. 서사시에서 수록된 트로이 전쟁에서 신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개별적으로 전투에 개입하였는데, 아레스는 정의와 명분, 특별히 정해진 진영이 없이 잔인한 전투를 즐기며 많은 살육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 트로이의 편에 서게 된 아레스에게 그리스군이 고전하자, 그리스의 편에 서있던 아테나는 역시 같은 편인 헤라의 명령으로 디오메데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어 그가 창으로 아레스의 복부에 상처를 입히도록 한다. 제우스는 아레스가 부상을 당한 채 큰 소리로 울며 돌아오자 이렇게 호통을 친다. "이 변절자야, 나는 올림포스의 신 중 네가 가장 밉다. 너는 전쟁과 싸움 밖에는 모르는구나." 더구나 아테나 역시 이복오빠인 아레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라버니께서는 포악하고 사나워서 가까이 하기 어렵습니다. 오라버니의의 아우님이신 헤파이스토스 오라버니께서 모든 면에서 차라리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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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장
서울특별시장(서울特別市長)은 서울특별시의 행정 사무를 총괄하는 광역지방자치단체장이다. 다른 광역지방자치단체장은 차관급 대우만 받지만, 특별시장은 유일하게 장관급 대우를 받는다. 다만 윤치영 전 시장 대에는 특별히 총리급 대우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서울특별시장은 정부 지휘 없이 독자적 예산 편성과 일부 세금 조달 등 행정 명령 독자 행사 권한이 있다. 현재 서울특별시장은 오세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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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 게임
리듬 게임이란 음악에 맞춰서 손, 혹은 몸을 사용해 조작하는 게임을 총칭하는 말이다. 리듬 액션 게임이라고도 한다. 1996년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사의 파라파 더 래퍼를 시작으로 다양한 리듬 게임이 출시되었는데, 특히 1998년 코나미사에서 아케이드 게임장용으로 출시한 비트매니아를 시작으로 리듬 게임 열풍이 불기 시작해 다양한 리듬 게임 시리즈가 출시되었다. 정의와 게임 디자인. 리듬 게임 혹은 리듬 액션 게임은 플레이어의 리듬 감각을 사용하는 액션 게임을 총칭한다. 이 게임은 정확한 타이밍에 지정된 조작을 행하는 것을 요구하며, 화면에는 보통 행해야 하는 조작의 종류와 행한 조작의 정확성을 표시한다. 리듬 게임의 인기는 기타, 드럼이나 마라카스와 같은 악기를 모방한 컨트롤러와 댄스 게임에 사용하기 위한 댄스 매트 등의 시장을 만들었다. 하지만 컨트롤 패드와 같은 기존의 입력 장치 또한 쓰이고 있다. 대표작. 아케이드. *프라이데이 나이트 펑킨 (뉴그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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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한용운(韓龍雲, 1879년 8월 29일 (음력 7월 12일) ~ 1944년 6월 29일)은 일제강점기의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청주. 호는 만해(萬海)이다. 불교를 통한 언론, 교육 활동을 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에 대한 대안점으로 불교사회개혁론을 주장했다.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며 광복 1년을 앞둔 1944년 6월 29일에 중풍과 영양실조 등의 합병증으로 병사(입적)하였다.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추가보완하였고 옥중에서 '조선 독립의 서'(朝鮮獨立之書)를 지어 독립과 자유를 주장하였다. 1910년 일본이 주장하는 한일불교동맹을 반대철폐하고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등의 독립지사(志士)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 1918년 11월부터는 불교 최초의 잡지인 《유심》을 발행하였고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 독립선언을 하여 체포당한 뒤 3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풀려났다. 1920년대에는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중에게도 결혼할 권리를 달라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 언론활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 2월부터는 신간회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과 이듬해 신간회 경성지부장을 지냈다. 1918년 《유심》에 시를 발표하였고, 1926년〈님의 침묵〉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님의 침묵에서는 기존의 시와, 시조의 형식을 깬 산문시 형태로 시를 썼다. 소설가로도 활동하여 1930년대부터는 장편소설《흑풍》(黑風),《후회》,《박명》(薄命), 단편소설《죽음》등을 비롯한 몇편의 장편, 단편 소설들을 발표하였다. 1931년 김법린 등과 청년승려비밀결사체인 만당(卍黨)을 조직하고 당수가 되었으나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를 적발하는 과정에서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불교대전》,《십현담주해》,《불교와 고려제왕》 등이 있다.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저항 정신으로 자신의 집인 심우장도 조선총독부 반대 방향인 북향으로 지었고, 식량 배급도 거부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실제로 심우장에 가보면 심우장 뿐만 아니라 주변의 대부분 집들도 조선총독부 반대 방향으로 지어져 있으며 동네 주민들도 뜻을 함께 한 것으로 짐작된다. 친일로 변절한 최남선에 관하여서는 1937년 자신에게 최남선을 언급한 김홍규에게는 "아직도 최남선이 살아 있소?"라고 하는가 하면, 최남선이 탑골공원에서 인사를 하자, 처음에는 알은체도 하지 않다가 최남선이 자신을 못 알아보겠냐면서 계속 이름을 말하자 "내가 아는 육당은 이미 죽었소."라면서 차갑게 대했다. 생애. 유년기. 만해는 고종 16년인 1879년 아버지 한응준(韓應俊)과 어머니 온양 방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유천(貞玉)이며 용운은 출가 했을 때 은사 스님으로부터 받은 법명이다. 만해의 호적상 이름이자 본명은 한정옥이다. 그의 형제로는 형 한윤경이 있었다. 본관은 청주이며, 세조 때의 권신 한명회의 동생으로 전구서승(典廏署丞)을 지낸 서원군 한명진의 후손이었다. 몰락한 양반 사대부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한응준은 홍성군 관아의 하급 임시 관리였으며, 집안은 몹시 가난하였다. 그의 집안은 형 한윤경이 일시적으로 가세를 일으켜 토지를 마련했지만 만해가 토지를 매각해 독립자금으로 썼다고 했다. 유년시대에 관해서는 본인의 술회도 없고 측근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6세부터 성곡리의 서당골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9세에 문리를 통달하여 신동이라 칭송이 자자하였다. 소년 시절. 14살이 되던 해인 1892년 풍속에 의해 지주 집의 딸 전정숙과 결혼했으나 그는 가정에 소홀하였다고 한다. 16살 되던 해인 1894년부터는 홍성읍 내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전정숙에게서 아들 한보국을 두었으나 그는 출가하였다. 후일 한보국이 부친인 그를 보러 왔을 때 그는 외면하였다 한다. 1894년에 가출하여 동학 농민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홍주감영 관군의 중군이 되어 농민군을 토벌하는데 참여한다. 1895년 또는 1897년에 고향 홍성을 떠나 인제군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수년 간 불교서적을 읽었다고 한다. 방랑 생활. 건양 1년인 1896년에 그는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후일 그는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 자신의 술회에 간략하에 언급하기를 세상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오세암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머슴으로 일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출가의 원인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고향 홍성군 홍주에서도 동학 농민 운동과 의병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미루어 역사적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동학 운동이 실패한 뒤 한동안 오세암에 은신해 있다가 다시 고향 홍성군으로 되돌아왔다.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그는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 관심(敎學的關心)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하였다. 1896년 하산하여 더 큰 세상을 배우고자 시베리아행을 결심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죽을 고비를 겨우 모면하고 1897년에 귀향하였으나 거처가 없던 그는 1901년 처가에서 2년간 은신하다가 가출한 후 나중에 다시 재출가를 한다. 대한제국기 활동. 출가와 문학. 1905년 을사조약 직후 홍성에서는 제2차 의병운동이 일어났고 이때 아버지 한응준은 의병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해 무작정 가출하여 재입산, 백담사에 가서 김연곡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출가, 김연곡에게 득도한 다음 전영제에게 계(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계명은 봉완(奉玩)이며 법호는 만해(萬海 또는 卍海)라 하였다. 이후 수년 간 불교활동에 전념했다. 이즈음에 불교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량치차오의〈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등을 접하면서 근대사상을 다양하게 수용하였다. 1908년 조선 전국 사찰 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의 설립에 참여한 뒤 1909년 5월부터 6개월간 원종종무원 시찰단의 한 사람으로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신문명을 시찰하고 견문을 넓혔다. 이러한 다양한 경험이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을 여행하던 중에 3·1독립운동 때의 동지가 된 최린 등을 만나 교류하였다. 1909년 12월에 귀국한 뒤 1910년 이후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작업에 주력하였다. 1909년 초에는 조선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1910년 10월에 한일 합방 조약이 체결되자 만주 동북삼성(東北三省)으로 갔다. 이곳에서 만주지방 여러 곳에 있던 우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였다.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 몽골, 시베리아 등을 방문하고 귀국하였당. 승려들의 결혼 자유화 주장. 1909년 초부터 그는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집필하여 1910년 초에 탈고하였다. 동시에 그는 백담사에서 거의 독학하다시피하며 대장경을 암송하고 한문과 인도어로 된 불교 경전들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다. 한편 1909년부터 그는 승려의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만해는 1910년 5월 승려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허락해 달라는 문건을 청원서 형식으로 대한제국 중추원과 한국통감부에 진정서로 올렸다. 승려에게 결혼을 금지하라고 부처님이 가르친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대중의 결혼생활, 가장이라는 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중생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승려의 결혼을 허가해 달라는 그의 주장은 그대로 묵살당한다. 한일합방 직후인 1910년 11월에 한용운은 다시 조선총독부에 승려의 결혼을 허가해 줄 것을 청하는 탄원 올렸으나 두 번째 탄원 역시 묵살당하고 만다. 한일합방 직후 총독부가 조선인을 차별대우하고 내지인을 우대하자 그는 불만을 드러냈다. 만해의 상좌였던 춘성스님에 의하면 만해는 평소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차별 정책에 대해 "왜놈의 머슴살이 같으니라구!"라며 불만을 토로하였다 한다. 일제강점기 활동. 불교 사회 혁신 운동. 1910년 12월 그는 일본이 주장하는 한일불교동맹을 반대철폐하고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등의 지사(志士)들을 만나서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 1911년 송광사에서 박한영·진진응·김종래 등과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조동종(曹洞宗)과 한국불교의 통합을 꾀한 이회광 등의 친일적인 불교행위를 규탄·저지했다. 한편 1913년 회동서간에서 다시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발행하였다. 1913년 불교학원과 명진학교의 교사로 초대되어 교편을 잡았다. 1912년경 통도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을 열람하고서 1914년 범어사에서《불교대전 (佛敎大典)》을 간행하였다.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계의 각성과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3년 석전 박한영 등과 함께 조선 불교 종무원을 창설하는데 참여했고 그는 사찰을 돌며 강의와 담론을 주도하였다. 1915년 청나라 승려 내림(來琳)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정선강의 《채근담》 국한문 혼용체 주해본을 저술하였다. 1917년 8월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했다. 그해 12월 어느날 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불교포교 대중화와 선교진흥론. 1914년에는 불교 포교의 보편화 대중화를 선언하고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을 결성하였다. 조선불교청년동맹의 강령을 손수 지었는데 이를 보면, 첫째로 정교분리(政敎分離), 둘째로는 여러 불교 종단의 통일 또는 연합, 셋째 불교와 사찰의 사회적 진출의 필요 등을 제시하였다. 이는 대중불교의 확산을 위하여 그 출발점을 청년 운동으로 삼아야 한다는 그의 실천행이었다. 그는 불교 포교가 보편화되려면 일단 청년들에게 침투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선교 활동, 동학의 포교 확산, 사이비 종교 등의 확산에 긴장한 그는 불교 역시 대중에게 침투하여야 함을 역설하고 불교가 중생의 곁에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으로 청소년과 청년층을 공략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불교의 보편화 운동의 실천을 위하여 '승려에서 대중에로', '산간에서 길가로' 등을 내걸었다. 또한 불교 포교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교단, 종단간의 갈등을 줄이고 협력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이는 선교진흥론(禪敎振興論)으로 발표되었다. 그에 의하면 불교의 진흥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건은 수행 이상을 확립하는 일이라 하였다. 이에 한용운은 지금까지 조선의 불교는 오교구산과 선교양종이니 해서, 마치 교의(敎義)와 종지(宗旨)가 다른 것처럼 잘못 인식되어 왔다. 선과 교의 본질은 하나이다. 왜냐하면, 선이란 불교의 마음이며, 교란 불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양자는 서로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며, 양자의 이론적 합일과 연대의 실천이 불교 진흥, 포교 확산의 관건이라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한용운은 선원(禪院)이나 강원(講院)의 지도 이념이나 이론, 실수(實修) 등에 있어 외전(外典)도 첨가해야 한다, 그리고 속된 것을 전적으로 배격하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선교일치를 주장해온 조선 불교의 일승정신(一乘精神)이 새로운 시대의 좌표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해외포교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서 미국, 중국 등지에 해외법당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조선보다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곳이고 미국인들은 대다수가 개신교나 천주교 신자처럼 인식하던 당대의 승려들과 불자들은 그의 해외 포교 주장을 실현 불가능한 이상으로 취급했다. 불교 경전의 한글화. 만해는 1910년부터 대장경과 화엄경 등을 비롯한 불교 경전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1930년대 이후에도 그는 불교 경전의 한글화를 주장했다. 경전의 내용이 한문이나 산스크리트어로서 일반 중생이 읽기에는 너무 힘들다, 어렵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대장경의 한글 번역이다. 현대포교의 요체는 문서에 의한 홍포였다. 그는 아무리 좋은 말씀도 이해를 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라 주장하였다. 불교 경전의 대부분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일반인이나 문맹률이 높던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읽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방대한 대장경을 쉽게 옮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불교의 교리와 활동, 고승 등에 대한 내용을 한글로 표현했으며 《불교대전》에는 대장경 등의 내용을 한글로 해석하였는데 이는 바로 그와 같은 시도의 결정이다. 대장경의 요지를 발췌하여 대의를 옮겨 적은 불교대전은 20세기 한국 불교이론서와 《불교성전》들의 효시가 되었다. 그밖에도 그는 불교학 진흥과 포교의 활성화를 위하여서는 각종 금석문(金石文)이나 사장된 자료들이 일반에 소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잡지 발행. 1918년 11월 제자 춘성 등과 함께 월간 불교잡지《유심 (惟心)》을 창간했으며 이 잡지를 통해 불교 논설만이 아니라 계몽적 성격을 띤 글을 발표했고, 또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심 (心)〉을 발표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당시 조선불교의 침체와 낙후성과 은둔주의를 대담하고 통렬하게 분석과 비판을 한 저서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하여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월간 유심지에서 그는 시 '심 (心)'과 수필 고학생, 남모르는 아이들을 발표하는 등 불교의 보편화와 친숙화를 꾀한다. 불교의 홍보, 포교와 함께 계몽, 자각, 자유정신,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논설들을 다수 실은 월간지 유심은 뒷날 그가 관계한《불교》잡지와 함께 가장 괄목할만한 문화사업의 하나가 되었다. 3.1 만세 운동과 투옥. 1918년 12월에 발표한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동하여 1919년 1월부터는 전국적인 만세 운동 준비에 참여하고, 백용성 등과 함께 불교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손병희 등 천도교 지도자들과 이상재 등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과 회합하였다. 그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과 의견충돌을 하였다. 내용이 좀더 과감하고 현실적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최남선 등은 만해의 주장이 급진적이고 과격하다며 반대했고 결국 만해가 제시한 조건들 중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제3조 '최후의 일인까지 쾌히 우리의 의사를 발표하자' 만이 수용, 독립선언서에 수록되었다. 19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일설에는 용성 선사의 도장도 그가 찍었다 한다. 경성 탑골공원에서 독립 선언서 낭독과 만세 운동에 가담했다가 피신하지 못하고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었다. 민족대표자들은 평화 시위를 기획하였는데 시위는 격화되었고, 민족대표자들은 자수를 결심한다. 한편 그는 자수하기 직전의 민족대표자들 중 체포된 뒤 고문당할 것을 두려워하며 걱정하는 민족대표자들을 보고 화장실에서 인분을 퍼다가 머리에 끼얹었다 한다. 이종일의 회고에 의하면 "체포되기 전 만해는 일제의 고문 및 위협에 벌벌 떠는 나약한 민족대표들에게 인분을 퍼다가 머리에 퍼부었다."고 한다. 그는 피신하지 못하고 만세운동을 진행하던 중 탑골공원에서 총독부 경무국 순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어 피신한 다른 민족대표자들이 자수함으로써 바로 서대문형무소로 넘겨지고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수감과 석방. 한편 체포된 만해는 동대문 시장에 투옥되어 복역하며 재판을 받았다. 이때 옥중에서 변호사는 물론 사식과 보석을 거부할 것을 결의하고 수감생활을 한다. 그리고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를 집필하다가 발각되어 결국 원본을 형사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만해는 한편으로 '조선독립의 서'를 일본인 서울지방법원 검사에게 제출하기 이전에 일부를 휴지에 작은 글씨로 옮겨 적었다. 그리고 그것을 접어 형무소 밖으로 나가는 의복의 갈피에 집어넣었다. 이렇게 외부로 나온 그 선언서는 상해까지 전달되었다. 인간의 권리와 자유와 평등에 대한 길을 가로막는 어떠한 형태의 무력, 군사력, 압제 정치는 결국 스스로의 덫에 걸려 스스로 패망하게 되리라는 내용이었다. 옥중에서 작성한 '조선독립의 서'는 종이를 노끈처럼 말아 유일하게 그의 옥바라지를 하던 춘성 스님을 통해 상하이로 보내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1919년 11월 4일의 기사 부록에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라는 제목으로 발표, 보도되었다. 그가 출옥하자 많은 면회객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가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면회객들은 이상하게 여겼다. 이에 만해는 자신을 마중하러 나온 인사들에게 "너희들은 이런 출옥의 인사를 할 줄은 알고, 인사를 받을 줄은 몰랐더냐?" 하고 대성질타하였다. 1922년 5월 출옥 후에는 언론에 칼럼을 발표하는 동시에 1922년부터 1923년까지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의 민족운동에도 참여했다. 이 기간 중 그는 김성수, 조만식, 안재홍, 이광수, 방응모 등을 만나 인맥을 쌓기도 했다. 글 못지않게 연설가로서도 남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던 그는 1922년 5월 전조선학생대회 주최로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강연회가 개최되자 3인의 종교 지도자의 한 사람이자 연사의 1인으로 초빙되었다. 대회가 열린 날 두 번째 연사로 나선 만해가 강연하자 청중이 극도로 열광하여 결국 다음 사람이 강연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1922년 9월 잡지《개벽》에 옥중시 '무궁화 심으라'를 발표하였다. 한편 그의 속가 형 한윤경은 150섬 이상을 수확하던 홍성군의 대지주였지만 그는 형의 땅을 팔아서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 한윤경의 아들이자 조카인 한창국은 일찍 죽고 종손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한다. 사회 단체 활동과 님의 침묵. 1922년 출옥 후에도 일본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의 열변을 토하였다. 1920년대에 부인이 있는 대처승이 속인들에게 사이비 중이라고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중에게도 결혼할 자격을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1924년부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논설위원을 겸하며 계몽, 사회 참여를 촉구,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칼럼을 송고하였다. 1923년 1월 동아일보에 논설 '조선 급(及) 조선인의 번민(煩悶)'을 발표한다. 1924년 조선불교청년회 회장에 취임했고, 다시 조선불교청년회 총재로 선임되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다. 님의 침묵에서 그는 인위적으로 한글 표준어를 쓰지 않고 충청도 방언과 토속어가 세련되지 않은 표현으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향토적 정감의 방언 및 토속어 애용과 서민적인 시어의 활용은 님의 침묵에 민중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925년부터 백담사에서 집필하여 1926년 경성 안동서관에서 발행한《님의 침묵》은 당시 자유주의적, 남녀간의 연애를 위주로 하던 한국문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현실과 이상,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요구되는 주체적 자세에 대해 노래했으며, 더욱이 그것을 풍부한 시적 이미지로 아름답게 형상화해 수준 높은 민족문학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독립, 혹은 자연을 '님'으로 표현하여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부처로도 해석되고 이별한 연인으로도 해석되는 화법을 구사하여 총독부 학무국의 검열 탄압을 피하였다. 신간회 창설에 참여. 1927년 2월에 이인, 김병로, 허헌, 조병옥, 허정숙 등과 함께 종교, 사회단체를 망라한 사회단체 신간회의 결성에 불교계 대표자의 한사람 겸 경성부 서부 지역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적극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신간회 조직을 결성하는 주도적으로 참여한 그는 1928년 다시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의 한사람에 선출되고 신간회 경성지회 회장(京城支會會長)에 피선되어 허정숙 등과 신간회 경성지회에서 활동하였다. 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학생 시위를 보고 그것을 민족적·민중적 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조선총독부 밀정에게 발각, 총독부 경무국에 의해 무산되었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朝鮮佛敎靑年會)를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 이후 많은 논문과 논설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 향상, 불자에게 생계를 의존하지 않기, 기강확립, 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 또한 주량 조절만 가능하다면 승려들도 음주를 하게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1930년 잡지《불교(佛敎)》의 필진이 되었다. 1931년 6월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전까지는 권상로(權相老)가 맡아오던 이 잡지를 인수하여 불교의 홍포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같은 해 김법린·최범술·만공·김상호 등이 조직한 청년법려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의 당수로 추대되었다. 1931년 6월부터 2년 남짓 동안은 친일파로 전락한 권상로에게 인수한 《불교》를 발간하는 일에 전념한다. 그러나 경영난으로 1933년 9월 결국 권상로에게 재인수하고 만다. 반일 강연 활동. 그는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한편 한 강연에서 그는 조선총독부나 일본 불교에 아첨하는 일부 승려들을 질타하기로 했다. 그간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자 아무도 그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똥이올시다. 똥! 그런데 그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라고 하자 역시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가난한 불자들의 시신을 염습해본 적이 있는 한 사람은 시체라고 하였다. "내 경험으로는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송장 썩는 것이올시다. 똥 옆에서는 식음을 할 수 있어도 송장 썩는 옆에서는 차마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일부는 좌석을 이탈하려 하였으나 좌중에 압도당해 움직일 수 없었다. 이어 만해는 "시체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일까?"하고 물었다. 아무도 답을 하지 않자 한용운은 굳은 표정으로 강연대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그건! 바로 여기 앉아 있는 31본산 주지 네놈들이다!"라고 일갈하고는 즉시 단상에서 내려와 퇴장해버렸다. 반일 혹은 일본 불교에의 흡수를 반대하는 그를 두고 불령선인이라는 지적이 계속되었고 그는 결국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감시하에 놓이게 된다. 한편 총독부로부터 생계비와 연구비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전향한 육당 최남선이 탑골공원 근처에서 마주쳤을 때 "오랜만이오. 만해."라고 먼저 인사하자 그는 "당신이 누구요?"며 냉정하게 답하였다. 최남선이 "나는 육당이오. 나를 몰라보겠소?"라고 하자 만해는 "뭐, 육당? 그 사람은 내가 장례 지낸 지 오랜 고인이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최남선이 전향을 선언하던 날 한용운은 그의 제사상을 마련하고 제사를 지냈다는 소문도 있었다. 생애 후반. 소설 집필 활동. 1931년 53세의 나이에 주변 친구들의 권유로 21살 연하의 유숙원과 재혼하였다. 유숙원은 결혼하기 전까지 단성사 옆에 위치했던 진성당병원의 간호사로 일하였다. 다음 해에 딸 영숙이 태어나고 1933년에 심우장을 지으면서 여생을 보내며 작품활동을 지속하였다. 1935년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흑풍》에서는 검열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배경을 청나라를 무대로 하고, 억압에 대한 투쟁정신을 묘사하여 조선총독부에 대한 저항성을 은근히 보여주고 여성해방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삽입하여 반봉건 정신 및 여성도 인격체라는 견해를 설파하였다. 1936년 단재 신채호의 시신이 비밀리에 입국한 것을 접하고 방응모와 함께 신채호의 묘비건립과 정약용 서세100년기념회 개최에 참여했다. 1936년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 後悔》를 연재하였다. 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은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얻기 위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도 소설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더 큰 것으로 이해된다.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 서대문형무소에 재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37년에 독립군 전쟁 중 사망한 김동삼의 시신이 조선으로 도착하였다. 아무도 그의 시신을 거두거나 수습하려 하지 않았는데 한용운이 홀로 찾아가 통곡하며 시신을 수습하였다. 태평양 전쟁 전후. 석방 후 불교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였고 1938년에는 장편 《박명(薄命)》을 발표하였다. 1938년부터는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에 반대하여 학도병 거부 운동을 벌였다. 작품으로는 여러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님의 침묵》을 비롯하여《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불교대전》,《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등이 있다. 그는〈님의 침묵〉 외에도《신인 문학》과《삼천리》에 시 '꿈과 근심', '실제 (實際)',《조광》에 수필 '최후의 5분간',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 박명, 조선중앙일보에 소설 후회와 중편소설 죽음 등을 발표하였다. 중일전쟁 이후로도 그는 계속 징용이나 보국대 또는 일본군을 찬양하는 글을 쓰지 않으며 강연도 하지 않았다. 또한 강연 협조 등도 거부하였다. 또한 1937년부터 강요된 신사 참배와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고, 조선총독부의 일본식 호적에 이름조차 올리지 않았다. 만년에는 경성부 성북동의 심우장을 친히 지어 거처했는데, 심우장은 후일 서울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1939년 경상남도 사천군 다솔사(多率寺)로 내려가 회갑을 맞으면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자축연을 가졌다. 다솔사는 당시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본거지였다. 사망. 1940년 5월부터는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하였고 1943년에는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말년에는 방응모, 정인보, 안재홍, 홍명희, 김성수, 만공 등과 교류하며 그들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어렵게 생활하였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다가,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성북동 집인 심우장에서 냉방으로 생활하였다.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만해의 생계는 그의 친구인 안재홍, 방응모, 김성수, 송진우, 조만식, 최남선, 이광수, 윤치호 등이 십시일반으로 부담해주었다. 말년에 중풍과 영양실조로 고생하였지만 병원 진료를 거부하다가 1944년 6월 28일 조선총독부의 특별 훈련으로 공습경보가 발령되었을 때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후 계속 혼수상태로 있다가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승랍 49세, 세수 66세로 열반에 들었다. 그가 사망하였던 1944년은 일본 제국이 패망하기 1년 전이자 광복을 1년 앞두고 있던 때라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의 독립은 끝내 생전에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가 사망한지 1년 후인 1945년 8월 15일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 제국이 패망하게 되면서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작품성. 시와 작품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였으며 조선의 독립 또는 자연을 부처님에 빗대어 불교적인 '님'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조선총독부나 일제 정치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하여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검열을 교묘하게 피하였다. 여기에서의 님은 보는 관점에 따라 조선의 독립, 자연, 부처님 혹은 이별한 연인 등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어법을 구사하였다. 그는 대표작 님의 침묵을 비롯한 시집, 작품집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님'은 연인·조국·부처 등 다의적인 의미를 지니며 그에 따라 '님의 침묵'이라는 표현은 당시의 민족적 상황을 은유적으로 상징하였다. 또한 세속적인 정감의 진솔성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적 설득력과 함께 세속적인 사랑을 표출하면서도 세속사의 진부함에 떨어지지 않으며 목소리 높여 민중정신을 강조하지도 않는다는 작품평도 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시적 주체인 '나'가 님과 이별하여 님이 부재하고 침묵하는 시대로 규정하면서도, 님은 이 자리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나'는 진정으로 님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는 변증법적인 진리 또는 부처에 대한 믿음, 이별한 연인에 대한 애정을 확신, 재다짐하는 것을 드러내고, 새로이 '나'는 이 자리에는 계시지 않는 님 또는 돌아올 님과 다시 합일될 수 있다는 뜻을 노래한다. 또한 내가 님과 새로이 만나기 위해서 나는 님이 존재하지 않지만 님에 대한 의리와 절개를 지키고 님에 대한 철저한 복종이 요구되는데, 그 절개와 의리, 복종을 통해서 비로소 '님'에 대한 신의도 지키면서 한편으로 '나'는 자유로워진다는 '복종과 자유의 변증법'을 노래한 것은 역사의 필연성의 인식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출한다. 그는 식민지하에 있는 조국의 운명과 독립의 필연성 또는 오지 아니한 극락세계와 다시 만나게 되는 그 날, 그리고 그 날을 위한 실천, 변함없는 믿음을 통해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진리를 작품들을 통해 형상화, 승화시켰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그의 시는 오언절구나 칠언절구, 3.4조 등 당시 조선의 시조, 시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산문시의 전형이 되었다. 은유와 역설의 자유로운 구사를 보여주며, 정형적인 틀을 완전히 벗어난 산문적 개방 속에서도 내재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근대 자유시의 완성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사상과 신념. 그는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불경의 사상을 인용하여 이를 현대적 자유사상에 연관시켜 생각하였다. 그는 이것이 만인의 평등사상을 설파하였다. 불교 사회혁신주의와 보편화. 만해의 불교 사상은 흔히 불교사회혁신주의로 요약된다. 그는 조선의 민중이 역사 이래로 지배자들로부터 억압과 수탈을 당해왔음을 인식하고 불교가 민중을 구제하거나, 아니면 현실에서 민중들을 위로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였다. 저서인 《조선불교유신론》에서 그는 불교혁신론을 주장, 산사로 들어가 고결한 이상만을 추구하는 점을 비판하고, 한국불교의 침체와 낙후성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는 불교사상이 자유주의, 평등주의, 구세주의, 진보적 입장에 서야 함을 역설했다. 그는 어떠한 진리와 진실을 대중에게 강요하지 않는 불교가 미래의 인류문명에 가장 적합한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에서는 고결한 이상만을 추구하거나 산에 들어가 낙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그는 사원운영의 혁신을 주장하는 내용에서 불교의 대중화·민중화라는 기본사상이 도출되어 나온다. 그는 불교의 민중화를 위해 불교 교리와 제도, 불교 재산을 일부 고위층 승려들, 간부 승려들이나 종단이 독식하지 말고 민중화, 사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청년불교를 제창하고 젊은이들의 불교 포교 및 불교 부흥을 위해 노력했고 《불교대전》 등 불교경전의 한글 번역작업에 착수했으며, 금강경, 화엄경 등 불교 서적의 한글 번역과 불교 서적의 해석서, 해석 칼럼과 논문 등을 발표하였다. 한편으로 《불교교육 불교한문독본》, 《정선강의 채근담 (精選講義菜根譚)》의 편찬에 참여하고 불교잡지인 《유심》, 《불교》 등의 잡지 간행에 힘쓰며 불교학교와 강연회를 주최하는 등 불교의 대중화, 보편화를 위해 노력했다. 대처승 운동. 또한 그는 생활불교가 되려면 독신이 아니라 생산적인 부부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승려는 결혼하면 안된다는 것이 편견이라 주장하고, 승려의 취처(聚妻)를 허락할 것 등을 주장했다. 대중의 결혼생활, 가장이라는 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대중의 입장을 이해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승려의 결혼이 불교 교리에 어긋나지 않음을 주장하였고, 원효 등 대처승의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결혼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는 윤리적·생물학적 여러 논거를 제시하였다. 한편 그의 대처승 허용 운동, 승려의 결혼 허가 주장에 대해 불교계에서는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해방 직후에도 조계종단에서는 만해가 승려의 결혼 자유화를 주장하고, 그 자신도 그것을 실천하였기에 더욱 거북스러운 존재였다. 다만 일부 불교개혁을 추구하였던 운동권 승려의 그룹에서, 불교청년운동을 하는 재가불교청년단체에서 만해를 찾았을 뿐이다. 불교 사회 혁신 주의와 도시화. 사원운영에 있어서 그는 염불당(念佛堂)의 폐지와 도시에 사찰 건립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근본교리에 비추어볼 때 우주에 편재(遍在)한 법신불(法身佛)이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 결코 특정한 신앙대상이 따로 없는 것이라 보았다. 그는 특히 법당은 산사라는 개념에 반대하였다. 사찰은 사람이 사는 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이 한용운의 지적이었다. 기존의 염불당 등과 교리에 얽매이는 허례적인 의식들을 타파하고 산중에 있는 절이 도시로 나올 것, 도시로 나와서 여러 국민들과 직접 만나고 직접 면담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승려들도 노동을 할 것을 주장했다. 최소한 사찰 주변에 땅을 마련하여 자기가 먹을 쌀과 곡식은 스스로 만들며 불자들의 시주에만 의존하는 그릇된 사상을 버리라고 촉구했다. 그는 승려들도 사취(詐取)와 동냥질을 그만두고 스스로 생산활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불교사상의 측면에서 역사를 끊임없는 변전의 운동으로 파악하는 중관론(中觀論)에 기초해 소승적인 소극주의나 현세부정적인 불교를 비판하고 중생의 삶에 참여하고 뛰어들라고 촉구했다. 한용운은 곧 중생의 삶과 일상에서 정토를 구하고, 정토로 인도하자고 역설하였다. 불교조직 혁신론. 일제강점기 후반 조선총독부의 조선사찰령 발표에 반대하였다. 총독부는 사찰들이 무분별하게 운영된다는 것을 핑계로 조선사찰령의 발표 이후 거의 모든 사원의 운영권이 총독부의 직속 관리하에 들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통일종단의 조직, 규약, 재정확보 등을 일원화시켜 조선총독부의 관리 감독과 간섭 의도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현행의 본말사제도(本末寺制度)를 그냥 두되 중앙에 통제기구를 신설하자는 것이었다. 김법린(金法麟) 등을 중심으로 하는 혁신불교파가 세운 불교총무원에서는 이를 그대로 수용하였다. 비록, 당시 승려들의 개혁 의지가 뒷받침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반대와 비방에 시달리렸지만 이는 불교행정조직의 좌표를 제시한 것이었다. 조선불교 독립 운동. 그는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에 편입되는 것을 반대하고 저항하였다. 1910년말 원종(圓宗) 종무원 이회광이 불교확장이란 미명하에 일본에 가서 조선의 원종이 일본 조동종과 완전히 연합, 동맹할 것 등을 협약하고 오자, 1911년 한용운은 석전 박한영, 백용성 등과 이회광 규탄 및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해 이회광을 종문난적(宗門亂賊)으로 규정하면서 원종에 대응되는 임제종(臨濟宗)을 창립한 것은 그의 대표적인 불교자주화운동이다. 임제종 창립을 통해 그전까지는 다소 불분명했던 그의 반제국주의적 사상이 뚜렷해진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불교자주화운동은 1931년 결성된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이면단체였던 만당활동 등으로 이어졌다. 그는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긴급한 사명으로서 정교분립(政敎分立)과 불교통일의 촉진, 불교의 사회적 진출을 강조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정교분립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는 종교를 정부 혹은 체제의 하수인으로 삼으려는 조선총독부 학무국 정책에 반대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가족 관계. 자녀는 첫 번째 아내 전정숙 사이에서 얻은 아들 한보국과 두 번째 아내 유숙원 사이에서 얻은 딸 한영숙이 있다. 한보국은 고향인 홍성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한국 전쟁 때 월북하였다.14세에 조혼 풍습에 따라 결혼한 전정숙과는 이혼하고 후에 승려 생활 도중인 1931년 53세에 21세 연하의 유숙원과 결혼하여 대처승이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월북한 한보국은 슬하에 2남 5녀를 두었으나 아들 1명은 어려서 요절하였다. 한보국의 다른 부인은 1960년대 무렵 인천에 거주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평가와 비판. 민족독립, 불교유신, 자유문학의 3대 사상가로서 절의의 행적을 남겼다. 강렬한 현실비판 등 현세에서의 실천을 강조한 그의 혁명사상을 가졌다는 평가가 있다. 그가 불교이념에 의한 자유, 평등의 국가사회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한편 자유민주주의, 비폭력 무저항주의, 민족자결주의 등에 입각한 소극적, 관념적인 차원에 머물렀다는 시각도 있다.만해 한용운은 대단한 독립운동가다. 스님이면서 독립운동에도 힘썼다. 또 독립 운동을 할 때 같이 했던 동지들이 창씨개명 등 일본이 억지로 권유한 것을 하기라도 하면 차갑게 외면했다.
2593
36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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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식
중식은 여러 뜻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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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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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디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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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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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단위
2597
43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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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 단위
2600
414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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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로그램
킬로그램(, )은 SI 단위계에서 사용하는 질량의 기본 단위로 기호는 kg이다. 국제 단위계의 기본단위 가운데 질량의 단위인 킬로그램만이 역사적인 이유로 그 명칭이 접두어를 포함하고 있다. 질량 단위의 십진 배수 및 분수에 대한 명칭 및 기호는 단위 명칭 “그램”에 접두어 명칭을 붙이고 단위기호 “g”에 접두어 기호를 붙여서 사용한다. 국제 표준원기에 의한 정의. 킬로그램은 다음과 같이 국제 킬로그램 원기로 정의되는 단위이다. 백금-이리듐으로 만들어진 국제 킬로그램 원기는 1889년 제1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 지정한 상태 하에 국제도량형국(BIPM)에 보관되어 있는데 당시 국제도량형총회는 국제원기를 인가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질량의 크기를 결정하는 표준물체로 국제도량형총회에서 지정된 킬로그램원기(백금 90%, 이리듐 10%)가 사용되며, 이 원기의 질량을 1kg으로 정하여 질량을 비교하는 질량의 표준단위로 사용한다. 새로운 표준 정의에 관한 논의. 종전 킬로그램의 정의는 1901년 3차 국제도량형총회(CGPM)가 정한 "kg은 질량의 기본 단위이며 그 질량은 국제 킬로그램원기의 질량과 같다"는 정의에 따른다. 이에 따라 프랑스 파리 근교의 세브르 국제도량형국(BIPM) 금고에는 가로·세로 각 3.9cm 크기의 1kg 원기 원통이 보관되어 있다. 종전에는 7개의 SI 기본 단위 가운데 시간(s)·길이(m)·전류(A)·온도(K)·몰(mol)·광도(cd) 등 6개 단위는 모두 물리적 원리를 바탕으로 정의되어 있는데 반하여, 질량(kg)만이 유일하게 인공적으로 만든 원기를 표준으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인공적으로 만든 원기를 표준으로 삼을 경우 인공 원기의 물리적 특성이 변할 수 있다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1kg의 기준이 바뀌면 질량과 관련된 물리량의 정의도 덩달아 바뀌게 된다. 실제로 국제도량형국(BIPM)은 2007년 "kg 원기의 질량이 50㎍(마이크로그램) 줄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과학자들이 kg의 정의를 재정립하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인공적으로 만든 인공 원기를 대체하여 kg 표준을 재정립하기 위해 국가간에도 '1kg 표준 정의'를 두고 치열한 대립이 발생하였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다음의 두 가지 방식으로 kg의 정의를 재정립하려는 국제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첫째, 1kg짜리 실리콘 구를 만든 뒤 그 안에 있는 원자 수를 세어 이를 질량으로 환산하는 일명 '아보가드로 프로젝트(Avogadro project)' 방식과 둘째, 플랑크 상수를 사용하여 전기력을 중력으로 환산하는 소위 '와트 저울(Watt balance)' 방식으로 kg을 재정의하는 방안 등이 논의되었다. 한국은 미국, 프랑스 등이 연구하고 있는 '와트 저울' 방식을 지지하였다. 킬로그램의 새로운 정의. 2011년 10월 21일,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열린 제24차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는 120년 이상 킬로그램의 정의로 사용된 '국제 킬로그램 원기(原器)'를 폐지하고, 새로운 정의를 도입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2018년 11월 16일 제26차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 아래와 같이 재정의 되었다. 새로운 정의는 세계 측정의 날인 2019년 5월 20일부터 발효되었다. 새 정의는 질량-에너지 등가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물질적인 표준 원기 없이 kg의 정의가 가능하다. SI 배수. SI 접두어는 두 개 이상이 연속해서 붙여질 수 없기 때문에, 접두어 사용시에는 이미 접두어가 붙은 단어인 ‘킬로그램’ 대신 ‘그램’이 사용된다. 예를 들어, 킬로그램의 백만분의 일은 1 µkg (마이크로킬로그램)이 아닌 1 mg (밀리그램)이다.
2601
22169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601
뉴턴
뉴턴(newton)은 다음 뜻으로 쓰인다.
2602
33300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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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뉴턴
아이작 뉴턴 경(, , 그레고리력 1643년 1월 4일~1727년 3월 31일, 율리우스력 1642년 12월 25일~1726년/1727년 3월 20일)은 잉글랜드의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이다. 1687년 발간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 "Principia")는 고전역학과 만유인력의 기본 바탕을 제시하며, 과학사에서 영향력 있는 저서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 저서에서 뉴턴은 다음 3세기 동안 우주의 과학적 관점에서 절대적이었던 만유인력과 3가지의 뉴턴 운동 법칙을 저술했다. 뉴턴은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과 그의 중력 이론 사이의 지속성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그의 이론이 어떻게 지구와 천체 위의 물체들의 운동을 증명하는지 보여줌으로써, 태양중심설에 대한 마지막 의문점들을 제거하고 과학 혁명을 발달시켰다. 뉴턴은 또한 첫 번째 실용적 반사 망원경을 제작했고, 프리즘이 흰 빛을 가시 광선으로 분해시키는 스펙트럼을 관찰한 결과를 바탕으로 빛에 대한 이론도 발달시켰다. 또한, 그는 실험에 의거한 뉴턴의 냉각 법칙을 발명하고 음속에 대해서 연구했으며, 뉴턴 유체의 개념을 고안하였다. 수학적 업적으로 뉴턴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 함께 미적분학에 기여했다. 또한, 그는 일반화된 이항정리를 증명하고, 소위 뉴턴의 방법이라 불리는 미분 가능한 연속 함수 에 대해 방정식 formula_1에서 미분계수와 접선을 반복해서 구하여 근에 근사하게끔 하는 방법을 발견하고, 거듭제곱 급수의 연구에 기여했다. 갈릴레이가 자연현상이 수학적으로 잘 표현된다는 점을 보여주었고, 뉴턴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제목으로 그가 만든 역학을 출판하였다. 사실상 물리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로 모든 물리학 이론에서 수학적 모델링이 필수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또한 17세기에 과학적 방법이 등장하고 과학이 시작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뉴턴은 2005년 영국 왕립학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아이작 뉴턴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중에서 과학사에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인류에게 더 큰 공로를 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 설문 조사에서 2가지 모두에서 우세를 보임으로써, 여전히 과학자들에게 영향력이 있음이 입증했다. 뉴턴은 전통적인 기독교 성직자는 아니었지만, 신앙심 또한 깊었다. 그는 그를 오늘날까지 기억되도록 만든 자연과학보다도 성서 해석이나 오컬트 연구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클 H. 하트(Michael H. Hart)가 저술한 "The 100"에서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삼위일체설을 부정하였고 유일신인 창조주를 믿었다. 생애. 어린 시절. 아이작 뉴턴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행하였다. 아이작 뉴턴은 율리우스력 1642년 12월 25일 성탄절에(그레고리력 1643년 1월 4일), 잉글랜드 동부 링컨셔주 울즈소프에서 농부(yeoman)인 아이작 뉴턴 시니어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이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조산아였던 그는 몸집이 매우 작았다. 뉴턴이 3살이었을 때, 그의 어머니 한나 스미스가 재혼하면서 그는 외가에 맡겨지게 되었다. 뉴턴은 그의 양아버지(바나바스 스미스는 목사)에게 적대감을 보였고, 이런 사실은 뉴턴이 쓴 "19살까지의 죄 목록"에도 적혀 있다. 뉴턴의 어머니는 아이를 3명 더 낳았으나 8년 후, 양아버지가 죽자 돌아왔다. 대학 시절. 1661년 6월 뉴턴은 선생님의 제안으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그 시절 대학의 가르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었는데, 뉴턴은 이를 르네 데카르트와 같은 현대 철학자의 철학으로 바꾸고, 천문학 역시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같은 천문학자의 이론으로 대신하였다. 1665년 그는 이항정리를 일반화하였다. 1665년 영국에서는 흑사병이 대대적으로 유행하게 되어, 이 기간동안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폐교하였다. 이 시기에 뉴턴은 2년동안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그의 위대한 업적의 대부분은 이 시기, 즉 1665~1666년에 싹튼 것으로, 유명한 사과의 일화도 이 무렵의 일이다. 2년간의 한적한 시골살이는 과학과 철학에 대한 사색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며, 이 시기에 수학, 광학, 천문학, 물리학의 중요한 발견들을 해냈다. 그래서 뉴턴 스스로도 2년간의 휴학 기간에 대해 "발견에 있어서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평가하였다. 1667년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다시 문을 열자, 뉴턴은 다시 케임브리지 대학교로 돌아와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이듬해에는 반사 망원경을 만들었다. 이 공로로 뉴턴은 1672년 왕립학회 회원으로 뽑혔다. 이보다 앞선 1669년에는 뉴턴의 지도 교수였던 아이작 배로 교수의 뒤를 이어서, 케임브리지 대학교 수학과 교수가 된 후, 미적분학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때 뉴턴이 했던 기여들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의 우선권 문제로 오랫동안 논쟁이 계속되기도 하였다. 그는 새 망원경을 만들어 왕립 학회에 제출함으로써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왕립 학회는 그것에 감명받아 1672년에 뉴턴을 회원으로 선출하였다. 1672년에 획기적인 발견을 했다. 캄캄한 방 안에서 가느다란 빛줄기가 프리즘을 통과하면 빨간색부터 보라색에 이르는 무지개 색과 똑같았다. 이렇게 갈라진 전체색의 빛을 렌즈에 통과시키면 다시 백색광으로 변했다. 뉴턴은 색은 빛의 기본 요소이며, 백색광은 스펙트럼상의 모든 색이 합쳐진 결과라고 결론 내렸다. 또, 스펙트럼상의 모든 색의 빛은 각각 굴절 정도가 다르며 고유하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1675년 박막의 간섭 현상을 발견하였는데, 여기서도 그의 "빛의 입자설"과 네덜란드의 크리스티안 하위헌스가 발표한 "빛의 파동설"의 엇갈린 주장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논쟁이 계속되었다.(단, 오히려 라이프니츠와 뉴턴이 서로의 수학적인 업적들을 인정하고 존경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번외로, 뉴턴은 실험한답시고 자신의 눈을 찔렀었다 (몇달 앓긴 했으나 나아졌다). 만유인력의 구상은 오래 전부터 싹이 터 있었으나, 요하네스 케플러의 행성 운동에 관한 3가지 법칙,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지상 물체의 운동 연구,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의 진동론 등을 종합·통일하기 위하여, 이론적 연구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물체 운동 및 만유인력의 기초 법칙을 2대 지주로 하는 이론 역학을 세운 것은 그의 저서 《프린키피아(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였으므로, 착상 이래 20년 후의 일이었다.(사람들은 흔히,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진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생각해낸 뉴턴의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는 후에 뉴턴 본인이 자신과 친분이 두터웠던 과학자 윌리엄 스터클리에게 말년에 진술한 일화이다. 이는 나중에 스터클리의 ‘아이작 뉴턴경의 삶에 대한 회고록(Memoirs of Sir Isaac Newton’s life)‘에 실려 세상에 공개되었다) 뉴턴은 1684년 핼리 혜성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한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와 행성 운동에 대해서 토론할 정도로 천문학에도 식견이 있었다. 1717년, 뉴턴은 에테르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실험을 고안했다. 밀봉된 두 유리 용기에 온도계를 넣었더니. 진공 속에 넣은 온도계가 다른 온도계만큼 빠른 속도로 온도가 올라갔다. 뉴턴은 이것을 공기보다 더 적게 존재하는 미묘한 에테르를 통해 열이 전달되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정치 활동. 뉴턴은 국회의원(1689년)과 왕립 조폐국의 국장(1696년) 등의 사회 활동, 연금술사로서의 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앙숙 관계였던 로버트 훅이 죽은 뒤, 뉴턴은 런던 왕립학회의 의장(1703년)에 취임하였다. 뉴턴은 앤 여왕에 의해 1705년에 최하위 훈작사 작위를 받기도 했다. 신앙생활. 뉴턴은 성공회신자였지만 그의 생활은 청교도적이었다. 그는 삼위일체를 부정했다. 그래서 그를 소시니안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3-5세기에 기독교가 초기시대의 신앙에서 벗어 났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으나 그리스도가 재림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의 연대기를 연구하였다. 사망. 뉴턴은 1727년 3월 31일 84세의 나이로 잠자던 중 평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흔히 시인 알렉산더 포프가 쓴 것으로 알려진, 가 뉴턴의 묘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는 웨스터민스터 묘비문에 쓰이지 않았고, 실제로 쓰인 뉴턴의 묘비문은 다음과 같다. 이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은 뜻이 된다. 업적. 미적분학에 기여. 적분은 고대에 무한대(無限大), 무한소(無限小), 극한(極限)을 생각하여 원의 넓이 구의 부피 등을 계산하는 구분 구적법으로 알려져 있었다. 대표적으로 카르타고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의 저작이 있다. 14세기 인도 수학자의 저작에는 삼각함수의 테일러 급수가 완전한 형태로 등장하며, 함수의 미분이 등장한다.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 드 페르마는 무한소를 다루며 함수를 미분하여 극대와 극소를 구하는 방법을 창안하였다. 미분과 적분을 한데 묶어주는 핵심적 정리인 미적분학의 기본정리는 뉴턴이 활동하기 이전에 증명되지 않은 채 알려져 있었고, 아일랜드 수학자 제임스 그레고리(James Gregory, 1638–1675)가 처음 증명을 출판하였다. 영국 수학자이자 뉴턴이 다니던 케임브리지 수학과 교수인 아이작 베로우(Isaac Barrow, 1630–1677)도 증명을 출판하였다. 뉴턴은 미적분학을 더욱 발전시키고(라이프니츠와 겹치는 부분이 많고, 이는 수학사에서 심심찮게 있는 일이다.), 함수의 근을 구할 때 미분을 해서 접선을 반복해서 그어 근에 수렴하게 하는 방법인 뉴턴법 (뉴턴-랩슨법)을 만들었다. 뉴턴 물체의 운동에 관한 3법칙. 뉴턴의 운동법칙(Newton의運動法則)은 물리학에서 물체의 운동에 관한 역학적 기본 법칙이다. 일반적으로 고전 역학의 기초인 뉴턴의 운동의 세 가지 법칙을 이르는데, 제1법칙은 관성의 법칙이고 제2법칙은 가속도의 법칙이며 제3법칙은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다. 중력의 발견. 뉴턴의 과학적 발견은 정밀하며 중력의 힘을 수학적 물리량으로 발견한 것이다. 그의 시대에 그는 중력의 역제곱 법칙을 밝힌것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중력의 역제곱 법칙은 두 물체 사이의 중력 인력은 힘을 두 물체 사이의 거리의 제곱으로 나눈 값에 따라 다르다. 사과가 떨어지게 하는 그 힘이 달을 계속 그 접선 방향으로부터 지구를 향해 떨어지도록 하는 것이 분명하다. 갈릴레오의 책을 읽고 자신의 실험들을 수행하면서 뉴턴은 지표면에서의 중력의 힘이 사과를 지면으로 끌어당기는 힘이라는 것을 알았다. 초기에 그의 책 1권에서, 뉴턴은 중력의 개념을 공식화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어떻게 달을 이용하여 중력을 연구할 수 있는지 설명했다. 만약 이 힘이 매우 작다면 달을 직선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데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너무 세다면 달의 경로를 너무 많이 휘게 하여 달이 자신의 궤도로부터 지구로 끌려오게 될 것이다. 결국 그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설명했다. 왜냐하면 중력은 물체가 무겁든, 가볍든 크든, 작든 모든 낙하 하는 물체를 똑같이 가속시키기 때문이다. 뉴턴은 수학적으로 증명된 전제들을 가지고 천체현상으로부터 물체를 태양이나 몇몇 행성으로 향하게 하는 중력을 유도해 낸다. 뉴턴은 프린키피아 3권에서 자연 철학의 두 개의 주류의 통합을 달성했다. 광학. 뉴턴은 프리즘을 연구했었는데, 프리즘으로 하는 초기 실험에서 뉴턴은 다른 색들은 꺾이거나 다른 각도로 굴절된다는 "굴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프리즘과 벽 사이에 바늘 구멍이 있는 다른 카드를 놓고 완전 적색 또는 청색의 광선이 분리되어 두 번째 프리즘을 통과하도록 하였다. 두 번째 프리즘은 각 색깔의 광선을 다시 굴절시켜 다른 색을 생성하지 않는다. 그는 청색 빛이 적색 빛보다 더 굴절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실험은 프리즘이 색을 생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뉴턴은 "빛은 다른 굴절성의 광선들의 집합이다"라고 정리했다. 뉴턴은 새로운 빛과 색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두개 더 독창적인 실험들을 고안해냈다. 첫번째는 프리즘에 의해 생성되는 스펙트럼의 경로에 렌즈를 놓는 것이다. 렌즈를 이용해 다른 색 광선들을 합성시키면 원래의 흰색 빛으로 복원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톱니바퀴를 렌즈와 벽 사이에 놓고, 그 톱니가 렌즈로부터 나오는 다른 색 빛의 광선들이 초점에 도달하기 전에 방해하도록 했다. 결과는 벽에 있는 점은 흰 빛이 차단되면서 통과되는 다른 색 광선들에 따라서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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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클레이데스
에우클레이데스(, 기원전 300년경) 또는 영어식 이름으로 유클리드(, 또는 )는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소설가이다. (고대 이집트의 수학자였을 가능성도 있다. 에우클레이데스가 어느 나라 수학자인지 확실하게 밝혀진 사실은 없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의 재위 기간(기원전 323년~기원전 283년)동안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의 부탁으로 최초의 대학이자 도서관,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알렉산드리아 대학에서 활동하였고(하지만 이 대학은 현재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정확한 위치도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다.), 당시 알려진 정수론 및 기하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을 집대한 업적을 가장 높게 평가받고 있다. 생애. 에우클레이데스의 이름은 (잘, 좋게)+(알려짐, 평판)의 합성어이며, "평판이 좋음, 유명함"이라는 뜻이다. 에우클레이데스의 삶에 관해서 알려진 것은 많지 않고, 그에 관한 소량의 언급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에 관한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언급마저도 그가 살았던 세기 후에야 프로클로스()와 알렉산드리아의 파포스()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다. 프로클로스는 5세기에 쓰여진 그의 저서 《주석이 달린 원론》을 통해서 에우클레이데스에 관해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에우클레이데스와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 사이의 기하학의 왕도에 대한 일화는 후세의 창작인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는 다른 고대 그리스 수학자인 메나이크모스와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 사이의 일화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주요 업적.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의 가장 유명한 저서는 총 1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이다. 기하학 원본이라고도 불린다.(원본은 그리스어로 문자라는 뜻이다.) 에우클레이데스 자신의 독창적인 내용들은 별로 없지만, 그 형태가 단순하고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당시까지 밝혀진 기하학과 정수론의 내용들을 다뤘는데, 10개밖에는 되지 않는 공리들에서 465개나 되는 명제들을 유도해냈다. 내용들 중 많은 부분들이 그 이전의 수학자들에게도 이미 널리 알려졌던 것이었다. 하지만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이 수학사의 고전이 된 이유는 일정한 공리에서부터 결과를 이끌어내는 논리적인 전개였다. 공리 체계에 바탕을 둔 근대 수학은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에 근원을 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은 수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술의 하나로, 출판된 뒤부터 19세기 말 또는 20세기 초까지 수학, 특히 기하학을 가르치는데 중요한 교과서로 쓰였다. 유클리드 기하학이라고 불리는 기하학의 정리들이 작은 공리로부터 출발해서 연역된다. 에우클레이데스의 기하학은 수백 년동안 순수한 기하학 그 자체로 여겨졌으나,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지금은 유클리드 기하학이라고 불린다.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에 나오는 2개의 정수의 최대공약수를 구하는 알고리즘은 지금도 유클리드 호제법이라고 불리며, 소수의 무한성에 대한 정리 역시 오늘날에도 유클리드의 정리로 불린다. 또한,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에는 피타고라스의 정리의 독창적 증명이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현존하는 기타 저서. 《원론》 말고도 현존하는 에우클레이데스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 손실된 저서. 이 밖에도, 문헌에는 에우클레이데스가 집필했다고 수록되어 있는 여러 책들이 전해 오지만, 이들은 짧은 인용을 제외하고는 현존하지 않는다. 일화. 위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와의 대화뿐만 아니라, 다른 유명한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에우클레이데스의 강연 도중에 한 제자가 "교수님, 수학은 너무 지루합니다. 도대체 그걸 배워서 어디다가 써먹을 수 있죠?"라고 묻자, 에우클레이데스는 하인을 불러서 "여봐라, 배운 것으로 반드시 이득을 얻으려고만 하는 저 친구에게는 동전 세 닢만 주고 강의실 밖으로 쫓아내라."라고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 일화를 볼 때, 에우클레이데스는 배우는 그 자체를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성격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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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
칭기즈 칸(, , , , 1162년 5월 31일(음력 4월 16일) ~ 1227년 8월 25일(음력 7월 20일))은 몽골 제국의 건국자이자 초대 카안이다. 중국식 별칭은 칭기스 황제,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법천계운성무황제(法天啓運聖武皇帝)이다. 본명은 보르지긴 테무친(, )으로,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한 군사·정치 지도자로서 몽골 초원의 부족들을 정복하고 몽골 제국을 성립시켜 몽골과 중국 지역을 비롯해 한반도에서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정복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청나라 때는 특목진(特穆津)으로 지칭되다가 청나라 멸망 후 테무진으로 복구되었다. 1189년 카마그 몽골의 칸으로 즉위했고, 1206년 전 몽골 제국의 칸으로 즉위했다. 존호인 칭기즈는 1206년 전 몽골의 칸으로 즉위하면서 몽골 제부족장들이 올린 존호이다. 중화민국 건국 이전의 중국에서는 그를 성길사 황제라 칭했다.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능력주의에 기반한 강한 군대를 이끌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이자 성공적인 군사 지도자 및 인류 최대의 정복군주로 평가된다. 반면에 침략당했던 유럽권과 서아시아에서는 학살자이자 약탈자, 문명의 파괴자라는 상반된 평가도 같이 존재한다. 몽골에서는 신 또는 국가 창건 영웅으로 칭송된다. 중국사에는 원(元) 태조(太祖)로 기록된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칭기즈 칸 국제공항으로 남아 있다. 생애. 초기의 투쟁 과정. 탄생. 훗날 칭기즈 칸으로 불리는 테무친은 1160년경 오논강 인근 델리운 볼락이라 불리는 지역에서 키야트(걸안, 乞顏) 부족인 아버지 예수게이와 어머니 호엘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예수게이는 소치겔이라는 여성에게서 이복 형 벡테르와 벨구테이가 있었고, 메르키트족에게 시집가는 호엘룬을 약탈하여 결혼, 테무친이 태어났다. 친동생으로 주치 카사르, 일찍 요절한 카치운, 동방에 영지를 받은 테무게 옷치킨 등이 태어났다. 칭기즈칸의 출생년도는 1162년에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나 역사서마다 달라서 1155년, 1163년, 1167년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현재 몽골에서 기념하는 칭기즈 칸의 탄신일은 1162년 11월 14일이다. 칭기즈 칸이 태어날 당시 아버지 예수게이가 테무진 우게가 이끄는 타타르족과의 전투를 승리했는데. 예수게이는 이 테무친 우게의 이름을 따서 태어난 아이에게 테무친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태어날 때 손에 고대 동방 사람들에게 생명을 상징하는 피 한 움큼을 쥐고 있는 등 여러 가지 상서로운 징표들이 나타났다. 예수게이는 이를 길한 징조로 생각하여 패배한 타타르 군주, 테무진 우게의 이름을 따서 자식에게 테무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칭기즈 칸의 이름에 대한 또 다른 해석으로는 ‘테무진’이 ‘대장장이’라는 뜻임을 근거로 당시 유목민 사회에서 쇠가 중요했음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아버지 예수게이는 옹기라트부 출신 호엘룬 외에도 먼저 부인 소치겔과 그 사이에서 아들 벡테르, 벨구테이가 있었다. 집안이 한미했던 소치겔은 예수게이의 본 부인임에도 호엘룬에게 정실 부인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칭기스 칸의 부족인 몽골 부는 위구르 제국의 해체 후 바이칼 호수 방면에서 남하해 몽골 고원의 북동부에 퍼져 살았다. 칭기스 칸의 생애를 그린 몽고의 전설적인 역사서 몽골 비사에 의하면, 그의 원조는 하늘의 명령을 받고 바이칼 호수에 강림한 보르테 치노(孛兒帖赤那, 몽골비사에는 脫卜赤顏, '푸른 늑대'라는 뜻)와 그의 아내 될 코아이 마라루("푸르고 흰 사슴"의 뜻)라고 한다. 보르테 치노의 11대손 도부 메르겐은 알란 구아와 두 아들을 두었지만 일찍 죽어 그의 아내 알란 구아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빛을 받아 남편이 없이 3명의 아들을 낳았다. 칭기즈 칸의 가계인 보르 지긴의 선조가 되는 보돈차르 몽학은 알란 구아가 낳은 아들 중 막내이다. 보돈차르의 자손은 번창하여 다양한 씨족이 나와 우리양카이 가문, 자라이르 부족 등을 형성했다. 보돈차르의 7대손 카불 칸이 처음 몽골족의 지파를 통일하고 대 칸의 칭호를 획득했다. 카불 칸의 후계자는 그의 6촌인 암바가이 칸이었다. 뒤에 카불 칸의 후손들은 키야트 가문, 암바가이 칸의 자손은 타이치우드 가문으 분화되었다. 칭기즈칸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카불 칸의 손자 3대 쿠툴라 칸의 조카였다. 유년기의 불행. 그러나 그의 유년시대는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9세 때 몽골 왕족 보르지긴족의 후예인 아버지 예수게이가 그의 부족과 오랜 불화관계에 있던 타타르족에 의해 독살되었다. 예수게이는 아들 테무친의 배우자를 정하러 옹기라트부족의 족장을 만나 그의 딸 보르테를 테무진의 약혼자로 정하고 오던 길에 타타르족의 막사에서 며칠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몽골 부족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타타르족은 예수게이를 손님으로 받아들였다가 독살하였다. 테무진의 종조부 쿠툴라 칸의 사후 보돈차르씨족에서는 통솔력을 갖춘 인물이 나타나지 못했고, 몽골은 예수게이의 가문인 키야트 씨족과, 암바가이 칸의 직계인 타이치우드 씨족, 그밖에 몇몇 부족으로 분열되었다. 예수게이가 죽자 부족 사람들은 예수게이와 경쟁자 관계였던 타이치우트 일가의 사주를 받아, 예수게이의 미망인 호엘룬과 그 자녀들이 지도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고 기회를 이용하여 이들을 추방했다. 암바가이 칸의 살아 있던 두 부인 역시 호엘룬과 자녀들에게 비호의적이었다. 노파 1명 만이 이들을 불쌍히 여겼으나 무시되었다. 이로 인해 테무진의 영세한 가문은 유목민의 일상음식인 양고기와 우유는 전혀 먹지 못하고 풀뿌리와 생선으로 연명하는 극심한 가난을 경험했다. 타이치우드 가문과의 갈등. 테무진과 그의 형제는 사냥 노획물을 약탈하는 이복 형 벡테르와 갈등하다가 그를 살해했다. 벡테르는 죽으면서 자신의 가계를 잇길 청하여 벡테르의 친동생이자 테무진의 다른 이복 형 벨구테이는 살려두었다. 타이치우드 가만의 타루구타이 키릴토쿠는 이복 형을 죽였다는 것을 빌미로 테무진을 감금하였다. 테무진은 나중에 스루도스 부족의 소르칸 시라 등의 도움을 얻어 탈출에 성공한다. 몽골비사에 따르면 이때 우연한 기회로 테무진의 친구가 된 네 명, 아루라트씨족의 보오르추, 테무진의 집안 가신이었던 우리양카이 집안의 제드메, 테무진을 도와준 소르칸 시라의 아들 치라운, 친베 등 4명은 그의 최측근이 되며, 이 중 보오르추, 치라운은 무칼리 등과 함께 칭기즈칸의 사준사구 중 4준이었고, 칭기즈 칸의 동지이자 유력 공신들 중의 하나가 된다. 사준은 전쟁에서 칭기스 칸의 옆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고 호위하는 역할을한다. 토그릴 완 칸과의 협상. 테무진과 그의 가족은 비록 보르지긴족들의 배척을 받긴 했지만 왕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상당한 대접을 받은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기 전에 정혼해준 아내 보르테를 되찾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몽골 북방에 사는 메르키트족은 예수게이가 그들에게 빼앗은 여자인 호엘룬을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테무진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메르키트족은 테무진의 아내인 보르테를 납치했다. 테무진은 아버지 예수게이와 의형제를 맺었던 케레이트족의 왕인 토그릴 완 칸에게 사정을 말하여 보르테를 다시 찾아올 수 있었다. 당시 토그릴 완 칸은 몽골 지역 안에서 가장 강대한 통치자였다. 테무진은 결혼기념물로 받은 잘의 모피를 토그릴에게 선물했고 답례로 토그릴 완 칸은 테무진의 흩어진 부족민들을 모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토그릴 완 칸은 테무진에게 2만 명의 병력을 제공하고 테무진의 어릴 적 친구인 쟈무카도 설득시켜 병력을 제공하게 함으로써 그 약속을 지켰다. 테무진 일가의 궁핍과 이웃 부족의 왕이 제공한 대규모 병력은 상반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실 여부가 의심스러우나, 〈몽골 비사〉, (원조비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1182년에 이렇게 모은 옛 키야트 부족의 부족장으로 선출되었다 한다. 그런데 자무카의 일족 중 한 사람이 테무진의 영지에 있던 말을 몰래 약탈하려다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 이 일을 계기로 테무진과 자무카는 서서히 멀어져갔다. 권력자로 부상. 메르키트족 정복. 강력한 동맹세력의 후원을 받은 테무진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메르키트족을 패배시켰다. 또한 장래에 자신을 반역할 기미가 있는 부족은 초토화시키는 전략을 세웠다. 이 전략에 따라 그는 메르키트족에 이어 주르킨족의 귀족들도 패배시켰다. 왜냐하면 주르킨족의 귀족들은 테무진의 동맹세력이었으나, 테무진이 타타르족 공격에 나선 틈을 이용하여 그의 재산을 약탈하는 배반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부족의 귀족들을 사회적 영향력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여 모두 처형했고, 평민들은 병졸과 노예로 삼았다. 그는 배후에 적을 남겨놓는 경우가 절대 없었다. 수년 뒤 중국을 침공하기에 앞서 먼저 등 뒤에서 자신을 찌를 유목민 통치자가 없는지 확인했다. 메르키트족을 정복한 뒤, 자무카는 타이치우드 가문과 동맹하고 키야트가문을 규합한 테무진과 바루주토의 평원에서 교전하였다. 1190년의 열세 날개 전투라고 불리는 이 싸움에서 누가 승리했는지는 문헌마다 결론이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키야트가문과 동맹을 맺고 테무진의 아군이던 한 씨족의 포로가 자무카에게 사로잡힌 뒤, 사람을 삶아 죽이는 팽형으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테무진의 동맹인 어느 씨족 포로를 자무카가 삶아서 죽인 것은 기록들마다 일치하고 있으며, 이때는 테무진이 패배 한 것으로 보인다. 자무카는 이 공개적 팽형으로 인망을 잃고, 몽골의 부족들은 테무진에게 귀부하는 일이 늘어났다. 부족의 지도자들과의 관계. 메르키트족을 패배시킨 이래 테무진은 스텝(기마인들이 살던 지역) 지역의 최고 실력자가 되려는 목표를 세웠다. 부족의 지도자들은 테무진의 주위에 몰려들기 시작했고, 12세기말에 이르자 그들 지도자 가운데 일부는 테무진을 몽골족의 칸(왕)으로 옹립하자고 제의했다. 또한 그 지도자들은 전쟁과 수렵에서 테무진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그러나 그들이 내놓은 조건을 보면 테무진에게 자신들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믿음직스러운 장수가 되어달라는 것이었지, 그들을 지배하는 군왕(君王)이 되어달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 뒤 실제로 일부 부족의 지도자는 그를 배신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테무진은 세력이 미약한 족장에 불과했다. 당시 중국 북부를 통치하고 있던 금(金)나라의 황제는 테무진을 중요하지 않은 인물로 여기고 있었다. 자르하족 정벌. 1190년 테무진의 영도하에 키야트부족의 세력은 강해졌다. 자르하부족의 수령이기도 했던 자무카는 불만을 품었다. 자무하의 동생 차르파는 테무진의 부하들을 습격하여 죽였다. 테무진 휘하 13개 부락 3만여 명이 차르파에게 살해되었다. 테무친은 즉시 13익(13개 부락)으로 군사를 편성해 자무카와 교전하였다. 1201년 타타르족 잔존세력과 메르키트족, 그리고 테무친의 친척인 타이치우드 부족이 연합하여 자무카를 칸으로 추대, 고아 칸(古兒汗)이라 칭했다. 1202년 테무친은 타타르 족과 교전, 타타르족 수령 자린부카를 죽이고, 나머지 잔존 타타르인 백여명을 모조리 죽였다. 타타르족 정복. 유목민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하여 변방의 평화를 유지했던 금은 가끔씩 변방정책을 바꾸어 그들의 동맹세력인 타타르족을 공격했다. 토그릴과 함께 테무진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타타르족의 배후를 공격했다. 세력이 점점 강성해지자 그는 강대한 타타르족과 최후의 결전을 벌인 것이다. 전투에서 타타르족을 패배시킨 뒤 수레바퀴보다 키가 큰 자들은 곧 어른은 모두 죽이고, 단지 아이들만 살려두었는데 이들은 나중에 커서 자신들의 신분을 잊고 몽골의 충실한 추종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금나라 황제는 토그릴에게 왕(王)이라는 칭호를 내렸고 테무진에게는 그보다 낮은 칭호를 내렸다. 실제로 그 후 몇 년 동안 금은 테무진의 존재를 전혀 위협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테무진은 스텝 지역에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해나가는 일에 몰두했기 때문에 중국에게 그리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숙청작업. 테무진은 조직적으로 모든 정적들을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친구이며 오랜 동료였던 자무카가 조직한 여러 세력의 연합은 그에게 패배를 거듭하여 그 존재가 없어졌고, 타타르족은 몰살당했다. 한편 케레이트족의 왕 토그릴과의 동맹관계도 마침내 붕괴되었고 테무진은 그마저도 최고권력을 잡는 데 장애가 된다고 판단하여 제거하려 했다. 토그릴은 자무카의 설득과 아들의 야망과 질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테무진에게 대항하여 싸울 수밖에 없었다. 테무진은 토그릴을 패배시킨 뒤 케레이트족을 모두 병졸과 노예로 삼았다. 테무진은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옛 정적·귀족 들은 하나도 살려두지 않을 속셈이었다. 그 이유는 첫째, 이들의 군대를 빼앗아 자신의 군대로 삼고, 둘째, 몽골 지역의 분열을 가져온 소속 부족 안에서의 충성심을 분쇄하고, 셋째, 모든 유목민 부족을 통일하여 테무진의 가문에만 충성을 바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나이만족 정복. 1199년 칭기즈 칸은 케레이트부와 연합, 고원 서쪽 알타이 산맥 방면에 있던 나이만부를 공략했다. 서부지역의 나이만부 통치자는 보르지긴족의 강력한 세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자무카와 합동으로 연합세력을 형성했으나, 완전히 패배했고 나이만 왕국은 없어졌다. 한편 변덕이 심한 자무카는 마지막 순간에 나이만족 왕을 배신했다. 이같은 전쟁은 1200년대 초반에 벌어졌고 테무진은 스텝 지역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1200년 초 테무진은 동부에 케레이트의 지원군을 호출, 친척이자 천적인 타이치우드 가문과 자이라트씨의 자무카 연합군을 깨고, 이어 대흥안령 방면의 타타르 족을 후룬베이얼 일대에서 격파했다. 1201년 몽골의 동방 지파는 반 케레이트, 반 테무진 세력과 동맹을 맺고, 테무진의 천적 자무카를 맹주로 추대하고, 고아 칸이라 하였다. 그러나 테무진은 동맹에 참가한 옹기라트부에 속하는 아내 보르테의 친가에서 동맹 결성 소식을 비밀리에 접하고 반대로 공세, 동맹을 깨고 동방 지파를 복속시켰다. 케레이트와의 갈등과 대칸 즉위. 1202년 서쪽 나이만, 북 메르키트부족 연맹이 북서쪽에 있던 오이라트와 동방 동맹의 잔당과 맺고, 케레이트 공격했지만, 테무진과 옹 칸은 고전 끝에 이를 물리 치고 고원 중앙부의 패권을 차지했다. 그뒤 옹 칸과 테무진 간의 결혼동맹을 체결하려 했으나 옹 칸의 장남 일카 셍굼의 반대로 무산됐다. 같은 해 자무카의 술수로 옹 칸의 장남 일카 센군과 테무진이 이간질을 하여, 1203년에 옹 칸은 셍굼의 진영에 망명 해 온 자무카의 모략으로 갑자기 테무진의 지역을 습격했다. 테무진은 오논 강에서 북쪽으로 벗어나 바루쥬나 호수에서 군대를 재정비 했다. 그해 가을, 오논 강을 거슬러 고원에 되돌아온 테무진은 병력을 결집하여 계략을 써서, 케레이트의 본영의 위치를 찾아 옹 칸의 본대를 급습해 대승했다. 이 패전으로 고원의 케레이트 부는 괴멸되고, 고원의 중앙부는 테무진의 손에 떨어졌다. 1205년 테무진은 고원에 남은 마지막 큰 세력인 서나이만부와 북메르키트부족을 격파하고, 동지에서 적이 된 자무카를 마침내 잡아 처형했다. 자무카는 부하들의 배신으로 테무진에게 넘겨졌으나, 그는 배신한 자무카의 부하들을 처형하고 자무카는 피를 보지 않게 처형했다 한다. 1206년 테무진은 쿠릴타이를 소집했고, 그해 2월 오논 강변에서 열린 족장대회의에서 테무진은 칭기즈 칸('전 세계의 군주라는 뜻')으로 추대되었다. 칭기스 라는 단어에 대해 일설에는 원래 몽골어가 아닌튀르크어에서 온 외래어였다는 설이 있다. 1206년 모든 스텝 지역을 통치하는 황제로 추대되었을 때 그는 수천 명에 달하는 피복속 부족의 사람들과 그 지역을 자신의 친·인척, 동료들에게 나누어 관리하게 했다. 그리하여 기존 부족·가문의 조직된 형태를 바꾸어 봉건제도와 유사한 조직을 만들어냈다. 몽골족의 통일. 칭기즈칸의 지도력. 1206년은 몽골 및 세계의 역사에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몽골족은 스텝 지역 밖으로 출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몽골 자체도 새로운 조직으로 재정비되었다. 칭기즈 칸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인해 통일된 몽골족이 존재하게 되었고, 몽골족은 많은 변천과정(봉건적 분열, 부족간의 세력다툼 재연, 영토병합)을 거쳐 오늘날까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동시대의 페르시아인 알 가즈자니는 칭기즈 칸에 대한 목격담을 이렇게 진술하였다. 키가 크고, 몸에 힘이 넘치고, 단단하고, 얼굴에 난 성긴 수염은 모두 하얗게 셌고, 눈은 고양이 같고, 넘치는 에너지와 분별력, 천재성과 이해력을 갖추었고,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고, 학살에 능하고, 의롭고, 단호하고, 적을 쉽게 무너뜨리고, 용맹스럽고, 살벌하고, 잔인하며, 마법과 기만에 능하다 한다. 칭기즈 칸은 마법을 구사하지는 않았으나, 알 가즈자니는 칭기즈 칸 군대의 활동을 마법으로 묘사했다. 1207년 아들 주치를 보내 삼림 부족을 정벌, 복속시켰다. 1210년에는 그의 손자와 동명이인이자 사준사구의 한사람인 쿠빌라이를 보내 투르크계 유목민 카를루크족을 정벌, 카를루크족의 부족장 아라사란 칸(阿兒思蘭汗)이 부락을 이끌고 투항해왔다. 몽골군의 특징. 믿을 수 있는 군인들. 몽골족의 야망은 스텝 지역 밖으로까지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었다. 칭기즈 칸은 세계정복의 원대한 야망을 실현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새로운 몽골국은 무엇보다도 전쟁을 치르기 위한 조직으로 정비되었다. 칭기즈 칸의 군대는 10진법 체제로 나뉘어 엄격한 기강을 유지했고, 보급품과 군비를 갖추었다. 부장(部將)들은 칭기즈 칸의 아들이거나 그에게 절대충성을 바치는 선발된 사람들이었다. 유연한 무기사용. 칭기즈 칸은 군사적으로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급속하게 변하는 외부환경에 잘 적응했다. 처음에 그의 군대는 사료가 필요 없는 튼튼한 초식동물인 몽골 조랑말을 타는 기병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군대로 다른 유목민들은 패배시킬 수 있었지만 도시들을 함락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곧 몽골족들은 규모가 큰 성읍도 투석기·쇠뇌·사다리와 끓는 기름 등을 사용하여 함락시킬 수 있었고, 흐르는 강물을 다른 데로 돌려놓아 홍수가 일어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정착문화를 가진 국가와 접촉하게 되면서 칭기즈 칸은 서서히 공격·파괴·약탈보다 더 멋진 권력의 향유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능한 참모들. 칭기즈 칸에 대항했던 마지막 몽골 부족인 나이만의 한 신하는 그에게 문화의 유용함을 일깨워 주었고, 몽골어를 문자로 정착시키는 일을 도와주었다. 〈몽골 비사〉에 따르면 1222년말 아무다리야 강(고대명은 옥수스)과 시르다리야 강(고대명은 작사르테스) 지역에서 호라즘 샤 왕조와 전쟁을 벌였을 때, 칭기즈 칸은 이슬람 출신의 측근으로부터 성읍의 의미와 중요성을 배우게 되었다. 한때 금나라의 신하였던 또 다른 측근인 야율초재는 농민과 장인들이 생산해내는 물품은 과세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일러주었다. 칭기즈 칸은 당초 중국 북부의 비옥한 전답들을 말의 목초지로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몽골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시킬 위대한 정복은 아직 수행되지 않은 단계였고 그 주목표로 중국이 떠올랐다. 정복 사업. 서하 정복과 위구르 복속. 1209년에 서하(西夏)에서 칭기즈 칸에게 복속, 몽골의 종주권을 인정하기로 하고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어 그 해에는 톈산 위구르 왕국를 복속시키고, 경제 감각이 뛰어난 위구르인의 협력을 얻는 데 성공한다. 1209년 칭기즈 칸에게 조공을 바치기로 했으나, 서하에서는 다시 반발하였다. 칭기즈 칸은 중국 북서쪽 변방지역의 국가인 서하와 싸움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고, 1211년 중국 북부에 자리잡고 있던 금을 향해 진격했다. 1214년 금으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보상금을 받고 철수했다가 1215년 전쟁을 재개하여 연경을 함락시켰다. 그 뒤 중국 북부의 완전한 장악은 부장인 무칼리에게 맡겨졌다. 금나라 공략. 1213년 군사를 이끌고 금나라를 공략, 만리장성 이남의 금나라의 영토를 정복, 병합했다. 1214년 칭기즈 칸은 금나라와 화약을 맺고 일단 군사를 후퇴시켰지만, 화약의 직후에 금나라가 몽골의 공세를 두려워해서 황하 강의 남쪽으로 옛 북송의 도읍인 개봉으로 수도를 옮기자 칭기즈 칸은 이를 배신 행위로 규정하고 다시 금을 공격했다. 1215년 몽골군은 금나라의 기존 수도 연경(현재의 베이징)을 포위, 함락시켰다. 후에 후계자 우구데이 칸의 시대에 중국의 행정에 활약하게 되는 야율초재는 이때 칭기즈 칸에 나타나고 그의 측근이 되었다. 연경을 함락시킨 칭기즈 칸은 장군 무칼리를 연경에 잔류시키고 그 후의 화북의 경영과 금나라와의 전쟁 준비 계획으르 맡겼으며, 그는 고원으로 되돌아갔다. 서요 정복. 나이만 부족 연합의 부족장의 아들 쿠츨루크는 나이만족 멸망 후 망명, 서요로 가서 야율직로고의 보호를 받고, 그의 사위가 되었다. 그러나 쿠츨루크는 야율직로고를 배신, 왕위를 찬탈했다. 서요의 혼란을 접한 칭기즈 칸은 쿠츨루크를 정벌을 선언, 추격하였으나 몽고군의 주력은 서하에 대한 계속적인 10년간의 원정으로 피폐해졌고, 첫 서요 원정은 실패하였다. 칭기즈 칸은 장군 지에베에게 2만 군을 주고 선봉대로 보냈으며 쿠츨루크를 맡도록 했다. 쿠츨루크는 불교로 개종하고 현지의 무슬림을 억압하고 있었으므로, 몽골이 보낸 밀정이 이를 칭기즈 칸에게 보고하였다. 곧 몽골 밀정이 내란을 선동하자 바로 서요 왕국은 분열되고 지에베는 바로 군사를 이끌고 가 적국을 크게 격파했다. 쿠츨루크는 카슈가르 서쪽으로 도주하였으나 이윽고 몽골에게 붙들려 처형되고, 서요의 영지는 몽골에 병합되었다. 이 원정의 성공으로 1218년까지 몽골 제국의 영역은 북쪽으로는 발하슈 호까지 확대되고, 남쪽으로 페르시아 만, 서쪽으로 카스피 해와 호라즘 샤 왕조를 접하게 되었다. 호라즘 정복. 칭기즈 칸은 중국에서 더 나아가 호라즘 샤의 정벌에 나섰다. 그 전쟁은 칭기즈 칸의 보호하에 있던 450명의 이슬람 대상단을 몰살시킨 오트라르 시(市)의 지사(知事) 이날축 때문에 촉발되었는데, 호라즘 제국의 샤(황제)는 이에 대한 보상을 거부했다. 호라즘 샤와의 전쟁은 조만간 벌어지게 되어 있었지만 이제 더이상 그 전쟁을 연기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호라즘 정벌에는 그의 아들 오고타이와 차가타이 등이 동행 출전하였다. 철저한 섬멸전. 이 전쟁에서 몽골족은 끔찍한 야만적 행동을 자행하여 이그만족이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몽골족은 가는 곳마다 도시를 불태웠고, 주민들은 몰살되거나 동족이라도 자신들보다 높은 신분이라면 모두 몰살시키는 몽골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도록 강요되었다. 칭기즈 칸이 호라즘 샤를 상대로 무자비한 복수전을 펼쳐나가는 동안 전답과 화원은 황폐화되었고 관개시설은 파괴되었다. 이 광경을 본 칭기즈 칸은 1223년 철수했고 1226~1227년 서하를 상대로 마지막 전역(戰役)에 나설 때까지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는 1227년 8월 18일에 죽었다. 칭기즈 칸의 정복활동. 무자비하고 잔인한 정복자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칭기즈 칸은 몽골에서 영웅이자 국부로 추앙받는다. 칸이 되기 이전에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몽골 연맹을 통합하여, 흩어져 있던 부족들에게 동질감을 형성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한 칭기즈 칸은 역설적으로 가장 넓은 지역에 전쟁의 처참함을 가져온 후에 가장 분쟁이 적은 평화의 시기를 가져왔다고 평가되고 있다. 서하와 금을 정복하고 중앙아시아의 호라즘 제국을 포함한 수많은 정복을 통하여 무수히 많은 나라를 합병하였다. 칭기즈 칸은 몽골 제국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기록을 남겼다. 몇 세기 동안 유라시아 대륙의 넓은 영토를 통치했던 몽골 제국은 몽골 제국에 의한 평화시대를 이루고, 인구학과 지정학적으로 큰 변화를 일으켰다. 몽골 제국의 영토는 현대의 몽골, 중국,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몰도바,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조지아, 이란,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파키스탄 일부, 터키 일부를 포함하는 것이다. 몽골군은 1260년 봄, 훌라구 칸의 부관인 키트부카의 지휘 하에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를 출발하여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가자 지구까지 진출했다. 서하 정복. 서하정복에서의 전술. 몽골을 통일한 그는 정착문명 민족에 대한 몽골인 최초의 공격을 시작했다. 서하는 탕구트 유목민들이 감숙, 알라샨, 오르도스에 세운 나라로, 탕구트인들은 티베트 종족에 속했으며 종교는 라마교(티베트 불교)였고 중국의 영향으로 문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되어 있었으며 한자에서 파생된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평원에서 전쟁하는 것에 능했던 몽골인들은 서하군과의 유격전에서는 연전 연승을 거두어 여러 차례(1205~1207년 그리고 1209년) 서하를 약탈하고 황폐화시켰다. 몽골의 총공격이 감행된 3차 침략 때 서하군은 전차 부대와 장창 부대를 앞세워 한순간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기동력의 부족으로 몽골군의 산개 작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고, 결국 총사령관 외명령공이 포로로 잡혀 처형당하며 사실상 궤멸 상태에 빠졌다. 서하의 항복. 몽골군은 수도인 영하를 포위했으나 공성전의 경험이 없던 몽골군은 이를 함락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황하의 물줄기를 바꾸어 영하를 공격하려는 시도도 하였으나 댐 건설의 경험이 없던 그들에게는 댐 건설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고, 오히려 사고로 수십명이 익사하는 피해를 보기도 했다(몽골군은 수영을 할 줄 몰랐기에 특히 피해가 심했다). 한편 양종 이안전은 농성 기간 동안 금에 구원요청을 하기도 했으나 거절당했고, 물자 부족에도 시달렸다. 결국 1207년 양종 이안전은 몽골에의 복속을 약속하고 자신의 딸을 보내 칭기즈 칸과 혼인시켰다. 이후 서하는 몽골의 명령을 받아 금나라와 오랜 전쟁을 치렀는데 이는 양국의 국력을 쇠퇴하게 하였다. 최후의 전쟁. 1211년 이준욱이 반란을 일으켰고, 양종은 퇴위하였으며 그 해 사망했다. 양종 역시 전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군주로, 이러한 일이 몇년 안에 잇따라 발생하자 이전의 정치적 혼란과 더불어 금과의 전쟁으로 국력은 급속히 쇠퇴해갔다. 게다가 1219년과 1226년에는 연달아 칭기즈칸의 서정(西征) 참가를 거부하여 칭기즈 칸의 분노를 샀다. 칭기스 칸이 호라즘 원정에 앞서 서하에 사신을 보내 출정. 이는 만약 칭기스 칸에게 충분한 병력이 없다면 그는 최고 권력을 행사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서하인들은 당시 중앙아시아의 최강국이었던 호라즘과의 전쟁에서 몽골군이 패배할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에 나온 반응이다. 그러나 호라즘이 몽골의 침입에 무력하게 무너지면서 이러한 서하의 결정은 치명적인 실수임이 드러났다. 1224년, 칭기스 칸은 서하의 반란에 대한 소식을 듣고 서둘러 페샤와르를 떠나 몽골 고원으로 귀환했다. 1225년 봄에 그는 몽골 고원에 도착했고, 여름에는 내정을 다지고, 가을에는 카라 툰의 행궁에서 묵었다.칭기즈 칸이 이란에 있는 동안 서하는 몽골에 반항하는 동맹을 맺었다. 이란에서 돌아온 칭기즈 칸은 이를 알고 서하에 대한 징벌 원정을 결의했다. 1년의 휴식과 군대의 재편성 후, 칭기즈 칸은 다시 군사를 일으켰다. 1226년 초 몽골군은 서하를 침공하면서 서하의 변경을 공략했다. 잔혹한 보복. 겨울에는 동결한 황하를 넘어 수도 싱칭(현재의 인촨) 이남 지역을 포위했다. 서하 군대는 황하 기슭에서 몽골군을 요격하닸지만 서하군은 30만 이상을 거느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패배, 궤멸되었다. 칭기즈 칸은 대대적인 민족 학살을 명령하고 죽었는데, 이는 서하의 호라즘전 참가 거부가 칭기즈 칸을 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며, 2차 침략에 대한 저항이 끈질겼기 때문에 칭기즈 칸의 섬태멸진 방식의 정복 전쟁에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중국 국영 CCTV의 보도에 의하면, 몽골군은 서하 사람들을 매우 철저하게 살육했기 때문에 현재까지 서하인의 유전자를 가진 서하인의 후손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한다. 다만 이들 중 살아남은 서하인은 원나라가 세워졌을 때 지배계급인 색목인으로 편성되었다. 비판. 정복지 나라의 국민이 이처럼 멸족당한 예는 세계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일로, 이는 칭기즈칸과 몽골 제국이 얼마나 잔학한 정복자였는지 알 수 있는 사례이며 학자들에 의해 비판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금 정복. 금과의 관계. 칭기즈 칸이 젊은 시절 케레이트와 함께 금의 마달갈(장종, 1189-1208)의 신하로서 타타르와 싸운 적이 있었다. 그는 장종의 신하였으며, 장종은 용병의 대가를 지불하였고, 중국식 칭호를 내려주었다. 그의 종증조부 안바가이 칸이 금나라로 끌려가 목마에 못박혀 처참하게 죽은 것을 그는 한시도 잊지 않았다. 마달갈이 죽자 그의 후계자 영제(위소왕)은 칭기즈 칸이 군신의 예를 갖추고 조공을 늘릴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의 사람됨을 알고 있던 칭기즈 칸은 무능한 통치자인 영제의 명령을 거부하고 정복의 기회로 이용하였다. 1210년 칭기즈 칸은 금나라에 조공관계를 중단한다고 통고하였다. 1211년 2월 칭기즈 칸은 군사를 이끌고 금나라 국경을 침입, 야고령 회전(野狐嶺會戰)에서 40만 명의 금나라 군을 격파했다. 1212년과 1213년에는 금나라의 하북을 상륙, 침공하여 격파하고 하동북로와 산둥 일대의 각 주와 현을 침공, 파괴하였다. 웅구트 사람들의 협조.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던 투르크계 웅구트인들이 몽골에서 만리장성으로 가는 산서성 북부의 길을 금을 위해 방어하고 있었다. 1211년 웅구트의 알라쿠쉬 티긴은 금의 정복을 위해 칭기즈 칸에게 이 길을 열어주었다. 그는 북경의 옛 주인이었으나 금에 의해 쫓겨난 거란인들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공격하였다. 특히 거란인 출신 장수 석말명안은 몽골군을 도와 금 황제의 목마장을 습격해 수십만 마리의 군마를 탈취하여 몽골군의 기병력을 대폭 증강하는데 기여했다. 1212년에는 거란의 옛 영토인 만주 서남부의 요하에서 야율유가가 반란을 일으켰다. 거란인들은 몽골계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퉁구스계 언어를 사용하는 금의 여진족보다는 몽골과 더 친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 야율유가는 몽골의 도움으로 요양을 빼앗고 요나라를 세웠으며 1220년 죽을 때까지 몽골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몽골과 함께 하였다. 이로써 금나라 서북의 웅구트와 동북의 거란은 몽골과 연합하게 되었다. 금나라 정복시작. 칭기즈 칸의 금나라 정복은 1211년에 시작되어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그의 후계자 시대인 1234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될 수 있었다. 몽골인들은 중국의 오래된 전투방법인 공성전을 다루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그들이 공포를 조성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던 학살의 방법은 인구가 많은 중국인들에게 큰 인상을 주지 못하였다. 또한 여진은 정주한 지 100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목민의 용맹함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1213년에는 선화를 정복하고 산서 중부를 돌파하여 태원과 평양을 빼앗았다. 이 후 남으로 기수를 돌려 하북과 산둥 평원을 가로질러 하간과 제남을 함락시켰다. 칭기즈 칸이 북경을 봉쇄작전으로 공격하려고 했을 때, 금 조정에는 궁정분란이 일어나 폐제가 호사호에게 암살을 당하였고, 호사호는 폐제의 조카인 오도보(선종)을 제위에 앉혔다. 당시 북경을 공격하고 있었으나 잇따른 실패에다 물자 부족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칭기즈 칸은 오도보의 화의를 받아들이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고 철수하였다. 북경 함락. 이후 오도보는 바로 개봉으로 천도하였고, 칭기즈 칸은 그것을 반격의 준비로 생각하고 다시 북경을 쳐서 마침내 성공적으로 함락해 불사르고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초원의 거주자들은 아무런 과도기적 단계도 없이 도시문명을 가진 고대국가를 소유하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더 나은 방법을 알지 못했던 그들은 난감함에 의하여 방화와 살육을 하게 되었다. 개인적인 약탈은 몽골군의 규범인 야삭에서 금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북경에 들어가서 한달 동안이나 약탈을 계속 하였다. 이것은 10세기의 거란이나 12세기의 여진 사람들이 기존 중국인에 대한 살육을 최소화하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하지 않음으로써 이전 왕조를 계승하여 차지한 것과 비교해 볼 때 퇴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나라 정복의 마무리. 금은 개봉 천도 이후 섬서성의 일부와 하남성 지역 정도로 축소되었다. 몽골이 중앙아시아에서 전쟁을 하고 있어 여력이 없을 때, 금은 다시 북경을 제외한 여러 성을 수복하였다. 칭기즈 칸의 신하 무칼리는 중국의 작전을 일임받고 지속적인 전투를 계속하였으나 이제 전투는 중국식 공성전으로 완전히 변해 버려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칭기즈 칸은 금나라 정복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으며 그의 아들인 우구데이와 톨루이에 의하여 1234년에야 정복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호라즘 정복. 1차 충돌. 금나라 정복 기간 중 칭기즈 칸은 중앙아시아에서 강성한 세력을 자랑하던 호라즘 제국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몽골과 호라즘의 1차 충돌은 1218년에 있었는데, 칭기즈칸은 아들 차가타이, 오고타이 등을 대동하고 호라즘 원정에 나섰다. 1218년 당시 호라즘은 알라 웃딘 무함마드 샤(황제)의 통치 하에 쇠퇴하고 있던 아바스 왕조를 몰아내고 서요를 속국으로 삼으며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 몽골에서는 명맥만 유지하던 메르키트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한 몽골군은 남은 메르키트 병사들을 서요 국경지대까지 쫓아가 전멸시켰다. 이 때 칭기즈 칸은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서요를 방문한 무함마드 샤의 군대와 마주치게 되었고, 이를 우습게 본 샤가 몽골군에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몽골군은 호라즘군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으나 치밀한 전략과 기마술로 호라즘군 절반을 죽이고 샤의 본진을 습격해 왕실 물품을 소수 탈취했다. 호라즘 정벌 당시 투항한 이슬람 상인 야라와치와 그의 아들 마수우드베이 부자가 투항했다. 이들은 후일 그의 아들 오고타이의 측근이 된다. 몽골군이 퇴각하면서, 마수우드베이는 호라즘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주재시켰다. 외교 결렬. 이후 칭기즈 칸은 나이만전 당시 도망쳤던 나이만 족장 타양 칸의 아들 쿠츨루크가 서요의 국왕이 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장수 제베를 시켜 서요를 공격해 쿠츨루크를 죽이고 서요를 점령함으로써 호라즘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그러나 금나라와의 전쟁 중에 호라즘과 같은 강국과 전쟁을 치를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칭기즈 칸은 이후 호라즘과 통상을 맺기 위해 사신을 보냈으나, 샤는 편지에 쓰여진 '그대를 사랑하는 내 아들처럼 대할 것'이라는, 자신을 비하하는 글귀에 분노했다. 그는 통상에 응하였으나 통상을 위해 방문한 450명의 상단을 오트라르 성의 성주 이날축을 시켜 붙잡아 처형했고, 항의하러 온 사신단마저 처형했다.(일각에는 칭기즈 칸의 전쟁을 위한 계략이 숨어있었다고도 한다). 이는 사실상 선전 포고나 다름이 없었으니 칭기즈 칸은 이에 선전 포고를 하고, 1219년 20만의 병력으로 호라즘 침공을 개시했다. 내분전략. 침공 전 칭기즈 칸은 호라즘 제국 내의 불화와 반목을 이용하는 계락을 펼쳤다. 호라즘은 알라 웃딘의 통치기간 동안 넓은 지역을 정복했으나 내정을 안정시킬 기간이 없어 나라 안 민중과 귀족, 왕족들 간의 파벌 갈등이 심했다. 칭기즈 칸은 호라즘 내의 여러 장수나 귀족들이 몽골과 내통하고 있는 것처럼 한 편지를 샤에게 들어가도록 했고, 몇몇 귀족이나 왕족에게 복속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에 불안해진 샤는 수도를 사마르칸트로 옮기고, 몽골군의 몇 배가 넘던 대군을 이리저리 갈라 배치하는 실책을 저지르게 되었다. 이는 몽골군의 호라즘 정복을 쉽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아바스 왕조의 정보제공. 아바스 왕조에서는 호라즘을 중앙아시아에서 몰아내기 위해 몽골군에게 호라즘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기도 했다. 호라즘 함락. 호라즘을 침공한 몽골군은 오트라르 성을 함락하고 샤의 명에 따라 몽골 대상단을 처형한 성주 이날축의 눈과 귀에 끓는 은물을 부어 처형했다. 이후 몽골군은 호라즘의 전 수도 부하라를 공격해 항복을 받아내고, 샤 알라 웃딘이 숨어있던 사마르칸트까지 포위해 5일만에 함락했다. 샤 알라 웃딘은 함락 전 성에서 빠져나와 달아났고, 칭기즈 칸은 도망친 샤를 잡기 위해 제베와 수부데이 두 장수에게 샤 알라 웃딘 무함마드를 추격할 것을 명했다. 이에 쫓긴 알라 웃딘은 나라 안을 이리저리 떠돌아야 했고, 그가 도중 머문 성이나 마을은 몽골군에게 철저히 짓밟혔으며, 알라 웃딘 무함마드의 어머니인 황태후가 살던 마잔다란마저 함락당하고 황태후는 몽골군에게 농락당해야 했다. 결국 숨을 곳을 찾지 못한 샤는 카스피해의 작은 섬으로 피신했다가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이후 샤의 아들 잘랄 웃딘이 몽골군에 항전했으나 그가 지키던 우르겐치 성은 끝내 몽골군에 의해 함락되면서 아내와 아들을 포함한 일가족을 잃었고, 군대를 모아 파르완에서 시기 쿠투쿠가 이끄는 몽골군을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패배 소식을 접한 칭기즈 칸이 직접 토벌에 나서자 끝내 당해내지 못하고 패배한 뒤 인더스 강을 건너 도망쳤다가 1년 뒤 쿠르드 산지에서 그곳 주민에게 살해당했다. 호라즘 정복의 의미. 한편 호라즘 정벌을 떠나기 전 칭기즈 칸은 서하에 참전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이는 이후 몽골이 서하를 재침략하여 멸망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호라즘 정벌은 몽골군이 중앙아시아를 넘어 아랍, 카프카스, 러시아까지 침략하는 계기가 되었다. 호라즘 정벌전 때 호라즘을 몰아내기 위해 몽골군을 이용하려던 아바스 왕조는 이후 그 몽골군에 의해 멸망했고 바그다드의 칼리프 역시 살해당했으며,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제외한 모든 이슬람권이 몽골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무함마드 샤가 몽골의 대상단을 살해한 것에 대해 많은 이슬람 역사가들은 이슬람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직접적인 요인으로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무함마드 샤는 뛰어난 통치술로 단기간에 넓은 땅을 차지했으나, 어리석게도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에게 자신에게 칼리프 자리를 넘길 것을 요구해 이슬람 형제의 반감을 샀고, 안정되지 않은 국내 사정을 무시하고 몽골을 도발하여 화를 자초하는 무모한 모습을 보여 후세에 시대착오적인 어리석은 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서하 재원정과 최후. 중앙아시아 원정에서 돌아온 징기즈 칸은 영지를 분할하여 주치는 남서 시베리아에서 남쪽 러시아 땅 및 미래에 정복 할 수 있는 모든 토지를, 차남 차가타이에는 중앙 아시아와 서요의 옛 땅을, 우구데이에게는 서쪽 몽골 및 위구르, 나이만, 타타르, 중가리아의 지배권을 주었다. 칭기즈 칸은 3명의 동생 주치 카사르, 카치운, 테무게 옷치긴 등에게 내몽골 동부 지역의 영토, 여진족의 영역 근처이자 구 거란족과 이민족이 차지했던 지역을 나눠서 분봉해 주었다. 이들은 동방 3왕가라 부른다. 이들 울루스는 소 울루스로서 독자적인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제후국 형식으로 남게 되었다. 칭기즈 칸에게 종주권을 약속한 서하의 황제는 호라즘 원정에 원군 보내는 것을 거절했고, 이를 괘씸히 여긴 칭기즈 칸은 다시 서하 공격을 선언한다. 1226년 가을, 칭기스 칸은 서하에 대한 재원정을 개시했다. 칭기스 칸은 사고로 말에서 낙마한 뒤에 열병을 겪었고, 이에 아들들은 원정을 만류했다. 하지만 칭기스 칸은 원정을 강행했다. 칭기스 칸은 우선 서하에 사신을 파견해 서정에 동반하지 않고 그 자신을 모욕한 것을 책망하며 항복을 제의했으나, 서하는 이를 거부했다. 칭기스 칸은 서하의 도시 대부분을 점령했고, 1226년 여름에는 서하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몽골군은 서하의 수도 흥경을 포위했다. 그때 칭기스 칸은 남하하여 육반산 남쪽에서 야영했다. 라시드 앗 딘은 이 남하의 목적은 칭기스 칸이 남송이었다고 적었다. 육반산 남쪽에 머무르던 칭기즈 칸은 서하에 사람을 보냈고, 서하에서는 곧 항복을 약속했다. 그때 서하는 칭기스 칸에게 사신을 보내 한 달 뒤 주민들을 이끌고 도시 밖으로 나와 항복하겠다고 제의했고, 칭기스 칸은 이를 허락했다. 하지만 그해 8월 초 칭기즈 칸은 갑자기 중태에 빠졌다가 깨어났다. 죽음을 앞둔 칭기스 칸은 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1227년 8월 18일 또는 8월 25일, 칭기스 칸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 서하의 수도 흥경은 함락되고 그 주민들은 학살당했다. 그는 죽음이 임박해서 부하들에게 서하 황제를 잡아 죽이라 명했고, 또 막내아들 툴루이를 불러들여 서하를 완전히 멸망시킬 계획을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후. 칭기즈 칸의 아들과 손자들 중에는 칭기즈 칸이 혐오했던 버릇인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다. 오고타이, 툴루이 등은 칭기즈 칸의 생존 시에도 술을 즐겨 마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기즈 칸 자신은 한때, 남자가 때때로 술에 취하지 않을 것을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진중에서 전사한 칭기즈 칸은 몽골 고원으로 옮겨져, 부르트칼둔, 원사 등에서는 기련곡에 장사되었다 한다. 기련곡은 대원 제국 말기까지 역대 몽골의 대칸이 기련곡에 매장되었다. 원사 등의 기술에서 칭기즈 칸과 역대 칸들의 묘지가 있는 지역에 합쳐져 영위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위치는 비밀이 되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에 의하면 친기스 칸의 시신을 운반한 사람은 비밀 유지를 위해 모두 살해되었다고 한다. 또한 매장 된 후에는 몽골은 그 증거를 없애기 위해 일천 마리의 말을 몰고 일대의 땅을 완전히 밟아 다졌다고 한다. 몽골비사에는 다른 설도 있는데, 어떤 이는 부르칸 칼둔 산에 묻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알타이 산의 북쪽, 켄테이 칸 산의 남쪽에 있는 예케 우텍에 묻었다고도 한다 하였다. 1990년 냉전 종식 이후 각국의 조사단은 칭기즈 칸의 매장지를 물색하고, 다양한 지역을 비정하였다. 그러나 몽골에서는 땅을 파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칭기즈 칸의 무덤이 외국인에 발굴되는 것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있다 한다. 2004년 일본의 조사단은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동쪽으로 250km 이격한 케를렌강의 한 초원 지대에 있는 칭기즈 칸의 오르드 흔적을 찾은 것으로 추정한다. 일각에서는 이 땅이 13세기 경 칭기즈 칸의 묘로 사용되었다는견해가 있다. 시카고 대학의 존 우즈 교수는 2001년 헨티 산맥의 구릉지대에서 높이 약 2.7~3.6m의 벽돌벽이 일시적으로 약 3.2km에 걸쳐서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원조비사에 있는 쿠레루구로 추정하고, 칭기즈 칸을 비롯한 몽골 황족, 원나라 황제의 능묘일 가능성이 높다고 제시한다. 또한 2009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의 다롄시에 거주하는 칭기즈 칸의 후예가 되는 80세 여성이 칭기즈 칸의 능묘가 현재, 쓰촨성 간츠 티베트족 자치구에 있는 것은 후예 가문에 전해지는 비밀이라고 발표, 현지 조사에서 비슷한 동굴이 확인되어 중국 정부에서 조사를 시작하였다. 역사적 배경. 유목민과 정착민의 관계. 야담(野談)으로 가득 차 있는 〈원조비사 元朝秘史〉(1240년경)를 제외하고는 몽골 쪽의 자료가 아닌 사료들이 칭기즈 칸이 살았던 시대와 비슷한 시대적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유사 이래 유목민과 정착민은 늘 접촉관계를 유지했다. 이 두 사회는 정반대되는 생활양식을 유지했기 때문에 늘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호의존적인 처지에 있었다. 유목민의 정복활동. 북방의 유목민들은 남부지역의 일부 주요산품과 그 지역의 사치품들을 필요로 했다. 유목민들이 이같은 물품을 얻는 방법은 무역·대상(隊商)·무력약탈의 3가지가 있었다. 중국의 정착민들은 유목민들이 사는 스텝 지역의 생산품들을 절실히 필요로 하지는 않았지만, 유목족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유목민들의 내침을 막아내야만 했다. 유목민의 단합과 분열. 스텝 지역 유목민들의 단합과 분열은 중국 왕조의 흥망성쇠에 따라 결정되었다. 유목민들은 세력이 강성할 때 결단력 있는 지도자를 옹립하여 다른 유목민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그 후 중국의 왕조가 쇠망의 길을 걷고 있으면 그들의 세력을 스텝 지역 밖으로까지 확장시켰다. 그러나 유목민들이 이같이 세력을 확장하여 남방정착민들의 문화를 수용하게 되면 결국에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흥망성쇠의 반복. 유목민들은 원래 기동성이 뛰어나 후방에서 별도의 물자보급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세력확장 이후에는 이 전통적인 우월성을 상실해 끝내는 그들이 복속시킨 중국인들에 의해 동화되고 말았다. 그 후 중국에는 다시 강력한 제국이 일어나고 유목민들은 족장들끼리 끊임없이 싸움을 벌여 분열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의 흥망성쇠는 계속 반복되었다. 반론 - 원의 붕괴는 강력한 전염성 질환에 의한 유라시아의 붕괴가 직접 원인이다. 이로 인한 국제무역이 축소되어 통치자금의 부족을 초래하고 몽골족은 중안아시아의 초원으로 회귀하게 된 것이 원의 소멸이다. 칭기즈칸의 현실이해. 몽골 정복의 역사는 이같은 형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이러한 정치적 갈등과 긴장을 배경으로 하여 칭기즈 칸의 생애가 검토되어야 한다. 그는 자신 부족들 내부에 재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고 또 그당시 중국과 기타 정착문화를 가진 나라들이 쇠퇴의 길을 걷고 있음을 인식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정복자의 길로 나선 것이었다. 칭기즈 칸의 통치법. 칭기즈 칸은 주변 국을 확장해나가면서 자신에게 협력할 경우 자치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여러 가지 혜택을 부여했다. 그러나 반항하게 되면 그 지역 전체를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모조리 멸족시켰는데 전멸시킨 사람들의 해골을 모아서 탑을 쌓았다. 바그다드와 이스파한 등의 지역에는 거의 100,000개 가량 되는 해골들로 탑을 쌓기도 했다. 특히 샤리 골골라의 경우 정복활동 도중 칭기스 칸의 손자인 모토칸(또는 무투겐)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므로 칭기즈 칸의 분노를 사서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모두 죽일 뿐만 아니라 모든 건물을 파괴시켜 전대미문의 폐허로 만들면서 멸망시켰다. 칭기즈 칸의 지도자로서의 특징. 칭기즈 칸이 활발한 정복활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다음과 같다.
2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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콸라룸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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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니스와프 울람
스타니스와프 마르친 울람(, 1909년 4월 13일 리비우 ~ 1984년 5월 13일 뉴멕시코주 산타페)은 폴란드계 미국인 수학자이다. 수소폭탄의 개발자로 유명하다. 생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도시 렘베르크(Lemberg, 현재의 우크라이나 리비우)에서 태어났다. 그의 수학 선생은 르부프 학파의 유명한 폴란드 수학자 스테판 바나흐였다. 1938년 미국에 하버드 대학교 주니어 장학생으로 왔다가 장학금을 계속 받지 못하자 위스콘신 대학의 강사진에 들어갔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폴란드에서 도피해 온 동생 울람도 부양하였다. 그때 그의 친구 존 폰 노이만이 뉴멕시코에서 추진되는 비밀 계획에 초청했다. 울람이 궁금히 여겨 도서관에서 뉴멕시코에 관한 책을 대출하고 보니 그동안 위스콘신 대학에서 사라졌던 이들의 이름이 책을 먼저 빌려갔던 이들의 목록에 다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울람은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다. 울람은 그 후에도 수소폭탄 개발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에드워드 텔러가 제시했던 수소폭탄의 모형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더 나은 방법을 개발했다. 말년에는 핵 펄스 추진(nuclear pulse propulsion)을 발명했다. 그는 이를 그의 발명 중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라고 밝혔다.
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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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1975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2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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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1955년은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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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995년은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2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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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987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2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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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980년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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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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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964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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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스
에페소스(, , , 공동번역성서에서는 에페소, 한글 개역판에서는 에베소로 표기)는 서부 소아시아의 에게 해 연안에 위치한(현재의 터키 Selçuk Efes),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의해 기원전 9세기에 건립된 식민도시다. 에페소스는 주변 도시 혹은 국가, 스파르타, 페르시아, 페르가몬, 로마 등의 흥망성쇠에 따라 식민지화 되는 역사로 얼룩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식민지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에페소스는 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기원전 6세기에 건조된 웅대한 아르테미스 신전과 로마 제국 시대에 건조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로마식 건축물인 도미티아누스 신전 (기원후 1세기)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아르테미스는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에페소스인들에게 풍요와 생명의 여신으로 숭배받던 대상이어서, 루가에 따르면 사도 바울로가 선교를 할 때 은으로 만든 신전모형을 팔던 상인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사도 바울로가 우상을 숭배하지 말자고 설교하여, 사람들이 신전모형을 더이상 사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페소스는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로가 전도와 사목을 한 교회중 하나가 에페소 교회였다. 또한 요한묵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의 7개의 교회중 하나가 에페소 교회일 정도로 1세기 기독교 역사에서 비중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국 성공회의 존 폭스 신부가 쓴 《순교자》에 따르면 사도 성 바울로의 제자인 디모테오가 주교로 사목한 교회가 에페소 교회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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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옴
게오르크 시몬 옴(Georg Simon Ohm, 1789년 3월 16일 ~ 1854년 7월 6일)은 독일 물리학자이다. 생애. 독일 에를랑겐에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일찍부터 아버지로부터 대장장이 기술을 배웠다. 만 16세인 1805년부터 에얼랑엔 대학교에서 수학, 물리, 철학을 전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제적인 문제로 1년 후에 학업을 쉬고 스위스의 사립학교에서 수학교사로 일한다. 22세에 에얼랑엔 대학으로 돌아와 1811년 빛과 색에 대한 주제로 박사학위를 따고, 교수자격도 통과한다. 이후 3학기 동안 모교에서 수학강사로 일한다. 1813년에는 밤베르크의 직업학교(Realschule)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817년부턴 쾰른의 예수회 김나지움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쳤고, 1826년에는 베를린의 사관학교(Kriegsschule)에서 교관을 지냈다. 당시부터 옴의 주된 관심사는 전기현상이었다. 1833년 뉜른베르크의 왕립 폴리테크닉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1839년부터는 학장을 지냈다. 1849년엔 뮌헨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실험물리학 교수가 되었으며, 1854년 7월 6일, 옴은 뮌헨에서 65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뮌헨 구시가지 남부 공동묘지(Südfriedhof)에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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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드 페르마
피에르 드 페르마(, , 1607년 ~ 1665년 1월 12일)는 프랑스의 변호사이자 수학자이다. 페르마는 미적분학에서 이용되는 여러 방법을 창안하는 등 많은 연구 성과를 남겼다. 또 현대 정수론의 창시자로 알려졌고, 좌표기하학을 확립하는데 크게 이바지했으며, 데카르트 좌표를 도입하였다. 그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라는 정리를 증명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formula_1보다 큰 정수 formula_2에 대하여 식 formula_3을 만족하는 formula_4이 아닌 정수해 formula_5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페르마가 증명했다는 증거가 없어서, 수학자들은 그가 증명했다는 소문에 대하여 의문을 갖기도 한다. 생애. 1607년 프랑스 타른에가론주 보몽 드 로마뉴()에서 보몽의 부영사이며, 피혁상을 하던 도미니크 페르마()와 법의학자 가문의 딸이었던 클레르 드 롱() 사이에서 태어났다. 페르마의 가족은 2남 2녀를 두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아무런 굴곡도 없는 평범한 시절이었다고 한다. 페르마는 1623년 오를레앙 대학교에 입학해서, 1626년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페르마는 프랑스어뿐만 아니라, 라틴어·그리스어·이탈리아어·스페인어·오크어에 능통하였다. 이후 보르도로 이사하였고, 여기에서 아폴로니오스의 논문을 접한 뒤, 취미로 수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아무리 뛰어난 증명을 해도, "언론의 각광을 받으니까 피곤하다"라는 이유로 절대 증명을 발표하지 않는 성격으로도 유명하다. 사실, 페르마의 친한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허세가 심한 성격이어서, 언론의 주목을 받기 위해 그랬다고 한다. 실제 페르마가 증명했다고 알려진 정리들 중, 페르마가 직관으로 발견하였지만, 증명하지 못한 정리들도 있다고 한다. 그는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모든 생각들을 책의 여백에다가 적어놓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1630년 툴루즈 지방의 청원위원으로 취임했으며, 그 해에 외사촌 누이인 루이제 드 롱과 결혼해서 3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낳았다. 그리고 귀족 지위의 표시로, 성에 "드"()를 추가하였다. 그는 생애의 34년을 국가를 위해서 봉사하다가, 1665년 1월 12일 타른주 카스트로()에서 한 사건을 처리한 이틀 뒤에 5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주요 업적페르마의 수학에 대한 기여는 지인들과의 서신 교환(서로 내기 문제를 주고 받았던), 디오판토스의 산술을 읽으면서 써넣은 짧은 글 등으로 한정된다. 그럼에도 그는 르네 데카르트와 함께 17세기 전반기의 두 주요 수학자로 불리고 있다. 데카르트의 발견과 독립적으로 페르마도 해석기하학의 방법을 발견했다고 한다. 또한 확률론을 확립시킨 블레즈 파스칼과 서신 교환을 통해서 이 분야에도 기여했다고 한다.. 페르마의 이름이 붙은 개념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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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 공간
선형대수학 및 함수해석학에서 노름 공간(norm空間, )은 원소들에 일종의 ‘길이’ 또는 ‘크기’가 부여된 벡터 공간이다. 이러한 크기는 노름()이라고 하며, 삼각 부등식을 따라 거리 함수를 정의한다. 노름 공간의 정의에서, 하우스도르프 조건을 생각하면 반노름 공간(半norm空間, )의 개념을 얻는다. 즉, 노름이 0인 벡터는 영벡터 밖에 없지만, 반노름(半norm, )이 0인 벡터는 영벡터가 아닐 수 있다. 삼각 부등식을 아래 부등식으로 변형하면 양의 실수 K에 대한 준노름이 된다. formula_1 정의. formula_2가 실수체 또는 복소수체라고 하자. formula_3-벡터 공간 formula_4 위의 반노름은 다음 두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함수 이다. 반노름이 주어진 formula_12-벡터 공간 formula_13을 formula_3-반노름 공간이라고 한다. formula_4 위의 노름은 다음 조건을 추가로 만족시키는 반노름 formula_16이다. 노름이 주어진 formula_12-벡터 공간 formula_13을 formula_3-노름 공간이라고 한다. 연산. 직합. formula_3-노름 공간들의 (유한 또는 무한) 족 formula_24과 실수 formula_25가 주어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직합 에 다음과 같은 노름을 부여할 수 있다. 그렇다면, formula_28 역시 노름 공간을 이룬다. 부분 공간과 몫. formula_3-노름 공간 formula_4의 formula_12-부분 벡터 공간 formula_32가 주어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formula_33에 formula_4의 노름을 제한한 것을 부여하면, formula_33 역시 formula_3-노름 공간을 이룬다. formula_3-노름 공간 formula_4의 닫힌 formula_12-부분 벡터 공간 formula_32가 주어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몫공간 formula_41 위에 다음과 같은 노름을 부여할 수 있다. 그렇다면 formula_41 역시 formula_3-노름 공간을 이룬다. 연속 쌍대 공간. formula_3-노름 공간 formula_46의 연속 쌍대 공간 formula_47 위에는 쌍대 노름 을 부여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formula_49 역시 formula_3-노름 공간을 이룬다. 하우스도르프화. 임의의 formula_3-반노름 공간 formula_52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formula_12-부분 벡터 공간을 정의하자. 그렇다면, 몫공간 formula_55 위에는 반노름이 잘 정의되며, 이 경우 반노름은 노름이 된다. 이러한 구성은 예를 들어 르베그 공간의 정의에 등장한다. 완비화. formula_3-노름 공간 formula_46의 (거리 공간으로서의) 완비화 formula_58 위에 다음과 같은 노름을 정의하자. 여기서 formula_60는 formula_61로 수렴하는 코시 열이다. 이를 부여하면 formula_62는 formula_3-바나흐 공간을 이룬다. 이 경우, 자연스러운 단사 formula_3-선형 등거리 변환 가 존재하여, formula_4를 formula_62의 부분 공간으로 여길 수 있다. 만약 formula_4가 이미 formula_3-바나흐 공간이라면, 위 함수는 전단사 함수이다. 성질. formula_3-반노름 공간 formula_4 위에는 다음과 같은 유사 거리 함수를 부여하여 유사 거리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만약 formula_4가 노름 공간이라면, 이는 거리 공간을 이룬다. 유사 거리 공간 구조에 의하여, formula_3-반노름 공간은 항상 formula_3-위상 벡터 공간을 이룬다. 두 formula_3-반노름 공간 사이의 formula_3-선형 변환의 경우, 유계 작용소인 것과 연속 함수인 것이 서로 동치이다. 함의 관계. 다음과 같은 함의 관계가 성립한다. 즉, formula_3-노름 공간 formula_46가 주어졌을 때, 예. 모든 벡터 공간에서 자명 반노름() formula_18은 반노름을 이루지만, 이는 (formula_4가 0차원이 아니라면) 노름을 이루지 못한다. 체. 체 formula_2는 스스로에 대한 1차원 벡터 공간을 이룬다. 이 경우 절댓값 formula_94은 노름을 이룬다. 유클리드 공간에서의 노름. 임의의 formula_95에 대하여, 유클리드 공간 formula_96 위에 다음과 같은 노름 formula_97을 정의할 수 있으며, 이를 L"p" 노름이라고 한다. 여기서 formula_99인 경우는 표준적인 유클리드 노름 이다. 만약 formula_101일 경우는 상한 노름() 이 된다. formula_103인 경우는 맨해튼 노름 이 된다. formula_105 노름 말고도 유클리드 공간 위에 수많은 노름들을 정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formula_106 위에는 다음과 같은 노름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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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 총선
4.15 총선은 다음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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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1년
1761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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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969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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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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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970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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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9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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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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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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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1960년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특징. 마라도나교의 교리상 1960년이 원년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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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1902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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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1953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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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994년은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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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993년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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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1930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2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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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1933년은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2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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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990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2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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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패턴 (책)
《디자인 패턴》(Design Patterns, )은 소프트웨어 설계에 있어 공통된 문제들에 대한 표준적인 해법과 작명법을 제안한 책이다. 이 분야의 사인방(Gang of Four, 줄여 GoF)으로 불리는 에리히 감마(Erich Gamma), 리처드 헬름(Richard Helm), 랄프 존슨(Ralph Johnson), 존 블리시데스(John Vlissides)가 같이 썼고, 한국어 판은 김정아의 번역으로 피어슨 에듀케이션 코리아를 통해 출판되었다. 책의 첫 번째 반절은 다양한 디자인 패턴의 정의에 할애하고 있고, 나머지 반절은 실제적으로 유용한 디자인 패턴들을 나열하고 있다. 책의 예제들은 객체지향적인 언어인 C++과 스몰토크로 제시되고 있다. 다음은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패턴의 리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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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1925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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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 루슈디
아메드 살만 루슈디 경(, , 1947년 6월 19일 ~ )은 인도에서 태어난 영국의 소설가 · 수필가이다. 그는 봄베이(현재의 뭄바이)에서 태어나 자라났으며, 14살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에서 역사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부커상을 세차례 수상한 《한밤의 아이들》과 1988년에 발표되어 격렬한 비판을 받은 《악마의 시》로 유명하다. 그의 서사 스타일은 신화와 환상과 현실이 혼합되어 나타나는 마술적 사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기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작품 활동. 그의 작품 활동은 환상적인 이야기이자 과학 소설의 면모도 일부 보이는 《》로 시작한다. 이 작품은 발표 당시 독서 대중과 비평가들에게서는 외면을 받았다. 그러나 다음 소설인 《한밤의 아이들》은 그에게 문학적인 명예와 부를 가져다주었고, 현재까지 그의 최고의 작품으로 일컬어진다. 이 작품은 그 후로 지금까지도 인도 및 탈식민지 현실의 글쓰기 형태를 규정하는 중요한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으로 그는 광고 카피라이터 일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으며, 소설은 이후 1993년에 부커 중의 부커상()을 수상했다. 또한 2008년에는 최고의 부커상()을 수상했다. 한밤의 아이들의 큰 성공 이후, 루슈디는 《수치》()라는 소설을 집필했다. 이 두 작품은 마술적 사실주의의 스타일을 차용하여, 이민자로서의 관점으로 쓰여진 것이다. 루슈디는 《아라비안 나이트》, 《마하바라타》, 《라마야나》 등의 동양 고전 문학뿐만 아니라 현대 문학으로부터도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한밤의 아이들》은 귄터 그라스의 《양철 북》과 같은 소설들에서 주제를 빌려 왔으며, 루슈디 자신도 그러한 소설에 영감을 얻어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말한 바 있다. 《악마의 시》는 명백히 미하일 불가코프의 고전 러시아 소설인 《거장과 마르가리타》과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Marriage of Heaven and Hell〉에 영향을 받았다고 작가 본인도 작품을 통해서 밝히고 있다. 《한밤의 아이들》과 《수치》()의 주제는 각각 인도와 파키스탄이다. 그의 후기작에서, 루슈디는 《무어의 마지막 한숨》()라는 작품을 가지고 스페인으로 작품의 무대를 확장했고, 인도와 이베리아 반도간의 상업/문화적인 연결을 탐구했으며, 《그녀 발아래 땅》()에서는 인도 사회와 미국 록앤롤의 상호 영향과 국경을 넘나드는 사랑에 대해 다루었다. 《한밤의 아이들은 루슈디의 작품으로 최고의 것이라는 찬사를 얻었다. 그러나 1989년 이후의 작품들은 《악마의 시》와 비슷한 관점에서 비판과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루슈디는 그의 작품들로 인해 부커상, 유럽 연합 문학상 등 수많은 다른 상들을 수상했다. 또한 그는 왕립문학협회와 의 회원이기도 하다. 《악마의 시》 논쟁. 1988년 《악마의 시》의 출판은 예언자 무함마드에 대한 불경스러운 묘사로 원리주의 이슬람 세계로부터 많은 비난을 불러 일으켰다. 1989년 2월 14일 이슬람 시아파 루홀라 호메이니가 그의 책을 "이슬람에 불손한" 것으로 규정하며 루슈디의 처형을 명령하는 격문인 파트와(fatwa)를 내걸었다. 더 나아가 호메이니는 그를 이슬람을 떠나길 시도하는 배교자로 선고하고 코란에 의해 죽음으로 처벌 받아 마땅하다고 비난했다. 이는 루슈디가 소설에서 이슬람교를 희화화하고 무함마드의 부인들을 창녀로 묘사한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호메이니는 모든 ‘독실한 무슬림’들에게 공개적으로 루슈디 뿐 아니라 책을 출판한 이도 처형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고 나서 2월 24일 호메이니는 루슈디의 목에 300만 달러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루슈디는 그로부터 약 10년 가까이 영국의 보호 아래 숨어 살았다. 이 기간 동안, 인도와 파키스탄, 이집트에서의 폭동으로 인해 여러 명이 죽었다. 1990년 루슈디는 수필집인 《》를 내어 그에게 향한 비난을 진정시키고, 이슬람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며 사과하고자 했다. 그러나 발의한 본인 이외에는 철회할 수 없는 파트와의 특성상, 이때는 이미 파트와를 내건 호메이니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이란 성직자들은 기존의 선고를 철회하지 못했다. 1989년에 호메이니가 사망한 이후, 이란 정부는 공개적으로 루슈디에 대한 사형 선고를 "집행하지 않을 것"임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이는 이란과 영국 간의 관계 정상화라는 더 큰 명분으로 동의가 가능했다. 그 후 루슈디는 숨어 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몇몇 이슬람 원리주의 그룹들은 그에 대한 응징 의지를 거두지 않고 있다. 그 예로 1999년 이란의 한 단체는 루슈디의 머리에 280만 달러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악마의 시》는 인도와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에서 금서로 지정되었고, 영국의 몇몇 아시아인 거주지에서는 거리에서 불태워지기도 했다. 1991년에는 이를 일본어로 번역한 이가라시 히토시 교수가 살해당하는 일도 발생했다. 그리고 1993년에는 노르웨이 쪽 출판사 사장도 공격을 받아 부상당했다. 2022년에는 루슈디가 미국 뉴욕주의 한 교육센터에서 강연하던 도중 한 레바논계 미국인 남성에게서 칼에 찔려 중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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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루스
벨라루스 공화국(, , ), 약칭 벨라루스(, , )는 동유럽에 있는 내륙국이다. 수도는 민스크이며, 민족 구성은 동슬라브족에 속하는 벨라루스인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며,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도 있다. 이 나라는 러시아와 매우 유사한 나라이며, 러시아어도 사용한다. 개요. 동쪽으로는 러시아, 서쪽으로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남쪽으로는 우크라이나, 북쪽으로는 라트비아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수도는 민스크이다. 공용어는 벨라루스어와 러시아어이다. 1922년부터 1991년까지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었다. 벨라루스는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었다가 1922년 소련에 편입됐다. 1990년 주권을 선언하고 1991년 독립을 선언했으며, 러시아·우크라이나와 함께 독립국가연합 창설을 주도했다. 빙하 작용을 받은 평원국으로 기후는 대서양의 영향으로 비교적 온화하다. 주민은 벨라루스인이 78%, 러시아인이 13%, 폴란드인 4%, 우크라이나인 3% 등이다. 산업이 특히 발달했으며 기계공업이 전체 공업생산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자동차, 트랙터, 농기계, 공작기계, 전기·무선기기 및 전자계산기 등이 유명하다. 반면에 석유, 가스, 화학 공업은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1992년 가격 자유화 조치를 단행했다. 벨라루스 사람들은 흰 옷을 즐겨입는 풍습이 있으며 전통 무늬가 새겨진 옷은 전통 의상이다. 또한, 가옥도 흰 색으로 칠하는 문화도 있다. 이 나라에서는 흰색은 상징색이나 사실상 마찬가지인 것이다. 국호. 벨라루스라는 국호는 하얀 루스()라는 표현에서 왔다. 러시아 제국 시절에는 러시아어로 벨로루시야(Белоруссия, Belorussia)라고 불렀다. 또, 대한민국에서는 이로 인해 한때 백러시아(白러시아)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실제 벨라루스는 White Ruthenia를 의미한다. 1991년 9월 19일 당시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소비에트 최고회의는 러시아어 국호를 Республика Беларусь (Respublika Belarus'), 줄여서 Беларусь (Belarus')로 표기하며 다른 언어로 표기할 때에도 이 발음을 따르도록 한다는 내용의 법을 고시하였다. 이에 따라 영어 국호도 Belorussia에서 Belarus로 바뀌었다. 대한민국에서는 1991년 12월 10일 정부·언론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 제2차 회의에서 이 국호를 벨로루시로 표기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벨라루스 정부의 요청에 따라 2008년 12월 11일 제82차 회의에서 표기를 벨라루스로 수정하였다. 러시아 제국과 소련 시절에는 현 벨라루스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하얀 러시아'라는 뜻으로 백러시아라는 명칭을 쓰기도 했다. 벨라루스를 이를 때 '하얀 러시아'라고 직역되는 명칭을 흔히 사용하는 경우로는 독일어의 바이스루슬란트(Weißrussland), 네덜란드어의 빗뤼슬란트(Wit-Rusland), 그리스어의 레프코로시아(Λευκορωσία) 등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한때 백로씨야로 불렸으나 이후 벨라루씨로 표기가 정해졌다. 지리. 벨라루스는 국토의 거의 대부분이 평야 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접국인 우크라이나와 다르게 바다가 없는 내륙국이며, 폴란드와는 비아워비에자 삼림을 공동으로 보호하고 있으며, 이 삼림은 유네스코 세계 자연 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 드네프르 강이 국토 일부에서 조금 흐르고 있다. 역사. 6세기부터 동슬라브족이 벨라루스 땅에 들어온 후 9세기 경에 형성된 키예프 루스의 구성 국가 중 하나인 폴라츠크 공국이 오늘날 벨라루스 지역에 존재하였으며, 1240년 몽골의 침략 뒤 벨라루스 땅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 후 폴란드 분할 때인 18세기 때 벨라루스 땅은 러시아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독일이 벨라루스 땅을 차지하게 된 후인 1918년 3월 25일 벨라루스 인민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하지만 실질적 국가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채 1919년 1월 5일 붉은 군대가 민스크에 들어오면서 해체되었다. 벨라루스는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일부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나치 독일은 소련을 침략하면서 벨라루스 땅은 독일군의 점령하에 들어가고 벨라루스 중앙 라다라는 나치 독일의 괴뢰 정부가 세워졌다. 벨라루스인들의 게릴라식 저항은 많은 성과를 올렸지만 벨라루스 인구의 4분의 1이 희생되는 등 피해가 막심했다. 독일의 패전 후 벨라루스는 다시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벨라루스는 1990년 7월 27일 독립을 선언하였다. 91년 12월 벨라루스는 독립국가연합의 회원국이 되었고 초대 대통령 알렉산드르 루카셴코는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97년부터 러시아와 국가 연합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2001년에 루카셴카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2004년에 루카셴코 대통령은 3선에 성공했다. 2007년에 러시아와 에너지 분쟁이 있었다. 2008년 9월 28일에 벨라루스는 총선을 시작했다. 하지만 총선에서 여당의 승리로 끝이 났다. 2010년 8월 3일에 루카셴코 대통령은 독립국가연합 정상들 앞에서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겠다는 말을 했다. 2010년 12월 19일에 있었던 선거에서 루카셴코가 4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야당 지도자와 벨라루스 국민 수만명은 항의 시위를 하다 경찰에 체포되었고, 미국과 EU는 벨라루스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2011년 1월 21일 벨라루스에서는 루카셴코의 4번째 임기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지만, EU는 취임식을 보이콧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벨라루스에 대한 제재 조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2012년 9월 23일에 하원의원을 뽑는 총선이 실시되었지만, 야당이 전면보이콧하면서 반쪽짜리 선거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리고 선거에서 여당후보자들이 전부 당선되면서 야당후보는 한명도 당선되지 못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벨라루스의 총선을 지지했다. EU는 벨라루스에 대한 제재를 2013년 10월 말까지 1년 더 연장하기로 했다. 2020년 8월에 치뤄진 대선에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현 대통령이 연속으로 성공하였다. 2020년 9월 23일경 여섯번째 임기 취임식을 진행했다. 사고. 1986년 4월 26일 인접국인 우크라이나의 프리피야티에 소재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하였는데 당시 바람의 방향으로 인하여 낙진의 거의 대부분이 벨라루스로 떨어졌다. 이 때문에 벨라루스 전 국토의 4분의 1이 방사능 오염지역이 되었으며 수 많은 벨라루스 국민들이 피폭당했다. 2011년 4월 11일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2011년 민스크 지하철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 이 사고로 15명이 사망했고, 204명이 부상당했다. 문화. 벨라루스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의 영향을 받았으며 전통 의상으로 햐안 바탕에 빨간색이 합쳐진 옷을 즐겨입는 문화가 있다. 그래서, 벨라루스 사람들은 가옥을 흰색으로 칠하기도 한다. 특히 전통 무늬가 들어간 옷은 벨라루스의 전통적인 의상이다. 이 밖에도 러시아의 지배 영향을 받아서 국민이 러시아인과 유사하기도 하다. 언어. 공용어는 벨라루스어와 러시아어이다. 1995년의 국민투표에 의해 러시아어가 정식으로 공용에서 추가되었다. 민스크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주민이 러시아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며,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주민도 있다. 2009년 조사에 따르면 인구의 60%가 벨라루스어가 모국어였지만, 주민의 거의 대부분(70%)는 집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했다. 일부는 우크라이나어, 폴란드어 등 소수 민족어도 사용한다. 종교. 종교는 벨라루스 정교회가 거의 대부분이다. 하지만 구 소련의 영향으로 무종교인도 많다. 문화와 일상생활, 명절 등은 정교회의 기준을 따르며, 무종교인 국민도 대부분 정교회 관습을 따른다. 그 외 벨라루스 자치 정교회, 천주교, 개신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을 믿고 있다(1997년 추계). 정치. 벨라루스 공화국은 대통령제 공화국이며, 임기는 5년 중임제이고 재선이 가능하다.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의 민주주의 지수 조사에 따르면 독재국가로 분류된다. 1991년 당시에 스타니슬라프 슈시케비치가 벨라루스 SSR의 최고 지도자로 선출된 바 있으나, 3년 만에 지도자직에서 물러났다. 1994년 7월 20일부터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현재까지 집권중이다. 독립한 1990년대부터 선거 등이 민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검열 등 여러 자유권 탄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행정구역. 벨라루스의 행정구역은 6개주와 1특별시로 구성된다 대외 관계. 벨라루스는 독립 직후인 1992년부터 러시아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 중이며 루카셴코 대통령은 벨라루스를 러시아에 부분적 또는 전체적으로 통합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유럽 평의회는 1996년부터 부정선거에 대한 반대의 의미로 벨라루스의 회원국 자격을 정지시켰고, 벨라루스는 현재 유럽 국가들 중 유일한 비회원국으로 있다. 국적. 벨라루스는 이중 국적을 인정하는 국가이며, 벨라루스 국적자가 타 국적을 보유 할 경우 이중국적이 된다. 벨라루스 국적 획득 자격은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다. 군사. 벨라루스 헌법에 따르면, 징병제를 실시한다. 육군은 기갑 위주로 편성되어있다. 공군은 육군보다 전투력이 더 뛰어나다고 한다. 인구. 주민은 벨라루스인이 81.2%, 러시아인이 11.4%, 그 외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이 7.4%, 유대인과 기타가 0.3%이다(1999년). 교통. 벨라루스는 서유럽과 러시아를 잇는 철도역이 있으며, 민스크 시는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버스, 택시, 공항 등이 정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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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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쾨헬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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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들의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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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피아노()는 대표적인 건반악기로서 피아노포르테()의 준말이다. 총 52개의 건반으로 구성되어 나무로 된 작은 망치가 강철 프레임에 고정된 피아노줄을 건반으로 소리를 낸다. 18세기 초 이탈리아의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Christofori, B.)가 고안하여 독일에서 완성하였다. 역사. 오늘날 세계적으로 보급되고 있는 일반적인 유건타현(有鍵打絃)악기이다. 피아노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쳄발로와 클라비코드가 가장 많이 보급된 건반악기였으나, 1709년에 이탈리아 사람인 쳄발로 제작가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 1655-1731)가 쳄발로의 몸통(胴)을 써서 ‘포르테피아노’라고 이름붙인 악기를 만들었다. 이것이 피아노의 효과적인 최초의 고안이어서, 그가 피아노의 발명자로 되어 있다. 쳄발로나 클라비코드는 음이 작아 실내연주용 외는 쓰이지 않던 것이었으나 이 발명은 현을 펠트로 된 해머로 쳐서 음을 내고, 댐퍼를 붙인 것으로 거의 오늘날의 피아노와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이로써 음은 힘차고 크게 되어 넓은 스테이지의 연주나 그 밖의 악기와 조화를 이루는 합주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간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도 제조기술의 연구가 종종 있었고 18세기의 중엽(바흐나 헨델이 일생을 마칠 무렵)부터 각국에서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제작하게 되었다. 그 뒤 많은 개량이 가해졌고 특히 현이 굵어졌으며 액션(손가락의 누른 키가 현을 칠 때까지의 장치)이나 댐퍼 등의 정교한 것 등이 나오게 되어 현재의 피아노에 이르기까지 진보하였고, 피아노의 원래 이름은 피아노포르테였다. 피아노의 형태. 피아노에는 그랜드형()과 업라이트형()의 두 가지 형태가 있고, 각각 소형에서 대형까지 여러 가지 크기가 있다. 그랜드형이 피아노 본래의 형태이며 이 형태는 쳄발로의 형태에서 생긴 것으로 음량도 크다. 피아노는 철골틀에 현을 매었고 그 틀의 뒷면에 울림판이 있어 해머로 친 현의 진동을 울림판으로 확대한다. 현은 피아노선이라고 하는 특수한 강철선으로서 낮은음부의 현은 그 선의 둘레를 구리선(銅線)으로 감아 낮은 음현일수록 굵고 높은 음현일수록 가늘다. 페달은 보통 3개가 있고 악기를 향해서 오른쪽은 보통 댐퍼 페달이라 하여 밟으면 전체 댐퍼가 일시에 현에서 떨어져서 두드린 음은 긴 여운을 가지게 된다. 왼쪽 페달은 그랜드와 업라이트와는 조금 구조가 다르나 음량을 약하게 하기 위하여 쓰인다. 피아노의 키의 수효는 52, 64, 76, 88 등 크기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으나 가장 일반적인 것은 88건이며 그 음역은 A0에서 C8까지로 7옥타브 이상이나 된다. 피아노는 건반으로 누르면서 치는 악기이다. 피아노 연주. 피아노의 가격은 700만원부터 3억원까지 천차만별이라고 한다. 피아노 주법은 19세기에 극도로 발달하여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베토벤 이후 베버, 슈베르트, 멘델스존 등을 거쳐서 쇼팽, 슈만, 리스트, 브람스 등의 대작곡가가 피아노 음악의 알차고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베토벤의 음악은 작품구성엔 우수하나 피아노라는 악기의 독특한 장점을 완전히 살렸다고는 할 수 없다. 그에 비하여 쇼팽이나 리스트의 음악은 피아노의 특징적인 아름다움을 완전히 살리고 있으며 또 양 손가락의 운동이나 페달의 효과를 극한까지 발전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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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프로그래밍 언어)
C는 1972년 켄 톰슨과 데니스 리치가 벨 연구소에서 일할 당시 새로 개발된 유닉스 운영 체제에서 사용하기 위해 개발한 프로그래밍 언어이다. 켄 톰슨은 BCPL언어를 필요에 맞추어 개조해서 "B"언어(언어를 개발한 벨 연구소의 B를 따서)라 명명했고, 데니스 리치가 이것을 개선하여 C 언어가 탄생했다. 유닉스 시스템의 바탕 프로그램은 모두 C로 작성되었고, 수많은 운영 체제의 커널 또한 C로 만들어졌다. 오늘날 많이 쓰이는 C++는 C에서 객체 지향형이다. 이는 오늘날의 널리 쓰이는 거의 모든 운영 체제 커널이 C를 이용해 구현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처럼 C는 시스템 프로그램 개발에 매우 적합하지만, 응용 프로그램 개발에도 많이 쓰이기도 한다. 예제. int main() { //메인메소드의 시작지점으로 , 메인메소드의 시작이라는걸 알려준다. printf("Hello World!"); //printf 구문과 Hello World! 로 Hello World를 출력한다. return 0; //숫자 0을 리턴해 프로그램을 종료한다. } //메인 메소드의 끝을 알린다. 역사. 초기 개발. C 언어의 초기 개발은 1969년부터 1973년까지 4년에 걸쳐 AT&T 벨 연구소에서 이루어 졌으며, 데니스 리치의 말에 따르면, 가장 창의적인 작업이 이루어진 기간은 1972년이었다. 언어의 이름이 'C'인 이유는 그 특징이 'B' 언어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며, 켄 톰슨에 의하면, B 언어는 BCPL 언어의 기본만 남긴 버전이다. 리치와 톰슨에 의해 초기에 PDP-7의 어셈블리 언어로 구현되었던 유닉스 운영체제의 개발과 C 언어의 기원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결국 그들은 유닉스 운영체제를 PDP-11로 포팅하기로 결정하였다. PDP-11의 기능의 일부, 특히 바이트 접근기능을 활용하지 못하는 B 언어의 부족함이 C 언어의 초기 버전의 개발을 이끌었다. 유닉스의 초기 PDP-11 버전은 어셈블리로 개발되었다. 1973년에 codice_1 자료형의 추가로, C 언어는 유닉스의 대부분을 C로 쓸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 졌다. 유닉스는 어셈블리가 아닌 언어로 구현된 최초의 운영체제 커널 중의 하나였다.(더 빠른 사례는 PL/I로 쓰인 Multics 시스템, ALGOL로 쓰인 Burroughs B5000을 위한 MCP(Master Control Program)가 있다.) 1977년 경, 리치와 스티븐 C. 존슨이 유닉스 운영체제의 이식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C 언어를 추가적으로 변경하였다. 존슨의 Portable C Compiler는 새로운 플랫폼에서의 C의 구현의 기초가 되었다. K&R C. 1978년에 브라이언 커니핸과 데니스 리치가 "The C Programming Language"라는 책의 초판을 출간했다. 커니핸과 리치의 앞 글자만 따서 C 프로그래머들에게는 "K&R"로 불리는 이 책은, 비공식적이지만 오랫동안 C의 규격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 서술하는 C의 판이 "K&R C"란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 책의 2판에서는 후의 ANSI C 표준을 다루게 되었다. K&R에서 다음과 같은 기능이 등장한다. C99. C 언어 표준이 상대적으로 정적으로 남아 있었던 동안, C++는 표준화를 위하여 계속 진화하고 있었다. 1995년에 1990년의 C 표준에 대한 규약 수정안 1이 출판되었는데, 이는 약간의 세부 사항을 교정하고 국제적 문자 세트에 대한 보다 확장된 지원을 위한 것이었다. C 표준은 1990년대 후반에 더 개정되어, 1999년 ISO/IEC 9899:1999가 출간되었고, 여기서 명시한 규범을 흔히 C99라 부른다. 이는 기술적 교정에 의하여 현재까지 3번의 수정이 있었다. 국제 C 표준은 실무 그룹 ISO/IEC JTC1/SC22/WG14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C11. 2011년 ISO/IEC 9899:2011이 출간되었고, 간단하게 C11라고 부른다. C11이 나오기 전까지의 개발 버전을 C1X라고 부른다. 최종 개발 버전은 2011년도 4월 N1570이었다. C17. 2018년 ISO/IEC 9899:2018이 출간되었으며, 간단하게 C17이라고 부른다. 문법. C는 C 표준에 의해 규정되는 형식 문법을 갖고 있다. 포트란 77과 같은 언어와 달리, C 소스코드는 free-form 언어로써 형식 코드에 공백을 마음대로 넣을 수 있다. 메모리 관리. OS에서 응용 프로그램을 실행하거나, CPU의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해 여러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 메모리를 할당하고 이를 메모리에 올려 실행한다. C 언어로 개발된 프로그램은 메모리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할당 영역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CPU를 사용하여 개발하여 장치에 넣어 코드를 실행할 때, 힙 영역을 많이 사용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필요 없다면 메모리 공간을 할당할 필요도 없고 힙관리 프로그램 코드(함수를 개발툴에서 라이브러리 형태로 제공)도 필요하지 않는다. 만약 malloc 등의 함수를 사용하면, 힙 영역을 사용하겠다는 의미 이기 때문에 힙 영역을 개발자가 선언하여 관리 해야 한다. 이 때 힙관리 프로그램 코드는 자동으로 링크 된다. 물론 저 사양의 CPU 경우, 이 함수를 제공하지 않을 수 있는 컴파일러도 있을 수 있다. 변수와 메모리 맵. C 언어 작성된 코드는 컴파일 과정과 링크 과정을 거치면 실행 파일이 만들어진다. 변수는 여러 가지 특성이 있다. int count = 4; char name[50] = "홍길동"; char tel[256]; int getTel(char *pstr) static char buff[1024]; gets(buff); strcpy(pstr, buff); return strlen(pstr); int main(int argc, char **argv) char *paddr; printf("이름= %s\n", name); getTel(tel); printf("전화 = %s\n", tel); paddr = (char*) malloc(1024); if (!paddr) return -1; { // 블록 시작 int scount; char *piaddr = paddr; for (scount = 1024;scount > count;scount--,piaddr++) { *piaddr = getch(); // getch 함수는 표준함수는 아니다. putchar(*piaddr); if (*piaddr == '\r') break; *piaddr = 0; printf("주소 = %s\n", paddr); } // 블록 끝 free(paddr); return 0; 이 프로그램 예에서 변수 별로 분리하면 다음과 같은 특성의 변수로 나눌 수 있다. Notes: 각 특성별로 나누어 그룹을 지어 메모리에 배치 하는데, 이것을 링커가 한다. 이렇게 그룹은 나누는 것을 세그먼트(SEGMENT) 또는 섹션(SEC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위의 그룹은 가장 기본적인 내용만을 표시 한 것이다. CPU와 컴파일 마다 다르다. 어떤 컴파일러는 더욱 세밀히 하기도 한다. 그리고 각 세그먼트 이름도 다르다. Visual Studio의 맵 이름 예 컴파일마다 각 세그먼트 이름과 구조가 다르지만, 예를 들어 중요한 세그먼트 만 표시 하였다, TEXT와 CONST는 ROM/FLASH에 배치해도 되는 변하지 않는 세그먼트이므로 같은 부류이고, CPU를 설계하고 코드를 직접 쓰는 경우 ROM/FLASH을 이용한다. 거의 모든 툴에서 이 맵을 파일로 만들어 준다. 물론 옵션으로 설정을 해야하는 경우도 있지만 구조를 얻을 수 있다. 함수와 변수의 위치와 이름 등을 확인할 수 있고, 각각의 세그먼트 크기 등의 데이터를 알 수 있다. 실제 CPU를 다루는 C 언어에서 이런 정보는 중요하다. 내가 사용하는 MCU의 메모리는 얼마나 사용하는지 등을 확인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라이브러리. C 언어 함수는 표준함수가 있고, 개발 툴에서 제공하는 함수가 있다. 여러 가지 부류가 있고 특성 별로 나누어 lib 파일로 코드를 제공하고 헤더파일로 선언을 알 수 있다. C 표준 라이브러리. C 표준 라이브러리는 함수 형태와 기능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개발툴별 같다는 특징이 있다. 개발 도구. GCC. 유닉스 계열(리눅스)의 시스템에서 주로 사용하는 C/C++ 언어 개발 도구이다. 리눅스의 OS을 제 컴파일하거나, 각종 응용 프로그램 개발에 사용한다. 또한 X-Windows의 개발 도구로도 사용할 수 있다. 전자 장치의 개발 시 임베디드 OS 포팅에서, 리눅스 커널이나 리눅스 커널 기반으로 하는 OS 커널 자체를 개발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리눅스 커널 기반 임베디드에서 실행되는 응용 프로그램 역시 gcc을 많이 사용한다. make. 여러 파일들끼리의 의존성과 각 파일에 필요한 명령을 정의함으로써 프로그램을 컴파일할 수 있으며 최종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과정을 서술할 수 있는 표준적인 문법을 가지고 있고, 구조로 기술된 파일(주로 Makefile이라는 파일명)을 [make]가 해석하여 프로그램 빌드를 수행하게 된다. Cygwin. gcc을 윈도우에서 실행할 수 있도록 재 포팅한 것이다. MinGW. Cygwin에서 분화 된 gcc 기반 개발 라이브러리이다. 이클립스. 이클립스는 다양한 언어와 다양한 OS에서 실행되는 IDE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상황에서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다. Eclipse IDE for C/C++ Developers. C/C++언어를 제공하는 IDE으로 리눅스의 경우 기존의 gcc을 사용할 수 있도록 연결 설정만 하면 된다. 윈도우에서 gcc와 연결하여 C/C++ 언어를 사용하여 프로그램을 개발 할 수 있다. MinGW는 다양한 언어를 지원하므로 다른 언어로도 이클립스와 연결하여 개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스튜디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 판매하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환경에서 작동하는 개발도구이다. 현재는 C 뿐만 아니라 C++, C# 등 다양한 언어를 지원하고 있지만 초기의 마이크로소프트 개발 도구는 C 언어로부터 출발하였다. 비주얼 스튜디오로는 윈도우 API를 이용한 GUI 프로그램, 명령 줄 인터페이스 환경으로 실행되는 Windows Console Application, 윈도우 서비스, 동적 링크 라이브러리 등의 형태로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수 있고, 최근 버전에서는 모바일 응용 소프트웨어 개발도 지원한다. 비주얼 스튜디오에서 사용 가능한 소프트웨어 개발 키트와 라이브러리는 다음과 같다. C 표준 라이브러리. 표준 C에서 정의하는 라이브러리 함수를 거의 대부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Windows SDK. 윈도우 운영체제의 API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툴킷이다. 응용프로그램에서 사용 가능한 윈도우 운영체제의 기능은 Windows SDK를 통해 제공된다. 초기에는 C가 기본 언어였으나, 최근에는 C#, C++ 등의 언어 툴킷도 제공한다. 예전에는 Win32 SDK라고 불리었다. MFC. 윈도우 개발에 필요한 Windows API를 클래스로 래핑한 C++ 라이브러리이다. DirectX. 윈도우에서 주로 게임 등을 개발할 때 사용하는 툴킷이다. 고속의 화면 제어, 음성지원, 3D 등을 지원한다. CODEBLOKES 그럭저럭한 툴 디버깅. 보통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디버깅의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두가지이다. GDB. GCC을 기반으로 하는 디버깅 도구이다. 따라서 유닉스 계열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실행된다. 응용 프로그램 디버깅. GCC 옵션을 디버깅이 되도록 설정하면 디버깅 테이블을 만든다. gdb 실행 중에 이것을 사용한다. GDB을 실행하여 응용 프로그램을 실행하면서 break, 변수, 함수 등의 디버깅을 할 수 있다. 원격 디버깅. GCC에서 gdb는 서버 구조를 사용할 수 있다. gdb-server을 설치하면 네트워크를 통해 디버깅 환경을 구성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임베디드 개발 시 리눅스 커널을 포팅하고, 해당 리눅스 시스템에 gdb-server를 설치하면 다른 환경에서 이를 통해 응용 프로그램을 디버깅 할 수 있다. 임베디드의 많은 경우 자신의 시스템에서는 디버깅이 만만치 않다. 따라서 원격으로 gdb의 실행 결과를 전송 할 수 있고 이 정보를 바탕으로 이클립스와 같은 IDE와 연동할 수 있다. 보통 리눅스 기반의 임베디드 개발 환경은 이클립스 C++를 사용할 수 있는데, 이것과 결합할 수 있다. 커널 디버깅. 원격 디버깅 모드는 리눅스 커널에 사용되는 소스 수준의 디버거인 KGDB에서도 사용된다. KGDB를 사용하면 커널 개발자는 일반 응용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커널을 디버깅할 수 있다. IDE 디버깅. 비주얼 스튜디오나 이클립스 등의 도구 들은 기본적으로 디버깅 방법을 제시한다. 이클립스 디버깅은 GDB와 연동해서 구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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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민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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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총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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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김종필(金鍾泌, 1926년 1월 7일 ~ 2018년 6월 23일)은 대한민국의 고위정치인이다. 제11·31대 국무총리로 재임하였다.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해 초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되는 것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이후 9선 의원을 지내면서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3김이라 불리며 대한민국의 정치를 이끌었다. 본관은 김해이며 충청남도 부여 출생이다. 그는 박정희가 5.16 군사 정변를 일으킬 당시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중령으로 쿠테타에 참여했다. 1951년 2월 박상희의 장녀 박영옥과 결혼했으며 1963년 육군 준장으로 진급 후 예편했다. 9선 국회의원으로 최다선 국회의원 출신이며, 1971년 박정희 정권기 제11대, 김대중정부기 31대 DJP 연정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민주공화당 총재와 신민주공화당 총재를 거쳐 자유민주연합 총재를 지낸 그의 주요 거주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청구동이었다. 육군사관학교를 8기로 졸업하고 1961년 5.16 군사 정변의 중심 인물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를 창설해 초대 부장에 취임해 활약했지만, 공화당의 내분으로 정계를 은퇴했다. 1971년 공화당 부총재직을 맡고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같은 해 6월 국무총리에 취임함으로써 정계에 복귀후 5년6개월간 최장수 총리를 지내며, 대덕연구단지, 민속촌등을 기획했다. 1979년 공화당 총재를 맡았으나,1981년 신군부의 압력으로 정계 은퇴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7년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며 정계에 복귀하였다. 1990년 3당합당에 참여하여 민주자유당 최고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1995년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고 초대 총재가 되었다. 2004년에 제17대 총선에서 낙마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당시 제2인자였으며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과 함께 박정희의 후계자 또는 잠재적 대안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1971년 6월 4일부터 1975년 12월 18일까지 대한민국의 제11대 국무총리를, 1998년 3월 3일부터 2000년 1월 12일까지 제31대 DJP 연정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2018년 6월 23일에 숙환으로 인해 향년 9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가계. 김종필은 1926년 1월 7일에 충청남도 부여에서 7남 중 5남으로 태어났다.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72대손이자 안경공파(安敬公派) 김영정의 22대손이었다. 그의 집안이 충남 갑부로 성장한 것은 그의 할아버지 김현택이 갑부로 성장하여 가세를 일으킨 것이며, 김현택은 부지런해 생전에 쌀 2000섬 지기가 됐다. 3대 독자였던 아버지 김상배는 토지측량사를 지냈다. 토지등록 분규 등을 잘 해결해 신망을 얻은 후 규암면장과 부여면장으로 지역사회의 유지가 됐으며, 어머니 이정훈은 전주 이씨로 아버지보다 12살 연하였다. 아버지 김상배는 일제강점기 당시 부여군 규암면장을 지냈다. 아버지는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집안에 숨겨주고 돌봐줬다. 의열단 단원인 유석현 등은 1921년 일본 경찰에 쫓기다가 김상배의 집에 피신했다. 그의 부모는 모두 아들만 7명을 두었다. 위로 4명의 형과 아래로 2명의 동생이 있는데 큰형 종호는 40대의 나이에 공무원 시험을 거쳐 서울 종로구청 주사로 근무했고, 1970년에서 1980년까지 중앙곡물협회 회장직을 맡았다. 둘째 형 종익은 민주공화당 6·7·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막내동생 종식은 중학생 무렵 한국 전쟁 중에 실종됐다. 그 뒤 김종필은 실종된 막내동생을 오랫동안 찾았으나 찾지 못했고, 그의 측근인 보좌관 김석야는 2000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총리께서 수십년 동안 막내동생을 찾으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끝내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했다. 학창 시절. 근엄한 한학자이기도 했던 아버지 김상배는 그를 직접 야단치는 법이 없었고, 특히 그의 칭찬을 주변에 얘기해서 간접적으로 듣게 했다고 한다. 소년기에 그는 아버지로부터 붓글씨를 배웠다. 그러나 글을 쓰다 싫증이 나서 도망쳤다가 밤늦게 돌아오면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인 뒤 나머지 글쓰기를 마치게 했다 한다.1944년 3월에 공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당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중학교(고등보통학교) 학제가 4년으로 단축되어 있었다.) 청년기.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는데, 정식 교육을 받지는 않았고 중학교 때 수채화를 그려본 기초 뿐이었다. 그러나 뒤에 40세가 넘어 유화를 배우기 시작하여 본격 화가의 경지에 오르기도 했다. 1944년 3월, 전쟁으로 4년으로 학제가 단축되어 있던 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바로 주오대학교 예과에 입학했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곧 자퇴하고 귀국하여 대전사범학교에 입학했고 1945년 3월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보령군의 소학교 교사로 발령받았으나 교편을 잡은 지 2개월 만인 8월 15일 광복을 맞고 아버지가 경성부에 사준 집을 팔아 자동차 회사를 운영하여 재력을 쌓았다. 1946년 경성사범학교 사회교육과에 입학하였다. 같은 해 8월 경성사범학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통합되어 격상되었다. 군인 생활. 군 복무 초기. 1948년 서울대 사범대학 3학년이었던 김종필은 부친이 작고한 후 집안이 어려워지자 내 힘으로 앞길을 열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파고다공원 앞 모병소에 원서를 내고 군에 입대하여 충청남도 온양에 주둔하는 육군 제13연대에 배속된다. 그러나 1주일 만에 구타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탈영하였다. 이후 친구 집을 전전하던 중 극장에 영화관람을 갔다가 육사 교도대와 만나게 되어 자수하고 기간병으로 재입대하였다가 육사 제8기생으로 입학해 1949년 5월에 소위로 임관했다. 소위 임관과 동시에 육군 정보국에 배치되었다. 그 뒤 주로 참모직을 역임하고 1949년 12월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에 중위로 있었다. 이후 한국 전쟁에 참전했고, 육군 정보국 전투정보과 북한반장에 임명, 갑작스런 남침으로 무너지는 전선을 시찰하고 전세를 정확히 보고했으며, 1계급 특별승진해 육군 대위가 됐다. 한국 전쟁 후반에는 6사단 19연대로 배속되어 수색중대장 등으로 북한군과 교전하였다. 1951년 1월에 박상희의 딸 박영옥과 결혼하였고 그해 육군 대위로 지내면서 제1차 도미 유학 장교단 150인 중 한 사람에 선발돼 조지아 포트베닝의 미국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하여 수료하였다. 1952년 다시 정보국 전투정보과 북한반 반장이 되었다. 김종필은 정보 계통에 근무하면서 야전부대에서 근무한 장교들과는 달리 시간과 활동에서 상대적으로 제약을 덜 받았기 때문에 동기생들과 언제든지 긴밀하게 접촉할 수 있었다. 이후 육본 정보국 정보과장으로 보직되었다. 항명 파동과 강제 예편. 그는 군에서 주로 정보관계 업무에 종사하다가 소령을 거쳐 1958년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장으로 부임했다. 기획과장 재직 중 중령으로 진급했는데, 다른 기수보다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하는 것이 8년 정도 늦었던 그의 동기들은 군 운영체계에 불만을 품게 됐다. 어쨌건 그는 육군 중령으로 진급한지 몇달 지나면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 과장에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정보처 처장이 되고, 이후 1960년 육군본부 정보국 행정처 처장에 임명되었다. 1960년 8월 24일 김종필과 석정선 중령은 성당에 미사 중이던 장면 국무총리를 찾아가 서면으로 정군을 요구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서면은 전달되지 않았고, 이는 후에 그가 항명파동에 연루되는 계기가 됐다. 장면 내각은 숙군을 단행하려 했고, 이때 그가 석정선과 함께 모든 책임을 지고 예편하는 것으로 파동을 마무리지었다. 예편 이후 별다른 직업이 없던 그는 정계 입문을 결심한다. 1961년 4월 19일 4.19 의거 1주년 기념 시위를 거사일로 정하고 박정희와 함께 군사 정변을 기도했지만 장면정권의 시국정화단에서 학생 시위대를 매수하여 4월 19일 당일은 조용했고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해 5월 다시 거사일을 정한다. 5·16 군사 쿠테타. 5·16 전후. 1960년에 일어난 항명 파동으로 육군 중령에서 예편했다. 갑자기 일자리를 잃게 된 김종필은 한때 '사상계'를 찾아가 이력서를 넣었으나 면접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예비역 중령 신분으로 꾸준히 박정희 등과 교류했고,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준비한다. 5·16 군사 정변에 참여했고 5·16 군사 정변이 성공하자 다시 현역으로 복귀, 육군 중령이 됐다. 이어 육군 대령으로 진급했고, 육군 준장으로 진급했다. 한편 박정희가 5·16을 거사했다는 비난을 받게 되자, 그는 "내가 박정희 장군을 모시고 5·16을 기획했다."라고 했다. 이후 군사혁명위원회(국가재건최고회의)가 구성되면서 중앙정보부가 신설, 그는 제1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된다. 6월 5일 오후 그는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5.16 군사 정변은 낡은 구세대의 정치 진출을 차단하기 위한 거사 라고 발표한다. 군사 정변 직후 그는 장인 박상희의 경력과 관련하여 사상 공세에 시달렸고, 황태성이 남하한 후에는 한일회담 직전까지 야당인사들로부터 수시로 의혹을 받게 된다. 중앙정보부 창설. 5.16 군사 정변이 성공한 직후 그는 즉시 시국정화단 등을 개편하여 정보조직인 중앙정보부를 창설한다. 초대 중정부장이었던 김종필은 중정청사 터를 조선 20대 왕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 어씨의 릉을 모신 의릉 사적지 주변으로 정하였다. 이후 의릉 입구에 세워진 중앙정보부 건물은 속칭 안가 로 불렸다. 1961년 5월 20일부터 1963년 1월까지 초대 중앙정보부장이었고, 1961년 7월에는 잡지 《사상계》의 동인이었던 함석헌이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자 사상계사 사장인 장준하를 불러 취조했다. 장준하 취조 과정. 1961년 7월호의 함석헌의 5·16 군사정변 비판 칼럼을 문제삼아 장준하를 소환했다. 사상계 7월호가 나가고 4, 5일 뒤, 퇴근시간이 되어갈 무렵 사상계사에 군인 둘이 나타났다. 그들은 혁명군에서 나왔다면서 다음날 아침 7시까지 사장과 편집 책임자를 모시러 오겠으니 그 시각까지 나와 있어 달라는 용건을 전했다. 다음날 장준하는 편집 책임자인 취재부장 고성훈과 함께 지정한 시각인 아침 7시에 회사로 나갔다. 검정 지프차 하나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고 다른 군인 2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프차는 장준하와 고성훈을 싣고 가 남산 밑 회현동 어딘가에 있는 허름한 2층 집의 한 방에다 내려놓았다. 20분뒤 김종필 이 나타났고 김종필은 사상계 7월호에 실린 함석헌의 5·16 군사정변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칼럼을 문제삼았다. 장준하는 말을 계속했다. 장준하의 말에 김종필은 앞으로 밀어놓았던 책을 급히 집어다 빨간 줄 투성이가 된 문제의 글과 권두언을 펴 여기저기 한 줄씩 읽어주며 장준하에게 들이댔다. 그는 이것은 무슨 소리이며 이것도 충고냐는 식으로 윽박질러 물었고, 이에 장준하는 항의했다. 그러나 김종필은 그가 장도영과 같은 고향이라는 점을 문제삼았다. 그러나 장준하는 장도영과의 관련을 부인했다. 장준하의 대답에 김종필은 흥미를 느껴 계속 꼬치꼬치 캐물었고, 장준하는 숨길 것이 없고 해서 자신이 평소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장도영에 대한 추억을 진술했다. 장준하에 의하면 '장준하와 장도영은 중국 서주에서 같이 있었다. 그 곳에서 한인 탈영 사건이 자주 일어나자 학도병들에 대한 감시와 핍박이 심했다. 그때 장도영은 일본도를 빼들고 탈주하는 자는 자기가 먼저 처단하겠다고 설치다가 장준하와 충돌했다. 그리고 탈출이 어려운 쓰카다 부대로 같이 옮겨가서 둘은 장준하가 벌인 '잔반 거부 운동'으로 반목한다.' 성이 같고 고향이 이웃해 있다고 해서 서로 호흡이 맞는 것도 아니었다. 같은 서북인 출신이라 하지만 장준하로서는 장도영의 이름을 들어 그 당으로 모니 참을 수가 없었다. 김종필이 장준하와 장도영의 사이를 의심할 만한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이 무렵에 사상계사에서 사상문고 100권 출간 기념 리셉션을 창경궁(昌慶宮)의 수정궁(水晶宮)에서 열었던 것이었다. 당시 사상계의 국제적인 명성 때문에 그날이 7월 4일 미국 독립 기념일인데도 미국 대사가 직접 참석하고 내외 귀빈이 수도 없이 모였는데 쿠데타 군부에서도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 이하 그 일파가 모두 왕림했다. 그때 박정희와 김종필 쪽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7월 5일 장도영 일파는 모두 체포됐다. 공화당 사전조직 구성. 1962년 1월 김종필은 민주공화당의 사전 창당조직 연구팀과 사전 조직인 동양화학 주식회사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5.16이 일어난 지 3개월 만인 1961년 8월에 김종필은 민정인수 구상의 하나로 공화당을 사전조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공화당 사전조직은 박정희의 재가를 얻은 김종필의 새 정당 창당구상 연구팀으로, 책임자는 예비역 육군중장 최영두이고, 윤천계(고려대), 김성희(서울대), 강상운(중앙대) 교수와 이종극, 김운태, 윤태림, 정범모, 박종화, 유호선, 김정렴, 김학열, 최규하, 이필석, 홍승면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1962년 1월 이 연구실의 이름을 '동양화학 주식회사'로 위장하고 종로 2가 뒷골목 제일전당포 2~3층에 사무실을 차렸다. 이어 김종필은 재건당을 조직하여, 민정에 군출신 인사들이 참여하기 위한 정식 정당 창당작업을 지속적으로 준비해 나갔다. 예편과 정계 입문.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 중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1962년 10월부터 11월까지 미국을 방문하고 귀국했다. 미국 방문 길에 그는 더글러스 맥아더 미국 육군 원수를 방문하기도 했다. 더글러스 맥아더와의 면담에서 맥아더는 김종필에게 "한국이 하루빨리 통일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한국이 통일될 때까지 죽을 수 없다."는 의사를 피력한다. 또 맥아더는 김종필에게 "한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만주 폭격을 주장"했으며 "한국 전쟁의 휴전에 있어서 미국은 잘못을 저질렀으며, 한국에서의 북진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의 인도네시아 사태가 발전된 것"이라고 답하였다. 또한 맥아더는 김종필에게 "이승만 박사에 대한 감정을 완화하여 그를 고국 땅에 귀국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1963년 1월에는 육군 준장에서 예편했고 중앙정보부장에서 사퇴했다. 이어 민주공화당의 사전조직인 재건당을 창당했고, 직접 윤일선, 임영신, 여운홍, 임병직, 윤치영, 정구영 등을 찾아다니며 설득, 신당 창당에 적극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 평소 장면 내각을 미워하던 윤치영, 여운홍 등은 그의 도움 요청을 적극 수용하였다. 같은 해 2월에는 정구영, 윤치영 등과 함께 민주공화당 창당 조직에 참여했다. 정치 활동. 1971년 ~ 1975년, 1998년 ~ 2000년에 걸쳐 두 차례 국무총리를 역임했으며, 1963년 6대 국회 때부터 의정활동을 해 총 9번 임기를 채웠다. 이것은 김영삼, 박준규와 함께 최다선 국회의원 기록이다. 3공 시절. 제3공화국 초기. 1961년 5·16 군사 정변 당시 박정희의 핵심 브레인으로 일명 혁명공약을 기초했으며, 5월 20일에는 중앙정보부를 조직하여 부장으로 취임하였다. 1962년 박정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있을 때부터 한일협정의 실질적인 교섭을 담당했다. 1963년 1월 민주공화당을 창당하기 위해 육군준장으로 예편(군번 13517)했고, 재건당이라는 가칭 조직을 창당했다가, 2월부터 정구영 등과 함께 민주공화당 창당준비위원회를 이끌었다. 이후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자 야당 인사들은 구정치인 정정법으로 묶어놓고 자신들만의 사전조직을 비밀리에 결성했다며 비난했다. 한편 꾸준히 육사 5기생, 6기생들의 견제를 받던 그는 그해 2월 25일, 민주공화당 창당 준비위원장을 사퇴하고 순회대사의 자격으로 동남아시아와 구라파(유럽) 여러 곳을 역방하고저 출국했다가 귀국하여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였다. 1963년 11월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1963년 12월 민주공화당 당의장에 선출됐다. 1964년 8월에는 하버드대학교 정치경제학과를 수료하였다. 1965년 6월, 당시 일본 외무상인 오히라 마사요시와의 비밀 접촉으로 '김종필·오히라 메모'에 합의해 협정 체결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으나 이 과정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 약탈 문화재 반환, 재일동포 지위, 동해어업권, 강제 동원 피해자 보상, 원폭피해자 문제 등 주요 현안은 모조리 무시한 채 경제적 보상과 차관을 대가로 모든 문제의 종결을 선언해버려 이 후 한일 관계에 계속되는 문제점과 야당 인사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김-오히라 메모. 1961년 11월 22일 박정희는 일본을 방문하여 이케다 하야토 총리를 만나 "맨주먹으로 황폐한 조국을 이끌어 보겠다는 의욕만은 왕성하다"며 협조를 요청했다. 박정희의 협조 요청에 따라 일본 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 등이 한국에 입국했다. 1962년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오히라 마사요시를 만나 협상의 내용을 합의하였다. 이 협상 내용은 "김-오히라 메모"로 불린다. 후일 김종필은 "내가 이완용이 소리를 들어도 그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적은 액수이더라도 빨리 공장을 세우고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우리 경제성장이 빠르지 않았느냐. 후회하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김종필과 오히라의 회동 이후에도 1962년 케네디와 요시다의 회담, 1963년 11월 존슨과 박정희의 회담 등을 통하여 한일간의 외교관계에 대한 내용이 정리되었다. 회담 타결이 막바지에 이른 1964년 미국은 러스크 국무장관과 극동문제담당차관 등이 한국에 방문하여 일본과 한국의 조속한 수교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1964년 1월부터 한국에서는 한일협상을 반대하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3월에는 5·16 이후 없었던 학생 시위가 시작되었다.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반대한다는 학생 시위는 6월 3일 절정을 이루어 6·3 한일협정 반대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비상 계엄을 선포하여 반대의 목소리를 탄압하고 회담을 지속하여 1965년 2월에는 기본조약이, 4월에는 어업협정이 가조인되었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이 정식으로 조인되었으며, 8월 14일 대한민국에서는 여당 단독으로 국회가 열려 한일기본조약을 비준하였다. 1965년 12월 18일 상오10시반 한국의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두 나라의 국교정상화를 최종적으로 매듭짓는 기본조약 및 협정에 의한 비준서를 교환했다. 3선 개헌 전후.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되었다. 민주공화당 내에는 그를 지지하는 파벌이 나타났고 이들은 1971년 차기 대선에서 박정희가 물러나고 그가 후임이 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3선개헌을 고려하던 박정희는 1968년 5월 '국민복지회 사건'을 이용하여 김종필 지지세력을 공화당에서 제명하였다.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김용태 의원이 중정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등에 수모를 겪었다. 이일로 인해 김종필은 같은해 5월 30일에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국민복지회는 송상남이 주도하여 1968년 3월에 만든 단체였다. 이 단체 소속 의원들과 당원들이 제명처분을 받은 이유는 이들이 3선개헌을 반대하며 1971년 대선에 김종필을 공화당 후보로 추대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상남, 김용태등 회원들은 국민복지회가 '농촌 근대화운동'을 위한 조직이었다고 항변했다. 물론 이들의 주장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울러 중앙정보부의 조사과정에서 발견된 '시국판단서'는 송상남이 개인적으로 작성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이 문건이 제명처리에 주요근거가 되고 말았다. 정계은퇴후 부인의 신병치료차 방일하였다가 1970년 4월에 귀국하였는데, 이때부터 삼선개헌 지지로 돌어서면서 정계에 복귀했다. 1970년 12월 민주공화당 총재 수석상임고문, 1971년 3월 민주공화당 부총재를 지냈다. 유신 시대. 국무총리 재직 시절. 1972년 5월엔 PTP 명예 총재에 선출되기도 했다. 1973년 6월에는 서독을 순방하고 귀국했다. 1974년 일요화가회 명예회장, 1974년 5월 5·16민족상 이사장, 대한올림픽위원회 명예위원장 등을 지냈다. 유신정권의 국무총리를 지내는 등 실권을 유지했다. 1976년 한일의원연맹 한국측 회장에 취임했고, 1977년 한일친선협회 중앙회장에 선출됐다. 1973년 1월 해리 트루먼의 추도식에 참석차 비행기편으로 미국 워싱턴을 방문하고 귀국하였다. 그해 5월 28일 다시 출국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도착하여 심흥선(沈興善) 주스페인 대사를 만난 뒤 알프레도 산체스 공보, 관광부 장관,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 스페인 부총통을 면담하고 6월 5일에는 프랑스를 방문 하고 귀국했다. 박정희와의 갈등, 외교 특사 활동. 그러나 정권의 2인자로 끊임없이 박정희와 갈등했고, 1975년 12월 18일 국무총리직에서 전격 경질된다. 박정희는 그 대신 그의 둘째 형 종익을 대신 충남 부여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내보냈다. 이후 김종익은 7, 8, 9대 의원을 지내게 됐다. 김종필이 박정희와의 갈등 때문에 파란을 겪고 있을 당시 정권측에서 부여지역 민심을 달래기 위해 동생 대신 억지로 부여지역구에 출마시킨 것이었다. 1977년 2월부터 3월까지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중남미를 순방한다. 그해 2월 10일부터 14일까지 중화민국을 방문하여 장징궈, 옌자진과 면담한 뒤 일본을 방문하여 후쿠다 수상, 오히라 자민당 간사장 등을 면담한 뒤 모로코 등을 방문했다. 그해 3월에는 브라질 등을 방문한 뒤 4월 11일 귀국하였다. 1979년 3월 제10대 국회의원에 재선하였다. 그해 6월에는 유럽 특사로 파견되어 독일과 프랑스 등을 순방하고 귀국했다. 유신 붕괴 직후. 1979년 10월 박정희가 사망한 후 1979년 11월 12일 민주공화당 당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총재로 선출되고, 1979년 11월에는 5·16 민족상 재단 총재이 됐다. 박정희 사후 공화당계 정당의 유력자로 부상하면서 재야 운동가들은 그에게 민주적인 선거 절차에 의한 정권 교체에 협조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김종필은 민주공화당 총재로서, 김영삼, 김대중 등과 함께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 부각했다. 1980년 5월 18일 새벽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함께 보안사에 체포돼 감금당했다. 5월 18일 아침 최규하 정권은 관제보도를 통해 김종필 등 10여 명을 유신 시대의 부정축재자로 발표했다. 이런 조치와 감금을 당하는 와중에 수경사령관 노태우 소장은 김종필이 감금된 지하감옥을 방문하고, 존댓말을 쓰며 깍듯이 예우했다. 김종필은 자신의 고사와 이승만, 박정희 시절의 2인자들의 몰락과 비참한 최후를 설명하며 절대 1인자 (당시 1인자란 전두환을 지칭)에게 밉보이지 말 것, 전두환이 서운하게 하더라도 절대 서운한 표현을 해서는 안되며 서운함을 드러냈을 경우 아랫사람과 주변의 이간질하는 세력이 나타나 관계를 악화시킨다는 것 등 2인자로서의 처세술을 노태우에게 일러주었다. 1980년 9월 그는 신군부에 의해 재산을 헌납하도록 강요받고, 정계에서 은퇴한다는 각서를 썼다. 그가 정계에서 은퇴하면서 구 민주공화당, 유정회계 인사들은 한국국민당을 창당해 활동했다. 그러나 정치금지가 해제되면서 김종필이 정계에 복귀하자 구 공화당, 유정회 인사들은 그를 총재로 받들고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였다. 신군부에 의해 정계를 강제 은퇴당한 그는 이후 운정재단을 운영하면서 사회사업에 종사하였다. 정치 금지와 복귀. 1980년 5·17 사태 이후 정치활동이 정지당한 채 1987년까지 야인생활을 하며 지냈다. 1987년 정계에 복귀해 10월에는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총재에 추대됐으며 신민주공화당의 출범 직후 구 민주공화당과 유정회의 후신인 국민당을 흡수했다. 87년 8월 신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이어 그는 1980년 무렵 전두환 정권에 의해 해직된 공무원과 공직자들의 복직을 공약의 하나로 내세우기도 했다. 12월의 대통령 선거 결과 4위로 낙선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의 5공 청산과 권위주의 철폐 등에 비호감을 느낀 군사 정권 출신 인사들의 지지에 힘입어 이듬해인 1988년 4월에는 1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공동 여당 창립. 삼당 합당과 탈퇴. 민주정의당의 노태우로부터 3당합당의 제의가 오자 고려 끝에 노태우의 제안을 수용했다. 1990년 초 3당합당을 통해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노태우의 민주정의당과 통합하고, 민주자유당 출범에 참여해 다시 집권여당의 정치인이 되고, 1990년 2월 민주자유당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1992년 3월 민주자유당 대표위원, 김영삼 정부 초기에 다시 집권 민주자유당의 대표가 됐으나, 내각제를 추진하려는 그의 견해와 대통령중심제를 고수하려는 김영삼 간의 정치적 견해 차이로 갈등하게 됐다. 한편 차기 대선유력주자로 거론됐으나 노태우는 박철언을 선택하려 했고, 이후 김영삼 계열이 집단 탈당조짐을 보이자 노태우는 김영삼을 후계자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대선 예비주자로서의 기회를 얻지도 못했다. 1992년 8월에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 재선임되었다. 그는 내각 책임제 개헌을 주장했는데 김영삼과 13대 대권을 놓고 경쟁하게 됐다. 1993년 2월에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 문민정부 출범 이후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신군부, 하나회 등 전두환 계열의 군부 숙청 이후 당내 군부세력을 제거하려던 김영삼과의 불화 끝에 민주계는 그의 퇴진을 이끌어낸다. 1995년 2월 9일 그는 민자당 총재직 사퇴와 동시에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이라는 독자정당을 다시 창당했다. 이후 일부 영남권 인사들을 포섭하고 박정희, 전두환 정권 출신 인사들과 지지층의 표심을 공략했으나 실패했다. DJP연합과 국민의 정부 출범. 1995년 3월에 자민련의 총재에 추대되었고 1996년 4월 제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념적 차이가 있는 김대중과 손을 잡아 DJP연합으로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고 1997년 11월에는 자유민주연합 명예총재로 정계일선에서 물러났다. 그가 김대중과 손을 잡자 보수주의 세력에서는 그의 연합을 놓고 비난을 퍼부었다. 이후 국민의 정부의 첫 국무총리 서리로 5개월간 지낸 후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DJP연합 정권의 한 축으로서 총리를 포함한 일부 각료의 인사권 등을 행사하였고 '국민연금' 등의 주요 정책에서도 그 권한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내각제 개헌, 대북 관계 등을 놓고 김대중과 갈등했고, 2001년 결국 DJP연합은 붕괴된다. 그가 총리직에서 사퇴한 뒤 박태준이 후임자가 되었다. 2000년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16대 총선에서 그가 이끄는 자민련은 17석을 얻는 데 그쳐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다. 2001년 9월 국회에서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안을 가결한 것을 계기로 김대중 정부와 결별을 선언했다. 이후 김종필은 소수야당의 총재로 남게 됐다. 1999년 2월 10일부터 11일까지 인도를 방문했다. 김종필은 한국이 파트너 국가로 참가한 인도 엔지니어링 무역 박람회《IETF'99》의 개막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1999년 6월 12일 제1회 자랑스런 미술인상(미술인 지원에 공로)을 받았고, 1998년 7월 한국미술협회 '대한민국 50년을 만든 50대 인물'에 선정됐으며 1998년 5월의 홍콩 아시아위크지 앙케이트 조사에 아시아 유력인사 50인 35위에 선정됐다. 1999년 미국 마르퀴즈 후즈 후사의 1999년판 후즈 후 인 더 월드에 등재됐다. 제16대 대통령 선거. DJP연합이 파기되고 김대중 정부와 결별을 선언한 김종필은 2002년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월 15일, 내각제를 핵심공약으로 내세운 뒤 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충청권 지역 이외에 지지세를 많이 잃어버린 탓에 지지율이 오르지 않자 독자출마를 포기했다. 2002년 대선 기간동안 김종필은 한나라당의 대선후보 이회창과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노무현 중 어느 인물도 지지하지 않고 중립을 유지했으며, 특히 두 후보 모두 '삼김정치' 청산을 내세우며 대선판에 등장한 건 삼김의 정치세가 2000년대에 들어 악화되었음을 보여주었다. 2005년 정계은퇴 이후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2000년 이회창에게 20석 이하의 자민련도 교섭단체 지위를 가질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나중에는 그런 말을 한 적도 없다는 거짓말을 했고, 이 때문에 그를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지지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자민련의 정치세는 더욱 악화되었으며 김종필은 소수 야당 총재로 남아 정치활동을 지속하였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와 정계은퇴. 2004년 새천년민주당, 한나라당이 대통령 노무현 탄핵소추안을 발의하자 그는 처음에는 탄핵에 반대하였으나, 이 후 의원들의 자유의사로 돌리며 사실상 중립을 선언했다. 김종필은 탄핵안 표결에 불참하였다. 그러나 김종필은 탄핵 역풍을 이겨내지 못했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민련은 지역구에서 4석을 획득하는 데에 그치면서 교섭단체도 구성하지 못했고, 비례대표에서는 후보 15명(1번 김종필, 2번 성완종, 3번 조희욱, 4번 김종택, 5번 유운영, 6번 이희자, 7번 신은숙, 8번 김용준, 9번 이병우, 10번 김영일, 11번 문도연, 12번 박배철, 13번 오영자, 14번 김용희, 15번 권경애)이 출마했지만 지역구 5석, 비례대표 득표율 3% 이상을 기록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도 비례대표가 나오지 않았다. 10선에 실패한 김종필은 총재직을 사퇴하고 정계 은퇴 선언을 하여, 43년만에 정치계에서 퇴장했다. 김종필이 은퇴하면서, 2004년을 끝으로 삼김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이후 충청권 지역 정당으로 국민중심당, 자유선진당 등이 만들어졌지만 자신은 이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2007년 대선에서도 한나라당 후보인 이명박을 지지했다. 2008년 3월 26일, 김종필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서울 강남에서 회동을 갖고 한나라당 공천 결과가 편파적으로 진행됐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이명박을 강력히 성토했다. 2000년대 이후 한성디지털대학교의 명예 석좌교수에 위촉되기도 했다. 2008년 12월 15일 무렵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 입원, 이후 초인적인 재활운동을 통해 2010년 무렵 거의 정상을 회복했다. 사망. 정계를 은퇴 한 뒤 200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치료와 재활을 반복해오던 김종필은 2018년 5월 무렵부터 음식을 제대로 삼키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2018년 6월 23일에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호흡곤란 증세를 일으켜 순천향대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결국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향년 92세였으며, 사인은 노환으로 알려졌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고 장례는 5일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6월 27일 영결식 및 발인식이 거행되었고, 그의 유해는 충청남도 부여군의 종중묘역에 안장되었다. 가계. 직계도. 1세 김목경(金牧卿) 2세 김보(金譜) 3세 김도문(金到門) 4세 김근(金覲) 5세 김효분(金孝芬) 6세 김진손(金震孫) 7세 김영정(金永貞) 8세 김세균(金世鈞) 9세 김종수(金從壽) 10세 김희철(金希哲) 11세 김예직(金禮直) 12세 김수량(金守良) 13세 김대형(金大亨) 14세 김중하(金重夏) 15세 김기서(金箕瑞) 16세 김태조(金泰祚) 17세 김광현(金廣鉉) 18세 김제원(金濟原) 19세 김권식(金權植) 20세 김현택(金顯澤) 21세 김상배(金相培) 22세 김종필(金鍾泌) 평가. 긍정적 평가. 김종필은 3김 중 하나인 대한민국의 2인자로써 막대한 정치적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5.16군사정변의 시스템을 설계하여 비록 헌정을 붕괴시킨 사건이지만 안정적으로 관리하였고 훗날 국가정보원이 되는 중앙정보부를 설립하여 공안정보기관에 기여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제1차 경제개발계획수립에도 도움을 주었고, 이런 김종필의 시스템으로 독재정권이기는 하지만 박정희 정권을 안정시켜 안정적 경제발전을 기여하기도 하였으며 박정희정권 이후에도 국무총리를 역임하는 막대한 권력을 행사한 사람이기도 하다. 부정적 평가. 군사 정권 출신이며 5.16 군사 정변의 주동자의 한 사람이라는 점과 박정희 정권에 부역하였다는 점은 부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반대로 보수 진영에서는 그가 1998년 DJP연합으로 정권교체에 기여한 점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 밖에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3김으로 불리며 충청권의 맹주로 자임하며 지역갈등, 지역정치를 조장했다는 점에서도 부정적인 시각이 일부 존재하고 있다. 일화. 아들 김진은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유타 대학교에 유학을 하던 중 그곳에서 만난 과테말라 여성 리디아와 결혼했다. 당시 그의 반응에 대한 측근의 진술로는 "김 총리가 미처 말리고 어쩌고 할 틈도 없이 김진씨가 이미 모든 것을 결정한 다음이라 김 총리도 속수무책으로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라고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 초기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군사 정권을 이끌던 김종필은, 호텔의 성격이 외래 관광객과 주한 유엔군 휴가장병 유치시설로 규정된 만큼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자신이 주도해 ‘워커힐’이라는 이름으로 호텔을 지었다. 세종문화회관 건축 당시 설계도에도 없던 파이프 오르간 설치를 김종필 총리가 지시한다. 당시에는 이 오르간이 동양 최대의 오르간이었다. 역대 선거 결과. 국회의원 선거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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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6대 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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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1926년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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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963년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달력. 음양력 대조 일람. 1963년은 계묘(癸卯)년이며, 각각의 음력 월은 아래 도표를 참조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