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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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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983년은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2018
72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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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프 메카티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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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
함부르크( , , )는 독일 북부에 있는 주이며 도시이다. 독일 최대의 항구 도시이자 제2의 대도시이다. 정식 이름은 함부르크 자유 한자 시(; )이다. 알스터 강, 빌레 강과 엘베 강이 흐른다. 북쪽으로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남쪽으로는 니더작센주와 접한다. 도시의 기원은 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950년 즈음에 엘베 강 유역에 함마부르크(Hammaburg)가 건립되고, 중세에는 한자 동맹(Hansa-Städtebund)의 일원이 되었다. 현재 독일 연방 정부 조직 형태상 함부르크는 지방 자치주에 해당한다. 시민은 개신교가 많고, 정치적으로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세력이 강하다. 면적은 755km2. 인구는 2004년 현재 174만 명. 실질적 외국인은 적지만, 항구에서 일하는 외국인은 많다. 역사. 기원전과 로마 시대에 켈트 족과 색슨 족(게르만 족의 일파)이 살고 있었으며, 825년 하마부르크 성이 함부르크 지방에 건설된 뒤 번창을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또는 프리드리히 1세)는 독일의 왕으로 선출된 뒤 1189년 이 도시에게 무역특권과 사용료 면제, 운항 특권을 인정했다. 중세가 지나고 르네상스 까지, 에스파냐, 노르웨이, 포르투갈, 영국과 네덜란드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르네상스 이후에도 빛나는 황금기를 맞이해, 뤼베크 다음으로 한자 동맹에서 중요한 항구 자리를 차지해, 특권을 맘껏 누렸다. 그 후 20세기에는 서독의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라는 명예를 얻었고, 21세기 초에도 꾸준히 증권거래소, 은행 등으로 붐비는 도시이다. 스포츠. 함부르크는 때때로 '독일 스포츠의 중심지'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 지역에서 1 분데스리가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축구팀인 함부르크 SV이 있고, 지역 라이벌팀인 FC 장크트 파울리가 있다.
2020
75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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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
마르셀 프루스트()는 1871년 7월 10일 파리에서 태어나 1922년 11월 18일 사망한 프랑스의 작가이다. 프루스트의 주요 작품으로는 1913년부터 1927년까지 출판된 연작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있다. 교양있고 유복한 가정(프루스트의 아버지는 파리 대학교 의학부 교수였다)에서 태어난 마르셀 프루스트는 어린 시절 허약한 아이였으며 천식으로 인한 심각한 호흡기 문제로 전 생애에 걸쳐 고통받았다. 프루스트는 젊었을 때부터 귀족들의 살롱에 드나들면서 그곳에서 예술가들과 작가들을 만나며 사교계의 딜레탕트로 유명세를 떨쳤다. 집안의 재산덕에 프루스트는 일을 하지 않았으며, 끝내 미완으로 남은, 《장 상퇴유》라는 제목으로 작가 사후 1952년에 출판된 소설을 1895년부터 쓰기 시작했다. 1900년 프루스트는 존 러스킨의 발자취를 따라 예술 작품들을 알아가고자, 계획하던 소설 집필을 중단하고, 대신 베네치아와 파도바로 여행을 떠나 그곳에 관한 글을 썼으며 러스킨이 저술한 두 권의 책, 《아미앵의 성서》와 《참깨와 백합》을 번역했다. 1907년부터 프루스트는 1913년부터 사후 1927년까지 7권으로 출판된 자신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기 시작했으며 2권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로 1919년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1922년 11월 18일 기관지염을 치료받지 못한 나머지 사망했다. 프루스트는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에 매장되었고 이 거장에게 경의를 표한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뒤이은 세대의 작가들은 프루스트를 최정상 작가 반열에 올리며 그를 진정한 문학의 신화로 만들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작품은 작가의 고유한 세계를 그려야 하는 예술의 역할처럼 당시의 시대상과 감성적인 기억의 주된 성찰을 보여준다. 그 뿐 아니라 작품은 동성애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프루스트적 묘사로 흐릿하게 그려낸, 실패라는 감정과 존재의 허무에 관한, 사랑과 질투의 성찰이기도 하다. 또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200명 이상의 등장인물이 나오는 광대한 인간 희곡이다. 프루스트는 신랄한 문체로 경이롭고 때로는 냉소적으로 다뤄지는 세계, 유년시절 콩브레의 레오니 숙모네 집과 파리 살롱들, 귀족과 부르주아의 사회가 대조되는 것처럼 작품내에서 보여지는 장소들을 재창조했다. 이러한 사회적 무대는 마르셀 프루스트가 익살극의 주인공처럼 묘사한 각양각색의 등장 인물들에 의해 생동감있게 그려진다.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실존 인물들에게서 모티브를 따온, 시대를 그린 회화이자 로망 아 클레로 탄생했다. 프루스트의 특징은 형성의 과정에서 창조의 나선을 따라, 항상 잡을 수 없는 실재의 전체성에 도달하기를 추구한, 문장을 길게 늘린 그의 문체에서도 찾을 수 있다. 생애. 가족과 어린 시절. 마르셀 프루스트는 파리 (16구역 오퇴유 구) 라 퐁텐가 96번지에 위치한 외종조부 루이 베유의 주택에서 태어났다. 이후 이 주택은 팔렸고 다른 건물을 짓느라 헐렸으나, 그 다음 지어진 건물 역시 모차르트 대로 건설로 인하여 헐렸다. 어머니 잔 클레망스 베유(1849년, 파리-1905년, 파리)는 메스 출신의 알자스로렌계 유대인 주식 중개인 나테 베유(1814년, 파리-1896년, 파리)와 아델 베른카스텔(1824년, 파리-1890년, 파리)의 딸로, 아들에게 다채롭고 깊은 교양을 주었다. 그녀는 아들에게 때로는 귀찮게까지 애정을 쏟았다. 그의 아버지 아드리앵 프루스트 박사는 외레루아르 일리에 출신 집안에서 태어난 파리 대학교 의학부 교수였으며, 전염병 대책에서 정부에게 자문을 한 명망있는 위생학자였다. 마르셀은 1873년 5월 24일 태어난 남동생 로베르가 있었다. 로베르는 후에 외과 의사가 되었다. 프루스트의 대부는 예술품 수집가 외젠 뮈티외였다. 1870년 공성과 1871년 파리 코뮌 시절 그를 임신한 어머니가 처했던 궁핍한 생활 탓에 그가 허약하게 태어났다고 여겨진다. 파리 코뮌의 혼란으로부터 프루스트의 부모는 오퇴유로 피난간다. 프루스트는 고통스런 유년기를 보냈지만 부모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프루스트는 허약했고 봄은 그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계절이었다. 아름다운 봄날에 분비되는 꽃가루는 그의 천식을 더 악화시켰다. 아홉 살 때 부모님과 불로뉴 숲을 산책하면서 프루스트는 천식 발작 증세를 호소했고 그의 호흡기는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자식에게 최후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산책 도중 언제라도 천식 발작으로 인해서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프루스트의 전 생애에 걸쳐 봄이 올 때마다 도사렸다. 프루스트의 아버지는 천주교 신자이고 친정 부모의 뜻에 따라 천주교로 개종하지 않은 어머니는 유대교 신자라는 두 종교가 결합된 환경 속에서, 프루스트는 파리 생 루이 당탱 교회에서 천주교 세례를 받았으나, 종교와 관련하여 자신을 규정하지 않고자 했다. (스스로는 적어도 유대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프루스트는 자신이 가톨릭 교도라고 글에서 쓴 적이 있으며, 그의 장례식 역시 교회에서 치뤄졌다. 그럼에도, 편지에서 그는 "신봉자(croyant)"는 아니라고 언급한 바 있다. 확고한 드레퓌스 지지자였던 프루스트는 당대 만연한 반유대주의에 민감했으며, 몇몇 유명 작가들로부터 반유대주의적인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젊은 시절. 프루스트는 초등교육으로 마리 파프 카르팡티에의 수업을 받았는데, 작곡가 조르주 비제와 주느비에브 알레비의 아들인 자크 비제가 여기서의 동창생이었다. 주느비에브는 먼저 삼촌 집에서 살롱을 열었는데 그곳에는 여러 예술가들이 모였다. 1886년 변호사 에밀 스트로스와 재혼하고 나서 그녀는 자신의 살롱을 열었으며, 프루스트는 그곳의 단골이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1882년 리세 콩도르세에 입학해서 공부를 계속 해나갔다. 그는 5학년 때 유급했으나 1884년 12월에는 처음으로 우등생 명부에 이름이 올라갔다. 그는 종종 건강상을 이유로 결석했지만, 소설 장 상티유에서 서술한 것처럼 빅토르 위고와 뮈세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철학 수업에서 알퐁스 다를뤼의 제자였고, 이 무렵 자크 비제와 친하게 지냈다. 그는 학교에서 문학 잡지를 함께 만들던 페르낭 그레그, 자크 베녜르와 다니엘 알레비 (자크 비제의 6촌)와 교우관계를 쌓기도 했다. 그의 첫사랑은 당시 러시아 제국의 폴란드인 외교관의 딸 마리 드 베나르다키였다. 목요일 오후마다 둘은 후에 대통령이 되는 펠릭스 포르의 두 딸, 앙투아네트와 뤼시 펠릭스 포르 고요와 레옹 브룅슈비크, 폴 베나제, 모리스 에르베트와 함께 샹젤리제 공원에서 놀았다. 프루스트는 1887년 마리 드 베나르다키와 절교하게 되었다. 이로써 그의 첫 사랑, 어머니를 제외한 타인에게 사랑을 받고 사랑을 준 첫사랑은 실패했다. 베나르다키는 프루스트가 이후 찾고자 했던 그가 잃어버린 첫 소녀("jeune fille",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권 꽃핀 소녀들의 그늘과 그 책의 주제)였다. 프루스트의 첫 문학 활동은 리세 고학년 때에 이뤄졌다. 시간이 지나 1892년, 그레그는 콩도르세 동창들과 함께 소규모의 잡지 <향연"Le Banquet">을 창간했고 프루스트는 이 잡지에 글을 썼다. 그 후 파리의 여러 살롱들을 드나들며 사교계 출세를 하려던 그는 스노비즘이라는 세간의 평가를 들었다. 이후 그는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아들인 6살 연상의 뤼시엥 도데와 친분을 쌓았다. 젊음은 훗날의 작가 프루스트를 사로잡았다. 그들은 1895년 수업에서 만났다. 서로에게 적어도 애정을 보인 그들의 관계는 장 로렌의 신문 기사에서 밝혀졌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국가의 부름을 받고 1889년부터 1890년까지 오를레앙의 76 보병연대에서 복무하였고, 거기서 좋은 추억을 쌓았다. 그는 로베르 드 빌리와 친구가 되었다. 파리에서 그의 절친한 친구가 된 가스통 아르망 드 케야베와 프루스트가 반한 그의 약혼녀 잔 푸케를 알게 된 것도 이 시절이었다. 그는 소설 속 등장인물 로베르 드 생루와 질베르트를 이들을 모델로 창작했다. 그는 마담 아르망 드 카야베의 살롱에 초대받기도 했다. 그는 끝까지 이 살롱의 단골이었고,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였던 아나톨 프랑스(베르고트의 모델)를 이곳에서 만나게 된다. 전역 후 사회에 나와서 그는 사립정치학교에서 그가 '박식하다'고 평가한 알베르 소렐과 아나톨 르루아 보리외의 강의를 들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외무고시나 국립고문서학교(École des chartes)에 합격하겠다고 나섰다. 후자에 더 관심을 들인 그는 국회도서관 사서 샤를 그랑장에게 글을 썼고, 먼저 소르본에서 학위를 따기로 결정한다. 소르본에서 프루스트는 6촌의 남편인 앙리 베르그송의 수업을 들었다. 그는 베르그송의 결혼식에서 참석하기도 했다. 프루스트의 작품에서 베르그송의 영향은 종종 중요하게 생각되며 프루스트는 그것을 옹호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1895년 3월 문학사 학위를 받는다. 1896년 그는 세기말 문체로 쓴 시, 산문, 단편 모음집, <즐거움과 나날들"Les Plaisirs et les Jours">을 출간하였다. 이 모음집에는 프루스트와 작곡가 친구 레날도 안과 함께 살롱에 드나들던 마들렌 르메르의 삽화가 수록되었다. 그는 1894년 봄에 샹송 그리스를 부른 쥘 마스네의 제자이자 레이날도 안의 부인인 르메르와 만났다. 23살의 프루스트와 20살의 레이날도 안은 1894년 여름 샤토 드 레베이옹에서 열린 파티에서 보았다. 이 책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고 비평가들은 책에 대해 호된 비판을 가했다. 특히 작가 장 로렌은 가차없는 평가를 내렸다. 그는 새벽에 총을 들고 결투하겠다고 말했다. 그에 맞서 마르셀 프루스트는 입회자인 화가 장 베로와 함께 똑같이 총 들고 그를 만나러 갔다. 누구 하나 다치지 않고 끝났지만, 어느 누구도 막 등단한 이 작가를 보고 슬퍼하지 않았다. 이 책은 프루스트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권이 나온 뒤에도 그가 사교계 딜레탕트라는 평을 듣게 했다. 《장 상퇴유》 집필. 집안의 재산은 프루스트에게 쉬운 삶을 보장해줬으며 그를 부르주아의 포부르 생 제르맹과 포부르 생 오노레의 귀족 사회로 구성된 살롱을 자주 드나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프루스트의 친구 기슈 공작 아르망 드 그라몽의 장모이자 시인의 사촌인 그레퓔 백작부인, 엘렌 스탕디슈 부인 (결혼 전 성은 페뤼스 데 카르), 바그람 공주 (결혼 전 성은 로트쉴드), 오송빌 백작부인과 만났듯이 1894년부터 1900년 초 사이에 프루스트는 귀족적인 살롱에서 유명한 로베르 드 몽테스키우를 소개받고 그와 만나게 된다. 1895년부터 1899년에 걸쳐서 3인칭 형식의 자서전적인 장편소설 《장 상퇴유》를 시도하였으나 미완으로 그쳤다. 존 러스킨의 미학. 존 러스킨의 <아미앵의 성서>와 <참깨와 백합>을 번역하였다(1904, 1906). 후에 《모작과 잡록》(Pastiches et mélanges, 1919)과 《시평집》(1927)에 수록될 평론을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활동은 모두 '유일하고 참다운 글'을 쓰기 위한 준비라 할 수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집필. 양친을 여읜 정신적 타격을 극복하며 프루스트는 1906년 《생트뵈브에 반하여》(Contre Sainte-Beuve, 1954)을 쓰기 시작하였으며, 이것은 곧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집필로 이어졌다. 이후 프루스트는 죽을 때까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집필에 몰두하였고, 총 일곱 권으로 구성된 이 방대한 분량의 작품은 1913년부터 1927년에 걸쳐 출간되었다. 그는 대전 이후 출간된 제2권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로 1919년 공쿠르상을 받아 일약 유명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 걸작을 통하여 20세기 최대 작가의 한 사람이 되어 널리, 그리고 깊이 영향을 끼쳤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문장은 1907년 쓰였다. 15년 동안 프루스트는 오스만 대로 102번지 2층의 코르크로 덮인 방에 은둔하여 살았다. 프루스트는 부모의 사망 이후(아버지는 1903년, 어머니는 1905년), 1906년 12월 27일부터 1919년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거주하였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1905년 12월부터 1906년 1월까지, 프루스트는 신경 쇠약으로 인하여 의사 알리스와 폴 솔리에가 있던 빌랑쿠르의 요양소에 머물렀다. 이 요양소는 1924년 앙브루아즈-파레 병원이 되었다. 닫힌 문 안에서, 프루스트는 작품을 끊임없이 수정, 삭제하며 첫 페이지에 인쇄공이 꺼려하던 "롤페이퍼(paperolles)"를 붙여가며 내용을 첨가하길 멈추질 않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집필했다. 장장 4세대에 걸친 200명이 넘는 인물들이 그의 펜에서 탄생했다. 부모의 사망 이후 프루스트의 건강은 천식으로 인하여 더욱 나빠졌다. 프루스트는 집필 작업에 기진맥진했는데, 낮에는 자면서 오직 밤에만 가끔씩 외출했으며, 보통 리츠(Ritz)에서 혼자서, 또는 친구들하고 밥을 먹었다. 프루스트의 핵심 작품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1913년부터 1927년까지에 걸쳐 출간되었다. 작품. 《즐거움과 나날》. 《즐거움과 나날》은 1896년 칼만-레비에서 출간된 마르셀 프루스트의 단편 소설과 산문시 모음집이다. 이 모음집은 퇴폐주의와 특히 댄디 로베르 드 몽테스키우의 작품에 큰 영향을 받았다. 《즐거움과 나날》은 프루스트의 첫 작품으로, 이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쓸 무렵 작가는 《즐거움과 나날》이 재판되는 것을 막으려고도 했다. 《장 상퇴유》. 1895년, 프루스트는 19세기 말 파리에 사는 젊은이에 관한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초안으로 평가받는 《장 상퇴유》는 완성된 작품이 아니었다. 프루스트는 스스로가 직접 경험하였던 드레퓌스 사건을 작중 환기시킨다. 프루스트는 반역죄로 기소당한 드레퓌스 대위에 대한 탄원서를 처음 퍼뜨린 이들 가운데 하나로, 아나톨 프랑스의 청으로 여기에 서명하였다. 러스킨 저서 번역. 프루스트는 존 러스킨의 《아미앵의 성서"La Bible d'Amiens", (1904)》를 번역하였으며, 이를 지난해에 사망한 아버지에게 헌정하였다. 이 작품은 프루스트의 두번째 러스킨 번역, 《참깨와 백합"Sésame et les Lys", 1906》과 함께 앙리 베르크손과 같은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허나 프루스트는 이 번역본에 만족하지 못했는데, 두 작품 모두 편집에 있어 실패였다. 하지만 미래의 작가에게 있어 이 번역은 개성이 뚜렷해진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또한 번역 대상의 글보다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한 풍부한 주석과 긴 서문을 번역본에 함께 실었다. 뿐만아니라 러스킨을 번역하며 프루스트는 러스킨의 미학적 태도를 비판하며 그에게서 떨어져나갈 수 있었다. 이는 특히 《아미앵의 성서》 서문의 마지막 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앞의 세 장에서 보여준 찬사하고는 대조를 이룬다. 프루스트는 특히 러스킨의 미학적 우상숭배를 비판했는데, 이는 곧 로베르 드 몽테스키우에게 보낸 비판과도 동일하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 스완의 견해를 공유한다. 프루스트에게 있어, 작가가 그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에 작품을 사랑하는 것은 예술로부터 탈선하는 것이다. 우리는 작품 그 자체를 사랑해야만 한다. 《생트뵈브에 반하여》. 《생트뵈브에 반하여"Contre Sainte-Beuve"》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1954년 작가 사후에 출판된 모음집으로, 짧게 서술된 대목들과 프루스트 본인이 비판하면서도 찬탄한, 발자크와 플로베르같은 작가를 다룬 간략한 수필(또는 수필 초벌)을 한데 모아놓은 선집이다. 여기서 프루스트는 샤를 오귀스탱 생트뵈브와 그가 주장한 비평론, 즉 작가의 작품은 무엇보다 작가가 살아온 삶의 반영이요, 작품은 오직 작가의 생애를 통하여만 설명될 수 있다는 비평 방식을 공격한다. 이 같은 비평론에 반대하며 프루스트는 자기 고유의 시학을 창설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되찾은 시간> 작중 프루스트적 화자에 의하여, 또는 등장 인물들에 의하여 일부 반복되었던 소설 내에서 표출된 사상의 실현이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한편, 《생트뵈브에 반하여》에서 나온 여러 서술 대목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작중에서 전개되기도 하였다. 《모작과 잡록》. 《모작과 잡록》은 프루스트가 1919년 NRF에서 출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08년부터 주로 <르 피가로>에 게재된 기사나 서문의 모음집으로, 가스통 갈리마르의 부탁으로 이를 한 권으로 모아 펴낸 것이다. 이 작품에 수록된 러스킨의 《참깨와 백합》 번역본의 서문, "독서 여행"이라는 부분은 1993년 10-18에서(ISBN 2-2640 1811-9), 2017년 갈리마르에서(ISBN 978-2-07-270534-2) 따로 발췌되어 출간되기도 하였다. 영향. 자크 드 라크르텔에 따르면, "마르셀 프루스트에게 가장 깊이 영향을 주었으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방향을 제공한 두 작가로는 의심할 여지 없이 생시몽과 발자크를 들 수 있다."
2023
10645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023
오디세우스
오디세우스(; )는 그리스 신화상의 영웅으로, 이타카(Ithaca)의 영주, 트로이 전쟁의 영웅, 트로이 목마의 고안자이다. 그의 이름을 딴 그리스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이다. 20년 간의 파란만장한 유랑 끝에 고향에 돌아와 그의 아들 텔레마코스와 함께 그의 정실한 아내 페넬로페를 넘보던 도당들에게 복수. 오디세우스는 유랑자, 간계와 변장의 화신자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명성이 보존되고 있다. 오디세우스는 아테나의 총애를 받던 영웅 중의 한명이었다. 아테나는 그에게 지혜로운 호의를 베푸는데, 그가 오디세이아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 동안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절제된 도움을 준다. 하지만 오디세우스의 배가 난파되어 오기기아 섬의 칼립소와 7년 동안 있게 되자 보다 못한 아테나는 제우스에게 간청하여 칼립소가 오디세우스를 풀어주도록 한다.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게 오디세우스의 친구로 변신하여 필로스의 네스토르에게 찾아가는 여행을 도와주기도 한다.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왔을 때는 변장을 하여 그를 시험한다. 일화. 트로이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죽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놓고 오디세우스와 장사 텔라몬의 아들 아이아스가 물망에 올랐다.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과 사람들은 지혜와 용기를 같이 갖춘 오디세우스가 용맹은 있으나 지혜는 거의 없는 아이아스보다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고 아킬레우스의 갑옷은 오디세우스에게 상으로 지급되었다. 이 판정에 불만을 품은 아이아스는 분개하여 아가멤논과 오디세우스가 짜고 자기를 놀렸다고 생각하고 일원 모두를 암살하려 했으나 아테나가 미치게 해 버려서 가축들을 아가멤논과 오디세우스인 줄 알게 해 그 가축들을 죽이고 제정신으로 돌아오더니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함. 그 후 오디세우스가 갑옷을 차지하게 됨.
2024
56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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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음악
2025
36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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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주곡
협주곡(協奏曲) 또는 콘체르토()는 관현악단이 협주 악기 독주자(soloist)와 함께 연주하는 서양 고전 음악으로, 악곡의 한 형식이다. 오늘날 의미하는 '협주곡'은 바로크 시대에 합주 협주곡과 함께 발생하였다. 합주 협주곡은 바로크 시대에 국한되지만, 협주곡은 오늘날에도 음악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 3악장 형식으로 구성된다. 어원. 협주곡의 이탈리아어 표현인 concerto는 중세 라틴어(; 합동 참여하다, 경연하다)에서 나온 말이다. 이것은 음악가의 집합 ()으로 해석될 수 있다. 협주곡을 라틴어 concertare에 준거하여 해석한다면, 여러 음성 간의 경연으로 풀이할 수 있으며, 이 뜻이 16세기 이후 바로크 시대의 협주곡에 사용된 이래 현대의 협주곡의 일반적 의미로 통용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지칭하는 음성의 개념은 인간의 육성을 포함한 악기의 소리라고 이해하여야 한다. 협주곡, 연주회 구분. 영어에서는 협주곡을 concerto, 연주회를 concert라고 한다. 독일어에서는 일반적으로 Konzert라 부르지만, 혼동을 굳이 피하려면 협주곡은 Instrumentalkonzert라고 해야 한다. 종류. 협주곡은 대부분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소나타 형식을 취한다. 반면 3악장의 소나타 형식을 취하지 않고, 환상곡, 교향곡의 형식을 취하는 곡들도 많다. 바로크 시대에는 두 대 이상의 악기가 동시에 협연을 하는 합주 협주곡이 많이 등장하였다. 합주 협주곡은 같은 악기 또는 종류가 다른 두 개 이상의 악기가 오케스트라나 앙상블과 협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형식. 악곡의 형식 면에서 보면 협주곡은 독주악기(또는 독주악기군)와 관현악을 위한 소나타이다. 전형적인 것으로는 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3악장으로 되어 있고, 제1악장은 소나타 형식, 제2악장은 리트 형식, 제3악장은 론도 형식을 취하는 것이 상례이다. 한편, 협주곡의 제1악장에서는 처음에 관현악이 2개의 주제를 으뜸조로 제시하고, 계속하여 독주악기가 이것을 반복하나, 그 때에 제2주제는 소나타 형식의 정형에 따라 딸림조 또는 병행조를 취하는 것이 고전적 협주곡의 원칙이다(예외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4번이 있다). 또 제1악장, 또는 끝악장의 코다 직전에 독주자만이 혼자 연주하는 카덴차가 있다. 이런 것은 독주자의 기교를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화려한 주구(走句)를 많이 써서 자유롭고 즉흥적 스타일로 쓰였다. 이전에는 카덴차는 연주자의 즉흥에 맡겨져 있었으나 베토벤 이후로는 작곡가가 미리 쓴 것에 따라 연주하게 되었다. 시대별 협주곡의 양식. 시대별로 발전한 협주곡의 양식은 다음과 같다. 바로크 시대의 협주곡. 바로크 시대는 협주곡이란 양식이 처음으로 등장한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지금과는 달리 합주협주곡의 형식을 띠었다. 협주곡의 명칭이 붙은 곡은 16세기 전반 이탈리아에서 맨 처음 나타났으나, 17세기 중엽까지는 일정한 악곡 형식을 갖지 않았으며, 주로 이 말은 기악의 반주가 있는 성악곡을 뜻하였다. 이러한 것으로는 교회에서 연주하는 교회협주곡과 궁정에서 연주되는 실내협주곡이 있었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전반경에 기악만으로 된 협주곡이 생겼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합주협주곡'(콘체르토 그로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관현악이 2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콘체르티노라고 하는 독주자의 그룹(보통 바이올린 2, 첼로 1, 쳄발로 1)과, 리피에노 또는 그로소라고 하는 관현악의 그룹이 서로 협주한다는 형식이다. 바로크시대의 작곡가 중 한 사람인 코렐리는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 가운데 가장 먼저 합주 협주곡의 양식을 도입했고, 비발디는 기악 합주 협주곡의 작곡에 능숙해서, 독주 파트의 기교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이 양식은 후에 헨델, 바흐가 계승한다). 바로크 시대의 협주곡들은 대부분 쳄발로와 오르간을 위해 쓰인 협주곡이 많고, 바이올린이나 첼로의 협주곡에도 오르간이나 쳄발로가 쓰일 정도로 이 두 악기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고전파 시대의 협주곡. 이 시대에는 우리가 알고있는 독주 협주곡이 발달하게 된 시대이다. 고전파 시대의 협주곡은 보편적으로 오케스트라가 동기를 제시하며 시작하였으나, 이것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에서 처음으로 독주자가 곡의 서두를 맡음으로서 새로운 형식이 탄생되었다. 독주악기로는 피아노, 첼로가 가장 많이 쓰이나, 그 밖에 비올라, 플루트, 클라리넷, 호른, 파곳, 오보에, 트럼펫 등도 많이 쓰인다. 이후 이 형식은 리스트, 슈만, 차이콥스키 등이 계승하게 된다. 또한 고전파 시대에 들어 새로 도입된 개념은 카덴차가 있다. 카덴차는 협주곡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독주악기의 즉흥적이고 기교적인 부분을 말한다. 대부분의 카덴차는 악장의 동기를 발전시키면서 진행된다. 고전파 시대의 카덴차는 주로 독주자 자신의 즉흥성에 의지했다고 한다.또한 고전파 음악의 카덴차는 연주자에 따라 생략하기도 한다. 고전파의 협주곡 양식과 형식은 모차르트에 의하여 확립되었다. 그는 모든 종류의 악기를 독주악기로 써서 50여의 협주곡을 썼다. 그것의 약 반수는 피아노 협주곡이며, 그 밖에는 바이올린 7곡, 호른 4곡, 플루트, 파곳, 오보에, 클라리넷 등의 협주곡이다. 베토벤은 유명한 제5번 협주곡 《황제》를 비롯하여 5곡의 피아노 협주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1곡, 바이올린과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3중 협주곡이 하나 있다. 낭만파 시대의 협주곡. 낭만파 시대의 협주곡은 독주 악기와 오케스트라가 조화를 이룬다. 오케스트라가 주제를 연주하면 독주악기는 그 주제를 발전시켜서 연주하는 식이다. 또한 낭만파 시대에 들어와서 발전된 새로운 협주곡의 형식은 연속된 악장을 가진 협주곡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의 협주곡은 1악장부터 마지막 악장까지 쉬는 부분없이 계속 이어지는 형식이다. 낭만파의 협주곡은 리스트, 파가니니, 루빈스타인, 차이콥스키에게서 볼 수 있는 독주자로서의 명인적인 기교를 과시하는 경향과 브람스와 같은 교향곡적 경향으로 나뉘었다. 그 밖에 멘델스존, 슈만, 쇼팽, 그리고 세사르 프랑크, 스크랴빈, 거쉰, 에런 코플런드 등에 의한 많은 걸작이 있다. 한편 콘체르티노라든가 콘체르토 시튀크라는 것은 어느 것이나 자유로운 1악장 형식의 소규모의 곡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베버의 《클라리넷과 호른을 위한 콘체르티노》, 《피아노를 위한 콘체르토 시튀크》 등이다. 근대의 협주곡. 이 시대에는 협주곡의 형식이 고도로 발전된 시기이다. 이 시대에는 이전의 음악의 양식을 유지하며 새로운 형식들을 취하는 곡들이 많이 생겨났으며, 대표적으로는 협주곡의 소나타 형식을 벗어나 교향곡,환상곡,광시곡의 형식을 취한 곡들 이 몇몇 있었다는 것이다 현대의 협주곡. 현대의 협주곡은 오케스트라의 편성이 기존의 편성과 다른 경우가 많다. 어떤 곡의 경우 독주 바이올린의 음을 돋보이고자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 파트를 모두 없애버린 곡도 있는가 하면, 어떤 곡은 불협화음의 조화로 듣는이에게 불안한 느낌을 주는 곡들도 많다. 동양의 작곡가들은 동양의 전통적인 음을 서양의 악기로 표현함 으로서 묘한 조화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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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야구(野球, )는 두 팀이 방망이와 공과 글러브를 사용해 겨루는 구기 종목이다. 야구경기의 최종적인 목표는 투수가 던지는 공을 타자가 방망이(배트)로 타격해서, 내야의 각 꼭짓점에 놓여 있는 루(壘, Base)를 모두 밟은 뒤 마지막으로 홈, 즉 본루(本壘, home plate)를 밟아서 득점하는 것이다. 공격 팀은 9명의 타자가 순서대로 나와서 수비 팀의 투수가 던지는 공을 타격해 각 루를 밟은 뒤 홈에 들어와야 하며, 동시에 수비 팀은 공격 팀의 타자, 주자들을 여러 가지 방법들을 통해 아웃시켜 실점을 막아야 한다. 공격 팀의 타자들은 안타를 쳤을 경우 갈 수 있는 루에 멈추거나 홈으로 들어와 득점할 수 있다. 공격 팀이 아웃 세 번을 기록할 경우 수비 팀은 공격 팀으로, 공격 팀은 수비 팀으로 교대된다. 이때 양 팀이 공격과 수비를 한 번씩 끝내는 것을 이닝(Inning, 회)이라고 하며, 일반적으로 한 경기는 9개 이닝 동안 진행된다. 이닝은 초와 말로 구성되며, 홈 팀이 말에 공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더 많은 득점을 한 팀이 이기게 된다. 공격과 수비가 완전히 분리된 스포츠이다. 프로 야구, 아마추어 야구, 청소년 야구는 북아메리카,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카리브 제도의 여러 국가들,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 열리긴 하지만 북아메리카의 미국이나 중앙아메리카의 멕시코나 쿠바 정도를 제외하면 각 나라의 대중들에게 인기가 떨어진다. 야구의 근대적인 틀은 19세기 북아메리카에서 만들어졌다. 역사학자들은 야구의 원형이 북미 대륙에 건너 온 영국,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가지고 들어온 크리켓이나 라운더스와 같이 공과 방망이를 사용하는 구기 경기에서 시작되었다는 데 의견을 함께한다. 명칭의 유래. 야구의 명칭의 유래는 1871년 미국에서 일본으로 방문하여 일본 제일고등중학교의 외국인 교사로 활동하는 호레이스 윌슨이 'baseball'이라는 운동 종목을 학생들에게 가르쳤고, 1894년 제일고등중학교에서 재학 중이던 주만 가나에가 'baseball'을 일본어 '야구'()로 번역하였고 이 말이 한반도로 들어와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앞서 4년 전인 1890년 일본의 문학가 마사오카 시키가 '배터(batter)', '러너(runner)', '베이스 온 볼스(base on balls)', '스트레이트(straight)', '플라이 볼(fly ball)', '쇼트스톱(shortstop)' 등의 미국식 야구 용어를 '타자', '주자', '사구 (四球, 대한민국에선 사구 대신 볼넷으로 사용)', '직구'(대한민국에서는 포심 패스트볼, 속구, 컷 패스트볼로 또 다르게 부름), '플라이'(대한민국에서는 뜬공으로도 부름), '단차'(短遮, 이후에는 주만 가나에의 교육에 따라 유격수로 번역함)로 번역하였다. 때때로 야구를 비슷한 경기인 소프트볼(softball)에 대비하여 하드볼(hardball)로 부르기도 한다. 역사. 야구의 기원. 야구의 기원은 확실하게 짚어내기가 힘들다. 1344년에 출간된 프랑스의 한 책에 성직자들이 야구와 흡사한 라 술(La soule)이라는 게임을 즐기는 모습을 담은 삽화가 실려있다. 원래 야구는 미국의 애브너 더블데이라는 군인 출신의 인물이 1839년에 쿠퍼스타운에서 창안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그가 직접 야구를 창안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며, 광산 기술자 출신의 애브너 그레이브스의 증언이 있었으나 별로 신뢰하기 어렵기 때문에 야구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방망이와 공을 이용한 경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리디아인, 페르시아인, 인도인, 이집트인, 그리스인, 로마인 등에 의해 의식이나 오락으로 행해졌다. 이런 경기들은 정해진 규칙없이 여러 지역에서 행해졌다. 이런 여러 가지 배트와 공을 이용하는 경기를 통해서 야구는 두드러진 발전을 할 수 있었다. 이런 발전을 통해서 1774년에 독일에서 프리드리히 구츠무츠가 존 뉴베리에서 출간한 《작고 귀여운 포켓북》(A Little Pretty Pocket-book)이라는 시집에서는 최초로 'Base-ball'이라는 단어가 들어가기도 했다. 방망이와 공을 이용해 하는 경기는 영국에서 여러 가지 종류로 발전하는데, 영국 동남부에서는 크리켓으로, 남서부에서는 원홀 캣(또는 원 오캣)의 이름으로 발전했으며, 야구와 흡사한 경기인 라운더스도 있었다. 이런 종류의 경기들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옮겨와 두가지 형태로 진화했는데, 뉴욕 주변에서 행해진 타운볼은 각각 9명의 선수로 이루어진 두 팀이 하는 경기로 정비되었다. 루셔스 애덤스등은 야구의 기본적인 규칙을 확립했다. 특히 1845년에는, 미국 뉴욕의 알렉산더 카트라이트가 니커보커 규칙을 만들었으며, 이 규칙은 오늘날 현대 야구의 규칙으로 진화하게 된다. 그는 또한 라운더스에서 사용되었던 말랑말랑한 공을 더 작지만 딱딱한 공으로 교체했다. 1846년에 뉴욕 니커보커스가 창단되었다. 1953년 6월 3일, 미국 의회는 공식적으로 카트라이트가 근대 야구의 발명가임을 인정했다. 카트라이트가 소속된 구단인 뉴욕 니커보커스 팀이 1845년에 경기를 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미국의 역사상 공식적인 첫 경기로 현재 알려지고 있는 것은 1846년 6월 19일 뉴저지주의 '호보켄'에서, '뉴욕 나인' 이 '니커보커스' 팀을 4이닝 동안 23 대 1로 이긴 경기이다. 미국에서의 발전. 1860년대 이미 미국에서는 야구가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 잡았으며 선수들은 연봉을 받고 생활하는 프로 선수였으나 아마추어 선수처럼 생활해야 했다. 아마추어 시대는 1871년 3월 17일, 전미프로야구선수협회가 창설됨으로써 그 막을 내렸다. 1869년, 최초의 프로 야구 팀 신시내티 레드 스타킹스(Cincinnati Red Stockings)가 창단되었으며 1875년에는 내셔널 리그(연봉 상한제 있음)가 창설되었다. 1882년에는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American Association)이 창설되었고 1901년에는 이를 전신으로 하는 아메리칸 리그(연봉이 무제한임)가 창설되어 양대 리그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903년에는 양 리그의 우승 팀간의 승자를 겨루는 월드 시리즈(여기에서 월드(World)는 "월드신문사"의 이름으로써 신문사에서 스폰서를 해주기 때문에 월드시리즈라는 이름이 쓰인다고 한다)가 처음으로 치러졌으며, 1933년에는 올스타전이 처음으로 치러졌다. 이후 많은 제도의 발전이 있었다. 브랜치 리키는 1920년에 대규모의 팜 시스템(Farm System)을 도입했다. 1975년에는 커드 플러드 등 여러 선수들의 희생으로 자유 계약 제도가 도입되었다. 1980년에는 선수협 위원들의 노력으로 연봉 상한선이 폐지되는 등 선수들의 권익이 향상되었다. 메이저 리그 야구에서는 1947년 이전까지 흑인이 선수로 활동하지 못했다. 그 대신 흑인들은 1920년에 설립된 니그로 리그 베이스볼에서 선수로 뛰었고, 1924년에는 최초의 니그로 월드 시리즈가 치러졌다. 메이저 리그 야구에서 흑인이 최초로 선수로 뛴 것은 1947년으로, 재키 로빈슨은 브루클린 다저스에 입단해 10년 동안 팀에 몸담았으며, 1962년에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최초의 흑인 선수가 되었다. 투수는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경기에서 타석에 섰다. 1970년대 초반, 지명타자(designated hitter, DH) 규칙이 고안되었으며, 아메리칸 리그에서는 1973년부터 이 규칙이 적용되었다. 지명타자 규칙에 따르면 투수가 타석에 서지 않게 되며 지명타자는 타석에만 서면서 수비는 하지 않는다. 내셔널 리그에는 지명타자 제도가 적용되지 않았고, 지금도 투수가 타석에 선다. 메이저 리그 야구는 1980년대 초반까지 불법이었던 약물 복용이 흔했고, 이 시기가 되어서야 알려졌다. 또한 여러 선수들이 약물로 인해 사망했다. 1990년대 초반부터는 선수들이 근육강화제를 사용했으며, 이 때문에 2005년 3월 17일, 미국 의회는 스테로이드 사용에 관한 청문회가 열렸다. 이 때문에 메이저 리그 야구는 2006년부터 약물 복용이 처음 발각되었을 때에는 50경기, 두 번째에는 100경기, 세 번째로 발각이 되면 영구 제명이 된다는 '삼진 아웃' 제도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메이저 리그 야구는 점점 미국 전역으로 확대되었는데, 팀이 미국 동부에서 우주로 많이 옮겨갔으며, 캐나다에서도 1969년 몬트리올 엑스포스가, 1977년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리그에 참가했다. 현재는 내셔널 리그 15팀, 아메리칸 리그 15팀으로 팀 수 (목표는 모든 리그 16팀씩 32팀)가 유지가 되고 있으며, 경기 수는 한 시즌 당 162경기로 치러진다. 세계의 야구. 야구는 미국의 대표적인 스포츠 중 하나이며,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팬들의 지지에 기반한 야구 체계가 갖추어져 있다. 캐나다 야구의 역사는 미국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데, 1877년 프로 리그와 국제 협회에서 두 나라로 이루어진 특색 있는 팀을 만들기도 했었다. 세계적으로 미국과 캐나다가 아닌 다른 공식적인 최초의 야구 리그는 쿠바의 야구 리그이다. 쿠바는 오랜 전통을 유지하며 1930년대 후반부터 국제 경기에서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는 팀이라는 명예를 얻게 된다. 쿠바의 야구 리그가 만들어진 후 야구 리그가 생긴 국가는 다음과 같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에 야구 리그가 만들어진 국가는 1922년 네덜란드, 1934년 오스트레일리아, 1936년 일본, 1938년 푸에르토리코이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야구 리그가 만들어진 국가는 1948년 이탈리아, 많은 라틴 아메리카의 나라들 중 가장 두드러진 나라, 1945년 베네수엘라, 1945년 멕시코, 1951년 도미니카 공화국과 1982년 대한민국, 1990년 중화민국, 2003년 중화인민공화국 순으로 만들어졌다. 2019년 기준으로 세계 야구 소프트볼 연맹에 총 127개국이 가입하고 있다. 현재 야구는 미국, 일본, 대한민국 등의 국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중 하나이다. MLB의 겨울 리그 프로그램으로 푸에르토리코, 베네수엘라, 도미니카 공화국, 오스트레일리아에 겨울 리그가 존재하고, 멕시코는 MLB 하위 트리플 A에서 리그 참여를 하고있다. MLB는 푸에르토 리코, 베네수엘라, 도미니카 공화국, 멕시코가 참여하는 캐러비언 시리즈를 4년에 한번씩 개최하고 있다. 또한 이탈리아, 네덜란드,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니카라과에도 대회가 존재한다. 공식적 첫 야구 리그였던 쿠바의 야구 리그는 1961년 쿠바 혁명으로 폐지되었다. 한편 2000년 하계 올림픽 이후 야구 종목에서 알루미늄 배트의 사용이 금지된 데다가, 2005년 7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2012년 하계 올림픽에 관한 117번째 회의에서 야구, 소프트볼 종목 삭제에 관한 투표가 진행되어 2012년 하계 올림픽에서 야구, 소프트볼 종목을 제외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들이 출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2009년 8월 회의에서 2016년 하계 올림픽에도 야구 종목을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이 회의에서는 빅스타 선수가 참여하는 8팀, 짧은 5일 간의 경기 방식으로 바꾸라고 요구했다. 대한민국. 1999년 대한야구협회와 한국야구위원회(KBO)가 공동 출간한 "한국야구사"에서는 한국에 야구가 처음 들어온 것은 1905년으로 당시 선교사로 온 미국인 질레트(P. L. Gillett)가 황성기독교청년회 회원들에게 야구를 가르친 것이 그 시초라고 나와 있지만 정확하지 않다. 현재까지 알려진 한반도에서 열렸던 최초의 야구 경기는 1896년 4월 23일 한성부에 거주하는 미국인들과 미국 해병대원들의 친선경기로 알려져 있다. 그 같은 사실은 서재필이 창간했던 「독립신문」의 영자판인 「THE INDEPENDENT(인디펜던트)」 제9호 1896년 4월 25일치 기사로 확인됐다. 「THE INDEPENDENT(인디펜던트)」 제35호 1896년 6월 25일치 기사에는 그해 6월 23일 오후 3시에 훈련원에서 경기를 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 경기에 미국으로 귀화했던 서재필이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미국이름으로 6번 타자, 중견수로 출장 2득점을 한 기록도 남아 있다. 1906년 2월 11일 훈련원 터에서 YMCA팀 대 덕어(독일어)학교팀 사이에 경기를 진행했는데 한국인들이 팀을 이루어 최초로 진행한 경기였다.《황성신문》1909년 3월 21일자에는 이러한 〈야구단 운동가〉라는 노래가 소개돼 있을 정도로 야구는 큰 인기를 누렸다. 규칙과 경기 진행. 야구 경기는 두 팀이 서로 겨루는데,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에 두 팀은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가면서 진행한다. 그리고 공격 팀이 공격을 진행하면서 세 번의 아웃을 기록하면 공격 팀은 수비 팀으로, 수비 팀은 공격 팀으로 바뀐다. 그리고 공수교대가 2번 이루어지는 것을 이닝(inning, 회)이라고 하며, 일반적인 경기는 9이닝으로 구성되어 진행된다. 그리고 한 이닝은 초(初, 선공)와 말(末, 후공)로 구성된다. 한 이닝에 두 팀은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가면서 경기를 진행하는데, 주로 원정팀이 초에 공격하며, 홈팀이 말에 공격한다. 야구 경기의 목표는 경기를 치르면서 상대 팀보다 더 많은 점수(득점)를 얻어 승리하는 것이다. 공격하는 팀의 선수들은 사각형 형태의 내야 다이아몬드 꼭짓점에 있는 네 개의 베이스를 돌면 득점을 할 수 있다. 타자는 홈플레이트 옆에서 타격을 하며 누상에 출루하면 반드시 시계반대방향으로 1루, 2루, 3루, 그리고 홈플레이트를 거쳐야 하며, 홈을 밟으면 득점이 된다. 반면 필드에서 수비를 보는 다른 팀은 아웃을 잡고 공격 팀이 점수를 내는 것을 막아야 한다. 아웃을 잡힌 선수는 배팅 오더에 따라 자신의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공격을 할 수 없다. 세 개의 아웃카운트가 채워지면, 양 팀은 공격과 수비 역할을 교대하는 공수교대를 하며, 경기는 초에서 말로, 말에서 초로 바뀌게 된다. 9이닝동안 경기가 진행되다가 9회가 다 끝나도 점수가 같을 경우에는 연장전을 치러 승부를 낸다. 연장전을 치르는 방식도 대회에 따라 상이한데, 프리미어 12와 같은 국제 대회에서는 주로 승부치기를 적용하지만,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는 정규 이닝의 경우와 동일하게 연장전을 치른다.보통 한국 리그경기에서는 연장전에 가게 되면 12이닝까지 승부가 나지 않을 경우에 무승부로 처리를 하고 프리미어12와 같은 국제 대회는 12이닝동안 승부가 가려지지 않으면 승부치기를 한다. 어린이 야구에서는 9이닝보다 적은 이닝으로 경기가 이루어지는게 보통이다. 경기 용구. 야구를 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방망이(배트), 야구공, 글러브가 필요하다. 포지션. 이닝에서, 수비를 할 때 9명의 수비수들은 각자의 수비 위치에 선다. 다이아몬드의 중심의 투수판에 서 있는 선수를 투수라고 하며, 그리고 홈 플레이트 뒤에 앉아 있는 선수를 포수라고 하는데 이 둘을 배터리라고 부른다. 나머지 수비수들은 야수라고 부르는데 야수는 위치에 따라 내야수와 외야수로 분류되며 내야 안에 있는 4명의 수비수들을 내야수라고 한다. 내야수 중 3명은 1, 2, 3루에 서 있는데 이들은 각각 1루수, 2루수, 3루수라고 말하며 각 루와 그 주변을 수비하는 역할을 한다. 나머지 한 명은 유격수로, 2루와 3루 사이를 서면서 그 사이를 수비한다. 이때 유격수와 2루수의 조합을 키스톤 콤비네이션 혹은 키스톤 콤비라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 3명의 선수는 외야에 서는데, 이들을 외야수라고 하며, 위치에 따라 좌익수(왼쪽), 중견수(가운데), 우익수(오른쪽)로 구분해서 부른다. 지명타자는 공격만 하고 수비는 하지 않는데, 이는 투수를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규칙으로 지명타자는 투수 대신 공격을 한다. 경기에서 홈플레이트 옆에 있는 타석에 서 공격을 하려는 선수를 '타자'라고 부르며, 타자는 배트를 잡고 있으며, 투수가 투수판에서 홈플레이트 쪽으로 공을 던지면 타자는 배트로 공을 쳐서 점수를 내려고 한다. 타자가 공을 치고 난 후에 타자는 배트를 놓고 1루를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2, 3루, 홈까지 갈 수 있다. 홈까지 돌아오거나 아웃이 된 경우에는 덕아웃으로 돌아간다. 투수는 타자가 베이스에 나가지 못하게 막기 위해 투수판에서 공을 던지는데, 공을 어디에 던지느냐에 따라 '스트라이크'(strike)와 '볼'(ball)로 구별된다. 타자는 스트라이크가 3개가 되면 아웃되고, 볼이 4개가 되면 1루로 나갈 수 있다. 스트라이크가 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아웃. 타자가 1루 이상에 또는 주자가 자신의 다음 베이스 이상에 진루하는 것을 실패할 때, 이를 아웃이라고 한다. 진루. 타자 또는 주자가 자신의 다음 베이스 (타자의 경우에는 1루) 또는 그 이상에서 세이프되는 것을 진루라고 한다. 야구의 인원. 선수. 최대 선수 수는 리그 또는 수준에 따라 다르다. 메이저 리그 야구 팀은 선수 명단을 시즌 중 25명까지 등록할 수 있으며 시즌 후반 9월부터 확장 로스터를 통해 40명까지 등록이 가능하고 포스트 시즌 기간에는 다시 25명으로 축소가 된다. 그 외. 팀의 감독 또는 수석 코치는 선수 명단, 타순, 선발 투수를 정하고, 특히 구원 투수의 경기 중의 등판 시점과 같은 선수교체 등과 같은 팀의 중요한 전술을 구상한다. 감독은 2명 또는 그 이상의 코치들의 도움을 받는다. 코치들은 타격 코치, 야수 코치, 투수 코치, 트레이닝 코치로 전문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경기에선 팀이 공격을 할 때 1루 코치와 3루 코치가 경기장에 서 있는데 그들은 파울선의 밖에 정해진 장소에 서서 경기 중에 주자의 방향에 조언하고 경기 중단시에 감독의 지시를 타자와 주자에게 전달한다. 심판. 야구 경기에서 심판은 4명인데, 주심, 1루심, 2루심, 3루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주심은 포수 뒤에 서 있는데, 스트라이크 존을 통해서 스트라이크와 볼을 판정한다. 주심은 본루에서 아웃인지 세이프인지 판단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머지 1루심, 2루심, 3루심은 루 근처에서 서 있으며, 아웃인지 세이프인지 판정한다. 또한 타자가 하프 스윙 시에 주심이 스트라이크를 선고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감독 또는 포수는 누심에게 조언을 받을 것을 요청할 수 있다. 좌우측 선심이 없는 경우 1, 3루심은 타자가 친 공이 외야에서 파울인지 아닌지 판단하기도 한다. 보크나 타임의 선언은 4심이 모두 동등한 권한을 갖는다. 메이저 리그 야구에서는 보통 4명의 심판을 두는데, 올스타전이나 포스트 시즌 경기와 같이 중요한 시합의 경우 외야에 좌측 선심과 우측 선심을 추가하여 6명의 심판을 둔다. 그리고 2008년 8월부터는 비디오 판독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야구의 기본기와 전술. 기본기. 야구는 기본적으로 야구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기인데, 공을 처리하는 것은 투구, 타격, 주루, 포구와 같은 동작으로 이루어진다. 이에 따른 신체의 동작도 손(어깨), 발(다리), 눈, 입, 귀, 머리를 통해서 행해진다. 손과 발은 투구, 타격, 주루, 포구에 필요한 수단이며, 눈은 잘볼 수 있는 수단이다. 또한 야구는 단체스포츠이기 때문에 서로의 기분을 이해하고 동료의 플레이가 쉽게 되도록 서로 협조하는 팀워크가 필요하다. 투구는 투수가 투수판을 밟고 타자에게 공을 던지는 행위를 뜻한다. 투수는 좋은 투구를 위해서는 스피드와 제구가 좋은 공을 던져야 하고, 기본적인 속구 이외에도 커브, 포크볼과 같은 변화구를 던질줄 알아야 한다. 또한 투수는 일반적인 와인드업 포지션과 주자 견제를 위한 세트 포지션을 사용한다. 타격은 타자가 투수가 던진 공을 쳐내는 행위를 뜻한다. 스윙의 각도에 따라서 다운 스윙, 레벨 스윙, 어퍼 스윙으로 나뉜다. 다운 스윙은 위에서 밑으로 내려치는 타법이며, 레벨 스윙은 수평으로 휘두르는 타법으로 가장 이상적이며, 어퍼 스윙은 밑에서 위로 올려치는 타법으로 가장 비효율적이다.하지만 이용만 잘 한다면 레벨,다운 스윙보다 효율적일수 있다. 주루는 루 상에 나간 주자의 플레이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주루는 득점을 위해 홈으로 들어오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다. 주루를 위해서는 주루 감각과 도루, 투수의 견제시 대비가 중요하다. 전술. 야구 경기에서 팀은 승리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전술을 사용한다. 예컨대, 일반적으로 우타자는 좌완 투수에게 강하며, 좌타자는 우완 투수에게 강하다. 만약 상대 팀의 선발 투수가 좌완 투수일 때, 보통 좌타자 대신 우타자를 많이 기용하며, 좌타자는 기용되지 않거나 하위타선에 배치된다. 이런 점 때문에 우완 투수일 때는 좌타석, 좌완 투수일 때는 우타석에 서서 양손을 사용하는 스위치 히터(양손타자)가 생겨났다. 희생 번트는 루 상에 나가 있는 주자의 진루를 목표로 하는 전술로, 주로 아웃 카운트가 유리한 무사 1루, 무사 2루, 무사 1·2루일 때 시도한다. 스퀴즈 플레이는 주자가 3루에 있을 때, 번트를 대서 3루 주자가 득점하기 위한 전술이다. 희생 플라이(일명 태그업)은 주자가 3루에 있을 때, 타자가 뜬공을 쳐 내면, 야수가 뜬공을 잡았을 때 3루주자는 득점하는 전술이다. 도루는 투수가 투구를 하는 사이에 주자가 다음 루로 가려고 시도하는 것으로, 주로 발이 빠른 주자가 시도한다. 히트 앤 런(Hit and run)은 투수가 투구를 하는 사이 주자는 다음 루로 주루하며, 타자는 투수가 던진 공을 무조건 쳐서 최대한 많이 진루하려는 것이다. 런 앤 히트(Run and hit)는 투수가 투구를 하는 사이 주자가 다음 루로 주루하는 것은 같지만, 타자는 투수가 던진 공을 원하면 타격하는 전술이다. 런 앤 히트 작전이 시도됐을 때 타자가 타격하지 않았을 경우 주자의 도루 시도가 된다. 고의사구는 경기의 승부처(클러치)일 때, 잘 치는 타자가 나왔을 경우 그 타자를 볼넷으로 거르고 다음 타자와 상대해 더 큰 실점을 막으려는 전술이다. 루 상에 발이 빠르고 도루 가능성이 높은 주자가 나가있을 경우에는 투수가 포수에게 공을 하나 완전히 빼서 투구를 하는데, 도루를 대비해 주자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피치 아웃). 투수가 투구 전 또는 포수가 투구 후에 주자를 견제하기 위해서 주자가 있는 루의 야수에게 견제구를 던지기도 한다. 주자가 3루에 있을 때 내야 땅볼을 홈에 송구하기 위해서, 또는 타자가 번트한 공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야수들이 홈플레이트 쪽으로 이동해 수비를 한다. 수비 위치는 타자의 타격 성향의 따라서 이동될 수 있다. 타자가 장타를 쳤을 때, 외야수는 잡은 공을 베이스에 있는 야수에게 송구하지 않고 보통 2루수 또는 유격수에게 송구를 하는데, 이를 중계 플레이라고 하며, 주자의 득점이나 진루를 방지하는 플레이이다. 전술의 지시는 보통 감독, 코칭스태프, 또는 선수간의 사인으로 전달되는데, 대부분 손짓으로 이루어진다. 사인의 종류에는 플래시 사인, 블록 사인, 키 사인 등이 있다. 메이저 리그 야구에서는 9이닝을 기준으로 한 경기에 오가는 사인이 평균 1000여건 정도이다. 경기는 모두 전술대로 진행하는 것은 아니며, 선수가 혼자서 독단적으로 플레이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발이 빠른 주자들은 덕아웃에서의 사인 지시 없이 자신의 판단으로 도루를 시도하는데, 이를 '그린라이트'(green light)라고 한다. 야구의 고유한 스타일. 야구는 미국의 스포츠 중에서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한 특징을 갖는 스포츠이다. 이러한 독특함이 오랜기간 지속해 올 수 있었던 매력이자 미국인의 정신에 강한 연대감을 갖게 하는 큰 요인이다. 또한 많은 미국인들은 야구가 기술과 타이밍 그리고 열정, 전략의 최상의 조합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자였던 모리스 라파엘 코언은 야구를 국민적 종교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이 점에서, 야구는 그의 사촌격인 크리켓과 유사한데, 많은 영연방 국가에서 크리켓과 그것과 관련된 문화는 미국 문화에서의 야구의 역할과 비슷한 지위와 영향력을 가진다. 시간적 요소. 농구, 아이스하키, 미식축구, 그리고 축구는 모두 경기 시간이 정해져 있고, 보통 상대 팀에 직접적으로 저항해서 경쟁하는 것보다 정해져 있는 시간에서 공격에서 많은 시간을 차지한 팀에 의해 끝난다. 이와 반대로 야구는 경기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 팀은 마지막 타자가 나가기 전까지는 이길 수 없고 반격은 시간 제한을 받지 않는다. 비록 단체 종목과 반대되는 개인 종목들 중에서 경기 시간제한이 없어서 미국의 전문직들에게 인기가 많은 다른 스포츠로는 테니스와 골프가 있다. 최근 수십 년간, 관찰자들은 매년 야구 경기를 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꾸준히 증가한 것에 대한 정당성을 들어 프로 야구의 게임 길이를 비판해 왔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게임 시간은 전형적으로 1시간 반 정도였다(1시간 반으로 정해졌다). 1920년대에는 평균 2시간 미만으로 변한 것이 1960년대에는 결국 2시간 38분으로 늘어났다. 1975년에는 평균 2시간 25분으로 줄어 들었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면서 2003년 시즌 종료 직후 조사한 결과 평균 2시간 46분대가 되는 것으로 밝혀져 경기 시간이 더욱 길어지게 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경기 시간이 늘어나는 것은 하프 이닝(half inning; 공수교대시간) 사이의 TV 광고, 늘어나는 반칙과 투구 인터벌, 그리고 느린 경기 흐름 때문이었다. 결국 메이저 리그는 하프 이닝 사이의 쉬는 시간의 최대 시간을 정하는 반면 심판이 더욱 엄격하게 스트라이크 존과 시간 규칙을 선수들이 지키게 강요하도록 교육했다. 2008년, 일본프로야구는 2007년부터 과거 10년간의 평균 경기 시간이었던 3시간 18분의 6%(교토 의정서의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목표에서 따온 것이다)인 12분 줄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제한 시간이 없는 특징 때문에 야구계 일각에서는 승부가 연장으로 이어질 시에 빠르게 승부를 낼 수 있는 규칙으로서 이른바 승부치기를 도입하는 것이 논의되고 있기도 하다. 실제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승부치기 제도가 실시된 바 있으나, 승부치기 제도가 일반적인 것은 아니며 전 세계 거의 대부분의 프로 야구 리그에서는 아직 승부치기 제도를 도입하지 않고 있다. 공식적인 규칙에 명기되어 있기는 하지만 루(Base) 상에 주자가 없을 경우 투수는 12초 안에 투구해야 하며 이를 어길 시 그 투구는 '볼(Ball)'로 판정이 된다는 경기 촉진룰의 적용은 매우 드물고 아주 만약의 상황에만 시행된다. 그러나 2010년도 프로야구에서는 이 12초룰을 적용키로 하여 투수에 유리한 룰이 아니냐며 타자들이 반발하고 있는 추세다. 심판은 또한 주자가 있을 경우에도 투수의 투구 지연 행위를 볼(Ball)로 판정할 수 있는 권리도 가지고 있는데 이 규칙 또한 매우 드물고 만약의 상황에만 시행된다. 공식 규칙 중에는 또한 주심이 타자에게 타격행위가 끝나지 않았을 경우 타자석을 벗어나지 않도록 요청할 수 있는 규칙이 있다. 그 이외의 다른 규칙으로는 '규칙위반을 하는지 주시하라'가 있다. 개인과 팀. 야구는 근본적으로 팀 스포츠이다.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정도로 훌륭한 실력을 가졌으며 높은 연봉을 받는 두, 세 명 정도의 선수를 보유할 정도로 재정이 좋은 지역 연고 구단이라 하더라도 기량이 우수한 선수들이 반드시 성공을 기대할 수는 없으며, 여전히 선수 개인들은 강한 압박과 시험에 놓이게 된다. 투수는 반드시 훌륭한 투구를 해야하며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시합에 질 위험이 크고, 타자는 극히 짧은 순간에 어떤 구질인지, 스윙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감독과 코치가 어떤 작전을 수행할지를 선수들에게 사인을 줄 수는 있지만, 그 어느 누구도 투수가 투구하는 것을, 타자가 타격하는 것을 도와 줄 수는 없다. 타자가 직선타구를 치게 되면, 최종 수비자인 외야수들은 볼을 잡아야 할지, 바운드 볼로 처리해야 할지를 혼자서 결정한다. 야구의 역사에서는 영웅적 대접을 받는 선수와 비난을 받는 선수들이 많다 - 시합의 승부처(클러치)에서 한 선수가 적시 안타를 치거나 또는 공을 잡아 플라이 아웃 시킬 수도 있지만, 또는 그 반대로 예상치 못한 삼진 아웃을 당하거나 수비에서 실책을 해서 모두에게 뚜렷이 각인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야구에서 모든 선수들이 주자로 뛸 수 있으며 이 때문에 야구에서는 단거리 달리기가 매우 중요하다. 굳이 주자가 아니더라도 모든 포지션에서 뛰어난 단거리 달리기 능력이 요구된다. 단거리를 빠른 속도로 달리는 능력이야말로 야구의 기본기이다. 경기장. 야구 규칙에 따르면 경기장에 대한 규정은 다음과 같다. 기록. 많은 스포츠 중에서 혹은 그보다 휠씬 더, 야구에서의 기록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야구 기록은 미국 프로 야구인 메이저 리그의 태동과 함께 유지되어 왔으며 생각컨대 이전보다 더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단장, 스카우터, 감독 그리고 선수들은 자신이 속한 팀의 승리를 위한 다양한 전략선택에 도움을 주기 위해 기록을 연구한다. 야구에서의 기록은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스포츠들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른 운동 경기들에서의 플레이는 유동적이고 다양한 결과를 보여주지만, 야구에서의 플레이는 제한된 결과만을 갖기 때문이다. 모든 세대의 야구팬은 다음과 같은 전통적인 야구 기록에 대해 알고 있으며 또한 그 내용에 관해 의견을 교환한다. 타격 기록. 이 외에 다른 기록으로는 장타율, 출루율 등이 있다. 투구 기록. 이 외에 투구 기록으로는 WHIP와 승리/패배 등이 있다. 세이버매트릭스. 미국 야구 연구 협회(The Society for American Baseball Research, SABR)는 야구 선수의 성과와 팀 기여도를 보다 더 잘 측정하고 상대적 가치에 관한 좀 더 추상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하기 위해 혁신적인 통계 수치를 개발해왔다('세이버매트릭스'란 용어는 학문의 분야와 고안된 특정 통계수치를 의미한다). 몇몇 세이버매트릭스 신봉자들이 야구계의 주류로 편입함에 따라 '세이버매트릭스'의 통계기록은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특정 상황에 따른 통계기록. 특정 상황에서 좀 더 세밀한 통계수치는 더욱 중요해진다. 예를 들어, 좌완 투수의 공을 잘 치는 타자의 경우 감독은 왼손 투수를 상대하기 위해 그 선수에게 좀 더 많은 기회를 줄 것이다. 득점상황에서 더 잘 치는 타자들이 나왔을 경우 상대팀 감독은 득점권 타율이 낮은 타자와 승부하기 위해 그 타자를 고의사구로 내보내려고 할 것이다. 다른 통계 기록들도 있는데, 타자의 경우 타수, 안타수, 장타수 그리고 타점이 있고, 투수의 경우는 투구 이닝수, 9이닝 당 삼진수, 볼넷, 투구 수 등이 있다. 야구 단체. 국제 야구 경기를 주관하는 세계 야구 소프트볼 연맹은 2013년 국제 야구 연맹과 국제 소프트볼 연맹의 통합으로 출범되었으며, 127개국이 가맹하고 있다. 그리고 대륙 별로도 연맹이 조직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이 소속되어 있다. 야구 대회. 세계의 주요 야구 대회에는 야구 월드컵, 대륙간컵 등이 있다. 하지만 이런 대회들은 아마추어 선수들만 참가하고 메이저 리그 야구 선수는 참여하지 않는다. 올림픽 야구 또한 메이저 리그 야구 선수들은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세계의 축구 잔치인 월드컵과 달리 마땅한 국제대항전 야구대회가 없는 실정이다. 유니버시아드 야구,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 유스 베이스볼 월드 챔피언십은 대학, 청소년을 위한 대회이다. 여자 야구 대회로는 여자 야구 월드컵이 있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사무국은 야구의 열기 확대를 위해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들도 참가하는 프로 야구 대회인 WBC(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을 2006년에 개최했지만 메이저 리그의 스타 선수들은 대체로 참가하지 않으면서 대회의 권위는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 대회는 2009년에 제2차 대회를 연 이래로 4년마다 개최되고 있다. 야구 리그. 야구가 대중화되면서, 야구인과 야구 팀의 숫자도 함께 늘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야구 팀간의 경기인 리그 경기도 대중화되고 있다. 여기서는 주로 프로리그를 중심으로 서술한다. 북미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세계 야구에서 가장 큰 규모의 프로 야구 리그는 미국의 메이저 리그로, 내셔널 리그 15팀, 아메리칸 리그 15팀, 총 30개의 팀으로 각각 서부, 중부, 동부 지구로 나뉘어 있다. 메이저 리그 밑으로는 마이너 리그에 트리플 A, 독립 트리플 A, 더블 A, 클래스 A 어드밴스드, 클래스 A, 클래스 A 쇼트 시즌, 루키 어드밴스드, 루키등의 하위 리그들이 각 연고지마다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메이저 리그와는 별개로 독립리그들이 북중미권에 여럿 있다. 일본 프로 야구. 일본 프로 야구는 세계에서 2번째로 출범한 리그로, 현재는 센트럴 리그와 퍼시픽 리그 양대 리그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센트럴 리그에는 지명타자 제도가 없고 퍼시픽 리그에는 지명타자 제도가 있다. 미국의 마이너 리그처럼, 일본도 2군 리그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여러 독립 리그도 존재한다. 대한민국 (KBO 리그, KBO 퓨처스리그, 독립리그). 1982년 세계에서 3번째로 프로 리그가 출범했으며, 2015년 시즌부터는 KBO 리그라는 명칭이 공식 제정되었다. 주관 기구는 KBO이다. 1982년 기준으로 삼성 라이온즈, OB 베어스, 롯데 자이언츠, 해태 타이거즈, MBC 청룡, 삼미 슈퍼스타즈의 6개 팀으로 리그가 진행되었다.지금은 10개이다. KBO 리그는 KBO 퓨처스리그라는 명칭으로 2군 리그 시스템을 운용하고 있다. 퓨처스 리그에는 상무가 추가로 참여하고 있으며, 이 팀은 군 입대 선수들만 소속되어 있다. 또한 KBO 리그의 키움 히어로즈는 고양 히어로즈, NC 다이노스는 창원 다이노스라는 별도의 팀 명칭을 퓨처스리그에 한정하여 사용하고 있다. 한국의 독립리그는 한국독립야구연맹이 주관하는 한국야구독립리그와 코리아 드림 리그가 있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고양 원더스가 있었고, 현재는 연천 미라클, 저니맨 외인구단, 파주 챌린저스가 있다. 대만 프로 야구. 대만 프로 야구는 중화 직업봉구 대연맹의 주관으로 개최되며, 1990년부터 리그 경기가 시작되었다. 대만 리그의 경우, 잇달은 승부 조작 사건과 모기업의 경영난 문제로 참가 팀 수가 자주 변화하였으며, 2015년 기준으로 유니 세븐일레븐 라이온즈, 중신슝디 엘리펀츠, EDA 라이노스, Lamigo 몽키스 4개 팀이 참여하고 있다. 한동안 타이완 메이저 리그도 함께 개최되었으나, 현재는 중화 직업봉구 대연맹에 흡수되었다. 중국 야구. 1986년 중국야구연맹이 창설되었고 2002년 4팀이 참가한 중국야구리그가 탄생되었다. 2005년, 2009년에 각각 한 팀씩 늘어나기 시작 해 확장을 이어갔으나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이후 야구가 올림픽 종목에서 퇴출 당하고 2009년 일본이 스폰서에서 철수하면서 위기를 맞게되어 결국 2012년부터 2년동안 리그가 열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2014년부터 부동산 재벌 헝다그룹이 스폰서로 참여하면서 리그가 재개 되었고 상금규모도 확대되었다. 또한 중국정부는 2025년까지 지도자 6000명, 심판 등 야구관련 전문인력 1만 명을 양성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또한 지금 야구장 규모는 3000~4000석정도인데 3년 내에 여러 곳에 1만2000석 규모 구장을 건설 하며 구단 수는 20개까지 늘릴 예정이다. 유럽 야구. 네덜란드,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체코, 스페인, 오스트리아등 이러한 국가들은 세미프로리그이며 그 외에도 아마리그로 운영되고 있는 국가들이 존재한다. 기타 야구 리그. 오스트레일리아, 푸에르토리코, 도미니카 공화국, 파나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니카라과, 캐나다 등에도 세미 프로리그가 있다. 쿠바는 공산 국가 특유상 프로 리그는 없지만 아마추어 국제대회에서는 상당한 실력을 보인다. 야구 리그는 난이도에 따라, 예를 들어서 아마추어, 프로에 따라서, 또는 성별에 따라, 나이에 따라서 리그가 다르다. 어린이 프로그램은 야구 규칙에 보다 더 쉬운 규칙을 적용하고 더 작은 구장에서 경기를 치르며, 코치나 기계로부터 보다 더 쉬운 투구를 한다. 또한 아마추어, 논-프로도 공식 야구 규칙에서 변형된 규칙을 사용한다. 동호인 야구 (사회인 야구). 대한민국, 일본 등지에서는 전문 선수가 아니더라도 동호인들이 취미로 자체적인 야구 리그를 조직하여 주말 등을 이용하여 소규모 야구장 등을 중심으로 자체적인 야구 경기를 개최하고 있는데, 이것을 동호인 야구 또는 사회인 야구라고 부른다. 동호인 야구단과 리그가 형성되는 구심점은 지역, 직업, 직장, 공유하는 야구 이외의 관심사 등이 있다.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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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키워드 서비스
인터넷 키워드 서비스는 영문으로 표현되는 웹 브라우저의 주소창에 키워드를 입력하여 해당 웹 사이트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서비스이다. 인터넷 키워드는 도메인 주소에 비해 짧고 편리하며 기억하기 쉬운 장점이 있으나 국제 표준이 정해지지 않아 다수의 민간 기업들에 의해 사설 서비스 방식으로 운영되는 단점이 있다. 인터넷 키워드를 한글로 표시한 것을 한글 인터넷 주소라고 한다. 개요. 인터넷은 4자리 숫자로 구성된 IP 주소로 운영된다. 그러나 사람은 숫자를 기억하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를 보다 편하고 쉽게 외울 수 있도록 제정한 것이 도메인이다. 도메인은 국제인터넷주소관리기구(ICANN)에서 일괄적으로 관리하므로 전 세계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다. 이 도메인도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나라에서는 사용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이에 따라 생겨난 서비스이다. 현재 표준으로 인정받은 다국어 도메인이 나오기 전 통용되던 방식이다. 차이점. 현재 표준으로 지정된 다국어 도메인과 인터넷 키워드 서비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점(.)으로 구분되는 계층구조가 없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서 '위키백과'를 들어 표현한다면 다국어 도메인으로는 '위키백과.org' 또는 '위키백과.한국' 등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인터넷 키워드 서비스로는 '위키백과'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서비스 방식. 인터넷 키워드 서비스는 크게 두가지 방식으로 운영된다. DNS 후킹 방식. 일반적으로 DNS에 주소 대신 이러한 키워드가 전송될 경우 오류를 일으키게 된다. 이때 브라우저는 "없는 사이트"라는 오류를 보여주거나 자신들이 운영하는 검색 사이트의 검색 결과(인터넷 익스플로러 6의 경우 msn) 등을 보여준다. 이때 DNS 서비스 업체와 제휴를 맺어 "없는 사이트"라는 오류를 일으키지 않고 자신들의 회사에서 운영하는 데이터베이스에서 해당 키워드와 매칭된 사이트로 이동하도록 한다. 플러그인 후킹 방식. 주소창에 일반적인 도메인 형식이 아닌 키워드 형식의 단어가 입력된 경우 자동으로 플러그인이 자신들의 도메인 키워드 서비스로 연결하는 방식이다. 문제점. 가장 큰 문제점은 이 서비스는 표준화된 서비스가 아니므로 브라우저와 ISP, DNS 환경, 플러그인 설치 여부 등에 의하여 서비스를 이용할 수도 있고, 이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사이트 운영자가 이러한 인터넷 키워드를 구입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이용자의 접속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매우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다. 브라우저 별 문제점. 인터넷 익스플로러. 인터넷 익스플로러 6까지는 DNS 후킹 방식에 큰 제한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인터넷 익스플로러 7부터는 다국어 도메인을 제외하고 이러한 키워드 형식이 주소창에 입력되었을 때 DNS에 키워드를 보내지 않고 사용자가 지정한 검색 사이트로 키워드를 보내게 되었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인터넷 키워드 서비스 업체는 플러그인을 추가 배포하는 것으로 해결하였으나 이는 DNS 후킹 방식에 비해 이용자 수를 대폭 하락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구글 크롬. 위에서 밝힌 인터넷 익스플로러 사례와 같이 다국어 도메인을 제외하고 이러한 키워드 형식이 주소창에 입력되었을 때 DNS에 키워드를 보내지 않고 사용자가 지정한 검색 사이트로 키워드를 보낸다. 서비스 인프라. 현재 대한민국에서 키워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 중 가장 큰 업체는 넷피아와 디지털네임즈가 있고, 그외 다수의 플러그인 후킹 방식의 업체들이 난립하고 있다. 넷피아는 플러그인 배포와 별도로 ISP인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 티브로드, 온세텔레콤과 제휴를 맺어 DNS 후킹 방식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디지털네임즈는 플러그인 후킹 방식을 주력으로 KT와 제휴를 맺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위 두 업체는 특허와 ISP 계약에 관해 상호 비방과 소송전을 다수 벌인 바 있다.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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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담
속담(俗談)은 예로부터 한 민족 혹은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말하여져서 굳어진 어구로 전해지는 말이다. 격언(格言)이나 잠언(箴言)과 유사하다. 속담은 그 속담이 통용되는 공동체의 의식 구조를 반영하기 때문에 언어학이나 문화인류학 등에서 연구 대상으로 많이 삼고 있다. 문학 작품에도 많이 등장한다.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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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2034
75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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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스
바이오스()는 운영 체제 중 가장 기본적인 소프트웨어이자 컴퓨터의 입출력을 처리하는 펌웨어다. 사용자가 컴퓨터를 켜면 시작되는 프로그램으로 주변 장치(하드웨어)와 컴퓨터 운영 체제(소프트웨어) 사이의 데이터의 흐름을 관리한다. 펌웨어(firmware)의 한 종류로서 IBM호환 컴퓨터의 경우에 전원이 공급되면 시작되는 부팅 절차에서 하드웨어 초기화를 수행하고, 운영체제나 응용 프로그램에게 런타임 서비스(컴퓨터 프로그램의 실행을 지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바이오스 펌웨어는 PC에 내장되어 있어서 전원이 인가되면 실행이 시작되는 최초의 프로그램이다. 바이오스라는 이름은 1975년도에 사용된 CP/M 운영체제의 Basic Input/Output System에서 유래하였다. 원래는 IBM의 소유였으나 많은 회사들이 원본 프로그램을 분석(리버스 엔지니어링)하여 호환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현대 PC에서 바이오스는 하드웨어 부품을 초기화하고 검사하는 역할, 부트로더 또는 대용량 저장장치에 저장된 운영체제를 RAM으로 읽어오는 기능을 수행한다. 넓은 의미로 컴퓨터에 탑재된 프로그램 중에서 하드웨어와 가장 낮은 수준에서 입출력을 담당하는 프로그램을 가리킨다. 좁은 의미의 정의에선 IBM-PC 호환 기종에 탑재된 것을 말하며, 보통 이 뜻으로 쓰인다. 바이오스는 컴퓨터에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중간 형태를 가지는 펌웨어의 일종으로, 대부분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제어하고 하드웨어에 의해 변경되거나 생성된 정보를 소프트웨어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등 인간의 신경망과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역사. 바이오스(BIOS, Basic Input/Output System)라는 용어는 게리 킬달이 발명하였으며, 1975년 CP/M 운영 체제에 처음 등장하였는데, 하드웨어와 직접 연결되는 부팅 시간 동안 불러들이는, 기기에 특화된 CP/M의 일부로 기술하고 있다. (CP/M 기기는 일반적으로 ROM에 하나의 부트 로더만 있었다.) 저장 매체. 바이오스를 저장하는 매체로 초기에는 롬이 주로 사용되었으나 정보화의 발전 속도가 증가되고 새로운 기기나 매체의 발매 주기가 짧아짐에 따라 현재의 플래시 메모리가 바이오스의 주된 저장 매체로 쓰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플래시 메모리를 이용한 편리함은 1990년대 후반에 바이오스를 손상시키는 바이러스의 등장으로 수많은 컴퓨터를 무력화시키는 사태를 겪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CIH 바이러스를 들 수 있다. (다만 이 바이러스는 윈도 NT 계열 이후의 운영 체제에서는 동작하지 않으므로 현대에는 큰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전까지 바이오스는 롬에 담겨 컴퓨터에 미리 맞춰진 형태로 제공되었다. 롬 라이터(ROM Writer)라고 불리는 기록 장치 없이는 바이오스의 내용을 바꿀 수 없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바이오스의 저장매체로 기존의 마스크 롬이나 이피롬이 아닌 플래시 메모리를 사용한 제품이 일반화되었는데, 이것으로 예상치 못했던 문제점을 해결하거나 새로운 장치나 기기를 지원하기 위해 별도의 기록 장치 없이 PC에서 프로그램을 실행해 바이오스의 내용을 간편하게 바꿀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바이오스의 내용을 갱신할 때 정전 등을 비롯하여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기록이 정상적으로 되지 못하면, 그 컴퓨터는 시동조차 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바이오스는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이어주는 신경망과 같은 프로그램으로 그 내용이 손상되면 BIOS 설정 화면을 띄울 수도 없다. 이렇게 손상된 바이오스를 복구하는 방법은 바이오스가 탑재된 플래시 메모리를 교환하는 방법 밖에 없다. 제어. 어댑터 카드의 펌웨어를 시동 과정에서 실행하기 위해 BIOS는 POST 과정 중에 메모리를 검사해서 실행할 펌웨어를 찾는다. 0xC0000h ~ 0xF0000h의 메모리 영역을 2킬로바이트 단위로 나누어서 각각의 첫 2바이트를 읽는데, 만약 2바이트의 값이 0xAA55h 일 경우 실행해야 하는 펌웨어이므로 4번째 바이트로 넘어가서 펌웨어의 코드를 실행한다. 이전에는 응용 소프트웨어가 주변 기기를 제어할 때 입출력 포트를 직접 만질 것 없이 바이오스가 제공하는 서브루틴을 불러 제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역할을 운영 체제가 대신 수행하여 응용 프로그램은 바이오스를 사용하지 않고, 운영 체제가 준비한 API 등을 거쳐 바이오스가 제공하는 기능을 사용하게 되었다. BIOS 외의 펌웨어의 실행. BIOS (=메인보드의 펌웨어)는 컴퓨터의 기본적인 하드웨어 장치들 (키보드, 플로피 디스크, 하드디스크) 에 접근해서 제어할 수 있다. 다만 여러 가지 제약사항이 있으며, 일부 플러그인 어댑터들(SCSI, NIC, 비디오 등)의 경우 BIOS 대신 독자적인 펌웨어를 장치에 포함시켜 그 장치용 펌웨어가 해당 장치를 제어하도록 한다. 이렇게 BIOS에서 호출하는 펌웨어를 옵션 롬 이라고 부른다.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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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신학(神學, )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신, The Divine, The God) 그 자체를 정경이나 이성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연구하거나 신과 관련된 교리와 방법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서방 기독교에서 쓰이는 신학이라는 낱말은 테오스(, )에 로고스(, )가 결합된 단어이다. 한국어에서 특별한 수식어 없이 신학이라는 낱말을 쓸 때는 일반적으로 기독교 신학을 가리킨다. 단어 의미로는 종교적 초월자로서 신 개념이 존재하는 모든 종교에서 다루는 신에 관한 학문을 신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종교로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힌두교, 시크교, 바하이교 등이 있다. 기독교 신학. 신학은 신을 뜻하는 "Θεο(theo)"와 학문을 뜻하는 "λογία(logy)"의 합성어로서 용어 그대로 기독교의 신과 율법, 교리에 대한 모든 연구이며, 좁은 의미로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연구를 의미한다. 기독교의 성장과 함께 2-3세기부터 학문으로서 틀을 갖추기 시작하여, 중세시대에 유럽인의 관점에서 기독교의 신과 관련된 일체 문제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신학이라는 용어는 원칙적으로 기독교 신학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나, 대개 기독교 신학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며 학문체계에서의 신학 역시 흔히 기독교 신학을 가리킨다. 교파에 따라 개신교 신학, 로마 가톨릭 신학, 정교회 신학, 성공회 신학 등으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신학은 좀더 세밀하게 분류가 된다. 구약신학, 신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선교신학, 기독교 상담학 등으로 나뉜다. 유대교 신학. 유대교에서는 역사적으로 전문 학문 기관보다는 유대교 공동체 중심으로 유대교 신학의 발달이 이루어져 왔다. 유대교 신학이 기독교 신학이나 이슬람 신학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에 대응될 만한 유대교 신학은 주로 할라카와 미드라쉬에 대한 랍비들의 논의와 주석으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슬람교 신학. 이슬람교에서 기독교의 신학에 견줄 만한 학문적 논의를 가리키는 용어는 "칼람"(Kalam)이다. 그러나 이슬람교에서 칼람은 기독교에서 신학이 차지하는 위치에 비해 그 역할이 작은 편이다. 일부 이슬람 신학자들은 기독교 신학의 발달에 특기할 만한 영향을 미쳤다.
2036
414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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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메인 네임
도메인 네임(, )은 넓은 의미로는 네트워크상에서 컴퓨터를 식별하는 호스트명을 가리키며, 좁은 의미에서는 도메인 레지스트리에게서 등록된 이름을 의미한다. 이를 통틀어서 ‘웹 주소’라고 (잘못) 부르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는 후자를 서술한다. 등록된 도메인 네임은 보통 호스트명의 일부분으로, DNS 상에서 해당 호스트명 및 그 하위의 호스트명들은 일반적으로 해당 등록자에게 권한이 주어진다. 도메인 레지스트리는 도메인 네임의 종류에 따라 국제 인터넷 주소자원 관리기관(ICANN)과 해당 국가 기관으로부터 승인을 받아, 일반 사용자들의 도메인 등록을 위임받는 역할을 한다. 이런 도메인 네임은 숫자로 된 IP 주소에 비해 외우기 쉬우며, 여러 개의 IP 주소가 한 도메인에 대응되거나 (서브 도메인) 여러 도메인이 하나의 IP 주소로 대응되는 (가상 호스트) 것도 가능하다. 도메인 네임이 항상 호스트명인 것은 아니지만, 호스트명이 아닌 도메인 네임은 대부분 아무 곳에도 사용될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도메인 레지스트리들은 호스트명과 같이 도메인 네임에 들어갈 수 있는 문자를 ASCII에서 0부터 9까지, a부터 z까지, 그리고 하이픈으로 등록을 제한하고 있다. 국제화 도메인(IDN)은 임의의 유니코드 문자열을 올바른 호스트명으로 변환하여 이 제한을 회피할 수 있도록 한다. 다만 제한적으로 밑줄(_)로 시작하는 도메인은 SRV 레코드와 같이 올바른 호스트명이 아니어야 하는 도메인 네임을 위해서 쓰이기도 한다. 종류. 도메인 네임은 그 최상위 도메인이 암시하는 관리 기관 및 등록 요건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뉜다. gTLD의 등록, 관리, 분쟁 및 법적인 문제 등 도메인 네임에 관한 모든 행정적인 절차 및 기술적인 관리는 ICANN에서 결정 및 시행한다. gTLD 중 가장 잘 알려진 .com, .net, .org는 본래 네트워크 솔루션즈에서 독점하고 있었으나 1999년 이후로는 경쟁체제로 전환되었다. .int는 본래 IANA가 인터넷의 하부 구조를 위해 사용하던 gTLD였으나, .arpa로 대체되고 현재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등의 국제 조약 기구 및 비정부조직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2039
414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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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상어목
악상어목은 상어의 한 목으로 백상아리와 청상아리가 이 목에 속한다.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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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묵상어
돌묵상어()는 악상어목 돌묵상어과에 속한 대형 바닷물고기이다. 상어 가운데서는 고래상어 다음으로 큰 상어로 태평양·대서양 등지에 분포하는 상어이다. 갑각류와 플랑크톤을 먹으며 4km/h로 순항 할 수 있다. 몸길이는 보통 10m가 넘는 길이로 자라며 몸무게는 20 t에 육박한다. 사람에게 확인된 최대 크기의 돌묵상어의 길이는 15m였다. 온순한 성질로 사람에게 전혀 해를 주지 않는다. 가끔 일광욕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돌묵상어를 basking shark(일광욕하는 상어)라고 부른다. 돌묵상어는 입을 크게 벌리고 플랑크톤을 새파라는 빗 모양 기관으로 걸러서 먹는데 새파는 겨울이 되면 떨어져 돌묵상어가 겨울잠을 잔다고 알려져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상어의 간에는 풍부한 기름이 들어있기 때문에, 상어기름을 얻기 위해 남획되고 있다. 이러한 남획과 낮은 번식률로 인해 멸종위기에 처해있다. 먹이. 돌묵상어는 입을 벌려 들어오는 동물성플랑크톤, 작은 물고기, 갑각류 등을 먹는데, 시간당 들어오는 물의 양은 2,000톤에 달한다. 큰입상어나 고래상어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먹이를 찾아 나서지는 않지만 후각을 이용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오로지 아가미를 통해 물을 빼낼 뿐이며, 먹이를 빨아들이지는 않는다.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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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
헤라()는 그리스 신화에서 최고의 여신으로 주신 제우스의 누나이자 아내이다. 결혼과 가정의 여신으로 숭배받았다. 로마 신화에서는 유피테르의 반려자인 유노에 해당된다. 헤라는 올림포스 신화가 자리잡기 전부터 모신(母神)으로 숭배받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다른 그리스 신화의 신들과 달리 헤라라는 이름의 어원은 그리스어나 인도유럽어에 속하지 않는 고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사모스 섬과 아르고스에는 기원전 8세기경에 지어진 헤라의 신전이 있다. 이는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이다. 공작은 헤라를 상징한다. 헤라는 종종 공작이 끄는 수레에 타거나 손에 여성과 풍요의 상징인 석류나 양귀비 씨앗을 든 모습으로 묘사된다. 가족. 헤라의 아버지는 크로노스이며 어머니는 레아이다. 헤라는 남편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전쟁의 신 아레스, 청춘(젊음)의 여신 헤베, 출산의 여신 에일레이티이아를 낳았으며, 제우스가 여성과의 동침 없이 혼자서 지혜의 여신 아테나를 낳자 자신도 남성과의 동침 없이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를 낳았다. 문제는 제우스와 헤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보다 제우스가 바람을 피워서 낳은 자녀들이 훨씬 우수하다는 점이었다. 전쟁 신 아레스는 매양 아테나에게 당하고 살기만 하며, 청춘의 여신 헤베는 헤라클레스에게 제우스의 민며느리가 되는 방식으로 시집갔다. 반면,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남매와 디오니소스, 아프로디테는 올림포스 12신으로서 헤라와 대등한 위치에 있다. 특히 이 중에서 아프로디테는 헤라나 아테네보다도 더한 미모를 인정받았다. 더군다나 올림포스 12신 중 과반수가 제우스의 내연녀이거나 제우스가 바람을 피워서 낳은 자녀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헤라클레스는 전무후무한 역사로 후에 신이 되었으며, 페르세우스 역시 메두사를 처치하는 무훈을 세웠다. 하지만 페르세우스는 헤라가 도와준 적이 있다. 질투.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는 헤라의 질투를 즐겨 다루었다. 제우스는 여러 인간 여인들이나 님프와 관계를 맺었고, 그 때마다 헤라는 남편의 애인들에게 복수를 했다. 헤라는 제우스와 그의 애인들 사이에 난 사생아들에게도 강한 증오심을 보였다. 디오니소스의 어머니 세멜레, 큰곰자리 전설의 칼리스토, 에우로페, 그리고 영웅 헤라클레스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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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기술(技術)은 과학, 공학, 기능과 관련하여 다양한 뜻으로 쓰인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과학이나 산업에서 다루는 '기술'의 의미는 사전의 첫 번째 의미를 말하며, 이는 영어의 테크놀로지에 대응한다. 두 번째 의미는 영어의 'technique' (기법)에 대응한다. 첫 번째 의미를 분명하게 구별하여 가리키고자 할 때는 '과학기술', 또는 '과기'(科技)라는 용어를 쓴다. 과학, 공학, 과학기술. 과학은 자연의 성질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공학은 물건 등을 만들기 위해 과학적 지식을 응용하는 연구 학문이다. 과학기술은 사람의 필요에 따라 도구나 기계, 재료 등을 개발하고 사용하는 과정 등에 대한 일련의 지식 체계나 학문을 의미한다. 산업과 과학기술. 과학기술의 발달은 각종 산업 발달의 토대가 된다. 18세기 이전에는 기술(technique)은 과학의 도움보다도, 장인들의 경험에 의하여 느릿느릿 진화했다. 급격한 과학기술의 발달을 기술혁신이라고 하며 기술혁신은 산업 구조의 변화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된 결과 산업혁명이 촉발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최근 들어 급격한 정보화의 진행으로 정보 통신 산업이 크게 발달하고 있으며 통신, 인터넷 등을 주요 과학기술로 취급한다. 경제와 과학기술. 경제학에서는 세계자본주의의 구조와 과학기술의 관계를 연구하며 다음과 같은 개념을 중요하게 다룬다. 사회와 과학기술.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생활과 환경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는 사회에 긍정적으로, 또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현대 철학과 사회학, 생태학, 정치학, 환경운동 등에서는 기술에 의한 여러 영향을 다루고 있다. 아래는 과학기술과 관련된 주요 이념이나 논점이다. 철학과 과학기술. 철학이란, 대상을 다시 한번 더 문제삼아 되돌아 보는 '반성적 사고'를 이른다. 기술은 본래, '어떠한 목적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산업화와 함께 기술(technique)과 과학이 결합함으로써 과학기술(technology)이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는 과학기술에 대해 사람들은 우려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목소리가 모여 기술에 대한 회의적 시각을 형성하였으며, 이는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1970년대 드디어 기술철학회가 창립되었고, 과학기술에 대한 반성적 사고( 기술철학 )가 철학의 분과 학문으로 독립되었다. 법학과 기술. 대한민국의 경우, 에서 기술에 관하여 정의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기술이란 「특허법」 등 관련 법률에 따라 등록 또는 출원(出願)된 특허, 실용신안(實用新案), 디자인, 반도체집적회로의 배치설계 및 소프트웨어 등 지식재산, 이들이 집적된 자본재, 또한 이에 관한 정보, 이전 및 사업화가 가능한 기술적ㆍ과학적 또는 산업적 노하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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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분학
미적분학(微積分學, )은 수학의 한 분야로 극한, 함수, 미분, 적분, 무한급수를 다루는 학문이다. 미분은 도함수라는 정의역에서 미소한 차이에 대한 함수값의 차이 값의 비를 구한다. 그 값은 곡선의 기울기로 해석한다. 또 넓이, 부피, 길이 등은 곡선으로 제한된다. 여기서 "곡선"은 직선을 의미할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또 극한을 구하는 과정을 유도하는 무한 과정 또는 궁극점(일반적으로 구하는 값)에 접근해 가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 2가지 방법은 수학적 해석학의 토대가 되고 있다. 기하학이 모양에 중심을 둔 학문이고 대수학이 연산에 대한 수학이라면, 미적분학은 변화에 중점을 둔 수학이다. 미적분학은 크게 2개의 분야로 분류되는데, 미분과 적분이 바로 그것이다. 미분은 미소적인 변화를 다루는 분야이고, 적분은 미소적인 양의 집적을 다루는 분야이다. 미분의 기하학적 의미를 보면, 특정 함수 그래프의 어떤 점에서 접선, 혹은 접평면을 구하는데 필요한 연산이다. 더 일반적으로, 미분은 원래는 어렵게 정의된 함수를 선형근사해서 다루기 쉬운 형태로 바꾸어 파악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미분은 선형사상이 된다. 그래서 선형 대수학에서 미분가능한 함수들의 선형공간을 다룰 때 중요한 선형사상으로 여겨진다. (단, 다변수 함수의 미분을 선형사상으로 취급하는 방식은 20세기에 들어서부터 확립됐다.) 미분방정식은 이런 사고의 자연스러운 연장 선상에 있다. 적분은 기하학적으로 보면, 곡선 또는 곡면과 좌표축으로 둘러싸인 영역의 면적을 구하는 것에 해당된다.(단, 이때는 절댓값 기호를 씌워서 곡선 또는 곡면을 x축위로 꺾어올렸을때의 상태이다.)(실제 적분의 기하학적인 의미는 y좌표, 즉 길이들의 합이다.) 그러나 적분의 의미는 오랫동안 확실하게 파악되지 못하고 있었다. 적분의 확실한 정의를 내린 사람은 베른하르트 리만이 최초이다. 리만이 생각한 적분을 정식화한 것을 리만 적분이라고 한다. 적분 또한 선형사상이다. 미분과 적분은 완전히 별개의 개념이지만,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변수가 하나인 경우, 하나가 나머지의 역연산이 된다. 이를 미적분학의 기본정리라고 부른다. 역사. 고대 시기. 적분을 이끌어내기 위한 몇 가지 아이디어들은 고대에서부터 시작됐지만 이 시대의 방법들은 수학적으로 엄밀하지도 않고 체계적이지 않았다. 모스크바 수학 파피루스(Moscow mathematical papyrus)에서 적분의 목표 중 하나인 부피계산법들이 나와있으나 이것들은 방법으로서 설명이 부족하고 몇 가지는 틀렸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크니도스의 에우독소스(Eudoxus)가 극한의 개념과 유사한 문제의 철저 검토법을 사용했고 아르키메데스는 이 방법을 발전시킨 발견적 교수법이라는 적분과 비슷한 방법을 만들었다. 중국에서는 유휘가 3세기에 원의 넓이를 구하기 위해 크니도스의 에우독소스와 같은 방법을 발명하였다. 중세 시기. 중세 시대에는 인도에서 미적분학의 기초가 다져졌다. 14세기 인도 수학자 마다바(Mādhava of Sañgamāgrama)와 케랄라 학파(Kerala school of astronomy and mathematics)가 테일러 급수, 무한급수의 근사법, 수렴에 대한 적분판정법, 미분의 초기형태, 비선형 방정식 풀이를 위한 방법, 곡선 아래부분이 차지하는 넓이가 적분값과 같다는 이론 등 미적분을 위한 많은 요소들을 기술하였다. 근대 시기. 프랑스 수학자 피에르 드 페르마는 무한소 오차항이 있어도 등호가 성립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adequality 개념을 소개했으며, 미분해서 0이 되는 곳을 구하여서 극대 극소를 찾는 법을 만들었다. 아일랜드 수학자 제임스 그레고리(James Gregory)이 미적분학의 핵심 정리인 미적분학 기본정리의 증명을 출판하였으며, 영국 수학자 아이작 배로(Issac Barrow)가 좀 더 일반적인 경우를 증명하였다. 무한소 미적분과 유한차 미적분의 결합은 두 번째 미적분학 기본정리가 증명되고 2년이 지나서 존 월리스(John Wallis), 아이작 배로(Issac Barrow)와 제임스 그레고리(James Gregory)에 의해 1670년경에 완성됐다. 이후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 아이작 뉴턴이 당시 알려져 있던 미적분학을 좀 더 체계화하고 발전시켰다. 아이작 뉴턴은 그가 수리물리학 문제를 풀 때 사용했던 이상한 형태의 곱의 미분법, 연쇄법칙, 고계도 미분계수의 개념, 테일러 급수와 해석함수를 공개했다. 하지만 그가 출판물로 낼 때는 그 시대의 수학적 표현방법에 맞게 그의 아이디어와 동등한 의미를 지니는 기하적 표현으로 그의 아이디어를 적어냈다. 뉴턴은 그의 책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거론한 행성의 운동, 회전하는 유체 표면의 모양, 지구의 편평도, 사이클로이드에서 미끄러지는 물체의 운동 같은 문제들을 푸는 데 미적분을 사용했다. 뉴턴은 미적분과 함께 함수의 급수를 실수의 범위로 확장했고 테일러 급수의 원칙들을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가 이뤄낸 모든 발견을 출판하지는 않았고 이 시대에 무한소를 이용한 방법은 여전히 평이 좋지 않았다. 그의 아이디어들은 뉴턴이 자신을 표절했다고 고소한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에 의해서 참된 무한소 미적분으로 체계화됐다. 뉴턴은 그를 표절자로 여겼지만, 현재는 그도 독립적으로 얻은 것임이 밝혀졌다. 그는 무한소를 다루는 규칙들을 명확하게 정리했고 2계도 이상의 미분을 가능하도록 해줬으며 곱의 미분법과 연계법칙을 미분 적분 형태로 모두 만들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뉴턴과 라이프니츠는 모두 미적분학에 기여한 자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둘의 미적분의 성격은 다르다. 뉴턴은 미적분을 물리학에서 활용한 첫 번째 사람으로, 라이프니츠는 오늘날 사용하는 미적분 표기법의 대부분을 만든 사람으로 여겨진다. 또 라이프니츠는 뉴턴과는 달리 형식을 중시해서 알맞은 표현법을 만들어내는데 며칠을 쓰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미적분에서 규정한 기본적인 사항들로는 미분과 적분의 법칙들, 2계도 이상에서의 미분, 다항 함수 급수의 근사에 대한 개념들이 있다. (뉴턴과 라이프니츠 이전에 미분과 적분이 역관계라는 미적분학의 기본정리들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라이프니츠가 그의 결과를 발표하고 뉴턴이 그의 아이디어에 대해서 권리를 주장하자 수학자들 사이에서는 어떤 사람을 우선권자로 인정을 해야 하느냐는 주제로 큰 논란이 일었다. 뉴턴이 최초로 결과를 이끌어 낸 사람이지만 출판을 한 것은 라이프니츠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뉴턴은 라이프니츠가 자신이 출판하지 않고 왕립학회에서 공유한 노트들에서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주장했다. 이 논란 때문에 영국 수학자들과 유럽 대륙의 수학자들이 오랫동안 갈라지게 되고 이는 영국 수학에 큰 손실을 초래했다. 현재는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논문에 대한 면밀한 조사 덕분에 그들이 독립적으로 결론을 이끌어 냈다는 것이 밝혀졌다. 라이프니츠는 적분에서부터 뉴턴은 미분에서부터 시작해서 결과를 도출해냈다. 이 시대 이후에 수많은 수학자들이 미적분학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첫 번째로 가장 성공적이었던 업적 중 하나로 마리아 아녜시가 1748년에 쓴 무한과 유한 분석이 있다. 기초. 미적분학에서 기초(foundations)는 정확하고 엄밀한 공리와 정의들의 발전을 말한다. 초기 미적분학에서 사용한 무한소는 엄밀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었기에 많은 수학자들에게 특히 미셸 롤과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에게 맹렬하게 비난 받았다. 버클리는 그가 1734년에 출판한 《해석학자》()라는 책에서 무한소를 ‘사라진 값들의 유령’()이라고 묘사했다. 미적분학의 엄밀한 기초를 도출해내는 일은 여러 수학자들이 제공했고 오늘날까지도 연구활동이 있는 분야다. 콜린 매클로린(Colin Maclaurin)을 포함한 다수의 수학자들이 무한소의 사용이 정당하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도했지만 그것은 150년이 지나서야 오귀스탱 루이 코시와 카를 바이어슈트라스에 의해서 증명됐고 무한소의 의미가 극히 작은 값이라는 관념을 막을 방법을 찾았다. 이것이 미분과 적분을 위한 기초를 놓았다. 코시의 필기에서 무한소의 형태로 적혀진 연속의 정의와 극한의 (ε-δ) 정의의 원형 등의 기초에 접근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코시의 업적에서 바이어슈트라스는 극한의 정의를 공식화 시키고 무한소의 개념을 없애버린다. 바이어슈트라스의 작업에 따라서 미적분학은 무한소가 아닌 극한에 기초하는 것이 일반적이게 됐다. 베른하르트 리만은 바이어슈트라스의 개념을 사용해서 적분의 정확한 개념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발견의 기간 동안 미적분학의 아이디어들은 유클리드 공간과 복소평면에서 일반화됐다. 현대 수학에서 미적분학의 기초는 미적분학의 정리에 대한 완전한 정의와 증명들을 포함하는 실해석 분야에 포함되어 있고 미적분학의 범위는 엄청나게 확대됐다. 앙리 르베그는 측도론을 만들어서 거의 모든 함수에서 적분을 가능하게 했다. 로랑 슈바르츠는 어떤 함수도 미분시킬 수 있는 분포 이론을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극한의 개념을 미적분학의 기초로 두지만 극한이 미적분학의 기초에 대한 유일한 접근법은 아니다. 에이브러햄 로빈슨(Abraham Robinson)의 비표준해석학이 대안책이다. 1960년대에 만들어진 로빈슨의 접근법은 미적분학 초창기에 사용했던 개념인 무한소와 무한수로 실수체계를 늘린 체계를 사용한다. 그 결과로 나온 수를 초실수라고 부른다. 초실수는 미적분학의 일반적인 법칙들을 라이프니츠의 방식처럼 이끌어 낼 수 있다. 함수. 함수의 정의. 함수 formula_1 란 집합 formula_2안에 있는 원소 formula_3가 집합 formula_4에 있는 정확히 한 원소, formula_5에 대응되는 규칙을 말한다. 여기서 집합 formula_2는 정의역이라하고 formula_4는 공역이라고 한다. 또한 정의역에 있는 임의의 수를 나타내는 기호를 독립변수, 공역에 있는 원소를 나타내는 기호를 종속변수라고 한다. 함수의 표현방법. 함수를 표현하는 방법에는 말로 설명하는 방법, 표를 이용하는 방법, 그래프를 이용하는 방법, 대수학적 식으로 표현하는 방법 등이 있다. 극한. 극한의 정의. formula_8는 formula_3가 formula_10로 다가갈 때 formula_11가 formula_12로 다가간다는 것이다. 극한에는 좌극한과 우극한이 존재하는데 좌극한이란 formula_13가 formula_10보다 작은 곳에서 formula_10로 다가갈 때 formula_11가 다가가는 값을 의미하고 우극한은 반대로 formula_17가 formula_18보다 큰 곳에서 다가간다. 좌극한과 우극한은 기호로 각각 formula_19, formula_20라고 표시한다. 극한값이 formula_12라는 것과 좌극한과 우극한 모두 formula_12라는 것은 필요충분조건이다.formula_23는 formula_3가 formula_10로 다가갈 때 formula_26는 무한히 커진다는 것이고 formula_27는 무한히 작아진다는 것이다. 엡실론-델타 논법. 극한의 더 정확한 수학적 정의는 엡실론-델타 논법이다. formula_8는 모든 양수 formula_29에 대해 만약 formula_30 면 formula_31인 formula_32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기호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이 방법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극한들을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극한의 성질. formula_46가 상수이고 formula_47 와 formula_48가 존재할 때 다음 성질들을 만족한다. 연속. 함수 formula_26가 formula_68에서 연속. formula_69에서 정의된 함수 formula_26가 다음의 조건을 만족할 때 formula_26는 formula_68인 점에서 연속이라고 한다. (formula_73) 함수 formula_26가 연속. 함수 formula_26가 정의역에 존재하는 모든 formula_3에서 연속일 때, formula_26는 연속함수라고 한다. 정의역 이외의 formula_3에 대해서 불연속이더라도, 함수의 연속성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formula_84은 formula_85 이외의 모든 점에서 연속이다. formula_85에서는 함숫값이 정의되지 않아 불연속이지만, formula_87은 정의역에 있지 않는 수이므로 함수 formula_26는 연속함수이다. 균등연속(Uniform Continuity). 함수 f(x)가 모든 정의역에서 연속이면, 정의역의 모든점 formula_89에 대해서 ε-δ 논법에 의해 모든 ε>0에 대해 0<|formula_90|<δ를 만족하는 x가 |formula_91|<ε가 되게 하는 δ>0이 존재한다. 만약 모든 formula_89에 대해서 δ가 같다면, 즉, δ가 formula_89에 변화에 따르지 않고 오직 ε의 변화에만 따른다면, 이 함수 f(x)가 균등연속(Uniformly continuous)이라고 한다. 제거 가능한 불연속성. 함수 f(x)가 formula_94에서 불연속이지만 formula_95를 적절히 정했을 때 연속이 될 수 있다면, formula_26는 formula_94에서 제거 가능한 불연속성을 지닌다고 표현한다. 예를 들어 formula_98라면, formula_85인 점에서 함숫값이 정의되지 않아 불연속이다. 그러나 formula_100로 극한값이 존재하므로 만약 formula_101로 함숫값을 정하면 불연속성이 제거될 수 있다. 따라서 함수 formula_26는 x=0인 점에서 제거 가능한 불연속성을 지닌다. 미분. 도함수. 그래프 formula_103에서 점formula_104을 통과하는 접선은 기울기 formula_105를 가진다. 여기서 formula_106라고 하면 formula_107가 된다. 함수 formula_5의 도함수 formula_109란 formula_110를 의미한다. 도함수 표현법에는 formula_111 등이 있다. 도함수를 한번 더 미분한 것을 이계도함수라고 한다. 이계도함수의 표현법에는 formula_112 등이 있다.이계도함수를 또 한번 더 미분한 것을 삼차도함수라고 하고 이것은 formula_113 등으로 표현한다. formula_114를 formula_115번 미분한 것은 formula_116 등으로 표현한다. 미분 가능성. 함수 formula_1가 formula_18에서 미분 가능하다는 말은 formula_119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구간formula_120에서 미분가능하다는 말은 구간 내의 모든점에서 미분가능하다는 것이다. 함수 formula_114가 점 formula_18에서 미분 가능하다는 말은 formula_18에서 연속하다는 것이다. 미분 불가능한 경우에는 좌미분계수formula_124와 우미분계수formula_125값이 다르거나 불연속하거나 수직 접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수직접선이란 formula_126일 때 formula_10에서 수직 접선을 가진다. 미분의 성질. formula_46는 상수이고 formula_58는 미분 가능할 때 다음을 만족한다. 삼각함수의 미분. formula_137이다. 이것을 이용하여 삼각함수의 미분을 할 수 있다. 삼각함수들의 미분은 다음과 같다. 연쇄법칙. formula_144가 formula_3에서 미분가능하고 formula_1가 formula_147에서 미분가능하면 formula_148는 formula_13에서 미분가능하고 formula_150로 표현된다. 이것을 다른방식으로 표현하면 formula_151와 formula_152가 미분가능한 함수면 formula_153이다. 음함수 미분법. 일반적으로 함수는 formula_154로 표현된다. 하지만 formula_155 나 formula_156와 같이 표현되는 음함수도 존재한다. 이런 함수를 미분할 때는 이 함수를 formula_103형태로 바꿀 필요 없이 음함수 미분법을 사용하면 된다. 이 방법은 양변을 모두 formula_3에 대하여 미분을 한 뒤, formula_159에 대한 방정식을 풀면 된다. 예를 들어 formula_155는 양변을 formula_3로 미분하면 formula_162가 돼서 formula_163가 된다. 지수, 로그 함수의 미분. 지수함수 formula_164를 정의를 이용해 미분하면 formula_165이다. 이때 formula_166이므로 formula_167이다. 이때 formula_168이 되는 formula_18를 formula_170라고 한다. 즉, formula_171이고 formula_172이다.formula_173일 때, formula_174라고 정의한다. 이때 formula_10를 밑이라고 하는데 밑이 formula_170 인 로그를 자연로그라고하고 formula_177라고 표현한다. 즉, formula_178이다. formula_179를 formula_180임을 이용하여 미분하면 formula_181임을 알 수 있다. 이 자연로그의 미분을 이용하여 일반적인 밑을 가지는 지수, 로그 함수의 미분을 구하면 다음과 같다. 적분. 역도함수(부정적분). 모든 formula_184에 대하여 formula_185일 때 함수 formula_186를 구간 formula_187에서의 formula_1의 역도함수(부정적분)라고 한다. 여기서 F가 f의 부정적분이면 일반적으로 F+C도 f의 부정적분이다. 여기서 C는 임의의 상수이다. 정적분. 함수 f가 구간 [a,b]에서 정의된 연속함수 일 때, 구간 [a,b]를 동일한 n개의 폭 formula_189으로 분할하여, 이 n개의 부분구간들의 끝점들을 formula_190이라하자. formula_191에 속하도록 표본점 formula_192을 잡자. 이 때 formula_193가 존재하면, 그 값을 a로부터 b까지의 f의 정적분formula_194이라고 하고, 함수 f는 구간 [a,b]에서 적분 가능하다고 한다. 이 때 표본점은 각구간의 끝점 또는 중점으로 잡는다. 일반적으로 함수f가 구간 [a,b]에서 유한개의 불연속점을 가지면 f가 구간[a,b]에서 적분 가능하다. 정적분의 성질. 1. formula_1952. formula_196 (단, formula_46는 임의의 실수)3. formula_1984. formula_199 5. formula_200인 formula_3에 대해서 formula_202이면 formula_203이다. 6. formula_200인 formula_3에 대해서 formula_206이면 formula_207이다. 7. formula_200인 formula_3에 대해서 formula_210이면 formula_211이다. 8. formula_212이면 formula_213 미적분학의 기본정리. 함수 formula_1가 구간 formula_215에서 연속이면, formula_216, formula_200로 정의된 함수 formula_218는 formula_215에서 연속이고 formula_220에서 미분가능하며, formula_221이다. 함수 formula_1가 닫힌 구간 formula_215에서 연속이면, formula_224이다. 여기에서 formula_186는 formula_1의 임의의 역도함수, 즉 formula_227이다. 치환 법칙. 함수 formula_152가 미분 가능하고, 그 치역이 구간 I이며 함수 f가 구간 I에서 연속이면, formula_229이다. 정적분에 대해 변형시키면, 함수 g'이 [a,b]에서 연속이고, 함수 f가 formula_152의 치역에서 연속이면, formula_231이다. 부분적분법. 두 미분가능한 연속 함수 formula_26와 formula_147에 대해서, 적분 구간이 formula_234 일 때, 부분적분법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이때 우변의 첫째 항은 다음을 나타낸다. 이 법칙은 다음과 같이 미분의 곱셈 법칙과 미적분학의 기본정리로 증명할 수 있다. 부정적분의 경우에는 다음과 같다. 또는, 짧게 줄여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한다. 여기서, formula_239이고, formula_240이다. 넓이. [a,b]안의 모든 x에 대하여 f,g가 연속이고, formula_26≥formula_147일 때, 곡선formula_154,formula_244와 직선 formula_68,formula_246로 둘러싸인 영역의 넓이 A는 formula_247로 정의된다. 부피. S를 formula_68와 formula_246에 놓인 입체도형이라 하자. x를 지나고 x축에 수직인 평면 Px에 있는 S의 절단면의 넓이가 A(x)이고, A가 연속이라면 S의 부피(V)는 formula_250이다. 회전체의 경우, 위의 방법으로는 부피를 구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회전체의 부피의 경우, 아래와 같은 방법을 이용한다. 곡선 formula_154와 formula_68및 formula_246로 둘러싸인 영역을 formula_254축을 둘레로 회전시킬 때 생기는 회전체의 부피는 다음과 같다. formula_255 속도와 거리. 수직선 위를 움직이는 점 P의 시각 formula_256에서의 속도가 formula_257이고, 시각 formula_258에서의 위치가 formula_89일 때, 다음이 성립한다. 좌표평면 위를 움직이는 점 P의 시각 formula_256에서의 위치 formula_270가 formula_271, formula_272일 때, 시각 formula_258에서 formula_264까지 점 P가 움직인 거리 s는 다음과 같다. formula_275 곡선 formula_271, formula_272 formula_278의 겹치는 부분이 없을 때 길이 formula_279은 다음과 같다. formula_280 곡선 formula_154 formula_282의 길이 formula_279은 다음과 같다. formula_284 급수. 급수(級數)란 수학에서 수열들의 각 항의 합을 의미한다. 즉, 급수란 여러 수들의 합연산으로 표현된다. 급수의 예로는 아래와 같은 등차수열의 합이 있다. 1 + 2 + 3 + 4 + 5 + ... + 99 + 100 급수에 더해지는 각 항들이 어떤 공식이나 알고리즘에 의해 표현되는 경우도 있다. 난수들로 이루어진 급수도 생각할 수 있다. 급수는 유한 급수와 무한급수로 나눌 수 있다. 유한 급수의 경우 기초적인 대수학의 법칙들만 사용하여도 그 값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무한급수는 그 정확한 합을 구하기 위해서는 해석학의 여러 정리들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등차수열들의 합으로 이루어진 급수의 경우,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formula_285 등비수열의 합으로 이루어진 급수의 경우,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formula_286 무한급수. formula_287 무한급수는 위의 formula_288, 즉 급수의 부분합으로 이루어지는 수열의 극한값으로 생각한다. formula_115이 무한대로 갈 때, 그 극한이 유한한 값을 갖는다면 이 급수가 수렴한다고 한다. 만약 이 값이 무한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급수는 발산한다고 한다. 무한급수의 수렴을 판정하는데는 비교판정법, 적분판정법, 일반항판정법, 멱근판정법, 비율판정법 등이 있다. 멱급수. 주어진 수열 formula_290와 변수 formula_3에 대해서 formula_292를 수열 a로부터 얻은 멱급수라고 부른다. formula_293가 존재한다고 하자. 이때, 이 수열의 멱급수는 formula_294일 때 수렴한다. 테일러 급수. 원점 formula_87을 포함하는 구간I에 대해서 정의된 n번 미분가능한 함수 f:I→R 에 대하여formula_296 formula_1의 formula_115차 근사 다항식이라하고,formula_299 를 formula_115차 테일러 나머지 항이라고 하자.그리고 원점 근방에서 정의된 무한번 미분 가능한 함수 formula_26에 대하여 멱급수 formula_302 를 formula_1의 테일러 급수라고 한다. 테일러 급수가 원래 함수에 수렴할 필요충분조건은 formula_304 이다. 교육.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미적분학을 가르치고 있다. 대한민국. 대한민국에서는 고등학교의 "수학 II" 과목과 "미적분" 과목에서 미적분학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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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학
임학(Silviculture)은 우리가 어떻게 산을 가꾸고 산에서 나는 여러 물자들을 경제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가에 대해 연구하는 실용학문의 하나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산림에 관해 연구가 시작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가 않는다. 19세기의 산업혁명 이후 인구의 증가와 도시문명의 발달에 따라 집을 짓고 종이의 대량 생산에 따른 목재 수요의 급격한 증가는 산림이 가진 경제적 가치를 새로운 시각에서 평가하게 되었으며 이와 함께 산림의 보호와 육성은 국가적 관심사로 등장하게 되었다. 20세기에 중엽 이후에는 특히 메마른 도시 문명에서 벗어나 숲과 전원에서 휴양을 하고 여가를 보내고자 하는 도시인들의 관심은 잘 가꾸어진 산림의 또다른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4월 5일을 식목일로 정하여 푸른 산을 가꾸는 일을 범국민적 운동으로서 삼고 있다. 이와 밀접한 혹은 산림학의 토대가 되는 분야로는 생물학의 여러 분과, 생물환경학, 동물학, 식물학 등을 우선으로 하여 지리학, 지질학, 기상학, 경영학, 재정학, 법학 (산림법) 등을 손꼽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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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미술(美術)은 공간적 또는 시각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로 공간예술조형예술 등으로 불린다. 시각적(視覺的) 방법 또는 조형적(造形的)인 방법으로 사람의 감정이나 뜻을 나타내는 예술의 한 종류라고 말할 수 있다. 미술이라는 용어는 미(美)를 재현 또는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여러 재주 또는 기예를 뜻한다. 미술은 주로 사용하는 도구와 표현하는 방법에 따라 장르를 나눈다. 판화를 포함한 회화, 조각이 전통적이고, 대표적인 미술의 장르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그 영역이 아니라 한층 넓어져, 물리적인 재료를 특정 장소에 설치하여 미술가의 뜻을 전하고자 하는 설치 예술, 백남준 등 다양한 작가들이 새로운 뉴미디어 매체를 통해 선보이는 비디오 아트, 마르쉘 뒤샹 이후 등장한, 개념 자체가 결과물이 되는 개념미술, 특정 풍경이나 장소를 대상으로 하는 장소특정적 대지미술 등이 새로이 이 영역에 추가되었다. 이 외에도 새로운 매체와 소재가 발견됨에 따라 미술의 영역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미술이란 무엇이냐는 것을 알기 위하여 기초 지식인 여러 가지 사항이 다음에 이야기 되어야만 된다. 기초 지식이란 미술 작품의 성립, 표현과 환경, 표현과 사람, 표현과 연령, 표현의 태도·양식 등에 걸친 것이다. 개요. 미술이란 용어에 대해서. 사람의 감정이나 뜻을 나타내는 것을 미술이라는 말로 표현했으나 용어 자체는 그때그때마다 달리 사용되었다. 우선 중국 당(唐)시대에는 공예(工藝)라고 불렀고, 명·청(明·淸) 시대에는 서화(書畵)라는 말이 오늘의 미술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도 미술이라는 말이 들어오기까지는 역시 서화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서예와 그림 외의 미술 즉 공예(工藝)나 건축이나 조각 같은 것은 지금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미술이 아니고 단순한 공예품·건축물·조각물에 지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1960년 전후로 해서 서양의 미학 사상(美學思想)이 들어와 미술의 영토가 확대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1800년대에 서양 사람이 생각해 낸 미술을 둘로 구분, 순수 미술(純粹美術)과 응용 미술(應用美術)로 하여 그림·조각은 순수 미술, 공예·건축은 응용 미술이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1950년 전후해서 미술의 모습이 크게 달라지자 미술이라는 말이 새로 생긴 미술적 현상을 가리키기에는 너무나 좁고 구식이기에 새로운 용어가 요구되어, 시각 예술(視覺藝術)·공간 예술(空間藝術) 또는 조형 미술(造形美術)과 같은 말이 생기고 사용되게 되었다. 시각 예술이라는 것은 미술이 사람의 시각 작용을 매개로 하는 예술이기에 그렇게 불렀고 공간 예술이라는 것은 미술의 성립이 그 공간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간 예술(時間藝術:음악·문학 등)과 대치되는 예술로 규정되었고, 조형 예술은 미술이 유형적(有形的)인 조형성을 기본 방법으로 하고 있기에 그렇게 불렀다. 이 새로운 용어들은 과학(科學)의 발달과 생활의 변모에 따라 생기는 새로운 미술현상, 예를 들면 사진(寫眞)이라든가 디자인이라든가, 꽃꽂이 같은 것도 아울러 표현할 수 있는 여유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이미 미술이라는 말은 시대적으로나 개념적으로 오늘의 유형 예술의 전부를 가리키기에는 좁은 의미의 내용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미술의 조건. 미술의 표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표현을 중심으로 표현 이전의 사상과 표현 이후의 작품이 있어 셋이 올바르게 갖추어져야 된다는 것이다. 가령 풍경화(風景畵)를 그릴 때 늘 자기가 좋다고 보아 온 어느 자연 풍경이 있어 그것을 한번 그려보려는 마음이 우선 있어야 하고, 다음 어떻게 그리겠다는 표현의 방법이 마련되어 구체적으로 캔버스에다 유채로 그려 풍경화 작품을 남겨 놓아야 된다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이 표현 이전의 아이디어냐, 그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능력 즉 표현이냐는 것은 늘 예술상의 문제이지만, 모든 예술의 성립이 표현에서 비롯하므로 미술에서도 역시 표현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예술이 표현인 것과 같이 미술도 표현이다. 미술 표현에 있어서는 재료도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미술 재료는 미술 표현의 매개체일 뿐더러 그 존립을 좌우하는 중요한 존재이다. 그러기에 미술 발전의 밑바닥에는 늘 재료의 발달이 뒤따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술은 본질적인 미학적 근거도 갖고 있으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적응하는 시대성도 또한 중요하다. 모든 시대를 통하여 미술은 리얼리티의 구현이라는 것은 그 시대의 모든 문화적 성과를 종합해서 미술이 성립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얼른 생각하기에는 미술은 자연 과학과 별개의 것이라고 하지만 어느 시대이건 가장 위대한 미술은 그 시대의 미술과 자연 과학의 일치에서 오는 종합적인 존재라는 것을 미술사(美術史)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미술 작품의 성립. 표현의 주제. 인간의 행동에는 그 행동을 일으키는 어떤 동인(動因)이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미적 조형 활동(美的造形活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화가가 풍경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감동해서 그 감동을 캔버스 위에 표현한다고 하는 것도 동인일 것이며, 또한 건축가가 건축 의뢰를 받고 그 설계를 시작한다는 것도 하나의 동인일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작가에게 있어서 극히 행복한 경우일지 모르나 그것만이 순수한 동인으로서 예술적 효과를 높일 수 있는 것이라고 조급하게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작가가 그 주제에 대해서 얼마만큼의 정열을 쏟을 수 있었는가, 또한 표현의 기술을 통해서 얼마만큼 자신의 미적 감각을 발휘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주문을 받은 것이든 자발적인 것이든, 예술상의 타락은 작가가 자신의 예술적 양심에 반해서 대중이나 주문자나 혹은 비평가 등에 영합하려고 표현을 속이는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렘브란트는 단체 초상화를 평판적(平板的)인 기념 촬영으로 만들지 않았다. 야경(夜警)은 그의 예술적 의도에서 인물들을 광선의 교착 속에 두어 생활상의 분위기를 살렸는데, 이것은 주문자의 불평을 샀으나 지금은 네덜란드의 국보가 되어 있다. 이미지. 우선 표현의 주제가 결정되면 작가는 그것에 대해 여러 가지 이미지를 갖는다. 이미지라는 말은 심상(心像), 즉 기억이나 상상에 의해서 마음에 떠오르는 상(像)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미지가 풍부하면 표현도 풍부한 것이 되어, 조형(造形) 표현으로서는 극히 중요한 것이다. 다음으로 그 이미지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를 조사해 보거나 몇 가지 시작(試作)을 만들어 본다. 이 단계에 있어서 아이디어(idea)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이디어라는 말은 고안이라든가 착상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작가의 창조력과 아이디어에 의해서 이미지를 구현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안이 나온다. 이 구체적인 안을 드림 디자인(dream design)이라고 한다. 모나리자를 그린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자연 과학이나 물리학에 관한 연구를 했는데, 그 맹렬한 창조 정신에 의해서 건축 설계를 하거나 비행기의 고안을 하거나 기타 여러 가지 기계를 고안했다. 우선 몇 가지 안이 나오면 그 가운데 무엇이 가장 좋은가가 결정되어 설계도라든가 밑그림이 만들어진다. 디자이너나 건축 설계사의 일은 대체적으로 거기까지로서 다음은 시공자에게 넘어가는데 인쇄되는 것은 인쇄상의, 또 건축가는 시공의 재료나 시공상의 여러 문제에 대해서 충분한 지식이 필요하며, 또한 시행 중에도 계획대로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가 어떤가 감독된다. 17세기의 화가 루벤스는 밀리는 주문의 뒤를 댈 수가 없어서 많은 제자들을 두어, 자신의 데생 위에 분담하여 그리도록 하고 최후로 자기 자신이 손을 대서 완성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미켈란젤로는 방대한 시스티나 성당의 대벽화를 거의 혼자서 목이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까지 그려댔다. 이처럼 건축이나 대량 생산되는 공예품 따위의 특별한 것 이외는 대체적으로 마지막까지 작자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진다. 왜냐하면 그림 같은 것은 그림물감을 칠하는 방법이나 붓 하나하나에 작자의 마음이 담기고 제작 의도가 충분히 살려져서 작품과 작자 사이에 한 치의 간격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마음속에 그려진 이미지가 이렇게 해서 하나의 창작품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많은 고생이 거듭되고 또한 제작에의 정열이 지속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에스프리. 산 피에트로 성당의 조영은 1세기 반에 걸쳐 전개된 대사업으로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상징이었다. 브라만테, 라파엘로, 페루치에 이어 72세의 미켈란젤로가 그 설계를 인계받았으며, 그가 죽은 후 대궁륭이 완성되고 베르니니가 내진의 대천개와 광장을 설계해서 완성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형성된 미술 작품이 무엇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일까. 그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작품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작자의 의도나 작품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고 있는 작자의 마음이 보는 사람의 마음에 통하기 때문이리라. 에스프리라는 말은 그 표현에 작자의 신경이 통하고 있어 개성적(個性的)이라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시혼(詩魂)이라는 말로 표현해도 좋고 혹은 작품 속에 숨겨져 있는 인간성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A라는 어느 한 인간을 생각해 보자. A에게는 머리도 있고 몸뚱이도 있으며 손발도 있다. 그것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도 볼 수 있으며 그것들이 없어지면 A도 물론 소멸해 버리긴 한다. 그러나 A는 단지 머리와 몸뚱이·손발들을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있는 무엇인가가 머리나 몸뚱이나 손발을 움직이게 해서 A다운 행동을 시킴으로써 머리나 몸뚱이나 손발을 특징지어 A라는 사람의 인상을 그와 접촉하는 사람에게 부여해 주는 것이다. 인간이 머리나 몸뚱이나 손발을 갖고 있는 것처럼 조형작품(造形作品)도 제각기 모양을 갖고 빛깔을 가지며, 재료를 갖고 또한 제각기 구성을 갖는다. 그것들은 눈으로 볼 수 있고 작품을 밖에서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의 양상을 특징지어주고 작품을 안에서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시대에, 어떤 지방에 살고 있던 어느 인간(작자)의 개성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작자의 인격이라고 해도 좋고, 또 인간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작품은 그 가운데 작자의 피가 맥박치며 흐르고 있어서 모양이나 색깔 따위를 특징지어 주고 있는 생명체이다. 따라서 조형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작품은 안에서 지탱하고 있는 작자 자신의 인간성을 이해함과 동시에 작품을 밖에서 지탱하고 있는 조형성(造形性)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표현과 환경. 표현과 환경. 인간은 자신의 의지만으로써는 행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좋거나 싫거나 관계 없이 자기를 둘러싼 환경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조형표현이라고 하는 인간의 행위도 유형 무형의 환경에서 영향을 받아 여러 가지 작품으로 이루어져 생겨나온 것이다. 표현에 영향을 미친 환경은 우선 시대의 차이이며, 다음에 작품을 낳은 풍토(風土)의 차이라 할 수 있겠다. 표현과 시대.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인류 문화의 발달 정도가 달라지고, 정치나 종교나 생활양식 등이 달라지게 되므로 그들이 조형표현에도 영향을 끼쳐서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다른 조형이 생겨나게 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인류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그 시대와 미술이 어떻게 관계해서 변화하였는지의 개략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자. 인류 최초의 회화(繪畵) 유품은 지금으로부터 약 2만년 전의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라고 하는데 아직 농경의 기술을 모르고 동굴 속에서 살면서 수렵으로 생활하던 인류는 손쉬운 재료를 사용하여 동굴 벽에, 마치 어린이가 돌이나 나뭇조각을 가지고 지면(地面)이나 벽에 낙서를 하듯이 자기들 생활에 가장 가까운 동물의 가지가지 모습을 그렸을 것이다. 후세 사람들처럼 사실적(寫實的)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들의 표현은 동물을 사랑하기도 하고 동물을 두려워하기도 하여, 동물의 생태나 습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기억을 바탕으로 생생하게 표현하였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원시적인 조형은 매우 솔직한 표현으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이 강한 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강조되었고 어린이의 표현처럼 심리적인 밸런스가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지나치다고 생각되리만큼 장식이 많은 것은 인간이 가진 장식본능의 발로이기도 하겠다. 이윽고 농경이 시작됨에 따라 살기 위한 집이 세워지게 되자 곡물을 저장하기 위한 옹기그릇 따위가 만들어지게 되어 여러 가지 조형활동이 성하게 된다. 집들이 모여서 마을이 생기고, 마을이 커지면 마을이 나뉘어 민족의 이동이 일어나고, 또한 지구의 지배자가 나와 나라와 통치자가 생긴다. 그리되면 풍토나 산물이나 또는 왕의 지배 면적의 대소 등에 따라서 문화의 발달에도 지속(遲速)의 차가 생겨 조형 활동에도 다양성을 띠게 된다. 가령 이집트왕은 태양의 아들(파라오)이라 불렸듯이, 산·강·새 따위 자연물이나 자연현상이 신격화되어, 왕이나 귀족의 궁전이나 분묘(墳墓)가 중심이 된 여러 가지 조형활동이 이룩된다. 이집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믿어서 왕이 죽으면 시체를 미라로 만들어 아름답게 장식된 관(棺)에 넣고, 분묘 벽에는 왕 생전의 공적을 표시하는 그림이 그려졌고, 왕의 상(像)을 문앞에 세웠으며, 실내에는 왕의 일용품이 놓였고 종자(從者)의 상 등이 만들어졌다. 자연신의 신앙은 마침내 신화(神話)를 낳았고 전설이나 신화가 사람들의 생활감정까지도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스에서는 우수한 대리석의 산출과 그 민족이 지닌 고유한 성이라 할 자유와 미를 사랑하는 심정에서, 신(神)을 인간이 가장 이상(理想)으로 하는 아름다운 형상으로 표현함으로써 진(眞)과 미가 일치되어 여러 가지 학문이 발전하였으며, 먼 후세까지의 규범이 될 만한 아름다운 조각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자연신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교나 불교 등의 종교가 생기자, 이윽고 그들 종교를 중심으로 한 조형미술이 발달한다. 우상 숭배를 부정하는 회교에서는 여기저기에 특징 있는 교회를 세워, 그것을 이른바 아라비아 무늬로 장식하였으나 그림이나 조각은 그곳에 놓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는 교회의 건조와 함께 그리스도나 성모, 또는 사도들에 관한 많은 조각(그림)이 만들어졌다. 또한 비잔틴 사원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창문에는 스테인드글라스가 붙여졌다. 종교개혁과 함께 일어난 르네상스는 유럽 미술의 가장 화려한 황금시대의 한 시기를 만들어 내었다. 인도에서 일어난 불교는 각지에 불교미술을 남기면서 인도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래되었다. 종교에 의하여 발달한 조형미술은 각지의 왕조나 권역자의 위엄을 나타내는 듯한 미술로 발전하거나, 또는 네덜란드 등과 같이 서민생활이나 생활주변의 자연으로 눈을 돌리게 하여 점차 근대화(近代化)가 이루어졌다. 유럽에서는 왕·왕자·왕비·공주 등의 초상(肖像)이 걸리거나 하였고, 또한 18세기가 되면 바티칸 궁전에는 장식 과잉이라고도 생각될 그러한 가구 등이 놓였다. 19세기로 접어들어 과학이 장족의 진보를 보이게 되자 조형미술도 급속하게 근대화로의 징조를 보인다. 빛의 과학적인 리얼리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상파(印象派)에서 후기인상파로, 더욱이 파리파(派)에 이르러 더욱 더 표현은 개성적인 성격이 짙어지고, 또한 표현을 위한 데포르메(變形)가 행해진다. 그리고 종래의 종교나 문학적인 정조(情操)에 예속된 느낌이 있었던 조형활동은 그 조형성이 존중되어 추상화가 촉진되었다. 이와 같이 시대와 더불어 조형미술도 변천해 왔으나 '역사는 반복된다'는 속담처럼, 그 진전 도상에서 이따금 과거로의 복귀(復歸)현상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것 그대로는 아니고, 새로운 시대정신에 의하여 순화(醇化)된 새로운 것의 탄생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미술은 전통의 계승과 함께 항상 새로운 것으로의 창조를 계속한다. 풍토와 표현. 시대의 진전에 따라 표현의 양상이 다르듯이, 기후나 산물이나 민족이나 종교나 또는 생활양식 등이 다른 풍토의 차이에 의해서도 표현의 재료나 방법이 달라지게 된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 한 예로서 유럽과 한국을 비교하여 보자. 우선 유럽은 대륙의 일부로서 공기는 건조하고 투명하며, 그리스나 이탈리아 등에서는 양질의 대리석 따위가 산출되고 그리스도교를 신봉하였다. 이들의 영향을 받았음인지 서양인의 사물에 대한 사고방식은 합리적이어서, 사물을 대함에 계획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짙다. 이에 비하여 한국은 대륙에 이어진 반도 국가로서 기후가 온화하고 자연환경이 아름답다. 이러한 자연환경 때문인지 한국 사람은 평화를 사랑하고 자연을 존중하게 되었다. 고려자기나 조선백자는 한국의 풍토와 한국의 기호(嗜好)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회화표현으로서는 유화(油畵)와 수묵화(水墨畵)의 차이를 들 수 있겠다. 유화의 도구는 즉흥적으로 그리기보다는 견고하게 캔버스 위에 그림물감을 덧칠해 나가는 데 적합한 재료이고, 또한 사실적인 표현에 적합한 재료이다. 즉 눈에 보이는 대로의 형상과 빛깔을 표현할 수도 있고, 또한 대상의 재질감(材質感)을 그림물감의 채색 방법의 차이에 따라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계획적으로 작업을 진행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반하여 수묵화는 심상적(心想的)인 풍경이나 인물을 오히려 즉흥적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그래서 우선 빛깔이 부정된다. 부정된다고는 하지만 먹의 농담(濃淡)에 의하여 빛깔의 느낌을 낼 수는 있는데, 묵색(墨色)이 중시되는 것은 현실의 빛깔과는 차원이 다른 빛깔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명암(明暗)·음영(陰影)에 의한 양감(量感)의 표현을 부정한다. 묘선(描線)이나 먹에 의하여 두께나 무게의 느낌을 내려고 한다. 표현의 교류. 표현은 풍토의 차이에 따라 달라지는데 또한 생각지도 않았던 상사(相似)를 다른 풍토의 조형 속에서 발견할 수도 있다. 이것은 민족의 이동이나 민족간의 문화교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의 고대 역사에 있어서 문화상의 커다란 변혁의 하나는 중국 남북조로부터의 불교 전래였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교의(敎義)만으로서의 전래가 아니라 철학에서, 문학에서, 그리고 건축을 비롯한 모든 조형문화의 전래이기도 하였다. 당시의 국제 국가였던 당(唐)나라는 조형미술에서 직접적이지는 않더라도 인도와의 문화교류가 이루어졌고, 또한 인도의 간다라 불상은 그리스·로마 조각의 영향을 받아서 극히 그리스식(式)이었다. 실크로드는 동서문화를 연결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고, 중앙 아시아의 여러 가지 집기(什器)들이 고대한국에도 전래되어, 이것들이 당시 한국의 조형활동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짐작할 만하다. 또한 20세기 초의 유럽 화가들은 동양회화에 흥미를 느꼈고 고갱은 색면(色面)으로써 대상을 파악하여 동양화가 특징으로 하는 그림물감의 평면도(平面塗)를 시도했다. 또한 선묘(線描)의 아름다움은 마티스 등의 그림에서도 살려져 있으며 1950년대에 세계를 휩쓴 앵포르멜의 회화기법도 동양화의 몰골법(沒骨法)과 깊은 유대를 가졌다. 교통기관이나 보도기관의 발달에 따라 문화교류는 더욱 왕성하게 되어 조형표현도 구역의 차이를 줄였다고는 하나 결국 그들이 지역의 전통 속에 흡수 융화되어 항상 새로운 문화가 계속하여 생겨나게 된다. 표현과 사람. 표현과 개성. 아이들이 친구들의 얼굴을 그리면 그 작품은 친구의 얼굴을 닮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상하게도 본인의 얼굴과도 닮은 데가 있다. 이와 같이 아이들 작품에는 남녀의 성별, 체격이 큰가 작은가, 강한가 약한가 등의 차이나, 마음이 대담한가 약한가, 또는 침착한가 거친가 하는 따위의 기질의 차이에서 지능의 정도 등이 화면에 그려지는 물체의 크기, 선(線)의 굵기, 또는 강약, 형상을 잡는 방법, 사용하는 빛깔, 또는 붓의 사용 방법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어른, 더군다나 그것이 전문가가 되면 여러 가지 경험이나 수업방법, 특히 본인의 의지 등에 따라서 갖가지 보상작용(補償作用)이 생겨, 어린이의 경우만큼 단적으로 드러나는 일은 없으나 성격이나 경험의 차이가 작품상에 나타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표현은 개성적으로 되고 또한 창조적으로 될 수 있다고 하겠다. 각인각색(各人各色)이란 말이 있는데 참으로 예술적 작품은 각인각색이다. 이 원인은 모든 사람이 다 그 성장과정이 다르고, 가지고 태어난 기질이 다르며, 지도자가 다르고, 이때까지의 경험이 다르며……요컨대 '사람' 그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같은 시대의 같은 지방에서 살던, 그리고 가능하다면 같은 종류의 작품을 비교하여 보면 잘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우선 르네상스 최성기(最盛期)의 3인의 대표적인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를 고찰하여 보자. 다 빈치는 구식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수학이나 기타 학문을 즐기는 한편, 음악에 뛰어나고 그림그리기를 좋아하여 그의 신통한 재간을 발휘하였는데, 15세기풍의 사실주의를 발전시켜 명암(明暗)에 의한 입체감(立體感)과 공간의 표현에 성공하였고, 나아가서 그의 회화론에서 '훌륭한 화가는 두개의 주요 사물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사람과 그리고 그 혼(魂)의 의향(意向)이다'라고 말하였듯이 대상의 정신내용의 표출에까지 발전하였다. 그러나 자연의 이법(理法)을 추구하여 그 속에 숨겨진 참에 대한 추구가 <모나리자>에도, <암굴(岩窟)의 성모>에도 드러나 있다. 미켈란젤로도 조각가·화가·건축가·해부학자이자 동시에 시인이기도 하였으며, 이 점에서 다 빈치와 마찬가지로 르네상스가 요구하는 '초인(超人)'이었으나, 다 빈치가 속에 있는 진실을 탐구하려 한 데 반해서, 미켈란젤로는 건강하고 바위와 같이 굳게, 하늘과 같이 넓게, 분방(奔放)하면서도 사려깊이 르네상스를 연소시켜 불꽃을 드높였다. 그러한 정열이 29세로 <다비드>를 만든 뛰어난 조형 능력과 서로 어울려 시스티나 성당에 현기증이 날 정도로 높은 비계를 걸어 놓고, 그곳에서 짐승처럼 돌아다니면서, 6년이 걸려서 저 대천장화(大天障畵)를 그리게 했다. 라파엘로는 다 빈치와 같은 발명적인 창조정신도, 그리고 미켈란젤로와 같은 초인적인 조형적 에너지도 갖지 않았으나, 그는 각 유파의 특질을 교묘하게 흡수하여, 멋진 조화 속에서 그것들을 통일하고 빼어난 기술과 어울려 부드럽고 아름다운 많은 성모상을 남기고 요절하였다. 표현과 연령. 표현이 작자의 경험이나 성격에 따라 개인차가 있다고 하는 것은, 동시에 개인에게 있어서도 연령에 따라 그 표현이 달라진다고 하겠다. 표현과 개인의 연령과의 관계는 지극히 개인차가 많아서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으나 대체적인 경향으로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노년기는 이른바 원숙한 시기로서 거기에서는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기 자신의 취향을 제마음대로 발휘하는 시대이다. 개중에는 고령이 된 다음 더욱더 진가(眞價)를 발휘하는 사람도 있고, 또는 매너리즘에 빠져 버리는 사람도 있다. 렘브란트는 청년기에서 만년기에 걸쳐 약 백 점에 가까운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데, 청년기·장년기의 표현의 차이가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알아보자. 렘브란트의 27세∼28세의 작품에서는 초상화가로서 호평을 받아 우쭐거리는 자세가 몸가짐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아직도 렘브란트의 특질을 충분하게는 발휘하고 있지 않다. 그의 57세∼58세 작품에서는 인생에 대한 체관(諦觀)이 지극히 사람이 좋은, 그리고 보는 견지에 따라서는 대범한 웃음이 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림물감이 두껍게 칠하여졌고 빛(光)과 빛깔이 완전히 융화되어 작품은 더욱더 심각성과 처절함을 덧붙이고 있다. 표현과 연령. 표현과 성장. 모든 것이 성장하여 나아갈 때 거기에는 몇 개의 단계가 있다시피 당연히 그림을 그리는 힘의 발달에도 대체적인 순서와 단계가 있다. 그것이 그림의 발달단계이다. 이 발달단계 연구자에 따라서 다소의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로웬페르드(미국)의 연구를 기저(基底)로 한 다음의 6단계설이 많이 쓰이고 있다. 그러나 연대(年代)의 진전에 따라 발달의 진보도 빨라지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성의 있는 가정교육, 미술연구소나 아름다운 복제화(複製畵)의 보급,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하는 매스컴의 영향 등이 그 원인이라 생각된다. 이상과 같이 나눌 수가 있다. 당연한 것이긴 하지만 어떤 단계에 넣어야 좋을지 확실치 않은 것도 있으며, 또한 성격이나 능력의 차이, 환경의 차이 등에 따라서 발달이 반드시 일정하지는 않다. 개중에는 표현이 후퇴하는 그런 어린이조차 나오게 된다. 이러한 특례가 있으나 대체적인 발달의 자태는 역시 비슷한 단계를 밟아간다. 이처럼 어린이의 그림은 심신의 성장과 함께 자라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린이의 작품에는, 어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그러한 예술성은 없다고 생각하여야 된다. 척서기. 이 척서기는 유아가 신경이나 근육 에너지의 과잉(過剩)을 자발적으로 소비하려고 하는, 무의식 속에서 나온 팔의 반복 운동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림으로서는 아무 뜻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에 이르기까지의 중요한 과정이다. 이 척서기에도 대체적인 발달 순서가 있다. 우선 처음으로 크레용을 잡은 유아는 점을 찍는다. 종이를 두들기듯이 점을 찍는다. 다음에 볼 수 있는 현상은 손목을 좌우로 흔들어서 그리는 횡선착화(橫線錯畵)이다. 이윽고 종선착화(縱線錯畵)에로 발달하여 간다. 이것은 손의 컨트롤이 팔꿈치까지 함께 움직일 수 있도록 되었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팔의 활동이 숙달됨에 따라 선도 뚜렷해지고 마침내 원형착화(圓形錯畵)로 발전하여 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그것이 파상(波狀)과 원형의 혼합으로 되어 더욱 더 복잡하게 되어 간다. 상징기. 2세 전후가 되면 그린 형상에 명명(命名)하는 어린이가 생겨난다. 그것이 상징기이다. 어른이 보기엔 단순히 선을 긁적거린 것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것을 어린이는 <기찻길> <버스> <멍멍> 따위로 이름을 붙이고 우쭐거리며 자랑스럽게 떠들고 있다. 이는 유아가 운동만으로 느끼고 있던 흥미에 시각적(視覺的)인 것이 곁들여져, 그린 것을 의미화(意味化)하는 단계이다. 단순한 운동적인 것에서 상상적인 것으로 발전했다는 증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는 척서기에 상상성(想像性)의 발달이 합쳐진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어른이 성급하게 이 시기 어린이의 표현에서 시각적인 의미를 강제로 끌어 내려고 하거나 형상을 그리도록 강요하거나 하는 것은 잘못이다. 어른은 곁에서 어린이가 그리면서 말을 들어주고 그 표현을 격려하여 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 시기의 그림은 성장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전도식기. 이 시기의 표현은 설명 없이 대충 그것이로구나 하고 인정할 수 있는 그러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다. 요컨대 어린이의 주위에 있는 사람이나 초목·기물 등을 조금씩 지식으로서 파악하여 그것 비슷하게 그려서 표시하게 된다. 표현은 물론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그 대상의 특징을 그려 표시하는 데서 진보가 보인다. 산·태양, 그리고 사람도 일정한 도식(圖式)으로 표시하고, 또는 부분을 그렸을 뿐인데 그 대상 전부를 표시하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상징기와 동일하게 생각되는 경향이 있으나, 상징기는 그려진 것이 무엇인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데 반해서, 전도식기의 표현은 하여튼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리는 방법으로서는 예를 들면 인간의 경우에 얼굴은 동그라미, 눈은 점, 발은 한 쌍의 선으로 표시한다. 제재(題材)는 인물이 압도적으로 자기 자신과 어머니·아버지·동생 등의 순으로 많이 그려진다. 요컨대 일상 생활에서 자기자신과 관련성이 깊은 것일수록 자주 취급된다고 할 수 있겠다. 도식기. 이 시기의 표현은 그림답게 되어 마침내 안정감을 갖추게 된다. 물론 실재(實在) 사물의 관계나 양(量)·형(形)을 베끼는 것은 아니고 기억에 의하여 도식으로 외워 그린다. 영향을 받기도 쉬어 형식에 대한 모방이 많았다. 이 시기의 표현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사실전기. 자유롭고 활발하게 그리면서 표시하여 온 과거의 연대와 비교하면 이 시기는 그리는 방법이 세밀하게 되어 한층 더 한 장의 그림 제작에 시간이 걸린다. 이것은 이 연대가 동료의식이 싹트는 시기로서 비판적·객관적으로 사물을 보게 되기 때문에 공간관계라든가 사물의 형상·빛깔 등을 점점 실물에 가깝게 그리려고 하는 데에 기인한다. 따라서 이것이 원인이 되어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 데 실망을 느껴서 그림 그리는 것에 흥미를 잃어버리는 아이가 적지 않다. 반면으로, 어른들의 흉내가 아니라 어린이다운 연구에서 묘미 있는 아동화를 볼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사실기. 사실기에 이르기까지에는 대상을 보면서도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을 마음내키는 대로 그리고 있었으나, 14세쯤 되면 대상을 관찰하고 그것과 비슷하게 그리려고 하는 욕구가 강해진다. 그것은 이성(理性)의 발달에 의하여 객관적으로 사물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形)이나 색채는 대상에 충실하게 표현된다. 그런데 지나치면 개념적·형식적인 그림을 그려 버리고, 더욱이 창조적인 표현이 차단되어 그림을 그리는 데 흥미를 잃는 자가 더욱 많아진다. 이것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인간으로서 급격한 발전을 이룩하는 데 반해서 그림을 그리는 힘이 그에 뒤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각하였던 대로 느꼈던 대로의 표현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만큼 이 시기를 어떻게 타개할 것이냐가 문제이다. 유아화와 아동화. 연령상으로나 작품상으로 확실하게 구분할 수는 없다. 대개 연령적으로는 생후 1년 내지 1년 반에서 12세에 이르기까지의 어린이가 그린 그림을 아동화라 부르고 있다. 또한 15세까지의 중학생의 그림도 포함시켜 아동화라고 할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생각하는 방식으로서는 6세까지의 그림을 유아화, 12세까지의 그림을 아동화로 구분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작품으로 그것을 구분하기는 거의 곤란하다. 그런데 유아의 그림은 성장의 기록이라 생각하는 게 좋다. 이 사실은 전술한 바 발전단계, 더욱이 착화기가 그를 가장 현저하게 드러내고 있다. 아동화도 본질적으로 이와 다를 바 없다. 역시 생활의 기록이며 자기 주장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유아화나 아동화를 화가가 그린 예술작품과 같은 견지에서 본다는 것은 잘못이다. 어린이가 그림을 그리는 일과 어른이 그림을 그리는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청년의 미술. 대학생·고교생은 물론 중학교 2∼3년생의 그림도 광의(廣義)로는 청년의 미술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회화에는 예술적인 가치가 없어서는 안 된다. 예술은 미의 독창(獨創)이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은 남이 이미 한 것, 써서 헌 것이 되어 버린 것의 재현(再現)을 기피한다. 백합꽃을 그린 그림이 있다고 하자. 그것이 예술작품이기 위해서는 일상 우리들이 보고 있는 백합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신선한 미가 있어야 된다. 과연 백합에는 이러한 아름다움도 있었구나 하는,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빠뜨리고 보지 못하였던 미를 알아차리는 것과 같은, 그러한 것의 발견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색채에서, 구성에서, 기법에 있어서, 그들 전체에 관계되어 있는 심정(心情)에 있어서 '싱싱하고 신선한 것'이 요구된다. '싱싱하고 신선한 것'은 그 작품의 표현이 지금까지 본 일이 없으며, 또한 보는 사람에게 쾌감을 줄 수 있는 그러한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까지 본 일이 없다고는 하나 변태를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새롭다'고 하는 것과 '변태'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표현의 태도·양식. 표현의 태도·양식. 미술작품은 시대에 따라 또는 사람에 따라서 가지가지 다른 양식(style)을 가지고 있다. 같은 종류의 표현양식이 모이면 유파(流派)가 생기고, 그것이 형식적으로 계승되면 양식이 생긴다. 미술표현의 양식 중 중요한 것을 살펴보자. 원시적 양식. 원시적(原始的, primitive) 양식은 구석기시대나 중석기시대의 인류와, 문화의 세계를 접하지 않은 민족의 조형미술의 양식으로서, 유아의 조형표현에도 공통되는 점이 많다.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 과장(誇張)되어 표현이 지극히 직절적(直截的)이다. 소박하고 치졸(稚拙)하기는 하나 힘과 매력이 넘친다. 아르카이크 양식. 아르카이크(archaique) 양식은 미술 발전의 초기 단계에 나타난 양식으로서 표현은 생경(生梗)하지만 신비성(神秘性)이 풍부하다. 그리스 조각에서는 기원전 7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 말까지를 아르카이크시대라 부르는데 고졸적(古拙的)인 표현양식을 갖고 직선적·정지적(靜止的)인 정면성(正面性)을 갖는다. 입에는 이른바 아르카이크 스마일(古拙的微笑)을 지니고 있다. 고전적 양식. 고전적(古典的, classic) 양식은 주제나 표현의 양식·수법이 그리스·로마 예술을 모범으로 하는 경향의 예술을 말한다. 잘 정돈된 엄격한 형식으로서 냉정성과 명쾌성을 가지고 있다. 17세기의 푸생은 바로크 예술의 반동으로서 목가적(牧歌的)·고전적인 작품을 그렸다. 19세기에는 18세기의 장식성이 많은 루이 왕조의 예술의 반동으로서, 다비드와 그 제자 앵그르가 고전주의의 작품을 그렸다. 또한 피카소에서도 그리스 조각에서 배운 신고전주의 시대가 있었다. 아카데믹 양식. 아카데미(academic) 양식은 플라톤이 아카데모스 신원(神苑)에서 플라톤 학파를 세웠고, 아카데미라는 말은 상원·학회·학교 등에 쓰이게 되었다. 관학풍(官學風) 등으로 번역되어, 미술적으로는 전통적이고 형식을 존중하며, 기초 기술을 중하게 여기는 태도를 말한다. 독창성이 결여되어 무기력한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져서 일정한 기술을 타성적으로 반복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사용할 경우도 있다. 전통적 양식. 전통적(傳統的, orthodox) 양식은 정통(正統)이나 본도(本道)의 뜻을 갖는 말로서 전통적·정통파적인 기법을 가리켜 사용되는 말이다. 사실적 양식. 사실적(寫實的, realism) 양식은 공상을 배격하고 가능한 한 현실에 즉응(卽應)하여 실재의 진실을 추구하려 하는 태도를 말한다. 사실적인 경향은 이집트 미술에서도, 그리스 미술에도 볼 수 있었는데 르네상스 미술은 사실(寫實)의 하나의 정점(頂點)에 달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사실적인 경향은 17세기에도 계승되어, 근대 쿠르베가 사실주의를 표방하였다. 구소련에서는 레빈 등이 사회적인 사상(事象)을 사실적으로 그려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선구가 되었고, 멕시코 회화에서도 특이한 사실주의가 눈에 띈다. 중국의 화조화(花鳥畵) 등에서 볼 수 있는 사실주의는 유럽과 다소 달라서 장식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낭만주의. 낭만주의(浪漫主義, romanticism)는 사실주의와 함께 서양미술의 커다란 저류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그 표현은 동적(動的)이어서 감정의 격렬한 여파(餘波)가 느껴진다. 소용돌이치는 듯한 구도, 대비(對比)를 살린 배색(配色) 등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동적인 구도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나 그것을 이어받은 틴토레토의 작품에도, 그리고 17세기에는 루벤스 등의 작품에도 보이는데,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쳐 제리코나 들라크루아 등이 고전파에 대항하여 낭만파를 세웠다. 낭만파는 현실 회피의 경향에서 그 주제도 주로 이야기, 사회적인 사변이나 전쟁 따위의 극적인 장면에서 구했다. 환상적 양식. 환상적(幻想的, fantastic) 양식에서 상상력이나 환상력은 창조표현의 크나큰 요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블레이크, 고야, 모로, 앙리 루소, 샤갈, 폴 클레 등의 작품에는 환상적인 장면이 그려졌고 또한 키리코 등의 초현실파 작품에는 심상적(心象的)인 환영(幻影)이 표현되어 신비성이 느껴진다. 상징적 양식. 상징적(象徵的, symbolic) 양식은 형상이나 빛깔이 갖는 의미를 단적으로 표시하려고 하는 것으로서, 가문(家紋)이나 마크 따위의 기호는 집이나 단체나 물품이나 그 밖의 의지(意志)를 상징적으로 표시한 것이다. 르동은 꽃이나 나비 등과 같이 어느 순간에 없어지는 것 속에서 영원한 아름다움과 생명을 호소하려고 즐겨 꽃이나 나비를 그렸다. 장식적 양식. 장식적(裝飾的, decorative) 양식은 사물을 꾸미는 태도이다. 즐문토기(櫛紋土器) 등에도 그로테스크라고까지도 생각되리만큼 곡선의 무늬가 붙여져 있다. 사물을 아름답게 장식하려는 장식본능은 조형 본능의 커다란 기반을 이루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장식성은 조형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발휘되고는 있으나 모자이크·스테인드글라스·벽화 등은 건축에 적응하는 것이다. 장식성이 그 자체, 혹은 그 영역의 기능보다 선행하면 장식 과잉이 된다. 자연주의. 자연주의(自然主義, naturalism)에 따르면 인간도 자연물의 하나이므로 자연 속에 둘러싸여서 생활하여 나가는 이상, 항상 자연에 순응하려고 하여 '자연으로 돌아가라'란 말이 반복되게 된다. 기물이나 건축장식 등에 동식물의 무늬를 붙이거나 또는 기물 따위의 형태 그것 자체를 동물 모양으로 모방하여 만드는 경우가 있는 것도 이러한 마음의 한 표현이다. 자연 현상으로서의 풍경이 독립하여 회화의 주제로서 취급된 것은 17세기 네덜란드로, 터너는 자연현상으로서의 대기(大氣)를 표현의 주제로서 취급하였고, 19세기 후반의 피사로, 모네, 시슬레 등에 의하여 일어난 인상파(impressionism)는 빛의 움직임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자연의 표정을 포착하려고 하였다. 사실파 사람들이 자연이나 인생의 현실적인 진실을 파헤쳐 뽑아내려고 한 데 반하여, 인상파는 솔직하게 자연현상의 아름다움에 순응하려는 태도가 보인다. 세잔 등의 후기인상파는 인상파를 수정하여 사실파와는 다른 각도에서 사물의 본질에 접근했다. 표현주의. 표현주의(表現主義, expressionism)는 20세기 전반에 독일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 예술운동으로 고흐나 뭉크 등의 강렬한 개성표현에서 영향을 받아 자연묘사에 대응하여서 감정표현을 주안(主眼)으로 하고, 주관의 표현을 강조하였다. 개성표현의 강조는 현대미술의 커다란 기반이라고 말할 수 있다. 20세기 초기에 프랑스에서 생긴 야수파(fauvism)도 주관주의 미술이며, 마티스, 루오, 뒤피 등은 야수파를 대표하는 화가들이다. 거친 터치의 대담한 표현으로서 단순화(單純化)나 데포르메(變形)를 볼 수 있다. 동양에서도 주관적인 경향이 짙은 작품이 지극히 많다. 추상주의. 추상주의(抽象主義, abstractism)에는 입체파가 대표적이다. 20세기 초 세잔의 영향으로 피카소나 브라크는 자연의 형체를 해체하여, 그것을 화면 위에 새로운 질서에 의해서 재구성(再構成)하려는 이른바 입체파(cubism)를 일으켰다. 이탈리아에서는 자연의 형체를 해체하는 데에 시간의 요소를 받아들여 '미래파'를 일으켰다. 칸딘스키는 자연의 대상과는 관계 없이 형상이나 빛깔이 갖는 성질을 살려서 이것들을 화면에 조립시켜, 음색(音色)이 다른 악기를 모아 교향곡을 만들듯이 새로운 질서와 통일을 도모하려 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지적·합리적인 화면 구성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것들에 대해서 가장 자유롭게, 부정형(不定形)을 가지고 자기 감정을 분방하게 표현하거나, 또는 완성된 결과 등을 문제 삼지 않고 그림물감을 마구 던져 칠하거나, 뿜어 칠하거나 하는 행동을 취할 때의 정신적인 긴장을 소중히 여기는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 따위도 생겼다. 기능주의. 기능주의(機能主義, functionalism)는 인간생활과 조형표현과의 사이의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여 순수한 질서를 확립코자 하는 것인데, 기능적인 조형표현의 가장 기반이 된다고 할 수 있음과 동시에, 합리적인 추상주의와 연결된다. 설리번의 '형식은 기능에 따른다'고 하는 말은 기능주의의 의도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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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
HTTP(HyperText Transfer Protocol, )는 W3 상에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프로토콜이다. 주로 HTML 문서를 주고받는 데에 쓰인다. 주로 TCP를 사용하고 HTTP/3부터는 UDP를 사용하며, 80번 포트를 사용한다. 1996년 버전 1.0, 그리고 1999년 1.1이 각각 발표되었다. HTTP는 클라이언트와 서버 사이에 이루어지는 요청/응답(request/response) 프로토콜이다. 예를 들면, 클라이언트인 웹 브라우저가 HTTP를 통하여 서버로부터 웹페이지(HTML)나 그림 정보를 요청하면, 서버는 이 요청에 응답하여 필요한 정보를 해당 사용자에게 전달하게 된다. 이 정보가 모니터와 같은 출력 장치를 통해 사용자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HTTP를 통해 전달되는 자료는 http:로 시작하는 URL(인터넷 주소)로 조회할 수 있다. 역사. 하이퍼텍스트라는 용어는 1965년 제너두 프로젝트에서 테드 넬슨이 만들었으며, 제너두 프로젝트는 《As We May Think》(1945년)라는 수필에서 마이크로필름 기반 정보 수신 및 관리 "메멕스" 시스템을 기술한 버니바 부시의 비전(1930년대)에 의해 영감을 받았다. 팀 버너스 리와 그의 팀은 CERN에서 HTML뿐 아니라 웹 브라우저 및 텍스트 기반 웹 브라우저 관련 기술과 더불어 오리지널 HTTP을 발명하였다. 버너스 리는 최초로 "월드와이드웹" 프로젝트를 1989년에 제안하였으며, 이것이 현재의 월드 와이드 웹이다. 이 프로토콜의 최초 버전은 서버로부터 페이지를 요청하는 GET이라는 이름의 하나의 메소드만 있었다. 서버로부터의 응답은 무조건 HTML 문서였다. 문서화된 최초의 HTTP 버전은 HTTP V0.9(1991년)이다. 데이브 레겟은 1995년 HTTP 워킹 그룹(HTTP WG)을 이끌었으며 확장된 조작, 확장된 협상, 더 보강된 메타 정보, 또 추가 메소드와 헤더 필드를 통한 더 효율적인 보안 프로토콜을 갖춘 프로토콜을 확장하기를 바랐다. RFC 1945는 공식적으로 1996년 HTTP v1.0을 도입하였다. HTTP WG는 1995년 12월 새로운 표준을 출간하기로 계획하였으며 당시 개발 중인 RFC 2068(이른바 HTTP-NG)에 기반한 이전 표준 HTTP/1.1에 대한 지원이 1996년 초에 주요 브라우저 개발자들에 의해 빠르게 채택되었다. 1996년 3월, 이전 표준 HTTP/1.1을 지원한 웹 브라우저로 아레나, 넷스케이프 2.0,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 골드 2.01, 모자이크 2.7, 링크스 2.5, 인터넷 익스플로러 2.0이 있다. 새로운 브라우저의 최종 사용자 채택 속도를 빨랐다. 1996년 3월, 한 웹 호스팅 회사의 보고에 따르면 인터넷 상에서 사용 중인 브라우저 중 40% 이상이 HTTP 1.1과 호환되었다. 같은 웹 호스팅 회사는 1996년 6월 기준으로 서버에 접근하는 모든 브라우저들 가운데 65%가 HTTP/1.1 호환이라고 보고하였다. RFC 2068에 정의된 HTTP/1.1 표준은 공식적으로 1997년 1월에 출시되었다. HTTP/1.1 표준에 대한 개선과 업데이트는 1999년 6월 RFC 2616으로 출시되었다. 2007년에 부분적으로 HTTP/1.1 사양을 개정하고 분명히 하기 위해 HTTPbis 워킹 그룹이 창설되었다. 2014년 6월, WG는 RFC 2616를 obsolete 처리하는, 업데이트된 6 파트 사양을 출시하였다: HTTP/2는 2015년 5월 RFC 7540로 출판되었다. 메시지 포맷. 클라이언트와 서버 사이의 소통은 평문(ASCII) 메시지로 이루어진다. 클라이언트는 서버로 요청메시지를 전달하며 서버는 응답메시지를 보낸다. 요청 메시지. 클라이언트가 서버에게 보내는 요청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요청 내용과 헤더 필드는 <CR><LF>로 끝나야 한다. 즉, 캐리지 리턴(Carriage Return) 다음에 라인 피드(Line Feed)가 와야 한다. 빈 줄(empty line)은 <CR><LF>로 구성되며 그 외 다른 화이트스페이스(whitespace)가 있어서는 안된다. 응답 메시지. 응답 메시지는 다음으로 구성된다. 예제 세션. 아래는 포트 80의 www.example.com에서 실행 중인 HTTP 클라이언트와 HTTP 서버 간의 샘플 변환이다. 모든 데이터는 줄 끝마다 2바이트 CR LF ('\r\n')를 사용하여 플레인 텍스트(ASCII) 인코딩을 통해 송신된다. 클라이언트 요청. GET /restapi/v1.0 HTTP/1.1 Accept: application/json Authorization: Bearer UExBMDFUMDRQV1MwMnzpdvtYYNWMSJ7CL8h0zM6q6a9ntw 서버 응답. HTTP/1.1 200 OK Date: Mon, 23 May 2005 22:38:34 GMT Content-Type: text/html; charset=UTF-8 Content-Encoding: UTF-8 Content-Length: 138 Last-Modified: Wed, 08 Jan 2003 23:11:55 GMT Server: Apache/1.3.3.7 (Unix) (Red-Hat/Linux) ETag: "3f80f-1b6-3e1cb03b" Accept-Ranges: bytes Connection: close <html> <head> <title>An Example Page</title> </head> <body> Hello World, this is a very simple HTML document. </body> </html> 응답 코드. 클라이언트가 서버에 접속하여 어떠한 요청을 하면, 서버는 세 자리 수로 된 응답 코드와 함께 응답한다. HTTP의 응답 코드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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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3C
W3C(, 축약형은 )는 월드 와이드 웹을 위한 표준을 개발하고 장려하는 조직으로 팀 버너스 리를 중심으로 1994년 10월에 설립되었다. W3C는 회원기구, 정직원, 공공기관이 협력하여 웹 표준을 개발하는 국제 컨소시엄이다. W3C의 설립취지는 웹의 지속적인 성장을 도모하는 프로토콜과 가이드라인을 개발하여 월드 와이드 웹의 모든 잠재력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웹 표준과 가이드라인 개발. W3C는 설립목적인 웹 표준과 가이드라인 개발을 수행하고 있으며, 지금까지의 결과로 지난 10년간 80여개의 W3C 권고안을 발표하였다. W3C는 또한 교육과 소프트웨어 개발에 관여해 왔고, 그리고 웹에 관하여 토론할 수 있는 열린 포럼을 개최해 왔다. 웹의 모든 잠재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인 웹 기술은 상호 간의 호환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어떤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에서도 웹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W3C의 이러한 목표를 "웹 상호운용성 (Web Interoperability)" 이라고 한다. W3C는 웹 언어와 프로토콜에 대한 공개(반독점적인) 표준을 제정하여 시장 분열과 웹의 분열을 피하고자 한다. 팀 버너스리(Tim Berners-Lee)와 운영진은 W3C를 웹 기술에 대한 컨센서스를 이끌어내는 산업 컨소시엄으로 발전시켜왔다. 유럽 핵물리 연구기관(European Organization for Nuclear Research, CERN)에서 근무하던 1989년에 월드 와이드 웹을 개발한 팀 버너스리는 W3C가 창립된 1994년부터 현재까지 W3C Director 직책을 맡고 있다. W3C는 2004년 12월에 창립 10주년을 기념하여 웹과 W3C의 과거와 미래에 관한 심포지엄을 보스턴에서 개최했다. 국제적인 컨소시엄인 W3C. 전 세계 곳곳에 위치한 다양한 분야의 기관들은 웹 표준화를 위해 벤더에 중립적인 기구인 W3C에 참여한다. 웹 표준 제정에 큰 공헌을 한 W3C의 기술전문직원과 회원은 국제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점점 다양해지는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그리고 사람들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키면서, 웹이 미래에도 지속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W3C의 회원(테스티모니알 샘플), 직원, 초청전문가들은 함께 힘을 모아 기술을 설계해 나가고 있다. W3C의 국제적인 활동은 또한 세계적으로 40여개가 넘는 국가, 지역, 국제 기관과의 관계 (liaison)를 활성화하는 것을 포함하며, 이는 W3C의 월드 와이드 웹 개발의 국제적인 참여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W3C 표준. 다음은 W3C가 제정한 WWW 관련 표준 목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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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CII
미국정보교환표준부호(), 또는 줄여서 ASCII(, 아스키)는 영문 알파벳을 사용하는 대표적인 문자 인코딩이다. 아스키는 컴퓨터와 통신 장비를 비롯한 문자를 사용하는 많은 장치에서 사용되며, 대부분의 문자 인코딩이 아스키에 기초를 두고 있다. 아스키는 7비트 인코딩으로, 33개의 출력 불가능한 제어 문자들과 공백을 비롯한 95개의 출력 가능한 문자들로 총128개로 이루어진다. 제어 문자들은 역사적인 이유로 남아 있으며 대부분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출력 가능한 문자들은 52개의 영문 알파벳 대소문자와, 10개의 숫자, 32개의 특수 문자, 그리고 하나의 공백 문자로 이루어진다. 아스키가 널리 사용되면서 다양한 아스키 기반의 확장 인코딩들이 등장했으며, 이들을 묶어서 아스키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7비트 인코딩을 유지한 ISO/IEC 646과, 원래 아스키 코드 앞에 비트 0을 넣어 8비트 인코딩을 만든 IBM 코드 페이지와 ISO 8859가 있다. 이 인코딩들은 언어군에 따라 같은 숫자에 서로 다른 문자가 배당된 경우가 많다. 역사. 아스키 코드는 지금의 미국 국가표준 협회(ANSI)의 전신인 미국 표준 협회(ASA)가 주도한 X3 위원회가 개발했다. 그 아래의 X3.2 소위원회는 1960년 10월 6일 아스키 표준화 작업을 시작하여, 1963년 표준화 초판을 발간했고, 1967년 개정했으며, 가장 최근의 업데이트는 1986년에 있었다. 제어 문자표. 제어할 때 쓰는 코드이다. 아직도 Serial 통신(RS-232, UART, USART...)이 적용된 곳에는 많이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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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1960년대는 1960년부터 1969년까지를 가리킨다.
2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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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1970년대는 1970년부터 1979년까지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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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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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까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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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EG
제이펙(, )은 정지 화상을 위해서 만들어진 손실 압축 방법 표준이다. 이 표준은 ISO와 ITU-T에서 제정하였다. JPEG를 사용하는 파일 형식들도 보통 JPEG 이미지라 불리며, .jpg, .jpeg, .jpe 등의 확장자를 사용한다. 1677만 7216색과 256색 그레이로 저장 할 수 있다. JPEG 표준은 이미지가 어떻게 연속된 바이트로 바뀌는지만을 규정한다. 독립 JPEG 그룹(Independent JPEG Group; IJG)에서 만든 JPEG의 확장인 JFIF(JPEG File Interchange Format)는 JPEG 스트림을 저장과 전송에 적합한 형태로 담는 이미지 파일 형식이다. 디지털 카메라의 사진 저장 방식으로는 다른 확장인 EXIF JPEG 형식이 더 자주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JPEG 파일이라고 할 때는 JFIF 형식이거나 EXIF JPEG 형식을 가리키지만, JNG와 같은 JPEG 기반의 다른 파일 형식도 존재한다. 손실 압축 형식이지만 파일 크기가 작기 때문에 웹에서 널리 쓰인다. 압축률을 높이면 파일 크기는 작아지지만 이미지 품질은 더욱 떨어진다. JPEG/JFIF는 웹 상에서 사진 등의 화상을 보관하고 전송하는 데 가장 널리 사용되는 파일 형식이다. 하지만 이 압축 방법은 문자, 선, 세밀한 격자 등 고주파 성분이 많은 이미지의 변환에서는 GIF나 PNG에 비해 불리하며, 나쁜 품질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JPEG 표준에도 비손실 압축 방법이 정의되어 있지만 특허 문제와 압축률 등의 이유로 잘 사용되지는 않으며, PNG 등의 비손실 압축을 지원하는 포맷을 많이 사용한다. 압축 과정. JPEG 표준 안에는 많은 선택사항들이 있지만, 그중 대부분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아래 설명은 픽셀당 24비트 (빨강, 초록, 파랑 각 8비트씩)의 색상정보를 가진 데이터를 변환하는 일반적인 방법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다. 아래 설명한 방식에선 손실 압축 방식을 사용한다. 색공간 변환. 우선 각 픽셀의 RGB 데이터를 YCbCr이라는 다른 색공간 데이터로 변환한다. 이 색공간은 NTSC나 PAL 방식의 컬러 텔레비전 전송에 쓰이는 색공간과 유사하다. Y 성분은 픽셀의 루마 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Cb와 Cr 성분은 색차 정보(chroma components)를 가지고 있다. 사람의 눈이 색상 성분보다 휘도 성분에 더 민감하기 때문에 색상 정보를 더 많이 압축하기 위해서 YCbCr 색공간으로 변환한다. 색공간 변환 시 제한된 정밀도 (채널당 8 비트) 때문에 정보가 완전히 보전되지 않는다. 따라서 뒤에서 양자화를 전혀하지 않더라도 원본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즉, JPEG 저장시 화질을 100%으로 하더라도 원본과 차이가 있게 된다. 크로마 서브샘플링. 때로는 Cb와 Cr 성분의 수를 줄인다. (이를 "다운 샘플링", 혹은 "크로마 서브샘플링"이라 한다.) 이어지는 설명은 각 성분에 대한 것으로, 성분별로 같은 절차가 진행된다. 양자화. 사람의 눈은 명도에 대해 비교적 넓은 영역에서 작은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고주파의 명도 변화에서는 그 구별 능력이 떨어진다. 이 사실에 근거하여 고주파 성분의 정보의 많은 부분은 버릴 수 있다. 이런 작업은 주파수 영역의 각 성분에 대해 특정 상수로 나누고 정수 몫만을 취함으로써 수행된다. 이 작업이 전체 압축 과정에서 가장 손실이 큰 부분이다. 이 방법으로 고주파 성분들은 거의 0이나 0에 근접한 양수, 혹은 음수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주파수는 전자기파의 주파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를 격자 상에 늘어 놓았을 때의 공간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에 주의한다.) 그런데 정지 영상의 특성상 평균적으로 픽셀값이 확 변하는 곳이 적다(에너지 집중 현상으로 인해 대부분 저주파수에 모여있다. 그래서 양자화를 할 때 가중치 양자화를 적용함으로써 에너지가 큰 저주파는 많이 살려내고, 에지가 거의 없어서 잘라내도 총합 에너지엔 거의 차이가 없는 고주파를 많이 제거한다.). 엔트로피 부호화. 이 과정은 비손실 압축 방식으로서, 8×8 격자의 성분들을 저주파부터 지그재그로 일렬로 세운 뒤. 반복된 0에만 RLE를 적용하고, 그 결과들에 대해 허프만 부호화를 한다. 표준은 허프만 부호화 대신에 더 압축률이 좋은 산술 부호화도 가능하다고 기술하지만 산술 코딩은 인코딩, 디코딩시의 지연, 경제성 등의 이유를 들어 잘 쓰이지 않는다. 압축 해제 과정. 압축 해제된 JPEG 데이터를 얻는 과정은 압축 과정을 역으로 취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규격서. 규격은 합동 그룹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ISO와 ITU-T 양측에서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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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독도()는 동해의 남서부, 울릉도와 오키 제도 사이에 위치한 동도와 서도를 포함해 총 91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는 대한민국의 섬이다. 울릉도에서 뱃길로 200여 리나 떨어져 있다. 서양권에서는 1849년에 독도를 발견한 프랑스 선박인 '리앙쿠르 호'의 이름을 따서 리앙쿠르 암초(, )라고 부른다. 현재 대한민국이 실효지배하고 있으나 일본국 정부에서는 다케시마()라는 명칭으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최종덕이 1965년 3월부터 최초 거주한 이래로 김성도 부부 및 독도경비대원 35명, 등대 관리원 2명, 울릉군청 독도관리 사무소 직원 2명 등 약 40명이 거주하고 있다. 또한, 2005년 동도에 대한 입도 신고제 도입 이후 2021년 4월 기준 약 200만 명이 방문하였고, 1일 평균 500명이 입도하고 있다. 명칭. 돌로 된 섬이란 뜻의 '돌섬'의 경상도 방언 명칭인 독섬을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쓰면서 독도(獨島)가 되었다. 과거에는 우산도(于山島)라고 불렸다. 독도 분쟁으로 인해 제3국에서는 리앙쿠르 암초(, )라는 중립적인 명칭을 주로 사용한다. 지리 및 지질. 이 섬은 동해의 해저 지형 중 울릉분지의 북쪽 경계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평균 수심 2,000m의 해양 평원에 솟아 있는 화산섬이다. 두 개의 큰 섬인 동도(東島)와 서도(西島)를 중심으로 총 91개의 크고 작은 섬과 암초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도와 서도 사이의 거리는 151m이다. 일본에서는 동도를 오지마(男島), 서도를 메지마(女島)라고 부른다. 독도의 총 면적은 187,554m²로, 서도(西島)가 88,740m², 동도(東島)가 73,297m², 그 밖의 부속도서가 25,517m²이다. 서도의 최고 높이는 168.5m이고, 동도의 최고 높이는 98.6m이다. 2012년 11월부터 대한민국 정부 고시에 의거하여 서도의 최고봉은 '대한봉'(大韓峰), 동도의 최고봉은 '우산봉'(于山峰)으로 부른다. 동도의 최고봉은 1950년대에는 '성걸봉'으로 불렸으며, 2005년부터 고시 이전까지는 '일출봉'(日出峰)이라 불렸다. 동도와 서도 및 부속 도서는 대부분 수심 10m 미만의 얕은 땅으로 연결되어 있다. 독도의 동도는 동경 131도 52분 10.4초, 북위 37도 14분 26.8초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섬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약 87.4 km 떨어져 있으며, 일본 시마네 현 오키 제도에서는 약 157.5 km 떨어져 있다. 한반도에서의 거리는 약 216.8km이며, 일본 혼슈에서의 거리는 약 211km이다. 날씨가 좋으면 울릉도 동쪽 해안에서 육안으로 이 섬을 볼 수 있다. 독도는 약 460~250만 년 전에 형성된 해양섬 기원의 화산체로서, 섬 주변에 분포하는 지층들을 아래에서부터 괴상 응회각력암, 조면안산암 I, 층상 라필리응회암, 층상응회암, 조면안산암 II, 스코리아성 층상 라릴리응회암, 조면안산암III, 각력암, 조면암, 염기섬 암맥 등 총 9개의 화산암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는 오랜 세월동안 침식되어 화산의 흔적은 찾기 힘들다. 독도(특히 동도)의 지반은 불안정한데, 이것은 단층과 절리, 균열, 그리고 불완전한 공사 등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독도는 지질학적으로 울릉도의 화산암류와 비슷한 전암 화학조성을 갖는 알칼리 현무암, 조면 현무암, 조면 안산암 및 조면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도. 높이 168.5m, 둘레 2.6km, 면적 88,740m² 5필지, 동도에 비해 높이가 높고 면적이 넓지만, 경사가 급한 편이라 필지가 적은 편이다. 동도. 높이 98.6m, 둘레 2.8km 면적 73,297m² 7필지. 서도에 비해 높이가 낮고 면적이 좁지만, 둘레가 크고 완만해 필지가 많은 편이다. 행정 구역. 대한민국의 행정구역에서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1-96번지에 속하며 우편번호는 40240이다. 대한민국은 이 섬을 천연기념물 제336호 독도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울릉군은 국민 공모를 통해 도로명 주소법에 따른 이 섬의 도로명 주소를 '독도안용복길'(서도)과 '독도이사부길'(동도)로 정하였다. 일본이 주장하는 행정 구역에서는 시마네현 오키군 오키노시마정에 속해 있다. 기후. 난류의 영향을 많이 받는 전형적인 해양성 기후로 연간 평균강수량은 1,240mm 정도, 연평균 기온 약 12℃, 1월 평균기온 1℃, 8월 평균기온 23℃로 온난한 편이다. 연평균 풍속은 4.3m/s로 겨울과 봄에는 북서풍이 빈번하고, 여름과 가을에는 남서풍이 빈번하여 계절에 따른 주풍향이 뚜렷하다. 안개가 잦고 연중 날씨 중 흐린 날은 160일 이상이며 비 또는 눈 오는 날은 150일 정도로, 겨울철 강수량이 많다. 즉, 일 년 중 맑은 날은 불과 45일 정도밖에 없다. 자연 및 자원. 두 섬과 주변 섬들은 서로 분리된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해저 2천여 미터로부터 바다 위로 솟은 해산(海山)의 봉우리 부분에 해당된다. 천연기념물. 독도천연보호구역. 대한민국은 독도 섬 주변의 바다에 다양한 해양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섬 일대의 자연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이 섬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1982년에 "독도 해조류(바다제비·슴새·괭이갈매기) 번식지(獨島海鳥類-繁殖地)"라는 이름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했고, 1999년에 천연보호구역으로 명칭을 바꾸어 동식물 전체의 식생을 관리하게 되었다. 2005년 독도의 기존 토지 및 부속도서를 측량하고 그 결과에 따라 지적공부를 정정하여 독도의 지적현황이 전체적으로 변경됨에 따라 2006년 9월 14일 문화재청장은 문화재보호법 제6조에 의거 천연기념물 제336호로 지정된 《독도 천연보호구역》의 문화재구역을 당초 고시한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37필지 180,902평미터(보호구역)"을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101필지 187,554평방미터(지정구역)으로 정정고시하였다. 2002년 경상북도는 환경부에 '울릉도·독도 해상국립공원' 지정을 건의했으나, 이는 울릉군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독도 사철나무. 울릉군 독도리 30번지에 있는 독도 사철나무는 독도를 구성하는 2개 섬인 동도와 서도 중 동도의 천장굴 급경사 지역 위쪽 끝 부분에서 자라고 있으며, 강한 해풍과 극히 열악한 토양조건 등에서 자란 나무로 독도에서 생육하는 몇 안 되는 수목 중 가장 오래된 나무로 2012년 10월 25일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538호로 지정되었다. 특정도서. 대한민국은 독도가 독특한 자연환경이 유지되고 있고, 해양생물상이 다양하고 풍부하여 에 의거 특정도서로 지정하였다. 국가지질공원. 2012년 12월 27일 환경부장관은 자연공원법 제36조의3의 규정에 의거 울릉도·독도 국가지질공원을 인증 고시하였다. 동물. 2005년과 2006년에 이루어진 실태조사를 통해 독도에서 관찰된 조류는 126종이다. 개체수가 가장 많은 종은 괭이갈매기이었고, 약 7,000여 마리가 서식하고 있다. 그리고 바다제비, 슴새, 참새가 서식하고 있는데, 최근 슴새의 수는 감소하고 있는 반면 바다제비 수는 증가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섬은 남북으로 왕래하는 철새들이 쉬어가는 주요 휴식처이다. 조류는 여러 가지의 천연 기념물이 있다. 짐승은 1973년 경비대에서 토끼를 방목하였으나 지금은 한 마리도 서식하지 않는다. 곤충은 7목 26과 37종이 서식하고 있다. 인근 해양에는 파랑돔, 가막베도라치, 일곱줄얼게비늘, 넙치, 미역치, 주홍감펭 등 다양한 어류가 서식하고 있다. 또한 대구지방환경청은 지난 2007년 5월부터 6개월 동안 경북대학교 울릉도·독도연구소와 공동으로 네 차례에 걸쳐 이 섬의 생태계를 조사한 결과 이 섬에 무척추동물 26종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2007년 12월 11일에 발표했다. 2013년에는 시베리아의 텃새인 솔양진이 수컷 한 개체가 남한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동도에서 발견되었다. 바다사자. 바다사자(독도강치)는 동해 연안에 서식하던 강치의 아종이다. 현재 멸종되었다고 알려진 동물로,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들을 "가제" 또는 "가지"로 불렀으며 이 섬을 중심으로 동해에 수만 마리가 서식했다고 한다. 이들이 머물렀다는 가제바위가 독도에 남아 있다. 러일 전쟁 전후로 가죽을 얻기 위해 시작된 일본인들의 무분별한 남획으로 바다사자는 서서히 그 모습을 감추었으며 1974년 홋카이도에서 새끼 강치가 확인된 이후로 목격되지 않는다. 1905년 일본 시마네현이 이 섬을 무단으로 편입한 이후 일본인들의 어획이 시작되었지만, 1905년 이전에 울릉도에 살던 한국인들이 1904년과 1905년에 독도에서 강치를 잡아 매년 가죽 800관(600엔)씩 일본에 수출한 기록이 1907년 시마네현 다케시마 섬 조사단의 오쿠하라 헤키운이 쓴 책 '죽도 및 울릉도'에 나온다. 식물. 박선주 등이 2008년과 2009년에 걸쳐 실행한 독도의 식물상 및 식생 조사에서는 독도의 식물은 29과 48속 49종, 1아종 3변종 총 53종류로 조사되었다. 이 중 특산식물은 섬기린초와 섬초롱꽃 2종류이고, 귀화식물은 갓, 방가지똥, 큰이삭풀, 콩다닥냉이, 흰명아주, 둥근입나팔꽃 6종류가 있다. 식생형은 주로 해국-땅채송화, 해국-갯제비쑥, 왕호장근-도깨비쇠고비, 돌피, 물피군락 등으로 구분된다. 경사가 급하여 토양이 발달하지 못하였고, 비는 내리는 대로 배수되어 수분이 부족하여 자생하는 식물이 적으나 울릉도에서 씨앗이 날아와 50~60종의 풀과 나무가 있다. 이 섬에 사는 식물은 키가 작아 강한 바람에 적응하고 잎이 두껍고 잔털이 많다. 물론 가뭄과 추위에도 잘 견딘다. 2007년 12월, 외부에서 들여와 직접 심은 나무 가운데 무궁화, 후박나무, 곰솔, 향나무 등이 대부분 말라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인근 얕은 바다에는 모자반, 대황 등의 해양식물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독도 사철나무는 독도에서 현존하는 수목 중 가장 오래된 나무로 독도에서 생육할 수 있는 수종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국토의 동쪽 끝 독도를 100년 이상 지켜왔다는 영토적·상징적 가치가 큰 점을 감안하여 2012년 10월 5일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538호로 지정되었다. 박테리아. 섬 일대는 '박테리아의 보고'로 불릴 만큼 다양한 종의 박테리아가 많이 서식하는 곳이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05년 5종, 2006년 13종, 2007년 16종, 2008년 4종 등 2008년 기준으로 이 섬에서 발견된 신종 박테리아는 38종에 이른다. 발견된 신종 박테리아들의 학명에는 독도넬라 코린시스(Dokdonella koreensis), 동해아나 독도넨시스(Donghaeana dokdonensis) 등과 같이 '독도'나 '동해'의 명칭이 포함되었다. 독도에서 발견된 박테리아들로 인해 2005년부터 2008년까지 대한민국이 3년 연속으로 신종 세균 발표 건수 1위를 차지했다. 매장 자원. KAIST 생명공학과의 조사에 따르면, 섬 근해 해저에 이른바 '불타는 얼음'으로 불리는 메탄 하이드레이트(methane hydrate, 고체 천연가스 또는 메탄 수화물)가 확인된 양만 약 6억 톤가량 매장되어 있다고 밝혀졌다. 메탄 하이드레이트는 녹으면서 물과 메탄 가스를 발생시켜 효용가치가 큰 미래 청정자원으로 주요 선진국의 개발·연구 대상으로 주목받는 자원이다. 해양. 독도 주변은 쿠로시오 지류인 따뜻한 대만남류와 찬 북한 해류가 만나는 지역으로, 영양염류가 풍부하며, 이로 인한 동·식물 플랑크톤이 다양하고, 경제적 가치가 높은 회유성 어족이 다량 분포하고 있다. 독도는 지형적으로 수심 2,068 m 정도 되는 동해 새중에서 분출한 화산성해산으로, 물위로 솟아있는 독도의 면적은 비록 작지만(0.186km2), 수면아래 독도의 면적을 합하면 울릉도의 2배 이상되는 거대한 해산이며, 동도와 서도를 중심으로 주변에 물개바위를 비롯한 크고 작은 32개 이상의 바위섬과 암초가 있어 단단한 바닥에 부착하여 생활하는 해양 저서생물에게 좋은 서식지를 마련하고 있다. 독도의 바다는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곳으로 생물종이 다양하고 수산자원이 풍부한 곳으로 섬 주변에는 감태, 대황, 모자반 등 해조류를 비롯하여 게류, 고둥류가 넓게 서식하고 있고, 어류로서는 볼락, 자리돔, 도화돔 등의 냉온대성, 온대성 및 아열대성 생물종이 집합하여 서식하고 있다. 또한 독도의 섬효과를 통해 깊은 바다의 영양염류가 표층으로 용승되어 플랑크톤을 먹이로 하는 동해의 회유성 및 독도 정착성 어종의 치어와 유어들이 모여 사는 산란장 내지 성육장의 기능으로서도 중요한 어장이다. 해양 생물. 국립수산과학원에서 동도와 서도 주변연안 및 수중생태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해양·자포동물 22종, 고둥류 30종, 극피동물 23종, 갑각류 22종, 갈조식물류 17종과 어류 17종 등 총 169종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도 주변연안에서 서식하고 있는 갑각류 중에서 도화새우, 물렁가시붉은새우, 가시배새우를 통틀어 '독도새우'라고 부르고 있다. 환경 오염. 독도에 하수처리시설이 설치된 이후, 그 오작동으로 인해 독도 경비대나 등대 관리자와 같은 거주자들로부터 발생한 오수가 바다에 그대로 쏟아지는 일이 반복돼 독도 부근은 심각한 바다 오염의 우려가 높다. 독도 부근 바다에서는 바닷물이 우윳빛으로 변하거나, 해초들이 죽고 산호초가 석회화되는 현상이 발견되고 있다. 현재는 이러한 오염을 줄이기 위한 공공 단체와 시민 조직에 의한 노력이 진행 중이다. 교통. 선착장. 동도에 선착장과 접안 시설(1997년 11월 완공, 1998년 8월 지적공부에 등록) 80미터로 500톤급 선박 접안이 가능하며, 유인 등대 1기가 설치되어 있다. 여객선. 대저해운에서 포항~울릉도~독도 구간을 1일 2회 운항한다. 단 풍랑 등 기상특보가 발생시 결항될 수 있다. 헬기장. 동도에 있는 독도헬기장()은 경찰청이 관할하는 헬리콥터 이착륙장이다. 동도에 있기 때문에 '동도 헬기장'으로도 불린다. 2008년 국제민간항공기구(ICAO)로부터 지명약어 RKDD를 부여받았다. 통신. 2013년 6월 12일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KCA) 경북본부와 대구·경북 소재의 이통3사 및 협력사 공동 주관으로 독도에 입도해 독도의 전파환경을 측정한 결과 독도는 방송, 통신뿐 아니라 아마추어 무선 주파수까지 모두 양호하게 도달되며, 최신 초고속 광대역 통신인 롱텀에볼루션(LTE)까지 끊김없이 전달된 것으로 조사됐다. 주요 시설. 서도. 경비대 30여명이 생활하고 방문객들이 방문하는 경로인 동도와는 달리 주로 주민 숙소로 이용되는 서도는 시설물이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기타. 문화재청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08년 독도 대포(大砲)의 문화재 지정을 추진했으나 좌절됐다. 당시 국무총리와 외교통상부 장관이 한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일본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기 때문으로 전해졌다. 이후 이건무 전 문화재청장과 엄승용 전 문화재청 사적명승국장, 독도단체 및 문화재계 관계자들이 독도 대포의 영토주권 수호 상징성과 보존가치를 고려해 문화재 지정 재추진을 주장(서울신문 2014년 8월 15일자 8면)했으나 지금까지 정부나 지자체에서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관련 문화. 전설. 독도와 관련되어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여러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구멍바위' 형성에 관한 전설이다. 전설에 따르면, 먼 옛날 힘센 노인 하나가 노인의 집 앞을 가리고 있던 바위를 묶어 배를 타고 옮기던 중에 다른 바위를 던져 바위에 구멍을 내고 난 후 독도에서 좌초되어 지금의 자리에 구멍바위가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관광. 본래 이 섬은 대한민국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어서 입도가 제한되었으나 2005년 3월 24일 대한민국 정부가 일본의 영유권 주장에 대항하기 위한 대책의 일환으로 입도 허가제를 신고제로 변경함으로써 동도 선착장에 한해서 하루 1,800명씩 일반인의 관광을 허용했다. 학술 조사와 같이 관광 이외의 목적으로 이 섬을 방문할 경우에는 14일 전에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 기념 사업. 고종이 대한제국칙령 제41호 1900년 10월 25일로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제정된 일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독도의 날이 기념일로 잘 알려져 있다. 1954년 9월 15일 대한민국은 3종의 독도 우표 3000만 장을 발행했는데 2환권과 5환권은 각각 500만 장, 10환권은 2000만 장이 팔렸다. 일본 외무성에서 독도 우표가 붙은 우편물을 받지 않겠다고 했으나, 만국우편연합(UPU) 규정중 '우편물 중계의 자유보장' 조항에 따라 허용하기로 하였다. 일본은 항의의 표시로 독도 우표가 붙은 한국 우편물에 먹칠을 해서 배달을 하였다. 대한민국은 이 섬을 도안으로 한 우표를 2002년과 2004년 1월 두 차례 더 발행했다. 2002년 8월 1일 내고향 특별우표 시리즈(32종)중 경북편에도 독도우표가 포함, 90만장이 발행되었으나 당시 일본의 항의는 없었다. 2004년 1월 대한민국이 독도 우표 4종 224만장을 발행하자 가와구치 일본 외상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의 입장과 한국의 우표발행이 만국우편연합헌장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주장하고 주일 한국대사에게 항의하였다. 2004년 6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이 섬이 조선의 영토임을 보여주고 있는 고지도를 도안으로 한 우표를 발행하였으며 2006년 8월에는 도안이 약간 수정되어 대한민국에서 판매되기도 하였다. 대한결핵협회는 2006년 크리스마스 실로 독도의 자연을 그린 '아이러브 독도'를 발행하였다. 독도함(獨島艦, LPH-6111)은 대한민국 해군의 독도급 강습상륙함의 첫 번째 함이다. 독도의 이름을 함명으로 정하였다. 실제로는 LHD(다목적 강습상륙함)의 기능을 갖고 있으나, 공식적으로는 LPH(강습상륙함)라고 불리고 있다. 2002년 10월 말에 한진중공업이 대한민국 해군으로부터 수주를 받아 건조를 시작한 뒤, 2005년 7월 12일 진수하였고 2006년 5월 22일부터 시운전을 시작하여 2007년 7월 3일 취역하였다. 2010년 3월 천안함 침몰 사고 수색구조 작전에 투입되었다. 학문. 한국복지사이버대학에 2012년 독도학과가 개설되어 2014년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정치·경제·사회·문화·지리·환경·역사학적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교육할 수 있는 학문적 기반 구축을 위해 전국 최초로 개설되었으며, 울릉군수와 독도경비대장 등 독도와 관련해 직·간접적으로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여러 인사들뿐만 아니라, 교육계 전문가, 독도 관련 시민사회단체 대표 등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는 인사들이 재학 중이거나 졸업하였다. 대중 문화. 1982년에 한국방송의 PD였던 박문영은 이 섬을 주제로 한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을 만들어 코미디 프로그램인 《유머 일번지》를 통해 발표했는데, 시기적절한 곡이라는 평가를 받아 곧 정광태의 정식 음반이 출시되면서 큰 인기를 모았다. 그 밖에도 박명수의 〈We Love 독도〉 등 수많은 연예인과 가수들이 독도에 관한 노래를 발표해 왔다. 2004년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공동으로 개발한 모바일 게임인 〈독도를 지켜라〉가 대한민국으로 수출되었다. 이 게임은 통일부로부터 외교적인 문제를 피할 것을 요청받아 〈섬을 지켜라〉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네티즌들의 항의로 다시 〈독도를 지켜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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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영어(英語, )는 영국의 구성국인 잉글랜드에서 기원한 서게르만어군 언어이다. 글자 수는 26개이고 자음 21개와 모음 5개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날에는 영국과 영연방, 북미의 국가를 중심으로 공식 언어뿐만 아니라 그 외 지역에서는 제2언어로 활용한다. 또한 영어는 18세기, 19세기 그리고 20세기 초 대영 제국의 군사적, 경제적, 과학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영향과 20세기 중반 이래의 미국의 영향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폭넓게 배우고, 활용하는 언어로 링구아 프랑카에 비유하기도 한다. 영어는 서게르만어군의 방언이었던 앵글로색슨족의 언어가 여러 역사적 사건을 겪으면서 변화하면서 형성되었다. 5세기 무렵 브리튼 제도에 앵글로색슨족이 이주하면서 시작한 고대 영어는 이후 바이킹의 침입과 함께 전파된 고대 노르드어의 영향을 받았다. 노르만 정복 이후 고대 영어는 단어와 철자법 등에서 노르만어의 영향을 받으며 중세 영어로 발전하였다. 영어()라는 단어의 어원은 12세기 고대 영어인 "Angles"의 복수형 "Ænglisc" 또는 "Engle"에서 파생했다. 근대 영어는 15세기 잉글랜드에서 있었던 대모음 추이가 기준이다. 이 무렵 여러 나라에서 유래한 외래어와 신조어가 크게 늘었다. 특히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를 어원으로 하는 기술 용어들도 늘었다. 또한, 각국 국민들의 모국어 억양이 영어에 흡수되었다. 영어는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처럼 로마자로 표기한다. 개요. 근대 영어는 종종 최초의 지구적 링구아 프랑카로서 언급된다. 영어는 통신, 과학, 무역, 비행, 오락, 방송, 외교 등의 분야에서 국제어로서 사용되고 있다. 때문에 영어의 사용은 종종 언어 제국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영어는 대영제국의 팽창과 함께 브리튼 제도의 밖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19세기 말 무렵에는 글자 그대로 전지구적 언어가 되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과 캐나다 역시 영어 사용의 확대에 기여하였는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초강국이 된 미국으로 인해 영어 사용의 세계화는 더욱 확산되었다. 의료나 컴퓨터 사용과 같은 여러 분야는 기초적인 영어 사용 능력을 전제로 한다. 이를 위해 수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영어를 배운다. 영어는 유엔의 여섯 공용어 가운데 하나이다. 영국의 언어학자 데이비드 크리스털은 전 지구적인 영어 사용의 급격한 증가로 인해 다른 언어가 막대한 타격을 입고 있다고 말한다. 북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를 포함한 지구 곳곳에서 영어 사용이 일반화됨으로써 각 지역의 자연어가 갖고 있던 언어 다양성이 감소하고 심지어 더 이상 쓰는 사람이 없는 사어가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영어의 영향은 역사언어학의 연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러 언어 공동체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사용되고 있는 영어는 복잡하고 역동적인 언어 변화를 가져왔다. 크리올과 피진은 이러한 영어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어족이다. 역사. 영어는 앵글로프리지아어와 저지 게르만어를 기원으로 하는 서게르만어군의 하나이다. 이 언어들은 로마 속주 시기 이후 5세기까지 오늘날 독일, 덴마크, 네덜란드 등의 지역에 해당하는 유럽 북서부에서 다양한 경로를 통해 브리튼섬으로 유입되었다. 이렇게 브리튼섬에 정착한 게르만족의 하나가 앵글족으로 이들의 이름 앵글()은 이들의 원래 거주하였던 곳의 지명 앵글른에서 유래한 것으로 오늘날의 슐레스비히 인근 지역이다. 브리튼이라는 이름은 베다 베네라빌리스의 《잉글랜드 교회사》에 최초로 등장한다. 브리튼 섬에 이주해 온 앵글족은 새 정착지를 자신들의 땅이라는 의미의 잉글랜드()로 불렀다. 영어()역시 앵글족의 말이란 뜻이다. 앵글로색슨족은 덴마크와 윌란 반도로부터 449년에 브리튼섬을 침공하였다. 이전까지 이 지역에서 사용되던 언어는 켈트어파에 속한 브리튼어와 게일어였다. 브리튼섬에 있었던 두 번의 침입은 영어에도 영향을 주었다. 하나는 8~9세기에 있었던 바이킹의 침입으로 이로 인해 영어는 북게르만어군의 영향을 받았다. 다른 하나는 1066년 있었던 노르만 정복으로 이로 인해 프랑스어와 노르만어가 유입되었다. 이런 역사적 사건들의 영향을 받으며 고대 영어가 형성되었다. 브리튼섬에 세워진 앵글로-색슨의 고대 왕국들에서는 저마다 고대 영어의 다양한 사투리가 쓰였다. 후기에는 색슨족이 들어와 저지 게르만어의 영향을 받았다. 영어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요소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의 전파였다. 530년의 베네딕도 규칙서에서부터 1536년의 수도원 해체까지 브리튼섬에는 많은 기독교 수도원이 세워졌다. 초대 주교였던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기독교 성직자들은 수도원을 통해서 문자와 문학을 전파하는 학교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서유럽 중세 기간 동안 수도원은 브리튼 제도에서 지식의 보고였고 이들의 활동은 영어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기독교 수도사들은 중세 서유럽의 링구아 프랑카였던 라틴어를 사용하였고 영어 역시 라틴어의 영향을 받았다.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런던에서 쓰인 영어를 초기 근대 영어라 한다. 이 시기 영어는 철자법이 고정되고 어순이 확립되는 등의 변화를 겪었다. 산업혁명과 과학의 발달은 라틴어와 그리스어 어근을 바탕으로한 막대한 과학 어휘가 새로 만들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성립으로 영어는 브리튼섬 전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되었으며 대영제국 시기 제국주의 정책에 따라 세계 곳곳에 영국의 식민지가 확장되자 영어 역시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 시기 영어가 전파된 주요 국가로는 오늘날의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이 있다. 또한 영어는 영국이나 미국의 영향권하에 있었던 파키스탄, 가나, 인도, 나이지리아, 남아프리카, 케냐, 우간다, 필리핀 등 많은 나라에서 공용어로 사용된다. 1945년 유엔의 설립 이래 영어는 유엔의 공식 언어들 가운데 하나로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 영어는 게르만어파의 언어 중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언어이며, 사실상 전 세계 언어 중에서 가장 폭넓게 쓰이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대영제국의 대외 팽창으로 인해 전 세계로 영어가 확산되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의 경제적 문화적 영향력이 증가한 데에 기인한다. 특히 근대에 들어 통신 기술의 발달로 영어는 다른 문화권에 영향을 주고 있다. 언어학적 특징. 어족. 영어는 인도유럽어족 게르만어파 서게르만어군의 앵글로프리지아어에 속하는 언어이다. 현존하는 가장 가까운 관계의 언어로는 스코틀랜드 저지대와 북아일랜드 일부 지역에서 사용되는 스코트어와 네덜란드의 프리슬란트주와 독일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일부 지역에서 사용되는 프리지아어가 있다. 스코트어는 별개의 언어가 아닌 영어의 방언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스코트어와 프리지아어 외에 영어와 연관이 있는 언어로는 서게르만어군 중에서 비(非)앵글로프리지아어에 해당하는 독일어, 네덜란드어, 아프리칸스어와 북게르만어군에 속하는 스웨덴어, 덴마크어, 노르웨이어, 아이슬란드어, 페로어 등이 있다. 이들은 가장 기초적인 부분에서 영어와 유사성을 보이기는 하지만 이미 오래전 서로 다른 언어로 분기되었고 영어와 스코트어는 그레이트브리튼섬에 고립되어 발달하여 어휘, 구문, 어의, 음운 등이 달라 서로 통용되지 않는다. 독일인, 더치(네덜란드, 벨기에 일부), 북유럽(핀란드 제외) 사람들은 어순이나 언어가 영어와 상당히 유사하여 진지하게 공부하지 않아도 영어로 의사소통하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데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아서 자연스레 영어를 잘한다. 이와 같은 관련 언어 가운데 굳이 친소를 가린다면 네덜란드어가 보다 영어와 유사한 편이다. 단어. 영어는 라틴어와 프랑스어의 어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지리적 고립으로 인한 구문의 변화로 관련된 게르만어들과 다른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실제로 라틴어는 영어의 15%에서 30%에 달하는 어휘의 근원이 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exit"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이에 해당하는 네덜란드어 "uitgang"이 보다 원래의 뜻을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uitgang은 "나가다"는 뜻의 "uit"과 "통로"를 뜻하는 "gang"의 합성어로 글자그대로 통로에서 나간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영어로 나타낸다면 "out-gangway"가 될 것이다.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movement" 역시 이 보다는 독일어 Bewegung이 글자그대로 "be-way-ing" 즉 "길을 따라 움직이는" 또는 "방도에 맞추어 가는"의 의미를 잘 나타낸다고 할 것이다. 현대의 영어 사용자들도 많은 프랑스 단어를 읽을 수 있는데 이 역시 노르만 침공 이후 영어에 미친 노르만어와 프랑스어의 영향을 보여준다. 어순. 영어의 어순은 다른 게르만어와는 상당히 다르다. 그러나 중세 이후 노르웨이어, 스웨덴어와 같은 북게르만어군의 어순이 영어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다음은 영어와 북게르만어군 사이에서 보이는 어순의 유사성을 나타낸 예문이다. 맨 아래의 독일어와 에 해당하는 단어의 어순을 비교해 보자. 한편, 네덜란드어의 어순은 영어와 독일어의 중간 형태를 보인다. 위의 예에서 네덜란드어는 다른 게르만어군에 비해 영어와 보다 유사한 형태를 띠는데 이는 동사의 시제 변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관련 어군과의 관계. 영어와 다른 연관 언어 사이에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는 단어가 유사한 음운을 갖는 거짓짝이 많이 있다. 일례로 과 을 들 수 있다. 또한 같은 의미를 지니는 낱말이 서로 다른 발음으로 변화한 것도 있는데 와 , 그리고 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에도 영어는 다른 언어군들에 비해 게르만어파와 확연한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다. 영어와 게르만어파에 속하는 많은 언어에서는 "‑hood", "-ship", "-dom", "-ness"와 같은 접미사들이 공통적으로 사용된다. 다만 접미사의 활용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예를 들어 에 해당하는 에 쓰인 접미사 "-heit"는 영어의 "-hood"에 해당하는 것이다. 한편 영어의 "-dom"에 해당하는 접미사에 독일어에서는 종종 "-tum"이 사용된다. 이러한 접미사의 사용은 아이슬란드어, 페로어와 같은 다른 도서 게르만어에서도 볼 수 있다. 이들 역시 영어와 같이 여타의 게르만어파에 속하는 언어들과는 다른 독자적인 방식으로 접미사를 사용하고 있다. 사용 인구. 현재 약 3억 7천 5백만 명이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중국어의 관화, 스페인어 다음으로 많은 수이다. 공용어와 제1외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의 수를 합산하면 영어 사용 인구는 중국어 다음으로 많다. 사용자. 다음의 표는 영어를 사용하는 주요 나라의 영어 사용 인구수를 나타내고 있다. 발음. 모음. 다음은 북아메리카 영어를 기준으로 한 모음의 표기이다. 자음. 다음은 국제 음성 기호 체계에 따른 영어 자음을 나타낸 것이다. 유성음과 유기음. 영어의 파열음이 유성음이나 유기음으로 발음되는데에는 뚜렷한 일반적인 규칙이 없으며 화자나 문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다만, 다음과 같이 규칙적으로 적용되는 경우도 존재한다. 기타 발음 특징. 억양과 성조군. 영어에는 독특한 억양이 있다. 다시 말하면 영어에서는 목소리의 높이가 구문을 이루는 요소로서 작용한다. 의문문, 감탄문, 반어법 등과 같은 특정 구문에는 이에 따르는 독특한 억양이 있다. 영어에서는 군을 이루는 단어가 하나의 억양 패턴을 형성하는데 이를 성조군이라 한다. 성조군은 단번에 발음되기 때문에 길이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 보통 성조군을 이루는 단어의 수는 다섯 단어를 넘지 않으며 단숨에 발음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2초 정도이다. 다음은 대표적인 성조군의 예이다. 강세. 영어에서는 문장의 특정한 음절이나 단어, 성조군에 강세가 실린다. 이렇게 강세가 실린 음절을 핵심 음절이라 한다. 예를 들어, 위 문장에서 강세가 놓이는 "best" 와 "do" 가 핵심 음절이 된다. 문장의 나머지 부분은 약하게 발음된다. 영어에서는 핵심 음절을 강하게 발음함으로써 화자의 의도를 들어낸다. 어디에 강세를 두는 가에 따라 의도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예를 들면 핵심 강세는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핵심 음절은 문장의 다른 부분에 비해 강하고 높게 발음된다. 또한 영어에는 문장 끝의 소리 높이가 올라가는 상승 성조와 내려가는 하강 성조가 있다. 두 성조를 합쳐 상승-하강 성조나 하강-상승 성조로 쓰이기도 한다. 대표적인 성조의 사용으로는 의문문에서 쓰이는 상승 성조이다. 영어에서 상승 성조는 화자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의 예문을 보면, 문법. 영문법은 다른 인도유럽어족에 비해 어형 변화가 간결한 편이다. 예를 들면, 현대 영어에서는 독일어, 네덜란드어와 같은 다른 서게르만어군나 로망스어군과는 달리 문법상의 성(性) 구분이 거의 없다. 또한 수·격·인칭·성에 따른 동사의 조화도 극히 드문 편이다. 격은 거의 사라져 대명사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게르만어파 특유의 동사변화 규칙도 많이 사라졌기 때문에 강한 동사변화(예:speak/spoke/spoken)와 약한 동사변화(예:love/loved/loved)는 이전 시기의 영어에 비해 엄격하지 않다. 이와 같은 변화로 인해 영어는 고립어와 같은 성격을 띠게 되어 양상 동사와 어순 등이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한편, 영어는 의문문, 부정문, 수동태와 같은 태의 표현, 상황의 설명을 위한 상 등을 나타내기 위해 조동사를 사용한다. 품사. 영어의 품사는 총 8개로, 이들을 가리켜 "8품사" (8 Parts of Speech)라고 부른다. 단어. 영어 단어는 수 세기에 걸쳐 변화를 겪어왔다. 다른 게르만어파에 속하는 언어들과 마찬가지로 영어 역시 많은 단어가 원 인도유럽어에서 유래하였다. 현대 영어에서도 대명사, 전치사, 접속사, 양상 동사 등은 거의 대부분 게르만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영어 구문과 문법의 기본적인 토대를 이루고 있다. 고대 영어나 고대 노르드어와 같은 게르만어에서 유래한 이러한 단어들은 일반적으로 라틴어와 같은 언어에서 유래한 단어보다 짧다. 이에는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는데 우선 단어의 축약 현상이 있었다. 고대 영어의 hēafod가 현대 영어의 head로 고대 영어의 sāwol이 soul로 변한 것이나, 끝소리가 강세를 잃어 gamen이 game으로 ǣrende가 errand로 변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다른 이유는 노르만 정복 이후 라틴어나 프랑스어가 정치, 학문, 예술의 전 분야에서 사용되면서 음절이 긴 토박이말들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같은 뜻을 나타내는 데 토박이말보다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것이 보다 교양 있는 것으로 여겨지면서 이러한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조지 오웰은 《정치와 영어》라는 수필을 통해 이러한 단어 사용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현대 영어에서도 여전히 게르만어에서 유래한 단어와 동의어인 라틴어에서 유래한 단어를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come과 arrive, sight와 vision, freedom과 liberty 등이 그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여기에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동의어가 추가된다. 예를 들어 게르만어에서 유래한 oversee 대신 라틴어에서 유래한 supervise나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survey를 동의어로 사용할 수 있다. 이외에도 영어에는 다양한 출처에서 들여온 단어들이 있다. 예를 들어 warranty는 앵글로노르만어에서 온 것이고 guarantee는 페르시아계 프랑스어에서 온 것이다. 어떤 단어들은 이렇게 여러 곳에서 유래한 동의어들이 두루 쓰이기도 하는데 고대 영어에서부터 사용된 sick는 고대 노르드어에서 유래한 ill,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infirm, 라틴어에서 유래한 afflicted와 같은 단어들과 동의어군을 이루고 있다. 영어의 사용에서 이러한 동의어의 선택은 뉘앙스와 같은 것을 함께 전달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이든 게르만어에서 유래한 것이든 이제는 영어에서만 사용되는 단어들도 있다. 라틴어에서 유래하여 영어에서만 사용되는 것들로는 mountain, valley, river, aunt, uncle, move, use, push, stay 같은 단어들이 있고 게르만어에서 유래한 것으로는 , abandonment, debutant, feudalism, seizure, guarantee, disregard, wardrobe, disenfranchise, disarray, bandolier, bourgeoisie, debauchery, performance, furniture, gallantry와 같은 단어들이 있다. 앵글로-색슨어에서 나온 단어들로는 acknowledge, meaningful, understanding, mindful, behaviour, forbearance, behoove, forestall, allay, rhyme, starvation, embodiment와 같은 단어들이 있다. 한편, 유래를 밝히기 어려운 단어들 역시 많이 있다. 영어 단어를 가장 많이 만든 사람 중에는 셰익스피어가 있다. 실제로 셰익스피어의 희곡에는 단어에 수많은 주석이 달려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영어 단어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많은 단어가 cookie(쿠키)나 URL과 같은 과학 기술 용어이다. 또한 속어 와슬랭의 사용으로 인해 단어가 가지고 있던 원래의 뜻에 새로운 의미가 더해지기도 한다. 때때로 사건으로 인해서 신문 등이 단어를 만들기도 한다. 외래어의 유입. Chaebol(재벌), Panmunjom(판문점)과 같은 한국어 기원의 영어 단어, Kancho(윤하), Tonkatsu(돈카쓰), Tofu(두부)와 같은 일본어 기원의 영어 단어와 같이 여러 문화와의 교류를 통해 외래어가 더해지고 있다. 단어의 수. 영어 단어의 수를 명확히 산출할 수 없는 이유를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광대한 영어 단어의 수를 산출하는 데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 우선 영어는 프랑스어(아카데미 프랑세즈), 스페인어(스페인 왕립 학술원)등과 달리 공식적인 어문 기구가 없다. 또한 의료, 과학, 기술 분야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신조어가 계속하여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속어의 사용으로 인한 단어의 의미 변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끝으로 외국어 역시 다수의 영어 화자가 이를 사용할 경우 넓은 의미에서 영어로 취급된다. 1933년 옥스포드 영어 사전 제2판은 60만 단어 이상을 등재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47만 5천여 중심 단어를 수록하고 있는 웹스터 사전은 매해 2만 5천여 단어를 추가로 등재하고 있다. 글로벌 랭귀지 모니터에 따르면 2009년 6월 10일 현재 사용되고 있는 영어 단어의 수는 약 1백만 개에 이른다. 한국의 영어. 한국. 대한민국에서 영어가 처음으로 교육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말기인 1883년 동문학이 세워지면서부터였다. 이후 1886년 육영공원에서 영국인 교사들이 영어로만 영국식 영어를 가르치는 최초의 영어몰입교육 (물론 직접식 교수법)이 시작되고 배재학당 (현재의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 이화학당 (현재의 이화여자대학교)에서도 영어 교육이 중시되고 1895년 설립된 관립 외국어 학교에서 영어 전공 학생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 다른 언어 전공 학생을 제치는 등 1910년까지 활발하게 교육되다가 1910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조선에서의 영어 교육을 대폭 축소해 암흑기에 빠졌다. 그 시기에 강사는 일본어에 능통해야 한다는 법 때문에 영어 강사들도 발음이 좋지 않은 일본인 강사로 채워졌다. 영어 교습법도 이 시기부터 직접식 교수법에서 문법 번역식 교수법으로 바뀌었다. 이후 1920년~1941년까지는 영어가 다른 외국어에 비해 충실하게 교육되다가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영어 교육이 다시 억압되었다. 대한민국. 1946년 서울대학교의 설립으로 영어영문학과가 설립되어 영문학 (영미 시, 영미 소설, 영미 희곡) 연구가 시작되었고, 대한민국 건국 이후부터 영어는 미국식 영어로만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교육되었다. 1960년대 이후 최초의 공인 영어 시험으로 TOEFL과 TOEIC이 차례대로 소개되었다. 1980년대에는 일제 시대식 문법 중심 교육 (문법 번역식 교수법)에서 독해/회화/듣기 중심 교육 (청각 구두식 교수법)으로 바뀌었다. 1983년에는 중, 고등학교 시험에 영어 듣기 평가가 도입되고 1984년에는 학력고사에도 듣기 평가가 도입되어 수능으로까지 이어졌다. 1999년부터는 기존 중학교 1학년부터 배우던 영어 교과를 초등학교 3학년부터 배우도록 확대하였고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영어 몰입 교육과 영어 공용화 논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TEPS는 물론 토종 영어 시험이라고 할 수 있는 TOSEL까지 개발하였다. 2014년 기준으로 한국의 유치원에서도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또 대학에서는 영문학이나 영어 교육 전공이 아닌 교수들도 영어로 강의하게 하기도 하며, 대부분의 대학에서 영어를 교양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고 최소 2학기에서 최대 8학기까지 이수하게 하고 있다. 카투사나 영어 통역병과 같이 지원 시 영어 공인 점수를 요구하는 병과도 있다. 교수법은 조선 시대에는 직접식 교수법으로, 일제 때는 문법 번역식 교수법으로, 현대에는 일부가 문법 번역식 교수법을 따르고 일부는 청각 구두식 교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고등 학교의 경우 영어 관련 교과목 수는 6개이다. (영어 I, 영어 II, 실용 영어 회화, 심화 영어 회화, 영어 독해와 작문, 심화 영어 독해와 작문) 현재 일부 학교에서는 원어민 교사를 채용하여 청각 구두식 교수법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인이 구사하는 영어의 억양은 대개 캘리포니아 억양 혹은 이에 기반한 한국식이고, 그 다음이 표준 미국식 억양이다. 영국 영어를 구사하는 한국인은 그렇게 많지 않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영국 영어만 교육하며, 교육 방식도 대한민국과는 달리 영국의 교과서를 사용한다. 교육 시기도 늦어서 대개 중학교부터 영어를 배운다. 유치원 과정에서는 영어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이 대한민국과의 큰 차이점이다. 또한 교과서에서도 김씨 일가 우상화 내용이 담겨 있고 남한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으로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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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공간
색 공간(色空間, )은 색 표시계(color system)를 3차원으로 표현한 공간 개념이다. 색 표시계의 모든 색들은 이 색 공간에서 3차원 좌표로 나타낸다. 여기서 색 표시계(color system)란 CIERGB, CIEXYZ, CIELAB, CIELUV 등의 색 체계를 말한다. 최근 디자인 학계나 산업계에서 색채 디자인 또는 시각 디자인을 연구하거나, 카메라, 스캐너, 모니터, 컬러 프린터 등의 컬러 영상 장비 개발 및 응용 단계에서 색 공간은 정확한 색을 재현하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색 디자인이나 디지털 색 처리에 기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색 공간인 CIELAB 색 공간은 먼셀 색 표시계의 기본 원리인 색의 3속성(색상, 명도, 채도)을 살림과 동시에 CIEXYZ 색 표시계의 불균등한 색 공간을 개선하기 위하여 개발된 것이다. 이 색 공간은 색상(hue), 명도(lightness), 채도(chroma)를 3차원 공간의 각각의 기본 축으로 하는 공간이다. 여기서 CIELAB은 CIE 1976 L*a*b*의 약식 명칭이고, CIE 1976 L*a*b*은 공식 명칭이다. 색 공간의 이해. 색의 3속성인 색상(hue), 명도(lightness), 채도(chroma)를 3차원 공간의 각각의 축으로 형성된 색 공간은 컬러 디자인이나 컬러 공학 등의 학문 또는 산업분야에서 컬러를 다루는 데 있어서 기본적으로 이해하여야 할 개념이다. 빨강, 노랑, 초록, 파랑, 보라 등으로 구분되는 색을 나타내는 색상(hue)은 색 공간을 지구로 비유할 경우 적도 상에서 경도 즉, 색상각(hue angle)으로 표현, 0도~360도의 범위를 가지며, 시계 방향으로 변화된다. 또한 이 색 공간은 대응색(opponent color) 관계를 쉽게 나타낸다. 대응색 관계란 명도 축을 기준으로 대칭의 위치에 있는 두 색의 관계를 말하며 서로 보색 관계에 있을 나타낸다. 모든 색들의 밝고 어둠을 나타내는 명도(lightness)는 색 공간을 지구로 비유할 경우 남극과 북극을 연결하는 축으로서 남극을 검은색, 북극을 흰색으로 하며 그 사이에는 회색들로 배열된다. 모든 색들의 깨끗한 정도를 나타내는 채도(chroma, saturation)는 색 공간의 명도축을 0으로 하고 적도에 가까이 갈수록 커진다. 색 공간의 중요한 용도 가운데 하나는 색차 계산(color difference)이다. 이는 색 공간에 존재하는 두 점 즉, 두 색들 사이의 거리를 계산하여 공학적으로 활용한다. 예를 들면 컬러 영상 분할(color image segmentation)은 CIELAB 색 공간에서 색차 계산 결과를 이용하여 CIELAB 색 공간에서 영상 분할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간혹 컬러 영상 분할에 관한 연구 논문들 중에는 RGB 데이터를 바탕으로 색차 계산한 결과를 가지고 RGB 데이터로 영상분할을 한 논문들이 발견되곤 하는데 이는 치명적인 오류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컬러 영상 장비에서 다루는 RGB는 시각의 RGB가 아니고 단지 코드에 불과할 뿐 아니라 균등색 공간(uniform color space)도 아니기 때문에 공학적인 계산은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부정확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색 공간의 응용에는 색감에 따른 색의 배열이나 배치(grouping)가 있다. 각종 산업 디자인에 흔히 쓰이고 있는 색감 즉, 따뜻한 색, 차가운 색 등의 배열이나 배치는 CIELAB 색 공간에서 좌표로 다룰 경우 개념이 분명해질 뿐만 아니라 정확성이 보장된다. 그러나 CIELAB 색 공간은 CIEXYZ 색 공간으로 변환한 다음 다시 RGB나 CMY 데이터로 변환해야 하는 필수적인 과정이 있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이 쉽거나 단순하지 않다는 데 있다. 이는 색 이론을 적용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자주 쓰이는 색 공간. RGB 색 공간. RGB 색 공간은 색을 혼합하면 명도가 올라가는 가산 혼합 방식으로 색을 표현한다. RGB 가산혼합의 삼원색은 빨강(Red), 녹색(Green), 파랑(Blue)을 뜻한다. RGBA은 RGB와 동일하며, 알파(Alpha)라는 투과도를 덧붙인 것이다. RGB 색 공간은 삼원색에 해당하는 세 가지 채널의 밝기를 기준으로 색을 지정한다. RGB 색 공간은 웹 색상 표현의 기본 원리이다. CMYK 색 공간. CMYK 색 공간은 인쇄과정에서 쓰이는 감산 혼합 방식으로, 흰 바탕에 네 가지 잉크의 조합으로 색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색을 혼합하면 명도가 낮아지기에 감산 혼합이라고 한다. CMYK는 인쇄에 쓰이는 4가지 색은 옥색(Cyan), 자홍색(Magenta), 노랑(Yellow), 검정(Black)을 뜻한다. HSV 색 공간. HSV 색 공간은 색상(Hue), 채도(Saturation), 명도(value)를 기준으로 색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감산 혼합이나 가산 혼합보다 색상의 지정이 직관적이기 때문에 시각 예술에서 자주 쓰인다. CIE 색 공간. CIE는 국제 조명 위원회()를 프랑스어식으로 표기한 준말이며, CIE 색 공간이란 컬러 매칭 실험을 통하여 생성된 R, G, B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CIEXYZ 색 공간과 CIELAB 색 공간, 그리고 CIELUV 색 공간이 대표적인 색 공간이다. 여기서 CIEXYZ 색 공간은 '균등 색 공간'이 아니어서, 이를 수식적으로 변환하여 만들어진 것이 CIELAB 색 공간과 CIELUV 색 공간이며, 이 두 색 공간은 색차를 계산할 때 비교적 정확한 계산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균등 색 공간'이란 '불균등 색 공간'의 대립 개념이며, 불균등 공간에서는 색상들을 나타내는 선, 채도들을 나타내는 선들이 일정하지 않고 불규칙하게 배열되기 때문에 색 공간에서 두 점의 거리 즉, 색의 차이를 계산하면 정확하지 않다. 전통적 색 공간. 초기 색 공간은 두 개의 성분을 갖고 있었다. 당시에는 청색광을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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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19세기(19世紀, )는 1801년부터 1900년까지의 기간이다. 19세기 동안 세계는 제국주의가 팽배하면서 여러 서구 열강들이 세계 곳곳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이전 시기부터 진행되어 온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는 19세기에 전 세계로 확대되었는데, 1884년 벨기에의 국왕이 주최한 베를린 회의에서 아프리카의 각지를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로 삼기로 결정한 아프리카 분할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19세기 세계적인 제국으로는 대영 제국,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등이 있었으며, 공화국이었던 프랑스와 미국 역시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펼쳤다. 프랑스는 1885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세워 지금의 라오스, 베트남, 캄보디아 지역을 식민 지배하였다. 미국은 1898년 필리핀-미국 전쟁을 벌이고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았다. 워털루 전쟁 종전 직후 유럽을 중심으로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확대에 따라 세계 각지의 전통적인 국가들은 몰락하였다. 아프리카에 있던 이페, 에티오피아, 만딩고 제국, 송가이 제국, 다호메이, 콩고 왕국, 모노모타바 왕국, 보르누 왕국과 같은 여러 나라들은 식민지로 전락하였고,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제국이었던 청나라는 점차 서구 열강의 침략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아편 전쟁 이후 반식민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일본은 1853년에 우라가 앞바다에 나타난 매슈 페리가 이끈 미국 해군 함대인 흑선의 등장 이후 미국과 불평등 조약인 가나가와 조약을 맺었고, 이후 메이지 유신으로 도쿠가와 막부가 붕괴된 이후 스스로 제국주의를 표방하고 일본 제국을 수립하였다. 한국의 역사에서 19세기는 조선의 순조부터 대한제국의 고종에 이르는 시기이다. 정조의 사망으로 1800년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정순황후는 노론 벽파에 속하였으며,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 당시 남인 사이에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전파되고 있던 천주교를 박해하여 신유사옥이 일어났다. 순조는 1804년부터 친정을 하였으며 정순왕후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노론 시파인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고, 이후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이 비변사를 장악하여 세도정치가 이루어졌다. 이후 헌종, 철종 시기에 이르기까지 세도정치가 계속되었다. 19세기 조선은 지역 차별과 삼정의 문란 등으로 인해 각종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1811년 일어난 홍경래의 난은 서북 지역에 대한 차별이 주요 원인이었고, 이 외에도 가혹한 수탈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산으로 숨어 화전민이 되거나, 심할 경우 명화적이나 수적이 되는 일이 많았다. 조선 후기 민란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으며, 특히 1862년 삼남지방의 임술농민항쟁은 매우 큰 사회적 충격을 가져왔다. 1863년 철종이 후사없이 사망하자 인조의 후손인 고종이 즉위하였다. 즉위 초기에는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였으나, 일본의 대정봉환에 따른 국교 수립 요청과 운요호 사건 이후 강화도 조약 채결을 즈음하여 친정을 하였다.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를 광무라 하였다. 한편, 19세기는 과학의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발견이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찰스 다윈은 1859년 《종의 기원》을 발표하여 생물 진화의 사실을 제시하고, 진화의 원인으로 자연 선택을 제시하였다. 루이 파스퇴르는 1861년 《자연발생설 비판》을 출간하여 발효와 부패는 미생물에 의한 것임을 증명하였고, 백신을 통한 전염병 예방법을 확립하였다. 생물학의 발전에 힘입어 서양의 의학역시 발전하여 사망률이 감소함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였다. 유럽의 인구는 19세기 동안 2억여 명에서 4억여 명으로 두 배가 되었다. 물리학 분야에서는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맥스웰 방정식을 수립하여 전기와 자기가 동일한 현상임을 입증하고 전자기 복사를 예견하였다. 조사이어 윌러드 기브스는 열역학의 여러 법칙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그가 도입한 기브스 자유 에너지 개념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기초 과학 법칙으로 사용되고 있다. 19세기에는 여러 새로운 사상이 출현하였다. 허버트 스펜서 등의 사회진화론 주장자들은 다윈의 자연선택 개념을 왜곡하여 사회에 도입하는 적자생존 논리로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를 옹호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회진화론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를 적극 옹호하는 이론으로 사용되었다. 영국의 러디어드 키플링은 백인의 짐이라는 시를 발표하여 서구의 제국주의가 인류 역사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까지 하였다. 한편,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을 출간하여 이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마르크스의 작업은 그의 사상에 대한 찬반 여부를 떠나 사회학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외에도 19세기에는 오늘날에도 주목 받고 있는 많은 철학자들이 독특한 사상을 발표하였다. 쇠렌 키르케고르, 프리드리히 니체,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와 같은 철학자들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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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약칭 연합 왕국(, UK, U.K.), 브리튼() 또는 영국은 유럽 본토 해안에서 북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섬나라이자 입헌군주국이다. 북해, 영국 해협, 아일랜드해 및 대서양에 접하여 있으며 그레이트브리튼섬의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및 아일랜드섬 북부의 북아일랜드로 네 개의 구성국이 연합해 형성한 단일 국가이다. 수도는 런던이고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의 수도는 각각 에든버러, 카디프, 벨파스트이다. 아일랜드섬의 영국령인 북아일랜드는 아일랜드 공화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해외 영토까지 포함 시 스페인(영국령 지브롤터), 키프로스(아크로티리 데켈리아)와 국경을 공유하고 있다. 케이맨 제도, 버뮤다와 같이 해외 본토의 일부는 아니나 영국의 군주의 지배 하에 있는 영토들도 있다. 해외 영토 거주민들과 영국 본토의 국민들은 서로의 지역에 거주할 권리가 없으며 상호간의 이민도 자유롭지 않다. 영국은 입헌군주제를 기본으로 하여 근대적 의회제도와 의원내각제를 전 세계로 전파시킨 국가이며 산업혁명의 발원지로 제일 먼저 산업화가 된 나라이자 19세기와 20세기 초반 세계 인구와 영토의 1/4을 차지한 유일의 초강대국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쇠퇴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세계에 경제, 문화, 군사, 과학, 정치적인 영향을 끼치는 강대국 중 하나로 남아 있으며 특히 대중 음악은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 레드 제플린, 퀸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세계에 막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핵무기 보유국이고 2018년 기준으로 군사비 지출은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크다. 2018년 명목 국내총생산은 세계 5위였으며, 시가총액 기준 세계 50대 기업 중 로열 더치 쉘, BHP 빌리튼, 보다폰, HSBC, BP, 글락소스미스클라인, 유니레버가 영국 기업이었다. 대졸자 초임 연봉은 2010년 기준으로 약 25,000 영국 파운드(한화 약 3,767만원)에 달한다. 국명. 영국의 정식명칭은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며, 약칭으로 브리튼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영국이라 부르는 것은 연합왕국의 구성국인 잉글랜드의 한자 표기에서 나온 것으로 다른 한자 문화권에서도 수용된다. 영(英){중국어발음은 잉(병음: Yīng)}은 잉글랜드(England)의 잉(Eng-)을 음역한 것이고, 국(國)은 랜드(-land)를 의역한 것이다. 한자 문화권에서 이 이름은 연합왕국 전체를 통칭하는 경우가 많지만 문맥에 따라서 여전히 잉글랜드만을 뜻하기도 하여 중의적 의미가 있다. 일본에서는 잉글랜드를 뜻하는 포르투갈어 잉글레스()의 음역인 이기리스( 또는 )로도 쓰인다. 어원. 1707년에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현재 영국을 지칭할 때 흔히 쓰이는 ‘유나이티드 킹덤’이라는 호칭은 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을 부를 때 사용했던 국명으로, 다만 1707년부터 1800년까지 정식 국명은 여전히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었다. 1801년에는 아일랜드 왕국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통합되며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을 구성하였다. 1922년에 아일랜드 자유국이 분리되어 영국에서 떨어져 나가자, 영국은 아일랜드 북부 지방 일부만을 통치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정식 명칭을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이라고 바꾸게 되었다. 영국은 현재 단일국가이기는 하지만,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는 여전히 상당한 자치를 가지고 있다. 영국 총리의 웹사이트에도 영국을 설명할 때에는 ‘국가 안의 국가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다만 완벽한 자치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서, 대부분의 정부 통계를 낼 때에는 ‘지방’이나 ‘행정구역’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부르기도 한다. ‘그레이트브리튼’이라는 단어는 보통 그레이트브리튼 섬을 칭하는 것이나, 정치적으로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를 합쳐 부르는 단어이기도 한다. 가끔씩은 영국 전체를 느슨하게 묶어서 통칭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브리튼’이라는 단어는 그레이트브리튼과 동의어로, 영국을 부를 때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한다. 다만 영국 정부는 'UK'를 ‘브리튼’보다 선호하며, 대사관이나 외교 업무를 제외하고는 브리튼을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영국 지리학회에서는 자국의 약칭을 ‘브리튼’이 아닌 ‘유나이티드 킹덤’이나 'UK'로 사용하도록 권고하고 있으며, ‘그레이트브리튼’이라는 단어의 경우에는 은연 중에 북아일랜드를 제외한다는 뉘앙스를 풍긴다고 하여 따로 분류해놓고 있다. 다만 영국의 대표적인 방송사인 BBC의 경우, 영국을 칭할 때에 ‘브리튼’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해오고 있다. 상징. 영국의 국기는 유니언기, 다른 말로는 유니언잭(Union Jack)이라고 부른다. 초기의 유니언잭은 하얀 바탕에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잉글랜드의 깃발에서 푸른 바탕에 하얀 십자가가 그려진 스코틀랜드의 기가 합쳐져 1600년대에 처음으로 만들어졌으며, 1801년에 성패트릭의 기가 합쳐졌다. 다만 드래곤이 그려져 있는 웨일스의 깃발은 유니언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영국의 국가는 ‘신은 국왕을 보우하소서(God save the King)'으로, 군주가 여성일 경우에는 가사 속의 단어를 ’국왕'이 아니라 ‘여왕'으로 바꾼다. 영국을 의인화한 인물은 브리타니아라고 하는데, 로만 브리튼 시절에 처음 유래하였으며 금발이나 갈색 머리를 하고 그리스 투구를 쓰고 있으며 하얀 로브를 걸치고 있는 젊은 여성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포세이돈의 삼지창과 방패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국장에는 사자와 유니콘, 혹은 드래곤이 그려져 있는데, 이 외에도 불독도 국가를 상징하는 동물로 있다. 브리타니아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존 불도 영국을 상징하는 캐릭터 중 하나이다. 역사. 연합왕국 성립 이전. 현생 인류는 대략 3만 년 전쯤부터 영국 지역에 살기 시작하였다. 선사시대가 끝나갈 무렵, 이들은 켈트족이라는 민족을 구성하며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켜나갔고, 브리튼 섬에는 브리튼인이, 아일랜드에는 게일인이 등장하였다. 그러던 중 기원후 43년부터 로마인들이 브리튼 섬을 침공하였고, 이들이 약 400여 년 동안 브리튼 섬 남부를 지배하며 브리튼인들을 로마화시켰다. 이후에는 게르만계의 앵글로 색슨족이 쳐들어왔고, 본래 섬에 거주하던 브리튼인들을 웨일스 지방으로 몰아낸 후에 섬의 주 지역들을 대신 차지하였다. 앵글로색슨족은 약 10세기 경 잉글랜드 왕국으로 통합되었고, 5세기 경 아일랜드에서부터 이주해와 브리튼 섬 북서부에 살고 있던 일부 게일인들은 픽트족과 통합되어 9세기 경에 스코틀랜드 왕국을 건국하였다. 1066년, 노르만족이 프랑스 북부에서 건너와 잉글랜드를 침공하였고, 웨일스, 아일랜드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며 이후에는 스코틀랜드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스코틀랜드에 자리를 틀며 프랑스식의 봉건제를 지역에 정착시켜나갔고, 본래 있던 앵글로색슨 지배계층들과 교류하며 섬의 엘리트층으로 떠올랐다. 이후 왕위에 오른 잉글랜드의 왕들은 웨일스 지방을 정복하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스코틀랜드를 합병하는 데에는 실패하여 1320년에는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반강제적으로 인정하기도 하였다. 이후 스코틀랜드는 1700년대에 합병될 때까지 시시건건 잉글랜드와의 충돌을 반복하게 된다. 잉글랜드의 역대 국왕들은 결혼과 전쟁 등을 반복하여 프랑스 본토 내에도 상당한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고, 게다가 프랑스 왕위계승권도 가지고 있었기에 프랑스 내에서 일어나는 정치 다툼에 깊이 휘말려들 수 밖에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프랑스와 벌인 백년전쟁으로, 이때 스코틀랜드의 왕들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에 대항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 구 가톨릭과 신교 간의 싸움이 치열해지자, 잉글랜드는 새로운 국교인 성공회를 조직하고 가톨릭 교회들이 갖고 있던 토지들을 몰수하고 왕권 강화에 활용하였다. 이때 즈음에 이르자 웨일스는 완전히 잉글랜드 왕국에 편입되었고, 아일랜드는 잉글랜드 왕위 하에 하나의 왕국으로 성립되었다. 한편 잉글랜드 왕국은 현재의 북아일랜드 지방에 있는 가톨릭 교회의 토지들을 몰수하여 근왕파 귀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603년, 스코틀랜드의 왕인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위를 물려받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왕국은 하나로 통합되게 되었다. 제임스 6세는 그의 궁정을 에든버러에서 런던으로 옮겼으나, 여전히 각각의 왕국들은 따로 노는 성향이 강했으며 정치적, 법적, 종교적으로는 제각각으로 활동했다. 17세기 중반에는 이 3개의 왕국들 모두가 내전에 휘말리게 되는데, 이때 잠시 왕정이 폐지되었으며 국왕 찰스 1세가 참수당했고 잠시동안 커먼웰스가 세워지며 단명한 공화국이 창설되기도 했다. 또한 17세기, 18세기에는 섬이라는 영국의 지리적 특성을 이용하여 영국 출신의 수많은 해적들이 활동하며 유럽과 캐리비안 해의 상선들을 약탈하여 악명을 떨쳤다. 단명한 공화정이 폐지된 이후 왕정이 복고되었으나, 전제군주정은 다시는 부활하지 못했다. 또한 가톨릭교도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법이 통과되면서 로마 교황의 간섭도 타 유럽 국가들에 비하여 훨씬 뜸해졌고, 권리장전 등 국왕의 권력을 제약하고 의회의 힘을 강화하는 법들이 연이어 통과되며 이후 영국은 의회제도와 입헌군주정에 기반한 국가로 도약하게 된다. 한편 1660년에는 왕립위원회가 창설되며 과학계에 대한 후원이 대폭 증가하였고, 왕실의 후원에 힘입어 해군력이 크게 증강되었으며 해외 식민지 탐사에 눈을 뜨게 되며 북아메리카와 캐리비안 지역에 대대적인 식민지 건설이 시작되었다.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왕국이 서로 몇 백년 동안 반목을 거듭한 끝에, 1707년 5월 1일에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양국 의회가 통합법을 가결하며 마침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성립됨에 따라 두 왕국이 하나로 통합되었다. 18세기에는 첫 총리로 로버트 월폴이 취임하였고, 의회내각제에 기반하여 근대 민주주의의 기반을 닦아 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자코바이트의 난이 터지며 신교를 믿는 하노버 왕가를 몰아내고 가톨릭을 신봉하는 스튜어트 왕가를 복구하려 시도하였으나, 결국 1746년에 대패하고 반란을 일으켰던 스코틀랜드인들은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한편 북아메리카에 설립한 영국의 식민지는 독립전쟁을 일으켜 미국을 건국하며 떨어져나갔고, 영국은 어쩔 수 없이 이를 1783년에 인정하였다. 이후 영국의 관심은 아시아 쪽으로 옮겨갔고, 특히 영국이 아시아에 차지하고 있는 가장 부유하고 거대한 식민지인 인도에 집중되었다. 영국은 대서양 노예무역을 주도하며 1662년과 1807년 사이에 수많은 선박들을 이용하여 거의 330만 명의 흑인 노예들을 아프리카에서부터 실어날랐다. 노예들은 보통 북아메리카나 캐리비안 해역에 있는 거대한 플랜테이션 등으로 강제적으로 옮겨갔으며 심각한 탄압을 받으며 사탕수수나 목화 등을 재배하는 일에 동원되었다. 이들의 강제 노동은 18세기 영국의 경제를 떠받치는 기둥들 중 하나였으며, 노예상인들은 이 과정에서 엄청난 이익을 남기며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노예무역의 반인륜적인 실태가 갈수록 폭로되자 결국 여론의 압박을 받은 의회가 1807년에 노예무역을 금했고, 1833년에는 대영제국 전체에서 노예제를 철폐하였다. 또한 이후에는 노예제 폐지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타 유럽 국가들도 노예를 거래하거나 사고파는 일을 그만두도록 압박하기도 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제인권단체인 ‘반노예인터네셔널(Anti-Slavery International)'도 1839년 런던에서 처음으로 창설되었다. 대영제국과 1차 세계대전. '유나이티드 킹덤‘, 즉 ’UK'라는 국명은 1801년에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아일랜드 정부가 서로 통합을 결정하면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이 창설되면서 정식으로 영국의 국명으로 결정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가 결국 영국과 그 연합국들에게 패한 이후, 영국은 19세기 유럽의 최강자로 떠올랐고, 전세계의 제해권을 장악하며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으로 뻗어나갔다. 1830년대 런던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였으며, 영국 상선들은 막강한 해군의 비호를 받으며 전세계를 이었다. 이 시기를 일컬어 영국 주도하의 평화, 즉 ‘팍스 브리타니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시기 영국의 국력은 매우 강대해지면서 ‘대영제국’이라고 불리기 시작하였고, 1815년에서 1914년까지 서구 열강들이 서로 균형을 유지하며 견제하는 소강상태 동안 세계의 패권을 쥐고 경찰국가 지위를 획득하였다. 또한 18세기에 대대적으로 일어난 산업혁명에서 주도권을 잡으며, ‘세계의 공장’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1853년에서 1856년까지는 오스만 제국과 손을 잡고 러시아 제국과 맞서 싸우며 크림 전쟁에 참가하였다. 영국은 이 전쟁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크게 넓히는 데에 성공하였고, 인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호주 등 세계 곳곳에 방대한 해외 영토를 건설하였다. 영국은 막강한 금력을 바탕으로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의 경제권을 손에 거머쥐었고, 자유무역과 작은정부를 지향하면서 점차 자본주의를 전세계에 전파하였다. 인구는 전례없는 속도로 증가하였고, 도시화가 급격히 일어났으며 사회의 빈부격차는 심각한 수준으로 확대되었다. 디즈레일리 총리가 이끄는 내각과 보수당은 제국을 먹여살릴 새로운 동력을 찾기 위하여 식민지 확장에 열을 올렸고, 이집트, 남아프리카 등 미개척지에 수많은 탐험원정대들을 파견하며 국력을 과시하였다. 한편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는 영국의 통제를 받는 자치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시간이 흐르자 압도적이었던 영국의 산업화 속도도 독일과 미국 등 신흥 강대국들에게 따라잡혔고, 유럽과 미국과의 경제력 격차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한편 1900년대 이후 아일랜드 지방의 사회개혁과 자치는 영국 정가의 최고 이슈로 급부상하였고, 이후 아일랜드의 독립에 대한 논의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한편 1900년대 이후에는 무역조합들과 조그만 사회주의 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노동당이 등장하였고, 여성 투표권, 참정권 등을 요구하는 다양한 사회단체들이 등장하여 사회의 변혁기를 이끌었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 러시아, 미국과 함께 독일과 동맹국을 상대로 연합국 측에서 싸웠다. 영국은 거의 모든 식민지에서 병사들을 모집했고, 대부분을 유럽 전선에 투입하며 전세를 승리조로 이끌었다. 그러나 피해는 막대하였고, 영국은 한 세대에 달하는 젊은이들을 잃었으며 사회질서의 붕괴, 기존 질서에 대한 회의 등 여러 변화를 맞았다. 전후에는 독일과 오스만 제국의 영토들을 분할, 새로운 세계질서를 구축하기 위하여 국제 연맹을 창설하는 데에 참가하였다. 대영제국은 세계대전 직후 그 국력의 절정기를 맞았다. 대영제국은 전세계 육지의 5분의 1을 다스렸으며, 전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그 신민들로 거느렸다. 그러나 세계대전의 피해도 만만치 않아서, 대략 250만 명의 사망자들을 내었으며 엄청난 양의 빚을 지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1920년대 중반에 이르자 거의 대부분의 영국 국민들은 BBC에서 송출하는 방송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텔레비전 방송이 1929년에 시범적으로 시작되었고, 1936년에는 처음으로 BBC 방송표가 결성되며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한편 1900년대 이후 계속되었던 아일랜드 민족주의는 1920년대 들어 그 절정을 찍었고, 결국 1921년에는 아일랜드가 대영제국에서 독립되어 나가는 결과를 낳았다. 다만 영국과의 분리를 바라지 않던 북아일랜드 지방은 여전히 영국에 남았다. 1928년에는 여성들에게 남성과 동등한 정치권과 선거권을 주었으며, 1920년대에는 빈부격차와 자본가들과 노동자들 간의 갈등이 극에 달하며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발 대공황이 도래했고, 1차 세계대전 시절에 입은 내상을 완벽히 회복하지 못한 영국은 엄청난 양의 실업률과 사회적 불안정을 맞으며 불안한 1930년대를 보냈다. 이시기 영국에서는 수많은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등장하였으며, 1931년에는 연립 정부가 구성되었다. 다만 이같은 불안정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아직까지도 세계의 중심이었으며, 런던은 세계 경제계의 핵심이었고 그 무력은 세계 최강이었다. 그러던 중 히틀러 주도의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도 이를 좌시하지 않고 1939년에 독일에 전쟁을 선포하며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였다. 1940년에는 윈스턴 처칠이 총리직에 올랐고, 내각을 이끌고 전쟁을 지속해나갔다. 다만 개전 초기에는 프랑스 등의 동맹들이 나치에게 쓸려나가며 홀로 외로운 전쟁을 계속하였으나, 처칠 총리가 산업을 독려하고 과학자, 기술자들에게 정부를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면서 점차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1940년에는 왕립 공군이 영국본토방공전에서 독일의 루프트바페를 상대로 영공을 수호하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이과정에서 런던 등을 포함한 시가지가 엄청난 폭격을 당했다. 1941년에는 영국과 미국, 소련이 대동맹을 맺었고, 점차 나치를 포함한 추축국을 상대로 대대적인 반격전에 나서며 유럽, 대서양,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등에서 엄청난 격전을 벌였다. 영국군은 1944년에 실시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유럽을 나치 치하에서 해방시키며 상당한 군공을 세웠다. 영국군은 유럽뿐만 아니라 미얀마, 태평양 등에서도 활약하였으며, 영국 태평양함대는 태평양에서 일본 함대와 맞서 싸우기도 하였다. 또한 영국 출신 과학자들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하며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이끌어내는 데에 일조하였다. 20세기. 2차 세계대전 시기동안, 영국은 미국, 소련, 중국과 함께 세계의 4대 강대국 측에 들었다. 이들은 전후에 세계평화와 신세계질서 구축을 위하여 국제연합을 창설하였고,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 지위를 얻었다. 또한 IMF, 세계은행, 북대서양 조약 기구 등 세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국제기구들을 설립하였다. 영국은 2번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국력이 심각하게 약화되었고, 이 때문에 미국 주도의 경제재건프로그램인 마셜 플랜에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대전이 끝난 이후 노동당이 이끄는 정부가 급진적인 개혁 정책들을 펼쳤고, 사회 전반을 바꾸기 위하여 막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수많은 주요 산업들과 자원들이 국유화되었고, 복지국가의 개념이 형성되었으며 거대한 규모의 국민복지제도가 설립되었다. 한편 해외 식민지들 사이에서는 점차 민족주의가 대두하였고, 한창 영국이 전쟁으로 약화된 틈을 타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였다. 결국 영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독립시킬 수밖에 없었고, 1947년에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이후 30여 년 동안 대영제국의 거의 모든 식민지들이 독립을 얻어내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영국의 지원 하에 정부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독립 이후에도 영국 주도의 코멘웰스에 가입하였고, 일부는 심지어 영국 국왕을 최고 국가원수로 모시기도 한다. 영국은 핵무기를 가지게 된 3번째 국가였다. 다만 핵무기를 가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1956년에 일어난 제2차 중동 전쟁에서 자국의 약화된 국력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고, 세계를 좌지우지하던 초강대국이 아닌,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의 눈치를 보는 국가로 위치가 격하되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1950년에는 노동력 부족 사태가 일어났고, 영국 정부는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언어가 통하는 커먼웰스 국가들에서 막대한 이민자들을 받아들였다. 이후 얼마지나지 않아 영국은 역사상 가장 다양한 민족들이 섞인 국가가 되었고, 사회 변동도 엄청나게 일어났다. 1950년대 후반과 60년대까지 영국은 경제가 꽤나 발전하였으나, 프랑스, 서독, 일본과 같은 경쟁국들에 비하면 딱히 좋은 성과를 보지 못했다. 전후 몇 십년 동안 유럽 통합에 대한 논의가 가속되던 차에, 영국은 1960년에 유럽 자유 무역 연합의 창립 회원국으로 참가하였으나, 1973년에는 유럽의 공동체에 합류하기 위하여 탈퇴하였다. 이후 EC가 1992년에 유럽 연합으로 전환되자, 영국은 12개의 창립 회원국들 중 하나로 참여하였으며 2007년 조인된 리스본 조약에서 유럽 연합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한편 1960년대 후반부터 북아일랜드 지방은 불안정한 치안으로 인하여 큰 피해를 입고 있었는데, 1998년의 벨파스트 협정이 조인되면서 이도 끝났다. 1970년대에 점차 경제가 위축되고 산업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마거릿 대처 총리 주도의 보수당 정권은 규제 완화, 대규모 자본 투입과 같은 정책들을 실시하며 경제 회복을 꾀하였다. 이후 1984년부터는 북해에서 뽑아낸 석유를 팔아 얻은 대금들이 대거 영국으로 유입되며 영국의 경제는 점차 회복세에 접어들었다. 21세기. 2008년 미국발 국제금융위기는 영국 경제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2010년에 연립정부는 여러 정책들을 도입하여 금융위기로 인하여 촉발된 막대한 양의 공공부채를 줄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2014년에는 스코틀랜드 정부가 스코틀랜드 독립을 결정할 주민투표를 실시하였고, 이 투표에서 55.3%의 주민들이 독립을 거부하면서 스코틀랜드는 영국에 남게 되었다. 2016년에는 약 51.9%의 영국 국민들이 유럽 연합을 떠나기로 결정하면서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즉 브렉시트가 현실화되었다. 이로 인하여 영국은 2020년 1월 31일까지만 유럽연합 회원국으로 남았고, 이후에는 유럽과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중국 우한에서 퍼진 코로나 19 사태는 영국 경제와 사회에 영향을 끼쳤다. 대규모의 금융부양정책과 통제정책이 실시되었으며,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여 경제를 부양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다. 지리. 북대서양과 북해 사이에 위치하며, 브리튼 제도와 아일랜드섬의 북동부에 자리잡은 북아일랜드로 이뤄진 섬나라이다. 서쪽으로 대서양이, 동쪽으로는 북해가 자리 잡고 있으며 남쪽의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두고 프랑스와 인접해 있다. 남북으로는 북위 49도에서 52도(세틀랜드 제도는 62도)에 이르며 동서로는 동경 2도에서 서경 8도사이에 놓여 있다. 국토는 그레이트브리튼섬과 아일랜드섬의 1/6을 차지하는 북아일랜드 및 그 주위에 분포되어 있는 몇 개의 속도군(屬島群)과 해외령을 포함한다. 맨섬과 채널 제도는 왕실속령으로서 영국 정부의 국방 및 외교 관할을 받는다. 잉글랜드는 그레이트브리튼섬의 남부 저지대로 면적은 섬 전체의 약 56.7%인 130,410km2이다. 스코틀랜드는 북부 고지대로 78,789km2이며, 서부 고지대인 웨일스는 20,758km2, 북아일랜드는 14,160km2이다. 지형. 빙식지형이 많다. 지형적으로는 동남부의 저지와 북서부의 고지로 크게 나뉜다. 이 둘의 경계는 동부 해안 중앙부의 티스강 하구와 남부 해안의 라임만을 연결하는 선이다. 고지라고 해도 대부분은 고도 1,000m 이하의 낮은 산맥 및 구릉으로서 영국의 최고봉 벤네비스 산도 1,343m에 지나지 않는다. 고지는 지형과 지질이 다른 다음과 같은 지괴(地塊)로 나뉜다. 스코틀랜드 고지와 북아일랜드는 주로 캄브리아계의 가장 오랜 변성암으로 되어 있으며, 스코틀랜드 남부 산지, 캄브리아 산지(호수 지방) 및 웨일스는 주로 고생대 실루리아계의 변성암으로 되어 있다. 페나인 산맥과 스코틀랜드 중앙 지구대는 고생대의 석탄계와 중생대 삼첩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기에 석탄층이 있어 영국의 탄전(炭田)을 형성한다. 웨일스 남부와 데번 코른월 지괴는 고생대 데본계로 되어 있다.한편 저지는 잉글랜드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해발 300m 이하의 낮은 구릉과 평야로 되어 있다. 구릉은 백악계와 제3계의 느리게 주름잡힌 새 지층으로 이뤄져 각지에 케스타 지형이 보인다. 영국은 제4기 홍적세에 유럽 대륙에서 뻗친 대륙 빙하에 덮여 있었으므로 산지에는 빙식(氷蝕) 지형이 많으며, 황토에 뒤덮인 황무지와 습지가 많다. 더구나 북쪽의 스코틀랜드 제도에는 피오르드 해안이 발달해 있다. 템스강(전체길이 350km)을 비롯하여 이 나라의 하천은 모두 짧으며 또 산지도 낮으므로 하천의 충적(沖積)작용은 크지 않다. 그래서 템스강 하구부, 브리스틀 해협, 포스만 등처럼 묻혀 버린 삼각강이 많으며, 해안선은 굴곡이 많고 하천의 경사가 완만하므로 향항과 가항하천(可航河川)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기후. 중위도 대륙 서해안의 해양성 기후로서 멕시코 만류(灣流)와 편서풍 때문에 위도에 비해서는 따뜻하다(1월의 기온 6∼3 °C). 그러나 겨울에는 간혹 섭씨 영하 10도까지 기온이 떨어지기도 하며 여름에는 섭씨 35도까지 오르기도 한다. 비는 서해안에는 많으나 동해안에는 적다. 또 습기가 많기 때문에 안개가 많으며 런던에서는 스모그가 1년에 90일간 생겨서 ‘안개의 도시’라고도 불린다. 연평균 강우량은 서부와 북부의 산간 지방에서는 1600mm 이상이지만 중부와 동부 지역에서는 800mm 미만이다. 비는 연중 고루 내리는 편이지만 평균적으로 3월부터 6월까지가 비가 가장 적고 9월부터 1월까지가 가장 많은 시기이다. 행정 구역. 영국의 행정구역은 중세 초기부터 그 경계가 설정되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게 되었고, 근대 초기에 들어서는 이미 현재의 행정구역이 완성되어 있었다. 또한 영국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등 여러 왕국들이 통합되어 만들어진 연합왕국이었기 때문에, 이 4개의 국가들은 서로 행정구역을 나누는 방식도 달랐으며 행정구 간의 위계도 차이가 있어 통합 초기에는 이를 일원화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영국의 지방자치단체 제도는 매우 복잡한데, 왕국들의 경제적, 사회적 특성에 따라 제도가 지역마다 모두 다르다. 일단 잉글랜드는 기본적으로 9개의 지역(region)으로 나누어진다. 이들 중 하나인 그레이터런던은 직접선거로 구성되는 지방의회를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으며, 2011년부터 설립된 10개의 통합자치구역들 가운데에서 8개가 선출직 시장을 두고 있다. 지역의 하위 구역인 주나 면 단위의 단체들에서도 내각제를 채택하여 일부 독자 의회 제도를 실시하는 경우가 있다. 스코틀랜드의 경우, 32개의 주(council area)들로 나누어지며 글래스고, 에든버러, 던디, 에버딘은 독자적인 의회를 가지고 있다. 또한 최북단에 위치하여 스코틀랜드 전체 영토의 3분의 1이나 차지하지만 인구는 다 합쳐 보았자 20만 명 밖에 안되는 하이랜드도 독자적인 의회를 가지고 있다. 지방의회들은 모두 투표로 인하여 직접선출되며, 국가로부터 월급을 지급받는다. 각각의 의회들에서는 지방자치단체장을 뽑을 권한이 있다. 웨일스는 총 22개의 주(unitary authority)들로 나누어져 있으며, 대도시인 카디프, 뉴포트 등의 지방들은 따로 분류한다. 선거는 매 4년마다 치러진다. 북아일랜드의 경우, 1973년 법에 따라 26개의 구(district)으로 나누어졌으며, 불안정한 정세 탓에 타 왕국과 비교했을 때 지방단체들의 권한이 상당히 약하다. 북아일랜드 지방의회는 하수 처리, 공공기물 관리 등에 그 권한이 한정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권한은 중앙정부에게 맡겨져 있다. 해외영토. 영국은 20세기까지만 해도 전세계에 식민지를 경영하며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였고, 이 잔재가 아직까지도 남아있어 해외 곳곳에 속령들이 많다. 영국은 14개의 해외영토가 있으며, 3개의 왕실령이 따로 존재한다. 14개의 해외영토에는 영국령 인도양 지역, 사우스조지아 사우스샌드위치 제도, 영국령 남극 지역, 케이맨 제도, 세인트헬레나, 핏케언 제도, 앵귈라, 몬트세랫,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지브롤터,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 버뮤다 등이 있다. 이 중 남극의 경우에는 특정 국가가 독자적으로 점유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데, 이를 피하기 위해서 영국에서는 남극을 오직 과학적, 학문적 용도로만 사용한다고 한정하였다. 영국의 해외영토는 대략 1,600,000제곱킬로미터 정도이고, 인구는 다 합쳐보았자 25만 명도 되지 않는다. 이 해외영토들 중에서 워낙 바다에 위치한 섬들이 많다보니, 영국은 세계에서 5번째로 거대한 크기의 배타적경제수역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1999년 영국 정부에서는 ‘영국령 해외영토들은 영국에 머물기를 원하는 한 언제까지고 영국에 머물 것이다. 영국은 해외령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리할 것이다.’라고 해외 영토들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 때문에 영국령에서 탈퇴하고자 하는 주민투표들이 실시된 적도 있는데, 예를 들어 1995년 버뮤다, 2002년에서 지브롤터가, 2013년에 포클랜드 제도 등에서 주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왕실령은 영국 국왕에 소속된 영토로, 단순한 영국의 해외 영토에 포함되지 않는다. 채널 제도와 맨섬 등이 왕실령에 포함되는데, 영국 정부는 암묵적 합의에 따라 왕실령의 외교, 국방을 책임을 지며 영국 의회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국제적으로는 거의 영국의 영토로 인정받고 있다. 다만 정치 제도에는 약간 차이가 있어서, 왕실 하의 섭정위원회가 통치를 맡으며 행정수반으로 총독을 따로 두고 있다. 정치. 영국은 근대 민주주의의 발상지로, 오래된 민주주의 역사에 걸맞게 세계에서 가장 체계적인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다. 영국은 웨스터민스터 시스템에 기반한 의회민주주의 입헌군주국이며, 영국 의회는 상원과 하원으로 나뉘며, 각각 793석, 650석의 의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국민들의 선거로 구성되는 서민원의 경우, 전국에 퍼져 있는 650개의 선거구에서 각각 의원들이 선출되며, 총선의 실시 또한 총리의 조언을 받아 국왕이 선포한다. 군주국을 표방하고 있는 영국답게, 상원과 하원을 통과한 모든 법안들은 효력이 발휘되기 전 국왕의 동의를 받아야만 한다. 다만 국왕이 실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입헌군주국이기 때문에, 실제로 국왕이 의회를 통과한 법안을 거부한 적은 없다. 영국의 국가수반은 총리로, 하원에서 선출되며 보통 하원에서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한 정당의 지도자가 총리직을 맡는다. 총리는 내각을 구성할 수 있으며, 보통 내각 장관들은 국왕의 허가를 받아 임명된다. 총리는 제1재무경(First Lord of Treasury)을 겸직하며, 이 때문에 본래 제1재무경의 관저였던 다우닝가 10번지에서 집무를 본다. 다만 총리가 재무부 장관직을 겸직한다는 것은 아니며, 재무부장관은 재2재무경(Second Lord of Treasury)직을 따로 겸직한다. 여당과 정권은 ‘여왕 폐하의 정부(Her Majesty's Government)'라고 불리기도 한다. 반대로 제1야당의 경우에는 ’여왕 폐하의 야당(Her Majesty's most loyal opposition)'이라고 불린다. 한편 총리가 거의 실권을 틀어쥐고 있기에, 형식적인 국가수반인 국왕은 관례적으로 총리의 뜻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전통으로 굳어져 왔다. 내각은 주로 총리가 여당이나 연정 정당에서 끌어온 인사들로 구성되며, 보통 하원 출신 인사들로 기용되지만 상원 출신 인사들도 항상 포함하고 있다. 현재의 총리는 2019년 7월 24일에 취임한 보수당 출신의 보리스 존슨 총리이다. 한편 영국은 정치학적으로 연방 국가가 아니라 단일 국가이다. 지방자치가 잘 발달되어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는 독자적인 의회와 행정부를 가지고 있으나, 의회주권의 원칙에 따라 최종적인 주권은 웨스트민스터의 영국 의회가 가지며 각 지방정부들은 헌법적 사항을 단독 결정할 수 없다. 주요 정당. 영국의 주요 정당은 크게 보수당, 노동당, 자유민주당, 이 3개의 정당으로 나누어져 있다. 각각 보수주의, 사회주의,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정당들로 알려져 있으며, 모두 역사가 최소 몇 십년에서 몇 백년에 달하는 유서깊은 정당들이다. 본래 영국의 정계는 19세기까지만 하여도 보수당과 자유당으로 양분되어 있었으나, 20세기 들어 자유당이 크게 위축되고 그 지지세를 새롭게 등장한 노동당에게 빼앗기면서 세가 크게 약해졌다. 21세기 현대의 자유당은 심지어 지역정당이자 스코틀랜드 분리독립을 추구하는 스코틀랜드 국민당보다도 의석 수가 적으며, 이 때문에 현대 영국의 정계는 크게 보수당과 노동당으로 양분되어 있다. 이 외에도 우파 연합주의 정당인 민주통일당, 아일랜드 통일을 주장하는 신페인, 웨일스 독립을 주장하는 플라이드 컴리 등 여러 지역정당들이 의석들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 2019년 12월의 영국 국회의원(하원) 총선거에서 10석 이상 확보한 정당을 순서대로 정렬했다. 영국은 의원내각제, 즉 의회가 곧 내각이 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선거제도는 소선거구제만 채택하여 각 선거구마다 1명만을 뽑는 'First-past-the-post'방식으로 모든 의원을 선출한다. 법상 최장 5년마다 열리는 선거에서 의석수의 과반 이상을 확보한 당이 집권당이 되며, 이들이 내각(Cabinet)을 구성한다. 야당은 예비 내각(Shadow Cabinet)을 구성하여 집권시 어떤 정책을 실시할 것인가를 국민이 미리 알 수 있어 정치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보장하고 있다. 영연방. 영연방은 느슨한 국가 연합이다. 53개 영연방 회원국 모두는 영국 여왕을 영연방의 수장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그 회원국들 중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자메이카, 바하마, 바베이도스 등 다수 국가들의 여왕이기도 하다. 여왕은 2년마다 열리는 영연방 정부 수반 회의에 참석하며 각국의 국가 수반으로 총독과 사적인 대화를 갖는다. 영연방군. 224,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전차 420대, 전술기 1,663대, 군함 99척 등을 보유하여 세계 5위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 핵 보유 국가이기도 하다. 영국은 세계 3위의 국방비를 지출하고 있다. 또한 항공모함 1척, 이지스함 3척 등을 보유하여 강력한 해군을 보유하고 있다. 잠수함들도 있다. 그리고 유럽에서 네덜란드와 함께 유일하게 토마호크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해군 전력도 추가로 항공모함을 건조 중이다. 국방. 헌법에 의하여 1960년부터 모병제를 실시하였다. 2차 대전 후부터 1960년까지 평시 징병제가 시행된 적이 있었는데, 영국인들은 이를 'National Service'로 부르고 있다. 영국은 예로부터 해군이 강한 국가로 알려져 있다. 공군인 'Royal Air Force'와 해군인 'Royal Navy'가 잘 알려져 있다. 근대국가의 출현과 동시에 징병제를 도입한 유럽 대륙과 다르게 영국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나서야 징병제를 도입하였다. 트라팔가 해전 당시 영국 해군은 모집군이었지만 프랑스군은 징집병으로 구성되었었다. 이와 같은 경험 때문에 영국의 부속령 국가 및 옛 식민지 상당수는 징병제를 실시한 적이 없거나 그 경험이 상대적으로 일천한 편이다. 최근 '범죄자를 이라크로 보내자(send criminals to Iraq)' 등 일부에서 징병제 부활을 논의하고는 있지만(가끔은 유희적으로) 범죄자 등에 대한 훈육차원에서 논의될 뿐이며, 이 징병제 관련 논의가 진지하게 정치적으로 문제제기된 바는 없다. 세계 8위의 군사력이며 전략 원자력 잠수함들을 보유하고 있다. 핵 전력을 강화시키고 있다. 스키점프대 형태의 HMS 일러스트리어스 한척을 운용 중이다. 함재기로 수직이착륙 기능의 시 해리어를 운용했으나 지금은 모두 퇴역시키고 각종 헬기위주의 항공단이 구성됐다. 또 차기 항공모함 2척을 건조 중이다. 무인항공기 항공모함 UXV가 2020년에 실전배치된다. 영국군은 국방개혁, SDSR (전략적 국방안보 검토서)에 의해, 조직개편을 하고 있다. 영국 신속대응군의 핵심전력인 영국 해병대는 현 영국 국방개혁을 통해 조직편성과 역할이 강화되고 있다. 소폭으로 병력이 증가했으며, 장비와 편성이 개편되고 있다. 냉전체계 이후 안보환경 변화와 국가 재정 위기에 직면한 영국은 국방비 삭감을 결정한다. 이를 위해 현 국방력과 미래 안보환경 등을 전면 재검토하여 삭감, 퇴역 장비, 도입 장비 등을 새로 결정하게 된다. 이에 총리실 주재하, 5개월간의 검토기간으로 2010년 10월, SDSR(전략적 국방 안보 검토서 : Strategic Defence Security Review)이 발표된다. SDSR은 신안보 위협을 등급별로 분류하고, 사이버전, 테러 등과 같은 우선순위 위협에 대한 자원을 더 배분하는 대신 대규모 재래전에 소요되는 장비(기갑, 전투기, 함정, 대형장비 등) 등을 퇴역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SDSR을 바탕으로하는 현 영국군 국방개혁은 영국군 장군들의 반발과 국민 찬반 논란 속에 진행되고 있다. 현재 영국은 부분 징병제 국가이다. 버뮤다 지역 시민을 징집하며, 영국 왕실과 이에 속한 귀족들인 왕실의 친·외가 친인척들의 남·여들은 영국군 장교로 복무하도록 영국 병역법에 규정되어 있다. 영국군은 흔히 ‘여왕 폐하의 군대(Her Majesty's Armed Force)’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며, 크게 해군과 해상경비대, 육군, 그리고 공군 이 3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국 국방부가 군대를 총괄하며, 군 최고 책임자는 국방부 장관이다. 다만 공식적인 최고 명령권자는 영국 국왕으로, 모든 영국 군인들은 입대할 때부터 국왕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입대한다. 영국 군대는 해외 영토와 왕실령 등을 포함한 영국 영토를 지킬 책임이 있으며, 그 외에도 UN의 국제 임무에도 나서기도 한다. 현재의 영국군은 대영제국 군대을 모체로 하며, 18세기, 19세기, 그리고 20세기 초중반까지만 하여도 가히 세계 최강의 군대였다. 영국은 그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간섭하였으며, 식민지를 경영하며 막대한 부를 벌여들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민지들이 독립해나가며 대영제국도 무너졌으나, 그 군사력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다만 이후 소련과 미국의 군사력이 압도적으로 강력해지면서 영국의 군사력은 점차 밀려나게 되었다. 영국은 세계에서 4위에서 5위 정도로 많은 군사비를 지출하고 있으며, 전체 GDP의 2% 정도를 국방비에 사용하고 있다. 외교. 영국은 UN 안보리의 상임 이사국이며, G7과 나토의 회원국이다. 2016년 6월 24일 영국은 국민투표를 실시해 EU를 탈퇴하기로 결정하였다. 현재는 브렉시트에서 과반수로 EU를 탈퇴하였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다른 유럽 나라들과 우호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영국은 1973년 유럽 경제 공동체 회원국이 되었다. 영국과 미국은 특별한 관계(Special Relationship)에 있다. 미국과 유럽 외 영국은 영국 연방, 아일랜드 그 밖에 영어 사용 국가들과 친밀한 관계에 있다. 영국의 세계적인 존재와 영향력은 무역관계와 군사력 때문에 더 증폭되는데, 전 세계에 80여개의 군사 기지와 기타 파견군을 유지하고 있다. 중세 이후로, 프랑스와 영국은 유럽대륙의 주도권 및 식민지 쟁탈을 놓고 서로 적대국인 경우가 많았으나 때로는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프랑스가 앙탕트 코르디알() 정책을 펴면서, 러일 전쟁 이후 프랑스 및 러시아와 동맹(삼국 협상)을 맺게 된다. 미국과의 관계 영국과 미국의 관계는 대략 400년 정도 소급된다. 1607년 영국은 "제임스타운"이라고 명명된 북미 대륙 최초의 상주 식민지를 세우기 시작하였고, 오늘날 영국과 미국은 가까운 군사적 동맹체다. 양국은 문화적으로 유사할 뿐만 아니라 군사적 연구와 정보 기구를 공유한다. 영국은 미국으로부터 토마호크 미사일이나 트라이던트 미사일과 같은 무기를 구입했고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해리어(Harrier)와 같은 장비를 구매했다. 또한 영국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하고 있다. 최근 영국의 총리와 미국의 대통령은 매우 친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령 토니 블레어와 빌 클린턴 및 이후 조지 W. 부시 대통령 간의 관계, 1980년대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 등의 관계가 그러하다. 현재 영국의 정책은 혈맹 미국과의 관계는 영국의 "가장 중요한 2자간 관계"임을 표명한다. 대한민국과의 관계 영국은 1883년 처음으로 한국과 통상조약을 맺었다. 그 후, 한국 전쟁에 임하여 참전 16개국 중의 하나로서 군사·경제지원 등을 통해서 한국에 대한 공헌이 지대했을 뿐만 아니라, 유엔을 비롯한 기타 많은 국제기구에서의 활동을 통해서 한국의 지위향상·보전 및 우호증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계속한 나라다. 한국에 있어서 영국은 프랑스와 더불어 한국의 대서구제국 관계사에서 중추적인 존재이며, 적어도 전통적으로 대서구 외교전개의 2대 거점국이자 우방국이다. 1883년 우호통상조약이 조인되고 영국과 조선에 각각 영사 또는 공사를 파견하였다가, 일본에 의하여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가 1949년에 양국은 재수교하였다. 한편 영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도 외교관계가 있다. 1999년 4월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한영 수교 116년 만에 국가 원수로써 최초로 방한하였으며, 2004년 12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영국을 최초로 국빈 방문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영국에서 선수로 뛰는 축구 선수들이 많은데, 박지성을 시작으로 이청용, 기성용, 손흥민 등의 축구 선수들이 영국의 프로 축구 팀에서 뛰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아시아나항공과 대한항공이 매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영국 런던으로 가는 논스톱 직항편을 운항하고 있으며, 2012년부터 영국항공도 인천국제공항과 런던 히드로 공항을 연결하는 직항편을 운항하고 있다. 2011년부터는 영국의 일부 학교에서는 한국어 수업이 개설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영국은 1715년, 청나라로부터 상관 설치를 허락받으며 일부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청나라와 무역을 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청나라는 영국에 차, 도자기 등을 수출하고 영국은 청나라에 인도산 상아, 모직물을 수출하였다. 그러나 1840년, 청나라가 제1차 아편 전쟁에서 패배해 난징 조약을 체결하였고, 1860년에는 애로호 사건을 빌미로 영국, 프랑스 연합군과 북경 조약을 체결하여 영국과 중국 간의 사이가 나빠졌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영국군과 함께 싸워 승전국이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중화민국과 연합국측에서 같이 싸웠으며, 국교가 수립되었으나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자 1950년 중화민국과 단교,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였다. 그리고 1997년, 영국은 난징 조약에서 떼어간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였다. 태국과의 관계 태국은 1826년 영국과 맺은 친선·통상 조약(Treaty of Amity and Commerce)으로 최초로 동남아시아 지역 서양 열강의 등장을 인정했다. 라마 5세 출라롱콘대왕(재위: 1868년~1910년)은 쇄국제도를 풀고 개국하여 1855년 영국과 통상우호조약을 맺었다. 태국은 영국에게는 말레이 인종이 거주하는 말레이 반도의 크다(Kedah), 프를리스(Perlis), 트렝가누(Terengganu), 클란탄(Kelantan)을 할양하여야 했다. 1909년의 영국-시암 조약은 시암과 영국령 말라야 사이의 국경을 정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국경이 되었다. 이때 말라야의 토후국 파타니와 크다의 일부였던 파타니(Pattani) 주와 얄라(Yala) 주, 나라티왓(Narathiwat) 주, 사뚠(Satun) 주가 태국령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태국이 추축국에 가입하면서 양국 관계가 악화된 적이 있으나, 종전 후 원상복귀되었다. 프랑스와의 관계 프랑스와 스코틀랜드는 오울드 얼라이언스(Auld Alliance)를 통해 중세 말에 군사적 동맹을 맺고 있었다. 중세 이후로,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유럽대륙의 주도권 및 식민지 쟁탈을 놓고 서로 적대국인 경우가 많았으나 때로는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17세기말, 영국과 프랑스는 모두 5대 강국에 속했고 이들 5대 강국이 유지하고 있었던 세력균형원칙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크게 위협받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유럽 전체를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유럽에 팽배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앙탕트 코르디알(entente cordiale) 정책을 펴면서, 러일 전쟁 이후 프랑스는 영국 및 러시아와 동맹(삼국 협상)을 맺게 된다. 1940년 프랑스 공방전에서 영국이 프랑스를 버렸다는 인식도 있으나, 양국은 현재까지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제1차,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관계에서는 보조를 함께 하기 시작했다. 유럽 연합의 미래에 대한 것은 양국간의 해묵은 논쟁 거리이다. 샤를 드 골 대통령 치세의 프랑스는 영국이 유럽 경제 공동체에 가입하는 것을 여러 번 반대하였다. 드 골은 영국이 유럽 이외의 지역 특히 미국과 지나친 동맹 관계라는 점을 내세웠다. 영국이 유럽 경제 공동체에 가입한 후, 영국의 마거릿 대처 수상은 유럽 경제 공동체의 분담금을 줄이는 데 노력하고 이를 얻어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프랑스의 경제 정책에 대하여 회의적인 시각을 나타낸 바 있다. 그러나,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과 동맹 관계를 구축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모두 식스 네이션스에 참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와의 관계 크림 반도에서 일어난 크림 전쟁 때에는 오스만 제국의 편을 들어주었지만, 현재에는 조금씩 양호적으로 풀리고 있으며, 수교는 1991년경에 실시하였다. 폴란드와의 관계 영국과 폴란드는 15세기부터 교류가 시작되어 제2차 세계 대전 때 주요 동맹국으로 참전했다. 현재 영국에는 많은 폴란드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인도와의 관계 영국은 19세기 중반, 인도의 무굴 제국을 멸망시킴으로써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게 되어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 여왕 직위와 인도 황제의 직위에 앉게 되었다. 영국은 인도에 소금채취 금지법 등 부당한 법제도를 제정하여 인도 국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오늘날 인도의 영웅이라고 추상되는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독립운동가이다. 그 결과 인도는 1947년, 독립하였고 영국과 우호 조약을 맺어 우호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민족. 흔히 이베리아족으로 지칭되는 대서양 연안 구석기 인들이 최초로 영국에 정착한 제민족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후 대륙으로부터 선진 기술을 지닌 켈트족이 정착하며 선주민과의 혼혈이 이뤄졌고 그레이트브리튼섬의 켈트화가 진행되었다. 로마 제국의 브리튼 정복 이후 일부 로마인들이 건너왔다. 로마의 행정과 군사 체계가 붕괴되기 시작한 5 ~ 6세기 경부터 라인강 하류, 플랑드르, 윌란반도에서 게르만 민족의 일파(一派)인 앵글인, 색슨인, 유트인 등이 그레이트브리튼섬을 침략했다. 초기 이들 민족은 선주민과의 혼혈을 엄격히 금지했던 것 같으나 결과적으로 혼혈이 진행되어 오늘날 영국인이 형성되었다. 앵글로색슨족이 선주민을 완전히 대체했다는 주장이 오랫동안 믿어져 왔지만 근래 분자생물학적, 유전학적 연구에 따르면, 앵글로색슨족 이주민의 숫자는 선주민의 1/4정도 밖에 안 되었고 선주민을 완전히는 대체하지는 못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근래에는 구 영국 식민지였던 남아시아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와 스리랑카)와 카리브해, 아프리카 (특히 가나, 나이지리아 등 서아프리카) 출신 이민자들이 영국 사회의 새로운 구성원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으며, 헝가리,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등 중앙유럽에서 온 주민도 소수로 존재한다. 언어. 영국 영어가 쓰이고 있다. 그 외에 웨일스어, 스코트어, 스코틀랜드 게일어, 얼스터 스코트어, 아일랜드어, 콘월어가 소수에 의해 쓰이고 있다. 영국은 공식적으로 국어를 정하진 않았으나, 사실상(de facto)의 언어는 영어이다. 영국 인구의 95%는 오직 영어만을 할 줄 알며, 대략 5.5%에 달하는 국민들만이 최근의 이민자들이나 교육의 영향으로 외국어를 모어로 한다. 영어 외에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아시아계 언어는 인도 이민자들의 영향으로 인하여 펀자브어, 우르두어, 벵골어, 힌디어, 구자라티어 등이 있다. 다만 2011년 통계 결과에 의하면, 최근 폴란드계 이민자들이 급증하며 폴란드어가 영국에서 2번째로 가장 많이 쓰이는 언어라고 한다. 2019년의 경우에는 75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영어를 완전히 쓰지 못하거나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한다고 한다. 영국의 토착 민족인 켈트어의 후계 격으로는 웨일스어, 아일랜드어, 스코틀랜드어 등이 따로 존재하였으나, 18세기 후반에 들어서 영어에 밀려나 결국 완전히 소멸되었다. 다만 20세기 후반 들어서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고, 현재에는 소수의 사용자가 있다. 2011년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웨일스인 전체의 19% 정도만이 웨일스어를 조금이나마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잉글랜드에는 약 20만 명 정도의 웨일스어 사용자가 거주하고 있다고 하며, 북아일랜드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10.4% 정도만이 아일랜드어를 조금이나마 구사할 줄 안다고 하였다. 스코틀랜드의 경우에는 토착어의 소멸 정도가 워낙 심각하여, 전체 인구의 2%도 안되는 사람들만이 토착 스코틀랜드어를 구사할 줄 알며 현재도 영어 구사자의 비율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다만 스코틀랜드어를 사용하는 영국인들이 캐나다로 이주하면서 캐나다 등지에서 조금씩이나마 사용되고는 있으며, 웨일스어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아르헨티나의 파타고니아 등지에서 사용되고 있다. 영국에서는 14세 이상의 청소년들은 무조건적으로 제2외국어를 배워야만 한다. 보통 프랑스어나 독일어를 가장 많이 배운다고 알려져 있다. 웨일스에 있는 모든 학생들은 16세가 넘었을 때부터 점차 웨일스어를 제2국어로 배워야하며, 아예 웨일스어를 모어로 사용하기도 한다. 종교. 종교를 가진 국민의 절대다수가 기독교도이고, 국교는 잉글랜드 성공회이다. 종교별 분포도는 다음과 같다. 기독교는 대략 1,400여 년 전부터 이미 브리튼 섬에 전래되었다.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정체성을 기독교도로 규정하고 있으나, 20세기 들어서 이미 교회 참석율은 급격히 떨어졌으며 대부분 무슬림들로 구성된 이민자들이 영국으로 쏟아져들어오면서 영국 내부의 종교 분포도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이로 인하여 영국은 18세기까지만 하여도 완벽한 기독교 국가였던 데에 반하여, 현대에 들어서는 다종교 국가, 혹은 세속국가, 혹은 탈기독교 국가로 분류되기도 한다. 2001년의 조사 결과, 영국인의 71.6%가 자신들을 기독교도라고 밝혔으며 2.8%의 무슬림, 1.0%의 힌두교도, 0.6%의 시크교도, 0.5%의 유대교도, 0.3%의 불교도, 기타 종교 0.3% 정도가 그 뒤를 이었다. 대략 15% 정도의 사람들은 믿는 종교가 없다고 밝혔으며, 7% 정도는 잘 모르겠다고 응답하였다. 한편 기독교도 비율에 비하여 교회 참석률은 극히 저조하여서, 전체 인구의 10분의 1 정도만이 주말마다 교회에 참석하며 기독교도 비율은 그 와중에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2011년에는 10년 만에 12%p 정도나 기독교도 비율이 하락하였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하였다. 이와 반대로 무슬림의 비율은 갈수록 급증하고 있어서, 매년 약 5%씩 급격한 증가세를 겪고 있으며 2001년에는 160만 명 정도였던 것에 반하여 2011년에는 270만 명으로 크게 증가하며 영국에서 2번째로 거대한 종교로 뛰어올랐다. 한편 기독교의 경우에는, 영국 성공회가 약 15%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로마 가톨릭이 9%, 그 외에도 동방정교, 개신교 등의 종교들이 약 17%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며 18세와 24세 사이의 젊은 층의 71%가 자신이 종교가 없다고 밝혔다. 영국 성공회는 영국에서 발원한 기독교 분파로, 영국 의회에도 대표를 보유하고 있으며 영국 국왕이 최고 권위자이다. 스코틀랜드의 경우에는 스코틀랜드 국교회가 따로 있으나,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한편 영국 국왕은 무조건적으로 성공회 신자여야 하며, 즉위할 때에도 ‘신교를 지키겠다’는 맹세를 선서해야만 한다. 웨일스와 아일랜드에도 각각 국교회가 있었으나, 웨일스는 1920년에 국교회가 해체되었고 아일랜드는 그보다 이른 1870년에 해체되었다. 문화. 언론.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방송사인 BBC의 국가일 정도로 언론계의 중심지인 나라이다. 야동이 1922년에 영국 정부의 공영 방송사로 개국하여,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정확한 보도로 명성을 날릴 정도로 활약하며 현재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공신력 있고 유명한 언론들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BBC는 현재에도 수많은 프로그램 채널들과 라디오 방송들을 독자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해외까지도 서비스들을 수출하고 있다. 현재 영국 방송계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다른 방송사들에는 ITV는 현재 영국 15개 지역들 가운데에서 11개의 텔레비전 채널을 장악하고 있을만큼 그 영향력이 크다. 또한 민영방송 등장으로 1955년에 ITV가 개국하였고, BBC를 제외한 상업광고가 시작했다. 1982년에 개국한 채널 4 준공영체계로 1997년에 마지막 지상파 방송 개국하였으며, 채널 5가 있다. 세계적인 영미권 미디어 복합사인 뉴스 코퍼레이션도 영국 언론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영국의 대표적인 타블로이드지인 더 선과 세계적으로 가장 오래된 일간지인 더 타임스 지 등을 소유하고 있다. 뉴스 코퍼레이션은 2018년까지만 해도 영국위성중계서비스(British Sky Broadcasting)의 최대 주주이기도 했다. 현 영국의 언론 중심지는 당연히 수도인 런던으로, 대부분의 언론 본사들이 런던에 위치하고 있으며 편집국, 방송국들도 웬만하면 런던에 자리하고 있다. 맨체스터가 런던의 뒤를 이어 제2의 언론 중심지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지역의 경우에는 에든버러, 글래스고, 카디프 등이 그나마 언론사들이 집중되어 있는 곳들이다. 한편 영국의 인쇄업도 상당한 수치라서, 영국에서 생산되는 책, 정보, 저널, 잡지, 비즈니스 잡지, 신문 등 모든 인쇄 서비스들의 가치를 합하면 그 가치가 20억 파운드가 넘으며 167,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고용하고 있다고 한다. 2009년 기준으로 평균적인 영국인은 매일 텔레비전을 3.75시간 정도 시청하며, 라디오는 약 2.81시간 정도를 청취한다고 한다. 한편 모든 텔레비전 채널들 중 가운데에서 28.4%나 되는 채널들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BBC의 소유라고 전해진다. 나머지 영국 3대 방송사들이 약 29.5%를 차지하고 있으며, 독립된 위성이나 중소 방송국들이 나머지 42.1%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한편 영국의 신문업계는 날로 쪼그라들고 있어서, 1970년대 이후 감소세를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들의 수는 굉장히 많아서, 2010년 기준으로 국민들의 41%가 일간신문을 구독한다고 한다. 다만 인터넷 기사들과 뉴스들의 범람들로 인하여 신문 구독자의 수는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문학. 영국 문학은 근대에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현대 문학의 기틀을 잡았으며 현재에도 ‘영미 문학’의 주류를 이루며 전세계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문학계이다. 2005년 기준으로 영국에서는 약 206,000권이 넘는 책들이 출판되었으며, 2006년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양의 책들이 출판된 국가였다. 영국 출신의 시인이가 극작가인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고금을 통틀어 최고의 극작가들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엘리자베스 여왕이 ‘그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라고 말할 정도로 엄청난 명성을 누렸다. 또한 그 외에도 20세기 최고의 소설가들 중 하나였던 아가사 크리스티도 영국 출신의 작가이다. 한편 스코틀랜드 출신의 인물들도 영국 문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셜록 홈즈의 작가인 아서 코난 도일 경, 아동작가 J.M. 베리,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시인 로버트 번스 등이 있다. 최근의 경우를 들면 휴 맥더미드, 네일 M. 군 등이 있다. 그 외에도 범죄문학의 전설 격인 이언 랜킨, 호러-코미디 작가인 아인 뱅크스 등이 유명하다.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든버러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유네스코 세계 문학의 도시로 지정되기도 했을 정도였다. 영국에서 알려진 최고(最古)의 시인 어 고도딘은 영국 북부에 있는 헨 오글레드 지방에서 지어졌으며, 대략 6세기 후반 경에 작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웨일스 고어로 지어져 있으며,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아서 왕의 전설을 담고 있는 시이다. 7세기 경에 헨 오글레드 지방과 웨일스 지방과 교류가 끊어지자, 웨일스 문화의 중심지는 자연스레 현재의 웨일스 지방으로 옮겨왔고 이후 웨일스에서는 아서 왕의 전설이 발전되어 전승되기 시작하였다. 웨일스가 배출한 중세 최고의 시인들 중 하나로 평가받는 다피드 압 귈림(Dafydd ap Gwilym)은 자연, 종교 등을 주제로 시들을 지었으며, 특히 사랑과 관련된 시들을 많이 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당대 최고의 유럽 시인들 중 하나로 칭송받을 정도로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후의 시들은 19세기에 또다시 변혁의 바람이 불어닥칠 때 전까지 종교적인 색채들을 진하게 띠었다고 한다. 한편 영국의 시인인 딜런 토마스는 20세기 중반에 미국과 유럽 대륙 전체에서 이름을 떨쳤으며, 특히 그의 가장 대표적인 시인 ‘저 좋은 밤속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말라’는 수많은 영화들과 이후의 시들에도 영감을 주었을 정도로 유명하며, 가장 대표적인 영국 명언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웨일스 민족주의자이자 시인인 R.S 토마스는 1996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그 외에도 리처드 레웰린이나 케이트 로버츠 등이 유명한 웨일스계 소설가들이다. 영국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이후 영국으로 이민을 와 영국 국적을 취득한 유명 문학가들도 매우 많다. 가장 대표적으로 요셉 콘라드, T.S 엘리엇, 가즈오 이시구로 등이 있다. 또한 아일랜드가 전부 영국의 통치 하에 놓여있었을 때에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영국계 시인들로 간주하는 경우가 있는데, 주로 오스카 와일드, 브램 스토커, 조지 버나드 쇼 등이 있다. 영화. 영국 영화계는 전세계적으로, 그리 역사적으로도 매우 유명하다. 가장 대표적인 영국 영화감독인 알프레드 히치콕은 수많은 명작들을 감독하였으며, 그의 대표작인 ‘현기증’은 아직까지도 ‘고금 최소의 명작’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영국계 영화 프랜차이즈들도 전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경우가 매우 잦은데, 가장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영화 2개가 바로 해리 포터 시리즈와 제임스 본드 시리즈이다. 또한 현재 영업 중인 가장 오래된 영화 스튜디오인 얼링 스튜디오(Ealing Studios)도 바로 영국에 있다. 2009년 기준, 영국 영화계는 전세계적으로 약 20억 달러를 벌어들였으며 세계 영화시장의 7%를 차지하였다. 영국의 박스오피스는 2009년 기준으로 9억 4,400만 파운드 정도였다. 음악. 영국 음악은 현대 세계 음악계를 장악하고 있는 영미권 음악의 시초로, 수많은 명가수들과 거장들을 배출해내왔고 현재까지도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영국 음악은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의 민속 음악에서부터 클래식 음악, 팝 음악까지 그 분야가 굉장히 다양한데, 먼저 클래식 음악부터 살펴볼 경우 윌리엄 버드, 헨리 퍼셀, 에드워드 엘가, 구스타프 홀스트, 아서 설리반, 레이프 본 윌리엄스, 벤자민 브리튼 등이 있다. 또한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같은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들의 본고장이기도 하며, 사이먼 래틀, 존 바비롤리, 맬컴 사젠트 등 저명한 지휘자들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영화음악 작곡가들 중에서는 존 배리, 클린트 맨셀, 마이크 올드필드, 존 포웰, 크레이그 암스트롱, 데이비드 아놀드, 존 머피, 몬티 노먼 등이 있다. 한편 유명한 작곡가인 프리드리히 헨델은 이후 영국 시민권을 취득하여 현재 영국의 즉위식 곡을 집필했으며 대표작인 ‘메시아’를 영어로 쓰기도 했다. 또한 앤드류 로이드 웨버와 같은 작곡가는 런던의 웨스트엔드 극장가를 20세기 후반까지 독점할 정도로 그 명성을 떨쳤으며, 상업적으로도 전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며 이름을 알렸다. ‘팝 음악’이라는 단어 자체가 아예 영국에서 유래되었다. 1950년대 중반, 로큰롤을 젊은층들이 향유하기 시작하면서 이 새로운 퓨전 장르를 일컫기 위하여 ‘팝'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영국 팝 음악가들에는 전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비틀스와 롤링스톤즈 등이 있고, 이들 덕분에 영국의 팝 음악은 1960년대에 엄청난 발전을 구가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록 음악에도 영국계 음악가들이 수없이 진출하였으며, 헤비메탈, 하드 록, 뉴웨이브, 펑크 등 수많은 장르들을 개척하는 데에도 성공하였다. 그 외에도 수많은 장르의 퓨전 록 장르들을 만들어내었으며, 전세계적인 인기를 끄는 데에도 성공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영국 음악가인 비틀스는 10억 장이 넘는 음반을 전세계에 팔았으며, 현대 음악의 전설로 남아있을 정도로 막대한 영향력을 떨쳤다. 그 외에도 롤링 스톤즈, 핑크 플로이드, 퀸, 레드 제플린, 비지스, 엘튼 존 등이 있는데, 이들 모두 전세계적으로 최소 2억장이 넘는 음반을 각각 판매한 명가수들이다. 90년대 이래 유명한 영국 가수들 가운데에는 조지 마이클, 오아시스, 스파이스 걸스, 라디오헤드, 콜드플레이, 로비 윌리엄스, 아델, 에드 시런, 원 디렉션 등이 있다. 이들 덕분에 2016년 기준으로 영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음악 장르는 팝으로, 33.4%의 국민들이 가장 즐긴다고 한다. 그 다음이 힙합 장르와 R&B라고 한다. 현대 영국 음악계는 동일한 영어권 국가인 미국 음악가들과 협업하여 랩 음악들을 함께 만들기도 한다. 요리. 영국 요리는 그 수가 많고 재료들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적으로 맛이 없다는 편견이 있다. 영국 요리는 영국 역사 내내 있었던 수많은 이주민들의 유입, 그리고 세계 각국과의 교류, 식민지 등을 통하여 들어온 식문화들로 인하여 급격히 발전하였다. 가장 옛날로는 켈트족과 브리튼족이 서로 융합하면서 수많은 요리들이 탄생하였고, 앵글로색슨족들은 유럽에서 스튜가 일반화되기도 전에 고기와 허브를 넣어 스튜를 끓이는 방법을 미리 고안하여 주식으로 삼기도 하였다. 또한 노르만인들의 영국 침공으로 인하여 중세 영국에 향신료들을 이용한 요리들이 소개되었고, 대영제국 시기에는 인도 요리가 큰 인기를 얻어 강하고 자극적인 냄새를 가지는 허브들과 향신료를 이용한 요리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얻어 인기를 끌었다. 이 때문에 본래 인도에서 유래한 요리를 영국식으로 개량하여 영국식 요리로 만들기도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도 닭요리에서 유래한 앵글로-인디안 치킨 티카 마살라이다. 그 외에도 피시앤드칩스, 샌드위치, 로스트비프, 파이, 영국식 푸딩 등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스포츠. 축구, 크리켓, 럭비, 테니스, 골프, 복싱 등이 모두 영국을 그 기원을 하거나 아니면 영국에서 주로 발전한 스포츠들에 속한다. 영국은 19세기 전세계적인 영향력을 바탕으로 대부분의 현대 스포츠의 규칙들과 기본적인 틀을 잡았으며, 빅토리아 시대 말에 이르자 현재 우리가 즐기는 스포츠들 대부분의 골격을 잡았다. 이같은 공헌 때문에 2012년에는 IOC 위원장이 직접 ‘이 위대하고 스포츠를 사랑하는 국가는 현대 스포츠의 발생지로 이미 잘 알려져 있으며, 이 곳에서 스포츠맨십과 페어플레이의 개념이 명료한 규칙과 룰의 이름으로 정리되었다. 또한 이 곳에서 처음으로 스포츠를 교육용 목적으로 학교 교과에 넣었기도 하다.’라고 칭찬했기도 했을 정도이다. 1860년대 이래로 축구는 영국에서 가장 인기있고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잡고 있다. 영국은 FIFA로부터 축구의 종주국으로 인정받았으며, 영국의 축구협회는 가장 오래된 축구협회로 1863년에 축구의 기본적인 룰을 정했기도 하다. 또한 영국은 현재의 리그전 방식을 처음으로 도입하기도 한 국가이며 영국 잉글랜드의 프리미어리그는 세계에서 가장 사람들이 많이 시청하는 축구 리그전이기도 하다. 또한 처음으로 열린 축구 국제경기도 1872년 11월 30일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에서 열렸다고 전해진다. 간혹 같은 영국이라는 이름 하에 속해있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기를 왜 국제전이라고 하는지 궁금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영국은 연합왕국이기 때문에 서로를 스포츠전에서 같은 국가로 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는 보통 국제 스포츠 전에서 독립된 팀으로 따로 출전한다. 골프는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처음으로 발원하였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골프 코스도 영국에 위치해 있다. 1764년, 18개의 홀을 가지고 있는 골프 코스 방식이 성앤드류 왕립 골프 클럽에서 결정되었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주요 골프 토너먼트인 오픈 챔피언십도 매년 7월의 세 번째 금요일을 낀 주말에 치러진다. 럭비 역시 영국 잉글랜드가 종주국으로 영국에서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잡았으며 특히 2003년 럭비 월드컵에서 영국 잉글랜드가 우승한 이후 실시된 영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 여론조사에서 기존 8위에서 2위까지 부상하였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열린 럭비 국제전은 1871년 3월 27일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에서 열린 것으로, 이외에도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프랑스, 이탈리아는 따로 6개국 챔피언십을 열어 경기를 열고는 한다. 럭비도 축구와 비슷하게 4개의 왕국들이 따로 출전하며, 다만 매 4년마다 ‘브리티시 앤 아이리시 라이언즈’라는 이름으로 합동 팀을 구성하여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와 같은 영연방의 국가들과 친선 경기를 펼치고는 한다. 영국과 인도 등지에서 인기가 있는 대표적인 스포츠인 크리켓도 영국에서 발명되었다. 크리켓의 규칙은 1788년에 영국에서 처음 제정되었던 것이다. 현재 영국은 ‘잉글랜드 웨일스 크리켓 협회’가 주관하는 잉글랜드 크리켓 팀과 ‘아일랜드 크리켓 협회’가 주관하는 아일랜드 크리켓 팀만을 공식적인 국가대표 크리켓 팀들로 인정하고 있다. 각각의 팀 멤버들은 잉글랜드와 웨일스 각지에서 함께 뽑기에, 잉글랜드와 웨일스를 확실히 구분짓는 축구와 럭비 등의 스포츠와는 약간 다른 면이 있다. 스코틀랜드의 경우에는 독자적인 협회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보통 규모가 더 큰 잉글랜드 쪽으로 가서 선수 자격을 취득하며, 크리켓 국제대회에 진출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잉글랜드와 웨일스, 아일랜드(북아일랜드 지역 포함)은 크리켓 월드컵에 함께 진출하며, 2019년 기준으로 잉글랜드가 승리하였다. 또한 그 외에도 17개의 영국권 국가들과 웨일스가 참가하는 리그 챔피언십이 따로 있다. 현대 테니스 또한 기본적으로 1860년대 영국 버밍엄에서 유래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테니스 토너먼트전인 윔블던 챔피언십도 1877년에 영국에서 처음 열렸으며, 현재는 6월 말과 7월 초 사이에 있는 2주 동안 열린다. 그 외에도 자동차 경주에도 관련이 깊어서, 포뮬라 원 등 여러 저명한 경기에 참가하는 팀과 선수들이 영국에 본적을 두고 있으며 실버스톤에서 처음으로 1950년에 F1 그랜드 프릭스를 열었으며, 현재도 이를 기념하여 매 7월마다 같은 장소에서 영국 그랜드 프릭스를 열고 있다. 교육. 중세시대부터 전통을 가진 옥스퍼드 대학교나 케임브리지 대학교 등이 대표적이다. 의무교육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11년이며(1972년 이후) 한국의 고등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12, 13학년의 경우는 의무는 아니지만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매주 국가로부터 지원금을 받게 된다. 대학 교육은 스코틀랜드는 전액 무상이나 잉글랜드를 포함한 나머지 국가들은 연간 9000파운드에 달한다. 다만 무이자 대출을 받을 수 있으며 연봉이 21000파운드 이하일 경우 갚게 될 의무가 없고, 이상일 경우 소득의 9%를 매년 납부하게 된다. 대학과정은 대부분 3년 과정이며 대학원 석사 과정은 2종류로 학습 과정과 연구 과정으로 각 1년씩이다. 박사과정은 대체로 3년 과정이나 실제 박사취득은 4년-5년이 걸린다. 일부 대학은 경영학 석사 과정과 같은 특성화 과정을 2년제로 운영하기도 한다. 대학의 학기는 대한민국의 연간 2학기제와 달리 연간 3학기제로 운영된다. 영국 교육의 역사는 잉글랜드의 귀족 및 왕족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설립한 옥스퍼드 대학교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이에 반발한 교수들과 학생들이 캠브리지 지방에 모여서 설립한 캠브리지 대학교가 뒤를 이으며 이 두 대학은 현대 대학의 원형이 되었다. 스코틀랜드는 이러한 잉글랜드의 두 대학을 부러워 했고, 잉글랜드와 달리 스코틀랜드의 수도승들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으로 교황의 지원 하에 세인트앤드류스 대학교, 글래스고 대학교, 에딘버러 대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이들 대학들은 중세시대에 설립 되었기에 중세대학 혹은 고대대학이라고 불린다. 이후 영국은 산업혁명을 통해서 근대문명사회로 접어들며 종교인이나 귀족의 양성만을 담당했던 고전적인 대학의 기능에 한계를 느꼈고, 과학자와 학자 등 각계의 전문가들을 양성해야 한다는 왕실과 의회의 결론에 따라서 인류 산업혁명의 발상지 맨체스터 지역에 잉글랜드 왕립협회 회원들과 과학자들이 설립한 맨체스터 대학교를 시작으로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브리스톨 대학교, 킹스 칼리지 런던 등 근현대적인 교육 기관들이 설립된다. 그리고 이러한 근대 대학들의 설립은 당시 대영 제국의 식민지였던 미국과, 호주, 캐나다 등의 나라들에 큰 영향을 주며, 하버드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토론토 대학교 등의 설립에 영향을 주게 된다. 옥스퍼드 대학교나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같은 대학교는 대체적으로 대학 즉 단과대학의 연합체이다. 대학교를 대표하는 총장이 있으나 실제 대학교의 운영은 단과대학이 자체적으로 결정한다. 단과대학들은 각자 독자적인 학생 모집과 학과목을 운영하며, 같은 학과가 여러 단과대학에 있기도 하다. 단과대학의 연합으로 운영해야 하는 과정에 대해서만 공동과정을 진행한다. 일례로 옥스퍼드 대학교는 "경영대학원"이 있으나 이는 공동 과정으로 대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은 단과대학에서 일종의 파견으로 와서 서로 다른 단과대학 소속이다. 경제. 영국의 경제 체제는 ‘정부의 통제를 일부 받는 시장경제체제’라고 정의할 수 있다. 현재 영국은 세계에서 5번째로 거대한 경제대국이며, 유럽에서는 독일에 이어 2번째로 경제 규모가 거대한 국가이다. 영국 경제는 영국 재무부에서 독자적으로 담당하며, 그 수장인 재무부장관은 정부 공공금융 정책과 경제 정책들을 담당할 의무가 있다. 영국의 중앙은행은 영국은행으로, 영국의 화폐인 파운드화를 발행하고 환율을 조절하는 업무를 본다.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 또한 독자적인 은행이 있고, 이 은행들도 자신들의 독자적인 화폐를 발행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나 이를 위하여 영국은행이 발행한 파운드화를 일정량 이상 보유하고 있어야만 한다. 파운드화는 달러화와 유로화 다음으로, 세계에서 3번째로 외환보유량이 많은 기축통화이기도 하다. 1997년 이래 영국의 환율을 정해온 것은 ‘금융정책위원회(Monetary Policy Committee)로, 위원장은 영국은행장이며 경제의 인플레이션을 막고 환율을 적절히 조절하는 역할을 하고 매년 경제 목표를 제시하기도 한다. 영국 경제 최대 부문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서비스업으로, 전체 GDP의 79%를 차지하고 있다. 런던은 뉴욕 다음가는 세계 2의 금융수도이기도 하다. 또한 유럽에서는 가장 거대한 GDP를 가지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에든버러가 세계 17위이고, 2020년 기준으로 서유럽에서도 무려 6위라는 경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또한 관광업으로도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는데, 2004년 기준으로 약 2,700만 명의 관광객들이 영국을 찾았으며 영국은 세계에서 6번째로 관광객이 많이 찾는 국가라고 한다. 또한 그 수도인 런던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제선 방문객들이 찾는 도시라고 전해진다. 이외에도 정보산업도 그 규모가 상당해서, 1997년과 2005년 사이에 매년 약 6% 씩 성장할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의 기틀을 놓은 산업혁명이 바로 영국에서 시작했고, 이덕분에 영국은 타 국가들보다 훨씬 빨리 주요 산업들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직물업을 가장 먼저 손에 넣었고, 그 다음으로는 조선업, 석탄업, 철강업 등을 장악한 것이다. 영국의 상인, 무역업자, 은행업자들은 이 발달된 선진 산업을 바탕으로 식민지와 주변 국가들의 경제계를 장악하였고, 19세기 내내 전세계의 경제를 쥐락펴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다른 국가들도 급격한 산업화에 들어가고, 2개의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소련과 미국이 양대 강대국으로 떠오르자 영국의 경제적 지위도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여 20세기 내내 경제가 하락세로 접어들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영국의 주력이었던 제조업도 크게 쇠퇴하여 2003년 기준으로 전체 GDP의 16.7% 정도 밖에 차지하고 있지 못하다고 한다. 영국의 자동차 산업은 약 80만 명의 사람들을 고용하고 있으며, 2015년 기준으로 약 700억 파운드 정도나 되는 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며 영국의 전체 수출액의 11.8%를 차지하고 있다. 2015년 기준으로 영국은 약 160만 대의 승용차들을 생산하였으며 94,500대의 상업용 차량들을 생산하였다. 또한 엔진 제작에도 매우 뛰어나서, 2015년 기준으로 약 240만 개의 엔진들을 따로 제작하기도 하였다. 영국의 모터스포츠 업계도 대단히 발달되어 있기에 대략 41,000명의 고용 효과를 내고 있으며 4,500여 개의 회사들이 있고 약 60억 파운드에 달하는 경제 효과를 내고 있다. 그 외에도 영국의 항공우주산업도 꽤나 발달되어 있어서, 세계에서 2번째에서 3번째로 거대한 규모이며 매년 약 300억 파운드에 달하는 매출을 내고 있다. 영국의 국방 관련 기업인 BAE 시스템즈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항공방위산업체들 중 하나로, 타이푼 유로파이터의 대다수 부품들을 제작하고 있으며 영국 왕립 공군에도 수많은 부품들을 납품하고 있다. 또한 미국 최고의 제트기들 중 하나인 F35의 제작에도 참여하고 있으며, 다양한 제트기 부품들을 디자인하고 제조하는 일을 맡고 있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제트훈련기인 호크을 제작하기도 한다. 에어버스 UK는 군용기의 날개 부분을 따로 제작할 정도로 기술력이 높으며, 30여 종이 넘는 특수 엔진들을 제작할 수 있으며 대략 30,000개가 넘는 다양한 엔진 도면들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이름이 높다. 영국의 우주 산업은 2011년 기준으로 약 91억 파운드 정도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며, 약 29,000여 명의 고용 효과를 내고 있다. 매년 약 7.5% 정도로 급격히 성장하고 있으며 영국 정부 측에서도 다양하게 지원을 쏟아붇고 있다. 이처럼 기술 집약적인 산업들 외에도, 농업과 같은 전통적인 1차 산업도 발달되어 있다. 영국의 농산업의 경우, 여타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고도로 기술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으며 이 덕분에 전체 인구의 1.6% 만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내 소비량의 약 60%를 자급하고 있다. 영국 국내 농산물 생산량의 3분의 2 정도는 가축들의 사료로 사용되며, 나머지 3분의 1만이 사람들이 먹을 목적으로 이용된다. 또한 그 외에도 국내에 묻혀있는 풍부한 석탄, 석유, 천연가스, 주석, 석회암, 철광석, 점토, 석회, 납, 규소, 암염 등 여러 자원들을 활용하고 있기도 하다. 2008년 4분기에 영국 경제는 1991년 이래 미국과 프랑스 등 여러 경제대국들의 뒤를 따라 1991년 이래 처음으로 정체기에 접어들었다. 2013년에는 무디스, 피치 신용등급에서 1978년 이래로 처음으로 신용등급 AAA 등급을 박탈당했다. 다만 스탠다드앤푸어스 측에서는 여전히 AAA 등급을 유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성장세를 이어가기 시작하였고, 2014년 말 즈음, 영국의 경제 성장률은 G7과 유럽 대다수의 국가들보다도 훨씬 빠른 속력으로 성장하였으며, 2015년 9월에는 실업률이 5.3% 정도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성장하던 영국의 경제도 2020년에 불어닥친 코로나 19 사태로 인하여 위축되었는데, 영국 경제는 4월과 6월 사이에 전달에 비해 20.4%나 경제 규모가 수축하는 기록을 세웠으며, 11년만에 다시 정체기로 진입하고야 말았다. 1980년대 이래 영국의 경제적 불평등은 호주나 캐나다 같은 타 선진국들에 비하여 매우 급격한 속도로 벌어져만 왔다. 영국의 경제적 빈곤선은 중산층 평균 수입의 60% 미만 정도인데, 국가 통계청에서는 2011년 경우에 140만 명에 달하는 국민들이 ‘심각한 물질적 빈곤’을 경험하고 있으며 이는 1977년의 30만 명보다도 훨씬 많은 수치라고 경고했다. 2018년에 영국을 방문한 UN 빈곤조사위원회 측에서는 독자적인 조사를 거쳐, 사회적 안정을 보장해주어야할 정부가 오히려 빈곤층에 대한 사회적 지원을 끊어내고 있으며 ‘빈곤율을 높이고 불필요한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라고 강도높게 비판하기도 할 정도였다. 현재 영국의 대외채무는 약 9.6조 달러 정도로,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높다. GDP와 비교했을 경우에는 약 408% 정도로, 룩셈부르크와 아이슬란드 다음으로 세계에서 3번째로 높은 순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기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17세기 이래 과학혁명의 시기부터 세계 과학계를 이끌어왔다. 영국은 18세기부터 산업혁명을 주도하며 기술발전을 이끌어왔는데, 수많은 영국 출신의 과학자들과 걸출한 인물들이 과학 발전에 업적을 남겼던 것이다. 17세기와 18세기 영국 출신의 대표적인 과학자들에는 운동의 법칙과 중력을 밝혀내며 세계 과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아이작 뉴턴, 진화론과 자연선택을 주창하고 현대 생물학의 기초를 놓은 찰스 다윈, 고전 전자기학의 시초를 놓은 클라크 막스웰, 최근에는 세계 과학계의 거두이자 우주학, 양자학, 블랙홀 연구에 큰 공헌을 한 스티븐 호킹 등이 있다. 이외에도 18세기의 영국 과학자들 중에서는 수소를 발견한 헨리 캐번디시, 페니실린을 합성한 알렉산더 플레밍, DNA 구조를 발견한 프란시스 크릭 등이 있다. 유명한 영국계 발명가들 중에서는 제임스 와트, 조지 스티븐슨, 로버트 스티븐슨,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등이 있다. 19세기에는 마이클 패러데이가 전기모터를 발명하였고, 찰스 배비지가 첫 컴퓨터를 발명하였다. 또한 조셉 스완이 첫 백열전구를 발명하였고,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처음으로 전화에 대한 특허를 얻어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20세기에는 존 로지 베어드가 처음으로 텔레비전 시스템을 개발하였다. 또한 프랭크 휘틀은 제트 엔진을 개발하였고, 앨런 튜링이 현대 컴퓨터의 기본 틀을 놓았으며 팀 버너스리는 월드와이드웹을 개발하였다. 이 때문에 영국은 아직도 과학기술 개발을 최대의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정부 차원에서 막대한 돈을 쏟아붇고 있다. 2004년과 2008년 사이에 영국은 전체 과학 관련 논문의 7%를 독자적으로 제출하였으며, 인용된 건수도 미국과 중국 다음으로 전체의 8%나 되었다. 또한 저명한 과학 잡지인 네이처, 영국의학저널, 란셋 등도 모두 영국에 기반을 둔 잡지사들이다. 교통. 해운국으로서의 지위는 대전 전에 비하면 크게 후퇴했으나 보유 선박은 3,292만 t(1976)으로서 세계 제3위를 차지하며 세계 해운 시장의 일대 중심지로 되어 있다. 런던을 비롯하여 사우댐프턴·리버풀·맨체스터·글래스고 등이 대표적인 항구이며, 템스강 하구, 클라이드 강구, 맨체스터 운하에는 10만 t급 탱커를 넣는 터미널이 완성되어 있다. 철도의 총연장은 약 2만km로서 세계 제2의 밀도(密度)이다. 1947년 이후 국유화했으나, 철도 발상지인 만큼 낡은 시설이 많은 데다가 자동차의 보급으로 큰 결손이 누적되고 있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합리화 계획을 실시하였으나 해결되지 않거나 오히려 더욱 큰 문제가 발생하는 상황이다. 도로 연장은 약 36만 6,000km로서 거의 포장이 되어 있다. 간선도로는 운수성(運輸省) 직할로 운영되며, 그 밖의 것은 지방자치단체가 관리하고 있다. 항공은 원월드의 주축 항공사 영국항공과, 저비용 항공사의 대표주자인 이지젯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버진 애틀랜틱 항공 등 유수의 항공사가 존재한다. 런던 히드로 국제공항은 세계 3위이자 유럽에서 가장 붐비는 공항이기도 하다. 우편물의 항공수송 서비스도 발달되어 있다. 한편 다년간 국내외의 주목을 받아왔던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유러터널(영국해협터널)은 1994년 5월 개통되었다. 해적. 영국은 해적으로 악명높은 나라였으며 이름난 영국 해적들이 많이 존재한다. 에드워드 티치, 윌리엄 키드, 프랜시스 드레이크, 앤 보니 등등 영국 출신 해적들은 대항해시대에 엄청난 악명을 떨쳤다. 국가. 영국의 국가는 《하느님 국왕 폐하를 지켜주소서》이다. 이외에 비 공식 국가로 《룰 브리타니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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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군주 목록
영국의 군주 목록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부터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영국)의 군주들을 다루고 있다. 1603년 잉글랜드 왕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한 후, 스코틀랜드 왕국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위를 이어받아 제임스 1세로 즉위하였다. 이때부터 1707년까지 잉글랜드의 군주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군주를 겸직했다. 그러다가 1707년 연합법에 의해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이후, 1801년 연합법에 의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아일랜드 왕국이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1922년 12월 6일 아일랜드 자유국이 독립함에 따라, 1927년 4월 12일 나라 이름을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으로 개정하였다. 스튜어트 왕가(1707–1714). 앤 여왕은 1702년 3월 8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여왕으로 즉위하였으며, 1707년 연합법이 제정됨에 따라,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이 통합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즉 영국의 첫 번째 군주가 되었다. 하노버 왕가(1714–1901). 잉글랜드 의회에서 1701년 왕위 결정 법이 통과되면서, 하노버 왕가가 왕위 계승권을 갖게 되었지만, 가톨릭 신자는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되었다. 1707년 스코틀랜드 의회에서도 하노버 왕가의 왕위 계승권을 비준하였다. 앤 여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서거하자, 그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자 제임스 1세(6세)의 증손녀인 팔츠의 조피의 아들인 데다가,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던 조지 1세가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1901–1917). 에드워드 7세는 빅토리아의 아들이자 후계자이긴 하지만, 부친의 가문 이름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그가 즉위하면서 왕가의 이름이 바뀌었다. 윈저 왕가(1917–현재).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 영국에 반독일 감정이 커지자 1917년 왕가의 이름을 윈저로 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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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2004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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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 목록
한국은 지형학상 산지가 국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고저의 차가 심하다. 대한민국의 영토인 한반도에 위치한 산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은 백두산이며, 남한에서는 한라산이 가장 높다(남한 내륙에서는 지리산이 가장 높다.). 산의 고도는 90% 이상이 2000미터 미만이다. 국가통계포털(KOSIS)의 국토지리정보현황 자료에 의하면 남한의 산은 8751개이다. 다음은 한국의 산에 관한 목록이다. 개요. 한반도는 산지 면적이 전국토의 약 70% 이상(남한 69.4%)을 차지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높은 편은 아니다. 대부분의 산지의 높이는 2,000m 이하이며, 가장 높은 백두산이 2,744m, 남한의 최고봉인 한라산도 1,947.06m에 불과하다. 해발 1,000m 이상의 고지대는 국토의 약 10%이며, 200 ~ 500m의 저산성 산지가 약 40% 이상을 차지한다. 남한 본토(내륙)에서 가장 높은 산은 지리산 천왕봉으로 높이가 1,915m이다. 산지의 높이는 북쪽과 동쪽으로 감에 따라 높아지고 험하다. 따라서 한반도의 산지는 북쪽과 동쪽의 높은 산지와 서쪽과 남쪽의 비교적 낮은 구릉성 산지로 구분되며, 남서쪽으로 완만히 기울어지는 '경동성 지형'을 이루고 있다. 한반도는 오랫동안 침식을 받아 전반적으로 낮고 편평했으나, 단층 요곡 운동과 함께 융기 운동을 받아 현재와 같은 지형이 형성되었다. 특히 북동쪽은 융기가 크게 나타나 높고 험한 산지를 이루었다. 비교적 높은 곳에 융기 이전의 평탄한 면인 '고위 평탄면'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오랫동안 산이 깎이고 쌓여서 준평원이 다시 지각 운동으로 인하여 몇 차례 솟아오르며, 단단한 부분이 그대로 굳어 버린 것으로 개마고원 지대에 가장 넓게 분포한다. 그리고 태백산맥의 대관령 부근과 삼척 부근을 비롯한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가나다 찾기. ㅁ. 매. 매봉산(경북 구미) 묘. 묘향산 ㅇ. 유. 유달산 · 유명산 · 유현덕산 · 유학산 · 육백산 월. 월명산 · 월미산 · 월봉산 · 월아산 · 월악산 · 월여산 · 월출산 ·월경산 (장수/함양) · 월하산 (부여) 으. 응복산 · 응봉산 (삼척) · 응봉산 (서울) · 응봉산 (홍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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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맥
한국의 산맥(韓國-山脈)은 주향에 따라서 한국 방향·중국 방향·랴오둥 방향의 산계로 나눈다. 지질학적 분류. 다음은 고토 분지로에 의한 분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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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동굴 목록
대한민국은 지형학적으로 산이 국토에 차지하는 면적이 매우 큰 까닭으로 산악 지형의 한 특징인 동굴을 적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한반도의 산맥 형성이 북쪽과 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펼쳐지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동굴은 남한에서는 강원도에 밀집하여 있다. 그리고 화산에 의해 생긴 제주도에 역시 긴 동굴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더군다나 몇몇 동굴들에서는 오늘날 한국의 선사시대의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지역별 동굴. 아래 목록은 대한민국의 동굴들을 지역별로 분류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목록에 기재되지 않은 동굴도 많으므로 정확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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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강
한국의 하천은 분수령이 동해안 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동해로 흘러드는 하천은 짧고 급류가 많으나, 서쪽 또는 서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완만하고 길다. 대개 하천은 노년곡과 준평원상을 흘러 경사가 극도로 완만한 평형 하천을 이루며, 오랫동안의 침식으로 중류와 하류에 침식 분지와 범람원·자연제방 등이 발달하고, 상류에는 하안단구를 이루는 곳이 많다. 계절에 따른 강수량 분포가 고르지 못하여 우량의 변화가 매우 커서 하천의 개발 이용이 곤란하며 특히 하기의 집중적인 호우로 화강암 산지에서 풍화된 토사의 유출이 많아 이것이 하저에 퇴적되어 하상을 높여 잦은 홍수를 유발한다. 하천 구분. 대한민국에서 하천은 하천법에 의한 국가하천과 지방하천, 그리고 소하천정비법에 의한 소하천으로 구분하고 있다. 국가하천은 국토보전상 또는 대한민국 국민 경제상 중요한 하천으로, 국토교통부장관이 아래 사항 중 하나에 해당하면 국가하천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하천법 7조 2항 4호의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하천은 다음 각 호의 사항을 고려하여 국토교통부 장관이 정하여 고시하는 기준에 해당하는 하천이다. 지방하천은 지방의 공공이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하천으로서 시장 또는 도지사가 그 명칭과 구간을 지정하는 하천을 말하며, 시장 또는 도지사가 하천을 관리한다. 지방하천을 지정할 때는 국가하천과 연결될 경우 국가하천의 종점과 지방하천의 기점이 일치해야 하며, 지방하천이 다른 지방하천과 연접할 경우 연접하는 다른 지방하천의 기점과 종점이 일치해야 한다. 또한 하나의 하천을 2개 이상의 명칭으로 지정할 수 없으며, 공유수면의 매립 등으로 해안선이 변경될 경우 하천의 종점이 변경된다. 만약 기존 지방하천이 국가하천으로 지정될 경우 지방하천의 효력을 잃게 된다. 소하천은 국가하천 또는 지방하천으로 지정되지 않은 하천으로, 일시적이 아닌 유수(流水)가 있거나 또는 있을 것이 예상되는 구역으로서 평균 하천 폭이 2m 이상이고 시점에서 종점까지 전체길이가 500m 이상인 하천을 말한다. 소하천은 국가하천과 지방하천과 달리 하천법의 적용을 받지 않으며 소하천 만을 다루는 소하천정비법을 따른다. 소하천의 지정은 특별자치도지사, 시장, 군수 또는 자치구 구청장이 할 수 있으며, 만약 기존 소하천을 특별시장, 광역시장, 도지사 또는 특별자치도지사가 지방하천으로 지정할 경우 소하천의 효력을 잃게 된다. 하천기본계획. 대한민국 하천법 25조에 따라 하천관리청은 자신이 관할하는 하천에 대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10년 단위로 하천기본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여기에 들어가는 내용은 하천 이용, 자연친화적 관리, 보전에 필요한 기본사항들이다. 구체적으로는 아래와 같다. 홍수. 2020년 8월 기준, 전국 홍수 피해의 98%는 소하천에서 발생한다. 2018년 12월 31일 기준, 지방하천 정비율은 48.07%이며 지방정부가 관리하는데 예산 부족으로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2018-2019년 수해를 입은 하천 중 98.4%는 지방하천이었다. 2018년 12월 31일 기준 국가하천 정비율은 81.41%이다.
2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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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섬 목록
한국의 섬 목록은 대한민국 및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섬의 목록이다.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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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적지
다음은 한국의 고적지 목록이다.
2202
414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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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절
한국의 명절은 같은 한자 문화권에 속하는 중국·베트남·일본의 명절과 겹치는 날이 많다. 개요. 한자 문화권의 다른 명절처럼 중양(重陽)에 드는 때가 많다. 양(陽)이란 수(數)에서 홀수를 가리키며, 중(重)은 수가 겹칩을 뜻한다. 이에 따라 중양(重陽)은 1월 1일 및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9월 9일을 가리키며, 특히 음력 9월 9일을 중양절이라 한다. 또한 보름달이 뜨는 날을 명절도 삼은 때도 역시 많아서 1월, 6월, 7월, 8월, 10월의 보름이 명절이다. 이와 같은 명절은 대개 보름마다 한 번씩 있는 절기(節氣)와는 구분되는 것으로 계절에 따라 뜻깊은 날을 정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음력 1월의 설과 대보름, 음력 8월의 추석 외에는 대부분 명절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이것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옮겨옴에 따라 생겨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목록. 아래는 한국의 명절 목록이다. 음력으로 기념되는 전통 명절과 양력이 도입되고 기념되는 명절 전부를 기재한다. 명절과 관련한 세시. 세시(歲時)가 명절과 관련을 가지기도 한다. 또한 설날과 복날, 납일을 아울러 “세시복랍”(歲時伏臘)이라고도 부른다. 명절 증후군. 명절 증후군의 대표적인 신체 증상으로는 소화불량, 구역감, 식욕 저하와 두통·어지러움 등의 신경계 증상 및 불안, 두근거림, 답답함, 불면, 초조, 걱정, 무기력감 등이 있다. 명절 이후에 이혼이 급증하는 현상이 있다. 가족 내의 재산 분배나 경제적 문제가 이슈가 되면 첨예한 갈등이 표출될 수도 있다. ‘결혼 언제하니?’, ‘취직은 했니?’등 친지가 무심코 던진 말도 상처가 된다. 취업난, 실직 등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더욱 과민해지고 가족 간 갈등이 증가하고 있어 명절증후군에 대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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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Socrates, 기원전 470년 경 – 기원전 399년 5월 7일)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기원전 469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나 일생을 철학의 제 문제에 관한 토론으로 일관한 서양 철학에서 첫번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죽음은 멜레토스, 아니토스, 리콘 등에 의해 '신성 모독죄' 와 '젊은 세대들을 타락시킨 죄' 로 기소당하고 기원전 399년에 71세의 나이로 사약을 마시고 사형을 당했다. 실존철학의 거장인 카를 야스퍼스의 저서 위대한 사상가들에서도 그렇게 보고 있다. 영국의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 라고 말했으며, 시인 에머슨은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 이라 평하였는데,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수제자이다. 플라톤이 20대인 시절, 스승 소크라테스가 민주주의에 의해 끝내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 크게 분개했으며, 이는 그의 귀족주의(철인정치) 지지의 큰 계기가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소크라테스의 증손 제자로,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과 달리 민주주의를 지지했다. 소크라테스 문제. 역사상의 소크라테스와 그의 철학적 관점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상당한 논쟁거리이다. 이 문제를 소크라테스 자신과 생애, 철학에 대한 지식은 그의 제자들과 당대 사람들의 기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플라톤의 기록이며, 그 밖에도 크세노폰,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파네스도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런 저작들은 정확한 사실이 아닌 철학 또는 극적인 글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제" 소크라테스를 알기는 어렵다. 당대 고대 그리스에서 투퀴디데스(일반적으로 소크라테스나 철학자들에 대해 언급한 바가 없다)를 제외하고는, 소크라테스 시대를 사실에 입각해서 서술하는 한 사람들은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역사가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업적에 대하여 정확하고 일관성있는 역사를 쓰기 위해 당대 인물들이 쓴 여러 사료들을 일치시켜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반드시 사실적이지는 않으며 다만 일관성을 갖추었을 따름이다. 일반적으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에 대해 가장 믿을 만하고 유용한 지식을 제공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동시에 일부 저작에서 플라톤은 자신이 저작속에서 구현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실제 소크라테스의 언행보다 더욱 미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저작이나 유물을 통해서 소크라테스가 단지 플라톤이 날조한 인물은 아님이 드러난다. 크세노폰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과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은 플라톤의 저작에 나오는 일반적인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확인하는 데 유용하다. 생애.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석공소를 운영한 석공이자 조각가였던 소프로니코스를 아버지로, 산파였던 파이나레테를 어머니로 하는 아테네의 서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성장 초기에는 직업을 세습하던 당시 문화에 따라 아버지 밑에서 석공 기술을 배우며 철학, 기하학, 천문학 등을 공부했고, 청년에서 40세까지 세 번에 걸친 전쟁에 중장보병으로 전투에 직접 참여하였다. 40세 이후에는 교육자로 청년들의 교화에 힘썼다. 기원전 406년, 500명 공회의 원로 일원이 되어 1년간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자연 철학을 배웠으나, 그 기계론적 세계관에 불만을 품었다. 그때는 아테네의 몰락기였으므로 보수적이고 귀족적인 정신과 진보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비판적 정신이 소용돌이치는 시대였다. 그도 이러한 경향을 지니게 되었으나 당시의 소피스트들처럼 궤변으로 진리를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한 진리를 찾아서 이상주의적, 목적론적인 철학을 수립하려고 하였다. 그는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의·절제·용기·경건 등을 가르쳐 많은 청년들에게 큰 감화를 끼쳤으나, 공포정치 시대의 참주였던 크리티아스 등의 출현이 그의 영향 때문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어 '청년을 부패시키고 국가의 여러 신을 믿지 않는 자'라는 죄명으로 고소되고, 배심원들의 투표 결과 40표로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는 도주할 수도 있었으나 태연히 독배를 들어 마시면서 자신이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을 빚졌다며 자신 대신 갚아 달라고 친구에게 당부하였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으로 그의 신전에서 치료받은 사람은 닭을 대가로 바쳐야 했다고 한다.) 참고로, 흔히 소크라테스라 하면 악법도 법이다 라며 담담히 사약을 받아들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야기가 후에 변질된 것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 하나인, 에우렐이 말년에 작성한 파타모닐리아에 묘사한 내용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내려진 사약을 몇 번이고 뒤엎어서 결국 마지막에 간수장이 간수들을 시켜 억지로 사약을 먹여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사상. 아무런 저서도 남긴 바 없는 소크라테스의 확실한 사상을 알기는 어려우나 아리스토텔레스, 디오게네스, 라이르티우스, 크세노폰, 특히 플라톤의 저서 등에 언급된 것을 보면 그는 델피의 신탁인 "만인 중에 소크라테스가 제일 현명하다."는 말을 들었다. 스스로의 무지를 자처하던 소크라테스는 신의 신탁이 사실인가 확인하기 위해 의아심을 품고 여러 현명한 사람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말을 확실히 알고 언표하는 사람이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 이전에 활동하던 소피스트의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에 맞서, 소크라테스는 장인이 아레테(ἀρετή, 훌륭함, 탁월함이라는 뜻)를 발휘하려면 자신의 기술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듯, 인간으로서의 아레테, 즉 덕을 발휘하려면 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방법으로 제논의 변증법을 활용하여 논변을 진행시키는 사이에 잘못된 판단의 모순을 깨우치고 다시금 옳은 판단으로 유도시켰는데, 이것이 유명한 산파술이다. 그는 합리주의자였으나, 때로는 초경험적인 내심의 소리, 즉 다이몬의 소리를 경청하고, 때로는 깊은 명상에 잠기기도 하였다.(다이몬은 고대 신비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찾았던 의식의 바탕이 되는 일종의 심연의 의식이다. 불가의 참나, 도교의 원신 등과 일맥상통 한다. 다이몬이 영어로 데몬이 되었고, 이것은 악마를 뜻하게 됐다. 이는 모든 이교도 학자, 신비주의자 일체를 이단으로 여긴 후대의 기독교도들에 의해서다.) 덕은 인간에 내재한다고 믿고 사람들에게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해 온갖 계층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지함을 일깨워 주고 용기나 정의 등에 관한 윤리상의 개념을 설교하고 다녔다. 그는 대화를 통해 누군가를 가르치지 않고 질문을 함으로써 자신에게 무엇이 잘못인지 깨닫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부당한 고발을 당해 사약을 마시게 되었다. 그의 탁월한 지적·도덕적 성격에 의해 비단 철학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인류 최대의 교사'로 불리고 있다. 도덕론.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시대는 전반적으로 아테네 민주주의가 부패하던 시기였고, 이로 인한 개인윤리 타락이 극심한 시대였다. 그는 여러 악덕을 '무지'에 기인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덕은 이성적 사고의 기초 하에 생겨난다. 또한, 덕의 확대는 사회를 더 이성적인 상태로 만들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점이다. 또한, 이성의 냉소로 인한 부덕함이란 개념 자체를 비판했다. 그는 악덕한 자는 필연적으로 앎이 부족한 무지한 상태에 있다고 봤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냉소적 이성'은 성립할 수 없다고 봤다. 그의 이러한 지행합일론은 그가 윤리·도덕적인 측면을 강조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실제로 그는 일상생활에서도 절제를 추구했으며, 자신의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청년들을 무료로 가르쳤다. 그리고 '선'을 중시하여 토론 과정에서도 관련된 질문을 많이 던졌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사후 '스토아학파'에 의해 계승됐으며, 기독교의 윤리관에도 큰 영향을 줬다. 그러나 이는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그리스 철학이나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기독교 윤리관과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영혼 중심적 사고. 소크라테스는 육체-영혼 이원론자였다. 그는 육체는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만, 그저 껍데기일 뿐이고, 만 지식은 영혼 안에 내재된 개념이라고 봤으며, 영혼은 불멸한다고 봤다. 인간은 영혼을 소유한 존재이지만, 육체의 감각적 요소에 의해 영혼에 내재된 진리를 통찰하는 것을 계속 방해 당한다고 봤으며, 그는 이를 극복하면 만 지식을 얻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극복 방법은 바로 이성적 사고에 기초한 산파술로 감각으로 인해 얻은 여러 '오류'를 하나씩 잡는 것에 있다고 봤다. 이러한 신념에 기초하여 그는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봤기 때문에 '죽음'을 긍정하기도 했다. 변론과 크리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회자되지만, 소크라테스가 직접 이런 말을 했다는 증거가 없다. 이 경구가 처음 등장한 것은 로마시대이며 말한 사람은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로 기록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변론》에서 법정이 철학을 포기한다면 석방해주겠다는 제안을 하더라도 자신이 철학을 하는 이유는 하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 외에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법 이상의 철학적 원칙과 신념에 기초하여 의사결정을 했던 몇가지 사례들이 있다. 반면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독배를 내린 법률에 대해 자신이 국외 추방을 제의하지 않음으로써 소극적으로 동의한 절차적 정당성을 뒤늦게 훼손할 수 없다고 친구인 크리톤에게 밝힌다. 그러나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평소의 냉정한 변증법적·이성적 논법을 구사하지 않고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모습으로 크리톤을 설득하고 있기에 이는 진의를 모두 파악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변론》과 《크리톤》의 이런 모순적인 모습 중 《크리톤》에 실린 모습이 과장되어 《변론》에 담긴 법령 불복종자로서의 모습을 누르고 지금까지 이어져왔는데 소크라테스의 일관된 삶과 철학에 비추어 볼 때 이런 말은 결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철학자는 진리조차도 회의하고 가짜로 드러나는 순간 바로 폐기시키는 엄중함이 있는데, 기껏해야 인위적인 실정법을 무조건 옹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철학과 법의 기본 성격조차 모르는 무지의 소치였다. 산파술. 소크라테스는 구두언어 - 흔히 당대에 로고스(Logos)라 불리던 -의 형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두었다. 그는 구두언어는 지(知)의 매개인 정신을 다른 상대방에게 전하는 유일한 운송 수단으로 봤다. 즉, 그에게 있어서 구두언어는 현대의 관점에서 말하는 단순한 규칙적인 음파의 개념이 아닌, 발화자의 사유 자체를 어떠한 오류도 없이 밖으로 내보내서, 듣는 이의 사유에 영향을 주는 절대적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토론했는데 제자들이 던진 질문에 즉각적인 답을 주는 것보단 거꾸로 질문을 던지는 것을 선호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의견이 무지에 기인한 의견 또는 그에 준하는 단견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이 만 지식을 알지 않는 한 단견으로 토론을 중지시켜서 '앎의 변증'을 멈추는 것은 비이성적인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질문에서 확신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끝없이 질문했으며, 이러한 변증의 과정을 통해 진리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미적 범주. 소크라테스는 미학적인 범주를 적어도 세 가지로 나누었다. 그 세 범주는 부분의 조립을 통해 자연을 표현하는 '이상적인 미', 시선을 통해 영혼을 표현하는 '정신적인 미', 그리고 '유용한(혹은 기능적인) 미'이다. 영향. 그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게 전해져 메가라 학파, 키니코스 학파, 키레네 학파 등을 이루고, 특히 수제자인 플라톤의 관념주의로서 피어나, 그 후의 서양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 수도원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일생을 통해 자신이 직접 책을 쓴 일이 없고 또한 문학적 흥미도 지닌 바 없으나 그가 철학의 방법으로 취한 대화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걸작 대화집을 낳았다. 또한 그의 독창적 개성과 비극적인 죽음은 전기문학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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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국가이다. 줄여서 중국()이라고도 한다. 14억 이상의 인구를 보유 중이다. 수도는 베이징시이며, 최대 도시는 상하이시이다. 이 밖의 주요 도시로는 광저우시, 난징시, 시안시, 푸저우시, 칭다오시, 충칭시 등이 있다. 근대 중국에서는 1911년 국민당 정부가 들어섰으나,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면서 각지에서 군벌정부가 권력을 휘두르는 군벌 시대로 돌입하게 되었다. 이후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5·4 운동의 반제국주의 강령을 중심으로 창당된 중국공산당은 1920년 이후 세력을 급격히 키웠고, 국민정부과 계속해서 내전을 벌였다. 중일 전쟁 이후 중국 대륙의 주도권을 두고 1946년 제2차 국공 내전이 발발하였고, 그 결과 타이완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한 영역이 공산당 측으로 넘어가 1949년 마오쩌둥을 초대 국가주석으로 하여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이 선포되었다. 소련의 막대한 영향력을 받는 중국공산당은 마오쩌둥으로 대약진 운동을 펼쳤고, 문화 대혁명도 실시하며 사회주의 국가의 틀을 굳히려 하였다. 다만 대약진 운동도 경제 성장으로 이어지지 못해 실패하였고 문화 대혁명도 수많은 국가적, 문화적 피해와 민간인 피해를 남겼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은 사회주의의 한계를 실감하게 되었고, 이후 소련의 영향력이 낮아지면서 덩샤오핑의 지도로 개혁·개방을 시행하면서 시장경제체제가 도입되어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받아들였다. 덩샤오핑은 흑묘백묘론을 내세우며 광활한 영토와 막대한 인구를 바탕으로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어냈고, 화평굴기를 외교 기조로 삼아 평화로운 공존 및 팽창 정책을 추구하였다. 이에 중국과 미국은 투키디데스의 함정 상황에 놓여있다는 평가가 있다. 국명. 국명의 약칭은 중국()이고 중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밖에도 국외에서는 중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공은 본래 중국공산당의 약칭이지만,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에서 중국공산당을 중화인민공화국의 집권 정당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공산당 정부의 의미로도 사용한다. 건국 초기에는 1949년 이전의 시대를 구중국,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를 신중국으로 구분해 부르기도 하였다. 1949년 국공 내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은 분단국가로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중국의 합법 정부는 자국임을 표방하므로, 중화민국의 독립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기원. 하나라. 고고학계는 대략 224만 년에서 25만 년 전 사이부터 중국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고 추측하며, 베이징에서는 불을 사용한 호모 에렉투스의 유골이 발견되어 베이징 원인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중국 고전에 의하면 중국의 첫 왕조는 기원전 2100년에 등장한 하나라이다. 하나라는 처음으로 중국에서 세습 군주제를 정립하였으며 이후 몇 천년간 이어내려 가는 왕조제의 기틀을 잡았다. 다만 하나라의 존재 자체는 중국 역사학계에 의하여 주장될 뿐, 실제로 하나라의 실존 여부를 증명할 역사적인 사료는 제대로 발굴된 바가 없다. 현재까지 고고학적으로 완벽하게 입증된 첫 중국 왕조는 하나라의 뒤를 이은 상나라이다. 상나라는 기원전 17세기부터 11세기까지 황하 유역을 다스렸다. 그들이 남긴 갑골문은 지금의 한자의 원형으로 일컬어진다. 상나라는 그 뒤를 이은 주나라에 의하여 멸망 당했고, 주나라는 11세기부터 5세기까지 지속하였다. 다만 이때 중국은 중앙집권체제가 아니라 봉건 제후들의 힘이 강해졌으며, 강력한 몇몇 제후들은 아예 주나라의 통치를 거부하고 300여 년 동안 춘추전국시대를 일으키며 천하의 패권을 다투었다. 5세기와 3세기 동안 춘추전국시대가 끝날 즈음에 이르자, 중국에는 가장 강력한 7개국만이 남아있었다. 전국시대와 청나라. 춘추전국시대는 진나라가 나머지 6개국을 모두 통합하며 천하를 통일하며 끝났다. 진나라의 군주였던 영정은 자신을 진나라의 시황제로 불렀고, 법치주의에 입각한 개혁을 진행하여 도량형, 문자, 도로, 통화 등을 통일하였다. 다만 15년 밖에 지속하지 못하였고, 시황제가 죽은 이후에는 곳곳에서 진나라의 가혹한 통치에 대항하여 반란이 일어나 멸망하고 말았다. 진나라가 힘을 잃자 전역에서 내전이 벌어졌고, 이 내전에서 초나라 출신 유방이 패권을 얻어 한나라를 세웠다. 한나라는 진나라에 비하여 지방분권적인 제도를 실시하고 법가를 공자가 개창한 유가로 바꾸었으나, 진나라의 법과 제도들은 대부분 한나라와 그 후계 왕조들 에게까지 전해 내려갔다. 한나라 말기, 위나라,촉나라, 오나라로 삼국이 나뉘어 졌다. 삼국 시대의 끝에는 결국 위나라가 승기를 잡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진나라에 의하여 멸망 당했다. 다만 진나라도 얼마 지나지 못하고 황제의 폭정으로 멸망하였고, 이후 오호가 북부에서 중국으로 침략해 들어와 16국을 세웠다. 이후 이민족이 통합되어 화북을 점령하여 북위를 세웠고 더, 한편 한족들은 밀려내려가 남부에서는 송나라가 세워졌다. 이 나라들은 이후에도 흥망을 거듭하며 건국되고 멸망하기를 반복하는데, 이시기를 남북조 시대라고 한다. 이민족인 북주와 북제는 남조를 자주 침략하였고 이후 북주에서 581년에 수나라로 이어져 남조를 멸망시켰다. 농업을 장려하였고 대운하를 파 무역을 촉진하였다. 수나라는 지나치게 많은 공공 공사를 추진하여 결국 국민들의 불만이 쌓이며 반란이 일어나 멸망하였다. 거란족 등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 시달리다 당나라는 8세기에 일어난 안사의 난으로 크게 약화되었고, 결국 절도사들이 분열되어 약화되었고 후량에 당나라를 선양하게 된다. 하지만 당나라와 후량은 907년에는 거란족에 의해 멸망하였다. 거란족에 의해 남쪽으로 밀려난 한족은 송나라를 건국하였다. 하지만 요나라에 의해 송나라는 지속적으로 침략을 받아 조공하게 되었고 이후 금나라에 의해 북송이 멸망하게 되었다. 10세기와 11세기 사이 송나라는 유교를 장려했으며 철학과 예술, 도자기 기술 등을 크게 진흥하였다. 허나 지나치게 문치에 입각한 송나라의 정책은 군대의 약화를 불러왔고, 결국 북부에서 기회를 엿보던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공격을 받고 말았다. 1127년, 송나라 휘종과 수도 변경이 금나라에 함락되어 잡혀갔고, 송나라의 유신들은 남쪽으로 후퇴하여 남송을 세웠다. 13세기에는 몽골족들이 크게 발흥하여 중국을 침입하였다. 1271년, 몽골의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를 세웠고, 1279년에는 송나라의 잔재를 모두 부수었다. 몽골 침략 이전에 많았던 송나라의 인구는 학살로 인해 급격히 줄어 들었으나 경제, 군사적으로 황금기를 맞았다. 그러나 원나라는 지나친 인종주의와 차별 정책으로 한족의 반발이 심했다, 1368년에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웠다. 하지만 남왜북로에 의해 남쪽에는 왜구의 침략이 심하였고 북쪽에서는 이민족의 침략이 심하였다. 명나라 초에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수도를 천도하기도 하였다. 왕양명과 같은 유학자들은 정통 유학을 비판하고 개인주의와 실용주의와 같은 가치들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후기에는 황제들이 국정을 방만하게 운영하자 신료들이 힘을 얻어 관료제적 요소가 강해지기도 하였다. 다만 명나라는 임진왜란에 군대를 파병하고 만주족들이 침입해오며 점차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1644년에 베이징은 이자성이 이끄는 반란군에 점령당했고, 만주족이 후금을 일으켜 이자성을 죽이고 베이징을 점령하자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자금성 경산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이후 수백년간 만주족이 중국을 식민 지배하였다. 청나라는 1644년부터 1912년까지 지속하였으며, 중국의 마지막 왕조 국가였다. 청나라 초기에 명나라의 잔재들을 정복하였고, 명나라의 2500만 명의 한족들을 학살하였다. 마지막 남명까지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시킨다. 변발 등 만주족의 문화를 한족들에게 강요하였고 한족들의 반청 감정을 완화하기 위하여 상업을 장려하고 농업을 촉진,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였다. 청나라는 문자의 옥을 일으켜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문학들을 불태우거나 탄압하였는데, 이 때문에 기술과 문학의 발전이 정체되기도 하였다. 19세기 중반부터 청나라는 아편 전쟁을 통하여 프랑스와 영국 등 서구 열강들과 갈등을 겪었다. 이 때문에 치외법권, 홍콩 통치권 등을 임대할 수 밖에 없었으며 불평등 조약들을 연이어 맺으며 국력을 깎아 나갔다. 게다가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는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으며, 일본에게 타이완섬을 주어야만 하였다. 청나라는 점차 불안정해졌고, 수 천만 명의 사람들이 특히 백련교의 난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었다. 게다가 1850년대에는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며 중국 남부에 대대적인 소요가 일어났고, 결국 청나라도 1860년대에 자강변법 운동을 통하여 개혁을 실시하였으나 결국 1880년대와 90년대에 군사적인 패배를 겪으며 실패로 드러나고 말았다. 19세기, 1876년에 대기근이 발생하며 청나라는 점차 멸망의 길로 빠져들었다. 대략 9백만 명에서 1300만 명의 사람들이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광서제는 입헌군주정을 만들기 위한 개혁정책을 실시하였으나, 보수적인 서태후의 반대로 실패하여 유폐되었고 게다가 의화단이 일어나며 청나라의 국력은 갈수록 약화되었다. 서태후도 나중에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개혁을 실시하려 하였으나, 1911년에 신해혁명이 발발하며 결국 청나라도 멸망하게 되었다. 공화국. 1912년 1월 1일에 쑨원의 주도로 중화민국이 건국되었고, 국민당은 중국 대륙의 임시 정부를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후 중화민국의 주권은 옛 청나라의 장군이었던 위안스카이에게 넘어갔고, 위안스카이는 중화제국을 세우며 황위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국민들 사이에서 원망이 들끓고, 그의 세력 기반이었던 북양함대에서조차 반대 의견이 강해지자 결국 퇴위하였고 공화정을 재창립하였다. 1916년에 위안스카이가 죽은 이후, 중국은 정치적으로 갈래갈래 나뉘었다. 베이징에 수도를 둔 중화민국은 국제적으로는 정당한 합법정부로 인정받았으나, 실제로는 유명무실한 상태였고 군벌들이 각지에서 주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렇게 혼란과 소요가 지속되던 중, 1920년대 후반에 장제스의 지휘 하의 중국국민당이 북벌을 실시하여 중국을 재통일하였다. 국민당은 수도를 베이징에서 난징으로 옮겼고, 쑨원의 삼민주의에 근거한 개혁을 실시하여 중국을 현대적인 민주공화국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도움을 받은 공산당들이 산악 지역에서 힘을 키우며 준동하기 시작하였고, 1927년부터는 본격적인 내전이 터져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대적으로 충돌하였다. 초기에는 국민당이 승기를 잡았고, 중국공산당은 대장정을 통하여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제국이 중국 본토를 침략하였고 장제스는 이에 맞서기 위하여 국공합작을 벌여 공산당과 손을 잡았다. 제2차 중일전쟁은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불안정한 연합을 구성하게 내몰았다. 이 전쟁에서 일본 군대는 수많은 전쟁 범죄들을 저질렀으며, 총 2천만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하는 등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참극을 벌였다. 특히 난징 대학살 때에 일본군은 4만 명에서 30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피바다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 시기, 중국의 대표권은 장제스와 국민당에게 있었으며 중국은 영국, 미국, 소련과 함께 세계의 4대 국가로 일컬어졌다. 1945년에 드디어 일본이 패망한 이후, 타이완섬 등이 중국에게 되돌아왔다. 중국은 승전국이었으나 오랜 전쟁과 내분으로 피폐해진 상태였고, 게다가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곪은 불화가 일본이라는 공적이 사라지자 드디어 폭발하며 본격적인 내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국민당 주도의 중화민국은 1947년에 헌법을 제정하였으나, 워낙 사태가 불안정하여 헌법 규정 대다수가 중국 본토에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역사. 1949년 즈음에 이르자 국민당은 고질적인 부정부패, 비효율적인 전술 등으로 인하여 공산당을 상대로 패색이 만연해졌고, 공산당은 곧 중국 본토 전역을 장악하였다. 국민당 주도의 중화민국은 결국 국부천대를 통하여 본토를 버리고 타이완섬으로 도주하였다.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에선 만주족과 몽골족 그리고 한족의 인구가 비슷하였다. 인구 80% 이상이 아무런 족보에도 해당되지 않는 백성이였다. 공산당은 아무런 "족"에도 포함되지 않는 인구 80%를 한족으로 편입시켰기 때문에 현재는 한족이 인구에 가장 많다.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서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공식 선언하였다. 이 날을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절이라고 한다. 1950년에는 국민당이 차지하고 있던 하이난섬을 점령했으며 중국 본토 대부분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해 마오쩌둥은 “5억 중국 인민이 분연히 일어나 혁명을 이룬 만큼 국가 건설의 과제를 달성하는 데 매진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혁명에 성공한 마오쩌둥은 이른 시일 내에 온전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조급증에 시달리게 된다. 중국공산당은 거의 1백만~2백만 명의 지주들의 땅을 몰수하고 그 토지들을 농민들에게 나누어주며 큰 호응을 얻었으며 독자적인 산업 정책을 펴고 핵무기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중국의 인구는 1950년대에 5억 5천만 명이었던 데에서 1974년에는 9억 명에 이르렀다.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은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추진하면서 인민공사와 전국적인 대약진 운동을 실시하였는데, 중국의 현실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진행된 급진적이고 무모한 대진 운동은 농촌부의 황폐화로 인해 식량난과 3천 5백만 명에 달하는 대량의 아사자를 발생시키며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 후 경제를 재건할 방법으로 마오쩌둥과 류사오치가 대립하였고, 마오쩌둥은 권력 탈환을 위해 문화 대혁명을 일으켰다. 혁명 중 마오쩌둥으로부터 반혁명파로 규정된 많은 사람이 탄압당하거나 학살되어, 국내는 일시 내란 상태가 되었다. 또 중국 각지의 귀중한 전통 문화재도 반혁명적인 존재로 간주되고 파괴되었다. 문화 대혁명은 1976년에 마오쩌둥의 죽음과 함께 종결되었다. 한편 1971년 10월에는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이 본래의 국민당 주도의 중화민국을 밀어내고 국제연합에서 중국의 대표권을 찾아갔으며, 상임이사국 지위도 함께 획득하였다. 마오쩌둥이 죽은 직후, 4인방이 마오쩌둥 대신 문화대혁명의 책임을 지고 체포되었고, 화궈펑이 그의 뒤를 이었다. 화궈펑 이후에는 덩샤오핑이 1978년에 권력을 잡았고, 대대적인 경제 개방, 개혁 정책을 실시하였다. 덩샤오핑의 개혁 정책과 함께, 소련의 붕괴 이후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은 더욱 자유롭게 미국과 서방 세력에 개방적인 정책을 펼 수 있었다.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은 중국공산당의 일당 독재 체제를 견지함과 동시에, 혼합경제를 도입하는 등 경제 개방 정책을 실시하여 중국의 현대화를 진행했고 이를 계기로 중화인민공화국은 경제가 빠르게 발전했다. 다만 경제의 민주화와 함께 정치의 민주화에 대한 목소리도 함께 높아졌는데, 1989년, 중국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를 억압하며 천안문 사건을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세계 각국의 지탄을 받았다. 장쩌민, 리펑, 주룽지 등의 지도자들이 1990년대 중국을 이끌었다. 중국은 이 시기에 눈부신 경제 성장을 보여 1억 5천만 명에 달하는 빈민들을 가난에서 구제하였으며, 매년 11.2%에 달하는 기록적인 경제 성장률을 보였다. 2001년에는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였으며, 2000년대에도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주석의 영도 하에 높은 경제 성장률을 유지하였다. 허나 지나치게 빠른 성장은 자원과 환경을 심각하게 고갈시켰고, 사회적 빈부격차와 불안정과 같은 부작용들도 함께 불러왔다. 중화인민공화국은 2010년에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올라섰고, 1인당 GDP는 4,000달러를 넘기는 데에 성공하며 기존의 계획보다 10년보다 앞당긴 시점에 목표를 이룩하였다. 현재의 지도자인 시진핑 주석은 2012년부터 집권하고 있다. 시진핑은 주석의 3연임을 금지하는 헌법을 폐기하며 장기 집권의 길을 열었으며, 집권 초기부터 실시한 반부패 운동을 통하여 정적들을 숙청하고 1인 독재의 지위를 굳히고 있다는 평가를 대외적으로 듣고 있다. 한편 시진핑 시대 해외 중국 외교관들의 무례한 언행과 공격적인 태도는 타국에게 ‘전랑 외교’ 또는 ‘늑대 외교’라고 불리며 타국민들의 비판을 사고 있다. 2019년 12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COVID-19)가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발원하였고, 중국의 다른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결국에는 전세계로 대대적으로 번지며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이어졌다. 생활. 중국 학계에선 환경의 생활방식의 일부분일 뿐인 것을 마치 민족을 유목민족, 농경민족으로 나눠 한국과 일본도 농경민족으로 나누는 동북공정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많은 민족들이 농경을 하다가 유목으로 발전하였고 이후 다시 정주하며 농경을 한 적이 많기 때문에 생활방식으로 농경민족, 유목민족 농경국가, 유목국가로 나눌 수가 없다. 또한 한국이나 일본도 농경생활이 퍼졌지만 귀족층은 소작을 하지 않고 유목적 생활을 하였다. 또한 선비족, 투르크, 퉁구스는 지역에 따라 농경생활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현재 몽골공화국의 경우 농경지 부족으로 유목을 주로 하고 있어 이들이 역사적으로 유목만 하였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정주하여 농경을 하게 된 민족이라고 해도 귀족층은 유목적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유목민족, 농경민족을 마치 다른 민족으로 나누는 것은 잘못된 중국 학계의 방법이다. 지리. 중화인민공화국의 면적은 9,596,961 km2이며 2015년 11월3일 러시아로부터 아편전쟁 시기 러시아에 할양했던 4.7km2의 영토를 반환받아 중화인민공화국의 면적은 9,596,965.7 km2로 확장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유라시아 대륙 동부에 있다. 국경은 총 22,117km로, 국경이 세계에서 가장 긴 국가이다. 북동쪽으로 러시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조선, 북한), 북쪽으로 러시아, 몽골,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남서쪽으로는 히말라야 산맥을 경계로 남아시아의 네팔, 부탄, 아프가니스탄, 인도, 파키스탄과 접하며, 남쪽으로는 동남아시아의 라오스, 미얀마, 베트남과 접한다. 해상으로는 황해를 사이에 두고 대한민국, 동중국해를 사이에 두고 일본, 타이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중화민국과 접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상당히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으므로 지방마다 기후 등 지리 특색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지형은 서고동저로 동쪽에는 화베이 평원과 둥베이 평원 등의 평지가 있고, 서쪽에는 티베트 고원, 톈산 산맥 등의 험준한 산지가 많다. 중국에서 가장 높은 곳은 티베트 자치구에 위치한 에베레스트 산(주무랑마 봉)으로 높이는 8,850m이다. 가장 낮은 곳은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에 위치한 투르판 분지로 높이는 -154m이다. 정치.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당시에는 정당, 정파, 군, 기타 개인 등으로 구성된 인민정치협상회의가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을 탄생시킨 모체로서 국가권력기관의 핵심을 이루었으나 사실상 공산당의 절대우위가 인정되었고 1954년 이후에는 공산당이 정치권력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1949년 임시 헌법인 공동 강령의 채택 이래 중화인민공화국의 헌법은 1982년까지 4차의 개정을 거치는 동안 국가권력기관·인민해방군에 대한 권력구조 조정작업이 수반되었다. 헌법에 의하면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원수는 국가주석이고 최고권력기관은 전국인민대표대회으로 국가주석은 의전상의 지위에 지나지 않으나, 전인대 역시 공산당이 우위에 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총서기·정치국·군사위원회 주석)에 정치권력이 집중되어 있다. 형식적으로는 당과 정부는 동등한 권력을 가지나, 중국공산당은 정부보다 높은 위치에 있으며 실질적으로는 당 위원회와 당의 대표가 정부 요인 뿐만 아니라, 대학교 총장과 외국계 기업의 대표를 포함한 국가의 거의 모든 조직과 기관의 대표를 구성하게 된다. 명목상 중국공산당의 최고 지위는 총비서이고 이에 대해 전국인민대표회의가 통제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57조에 따라 전국인민대표회의를 중국 최고권력기관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가장 높은 직책을 전인대에서 선출된 의장과 부의장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전인대는 국무원과 공산당 위원회에 종속되어 있다. 실제로 국정을 움직이는 중심에는 공산당이 있으며, 당의 최고 지도집단인 정치국이 있고 정치국안에 상설집행기관인 정치국 상무위원회(政治局常務委員會)가 권력을 장악하는 구조이다. 중국공산당은 중앙뿐만 아니라 말단 행정기구까지 장악한다. 지방행정기구 역시 중앙과 같은 체제를 갖추고 있으며 각급 지방 행정기구는 해당 지역 공산당 서기가 실력자이며 공산당 부서기인 장이 행정을 관리한다. 형식적으로는 최고 기관인 전국인민대표대회(全國人民代表大會)에 권력이 집중되는 민주집중제를 취한다. 전국인민대표대회는 서구의 의회에 상당하는 기구로 32개의 성, 자치구, 직할시, 홍콩 특구 및 인민해방군에서 선출되는 대표로 구성된다. 헌법의 개정과 헌법 실시, 감독 및 기본 법률을 제정, 개정하며 국가 주석과 부주석을 선출하고, 국가 경제, 사회 발전 계획 및 진행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고 심의, 비준한다. 산하의 상무위원회가 소집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 중국의 인민대표는 18세 이상의 중국 공민에 의하여 선출되는데, 인민대표는 직접선거를 거쳐 선출되지만, 인민대표의 상위 직책은 간접으로 선출된다. 전국인민대표대회의 대표들은 성급인민대표들의 선거로 선출된다. 사실상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제 체제로 유지되고 있으며, 그 외에 민주제당파라는 8개의 정당이 존재하지만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위성정당으로 사실상 정치적인 영향력을 거의 갖지 못한다. 국가 주석은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선출하며, 임기는 5년으로 2회를 초과하여 연임할 수 없다. 국가주석은 국내외에 국가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며, 법률을 공포하고, 총리, 부총리, 국무위원, 각 부장, 각 위원회 주임, 국무원 비서장을 임명한다. 하지만 2018년 3월 11일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헌법에 국가주석 임기를 폐지하였다. 총리가 수장인 국무원은 전국인민대표회의의 집행기관으로 법률에 근거한 행정법규 및 명령을 제정, 공포한다. 인민 경제, 사회 발전 계획을 수립하고 국가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한다. 인민검찰원은 중국 최고 검찰기관으로 지방의 각급 인민검찰원과 전국인민검찰원의 활동을 지도한다. 전국인민대표회의와 상무위원회의 감독을 받는다. 홍콩과 마카오의 일국양제. 1997년 영국에서 반환받은 홍콩과 1999년 포르투갈에서 반환받은 마카오는 고도의 자치권을 가지고 다른 체제 하에 유지되며, 입법부의 일부 의원은 직접 선거로 선출된다. 이러한 자치 체제를 일국양제라고 한다. 그러나 홍콩인들과 마카오인들은 리보실종사건 등의 발생을 보며 지켜지지 않는 일국양제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특히 현재 홍콩같은 경우는 독립을 주장하는 본토주의가 유행할 정도이다. 타이완. 타이완은 청나라 때 중국의 영토였다가, 일본과 청·일전쟁에서 진 후 센카쿠 열도(중국명:댜오위다오)와 타이완섬을 일본에 할양하였다. 이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국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이 1912년에 수립되었으나, 워낙 국내 상황이 혼란스러웠던 탓에 제대로 된 통치를 하지 못했으며 타이완섬 등도 여전히 일본의 영향권 내에 속해있었다. 그러던 중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전쟁에서 무조건적인 항복으로 패망하자, 타이완섬은 당시 중국 대륙을 지배하던 국민당의 중화민국에 다시 편입되었다. 그러나 1945년부터 1949년 사이에 일어난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이 중화민국 정부를 쫒아내고 대륙을 점거하였고, 한때 중국 전역을 다스리던 합법 정부인 중화민국과 장제스를 위시한 정부 수반들은 공산당을 피해 타이완섬으로 도피, 즉 국부천대를 하였다. 이후 마오쩌둥은 1949년 10월 1일에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였으나, 정작 1970년대까지는 미국을 포함한 다수의 서양 국가들과 국제 사회는 국민당의 중화민국을 중국의 유일 합법 정부로 인정하고 있었으며 UN에서의 상임이사국 지위도 중화민국이 여전히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1971년에 베트남 전쟁을 겪으며 외교적 돌파구가 필요했던 미국과, 국제적 고립에서 탈피하고자 했던 중화인민공화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자 그해 10월 25일에 2758호 결의안으로 중화민국의 중국 대표권을 탈취해갔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은 90년대 이후로 경제 개방 정책을 펴며 국력을 급격히 신장시켰고, 이 증대된 국력을 이용하여 중화민국을 외교적, 국제적으로 압박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하나의 중국 정책을 주장하며 중화민국의 국체를 인정하지 않으며, 현재 타이완섬의 중화민국은 옛 중화민국의 참칭 정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대로 중화민국 측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을 반란 세력으로 보고 있으며, 여전히 중국 대륙의 합법적인 정부는 중화민국이라고 주장하면서 양안 관계는 아직까지도 안정을 찾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행정 및 행정 구역.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고행정기관은 국무원으로 즉 중앙인민정부이다. 국무원은 내정, 외교, 재정, 경제, 문화, 교육, 위생, 공공사업 등 행정사무를 조직하고 관리하여 행정결정과 명령을 반포하고, 전국 지방 각급 국가행정기관의 사업을 통일적으로 지도한다. 국무원은 총리, 부총리, 국무위원, 각 위원회 주임, 각부부장, 심계서 계장, 비서장으로 구성된다. 28개의 부서로 조직되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은 22개의 성(省), 5개의 자치구(), 4개의 직할시(), 2개의 특별행정구()로 구성된다. 이 중에서 특별행정구(, )를 제외한 지역을 중국 대륙(; 중국 본토)으로 칭한다. 사법. 중화인민공화국은 아직까지 사법부의 독립성이 확보되지 않아서, 사법 절차에서 자백을 얻기 위한 고문, 영장 없는 자의적인 체포 등의 인권 유린이 발생하기도 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현대법은 1949년 당시 초강대국이던 소련 법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형성되었고, 1979년 이후 경제 현대화 과정에서 미국과 유럽 등지의 투자에 발맞추기 위해 새로운 법안들이 통과되고 있다. 외교. 소련이 붕괴되고 소련의 지배적인 영향력에서 자유로워진 중화인민공화국은 자유 경제 체제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세계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 1950년 5월 9일 스웨덴이 서방 국가로서는 최초로 중화인민공화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외교에 있어서 특필해야할 것은 분단국가인 중화민국에 대비하여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스스로를 "중국의 정통한 정부"라고 하고 있는 점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냉전 구조 하에서, 건국 당초에는 완전히 동측 진영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 사후의 중소 대립을 거쳐, 1964년 1월에 프랑스와 수교한 이후, 1979년 1월 1일부터 미국과 수교하는 등 서방 측과의 관계 회복을 이루고, 동시에 중화민국을 대신하여 유엔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또한, 냉전 하에 있어서 서방측 여러나라와 소련과의 대립 관계의 미묘한 밸런스의 중간에서 , "중국을 대표하는 정당한 정부는 중화민국이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이다"라는 기정 사실을 서방측의 다수 국가로부터 확인받아 하나의 중국 정책도 성공을 거두었다. 1989년 소련의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함으로써 소련-중국 간의 오랜 원한이 종지부를 찍었다. 1978년부터 시작된 경제개혁 이후부터 경제 면에서의 민주주의인 여러 나라와의 관계도 강화하고, 2001년에는 세계무역기구에도 가맹하였다. 우크라이나는 1992년경에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 한 것으로 보인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타이완을 자국 영토로 간주하고 ‘하나의 중국’이라는 사상을 내세워 타이완을 실효적으로 통치하는 중화민국 정부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중화민국을 승인하는 국가와는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UN 회원국 중 22개국(바티칸은 준회원국)은 중화민국을 승인하고 있고, 부탄은 중화인민공화국 및 중화민국 모두와 외교관계가 없다. 폴란드는 1949년 10월 5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고, 양국은 10월 7일 대사급 외교 관계를 맺었다. 외교 문제. 중화인민공화국과 일본은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가 각각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중화민국도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가 타이완 성에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인도의 아루나찰프라데시 주 북부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고, 인도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점령한 아크사이친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중화인민공화국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중화민국도 아루나찰프라데시와 아크사이친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서는 이어도와 파랑초 문제가 놓여 있다. (중국 이어도 도발) 그 외에도 남중국해에 있는 남사군도와 서사군도 문제도 있다. 예전에는 소비에트 연방과 중소 국경 분쟁이 일어났다. 하지만, 1991년 5월 16일에 체결된 중소 국경 협정으로 양측은 이들 섬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라는 것에 합의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경에 있는 백두산 일대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영유한 일부 지역에 대해 대한민국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백두산을 장백산이라고 부르면서 북한 땅을 흡수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은 각각 상대방의 영토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중화민국은 몽골도 중화인민공화국이 독립을 허용했다는 이유로 몽골 지방이라 부르며 몽골 국토 전체까지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서 동북공정이 대표적인 외교 분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부여와 고구려, 발해를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베트남, 몽골 등 주변의 이웃 국가와도 역사 문제로 서로 대립하고 있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은 내몽골 자치구에 칭기스칸의 묘를 만들어 몽골의 역사를 왜곡하기도 했다. 타이완 문제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간에 벌어지고 있는 문제이다. 대외 정책. 1970년대 이전, 국제사회가 공산주의 혁명과 전쟁의 시대에 놓여있다고 인식하고 전쟁이 필연적이라고 생각했던 마오쩌둥 중심의 대외정책이 그런 상황에서 우방인 소련과의 전쟁을 막기위한 동맹정책이었다면, 마오쩌둥 사망부터 1991년 소련 붕괴 전 덩샤오핑와 장쩌민 중심의 대외정책은 국제사회가 평화의 발전 단계에 놓여있으며 전쟁은 피할 수 있다는 인식에서 독립자주 비동맹정책을 고수하는 대신 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국가이익을 중시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소련 붕괴 이후 기존의 군사적 위협보다 정치, 경제, 사회적 위협이 증가하자 장쩌민은 전통적 안보위협요인에만 주목하는 기존의 안보관이 아닌 신안보관을 주요 안보정책의 기조로 활용하게 되었다. 군사. 헌법상 중화인민공화국의 군대는 국가(정부)의 군대가 아닌 당의 군대이다. 따라서 군대의 정식 명칭은 ‘중국군’이 아닌 ‘중국 인민해방군’이다. 과거에는 징병제였으나, 현재는 경제발전과 인력의 고급화로 인하여 실질적인 모병제로 운용하고 있다. 현역병이 2,285,000명이다. 전차 7,470대, 전투기 4,092대, 전함 562척을 보유하고 있다. 조만간 러시아를 제치고 세계 군사력 순위 2위의 차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현재 중국은 러시아의 T-72를 개량한 '99식'전차를 주전차로 사용하며, IL-28이라는 구형 폭격기를 보유하고 있다. 숫자만 많고 약하다고 무시당하던 중국인민해방군은 현대화로 해군·공군 및 사이버·위성 전력을 크게 확대하고 러시아의 쿠즈네초프 항공모함을 사들여 강력해지고 있다. 이에 대한민국, 일본, 몽골, 필리핀, 베트남 등은 국가안보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 경제. 1978년에 덩샤오핑의 주도 하에 개혁적인 경제 정책을 실시한 이래 최소 6%를 상회하는 경제 성장률을 보여주고 있으며, 미국 뒤를 이은 제2의 수입국이기도 하다. 2010년과 2019년 사이, 중국의 세계GDP 차지비율은 25%에서 39%로 급격히 상승하였다. 1978년의 대대적인 개혁 이래, 중국은 다원화된 경제 구조를 가지고 세계 무역에 가장 활발히 참여하는 국가로 떠올랐다. 특히 상대적으로 저렴한 노동력을 활용하여 제조업 분야에서 강세를 보이며, 그 외에도 소매업, 광산업, 철강업, 직물업, 자동차 산업, 발전업, 은행업, 전기업, 통신업, 부동산업, 관광업 등에서 크게 발달하고 있다. 중국에는 세계의 10대 주식 거래소들 중 3개가 위치하는데, 크게 상하이, 홍콩, 선전 주식 거래소가 있다. 이 거래소들을 합치면 2019년 기준으로 10조 달러에 이르는 자본금을 자랑한다. 중국은 전기 차량 제조업 국가이기도 하며, 2018년 기준으로 전세계 플러그인 전기차의 50%를 사들였다. 2018년 말 기준으로 중국은 174GW 용량의 태양량 발전을 가동하고 있으며, 전세계 태양량 발전량의 40%를 차지한다. 중국은 1978년 이래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의 사람들을 빈곤에서 구제하였는데, 1981년에 1.9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율이 88%였던 것에 반하여 2013년에는 이를 1.85%로 줄이며 8억에 가까운 사람들을 구제해낸 것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중국 극빈자들의 수는 1990년과 2013년 사이에 7억 5천6백만 명에서 2,500만 명으로 줄었다고 전한다. 게다가 현재에는 극빈자를 규정하는 기준도 훨씬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적인 빈곤율은 2017년의 3.1%에서 2018년에는 1%로 줄었다. 경제사. 경제발전시기. 중화인민공화국은 농업을 중심으로 한 대생산국으로 특히 1949년 정부수립 후 각종 산업의 생산고가 점차 증가일로를 걸어왔다. 제2차세계대전 후 중화인민공화국의 산업·경제의 발전단계는 을 착수했으나 결함이 노출되어, 1979~81년의 경제조정기를 거쳐 1986~90년의 제7차 5개년계획에 이어 2010년까지 제9차 5개년계획에 들어갔다. 경제부흥기. 이들 각 시기의 특징은, 경제부흥기에는 1952년에 이미 전전의 최고생산고에 도달하여 문자 그대로 경제재건에 성공했고, 제1차 5개년 계획기(1953~57년)에는 소련의 원조로 중공업의 확충이 단행되었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말기에는 (a) 중공업의 중시와 농업의 경시, (b) 중공업 편중, 경공업 경시, (c) 대규모화·기계화의 무리한 목표설정에서 오는 자금의 낭비와 국내기술의 부실, (d) 공업의 내륙편중 등의 결함이 노정되었다. 대약진 운동. 1958년에 시작된 제2차 5개년계획(대약진운동)에서, 마오쩌둥 전 주석의 정책으로 계획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했다. 경제부흥기의 미해결문제의 해결을 위해 (a) 농업과 지방공업, (b) 경공업과 중공업, (c) 중앙공업과 지방공업, (d) 대규모 공업과 소규모 공업, (e) 재래식 생산과 외래식 생산의 조화를 지향했고, 이 기간중 공업생산 증가율은 40%에 달했다. 그러나 공업발전은 내용적으로 극히 불건전하여 (a) 생산품이 품질조악으로 사용가치가 적었고, (b) 재래식 생산 방식은 원료, 노동력, 연료의 낭비를 초래했고, (c) 기술문제가 등한시되었기 때문에 사고의 발생률이 높았으며, (d) 공업부문의 균형적 발전이 저해되었다. 인민공사. 농촌을 현대화시키기 위해 1958년부터 인민공사가 조직되었다. 소위 대약진기라는 이 시기에 이어 1959~61년에 걸친 연속적인 자연재해로 인민공사에 대한 회의가 고개를 들어 농업생산은 크게 줄고 공업원료는 부족하여 경공업생산도 그 파급으로 타격을 입는 등 농·공 사이의 균형이 크게 문제가 되고 게다가 1960년 7월 국경 분쟁으로 인한 중·소대립의 악화로 소련의 공업전문가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고 소련의 무상원조, 자재지원도 중단되어 심각한 경제위기가 찾아들었다. 경제조정기. 그래서 1961년부터는 경제조정기가 시작되어 농업재해, 대약진의 실패, 소련의 원조중단 등에서 온 위기를 극복하는 데 노력이 집중되었다. 1961년에는 조정·공고화·충실·생산제고 등의 목표로 정책이 전환되어 공업의 규모는 대폭 축소되었다. 1962년부터 농업생산이 호전하여 경제 전반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같은 해에는 농업, 경공업, 중공업의 순차적인 발전이 도모되어 공업의 위치가 2차적인 것이 되었으며 공업구조 내부의 조정이 중시되었고, 농업 지원도의 재고로 공업의 내적 충실화가 모색되었다. 현대공업체제. 3차 5개년계획(1966~70년) 실시 이후 독립되고 거의 완전한 근대공업체제의 건설단계에 들어갔다. 1967년 이후 홍위병 난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각종 산업, 특히 광공업 부문에서 생산이 상당히 저하했다. 중국의 산업건설의 기본방향은 농업을 기초로 하고 광공업에 선도구실을 시키려는 것인데, 1968년 이후 홍위병 난동이 수습단계에 들어가면 생산도 다시 호전의 기미를 보였다. 결국, 국가 성립 후 1970년대 중반까지의 경제는 대약진정책의 실패와 문화대혁명에 의하여 뒤떨어져 있었다. 개혁개방. 1978년에는 경제발전 10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4개 현대화에 착수했으나 각종 누적된 결함이 노출되어, 1979년 조정방향이 설정되면서 본격적인 개방과 개혁정책이 건의되었다. 1980년초에는 기업의 자율화, 외국기업의 투자 보강, 금융의 자율화, 세제 도입 등의 조치를 단계적으로 채택한 후, 1984년 대규모 경제개혁이 채택되었다. 이에 1985년 인플레와 과열경기현상이 나타났고, 1986년 4월 안정과 균형에 기저를 둔 지속적 성장을 목표로 한 제7차 5개년계획(1986~90년)을 채택했다. 세계의 공장. 덩샤오핑에 의한 자본주의 경제제도 도입 등의 개혁 개방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경제는 급속히 발전하여 ‘세계의 공장’이라고도 불리고 있다.세계무역기구(WTO)의 발표로는, 2003년의 대 중국 직접투자는 535억 달러가 되어 미국을 제치고 실질적으로 세계 최대의 직접투자 수입국이 되었다. 세계 최대의 인구와 강한 경제력 덕분에 중국 경제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 국내 노동자들은 연안부나 대도시 근교를 제외하면 지방 인민의 대다수가 아프리카 여러 나라와 동일한 정도의 빈민층이며, 농업을 할 수 없는 계절에 도시 지역에 유입되어 객지에서 노동하고 있다. 그들은 매우 저렴한 임금으로 도시 지역에서 일하기 때문에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값싼 노동력을 목적으로 미국, 서구나 대한민국·일본의 기업 진출도 번성하여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릴 정도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에서도 대한민국에 무역 사무소를 개설하는 등 외국 기업 유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경제위기가 가속화되고 있는 점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은 내년 경제성장률을 8.5%로 예상하였다. 다른 나라인 인도 역시 경제성장률을 6.3%로 큰 폭으로 예상하였다. 농업. 중국에는 농사를 짓기에 편리한 3대 평야가 있는데, 호북평야, 호남평야, 사천평야이다. 지역별 농업. 중화인민공화국의 국토는 신석기 시대에 이미 경작되어 있었고, 경지도 널리 분포해 있어 각지의 토지 이용이나 농업 경영방식은 지역별 자연조건이라든가 사회환경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난다. 중국인 학자들과 함께 치밀한 현지조사를 한 로싱백은 화이허(淮河)와 친링(秦嶺)선에서 수도(水稻)지역과 소맥(小麥) 지역으로 크게 둘로 나누고, 나아가서 다시 소맥지역을 창장(長江)수도 소맥구, 쓰촨 수도구, 수도·차(茶)구, 서남수도구, 수도 2기작구(二期作區)로 세분하고, 한편 북부의 소맥지대를 겨울보리·수수구, 겨울보리·조구, 봄보리구로 구분했다. 전통적인 농업방식. 이러한 지역구분은 주변 지대로의 확대도 가능하여 동북지구를 콩·수수구로 보고 내몽골 지방과 티베트 및 칭하이 지방을 목축구로, 타이완섬과 하이난섬을 2기작구로 볼 수도 있다. 종래 중화인민공화국의 농가는 주로 자급용기의 곡물과 콩 종류를 재배하고, 여력이 있으면 판매용 작물을 길렀다. 수도(벼)는 기온이 높고 강우량이 많은 화이허 이남에서 주로 생산되는데 특히 광둥·푸젠 양성(兩省) 연해 지방은 이모작이 가능하다. 쌀. 쌀의 총생산량은 17,825만t(1994년 기준)으로 방글라데시에 이어 세계 제2위이지만 국내소비가 많기 때문에 수출은 소량이다. 밀. 소맥(밀)은 중국본토 북부와 동부지구 북부를 중심으로 하며 화이허와 양쯔강에 연하여 평야지대에서도 제2기작으로서 재배된다. 산시(陜西), 산시(山西) 북부에서 옌산산맥 북서에 걸치는 지방에서는 기후가 한랭한 관계로 춘경보리가 재배된다. 총생산 3,200만t(1994년 기준)으로 만주, 바오즈 등을 주식으로 하기 때문에 대부분 국내에서 소비된다. 고구마. 고구마는 산둥, 허베이, 허난에서 재배되고 조, 수수 등은 동북과 화북의 평야 및 쓰촨 분지에서 많이 산출된다. 옥수수. 옥수수는 랴오둥반도, 황하 이북의 후베이(湖北)평야, 산시·산시의 남부에서 쓰촨에 걸치는 지대에서 많이 나는데 식량과 사료로 쓰인다. 콩. 콩은 둥베이 평원과 산둥 반도에서 많이 나오는데 총생산고는 약 1,212만 t이다.면화는 랴오허강 하류의 평야에서부터 후난(湖南, 쓰촨, 구이저우(貴州)의 각 성에 이르는 지역에 분포해 있으며 허베이 평야지대, 산시·산시의 남부, 후난, 장쑤, 안후이, 후베이의 제성이 그 생산 중심이 되어 있다. 면화. 면화는 관개작물로 결실기의 건조한 기후가 양질의 작물을 낳는다. 가축. 가축은 돼지, 닭, 오리 외에 노력과 배료원으로서 나귀, 노새(밭농사지대), 소, 물소(수전지대), 말(초원지대) 등이 많으며 양은 식육 및 모(毛) 자원으로서 동북지구, 내몽골 지방, 신장·위구르 지방, 티베트 등 변경 지대에서 많이 사육된다. 문제점. 중화인민공화국에는 고도 경제 성장의 이면에, 농업의 저생산성, 농촌의 황폐, 농민의 저소득이라는 3농 문제가 심각하여 경제성장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도시와 농촌의 수입격차가 계속 확대하면서 토지 수용에 과한 쟁의도 빈발한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농업생산진흥책과 농업세의 폐지 등에 열의를 보여서, 2007년 3월의 제10기 전인대 제3회 회의에서는, 물권법을 제정하여 토지사용권의 물권화를 인정하고 농촌대책비를 긴급 증편하여, 농촌의 의료와 교육에 대한 보조금의 증액을 결정하였다. 공업. 2차대전 전의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업 분포는 일본이 지배했던 동북지구와 함포(艦砲) 외교 아래 열강이 투자한 연해 지역·대하천 유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일 전쟁이 1937년에 발발하면서 국방상의 배려로 공업이 내륙지방으로 소개되고, 또 전후에는 공업의 적정재배치가 단행되어 종래의 공업 편재상은 상당히 수정되었다. 전전 동북지구의 안산 벤시후를 비롯해 허베이, 산시, 쓰촨, 후베이 등지가 중심이 되었던 제철·제강업은 전후 기간산업으로서 중요성을 더하여 우한, 바오터우 등지에 거대한 철강공업 기지가 신설되었다. 중기계공업을 보면, 광산·야금기계가 타이위안, 선양, 치치하얼 등지에서, 발전기가 상하이, 하얼빈 등지에서, 그리고 정유기계가 란저우에서 제조되고 있다. 중형 기계공업으로는 방직기계가 위츠, 상하이, 칭다오 등지에서, 조선(造船)이 뤼다, 상하이 등지에서, 철도 차량이 뤼다, 치치하얼, 칭다오 등지에서 자동차가 장춘, 뤄양, 정밀기계가 상하이, 하얼빈, 샤먼, 염료·의약품이 상하이에서, 비료가 난징에서 생산되고 있다.전전(戰前)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업은 경공업 위주였는데 특히 방적업이 성한 톈진, 칭다오와 면방직이 성한 상하이, 우시, 난퉁 등 양쯔강 연안의 여러 도시가 그 중심이 되어 있었다. 전후(戰後) 상하이의 면방직공장이 확충되고 면화지대인 스자좡, 한단, 정저우, 시안, 셴양, 우한, 우루무치 등지에 대공장이 건설되는 등 내륙의 원료 산지로의 공업 진출이 활발하다.식품공업은 전전 상하이, 칭다오 등지가 중심이 되어 연초가공, 제분, 육류가공, 양조 등이 성했는데 전후에는 유류(乳類)를 가공하는 대공장이 하이라얼, 시닝에, 육류가공공장이 우한·청두에 건설되고 또 상하이로부터 이전한 방푸의 일용품공업이나 뤄양의 제분·착유공업도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동북지구는 유지·제당, 본토 북·동부는 제분·연초·유지·남부는 제당으로 각각 알려져 있다. 무역. 2017년 기준으로 중국의 주요 수출 상대국은 미국 (19.01%), 홍콩(12.34%), 일본(6.06%), 한국(4.54%), 베트남(3.16%)이다. 주요 수입 상대국은 한국(9.63%), 일본(8.99%), 아시아(8.46%), 미국(8.38%)으로 주요 수출입 상대국은 모두 인접 아시아 국가들이다. 2017년 기준으로 총수출액은 2,263,371백만 달러, 총수입액은 1,843,793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 품목은 변속기 장치(165,991,555.66달러), 저장 장치(89,690,331천 달러), 전자 부품(74,102,011천 달러), 반도체(68,167,379천 달러), 전화기 부품(51,057,293천 달러)이다. 주요 수입 품목은 반도체(260,920,122천 달러), 석유(163,820,666천 달러), 철광석,604,641천 달러), 금광석(48,740,696천 달러), 전화기 부품(41,293,629천 달러)이다. 소득 격차. 개혁 개방 이후의 활발한 경제 발전의 이면에는 국민의 80%를 차지하는 농민과 도시 지역 사람들과의 소득 격차 문제가 있으며, 이는 평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공산주의로부터의 일탈을 의미한다. 이 빈부 격차 문제는 향후의 중국 경제의 방향을 결정하는 요소이며, 새로 출범한 후진타오 정권은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농촌과 도시 지역 간의 빈부 격차 문제 해소를 논의하는 등 긴급하게 대응하고 있다. 2005년 3월의 전인대 이후, 후진타오 지도부는 "조화로운 사회 건설"의 건설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는 경제성장의 이면에, 빈부의 격차, 치안, 실업, 부패 등의 문제가 심각하게 되었다. 생활고 및 토지수용이나 독직 등 당국에의 불만으로부터 중국 각지에서 데모와 폭동이 빈발하고 있다. 정부는 이러한 사태의 악화를 염려하며, "조화로운 사회"의 건설을 중요과제로서 제기하였다. 그 실현을 위해서는, 부의 재분배 시스템을 확립하고, 빈부의 격차의 해소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기득권층의 이해에도 저촉하기 때문에, 그 실현에는 곤란이 뒤따르고 있다. 1990년 빈곤율은 50%이나, 최근 많이 줄었다. 또한, 열악한 노동 환경도 개선되어야 할 문제점이다. 교통. '중화인민공화국의 교통'은 1949년부터, 특히 1980년대 초반부터 크게 발전하였다. 공항, 도로, 철도 건설은 2010년대에 대규모 일자리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된다. 운송 수단으로서 중요한 철도는 20세기 중반이래 2배의 길이로 늘어났고, 전국을 잇고 있다. 주요 대도시들은 전철 시스템을 운영 또는 건설중이거나 계획 단계에 있다. 고속도로와 도로 체계도 급속히 성장하였고 그 결과 중국 전역에서 자동차도 급속히 증가하였다. 중국의 교통 체계는 방대한 국토에 걸쳐 넓은 교통 교차점의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으나, 교차점들은 비교적 경제적으로 발달한 해안 지대와 주요 강을 따라 발달한 도시들에 집중되어 있다. 중국 교통 기반시설의 물적 상황과 그 이용 실태는 지리에 따라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시골 지역에서는 아직도 비기계적인 운송 수단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반면, 상하이와 푸동 국제공항을 연결하는 자기부상열차도 건설되었다. 티베트의 말과 중국의 녹차를 주로 교환한 것에서 유래한 전통적인 차마고도 (윈난 성 ~ 티베트)도 지금은 국도와 고속도로, 티베트 철도로 대체되어, 이제는 관광객들이 일부 이용할 뿐이다. 현재 중국의 교통 체계의 상당수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중국은 현재 교통 인프라의 업그레이드를 광범위하게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최근까지, 중국의 경제는 인프라 개발 부족에 불구하고, 교통 인프라를 개발할 여력이 부족했었다. 그러나 이제 중국 정부는 경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물자를 수송하고 사람을 이동시키기 위한 효과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세계 은행의 1990년대 중반 자료에 따르면, 중국의 열악한 교통 인프라로 인하여 손실되는 물류량이 중국 GDP의 1%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의 물류 비용은 생산 원가의 20%로서 미국의 10%, 기타 선진국의 5%와 크게 대비된다. 중국의 항구는 수로의 이용을 위해 크게 개선되고 있으며 공항 설비도 향상되고 있다. 건설 장비, 엔지니어링, 콘테이너 보안, 전자산업, 안전 도구와 같은 교통 관련 산업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철도는 동북지구와 북부에 편재해 있다. 철도는 중국에 있어서 현대 운수의 근간을 이룬다. 중국 철도의 총 길이는 2009년에 86,000km로 연장되었다. 철도 밀도는 89.6km/10,000km2로, 이웃한 대한민국에 비하여 0.29배에 불과하다. 여객 수송은 연간 215억명/km, 철도선은 60여개를 헤아리고, 수송량은 전수송량의 85%에 이르고 있다. 새로운 도로의 적극적인 건설로 1978년에는 자동차의 통행이 가능한 도로의 총연장이 89만km에 이르렀다. 항공 교통이 1990년대 말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지만, 철도 교통은 여전히 가장 이용객이 많은 교통 수단이다. 1990년부터 시작된 정부의 노력으로 중국의 고속도로는 2009년 기준으로 65,000km를 넘는다. 이것은 길이 기준으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를 자랑하는 수치이다. 1,200여개의 하천은 예로부터 가장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고 경제적 동맥이 되어 왔으며, 특히 창 강은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예부터 중국에서 남선북마(南船北馬)라 일컬은 것은 창 강 수계가 차지하는 경제적 의의를 설명하는 것이다. 수나라 때부터 화중의 농산물을 화북으로 운송할 목적으로 건설된 대운하는 현재는 국부적으로 이용될 뿐이고, 남북간의 물자 수송은 경한선·진포선 등의 철도로 하고 있다. 주 강, 쑹화 강도 주요한 하천이다. 1956년 중국의 민간항공로의 총 연장은 1만7,194km였다. 베이징을 중심으로 모스크바, 평양, 하노이, 양곤, 울란바타르 등지에 정기항로가 개설되어 있고 국내 주요도시를 연결하는 항공망도 정비되어 있다. 영토가 광대한 중국에서는 항공 발전은 큰 의미를 가진다. 예컨대 철도편으로 10~15일이 소요되는 베이징 우루무치간의 거리는 항공로로 8~10시간이면 갈 수 있다. 중국과 대한민국 사이에는 대한항공이 중국 내 20개 도시에서 26개 노선을, 아시아나 항공은 22개 도시 30개 노선을 각각 운항 중이다. 2010년 8월, 대한항공은 83%, 아시아나항공은 83.6%의 탑승율을 기록했다. 8월 한달 동안, 각각 35만2천명과 29만4천명의 탑승객을 운송하였다. 사회. 인구와 주민. 중국의 사회는 신해혁명 이후 매우 근대화되었다. 신해혁명 이전에 중국인의 80% 이상은 성씨를 가지고 있지 않은 백성들이였다. 만주족, 한족 등 족보 명칭은 소수 귀족 또는 강등된 귀족만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신해혁명 이후에 쑨원은 서양열강들처럼 근대화에선 농노비 해방의 중요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일부 족보 귀족들만 사용할 수 있었던 성씨를 백성들도 사용할 수 있게 하여 대대적 민적법을 실행하였다. 인구 다수였던 농노들을 해방시켜 산업활동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신해혁명 이후 민적법에서 백성들이 한족(漢族)으로 등록되었으며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한족은 중국 전체 인구의 92%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외 55개의 소수 민족들이 8%를 차지하고 있다. 원래 중국은 현재처럼 인구가 많은 국가는 아니였다. 공산당의 정책은 가족의 구성 숫자대로 양식과 돈을 분배를 하는 정책을 썼기 때문에 인민들은 자녀가 많을 수록 분배되는 양식과 돈이 많았다. 그래서 당시 많은 자녀들의 숫자는 많은 양식과 돈의 분배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였으며 또한 농업에 종사하는 가족의 구성원이 많을 수록 분배가 많았기 때문에 농업 지역의 인구 수가 비정상적으로 늘었다. 이러한 가족 구성원 수대로 공정한 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공산정책으로 인해 중국인들은 가족의 숫자를 늘리려 하였고 이로 인해 중국의 인구가 늘어난 것이다. 이후 경제개방 정책을 펼쳐 도시에서는 가족 구성원 수대로 분배하는 정책을 줄이게 되었고 1970년대에는 1자녀 정책으로 자녀 수를 제한시켰다. 중국 전체의 인구는 2015년 말에 13억 5,569만 명이었으며,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인구증가율은 0.52%(2010년~2015년)이며 1995년 이후 1% 미만의 낮은 증가율을 지속하고 있다. 1979년부터 인구 억제책으로서 한 부부에 한 자녀라고 하는 정책이 실시되고 있다. 1자녀 가정에는 장려금, 학교에의 우선 입학 등의 혜택이 주어지나, 위반한 자에게는 반대로 벌금이 부과된다. 그러나 농촌 지역에서는 다(多)자녀의 전통적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강하여, 정책이 형해화된 지역도 많다. 중위 연령은 37.0세이며 2015년 노인 인구 비율이 9.55%로 고령화 사회에 해당한다. 2040년경에는 65세 이상의 노령 인구가 20%에 달하고, 초고령 사회가 도래하고 있다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이것을 반영한 것인지, 정부는 2002년 9월 1일에 "인구와 계획 출산법"을 시행하여, 조건부로 1자녀 정책을 완화하였다. 중국에서 가장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는 성(省)은 서남부의 윈난성(雲南省)으로 35개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2022년 7월 21일부터 중국의 인구는 감소하기 시작했다. 2022년 12월 중순 쯤 중국은 인도에 인구대국 1위 타이틀을 뺏기고 2023년부터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다. 2024년 중국의 인구는 225,551명이 감소할 것으로 예측된다. 중국의 인구는 2063년 최대로 감소할 것으로 보이는데, 2063년 한 해 동안 12,251,859명이 감소한다. 2064년부터 감소폭이 조금 줄어들지만 2090년까지 2020년 대한민국 인구 5분의 1에 달하는 인구가 한 해 동안 감소한다. 2103년부터는 인도에게 인구감소 1위국가 타이틀을 내주게 되는데, 인도는 2119년 22,452,584명이라는 인구가 감소한다. 대한민국 인구의 거의 절반 정도이다. 언어. 중국 국내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공용어인 표준 중국어(普通話)는 세계에서 가장 사용자가 많은 언어이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으며 이 중 대부분이 중국어를 구사하기 때문이다. 중국어는 여러 가지 방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북방방언(北方方言), 오어(吳語, 상하이어 등), 광둥어(廣東語), 푸젠어(福建語), 객가어(客家語)의 5개로 대별되며 방언들 간에는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중국 전 지역에서 통용되는 표준 중국어는 베이징화(北京話)의 발음을 표준음으로 하고 북방어를 기초로 하여 현대백화(現代白話, 구어)의 문장을 문법 규범으로 하고 있다. 중국어를 표기하는 한자는 총 6만 자 가량으로, 그 중 2,500자가 상용한자로 지정되어 있다. 한자 간략화 정책 때문에 중국 대륙에서는 한국어에서 사용되는 한자인 정체자와 다른 간체자(簡體字)가 통상 사용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56개의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으나 98%는 중국인 한족(漢族)으로 소수민족의 인구는 매우 적다. 한족(漢族)의 비율이 98%가 되기 때문에 중국은 한족(漢族) 단일 민족으로 봐도 무관하나 신분증 표기에 소수민족과 한족(漢族)의 구분이 되게 표기되어 있으며 중국은 사실상 외국인의 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외국인들은 소수민족이 될 수 없으며 원래 살고 있던 매우 적은 인구의 소수민족들이 신분증에 표기되어 있다. 소수민족은 대부분 각 민족 언어와 표준 중국어를 병용한다. 소수 민족 언어로는 좡어, 티베트어, 위구르어 등이 널리 쓰인다. 그중에는 극 소수의 인구인 나시족(納西族)의 동파 문자(東巴文)와 같은 표의 문자도 있다. 표준 중국어와 함께 1990년대 말에 반환된 홍콩에서는 광둥어와 영어를, 마카오에서는 포르투갈어를 공용어로 사용된다. 교육. 국가 전체의 문맹률은 미국 CIA 조사를 따르면 약 9.1%로, 중간 이하이다. 도시 지역에서는 문맹률이 많이 낮아졌으나 티베트 자치구나 신장 위구르 자치구 등 서부 지방에서는 아직도 문맹률이 높다. 2003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국민들의 의무 교육 기간을 초등교육의 6년에서 중학교의 9년으로 확대하였다. 학년은 9월에 시작해서 이듬해 7월에 끝난다. 중국에서는 고등학교 수학에서 미적분을 아예 다루지 않고 있는 대신 복소평면과 역삼각함수를 다루고 있다. 또한 중국의 대학 입시는 가오카오라고 부르며, 고급중학(한국의 고등학교에 해당) 3학년 말인 6월 7일과 6월 8일에 치른다. 과목은 어문, 수학, 문과종합, 이과종합, 외국어를 치른다. 미디어. 2019년 6월 5일 미국 프리덤하우스는 중국의 언론 지수에 최고 점수 4점 중 가장 낮은 점수인 0점을 주었다. 즉 언론의 자유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완전히 편향적이라는 것이다. 국영통신으로는 신화통신이 있다. 신화통신은 1931년에 장시성 루이진에서 '홍색중앙통신사'로 처음 발족했고, 1934년에는 대장정에 마오쩌둥과 함께 올랐으며 1937년에는 옌안에서 '신화통신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현재에 이른다. 이곳은 《인민일보》, 중국중앙방송의 기사를 보내고 있다. 또 이 통신사에서 발간하는 간행물로는 《신화매일전신》, 《참고신문》, 중국신화방송 등이 있는데, 《참고신문》은 주로 공산당원이 많이 읽는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대표적인 신문은 《인민일보》로써, 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이다. 이 신문은 1948년에 창간되었다. 이 신문은 당보인 것처럼 중국공산당의 입장, 정책설명, 당의 공보 등을 발표하고 있으며, 영어판과 한국어 서비스를 비롯해 7개의 외국어판을 발행하고 있다. 이 외에 《해방군보》, 《광명일보》, 《공인일보》를 발행하며, 《중국일보》는 외국인들을 위한 영문판 일간지이다. 외국어판 신문인 《베이징타임스》는 재미있는 기사와 강렬한 천연색 사진을 편집하여 외국인과 중국인에게 많은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방송은 국영방송인 중국중앙방송(CCTV)과 베이징 텔레비전, 홍콩스타TV방송 등이 있으며, 중국중앙전시대는 원래 광고편성을 하지 않았으나, 1980년대에 광고를 시작했다. 중국정부에서는 언론을 검열하므로 BBC를 들을 수 없다. 환경. 중국 각지에서 대기오염, 수질오염, 고형 폐기물, 소음, 사막화, 산성비, 물부족 등의 환경문제가 심각하게 되었다. 1973년에 제1회 전국환경보호회의가 개최된 이래, 환경보전에 대한 조직적 대응이 시작되어, 1979년의 환경보호법(시행) 채택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1983년에는 환경보전을 기본 국책으로 위상을 높였다. 1988년에 환경보호법이 수정되어 오염물질을 배출하는 기업에게 벌칙이 강화된 이외에, 1997년의 형법 개정으로 자원환경파괴죄가 신설되었다. 또한 1998년의 국무원 개혁으로 1984년에 설치되었던 국가환경보호국이 국가환경보호총국으로 격상되었고, 2008년 3월에는 환경보호성으로 승격되었다. 이러한 대책에도 불구하고, 환경문제는 의연히 악화경향에 있다. 이것은 환경개선에의 기술적, 자금적인 문제도 있으나, 환경보호단체를 비영리단체로서 조직하는 것이 일부 규제되고 있는 등, 일반시민에게 환경보전의식이 침투하기 어렵다고 하는 정치체제에 기원하는 것도 크다. 사회문제 및 국제문제. 인권문제. 외국 정부들, 언론, NGO는 중국의 낮은 인권 점수를 비판해오고 있다. 또한 법정재판 없이 가해지는 형벌, 강제 낙태, 강제 자백, 고문, 기본권 침해, 사형제 남용 등도 주 비판 대상이다. 정부는 경찰력과 군대를 동원하여 대규모 대중 시위를 차단하며, 가장 대표적으로 1989년의 천안문 사건과 같이 ‘사회 안정’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생각되는 요소들은 모두 빠르게 제거한다. 톈안먼 사건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국내에서는 일당 독재 체제에 반대하는 대규모 움직임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국외에서는 미국의 화교 매체인 대기원시보가 중국공산당을 비판하는 사설 ‘구평공산당(九評共産黨)’을 발표하는 등의 민주화 요구 운동이 지속되고 있다. 2010년 중화인민공화국의 반체제 인사 류샤오보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중국 정부가 반발하기도 했다. 중국의 민주화 운동가, 사회적 활동가들, 그리고 공산당 극히 일부 인사들은 중국이 정치적, 사회적인 개혁을 거쳐야만 한다고 믿는다. 1970년대부터 중국은 경제적, 사회적으로는 크게 정부의 통제가 풀리고 개인의 자유가 허가되었으나, 정치적인 자유는 아직까지도 극히 제한되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헌법에는 시민들에게 주어진 ‘기본권’에 발언의 자유, 언론의 자유, 공정한 재판을 받을 자유, 종교의 자유, 평등한 투표권, 재산권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법률 조항들은 정부의 강력한 권력 앞에서는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또한 인터넷 상에서도 정기적인 검열을 통하여 시민들의 발언을 엄격히 통제하며, 여론을 조작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2020년까지 중국 중앙정부는 시민들에게 각각 ‘사회신용평가점수’를 부여하여 그들의 행동을 평가하는 제도를 도입하기로 하기도 하였다. 사회신용평가제는 이미 여러 중국 도시들에서 실행되고 있는데, 외국 전문가들은 이를 빅데이터 분석을 활용하여 대규모의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방법의 일환이라고 평가한다. 1992년부터 공공에 전파되기 시작한 종교 운동 파룬궁은 세를 급격히 확장하여 1999년에 7천만 명에 달하는 수련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허나 중국 정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파룬궁 탄압을 시작하였고, 대규모로 수련자들을 체포하였으며 초법적인 권한으로 형벌 집행을 하고 고문과 죽음에 대한 보도를 엄금하였다. 2016년 세계노예지수는 중국에서 전체 인구의 0.25% 즉 380만 명보다 많은 사람들이 검열, 강제 결혼, 아동 노동, 국가 주도하의 강제 노동 등으로 인하여 ‘현대 노예와 비슷한 상태’와 살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국가 주도의 강제 노동은 공식적으로 2013년에 폐지되었으나, 몇 십년 동안 다양하게 이루어진 강제 노동 정책이 제대로 폐지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중국의 감옥 시스템에는 로개(劳改) 제도라고 불리는 노동 수용소, 재교육 캠프 등이 교화 목적으로 포함되어 있는데, 미국에서 조사한 결과 이 과정에서 비민주적인 절차와 인권 탄압이 발생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제적으로 조사된 연구 결과에 의하면, 중국에서 사형수를 대상으로 벌어지는 장기 적출도 심각한 상황이라 추측된다. 2019년에 400개가 넘는 장기이식 관련 논문들에 논문의 철회가 요구되었는데, 이는 논문에 사용된 장기들이 감옥 수감자들에게서 불법으로 떼온 것이라는 의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연구원에서는 주로 이 장기들이 사형당한 양심수들에게서 거두어진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소수민족 문제. 중화인민공화국은 1950년대 초에 합병한 티베트에서 인권과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있는 것에 관해 계속적인 비난을 받고 있다. 정부는 티베트 영토 내에서 과도한 공권력을 행사하고 종교 모임의 금지 등을 통하여 사람들의 결집을 막고 있다고 비판받는다.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살고 있는 최소 1백만 명에 이르는 위구르 무슬림들은 대규모 집단 수용소에 갇혀 ‘사회 재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하도록 강요받고 있다고 전해진다. 이 재교육 프로그램에서 수감자들은 자신의 국적, 정체성, 종교적 신념 등을 다시 재교육받아 중국 정부가 원하는 방식으로 개조된다. 2019년 1월, UN은 한 패널이 이 수용소에 110만 명에 달하는 위구르족, 소수 민족들이 갇혀 있다는 주장을 한 이후에 수용소들에 대한 직접적인 감사를 요구하였다. 정부는 신장에 대한 보도를 하는 것도 차단하고 있는데, 주로 자국 내에 있는 기자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는 방법을 주로 사용한다. 언론 검열. 중국공산당은 독재 체제에 반대하는 언론 및 표현의 자유를 탄압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현대에는 금순공정 또는 황금방패로 불리는 대규모 인터넷 차단으로 천안문 사태, 티베트 독립운동 등 체제에 반하는 정보들을 검열하고 사용자들의 개인정보를 침해하고 있다. 인구문제. 인구 과잉 문제는 중국 정부의 오래된 문제로 과거부터 출생의 통제 정책 등이 이루어져 왔다. 또한 이에 관해 2018년 임신중절을 전면 합법화하는 정책이 통과되었으며, 중국의 ‘부녀권익보장법’에 따라 임신중단수술을 하는 여성의 건강과 안전을 국가가 보장하도록 의무화하였다. 또 남편은 임신중단수술 후 6개월 이내에는 이혼소송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한다. 한편 21세기에 들어 저출산 및 고령화 문제가 진행됨에 따라 출산 통제 정책을 약화시키고 있다. 환경문제. 중화인민공화국은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환경오염 우려가 크고 또한 사막에서 날라오는 황사와 합쳐져 환경문제가 가장 심한 국가이기도 하다. 문화. 전통적으로는 부계 중심의 가족, 확대 가족이며 조상 숭배를 강조한다. 아들의 출산을 통해 가족의 혈통을 계승하려 한다. 효도를 중시하며, 결혼은 가문의 관심사이자 대(代)를 잇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는 핵가족화 추세이나 농촌은 대가족 제도를 계속 유지한다. 연애 결혼과 중매 결혼이 공존하며, 가족 중심적이고 이혼율이 증가 추세에 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보다는 낮은 편이다. 만리장성이나 자금성 등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문화재가 중국 영토 곳곳에 많이 존재하고 있다. 설날, 청명, 노동절, 현충일, 단오, 추석, 국경절 등에 연휴가 있으며 대체평일제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영토가 넓은 대신 비행기 등을 이용할 능력이 되는 사람이 적어서 고향 방문이나 여행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연휴를 길게 하는 대신 주말근무로 대체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중국 문화는 고대 이래 유교에 의해 지대한 영향을 받아왔다. 한나라부터 왕조기 내내 관리가 되는 가장 주된 방법은 학문을 통한 과거제였다. 이 때문에 중국 사회에서는 문학과 글에 대한 동경이 두드러졌으며, 이 때문에 서예, 시, 그림과 같은 문학적 예술들이 춤이나 연극같은 것들보다 더 고급스러운 예술이라는 인식이 일어나게 되었다. 중국 문화는 주로 왕조기부터 내려온 전통의 영향을 받아 시험과 능력주의가 크게 평가받는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초기 지도부는 청나라 시기에 태어났으나, 공산주의를 접하며 혁명적인 사상들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전통적이고 폐쇄적인 사상들을 배격하고 가족과 순종의 태도는 유지하는 동시에 지주세, 성차별주의, 유교식 교육 등을 타파하려 노력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전통적인 중국 문화를 잘 지켜왔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상당수의 학자들은 1960년대에 일어난 문화대혁명으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중국 전통문화가 ‘봉건의 잔재’, 혹은 ‘퇴폐적이고 해롭다’라고 평가받아 대규모로 파괴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유교, 문학, 예술, 경극과 같은 전통문화들은 공산당의 입맛에 맞는 방식으로 변질되었으며, 외국 미디어나 정보에 대한 접촉은 엄격하게 제한되고 있다. 현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내부 결집과 정통성 확보를 위해 옛 전통들을 대거 부활시키고 있다. 특히 국가주의, 민족주의가 대두하고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다시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옛 문화들이 다시 되살려진 것이다. 현재 중국은 세계에서 3번째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국가이며, 2010년에만 5,570만 명에 달하는 방문객들을 맞아들였다. 게다가 막대한 인구로 인하여 국내 여행 수요도 가지고 있는데, 2012년 10월에 7억 4천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들이 연휴 기간을 맞아 자국 내를 여행하였다고 전해졌다. 문학. 중국 문학은 옛 주나라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고전 문학에는 여러 사상들과 달력, 병법, 천문학, 약초학, 지리학 등 여러 귀중한 문화들이 담겨 있다. 가장 유명한 책들에는 주로 역경, 서경, 사서오경 등이 있는데, 주로 춘추전국시대에 공자와 같은 사상가들이 남긴 유산들을 정리해놓은 책이다. 중국의 시가는 주로 시경에서부터 시작되어 당나라 시기에 크게 번성기를 맞았는데, 이백과 두보와 같은 당대의 명시인들이 사랑과 현실주의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중국의 역사학은 서경에서부터 시작하여, 명나라 대의 이십사서까지 내려오며 주로 중국의 신화와 민화까지도 모두 써놓았다. 고전문학은 주로 수호지, 삼국지연의, 서유기, 홍루몽과 같은 소설들이 주로 인기를 끌어 통칭 4대 소설이라고 불린다. 이 문학들은 현대까지도 재창조, 재해석되어 내려오며, 동아시아의 문화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청나라 말기의 계몽기에, 중국은 백화문이라 불리는 새로운 문학 형식이 등장하였으며 루쉰이나 후스와 같은 거장들이 나타나 현대 문학의 길을 열었다. 의상. 중국 전통의상에는 여성전통의상인 치파오가 있다. 요리. 중국 요리는 수 천년에 걸친 역사와 다양한 식생으로 인하여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조리법과 재료로 유명하다. 크게 쓰촨 요리, 광둥 요리, 산동 요리, 장쑤 요리, 푸젠 요리, 후난 요리, 안후이 요리, 저장 요리로 8가지로 나뉜다. 이 모든 요리들은 모양, 열, 색감, 향신 등이 적절하게 배합되어 있으며, 중국 전통 약학에 기반하여 맛과 함께 건강도 함께 갖추고 있다. 보통 중국의 주식은 남부에서 나는 쌀이고, 북부에서는 밀로 만든 빵이나 면을 주로 먹는다. 현대 중국인들의 주식은 대부분 곡물과 간단한 채소류, 그리고 특별한 경우에는 고기도 먹는다. 또한 콩으로 만든 요리들도 크게 인기를 끌고 있는데, 두유나 두부 등이 유명하며 주 단백질 공급원으로 사용된다. 중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고기류는 돼지고기이며, 국가 전체 고기 소비의 4분의 3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돼지고기가 육류 시장에 압도를 점하고 있기는 하다만, 중국에는 불교를 믿는 채식주의자용 식단과 이슬람교를 믿는 할랄용 음식들도 있다. 남부 지방의 음식들은 해양 근접성과 온화한 날씨 덕에 해산물 종류가 풍부하며 채소도 더 많이 사용한다. 반대로 북부에서는 곡물에 기반한 요리들을 주로 만들어 먹는다. 이처럼 다양한 요리들은 국제화시대에 다양한 외국 문화들과 결합하여 홍콩 요리나 미국식 중국 요리와 같이 혼합한 요리 문화를 창조하고 있기도 하다. 스포츠.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스포츠 문화를 지닌 나라들 중 하나이다. 궁술은 서주 시대부터 전래되어왔다는 기록이 있으며, 검술과 축국 등도 고대부터 활발히 이루어졌다. 참고로 축국은 후대에 발전되어 중국식 축구와 비슷하게 변형되었다. 중국에서는 신체 단련을 중요시하는데, 이 때문에 현대까지도 기공이나 태극권이 활발히 대중들 사이에서 단련되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관련 모임들이 성업중이다. 현재 가장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스포츠 종목은 농구로, 중국 농구 연맹과 미국 NBA는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젠롄이나 야오밍 같은 선수들이 인기가 많다. 중국의 프로 축구리그인 중국 슈퍼리그는 1994년에 시작되었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거대한 축구 시장이다. 그 외에 대중적인 스포츠는 무술, 탁구, 배드민턴, 수영 등이 있다. 보드게임의 경우 장기, 마작, 최근의 경우에는 체스 등이 유명하며, 전문적인 대회도 있다. 또한 자전거도 매우 인기가 많은데, 2012년에만 4억 7천만 개의 자전거가 보급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전통적으로 전해져내려오는 용선 경주, 몽골식 레슬링, 경마도 매우 유명하다. 중국은 1932년 이래 올림픽에 계속 참가해왔으나, 다만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참가한 것은 1952년부터이다. 중국은 베이징에서 2008년 올림픽을 개최하였으며, 51개의 금메달을 따내며 참가국들 중 최다 금메달 수를 기록하는 영예를 안았다. 중국은 2012년 패럴림픽에서도 95개의 금메달을 포함한 231개의 메달을 따내며 가장 많은 메달을 따냈고, 2011년에는 선전에서 2011년 여름 유니버시아드를 개최하였다. 중국은 2013년 동아시아 게임을 텐진에서 개최하였으며 난징에서는 2014년 하계 청소년 올림픽을 열었다. 베이징과 인접 도시는 2022년 동계 올림픽을 개최했으며, 이로서 베이징은 처음으로 하계 올림픽과 동계 올림픽을 모두 개최한 도시가 됐다. 종교. 1982년 제정된 〈공산주의 종교법〉에서 중국 정부는 인민들과의 협조를 위한 공산당원의 종교 활동을 인정하는 등 종교 활동에 대한 자유를 인정하고 있지만, 만 18세 미만 미성년자에 대한 선교 활동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으며, 불교, 도교, 이슬람교, 천주교, 개신교 등 5개 제도성 종교(制度性宗教)는 각각 중국불교협회(中国佛教协会), 중국도교협회(中国道教协会), 중국이사란교협회(中国伊斯兰教协会), 중국천주교애국회(中国天主教爱国会), 중국천주교교무위원회(中国天主教教务委员会), 중국천주교주교단(中国天主教主教团),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中国基督教三自爱国运动委员会), 중국기독교협회(中国基督教协会) 등 8개 관방 종교 단체로 통합되어 있다. 중국 정부의 종교 정책은 자치(自治, 스스로 다스림), 자양(自養, 스스로 키움), 자전(自傳, 스스로 전파시킴)을 중점으로 하는 삼자 정책이라고 하는데, 이는 외세를 배격하는 자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책이다. 천주교. 로마 교황청과의 교류가 단절되어 있다. 2006년에는 쉬저우 교구장인 천위룽 주교가 로마 교황청과의 협의없이 천주교 주교 서품을 집전하여 교황청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현재 중국공산당에서 인정하는 천주교 단체는 다음 3개이다. 개신교. 현재 중국공산당에서 인정하는 개신교 단체는 다음 2개이다. 삼자애국운동과 중국기독교협회를 중국기독교양회(中国基督教兩会)로 통칭하기도 한다. 주요 정책 발표 등이 공동의 명의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기독교양회에 속하지 않은 가정교회에서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도 많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가정교회는 비공인된 것으로 탄압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기독교양회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발전한 토착적인 교리를 중요시하며, 반외세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 최근엔 정부에 협력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중국 공안부가 사교(邪教)로 지정해 탄압하는 기독교 계열 종교들이 있다. 널리 알려진 단체로는 호함파(지방교회),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동방번개) 등이 있다. 일부 단체는 중국내에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지리적으로 가까운 대한민국으로 전도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법률은 외국 개신교 단체의 중국 내 선교를 금지하고 있다.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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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중국(, )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을 일컫는 단어이다. 본디 중국 대륙은 청나라 때까지 한 국가였으나, 1949년에 국공내전에서 승패가 갈리면서 두 국가로 된 이래 현재까지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즉 두 개의 중국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각국은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며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다만 유엔에서는 압도적인 인구와 영토를 점유하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만을 합법적인 중국 정부로 인정한다. 중국의 범위. 사람들마다 개인별로 차이가 있으나 중화인민공화국만을 지칭하는 경우가 중화민국을 지칭하는 경우보다 훨씬 많아졌고, 문맥에 따라서는 둘을 포괄하여 지칭되기도 한다. 때로는 중화권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1980년대까지만 하여도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지 않은 대한민국에서는 '자유중국'이라고 하여 중화민국을 중국이라 불렀으나,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수교 이후부터는 점차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 현대. 중국은 "아시아의 병자"라는 이야기가 있었을 만큼 서양 열강과 일본 제국에 먹혀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고 만다. 소련은 중국을 직접 지배하는 것 보다 소련 정부의 간섭에 좌지우지 되는 공산당을 중국에 만들고 싶어 하였다. 그리하여 노비, 소작농 등 농민들로 이루어진 중국 공산당원들은 소련의 지지 아래서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 하게 된다. 양안 관계. 현재 중국은 여러 가지 정치상 문제로 말미암아 완벽한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있으며, 다수의 정부가 존재한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중국대륙에서 타이완섬으로 건너와 세운 정권인 중화민국 모두 하나의 중국(One China) 정책을 강하게 천명하여(물론 중화인민공화국 이전부터 타이완에서 살던 타이완인들은 중국과의 영원한 결별을 원한다. 타이완 공화국 참고), 자국과 수교하는 모든 국가는 중국의 다른 정부와 수교하는 것을 원칙상으로 금지한다. 예컨대 1992년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한 대한민국은 중화민국과 단교해야 했다. 유엔과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승인받은 정부인 중화인민공화국은 이 정책을 내세워 중화민국이 국제사회에서 주권국을 암시하는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이나 타이완의 독립을 암시하는 ‘타이완 (대만)’(Taiwan)이라는 두 가지 명칭 모두 사용하지 못하게 압력을 행사해서 중화민국은 비공식 명칭으로 국제사회에서 ‘타이완’으로 불리고거나 스스로 그렇게 부르더라도, 국제 기구에서는 반드시 묵시로 합의된 국가명인 중화 타이베이 (中華臺北)를 사용해야 한다. 국제사회에서 중화민국의 국기, 중화민국의 국가를 위시한 중화민국의 상징물 사용은 하나의 중국 정책 위반이고 특히 중화인민공화국 영토 내에서 불법성을 띤 사용은 반분열국가법에 제재받는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타이완 지구를 자국의 영토로 간주하듯이, 제한되게 승인받았지만 국가 대부분에 ‘사실상 독립국’ (sovereign de facto)으로 ‘간주’되는 중화민국 정부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며, 공식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일컫는 말로 ‘중국 대륙’ 혹은 ‘본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일컫는 말로 중국 공산당 정부라는 뜻의 ‘중공정부’를 쓰는데도 양안 관계가 호전되어 본토인들이 타이완을 ‘타이완’이라고 부르며 타이완인들이 본토를 ‘중국’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자연스러워지기도 하였다. 중화민국은 1992년부터 92공식(92共識)에 의거해 3불(三不)정책(不統, 不獨, 不武. 통일이나 독립을 추구하지 않으며 무력을 사용하지도 않는다는 원칙)을 지킨다. 한편 마카오는 세계무역기구에 중국 마카오 (Macao, China, )라는 이름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국제올림픽위원회,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 아시아 개발은행에는 참여하고 있지 않다. 언어와 문자.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모두 허베이성에서 쓰이는 표준 중국어인 푸퉁화(普通話) 혹은 궈위(國語)가 사용되나 소수민족이 사용하는 다른 언어도 있다. 중국어의 경우 같은 표준 중국어(푸퉁화)와 상호의사소통성이 없는 방언이 여러 가지 있다. 소수민족의 언어로는 몽골어, 좡어, 위구르어, 티베트어, 후이어 등이 있다.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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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운영체제
실시간 운영체제() 또는 RTOS(←)는 실시간 응용 프로그램을 위해 개발된 운영체제이다. 운영체제의 기능 중 CPU 시간 관리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설계되었다. 실시간 운영체제는 프로그래머가 프로세스 우선 순위에 더 많은 제어를 할 수 있게 한다. 응용 프로그램의 우선 순위가 시스템 프로그램의 우선 순위를 넘어설 수도 있다. 시스템 코드의 임계 구역을 최소화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응용 프로그램의 처리 요청을 정해진 시간 안에 처리해 줄 수 있다. 실시간 운영체제의 핵심은 응용 프로그램 테스크 처리에 걸리는 시간을 일관되게 유지할 수 있는 정도에 있다. 처리 시간의 변동폭은 지터("jitter")(실제 신호와 기준점과의 시간 편차)라 부른다. 경성("hard") 실시간 운영체제와 연성("soft") 실시간 운영체제로 구분할 수 있으며, 전자가 후자에 비해 지터가 적다. RTOS의 주된 설계 목표는 높은 처리율(throughput)이 아니라, 실시간 성능 보장에 있다. 실시간 시스템의 데드라인을 "대체로" 맞추는 RTOS를 연성 실시간 운영체제라 하고, 데드라인을 결정론적 알고리즘(deterministic algorithm)에 의해 만족하는 경우를 경성 실시간 운영체제라 한다. 규모가 큰 실시간 운영체제의 초기 예는 "제어 프로그램"이었는데, 이는 아메리칸 항공(American Airlines)과 IBM이 세이버(Sabre) 항공 예약 시스템을 위해서 개발한 것이었다. 설계 방식. 두 가지 기본적인 설계 방식이 존재한다. 엄밀히 말해, 시분할 스케줄링 방식은 실제 필요한 것보다 더 자주 태스크 전환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러한점 덕분에 좀 더 자연스럽고, 예측하기 쉬운 멀티태스킹을 제공하며, 하나의 프로세스나 한명의 사용자가 장치를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제공한다. 때문에 이 방식이 좀 더 나은 멀티태스킹 방식처럼 보일 수 있다. 스케줄링. 전통적인 설계 방식에서, 태스크는 수행(running), 대기(ready), 블록(blocked)의 세 가지 상태(state) 중 한 가지 상태로 존재한다. 대부분의 태스크가 블록상태이고, 오직 1개의 태스크만 수행상태이다. 간단한 시스템 일수록 대기 상태의 태스크 목록이 짧으며, 많은 경우도 2~3개 정도이다. 일반적으로 스케줄러 대기 태스크 목록의 데이터 구조는 스케줄러의 임계 구역 (CPU의 선점이 금지되며, 어떠한 경우에는 모든 인터럽트가 비활성화된다.)에서 소비되는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게 설계 한다. 하지만, 데이터 구조의 선택은 대기 리스트에 들어갈 수 있는 최대 태스크의 숫자에도 좌우된다. 만약 대기 목록에 2~3개 정도에 적은 수의 태스크만 존재하는 구조라면, 단순히 이중 연결 리스트 구조로 대기 목록을 구현하는 것도 효율적이다. 반면, 통상 적은 수에 태스크만 존재하지만 가끔 그보다 많은 수가 존재하는 경우라면, 태스크를 실행할 때마다 전체 목록을 뒤져 우선 순위가 높은 태스크를 찾는 작업을 반복적으로 하지 않도록 우선 순위를 기준으로 미리 정렬하거나 높은 우선 순위의 태스크를 낮은 우선 순위의 태스크보다 먼저 대기 리스트에 추가할 수 있도록 설계한다. 즉, 대기 목록을 검색하는 동안 CPU의 선점을 금지하지 않거나 긴 임계 구역을 작게 나누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낮은 우선 순위의 태스크를 리스트에 추가하는 동안이라도, 높은 우선 순위의 태스크를 대기 상태로 만드는 인터럽트가 발생하면, 높은 우선 순위의 태스크를 먼저 대기 목록에 추가하고 바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태스크가 생성되면 이 태스크는 일단 대기 상태가 된다. 스케줄러는 현재 수행중인 태스크 역시 대기 상태로 변경하고, 두 개의 태스크를 대기 상태 태스크 목록에 집어 넣는다. 그 후, 가장 우선 순위가 높은 태스크를 다시 수행하는데 이 전체 과정에 걸리는 시간을 중요 응답 시간(critical response time) 혹은 플라이백 타임 (flyback time) 이라고 부른다. 잘 설계된 실시간 운영체제의 경우, 새로운 태스크를 대기 상태로 만드는 데 3-20개의 명령어를 사용한다. 또, 가장 높은 우선 순위를 가진 대기 태스크를 수행 상태로 변경하는데 5-30개의 명령어를 사용한다. 고급 실시간 운영체제에서는 실시간으로 동작하는 태스크들이 실시간으로 동작하지 않는 태스크들과 컴퓨터 자원을 공유한다. 따라서 대기 리스트는 상당히 길어질 수 있다. 이러한 시스템에서 스케줄러 대기 리스트를 간단한 연결 리스트(linked list)로 구현하는 것은 알맞지 않다. 스케줄링 알고리즘. 일반적으로 RTOS에서 사용되는 스케줄링 알고리즘에는 아래와 같은 것이 있다. 태스크 간 통신과 자원 공유. 멀티태스킹 시스템은 여러 개의 태스크 사이에 공유되는 데이터와 하드웨어 자원을 관리해 주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두 개 이상의 태스크가 동시에 같은 데이터나 하드웨어 자원에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다. ("위험"하다는 것은 한 태스크가 복수의 데이터를 갱신하는 중일 경우, 결과가 일관성이 없고 예측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다른 태스크가 이 데이터들에 접근해도 되는 시점은 갱신이 시작하기 전이나 완전히 종료된 후 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보통 사용되는 3가지 방식을 소개한다. 일시적인 인터럽트 비활성화. 범용 운영체제에서는 사용자가 인터럽트를 마스크(비활성화)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사용자의 프로그램이 운영체제의 핵심 자원인 CPU를 너무 긴 시간동안 점유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재 사용되는 대다수의 CPU들은 사용자 모드 코드가 인터럽트를 비활성화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임베디드 시스템과 실시간 운영체제들은 응용 프로그램이 운영체제의 간섭 없이 시스템 콜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커널 모드에서도 동작할 수 있도록 한다. 단일 프로세서 시스템에서, 만약 응용 프로그램이 현재 커널 모드로 동작하고, 인터럽트를 비활성화할 수 있다면, 대개 인터럽트 비활성화야말로 두 개 이상의 태스크가 동시에 공유자원에 접근하는 것을 막아주는 최고의 기법이다. 인터럽트가 비활성화되어 있는 경우, 현재 돌고 있는 태스크는 다른 태스크나 인터럽트가 CPU를 제어할 수 없기 때문에 "배타성"을 띠며, 따라서 임계 구역은 보호 받는다. 태스크가 임계 구역에서 벗어나게 되면, 대기중인 인터럽트가 있다면 실행되도록 인터럽트를 다시 활성화시켜야 한다. 일시적으로 인터럽트를 비활성화하는 것은 임계 구역의 가장 긴 경로가 인터럽트 대기 시간보다 짧은 경우 유효한 전략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방법을 통하여 시스템의 최대 인터럽트 대기 시간을 증가시킬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임계 구역이 단지 몇 개의 명령어로 이루어졌거나, 반복구문을 포함하지 않은 경우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세마포어. 세마포어는 잠기거나 풀려있다. 잠겨 있을 때 작업들의 대기는 세마포어(가 풀리기)를 기다린다. 세마포어 디자인들이 가지는 문제점들은 잘 알려져 있다: 과 교착 상태이다. 우선 순위 역전은 높은 순위의 작업이 낮은 순위의 세마포어를 가지는 작업을 기다리는 상황이다. 대표적인 해결법은 세마포어를 가지는 작업이 최우선 순위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교착에서는 두 개의 작업이 두 개의 세마포어를 역순으로 잠근다. 이것은 대개 대기열을 구현할 때 면밀하게 설계하거나 또는 floored semaphores(정해진 상황에서 세마포어의 제어권을 높은 순위의 작업에 넘기는)를 추가함으로써 해결된다. 메시지 전달. 다른 해결책은 작업들이 서로 메시지를 주고 받게 하는 것이다. 이것 또한 똑같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작업이 낮은 우선 순위의 메시지를 수행하느라 in-box에 있는 더 높은 순위의 메시지를 무시할 때 우선 순위 역전이 일어난다. 두 개의 작업이 서로 상대방의 응답을 기다릴 때 교착이 일어난다. 실시간 동작은 세마포어 시스템의 경우보다는 덜 분명하지만, 메시지 기반 시스템들은 자체적으로는 고정적이지 않아 일반적으로 세마포어 시스템들보다는 더 잘 동작한다. 인터럽트 핸들러와 스케줄러. 인터럽트 핸들러는 실행중인 가장 높은 우선의 태스크 조차도 중단 시킬 수 있으며, 실시간 운영체제는 스레드 대기시간을 최소화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인터럽트 핸들러의 기능은 가능한 최소화되기 마련이다. 메모리 할당. 실시간 운영체제의 메모리 할당은 다른 운영체제에서보다 더 치명적이다. 첫째로, 안정성을 위해서 메모리 누수(할당되었지만 사용후 반환되지 않은 메모리)는 있을 수 없다. 장치는 한번의 재부팅도 필요없이 무한정 동작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동적 메모리 할당은 눈살이 찌푸려진다. 가능할 때에는 반드시, 모든 요구되는 메모리 할당은 컴파일 시간에 정적으로 명시된다. 동적 메모리 할당을 피하는 다른 이유는 메모리 단편화이다. 단편화된 할당과 작은 메모리 덩이들의 반환으로, 사용가능한 메모리가 여러 섹션으로 나눠져, 충분한 여유 메모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RTOS가 충분히 연속적인 큰 메모리 블록을 할당할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 둘째로, 할당 속도가 중요하다. 일반적인 메모리 할당 설계는 적절한 여유 메모리 블록을 찾기 위해 가늠할 수 없는 길이의 연결 리스트를 스캔한다. 이는 메모리 할당이 확실한 시간안에 일어나야하는 연유로 RTOS에서는 용납될 수 없다. 물리적인 디스크는 훨씬 더 길고 예측할 수 없는 응답시간을 가지기 때문에, 디스크 파일로 교환하는 것은 위에서 논의한 RAM 할당과 같은 이유로 사용되지 않는다. 간단한 임베디드 시스템에는 단순한 고정 크기 블록 알고리즘이 낮은 고정 비용때문에 상당히 잘 동작한다. 임베디드 시스템의 메모리 사용. 몇몇의 RTOS(임베디드 운영체제)는 "XIP" (즉석에서 실행)를 지원한다. 커널과 응용 프로그램들이 코드를 RAM으로 먼저 전송하지 않고 ROM에서 직접 실행된다. 운영체제의 필요한 RAM 크기와 ROM 크기 사이의 교환을 제공한다. 다양한 RTOS들. 많은 회사들이 리눅스에 실시간 기능을 가미한 버전을 판매하고 있다. 2004년 10월 8일 몬타비스타는 리눅스 커널 메일링 리스트를 통해 리눅스에 실시간 성능을 향상하기 위한 실시간 패치를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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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유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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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보호
자연보호(自然保護)는 20세기 중반부터 점차로 비중을 가지고 토론되고 제기된 사회문제의 하나이다. 현대문명이 공업 기계화됨과 함께 인간 생존의 필수적 요건인 자연과 주변 환경의 오염은 급속한 현대 문명 발달이 가져온 커다란 해악의 하나로 간주할 수 있다. 자연환경의 보호 문제는 이제 어느 개별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전 인류가 함께 한 마음으로 진지하게 토론하고, 또한 현대의 문명이 가진 문제점과 관련하여 생각해야 할 인류의 공동관심사라고 할 수 있다. 중요성. 환경 오염 문제는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발생하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지구의 온난화, 오존층 파괴, 산성비, 지구 사막화, 중국의 황사, 해수면 상승, 열대 우림의 감소, 생태계 파괴 등이다. 산성비는 수소이온 농도 5.6 이하일 때를 말하며 화석연료가 연소할 때 나오는 황산화물이나 질소산화물이 빗물에 섞여 강산성을 띠게 된다. 산성비는 눈을 자극하고 식물체를 고사시키거나 문화재를 부식시켜 수명을 단축시키고 전철의 전선을 부식시켜 대형사고를 유발할 수도 있다. 지구온난화는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CO₂) 메탄(CH₄), 오존(O₃), 이산화질소(N₂O), 수증기(H₂O) 등의 농도가 높아지면서 지구 온도가 서서히 상승하는 현상을 말한다. 지구 온난화가 진행되면 지구전역의 강수량의 변화가 일어나며 해면 기압과 토양수분의 변화가 일어나며 이로 인한 각종 기상재해가 일어날 가능성이 커지고 지구온도가 상승하면서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상승하게 되면 0.5미터 ~ 2미터 정도 상승하여 10억명의 환경난민이 발생하게 되고 농업생태계의 변화로 재배 작물 생육이 불가능하게 된다. 환경호르몬에 의한 식품오염물질과 장염비브리오균, 살모넬라균, 리스테리아균, 캄필로박토균, 황색포도상구균, 장관출혈성대장균, 보툴리누스균 등에 의한 식중독, 알레르기는 환경오염으로 비롯된다. 자연보호운동. 자연보호운동(自然保護運動)은 자연적 파괴 또는 인위적 훼손으로부터 지키거나 돌보아 원상태로 복구함으로써 자연환경을 보전하고 국민정서 및 생활을 좀더 윤택하게 하려는 운동을 말한다(자연환경보전법 제3조 제1항 제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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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 부호화
엔트로피 인코딩 혹은 엔트로피 부호화()는 심볼이 나올 확률에 따라 심볼을 나타내는 코드의 길이를 달리하는 부호화 방법이다. 보통 엔트로피 인코더는 모든 심볼에 대해 같은 길이를 갖는 코드를 심볼이 나올 확률값의 음의 로그에 비례하는 서로 다른 길이의 코드로 바꾸어 부호화한다. 즉 가장 자주 나오는 심볼에 대한 코드가 가장 짧다. 새넌 정리(Shannon's source coding theorem)에 따르면, 가장 좋은 코드 길이는 "b"를 부호화할 진수(2진수로 부호화 할 경우에는 b=2가 된다), "P"를 심볼이 나올 확률이라고 할 때 −log"bP"라고 한다. 엔트로피 코딩 중에 가장 자주 쓰이는 세 가지는 허프만 부호화, 범위 부호화와 산술 부호화이다. 이 부호화 기술들은 입력 데이터의 값 분포에 따라 할당 방법이 동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별도로 분포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거나 보내 주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데이터 스트림의 대략적인 엔트로피 성질을 미리 알고 있을 때에는(특히 신호 압축에서) 범용 부호 기술로서 단항 부호, 엘리어스 감마 부호, 피보나치 부호, 골롬 부호, 라이스 부호 등을 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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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가가린
유리 알렉세예비치 가가린(, 1934년 3월 9일 - 1968년 3월 27일)은 소비에트 연방의 우주비행사, 군인으로, 1961년 4월 12일에 인류로서는 최초로 지구 궤도를 도는 우주 비행을 하였으며, 6번이나 우주 비행에 성공하였다. 가가린은 그 공적으로 각국으로부터 메달을 수상하였다. 1968년 3월 27일, 7번째 우주비행 훈련 중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어린 시절. 가가린은 1934년 3월 9일 소비에트 연방 스몰렌스크주의 크루시노 마을에서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가가린은 목수였고 어머니 안나 티모페예브나는 낙농업자로 부모님 모두 집단 농장에서 일했다. 1941년 10월 18일 나치 독일군이 크루시노를 점령했고 학교를 불태워 가가린은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나치는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마을 주민들에게 농장일을 강요하였고 이를 거부한 사람들은 구타를 당하거나 그자츠크에 설치된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가가린의 집은 독일 장교에게 빼앗겼고 가족들은 독일군이 철수하기까지 21개월동안 집 뒤에 진흙으로 오두막을 지어 생활했다. 독일 병사 중 한 명이 막내 동생 보리스를 스카프로 사과나무에 매달려고 하자 이에 분노한 가가린은 탱크 배터리에 흙을 붓고 독일군이 사용하는 화학물질들을 무작위로 섞어버리는 등 병사들의 일을 방해했다. 1943년 초, 독일군은 노동력이 부족하자 가가린과 형 발렌틴을 강제로 폴란드로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두 형제는 탈출에 성공하고 자신들을 발견해준 소련군을 도왔다.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 가족들은 두 형제가 모두 죽었다고 생각했었다. 1946년 그가 12살이 되던 해, 유리 가가린의 가족은 그자츠크로 이주하였다. 가가린은 당시 마을에 한 젊은 여성이 자원해 세워진 조잡한 학교를 다녔는데 수학과 과학을 가르치기 위해 새로 온 선생님이 전직 러시아 비행사였다. 함께 모형 비행기를 만들면서 비행 공예에 매료되었고 전쟁 중 야코블레프 전투기 추락 사고가 발생하자 비행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공군 생활. 1950년 그가 16살이 되었을 때는 모스크바 류베르치에 있는 철강 공장에서 주물공으로 견습생 생활을 시작했고 지역에 있던 청년 노동자들을 위한 직업학교에 등록하였다. 7학년의 과정을 마친 후 가가린은 주형 제작 및 주조 공장 작업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사라토프의 산업 기술 학교에 선발되어 트랙터를 공부했다. 사라토프에서 지내는 동안 지역에 있던 비행 클럽에서 비행 훈련을 받기 위해 소련 공군 사관생도로 자원했고 복엽기와 야코블레프 Yak-18을 조종하게 되었다. 1957년 11월 5일, 가가린은 166시간 47분의 비행시간을 가진 소련 공군 소위로 임관했다. 무르만스크주의 노르웨이 국경 근처의 루오스타리 공군 기지로 배치되어 북부 함대에서 2년간 복무하였다. 1959년 7월 7일 그는 3급 군사 조종사로 임명되었고 1959년 10월 6일 루나 3호 발사 이후 우주 탐사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후, 바부시킨 중령의 승인을 받아 그가 제안한 소련 우주 프로그램을 추진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265시간의 비행시간을 축적한 상태였다. 그리고 다음 달 11월 6일 중위로 진급하였다. 소련 우주 프로그램(보스토크 프로그램). 선발과 훈련. 가가린의 선발 테스트는 소련 육군 의료국의 콘스탄틴 표도로비치 보로딘 소장이 이끄는 중앙 비행 의료 위원회에 의해 진행되었다. 가가린은 모스크바에 있는 중앙 항공 과학 연구 병원에서 우사노프 대령의 지휘 하에 신체 및 심리 검사를 받았는데 당시 명시된 신체 기준은 25세에서 30세 사이의 나이, 72kg 이하의 몸무게, 1.70m 이하의 키였다. 154명의 조종사 중 29명이 군의관의 승인을 받았고 이 중 20명이 정부에게 자격을 증명받아 승인되었다. 1960년 3월 15일 모스크바 시내에 있는 호딘카 비행장에서 훈련을 시작했고 4월에는 사라토프주에서 낙하산 훈련을 시작하여, 각각 육지와 해상에서 저고도와 고공에서 약 40~50회의 점프를 완료했다. 가가린은 동료들에게 매우 신임받는 후보였는데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을 뽑는 익명 투표에서 3표를 제외한 모든 표를 받았다고 한다. 동료 중 한명인 예브게니 흐루노프의 증언에 따르면 가가린은 매우 집중력 있고 도움이 필요할 때 큰 힘이 되는 동료라고 한다. 1960년 5월 30일, 가가린은 보스토크 프로그램의 첫 우주비행사로 선발된 가속 훈련 그룹에 추가로 선발되었다. 그룹의 다른 멤버들로 아나톨리 카르타쇼프, 안드리안 니콜라예프, 파벨 포포비치, 게르만 티토프, 발렌틴 발라모프가 선발되었으나 카르타쇼프와 발라모프는 부상을 입어 흐루노프와 그리고리 넬류보프로 대체되었다. 가가린을 포함한 일부 멤버들은 어렸을 때 전쟁으로 인해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주코프스키 공군공업학교에서 통신과정 프로그램을 이수했다. 가가린은 우주 비행사들의 신체적, 심리적 지구력을 시험하도록 설계된 실험의 후보가 되어 격리된 방에 갇혀 천천히 공기를 뿜어내는 산소 결핍 테스트와 열흘간 무반향실의 완전한 격리실험을 받았고 다가오는 비행을 위해 원심분리기에서 G-force 경험 훈련 등을 실시하였다. 실험을 진행한 한 소련 공군 의사는 가가린을 겸손하고, 높은 수준의 지적 발달을 지녔으며 구별 능력과 반응력이 뛰어나며 천체 역학, 수학 공식, 고등 수학 등에서 뛰어난 활용력을 보인다고 평가했다. 뱅가드 식스는 1961년 1월 36일 조종사 칭호를 부여받았으며 보스토크 프로젝트의 감독관인 니콜라이 카마닌 중장이 이끄는 특별 위원회에서 이틀간 시험을 치렀다. 위원회는 인류의 첫 보스토크 프로젝트의 임무에 대한 준비도를 기준으로 후보들의 순위를 매겼는데 가가린은 첫째 날의 면접과 둘째 날의 필기시험에서 모두 우수한 성적을 받아 가장 적합한 후보로서 1등을 차지했고 공동 2등으로 티토프와 넬류보프가 차지했다. 4월 8일 국무위원회 회의에서 카마닌은 가가린을 1차 조종사로, 티토프를 예비 조종사로 공식 선언하였으며 가가린이 발사 전 건강 이상 등의 문제가 생길 경우, 티토프가 1차 조종사를 대행하고 넬류보프가 예비 조종사를 대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보스토크 1차 비행. 1961년 4월 12일 오전 6시 7분에 보스토크 3KA-3 우주선이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발사되면서 가가린은 호출 부호 Kedr(히말라야 삼목)를 이용해 우주에 진입한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 "무중력 상태는 지구의 상황과 비교했을 때 다소 생소했습니다. 여기서는 스트랩을 매고 수평으로 매달린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고 가가린은 비행 후 보고서에서 말했다. 같은 해 출간된 자서전에도 재입국 할 때 '조국은 듣고, 조국은 알고 있다'라는 곡을 불렀다고 적었다. 가가린은 비행 중 소령으로 진급했다. 약 7,000 미터 상공에서 가가린은 계획대로 하강 캡슐에서 탈출하여 낙하산을 이용해 착륙했다. 가가린의 우주 비행 기록은 FAI에 의해 인증 및 재확인되었고, FAI는 규정을 개정했으며, 조종사의 안전한 발사, 궤도 및 귀환을 위한 주요 단계가 달성되었음을 인정했다. 가가린은 지구 궤도를 선회한 최초의 인간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보스토크 1차 비행 이후. 가가린의 비행은 소련 우주 프로그램의 성공이었고, 그는 소비에트 연방과 동구권의 국가적 영웅이자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신문들은 가가린의 비행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찼고 가가린은 모스크바의 거리를 지나 크렘린궁까지 가는 긴 행렬에 호위되었고, 호화로운 연회에서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소련의 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소련의 다른 도시들도 대규모 시위를 벌였는데, 그 규모는 제2차 세계 대전 승리 퍼레이드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가가린은 능숙한 공인으로서 명성을 얻었고 카리스마 넘치는 미소로 유명했다. 가가린은 보스토크 1호 미션을 마치고 3개월 만에 영국 런던과 맨체스터를 방문했다. 맨체스터에 있는 동안 폭우에도 불구하고 환호하는 관중들이 그를 볼 수 있도록 우산을 거부하고 자신이 타고 있는 컨버터블 자동차의 지붕을 열어 서 있었다. 가가린은 비행 후 약 30개국의 초청을 받아 해외 순회공연을 했다. 그의 인기는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가가린의 인기로 인한 미국 방문을 막을 정도였다. 1962년 가가린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대표로 선출되었고 소련 공군의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1963년 11월 6일 대령으로 진급했다. 12월 20일에는 우주비행사 훈련 시설의 부훈련 책임자가 되었다. 2년 후, 그는 소비에트 연방의 대의원으로 재선되었지만 이번에는 입법부의 상원인 연방 소비에트에 선출되었다. 이듬해 그는 전투기 조종사 자격을 다시 얻어 5년 만에 친구 블라디미르 코마로프의 소유스 1호 예비 조종사가 되었다. 가가린은 체중이 늘고 비행 기술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카마닌은 가가린의 우주비행사 훈련 복귀에 반대했었다. 소유즈 1호의 발사는 추가적인 안전 예방이 필요하다는 가가린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암묵적인 정치적 압력에 의해 서둘러 이루어졌다. 가가린은 발사 전에 코마로프와 동행하여 지상통제실에서 코마로프에게 여러 차례의 시스템 고장에 따른 지시를 전달했다. 그러나 결국 소유즈 1호는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추락했고, 코마로프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소유즈 1호 추락 사고 이후 가가린은 우주 비행 훈련과 참가를 영구히 금지당했다. 그는 또한 비행기의 단독 비행에 대하여 금지당했는데, 이는 그가 힘들게 끌어올린데 반한 강등이었다. 그는 비행 훈련을 재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학업에 전념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면직되었다. 1968년 2월 17일, 가가린은 우주 비행기의 공기역학적 구성에 관한 자신의 논문을 성공적으로 발표했고, 주코프스키 공군 공학 아카데미에서 우등으로 졸업했다. 사망. 가가린은 비행 교관 블라디미르 세료긴과 함께 1968년 3월 27일 키르자흐 근처에서 미코얀구레비치 MiG-15의 시험 비행 훈련 중에 연습기 추락으로 사망하였다. 가가린과 세료긴의 시신은 화장되었고 그들의 재는 크레믈린 벽에 묻혔다. 추락 사고의 원인은 불분명하였기에 여러 음모론을 포함한 여러 이론의 주제가 되었다. 추락 사고에 대한 조사는 공군, 정부 공식위원회, KGB에 의해 최소한 세 번 실시되었다. 2003년 3월 기밀 해제된 KGB의 보고서는 공군기지 요원의 행동이 추락에 기여했다고 지적하며 다양한 음모론들을 일축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항공 교통 관제사가 가가린에게 부정확한 기상 정보를 제공했으며 비행 당시 상태가 크게 악화됐다고 밝혔다. 또한 지상 승무원들은 가가린의 비행 계획에 필요 없었던 외부 연료 탱크를 항공기에 부착했다. 조사 결과 가가린의 항공기는 새의 충돌 또는 다른 항공기를 피하려는 갑작스러운 움직임으로 인해 회전에 돌입하였고 부정확한 기상정보 때문에 승무원들은 당시 고도를 더 높게 판단하여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2005년 최초 충돌 조사관이 제안한 또 다른 이론은 승무원이나 이전 조종사가 실수로 실내 공기 통풍구를 열어두고 산소 결핍으로 이어져 승무원이 항공기를 제어할 수 없게 되었다는 가설이다. 이와 유사한 이론으로, 에어 앤 스페이스 잡지에 게재되었는데, 승무원들이 개방된 환풍구를 감지하고 낮은 고도로 급강하하여 절차를 따랐으나 급강하로 인해 의식을 잃고 추락했다는 것이다. 2007년 4월 12일, 구 소련 정부는 가가린의 죽음에 대한 새로운 조사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정부 관계자들은 새로운 조사를 시작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1968년에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이 사고를 조사하기 위해 설치한 위원회의 문서는 2011년 4월에 기밀 해제되었다. 이 문서에 따르면 가가린이나 세료긴이 기상 관측 기구를 피하거나 "구름 덮개의 첫 층의 상한선 진입"을 피하기 위해 급작스럽게 움직여서 제트기를 "초임계 비행 체제"로 만들고 복잡한 기상 조건에서 정지시켰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상훈. 1961년 4월 15일, 소련 과학 아카데미는 가가린에게 러시아 우주 항공학의 선구자의 이름을 딴 콘스탄틴 치올콥스키 금메달을 수여했다. 가가린은 또한 그의 경력 동안 4개의 소련 기념 메달을 받았다. 1961년 4월 29일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같은 해 4월 29일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7월 26일에는 쿠바 혁명의 시작 8주년을 맞아 쿠바의 오스발도 도르티코스 대통령에게 새로 만들어진 플라야 지론 훈장을 수여받았다. 가가린은 또한 1960년 스위스 에로나우티크 국제 페데레이션으로부터 1960년 골드 에어 메달과 1961년 데 라 폴크스 메달을 받았다. 그는 그 해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별(2등급), 폴란드 그룬발트 십자 훈장(1등급), 헝가리 국기 훈장, 베트남 민주 공화국 노동영웅상, 이탈리아 콜럼버스 훈장 등 다른 나라들로부터 수많은 상을 받았다. 1961년 8월 2일 브라질의 대통령 Jánio Quadros에게 사령관 등급의 항공 훈장을 받았고, 1962년 1월 말 이집트 순방 중에 가가린은 나일강 훈장과 카이로의 황금 열쇠를 받았다. 1963년 10월 22일 가가린과 발렌티나 테레시코바는 독일 민주 공화국으로부터 카를 마르크스 훈장을 받았다. 헌사. 가가린의 우주 비행 날짜인 4월 12일은 기념되었다. 1962년부터 소련과 옛 영토 대부분에서 우주 비행사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 2000년부터, 우주 탐험의 이정표를 기념하기 위해 국제적인 기념 행사인 유리의 밤이 매년 열리고 있고 2011년, 국제 연합에 의해 국제 우주 비행의 날로 지정되었다. 많은 건물들과 장소들이 가가린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968년 4월 30일, 스타시티에 유리 가가린 우주비행사 훈련 센터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스푸트니크 1호와 보스토크 1호가 발사된 바이코누르 우주 기지의 발사대는 현재 가가린의 시작점으로 유명하다. 세바스토폴에 있는 가가린 라이온은 소련 시절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러시아 공군사관학교는 1968년에 가가린 공군사관학교로 개칭되었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한 거리는 유리 가가린 거리라고 불리며 1961년 아르메니아 가가린이라는 마을이 그의 이름을 따서 개칭되었다. 가가린은 우주비행사와 천문학자들로부터 기려졌다. 1969년 미국 우주 프로그램의 아폴로 11호 임무 동안,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은 달 표면에 가가린과 코마로프를 기념하는 메달이 담긴 기념 책가방을 남겼다. 1971년, 아폴로 15호 우주비행사 데이비드 스콧과 제임스 어윈은 우주 경쟁에서 사망한 미국 우주비행사와 소련 우주비행사를 추모하기 위해 그들의 착륙 지점에 작은 폴른 우주비행사 조각상을 남겼다. 가가린은 1976년 뉴멕시코주 국제 우주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1981년에는 그의 비행 20주년을 기념하는 구리 니켈로 된 1루블 기념주화, 1991년에는 그의 비행 30주년을 기념하는 은으로 된 3루블 기념 주화가 발행되었다. 2001년에는 가가린의 비행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러시아에서는 그의 모습이 새겨진 4개의 동전이 발행되었다. 2011년, 러시아는 그의 비행 50주년을 기념하여 금으로 된 1,000 루블 동전과 은으로 된 3 루블 동전을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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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패션(Fashion)은 현재의 (끊임없이 변하는) 유행으로 이루어진다. 논리적이거나 추상적인 이유보다는 사소한 취향에 따라서 변한다. 종종 옷이나 모습에 쓰이곤 하지만, 패션의 개념은 음악, 예술, 정치 그리고 심지어는 수학과 프로그래밍 기술의 선택까지도 포함한다. 주로 의복의 유행을 가리켜 쓰이곤 하지만 가구, 공예, 건축, 인테리어, 액세서리등 광범위한 범위에 적용되어 쓰이기도 한다. 패션은 미학과 혁신의 틈에 있는 것이다. 어원. 패션(Fashion)은 행위나 활동하는 것(doing) 또는 만드는 것(making)을 뜻하는 라틴어의 팩티오(factio)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전적 의미는 '양식, 방식, 형, 유행, 관습, 습관' 등 다양하며, 실제로 모든 생활양식 그 자체가 패션이라 할 수 있다. 패션 산업. 패션 산업은 현대의 산물이다. 19세기 중반 이전에 대부분의 옷은 주문 제작 되었다. 즉, 옷은 개인에 의해 또는 재봉사와 재단사로부터 주문에 의해 수작업 되었다. 20세기가 시작하면서 재봉틀과 같이 새로운 기술의 발달과 함께 전 세계적 자본주의와 공장제도가 발달하면서 백화점 아울렛이 급증하였고 옷은 점점 더 표준치에서 대량생산되고 고정된 가격에서 팔리기 시작했다. 패션산업은 유럽과 미국에서 처음으로 발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015년 기준으로 국제적이고 매우 세계화된 산업이 되었다. 한나라에서 디자인되어 다른 나라에서 제조되고 또 전 세계로 팔렸다. 예를 들어 미국의 한 패션 회사는 중국에서 천은 얻어 베트남에서 제조된 옷을 가지고 이탈리아에 팔았고 이 옷들은 국제적인 소매 판매점에 분배하기 위해 다시 미국의 창고로 옮겨졌다. 패션산업은 오랫동안 미국의 가장 거대한 고용주들 중 하나가 되어왔고 21세기 또한 그럴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고용은 생산이 점점 해외로 특히 중국으로 옮겨짐에 따라 상당하게 감소하였다. 패션산업의 자료는 전형적으로 국제적 경제에 의해 보고되고 산업의 많은 세분화된 분야에 관해 표현되기 때문에 직물과 옷의 세계적인 생산에 관한 총계수치는 얻기 어렵다. 하지만 틀림없이 의류 산업은 세계 경제 산출에 상당한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패션 산업은 네 개로 구성된다: 이 단계들은 많이 세분화되어있지만 상호의존적이다. 이 분야들은 직물 디자인과 생산, 패션 디자인과 생산, 패션 소매업, 마케팅과 상업, 패션쇼, 그리고 매체와 마케팅으로 나뉜다. 각각의 분야는 이익에 맞게 운용되는 산업에서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하에 옷에 대한 소비자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헌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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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그 칸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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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국가인민군
국가인민군()은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의 군대다. 역사. 창설. 국가인민군(이하 동독군)은 1956년 3월 1일에 창설되었다. 동독군의 뿌리는 1952년에 창설된 "병영화된 인민경찰(KVP)"이다. NVA는 직업군인으로 일하는 모병제가 1962년 1월 24일, 징병제 발표 이전까지 시행되었다. 징병은 18세에서 26세의 성인 남성을 위주로 징병했으며, 최소 복무기간은 18개월이었다. 과감히 구 나치 독일이나 귀족들의 잔제를 청산하면서도, 나치 독일의 군복과 철모를 조금 변환해서 사용하는 등, 구 독일 국방군의 문화를 많이 유지했다. 창설 첫해에 동독군 장교의 27%가 구 독일 국방군 출신이였고 6년동안은 모병제를 유지해오다가 징병제를 통해서 1962년에 17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60년대에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경력이 있던 병력들은 퇴역하게 되었다. 냉전기. 동독군은 공산권과 관련한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진 않았지만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당시 바르샤바 조약군의 진압 임무를 지원했으며 아프리카에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였다. 프라하의 봄 당시 동독은 7전차사단과 11차량화소총사단을 파견해 소련군을 지원할 계획을 세웠지만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독일 군대가 타국을 침공했다는 국제적 비판이 우려되어서 실행되지는 않았다. 대신 소련군의 병참을 지원하였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동독군은 전투 준비(Gefechtsbereitschaft)에 들어갔는데 북대서양 조약 기구가 잠수함발사 탄도유도탄과 같은 막강한 병기들을 잇달아 전개했기 때문이다. 결국 동독군의 85%는 끊임없는 경보에 시달리며 25~30분 안에 그들의 주둔지에서 5~7km를 벗어나는 훈련을 했다. 동원령은 이틀 안에 완료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1970년대 초에 주동독 소련군 최고 사령부는 전시 동독군의 서베를린 점령에 할당했다. '작전명 도심'으로 명명된 작전에서는 두 개 사단으로 이루어진 32,000여 명의 병력들이 주동독 소련군 6독립근위차량화소총여단과 함께 서베를린을 장악하자는 내용이였다. 390여 대의 전차, 400여 대의 장갑차, 400여 기의 대전차화기, 450여 문의 포병 전력이 동원되는 것으로 계획되었으며, 해당 작계(작전 계획)은 1988년까지 갱신되었다. 1980년부터 벌여진 폴란드의 노동 운동으로 1981년에 동독군은 소련의 폴란드 침공시 소련군을 지원할 계획을 했지만 1981년 12월 13일 폴란드 수상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가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일단락되었다. 동독군이 비상 전투태세를 발령했을 때는 1961년 베를린 장벽건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1968년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그리고 1989년이였다. 대체복무제와 신념에 의한 병역거부. 동독에서는 종교적 이유 이외에는 군 복무를 대체할 만한 근무는 없었으나, 1964년 "바우졸다텐"(건설단)이 대체근무를 할 수 있도록 창설되었다. 건설단은 주로 군사시설 건설에 동원되었고, 몇몇은 병원이나 기타 사회 봉사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건설단으로 군 복무 하게 되면, 일하는 동안은 물론 군복무를 마치고 나서도 불이익이 많았다. 신념에 의한 병역 거부 또한 불법이었고, 군 복무 기간만큼 복역해야 했다. 때로 그들은 신념에 의한 병역거부를 허용하는 서독으로 탈출하기도 했다. 건설단은 조직도나 그 기능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속도전 청년돌격대와 매우 유사한 형태이다. 독일 통일 이후. 1990년, 동독군은 서독의 독일 연방방위군(Bundeswehr)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1:1 통합은 아니어서 대다수의 현역 장교들은 그들의 임무를 중단해야 했고, 설사 편입된다 하더라도 대부분 1 계급 강등과 함께 임금도 삭감되는 불이익을 받았다. 대부분의 막사는 폐쇄되었고, 많은 동독군의 장비는 다른 국가의 군대로 수출되었다. 1990년 당시 구 동독군의 장비와 수량은 다음과 같다. 편제. 동독군은 4개의 주요 편제가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제복. 나치를 상징하는 하켄크로이츠 등의 휘장이 폐지되고, 간부용 정모 크라운의 디자인이 소련식을 참고한 디자인으로 변경된 것 외에는 대체로 나치 시대. 독일 국방군 군복 디자인을 유지하였다. 독특한 형태로 유명한 철모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독일 국방군이 시험적으로 일부 도입했던 철모 디자인을 사용한 것이다. 독일 통일 이후 중고품으로 방출된 동독 군복이 나치 시대 군복으로 개조되어 군사 매니아들에게 팔리는 일이 종종 있다. 대 나토 전쟁에서 동독군의 임무. 중부에서 동독군이 소련군과 함께 루르 지역과 프랑스의 알자스-로렌 지방까지를 목표로 진격하기로 했다. 동독군은 보고서에 의하면 타 바르샤바 조약 가맹군에 비해서 나토 가맹국들을 상대할 때 상대적으로 전투의지가 크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독군을 상대할 때는 사기가 매우 저하된다고 예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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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사용자가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입출력 등의 기능을 알기 쉬운 아이콘 따위의 그래픽으로 나타낸 것이다.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화면 위의 물체나 틀, 색상과 같은 그래픽 요소들을 어떠한 기능과 용도를 나타내기 위해 고안된 사용자를 위한 컴퓨터 인터페이스이다.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에서 어떤 요소를 제어하려면 그 요소에 해당하는 그래픽을 직접 조작하여야 한다. 일반적으로 2차원의 공간에서 그 기능을 은유적 혹은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그래픽으로 요소를 꾸미고 이를 선택, 이동, 복사하여 작동한다. 이를테면, X자와 같은 형태의 그래픽 요소는 이를 선택하면 삭제하거나 취소하는 기능을 수행하게 되며 어떤 파일을 나타내는 아이콘을 어느 위치에서 다른 하드 디스크의 장소를 나타내는 공간으로 이동하면 복사가 된다. 컴퓨터 자판의 명령어 입력이 요구되는 명령 줄 인터페이스(CLI)의 가파른 학습 곡선에 대응하여 GUI가 도입되었다. GUI의 동작은 일반적으로 그래픽 요소의 직접 조작을 통해 수행된다. 컴퓨터를 넘어 GUI는 MP3 플레이어 등, 포터블 미디어 플레이어, 게이밍 장치, 스마트폰, 소형 가전, 사무 및 산업 제어 등 수많은 휴대용 모바일 장치에 사용된다. 윈도우와 리눅스, OS X을 비롯한 대부분의 현대 운영 체제들이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지원한다. 리눅스 및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에서는 X 윈도 시스템을 주로 사용하며, 모티프, Qt, GTK+ 등의 툴킷으로 확장할 수 있다. 역사.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아이디어는 1960년대에 제안되었다. 이반 서덜랜드가 1963년에 개발한 스케치패드는 컴퓨터 지원 설계(CAD) 소프트웨어의 조상이자 최초로 완전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구현한 것이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더글라스 엥겔바트를 비롯한 SRI 인터내셔널의 연구자들은 하이퍼링크를 기반으로 마우스를 사용하는 NLS(On-line System)를 개발하였다. NLS의 하이퍼링크 개념은 제록스 파크에서 그래픽으로 확장되었으며, 1973년에 개발된 제록스 알토 컴퓨터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사용하는 최초의 컴퓨터가 되었다. 현재 대부분의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들은 기본적으로 이 인터페이스로부터 유래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이들을 ‘파크 사용자 인터페이스(PUI)’라 부르기도 한다. 파크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윈도, 메뉴, 아이콘, 라디오 단추, 체크 상자 등의 그래픽 요소들을 사용하며, 마우스와 같은 포인팅 장치를 키보드와 함께 사용한다. 이후 애플 컴퓨터는 제록스 파크에서 만든 이러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보고 당시 비상장이었던 애플의 주식 액면가 100만 달러 어치를 지불하고 기본적인 기술을 전수받았다. 1981년에 개인용 컴퓨터인 1983년에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에 기반한 컴퓨터 리사(LISA)를 출시했지만 값이 너무 비싼 탓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후 1984년에 나온 애플의 매킨토시는 상업적인 성공을 이뤘다. 한편 매킨토시가 이러한 성공을 거두자 마이크로소프트사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를 개발하였다. 이는 매킨토시의 아이디어를 다시 모방한 것이었으며 이후 법정소송을 거치기도 하였다. 1995년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윈도우 95를 출시하여 성공을 거둠으로써 본격적인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대중화를 이루었다. 한편 CUI(character user interface, 명령 줄 인터페이스) OS인 유닉스(UNIX)와 그 계열의 리눅스에서는, X 윈도 시스템을 통해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구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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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알라 룸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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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정
음정(音程, interval)은 음악이론에서 두 음의 높이 차이, 즉 두 음 사이의 거리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두 음이 시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울리는 것을 선율적 음정, 동시에 울리는 것을 화성적 음정이라고 한다. 음이름에 준하여 얼마만큼 떨어져 있는가에 따라서 도수가 결정되고, 같은 도수 안에서도 실제 음과 음의 간격에 따라서 도수 앞에 성질을 표기한다. 즉, 완벽한 음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 성질 + 도수 " 로 표기되어야 하며, 한글로는 완전5도, 장3도, 증4도, 단2도 와 같이 표기, 영어로는 Perfect 5th, Major 3rd, Augmented 4th, minor 2nd 와 같이 표기한다. (영문의 앞글자를 따서 P5, M3, A4, m2 등으로 축약하여 쓰기도 한다.) 보통 음악가들간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쓰이는 음악이론의 기초이며, 대개 화성학에서 초반부에 다룬다. 음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계산 원리. 도수. 음 사이의 간격에 대한 도수는 음이름에 따라 결정되는데, C D E F G A B C, E F G A B C D E의 순번에 준한다. 성질. 이렇게 음과 음 사이의 도수가 정해졌을 때, 그 정해진 도수를 기반으로 정확한 간격을 나타내기 위해 도수 앞에 성질을 표시해야 하는데, 장음계의 계이름을 기준으로 두 음 모두 샵(♯)이나 플랫(♭)이 붙지 않았을 경우, 2, 3, 6, 7도 간격의 경우에는 장(Major) 성질을 붙여서 표기하며, 1, 4, 5, 8도 간격의 경우에는 완전(Perfect) 성질을 붙여서 표기한다. 여기서 기준음, 혹은 비교대상으로 하는 음에 샵(♯) 이나 플랫(♭) 이 붙게되어 음 사이의 간격이 더 넓어지거나 좁아지면, 도수는 변하지 않으나, 장(Major) 성질이었던 음정은 단(minor), 감(diminished), 증(Augmented) 과 같은 성질로 변화하게 되고, 완전(Perfect) 성질이었던 음정은 감(diminished), 증(Augmented) 과 같은 성질로 변화하게 된다. 이와같은 음정의 성질변화는, 위와같은 그림을 통해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설명하곤 한다. 계산법의 종류. 음정을 계산하는 방법으로는 크게 3가지 계산법이 많이 사용되며, 계산하는 사람이 상대음감이냐, 절대음감이냐에 따라 어떤 계산법을 선호하는지가 달라지기도 한다. 계이름 계산법. 상대음감의 경우 음정을 계산할 때 계이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어떤 음과 어떤 다른 음의 음정을 계산해야 한다면, 기준음을 '도', '미' 로 보고 음정을 계산한다. 음이름 계산법. 절대음감의 경우 음정을 계산할 때 음이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로 음을 치면서 "도~", "미~" 라고 노래하면, 귀에서는 음이 들리는데 앞에 있는 사람이 "도", "미" 라고 말하는 것 때문에 굉장히 혼란스러워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들은 음정을 계산할 때도 기준음을 계이름 '도', '미' 로 생각하고 계산하는 것보다 음이름 그대로 계산한다. 반음 개수 계산법. 장음계의 계이름을 떠올리는 것, 또는 기준음을 으뜸음으로 하는 Diatonic Scale (Major Scale) 을 떠올리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나, 암기능력과 속셈에 자신있는 사람들은 음정을 계산할 때 기준음과 비교대상으로 하는 음 사이에 반음이 몇개 들어있는지를 계산해서 암기해놓은 음정을 도출해내는 계산법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계산해 낸 것이 꼭 정확한 값이라고 볼 수는 없다. 피아노 건반을 기준으로 생각하자면 C♯ - D♯ 은 반음 개수가 2개이므로 장2도가 맞지만, 만약 악보(오선지) 에 표기되어있는 음들을 비교할 때 C♯ 과 E♭ 이라고 적혀있는 경우에는 장2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C♯ 과 E♭ 을 피아노로 쳐보면 반음 개수가 2개이므로 장2도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C♯ 과 E♭ 은 도수를 3도로 해석해야하기 때문에 장2도가 아니라 감3도가 맞다. 때문에 반음 개수 계산법이 사실 정확한 계산법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음정을 공부하는 목적이 문제풀이에서 정답을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음악가들끼리 음정단위를 통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느냐 하는 언어학적 목적인 경우에는 이런 계산법을 사용하는 것이 꼭 틀렸다고 비판할 수는 없다. 1cm 와 10mm는 표기법이 다르지만 같은 간격을 나타내듯이 장2도와 감3도는 표기법이 다르지만 사실 같은 음을 지칭하므로 의사소통엔 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계산 시 주의점. 계이름 계산법이나 음이름 계산법으로 계산할 때 계이름과 음이름에 대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음정을 계산하면, 음정의 성질을 잘못 계산할 수 있다. 계이름이라는 것은 원래 조성에 따라 음이름이 달라진다. C Major Key (다장조)에서 계이름 '도'는 실제 음이름도 마찬가지로 C이지만, G Major Key (사장조)에서 계이름 '도'는 실제 음이름이 G이다. 이렇듯 조성 이 무엇인지에 상관없이 계이름은 으뜸음을 '도'부터 시작해서 부르는 것이 권장된다. 예를 들어, F Major Key (바장조) 에서의 계이름인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는 실제 음이름으로 봤을 때 F G A B♭ C D E F 가 되므로 F Major Key (바장조)에서 2, 3, 6, 7음을 반음 내릴 때 계이름인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는 실제 음이름으로 봤을 때 F G♭ A♭, B♭ C D♭ E♭ F 가 되며 B Major Key (나장조) 에서의 계이름인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는 실제 음이름으로 봤을 때 B C♯ D♯ E F♯ G♯ A♯ B 가 되므로 B Major Key (나장조)에서 2, 3, 6, 7음을 반음 내릴 때 계이름인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는 실제 음이름으로 봤을 때 B C D E F♯ G A B 가 된다. 따라서 F - B 가 도수만 놓고 봤을 때는 4도가 맞지만, 완전4도는 아니다. 실제로 F 와 B 가 완전4도 이려면 B 가 B♭ 로 또는 F 가 F♯ 로 바뀌어야만 F - B♭ 또는 F♯ - B 가 되어 완전4도가 되며 B - F 가 도수만 놓고 봤을 때 5도가 맞지만, 완전5도는 아니다. 실제로 B 와 F 가 완전5도 이려면 F 가 F♯ 로 또는 B 가 B♭ 로 바뀌어야만 B - F♯ 또는 B♭ - F 가 되어 완전5도가 된다. 장/단, 완전의 구분. 1, 4, 5, 8도 음정의 경우에는 "장/단" 표기를 절대 사용하지 않고, 2, 3, 6, 7도 음정의 경우에는 "완전" 표기를 절대 사용하지 않는데, 이는 음 과 음 사이의 조화로운 울림에 영향을 끼치는 배음과 관계가 있다. 사인파를 제외한 모든 음(音)은 실제로 하나의 음이 아닌 여러개의 음이 같이 울리는데, 이와 같이 함께 울리는 음들을 배음이라고 부르며, 인간은 그 배음들 중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잘 들리는 1배음을 주로 듣기 때문에 음을 하나로 느끼는 것이다. 이 배음들을 근음인 1배음부터 12배음까지 나열해봤을 때, 각각의 배음들의 음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음정에는 센트 (음악)라는 단위가 있는데, 이것은 음정에서 유니즌을 제외한 가장 낮은 음정단위인 단2도 보다 더 좁은 간격, 즉 12음계를 벗어난 그 사이사이의 미세한 간격을 측정할 때 쓰는 단위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5센트까지의 차이는 잘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4배음까지의 울림에서는 부조화를 느끼지 못해서 완전한 울림이라고 불리었고, 5배음부터는 울림의 부조화를 느꼈기 때문에 완전 대신 장/단 을 쓰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그 외 명칭. 몇가지 음정의 경우에는 " 성질 + 도수 "의 표기법을 벗어나 하나의 단어로 바꿔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5가지 경우가 있다. 평균율 음정 기억법. 다음의 음악은 해당 음정으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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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근 표기법
점근 표기법(漸近 表記法, )은 어떤 함수의 증가 양상을 다른 함수와의 비교로 표현하는 수론과 해석학의 방법이다. 알고리즘의 복잡도를 단순화할 때나 무한급수의 뒷부분을 간소화할 때 쓰인다. 대표적으로 다음의 다섯 가지 표기법이 있다. 이 중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는 것이 대문자 O 표기법으로, 란다우 표기법이라고도 한다. 특히, 알고리즘의 복잡도를 나타내는 용어로는 "계산 복잡도 이론" 또는 "시간복잡도"로 대문자 O 표기법이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대문자 O 표기법 (Big-O notation). 정의. 함수 "formula_1", "formula_2"에 대해 "formula_1"가 "formula_4"라는 것은 상한 점근에 관한 다음의 동치인 정의와 같다. 이를 formula_16 혹은 formula_17로 표기하기도 한다. 예. 두 다항식 formula_18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이때 formula_21이 된다. 증명은 다음과 같다. 표기법 문제. formula_16라는 표현에서, 등호는 원래의 등호와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예를 들어, 어떤 함수가 formula_29이면 formula_30이므로 formula_31로 표기할 수는 있지만, formula_32와 같이 쓰는 것은 잘못된 표기이다. 이 때, 등호 표기는 일반적인 표기법과 다르게 사용된 기호의 남용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formula_4를 원래 정의에서 해당하는 함수들의 집합으로 정의하는 경우도 많이 사용된다. 이러한 경우 formula_17과 같이 표기할 수 있고, 이것은 기호의 원래 정의와 잘 맞아 떨어진다. 다른 표기법들. 대문자 O 표기법과 비슷하게, 다음의 표기법들이 사용된다. 또한 Õ 표기법은 대문자 O 표기법의 일종으로, formula_35는 formula_36(formula_37는 임의의 상수)를 의미한다. 이 표기법은 함수의 로그 증가 비율을 무시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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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O (동음이의)
ISO는 다음을 뜻한다.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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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메인 네임 시스템
도메인 네임 시스템(Domain Name System, DNS)은 호스트의 도메인 이름을 호스트의 네트워크 주소로 바꾸거나 그 반대의 변환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특정 컴퓨터(또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임의의 장치)의 주소를 찾기 위해, 사람이 이해하기 쉬운 도메인 이름을 숫자로 된 식별 번호(IP 주소)로 변환해 준다. 도메인 네임 시스템은 흔히 "전화번호부"에 비유된다. 인터넷 도메인 주소 체계로서 TCP/IP의 응용에서, www.example.com과 같은 주 컴퓨터의 도메인 이름을 192.168.1.0과 같은 IP 주소로 변환하고 라우팅 정보를 제공하는 분산형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이다. 인터넷은 2개의 주요 이름공간을 관리하는데, 하나는 도메인 네임 계층, 다른 하나는 인터넷 프로토콜(IP) 주소 공간이다. 도메인 네임 시스템은 도메인 네임 계층을 관리하며 해당 네임 계층과 주소 공간 간의 변환 서비스를 제공한다. 인터넷 네임 서버와 통신 프로토콜은 도메인 네임 시스템을 구현한다. DNS 네임 서버는 도메인을 위한 DNS 레코드를 저장하는 서버이다. DNS 네임 서버는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쿼리의 응답 정보와 함께 응답한다. 역사. 호스트의 숫자 주소 대신 더 단순한, 더 기억하기 쉬운 이름을 사용하는 일은 ARPANET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탠퍼드 연구소(현재의 SRI 인터내셔널)는 ARPANET의 컴퓨터들의 숫자 주소와 호스트 이름을 매핑하는 HOSTS.TXT라는 이름의 텍스트 파일을 관리하였다. 할당 번호 목록(Assigned Numbers List)이라 불리던 숫자 주소들은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정보과학연구소 소속(소속팀은 SRI와 함께 밀접하게 일했음) 존 포스텔에 의해 관리되었다. 구조. 도메인 이름 공간. 도메인 이름 공간은 도메인 이름을 트리 형태로 구성한 것이다. 트리의 각 노드는 0개 이상의 "리소스 레코드(resource record)"를 가진다. 트리는 루트 존(root zone)에서 시작하여 여러 개의 하위 존으로 나뉜다. 각 DNS 존은 하나의 권한 있는 "네임 서버(authoritative name server)"에 의해 관리되는 노드들의 집합이다. (하나의 네임 서버가 여러 개의 존을 관리할 수도 있다.) 관리 권한은 분할되어서 새로운 존을 형성할 수 있다. 이때, 기존의 도메인 이름 공간의 일부분이 서브도메인 형태로 다른 네임 서버에 권한이 "위임"된다고 한다. 그리고 기존의 존은 새로운 존에 대한 권한을 잃게 된다. 도메인 이름 형성. 도메인 이름 형성에 관한 규칙은 RFC 1035, RFC 1123, RFC 2181에 정의되어 있다. 도메인 이름은 한 개 이상의 부분(레이블)로 이루어지고, 점으로 구분하여 붙여 쓴다.(예: codice_1) 주요 DNS 목록. DNS를 잘못 설정할 경우 인터넷 이용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신뢰할 수 없는 DNS는 해킹, 파싱 등에 노출되므로, 신뢰할 수 있는 DNS 서버만 이용하는 것이 권장된다. 기본적으로 통신사가 제공하는 DNS는 서버가 한국에 소재하여 빠른 응답 속도를 보여준다. 구글과 시만텍의 DNS는 한국에 서버가 소재하진 않지만, 인접국인 일본에 서버가 소재하고 있어, 40ms 미만의 응답 속도를 보여준다. 클라우드플레어(cloudeflare)의 DNS는 한국에 서버를 두어 응답속도가 3~5ms정도의 응답속도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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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또는 조류(鳥類)는 백악기 대멸종에서 살아남은 수각류 공룡을 의미한다. 또한 조류는 보통 비행이 가능하며, 계통적으로는 석형강 공룡상목 ‘조강’(鳥綱)에 속한다. 새는 포유류와 마찬가지로 심장이 2심방, 2심실이며, 허파로 호흡하는 항온동물이다. 조류는 ‘날짐승’이라고도 한다. 특징. 진화. 분류에 따라 8,800 ~ 10,200 종이 분포한다. 가장 작은 종은 벌새이며, 현재 가장 큰 종은 타조이다. 보통 공룡의 멸종기인 6천 600만년전 이후 조류가 생겨났다고 인식되나, 1877년에 독일 졸로호펜에서 발굴된 시조새와 중국에서 발견된 안키오르니스의 화석 등을 통해 수각류 공룡이 약 1억 5,000만 년 전부터 조류의 형태로 진화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고, 백악기 때부터 오리나 닭이 될 조류가 분화되었다. 현재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수각류에 속한다. 각질의 깍지로 덮여 있는 부리와 비늘이 있는 다리, 날개 이외의 뼈대 구조 등은 파충류와 유사하나 체표가 깃털에 싸여 있는 점과, 앞다리가 날개로 변화해 있는 점은 현생하는 다른 동물 무리에서는 볼 수 없다. 감각기관. 조류는 대체로 머리에 비해 눈알이 크고, 망막의 시신경이 발달해 있어 시력이 예민하다. 부엉이 등의 야행성 종에서는 시세포가 간상세포만으로 되어 있으나, 주행성 종에서는 원추세포가 발달해 사람이 느끼는 색상을 거의 대부분 감지할 수 있다. 귀는 머리 부분의 좌우에 한 쌍이 열려 있는데, 모두 깃털로 싸여 있기 때문에, 겉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청각도 잘 발달해, 시각과 함께 조류가 생활하는 데 가장 중요한 감각 기관이다. 반면 후각은 타조목·슴새목 이외에는 예민하지 않으며, 미각도 그리 발달해 있지 않다. 철새 같은 경우는 이동을 해야하는데 이 넓은 지구를 길 한번 잃지 않고 간다. 활동시기. 거의 대부분의 새는 낮에 활동하지만, 올빼미 등 맹금류는 야행성이다. 먹이. 먹이는 종류에 따라 꿀, 나무 열매, 곤충, 쥐, 물고기, 작은 새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번식. 모든 종류가 보통 열개 안팎으로 비교적 적은 수의 알을 낳는데, 대부분 어미새가 몸의 열로 알을 데워 부화시킨다. 알은 다량의 난황을 포함하는 단황란으로, 미수정란의 난황 부분은 하나의 세포로는 동물 중 가장 큰 부피를 차지한다. 이동. 많은 종은 계절에 따라 이주하며, 이러한 새들을 철새라 부른다. 언제, 어느 곳에서 이주하느냐에 따라 여름철새, 겨울철새로 나뉜다. 또, 한 곳에 머무르며 서식하는 새를 텃새라고 하며, 그중에서 한 나라 안에서 단거리로 이동하는 새를 떠돌이새라고 하고, 먼 길을 가기 위해 한 곳에 잠시 머무르는 새를 나그네새라고 한다. 서식지나 이동 경로에서 벗어나 있는 새들은 미조나, 길잃은새라고 한다. 지능. 모든 조류는 보통 지능이 높고 까마귀와 앵무새는 침팬지의 지능에 가까운 수준으로 높다고 알려져 있다. 심지어 평범한 닭이나 비둘기도 연구결과에 따르면 지능이 굉장히 높다. 생식. 새의 성염색체는 ZZ-ZW형으로, 성염색체가 ZZ이면 수컷, ZW이면 암컷이다. 따라서, 새의 정자와 난자 중 성을 결정하는 것은 난자이다. 하위 분류. 조강이 석형류에 포함되지 않을 경우의 하위 분류와 조강에 속하는 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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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위그
위지위그(, "보는 대로 얻는다")는 문서 편집 과정에서 화면에 포맷된 낱말, 문장이 출력물과 동일하게 나오는 방식을 말한다. 이는 편집 명령어를 입력하여 글꼴이나 문장 형태를 바꾸는 방식과 구별된다. 현재 대부분의 워드 프로세서는 위지위그 방식을 쓰고 있으나 HTML이나 TeX는 편집 명령어를 통해 편집하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이는 문서의 호환성, 범용성 때문이다. 역사. 위지위그 기법이 채택되기 전에, 레이아웃(여백, 공백 등)에 거의 관계 없이 시스템 표준 글꼴과 스타일을 사용하여 텍스트가 편집기들에 나타났다. 사용자들은 일부 텍스트가 굵게, 기울임을 써야 하는지, 또 어떠한 크기나 글꼴을 사용해야 하는지를 지시하기 위해 특수한 비인쇄 제어 코드(현재는 마크업 코드 태그라고 함)를 입력해야 했다. 이 환경에서는 문서 편집기와 워드 프로세서 간 차이가 거의 없었다. 1974년 제록스 PARC에서 버틀러 램슨, 찰스 시모니 및 동료들이 개발한 알토용 문서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인 브라보가 일반적으로 위지위그 기술을 통합한 최초의 프로그램으로 간주되며 글꼴, 자간과 같은 형식으로 텍스트를 보여주었다. 뜻. 현대의 소프트웨어는 특정한 종류의 출력을 위해 화면 디스플레이를 최적화한다. 이를테면, 워드 프로세서는 일반 프린터의 출력물에 최적화되어 있다. 이 소프트웨어는 프린터의 해상도를 가상으로 구현하고 위지위그에 최대한 가깝게 만들어 준다. 그러나 그저 사용자가 작업한 것을 보여준다는 능력 자체가 위지위그의 주된 매력 포인트는 아니다. 여러 상황에서, "What You See Is What You Get"이라는 표현이 중요하지 않을 만큼 약간의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사실 응용 프로그램들은 다른 수준의 "현실주의"와 더불어 여러 개의 위지위그 모드를 제공하기도 한다. 문제와 해결. 위지위그 응용 프로그램들의 디자이너들이 보통 저마다 다른 기능을 갖춘 다양한 출력 장치를 고려하기 때문에, 수많은 문제가 비롯될 수 있다. 여러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라면, 여러 해결책을 포함한 응용 프로그램들을 사용하는 것이 낫다. 위지위그 응용 프로그램의 설계 목표: 위의 모든 목표를 한 번에가지고 있다. 프린터는 한 인치에 보통 240에서 1440 화소를 가지고 있다. 일부 프린터의 수직 해상도는 저마다 다르다. 레이아웃 텍스트를 출력하려고 할 때 문제가 될 수 있는데 대부분의 출력 기술이 문자열들 사이에 공간(스페이싱)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다음을 포함한다: 화면에 보여 줄 때 품질을 떨어트리고, 문서가 다른 프린터에 출력된다면 레이아웃이 변경될 수도 있다. (높은 해상도의 프린터에서는 라운딩 문제가 더 적어지므로 이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적다)에서 사용하는 방식이다. 블로그에서의 위지위그. 보통의 가입형 블로그 가입자는 HTML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므로 글을 쓰기가 힘들다. 따라서 글을 쓸때에 위지위그 방식을 많이 이용한다. 대한민국의 네이버 블로그, 다음 블로그, 이글루스 블로그, 티스토리 블로그 등은 모두 지원하며, 또한 HTML로 바로 쓸 수도 있다. 위지위그와 관련된 낱말. '보는 것'은 사용자가 입력한 것, '얻는 것'은 출력되는 것을 가리킨다. S는 ㅅ으로 풀이하였으며 ㅈ로도 읽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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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플라톤(, 플라톤, "넓은, 어깨 폭이 넓은";, ; 기원전 428년/기원전 427년 또는 기원전 424년/기원전 424년 ~ 기원전 348년/기원전 347년)은 다양한 서양 학문에 영향력 있는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사상가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며, 대학의 원형인 고등 교육 기관 ‘아카데메이아’의 교육자이다. 플라톤은 아카데메이아에서 폭넓은 주제를 강의하였으며, 특히 정치학, 윤리학, 형이상학, 인식론 등 많은 철학적 논점에 관해 저술하였다. 플라톤 저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게 그의 대화편이다. 비록 일부 편지는 단지 그의 이름을 붙여서 전해지지만, 플라톤이 쓴 진짜 대화편은 모두 온전하게 전해진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학자들의 합의에 따라, 그리스인들이 플라톤의 것으로 생각하는 ‘알키비아데스 I’과 ‘클레이토폰’ 등과 같은 대화편은 의심스러우며 ‘데모도코스’와 ‘알키비아데스 II’ 등과 같은 대화편은 대개 위조되었다고 판단한다. 편지는 거의 모두 위조되었다고 대개 여기며, 예외로 일곱 번째 편지만 위조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자주 등장하는 주요 등장인물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에 있는 내용과 주장 가운데 무엇이 소크라테스의 것이고 플라톤의 것인지에 관해 많은 논쟁이 있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남긴 저술이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종종 ‘소크라테스의 문제’라고 부른다. 그러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게 확실하다. 따라서 수많은 플라톤의 아이디어, 적어도 그의 초기 연구는 소크라테스에게서 가져오거나 발전시켰을 것이다. 그가 이성 우위의 전통을 가진 서양 철학에 미친 영향은 더할 수 없이 크다. 영국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라고 말했으며, 시인 에머슨은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이다”라고 평하였다. 삶. 플라톤은 아테네의 명문 가정에서 태어났다. 젊었을 때 소크라테스에게 배우고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저서는 모두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으로 된 변증론에 관한 《대화편》이어서 그와 스승과의 학설을 구별하기 힘들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정치가로서의 꿈을 버리고 정의를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다. 이탈리아를 여행하여 키레네 학파로부터 이데아와 변증법의 기초를 얻었고, 피타고라스 학파를 접하며 실천적 정신과 실생활에의 흥미를 얻어 그의 독자적인 사상을 반성하게 되었다. 그 사이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라케스〉 등을 쓰고, 40세에 귀국하여 〈고르기아스〉, 〈대(大)히피아스〉, 〈소(小) 히피아스〉를 썼다. 그는 그의 이상 국가를 실현해 보고자 친구인 디온의 권고로 시켈리아의 참주 디오니시오스 1세의 초청에 응하였으나, 그의 과두 정치를 비난함으로써 분노를 얻어 노예로 팔리기까지 하였다. 후에 그의 저작을 본 퀴레네 사람 덕분에 구출되어 귀국할 수 있었다. 이후 아카데메이아 학원을 건립하고 제자 양성에 전력하면서 저작에 몰두하였다. 〈향연〉, 〈파이돈〉, 〈국가〉, 〈파이드로스〉 등 주요 저술이 여기서 이루어졌고, 이 학원은 529년까지 계속되었다. 대학교의 초기 형태인 ‘아카데미’("Academy")라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기원전 357년 디오니시오스 2세의 간청을 받자 망설이던 끝에 다시 시켈리아로 가서 이상 정치를 펴보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1년 만에 귀국하여 〈법률〉 등 몇 개의 저서를 더 쓴 뒤 81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데아론. 플라톤은 ⟪파이돈⟫부터 스승 소크라테스의 사상에서 독립하여 이데아론이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학설을 제창하였다. 우리가 삼각형을 생각할 경우에 현실적으로 삼각형을 아무리 정확하게 그린다고 해도 어느 하나도 완전하게 그려 낼 수 없다. 그것은 이미 한 변의 직선마저 완전하게 긋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전한 직선, 완전한 삼각형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으며 그 존재를 인정하고 계산도 하여 해답한다. 결국 현실에 있어서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현실의 삼각형은 이 이데아를 인정하는 까닭에 삼각형으로 인식할 수가 있다고 하겠다. 수학의 대상뿐만 아니라 선(善)의, 미(美)의, 용기의 이데아라는 것도 거기에서 생각해 낼 수 있다. 현실적으로는 완전한 선은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겠으나 완전한 선의 이데아는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보다 이것이 낫다고 하는 비교는 할 수 없게 된다. 아름다운 꽃은 조락(凋落)하고 아름다운 경치가 폐허가 되어도 아름다움 자체는 그것 때문에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미의 이데아이다. 이 미의 이데아에 현실의 개체가 의탁될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개체가 된다. 즉 미의 이데아는 아름다운 개체의 원인이다. 사람의 영혼은 원래 이러한 이데아계(界)에 있었는데 육체를 갖추고 이데아를 망각하여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진·선·미를 인식하는 것은 영혼이 원래 살던 이데아계를 상기하는 것과 같다는 상기설을 주장하였다. ‘플라톤의 교육관’ 목적. 그는 인간의 영혼이 육체와 결합된 충동적이며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정욕과, 육체와 결합되지 않으며 불사적인 순수한 이성으로 되어 있다고 하고, '이성'은 매우 순수한 것이지만 이 세계의 배후에 있는 완전 지성 실체계인 이데아를 직관할 수 없으며 세상에 탄생하여 육체 속에 듦으로써 이데아를 잊고 있다. 이 잊었던 이데아를 동경하는 마음이 에로스이며, 현상을 보고 그 원형인 이데아를 '상기'하여(상기설), 인식하는 것이 진리라고 한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적 부분의 덕이 지혜이며, 정욕적 부분의 덕을 절제, 이성의 명령에 복종하여 정욕을 억압하는 기개의 덕을 용기라고 하는 것이다. '올바름(dikaiosyne, 또는 '정의')란 여러 덕이 알맞게 그 기능을 발휘할 때의 상태를 말한다.' 그는 이러한 덕론을 통하여 인간 개인의 윤리학을 논하였다. 그러나 정의의 실현은 개인의 덕을 달성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사회 전체의 윤리설을 주장하였다. 그것이 그의 '국가(Politeia)'이다. 플라톤의 교육방법. 그는 국가를 개인의 확대로 생각하여 개인에 있어서의 정욕의 부분이 농·공·상업의 서민이며, 기개의 부분은 군인·관리, 이성의 부분은 통치자라고 하고, 이성은 당연히 선의 이데아를 인식하여야 하므로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왕이 철학을 해야 한다"고 하는 유명한 철인 정치론을 전개했다. 이러한 통치자의 교육 제도와 방법에서 그의 교육학을 엿볼 수 있다. 플라톤은 교육을 5단계로 나누었다. 첫째 단계는 출생부터 17세까지로서, 이 시기는 기초적인 도야(陶冶)의 단계로 보아, 문예·음악·조형미술 등 비교적 수준이 낮은 지적 도야 및 일반적으로 정서적 방면에 해당되는 학예와 체육을 주로 하였다. 체육도 단지 육체의 단련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 이상의 정신적 도야를 위한 것이었다. 이들 과목은 유희적인 방법으로 가르치게 하였고, 이런 자유로운 학습활동을 하는 가운데 각자의 개성이 발견되게 하였다. 둘째 단계는 17세부터 20세까지로, 이 시기의 교육은 군사훈련의 기초가 되게 하며, 어떤 곤경에도 참아낼 수 있는 강인한 심신을 기르기 위하여 체육만을 전수시킬 것을 주장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성적이 불량한 자는 생산자 계급으로 남게 했다. 셋째 단계는 20세에서 30세까지로, 이 시기에는 철학의 예비교과로써 수학·기하·천문·음악 이론을 체계적으로 배우게 했다. 이 시기에 성적이 불량한 자는 군인으로 남게 했다. 넷째 단계는 30세에서 36세까지로서, 이때에는 전적으로 협의(狹義)의 변증법을 배웠다. 이 시기에는 감각적인 것을 떠나 순수하게 관념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취급하는 시기로 설정하였다. 다섯째 단계는 35세에서 50세까지로서, 이 시기를 플라톤은 '동굴에 들어가는 시기'로 비유하였다. 이때가 되면 인간은 속세에 나와 군사와 정치를 실습·연구하고, 풍부한 경험과 견문을 쌓는다. 50세 이후에는 평생토록 변증법의 초보적인 대상인 선(善)의 이데아를 연구하고, 교대로 정치를 맡으며 후진을 교육한다. 플라톤이 주장했고 또한 '아카데미아'에서 실행한 교육방법은 소크라테스적 방법이었다. 그것은 소피스트들의 논쟁술·궤변술에 빠지는 대화법이 아닌, 자기 성찰과 진리탐구를 위한 방법이며, 생명이 없고 또 문자에 의한 교육이 아닌 살아 있는 말을 존중하는 대화법이었다. 아동발달 연구. 플라톤은 《국가》(, )에서 인간발달에는 세 가지 국면이 있는데, 그것은 욕망, 정신, 그리고 신성이라고 하였다. 가장 낮은 수준의 욕망(desire)은 오늘날 본능, 욕구, 충동으로도 표현되며,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론에서 말하는 원초아의 개념과도 비슷하다. 플라톤에 의하면 욕망은 주로 신체적 욕구만족과 관련되어 있다. 그 다음 수준인 정신은 용기, 확신, 절제, 인내, 대담과 같은 개념이며, 최고의 수준인 신성은 초자연적이고 영원하며 우주의 본질을 이룬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정신으로서 오늘날 이성으로 표현된다. 플라톤은 이미 그 시대에 인간이 성장함에 따라 낮은 수준이 높은 수준으로 대체되는 과정이 발달이라는 생각을 했다. 플라톤에 의하면 3세까지 유아는 공포나 고통, 슬픔의 감정을 경험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유아기는 그 어느 시기보다도 습관에 의해 성격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Platon, 1953)면서 유아에게 쾌락을 제공하는 것은 아이를 버려놓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플라톤은 성격형성에 있어서 초기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경험에 의해 인간의 성격이 수정될 수 있다는 점 또한 인정하였다. 아동기에는 이성이 성숙되지 않기 때문에 아동교육은 주로 음악이나 스포츠 등에 중점을 두고 같은 또래와 어울림으로써 사회성발달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다. 플라톤은 6세가 되면 “남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끼리 놀게 하고, 여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끼리 놀게 하라”고 하면서 성의 분리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전통 아동교육에서의 ‘남녀칠세부동석’ 개념과 유사하다. 청년기가 되면 최고의 국면인 이성이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때는 이성적,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교육과정을 과학이나 수학으로 대체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교육철학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는 교육을 환경의 영향을 받는 정신의 발달이라고 해석하였다. 플라톤은 이미 그 때 개인차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우리 인간은 각기 다른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므로, 각기 적성에 알맞은 일에 종사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Muuss, 1996). 철인 정치. 철인 정치론을 전개한 플라톤은 기본적으로 엘리트에 의한 지배를 옹호한다. 일반적으로 귀족정은 평등사회가 아닌 신분사회를 옹호하는 데, 플라톤 또한 신분사회를 옹호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귀족정의 궁극적인 목적과 그 실현 양태는 일반적인 귀족정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귀족정에서의 왕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같은 높은 신분으로서 도덕적 의무를 중시해야 하는데, 그 실현은 한가지 예를 들면 왕의 사유재산의 형태로 나타난다. 플라톤은 왕의 사유재산은 오직 공익을 위해서만 쓰여야한다(공유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그 밑의 귀족들까지도 사유재산을 공유하자는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신분의 상징인 왕이라면 그만큼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해야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한 정치 일선을 담당한 일선 ‘귀족’들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무사 계급에 기반한 귀족 또는 세습에 의한 귀족이 아니라, 철학 지식이 충만한 철학자들을 가리킨다. 그는 ‘지식인에 의한 독재’를 줄곧 주장해왔으며, 시민 계급에 의한 토론 정치인 아테네의 민주정을 ‘우민 정치’라고 비판해 왔다. 뿐만 아니라 그의 ‘세 가지 주된 덕’("cardinal virtues")에서는 ‘조화’라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데, ‘네가지 주된 덕’에 맞는 각각의 신분이 각자 맡은 일만을 해야하며 그것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일을 한다거나 서민이 전쟁을 한다는 것과 같은 용기를 보이는 것은 플라톤의 관점에선 ‘사회적 부조화’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초기 공산주의. 오늘날 공산주의라고 하면 일컬어지는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전제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만, 인간은 정치·사회적으로 독립될 수 없는 개인이며, 더 나은 정치·, 사회 체제를 만드려는 것이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진리라고 설파했다. 또한 인간은 더 나은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 '이성적 존재'가 되어야 하는 '의무'가 부여된 존재라는 목적론적 인간관이란 개념을 만들었기 때문에 초기 관념적 공산주의 기조의 창시자라고 알려졌다. 이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으로 계승이 되기도 했다. 저작. 현존하는 저작의 대부분은 《대화편》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고,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주요 해설자로 한다. 35편의 《대화편》과 13편의 서간은 전통적으로 플라톤의 것으로 여겨졌으나 현대 학자들은 최소한 일부 저작에 대해서는 진위 여부를 의심하고 있다. 플라톤의 저작은 여러 방식으로 간행된 바 있는데, 그에 따라 플라톤의 글을 명명하고 배열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가 되었다. 플라톤의 글을 분류하는 일반적인 방식은 16세기 앙리 에티엔(헨리쿠스 스테파누스)의 플라톤 판본에서 비롯되었다. 또 플라톤의 글을 배열하는 방식으로 4부극에 따르는 전통이 있었는데,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이 방식이 고대의 학자이자 티베리우스 황제의 궁정 점성가였던 트라쉬불로스의 것이라고 여겼다. 아래 플라톤의 저작 목록에서 학자간에 플라톤이 쓴 글인지 합의가 되어 있지 않은 책은 (1) 표시를, 그리고 일반적으로 플라톤의 저작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책은 (2) 표시를 달았다. 표시가 없는 저작은 플라톤이 쓴 것으로 여겨진다. 그 밖에 저작은 플라톤의 이름을 빌었으나 상당수는 고대에 이미 위작으로 여겨졌으며, 트라쉴로스는 자신의 4부극식 저작 배열에서 이런 류를 넣지 않았다. 아래 작품은 "위작"(Notheuomenoi) 또는 "위서"(Apocrypha)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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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O 639
ISO 639는 전 세계의 언어 명칭에 고유 부호를 부여하는 국제 표준이다. ISO 639 표준은 몇 개의 세부 표준으로 구성되는데, 이 가운데 두 가지가 현재 발표되어 있고 나머지는 아직 작업 중이다. ISO 639의 세부 표준. 세부 표준은 다음과 같다. 언어 부호 목록. 언어의 한국어 명칭에 따라 가나다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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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공격
진주만 공격(眞珠灣 攻擊, ) 또는 진주만 공습() 혹은 진주만 폭격()는 1941년 12월 7일 미합중국 하와이주 오아후섬의 미합중국 해군의 진주만 기지를 일본 해군이 기습한 공격이다. 진주만 공격은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 해군이 진주만에 대한 공격을 가했다. 하와이주 오아후 섬에 위치한 진주만에 대한 기습 공격은 미국 태평양 함대와 이를 지키는 공군과 해병대를 대상으로 감행되었다. 결국 진주만 공격으로 12척의 미 해군의 함선이 피해를 입거나 침몰했고, 188대의 비행기가 격추되거나 손상을 입었으며, 2,335명의 군인과 68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관은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의 시작으로 폭격을 계획하였고, 나구모 주이치 부사령관이 지휘를 맡았다. 일본군은 이 작전에서 64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항구에 있지 않았던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3척과 유류 보관소와 병기창 등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미국은 이와 같은 자원을 이용해서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원상복구를 할 수 있었다. 미국 국민들은 진주만 공격을 배신행위로 보고, 일본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일치단결하여 복구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이는 훗날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준비. 일본은 만주를 점령한 몇 년 뒤인 1937년부터 중국과 전쟁을 하고 있었다(중일전쟁). 1941년에는 일본과 미국과의 오래된 긴장이 더 고조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일본에 무기 제조에 필요한 고철 수출을 금지했으며, 석유 수출 금지, 미국 내 일본 재산 동결, 일본 선박의 파나마 운하 통과 거부로 중국 내에서의 군사행동을 위축시키고자 했다. 1941년 11월 26일의 헐 노트를 마지막으로 외교적 노력은 절정에 다다랐고, 도조 히데키 수상은 자신의 각료들에게 이것이 최후통첩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석유 봉쇄는 유전이 없어서 대부분의 석유를 미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수입하던 일본에게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세 가지의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이 세 가지 중에 마지막을 선택하였다. 진주만 공격의 목표는 미국의 태평양에서의 해군력을 무력화하여 전면전이나 동시 다발적인 준비된 공격을 잠시나마 막는 것이었다. 11월 26일은 일본의 연합 함대가 진주만을 향해 출정한 날이다. 일본은 미국이 제시한 헐 통지문 내용과 상관없이 그 이전부터 전쟁을 준비해 왔었다. 그 근거로 일본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보고서를 주일 미국 대사관의 조지프 그루(Joseph Grew) 대사가 본국에 송신하였으나, 유럽 내 전쟁 문제에 몰두하던 미국 정부는 그것을 묵살하였다. 일본군의 공격 임박설에 대한 사전 정보들은 많았으나, 아무도 이 정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941년 1월 주일대사 조셉 그류는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 계획 정보를 입수했다. 공격개시 수시간 전에 진주만 외곽에서 한 대의 잠수함이 발견되고 다른 한 대는 원인 불명인 채 침몰되었으며, 오아우 북쪽 해안 레이다 기지에서는 거대한 비행물체가 포착되었다. 많은 관리들은 일본군의 공격임박설을 알고 있었으나, 그 대상이 일본으로부터 5,000 마일 떨어진 진주만이 아닌 필리핀이라고 생각했다. 1941년 진주만의 일요일 아침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루의 일과가 진행되었지만, 진주만 북쪽 200마일에서는 차가운 물살을 가르며 항진하는 항모 위에서 항공기들이 발진하고 있었다. 일본군 항공기의 라디오에는 하와이 방송국에서 흘러 나오는 달콤한 음악이 들려 오고,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어서 공격 목표물을 훤히 볼 수가 있었다고 그 당시 공격에 참가했던 일본제국 해군 소좌 미쯔오 후지다(Mitsuo Fuchida)는 회고했다. 심지어, 레이다에 일본군 전투기와 폭격기가 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당일 아침녘에 오기로 한 B-17 폭격편대로 오인하게 된다. 다만 당시 일본군 함재기는 항공모함의 위치가 노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크게 우회해 진주만의 북동쪽 방향에서 접근하였기 때문에 충분히 오인의 여지가 있었으며, 실제로 이후 군사재판에서도 당시 근무자들에 대한 태만을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진주만 공격 이후 상황. 루즈벨트 대통령은 12월 7일을 치욕의 날로 선포했고, 그로부터 3일 뒤 미국 의회는 전쟁을 선포했으며 미국인들은 일본이 본토로 쳐들어 올 것을 대비해 전쟁 준비를 했고, 애국심에 군대에 자원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한인들은 진주만 공격 이후 일본인에게 반감을 사게 된 미국의 생각을 반겼으며 미 정부에 한인으로 구성된 미 육군부대를 훈련시켜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주 방위군 휴스 대령은 한인 중대를 조직하는데 협조해 주겠다는 약속을 해왔으며 이에 나이가 18세부터 64세까지인 한인들 50명이 지원했고 중국인들과 필리핀인들도 가세하여 동양인 대대가 구성되었다. 이 대대의 이름은 '맹호군'이었고 대대장은 김용성이었다. 맹호군의 정식 인가가 1942년 4월 26일에 나왔고 대대기가 수여되었다. 진주만 기습과 관련된 음모론(통킹만). 태평양 전쟁 발발과 관련하여 미국이 일본의 공격을 유도했다는 소위 “음모론”이 떠돌고 있고, 그중 하나가 진주만 공격 당시 미 해군이 일부러 격침되어도 상관없는 구식 전함들만을 배치했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애리조나호 등 정박 중이던 미군 전함들은 1941년 기준으로 취역한 지 30년 가까이 된 전함이었다. 가장 젊은 편인 애리조나호도 취역 연도가 1915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상황을 모르는 오해에 불과하다. 미군은 1922년 워싱턴 군축 조약에 따라 1920년대 이후에 신형 전함을 한 척도 건조하지 못했다. 워싱턴 군축 조약 결과 미국을 비롯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은 일정한 비율의 전함만을 보유할 수 있었을뿐더러 신형함 건조는 제한되었다. 이미 건조 중이던 전함 및 대형 중순양함은 1920년대에 항공모함으로 용도 변경되었다(1920년대와 30년대에 각국이 항공모함을 취역시킨 원인은 항공모함의 가치에 주목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일찌감치 군축 조약에서 탈퇴한 일본은 신형함 건조를 1930년대 초부터 진행해 왔으나, 미국은 1937년 이후부터 서둘러 신형함 건조를 시작했고, 1941년 12월까지 신규 건조된 최신형 전함은 단 2척이었다. 위의 피해 현황에도 나오지만, 전쟁 초기 군함이 부족했던 미국은 가능한 한 인양하여 수리한 후에 재투입했다. 문제가 된 구식 전함 가운데 애리조나호와 연습 표적함이던 유타호를 제외한 나머지 전함은 모두 일선에 복귀하였다. 뒤늦게 신형함 건조를 시작한 탓에 가용 가능한 군함은 구식함뿐이었던 미군이었지만, 일본군은 그 함대가 두려워 조기에 기습했던 것이다. 참고로 신형함 건조 시작 이후에도 미군은 전함이 모자라 진주만 공격 당시 파손된 구식 전함을 수리해서 다시 전투에 투입했다. 특히, 만약 미군이 일본의 공격을 유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하게 둘 필요도 없이 차라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중간 해역에서 요격하여 참전 명분은 명분대로 얻고 훨씬 적은 피해로 일본을 무력화할 수 있었을 것이나, 실제로는 진주만이 궤멸만 간신히 면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는 점에서도 미국이 일본의 공격을 유도했다는 설은 신빙성이 부족하다. 진주만 공격 후 일본인들의 피해. 일본의 진주만 공격후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은 큰 반감을 사게 되었다. 미국 정부는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인수용소를 만들었고, 전쟁이 끝날때까지 일본인들을 강제수용시켰다. 애리조나호 기념관. 진주만에 있는 애리조나호 기념관(USS Arizona Memorial)은 진주만 공격 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애리조나호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애리조나호는 그 당시 공격을 받은 지 불과 9분만에 침몰하였고, 총 인명피해 2403명 중 1177명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선체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가 그 위에 기념관을 만들었다. 이 기념관을 설계한 사람은 알프레드 프레이스이고 2차 세계대전 이후 1958년에 기념관 착공 그로부터 3년 후에 완공되었다. 출처. "The Attack on Pearl Harbor: An Illustrated History" by Larry Kimmett and Margaret Regis is a careful recreation of the "Day of Infamy" using maps, photos, unique illustrations, and an animated CD. From the early stages of Japanese planning, through the attack on Battleship Row, to the salvage of the U.S. Pacific fleet, this book provides a detailed overview of the att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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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11 색 이름
X11 색 이름은 X 윈도 시스템에서 RGB 색에 대응하는 고유한 명칭의 색 이름이다. 아래의 표는 CSS에서 사용되는 색상 이름의 목록이다. 상세. HTML에서 "Gray"는 검은색과 흰색을 정확히 1:1 비율로 섞은 (128, 128, 128)로 정의되지만, X11에서의 "Gray"는 HTML에서의 "Silver"(192, 192, 192) 에 가까운 (190, 190, 190)으로 정의된다. HTML에서의 "Gray"는 "LightGray" (211, 211, 211), "DarkGray" (169, 169, 169)보다 더 어둡다. 기본 색상에서 modify된 색상을 정의하고 이를 RGB로 환산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Gray30은 채도가 0%, 명도가 30% 이므로 "k" = = 76.5에서 Gray30의 RGB값은 (77, 77, 77) 이고, X11 회색에 가장 가까운 Gray75의 RGB값은 (191,191,191)이다. 또한, Gray 계열이 아닌 색상을 정의하는 데에 있어서 기본 색상 이름 뒤에 1부터 4까지의 숫자를 붙인 'Color1', 'Color2', 'Color3', 'Color4'와 같이 이름을 짓는다. 이때, Color1은 기본 색상의 명도를 100%로 변경한 색이고, Color2, Color3, Color4는 각각 0.932, 0.804, 0,548을 Color1의 명도에 곱한 색이다. 이를 식으로 쓰면 다음과 같다:
2262
19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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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뒤러
알브레히트 뒤러(, 1471년 5월 21일 - 1528년 4월 6일)는 독일의 화가, 판화가, 조각가다.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이며, 특히 목판화, 동판화 및 수채화에서 독창적 재질을 보였다. 삶과 창작 활동. 뉘른베르크에서 금세공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는 부친 아래서 금세공을 배웠으나 화가가 되기 위해 미하엘 볼게무트(Michael Wolgemut)의 문하생이 되었다. 1490년 부활절부터 1494년 오순절까지 알브레히트 뒤러는 오버라인 각지를 편력했다. 살아생전 했던 세 번의 장기 여행 가운데 첫 번째였던 이 여행의 여정은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처음에는 네덜란드나 중부 라인 지역에 머물렀다가, 1492년에 엘사스 지역에 머물렀던 것 같다. 그는 자신에게 커다란 인상을 준 작품을 만든 마르틴 숀가우어(Martin Schongauer)를 방문하기 위해서 콜마르(Colmar)를 찾아갔지만, 숀가우어가 이미 1419년 2월 2일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나중에 뒤러는 바젤에서 활동했는데, 그곳에서 세바스티안 브란트(Sebastian)의 책〈바보배Narrenschiff〉(1494년 초판 인쇄)에 실린 유명한 목판화를 제작했다. 여행에서 뉘른베르크로 돌아온 그는 1494년 아그네스 프라이(Agnes Frey)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오래되고 명망이 있는 뉘른베르크 가문의 출신이었지만, 그녀 사이 자식은 없었다. 그와 그의 두 형제 모두 자식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뒤러 가문은 대가 끊기고 사라졌다. 결혼하고서 약 3개월이 지난 1494년 10월 초순에 그는 신혼인 아내를 혼자 남겨 두고 베네치아로 여행, 이듬해인 1495년에 귀국하였다. 이 제1차 이탈리아 여행에서 당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미술을 가까이 한 게 뒤러 자신에게서나, 또 후의 독일 회화 전체를 위해서도 커다란 의의 있는 일이었다. 그때 구체적인 성과는 그가 여행 도중 틈틈이 그린 몇 점의 수채화에 있었다. 여기에는 새로운 자연을 접할 때 느끼는 화가의 신선한 감동이 싱싱한 서정성과 날카로운 자연 관조를 바탕으로 하여 훌륭하게 표현했으며, 이른바 도나우 파의 작품과 더불어 그 후 유럽 풍경화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1497년부터 독립을 했고, 1503년부터는 한스 쇼이펠라인(Hans Schäufelein), 한스 폰 쿨름바흐(Hans von Kulmbach), 한스 발둥 그리엔(Hans Baldung Grien)과 함께 작업장을 운영했다. 그는 뉘른베르크 알트슈타드에 있던 그의 작업장에서 아주 열심히 일했다. 이 시기 주로 초상화와 몇 점의 자화상을 만들었다. 〈아버지의 초상화〉(1498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자화상〉(1498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린다우의 상인〈오스볼트의 초상화〉(1499년 바이어른 국립 회화 수집소 소장), 〈자화상〉(1500년 뮌헨 미술관 소장) 등 이 시기 그린 그림들이었다. 당시 이미 작가로서 뒤러의 명성은 꽤 높았으나, 그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만든 게 오히려 판화였다. 특히 1498년 간행한 목판 연작 <요한 묵시록>(1498년)은 뒤러의 삶 뿐만 아니라 유럽 목판화 역사에서도 기념비적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을 이루는 16점 작품은 한 점씩마다 고도의 기술적 완성과 탁월한 화면 구성을 보여 주는데, 그 가운데서도 <네 사람의 기사>는 특히 널리 알려져 있다. 인문주의와 뒤러가 맺고 있는 관계는 콘라트 첼티(Conrad Celtis)의 책 〈지형학으로서의 사랑 quatuor libri amorum〉(1502년)을 위해서 뒤러가 제작한 삽화에 잘 드러나 있다. 첼티는 뒤러를 제2의 아펠레스(Apelles)라고 칭찬했다. 이탈리아 여행과 그 이후 활동. 1505년 뒤러는 베네치아를 향해 두 번째 여행을 떠났다. 당시 베네치아에는 티치아노, 조르조네, 팔마 일 베키오가 활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누구보다도 조반니 벨리니가 그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한 편지에서 뒤러는 벨리니를 "회화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고 언급을 하기도 했다. 진지한 학구열, 근면함, 통찰력을 통해서 뒤러는 고향 도시 뉘른베르크에서도 정확한 소묘의 가치를 평가하는 법과 진실된 자연관을 배우기는 했지만,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서 그는 전혀 예감하지 못했던 색채가 지닌 힘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런 발견은 그의 작품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베네치아에 거주하는 독일의 상인들은 바르톨로메우스 교회를 위해서 커다란 크기의 그림 〈묵주〉를 주문했다. 후에 신성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가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고 그 그림을 구입해서 프라하로 옮기도록 해서, 지금은 프라하의 국립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 그림에는 두 명의 천사가 마리아에게 관을 씌워주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었다. 마리아가 황제에게, 아기 예수가 교황에게, 성 도미니크와 여러 천사들이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묵주를 건네주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에서 베네치아에서 받은 영향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뒤러는 베네치아에서 상당한 인정을 받았고, 베네치아 시 위원회가 만약 그가 영구히 베네치아에 거주한다면 200두카트의 연금을 지급하겠다는 제의를 했지만, 그는 1506년 늦가을 고향 도시로 되돌아오는 여행길에 올랐다. 1506-1514년. 1509년부터 뒤러는 뉘른베르크 시위원회에 의해서 임명된 미술가가 되었다. 사람들은 도시의 예술 계획을 입안하는데 뒤러가 상당부분 관여를 했다고 가정을 한다. 이 시기 동안 작은 크기의 동판화와 목판화 이외에 중요한 목판화 연작을 간행했다. 그 당시 뒤러는 드라이포인트 기법을 이용해서 판화를 제작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렇게 해서 〈성녀 베로니카〉(1510년), 〈고통을 겪는 구세주〉(1512년), 〈참회하는 성 히에로니무스〉(1512년)가 제작되었다. 이 시기부터 뒤러의 작품에서는 목판화가 압도적으로 우세하게 되었고, 뒤러가 그린 회화는 점점 드물게 보게 되었다. 1512년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그린 유화가 있다. 작은 크기의 동판화 연작의 상당 부분이 이 해에 제작되었다. 그리고 뒤러는 막시밀리안 황제로부터 자신의 목판화와 동판화를 복제하는 것을 금지할 수 있는 특별한 권리를 얻었다. 뒤러는 여러 번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주문을 받아서 일을 했다. 늦어도 1510/1511년 이후부터는 관계가 이루어졌다. 뒤러의 친구인 빌리발트 피리크하이머(Willibald Pirckheimer)가 그 관계를 중재했다. 모든 작품은 간접적으로나마 황제의 결혼과 명성을 위한 것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 그의 유명한 동판화 〈기사, 죽음과 악마〉,〈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멜랑콜리아I〉이 제작되었다. 또한 〈파움가르트너 제단화〉도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2달 전에 뒤러는 목판화로 어머니의 초상화를 제작했는데, 이 그림은 서양 미술사에서 죽을 정도로 병약해진 인간을 그린 최초의 초상화였다. 1518-1520년. 이 시기에 뒤러는 집중적으로 비례학과 같은 이론적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1518년 뉘른베르크 시의 대표자로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렸던 제국회의에 참석했으며, 그곳에서 유명 인사들의 모습을 작품으로 남겼다. 네덜란드로의 여행(1520-1521년). 1520년 6월 12일부터 뒤러는 아내와 함께 밤베르크,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쾰른을 거쳐서 안트베르펜과 네덜란드의 다른 도시들로 여행을 갔다. 네덜란드로의 여행은 진짜 개선행진과도 같았다. 도처에서 뒤러는 열렬하게 환영을 받았다. 안트페르펜의 시행정당국은 정착을 하도록 뒤러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 300굴덴의 연금, 아름다운 저택, 무료 숙식과 공공 작업에 대한 보수를 지불하겠다는 제안을 내놓았지만, 시행정당국의 제안은 허사였다. 영주들, 각국의 대사들, 학자들 그리고 예술가들이 그를 열렬하게 찬양했고, 그를 자신들의 모임의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새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카를 5세도 이전의 특권들을 다시 확인해주었다. 특권을 재확인받으려는 것이 이번 여행의 진짜 목적이었다. 네덜란드의 보물같은 예술품을 보고, 그곳의 예술가들과 교류를 할 수 있었던 것이 그에게는 상당히 중요했다. 수 많은 영주, 고위 성직자, 예술가들의 그림도 이번 여행의 결과물이었다. 1521년 7월 2일 그는 뉘른베르크로 돌아가는 여행길에 올랐다. 고향 도시로 돌아온 이후에 뒤러는 다시금 미술작품을 제작하는 데 몰두했다. 1520/1521년에 그는 뉘른베르크 시청사의 장식을 책임졌다. 그 장식은 오늘날에서 사라지고 없지만, 1530년에 제작된 모조품이 빈 알베르티나 미술관에 보관되어 전해지고 있다. 뮌헨의 알테 피나코텍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뒤러의 가장 중요한 작품에 속하는 두 점의 거대한 목판화가 1526년에 제작되었다. 이 목판화는 바오로, 베드로, 마르코 복음 저자, 요한 복음 저자의 실물 크기의 인물상이었으며, 동시에 4가지 체액을 믿는 이론을 형상화한 작품이었다. 뒤러는 원래 이 목판화를 뉘른베르크 시에 선사했고, 시청사에 세워져 전시되었다. 뒤러가 그린 그림 중에서 가장 훌륭한 그림으로 간주되는 뉘른베르크의 상인〈히에로니무스 홀츠슈우어〉라는 유화가 1526년에 그려졌다. 같은 해에 〈요한 클레베르거〉의 그림이 제작되었는데, 그림이 뒤러가 그린 마지막 그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네덜란드 여행 이후로 말라리아로 고통을 받고 있던 뒤러는 1528년 4월 6일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 업적. 그는 르네상스 최성기에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그 영향을 받았으나, 뒤에 독자적인 화풍을 창조하고, 북유럽적·독일적인 미의 전통을 쌓은 화가이다. 이론적 연구에도 뛰어나 <인체 비례론> 및 <원근법에 관한 고찰> 등의 저서도 내고, 또 이상미(理想美)에 관하여도 논하였다. 수채화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으며, 인문주의와 종교 개혁에도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주로 종교화·초상화·풍경화 등을 제재로 하였으며, 동판·목판 등 판화에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작품으로 <아담과 이브> <동방 세 박사의 예배> <자화상> <요한 묵시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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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 )은 플라톤의 저작 가운데 대화록이 아닌 유일한 작품이다. 작품의 주제는 이미 제목이 예시하듯이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면서, 당시의 일반적인 인간 생활에서 관찰하게 되는 사회적, 윤리적 문제점에 대한 토론이다. 개요. 주된 내용은 기원전 399년 부당한 죄상으로 피소된 소크라테스의 법정(法廷) 변론이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부당한 죄상의 중요한 원인이 된 것은 무지(無知)에 대한 지(知)의 가르침이었다. 즉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는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과 같으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그만큼 다른 사람에 비하여 얼마간은 지자(知者)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첫째가는 현자(賢者)이다"라고 하는 델포이의 신탁(神託)에 대한 그의 해석이었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무지를 깨우치는 일이 신의 뜻에 좇는다고 생각하여 엄격한 대화를 통해서 사람의 억단(臆斷)의 꿈을 깨뜨려 나갔다. 이것이 사람들의 앙심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무지를 자각하게 하고 알게 하는 일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들은 신의 지(知)에 대해서는 무지와 다름없으므로, 그러면 그러할수록 진지(眞知)를 사랑하고 정신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신체나 재산보다 먼저 이 일에 마음을 써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지를 사랑하고 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가장 큰 열쇠라고 하였다. "아테네의 시민들이여, (중략) 어떻게 하든 나는 결코 나의 행동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설사 몇 번이나 죽음의 운명에 위협을 받는다 해도."라고 애지(愛知)에 대한 각오가 언급되고 있다. 결국은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시종일관 두려움 없이 자기의 소신을 말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떠날 때가 왔다. 나는 죽기 위하여,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그러나 그 어느 것이 더 행복한가에 대해서는 신 이외에 아는 자는 없다." 이것이 이 글의 마지막 구절이다. 또한 이 책은 위대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의 영혼의 서(書)이며 제자인 플라톤이 심혈을 기울여 지난날의 소크라테스를 같은 세대의 사람이나 후세에 전해 주려고 한 불후의 명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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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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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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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크릭
프랜시스 크릭(, 1916년 6월 8일 ~ 2004년 7월 29일)은 영국의 생물학자이다. 1962년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자이다. 노샘프턴셔주에서 태어났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제2차 세계 대전 후부터는 생물학의 연구에 집중한다. 때마침 1951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캐번디시 연구소에 유학 중이던 미국의 젊은 생물학자 제임스 D. 왓슨과 교류하기 시작한다. 두 과학자는 서로의 중점 연구분야에 동의, 1953년 4월 25일 DNA의 이중 나선의 구조에 관한 논문을 과학잡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이 논문은 발표 당시 학계에서 별로 주목을 받지 않았으나, 생물학이 점차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이 논문에서 제시된 DNA 구조의 중요성과 타당성이 인정되어 1962년 두 사람과 모리스 윌킨스는 노벨상을 수상한다. 지구 생명의 외계기원설(우주기원설)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의식에 대한 그의 책으로는 《놀라운 가설》이 번역되어 있다. 신경과학과 기타 관심분야. 크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은 그의 오랜 과학 경력의 절정이었지만, 곤빌 앤드 카이우스 칼리지 학장직을 고사하고 1977년 30년간 몸담았던 케임브리지를 떠났다. 제임스 D. 왓슨은 2003년 DNA 구조 발견 50주년을 기념하는 한 케임브리지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겉으로 "꽤 잘 유지된 비밀"은 2002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에서 출판된 소라야 드 샤다레비앙의 《생명의 설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분자생물학》에 이미 기록되었다. 케임브리지에서 분자생물학에 미친 그의 중요한 공로는 1992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에서 출판된 《케임브리지 대학교 역사》 제4권(1870년 - 1990년)에 잘 기록되어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유전학과의 공식 웹사이트에 따르면, 교수직 선거인단이 합의에 도달할 수 없어서 당시 대학 부총장 로드 아드리언의 절충을 요구했다. 로드 아드리언은 그 교수직을 먼저 대안 후보 귀도 폰테코르보에게 제안하자, 그는 고사했다. 그래서 그 다음에 크릭에게 교수직을 제안하자, 그도 고사했다는 것이다. 크릭은 1976년에 캘리포니아 라 호이아의 소크 연구소()에서 안식년을 보냈다. 크릭은 1960년부터 이 연구소의 비상근 연구원이었다. "나는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고향에 온 느낌이었다"고 크릭은 썼다. 안식년이 끝나자 크릭은 소크 연구소에서 계속 일하기 위해 케임브리지를 떠났다. 그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이고의 교수를 겸했다. 그는 신경해부학을 독학하고 신경과학의 다른 여러 분야를 공부했다. 그는 분자생물학에서 빠져 나오는 데 몇 년 걸렸다. 그는 마침내 1980년대에는 그의 새 관심사였던 의식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의 자서전적 저서 《얼마나 미친 추구인가》는 왜 그가 분자생물학을 떠나 신경과학으로 돌아섰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크릭이 이론적 신경과학분야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다음 몇가지는 그에게 충격적이었다: 크릭은 자기가 의식에 관련된 여러 하위분야 전문가들 사이의 건설적인 상호작용을 촉진함으로써 신경과학의 발달을 도울 수 있기를 바랐다. 그는 퍼트리샤 처칠랜드 같은 관련 철학자들과도 협력했다. 크릭은 크리스토프 코흐와 협력관계를 맺고 1990년부터 2005년 사이에 의식에 관한 일련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크릭은 의식에 관한 자신의 이론적 연구를 우리가 사물을 보는 수백 밀리초 동안에 뇌가 어떻게 시각적 인식을 일으키는가에 초점을 맞추기로 전략적인 결정을 내렸다. 의식은 아직껏 잘 알려지지 않은 단기 메모리 과정을 포함하는 만큼 매우 신비한 것 같다고 크릭과 코흐는 인정했다. 크릭은 신경생물학이 어떻게 해서 충분히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으며 그 결과 의식을 분자적, 세포적, 행동과학적 차원에서 연구하면서 하나의 통합된 연구과제가 될 수 있음을 밝히는 책도 출판했다. 크릭의 저서 《놀라운 가설》에서, 신경과학은 이제 뇌가 어떻게 의식이라는 경험을 일으키는지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갖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크릭은 뇌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상세한 정보 위에 세워지지 않은 인공지능형 정신기능 모형의 가치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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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낭 드 소쉬르
페르디낭 드 소쉬르(, 1857년 11월 26일 ~ 1913년 2월 22일)는 스위스의 언어학자로 근대 구조주의 언어학의 시조로 불린다. 이후 그의 이론을 받아들인 사회학에서도 구조주의 사회학이 발생하게 되었다. 업적. 언어학에서 사용되는 중요 개념 중 공시 언어학(synchronic linguistics)과 통시 언어학(diachronic linguistics)을 처음 도입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 소쉬르의 제자들의 강의 노트를 바탕으로 편집하여 그의 사후(1916년)에 출판된 《일반언어학 강의》(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가 있다. 젊은이 문법학파의 제자였으나 그들의 이성과 존재론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전근대적인 접근 방법을 취하였다. 언어 현상을 전체로서 체계 속에서 고찰하였다. 드 소쉬르의 최초의 논문이자 가장 중요한 저작인 1878년의 "Mémoire sur le système primitif des voyelles dans les langues indo-européennes" (인도유럽어족 원시 모음체계에 관한 논문)가 바로 그것이다. 이 논문에서 인도유럽어족의 음성체계에는 이미 알려진 음 이외에 소멸한, 음가를 알 수 없는 한 ㅇ음이 있었다고 가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1941년 헨드릭센(Hendriksen)이 히타이트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드 소쉬르가 언급한 바로 그 위치에서 어떤 후두음을 발견함에 따라 드 소쉬르의 이론의 정당성은 확고해졌다. 이 이론은 후두음 이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언어세계. 파롤은 개인적인 언어 사용, 개인적인 언어 스타일을 의미한다. 자신만의 독특한 말하는 스타일이나 각 지방의 사투리가 이에 해당한다. 또한, 개인적 발화에 의미를 부여해 주고 발화 행위를 가능케 해주는 추상적 체계를 랑그라고 했다. 예를 들어 장미라고 한다면 장미라는 단어 그 자체는 랑그이며, 붉은색을 띄며 정열을 의미하는 것은 파롤인 것이다. (바로 앞의 내용은 거꾸로 설명한게 아닐지? "예를 들어 장미라고 한다면 장미라는 단어 그 자체는 파롤이며, 붉은색을 띄며 정열을 의미하는 것은 랑그인 것이다."가 맞지 않을지?) 기호의 자의성(arbitrary)이란 기표와 기의 간 연결 관계가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학생이라는 말이 나라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기표인 음성의 연속과 그것이 나타내는 개념과 아무런 자연적·내적 관계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므로 자의적이다. 또한 기표는 시간의 선상에서 전개된다. 기표는 청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정한 음의 길이를 가지고 있고, 이 음의 길이는 시간의 선이란 차원에서 헤아릴 수 있다. 언어 기호는 언어 연쇄의 선상에 놓이는 순서와 위치에 따라 변별적 단위가 되고 의미 변화를 가져온다. 이와 같은 언어 기호의 성질을 선조성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은 기호의 특성은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에서 기호의 제1의 원리와 제2의 원리로 설명된다(소두영, 1991). 기호의 의미는 그 자체의 고유한 어떤 내용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단어들과의 관계속에서 '차이'에 의해 규정된다. 이는 의미가 긍정적으로(positively)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는 관계에 의해 부정적으로(negatively) 규정된다는 것이다. 기표와 기표의 차이로 인해 기의가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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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역학
고전역학(古典力學, )은 물체에 작용하는 힘과 운동의 관계를 설명하는 물리학이다. 뉴턴의 운동법칙을 만든 뉴턴의 이름을 따 "뉴턴 역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전역학은 다시 크게 두 분야로 나뉜다. 하나는 힘이 균형을 이루어 움직이지 않는 물체들을 다루는 정역학이며 다른 하나는 운동하는 물체를 다루는 동역학이다. (역학 참조) 고전역학은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매우 정확하게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계에서는 상대성이론, 원자단위와 같은 극히 미세한 스케일의 계에서는 양자 역학에 자리를 내주었으며, 그리고 그 두 가지 조건을 동시에 만족하는 계에서는 양자 마당 이론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그렇지만, 고전역학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여전히 아주 유용하다. 첫째, 다른 이론들에 비해 비교적 수학적으로 간단하여 쉽게 사용할 수 있으며 둘째, 대략적으로 옳은 결과를 주는 범위가 아주 넓다. 실제로 고전 역학은 다음과 같은 물체들의 운동들을 잘 설명하고 있다. 고전역학은 따로 발전된 고전 전자기학, 그리고 고전 열역학과 거의 모순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나, 19세기에 들어서 더 심각한 모순점들이 드러나 현대 물리학이 필요하게 되었다. 특별히, 고전 비상대론 전기역학은 에테르 매질에 대해 빛의 속도가 일정하리라고 예측하였다. 이 예측은 고전 역학과 융화될 수 없었고 그러한 사실이 특수상대론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고전 열역학과는 엔트로피가 잘 정의될 수 없는 양이 되는 깁스 역설과 흑체복사의 자외선 영역에서의 무한한 에너지의 예측 등의 모순을 빚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해 양자 역학이 성장하게 되었다. 이론 세부 설명. 여기서 고전 역학의 기본개념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해하기 쉽게 점입자 - 즉 무시할 만큼 작은 크기를 가지는 물체 - 만 다루고자 한다. 적은 수의 맺음변수(parameter)를 가지고 "점입자"의 운동을 기술할 수 있다. 그 몇몇 맺음변수는 위치, 질량, 그리고 점입자에 가해지는 힘이다. 맺음변수들 하나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실제로, 고전 역학으로 기술할 수 있는 물체 중에서 어떠한 것은 크기를 가지고 있다. 진짜 점입자들(ex:전자)은 양자 역학에 의해 잘 설명될 수 있다. 크기를 가지고 있는 물체들은 점입자라고 가정한 물체보다 훨씬 복잡한 운동 형태를 가진다. 왜냐하면 내부 구조 또한 다른 운동의 형태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투수가 회전을 걸어 던진 야구공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야구공과 같은 물체를 서로 상호작용하는 수많은 입자의 집합체로 생각하여 점입자에 대해 얻은 결과를 적용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집합체 속 입자 간의 거리가 다른 물체와의 거리보다 충분히 작다면 이 집합체가 점입자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보일 수 있으며 또한 이렇게 야구공 같은 집합체를 점입자로 취급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 위치와 위치의 도함수. 점입자의 "위치"는 공간 내의 임의의 고정된 한 점, 때때로 이것을 "원점" 즉 O, 을 기준으로 해서 정해지며, O에서 입자까지의 벡터 r로 정의된다. 일반적으로 점입자는 움직이거나 변화하기 때문에 r은 "t"의 함수이다. 여기서 시간은 임의의 초기시간 이후로 지나간 시간을 의미한다. 아인슈타인 이전의 상대성(알려져 있기로는 갈릴레이의 상대성)에서는 시간은 모든 기준틀에서 절대적이다. 속도. "속도", 즉 시간에 따른 위치의 변화율, 은 다음과 같이 정의 된다. 아인슈타인 이전의 상대성에서는 속도는 직접 더하고 빼기가 가능하다. 예를 들면, 만약 자동차 A가 60 km/h의 속도로 50 km/h의 속도로 달리는 다른 자동차B 옆을 지나간다고 하자. 이럴 때 60 km/h로 달리는 자동차A의 관점에서 보면 자동차 A는 속도60-50=10 km/h로 달리고 있는 다른 자동차 B의 옆을 지나가는 것이다. 간단한 수식을 사용해보자. 앞에서 논의한 자동차 B의 기준좌표계의 속도를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린다면 벡터 u = "u"x (x는 x 방향의 단위벡터), 자동차A가 바라보는 자동차B의 속도는 다음과 같다. 가속도. "가속도"(속도의 변화율) 는 가속도 벡터는 속도의 크기가 변할 때, 방향이 변할 때 혹은 둘 다 변할 때 변한다. 만약 v의 크기가 줄어든다면, 이것은 때때로 감속이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감속을 포함해서 속도의 어떤 변화라도 간단히 가속도라고 말할 수 있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감속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가속도가 영(0)보다 작은 경우이다. 그렇다면 가속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가속도가 영(0)보다 큰 경우가 된다. 기준틀. 두 개의 기준틀(Frames of Reference) S와 S'를 생각해 보자. 여기서 S'는 S에 대해 상대속도 u로 움직이고 있다. S와 S'에서 각각 바라보는 하나의 사건(event)이 있다. 두 기준틀에서 바라보는 그 사건에 대한 연관성은 다음과 같다.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면, 먼저 질량 m을 가지는 물체가 운동하고 있다고 하자. 당신은 S에 있고, 당신의 친구는 S'에 있으며 당신의 친구가 속도 u로 달리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당신이 바라보는 물체의 속도는 v이며, 당신의 친구가 바라보는 속도는 v'이다. 이런 경우에 v와 v'의 연관성은 다음의 수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힘; 뉴턴 제2법칙. 뉴턴의 제2법칙은 한 입자의 질량과 속도와 힘(벡터양)의 관계를 설명한다. 여기서 "m"은 입자의 질량 F는 그 입자에 가해지는 모든 힘들의 벡터합(외부에서 가해진 "알짜"힘)이다. 그래서 뉴턴의 제2법칙은 다음{수식(1)}과 같다. 로 바뀐다. 여기서 a는 위에서 정의한 것처럼 가속도이다. 항상 질량("m")이 시간("t")에 대해 일정한 것은 아니다. 질량이 시간에 따라 변하는 예도 있다. 먼 달로 쏘아 올린 로켓을 생각해 보자. 로켓의 질량은 로켓이 멀리 날아갈수록 줄어든다. 연료를 소모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위와 같은 간단한 형태{수식 (2)}는 틀린 것이 되며 뉴턴의 제2법칙의 완전한 형태{수식(1)}를 사용해야만 한다. 뉴턴의 두 번째 법칙만으로 한 입자의 운동을 모두 기술할 수는 없다. F를 어떤 식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식은 그 입자가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물리적인 상황을 고려함으로써 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저항력을 다음과 같이 입자의 속도에 대한 함수로 모형화할 수 있다. 여기에서 λ는 양의 상수라고 하자. 일단 입자에 작용하는 각 힘을 구하고 나면 그 식을 뉴턴의 두 번째 법칙에 대입하여 "운동 방정식"이라고 부르는 상미분 방정식을 만들 수 있다. 앞에서 든 예를 계속 써서, 그 입자에 작용하는 힘이 마찰력뿐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운동 방정식은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위 식을 적분하면 다음과 같은 식을 얻을 수 있다. 여기에서 v0는 초기 속도를 뜻한다. 즉 이 입자의 속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수함수적으로 감소한다. 이 식을 다시 한 번 적분하면 입자의 위치 r을 시간의 함수로 구할 수 있다. 대표적인 힘의 예로 중력과 전자기학에서 나오는 로렌츠 힘 등을 들 수 있다. 이 외에, 뉴턴의 셋째 법칙을 써서 입자에 작용하는 힘을 유도할 수도 있다. 어떤 입자 A가 다른 입자 B에 F라는 힘을 작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B는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인 "반작용력" -F를 A에 대해 작용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에너지. 힘 F를 한 입자에 주게되면 입자는 변위 δr만큼 움직이며 이 힘에 의해 "행하여진 일"은 스칼라양으로 다음과 같다. 입자의 질량이 일정하다고 하고 그 입자에 행하여진 총 일은 δ"W"total 이라고 한다면, 뉴턴의 두 번째 법칙에 의해 다음과 같은 등식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T"를 운동 에너지라고 부른다. 점입자의 경우 아래와 같이 정의된다. 여러개의 입자로 구성된 물체의 운동에너지는 각각의 입자들의 운동에너지의 합으로 표현할 수 있다. 특별한 힘의 종류인 보존력은 퍼텐셜 에너지의 스칼라 함수 V의 그라디언트 로 나타낼 수 있다. 입자에 작용하는 모든 힘이 보존력이라 하고 V를 총 퍼텐셜 에너지라하면, 총 퍼텐셜 에너지는 입자에 작용하는 각 힘에 대응하는 퍼텐셜 에너지 의 합으로 얻어낼 수 있다. 그러면 이것이 에너지 보존 법칙이다. 그리고 총 에너지 formula_18는 시간에 대해서 상수이다. 우리가 보통 다루는 힘이 보존력 이기 때문에 이 법칙은 유용하게 쓰이는 경우가 많다. 추가 결과. 뉴턴의 운동 법칙은 입자계에 대한 유용한 결과를 얻게 해준다. 참고 각운동량. 고전역학에 대응하는 두 가지의 중요한 체계가 있다. 라그랑지안 역학과 해밀토니안 역학이 그것이다. 이 둘은 뉴턴 역학과 동등하나 문제를 풀 때 더 유용한 경우가 있다. 이 둘과 현대 물리학 체계들은 보통, 힘이라는 개념을 우회해 에너지 같은 다른 물리량을 사용하여 역학계를 다룬다. 예시. 두 개의 기준틀을 생각하자, 이 중 하나는 다른 하나의 기준틀에 대해서 상대적인 속력 u로 움직이고 있다. 예를 들면, 차 한 대가 다른 차 한대에 대해서 10 km/h로 지나치는 상황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u는 10 km/h가 될 것이다. 두 기준틀 "S" 와 "S이며, "S'은 "S"에 대해서 u의 속력으로 움직이고 있다. 어떤 사건이 "S"기준틀에서는 시-공간 좌표로 ("x","y","z","t") 로 표시되고, "S에서는 ("x',"y',"z',"t')"' 로 표시된다. 갈릴레이-뉴턴 상대론에서 어떤 사건의 시-공간 좌표는 갈릴레이 변환으로 알려진 군변환에 의해서 규정된다. 시간이 어떤 기준틀에서도 절대적이라고 가정하면, x방향으로 상대속도가 u만큼 차이나는 기준틀간의 시-공간 좌표는 다음의 관계를 갖는다. 이 방정식 4개가 갈릴레이 변환으로 알려진 군변환을 정의한다. 역사. 자연을 지배하는 추상적인 원리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제안한 것은 그리스인들, 그중에서도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추상적인 법칙을 처음으로 제안한 과학자 중 한 명인데 그는 피사의 사탑에서 대포알 두 개를 떨어뜨리는 유명한 실험을 수행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 실험에서 그는 두 개의 무게가 다른 물체가 땅에 동시에 떨어진다는 이론을 검증했다.) 아이작 뉴턴경은 프린키피아에서 3개의 운동법칙을 처음으로 제안했으며 또한 이들 세 법칙이 일상적으로 접하는 물체나 천체의 움직임을 지배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뉴턴 이후로 여러 수학자들의 손을 거쳐가며 고전역학은 더욱 수학적이며 추상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라그랑주역학, 해밀턴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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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 , 기원전 384년 ~ 322년)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박식가로, 플라톤의 제자이며,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다. 물리학, 형이상학, 시, 생물학, 동물학, 논리학, 수사, 정치, 윤리학, 도덕 등 다양한 주제로 책을 저술하였다.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함께 고대 그리스의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였으며, 그리스 철학이 현재의 서양 철학의 근본을 이루는 데에 이바지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은 도덕과 미학, 논리와 과학, 정치와 형이상학을 포함하는 서양 철학의 포괄적인 체계를 처음으로 창조하였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도움으로 리케이온 학교에 도서관을 만들어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세계 최초의 동물원도 만들었다. 자연과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중세 학문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이러한 그의 견해는 뉴턴 물리학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게 되는 르네상스 시대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동물학 연구에서 그의 관찰은 19세기까지 정설로 인정되었다. 그의 글에는 가장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 논리에 대한 형식 연구가 담겨 있으며, 이러한 그의 연구는 19세기 후반에 형식 논리학으로 구체화되었다.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800년 ~ 1400년까지의 중세시대 유대와 이슬람 전통에서 나타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기독교 신학에서는 초대교회의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에 영향을 주었고, 특히 서방교회 전통의 스콜라 철학과 관련하여 계속해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의 윤리학은 여전히 영향력이 있는데, 현대에 이르러 덕 윤리학(virtue ethics)의 출현과 더불어 새롭게 관심을 받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모든 측면은 오늘날에서 계속해서 활동적인 학문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는 스승 플라톤이 관념론적 이상주의임에 대하여 경험론적 현실주의자로 지적되고 있으며, 예술에 관해서도 플라톤과 다른 의견을 내세우고 있다. 예술을 일종의 '모방'으로 보는 점은 플라톤과 같으나, 플라톤이 '모방의 모방'으로 생각하여 이데아의 참된 인식을 흐려 놓는 것으로 인정한 데 비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신을 카타르시스(정화)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여러 편의 품위있는 논문과 대화록을 저술했음에도(키케로는 그의 문체를 "황금이 흐르는 강"이라고 묘사하였다.) 오늘날 그가 쓴 글의 대부분은 사라진 것으로 보이며, 원래 쓴 글의 3분의 1 정도만 남아있다. 생애. 그리스 북부 할키디키반도에 위치한 트라키아 지방의 스타게이라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니코마코스는 마케도니아 왕 아민타스 2세의 시의(侍醫)였고, 모친인 파이스티스는 칼키스의 이민 출신이다. 왕자 필리포스 2세의 소꿉동무로 궁정에서 자랐으나 어려서 양친을 여의어 연고자인 프록세노스가 후견인이 되었다. 17세 때(기원전 367년)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 입문하였다. 이후 플라톤의 사망시까지 약 20년 동안 그곳에서 연구에 정진, 학생 지도도 담당하였다. 이오니아 문화를 배경으로 의가(醫家)의 실증정신(實證精神) 아래 성장한 그에게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은 큰 영향을 주었다. 충실한 플라토니스트로서 출발한 그는 맹렬한 이데아 비판을 하면서도 거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의 연구와 교수(敎授) 및 저작 활동은 대략 3기―아카데미아기(期)와 편력기(遍歷期)와 학두기(學頭期)―로 나눌 수 있다. 아카데미아기―저작은 기원전 360년경부터 시작된다. 먼저 플라톤의 대화편을 본떠서 ⟪그릴러스⟫ ⟪유디머스⟫ ⟪프로트렙티커스⟫(철학에의 권유) ⟪향연(饗宴)⟫ ⟪소피스트⟫ ⟪정치가⟫ ⟪메닉시너스⟫ 등 많은 대화편과 기타 글이 씌어져 간행되었다. 동시에 자연학을 비롯하여 그 밖의 연구도 시작되어 ⟪자연학⟫의 일부(제1, 2, 7권) ⟪천체론(天體論)⟫ 제1권과 ⟪정치학⟫ 제2권의 일부, ⟪데 아니마⟫ 제3권과 ⟪논리학⟫의 일부(⟪토피카⟫ 등)와 ⟪형이상학⟫(제12권) 등이 쓰여졌다. 편력기―플라톤이 죽기(전 347) 직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참주 헤르미아스의 초청으로 아타르뉴스로 갔다. 아카데미아 학두에 취임한 스페우시포스의 수학주의(數學主義), 피타고라스주의에 만족하지 못한데다 올린토스의 함락으로 아테네에 반(反)마케도니아 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강대한 군대를 가지고 있던 참주의 보호 아래 왕의 질녀인 피티아스와 결혼하여 그 곳 가까운 아리스에 살면서 3년간을 강의와 연구로 보냈다. 학우인 에라스토스와 코리스코스도 같이 참가하였다. 여기에서 ⟪철학에 대하여⟫를 썼고 이데아나 이데아 수(數)의 비판이 시작되었다. 또 ⟪형이상학⟫ 제1, 2, 4, 5권과 ⟪에우데모스 윤리학⟫, ⟪자연학⟫ 제3-6권, ⟪천체론⟫(현재의 형태), ⟪생성소멸론⟫ 등을 썼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플라톤의 수제자 중 한 사람으로 레스보스 태생인 테오프라스토스의 알선으로 미치레네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이곳에서는 특히 생물학에 대한 연구가 발전되어 있었다. 기원전 342년에는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의 의뢰와 헤르미아스의 추천을 받아 알렉산드로스 왕자의 가정교사로서 미에자로 갔다. 왕자를 위하여 호메로스를 가르쳐 주었고 ⟪호메로스 문제⟫를 썼다. 또 ⟪군주정치론⟫ ⟪식민정책론⟫도 저술하였다. 기타 그리스인에 관한 국가제도의 수집이나 기록을 하였다. 그 일부인 ⟪아테네인의 국제(國制)⟫의 태반이 1891년에 재발견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헬라스의 통일, 즉 그리스의 폴리스군과 마케도니아 제국의 통일에 열심인 애국자였고 이것이 필리포스 2세의 야심에 합치한 듯하나, 후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서 융합 정책에는 동의하지를 못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우정은 변하지 않아 알렉산드로스는 동정(東征) 중 생물학상의 표본을 위시하여 다른 선물을 보냈다고 한다. 기원전 340년 알렉산드로스는 섭정(攝政)이 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타게이로스로 물러가 연구생활을 계속하였다. 기원전 338년 그리스 연합군이 카이로네이아에서 패배,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 왕은 암살되고 알렉산드로스가 즉위하였다. 이듬해인 기원전 335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재차 아테네로 돌아왔다. 학두기(學頭期)―마케도니아의 총독 안티파트로스의 원조로 아테네 동쪽 교외인 아폴론 리케이오스 성역 중 일반에게 공개하는 김나시온을 빌려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리케이온이라 불리었는데 이곳에서 12년간 강의와 연구로 세월을 보냈다. 오전에는 상급반 연구자를 위하여 논리학과 제1차 철학을 강의하였고, 오후에는 수사학, 정치학, 윤리학 공개 강의를 하였다. 현존하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학두기의 강의 초고이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이 전하여지자 반마케도니아 운동이 재연(再燃)되었다. 마케도니아와 관계가 깊었던 그는 불경죄로 문책을 받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사전에 모친의 고향인 칼키스로 떠났다가 이듬해 위장병으로 63세의 생애를 마쳤다. 형이상학. 문헌으로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가 기원전 1세기 후반 로마에서 편집 간행한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에서 <자연학(Physics)>의 뒤(Meta)에 놓였기 때문에 <자연학의 뒤의 서(Meta-Physics)>라고 불리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후세의 형이상학에서 의미하는 내용을 '프로테 필로소피아(Prote Philosophia)'(제1의 철학) 또는 '테올로기케(Theologike, 신학)'라 하였으며, 존재 내지 실체란 무엇인가를 해명하는 일을 중심 과제로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문은 의사 가문이었으므로 이러한 그의 배경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학, 특히 생물학 영역에 관심을 갖게 하였다. 한편 플라톤의 수제자로서 이데아론의 영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플라톤주의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두 정신의 견제 가운데서 존재 내지 실체의 포착 방법에서도 그의 사색은 말하자면 양극 사이를 항상 크게 동요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데아론을 엄격하게 비판하면서 그의 독자적인 존재론이 형성돼 오기는 하지만 신학적인 면이 완전히 불식(拂拭)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정리한 4원인론에서부터 그 이전의 학설은 모두 불충분한 것으로 밀어버렸고, 특히 스승인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이재성(離在性)·초월성으로 인하여 감각물의 존재와 해명에 아무런 소용이 되지 못한다고 거부한다. 더욱이 이 이데아의 감각물로의 내재화(內在化)가 그의 생애의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12권의 신학에서 목적론적으로 포착된 자연의 생성과 운동의 원인인 신을 부동(不動)의 동자(動者)로서 사유(思惟)의 사유, 자기 사유라고 역설하였다. Hoi ik ben Henk de vries 최고의 지혜는 오로지 인식시키기 위하여 인식한다고 하는 특권을 가지며, 무릇 모든 제1 원인을 대상으로 하는 학(學), 모든 학의 왕자, 최고선을 알며 그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유일하고 자유로운 학, 가장 신적(神的)이어서 외경될 만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모든 것에 있어서 원인의 하나이며 어떤 종류의 원리(始動因)라고 생각되며, 또 이와 같은 학은 신만이 소유할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1 원리 원인의 학, 즉 제1 철학은 동시에 신학이기도 하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도덕적 행동의 습관화를 통해 도덕적 성품을 고양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좋은 삶)를 삶의 목표로 보고 있다. 한편 저스티스(Justice) 즉 '정의'(正義)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윤리학(Nicomachean Ethics) 제5권 정의론에서 정의는 동전의 양면처럼 '평등'(equal)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논리학. 《분석론 전서》("Prior Analytics")의 편찬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식논리학의 선구자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으며 그가 창안한 개념은 19세기에 수리논리학 분야에서의 발전이 있기까지 서양 논리학의 주된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칸트는 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에 관한 이론이 의 핵심적인 부분을 모두 설명하고 있다고 기술하였다. 조금 더 설명을 추가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중에서 가장 유명한 예는 ‘삼단 논법’이다. 삼단 논법은 연역적 추론에 바탕한 논증이다. 삼단 논법은 두 개의 전제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내는 추론적 방법이다. 자연관. 그의 스승인 플라톤과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보편성을 향해 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 플라톤이 보편성은 특정한 것에서 멀리 떨어져 존재하며, 이와 같은 보편성은 그들의 원형(原型) 또는 전형으로써 주장하였던 것과 대조적으로 특정한 것에서 보편성을 발견하였고 그것을 사물들의 본질(essence of things)이라 칭하였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철학적인 방법이란 특정한 현상에 대한 연구로부터 본질에 관한 지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포괄하며, 이는 플라톤의 이데아 또는 형상(form)이라 불린 것에 관한 지식으로부터 이들과 유사한 형태로의 관상(contemplation), 다시 말해 인식하는 양식에 이르기까지의 하향적인 과정을 취한 플라톤의 방법과 차이를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형상(form)'은 여전히 현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기초를 가리키지만 이와 동시에 특정한 사물에 '구체화'되어 있다. 플라톤의 방법이 선험적인 원칙으로부터의 연역 추론에 기반해 있는 것이라면, 그의 방법은 귀납적이면서 연역적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사용한 용어 중에 '자연 철학(natural philosophy)'이라는 말은 자연계의 현상을 탐구하는 철학의 한 부분이며, 이는 현대의 물리학, 생물학 등의 분야를 포괄한다. 현대에 들어서 철학("philosophy")은 윤리학이라든지 논리가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형이상학(metaphysics)과 같은 보다 더 포괄적이고(generic) 모호한 분야에 한정되었다. 현대의 철학은 자연계에 관한 경험적인 연구를 과학적 방법이라는 용어를 활용하여 제외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인 활동 분야는 지적 탐구(intellectual inquiry)의 모든 분야를 넘나든다. 4원소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4 개의 원소는 다음과 같다: 하지만 물이 수소원자 2개와 산소원자 1개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밝혀지고, 공기도 사실 산소, 질소 등등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며 흙도 여러 분자로 이루어졌다는 게 밝혀지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이 틀렸다는 게 증명되었다. 사원인. 운동하고 변화하는 감각적 사물의 원인 연구를 자연학이라 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에 4가지 원인을 들었다(四因論). 그는 , , , 그리고 에서 그 원인을 답하였다. 자연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質料, 휠레)와 형상(形相, 에이도스)간의 상호작용이라는 생각으로 자연을 해명하려고 하였다. 질료는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원소재로서 이것이 형상에 의해서 형태가 주어짐으로써 비로소 구체적인 사물이 되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그는 관찰이나 경험을 플라톤과는 달리 중요시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는 모든 분야에 이르고 있지만, 500종 이상의 동물을 관찰, 기록하고 분류하였다. 《동물지(動物誌)》 9권, 《동물 부분론》 4권, 《동물 발생론》 5권 등을 저술하고, 형상과 질료의 철학으로 설명하였다. 암컷은 재료 즉 질료를, 수컷은 계획 즉 형상을 제공하고, 생물의 성장에 따라서 형상이 완성하고 더욱이 그것은 "자연은 불필요한 일은 하지 않는다"라 하는 관점에 입각한 해부학적 구조, 발생학적인 기관 발달의 연구를 했다. 그의 날카로운 관찰은, 고래나 평활(平滑), 상어의 태생(胎生)을 발견하였고, 꿀벌의 생태나 닭의 부화 등의 정밀한 기록을 남겼다. 이와 같은 성과에 입각하여 생물의 분류를 하였고, 또 생물의 종(種)은 식물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완전도를 늘린다고 하고 생물의 11개의 계급을 만들었다. 이것이 '자연의 계단'이라는 생각이며, 완전도는 발생학적인 기준에 의거한 것이었다. 생물학에 이어서 그는 물리학, 천문학으로 고찰을 진행시켰는데, 경험·관찰 혹은 생산 기술과의 관련은 생물학과 비교하면 훨씬 적었다. 따라서 그 성과도 역시 생물학에 비해서 뒤떨어져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파급시킨 영향은 매우 크며, 근대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적 학문의 부정(否定)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는 물질은 연속적이며, 허공(진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反)데모크리토스적 입장을 취하고, 모든 땅 위의 물질은 흙·물·공기·불의 4원소로 되었으며, 이것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참된 원소인 제1질료가 열냉·건·습의 4개 기본적인 형상 2개씩을 얻어서 생성된 것이다. 제1질료가 열·습을 얻어서 기(氣)로, 건·열로 불, 건·냉으로 흙, 습·냉으로 물이 된다. 이 4원소는 그에 의하면 단일체이며, 4성질은 분리시킬 수 있으므로 상호의 변환은 가능해진다. 이 이론이 연금술을 장기에 걸쳐서 밑받침하였던 것이다. 천계(天界)를 만드는 원소는 아이테르로서, 땅 위와는 다르듯이 지상과 천체의 운동도 서로 다르다. 항성과 행성은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계속해서 등속 원운동을 하고 있다. 원은 완전한 도형이며, 원운동은 완전하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지상의 물체가 갖는 운동은 본질적으로 상승이거나 낙하, 즉 직선운동이라고 보고, 천체와 지구의 운동을 마주 놓았다. 지상의 물리학을 천계에 적용시킬 순 없는 것이지만 이 생각은 결국 17세기 뉴턴에 의해 뒤집힐 때까지는 정통적(正統的) 학리로서 인정되고 있었다. 또 그의 역학에서는 자유 낙하의 속도는 무게에 비례하고 공기의 저항에 반비례하는, 즉 무거운 것일수록 빨리 낙하한다는 견해를 취하지만, 이것이 갈릴레이에 의해서 부정된 사실은 유명하다. 광학. 동시대의 철학자들과 비교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몇몇 광학에 관한 뛰어난 이론의 소유자였다. 기원전 350년에 쓰여진 그의 저서 '난제들'("Problemata")에 초창기의 카메라에 해당하는 에 관한 가장 오래된 설명이 담겨 있다. 교육 사상.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적인 생활의 영위에 교육목적을 두었다. 그는 개인이 타인과 접촉할 때 이성에 의해 모든 행위를 하도록 하는 교육체계를 요망했다. 인간의 최고기능은 사고와 행위를 이성적으로 하는 데 있다고 보고, 과학과 철학을 통한 이성의 훈련을 주장했다. 다음으로 그는 행복한 생활을 이룩하는 데에 교육의 목적을 두었다. 그는 모든 인간 행위의 궁극적 목적을 행복이라 보고, 이 행복은 중용(中庸)이란 덕과 이성적인 행동을 할 때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교육은 이성을 통해서 중용의 덕을 가진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는 국민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성원(成員)으로 교육할 수 있는가를 중심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하고, 교육을 통하여 행복을 성취하고 국가에 유능한 인물을 양성해야 한다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교육을 중요시하였다. 자유교육은 직업적(생산적) 교육이 아니고 여가를 이용하여 자유인으로서의 교양을 함양토록 하는 교육인데, 이를 위한 교육으로 읽기·쓰기·셈하기·음악·체육 등을 들었다. 그에 의하면 책을 읽는 것은 문화인의 교양을 쌓는 것이며, 음악은 한가한 시간을 유쾌하게 보내기 위한 것이고, 체육은 건전한 신체를 갖게 하여 용기를 북돋워주는 것이었다. 그의 자유교육은 신체의 노동보다 정신의 활동을 더 중요시한 것이었다. 그는 교육의 조직이나 내용은 아동의 성장형태에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유아에게는 동물놀이·신체적 활동·이야기 등으로 교육시키며, 14세 이전의 아동들에게는 도덕적·신체적 교육을 중시하여 체육·음악·독서·쓰기 등을 가르치되 이론이나 법칙의 교설(敎說)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행동을 통한 안정된 습관을 확립케 하기 위해서만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또 21세가 될 때까지의 청년들은 수학·문학·천문·음악·문법·시·수사학·윤리학·정치학 등 지적인 학습을 시켜야 하며, 21세 이상의 대상자들에게 과학과 철학을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육방법은 자연발달에 의하여 불합리한 것에서 합리적인 것으로 지향하는 것이었다. 처음의 불합리한 신체적 교육에서 점차로 합리적인 정신적 교육을 지향하며, 정신교육에 있어서도 불합리한 욕망에서 합리적인 이성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신체적 교육에서 습관으로 향상하고, 다시 마지막으로 이성의 교육에 도달하게 하는 방법이 진정한 교육방법이라고 했다. 즉 체육(體育)·훈육(訓育)·교수(敎授)의 3분야로 나누었던 것이다. 여성관. 아리스토텔레스의 여성관은 중세 말기까지 그를 절대 권위로 신봉한 서양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고로 여성사에서도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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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타
서양 고전 음악에서 소나타(sonata)는 기악을 위한 음악 형식의 하나로, 주로 노래가 동반되는 칸타타(cantata)에 대비되어 '연주'만 되는 작품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소나타의 역사. 바로크 시대의 소나타. 소나타는 원래 16세기 초 프랑스의 세계적 성악곡인 샹송이 이탈리아에 전해져 악기로 연주된 데서 탄생하였다. 이 샹송 형식으로 된 오르간이나 기악합주용의 곡은 17세기 중엽부터 한창 작곡되어, 당시는 칸초네 또는 '칸초니 다 소나레'(악기로 연주되는 노래의 뜻)라 하였으나, 이것은 몇 개의 짧은 부분으로 된 1악장 형식의 것이었다. 이후 소나타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성악을 위한 칸타타와 구분하는 용어로 시작되었다. 17세기 후반, 비탈리 부자(父子)와 아르칸젤로 코렐리 등에 의하여 교회 소나타가, 그리고 프랑스나 독일을 중심으로 실내 소나타가 생겼다. 두 소나타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전자는 대위법적인 스타일을 가졌고, 후자는 일종의 모음곡(組曲)풍인 것으로 양쪽 다 '느리게-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4악장으로 되었다. 그 후 이 두 가지 소나타는 서로 영향을 받다가 하나로 융합되었다. 바로크 시대 소나타의 대부분은 트리오 소나타라는 양식으로 쓰였다. 이것은 화음반주의 낮은음부를 포함하는 독립된 3성부로 된 소나타로, 보통 높은 2성부를 2개의 바이올린으로 하고, 낮은 1성부를 첼로와 하프시코드(또는 오르간)로 연주하였다. 이 시대의 중요한 소나타 작곡가에는 영국의 퍼셀, 프랑스의 쿠프랭, 이탈리아의 비발디, 스카를라티, 독일의 쿠나우, 텔레만, 헨델, 바흐 등이 있다. 특히 바흐는 소나타를 진정 예술적인 높은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고전파 시대의 소나타. 이 시기의 소나타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대표하는 빈 고전파의 작곡가들에 의하여 완성되었고, 낭만파에 계승된 다악장형식의 기악곡을 말한다. 소나타는 보통 빠르기나 성격을 달리하는 3~4악장으로 구성된다. 이상은 소나타의 전형적인 악장 구성이다. 그러나 고전파의 피아노 소나타나 협주곡의 대부분은 3악장제(보통 미뉴에트 악장을 생략)를 쓰며, 기타 2악장, 드물게는 1악장 또는 5악장 이상의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월광 소나타는 느린 악장으로 시작하여 2악장으로 미뉴에트를 거쳐서 소나타 형식의 3악장으로 마친다. 이 같은 형식으로 쓴 피아노곡을 피아노 소나타라 한다. 바이올린 소나타, 첼로 소나타, 클라리넷 소나타 등의 경우는 보통 피아노 반주를 가진다. 3중주곡, 4중주곡 등도 각기 3개, 4개의 악기로 하는 기악합주를 위한 소나타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협주곡은 독주악기(또는 독주악기군)와 관현악을 위한 소나타에 지나지 않는다. 고전파의 소나타는 이탈리아의 스카를라티, 클레멘티, 만하임의 시타미츠 부자,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아들 엠마누엘 바흐, 크리스티안 바흐 들에 의하여 준비되었고, 하이든, 모차르트의 손을 거쳐 베토벤에 의하여 형식과 내용이 모두 절정에 이르렀다. 유명한 《열정 소나타》를 비롯한 32곡의 피아노 소나타는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이 음악의 '구약성서'로 불리는 데 대하여 음악의 '신약성서'로 불리고 있다. 낭만파 이후의 소나타. 낭만파 이후의 소나타에서는 형식의 발전은 없으나 독자의 개성적인 소나타가 많이 생겼다. 중요한 소나타 작곡가에는 베버, 슈베르트, 슈만, 쇼팽, 리스트, 브람스, 드보르자크, 프랑크, 생상스, 포레 등이고 현대에서는 스크랴빈, 드뷔시, 레거, 프로코피예프, 바르토크, 힌데미트, 쇼스타코비치, 스트라빈스키 등이 있다. 형식으로서의 소나타. 소나타의 대표적 악장 주기 3중주 소나타 악기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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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스트
소피스트(, , )는 고대 그리스의 특정 종류의 교사를 일컫는 말이다. 그리스어의 원래 의미는 '현자(賢者)', '알고 있는 사람', '지식을 주고 가르치는 사람'이었으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궤변가(詭辯家)'라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소피스트는 종래의 시인들에게 이어받은 교육 문화의 전통을 깨는 일이 없이 신화를 인용하여 개성을 존중하면서 고등 교육의 촉진에 기여하였으나 기원전 4세기 이후 에우티데모스 형제처럼 아류가 되어 언론의 공정성을 무시하고 전적으로 에리스티케(문답 경기)에 열중함으로써 악명을 얻었다. 전통적으로 소피스트들은 궤변론자(詭辯論者)등으로 치부되어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는 정당하지 않다는 의견도 일부 나와 부분적으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시발점이 된 것은 조지 커퍼드의 <소피스트 운동>이다. 소피스트의 출현 배경. 소피스트의 출현 배경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소피스트 이전의 철학자들이 우주에 대한 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러 학파는 각자의 주장만을 고집했고, 자연 철학자들은 알맞은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다. 이런 주장은 자연의 비밀을 간파하는 데 난점을 제공했으며 자연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인간 이성의 능력에 대한 회의주의적 분위기를 초래했다. 회의주의로 인해 철학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으며, 철학자들은 인간 지식의 문제에 집중하였다. 두 번째는 아테나의사회의 변화이다. 페르시아 전쟁(B.C 490~480)에서 아테네가 승리하게 되어 아테네 사회가 부와 권력을 가지게 되면서 그들은 소위 민주주의 사회를 이루었다. 그 후 선생으로서 소피스트가 출현(대부분 아테네 출신이 아닌 타 지역인)하게 되었고 그들은 노예 국가에 예속된 소피스트들이었으므로 아테네의 관습과 문화를 바꾸는 데 주역할을 하게 되었다. 소피스트는 주로 떠돌이 교사로서 혹은 외교관의 자격으로 아테네에 왔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그중 대략 기원전 5세기부터 4세기까지 아테네에 출현했던 소피스트들은 서로 다른 지방에서 왔기 때문에, 아테네인의 사고 방식과 관습을 참신하게 여겼고, 그것들에 대해 탐구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 있었다. 활동. 프로타고라스는 개인을 위주로 한 지식의 상대성과 전진성을 강조하였고, 덕의 교사로서는 종래의 귀족적인 덕에 대신하여 욕지(辱知)와 정의와 우애를, 민중 일반이 가르침을 받아 공유(共有)해야 할 폴리스의 덕이라고 역설하였다. 고르기아스는 존재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적(不可知論的), 회의주의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나 동시에 언어가 감정에 미치는 극적 효과를 중시하여 기만과 설득에 의하여 사람들을 시의적(時宜的)인 행동으로 유도해 가는 일에 노력하였다. 이처럼 긴장한 비극성을 아류(亞流)인 카리쿠레스와 프라시마코스에서는 기회주의적이고 배덕적인 것으로 타락시켜 힘이 즉 정의라는 논법을 펴기에 이르렀다. 기원전 5세기 후반에는 케오스의 프로디코스가 아테네를 방문하여 변론의 공연(公演)을 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는 자연에서 출발하여 언어·지식을 전달한 문명의 인위적인 발전을 강조하였는데, 특히 '헤라클레스의 선택'이란 덕론(德論)이 유명하다. 백과전서적인 관심을 보였던 엘리스의 히피아스는 전반적인 지식 위에 웅변가와 정치가의 교육을 베풀어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또 자연의 법과 인위의 법의 대립을 조정하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수학을 교육의 중요한 부분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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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자원 식별자
통합 자원 식별자(, URI)는 인터넷에 있는 자원을 나타내는 유일한 주소이다. URI의 존재는 인터넷에서 요구되는 기본조건으로서 인터넷 프로토콜에 항상 붙어 다닌다. URI의 하위개념으로 URL, URN 이 있다. 표현방법. 일반 URI와 절대 URI 참조 문법은 RFC 2396에 처음 정의되었으며, 1998년 8월 출판되었으며, RFC 3986로 완성되어, 2005년 1월 출판되었다. 일반 URI는 다음과 같은 형태를 나타낸다: scheme:[//[user[:password]@]host[:port]][/path][?query][#fragment] 예. 다음은 2개의 예시 URI와 구성 부분을 나타내고 있다.                     hierarchical part                     authority          path   abc://username:password@example.com:123/path/data?key=value#fragid1 scheme  user information    host    port         query   fragment   urn:example:mammal:monotreme:echidna scheme              path 역사. URI와 URL은 역사를 함께 공유한다. 1994년 팀 버너스 리가 하이퍼텍스트를 제안하면서 하이퍼링크의 대상이 되는 자원을 대표하는 짧은 문자열로 URL의 개념을 암묵적으로 도입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하이퍼텍스트 이름" 또는 "문서 이름"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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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력
그레고리력()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태양력(太陽曆)으로, 158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이전의 율리우스력을 개정하여 시행한 역법을 말한다. 율리우스력의 계산법은 천체운행과 불일치함으로 오차가 발생했기에 이를 보정하기 위해서 새로운 역법을 만들었다. 그레고리력은 달의 운동과는 관계없이, 태양의 운행만을 기준으로 한 태양력의 한 종류로, 이 역법 사용이 전세계적으로 일반화된 시기는 20세기가 되어서이다.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은 1582년에 그레고리력을 채택하였으나 대부분의 개신교와 정교회 국가들은 정치·종교적 이유로 인해 기존의 율리우스력 사용을 고수했다. 영국은 1752년, 일본은 1873년, 러시아는 1918년에 그레고리력을 채택하였다. 대한민국은 1896년부터 그레고리력을 채택하였고, 서력기원(西曆紀元, AD)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시기는 1962년 부터이다. 현재까지 대한민국에서 사용하는 태양력 또는 양력은 그레고리력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6년에 제정한 율리우스력은 1년의 평균 길이는 365.25일로 보고 4년마다 하루를 추가하는 윤년을 두었다. 이는 천문학에서 1 회귀년 365.2422일보다 0.0078일(11분 14초)이 길어서 128년마다 1일의 편차가 발생한다. 결국 이 편차가 1,250여년동안 누적되어 1582년에 이르자 부활절을 정하는 기준이 되는 춘분이 달력상 춘분인 3월 21일 보다 10일 빨라지는 오차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 편차를 수정하기 위해서 그레고리력에서는 1582년 10월달중에 10일을 제거하였고 이후에는 400년에서 3일(세 번의 윤년)을 없애는 방법을 도입하였다. 역법 개정. 개정의 필요성. 그레고리력의 채택 동기는 부활절을 언제 지켜야 할 지에 대한 초대교회의 의견 차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기원 후 4세기 초에 소아시아(현재의 터키)에 위치한 도시 에페소스의 주교인 폴리크라테스는 부활절의 날짜를 로마에서 공식적으로 정한 날짜와 달리 정함으로써 의견 충돌을 빚었다. 폴리크라테스 주교 역시 부활절의 날짜를 임의로 정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에 대한 요한 복음서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가 부활한 날은 니산 14일(춘분 즈음 시작하는 달의 보름: 유대인들의 광복절인 과월절 또는 유월절) 이후 첫 안식일의 다음날이었는데, 부활절을 히브리력(태음력)의 유월절에 따라 정해야 한다는 기독교 공동체들과 이에 반대하는 기독교 공동체들 간의 대립이 생겼다. 325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소집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부활절을 모든 기독교인들의 교회력 시기로 통일하기 위해 춘분 이후 첫 보름 다음의 일요일로 정하였다. 그러나 율리우스력은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천문학적 햇수와 날의 계산에서 작은 편차가 있었다. 즉, 율리우스력의 한 해의 길이는 정확히 365일 6시간이며, 이는 천문학적으로 계산한 1년의 길이보다 약 11분 14초가 길다. 이 편차가 AD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로부터 1,250여 년 동안 누적된 1582년에 이르자, 실제 춘분은 그해 달력상 춘분인 3월 21일 보다 10일 빨라진 3월 11일이 되는 큰 오차가 생겼다. 결국 춘분을 기준으로 하여 정하는 부활절이 점점 더 만월시기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개정 내용.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교황에게 역법 개정에 대한 권한을 부여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천문학자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역법을 제정한후, 1582년 2월 24일에 칙령을 통해 이를 발표하여 역법 개정을 단행하였다. 개정한 달력은 그의 이름을 따서 그레고리력으로 부르게 되었다. 개정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레고리력은 1년을 365.2425일로 보아 율리우스력의 400년에서 3일을 빼야 했고, 이를 위해 400년에서 3번의 윤년을 평년으로 변경하는 방법을 썼다. 즉, 율리우스력에서 4년마다 발생하는 윤년 중에서 1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는 평년으로 수정을 하되(400년의 일수가 4일 감소), 다만 그 중 4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는 여전히 윤년으로 두었다. 예를 들어, 1700년, 1800년, 1900년, 2100년, 2200년, 2300년은 평년으로 변경이 되어 윤년에 해당되지 않지만, 1600년, 2000년, 2400년은 여전히 윤년으로 된다. 이로써 400년의 일수가 율리우스력에 비하여 3일 감소하여 1년의 평균 일수가 종전의 365.25일로부터 365.2425일로 단축 되고, 이는 평균 태양년 365.2422일에 더욱 근접하는 값으로 천문학의 회귀년보다 0.0003일(26초)이 길고 약 3,300년마다 1일의 편차가 난다. 지동설 체계 적용. 새로운 달력을 만들면서 교황청은 에라스무스 라인홀트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체계를 참고로하여 1551년에 출판한 책의 《프로이센 표》를 기초로 하였다. 즉 그레고리력은 천동설이 아니라 1543년에 코페르니쿠스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을 출판하며 공개적으로 주장한 지동설 체계를 적용한 것이다. 물론 당시 교회가 천동설을 버리고 지동설을 공인한 것은 아니었고 다만 좀 더 과학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지동설 체계를 바탕으로 하였을 뿐이다. 교회가 지동설을 받아들인 것은 300년이 지난후에 일이다. 그레고리력의 채택. 21세기 현재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레고리력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레고리력 사용이 일반화 된 것은 20세기가 되어서다. 그레고리력 제정 후 1년 만에 대부분의 천주교 국가들은 새로운 역법을 시행했다. 그러나 개신교 국가들은 종교와 정치적 이유로 18세기가 되어서야 채택하였고, 정교회 국가들은 율리우스력을 고수하다가 20세기에 들어서자 그레고리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국교가 개신교였던 영국은 1752년 9월 2일 다음날을 9월 14일로, 정교회 지역인 러시아는 러시아 혁명 직후 1918년 1월 31일 다음날을 2월 14일로 하여 그레고리력을 채택하였다. 미국은 1776년 독립을 선언하며 영국의 그리고리력 사용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이렇게 나라마다 역법이 달랐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어떤 사건이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 규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 예로서 안톤 체호프가 독일의 바덴바일러에서 사망했을 때 그곳 경찰이 기록한 사망 날짜는 그레고리력에 따른 1904년 7월 15일이지만, 당시 러시아에서 쓰이던 율리우스력으로는 7월 2일이며 체호프 연구학회에서는 지금도 체호프의 사망일을 7월 2일이라고 한다. 한국의 양력 사용. 음력 사용. 조선 초에는 고려 공민왕 때 명나라에서 가져온 대통력(大統曆)을 사용하다가, 세종 때에는 회회력을 바탕으로 개정된 태음태양력을 사용하였다. 병자호란(1636)으로 청나라에서 볼모생활을 하던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여러 가지 서양 문물을 가져오면서 조선에도 역법 개정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1645년(인조 23년) 관상감 제조(提調)로 있던 김육이 상소하여 시헌력의 채용을 주장하였다. 인조의 승인하에 청나라의 예수회 신부 아담 샬이 서양역법을 적용하여 만든 시헌역법을 10여 년 동안 연구하였고, 1653년(효종 4년)에 시헌력을 시행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7요일제를 쓰기 시작한 것은 1895년 4월부터였다. 이전에는 매월 1일, 7일, 15일, 23일, 절기가 드는 날(입춘, 경칩 등)은 정기휴일이었다. 국정 공휴일은 설날 7일, 대보름과 단오 그리고 연등회에 각각 3일, 추석에는 하루였다. 또한 정월에 자일(子日)과 오일(午日)에 쉬었으며 일식과 월식이 있으면 그날은 부정을 탄다 하여 공무를 보지 않았다. 양력 사용. 19세기 말이 되자 당시의 국제정세의 흐름상 태양력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1895년 김홍집 내각에 의해서 갑오개혁 차원에서 그레고리력 채택을 추진하여 1895년 9월 9일자 《관보》에 태양력을 사용하라는 조칙을 실었다. 또한 고종은 김홍집의 의견을 받아들여 음력 1895년 11월 15일에 공식적으로 개력을 반포하였다. 이로써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정하여 양력을 사용하게 되었다. 태양력을 사용하게 되면서 그에 따른 업무를 관할한 곳은 관상감의 후신인 관상소였다. 관상소에서 새로운 책력을 배포하였으나 갑작스런 양력의 사용은 백성들뿐만 아니라 행사가 많았던 궁궐에서 조차 매우 혼란스러웠다. 음력을 참고하여 농사를 짓던 농촌의 촌로들은 크게 반발하며 책력을 내던지기도 했다. 태양력 채택을 기념하며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변경하였을뿐 서력기원(西曆紀元, AD), 즉 예수가 태어난 해를 원년으로 하는 기년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광무(光武), 단기(檀紀) 등의 연호를 사용하다가 광복직후 미군정시절 3년간 서력기원(AD)을 사용했으나 1948년에 폐지되었다. 서력기원(AD)을 다시 도입한 시기는 1962년 1월 1일부터이며 현재까지 계속 사용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공용(公用)으로 양력을 사용하고 있으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음력을 병행하여 사용하고 있다. 개인 생일이나 과거에 한때 3대명절로 분류되었던 단오절 행사 등이 이에 해당한다. 물론 정부에서도 설날, 추석, 석가탄신일 등 전통 명절에 따른 법정공휴일은 음력을 살펴 지정하고 있으나 그 밖에 삼일절, 광복절, 한글날 등 국경일과 기념일 등은 양력을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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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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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수
수론에서 완전수(完全數)는 자기 자신을 제외한 양의 약수(진약수)를 더했을 때 자기 자신이 되는 양의 정수를 말한다. 또는 모든 양의 약수를 더했을 때 자기 자신의 2배가 되는 수를 말하기도 한다. 최초 다섯 개의 완전수는 6, 28, 496, 8128, 33550336이다. 6 = 1 + 2 + 3 28 = 1 + 2 + 4 + 7 + 14 496 = 1 + 2 + 4 + 8 + 16 + 31 + 62 + 124 + 248 8128 = 1 + 2 + 4 + 8 + 16 + 32 + 64 + 127 + 254 + 508 + 1016 + 2032 + 4064 짝수 완전수.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들 네 개의 완전수밖에는 알지 못했다. 유클리드는 이들을 formula_1 에 알맞은 수를 대입해 구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때 formula_2은 언제나 소수이지만 formula_2이 소수라고 2"n" − 1도 꼭 소수가 되지는 않는다. 2"n" − 1이 소수일 때는 이를 메르센 소수라고 부른다. 마랭 메르센은 17세기에 정수론과 완전수를 연구한 수도승이었다. 모든 짝수 완전수가 formula_1 꼴이므로, 모든 짝수 완전수는 연속된 자연수의 합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메르센 수가 소수가 아닌 경우에는 해당 숫자는 과잉수가 된다. 그와 동시에 모두 반완전수이기도 하다. 그러한 예는 120, 2016, 32640, 130816 등이 있다. 15, 63, 255, 511 등은 모두 메르센 수들 중에서 소수가 아닌 합성수이기 때문이다. 6 = 1 + 2 + 3 28 = 1 + 2 + 3 + 4 + 5 + 6 + 7 496 = 1 + 2 + 3 + 4 + 5 + 6 + 7 + 8 + 9 + . . . + 30 + 31 메르센 소수의 수가 유한한지 무한한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짝수 완전수의 수가 무한한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홀수 완전수. 홀수 완전수가 존재하는지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만약 홀수 완전수가 존재한다면 그 수는 다음 조건을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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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소나타 14번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올림다단조, 작품번호 27-2》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 의해 쓰인 작품으로, “두 개의 소나타, 작품 번호 27”(“환상곡풍 소나타”)의 두 번째 소나타이다. 이 소나타의 유명한 "월광 소나타"라는 별칭은 베토벤의 사망 이후 평론가의 논평으로부터 비롯되어 생겨났다. "비창 소나타", "열정 소나타"과 함께 베토벤의 3대 피아노 소나타로 불리기도 한다. 작곡 및 배경. 베토벤은 헝가리 귀족인 브룬스비크 가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1800년, 1801년, 1806년에 그는 요제프 브룬스비크 백작(1750-1827)의 초청으로 가문의 맨션 중 하나인 운터쿠루파 성 근처에서 머물렀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그는 바로크 정원사의 오두막 위층에서 거주했는데, 1801년에 이 곳에서 브룬스비크 가문의 구전 전통에 따라 "월광 소나타"를 작곡했다(성 근처에 위치한 이 정원사의 오두막에는 현재 작은 베토벤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작품은 전통적인 고전주의 소나타에서 벗어나 낭만주의적 표현에 접근하고 있다. 속도 면에서는 완만한 1악장, 경쾌한 2악장, 급속한 3악장으로 구분되며, 악장이 진행될 때마다 템포가 빨라지는 서파급의 3단 구성을 보이고 있다. 또한 형식적으로는 소나타 형식의 피날레에 무게 중심이 놓인 균형잡힌 악장 배치가 이루어져 있고, 감정 변화가 강건한 의지 아래 흔들림 없는 귀결을 맞이한다는 베토벤 특유의 음악이 명료하게 나타나 있다. 출판 및 헌정. 이 작품의 초판은 1802년 3월에 빈의 조반니 카피 사를 통해 간행되었다. 동반 작품 "작품번호 27-1" (피아노 소나타 13번)과 함께 "Sonata quasi una Fantasia" (“환상곡 풍 소나타”)라는 이탈리아어 표제를 내걸고 출판되었는데, 이 표제는 베토벤에 의해 붙여진 것이다. "Fantasia" (“환상곡”)이라는 용어는 피아노 소나타의 비정상적인 동작 순서를 나타낸다. 그 템포는 기존 소나타 형식과는 다른 것이며, 이 작품의 경우 소나타 형식의 첫 번째 (빠른) 악장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아다지오로 시작, 트리오가 있는 활기찬 알레그레토, 소나타 형식 주 악장의 구조를 가진, 빠르고 극적인 피날레가 이어진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악장마다 속도가 증가하는 것이다. 베토벤은 짧은 시간 동안 사랑에 빠졌던 그의 피아노 학생, 줄리에타 귀차르디에게 이 소나타를 헌정했다. 하지만, 이는 베토벤이 줄리에타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선물에 대한 “보답”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베토벤은 브룬스비크 가문과의 인연으로 줄리에타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줄리에타와 사촌 관계에 있는 “브룬스비크 자매”(“테레제와 요제피네”)와도 이미 깊은 친분을 갖고 있었다. 1801년 말에 줄리에타의 피아노 지도를 맡게 된 베토벤은 눈에 띄게 그녀의 포로가 되었다. 1801년 11월 16일, 당시 30세의 나이였던 베토벤이 친구 프란츠 베겔러에게 쓴 편지에는 줄리에타를 향해 쓴 것으로 여겨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난, 이제 내 인생이 이제 조금 흐뭇해졌다고 느끼고, 다시 밖으로 나가 사람들 속에 있네. 지난 2년 동안 내 삶이 얼마나 초라하고 슬픈 것 이었는지 믿기 어려울 거네. 2년만에 얼마간의 행복한 순간을 구가하고 있는 것이지. 이번 변화는 한 명의 귀엽고 매력적인 소녀에 의해 초래되었네.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녀를 사랑하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결혼하면 행복해 질 거라는 기대도 하네. 그러나 불행히도 그녀는 나와 신분이 다르다네. 그래서, 그래서 지금은 결혼할 수 없을 것이네." 하지만, 줄리에타는 1803년 11월 14일, 오스트리아의 귀족이자 작곡가인 갈렌베르크 백작과 결혼하여 베토벤을 떠난다. 훗날(1823년), 베토벤은 당시의 비서이자 훗날의 전기 작가인 안톤 쉰들러에게 줄리에타와 진정한 연애 관계를 가졌음을 고백했다. 쉰들러는 1840년에 베토벤의 전기에서 줄리에타가 베토벤이 “불멸의 연인"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의 수신자이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것은 훗날 순수한 추측으로 판명되었는데, 그 주장에 즉시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줄리에타의 사촌이었던 테레제 브룬스비크였다. 테레제는 의심을 품었다: "베토벤의 세 통의 편지가 줄리에타 앞으로 되어 있다? 허술한 건 아닌지" 테레제가 의심을 품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쉰들러나 그 밖의 동시대 사람들과는 달리, 그녀는 여동생 요제피네와 베토벤의 오랜 열애 관계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줄리에타에 대한 이 작품의 헌정은 당초 의도된 것은 아니었다. 줄리에타에게는 "론도 사장조 작품번호 51-2"를 헌정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 론도를 헨리에테 리히노프스키 백작부인에게 헌정하기로 결정을 내리게 되면서, 줄리에타에게 헌정된 것이 이 소나타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수용 및 유산. 이 소나타가 처음 알려지게 된 시기에는 베토벤이 어느 정자에서 첫 악장을 즉흥적으로 만들었고 하여 "정자 소나타"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훗날 베토벤이 사망하고 5년 후인 1832년에 독일의 음악 평론가이자 시인, 기자였던 루트비히 렐슈타프는 이 음악이 그에게 연상 시키는 것에 대한 논평을 써냈는데, 그것은 이 음악의 첫 악장에 관한 것으로, "몽롱한 분위기가 달빛이 비치는 스위스 루체른 호수의 물결에 흔들리는 작은 배 같다"라는 내용이었다. 이로부터 10여년이 지난 후 독일과 영국의 출판물은 일반적으로 "월광(月光, , ) 소나타"라는 제목을 채택했고,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소나타는 이 통칭으로 유명해졌다. 한편 작곡자의 제자였던 체르니도 렐슈타프의 언급에 앞서, "야경, 저 멀리서 영혼의 슬픈 목소리가 들린다"라고 말한 바 있다. 또 다른 해석의 배경은 안드라스 쉬프에 의해 제공되었다. 그는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중 슬픈 장면에서의 리듬적인 연관성을 보고 그것이 "죽음의 장면" 또는 "장례식 행진"이라고 생각했다. 바렌보임도 이 논문을 지지했다. 쉬프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1막에서 죽어가는 코멘다토레의 장면에 관하여 베토벤이 자신의 원고에 메모를 남겼다고 언급했지만, 베토벤은 1803-4년까지 그 메모를 남기지 않았다는 점에서, 1800-1년에 쓰여진 소나타, "작품번호 27-2"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 작품은, "월광 소나타"라는 별칭과 함께 널리 알려지기 이전에도 이미 사람들의 상상을 불러일으키며 큰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었고, 베토벤의 생전에도 그의 가장 인기있는 피아노 작품 중 하나였다. 너무도 유명해서 베토벤은 그의 학생인 카를 체르니에게 "나는 확실히 더 나은 것을 썼네"라고 말했다. 그것은 형식적인 자유와 감정적으로 결정된 표현 방식으로 낭만주의의 중요한 선구자로 간주되었다. 그것의 표현 방식은 훗날 쇼팽의 "즉흥환상곡"이나 폴크만의 "피아노 삼중주 나단조, 작품번호 5"에서 채택되었다. 리스트는 극도로 까다롭다고 생각되는 이 작품에 관해서 학생들이 연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알렉산드로 실로티는 리스트가 베히슈타인 그랜드 피아노로 소나타를 연주하면서 너무나도 매혹되어 나중에 다른 연주가로부터 그 곡을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작품번호 147"의 마지막 악장을 위해, "월광 소나타"로부터 모티브를 가져왔으며, 사망 직전에 베토벤에 대한 또 다른 기념비를 세웠다. 1800년에서 1801년에 걸쳐 작곡된 피아노 소나타의 영향 아래에 있는 역사는 음악 작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문학과 조형 예술, 모두에서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것은 대개 느린 첫 악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수많은 예술 작품 재현의 시도 대상이었다. 악장 구성. 연주에는 보통 15-16분 정도가 걸린다. 1악장 -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올림다단조). 2/2 박자, 세도막 형식 (두 번째 주제는 나란한 조가 아니라 관련 없는 나단조). 악장은 왼손의 옥타브와 오른손의 잇단음표 아르페지오로 시작하여 점차 오른손의 주선율을 도입한다. 동시에 오른손의 잇단음표 고정 리듬 패턴이 곡 전체에 걸쳐 계속된다. 강도는 매우 약하여 일반적으로 "pp"(pianissimo, 피아노시모, 매우 여리게)로 표시되고 가장 큰 위치는 "mf"(mezzo forte, 메조포르테, 조금 세게)로 표시된다. 악장은 차분하고 몽롱하며, 조용히 생각하는 듯한 느낌이 인상적이다. 베를리오즈는 "이것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시"라고 말했다. 그는 오른손의 선율을 "추도"(追悼)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월광"으로 해독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score lang="lilypond">\new PianoStaff « \new Staff \relative c' { \key cis \minor \time 2/2 \tempo "Adagio sostenuto" \tupletDown \override TupletNumber.stencil = ##f \repeat unfold 7 { \tuplet 3/2 { gis,8[ cis e] } } | \tuplet 3/2 { a,8[( cis e] } \tuplet 3/2 { a, cis e) } \tuplet 3/2 { a,8[( d! fis] } \tuplet 3/2 { a, d fis) } | \tuplet 3/2 { gis,([ bis fis'] } \tuplet 3/2 { gis, cis e } \tuplet 3/2 { gis,[ cis dis!] } \tuplet 3/2 { fis, bis dis) } | \new Dynamics { \override TextScript.whiteout = ##t \new Staff \relative c { \clef "bass" \key cis \minor <cis cis,>1 | 1 | 2 <fis fis,> | <gis gis,> q | » </score> 2악장 - 알레그레토 - 트리오 (내림라장조). 3/4 박자, 복합 세도막 형식. 스케르초의 첫 번째 부분이 반복되지 않는 비교적 전통적인 스케르초 및 트리오이다. 그것은 내림라장조로 쓰여진 상대적으로 평온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며, 첫 악장의 조성인 올림다단조의 같은 으뜸음조인 올림다장조와 동등한 딴이름한소리로 기록된다. 악장은 길이가 짧고 주제도 짧으며(고집저음의 음형), 여러 번의 반복으로 더 차분하고 우아하게 두 악장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는데, 리스트는 그것을 "두 심연(深淵) 사이의 한송이 꽃"이라고 불렀다. 악장은 전반적으로 "p"(piano, 여리게)에 놓여져 있지만, 소수의 "sf"(sforzando, 스포르찬도, 특히 세게)와 "fp"(포르테피아노, 세게 곧 여리게)는 그 악장의 명랑한 기질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score lang="lilypond">\new PianoStaff « #(set-global-staff-size 17) \new Staff \relative c" { \key des \major \time 3/4 \tempo "Allegretto" \partial 4 <as des>4( | <as c>2 <g bes>4 | <as es'>4-.) r <f des'>-. | <as c>4-. r <g bes>-. | as4-. r <des ges!>( | <des f>2 <c es>4 | <des as'>4-.) r <bes ges'>-. | <des f>4-. r <c es>-. | des4-. r \new Staff \relative c' { \clef "bass" \key des \major f4( | es2 des4 | c-.) r <bes des,>-. | <es es,>-. r <des es,>-. | <c as>-. r \clef "treble" bes'4( | as2 g4 | f-.) r <es ges>-. | <as as,>-. r <ges as,>-. | <f des>-. r »</score> 3악장 - 프레스토 - 아기타토 (올림다단조). 4/4 박자, 소나타 형식. 폭풍우가 치는 마지막 악장은 베토벤의 "실험"(동반 소나타 Opus 27-1 및 이후의 Opus 101에서도 수행됨)을 반영, 이 작품의 중심이며 세 개의 악장 중 가장 무거운 악장이다. 첫 번째 주제는 오른손이 등반하는 아르페지오와 왼손의 강한 스타카토이다. 두 번째 주제는 첫 번째 주제에 얽힌 노래와 비슷하다. 전개부의 첫 부분에서는 두 가지 주제를 검토하고 재현부의 마지막에서는 극적인 절정에 도달한다. 이 악장의 감정의 폭발은 매우 강렬하며, 빠른 아르페지오, 트레몰로 및 과장된 표현 기호가 많기 때문에 연주자의 기술과 정서적 경험에 대한 요구 사항이 높다. 로젠은 이 악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억제되지 않은 감정 표현이며,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격렬함이 놀랍다." 베토벤은 "sf"(sforzando, 스포르찬도, 특히 세게) 음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전략적으로 배치된 몇 개의 "ff"(fortissimo, 포르티시모, 매우 세게) 악절과 함께 전체적으로 "p"(piano, 여리게) 마킹이 우세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강력한 사운드의 감각이 만들어지고 있다. <score>\new PianoStaff « #(set-global-staff-size 17) \new Staff \relative c { \key cis \minor \tempo "Presto agitato" \clef "bass" r16 gis cis e gis cis, e gis cis e, gis cis \clef "treble" e gis, cis e | \bar ".|:" gis16 cis, e gis cis e, gis cis e gis, cis e <gis e cis gis>8-. q-. | \clef "bass" r16 gis,, bis dis gis bis, dis gis bis dis, gis bis \clef "treble" dis gis, bis dis | \new Staff \relative c, { \clef "bass" \key cis \minor \repeat unfold 4 { cis8-. gis'-. } | \repeat unfold 3 { cis,8 gis' } <cis cis,> gis | \repeat unfold 4 { bis,8 gis' } | »</score> 베토벤의 페달 마크. 첫 번째 악장을 시작할 때 베토벤은 이탈리아어로 다음과 같은 지시를 포함시켰다: "Si deve suonare tutto questo pezzo delicatissimamente e senza sordino"("이 전체 곡은 댐퍼(약음기) 없이 최대한 섬세하게 연주해야 한다"). 이것을 달성하는 방법은 (현대의 피아노와 베토벤 시대의 피아노 모두) 악장 내내 서스테인 페달을 밟거나 적어도 전체적으로 페달을 사용하지만 화음이 변경되면 다시 적용하는 것이다. 베토벤 시대의 댐퍼(약음기)라는 것은 현대의 현과 햄머 사이에 펠트를 껴서 소리를 완화시키는 효과를 주는 무릎레버(현대의 소프트 페달이나 일부 우나 코르다 페달의 효과에 해당)를 뜻하는데, 이를 사용하면 지속음과 배음이 모두 끊겨버리기 때문에 베토벤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피아노는 베토벤 시대의 악기보다 서스테인 시간이 훨씬 길기 때문에 서스테인 페달을 안정적으로 적용하면 불협화음이 생성된다. 대조적으로, “역사적 기반의 악기”(복원된 오래된 피아노, 또는 역사적 원칙에 기반한 현대 악기)를 사용하는 연주자는 문자 그대로 베토벤의 방향을 더 잘 따를 수 있다. 현대의 피아노 연주를 위해 몇 가지 옵션이 제시되었다.
2304
3308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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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중국어() 또는 한어(, ㄏㄢˋㄩˇ)는 중국티베트어족에 속하는 언어로, 화어(), 중문() 등으로도 불린다. 중화인민공화국에 가장 많은 사용자가 있으며, 각지의 중국계 이주민들도 쓴다. 중국어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싱가포르에서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으며, UN의 6개 공용어 중 하나이다. 명칭은 현대 중국어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될 우려가 있으므로 역사적으로 그것까지 통틀어 일컬을 경우에는 한어(漢語)라고도 한다. 중국어는 단일의 언어라기보다는 방언연속체로 이루어진 제어(諸語)이며, 학자에 따라 다르나, 방언은 크게 10개 정도로 나뉜다. 대표적으로 베이징 등지의 방언이며 가장 많은 구사자를 보유한 관화(官話; Mandarin), 상하이 등지에서 쓰이는 오어(吳語), 남부의 민어(閩語), 광둥어 등이 있다. 근대에 들어서 중국어에는 영어 발음과 비슷하도록 많은 현대어들이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Social(反弹) , rebound(反弹), Electricity(电气) 등 현재 많은 현대어들이 근대에 만들어 졌으며 이런 단어들은 근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단어들이다. 일반적으로 한자(漢字)라는 문자로 표기되는데, 이는 고대의 상형문자 갑골문을 기반으로 한 표어문자로서 그 수가 매우 많으며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발음을 표기할 때에는 한자에서 따온 주음부호와 로마자를 이용한 한어 병음이 사용된다. 현대 중국어는 성조가 존재하며, 성조에 따라 단어의 의미가 바뀌기도 한다. SVO 어순을 따르며, 형태소가 굴절없이 단어를 이루어 어순에 따라 문법적 역할이 결정되는 고립어이다. 분류. 역사적 분류. 중국어를 역사적으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계통학적 분류. 중국어 제(諸) 방언의 특징은 중국어를 모어로 하면서 방언을 쓰는 집단 간에 서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각 언어변이형을 방언으로 취급하느냐 아니면 개별의 언어로 취급하느냐 하는 데에는 논란이 있다. 다만, 한자 및 한문이라는 공통된 문어의 기반 위에서는 중국어 제방언을 아우르는 상호의사소통성을 유지할 수 있으며, 이것이 중국어 제방언을 공통된 언어로 묶는 역할을 한다. 음운. 중국어는 성조어이다. 음절소리의 고저의 차이가 자음이나 모음과 같이 의미를 구별하고 있다. 이것을 성조라고 한다. 예를 들면 표준 중국어에는 {ma}라고 하는 형태소는 경성도 포함해서 19개나 있다. 하지만 음평성(陰平聲), 양평성(陽平聲), 상성(上聲), 거성(去聲)의 4개의 성조와 경성이 있어서 모든 것이 같은 발음은 되지 않는다. 문법. 어형변화(활용)가 일어나지 않고, 어순이 의미를 해석할 때의 중요한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고립어이다. 고립적인 특징을 가진 언어로서는 그 밖에 영어 등이 있다. 기본어순은 주어-서술어-목적어형(SVO)이다. 하지만, 현대북방어나 문어에서는 나 , 에 의한 목적격 표시 등이 있으며, 주어-서술어-목적어→주어-목적어-서술어 형의 문장을 만들 수가 있으며, 게다가 교착어에 가까워져 있다. 예 현대 중국어에서는 일본어처럼 동사의 전후나 문말에 조사, 조동사가 온다. 예를 들면 了는 동사에 붙으면 완료(perfect)를 표시하는 상(相, aspect)을 나타내며, 문말에 붙으면 법성(法性, modality)을 나타낸다. 중국어에는 시제를 나타내는 문법 범주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에 상은 존재하며, 동사에 (완료), (경험), (진행)을 붙이는 것에 의해서 나타내어진다. 또, 격에 의한 어형변화는 없는 것이 고립어의 특징이다. 따라서 중국어에도 명사나 형용사에 격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격은 어순에 의해서 나타내어진다. 예 1인칭단수의 인칭대명사 我 표기. 중국어를 표기하는 데 쓰이는 문자인 한자는 표의 문자로 로마자나 한글 같은 표음 문자와 달리 의미에 초점이 맞추어져 발음을 표기하는 데는 상당한 제약이 있다. 그래서 외국의 지명, 인명 등 고유명사는 그 지역의 원래 발음과 비슷한 한자를 가차(假借)하여 쓰거나, 간혹 그 용도와 특징을 한자어로 번역하여 (예컨대 컴퓨터를 電腦(전뇌)로 번역) 어휘를 도입하기도 한다.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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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쿠바 공화국(), 약칭 쿠바(, )는 북아메리카의 카리브 제도에 있는 가장 큰 섬과 인근 섬들로 이루어진 아메리카 유일의 사회주의 국가이며, 수도는 아바나이다. 개요. 윈드워드 해협을 사이에 두고 동쪽에는 히스파니올라섬에 있는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이, 케이만 해협을 사이에 두고 남쪽에는 케이만 제도와 자메이카가, 플로리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는 미국 플로리다주가 있다. 수도는 아바나이다. 지리적으로는 북아메리카에 포함되지만, 광의의 중앙아메리카에도 포함된다.「아메리카 합중국의 뒷마당」이라고 일반적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뒷마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를 연결하는 요로에 있다. 또한 아메리카 대륙에서 처음으로 성립한 공산주의 정권을 기념하여 「카리브에 떠오르는 붉은 섬」이라고 형용되기도 한다. 체 게바라가 참여한 쿠바 혁명으로 피델 카스트로가 집권한 이래 현재까지 공산주의 국가로서 미국의 경제 봉쇄로 경제의 어려움을 자립 경제 체제로 버티면서 미국과 대립하고 있었으나 2014년 12월 18일 국교정상화 선언을 했다. 1961년 자본주의 체제에서 공산주의 체제로 바뀌었으며, 냉전 시기인 1991년까지 중남미의 수많은 사회주의 혁명의 주요 지원 국가였다. 쿠바 섬은 카리브해의 진주라고 불리면서 세계인들에게 동경의 섬으로 알려진 곳이다. 역사. 식민지 시대. 쿠바에는 수천 년 전에 타이노족 등 원주민이 농경 등을 영위하고 있었으나, 15세기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쿠바에 건너온 이후 19세기까지 스페인의 식민지로 있었다. 16세기 초부터 스페인사람들은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를 수입하여 19세기까지 쿠바에 수입된 흑인 노예의 수는 100만 명에 이르렀다. 17∼18세기에는 흑인들이 여러 차례 해방투쟁을 일으켰으나 스페인의 가혹한 탄압으로 끝을 맺었다. 쿠바와 미국 간의 긴밀성은 쿠바의 역사에 매우 많은 영향을 끼쳐 미국은 끊임없이 쿠바를 지배하려고 넘보았다. 19세기에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와 호세 마르티는 각각 독립전쟁을 일으켰으나 스페인은 쿠바의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고, 군사 통치자 발레리아노 베일레르()는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1898년 미국의 메인 호가 아바나 항에서 정박 중에 폭발한 사고(메인호 사건)(후에 미국의 자작극으로 확인되었다.)를 구실로 미국이 일으킨 미서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스페인은 쿠바를 미국에 넘겨주었다. 종전 후 3년 동안 쿠바에서는 미국 군대의 군정(軍政)이 실시되었으며, 1903년에는 관타나모에 미국 해군의 기지가 설치되고 쿠바의 중추적 기능을 미국 자본이 장악하는 등 쿠바는 미국의 사실상의 식민지가 되었다. 쿠바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측으로서, 명목상 선전포고는 하였으나, 실제 전투에 참가는 거의 없었다. 군인들과 바티스타의 독재. 1930년 마차도의 쿠데타 이후로, 10여 년간 계속 군사 정권이 들어섰다. 1940년 쿠바 자유당의 바티스타는 선거로 정권을 획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삶의 질은 향상되었으나 빈부 격차도 극심해졌다. 1952년에는 군부의 지지를 받는 바티스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권력을 얻어냈고 바티스타에 대항한 1956년 바르킨의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공산주의 독재. 1959년 카스트로가 정권을 장악하여 쿠바는 공산화되었다. 피델 카스트로는 집권한 이 후 쿠바 내 미국 자산을 모두 국유화하였고, 이에 미국은 강력반발하며 보복으로 1961년 1월 3일 국교를 단절하고 대사관을 폐쇄하였다. (이 때 쿠바는 프로 야구인 큐반 리그를 없애 버렸다.) 이후,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쿠바 공산화 때부터 1993년까지 쿠바의 독재정권을 피하고자 120만 명의 쿠바인이 쿠바를 탈출하였다. 1970년대 쿠바는 볼리비아, 앙골라 등의 공산당 군벌들을 원조했고, 미국은 이에 대응하여 해당 국가의 정부군을 지원하였다.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쿠바의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1993년에는 일부 민간차원의 미국과의 교류를 허용하였으나 미국은 금수 조치로 쿠바에 제재를 가했다. 카스트로정권에 반대하여 수감된 양심수가 500명에 이른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등 쿠바 정부는 지난 30년 동안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로부터 인권 침해로 비난받아 왔다. 2008년, 피델 카스트로의 건강악화를 이유로 친동생 라울 카스트로가 새로운 국가평의회장직을 계승했다. 2014년 12월 18일, 쿠바는 적대적인 관계였던 미국과 국교정상화를 했다. 2016년 11월 28일에 마침내 피델 카스트로는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지리. 쿠바는 카리브 해 북쪽에 있으며 주변으로 카리브 해, 멕시코 만, 대서양에 둘러싸여 있다. 쿠바 북쪽으론 미합중국 플로리다주와 바하마, 동쪽으로는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와 아이티, 서쪽에는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 남쪽으로는 케이맨 제도와 자메이카와 이웃하고 있다. 쿠바는 카리브 해의 군도로, 쿠바는 주요 섬이다. 주변의 섬들을 네 가지로 분류하는데 콜로라도스 제도, 사바나 카마구에이 제도, 하르디네스 데 라 레이나 제도, 카나레오스 제도이다. 쿠바 본섬은 면적이 105,006 제곱킬로미터로 국토의 대부분을 이루며, 길이는 1,233km에 이르는 세계에서 17번째로 큰 섬이다. 쿠바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은 남서쪽의 이슬라 데 라 후벤투드(젊음의 섬)으로 그 면적은 3,056 제곱킬로미터이다. 쿠바의 총 면적은 110,860 제곱킬로미터이다. 쿠바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지구온난화의 영향을 받고 있어서 2050년이 되면 국토의 6%가 바다에 잠긴다는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본섬은 대부분 평탄하거나 구릉이 있는 평야이다. 섬 남동쪽 끝에는 가파른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이 있는데, 가장 높은 곳은 피코 레알 델 투르키노 산(높이 1,975m)이다. 기후. 이 곳의 기후는 열대에 속하지만, 연중 부는 북동쪽의 무역풍으로 온화하다. 일반적으로(지역차가 있지만) 11월에서 4월까지는 건기이며, 5월부터 10월까지는 우기이다. 평균 기온은 1월에는 21 °C, 7월에는 27 °C이다. 카리브 해는 기온이 따뜻한 데다 쿠바 섬이 멕시코 만 입구에 자리잡고 있어서 허리케인 이 지나갈 때가 많다. 허리케인은 9월과 10월에 자주 일어난다. 천연 자원. 쿠바의 가장 중요한 광물 자원은 니켈이다. 쿠바는 러시아 다음으로 니켈 매장량이 많다. 캐나다의 에너지 기업인 쉐리트 인터내셔널(Sherritt International) 사는 모아에 거대한 니켈 광산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다른 주요 자원으로는 니켈 채굴로 나오는 부산물인 코발트가 있다. 쿠바는 세계에서 정제한 코발트 생산량이 다섯 번째로 많은 나라이다. 최근 석유 탐사로 북부 쿠바 분지에서 약 46억~93억 배럴의 석유를 생산할 수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2006년 쿠바는 이곳에 시험 시추를 시작하였다. 정치. 쿠바의 정치 체제는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국가원수는 국가평의회 의장과 국무위원회 의장을 겸하며 현재 미겔 디아스카넬(임기 5년)이다. 국가평의회는 인민 주권 민족 회의가 폐회 중일 때 입법 기능을 수행하고, 국무위원회는 행정을 담당한다. 국가평의회와 국무위원회의 구성원은 인민 주권 민족 회의(Asamblea Nacional del Poder Popular)에서 선출한다. 입법권은 5년 임기인 609명의 대의원으로 구성되는 인민 주권 민족 회의가 행사한다. 사법권을 행사하는 최고의 기관은 쿠바 최고 인민 법원(Tribunal Supremo Popular)이다. 쿠바에는 다양한 정당들이 존재하지만, 후보를 지명하거나 선거 운동을 할 수 있도록 허락된 정당은 "쿠바 공산당"(PCC) 이외에는 없다. 쿠바의 수도는 아바나이며, 쿠바에는 14개의 주와 1개의 특별구역의 행정구역이 있다. 쿠바는 대단히 군사화 된 국가이며 국가 자원의 큰 부분을 군대의 설립과 유지를 지원하기 위하여 할애하였다. 쿠바는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지의 전쟁을 지원하는 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반면, 미국과는 2014년 12월 18일 1961년 국교가 단절된 이후 53년 만에 국교를 정상화하였다. 미국은 수개월 내에 쿠바의 아바나에 대사관을 재개관하기로 하고 여행, 송금 제한 완화와 미국 금융기관이 쿠바 계좌를 개설할 수 있도록 하는 제재 수위를 낮추기로 했다. 대한민국과는 아직 수교를 맺고 있지 않았으나 현재 주 멕시코 대사관이 쿠바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2005년 KOTRA 무역관이 개관하였고, 현재 연간 5000여 명이 쿠바를 방문하는 등 민간차원에서는 차질 없는 교류를 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60년에 수교하였다. 행정 구역. 쿠바의 행정 구역 쿠바에는 15개 주(provincia)와 특별구역(이슬라 데 라 후벤투드)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에는 여섯 지방으로 피나르 델 리오(Pinar del Río), 아바나(Habana), 마탄사스(Matanzas), 라스 비야스(Las Villas), 카마궤이(Camagüey), 오리엔테(Oriente)로 나누었다. 현재 행정 구역은 쿠바 독립 전쟁 당시 에스파냐의 군사 지역과 매우 유사하다. 쿠바의 주는 여러 시군(municipio)으로 세분된다. 경제. 쿠바 정부는 정부가 대규모로 통제하는 계획경제를 조직하는 데에 공산주의 정책을 고집하고 있다. 생산수단의 대부분은 정부가 소유·운영하며, 정부가 대부분의 인력을 고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사기업의 인력 분담율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1981년 공공부분이 91.8%, 사기업이 8.2%의 인력을 고용한 것에 비하여, 2006년에는 공공부분이 78%, 사기업이 22%의 인력을 고용하고 있다. 자본 투자는 제한적이며 정부가 승인하여야 가능하다. 게다가, 쿠바 사람을 고용하고자 하는 기업은 쿠바 정부에 임금을 지급하고, 쿠바 정부가 다시 해당 근로자에게 쿠바 페소로 임금을 지급한다. 쿠바 정부는 이론적으로는 계급 특권을 부정하는 입장이지만, 공산당원 또는 정부에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한 우대가 존재한다. 교통, 직업, 주거, 대학 교육 그리고 보다 우수한 보건 혜택을 받는 것은 정부나 또는 공산당 내에서 신분을 가져야 가능하다. 1980년대 말부터 쿠바의 국가 운영 경제에 대한 소련의 보조금이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 쿠바에게 소련은 수출의 보호무역 시장이었고 많은 경제 원조의 주역이었다. 소련은 쿠바산 사탕수수를 시장보다 높은 가격에 사 주었고 석유를 시장보다 낮은 가격에 쿠바에 공급해 주었다. 한때 쿠바가 소련으로부터 받는 보조금은 60억 달러에 달하였다. 이 보조금이 사라지자 쿠바의 경제는 "페리오도 에스페시알 엔 티엠포 데 파즈"(Período especial en tiempo de paz)라 불리는 급속한 경기불황에 직면하였다. 1992년에는 미국이 쿠바에 대한 엠바고를 더욱 강화하였다. 일부에서는 이것이 쿠바 사람들의 삶의 질을 1년 내에 위기 상황으로 몰아가는 데에 일조했다고 보고 있다. 쿠바는 1인당 실질 GDP가 약 2만 달러에 달하지만, 엄청난 고환율 정책으로 인해 쿠바 페소화가 비정상적으로 자국내에선 고평가되어 있고, 국제 화폐 기준에서는 매우 저평가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수치이다. 전문가들은 쿠바의 1인당 명목 GDP를 약 7천 달러로 예상하며, 쿠바 내에서 생산되는 품목의 경우는 싼값에 거래되지만 수입 물품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한 상태이다. 소련이 붕괴됨에 따라, 다른 공산주의·후(後)공산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쿠바는 소련의 원조의 종결을 벌충하여 식량, 소비재, 서비스 산업의 부족을 완화시킬 제한적인 자유 시장 수단을 취하였다. 이러한 수단들은 일부 소매와 경공업 분야에서의 자체적인 고용과 기업계에서 미국 달러 사용의 합법화, 그리고 관광 산업의 육성을 포함한다. 1996년, 관광산업은 사탕수수 산업을 제치고, 쿠바가 경화(硬貨)를 벌어들이는 가장 큰 자원이 되었다. 쿠바는 최근 10년간 카리브해 지역의 관광산업에 있어서 시장점유율을 3배나 올려놓았다. 이것은 관광산업의 인프라에 많은 투자를 한 결과이며, 이러한 성장율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농업. 쿠바의 경제에서 기본은 사탕수수 생산이다. 사탕수수 재배 면적은 부침땅의 4분의 1을 차지하며 사탕수수는 수출총액의 80~85%를 차지한다. 설탕 수출량의 4분의 3이 미국에 수출되고 있다. 사탕수수의 생산은 국민총생산의 25%를 차지한다. 아바나 시가는 세계 최고품 담배로 주요 수출품이다. 그밖에 벼, 옥수수, 콩, 땅콩, 감자, 귤, 커피, 레몬, 코코아, 파인애플, 목화, 채소류 등 다양한 농산물을 재배하고 있다. 농업협동화와 저수지건설이 힘차게 추진되고 있다. 축산물은 이 나라 농업의 2대 부문의 하나이다. 혁명 전의 플랜테이션이나 대지주 경작지는 전부 공산주의 혁명이후 정부에 의해 토지개혁이 시행되어 국유농장이나 소농(小農)의 경작지가 되었다. 1990년대 소련의 몰락과 미국의 봉쇄 정책으로 유기농업이 시작되었다. 쿠바는 사탕수수를 위주로 한 대량생산 시스템을 포기하고 소와 유기질 비료를 이용한 협동농장 중심의 친환경 농업으로 전환하였다. 목축업. 주요 짐승은 닭, 소, 돼지 등이다. 수산업에서는 왕새우잡이가 유명하여 생산량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첫 자리를 차지한다. 공업. 공업에서 기본을 이루고 있는 것은 사탕공업이며 기타 채취, 전력, 야금, 세멘트, 화학, 원유가공 등 중공업이 발전하고 있다. 주요지하자원은 니켈, 코발트, 철, 망간, 동, 크로뮴, 보크사이트 등이다. 주요수출품은 사탕수수, 니켈을 비롯한 광물류, 잎담배(시가)와 그 가공제품, 커피, 물고기 제품 등이며 주요수입품은 기계, 식료, 원유, 강재, 화학제품 등이다. 철도 및 자동차, 해상 운수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무역. 2006년 기준으로 쿠바의 주요 수출 상대국은 베네수엘라(13.39%), 스페인(7.66%), 독일(5.66%), 미국(4.46%)이다. 주요 수입 상대국은 베네수엘라(12.82%), 스페인(4.14%), 러시아(3.17%), 볼리비아(1.59%)이다. 2006년 기준으로 총수출액은 2,980백만 달러, 총수입액은 10,174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 품목은 시가 제품(213,218천 달러), 기타 의약품(178,905천 달러), 무인 항공기(88,625천 달러), 페니실린 등 의약품(38,131천 달러), 금속(38,016천 달러)이다. 주요 수입 품목은 디젤유(450.232천 달러), 냉장고(281,446천 달러), 형광등(169,650천 달러), 쌀가루(152,997천 달러), 냉동 닭고기(105,213천 달러)이다. 사회. 국내 총생산의 10%를 투자하는 무상교육과 7%를 투자하는 무상의료 시스템은 오직 공공선의 목적으로 굴러간다. 쿠바에는 학생이 10명 이하인 학교가 2천여 개에 달하고, 의사들의 수준은 미국에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쿠바 국민은 전체가 배급 수첩을 소지하고 있으며, 매일 배급을 받는다. 과거에는 외국의 초청이 없는 한 해외로 출국할 수 없었으나 최근 여권만 있으면 출국할 수 있도록 법이 바뀌었다. 인구와 주민. 이 나라는 500여 년 전에 스페인 사람들이 원주민 인디오를 학살했기 때문에 백인 정착자와 흑인 이주민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주민의 인종 구성은 물라토가 37%, 유럽계 백인이 51% (주로 스페인계), 흑인 11%, 중국계 1% 인 것으로 추정되며 그 외에도 메스티소가 있다. 쿠바 정부는 인종별 통계는 인종차별로 연결된다는 이유로 인종별 통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추계 값은 점차 혼혈이 증가하는 추세이며 2002년 쿠바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쿠바의 총인구는 1117만7743명 이고 이 중 남성이 559만7233명, 여성이 558만0510명이었다. 인종별로 보면, 백인이 727만1926명, 메스티소 및 물라토가 277만8923명, 흑인이 112만6894명이었다. 인구 통계에 대한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마이애미 대학교의 쿠바와 쿠바-미국 연구소(The Institute for Cuban and Cuban-American Studies)는 62%가 흑인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2002년 인구 조사에서는 백인이 65.05%로 나타났었다. 국제 소수자 인권 연대(The Minority Rights Group International)는 아프리카-쿠바 혼혈인의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혁명 전후의 빈약한 자료와 체계적인 연구의 결핍으로 인하여 여전히 의문인 상태라고 말한다. 쿠바의 인구에서 아프리카 출신의 후손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33.9%에서 62%로 매우 다양하다. 쿠바의 주민은 매우 복잡한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점점 흑인계의 인구증가율이 높아지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백인과 메스티소가 사회의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다. 근래에는 다양한 종족간의 결혼도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등 종족의 통합을 지향하는 추세다. 백인의 선조들은 스페인 사람과 다양한 라틴 아메리카 출신들이다. 18세기, 19세기 그리고 20세기 초반에 카나리아 사람, 카탈란 사람, 안달루시아 사람, 갈리시아 사람 그 밖에 다른 스페인 사람들은 쿠바 이주의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다. 그 밖에도 아일랜드인, 영국인,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포르투갈인, 러시아인, 전쟁 전 이민 온 일본계 등 아시아인 등 다양한 인종들이 쿠바에서 살고 있다. 아프리카-쿠바 혼혈인들의 선조는 주로 콩고에서 건너왔다. 20세기 동안 있었던 이민은 쿠바의 인구 특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03년에서 1933년 사이에 72만 명의 스페인 사람, 19만 명의 아이티 사람, 12만 명의 자메이카 사람, 기타 약간의 미국 사람, 중국 사람 등의 이민이 있었다. 1959년 쿠바 혁명을 통해 이뤄진 현 정부의 정책에 따라 라틴 아메리카 국가별, 스페인 식민 시대부터 이어져 온 인류에 기반 전통적 계급 사회는 파괴되고 많은 백인 유산 계층과 중산층이 미국 플로리다와 서유럽으로 망명했다. 쿠바는 또한 비 쿠바인의 피신처이기도 한데, 정확한 숫자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수천 명의 북부 아프리카 출신의 10대 및 소아 난민들도 존재한다. 쿠바의 출산율(2006년, 1천명 당 9.88명)은 서반구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쿠바 전체의 인구는 1961년의 약 7백만 명에서 현재의 1100만 명으로 꾸준히 증가하였다. 그러나 증가율은 지난 수십 년간 둔화되었다. 그리고 2006년부터는 증가율이 낮아지기 시작하였다. 2006년의 여성 1인당 출산율은 1.43명이다. 이러한 출산율의 하락은 서반구에서는 가장 큰 것이다. 쿠바에서 이혼은 자유로우며 1996년에 1천명당 58.6명이 이혼하였다. (캐리비안 지역 평균 35명, 라틴 아메리카 평균 27명, 유럽 평균 48명과 비교된다.) 피임율은 약 79%인데, 이 수치는 서반구의 상위 1/3에 속한다. 언어. 현재 공용어는 스페인어(쿠바 방식의 스페인어)이다. 하지만 관광 산업에 주력하고 있는 미국 본토에 가까운 곳, 그리고 공교육의 보급률이 높다는 점 때문에, 호텔, 레스토랑, 그리고 도심 등에서는 영어(보통 자메이카에서 넘어온 사람도 사용한다.)가 통한다. 구 소련 해체 전에는 러시아어도 공용어로 추가되었다. 러시아어는 쿠바의 대도시에서 사용된다. 또한, 아이티에서 이주한 주민은 아이티어(아이티식의 독특한 크레올 언어.)를 사용하며,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인구도 있는 편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사용하는 언어는 스페인어로 통하며, 영어, 아이티어는 소수가 사용하기 따름이다. 교육. 카스트로는 쿠바가 미국의 반식민지가 되었던 것은 미국의 선전을 국민들이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국력을 교육에 집중하였다. 1959년 쿠바혁명 이후 카스트로 정권은 교육 사회 복지 부문에 대한 투자 비율을 강화하고 관련 예산이 국가 예산의 16%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농촌의 문맹률이 크게 하락하였고 대학을 포함한 모든 교육은 무료로 제공한다. 유치원을 거쳐 예비학교 1년,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은 의무교육(obligatorio)이며 이후 고등학교, 대학교로 이어진다. 초등학교에서는 학급을 20명으로 하거나, 서브티쳐(sub-teacher)를 도입하고 있다. 고등학교 과정은 크게 직업교육을 목적으로 한 실업계고등학교, 대학교 진학을 목적으로 한 인문계고등학교, 예술고, 체육고로 나뉜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모두 교복을 입으며, 학년에 따라, 기숙사 여부에 따라, 전공에 따라 교복의 색과 무늬가 달라진다. 특히 농촌에서 높았던 문맹률 일소 운동을 전개하여 문맹률이 낮아졌다. 2002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15세 이상 국민의 문자해독률은 99.8%이며 이는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칠레와 함께 라틴 아메리카 최고 수준이다. 또 국민의 대다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주요 고등 교육 기관으로 1728년에 개교한 아바나 대학 등이 꼽힌다. 2001~2002년 기준으로 19만 1262명의 학생이 고등 교육을 받았다. 또한 쿠바는 학교 교육에서 스포츠에 주력하고 있으며 특히 야구는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필수 과목으로 도입했고 쿠바 최고의 인기 스포츠다. 인권. 쿠바 정부는 고문, 자의적인 구금, 불공정한 재판 그리고, 사법절차에 의하지 않은 처형 {일명, 엘 파레돈("El Paredón")} 등을 포함한 수많은 인권 유린으로 지탄을 받고 있다. 휴먼 라이트 워치는 이 정권이 거의 모든 정치적인 반대를 탄압하고 표현·회합·사생활·정치적 운동의 자유와 적법절차의 원칙을 제도적으로 보장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앰네스티나 휴먼 라이트 워치 같은 인권 단체는 쿠바 양심수에 대한 보고서를 발행했다. 국경 없는 기자회는 2008년의 세계 언론 자유 지수에서 쿠바를 최하위권으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국경 없는 기자회는 쿠바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공동으로 "세계에서 첫 번째로 언론인을 많이 투옥하는 나라"라고 간주한다. 쿠바 반정부 단체 하얀 옷의 여자들은 2005년 유럽 의회에서 사하로프상을 수상했다. 쿠바는 수많은 반체제 인사들을 투옥하였다. 유명 인사로는 페드로 루이스 보이텔(Pedro Luis Boitel), 마르타 베아트리즈 로케(Marta Beatriz Roque), 라울 리베로(Raúl Rivero), 마누엘 바즈케즈 포르탈(Manuel Vázquez Portal), 엑토르 마세다 구티에레즈(Héctor Maseda Gutiérrez), 호세 루이즈 가르시아 페레즈(Jorge Luis García Pérez), 기에르모 파리냐스(Guillermo Fariñas)가 있다. 휴먼 라이트 워치는 투옥된 정치범의 숫자가 매우 축소되어 발표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휴먼 라이트 워치에 따르면, 정치범들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수준 이하이며 비위생적인 조건의 감옥에 투옥되고 있다. 그 밖에도 블로그를 통해서 쿠바 소식을 생생히 전하는 요아니 산체스(Yoani Sánchez)와 같은 경우는 매우 엄격한 감시를 받고 있다. 쿠바 국민들은 정부 허가(하지만 극히 드물다) 없이는 쿠바를 떠나거나 돌아올 수 없다. 쿠바 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비슷한 광범위한 검열 제도를 실시하고 있으며, 국경 없는 기자회의 2008년 언론 자유 지수에서 최하위 순위를 보였다. 검열은 쿠바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전달을 제한한다. 언론매체는 정부에 의해 통제된다. 쿠바의 매체는 공산당의 혁명 지도부에서 관할하며, "선전 전략을 발전시키고 협조 한다.". 당국은 인터넷을 "21세기의 큰 질병"이라 부른다. 컴퓨터 소유가 금지되어 컴퓨터 보유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다. 인터넷을 이용할 권리는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허가되며, 이들도 감시받는다. 불법적인 인터넷 연결은 징역 5년형에 처해질 수 있다. 의료. 1959년 쿠바혁명 이후 쿠바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상의료를 시행하였다. 일차의료기관(Primary Health Care)을 중시하는 의료 제도를 채택하여 독특한 사회 복지 정책과 함께 "쿠바 모델"로 유명하다. 쿠바에는 '가정의 제도'가 있어 지역 주민의 건강 상태를 파악하는 등 예방진료를 담당한다. 가정 의사는 의사가 환자를 방문하여 돌보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종합의료기관(폴리클리닉)은 1차 진료기관으로 모든 진료과목과 전문의를 보유하고 있다. 최종 진료기관으로는 종합병원이 있고 이는 종합수술 및 입원이 가능한 병실 등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쿠바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에서는 미국인을 포함하여 유학생을 무료로 받는다. 의사들은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오지에서 수년간 의료 봉사활동을 한다. 쿠바는 재해가 발생한 해외에 의사를 파견하고 있다. 이것은 마이클 무어 감독의 영화 《식코》에서 소개되기도 하였다. 베네수엘라와 의사-석유 교환 협정으로 베네수엘라의 바리오 아덴트로 미션에 의료인력과 설비를 제공하고 석유를 받고 있다. 문화. 쿠바 국민의 대부분이 스페인이나 아프리카로부터 이민을 왔기 때문에, 쿠바의 문화는 스페인과 아프리카, 특히 요루바(현재의 나이지리아)의 전통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것들이 혼합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국민의 영화 감상이 번성한 나라이기도 하다. 종교. 쿠바 혁명으로 공산주의 국가가 된 후 쿠바정부는 종교를 탄압했으나, 현재는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무교가 인구의 55%에 달한다. 스페인 식민의 영향으로 쿠바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는 로마 가톨릭교회이고 쿠바 혁명 이전에 인구의 70% 이상이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였다.(1957년) 그러나 카스트로 정권 아래 신자 수는 약 40%까지 감소하고, 종교 활동이 반혁명 활동으로 간주되지 않을 필요성 때문에 현재도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교는 정부의 제한을 받고 있다. 다른 종교로는 장로교 등의 개신교, 여호와의 증인,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와 아프리카 요루바족의 전통종교가 섞인 혼합 종교인 산테리아(Santería)도 민중 종교로 존재한다. 동부 지역에서는 아이티에서 온 이민자의 영향으로 부두교 신자도 있다. 공산주의 국가로서는 특별하게도, 일본에서 발상된 창가학회도 존재한다. 기독교. 쿠바의 국교는 전통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이지만, 개신교도 소수 존재한다. 정부에서 허가하면 야외에서 종교 집회를 열 수 있으며, 개신교인과 가톨릭교회 신자 모두 사실상 쿠바 공산당(1961년 결성)에 당원으로 가입할 수 있게 하는 등 종교정책은 혁명초기에 비해 많이 온건화되었다. 이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회선교에 따른 것이다. 그 증거로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1982년 발행된 국제복음주의학생회(IFES)의 소식지《"In-Touch"》와의 인터뷰에서 쿠바의 공산당원들은 아무런 대가없이 사회선교를 실천하는 가톨릭교회 수녀들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가톨릭교회와 일반적인 개신교들을 제외한 교파로는 세계성공회공동체(Anglican Communion) 소속 쿠바 성공회(,)가 있다. 음악. 쿠바 음악은 스페인계와 아프리카계의 음악이 융합해 태어난 것을 기반으로 여러 요소가 서로 섞여서 만들어진 것으로서 라틴 음악의 중추적인 존재이다. 미국의 재즈 등과 함께 20세기의 대중음악에 큰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인 쿠바 음악은 스페인의 기타와 아프리카의 북을 조합한 요루바계 문화의 영향이 강한 룸바(Rumba)나 손(Son)이 있다. 그 외에도, 대중음악으로서, 트로바나 댄 손과 같이 유럽 음악의 요소가 비교적 강하게 남아 있는 것도 있다. 음악은 유로쿠바 음악, 아바네라(Habanera)와 아프로쿠바 음악인 룸바, 볼레로, 맘보, 차차차 등이 있다. 19 세기에 프랑스의 비제가 아바네라 리듬을 받아들인 때부터 쿠바 음악이 세계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였는데, 쿠바 음악은 먼저 1930년에 송(son)이 미국에 소개되었고, 1930년대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로 확산되었다. 1959년 쿠바 혁명 후, 미국과 국교가 단절되고, 또한 경제봉쇄 때문에 쿠바 음악이 세계로 확장되는 경로가 좁아졌다. 그러나 스페인어권 국가에서는 영향력이 지속되었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는 혁명 이후 쿠바에서 젊은 세대의 운동으로 일어난 누에바 토로바가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사회 현상이라고 할 정도의 인기와 영향력을 얻었다. 또한 아프리카풍 리듬 감각과 소련과의 연계에 의하여 고전적인 기술 체계가 반영된 재즈 연주자의 수준은 아주 높았고 1970년대 후반에 그래미상을 받은 이라케레(Irakere), 1990년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곤사로 루발카바, 추초 발데스(Chucho Valdés, 이라케레의 리더) 등 다양하고 수준 높은 뮤지션을 낳고 있다. 냉전 후 1990년대가 되면서, 로스 반 반(Los Van Van), 아달베르토 알바레즈 이 수 손(Adalberto Alvarez y su Son) 등 뉴욕 살사의 감각도 받아들인 그룹이 속속 등장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유럽 등에서 강연하는 연주가도 증가하였다. 1990년대 말에는 노년의 뮤지션을 다루었던 영화(1998년의 빔 벤더스(Wim Wenders) 감독의 작품,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기도 하였고, 경제봉쇄가 계속되던 중에도, 미국계 대형 레코드 회사가 차례로 쿠바의 음악가와 계약하고, 일본에 와서 하는 공연도 증가하는 등, 쿠바 붐이라고 불려도 좋을 정도의 활황을 보이고 있다. 쿠바의 국가는 바야모 행진곡(La Bayamesa)이다.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Carlos Manuel de Céspedes)가 작곡하였으며, 공식 국가로 제정된 해는 1902년이다. 영화. 쿠바는 라틴 아메리카의 영화 대국인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에 비해 제작 편수는 적지만 열악한 제작 여건에도 불구하고 질적으로 매우 우수한 영화들을 만들어 왔다. 혁명 정부가 1959년 세운 ICAIC(쿠바 예술, 영화 위원회)의 지원, 기획하에 영화가 제작되어 왔다. 유명한 영화인으로는 《저개발의 기억》(Memorias del subdesarrollo, 1968년), 《딸기와 초콜릿》(Fresa y Chocolate, 1993년)의 토마스 구티에레스 알레아(Tomás Gutiérrez Alea) 감독, 움베르토 솔라스(Humberto Solas), 《인생은 휘파람을 부는 것》(La vida es silbar, 1998년),《아바나 조곡》(Suite Habana, 2003년)의 페르난도 페레스(Fernando Pérez)를 들 수 있다. 관광. 카리브해에 떠 있는 붉은 섬이라는 별명을 가진 쿠바는 에스파냐와 아프리카의 영향을 받은 문화를 가진 나라이다. 헤밍웨이 박물관. 헤밍웨이 박물관(Museo Momerial 'Ernest Hemingway')은 아바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살았던 집에 있다. 1928년 헤밍웨이가 쿠바를 방문한 후 줄곧 머물며 '노인과 바다' 등의 작품을 쓴 곳으로 내부는 당시의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며 '노인과 바다'책이 있는 방, 타이프라이터, 동물박제, 9,000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다. 혁명 박물관. 혁명 박물관(Museo de la Revol cion)은 1920∼1960년에는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현재 혁명관련 사진자료와 무기가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으로 박물관 광장에는 카스트로가 반혁명파의 배를 침몰시킨 전차 Memorial Granma가 전시되어 있다. 요리. 쿠바 요리는 스페인, 카리브해, 아프리카 영향을 다양하게 받아서 섞였다. 또한, 스페인과 미국의 영향이 강하여, 쌀, 콩, 돼지고기를 많이 사용한다. 쿠바 요리는 특이하게도 스페인과 아프리카식 요리법을 자국에 도입한 한편 타국과는 다른 독특한 향이 많이 나타나서 자국의 향취를 풍긴다. 적기는 하지만 수도 아바나를 중심으로 중국 요리의 영향이 나타난다. 역사적 이유로 오래전부터 쿠바 본섬을 비롯해 지역적으로 인구 분포는 상당히 불균형적이다.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상당 부분 기용됐지만 지금도 도시 내부에서는 소수 인구를 차지한다. 담배 플랜테이션과 땅콩 재배 인구도 많다. 쿠바요리는 멕시코 요리와 상당한 연관이 있으며 미국과 유럽 관광객이 많아서 특히 더 다양하다. 라틴 아메리카 요리와 미국 요리가 지니던 특색과는 또 다른 묘미가 있다고들 한다. 외교 관계. 대한 관계. 멕시코, 과테말라 등지에서 일하던 대한민국 농민들이 쿠바로 이주해 에네켄 농장에서 강제노동을 하였다. 그 후 한국 전쟁 때 쿠바의 경제 원조를 지원받기도 하였으나, 쿠바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지금까지 외교관계가 없는 상태로 남아있다. 현재는 대한민국의 멕시코 주재 대사관에서 비공식적으로 쿠바와의 교류를 담당하고 있다. 반면, 비슷한 이념을 가진 북한과는 수교하였다. 중국이 대만과 단교한 나라들과 일제히 수교하고 있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쿠바와 대한민국의 외교 관계를 맺겠다는 계획을 내세우고 있는 것으로 보이게 되지만, 앞으로 대한민국이 쿠바와의 외교 관계를 수립할 가능성이 잠재적으로 높을 것으로 예측된다. 대 베네수엘라 관계. 쿠바는 미국, 서방 세계와의 경제 제재를 받을 정도로 고통을 주게 되자 기회를 타산지석으로 삼는 나라가 베네수엘라 뿐이다. 베네수엘라는 석유를 돈줄 역할로 쓰면서 쿠바에 석유를 무상으로 공급하고, 쿠바는 반대로 설탕을 베네수엘라에게 이익을 챙기려는 본심이 있다. 대 캐나다 관계. 캐나다는 동방 정책을 취하기 위해 대한민국, 미국, 이스라엘, 옛 서독 등과 달리 쿠바와의 외교 관계는 계속 유지중에 있으며, 캐나다에서 쿠바로 건널 때 미국의 동의가 필요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 등 외교 활동에 지장을 줄 수 있는 각종 단점들도 물론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타 국가와의 관계. 쿠바는 한국과 달리 일본, 중화인민공화국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일본의 경우 야구를 일본 프로 야구에 파견시켜서 선수를 배출하는 자격 조건도 충족되어 있고 중국은 미국과의 사이가 틀어지자 미국과 달리 쿠바와는 거의 친한 편이기도 한다. 또한 스페인의 경우 식민지 시절의 정신을 그대로 남아 있어 스페인이 쿠바에 와인, 올리브 등을 수출시킬 정도로 쿠바인들의 매력을 높일 수 있는 기준이 있다. 또한 러시아의 경우, 카스트로 정권 수립 이후 소련에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시절부터 지금까지 돈독한 사이를 가지고 있고, 쿠바 미사일 위기가 불어닥칠 때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과의 악연도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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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딧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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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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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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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SD 허가서
BSD 허가서는 자유 소프트웨어 저작권의 한 가지이다. BSD 계열 소프트웨어를 포함한 많은 프로그램에서 사용한다. BSD (Berkeley Software Distribution) 라이선스는 소프트웨어 라이선스라고도 할 수 없을 만큼 미약하여, 해당 소프트웨어는 아무나 개작할 수 있고, 수정한 것을 제한 없이 배포할 수 있다. 다만 수정본의 재배포는 의무적인 사항이 아니므로 BSD 라이선스를 갖는 프로그램은 공개하지 않아도 되는 상용 소프트웨어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이 GNU GPL과의 가장 큰 차이점인데, GPL은 파생된 소프트웨어도 GPL과 같은 라이선스를 갖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즉 파생물의 경우에도 소스 코드가 반드시 배포되도록 하는 것인데, 이것은 GPL을 만들어낸 리처드 스톨먼의 의지에 따른 결과이다. BSD 라이선스의 경우에는 BSD 자체가 공공기관에서 만들어낸 것이므로 공공의 몫으로 돌려주자는 의미가 강하므로 라이선스 자체에는 아무런 제한 없이 누구나 자신의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고, GPL의 경우에는 자유 소프트웨어의 철학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BSD 라이선스는 라이선스 자체에는 소프트웨어에 국한되지 않고 하드웨어 등에서도 아무런 제약 없이 누구나 자신의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대신 사용자의 사용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발생가능한 경우의 리스크와 손해에 대해 사전인식가능 여부와 상관없이 사용자 본인에게 책임지고 있다는 점도 이 라이선스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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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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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
쑨원(, 1866년 11월 12일 ~ 1925년 3월 12일)은 중국의 외과 의사이자 정치가이며 신해혁명을 이끈 혁명가, 중국국민당의 창립자이다. 호(號)는 이셴(, ), 본자(本字)는 더밍(), 별명은 중산() 또는 나카야마()이다. 쑨중산(孫中山)·쑨이셴(孫逸仙)이라고도 불리는 그는 청나라 광둥성 샹산 출신으로 홍콩에서 의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 중에 혁명에 뜻을 품고 1894년 미국 하와이에서 흥중회를 조직하여 이듬해 광저우에서 최초로 거병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일본과 유럽 등지에서 망명하면서 삼민주의를 착상, 이를 제창했다. 1905년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 화교들을 중심으로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 반청 혁명운동을 전개했다. 1911년 쑨원은 난징에서 신해혁명을 크게 성공시킴으로써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으나, 북양군벌의 거두 위안스카이와 타협, 같은 해 3월 1일 위안스카이에게 실권을 위임하였고 급기야는 같은 해 3월 10일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직을 넘겨주었다. 같은 해 '제2혁명'에서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 이듬해 중화혁명당을 결성하여 반원(反袁])운동을 계속했다. 1917년 광저우에서 군정부를 수립, 대원수에 취임하고, 1919년 중화혁명당을 개조, 중국국민당을 결성했다. 1924년 국민당대회에서 '연소, 용공, 농공부조'의 3대 정책을 채택, 제1차 국공합작을 실현시켰다. 이어 '북상선언'을 발표하고 '국민혁명'을 제창, 국민회의를 주장했으나, 이듬해 베이징에서 병사했다. 쑨원의 묘는 난징에 있다. 오늘날 중화민국에서 국부로 추앙받고 있고,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마오쩌둥 다음가는 사상가로 평가되고 있다 쑨원은 한국의 독립 운동 지원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창립에 커다란 일조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로를 인정받아 1968년 12월 1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받았다. 이름. 청나라와 일본 제국, 그리고 군벌 등의 정적들에게 평생 추적을 당하면서 중국 국내외 여행이 많았던 그는 여러 차례 가명을 사용하였으며 이 때문에 그의 호칭은 잘 알려진 쑨원(孫文)과 중산(中山) 외에도 여러 개가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호적상의 본명은 쑨더밍()이며 아명(兒名)은 쑨디샹()이다. 쑨원()이라는 이름은 그가 10세 무렵부터 사용한 이름이다. 자(字)는 재지()이다. 그리고 호(號)는 일신()이었는데 홍콩 서양 의학원의 중문학 스승의 권유로 일선()이라는 또다른 자(字)를 병용한다, 일신과 일선은 광둥어로 발음하면 ""으로 같은 발음이다. 잘 알려진 중산(中山)은 정식으로 만든 호가 아니라 1897년 무렵부터 사용한 "나카야마"라고 하는 일본 성씨 가명이다. 쑨원이 광저우에서 1895년 30세의 나이로 가담한 혁명이 실패한 후, 외국으로 수 년간 피신했을 시기에 일본에서 사용한 가명 中山 樵(나카야마 키코리, 나카야마 사코노, 중산 차오, 중산 초)에서 유래한다. 이 밖에도 일본에서 망명하던 시절에 다카노 나가오(高野長雄)라는 일본식 가명을 사용하였다. 생애. 생애 초기. 쑨원은 1866년 11월 12일 광동성 향산현() 부근의 취형촌(翠亨村)의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쑨다청(孫達成, )은 일찍이 마카오에서 재봉 일을 하다가 그 뒤로 그 사치함을 더럽게 여겨 농촌으로 되돌아 왔다. 큰 형은 손미()이고 자는 덕창(德彰)이다. 그의 집안은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상업에 종사하였다. 영국·프랑스 등 열강이 무너져 가는 청조를 침략하여 이권을 차지하려는 혼란한 시기에 태어났으므로, 어려서부터 제2의 홍수전으로 자처하며 청나라의 타도를 꿈꾸었다. 집이 가난하여 배우지 못한 채 13세때 1879년 하와이 호놀룰루로 건너갔다. 그는 하와이 화교 자본가였던 큰형 쑨메이(孫眉)의 도움으로 유학하며 미국의 민주주의를 몸소 배우고 느꼈다. 그리고 홍콩으로 돌아온 이후 1892년 홍콩 서양 의학원에서 의학을 배웠다. 이 시기에 그는 서구식 민주주의와 자연 과학적 사고 방식을 받아들여 큰 영향을 받았다. 청조말기 혁명운동 활동. 혁명운동 투신과 흥중회 활동. 의대를 졸업한 후 쑨원은 병원을 개업하고 잠시 개업의로 생활한다. 하지만, 서구 열강들의 침입으로 나라가 더욱 어려워지자 쑨원은 1894년 청조의 실력자 이홍장에게 편지를 보내 "사람은 그 재능을 다할 수 있어야 하고, 토지는 그 이익을 다할 수 있어야 하며, 물건은 그 쓰임을 다할 수 있어야 하고, 재화는 그 흐름이 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개혁적인 주장을 펼쳤지만 이 편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쑨원은 1894년,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연합정부 건설'을 강령으로 하는 흥중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1895년 1월에는 홍콩에서도 흥중회 지부를 결성했으나,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흥중회는 청나라 조정이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는 등 갈수록 그 무능함을 드러내자 '오직 혁명만이 위기에 놓인 조국을 구하는 길'이라는 신념 아래 1895년 10월 광저우에서 무장봉기를 계획했다. 그러나 봉기는 가담자의 밀고로 허무하게 무산되고, 쑨원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우선 일본으로 탈출, 망명했다. 삼민주의 윤곽형성. 그리고 이듬해 1896년으로 일본을 떠나 영국에 머물렀는데, 거기서 청나라 공사관에 체포되고만다. 그러나, 다행히 영국인 친구의 도움으로 무사히 풀려났다. 석방 직후 기자회견에서 영국을 격찬, 일약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쑨원은 해외 언론들의 관심을 받았고 중국 혁명의 지도자급 핵심 인물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영국 런던에 체류하면서 생활하게 되는데, 대영박물관의 도서관을 드나들며 약 9개월간 독서에 열중하면서 지낸다. 이 기간동안 쑨원은 경제학자들인 카를 마르크스와 헨리 조지 등의 저술을 탐독했고 사회 과학의 여러 분야를 연구했는데, 이때부터 그의 혁명이념인 '삼민주의(민권·민족·민생)'의 윤곽이 형성되었다. 망명과 무장봉기 기도. 이듬해 1897년 쑨원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 우익들의 도움을 받으며 망명생활을 지내게 되는데, 이 시기 쑨원은 나카야마 쇼우라는 가명을 쓰며 다시 혁명세력을 결집하고 다녔다. 1900년 의화단 운동으로 청나라 정국이 더욱 어수선해진 상황에서 쑨원은 오랜 망명생활 끝에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2차 무장봉기를 준비하지만, 이 역시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해외활동과 혁명선전. 그 후 몇 년간 쑨원은 일본, 하와이, 베트남, 시암, 미국 등지에서 화교와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혁명 사상을 전파하고, 1905년에는 필리핀, 독일, 프랑스 등의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혁명단체를 조직하게 되었다. 1905년 8월에는 일본 도쿄에서 흥중회, 화흥회 등의 단체를 기반으로 중국혁명동맹회(중국 동맹회)라는 새로운 단체를 창건하고 총리에 추대되었다. 동맹회는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민국 창립, 토지 조유의 균등'을 강령으로 채택했고, 쑨원은 동맹회의 기관지 《민보》(民報) 발간사를 통해 삼민주의를 발표했다. 이후 중국동맹회는 총재 쑨원의 지휘를 받으며 수십여차례 봉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봉기는 빈번이 실패로 끝나고 쑨원에게는 가혹한 질책과 비판이 뒤따랐다. 쑨원은 중국동맹회의 활동을 다른 동지에게 맡기고 출국하여 1911년 무렵까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중국혁명의 당위성을 알리는 한편, 혁명자금과 군자금을 마련하여 동맹회의 활동을 뒤에서 도왔다. 신해혁명과 중화민국 수립. 혁명의 기회는 의외의 곳에서 찾아왔다. 당시 청나라에서는 청일전쟁 이후 민간이 스스로 주식을 발행하여 마련한 자금으로 철도를 건설하겠다는 '철도 부설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1911년, 청조에서는 우전부대신 성선회의 건의에 따라 이들에게 아무런 설명이나 사전 협의도 없이 철도건설을 국유화시켜 버렸다. 이러한 청조의 철도 국유화 정책으로 가장 많이 피해를 본 것은 쓰촨성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사천보로동지회'를 결성하여 동맹휴학과 납세 거부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쳐나가기 시작하였고, 각지에서 보로운동이 전개되었다. 다급해진 청조는 우창에 있던 군인들을 동원하여 이들을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우창에서는 중국동맹회의 활동이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동맹회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0월 10일 우창 봉기를 일으키고 총독관청을 일시에 장악해 '호북군 정부'를 조직했다. 이 소식은 빠르게 중국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각지에서 우창 혁명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두 달이 채 안되는 기간동안 17개 성이 청조로부터 독립을 선포했다. 12월 2일 혁명군은 난징을 함락하고 난징에 임시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동맹회와 혁명군의 성과는 혁명운동의 지도자들도 예상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당시 중국을 중흥할 현실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있지 못했고, 강력한 영도자도 없었다. 때문에 청조로부터 요청을 받은 위안 스카이 군대에 의해 진압당할 형편이 되었다. 외교활동. 한편, 혁명이 일어났을 때, 쑨원은 중국 밖에 있었다. 그는 그때 외교적, 재정적 지원을 얻기 위해 서구를 돌아다니고 있었고, 우창 봉기 당시 쑨원은 혁명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미국 콜로라도주의 덴버에 체류중이었다. 그는 덴버에서 그곳의 신문에 보도된 기사를 보고 국내의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쑨원은 '혁명을 성공시키려면 서구 열강의 간섭을 사전에 막아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즉 외교의 성패에 따라 혁명의 성공이 좌우된다고 여긴 것이다. 당시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는 6개국으로 미국과 프랑스는 공화정을 실시하려는 중국을 동정하는 입장이었고, 그 반대로 독일과 러시아는 혁명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며, 일본의 재야는 중국의 혁명에 동정적이었으나 정부는 그 반대였고, 영국의 경우는 재야가 동정적이었으나 정부는 미정된 상태였다. 따라서 쑨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나라가 영국이라 보고 급히 영국으로 달려가 교섭을 벌였다. 그는 영국 외무성과 회담하고 영국정부에 대하여 청조에 대한 일체의 차관을 중지할 것과 일본에게 청조의 지원을 중지하도록 해주고, 영국 각 속지에서 '쑨원 추방령'을 취소하도록 요구하여 영국정부로부터 확약 받는 대신에 혁명정부는 청나라와 체결한 모든 조약을 인정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프랑스로 가 똑같은 약속을 받아내고, 12월 16일 싱가포르에서 체류하다 12월 21일에 홍콩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호한민과 요중개를 만나 전후의 사정을 듣고 '광둥지역을 기반으로 삼자'는 일부 인사의 주장을 거절한 채 12월 25일 상하이로 와 진기미, 쑹자오런을 만나 정부조직에 관하여 의논하였다. 여기에서 쑹자오런은 '내각 책임제'를 주장했고, 쑨원은 '미국식 대천황중심제'를 주장하였다. 임시대총통 취임과 위안스카이와의 협상. 12월 29일에 난징에서 '각성대표회의'(17성의 45명, 화교 2명)는 총통 선거회를 열었는데, 쑨원이 16표를 얻어 초대 임시대총통에 당선되었다. 쑨원은 이 소식을 듣고 이를 받아들인다고 하였다. 1912년 1월 1일에 손문은 난징에서 영접 온 이들과 함께 열렬한 축하를 받으며 상하이를 출발하여 그 날 오후 5시에 난징에 도착하여 밤 11시에 총통부에서 취임식을 갖고 서약하였다. 이어 쑨원은 임시대총통직에 취임한 뒤 국호를 중화민국, 1912년 1월 1일을 '민국 원년'으로 하였다. 이로써 그 동안 주도권 장악을 위하여 벌였던 싸움은 일단락되었고,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민주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쑨원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비록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나 청조는 굳건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들을 무너뜨리기에 그의 세력은 너무 약했다. 쑨원은 여기서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데, 바로 청조의 요청으로 혁명군 진압을 지휘하고 있던 위안 스카이와의 협상과 연합이었다. 쑨원은 위안 스카이에게 청조를 설득하여 그들을 퇴위시켜줄 것을 요청하고 만일 이 요청이 받아들여진다면 '대통령의 지위를 그에게 양보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따라 위안 스카이는 청조를 설득하여 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로 하여금 2월 12일 퇴위조서를 발표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청조는 1912년에 멸망하게 되었다. 혁명정부는 청조와 위안 스카이 사이에 퇴위협약이 진행되는 동안 위안 스카이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해 3월, 대통령중심제였던 '임시정부 조직대강'을 수정하여 내각 중심제를 기본 틀로 한 '임시약법'을 제정,발표하였다. 그리고 쑨원은 약속대로 위안 스카이에게 1912년 4월에 임시 대총통직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쑨원과 쑹자오런은 중국 동맹회를 1912년 12월에 국민당으로 개편하여 쑹자오런이 이사장 대리으로서 당수가 되었고, 쑨원을 이사장으로 추대하였다. 민국초기 혁명활동. 위안 스카이의 독재. 그러나 권력을 잡은 위안 스카이의 야심은 제약할 길이 없었다. 위안 스카이는 임시약법을 무시하고 대통령 중심제로 법을 개정함으로써 완전한 독재정권을 수립하고, 서구 열강세력으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받아먹는등 '매국'행위와 '독재'정치를 일삼았다. 아울러 그의 유력한 정적이 될 가능성이 높았던 국민당의 이사장 대리였던 쑹자오런을 암살하는 등 전횡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 쑨원은 위안 스카이를 무력으로 타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위안 스카이의 전횡에 반대하는 이열균(李烈均) 등이 토원군(討遠軍)을 조직하여 대항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고, 쑨원은 1913년 7월에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는 신세가 되었다.(제2차 혁명) 위안 스카이의 독재정치와 욕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어용단체를 조직하고 여론을 선동하여 '황제'로의 등극을 도모하기에 이르렀다. 1914년 쑨원은 일본 도쿄에서 구(舊) 혁명당원들을 모아 중화혁명당을 결성하는데, 이 중화혁명당은 뒷날 중국국민당의 모태가 된다. 혁명당원들은 곧 국내로 들어와 위안 스카이에게 반대하는 무리들을 규합하여 토원군을 재조직하였다. 위안 스카이의 황제 등극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가운데 운남 성 도독이었던 당계요가 토원군에 가담하여 이름을 호국군(護國軍)이라 개칭했다.(제3차 혁명) 이와 때를 같이하여 위안 스카이의 심복이었던 돤치루이도 위안 스카이의 황제 등극을 반대했고, 서구 열강들도 위안 스카이에게 황제 등극을 강력히 반대했다. 결국 위안 스카이는 황제 등극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에 호국군은 더욱 압박을 가해 위안 스카이의 퇴임을 요구했으나 1916년 6월, 위안 스카이가 병사함으로써 이 일은 자연스럽게 일단락되었다. 1916년 위안 스카이의 사망과 때를 같이하여 쑨원은 일본에서 귀국하였다. 호법운동. 1917년 위안 스카이 사후 북양 정권은 돤치루이의 수중에 떨어졌다. 돤치루이의 탄압을 피해 광둥성지역으로 자리를 옮기고, 비상국회를 열어 서남군벌 세력과 연합하여 광저우에서 군사정부를 세우고 쑨원을 대원수로 추대했다.(호법 정부) 쑨원은 1917년 9월, '광둥 군정부'의 대원수로 임명되어 임시약법 수호를 위해 투쟁할 것을 선언했다.(첫 번째 호법 정부) 그러나, 그 조직도 실권을 잡지 못했고 같이 손잡은 군벌들의 본질을 보고 이들 군벌들과는 '호법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다음 해 1918년에 대원수 직책을 사임하고 5월에 상하이로 망명가야했다. 이 기간동안 쑨원은 얼마간은 상황이 유리할 때는 광저우로 돌아갔다가, 상황이 불리해지면 다시 상하이로 도망치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저술활동과 강연활동을 하고 지냈는데, 상하이에서 《쑨원학설》,《건국대강》등 중요한 저술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뒷날 국민 정부의 지도이념이며 국정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또, 쑨원은 상하이에 있는 동안에 《건설》잡지를 창간하고, '민지서국'(民智書局)을 세워 혁명 사상을 선전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1918년 여름무렵에 레닌과 소련 정부에 축전을 보냈다. 1919년 5.4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운동은 쑨원에게 있어서 커다란 자극을 주었는데, 이 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보고 '중화혁명당에 대중성을 도입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쑨원은 5.4 운동을 계기로 기존에 구상했던 '위로부터의 혁명'노선을 버리고 '아래로부터의 혁명'노선으로 선회하여 1919년 10월 10일에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으로 개칭하고 총부를 상하이에 두었다. 중국국민당은 조직상에 있어서 중화혁명당과 달랐는데, 비밀당의 조직을 공개적으로 한 점과 중화 혁명당 시기에 당원이 당수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는 규정을 삭제하고 당원의 등급을 폐지시킨 것 등이었다. 한편, 쑨원이 대원수 직책 사임한 이후 1918년 5월~1920년 6월까지의 광둥 정부(호법 정부)는 '7인 총재정부'로 존재했다. 1920년 6월에 쑨원은 상하이에서 당소의, 오정방, 당계요 등과 함께 합작을 성명하고, '광둥 정부의 계계 군벌이 호법의 이름을 빌려 나쁜 일을 저지른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복건 성 남쪽에 주둔하고 있던 광둥성 군벌 진형명에게 광둥에 자리잡고 있는 광서 성(계계) 군벌을 타도하도록 하였다. 이에 진형명은 '광둥인이 광둥을 다스려야 한다'며 광둥 정부를 타도하였다. 진형명은 쑨원이 광저우로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나 쑨원은 그를 광둥성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안심시켰다. 그리고 11월 말에 국회의원들과 함께 광저우로 와 국회를 소집하였다. 여기에서 '군정부가 이미 존재하지 않으므로 정식 정부를 세우자'고 하였다. 이에 따라 이듬해인 1921년 4월 광둥성 국회에서 '중화민국 정부조직 대강'이 결정되었다. 다음달 5월에는 쑨원이 광둥에서 '중화민국 정식정부'의 총통에 취임했다. 이로써 중국은 북쪽에서는 북양 정부, 남쪽에서는 쑨원 중심의 광둥 정부(두 번째 호법 정부)로 양분되었다. 호법 정부가 성립된 후 쑨원은 호법(護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무력으로 북양 정부와 대항하고자 국회에 '북벌안'(北伐案)을 제출하여 이를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호법 정부는 구이린에 대본영을 설치하고 대대적으로 북벌 준비에 들어갔다. 이때 쑨원은 안휘파와 봉천파와 함께 '반(反) 직예파 삼각동맹'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형명은 직예파의 오패부와 결탁하여 북벌을 반대하고, 쑨원과 가까운 광둥군 참모장 겸 제2사단장을 암살하였다. 이에 쑨원도 1922년 봄에 구이린에서 긴급 군사회의를 열어 북벌 계호기를 변경, 광둥으로 돌아와 진형명이 가지고 있던 광둥성 성장 등의 직책을 취소하였다. 또 5월 4일에 북벌령을 내려 소관(韶關)에 대본영을 설치, 강서 성으로 북벌을 시작하였다. 한편 진형명은 쑨원의 이러한 조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1922년 6월에 총통부를 포위하였다. 이 때, 장제스가 황푸에서 영풍함(永豊艦)을 타고 광저우로 와 쑨원을 구하였으며, 호법 정부는 북벌군을 불러들여 진형명을 토벌하였다. 결국 호법을 위한 두 번째의 북벌도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쑨원도 상하이로 갔다가 1923년 초순 주변군벌의 압력에 의해 '진형명의 난'이 평정되자 다시 광저우로 돌아와 세 번째 호법 정부를 조직하고 다시 북벌을 도모하였는데, 이러한 시기에 쑨원에게 접근한 것이 소련의 코뮌테른이었다. 코민테른과의 연계. 코민테른은 1920년에 중국공산당이 창당되었다고 해도 그 힘으로는 중국 혁명을 이끌어 낼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중국 안에서 협조자를 물색하였는데, 오패부와 같은 군벌도 고려되었지만 그 동안 혁명을 이끌어 온 쑨원을 지목해 관심을 가졌다. 때문에 보이틴스키는 상하이에 와서 쑨원을 만났고, 쑨원도 소련의 혁명 사정에 대하여 관심을 표명하였다. 1921년 7월, 레닌의 비서인 마링도 중국에 오자마자 쑨원과 만나 중국국민당 개조를 촉구하고, 군사학교를 세워 혁명을 위한 무력을 키워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이때 쑨원은 소련이 실시하고 있는 신경제정책(NEP)과 자신의 실업 계획이 별차이가 없음을 밝히고, 처음에는 중국공산당이나 코민테른과의 합작을 거부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쑨원은 북벌을 준비하고 있어 양쯔 강을 건너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이 지역은 영국의 세력권이어서 그 방해를 받을까 우려되었고, 당시 '반(反)직예파 삼각 동맹'의 안휘파나 봉천파는 모두 일본과 가까운 관계여서 소련과의 합작은 곤란하였으며, 또한 중국공산당의 힘이 당시로서는 너무 미약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쑨원은 중국공산당이 창당되면서 이들의 주도 아래 노동운동이 확산되고 노동자의 요구가 관철되는 모습을 목격하며, 만일 중국공산당 당원이 개인적으로 가입을 원한다면 받아들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감지한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과의 관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결의하고, 소련은 외교가인 요페(Adolf Abramovich Joffe)를 파견하여 북양 정부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고 하면서 베이징으로 왔다가 다시 병을 치료한다는 명분으로 남쪽으로 내려와 쑨원을 만나 중국국민당의 개조문제, 코민테른의 중국 혁명 원조 문제 등을 협의하여 1923년 1월 16일 이른바 '쑨원-요페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으로 쑨원은 '연소용공' 정책의 기본이 되었으며, 이른바 '제1차 국공합작'의 기초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쑨원과 소련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1923년 1월 1일에 쑨원은 '중국국민당 개조 선언'을 발표하여 당의 개조 작업에 들어갔다. 따라서, 공산당 당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중국국민당에 입당하게 되었으며, 또 프랑스에 유학 중인 학생들로 조직된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의 단원은 단체로 중국국민당 프랑스 지부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소련의 초청으로 8월 16일에 장제스를 단장으로 '쑨원(일선) 박사 대표단'을 모스크바로 파견하여 소비에트 제도와 군사 조직을 살펴보도록 하였다. 이들은 약 4개월 동안 소련의 각 도시를 돌면서 소비에트 조직과 군사학교 등을 시찰하고 12월 15일에 귀국하였다. 소련 정부도 쑨원에게 재정 원조와 고문단을 보내기로 결정하여 정치 고문 미하일 보로딘과 군사전문가를 중국에 파견하였다. 국공합작. 1924년 1월에는 쑨원의 주관으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광저우에서 소집하였으며, 중국공산당원이 참여하는 중앙통치기구를 구성하여 공산당과의 합작을 이루었다.(제1차 국공합작) 여기에서 새로운 당의 강령과 헌장을 제정하여, 1.소련과의 연합, 2.공산당과의 연합, 3.노동자·농민에 대한 원조라는 3대 정책을 확립하고, 공산당원이 참여하는 중앙 통치 기구를 구성하였다.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에서 쑨원은 삼민주의에 반제·반봉건적 내용을 추가하였다.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이 소집은 쑨원의 혁명사업이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일련의 투쟁을 통해 쑨원은 제국주의 타도만이 중국의 독립과 부강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말년과 병사. 국민혁명을 추진하기 위한 북벌군이 진격할 즈음, 1924년 10월 봉천파 군벌 장쭤린과 직예파 군벌인 펑위샹이 연합하여 차오쿤을 대표로 하는 군벌 정부를 전복시켰다.(베이징 정변) 이후 펑위샹, 돤치루이, 장쭤린이 쑨원에게 전문을 보내어 국정을 함께 논의할 것을 요청하였다. 쑨원은 정치교섭이 필요함을 느껴 이 요청을 받아들여 1924년 11월 광저우를 떠나 베이징으로 향했다. 그는 광저우->상하이->일본 고베->톈진->베이징 순으로 시찰하고 다녔는데, 이때 그의 몸에는 암이 번지고 있었다. 시찰 도중에 일본 고베에 들렀을 때 현립 고등여학교에서 '대아시아주의'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면서 일본 정부에 이같이 물었다. 이듬해 1925년 초 돤치루이의 주선으로 시국 수습을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베이징에서 소집되었다. 쑨원은 동지들을 인솔하여 베이징으로 향하는 도중에 간암으로 쓰러졌다. 이해 2월 24일 아들 손과와 송자문, 공상희, 다이지타오 등을 증인으로 한 가운데 유언을 남겼다. 이는 왕징웨이가 쑨원의 구술을 받아쓰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그의 첫 유언에는 부인 쑹칭링과 자식들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그는 한달 뒤 다시 첫 유언을 남길 때 참석했던 사람들 모두 모아놓고 두 번째 유언을 했다. 그는 1925년 3월 12일 간암으로 베이징에서 향년 60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사후. 그의 시신은 모두 네 차례에 걸친 입관 끝에 장제스가 1928년 북벌에 성공한 직후인 1929년 6월 1일 난징 시외의 중산릉에 안장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사후 43년 만인 1968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한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하였다. 연보. 반란 후,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과 합작하기 위하여 이대교(李大钊) 등 유명 공산당 인사들을 개인 자격으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하게 함. 기타. 정치활동 및 업적. 1895년 무렵부터 평생 동안 청나라에 반대하는 혁명을 주도했다. 1905년 남경에서 동맹회 (1912년의 신해혁명 후에 국민당으로 개편)를 조직해서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제시했고 1913년 중국국민당을 창시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기록은 쑨원 말년의 "소련, 코민테른, 중국공산당과의 합작"을 자세히 기록하면서 강조하는 면이 있다. 반면, 중화민국의 기록은 장제스가 1918년 이후로 쑨원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는 점을 감안하여서, 그리고 중화민국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점에서 쑨원에게 지극히 우호적이나, 그의 국공합작 내용이나 공산계열에 우호적이었던 활동은 다소 축소되어 기술되는 경향이 있다. 쑨원과 군벌의 관계를 말하면, 1912년 위안스카이와의 회합 후 그에게 배반을 당해 북양군에 의해서 그의 조직이 와해되고, 다시 1917년 광주 지역에서 서남군벌과 합작한 조직에서 1918년 축출되었으며, 1921년 광동에서 조직한 세력도 1922년 진형명의 반란 등으로 타격을 입는 등, 군벌 조직으로부터 많은 피해를 입었다. 실제로 그의 대표적인 수장(首長) 직위를 살펴보면 1912년 1월에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中華民國 臨時大總統)으로 있다가 2월에 위안스카이에게 자리를 넘겨주며, 1917년에 광주에서 대원수(海陸軍 大元帥)로 있다가 1918년에 축출되며, 1921년에 비상 (임시) 대총통(非常(時期)大總統)으로 있다가 진형명의 반란을 맞이한다. 중화민국의 실제적 실권을 쥐는 1923년에야 민정적 명칭인 대총통이 아닌, 군사적 성격이 강한 대원수(海陸軍大元帥)가 된다. 그는 광동 지역에 기반을 두고 국내는 물론이며, 하와이에 있던 큰 형 쑨메이() 등의 도움으로 해외의 화교와 유학생을 규합하며 해외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의 오권분립과 삼민주의 등의 사상은 민중의 많은 지지를 받았으며, 그가 제창한 삼민주의 정신은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양 측에서 모두 높이 인정받고 있다. 또 국민당을 창당한 쑨원은 통치방식을 ‘군정’ ‘훈정’ ‘헌정’의 3단계로 나눴다. 군정은 군대의 힘으로 통치하는 것으로 이른바 계엄상황이다. 훈정은 일당독재, 헌정은 보편적인 민주주의 체제를 각각 의미한다. 쑨원은 당시 중국인들의 민도가 낮아 국민당 지도 아래 군정·훈정을 거치고 이후 헌정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중국 혁명 정신이 남긴 영향은 아직도 그의 초상화가 중국 대륙 및 타이완의 정치 행사에 자주 사용될 정도로 크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기념일인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절 등에는 그의 대형 초상화가 천안문 광장에 걸리며, 2004년 중화민국의 천수이볜 총통 취임식에서도 쑨원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중화민국의 국부(國父)로 칭송받으며, 반면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국부보다는 ‘혁명선행자’(革命先行者)로서 존경받고 있다. 삼민주의. 삼민주의는 쑨원에 의해 제창된 지도이론으로 중국혁명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896년~1897년 쑨원이 영국 런던에서 망명하던 중에 구상된 것으로, '멸만흥한'(滅滿興漢)에 입각한 민족주의, 수천년에 내려운 군주전제 정체의 변혁을 목표로 한 민권주의, 사회·경제의 조직 개혁을 지향하는 민생주의를 골간으로 하는 혁명 이론이다. 1905년 쑨원이 일본 도쿄에 망명하던 중 중국 혁명동맹회를 결성했는데, 동맹회 결성 후에는 삼민주의가 곧 지도이론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신해혁명 후 혁명운동의 진전에 따라 그 내용도 점점 변화되어가고 발전하게 되었다. 중요한 참고로, 삼민주의의 원형과 현대 중국 본토의 역사관은 사뭇 다름을 인지하여야 한다. 즉, 1905년 혁명동맹회에서 제시된 초기 삼민주의와 대비하여 현재의 삼민주의와 정치사상은 확인이 다름을 이해하고 인지하여야 한다. 초기의 삼민주의와 현재의 삼민주의는 같지 아니하며, 이의 변화는 중국 현대사의 흐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로서, 초기 삼민주의와 연관된 1905년 당시의 동맹회 구호는 구제달로(驅除撻虜 ; 달로(오랑캐)를 박멸한다), 회복중화(恢復中華), 창립민국(創立民國), 평균지권(平均地權)의 4대 강령이었는데, 이 중 --- 현재로서는 그 표현이 다소 과격하기도 하고, 현대의 정치사상과 배척되는 --- '구제달로'의 민족주의 강령은 중국 통일 후 소수민족 수용을 위한 민족주의로서 소수민족을 배려하는 정치적 필요를 고려하여 현대화 수용되었으며, 현재의 민족주의는 중국내부의 한족, 만주족, 몽고족, 회족, 장족 등 여러 소수민족과 한족이 상호 평등 및 대외적으로 '하나의 중국 민족'으로 본다고 중국 내부에서는 교육되고 있다. 즉, 초기 삼민주의에서 제시된 구제달로 등 과격한 구호는 현재 마땅히 표현되지는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현대의 민권주의는 민주 정치의 실현을 위해 국민이 선거, 파면, 창제, 복결의 4대 권리를 가짐으로써 인민의 권력과 정부의 권력이 균형을 유지하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는 현대화된 사상을 교육하고 있다. 민생주의는 국민의 생활 안정을 위한 사회주의적 성격의 주장으로서 자본의 억제와 지권의 평균을 제시하였으며 최종목적은 대동세계의 실현에 있다고 하는 현대적 해석이 주로 교육되고 있으며, 초기 삼민주의에 대해서는 애써 그 내용과 변화를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고 있다. 현대의 중국에서는, '1924년 국공합작 후 그가 주창한 삼민주의 강령에서 민족주의는 '반제국주의'로 민권주의는 '기본적 인권옹호'와 '인민 민주 독재'로, 민생주의는 '토지와 경작자에게'라는 내용으로 바뀌었다'고 현대의 변화에 의미의 중심을 두고 삼민주의를 교육한다. 대아시아주의. 쑨원은 대아시아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는 1897년경부터 일본에 망명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 정계인사들하고 상당히 친분이 두터웠으며 일본에 망명해 머문 기간은 총 10년에 이른다. 1924년 11월이 마지막 일본 방문이 되었다. 1924년 11월 24일에 일본 고베에 도착, 11월 30일일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는 고베에서 11월 28일 고베여자고등학교에서 '대아시아주의'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는데, 이 강연은 쑨원의 일생에서 최후의 공식적인 강연이자, 가장 유명한 발언으로 기록되고 있다. 여기서 쑨원은 '중국과 일본 중심의 아시아연합 주장'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쑨원의 대아시아주의는 기본적인 목표가 있어서 일본의 그것과는 구별될 수 있다. 일본의 대아시아주의가 '일본의 팽창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로 등장한 것이었던 반면, 쑨원의 대아시아주의는 그 출발점을 (서양)열강의 침략에 대한 대항에 두고 있었다. 다만, 쑨원의 초기 대아시아주의는 유럽 백인종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황인종들의 단결을 주장했던 것으로, 열강의 침략을 백인종의 침략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반제국주의 인식을 가지지 못한 채 황인종인 아시아인들의 단결만을 강조하고 있었다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쑨원은 대아시아주의를 설명한 고베 강연에서 일본의 대아시아주의가 패권주의로 경도되고 있는 것을 경계하면서 “일본은 이미 유럽 패도의 문화를 이룩했고 또 아시아 왕도의 본질도 갖고 있다. 이제부터 서구 패도의 주구(走狗)가 될 것인지, 아니면 동방 왕도의 간성(干城)이 될 것인지 일본인 스스로 잘 선택하기를 바란다.”고 지적하고, “시대 조류에 순하면 흥하고 역하면 망한다(世界潮流 浩浩蕩蕩 順之卽昌 逆之卽亡)” 고 경고하였다.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동양사 교수인 박선영은 쑨원의 고베 강연에 대해 “쑨원이 주창한 아시아 연대는 서양의 반식민지를 경험하고 있던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대한제국이 이미 제국주의 국가라 할 수 있는 일본과 연대하여 반제국주의 연대를 강화한다는 모순된 것이었다. 한·중·일이 각기 주창했던 ‘아시아주의’는 지향하는 목적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아시아 제국과의 연대를 통해 구체적이고 공통적인 이해관계를 정립하기 어려운 공허함이 존재했다.” 고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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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얏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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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둔
마오둔(茅盾, 1896년 7월 4일 ~ 1981년 3월 27일)은 중국의 소설가이자, 작가, 평론가이며,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학 공작자, 마오쩌둥주의 문학 공작자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1950년부터 일어난 항미원조 운동에서 문화부 총책을 담당하였다. 마오쩌둥 집권 기간 중화인민공화국 문화부 부장이다. 생애. 자는 안빙(雁氷)으로, 본명은 심덕홍(沈德鴻), 별명은 심안빙(沈雁氷), 필명은 마오둔(茅盾)이다. 신문학 작가이자 코민테른 혁명 작가, 문학 공작자, 항미원조 운동에서 문화부 총책을 담당하였다. 1896년 저장성 가흥에서 태어났으며 1914년 북경대학교 문과(文科) 예과반에 들어간 뒤 소설과 비평을 발표했고, 1920년 5월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는 천두슈의 상하이 공산주의 소조를 거쳐 1921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5년 '프롤레타리아트 예술론'이라는 평론을 발표하였다. 1921년부터 <공산당>, <소설월보>, <신청년> 등 문예 전선에서 제3인터내셔널 문학 진지 확보에 나섰고 상하이 상무인서관 편집원으로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아 직원 파업을 열기도 했다. 덩중샤, 취추바이, 궈모뤄 등과 함께 상하이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26년에는 선전 공작의 주축으로 마오쩌둥의 비서직에 있었다. 1927년 난창봉기와 추수봉기가 실패된 후는 검거를 피하여 1928년 7월 일본 제국으로 피신해서 문인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30년 4월 상하이로 귀국하였다. 랑손(郞損), 현주(玄珠), 방벽(方璧), 지경(止敬), 미명(微明), 심명보(沈明甫) 등의 여러 필명을 사용하였으며 주로 국민 정부 통치 지역과 조계지에서 비밀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코민테른의 상하이 좌익작가 연맹에서 저우언라이와 취추바이의 밑에서 집행 서기를 맡았으며, 이른바 '국방문학(國防文學) 논전'에서는 '민족 혁명 전쟁의 대중 문예'를 주장하여 중화민국 정부에 대한 협력을 반대하고 루쉰, 취추바이 등과 좌련의 해산에도 반대하였다. 마오둔은 그러나 중일전쟁 기간 국공합작을 맞이하여 더욱 자유로운 소비에트주의 공산주의 혁명 활동의 기회를 얻는다. 좌익 작가 연맹 시기 이후로 상하이, 창사, 우한, 광저우 등지의 혁명 일선에서 작가 요원으로 활동하였고 1939년에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방문하였으며 1940년에는 옌안의 루쉰 예술학원에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장칭 등과 함께 혁명 지도 공작에 참여하였다. 그후 충칭, 홍콩 등지에서도 비밀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12월에는 소련 공산당의 대외 문화 공작자 교류의 일환으로 아내 쿵더즈(孔德沚)와 함께 소련 공산당을 방문하였고 1947년 4월 상하이로 귀국했으며 1949년 1월에 베이핑으로 이동하였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후에는, 마오쩌둥의 중공 혁명 문학 비서, 중앙인민정부 위원, 정무원 문화교육위원회 위원, 초대 문화부 부장(문화부 장관, 1949년 ~ 1965년), 중국작가협회 회장(1949년~1981년) 등직에 있었으며, 항미원조 운동, 삼반오반 운동, 반우파 운동, 대약진 운동 등에서 지도 공작에 참여하였다. 1957년에는 마오쩌둥의 소련 방문을 직접 수행하였다. 문혁기에서는 문화부 부장직에 있지 않았으나, 장칭 등의 보호 하에서 일신의 탄압을 받지 않았다. 죽기 직전에 중국작가협회 회장, 공산당 혁명 당원 등직으로 복귄되었으며, 인민들에게서 거둬들인 거액의 인세 수입을 화궈펑의 중공 지도부에 전달하였다. 1981년 베이징에서 사망하였다. 저술. 1927년의 '식 3부작'은 초기작으로 '환멸' '동요' '추구' 세 중편소설이고, 1932년에 마오쩌둥의 농촌 혁명의 공작 일환으로 쓰여진 '농촌 삼부작', 1933년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도시 혁명 소설 '자야' 등이 있다. 1948년에는 '소련견문록'을 출판하였다. 마오쩌둥 정권 성립 후로는 중공 혁명 문학 운동의 지도 공작에 집중하였으며, 평론으로 1950년 '재북경 문학공작자 선언', 1958년 '약진 중의 동북', 1960년 '사회주의 약진의 시대를 반영해 사회주의 시대의 약진을 추진하라' 등이 있다. 마오둔 문학상. 마오둔 문학상은 그의 유언과 화궈펑 이후의 정권에 의해서 1977년부터의 장편 소설을 대상으로, 1982년부터 그의 이름을 딴 장편 소설 문학상 수상이 이뤄지며, 초기 선정작에는 '항미원조(抗美援朝) 운동'을 주제로 직접 담은 작품도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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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모순(矛盾)은 명제끼리 서로 맞지 않아 논리적인 이치에 어긋남을 의미하는 말이다. 고전 논리에서는, 어느 한쪽은 참을 결론으로 내어놓고 다른 쪽은 거짓을 결론으로 내어놓는 식으로 진리값이 맞지 않는 경우, 곧 동시에 성립할 수 없는 여러 명제가 동시에 제시된 경우를 가리킨다. 어원. 다음은 한자 문화권에서 ‘모순’(矛盾)이라는 말이 유래된 중국의 고사이다. 초나라에서 무기를 파는 상인이 있었다. 그 상인은 자신의 창을 들어 보이며 그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이라고 선전했고, 또 자신의 방패를 들어 보이며 그 어떤 창도 막아낼 수 있는 방패라고 선전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명나라왕 신하중 한 명이 상인에게 “당신이 그 어떤 방패도 다 뚫을 수 있다고 선전하는 창으로 그 어떤 창도 막아낼 수 있다고 선전하는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됩니까?”하고 질문을 던지자 상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비자 난(難)1》 그런데 엄밀히 말해서 이 고사의 창과 방패 이야기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대당 사각형에서 말하는 모순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창은 모든 방패를 뚫을 수 있다."는 문장과 "이 방패는 모든 창을 막을 수 있다."는 명제는 동시에 거짓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당 사각형에서 모순은 동시에 참일 수도 없고 동시에 거짓일 수도 없다. 논리학. 본래 고전 논리에서는 진리값이 맞지 않는, 곧 동시에 성립할 수 없는 여러 명제가 동시에 제시된 경우를 일컫는 말이다. 수리 논리학에서는 술어 p가 모순(contradiction)이라는 것을 formula_1인 경우, 즉 p로부터 거짓을 도출할 수 있는 상황으로 정의한다. 귀류법은 어떠한 주장이 모순이기 때문에 그 주장의 부정이 참임을 논증하는 증명법이다. 한편 의미론에서는 어떠한 명제가 '충족불가능'한 경우로 정의한다. 이러한 모순이 도출되지 않는 이론을 무모순적(일관적)이라 하며, 이는 수학기초론의 중요한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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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절
만우절(萬愚節, )은 매년 4월 1일에 악의 없는 가벼운 거짓말로 서로 속이면서 즐기는 날이다. 명절이나 공휴일은 아니지만 서양의 여러 지역에서 일종의 기념일로 여긴다. 전통적으로 몇몇 나라에서는 만우절 장난은 정오 이전에만 행해지며, 이후에는 장난임을 알린다. 이때 오후에도 만우절 장난을 하는 사람 또는 그에 속은 사람을 '에이프릴 풀(April Fool)'이라 부른다. 한편, 어떤 곳은 농담이 하루 종일 계속되기도 한다. 유래. 만우절에 관한 초기의 언급은 15세기에 제프리 초서가 쓴 이야기인 〈수녀와 수도사의 이야기〉에 나온다. 만우절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대체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3월 25일에서 4월 2일의 이 시기가 봄의 춘분과 관련이 깊고, 이 때가 고대로부터 새해가 시작되는 날로 여겨왔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첫눈 내리는 날이 만우절이었다. 이 날 만큼은 거짓말을 하여도 눈감아주었다. 유럽에서는 이러한 전통이 프랑스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다. 1508년부터 1539년 사이의 프랑스와 네덜란드 자료들 중 만우절 농담에 대한 이야기나 사월의 첫째날을 기념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그레고리력(양력)을 받아들이기 전인 1564년까지 사람들은 4월 1일을 새해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샤를 9세에 의해 공식적으로 지금의 4월 1일에서 새해 첫날인 1월 1일로 변경하였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4월 1일에 축제를 벌였는데 이런 사람들을 '사월의 물고기'()라고 불렀으며 친구가 자는 머리맡에 천궁좌의 하나를 상징하는 물고기를 놓는 등의 장난을 치며 조롱하는 의미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네덜란드에서는 다른 이유로 이 날을 기념한다. 1572년 스페인의 왕 필립 2세에 의해 네덜란드가 통치되고 있었을 때 네덜란드인 반란군들이 1572년 4월 1일 덴 브리엘이라는 작은 바닷가 마을을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이후에 다른 네덜란드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에 이 날을 유머로 기념하게 되었다. 이 밖에 만우절의 유래에 대한 다른 설들도 있다. 부작용. 대한민국에서는 만우절에 주로 경찰서와 소방서에 장난전화를 거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는 만우절 장난전화는 범죄 행위라고 규정하고 최대 200만원의 벌금을 부과하는 등 강력하게 조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2018년 만우절(4월 1일)에 경찰서나 소방서에 장난전화를 거는 일이 많이 줄었다. 부산소방안전본부 등의 집계를 보면 만우절 장난전화는 2010년 19건이던 것이 2011년 7건으로 줄었고, 2012년부터는 아예 없거나 1건에 그쳤고, 2016년 만우절에는 단 한 건의 장난전화도 없었다고 한다. 부산경찰서에 접수된 만우절 장난전화는 2014년부터 이듬해까지 매년 1건뿐이었다. 경범죄처벌법에 따라 허위신고를 하면 60만원 이하의 벌금이나 구류, 과료의 형에 처해지며, 정도가 심하거나 상습적으로 허위신고를 하면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가 적용되어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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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문학)
시(詩, poetry)란 마음 속에 떠오르는 느낌을 운율이 있는 언어로 압축하여 표현한 글이다. 이름의 유래. 동양. 시는 한자어로 詩이며 이는 言(말씀 언)과 寺(관청 시)가 합쳐진 형성자이다. 여기서 言이 의미기호, 寺가 소리기호이다. 즉 시는 言, 언어가 그 의미내용의 핵심을 이루는 이름이며, 서경(書經)의 순전(舜典)에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시언지(詩言志, 언어로 나타낸 뜻이 곧 시)라는 구절이 나온다. 특성. 시란, 울림, 운율, 조화를 가진 운문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시작품을 성립시키는 각 시구를 가리킨다. 세계의 시. 한국의 시. 기록상으로 남아 있는 한국의 시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한글이 반포되기 전의 한국어시는 향찰이나 이두로 기록되었다. 상고 시대. 고대 한민족은 제천 의식과 가무를 통해 시가 문학을 만들어 냈다. 서정 양식은 서정시로 대표된다. 고대 한민족은 제천 의식과 가무를 통해 문학의 창조적 싹을 틔워 왔다. 시가의 기원은 원시 고대적 공동체 사회의 제의(祭儀)에서 발생하였다. 제천 의식 때 제주(祭主)가 되는 기도사(祈禱詞)나 송축사(頌祝詞), 민족적 시조신(始祖神)이나 영웅을 칭송하는 제사(祭詞) 같은 것은 신악(神樂)이나 율동적인 무용과 아울러 종합 예술의 분위기를 형성했고, 또 이것이 민족 문학의 모체가 되어 주었다. 예컨대,《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에 고구려 민족은 가무를 좋아하며 10월 제천시 국중에 대회를 갖는데, 이를 동맹이라 했다 한다. (→고구려의 제천 행사 참조) 이러한 제의에서 불린 노래가 곧 삼국 초기의 시가 문학이다. 시가는 분화되어 악기를 연주하는 노래로 발전하고, 지금은 음악으로부터 유리된 가사만이 변천의 과정을 겪고 문자로 정착되어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기록된 가야 건국 신화 속에 낀 원시 시가의 유편인 〈구지가〉, 〈황조가〉, 〈공후인〉 등이 신화·전설 속에 묻혀 오늘날까지 그 가사의 내용이 한역(漢譯)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중, 〈황조가〉는 연애 감정을 표현한 서정적인 내용의 작품으로서 집단적인 원시 문학으로부터 개인적인 고대 서정 문학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 시대. 삼국은 각기 부족 연맹으로부터 세력을 키워 고대 국가로 성장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자체의 문학을 발전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이 초창기에는 아직 문화적으로 제의와 밀접히 관련된 원시의 치졸한 단계에 머물러 있던 것이 삼국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집단적·제의적 성격을 탈피하여 개인적인 문학예술이 발달을 보게 된 것이다. 향가는 세련된 개인 창작시로서 남북국 시대의 문학을 대표하고 있다. 신라 유리왕 연대에 지어진 〈도솔가〉, 〈회소곡〉 등은 농업 국가를 형성한 신라 민족의 제신적인 성격에서 벗어난 비종교적인 시가이다. 향가는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본격적으로 발달한 시가 양식이다. 이것은 특히 경주 지방을 중심으로 한 화랑·승려 등 신라의 중앙 귀족층에 의해서 발달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제의적·민요적인 것과는 달리 개인 창작 예술로서 어디까지나 귀족 문학인 것이다. 이 향가의 완성형은 10구체이며, 그 과도기적인 형태로서 4구체와 8구체가 있다. 내용 면에서 보면, 주로 생사(生死) 등 인생의 심각한 문제를 높은 종교적인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려 우아한 언어로 표현한 고상한 서정시이다. 현재 전통적인 신라 향가 14수와 균여의 불교찬가로 지어진 11수가 전하고 있다. 신라 말기에 위홍과 대구화상에 의해 향가집 〈삼대목〉이 편찬되었다고는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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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나
아테나()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혜·전쟁·직물·요리·도기·문명의 여신이다. 로마 신화의 미네르바와 동일시된다. 제우스와 메티스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올림포스의 12신의 두 번째 세대에 속한다. 투구, 갑옷, 창, 메두사의 머리가 달린 방패(아이기스), 올빼미,올리브나무, 뱀이 대표적 상징물이다. 언제나 투구와 갑옷을 입고, 손에는 창과 방패를 든 무장한 여전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같은 전쟁의 신인 아레스와는 달리 총명하고, 이성적이고, 순결하여 사람들에게 은혜를 많이 베풀며 영웅들을 수호한다. 그녀의 신전으로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아테네의 수호 여신이며 ‘아테네’라는 명칭의 어원이다. 개요. 아테나 문화는 사람들이 아테나를 아테네의 수호자로 생각하고,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있었던 신화가 여러 시대를 넘어 다시 기록되는 것으로 계속 이어져 왔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아테나를 이집트인들의 고대 왕조 이전 시대부터 존재했던 리비아의 전쟁의 신이자 여성 사냥꾼 신인 네이트에서 왔다고 여기었다. 아테나는 또한 철학적인 지혜의 여신으로 알려지게 되어 5세기 후와 고대 그리스의 문화에 적용되었다. 그녀는 특히 방직, 그리고 여러 기술의 수호자("Athena Ergane")이기도 하고, 전쟁에서의 전략을 맡아 지휘("Athena Promachos")하기도 한다. 무기의 제작과 관련된 금속 가공도 그녀의 가호 아래에 있기도 하다. 아테나의 지혜는 오디세우스에서 묘사된 모습처럼 메티스에게서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 교활한 지성도 포함하고 있다. 아테나의 주위에서는 올빼미가 그녀의 시중을 들며, 승리의 여신인 니케가 그녀와 종종 동행하기도 하는데, 아테나의 조각상의 손바닥 위에 종종 작은 니케의 형상이 있기도 하다. 염소가죽, 혹은 뱀가죽으로 만든 흉갑 아이기스를 입고 있는데, 이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다른 문화적 정황에 연관되어 있었는데 후기의 신화에서는 그녀의 아버지 제우스가 주었다고 전해온다. 아테나는 종종 투구를 쓰고 고르곤의 머리로 장식된 방패를 들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 조각상은 그리스 초기의 여신 문화로, 파르테논의 앞부분 앞 정점에 있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게 된다. 그녀의 방패는 후에 페르세우스의 축원의 선물이 된다. 뱀은 종종 아테나와 함께 동행하기도 하는데, 그녀의 창 막대기로도 자주 묘사된다. 바다와 배, 말과 전차도 그녀와 연관되지만, 밀접하게 드러나는 것은 없다. 아테나는 무기를 든 전쟁의 여신이며, 그리스 신화에서 오디세우스, 이아손, 헤라클레스와 같이 많은 영웅들의 조력자로 등장한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그녀의 유명한 신전도 파르테논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참고로, 아테나는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후 , 스틱스강에 처녀신으로 있을것임을 맹세하였다. 한번은 헤파이스토스에게 겁탈당할 뻔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치마에 묻은 정액을 닦아서 땅에 버렸다. 이로 인해 땅의 여신 가이아가 헤파이스토스의 정액으로 수태하고, 에리크토니오스가 태어난다. 그녀의 역할이 도시의 수호자였기에, 그녀는 그리스 전역에서 아테나 폴리아스("Athena Polias")로서 숭배 받았다. 그녀는 아테네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데, 여신과 도시의 이름은 어원적으로 연관되어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신화. 탄생. 제우스는 자신이 아버지인 크로노스나 할아버지인 우라노스처럼 자신도 언젠가 같은 방식으로 자기 아들에게 지위를 빼앗기지는 않을까 우려하였다. 그러던 차에 장차 자신과 메티스 사이에서 태어날 아들이 올림포스의 주신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가이아의 신탁을 듣자 몹시 불안해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 자신은 개구리로 변신하고 메티스는 파리로 변신시킨 다음, 크로노스가 자신과 자신의 남매를 그렇게 했던 것처럼 당시 임신한 상태였던 메티스를 꿀꺽 삼켜버린다. 몇달 후, 제우스에게 갑자기 격한 두통이 몰려왔다. 두통이 갈수록 심해지자 헤파이스토스가 두통의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제우스의 머리를 도끼로 쪼갰다. 그러자 그 속에서 갑옷으로 완전무장한 완전한 성인 여성의 모습을 한 아테나가 소리를 지르며 튀어나왔다. 이때 하늘과 땅, 바다가 아테나의 탄생을 축하하며 성대하게 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냈다고 한다. 덕분에 아테나는 늘 아버지 제우스의 총애를 받았다. 메티스는 이후로도 계속 제우스의 뱃속에 남겨져 임신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아들을 낳지 못하였고, 제우스는 계속 권좌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아테네의 수호신. 아티카 지역의 도시 아테네를 두고 아테나는 포세이돈과 누가 인간에게 더 유용한 선물을 줄 것인가로 겨룬 적이 있다. 포세이돈은 그의 삼지창으로 땅을 때려 말과 샘을 만들어 주고 아테나는 올리브 나무를 만들어 주었는데, 말이 투쟁과 슬픔을 상징하는 반면, 올리브 나무는 평화와 풍요를 상징하기에 인간들의 결정으로 아테나가 승부에서 이기게 되었다. 이로써 아테나는 그 도시를 갖게 되고 도시의 이름은 아테네가 된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이 위치한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나 여신이 거주하는 장소로 알려진다. 파르테논 신전에는 아테나 여신상과 함께 수호신을 놓고 겨루는 승부가 조각되어 있다. 한편 승부에서 진 포세이돈이 인간들에게 보복하고자 홍수를 불러오자 인간들은 아테나에 다음 가는 지배권을 그에게 맡겨 화를 풀도록 하였다 한다. 에릭토니우스. 헤파이스토스는 아테나가 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대장간을 찾아오자 아테나에게 반해 강간하려고 했다. 아테나는 헤파이스토스를 뿌리치고 허벅지에 뭍은 정액을 닦아 땅에 버렸는데, 이로 인해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수태해 에릭토니우스를 낳고만다. 아테나는 에릭토니우스를 거둔다. 아테네 왕 케크롭스의 딸인 공주 아글라우로스와 자매들에게, 아기가 담긴 바구니를 맡기며 절대 열어보지 말라 하였다. 하지만 아글라우로스와 자매들은 호기심으로 인해서 바구니를 열어 보고, 두 마리 뱀에게 감긴 에릭토니우스를 보자 실성하여 아크로폴리스의 언덕에서 자살하였다. 아테나는 에릭토니우스를 바구니에서 꺼내 파르테논 신전으로 옮기어 길렀고, 후에 에릭토니우스는 아테네의 왕이 되었다. 아라크네. 리디아의 염색의 명인 이드몬의 딸인 아라크네는 베짜기와 자수를 잘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솜씨가 아테나 여신보다 뛰어나다고 실력을 뽐내며, 아테나에게 도전한다. 아라크네의 자만심에 화가 난 아테나는 할머니로 변신하여 신을 모독하지 말고 용서를 구하라고 충고했는데, 아라크네가 그녀를 무시하고 쫓아내려 하자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와 그녀와 시합을 벌인다. 아테나는 자신과 포세이돈이 아테네를 두고 겨룬 승부의 광경과, 신에게 대항한 인간들이 욕을 보는 장면과, 자신의 신목이자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를 수놓아 아라크네에게 경쟁을 포기하라는 경고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라크네는 자신의 직물에, 제우스와 여러 신들의 문란한 성생활을 뛰어난 솜씨로 수놓는다. 아테나는 아라크네의 뛰어난 솜씨에는 감탄했지만, 신들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자수내용에 모욕과 분노를 느껴 북으로 직물을 찢는다. 아테나는 이 행동으로 인해 '신이 인간에게 패배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만다. 아테나는 아라크네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아라크네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하도록, 북으로 아라크네의 이마를 때리며 자신의 죄와 치욕을 느끼게 하였고, 아라크네는 치욕을 참지 못하여 목을 맨다. 아라크네를 불쌍히 여긴 아테나는 그녀가 영원히 실을 잣도록 하게 만들고자 아코니트 즙을 뿌려 그녀를 거미로 만들고, 그녀의 목에 매어있던 밧줄은 거미줄이 된다. 페르세우스와 메두사 그리고 페가수스. 고르곤 세 자매 중 한 명인 메두사는 다른 자매들과는 다르게 본래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포세이돈은 처녀신 아테나의 신전에서 메두사와 사랑을 나누었다. 이에 모욕을 느낀 아테나가 메두사에게 저주를 내린다. 저주로 인해 메두사는 뱀으로 된 머리카락과 하체를 가진 흉칙한 괴물이 되었고, 그녀의 눈 또는 머리를 본 사람은 모두 돌이 되었다. 세리포스 섬의 왕 폴리데크데스의 명령으로 메두사의 목을 가져와야 하는 페르세우스는 아테나가 준 방패를 통해 메두사의 모습을 비추어 보며 접근하여 그녀의 목을 베는 데 성공한다. 후에 메두사의 머리는 아테나에게 바쳐져 그녀의 방패에 부착되었다. 그러나 메두사는 두 아들을 낳게 되는데, 그게 크리사오르와 하늘을 날아다니는 말 페가소스였다. 원래 굉장한 미모를 갖고 태어난 메두사가 아테나에게 저주를 받아 흉칙한 괴물이 되고 나서 페르세우스에 의해 토벌당한 반면 페가소스는 태어날 때부터 축복받았으며 일생이 다하는 순간 포세이돈에 의해 별자리에 올라갔다. 헤라클레스. 기간테스 알키오네우스는 기간테스가 태어난 플레그라이 안에서는 죽지 않았다. 플레그라이에서 헤라클레스가 고전하게 되자 아테나는 알키오네우스를 어깨에 메어 플레그라이 밖으로 끌어내라고 귀뜸을 주었다. 플레그라이를 벗어나게 된 알키오네우스는 헤라클레스의 히드라의 독이 묻은 화살에 맞아 죽게 되었다. 한편 아테나는 헤라클레스가 조국 테베를 구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을 때 그의 옆에서 함께 싸워주었으며 스팀팔로스 숲의 새를 쫓을 때는 청동으로 된 종을 빌려 주었고 케르베로스를 데려오는 임무에서 케르베로스가 있는 지하 세계의 길을 안내해주기도 하였다. 테이레시아스와 카리클로. 카리클로는 아테나의 총애를 받던 님프로, 에베레스와의 사이에서 테이레시아스를 낳았다. 사냥을 하던 테이레시아스는 우연히 카리클로의 도움을 받으며 목욕을 하는 아테나의 모습을 보게 되고 분노한 아테나에 의해 눈이 멀게 되었다. 아들이 맹인이 된 것을 슬퍼하는 카리클로를 보자 아테나는 그것을 위로하고자 뱀이 테이레시아스의 귀를 핥도록 하여 새의 말을 듣고 예언을 할 수 있는 능력, 7세대를 살 수 있는 생명을 부여하였다고 한다. 오디세우스. 오디세우스는 아테나의 총애를 받던 영웅 중의 한명이었다. 아테나는 그에게 지혜로운 호의를 베푸는데, 그가 트로이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 동안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절제된 도움을 준다. 하지만 오디세우스의 배가 난파되어 오기기아섬의 칼립소와 7년 동안 있게 되자 보다 못한 아테나는 제우스에게 간청하여 칼립소가 오디세우스를 풀어주도록 한다.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도록 오디세우스의 친구로 변신하여 필로스의 네스토르에게 찾아가는 여행을 도와주기도 한다.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왔을 때는 변장을 하여 그를 시험해본다. 포세이돈. 포세이돈이 자신의 신전에서 메두사와 정을 통하자 메두사를 저주해 못생긴 괴물로 만들었고 그 외에도 아테네의 지배권을 두고 다툰 적도 있었다.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귀환하는 오디세우스를 포세이돈이 방해한 반면 아테나는 오디세우스를 도와주었다. 황금 사과. 불화의 여신 에리스는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에서 자신만 하객으로 초대받지 못한 것에 앙심을 품고 그 결혼식장에 찾아가서 황금사과에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이 황금사과를 바칩니다.'라는 글을 써서 던졌다. 그러자 이때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나가 후보로 나서서 경합을 벌이게 되었고 심판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로 결정되었다. 이에 헤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테나는 끝없는 지혜를 각각 조건으로 제시하며 자신을 선택해달라고 했다. 그 결과 파리스는 황금사과를 아프로디테에게 줬다. 숭배. 아테나는 헬레니즘 시대 이전부터 있던 여신으로, 뒤에 그리스의 여러 지역에서 숭배되었다. 이전의 미노아와 달리 그리스에서는 군사 경제가 발달하였기에 아테나는 초기에 알려진 직물·요리·도기에 이어 전쟁 또한 주관한다고 생각되었다. 미케네 시대 이후 아테나의 영역은 궁궐에서 도시로 확대되었는데, 아테네의 수호신이 된 것은 고대의 도시 국가가 군주제에서 민주제로 바뀜에 따라 설정된 것이었다. 도시를 위한 아테나의 활동은 식물과도 연관이 있었다. 아테나의 탄생 축제인 판아테나이나는 식물의 성장과 결부되었으며, 프로카리스테리아는 봄을 맞아 여신이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축하하는 행사였다. 페이디아스는 파르테논 신전에 금과 상아로 된 아테나 파르테노스를 비롯하여 3개의 아테나 상을 조각하였으며, 아이스킬로스의 에우메니데스에서는 재판의 피고가 된 오레스테테이아에게 표결이 동수일 때는 무죄라는 선례를 남긴 것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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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박정희(朴正熙, 1917년 11월 14일~1979년 10월 26일)는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중수(中樹)이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하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성적 석차 2등으로 만주국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성적우수자 추천을 받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57기로 입학한 후 1944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일본 제국이 수립한 만주국의 일제관동군장교로 근무하였다. 병과(兵科)는 포병(砲兵)이다. 1945년 9월 21일 북경에서 활동하던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 1946년 5월 10일에 미 해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을 통해 한반도로 귀국한다. 이후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복무하던 중 셋째형 독립운동가 박상희가 대구 10.1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순사 출신 구미 경찰관들과 대립하다 사살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된다. 사건 직후 형의 친구이자 사회주의자이던 이재복의 권유로 반이승만파이던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여 활동하다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에서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정보국에 남조선로동당 조직과 동료들을 증언한 후,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의 최종 면담에서 사형을 면하였다. 반공을 국시로 하는 국가변란 성격의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어 "군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깨면서 군복을 벗고 직선제로 치루어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등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치러진 선거에서 당선되어 제5·6·7·8·9대 대통령으로 재직하였다. 국가재건사업을 추진하여 1968년부터 경부고속도로 기공 및 개통, 서울 지하철 기공 및 개통, 농촌의 현대화 운동이었던 새마을 운동, 대규모 중화학 공업 건설 및 육성, 민둥산의 기적인 산림녹화 사업, 식량 자급자족 실현, 자주국방 및 군대 현대화 사업 등 국가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여 국가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 집권을 반대하던 여야 및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으로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중정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대통령이 되기 이전. 생애 초반. 1917년 동학농민운동가 아버지 박성빈과 어머니 백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마루에서 굴렀다가 마루 밑에 놓인 화로에 떨어져 머리카락과 눈썹 부분에 화상을 입기도 하였다. 아버지 박성빈은 황토를 짓이겨서 박정희에게 발라주었고 이때 화상을 입어 피부가 검게 그을린 것이라 한다. 이 일 이후로 박정희는 짧은 옷을 입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유년기에는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훗날 입학하는 구미공립보통학교의 입학 전 경력에도 한학 수학이라 기재되어 있으며 학교에 다니면서도 일요일에는 서당에 가서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일요일에는 교회에도 다녔고, 나머지 시간을 이용해서 서당에 다닌 것이다. 아버지는 조선 후기에 무관직 정9품 효력부위를 지냈으나 동학 접주 출신으로 연좌되어 가장으로서 경제생활을 할 수 없었고, 맏형 박동희는 독립하였으며 둘째 형 박무희와 셋째 형 박상희가 실질적인 가장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아버지와 둘째 형은 인근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칠곡군의 갑부 장승원을 찾아가 그의 집안 토지의 소작농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후일 장승원의 아들 장택상은 이를 회자화 하며 박정희를 공격했고 박정희는 이로 인해 장택상과 아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1926년 4월 1일에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보통학교 시절, 2학년 때까지는 급장을 담임선생이 지명했으나 3학년 때부터 교칙이 바뀌어 1등을 하면 급장을 시켜주는 새로운 제도 덕분에 공부를 잘하던 박정희는 3학년 때부터 내내 급장을 맡았다. 이때 박정희의 급우 가운데 그로부터 맞아 보지 않은 아이들이 드물었다고 같은 반 동기생이었던 박승룡이 회고한 바 있다. 한편 그의 담임은 박정희에 대해 평가하기를 '성적은 전 과목이 고루 우수하며 암기력이 좋아 산수, 역사, 지리 등은 언제나 만점을 받았다고 기록하였으며, 조리 있는 발표력과 예민한 사고력을 특기사항으로 기록하였다. 반 학생 중 나이가 어렸으나 급장으로서 통솔력이 탁월하고 자습시간 등에는 학우들을 지도하였으며 체육 시간에 선생이 나오기 전에 준비를 하여 기다리도록 지도를 잘한다고 평하였다. 당시 박정희는 학교 수업 외에 독서를 즐겼는데, 군인을 동경하였으며 그중 나폴레옹과 이순신의 위인전을 탐독해 읽었다고 한다. 1970년 4월 26일 박대통령 자신이 김종신 공보비서관에게 직접 써준 '나의 소년 시절' 회고에 의하면 어린 시절부터 군인을 무척 동경했으며, 대구에 있던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가끔 구미 지방에 와서 야외 훈련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군인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고 기록한다. 보통학교 시절에는 일본인 교육으로 일본 역사에 나오는 위인들을 좋아하다가 5학년 때 춘원 이광수가 쓴 '이순신'을 읽고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게 됐고, 6학년 때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나폴레옹을 숭배하였다고 회상하였다. 소년 시절에 박정희는 친구를 따라 개신교 교회에 다녔다. 그의 동창인 한성도는 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이때 그가 주일학교에 다녔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뒤에 박정희는 종교를 바꾸게 되었다. 형편상 도시락을 싸올 수 없을 때도 종종 있었다. 끼니를 거를 때도 있었지만, 한약방을 하던 집 아들인 급우 이준상과 친해지면서 도시락을 싸올 수 없는 날에는 학교에서 5분 거리인 그 친구의 집에 가서 점심을 먹기도 하였다. 이준상의 집안은 그의 아버지가 작고한 이후 가세가 급속히 기울어진 데다가 병이 있어 어렵게 살고 있었다. 박정희는 1963년 10월 15일 선거에서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경주에 있다가 생가를 찾아 구미역에 도착했다. 환영 인파를 대하자 박정희는 제일 먼저 이준상을 찾아 허름한 차림의 그를 자신의 지프에 태운 뒤 생가로 이동했다. 이후 구미에서는 가난한 장애인 이준상을 아무도 업신여기지 못했다 한다. 1972년 이준상이 어릴 때 다친 다리를 또 다시 다쳐서 입원했을 때 대통령 박정희는 그의 병원치료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1932년 3월 1일에 보통학교를 제11회로 졸업한 박정희는 그해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했다. 총 응시자는 조선인과 일본인 합하여 모두 1,070명이었다. 당시 박정희의 집은 가난하여 학비를 댈 엄두도 못 냈고, 그의 가족들은 내심 그의 사범학교 진학을 포기했으면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구미공립보통학교의 담임과 교장이 방문하여 박정희의 부모를 설득하여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하게 하였다. 누나 박재희의 증언에 의하면 어머니 백남의는 박정희가 시험에서 떨어지기를 빌었다고 한다. 합격하고 진학을 못 하면 한이 생긴다고 하여 불합격을 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51등으로 합격하였다. 1932년 4월 1일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제4기생으로 진학하였다. 이때 입학정원 100명이었는데 이 중 조선인 90명, 일본인 10명이었다. 대구사범학교 진학 후 박정희는 집을 떠나 대구 시내 기숙사에서 등하교하였다. 대구사범학교 5년 중 3년간 그의 성적은 하위권이었다. 품행평가에서 '양'이 네 번, '가'가 한 번이었으나, 군사 및 체육 관련 교과목의 성적은 뛰어났다. 이 성적표는 그의 집권 기간에는 공개 금지가 되기도 하였다. 청년기. 결혼에서 재혼까지. 1936년 4월 1일 3살 연하 김호남과 21살에 결혼했다. 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가 죽기 전에 막내가 결혼하는 걸 보고 싶다고 간청하여 이루어진 결혼이었으나, 신혼 이후 성격 차이로 거의 얼굴을 보지 않는 사이로 지내다 결국 1950년에 이혼을 한다. 1947년 이효 대위의 소개로 이북 출신이자 이화여대 학생이던 24세 이현란을 처음 만나 1948년 약혼식을 갖고 결혼을 전제로 동거를 시작한다. 당시 학비금도 내어주고 무척 잘해줬다고 한다. 허나 정작 이현란은 학교에서 어떤 소령과 약혼했다는 소문이 부끄러웠고, 박정희가 지프차를 타고 자주 보러 올때도 숨었다고 한다. 1948년 박정희가 여수·순천 사건에 연루되어 숙군(肅軍) 대상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 이현란은 '이북서 공산당이 싫어서 내려왔는데 빨갱이 마누라라니'라고 푸념했다 한다. 이때 박정희에게 이혼수속을 해주지 않던 부인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고, 괘씸한 생각이 들어 여러번 가출하다 1950년 2월 6일 결별했다고 조갑제가 기재한 자유기고가 강인옥의 녹취록 인터뷰에서 밝힌다. 인터넷 일간지 오마이뉴스 정운현 기자의 2011년 기사에서는 이현란이 박정희와의 동거 때 아이가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반면 1997년 강인옥의 녹취록에서 이현란은 둘 사이 소생은 없었다고 밝힌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기 직전 김호남과 이혼 후 곧바로 육영수와 재혼을 한다. 박정희에게 김호남과의 첫 결혼에서 생긴 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육영수는 박재옥을 집으로 데려와 함께 살았다. 첫 부인 김호남은 훗날 두번째 남편 사이에 태어난 아들과 함께 절로 들어가 비구니로 살았다고 한다. 교사 생활 (1937 ~ 1939). 1937년 3월 25일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4월 1일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4학년을 맡았다. 그 해 장녀 박재옥이 태어났고 1938년 9월 4일에 아버지 박성빈이 67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시절 때 박정희의 모습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이다. 제자였던 전경준은 "선생님은 열등아나 사고아 등의 가정을 자주 방문했다"고 기억했다. 월사금을 내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자신의 월급을 떼내어 도와주었다고도 한다. 농번기인 봄 가을에는 학생들에게 4∼5일씩의 휴가를 주어 농사와 가사를 돕도록 했다. 이 기간에 박정희는 학급원들의 가정을 찾아가서 농업과 가사 실태를 조사하였다. 제자 김경운은 자기 집을 찾아온 박선생이 보리밥과 살구를 맛있게 먹고 가던 기억을 오래 간직했다고 한다. 제자 이영태는 박정희 선생이 조선어 시간에 태극기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다고 증언했다. 박정희는 복도에 보초를 배치한 뒤 우리나라의 역사를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대구사범 때 김영기 선생이 쓰던 방법이었다). 또 음악시간엔 황성옛터와 심청이의 노래를 가르쳤다고 전한다. 박선생을 통해서 임시정부가 상해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영태는 박정희가 경찰지서의 사찰주임인 오가와 순사부장 하고 자주 논쟁하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한다. 제자 박준복의 증언에서는 박선생은 일본인 교사들 하고도 사이가 좋았는데 아리마 교장과 야나자와 교사와는 말다툼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야나자와가 "조선인의 주제에…"라고 말하자 박정희가 의자를 집어던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박정희가 담임했던 5학년의 급장이었던 신현균 또한 박선생이 특히 우리 말의 지도에 열성을 보였다고 기억했다. 이어 박선생은 운동회 때 1백m 달리기에서 일본인 교사 쓰루다에게 졌는데 연습을 많이 하여 다음 시합에서는 그를 물리쳐 문경에선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누구한테도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는데 특히 일본인한테 더욱 그러했다 전해진다. 제자들을 모아서 나팔조를 만들고 지도했다고 한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기 1년 전 1939년 행적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한다.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였던 권상하씨의 증언에 따르면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9년 10월 아니면 11월 즈음 박정희가 보따리를 싸들고 찾아와, 스스로 밝히길 가을에 연구수업 시찰을 나온 일본인 시학(장학사)이 박정희의 긴 머리를 보고 강하게 비판했고, 이튿날 교장이 그를 불러 질책하자 울컥한 끝에 교장을 두들겨 패고는 그 길로 짐을 챙겨 문경을 떴다고 증언한다. 허나 박정희는 10월 입학시험을 치르고 나서 다시 문경학교로 돌아와 근무했었다. 박정희의 주장대로 일본인 교장을 때렸다면 다시 근무를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교사 부임 당시 2학년이었던 이순희 씨의 증언에 따르면 머리가 긴 것은 박 선생님이 아니라 학생들이었으며, 동네 바리캉이 한 두 개 뿐인데다 빌리기도 힘들어 제 때 머리를 깎지 못해 머리가 긴 학생들이 있었고, 일본인 교사들이 이런 사정은 제쳐놓고 무조건 머리가 긴 학생들을 벌을 세우자 박 선생님과 일본인 교사간에 자주 언쟁이 발생하곤 하였다고 한다. 이어서 이순희는 박정희가 학교에서 평소 좋아하던 나팔을 불고 있었는데 급사가 가서 내려오라고 해도 듣지 않자 일본인 교사들이 박정희를 집단 구타하였다 전한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박정희는 '내가 꼭 복수해 주겠다. 조선에는 사관학교가 없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고 전한다. 박정희의 제자 황실광의 증언에 의하면 졸업 뒤에도 박 선생한테 자주 놀러갔었는데, 1939년 10월 박정희가 머물고 있던 하숙집에 갔더니 머리카락 길이에 관한 내용은 없고 아리마 교장이 시학을 접대하는 술자리에서 조선인을 모욕하는 발언을 했고 자신이 크게 반발했다는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박정희 행적은 1939년 10월 만주 만주 목단강성에 있는 만군 관구사령부내 장교구락부에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 시험을 치르고 (시험과목은 수학, 일본어, 작문, 신체검사 등이었다), 문경학교로 돌아와서 계속해서 근무하다가 다음해 1월 4일자 만주국 공보에 실린 '육군군관학교 제2기예과생도 채용고시합격자공보'를 확인 한 뒤 1940년 3월에 만주로 떠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박대통령에 대한 소년용 전기를 준비하고 있던 김종신 공보비서관이 "각하는 왜 만주에 가셨습니까" 라고 묻자 박정희는 "긴 칼 차고 싶어서 갔지"라며 단순명쾌하게 대답했다 한다. 중화인민공화국 조선족 작가 류연산에 따르면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에서 박정희가 신징 육군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하기 전인 1939년 8월, 대사하 전투에 참여했고 이후 간도 조선인특설부대에 자원입대해 동북항일연군 토벌에 나섰고, 교직은 1940년 2월까지 재직하였다고 한다. 박정희의 셋째 딸 박근령은 2005년 2월, 이러한 주장을 담고 있는 서적이 부친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국내 출판사 대표인 아이필드 출판사 대표 유연식을 검찰에 고소했고 대법원 3부(주심 안대희 대법관)까지 올라갔으며 1939년, 박정희가 서명한 문경공립보통소학교 “성적통지표”와 1940년, 박정희가 교직을 의원면직했음을 보여주는 교육 당국의 서류를 제출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재판에서 안대희 재판관 등 재판부는 “그의 친일 행적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고 특설부대에 근무했는지도 한국 현대사의 쟁점으로 계속 연구돼야 한다. 책에 적시된 내용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에 반한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이 ‘허위’임을 인식했다고 단정할 수 없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은 정당하다”는 이유를 들어 무죄를 판결했다. 이와 관련하여 데일리안은 다른 언론들이 무죄판결을 가지고 류연산의 주장을 정당화해서는 안되며, 이 판결은 무죄가 죄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죄임을 확증할 근거가 없다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대법원 3부에서는 "역사적·공적 인물의 경우 시간이 경과하면 망인과 유족의 명예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표현의 자유가 보호돼야 하므로 사자 명예훼손죄가 성립하려면 허위 사실에 대한 고의성을 엄격히 따져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의 특설부대 근무설은 여러 책에 언급됐고 저자 류씨는 역사학계에서도 인지도가 있어,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유죄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재학 시절 (1940~1942). 1940년 4월 1일 박정희는 만주국 육군군관학교(滿洲國 陸軍軍官學校, 또는 신징 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교하였다. 원래 1기 지원을 했었지만 나이 초과로 탈락하여 재지원을 한 것이다. 군관학교 동기생들 가운데 5·16에 가담한 사람은 없었으나, 간도·용정의 광명중학 출신이자 군관학교 제1기생들인 선배 기수들 대다수가 훗날 박정희의 5·16을 지지한 핵심인물들이 되었다. 이주일, 김동하, 윤태일, 박임항, 방원철이 그들이다. 혈서(血書) 지원. 만 23세에 만주국군 1차 지원을 했을 때 나이 초과로 서류전형 탈락이 된 박정희는 재지원 서류에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첨부해 제출하며 반드시 군인이 되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1938년 5월경 당시 박정희와 같이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던 유증선씨는 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박정희에게 혈서를 쓰도록 권유했으며, 그 말을 들은 박정희가 즉시 시험지에다가 핏방울로 혈서를 썼다고 증언한 바 있다. 한편 민족문제연구소는 인터넷 일간지 오마이뉴스를 통해 교사시절 박정희가 만주군에 지원할 때 쓴 혈서가 그가 일본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친일파임을 뒷받침하는 자료 근거라고 주장한다. 본 기사 내용에서 민족문제연구소는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 자 마이크로필름에서 박정희의 편지 내용과 혈서 문구가 기록된 기사가 발견 되었고,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본질이 흐려지고 정치쟁점화하고 있다는 판단 아래 이날 자료를 공개한다"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밝힌 <만주신문> 마이크로필름 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편지 내용과 혈서 글귀가 적혀있다. 《박정희 평전: 가난에서 권력까지》를 쓴 이정식 경희대 석좌교수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혈서에 관해 "1939년과 1940년 당시 일본군에 입대하기 위한 혈서 제출은 일종의 유행이었다"고 한다. 그 근거로 당시 혈서를 쓴 한국 청년이 39년 첫 해엔 45명, 다음 해 박정희가 입교했던 40년에는 168명씩이나 되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광복 이후 한국군 사이에서는 군대 지원서에 혈서를 포함시켰던 문화가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1951년 7월에 게제된 부산일보에는 "해병대원 모집에 수 많은 애국 청년들이 앞을 다투어 지원하고 있거니와 그 중에는 혈서로써 滅共戰線(멸공전선)에 참가 하겠다고 하여와 관계관의 감격을 자아내고 있다."고 기록한다. 혈서를 쓰는 문화가 무조건 일본식이라고만 단정 지을 수는 없다. 1909년 2월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義士)는 항일의병들과 함께 러시아 연해주에서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던 순간 왼쪽 손의 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태극기에 혈서(血書)로 '大韓獨立(대한독립)'이라 쓰며 항일결의를 다졌었다. 독립운동가 남자현 지사(志士) 또한 1932년 손가락을 잘라 '조선의 독립을 원한다'는 혈서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주신문 진위 논란.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장하는 박정희의 혈서 내용은 박정희의 만주군 서류지원 당시 함께 교사 생활을 했던 유증선씨의 증언과 상당히 엇갈린다. 1998년 2월 12일 처음 게제됐었던 조갑제의 조선일보 인터뷰 기사에 의하면 유증선씨는 1938년 5월쯤에 박정희가 핏방울로 시험지에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고 써서 만주로 보냈다고 한다. 그는 당시 편지가 만주까지 도착하는 데는 1주일쯤 걸릴 때였고, 편지를 보낸지 보름 정도가 지나 만주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박 선생 이야기가 실렸다고 증언하였다. 반면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근거로 제공한 <만주신문> 자료는 1939년 3월 31일치 기사 전문에서 박정희의 편지가 29일에 공관학교로 도착했다고 밝히고 있다. 박정희가 1938년 5월 중순에 편지를 보냈고, 보름 정도의 운송기간 뒤 만주지역의 신문에 박정희 이야기가 실렸다면, 같은해 5월 또는 6월, 길게 잡아도 7월 초에는 도착했을 시간이다. 그런데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시한 자료근거에 의하면 1주일 또는 보름 정도면 만주에 도착했을 박정희의 편지가 10개월 뒤인 1939년 3월 말에 도착했다는 소리가 된다. 또한 만주신문 자료에는 박정희의 군관지원 편지와 함께 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이시이 테 오호코, 또는 일사이 테 어봉공, 박정희)라고 쓰여있는 혈서 내용이 함께 동봉되어 있었다고 기록한다. 허나 유증선씨의 증언에서는 박정희가 혈서에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는 문구를 썼다고 주장한다. 조갑제가 인터뷰한 유증선씨의 증언과, 2009년 11월 5일 인터넷 일간지 오마이뉴스의 기사에서 인용된 민족문제연구소의 근거자료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상황이다. 박정희가 만주군 서류지원에 편지와 혈서를 동봉했던 것은 여러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일치되는 사실이다. 허나 혈서의 내용과 기사 날짜는 근거 자료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상황이다. 설령 유증선씨가 년도를 잘못 기억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의 증언 내용들이 당시 민간인 신분으로는 입수할 방법이 없었던 1962년 최고회의 의장비서 이낙선 중령의 비망록에도 같은 대목이 발견되고 있고, 유증선의 증언이 여러 공식 자료들과 과거 박정희 제자들의 증언들과 일치하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아서 섣불리 틀린 근거라고 치부할 수가 없다. 결국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군에 서류지원을 했던 시기에 동명이인이 존재했거나, 유증선의 기억이 틀리거나, 신문에 오타가 있었거나 하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놓고 더 많은 자료들을 검토해봐야 하는 상황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한 역사의 정치적 거물들의 생애를 논할땐 항상 여러 가지 상반된 평가와 논란들이 생기며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가 되버리곤 한다. 반면 이와 같은 무분별한 루머나 정치적인 진위논란이 팽배하는 상황이 있을 때마다 스스로를 논란의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개입시켜 새로운 이슈를 만들려는 특정 사회 인물들의 독특한 정치생태계가 파생되기도 한다. 다채로운 논란들에 끊임없이 연관되어온 가로세로연구소 소장 강용석 변호사, '일간베스트' 회원 강씨, 그리고 정미홍 전 KBS 아나운서는 각자 박정희의 혈서가 날조라는 주장을 하며 민족문제연구소가 박 대통령 혈서 관련 기사를 조작했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쳐왔다. 결론적으로 2017년 기준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강 변호사는 500만원, 정씨와 강씨는 300만원을 배상하라는 대법원의 판결을 받았다. 박정희가 쓴 혈서가 보도됐다고 알려진 1939년 3월 31일 자 만주신문은 현재 일본 국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박정희를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혈서에 관해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일 혈서를 작성했다는 만주신문 기사도 사전 발간 직전에 알게 돼 다시 거론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편입학 시절 (1942~1944). 1942년 3월 박정희는 만주국 신징 군관학교 2기 예과 졸업생 240명 가운데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이때 박정희는 수석졸업 기념으로 만주국 황제 푸이에게서 은사품으로 금시계를 하사받았다. 졸업 후 5개월 정도 현장 실습을 마친 박정희는 1942년 10월 1일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57기로 편입했다. 1944년 4월 박정희는 300명 가운데 3등 성적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를 졸업했다. 그리고 수습사관 과정을 거쳐 1944년 7월 열하성(熱河省) 주둔 만주국군 보병 제8단에 배속되었다. 12월 23일 정식 만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때 함께 근무했던 신현준, 이주일, 방원철은 훗날 5·16 군사 정변의 동지가 되었다. 박정희는 문경으로 돌아와 교사 시절 자신을 핍박하였던 일본인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 사과를 요구했다고 전해지는데 아래는 제자인 이순희의 증언이다. 만주국군 복무 (1944~1945). 박정희가 배속되었던 부대는 보병 제8사단으로 동만주 지역 열하성이었다. 주 토벌 부대는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좌파계열 독립군들이 팔로군에 가담하였고 박정희가 팔로군 토벌에 참여하였으므로, 독립군 토벌에도 참여한 셈이라고 주장한다. 언론인 겸 작가 문명자는 1972년 일본 도쿄에서 박정희의 만주국육군군관학교 동창생 두 명으로부터 만주국육군군관학교 동창생들이 박정희에 관해 "박정희는 온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과묵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에 나간다 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 하고 벽력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 생도들은 '저거 돈 놈 아닌가' 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라고 증언했다. 허나 이것은 당시 나라를 잃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사상적으로 갈라져 중국 국민혁명군, 중국 홍군, 중국 팔로군,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 등등 여러 단체들로 흡수되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독립활동을 추진하던 시대적 배경을 배제하는 편무적 해석이다. 일단 국민공통 교육과정 국사 교과서에는 1940년 이후 한국의 독립군 대부분이 광복군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근거지를 중국 대륙에 있는 충칭(重慶)으로 옮겼다고 서술하고 있다. 또한 1930년대 이후 만주지역 조선인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공작인 ‘민생단 사건’으로 말미암아 최소 500여 명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공산당에 숙청당하거나 학살당하였고 만주 지역 내에서 조선인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중국 공산당이 이를 방관함으로써 민생단 사건 이후 만주 지역에서 조선인 영향력은 위축되었고 조선인과 중국 공산당 사이 연대도 약화하였다. 이진영 경희대학교 교수는 2000년, 자신의 논문인 《중국 공산당의 조선족 정책의 기원에 대하여》에서 민생단 사건으로 인해 1940년대에 들어서는 사실상 만주에서 공산주의 운동은 종언을 고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좌익 계열 독립군 단체들은 이런 공산군의 만행에도 불구하고 사상적으로 달랐던 대한민국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중국 공산당과 팔로군에 협력하였다. 김무정 같은 조선인 독립운동가 출신이자 중공 팔로군 포병장교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버리고 북한 조선인민군 수립에 동참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조선인민군의 전신인 조선의용군은 박정희가 갓 복무한 1944년대에 화베이 지역의 도시와 농촌, 그리고 만주 일대의 일본군 점령 지역에서 조직 결성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고, 그 결과 여러 도시에 독립 동맹의 거점이 마련되었다. 이리하여 의용군과 독립 동맹의 존재가 널리 알려졌으며,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의용군에 입대했다. 이에 대해 2004년 동아일보가 제안한 가상토론에서는 언론인 조갑제는 박정희가 팔로군을 토벌하였으나 이는 중국 공산당의 군대이므로 독립군과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조갑제가 팔로군과 독립군이 무관하다고 주장했지만, 진중권은 팔로군에 독립운동 세력이 참여하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성신여대 김명호 교수 또한 독립군이 "팔로군과 신사군의 지도 아래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조선의용군은 팔로군, 신사군과 긴밀한 관계를 수립했다"고 주장하였다. 인터넷 일간지 오마이뉴스의 취재에서 박정희와 같이 만주국군 제8단에서 복무한 중국인 동기생 고경인에 따르면 당시 제8단 지역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전신인 팔로군 토벌을 위해 주둔하고 있었으며, 초임 소위 시절 팔로군 토벌 작전에 참가한건 사실이라고 증언한다. 하지만 2-3개월후 단장 부관으로 승진했기 때문에 일선부대에서 빠지게 된다. 부관이 된 이후 박정희와 같이 복무하게 된 신현준, 방원철 등은 “박정희는 단장 부관으로 직접 전투보다는 놀고 술 먹을 기회가 많았다”고 증언하였다. 창씨개명 논란. 군관학교 시절 박정희는 ‘다카기 마사오’()로 창씨개명을 하였고, 만주국육군군관학교 2기생 졸업앨범과 일본 육사 졸업앨범에서도 같은 이름을 사용하였음이 확인되었다. 1940년 여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폐간시킨 일제는 창씨 개명을 강요하기 시작했고, 만주군관학교에서도 같은해 가을에 조선인학생들 24명(1기생 13명, 2기생 11명)을 호출, 1주일간의 휴가를 주며 고향에 가서 창씨개명을 해오라 하였다. 박정희는 고향 구미에 내려와 항일활동가이던 형 박상희와 함께 의논하여 고령박씨에서 '고목'이란 성을 작명하였다. 박상희는 '다카키 소기(고목상희)', 박정희는 '다카키 마사오(고목정웅)', 박정희의 조카 박재석은 '다카키 이사무(고목용)'가 되었다. 정치계에서는 창씨개명 존재를 두고 특정 인물들의 '친일성'의 근거라고 주장하지만, 창씨개명은 진보, 보수 출신 정치인들의 친일 성향과는 상관없이 일제강점기 시대를 살아왔던 조선인들 전체가 강제로 겪은 일이다. 창씨 여부를 갖고 조상을 친일파로 낙인 찍는 것은 악의적인 정치 이분법에 지나지 않는다. 의병출신 설진영(薛鎭永)은 창씨에 불응하면 자녀를 퇴학시키겠다는 학교측의 통보를 받고 결국 자녀를 창씨시킨 다음 자신은 조상 볼 낯이 없다며 돌을 안고 우물로 뛰어들었다.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었던 윤동주에게는 히라누마 도오주(平沼東柱), 대한민국 10대 대통령 최규하에게는 우메하라 게이이치(梅原圭一), 심지어 박정희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김대중에게도 도요다 다이쥬(豊田大中)라는 창씨개명된 이름이 있었다. 오히려 세간에 알려진 극렬 친일파 가운데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도 더러 있었다. 해방후 반민특위에 '검거 제1호'로 붙잡혀온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朴興植)을 비롯해 중추원고문 한상룡(韓相龍), 일본 대의사(代議士, 국회의원)를 지낸 재일친일파의 거두 박춘금(朴春琴), 경북도지사를 지낸 김대우(金大羽), 귀족원 의원을 지낸 윤덕영(尹德榮) 등이 이에 속한다.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제하지 않았다는 변명거리로 삼기 위해 소위 내로라는 친일파들에게 일부러 창씨개명을 시키지 않는 잔꾀를 부렸다. 한때 박정희가 자신의 친일 충성심을 증명하려고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 번 개명을 했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북한에서 시작된 가짜 정보인 것으로 밝혀졌다. 박정희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유지하는 두 언론매체 《오마이뉴스》와 《한겨레》에서 조차 박정희 2번 창씨개명 썰에 대해서는 "자료로 입증된 사실이 없거나 공식 기록으로 확인된 바 없으며 다카키 마사오로 한 차례 개명한 사실만 확인되었으며 자료로 입증된 사실은 아니다"라고 밝힌다. 이 논란이 퍼뜨려진 경위는 1973년 8월 11일자 북한 <로동신문>이 '김대중 납치 사건' 직후부터 박정희 비판글을 쏟아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73년 이전에 박정희를 '오카모토 미노루'라고 주장한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재미 언론가 문명자의 1999년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서는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시절 박정희의 창씨명은 다카키 마사오. 그곳을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했을 때 박정희는 창씨명을 완전히 일본사람 이름처럼 보이는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꾼다.”라고 서술하며 2005년 도쿄대학교에서 출판한 《일본 육·해군 종합사전》 2판에서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로 소개되는 것을 근거로 제시한다. 이에 대해 김병태 건국대학교 명예교수는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관동군 23사단 72연대에 배속됐는데 거기 연대장의 이름이 오카모토였다"고 설명하였다. 인터넷 일간지 오마이뉴스의 정운현 기자는 "박정희가 배속된 23사단 72연대 연대장 이름이 오카모토였다는 김병태 교수의 주장은 허구성이 있다.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견습사관을 거쳐 배속된 곳은 열하성 흥륭현 소재 만주국군 보병 8단이었다. 단장은 중국인 당제영이었으며, 그의 계급은 상교, 우리로 치면 대령이었다. 당시 보병 8단에는 박정희를 포함해 이주일, 방원철, 신현준 등 한국인 장교가 4명 있었다."고 반박한다. 또한 "군관학교 예과를 수석으로 졸업해 일본 육사 유학 특전까지 얻은 박정희가 다시 창씨개명을 해야 할 필요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주장한다. 2012년 12월 5일 인터넷 매체 '빅뉴스'의 기사에서(미디어워치로 옮겨졌다) 이시완 자유기고가는 "한국 사회에 퍼진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설은" '안티박정희' 진영이 "북한의 주장을 확인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정적 비판을 위해 퍼뜨렸다"고 주장한다. 문명자가 증거로 제시했던 "사전은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이 아니라, 도쿄대학 출판부에서 출판한 개인출판물"이며 "이 사전 초판(1991)에는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이 없었는데, 2005년 발간된 2판에 갑자기 이 이름이 추가되었다" 고 지적했다. 또 "도쿄대학 출판부를 통해 이 사전의 저자에게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의 근거를 확인해 본 결과, '근거 확인이 안되니 3판을 출판할 때는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을 삭제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고 했다. 그는 "한국의 '안티 박정희' 세력이 금과옥조처럼 받들어 오던 '일본측 자료'의 설득력도 이것으로 없어진 셈"이라고 주장했다. 광복 직후. 광복과 귀국 (1945~1946). 박정희는 만주 보병 제8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근무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소속 부대가 없어진 박정희는 9월 21일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 쪽으로 건너가, 장교 경험자를 찾고 있던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북경의 김학규가 지휘하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1946년 5월 8일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 빈털터리 상태로 돌아온 그를 고향의 가족도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다고 한다. 셋째 형 박상희(朴相熙)는 “그냥 선생질이나 하면 좋았을 걸 괜히 고집대로 했다가 거지가 되어 돌아오지 않았느냐?”고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만주국군 출신이었던 박정희가 한국광복군 광복군에 바로 입대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 광복군이 만주에 있던 조선인들에게 선전했던 투쟁지침과 관련짓는 주장도 있다. 비밀리에 일본군 내 조선인 장교들에게 살포된 이 선전문을 보면 일본군에 위장 침투한 한국인에게 고하는 것으로서 본문에는 “아직 전민족적으로 총궐기할 때는 아니다. 때를 기다려라. 제군들은 일군 내에서 작전을 방해하고 손상하는 게 임무다. 자신이나 동포에게 위험이 없는 범위에서 활동하라. 겉으로는 친일(활동)을 하라”는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1945년 8월 이전에 박정희가 독립군에 참여했다는 증거는 없다. 비밀 선전문은 전 광복회장 김우전으로 확인되고 있으나, 박정희가 비밀광복군에 연관된 듯 알려진 ‘원전(原典)’은 1967년 박영만이 쓴 소설 ‘광복군’이었다. '실록 군인 박정희'에 따르면 1967년 박영만은 자신의 책을 박정희에게 전달했으나 환대는 커녕 호통을 들었다는 설도 있다. 당시 정황을 비교적 잘 아는 김승곤 전 광복회장은 “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 대통령은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라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 한 푼 못 받고 거창하게 준비한 출판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5·16 이후 반혁명 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박창암 전 혁명검찰부장 앞에 박정희를 지하독립운동 리더로 묘사한 책을 쓰자고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광복 직후(1946~1950). 1946년 5월 8일 귀국한 그는 고향에서 넉 달간 휴식을 취하다가 그해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여 단기 과정을 마치고 1946년 12월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 광복을 맞은 한국의 군대에서 다시 육군 소위로 임관해 군인 생활을 시작한다. 박정희와 2기생도들은 1946년 12월 14일에 졸업하였다. 교육 중 동기 군번 69명이 탈락하고 194명이 졸업하였고, 군번은 성적순으로 받았다. 1등은 신재식 (육군소장, 군수기지사령관 역임)이었고, 박정희는 3등이었다. 1946년 10월 5일 독립운동가이자 언론가였던 박정희의 친형 박상희가 대구 항쟁 사건 때 구미 경찰서에서 시위대와 진압대 사이를 중재하다 경찰이 발포한 총알에 맞고 사살되었다. 육사에서 훈련 중이던 박정희는 형의 피살 소식을 접했으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고, 그 며칠 뒤 조용히 다녀갔다고 한다. 박정희는 대통령 시절 한 측근에게 "형이 피살된 사정을 알아보려고 장교 복장으로 고향에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숙군 때 김창룡으로부터 그 점을 추궁당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평소 가장 따르고 존경했던 형 박상희의 죽음은 박정희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박상희의 친구이자 당시 남로당 군사부 총책이었던 이재복이 박정희에게 접근해 남로당 가입을 권유한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박정희의 삶을 다방면으로 취재했던 조갑제(조갑제닷컴 대표)씨는 박정희의 전반부를 다룬 <박정희-불만과 불운의 세월>에서 "박정희가 남로당에 들어가게 된 데는 그의 성격에서도 찾을 수 있다"며 그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소위로 임관한 박정희는 본부가 춘천에 있던 8연대로 발령받았다. 8연대는 1947년 2월, 미군이 38선 경비업무를 일부 이관하면서 다섯 곳에 경비초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당시 경비중대장은 경비사관학교 1기인 김점곤 중위가 중대장으로 있었다. 원용덕 연대장이 장교들을 소집하고 경비초소(CP)의 위치와 소대장의 배치장소를 의논하였는데 미군 고문관 브라운이 소대장의 서열에 따라 배치하면 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박정희는 보는 앞에서 미국놈이 왜 간섭을 하느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미국놈'이란 표현을 알아들은 브라운은 고소하였고 원용덕 연대장이 미국놈은 애칭이며 욕이 아니라고 변명해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브라운은 타자원한테 들어서 안다며 미국놈은 욕이라 하며 박정희의 징계를 요구하였으나 원만한 원용덕이 적당히 달랬다. 이 시절 국군 초의 연대단위 기동훈련을 기안한 공로로 중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대위로 진급한다. 1947년 12월 경리장교였던 박경원의 결혼식에 참석하다 만난 이화여대 1학년 이현란(당시 24세)과 1948년부터 1950년 초까지 약 3년가량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 이현란과 약혼한 후 곧 용산 관사로 데리고 와서 동거를 시작했고, 그 뒤 육군 소령으로 진급, 1948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중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를 받고 감옥생활을 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갔다. 여수·순천 사건 후에 시작된 대한민국 정부의 군대 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숙군작업에서 박정희는 남조선로동당(남로당) 군부 하부조직책으로 그해 11월 11일 체포되었다. 1심에서 “파면, 급료몰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하며, 감형한 징역을 집행정지함” 조치를 받았다. 다음 해 1월 강제 예편되었으며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박정희가 좌익전력으로 구속되기 서너 달 전에 이현란이 사생아 아들을 출산했고 태어나자마자 사망했다는 설이 존재허나 거짓으로 밝혀졌다. 박정희가 군내의 남로당 수사에 걸려 구석된 것이 1948년 11월, 이때 박정희의 용산관사와 가까운 집에 살던 이효 대위가 구속된 박정희를 대신해 이현란을 방문해 자금을 챙겨주었으나 임신에 대한 증언은 존재하지 않는다. 며칠 뒤 숙군수사 실무장교로 박정희의 조사를 맏았던 김창룡 또한 이현란을 직접 찾아가 경위를 설명해주며 박정희의 메모를 건네 주었음에도 약혼녀 이현란의 임신에 대한 조사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이현란 스스로가 박정희와의 사이에서는 소생이 없었다고 밝힌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 중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하였고 이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될 때 중령으로 진급하고 대구로 올라가는 육군본부의 수송지휘관을 맡았다. 10월 육영수를 소개받았고 육군본부의 전방지휘소가 서울특별시로 이동하게 되자, 그는 서둘러 약혼식을 올렸다. 10월 25일 장도영의 추천으로 제9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한국전쟁 이후(1950~1959). 1950년 11월에 김호남과 이혼하였다. 육종관은 딸 육영수가 박정희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육영수와 그의 모친 이경령은 집을 나와 대구 시내에 있는 박정희의 거처 주변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1950년 12월 12일 박정희는 대구시의 한 성당에서 육영수와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는 대구시장 허억(許億)이 보았고 신부의 손을 잡은 이는 육종관 대신 박정희의 대구 사범 스승 김영기였다. 이때 주례를 맡은 허억은 박정희와 육영수의 이름을 바꿔 부르는 실수를 하였다. 1950년 육군 정보국 제1과장이 됐다. 1952년 피난처인 부산에서 이용문 준장의 사무실에 찾아갔다가 그로부터 시인 구상을 소개받게 된다. 그는 이후 이용문과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병들을 동원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뒤에, 국회에서 개헌을 통과시키고 직선제 대통령으로 출마하려는 데 반발하여 정변을 계획하였다. 1952년 5월 군부 내에서는 이승만 축출 시도가 있었다. 이용문 등 군부의 일부는 이승만을 축출하고 장면을 추대하려는 시도를 계획, 이용문은 장면의 비서로 있다가 1952년 4월 사퇴한 선우종원을 포섭하려 하였으나 선우종원이 협조를 거부하여 무산되었다. 박정희는 이때 주동적 역할은 아니었지만, 이용문을 보좌하는 위치에 있었다. 정변 계획은 미수로 끝났고 이용문은 그 1년 뒤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1953년 11월 25일 육군 준장으로 승진하여 장군이 되었으며 1955년 7월 14일 제5사단 사단장이 되었다. 1955년 겨울 예기치 않은 폭설이 발생, 작업 중이던 여러 사단 소속 장병들이 사고를 당한 사건이 발생한 후 박정희는 문책성 인사 조처로 대기 발령되었다가 1956년 육군대학에 입교하였다. 1957년 3월 20일 육군대학을 졸업한 뒤 육군 소장 진급심의대상이 되었다. 이때 박정희의 육군 소장 진급심사위원회가 열려 22명의 심사위원이 참가하여 찬성 18표, 기권 2표, 반대 2표로 박정희의 소장 진급은 무난히 통과되는 듯하였다. 이때 경무대 행정관 곽영주(郭永周)가 나타나 박정희의 사상 문제, 결혼 문제 등을 이유로 그의 진급을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고 있던 곽영주의 반대에 부딪혀 박정희의 소장 진급 문제가 계류 중에 있을 때 김정렬이 나타나 심사위원들을 설득함으로써 박정희의 소장 진급은 무난히 통과하게 되었다. (곽영주는 5·16 군사정변 후 혁명재판에서 경무대로 몰려온 데모대를 살상한 죄로 사형되었다.) 이어 박정희는 제6군단 부군단장으로 부임하였다. 1957년 제7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1959년 7월 1일 육군 제6관구사령관이 되었다. 1960년 1월 21일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발령받았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하였다. 그 뒤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 겸 내각 수반의 과도내각을 거쳐 1960년 7월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때 박정희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으로 부임하였다.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자 이종찬 장군은 국무총리 장면을 찾아 박정희의 중용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장면 총리는 이 문제를 바로 답변하지 않고 주한미군 사령관 사령관을 찾아 논의하였다. 며칠 뒤 매그루더는 한국 육군본부로 박정희의 신원조회를 요청하였고 김형일 육군본부 참모차장은 '박정희는 좌익이다'고 답변하였다. 매그루더는 다시 장면을 찾아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런 요직에 앉혀뒀냐'라며 항의하였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이었다가 이 일이 있었던 후 12월 15일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 미국의 감시도 감시였지만 당시 박정희에 대한 사상문제는 한국군 내부에서도 완전히 정리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매그루더에게 박정희를 좌익으로 지목하였던 김형일은 이 일로 박정희와 등을 지게 되었는데, 김형일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정에 반대하다가 참모차장에서 예편하였다. 박정희는 1961년 4월 19일 4·19 혁명 1주년 기념식을 거사일로 잡았다. 그러나 그날 아무런 시위도 집회도 없었고 박정희는 당황한다. 이때 장면 정부의 정보기관인 시국정화단에서 미리 첩보를 입수하고 1961년 4월 19일로 계획된 학생들의 데모를 매수했다는 의혹이 있다. 박정희 등을 비롯한 군인들은 4·19 혁명 1주년 기념식 때 일부 학생들이 정부에 대한 데모를 준비할 때, 이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정변을 준비하였다. 당일 학생들이 데모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자 박정희 등은 당황한다. 군부 쿠데타 모임인 혁명 요원들은 4·19 1주년 되는 날로 거사일을 정했지만, 소문에 의하면 시국 정화 운동 본부에서 학생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데모를 못 하도록 막았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박정희의 계획대로라면 그날 학생들의 대대적인 시위가 발생해야 했고, 군중 폭동에 자연스럽게 군부가 침투해야 거사에 성공할 수 있었다. 4·19 1주년은 아무 일이 없었고, 쿠데타를 기도하려던 군부는 일시적인 공황상태에 빠졌다. 한편 당시 시국정화단에서 학생운동권들을 돈으로 매수했다는 의혹, 금액과 내용 등은 공개되지 않았다. 대통령직 재임 시절. 5·16 군사정변. 5·16 군사정변은 1961년 5월 16일 새벽, 당시 제2군 사령부(사령관 최경록 중장)부사령관이었던 박정희 등의 주도하에 육군사관학교 5기생과 8기생 출신의 전투보병사단 중령급 대대장(오학진 등) 그리고 6군단 포병단(단장 5기생 문재준 대령과 예하8기생 중령급 대대장-신윤창 구자춘 등) 제 1공수특전단(단장 5기생 박치옥 대령 등 예하 장교 등)기타 박정희의 만군 인맥인 해병대 사령부(사령관 김성은 중장) 예하 여단(여단장 김윤근 준장과 예하 대대장 오정근 중령 등)이 일으킨 군사정변으로 뒤에는 참모총장으로 있던 장도영을 끌어들였다. 정변의 주도 세력은 5월 18일에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초대 위원장에 장도영, 부위원장에 박정희가 취임하였으며 5월 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꾸면서 의장에 장도영, 부의장에 박정희가 취임,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행사하게 하였다. 정변이 발생하자 장면 총리는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5월 18일 나와 하야를 선언하였다.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면서 장도영이 의장에 선임되고 박정희는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5월 20일 장도영이 내각 수반이 되면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혁명위원회를 국가 재건 최고 회의로 개편한다. 첫 번째 군사내각은 5월 20일에 발표되었으며, 7월 3일 장도영이 퇴진하고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하였다. 1962년 3월 22일 대통령 윤보선의 사퇴로 박정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도 하였다.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민주당 윤보선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어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해체되었다. 5·16 군사 정변 초기.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결심했던 데에는 그가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하던 시절 4·19 혁명이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졌다. 박정희는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하면서 정변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하여 그는 1960년 5월 8일을 거사일로 정했지만, 4·19 혁명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1960년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역임 후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하면서 김종필 중령을 비롯한 지지 세력을 규합하였고, 이듬해인 1961년 5월 16일 새벽, 반공·친미·구악 일소·경제 재건 등을 명분으로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하여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을 붕괴시켰다. 정변이 발생하자 장면 총리는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5월 18일에 나오며 하야를 선언하였다. 대통령인 윤보선은 군사 정변을 추인하였고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되면서 장도영이 의장에 선임되고 박정희는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5월 20일 장도영이 내각 수반이 되면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한다. 정변 당시 박정희는 유원식을 데리고 청와대로 찾아갔다. 그러나 윤보선은 혁명군을 진압하지 않고 올 것이 왔다고 하여 정변을 방관하는 태도를 보였다.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은 정변을 주도한 군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가 진압 명령서를 들고 '사인만 하시면 쿠데타군을 진압하겠다'고 하였으나 윤보선은 “우리 한국에선 며느리가 물에 빠져도 시아버지가 들어가서 안고 나오지 못한다”며 사실상 정변을 방관하였다. 그러나 매그루더 사령관은 미 합참의장에게 보내는 5월 17일 자 전문에서 “미군 방첩대(CIC)가 거리의 행인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해본 결과 10명 중 4명은 혁명을 지지했고, 2명은 지지는 하지만 시기가 빨랐다고 했으며, 나머지는 반대했다”고 보고했다. 또한, 정변이 발생하자마자 박정희는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은 범죄자들을 색출해서 전원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치깡패로 유명한 이정재, 영화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면서 최무룡, 김지미 등 연예인들에게 갖은 행패를 부려왔던 폭력배 임화수, 꿀돼지라는 이름으로 폭력배들의 세계에서 유명한 신정식, 이승만 정권 당시 내무부장관 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깡패들을 두둔한 책임을 지게 된 최인규, 그리고 경찰관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 가장 죄질이 무거운 데다가 이승만의 비호를 받으며 못된 짓을 저지르며 특히 4·19 혁명 때 민간인에게 발포 명령을 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사살한 곽영주 등을 사형에 처했는데 박정희는 이들을 사형에 처하기에 앞서 구악 일소, 즉 과거의 잘못된 점을 모두 없앤다는 명분으로 조리돌림을 실시한 후 이들의 사형을 집행했다. 정변 초기에는 일부 인사들의 지지 성명이 있었는데 장준하는 사상계 6월호에서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을 뿌리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라며 정변을 지지하였고 언론인 송건호도 제3공화국 초기까지 민족적이라고 평가하여 박정희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또한 정변 한 달 뒤, 일제강점기 당시 제암리 학살사건을 폭로한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1961년 6월 14일 ‘코리언 리퍼블릭’지에 ‘5·16 쿠데타에 대한 나의 견해’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는 투고의 첫머리에서 ‘5·16 쿠데타는 필요하고도 불가피한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민주당 정권의 부정과 무능을 폭로하며 ‘한국에는 아직 진정한 민주주의가 시험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박정희는 군사정변 직후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다 투옥된 독립운동가 김학규를 사면, 복권했다. 김학규가 중풍으로 쓰러져 운신을 못 할 때, 박정희는 한학자인 최서면(崔書勉)에게 김학규를 입원시키고 돌봐주도록 부탁하여 국군 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병석에서 입버릇처럼 항상 박정희는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였다. 이후 박정희는 1962년, 김학규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5월 23일 외신기자들과 회견을 하였다. 6월 3일 오후 4시 대구매일신문 기자와 단독 회견을 가졌다. 정변 초기 기자들 사이에서 박곰보, 박코프라는 별명이 돌기도 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1961~1962). 박정희가 초창기부터 군사정변의 최고 지도자는 아니었다. 당일로 ‘군사 혁명 위원회’를 설치하고, 장도영을 의장으로 자신은 부의장으로 취임하였다. 거사 3일째인 5월 18일 군사 혁명 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6월 10일에는 비밀 첩보 기관이자 동시에 국민 감시 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를 발족시켰다. 이후 '군 일부 반혁명사건'(알래스카 토벌작전)을 일으켜 군부 내의 반대 세력을 숙청하였고 7월 3일에는 장도영마저 이에 관련지어 의장직에서 추방하고 다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추대되었다. 9월 9일 수출조합법을 공포하였고 9월 30일 공업표준화법을 제정하여 수출과 공업화에 대해 준비를 한다. 보리와 밀 품종개발을 시도하여 1963년 1월에 성공을 거두었다. 1961년 10월 17일에는 장면 정권 때 날림으로 만들어진 ‘구황실재산법 제4조 시행에 관한 건’의 대상을 개정·확대하여 대한제국 황족의 범위를 축소하였고 일본 마쓰사와 정신병원에 갇혀 있던 덕혜옹주를 귀국시킨 뒤 1962년 4월 10일 재개정을 통해 그 범위에 덕혜옹주를 포함시켰다. 대한제국 황실에 동정심을 품었던 박정희는 옛 황족들에게 꾸준히 생활비와 치료비를 지급하였으며 매달 순종의 계후인 순정효황후 윤 씨에게는 50만 환, 의친왕비(妃) 김 씨에게는 30만 환, 고종의 후비인 광화당 귀인 이 씨와 삼축당 귀인 김 씨에게는 각각 10만 환 등 모두 100만 환을 지급하였다. 1962년 9월 26일에는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해방 이후 귀국하지 못하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식물인간이 된 의민태자(영친왕)와 비 이방자에게 1,945달러의 치료비를 지원하였고 1963년에는 의민태자의 환국을 추진하여 그해 11월, 의민태자는 5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은 군사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박정희를 승인하지 않고 정권교체 의지를 분명히 표현하였으나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뒤, 1964년 베트남 전쟁의 지원을 약속하자 미국은 일단 박정권을 향후 10년 이상 지지하겠다고 하여 정권교체 의사를 보류하기도 하였다. 한편 미국 문서에는 워싱턴의 인사들이 박정희를 파악하기 위해 정일권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하버드대학교에서 만났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1961년 미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박정희를 만나주는 조건으로 일본 이케다 총리와 만나라는 지령을 내렸다. 10월 10일 당시 일본 도쿄에서 6차 한일회담을 준비하고 있던 배의환 회담 수석대표와 정일영 당시 서울대 교수에게는 '급거 귀국'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곧바로 서울에서 박 의장을 만나게 된다. 거기서 박정희 의장과 김종필 정보부장과 만나 예상 회담의제와 일본의 반응에 대해 준비했다. 정 교수는 박 의장에게 일본이 현찰로 달러를 주지는 않으려고 할 것이며 대신 물자나 산업 노하우를 가져올 것이며, "그 경우 우리 산업 및 경제가 일본화할 우려가 있다"는 점을 미리 설명해줬다. 1961년 11월 12일 회담에서 이케다 총리는 예상대로 현금이 아닌 산업 건설을 해주겠다는 이야기를 꺼냈고 그 명목도 배상이 아닌 경제협력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박 의장은 "우리는 구걸하려는 것이 아니라 받을 것을 받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박 의장은 청구권 문제에 대해 "충분한 법적 근거가 있는 청구권"이라면서 "상당한 액수의 청구권을 한국이 갖고 있는데 일본이 5천만달러를 운운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1961년 11월 박정희 의장은 독도 영유권과 국토 관리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독도를 정확히 측량하여 토지대장에 등록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고 특별 지시하였으며 그에 따라 국토건설청 측량팀이 약 2개월에 걸쳐 독도의 지형을 측량하고 지형도를 작성하였다. 한편 12월 학사 고시 제도를 도입하여 12월 22일 학사 자격 국가고시를 실시하였고, 1961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1962~1963). 1962년 3월 17일 수출진흥법 등 16개 법령을 공포하여 수출진흥정책을 수립하였고, 제2공화국 정부가 기획 중이었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행하고 울산 공업 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하며 경제 발전을 모색했다. 그해 3월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구(舊)정치인을 정죄하는 ‘구 정치인 정화법’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대통령 윤보선이 반발하면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박정희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활동하였고, 같은 해 7월부터 8월 김현철을 후임으로 임명하기 전까지는 공석인 국무총리급의 지위인 내각 수반으로도 활동했다. 그 해, 3월에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훈장 추서가 미뤄지던 김구, 안중근, 이승훈, 안창호, 김좌진, 한용운, 최익현, 조만식, 윤봉길, 신익희, 이시영, 강우규, 민영환 등 독립운동가 285명에게 건국훈장을 비롯한 독립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1962년 7월 14일, 개인재산을 기부하여 장학재단인 5·16 장학회를 설립 하였다고 ‘박정희 기념사업회’는 밝히고 있으나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밝힌 바에 의하면,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에 지시하여 '부정축재처리요강'에 의해 이병철 등 기업인 15명과 함께 구속되어 있던 부산 지역의 재력가 김지태(金智泰)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의 주식과 부일장학회 기본재산 명목의 토지 100,147평을 헌납토록 하였고, 이 재산 중 토지는 국방부에 무상으로 양도하였으며 이후 "기부받은 재산이 자꾸 유실된다"는 보고를 받고 법무부 장관 고원증에게 장학회의 설립을 지시하여 5·16 장학회를 설립했다. 이 사건은 당시 최고권력자였던 박정희 의장의 언론장악 의도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언론 자유와 사유 재산권이 최고 권력자의 자의와 중앙정보부에 의해 중대하게 침해당한 사건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에 대해 김지태의 차남인 김영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아버지의 재산 등을 빼앗았지만,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고 장학회를 45년 동안 관리한 점은 높이 평가한다”며 “박(근혜) 전 대표만 (정수장학회 반환과 관련한)결단을 내린다면 ‘자명(김지태의 호)·정수장학회’로 이름을 바꿔 함께 운영하고 싶다”고 발언하기도 하였다. 1962년 10월에는 동해안 화진포에서 해병대 상륙작전 훈련을 참관한 후 주문진으로 이동하여 역대 지도자 중 유일하게 울릉도를 방문하였고 이후 독도 의용수비대 출신 용사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1962년 12월 말에 박정희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이후 인재등용의 하나로 전두환과 차지철 등의 부하 장교들을 정치권에 끌어들이려 시도했다. 차지철 대위는 이에 응해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전두환 대위는 군대에 남겠다며 거부했다. 이에 박정희는 몇 번이고 계속 권유했으나 전두환은 "각하,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부하가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며 일축했다. 이에 박정희는 전두환의 용도가 이미 정해져 있음을 깨닫고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라는 권유를 중단하는 대신 전두환을 군 내부에서 특별히 총애하게 되었다. 통화개혁. 1962년 6월 10일 통화개혁을 단행하여 구 환율을 10대 1로 축소시켰다. 통화개혁 단행의 이유로는 거액의 자금을 숨겨둔 부정 축재자들의 자금 세탁 방지와 당시 아시아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화교 세력의 한국 내에서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연이은 연계 조치를 통해 국민들의 돈을 일정 비율에 따라 증권으로 강제 전환함에 따라 중공업 육성에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화폐개혁 이후 화교들의 자본력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며 상당수의 화교들은 한국을 떠났고 자연히 외식업에 진출하는 화교가 늘어났으나 대통령 취임 뒤인 1976년에는 화교에 대한 교육권과 재산권을 박탈하여 한국 내에서의 외국인과 외국 자본의 경제 장악력을 억제하기도 하였다. 인천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1만 8000평의 차이나타운에는 한때 화교 5,000여 명이 거주했으나 박정희 정권 이후 화교의 재산권 행사를 제한하는 정책에 불만을 품고 미국, 동남아 등으로 떠나 현재는 500여 명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금융 상업적 경제 구조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통화 개혁 정책은 예금 동결 조치를 불러왔고, 전체 공장의 45%는 가동을 중지하는 등, 사태가 악화되었다. 그러나, 예상보다 검은 돈의 규모는 크지 않았고, 궁극적 목적이었던 것은 미국에 알리지 않고 은밀히 준비해왔기 때문에 미국으로부터 철회를 강요받았으며, 자금 융통이 제약을 받아 중소기업 가동률이 50%로 떨어지는 등 경제난까지 야기하여 거두어 들이고 실패하게 된다. 제3공화국. 5대 대통령 후보자. 1963년 3월 16일 군정연장과 함께 구정치인들의 정치활동 금지를 해제하는 3.16 성명을 발표했다. 1963년 3월 16일 오후 2시 55분, 전 대통령 윤보선, 전 국무총리 장택상, 신민당 위원장 김도연,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등과 면담하였다. 김희덕(金熙德) 최고재건회의 외무 겸 국방위원장, 유양수(柳陽洙) 재경위원장, 홍종철(洪鍾哲) 문사위원장 등이 3.16 성명을 발표하게 된 동기를 번갈아가며 설명하였다. 같은 해 4월 8일에는 국민투표를 보류한다는 4·8 선언을 했다. 4월 17일,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 공표를 지시했다. 1963년 중반, 군에 복귀한다는 이른바 혁명 공약과는 달리 강원도 철원 군탄리에 위치한 비행장에서 전역식을 갖고 예비역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후, 정계에 참여 1963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구 정치인 정치정화법이 일부 해제되면서 정치활동을 재개한 구 정치인들은 군정연장이라며 박정희를 비판하였다. 이후 박정희의 정치참여를 비롯한 군정연장과 군정반대를 놓고 야당들과 갈등하게 되었다. 이 무렵 야당통합의 명분을 걸고 국민의당이 창당되었으나 윤보선과 허정, 이범석 등의 갈등으로 야당 내 대립은 격화되었다. 사상 검증 의혹. 이후 박정희는 여순사건과 관련해 공산주의자라는 의혹과 함께 일본 여자와 동거한다는 소문이 있었고, 민주당의 윤보선으로부터 좌익 활동한 과거전력에 대한 사상 공세를 당하였고, 이후 6대 대선에서도 사상 공세를 당한 바 있다. 선거 유세 당시 전 동아일보 기자 이만섭(李萬燮)을 비롯하여 민관식(閔寬植), 백남억 등이 참여하였다. 대구 지역 유세에서 박정희는 '모씨가 나를 빨갱이라고 모는가 하면, 일본 여자를 데리고 산다는 허무맹랑한 모략을 퍼뜨리고 있으나 저는 여러분들이 저만큼은 알고 있으리라 믿고 구태여 해명을 않겠다'고 하였다. 1963년 여름 김준연은 박정희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냐며 공개적으로 의혹을 제기하여 파문을 던졌다. 윤치영 등이 박정희의 전향은 확실하며 내가 내무장관 때 사상을 보증했다고 했지만 그가 다시 박정희의 사상 의혹을 제기하면서 논란은 확산되었다. 그는 박정희에게 사상 검증을 한 바 있었다. 1963년 9월 윤보선은 공화당과 박정희 후보 측으로부터 피소당하였다. 공화당 측으로부터 고발당하자 윤보선 후보는 "그렇다고 해서 박 의장이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라고 해명하곤 "하지만 그의 민주주의 신봉 여부가 의심스럽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어 윤보선은 박정희의 민주주의관을 의심했다. 그는 "박 의장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것을 보면 '구민주주의는 대한민국에 맞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또 러셀을 찬양하고 히틀러도 쓸 만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 사람이 과연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했다. 9월 28일 윤보선의 지지 유세를 하던 김사만(金思萬)은 '박정희는 여순반란사건에 관련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공산주의자였다'는 발언을 인용하면서 "일제에 항거하다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면 몰라도, 우리의 주적인 공산당 혐의를 받았던 사람에게 어떻게 믿고 투표할 것이냐"라며 박정희를 공격했다. 이에 대하여 박정희는 9월 28일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용공주의 세력을 혁명으로 일소하여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반박했다. 10월 자유민주당의 김준연은 송요찬의 녹음 연설회를 열기 위해 경남 마산으로 내려갔다. 마산에 온 그는 10월 2일 오전 10시 기자회견을 발표한다. 이 기자회견에서 그는 박정희와 김종필의 사상 의혹을 제기한다. 윤보선, 김준연 등의 사상 공세에 수세로 밀린 그는 한민당은 부패한 부자들과 변화를 거부하는 구태의연한 집단이라며 맹비난을 가한다. 그는 두 사람이 한민당 출신임을 강조하고 한민당의 후신인 민주당 장면 정권의 부패와 무능론으로 대응했다. 강원룡은 박정희의 군사 혁명을 이데올로기로서 좌익이라고 본 사람은 거의 없었고 군인들이 일으킨 혁명인 데다, 6개 혁명공약의 제1항에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이라고 못박았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차츰 그의 과거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언론에 보도됐고 윤보선이 선거에서 이 점을 본격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5·16 정변이 일어날 무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군사·경제적으로 상당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소련, 중공과 군사동맹도 맺고 있었고, 4·19 혁명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남조선 인민들이 봉기했으니 우리가 도와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기에 공산주의라고 하면 다들 무척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들어 박정희의 좌익 전력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고 보았다. 광복 후에는 공산주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형 박상희의 죽음으로 이에 따랐다는 견해와 박상희의 죽음 이전에 자발적으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는 견해로 나뉘어 있다. 실제로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들이 지금까지 남한 내에서 감행했던 것 중에 가장 큰 규모였으며 가장 성공에 가까웠던 정부전복 기도사건(1947~48년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침투사건)을 지도했으며, 광복 직후 남조선로동당에서 활동하면서 여수-순천 반란을 꾸미다가 적발되어 일시적으로 직급박탈을 당하였다가 복귀하기도 하였고 그 뒤 사상 전향을 하였다고 하나 정부로부터 진실된 전향인지 의심받았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미국은 박정희의 남로당 행적에 관하여 그의 사상을 의심하기도 하였으며 제5대와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윤보선이 박정희에게 사상공세를 하기도 했다. 원용덕의 반론. 1963년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원용덕은 윤보선, 송요찬, 자민당계의 박정희에 대한 사상공격은 사실무근이라고 말했다. 그는 송요찬의 주장에 대해서는 "송장군은 제주도 지방공비토벌을 맡고 있을 당시 박정희에 대해서는 나보다 아는바가 적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박정희가 여순사건 관련자로 몬 장본인은 김창룡이었으며 그가 자기에게 순복하지 않은 장교들을 용공분자로 몰아 숙청한 사실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또 원용덕은 "박정희가 여순사건 당시 지리산 밑 문주리 토벌작전에서 김지회의 반란군을 격멸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밝혔다. 이어 "송요찬 씨도 한때 김창룡 일파에 의해 빨갱이로 몰린 사실이 있다."고 말하며 "박정희의 과거 군역은 백선엽 장군이나 김점곤 장군 등이 환하게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3공화국 초기(1963~1964). 한편, 1963년 9월 25일 직업훈련기관인 직업재활원을 개원하였고 12월 6일 비행기편으로 서독에 도착하였다. 당시 서독에는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이 있었는데 박정희는 이 때 아우토반을 보고 한국의 고속도로 건설을 계획하게 된다. 1963년 12월 독일로부터 국빈방문 초청을 받게 되었다. 에르하르트 수상을 면담할 때, 그는 박정희의 손을 잡고 한국에 지원을 약속했다. 또한 에르하르트는 ‘라인강의 기적’을 예로 들며 고속도로와 제철산업, 자동차산업, 정유산업, 조선산업 등을 할 것과 ‘한·일협정’을 맺을 것도 자문하였다.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84.99%의 투표율에 470만 2700여 표(유효투표의 약 46.7%)를 얻어 윤보선을 15만 표차로 꺾고 당선되었으며,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박정희에 대한 지지율은 빈농이미지로 도시보다 농촌에서 월등한 것(여촌야도)으로 드러났다. 이후에는 지역감정으로 인해 호남의 지지율이 떨어졌다. 박정희는 대통령 취임 직후 여운형의 동생인 여운홍을 면담하였는데 5·16 군사정변 직후 맏형 여운형의 묘소 주변 토지가 채윤혁에게 매각되자 여운홍은 변호사를 찾아 구제의 길을 찾았으나 법적으로 구제의 길이 없자 박정희를 찾아와 호소하였다. 여운홍의 참소를 들은 박정희는 여운형 묘소주변 토지의 불하를 차단해주었다. 1963년 11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장례식에 참석하여 조문하였다. 베트남 전쟁 파병. 1964년 미국으로부터 베트남 파병 지원 요청이 왔다. 베트남 전쟁 당시 일부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단행하였으며, 1964년 8월 제1이동외과병원(130명)과 태권도 교관단(10명) 파월을 시작으로 주월한국군사원조단(비둘기부대), 방공포병대대(호크유도탄부대)를 창설하고 맹호부대, 백마부대, 해병 청룡부대 등 한국군을 파견한다. (→한월 관계) 그해 8월 식량증산 7개년계획을 발표하여 65년부터 시행하였다. 이후 국토 종합 개발 계획 등을 실시하고 식량 증산 계획과 벼품종 개량 등을 시도하여 경제 부양을 시도한다. 1966년에는 미국이 원조한 1000만 달러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설립하였고 한달에 한두 번씩 연구소를 찾아 연구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연구동 신축현장 인부들에게 금일봉을 지급하기도 하였으며 해외에서 뽑아온 박사들에겐 집과 대통령 자신의 몇 배의 봉급을 제공하고 당시 국내에 없던 의료보험을 미국 회사와 계약하여 가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일협정 전후(1965~1966). 한일협정을 통해 국가 기틀을 다질 자금을 마련하려 했으나 학생과 야당의 반대에 봉착한다. 특히 1964년의 6.3항쟁은 그 정점에 달한다. 6.3항쟁의 학생시위가 수그러들지 않자 박정희는 8월 25일 저녁 중앙청 제 1회의실에서 전국 방송을 통해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담화에서 그는 학생들이 국회해산과 조약무효를 주장하는 것과 데모 만능 풍조를 비판하였고, 시위를 독려하며 데모학생을 영웅시하는 교육자 등을 비판하였으며 구 정치인을 학생데모에 의존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던 반동분자라고 강경한 어조로 비판하였다. 다음날인 1965년 8월 26일 아침. 이때에도 한일협정 반대 분위기가 심했다. 박정희는 경찰력만으로는 치안유지가 불가능하다는 서울시장 윤치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하여 학생시위를 진압하였다. 8월 27일 시위 사태에 대한 문책성 인사로 문교부 장관 윤천주와 서울대학교 총장 신태환을 경질하고 후임에 법무부 차관 권오병과 교수 유기천을 각각 임명했다. 1965년 5월 16일 오후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이 보내준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미국을 방문하였다. 출발전 김포공항에서의 인사에서 자주, 자립을 강조하였다. 1965년 5월 17일 한미정상회담을 한 뒤 5월 18일 미국 순방을 하였다. 1965년 5월 22일 아침 피츠버그의 존스 앤드 로린 철강회사를 방문하여 군정 시절에 종합제철공장 건설을 시도하다가 좌절한 그는 공장 내부를 돌아보았다. 22일 오전 10시 20분에 피츠버그 공항에서 플로리다 주의 우주기지인 케이프 케네디에 도착하여 로켓발사 시험을 참관하고 돌아왔다. 최근 기밀해제된 미국 국무부 문서 《‘1964-68 미국의 외교관계 29편’363호에》 따르면 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 기간동안 딘 러스크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독도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한국과 일본이 독도에 등대를 설치해 공동 소유하는 방안을 제의했으나 박 대통령은“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미국은 같은 해 6월 15일에도 한국과 일본 간의 외무장관 회담을 열어 독도 문제의 조속한 처리를 요구하였고 박 대통령은 “일본이 우리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별도 회담 없이도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회담이 무의미하다”며 역시 거절하였다. 2005년 한일협정문서가 공개됐다. 이에 대해 박정희 정권이 대일청구권 포기말고도, 협상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아예 '독도를 폭파하자'고 협박까지 하며 '독도'를 협상안건으로 넣으려 했다. 또한 한일어업협상을 대선에 활용하고 대일본 배상관련 개인청구권을 무시한 점도 드러났다. 당시 정부는 기존의 40마일 전관수역입장에서 후퇴, 일본 정부가 주장한 12마일 전관수역 방안을 서둘러 수용했으나 여론악화를 우려해 공개시기를 늦춘 것으로 나타났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박 정권이 61년부터 한일협정을 체결한 65년 사이 5년간에 걸쳐 6개의 일본기업들로부터 민주공화당 총예산 2/3에 해당하는 6,600만 달러를 제공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측 외교라인은 만주인맥이었다.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은 "독도영유권문제를 불법적으로 처리해버린 자기들의 죄상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꺼린 한일 양국정부의 고위관리들은 밀약문서를 영원한 비밀로 묻어두기로 약속하였고, 밀약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말하지 않았다. ‘한일협력’을 외쳐온 역대정권들의 은폐술에 세상이 감쪽같이 속았던 것이다. 이 때의 밀약 파기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고 평했다. 2007 월간중앙은 “한일협정 체결 5개월 전인 1965년 1월 11일 당시 일본의 건설장관 고노 이치로의 특명을 받아 서울을 방문한 우노 소스케 자민당 의원이 성북동 소재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 자택에서 정일권 국무총리를 만나 ‘미해결의 해결’ 대원칙 아래 모두 4개항으로 된 독도 부속조항에 합의했다”고 주장했다. 내용에 의하면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라는 주장과 상대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 게 독도밀약 때문이라고 평했다. 독도밀약은 주장만 있을 뿐 증거나 사실이 밝혀진 바는 없다. 이것을 추적 조사한 노대니얼 박사는 이것이 사실이었음을 전제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전두환 씨가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시끄러운 문제가 될 것 같아 사본 하나 없는 독도밀약 문건을 태워 버렸다”면서 ”거기에는 서울과 도쿄를 오가는 비행기 안에서 쉬지 않고 정서한 기록들도 포함돼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 밀약때문에 이후로 맺어진 한일어업협정에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이 있다. 월간중앙이 주장한 독도밀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65년 7월 19일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이승만이 사망하였다. 7월 23일 오후 3시 미 공군 수송기가 ‘고향생각’이 연주되는 가운데 이승만의 유해를 운구하여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박정희는 국회의장 이효상, 대법원장 조진만, 국무총리 정일권 등 3부 요인들을 대동하고 공항으로 나가 시신을 영접하였다. 1965년 7월 20일 박정희는 이승만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결정하였으나 이승만의 문중 사람들과 이승만 측근들은 정부의 국민장 결정은 이승만에 대한 홀대라고 생각했고, 4월 혁명동지회 등은 국민장은 너무 과분한 조치라며 3일간 농성을 하였다. 한편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국민장을 거부하고 가족장을 하겠다고 응답하였고, 구 자유당측 인사들은 국민장을 거부하고 국장을 요구하였다. 1967년 9월 20일 김학규가 자택에서 별세하자, 박정희와 정부는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그를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포항제철 건설. 군사정부는 경제개발계획을 시행하기 위해서 막대한 개발자금을 필요로 하였으나 국내자본 축적이 미흡하고 외자도입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으로부터 유무상차관도입을 전제로 하는 대일청구권자금 협상과 연계된 한일국교정상화 협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장기간 이끌어온 협상을 마무리하고 1964년 12월 18일에 양국간에「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에 관한 비준서를 교환하고 1965년 6월 22일에 한일기본조약 등 25개 협정을 정식으로 조인하였다. 일본 측과 협의하여 청구권 사용방안중 제1차년도 실시계획을 1966년 4월 20일 결정짓고 그것이 국회의 동의를 거쳐 4월 27일 공고됨에 따라 5월부터 청구권자금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969년 1월 31일,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은 통역담당 최주선 부장과 함께 피츠버그로 건너가 KISA 대표인 포이(F.Foy) 회장을 만났으며, KISA 회원사들을 따로따로 만나 한국의 경제상황과 제철소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그들은 IBRD 보고서 내용을 인용하면서 한국의 제철소는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고 하였다. KISA와의 기본협정에 따르면 1972년까지는 제철소가 완공돼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늦어도 1969년 초부터는 건설공사를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건설자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제차관 도입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박태준 사장은 귀국하던 길에 하와이에 잠시 들러 낙담한 채 하와이 해변을 걷다가 '대일청구권자금'을 활용해 제철소를 지어야겠다는 이른바 '하와이 구상'을 했다. 그는 국제전화로 박정희에게 자기 생각을 알리고 곧바로 일본 도쿄로 날아가 일본의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 자금 지원 협상을 벌였다. 대일청구권자금 3억 달러는 1966년부터 1975년까지 10년 동안 균등분할로 무상지급하게 돼 있었다.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일종의 배상금으로,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의 대가이자 말하자면 ‘민족의 피맺힌 돈’이었다. 이 돈은 농림수산부문에 투자하기로 양국 정부간에 합의가 끝나 이미 국회 비준까지 얻은 상태였다. 그러나 제철소 건설에 전용할 수 있다면 ‘피맺힌 돈’의 가치를 가장 알차게 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유일한 대안이었다. 1969년 5월 7일, 박충훈 부총리가 '종합제철 프로젝트 재검토' 발언을 했다.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과의 협상을 위해 외국까지 나갔지만 빚도 얻지 못하고 홀대를 당한 데 대한 하소연이나 다름없었다. 이튿날 신문에는 "차라리 제철소를 짓지 말고 철을 수입하라"는 사설이 실리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진노했고, 결국 6월 2일 박 부총리를 경질했다. 정부는 박충훈 해임 뒤 김학렬 경제수석비서관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으로 임명하는 한편, 경제기획원 내에 ‘종합제철건설전담반’을 설치했다. 또한 1969년 8월 하순에 열리는 제3차 한일각료회담에서 청구권 자금 전용 문제를 매듭짓기로 했다. 1969년 여름 박태준 사장은 도쿄에서 많은 정.재계 거물들을 만났다. 우선 일본철강연맹의 기술지원 약속, 특히 3대 철강회사(야와타제철, 후지제철, 일본강관)의 적극적인 참여의사를 이끌어내기로 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 정부의 동의를 얻어낼 생각이었다. 외무상 아이치, 대장상 후쿠다, 통산상 오히라 등도 포함됐다. 야스오카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많은 우군을 만들 수 있었다. 결국 1969년 8월 28일 양국 정부는 각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다음날 일본 정부는 포항제철 프로젝트를 지원할 것이며, 서울에 대표단을 파견해 최종합의서를 마무리짓기로 했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3선 개헌과 유신전야 (1967~1971). 1967년,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5·3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는 경제개발의 성과와 비전을 내세우면서, 이를 지속하기 위한 정치적 지지를 호소했다. 반면에 신민당의 윤보선은 쿠데타 이후에 추진된 경제개발의 폭력성과 독재성을 규탄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공산주의자 경력과 남로당 경력이 문제시되었다. 6대 대선에서는 신라 천년의 고도에서 신라 왕손을 임금으로 받들어 천년의 영광을 재현하자는 찬조연설이 지역감정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5·3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은 선거 유세 중에 월남전 파병을 미국의 '청부 전쟁'이라고 비판했고, 이어 윤보선을 지지하던 장준하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 광복군의 총부리를 겨누었다"라면서 박정희의 친일 경력 의혹을 쟁점으로 꺼냈다. 또 장준하는 "우리나라 청년들을 남베트남에 팔아먹고 피를 판 돈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라며 베트남 파병을 비판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다시 대선에 출마한 윤보선을 116여만 표의 근소한 차로 꺾고 재선에 성공하여 12월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박정희는 농촌지역의 지지를 얻은 한편 윤보선은 도시와 지식인층의 지지를 받았다. 1967년 12월 농어촌개발공사를 창립하였고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한다. 1969년 2월 농업기계화 8개년 계획을 확정하고 그해 11월 1일 농어촌근대화촉진법을 승인한다. 1969년에는 3선 개헌을 골자로 한 개헌안을 국민투표를 통해 통과시켰는데 투표율 77.1%에 찬성율 65.1%로 통과되었다. 같은 해 9월에는 구미에 외국인의 투자 100%를 허용하고 5년 동안 100% 외국인 투자에 대해 법인세, 소득세, 취득세를 면제해주는 사항을 포함한 전자공업단지 조성 계획을 발표하였는데 구미 전자공업단지는 최종적으로 1973년 10월에 1,874천 평 규모로 완공되었다. 이후 8월 22일 미국 순방 때는 미국을 방문해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과 만났으나 닉슨 독트린에 의거한 주한 미군 철수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 1970년 3월 장기종합교육계획시안을 마련 발표하였다. 이 안에 의하면 86년까지 의무교육 확대를 단계적으로 실시하고, 의무교육을 9년으로 연장하는 것과, 교육세를 신설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1970년 4월에는 새마을 운동을 제창, 시작하였으며 그해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하였다. 같은해 8월 21일 관세청을 개청하였으며 1971년 10월 25일 내수용 생산업체에서도 수출을 의무화할 것을 지시하였다. 1971년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농업을 보다 큰 규모로 확대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정부로부터 여의도의 70배나 되는 규모의 땅을 구매하였는데 이 땅에 신원 조사 등 갖가지 심사를 거쳐 엄선한 농민들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의 여름이 아르헨티나에서는 겨울인 것부터 시작해서 대한민국과 아르헨티나의 기후는 전혀 맞지 않는 데다가 박정희가 구매한 땅 중에는 소금기가 많은 땅이 있는가 하면 여러 종류의 황무지가 많았다. 결국 박정희의 이 프로젝트는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으며 박정희가 구입한 땅은 아직도 대한민국 정부가 소유하지만 해마다 관리비 명목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아르헨티나 정부에 세금을 내는 형국이 되거나 아르헨티나 정부에 반환하거나 현지 농민들에게 소유권을 이전했다. 1972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하였고 1월 27일 제3차 인력개발 5개년 계획을 확정하였다. 2월 9일에는 녹색혁명을 추진, 통일벼를 개발하였으며 쌀의 한국 자체생산 및 완전 자급자족은 1976년에 달성한다. 1972년 7월 4일 분단 이후로 최초로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8월 3일 기업사채 동결 등 긴급 명령을 발표하였다. 1971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을 약 95만 표차로 이기고 3선에 성공했다. 1971년 대선을 앞두고 김종필은 1971년 선거에서 박정희 당선을 위해 무려 600억원이나 썼다고 밝혔다. 강창성 당시 보안사령관은 1971년 대선자금이 모두 '700억 원'이었다고 밝혔다. 1971년 국가예산이 5242억여 원과 비교할 때, 예산의 1할을 넘는 액수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 김신조사건 1.21 사태 (1968). 1968년 1월 1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특수부대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인 124부대 소속 31명이 조선인민군 정찰국장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한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8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수도권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청운동 세검정고개의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자, 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하였으며,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이 사상당했다. 군·경은 즉시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 김신조를 발견하여 생포하고 이들에 대한 소탕전에서 5명을 사살하고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전개해서 1968년 1월 31일까지 28명을 사살하였다. 나머지 2명은 도주한 것으로 간주되어 작전은 종료되었다. 이 김신조 무장공비 사건으로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총탄에 순직하였고 시민들도 상당한 인명피해를 입었음은 물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부정적 여론과 반공의식이 급속하게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교육, 문화 정책. 1963년 8월 8일 국사교육 통일방안을 선포하였다. 1968년 학자들을 초빙하여 국민교육헌장을 제정 반포하게 하여 새로운 시대를 여는 바람직한 한국인상, 국적 있는 교육의 전개를 강조하였고 이는 국민교육화되었으나 전두환 정권 때 폐지되었다. 박정희는 정치의 최우선 과제를 교육에 두었으며, 과학기술교육의 진흥을 목적으로 실업계학교 장려와 [[1973년부터 대덕연구단지 조성사업을 추진하였다. 1978년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설립하여 한국학 및 한국문화 연구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국민교육의 양적 향상을 위해 제1차 의무교육시설확충 5개년 계획(1962년-1967년), 제2차 의무교육시설확충 5개년 계획(1967~1971년) 등을 수립 및 추진하였다. 1963년 6월 26일 사립학교법을 공포하여 사립학교 운영의 기준을 확립하였다. 그런가 하면 64년 1월 4일 시도 단위 교육자치제를 실시하여 시도 교육청에 교육행정권을 위임하기도 했다. 1968년 7월 15일 71년까지 중학입시시험을 폐지하는 등 입시개혁안을 발표한 반면 10월 14일 대학교 입시 예비고사제를 69년부터 실시하게 하였다. 또한 국공립중학교증설 7개년 계획과 고등학교기관확충계획을 추진하였고 1969년 11월에는 공장 근로자들을 위한 금성사 등 7개 대기업체에 회사 내에 이공계 실업학교 부설을 지시하였다. 1976년 5월 20일에는 국비 장학생을 선발하여 유학보내는 제도를 신설하였고, 1976년 7월에는 노동자에 대한 교육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야간중학 개설을 지시하였다. 제4공화국. 10월 유신 직후 (1972 ~ 1973). 1972년 박정희 정권은 [[10월 유신]]을 단행해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고, 긴급 조치권, 국회의원 정수 1/3에 관한 실질적 임명권, 간선제 등 막강한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6년 연임제의 [[대한민국 제4공화국|제4공화국]] 헌법을 제정 통과시킨다. 긴급 조치 1호에서 9호를 발동하여 개헌 논의 일체를 금지하고, 정치 활동, 언론이나 표현의 자유에 제한을 가하였다. [[파일:Card Stunt for Park Chung-hee.jpg|섬네일|왼쪽|240px|국군의 날 행사 때 박정희 초상을 나타낸 [[카드섹션]].]]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유신 체제를 선포하기 직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이를 두 차례 예고하고 배경을 설명했다. 당시 남측 대표는 북측 대표를 만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 남북조절위원회 북측위원장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후락 부장은 메시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내각 수상이 권력을 갖고 있는 동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통일을 이룰 것"이라며 "하지만 남측 다수가 통일을 반대하고 있다. 따라서 질서가 먼저 구축돼야 한다. 박 대통령은 17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주의해서 들어야 할 중요한 선언을 발표할 것"이라고 전했다. 1973년 1월 중화학공업정책 육성을 선언하였고 [[공업진흥청]]을 신설하였으며 3월 중화학공업의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온산, 창원, 여수~광양, 군산~비인, 구미 등 5개 대단위공업단지 조성 계획을 수립하였다. 1973년 중반 기능공 양성정책을 수립하고 1973년 10월~1974년 12월에는 이리 수출자유지역을 착공하였다. 1972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하였고 1월 27일 제3차 인력개발 5개년 계획을 확정하였다. 2월 9일에는 녹색혁명을 추진, [[통일벼]]를 개발하였으며 쌀의 한국 자체생산 및 완전 자급자족은 1976년에 달성한다. 1972년 7월 4일 분단 이후로 최초로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1972년 8월 3일 기업사채 동결 등 긴급 명령을 발표하였다.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1974년 8월 15일, [[국립중앙극장]]에서 박정희가 [[광복절]] 29주년 기념사를 하던중에, 청중석에 있던 [[문세광]]이 연단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연설대 아래로 피해 무사했으나 귀빈석에 앉아있던 영부인 [[육영수]]가 머리에 총을 맞았다. 육영수는 사건 발생 9분 만에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진후 뇌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이날 오후 7시 경 향년 49세로 사망했다. 범인 재일교포 문세광은 현장에서 체포된후 중앙정보부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다. 문세광은 일본의 한 파출소에서 탈취한 권총을 사용했고, 위조 [[여권]]을 소지하고 밀입국했으며 일본인 공범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한국은 일본정부에 강력히 항의 했으며 양국관계는 냉각되었다. 9월에 집권당인 [[자유민주당 (일본)|자유민주당]] 부총재 [[시나 에쓰사부로]]가 수상 [[다나카 가쿠에이|다나카]]의 친서를 휴대하고 사과방한 한후 양국관계는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새마을 운동. 1967년 12월 1일에 박정희는 농어촌개발공사를 설치했다. 1973년부터 [[새마을 운동|새마을운동]]을 전국민적 운동으로 확산시켰다. 유신 선포후인 1973년 1월 16일 박정희는 대통령령 6458호로 내무부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하고 그 산하에 4개의 과를 두었으며 3월 7일 대통령 비서실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했다. 이후 새마을 운동과 관련된 교육을 강화했다. 72년 3월에는 서울시와 경기도 일대의 마을을 순방하며 새마을운동을 시찰하였고 이후 현장을 직접 시찰하며 새마을운동을 관리 감독하였다. 1973년 5월 31일 [[경기도]] [[수원]]에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을 신설 건립하여, 이전까지 농협 대학에서 개설하여 운영하는 독농가연구원에서 실시해 오던 새마을 운동을 위한 농촌 지도자 교육과 양성 등을 맡게 하였다. 1972년 1490명, 1973년 4354명으로 피교육자 수가 증가하였으며 그 이후로 매년 6천 명 이상이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1973년부터 지원금을 대폭 늘려 71년 41억 원, 72년 33억 원에서 격증하여 1973년 215억 원, 1974년 308억 원, 1979년에는 4252억 원까지 정부 예산 지원을 늘렸다. 또한 민간단체의 지원과 성금도 꾸준히 들어와 1972년 17억 원에서 1979년 2032억 원의 지원금이 들어왔다. 박정희가 만든 '[[새마을노래]]'는 방송매체를 통해 아침, 저녁에 방영되었고 국민운동화된 새마을 운동의 성공 사례는 일간신문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비슷한 것으로 [[잘 살아 보세]]라는 노래도 있다. 1973년 9월 21일 경제 4단체는 새마을운동을 생산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공장에 도입하는 방안을 토의하였으며 11월 21일 제1차 새마을 지도자 대회가 열려,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확산시킬 것을 결의하는 등의 노력이 지속되었다. 반면 새마을 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새마을 운동이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을 모방한 것으로 [[파시즘]] 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였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새마을 운동은 미신타파를 명분으로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탄압도 자행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이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1급 발암물질인 [[석면]]을 이용해 농촌 가옥을 개량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받는다. 긴급조치 시대와 집권 말기 (1975~1978). 만년의 박정희는 [[탈모]]현상으로 아침 샤워할 때마다 머리카락이 빠졌고, 좌골신경통을 앓고 있어 통증이 심할 때는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서서 서류결재하였으며, 또한 9대 대통령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임기 1년전에 사퇴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와 관련해 유신헌법 개정안 초안 작업을 전 중앙정보부장 신직수에게 지시했다는 주장도 있다. 남덕우 전 총리에게는 “내가 봐도 유신헌법의 대통령 선출 방법은 엉터리야. 그러고서야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어? 헌법을 개정하고 나는 물러날 거야.”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후계자로서는 김종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1974년,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 의해 암살당한 지 1년 뒤인 1975년 8월 6일에는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저도에 위치한 청해대에서 ‘일수’(一首)라는 [[시 (문학)|시]](詩)를 썼는데 아내인 육영수 여사와 함께 거닐던 곳에 혼자 와 보니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해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가 쓴 이 시는 2004년, 가수 남상규가 ‘임과 함께 놀던 곳에’라는 제목의 음반으로 출시되기도 했다. 아래는 박정희가 쓴 시인 일수(一首)의 전문이다. 박정희는 이외에도 '한 송이 흰 목련이 바람에 지듯이'와 '추억의 흰 목련', '제야(除夜)'등 많은 시를 지었는데 대부분 육영수 여사에 대한 그리움과 인생의 회한을 나타낸 시들이며 이외에도 많은 그림들과 휘호를 남겼다. 또한 [[독도]]와 [[간도]]의 영유권 확보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1975년 9월에는 국회에서 발간한 《간도 영유권 관계 발췌문서》에 특별예산을 지원하였으며 1978년에는 독도를 종합 연구하는 데 거액의 예산을 지원하였다. 이후 10여명의 학자들이 7년 동안 연구하여 박정희 사후인 1984년, 독도 영유권에 관한 자료들을 수록한 《독도 연구》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1975년 10월 8일 [[신민당 (1967년)|신민당]]의 [[김옥선]] 의원은 국회 대정부 질의장에서 그가 안보 논리로 공안정국을 조성했다고 비난하였고 이는 여야간의 싸움으로 비화되려다가, 공화당과 유정회에 의해 김옥선이 의원직에서 제명당하는 사태로까지 치닫게 된다. 국방력 증강 정책 추진. [[파일:Armed Forces Day of South Korea (1973) 1.jpg|오른쪽|섬네일|1973년 제 25주년 [[국군의 날]] 행사에서 행진에 참가한 박정희]] 박정희는 집권 초기부터 자주국방 정책을 추진하였다. 박정희는 미군이 우리의 국방을 맡아주고 있다는 생각을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한 시위에 따른 안보상의 불안에 대해서는 책임있게 판단하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주국방을 하지 못하면 진정한 독립국가도, 책임 있는 국민도 될 수 없다"고 말하곤 했었다. 1962년 5월 5일 해양경찰을 발족하고 1968년 1월에는 기동타격대를 창설 1968년 4월 향토 예비군, 1975년 전투상비군부대를 창설하였다. 1965년 4월 3일 초음속 전투기를 도입하였으며, 동해안 등에 기지를 설치하였다. 1969년 1월 7개 시군의 고교생과 대학생에 군사훈련 실시를 시범적으로 정하였고, 71년 12월 전국에서 첫 민방공훈련을 실시하였다. 병기 개발에도 노력을 들였으며 1975년 11월 함대함미사일 시험 발사에 성공하였다. 1977년 1월 핵무기와 전투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를 국산화하고 있음을 천명하였고 1978년 9월 26일 세계 7번째로 국산장거리 유도탄 등과 다연발로켓 시험 발사에 성공하였다. 박정희는 1970년대에 핵개발 추진을 시도하였다. 일부의 의견으로는 [[박정희 정부]]가 핵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를 반대하던 강대국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박정희는 핵개발 시도는 내외부적인 상황 때문에 좌절한 것으로 추정되나 이해당사자들이 생존해 있으므로 지금 현재로서는 파악이 어렵다. [[부가가치세]]제 시행 논란. [[파일:저도 앞바다에서 휴양 중인 박정희 대통령.jpg|섬네일|저도 앞바다에서 휴양 중인 박정희(1976년 7월)]] 박정희 정권은 안정적인 세원확보와 거래의 투명화를 통한 소비세의 증가를 위해 [[부가가치세]]법을 추진하였는데 이 법은 1971년, 세제 심의회에서 장기세제 방향으로 종합소득세 도입과 부가가치세 도입을 결정하면서 준비가 진행되었고 1976년 12월, 국회에서 통과되어 다음 해 7월에 시행되었다. 그러나 부가가치세법의 시행으로 인해 비자금 마련이 어려워진 대기업들과 박정희 정권의 지지기반인 서민 자영업자들이 등을 돌리게 되었고 결국 이로 인해 1978년 12월 시행된 [[대한민국 제10대 총선|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이 [[신민당 (1967년)|신민당]]과 [[통일당]]을 비롯한 야당에게 참패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기반이 흔들리게 되었다. 일각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붕괴원인을 부가가치세에서 찾기도 한다. 이러한 박정희 정권의 부가가치세 도입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박정희 정부의 결단이 있었기에 한국 정부는 안정적인 세입확보를 할 수 있어 결국 1997년 [[외환위기]] 때도 대응할 수 있는 재정여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코리아 게이트 사건. [[인권문제]]는 박정희 유신정권의 존립을 뒤흔드는 문제였고, 박정희는 권력을 강화하고자 [[미국]]에 대한 로비를 진행했다. 박정희는 기업인 박동선을 시켜 미국 상·하원 의원들에게 로비를 했다. 1977년 10월 15일 [[워싱턴포스트]]는 한국 정부가 [[박동선]]을 내세워 의원들에게 거액의 자금을 제공한 기사를 보도했다. 박동선은 도주했고, 미국 [[의회]]와 [[국무부]]는 박정희에게 박동선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박정희는 1977년 청와대에 도청장치가 발견된 것을 들어, 미국 측이 청와대를 도청한 사실을 문제로 삼아 송환을 거절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회담과 조율을 거쳐 12월 31일 한, 미 양국은 박동선이 미국 정부로부터 전면사면권을 받는 조건으로 증언에 응할 것이라는 합의를 보고, 공동성명을 냈다. 1978년 2월 23일 박동선은 미국으로 건너가 2월 23일과 4월에 미 국무부와 상하원에서 증언을 하기도 했다. 이후 몇명의 [[미국 민주당]]의원 몇 명만 징계를 받고 사건은 종결되었다. 박정희가 미국 정치인을 상대로 로비를 하게 된 배경은 [[지미 카터]]와의 갈등이었다. 박정희의 인권탄압이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와 관련된 한미갈등의 원인이었다. 미국 의회와 행정부 사이에서 한국의 인권문제 때문에 군사원조를 중단해야 하는 사안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일 때도 한국 정부는 인권문제 때문이라는 단서만 빼준다면 더 많은 군사원조 삭감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제시했다. YH 사건과 김영삼 제명파동. [[육영수]]를 피격으로 잃은 직후 박정희는 인의 장막을 쳐놓고 소수의 인사들과만 접촉하였고, 간혹 유흥을 즐겼다. 한편으로는 관제 반미 시위를 암암리에 조장했다는 시각도 있다. 1978년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로 제9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어 5선에 성공했다. 취임선서를 한 때는 12월 27일이었다. 박정희는 그날을 임시공휴일로 하고 통행금지를 하루 해제하며 고궁을 무료로 개방함과 아울러 1302명의 수감자를 가석방하는 등 선심조치를 취했으며 전임 일본 수상 [[기시 노부스케]]가 이끄는 일본인 12인이 방한하였고 글라이스틴 미 대사 등 국내외 3000여 명의 인사가 참석하였다. 1979년 8월 9일 YH 무역회사의 여공들이 [[신민당 (1967년)|신민당]]사를 점거, 농성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8월 10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이 참석한 대책회의에서 강제진압 결정이 났고 박정희가 이를 재가했다. 8월 11일 경찰은 강제로 신민당사에 들어가 여공들을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이 추락해 사망하고, 이에 항의하던 [[신민당 (1967년)|신민당]] 당수 [[김영삼]]은 가택연금, [[고은]] 시인, [[인명진]] 목사 등 7명은 구속되었다. 김영삼은 이 사건과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강도높게 비판했고, 박정희는 이를 계기로 김영삼을 제거하기로 하여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이 발생, 이는 [[부마 항쟁]]의 원인이 되었다. 한편 박정희는 김영삼을 위선자로 보고 경멸하였고 독재정권을 혼내준다며 미국의 세계전략에도 불리한 주한미군 철수 정책을 들고 나온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와도 갈등을 빚었다. 임기 말에는 핵개발 등의 문제와 인권 문제 등으로 미국과 마찰을 빚었으며 인권 외교를 내세운 미국 카터 행정부와의 갈등 등으로 정권의 기반은 더욱 흔들렸다. 박정희는 1979년에 들어와서는 카터와 김영삼에 대한 이런 경멸감을 정책으로 표현하면서 갈등은 심화되었고, 카터의 방한을 앞두고는 통역을 담당할 의전수석 [[최광수]]에게 '인권 좋아하시네'를 영어로 어떻게 통역할지에 대해서 미리 생각을 해두라는 지시를 사전에 내리기도 했다. 미국과의 관계 악화. [[파일:Jimmy Carter April 1980.jpg|섬네일|180px|[[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는 1979년 6월 29일에 성사된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더욱 악화되었는데, 도쿄에서 [[선진 7개국]] 경제정상회담을 마치고 방한한 카터 대통령은 방한 이후 영빈관에 머물러 달라는 박 대통령의 성의를 무시하고 주한 미군 내에 숙소를 정하는 등 노골적으로 박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에 박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45분간 주한미군이 한국의 방위뿐 아니라 동아시아와 자유세계의 방어를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점을 카터 대통령에게 일방적으로 ‘강의’했다. 결국 이로 인해 카터 행정부는 주한 미군의 감축 규모를 3000명가량 감축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박동진 (1922년)|박동진]] 전 외무부 장관은 박 대통령이 카터 대통령의 방한 기간 동안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박정희가 [[김영삼]]을 국회의원에서 제명하고 의원직을 박탈하자 지미 카터는 한국 내에 있던 CIA 요원과 주한미국 대사관 직원 일부를 소환하였다. 박상범 전 청와대 경호실장의 증언에 의하면 박 대통령은 유신 말기에 이르러 개헌을 통한 하야를 고려했다고 한다. 박 전 실장은 "[[남덕우]] 전 국무총리가 회고록에서 1978년 경제특보 재임 당시 '유신 헌법의 대통령 선출방식은 내가 봐도 엉터리야. 그러고서야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겠어.'라며, 개헌 후에 물러나겠다는 박 전 대통령의 육성을 기록한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라는 질문에 '1~2년 뒤에는 내가 하야를 해야 하지 않겠나'하는 말을 사석에서 했던 걸로 기억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유신헌법 개정안 초안 작업을 하던 [[신직수]] 법률특보가 '10·26' 이후 관련 자료를 폐기했다는 증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박 전 대통령은 1~2년 뒤에 하야하려는 생각을 확실하게 갖고 있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시기 박 전대통령은 활동성 간염 진단을 받아 치료를 시작하였다. 미국 하원 청문회 증인이었던 김형욱 전 안기부장의 암살 사건에 실무자였다고 증언하는 비선 공작팀장에게 1979년 초에 술을 직접 따라주었다는 언론 보도도 존재한다. 이 사건 관련 기록도 중앙정보부에는 없으며 이 요원의 상급자도 파리 침투 사실을 몰랐다고 증언한다. 한편 말년까지도 미국의 의구심은 여전했던 듯하다. [[남로당]] 출신 박갑동의 증언에 의하면 국민에게는 독재자 소리를 듣고, 미국한테는 공산주의자로 의심받고, [[북조선]]에게는 친일파로 매도되어 완전히 사면초가에 몰렸다고 하며 조갑제의 주장에 의하면 박정희는 '나라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일해도 국민이 알아주질 않아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였다'고 한다. 사망. 10월 16일부터 부산에서 시작된 [[부산마산 민주항쟁]]은 마산, 창원 등으로 확산되었다. 10월 16일 오전 [[한강]]을 가로지르는 [[성수대교]]의 개통식에 참석하였고, 싱가포르의 [[리콴유]] 수상이 내한하여 정상회담을 갖기도 하였다. 10월 18일 새벽 0시 박정희는 [[부산직할시]]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사태가 악화되자 1979년 10월 20일, 계엄령을 선포하여 [[부마 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게 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오전에는 [[충청남도]] [[당진군|당진]]의 [[삽교천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귀경하였다. 10월 26일 오후 7시경 [[궁정동]] 안가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가수 [[심수봉]], 한양대생 신재순을 불러 연회를 하던 도중 김재규의 총에 저격당하여 김계원 비서실장에 의해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61세로 사망하였다. 일명 [[10.26 사건]]. 최초 정부의 공식 발표 내용에서는 부상당한 박정희를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곧바로 옮겼다고 알려져 왔었으나, 2016년 재미언론인 안치용의 기고에서 공개된 미국무부 해제 비밀문서들에 의하면 처음 김재규가 권총을 발포 한 7시 41분 이후 부상당한 박정희는 9분 뒤 7시 55분 미국의사가 운영하는 병원에 먼저 도착했다고 밝혀졌다. 국군서울지구병원에 근무하던 청와대 의무실장 김병수가 박정희의 총상 입은 사체를 보게 된 것은 사건이 일어나고 2시간이 지나서였다. 사건 이후 [[미국]]의 개입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주장은 김재규가 [[10·26 사건]] 며칠 전에 [[로버트 브루스터]] 미국 CIA 한국지부장을 만난 것이 확인되면서 제기되기 시작했다. 또한 2016년에 김재규가 사건 당일날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니어|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주한미국대사]]를 오후 2시경에 만났었다는 사실이 발견되며 의혹은 더욱 증폭되었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유신 개헌으로 민주주의가 무너졌다. 유신 체제는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다. 나는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고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박정희를 저격했다"고 진술하며,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개입은 부정했다. 그러나 김재규의 증언을 입수한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니어|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쓰레기 같은 소리'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김재규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이 사건을 두고 많은 설이 있었으나, [[부마 항쟁]]을 두고 박정권의 내부에서 김재규가 강경파 [[차지철]]과 정치적 갈등으로 빚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 외에는 박정권의 핵개발과 관련된 것, 그리고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 사건]] 등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된 점 때문에 미국정부가 박정희의 암살을 은밀히 조장했다는 설도 있으나, 근거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박정희는 인권 문제로 미국과 갈등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인권 문제보다 박정희의 핵개발이 미국을 더 자극했다는 주장도 있다. 소설가 [[김진명]]은 이 설을 전체 스토리의 뼈대로 잡고 《[[한반도]]》라는 장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1979년 6월, 지미 카터의 방한 때 같이 왔던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 250명은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한국에 남아 있었다. [[김영삼]]의 제명에 미국은 주한미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니어|글라이스틴]]을 본국으로 소환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미국은 늦어도 1976년부터 한국 권력층과 사회저명인사들을 대상으로 박정희가 없는 한국에 대한 각계의 의견을 듣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는 질문을 받은 사람들이 '미국은 박정희의 통치를 더이상 원치 않는다'라고 느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박정희가 죽었을 때, 한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던 한 일본인 외교관이 자신의 저서에서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고 평하였다. 최규하 추도사. [[최규하]]는 박정희 대통령 국장 당시 추도사를 작성하였다. 암살 배후 의혹. 박정희의 암살 배경에 관해서는 [[미국]]과 CIA가 사주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 현재 미국 등의 개입에 대해 확실하게 입증된 것은 없다. 1979년 10월 [[10.26 사태]]가 있기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미국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하였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하였다. 당시 주한미국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니어|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의혹이 풀리지는 않고 있다. 1979년 10월 26일 사건 당일날 오후 2시경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하기 앞서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니어|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주한미국대사]]를 먼저 만났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김재규와의 마지막 대화가 1979년 9월 26일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혀왔던 글라이스틴 대사의 주장이 거짓으로 밝혀진 것이다. 글라이스틴 대사가 왜 박대통령 암살 당일날 김재규를 만났던 사실을 평생동안 비밀로 해왔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사건 당시 박정희를 청와대 의무실장이 아닌 미국의사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검진했다는 사실을 정부에서 왜 비밀시 했는지도 불확실하다. 김재규는 재판 도중 '내 뒤에는 미국이 있다'는 발언을 했었다. 또한 조사 과정에서 '혹시 미국 측에서 무슨 연락이 없느냐'고 수사관에게 거듭 물었다고 한다. 핵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박정희의 죽음이 [[미국]]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믿고 있다. 지금도 그 때의 일에 대해 입을 열면 미국에게서 무슨 일을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박정희는 미국의 경고에도 1978년 이후로도 계속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고, 미국에 의한 암살 의혹은 계속 증폭되었고, 이는 소설과 희곡 등의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장례식. [[파일:선데이서울 제571호 1.jpg|섬네일|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를 전하는 [[선데이서울]] 표지]] 10월 27일 새벽 [[국무총리]] [[최규하]]는 긴급히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대통령 유고 문제를 물었고 27일 아침에야 박정희가 서거하였다는 사실이 공식 보도되었다. 이후 박정희의 장례식은 9일장으로 결정되었고 [[국장 (장례)|국장]]으로 치러졌다. 국장 장례식은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최규하에 의해 진행되고 11월 3일까지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시신은 석관에 안치되어 운구차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의 육영수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 주요 정책. 경제 정책. 식량자급자족을 위한 식량증산 정책을 추진했고, 벼의 품종을 개량하여 바람에 불면 날아가는 점과 수확량이 낮은 것을 개선케 하여 [[통일벼]] 품종을 선보이기도 했다. 장기불황으로 대학 졸업후 미취직자들의 구제를 위한 국토 건설 개발을 추진하였다. 또한 저소득층 미취직자의 취업과 근로여건 개선을 위한 [[직업훈련원]] 개설을 추진, 지원하였고, 후처 [[육영수]]가 [[정수직업훈련원]]을 설립한 것을 필두로 확산 장려시켰다. 1972년부터는 각 회사의 회장, 사장단에게 회사 내에 야간학교를 설치할 것을 권고하였다. 경제불황이 지속되면서 1972년 8월 3일에는 8.3 조치를 발표하여 각 기업체를 재정지원하고 채무를 탕감해주기도 했다. 1974년 초 [[한일합섬]] 회장 [[김한수]](金翰壽)가 회사 내에 한일여자고등실업학교를 설립했고, 이는 76년 9월 7일 경제 각단체장의 월간경제동향 보고에서 공장새마을운동의 성공한 사례로 보고되었다. 여기에 고무받은 박정희는 국무회의에서 저소득층으로 미취학, 미진학 [[청소년]]들을 위한 [[야학]] 결성을 지시하여, 야학 설립을 추진하고, 각 기업체 회장 등을 면담 설득하여 공장단지 내에 야간학교 설립, 국공립 학교 내 야간반 설립 등을 실시하게 했다. 1977년 7월 22일 정부·여당 연석회의에서 공단에서 일하는 근로자 중 배움에 뜻이 있는 근로자들이 중등학교 졸업장을 취득할 수 있도록 야간학교 개설 방안을 강구하고, 기능직·기술직 근로자를 우대하는 정책을 수립할 것을 지시했다. 부동산 정책. 박정희 정부는 저곡가 정책을 통해 도시화를 진행시키고, 산업 용지를 적극적으로 개발 및 공급하였다. 1960년대의 강남 개발은 이러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963년 지금의 강남 지역이 서울에 편입됐다. 1966년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서울 기본도시계획을 통해 강남권 개발을 추진했다. 1967년 11월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완료됐고 강남 일대 900만 평이 토지계획지구(영동지구)로 지정됐다. 그러나 당시 북한보다 1인당 국민생산이 뒤쳐진 상태여서 개발자금이 부족했고, 정부는 체비지(개발 비용 충당을 위한 판매용 토지) 사업을 통해 자금을 충당했다. 강병기 전 국토계획학회 회장에 따르면, 당시 강남의 사유지 소유자들은 부가가치를 위해 당시 허허벌판이었던 강남 땅에 학교, 공원 등의 시설을 짓고, 그 대금으로 토지를 공공용지로 바쳤다. 이들 중 일부는 체비지로 설정되어 재산가들에게 팔렸고, 이렇게 모인 자금으로 경부고속도로 등 도시기반시설 사업이 진행됐다. 체비지가 매각되지 않으면 개발자금이 모이지 않고 개발이 진행되지 않기에, 정부는 적극적으로 체비지 매각에 힘썼다. 그 결과 경부고속도로로 수용된 토지를 중심으로 집값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말을 먹이고 쉬어가던 거리라는 뜻의 말죽거리가 그 대명사다. 1966년 초 평당 200원에 불과했던 말죽거리의 가격은 순식간에 2~3천원으로 수직상승했고, 68년 말에는 평당 6천 원에 이르렀다. 체비지를 구입한 재산가들과 원래 사유지 소유자들의 재산은 순식간에 불어났다. 이것이 제 1차 부동산 투기 붐이다. 이렇게 부동산 붐이 조성되자 정부는 1967년 11월 29일 <부동산투기억제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했다. 이를 통해 서울, 부산 및 그 인접 지역의 토지에 한하여 토지양도 및 보유로 인해 발생하는 소득의 50%를 과세하며, 공지로서 2년 이상 방치하면 과세 대상이 되도록 했다. 건물이 정착된 토지 면적이 건축물 면적의 10배를 넘는 경우에도 과세 대상이 됐다. 그러나 이런 높은 과세에도 불구하고 땅값이 몇 배로 오르는 부동산 붐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박정희 정부는 강남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1973년 영동지구를 개발촉진지구로 지정했다. 이 과정인 72년에 제정된 <특별지구 개발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따르면, 개발촉진지구에 땅을 구입해 주택 등을 지으면 이후 부동산 판매시 1967년에 제정한 투기억제세를 면제해 주었으며, 기타 재산세, 면허세, 도시계획세 등을 면제해 줬다. 강북 지역의 신규 유흥 시설 등의 설립을 금지하는 반면, 영동지구에는 허용했다. 당시 인구 희소지역이었던 강남을 관통하는 지하철 2호선을 개통하였고, 경기고, 경기여고, 휘문고, 서울고 등 전통의 명문 고등학교를 강남 지역으로 옮겼다. 1976년에는 고속버스터미널을 강남으로 이전했다. 또한 1974년에는 330만 평 부지에 25만 인구를 수용한다는 잠실 뉴타운 계획을 수립했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 1973년 5만 명에 불과했던 영동지구의 인구는 1978년 21만 명으로 급성장할 수 있었다. 강남구 학동(현 논현동)의 경우, 1970년 평당 2천 원에 불과했던 지가가 1~2년 사이에 10배가 뛰었다. 1974년에는 8만원까지 뛰었고, 이는 3년 만에 다시 두 배가 됐다. 79년에는 평당 40만원에 이르게 된다. 1963~1979년 동안 압구정동의 지가는 875배, 신사동의 지가는 1000배 상승했다. 부동산 규제책이 있었지만 시장의 움직임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이러한 경향을 막기 위해 <8.8 부동산 투기억제와 지가 안정을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이 대책은 “부동산투기를 효율적으로 규제하고 장기적으로 지가의 안정을 도모하여 토지이용의 적정화를 기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는 토지거래에 대한 허가 및 신고제의 도입, 기준지가 고사, 부동산소개업 허가제, 양도 소득세 강화, 토지개발공사 설립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러한 강력한 규제 정책 덕분에 78년 135%에 달하던 서울의 지가변동률은 1979~1982년 동안 3~13%로 진정됐다. 70년대 말의 오일쇼크로 인한 경기침체 역시 지가 하락에 기여했다. 외교관계. [[파일:Bundesarchiv B 145 Bild-F019521-0007, Berlin, Staatsbesuch Präsident von Süd-Korea.jpg|섬네일|280px|박정희 대통령과 [[빌리 브란트|브란트]] [[서베를린]] 시장]] 통일관. 박정희의 통일관은 선(先) 개발 후(後) 통일이었다. 경제개발을 통해 국력을 신장시켜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선점한 뒤 통일하자는 것이었다. [[조갑제]]에 의하면 '박정희는 집권 3년째인 1963년에 쓴 저서『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피력한 조국 근대화란 목표와 자조→자립→자주→통일의 단계적 방법론을 죽을 때까지 견지하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닉슨 독트린]] 정책으로 [[베트남 전쟁]]의 포기와 [[중화인민공화국]](중공)과의 관계개선, [[주한 미군]]의 부분적 철수및 동아시아에서 냉전기류의 해체경향의 영향을 받아 남북간의 관계를 모색하고 경제적 현실을 고려하여 '선건설 후통일' 정책에서 [[평화통일 3원칙]]을 통해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고, 남북간 경직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선평화 후통일' 정책으로 바꾸어 현재까지 통일정책의 기본원칙이 되고 있다. [[7·4 남북 공동 성명]] 남북 간 합의문서를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내외적인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곧 박정희 정부는 [[10월 유신]]을 선포하여 장기 집권을 꾀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주체사상]] 헌법을 개정하여 유일 지도 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자주국방. 1970년대부터 [[닉슨 독트린]]으로 인한 [[주한 미군의 철수]],중국의 유엔가입 등으로 국제정세가 한국에게 불리하게 조성되었고,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한층 강화되었다. 이 시기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 목표는 유사시 북한이 단독으로 벌인전면적 도발만큼은 미군의 도움없이 독자적 방위능력을 갖추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이를 위한 실천노력으로, 첫째 독자적인 무기체계 개발에 따른 방위산업육성, 둘째 독자적인 전략과 전술개발에 따른 한반도 작전계획 수립,셋째 군사제도의 개혁이었다. 이처럼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사상은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따른 한국의 올바른 행동이 무엇인지 제시하였다. 핵개발 추진. 박정희 정부가 핵무기 개발 계획을 처음으로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닉슨 미 대통령이 1969년에 [[닉슨 독트린|괌(Guam) 독트린]]을 선언하고 1년 뒤인 1970년 7월 초 로저스 미 국무장관이 한국정부에 주한미군 2만 명의 철수를 통고한 직후였다. 예정대로 미국은 1971년 3월 주한미군 7사단을 철수시켰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미국의 일방적인 주한미군 철수결정에 대해 심한 배신감을 느낀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부터 그는 자주국방정책의 일환으로 극비리에 핵무기 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박정희 정부의 핵개발 계획은 1971년에 설립된 청와대 제2경제수석실이 총괄하고 국방과학연구소와 무기개발위원회에서 실제적인 개발을 담당하였다. 1970년 당시의 박정희는 한국의 [[군수]] 산업 발전에 몰두했다. 1970년 [[무기개발위원회]](WEC)를 창설했다. 박정희가 1970년에 창설한 [[무기개발위원회]](WEC)는 70년대 초반에 만장일치로 핵무기 개발을 결정하고 박정희에게 진언했다. 박정희는 1971년 말이나 72년 초에 그 권고를 실행에 옮기는 것을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1970년초 닉슨 대통령은 [[데탕트]]를 추진, 1972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광둥성]]을 방문하여 냉전 화해모드를 조성했다. 동시에 아시아 문제에 대한 군사개입을 철회할 것을 주장하여 각국의 반발을 샀는데, 박정희 정부는 핵개발의 정당화를 북한의 침략 위협으로 고정하였다. 1975년 [[베트남 공화국]]이 멸망의 길을 걷자 박정희는 자신의 핵 개발의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박정희는 1973년 11월 24일 [[한국]]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월성 1호]]기 건설계획을 확정짓고 사흘 뒤인 11월 27일 [[원자로]] 구매의 향서를 [[캐나다]]에 발송했다. 그가 캐나다에서 도입하려는 캔두형 원자로는 플루토늄 추출이 용이한 중수로이다. 중수로에서 타고 남은 핵연료를 재처리시설에서 재처리하면 핵폭탄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다. 박정희가 프랑스에서는 재처리시설을, 캐나다에서는 중수형 원자로를 도입하려 한 것은 플루토늄의 군사적 이용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비밀 플루토늄 도입 기도. 박정희 정부가 [[캐나다]]로부터 중수로와 함께 순도 높은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3만kW짜리 연구용 원자로(NRX)를 도입하려고 하였으나, 플루토늄의 군사적 이용을 우려한 미국의 반대로 연구용 원자로 도입은 실패했다. 75년 3월 미국은 직접 개입하여, 한국정부에 대해서 핵개발 계획을 중지하도록 강요했다. 키신저는 박정희에게 핵무기 개발을 고집한다면 [[미국]]은 [[한국]]에 대한 안보지원을 중지한다고 하였다. 이후 박정희는 비밀리에 [[스웨덴]], [[프랑스]], [[캐나다]]로부터 [[플루토늄]] 중수로 도입을 추진했다. [[닉슨독트린]] 이후 주한미군 제7보병사단을 한국에서 철수한다고 발표한 것에 대응한 결정이다. 한국에는 미국의 제2보병사단이 주둔하고 600에서 700개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핵개발 결정은 내려졌다. 뒤이어 대통령에 취임한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 역시 아시아 문제 불개입과 미군 감축, 철수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박정희의 핵 개발 첩보가 [[CIA]]를 통해 미국 내에 전해지면서 미국에서는 [[한반도]]의 상공[[위성사진]] 촬영 등을 시도했고, 핵시설을 찾아내지 못한 미국은 박정희에게 핵개발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고 계속 핵개발을 시도할 경우 [[미군]] 철수를 시사하며 강경하게 맞대응했다. 카터 정권 아래서도 미국과 [[한국]]은 핵무기 문제에 관한 갈등을 빚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카터가 제창한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뒤집어엎기 위한 캠페인의 일환으로 만약 미국이 계획대로 철수하면 한국은 핵개발로 나아간다는 것이 한국정부의 입장이었고, 박정희는 핵개발을 추진하던 것이다. 미국은 [[인도]]가 1974년에 핵무기 실험에 성공한 것을 계기로 해서 한국의 핵무장 계획을 경계하게 되었다. 1978년 11월 4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1974년 인도정부의 충격적인 핵폭발 실험을 계기로 여타 국가들의 핵무기 개발계획을 탐지해내기 위해 특별정보반을 설치했다"고 한다. 이 특별 정보반의 운영과정에서 한국이 핵무기 개발 계획을 비밀리에 추친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한국이 프랑스에서 재처리시설을 구입하려는 교섭은 1972년부터 계속되었다. 미국과의 갈등. 1975년 [[가을]]과 [[겨울]]에 걸쳐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필립 하비브]]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함병춘]] 주미한국대사에게 한국이 [[프랑스]]와 체결한 핵무기 관련 계약을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박정희에게 보고되었고, 박정희 정부는 물론 거절했다. 미국은 계약을 취소할 경우, 한미과학기술협정의 체결을 통한 [[미국]]의 추가 기술 제공 등 여러 가지 대가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했지만, 그것 역시 소용이 없었다. [[제럴드 포드|포드]] 행정부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기로 하고 하비브와 [[리처드 스나이더]]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박정희에게 만약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계속 진행할 경우 전반적인 한·미 안보관계에 심각한 훼손을 초래할 것이라는 일종의 최후통첩을 보내는 것이었다. 결국 박정희는 1975년 8월 25일부터 8월 28일까지 미 국방장관 [[슐레진저]]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핵무기 포기 각서를 써주었다. 1975년 박정희는 공식적으로 핵개발 추진 포기를 선언하였으나, 비밀리에 [[프랑스]]와 [[스웨덴]]으로부터 [[플루토늄]] 구매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압력으로 프랑스는 1975년 말에 재처리시설 계약 취소를 요구하였다. 1976년 6월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 국방부|미국 국방장관]]도 한국 국방장관에게 만일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계속 고집한다면, 미국은 안보와 경제협력관계들을 포함한 한미관계 전반에 대해 재검토할 것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위협했다. 미국의 강력하고도 끈질긴 반대와 위협에 직면한 박정희는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는 프랑스와 체결한 [[플루토늄]] 수입과 원자로 도입계약을 취소했다. 박정희는 프랑스와 맺은 계약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76년 1월 23일 계약은 취소되었다. 1977년 1월 28일 박정희는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 또한 핵무기개발을 통한 자주국방의 조속한 달성으로 대한민국을 진정한 의미의 주권국가로 당당하게 일어서게 만들겠다는 박정희의 웅대한 꿈과 그것의 실현을 위한 집요한 집념,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방안이 현실적으로 포기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78년에는 미국이 대한민국 청와대를 도청하다가 박정희 측에 의해 발각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 와중에 [[대한민국]] 국내에 체류중이던 학자가 갑자기 실종, 공황상태가 되어 미국에서 발견되었고, 다른 물리학자인 [[김희규]], [[진영선]] 등이 연이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핵개발에 관련된 의혹을 증폭시켰다. 박정희의 독자적 핵무기 개발은 70년대 말 [[한미 관계]]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 점에서 박정희는 분명히 반미적이었다. 하지만 70년대 말 주한미군 철수와 핵무기 개발을 둘러싼 논쟁은 미국측의 철군 주장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된 자주 국방이 나중에 [[민족 자주]]권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핵무기 개발로 표현되는 박정희의 반미는 지미 카터의 인권 정책과 철군 정책에 쐐기를 박기 위한 대응 수단이었다. 박정희와 미국의 갈등에서 비롯되는 박정희의 [[반미|반미주의]]는 박정희 정권을 지지해주지 않는 미국에 대한 반발이었을 뿐이 라는 의견도 있다. 박정희의 핵무기 개발 역시 그의 [[자주국방]]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써 미국의 정책 전환을 이끌어내서 자신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강화하려는 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미국의 압력으로 핵개발 포기 선언을 하였지만 이후에도 박정희 정부는 집요하게 핵개발을 추진하였다. 박정희 정부 당국자들이 핵개발을 위해서 비밀리에 캐나다로부터 9백 메가와트급 캔두형 중수로 4기를 신설하기로 하였다. 이 계획은 한국과 캐나다가 합작해서 9백 메가 와트급 원자로 4기를 짓는다는 뜻에서 KC-49 사업으로 불렸다. 이후에도 박정희는 비밀리에 핵개발을 추진했고, 1979년 2월 박정희는 1979년 현재 핵개발이 88% 이상 완성되었다며 1983년에는 핵 미사일의 완성이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보았으나 그는 그해 10월에 암살당하였다. 베트남 전쟁 파병. 한편 그가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하여 벌어들인 돈이 1970년대의 경제 개발의 배경이 됐다는 견해도 있다. 그에 의하면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케네디]] 대통령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한국 정부가 베트남 파병을 3200명으로 확대하면서 이에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하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여 베트남전 파병이 이루어졌다. 이후 1964년부터 파견된 [[베트남전쟁]] 파병으로 향후 한국경제 발전의 원동력에 가속화가 되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기간에 파병 국군장병이 해외근무 수당으로 벌어들인 수입은 총 2억 3556만 달러였다. 이 중 82.8%에 달하는 1억 9511만 달러가 국내로 송금되었고, 이 돈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에 기여되었다. 전쟁에 조달할 군수물자 납품과 용역사업 투입 등으로 한국 기업들은 베트남전 특수(特需)를 톡톡히 누렸다. 국군의 파병 대가로 들어온 외화 송금에 힘입어 당시 내수산업과 수출이 성장하여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전투병 파병 직전인 1964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03달러에서 한국군 철수가 끝난 1974년엔 5배가 넘는 541달러로 국민 소득을 향상시켰다. 베트남 파병은 한국 경제의 활로를 트고 군을 현대화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베트남 파병이 국군의 목숨을 담보로 한 미국의 용병일 뿐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사상과 신념. 종교적 편력. 국가기록원의 박정희의 공식 종교는 [[불교]]이다. 하지만 일부에선 주장하기를, 박정희는 [[종교]]가 없으며, 외부에 불교로 알려진 것은 불교신도인 부인 육영수 여사의 영향을 받아 친불교 행보를 보여서라는 주장도 있다. 1970년대에 일부 [[기독교]] 교회가 반정부 투쟁에 앞장서자 박정희는 서구적인 가치관을 추종하는 풍조를 지적, [[기독교]]계를 비판하며 '국적 있는 종교'로서의 신라 불교 정신을 여러 번 강조했다. 이 때문에 박정희를 불교 신도로 생각한 사람도 많았다. 1974년 12월 11일 박정희는 청와대 참모들 앞에서 천주교계에 대해서 불평을 털어놓은 뒤에 "교회에서 정치에 간섭하면 우리도 교회에 간섭할까?"라는 농담을 했다.([[민청학련 사건]]으로 [[지학순]] 주교가 구속된 계기로 천주교 사제들이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된 후 신부들을 연행과 구속이 되는 일이 있었다.) 1972년 지폐 도안을 놓고 [[기독교]] 등 종교계와 갈등하기도 했다. 만원권 지폐가 처음 도안됐는데 [[한국은행]]에서는 만원의 주인공으로 [[석굴암]]의 불상(앞면), 뒷면이 [[불국사]]로 정하였고, 박정희의 친필 서명까지 하였다. 새로 발행된 만원은 그의 재가를 얻어 발행공고까지 냈다. 그러나 기독교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이에 만원권의 주인공은 [[세종대왕]]으로 교체되었다. 남조선로동당 활동. 광복 직후 [[남조선로동당]]에서 활동하면서 [[여수·순천 사건]]에 연루되어 일시적으로 직급을 박탈당하였다가 복귀하였고 그 뒤 사상 전향을 하였다고 하나 진실된 전향이었는지에 대해 정치계로부터 평생 의심을 받았다. 1946년 [[10.1 대구 사건]]때 형 [[박상희 (1905년)|박상희]]의 죽음을 계기로 남로당에 가입했다는 견해와 박상희의 죽음 이전에 자발적으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는 견해로 나뉘어 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미국]]은 박정희의 남로당 행적에 관하여 그의 사상을 의심하였으며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제5대]],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윤보선]]에게 사상공세를 당했다. 목사 [[강원룡]]의 증언에 의하면 정변 직후 박정희의 군사 혁명을 이데올로기로서 좌익이라고 본 사람은 거의 없었고 군인들이 일으킨 혁명인 데다, 6개 혁명공약의 제1항에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이라고 못박았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차츰 그의 과거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언론에 보도됐고 [[윤보선]]이 선거에서 이 점을 본격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라고 한다. 당시 5·16 정변이 일어날 무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군사·경제적으로 상당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소련, 중공과 군사동맹도 맺고 있었고, [[4·19 혁명]]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남조선 인민들이 봉기했으니 우리가 도와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기에 공산주의라고 하면 다들 무척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들어 박정희의 좌익 전력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고 보았다.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들을 진두지휘하여 [[여수·순천 사건]](1947~48년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침투사건)을 감행했다는 주장이 존재하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 사건은 제14여대의 [[홍순석 (군인)|홍순석]], [[김지회]], [[지창수 (군인)|지창수]]가 [[제주 4.3 사건|제주도 진압 명령]]을 반대하며 남로당의 지령도 없이 우발적으로 일으켰던 반란이다. 박정희는 사건 당시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현재 [[여수시]]에서는 1948년 사건들이 공통적으로 남북협상의 실패와 함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는 점, [[이승만]]과 [[김성수 (언론인)|김성수]] 타도라는 같은 목적을 가졌던 점, 그리고 공산당원이 아니었던 [[흥사단]] 출신의 [[최능진]], 백범 [[김구]], [[김규식]], [[서세충]], [[오동기]] 같은 독립운동가 출신들이 사건의 주종자들이었다는 점 등을 감안하여 좌파정권의 수립을 목표로 하는 [[공산주의]] 반란이였다기 보다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단독 정부 추진을 반대하는 투쟁, 즉 [[신탁통치 반대 운동]]의 연장선에 더 가까웠다고 결론 짓는다. 1948년 UN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결정하기 위하여 1월 9일 처음으로 서울에 입국한 이후 다음달인 2월 7일 [[2.7 사건]]에서부터 시작해 4월 3일 일어난 [[제주 4.3 사건]], 4월 19일 결성되었던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 연석회의]], 10월 1일 [[혁명의용군 사건]], 그리고 10월 19일 일어난 [[여수·순천 사건]]까지 모두 1948년 한 해에 남한 전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이다. 사후 영향력. 박정희 정권 때 산업화 노력에 주력한 세대는 [[대한민국]]의 '산업화세대'로 불리기도 한다. 박정희 정권을 '개발독재'라는 표현도 쓰이고 있다. 국가주도의 산업화 과정에서 한국 사회에 [[대한민국의 재벌|재벌 계층]]이 등장했으며, [[IMF 구제금융사건]]이후 재벌, 관치금융, 정경유착에 대한 비판이 등장했다. [[한일회담]]의 과거사문제 등으로 이후에도 한일 외교관계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그린벨트]] 정비와 [[새마을운동]] 정책으로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인구집중을 방지하는 한편 환경보전에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이후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개발제한구역 제도개선방안'이라는 명칭으로 [[그린벨트]]가 훼손되기 시작하였고, 그 이후 시민의 권익증진을 우선하는 정책이 경쟁적으로 나오면서 환경보전 정책은 더욱 후퇴되었고 무분별한 개발로 농촌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국무총리]]로 재임 중이었던 [[최규하]]는 박정희 사후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로 [[서울의 봄]]을 맞이하였으나, 육군 소장인 [[전두환]]이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고 집권 후에는 박정희와 차별을 두었다. 전두환은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헌법에서 소위 "5·16 혁명정신"에 관련된 사항을 삭제하였으며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폐지하고 [[하나회]] 계열에 부정적인 공화당 실세들을 권력형 비리 혐의와 연관하여 제거하였고, 박정희의 시대를 부정과 부패, 비리의 시대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정의사회 구현을 추구한다고 선언하였다. 1972년, [[여의도]]에 조성한 5·16 광장의 명칭을 여의도 광장(지금의 [[여의도 공원]])으로 바꾼 것 또한 이 때의 일이다. 백지계획은 [[10·26사태]]로 백지화되었으며, [[전두환 정부]]는 '핵개발 포기선언', [[노태우 정부]]는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했다. 월남전 파병에 대한 논란이 있다. 한국군 현대화의 긍정적 평가도 있는 반면 미국의 패배로 끝난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을 파병하여 ‘경제개발을 대가로 피를 헐값에 팔아 넘겼다’는 비판도 있다. 구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출신 중 일부는 부정축재혐의로 제거되었으나, 일부 정치금지법에 제한되지 않은 구 [[민주공화당 (대한민국)|공화당]]과 [[유정회]] 인사들은 1981년 1월 [[한국국민당 (1981년)|한국국민당]]을 창당하여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을 정치적 유산으로 삼아 명맥을 이어갔다. 원내 제1당을 목표로 한 [[한국국민당 (1981년)|국민당]]은 몰락했으나 1987년 전두환 정권에 반발하여 [[6월 항쟁]]이 일어난 후,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의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다시 실시되었고, 전두환 정권에 의해 정치활동금지법에 묶였던 일부 공화당계 인사들이 풀려나면서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을 중심으로 다시 결집하였으나 [[198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했다.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으로 탄생되었으나, 당내의 [[통일민주당]]의 [[김영삼]]계 정치인들과의 갈등으로 탈당한 인사들은, 또 다시 공화계 주축으로 독립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다. 이후 [[자유민주연합]]은‘[[DJP연합]]’으로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켰으나, 2006년 [[자유민주연합]]은 해체되고 일부는 [[대한민국의 보수정당|한나라당]]에 흡수되었다. 박정희의 친딸인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 역시 박정희 사후 [[육영재단]]과 [[정수장학회]] 등을 운영하다가 1998년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하여, 한나라당의 유력 대선후보로서 정치계의 주목받는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후 친[[이명박]]계와의 갈등으로 이후 [[친박연대]]를 창당한 인사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후 2012년 12월 19일 실시된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51.6%의 득표율로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부녀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한편 박정희의 셋째 딸인 [[박근령]] 역시 1997년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2008년부터 한나라당 충북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는 등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새로 창립된 [[민주공화당 (대한민국, 1997년)|민주공화당]]의 총재 [[허경영]]은 자신이 박정희의 비밀 정책보좌관이었다고 주장하며 '제2의 박정희'를 자칭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직선거법위반,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되어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지난 2009년 7월 출소했다. 2007년,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17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학기술입국을 과학기술강국의 시대로 이끌어내겠다"는 발언을 하였는데 이외에도 "박 전 대통령이 독재하고 억압했지만 미래 먹거리와 관련해 고민했던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박 전 대통령이 씨뿌리고 가꾼 것을 토대로 다음 단계로 도약해야 한다"는 발언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 지지자들에게 자신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였다. [[노무현 정부]]는 지방분권정책을 추진하면서 [[신행정수도]] 이전을 강조하였는데 이와 관련해 2005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70년대 후반에 박 대통령이 계획하고 입안했던 것을 이제와서 실천하고 있는 것”이라며 “적어도 행정도시에 관한 한 박정희 정부의 업적을 제가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느낌이 좀 묘하다”고 발언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이 발표한 '[[세종시]] 수정안'을 둘러싸고 한나라당의 친이계와 친박계가 충돌했다. 친이계와 김영삼은 연일 영남[[지역주의]]와 박정희 집권기를 비판하며 친박계를 공격했고, 대구경북을 비롯한 한나라당 지역 정치권과 친박계는 반발했다. 박근혜가 세종시 원안 고수를 강력히 주창하는 데는 행정수도 이전과 지역균형 발전이라는 ‘선친의 유훈(遺訓)’의 영향이 있을 것이며, 세종시 문제는 이명박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충돌이라는 평가도 있다. 평가 및 논란. 박정희의 대통령 직무 수행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장면 내각이 수립한 국가 주도 핵심 공업 개발을 골자로 하는 '불균형 개발 모델-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제2공화국과 울프 박사의 합작인 [[5개년 계획|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미국이 주문한 환율 현실화 및 노동집약형 수출 경공업 개발을 비교적 충실하게 따랐다는 평가와 무리하고 비효율적인 중공업 중복 투자 및 지나친 관치 경제로 인한 금융 시장의 부실화로 한국의 경제발전을 늦추었다는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이외에도 [[새마을 운동]]을 통해 농촌 발전에 성공했다는 긍정적 평가와 군정 시절 이래로 중농 정책, 통일벼 보급, 새마을 운동에도 불구하고 농촌과 농가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고 있으며, 그린벨트 규제에도 불구하고 수도권 과밀을 예방하지 못했다는 부정적 평가, 의료보험 제도가 오늘날 한국 의료보험의 토대가 된 전두환 정부의 의료보험만 못하다는 부정적 평가, 개발 위주의 획일화된 정책이라는 부정적 평가 등이 뒤따르고 있다. 다만,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에서 꾸준히 실시되었던 사방 사업, 조림 사업, 산림 복원 사업 등에 관하여는 호평이 더 많은 편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존경하는 대통령을 비롯한 대통령 선호도와 공적 부문 등에서 최상위 평가를 받아오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5.16 군사 정변]], [[10월 유신]]을 통한 헌정 파괴, 노동 운동 및 야당 탄압, 군사 독재 등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한일협정]]을 강행한 것과 [[베트남 전쟁]] 파병에 대한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 핵무기 개발, 행정 수도 이전을 추진하기도 했다. 또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영향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다소 낮아져 [[노무현]]이나 [[문재인]]이 1위를 차지하고 박정희는 2위로 하락하였다. 박정희의 작품. 서적. 박정희가 저술한 저서 편집본 가계. 직계도. 1세 [[박언성]](朴彦成) 2세 [[박인황]](朴仁晃) 3세 [[박 억]](朴 憶) 4세 박연정(朴連正) 5세 [[박지순]](朴之順) 6세 [[박수화]](朴秀華) 7세 [[박 섬]](朴 暹) 8세 박윤정(朴允晶) 9세 [[박 돈]](朴 暾) 10세 [[박사겸]](朴思謙) 11세 [[박원후]](朴原厚) 12세 [[박 지]](朴 持) 13세 [[박효림]](朴孝林) 14세 [[박숙동]](朴叔童) 15세 [[박망달]](朴望達) 16세 [[박효통]](朴孝通) 17세 [[박 린]](朴 麟) 19세 [[박안인]](朴安仁) 20세 [[박문달]](朴文達) 21세 [[박수해]](朴壽海) 22세 박이순(朴以順) 23세 [[박명흥]](朴命興) 24세 [[박세형]](朴世衡) 25세 박영환(朴英煥) 26세 [[박이찬]](朴履贊) 27세 박영규(朴永奎) 28세 [[박성빈 (조선)|박성빈]](朴成彬) 29세 박정희(朴正熙) 문화에 나타난 박정희. 영화. 괄호 안은 박정희를 연기한 배우이다. 외부 링크. [[분류:박정희| ]] [[분류:1917년 출생]] [[분류:1979년 사망]] [[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 [[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 [[분류: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후보]] [[분류: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후보]] [[분류: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후보]] [[분류:대한민국 제8대 대통령 후보]] [[분류:대한민국 제9대 대통령 후보]] [[분류:대한민국 육군 대장]] [[분류:대한민국의 반란자]] [[분류:5·16 군사 정변 관련자]] [[분류:쿠데타로 집권한 지도자]] [[분류:친위 쿠데타를 한 지도자]] [[분류:일제강점기의 교육인]] [[분류:일제강점기의 교사]] [[분류:관동군 관련자]] [[분류:만주국의 군인]] [[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 [[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관련자]] [[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 [[분류:구미시 출신]] [[분류:고령 박씨]] [[분류:대구사범학교 (1923년) 동문]] [[분류:구미초등학교 (경북) 동문]] [[분류:일본 육군사관학교 동문]] [[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 [[분류:조선경비보병학교 동문]] [[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 [[분류:미국 육군포병학교 동문]] [[분류:육군대학교 동문]] [[분류:경북대학교 동문]] [[분류:대한민국 제2공화국]] [[분류:대한민국 제3공화국]] [[분류:대한민국 제4공화국]] [[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분류:화기에 죽은 사람]] [[분류:암살된 정부수반]] [[분류:암살된 국가원수]] [[분류:대한민국의 암살된 정치인]] [[분류:암살된 정치인]] [[분류:암살 미수 생존자]] [[분류:박근혜]] [[분류:박성빈 가]] [[분류: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분류:대한민국의 극우 정치]] [[분류:만주국의 한국인]] [[분류:1979년 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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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
고건(髙建, 1938년 1월 2일 ~ )은 대한민국의 고위정치인이다. 제35대 국무총리로 재임하였다. 생애. 출생과 가계. 고건은 1938년 1월 2일, 서울에서 아버지 고형곤과 어머니 장정자 사이에서 3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지는 전라북도 군산이며, 본관은 제주이다. 아버지 고형곤은 학술원 회원을 역임한 철학자로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 당시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한 탓에 내사와 탄압을 받기도 했다. 큰형 고석윤은 행시와 사시에 모두 합격했고 이후 상공부 상역국장을 지내다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던 아버지가 검찰의 내사를 받자 공직을 사퇴한 후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작은 형 고경윤은 일찍 사망했다. 학창 시절 서울에서 거주하였으며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진학했다. 공무원 활동. 1959년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지냈으며, 졸업 후 1961년 제13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였다. 고시에 합격한 아들에게 아버지 고형곤은 공무원으로 지켜야 할 3계명을 줬다. "줄서지 마라, 돈받지 마라, 술 잘 먹는다는 소문을 내지 마라."이다. 후일 고건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버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술은 어쩔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지방행정사무관에 임용된 뒤 1962년 내무부 수습사무관, 이후 여러 보직을 거쳐 1965년 내무부 행정과 기획계장, 1968년 서기관으로 승진, 전라북도청 식산국장과 내무국장을 거쳐, 1971년부터 1973년까지 내무부 지방국 지역개발담당관, 새마을담당관 등을 지냈다. 행정관리관으로 승진, 1973년 강원도 부지사, 내무부 지방국장, 1975년 전남지사를 거쳐 1979년 대통령 정무제2수석비서관, 정무수석비서관을 지냈다. 1980년 국토개발연구원 고문에 선임되었으나, 1980년 5월 17일 신군부가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내리자 5.17을 군정으로 간주하고, 군정하에서 일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해 사표를 냈다. 정치 활동과 제30대 국무총리. 1980년 9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 고건은 교통부 장관과 이듬해 농수산부 장관을 지내고, 미국으로 유학,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교 객원연구원으로 있다가 이듬해 1984년 미국 M.I.T. 국제문제연구소 객원교수로 임명되었으나 곧 귀국한다. 1985년 민주정의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으며, 민정당 지방자치제특별위원회 위원장, 1987년 민주정의당 전북도 지부장,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내무부 장관에서 하야한 뒤 서울 종로에 사무실을 하나 열고 칩거하던 중 1988년 민정당 군산지구당 위원장, 민정당 전라북도 지부장에 임명되고,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서울시 관선 시장을 지내고 뒤이어 1991년부터 공동체의식개혁국민협의회 공동대표와 명지대학교 총장직에 있다가 1995년 한국그린크로스 공동의장, 1996년부터 1997년까지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를 거쳐, 문민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냈다. 1998년 3월 3일 퇴임 다음날 대통령 취임일 각료제청권을 재청하고 물러나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는 김종필 총리 서리가 인준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해 6월 새정치국민회의 공천으로 서울시장 선거에 당선되어 4년간 시정을 이끌었다. 1998년 4월 그는 명지대학교 석좌교수에 특별 임용되었다. 제35대 국무총리. 고건은 2001년 한국상하수도협회 초대회장, 2002년 국제투명성기구 대한민국지부 회장에 선출되었다. 2003년 다시 입각제의를 받고 입각, 고건은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첫 국무총리로 임명되어 직무를 수행하던 중 2004년 3월 12일 대한민국 국회가 193대 2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의결하여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면서 헌법에 의거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했다. 대통령 권한대행. 고건이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게 되자 외신, 특히 미국계 외신은 특별한 기대와 관심을 보여왔다. 미국 AP통신은 12일(현지시간) 고 총리가 과거 군사정권과 김영삼, 김대중 정부에서도 활동했던 인물이라면서 보수와 진보 성향의 정권 모두로부터 신뢰를 받아왔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한국에서 국무총리는 통상 의전적인 역할만을 맡아왔지만 고총리가 정치적 격변기를 맞아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큰 고비에 직면했다면서 탄핵안을 주도한 야당조차도 "고총리가 있기 때문에 국정 운영이 안정적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고 총리가 지난 97~98년 외환위기 당시 총리를 지냈던 경험을 살려 헌법재판소가 탄핵심판 결정을 내리기까지 임시 수반으로서의 역할을 해낼 것이라면서 정치 분석가들은 고총리의 풍부한 행정 경험, 격동의 시기에 안정적인 스타일의 리더쉽을 발휘해온 점을 평가하고 있다 고 발표했다. 영국 BBC는 고 총리를 한국의 안정적인 리더(South Korea"s "steady" leader)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비교적 자세히 논평을 실었다. 요지는 세 번의 장관, 두 번의 서울 시장에 이어 국무총리도 두 번째로 역임하는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정국을 안정시키고 원활히 돌아가도록 하는 역할을 잘 해 온 인물이었다는 것. BBC 역시 고 총리를 "미스터 안정(Mr.stability)" "행정의 달인(Master Administrator)"으로 지칭했다. BBC는 고 총리가 핵심 요직에 있을 때마다 나라를 뒤흔들 만한 대형 사건이 많았다면서 그가 특히 보수파들에게 어필하면서 노대통령을 잘 보좌해 왔다고 평가했다. BBC는 대미관계에 있어 비굴한 아부는 하지 않겠다며 대선 당시부터 마찰을 빚어왔던 노대통령과 달리 고 총리는 미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 신중한 태도를 보여 왔다는 점을 강조했다. 미국 언론의 관심 이후 외신들의 특별한 관심 속에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했다. 고건은 2개월 동안 이라크 파병문제나 경제문제, 특히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의 공정한 관리라는 역할을 무리 없이 수행했다는 평을 받는다. 노무현 대통령이 직무에 복귀한 후 자동으로 대통령의 권한대행을 종료하고 5월 24일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노무현 대통령과 대립. 노무현의 대통령 탄핵기간 중 고건은 민심과 여의도 국회의 분노를 수습하는 등 무난한 수습 노력을 보였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대통령직에 복귀한 노무현은 그를 총리로 기용한 것은 인사실패라고 비판하여 설전을 벌였다. 2006년 12월 15일 광주 전남방문에서 그는 "정부가 할 일은 안 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면서 남의 탓만 하고 있다"든가 "임기를 못 채울 수도 있다는 무책임한 충격 발언으로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며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비판했다. 노무현은 12월 21일 민주평통 상임위원회 에서 고 전 총리 기용에 대해 "중간에 선 사람이 양쪽을 끌어 당기질 못하고 스스로 고립되는 그런 결과가 되기도 했다"며 " 하여튼 실패한 인사다. 결과적으로 실패해 버린 인사다"라고 말했다. 이어 "오히려 나와 정부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 왕따가 됐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인사였다" 고 하여 노무현은 고건의 기용을 인사 실패라고 규정했다. 고건 측에서는 '평가는 국민의 몫'이라고 즉각 반박했다. 고건의 한 측근은 그 날 "(그가) 사상 초유의 탄핵사태를 맞아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로서 위기를 원만하게 수습한 고 전총리에 대한 평가는 국민의 몫이다"라고 말했다. 인사실패 발언이 일파만파로 커지자 고건은 12월 22일 언론에 성명을 발표했다 22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발언은 한마디로 자가당착이며 자기부정"이라며 자신의 총리 기용을 `인사 실패'로 규정한 노 대통령의 전날 발언을 정면 비판했다. 이어 그는 노무현 대통령 등의 고립에 대해 "따돌림 당한 것은 오만과 독선, 무능력탓"이라고 정면 반박했다. 고건은 또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국민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면 상생과 협력의 정치를 외면하고, 오만과 독선에 빠져 국정을 전단(專斷)한 당연한 결과"라며 반박했다. 덧붙여 "노 대통령이 스스로 인정하는 `고립'은 국민을 적과 아군으로 구분하는 편가르기, 민생문제도 챙기지 못한 무능력, `나누기 정치'로 일관한 정치력 부재의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내가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여당이 원내 제1당이었음에도 국정운영은 난맥을 거듭했다"면서 노 대통령의 발언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는 "내가 총리로 재직하는 동안은 집권당인 열린우리당 의석이 46석에 불과한 여소야대 정국이었다"며 "총리 주재로 4당 정책위의장과 원내대표가 참여하는 국정협의회를 정례화해 국가적 현안과제들을 정치권과 조율을 통해 원만히 해결해 나감으로써 큰 차질없이 국정을 운영한 바 있다"고 말했다. 고건은 또 "참여정부 초대 총리직을 제의받았을 때 많이 망설였고, 또 고뇌했다"며 "그러나 안정속의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많은 사람들의 권유와 종용에 따라 이를 수락했다"며 억울함을 내비쳤다. 이어 그는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사태를 맞아 권한대행으로서 국민의 협조를 얻어 국가적 위기를 원만하게 수습한 데 대한 평가는 국민의 몫"이라며 "국가 최고지도자의 언행은 신중하고, 절제돼야 한다."고 반박했다. 비판 성명 발표 이후 '성명 내용이 강경하다.'는 한 언론의 질문에 대해 고건은“그런 것 아니다. 내가 늘 해오던 얘기 중에서 지금 상황에 맞는 말을 모은 것 뿐이다.”라고 응답했다. 일각에선 "고 전 총리가 노 대통령을 비롯한 참여정부와의 인연을 완전하게끊는 계기로 삼을 것 같다"는 분석도 제기되었었다. 이후 그의 한 측근은 "참여정부 초대 총리라는 타이틀이 오히려 부담이 되는 상황이었다"며 "노 대통령의 발언 때문에 이제 부담없이 `이혼도장`을 찍을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이후 그는 17대 대통령 선거의 유력한 대선주자와 대선 후보로 거론됐으며 대통합민주신당 영입설, 민주당 영입설, 한나라당 영입설 등이 나타났으나 2007년 1월 16일 언론에 대통령 불출마 선언을 발표했다. 국무총리 퇴임 이후. 2009년 대통령 소속의 사회통합위원회가 공식 출범했는데, 고건이 초대 위원장으로 위촉됐다. 평가와 비판. 평가. 고건은 행정의 달인, 유능한 관료, 물러설 때와 나설 때를 아는 현명한 관료라는 평가가 있다. '사실상 새마을운동을 기획한 주무책임자로서 농촌부흥운동을 진두지휘했다. 새마을운동 성공이 그를 최연소 도지사(전남·37)로 만든 것이다. 세계 5대 지하철 교통망 구축, 난지도 생태공원 조성, 서울 도시고속도로건설, 한옥마을 복원' 등이 업적으로 거론된다. “청렴은 사명감 이전에 나의 생존법칙이다”고 고백했다. 그의 고백이 아니더라도 그의 청렴성은 브랜드화됐다. 그는 오랜 공직생활 속에서도 스캔들이나 부정부패에 단 한 번도 연루된 일이 없다. 그가 행정의 달인이 된 배경에도 청렴성이 자리잡고 있다. 그는 1990년 2월 초 한보 수서택지분양 때 도덕성과 자리를 바꿨다. 청와대 등으로부터 여러 차례 수서택지분양 수의계약 압력을 받았으나 끝내 이를 거부했다. 이 사건이 서울시장(관선) 자리에서 물러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는 게 고 전 총리의 설명이다. 당시 수서특혜분양수사 결과 많은 사람이 구속됐으나 서울시 공무원은 단 한 명도 연루되지 않았다. 이로써 ‘클린 서울’의 명성을 얻었다. 그의 청렴성은 국제적으로 공인받기도 했다. 국제투명성기구는 1998년 그에게 세계청렴인상을 주었다. 비판. 일부에선 고 총리가 "예스맨"이란 닉네임으로 불릴 만큼 근성이나 열정이 없다는 비판도 있다. 처세술의 달인이라는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기타. 고건은 생맥주를 즐겨 마시지만 가까운 사람과는 맥주에 소주와 토마토주스, 후춧가루 등을 혼합한 독특한 칵테일을 돌려 마신다. 인맥 관리. 고건은 인맥 관리로도 유명하였다. 그의 인맥은 오랜 관료생활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부임하는 곳, 만나는 사람마다 모임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관료모임, 자문 교수모임은 물론 심지어 부임하는 부처의 출입기자와도 모임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심지어 김영삼 정권과 김대중간의 갈등을 중재했다 한다. YS정권 말기 DJ와 갈등을 빚을 때도 두 세력에 동시에 인맥을 구축할 정도로 고 전 총리는 인맥관리의 달인이다. 그리고 공직에서 퇴임 후에도 대학총장은 물론 각종 시민단체 등으로 넘나들며 인맥을 구축했다. 여기에는 본인 특유의 부지런함도 작용했다. 잠적 의혹. 한편 격동의 순간마다 잠적하여 위기를 모면했다는 의혹이 있다. 고건은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피습 서거 당시 3일 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1980년 5월 5·17 비상계엄확대 조치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1주일 간 잠적했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특히 이 부분은 2003년 2월 국무총리 인사청문회에서 집중적으로 의혹이 부각됐다. 그 의혹의 제기의 속내는 “당시 국가위기 때 처신은 국가지도자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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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가표준 협회
미국 국가표준 협회(, ANSI)는 미국에서 제품, 서비스, 과정, 시스템, 인력관리 분야에서 표준을 개발하는 것을 감독하는 비영리 민간 기구로서, 미국을 대표하여 국제 표준화 기구(ISO)에 가입하였다. 이 협회는 미국의 제품이 전세계에서 사용될 수 있도록 미국의 표준을 국제표준에 맞추는 활동도 한다. 이 협회는 다른 표준화 기구나 정부 기관, 소비자 단체, 회사 등이 개발한 표준을 승인하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용어를 통일하고, 제품의 특성, 성능, 테스트 방법 등에서 일관성을 유지한다. 이 협회는 제품이나 인력의 인증 기구가 국제표준에서 정의된 기준에 부합하는지에 대해 승인하기도 한다. 이 협회가 제정한 표준을 "ANSI"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미국 내 표준이지만, 국제 표준화 기구의 ISO 표준보다 먼저 제정되는 경우도 많으며, ANSI 표준이 ISO 표준이 되기도 한다. 역사. 1918년 이전에 다음의 5개 학회는 공학 학회 연합(United Engineering Society, UES)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들 5개 학회는 1918년 전쟁부, 해군, 상무부라는 3개 정부기관과 함께 국가표준 기구 설립을 추진했고, 그 결과 미국 공학표준 위원회(American Engineering Standards Committee, AESC)가 발족했다. 이 위원회는 1928년 미국 표준 협회(American Standards Association, ASA)가 되었고, 1931년 국제전기기술위원회(International Electrotechnical Commission, IEC)의 미국 위원회와 제휴를 맺었다. 그 후 명칭과 조직에서 몇번의 변화를 거치는데, 1966년 미합중국 표준 협회(United States of America Standards Institute, USASI)가 되었으며, 1969년에 지금의 미국 국가표준 협회(American National Standards Institute, ANSI)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회원. 이 협회는 정부 기관, 각종 기구와 회사, 학회, 국제 조직, 개인 등을 회원으로 보유하고 있고, 27만개가 넘는 회사, 3천만명이 넘는 전문가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 과정. 이 협회 자체가 표준을 개발하지는 않지만, 이 협회는 표준을 개발하는 기구들의 절차를 인증함으로써 표준의 개발과 사용을 감독한다. 표준을 개발하는 기구들이 사용하는 절차가 이 협회의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개방성, 균형, 합의, 그리고 적절한 절차라는 요구사항에 부합해야 한다. 이 협회는 어떤 표준이 개발된 환경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에게 공평하고, 그들이 접근할 수 있고,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고 판단할 때, 그것을 미국 국가표준(American National Standards, ANS)으로 지정한다. 만약 자발적인 합의로 표준이 되었다면, 그 제품이 소비자 보호를 위한 안전성을 향상시키는 방법이 확인됨으로써 시장이 급속히 받아들인 것이다. 이 협회가 미국 국가표준으로 지정한 것은 대략 9,500개 정도이다. 미국 국가표준으로 지정되는 과정은 다음의 원칙을 준수한다. 활동. 이 협회는 산업계에 소속된 기술자 그룹들과 함께 일하며, 국제 표준화 기구(ISO), 국제전기기술위원회(International Electrotechnical Commission, IEC) 등의 일원이다. 이 협회가 제정한 컴퓨터 관련 표준 중 대표적인 것으로 ASCII 코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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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통령
대한민국의 대통령(大韓民國의 大統領, )은 대한민국의 국가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이다. 현행 헌법에 따라 5년 단임제를 따른다. 현직 대통령은 2022년 5월10일 취임한 제20대 윤석열 대통령이다. 임기는 2027년 5월 9일 까지로 예정되어있다. 대통령의 지위. 국가원수로서의 지위.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지위에 있다. 이를 대한민국 헌법은 “국가의 원수이며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한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 국가의 원수라 함은 국내법상 국가의 통일성과 항구성을 상징하며, 국내에서는 최고의 통치권을 행사하고 대외적으로는 국가를 대표하는 자격을 가진 국가기관을 말한다. 대통령이 헌법에 의하여 조약을 체결·비준하고 외교사절을 신임·접수 또는 파견하며, 선전포고와 강화를 할 외교에 관한 권한을 가지는 것은 국가 원수로서의 지위에 따른 것이다. 정부수반으로서의 지위. 대통령은 정부수반으로서의 지위에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66조 제4항에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 속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에 의해 대통령은 행정수반의 지위를 가지는 것이며, 이것은 정부가 그에 의하여 조직되고 영도되는 것을 말한다. 대통령은 정부조직권과 행정각부 장의 임명권, 감사원의 조직과 통할권을 가진 기관인 동시에, 국무회의의 의장으로서의 지위 및 행정각부를 통할하는 행정의 최고지휘자의 지위 등도 갖고 있다. 이는 대통령의 행정수반으로서의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일정한 직무를 행하는 공무원에 대한 임명권과 영전수여권, 등을 가진다. 그리고 국군통수권은 국방부가 행정부에 속해있기 때문에 행정부의 수반으로써 가지는 권한이다. 헌법의 수호자로서의 지위. 대한민국 헌법은 제66조 제2항과 제3항에 “대통령은 국가의 독립, 영토의 보전,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다.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라고 규정하고 있어 대통령의 국가와 헌법의 수호자로서의 지위와 한반도 통일 책무자로서의 지위를 명시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는 자는 국회의원의 피선거권이 있고, 선거일 당일 40살에 달하여야 한다. 대통령의 선거 시기는 임기가 만료된 때와 궐위된 때로 나누어 규정하고 있다. 대통령의 임기가 만료되는 때에는 임기만료 70일 내지 40일 전에 후임자를 선거한다. 대통령이 궐위된 때 또는 대통령 당선자가 사망하거나 판결 기타의 사유로 그 자격을 상실한 때에는 60일 이내에 후임자를 선거한다.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를 통해 가장 많은 득표를 얻은 사람으로 정하며, 선거에서 최고득표자가 두 명 이상일 때에는 국회의 재적인원 과반수가 출석한 공개회의에서 다수표를 얻은 자를 당선자로 한다. 따라서 득표율의 제한 없이 최다수득표자가 당선자가 된다. 대통령 후보자가 한 사람일 때에는 그 득표자가 총 선거권자의 3분의 1 이상을 득표하지 않으면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없다. 대통령 당선인. 현 대통령의 임기가 70여일이 남은 시점에서 선거를 시행하여 차기 대통령 취임자로 확정될 시 대통령 당선인 신분이 된다. 현직이자 전임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당선인이 취임하면 정식 대통령으로 호칭된다. 대통령의 임기.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며 중임할 수 없고 단임제다. 또한 대통령의 임기를 연장하거나 중임으로 변경하는 개헌은 그 개정안 제안 당시의 대통령에 대해서는 효력이 없다. 이는 과거의 정권이 그 정권을 연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개헌을 추진했던 것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한 것이다. 대통령은 임기 개시일 0시에 취임하게 되는데, 이러한 것은 시간적 의미에서 업무가 시작되는 것을 말한다. 취임식은 대개 임기 개시 이후에 진행하게 되므로, 취임식은 취임의 요건이 아니다. 1987년 헌법 개정으로 1988년 이후부터 임기가 5년 단임으로 고정되어 재직 일수는 1826일 또는 1827일(5년)이 되었다. 이외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선서 및 의무. 대통령은 취임 시 다음과 같은 선서를 한다. 대통령의 직무상 의무는 아래와 같다. 대통령의 특권. 불소추특권. 대통령은 형사상 특권을 갖고 있다. 헌법 제84조는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대통령의 헌법상 지위에 따르는 권위를 유지하면서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대통령은 재직 중에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하지 않는 이상 재직 중에는 형사 피고인으로 재판을 받지 않는다. 다만 이는 재직 중의 민사·행정상의 임과 퇴직 이후의 형사상의 소추까지 면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대통령이 민·형사상의 재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하는 것까지 막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을 증인으로 출석시켜 심문하는 것과 이를 거부하는 경우에 법원이 강제 구인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는 일반적으로 긍정하고 있다.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에 소추되는 것은, 이러한 행위가 헌법수호자의 지위를 스스로 부정하여 헌법질서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범한 시점은 취임 이전이나 이후를 모두 포함한다. 이러한 죄 이외에는 법원의 재판권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법원은 공소기각의 판결(형사소송법 제327조 제1호)을 한다. 다만 재직시에 기소되지 않더라도, 퇴임시까지는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된다. 직무수행상의 면책특권. 대통령이 직무를 수행하면서 행하는 적법한 모든 행위에 대하여는 법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 대통령의 판단 오류 등으로 인한 정책집행의 오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위법한 행위나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법적인 책임을 진다. 퇴임 후의 예우. 전직 대통령의 신분과 예우에 관해서는 법률로 정한다는 헌법 제85조의 규정에 따라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있다. 동법에 따라 전직 대통령이 재직 중에 탄핵 결정을 받아 퇴임하거나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된 경우, 형사 처분을 회피할 목적으로 외국 정부에 대하여 도피처 또는 보호를 요청하는 경우, 대한민국의 국적을 상실한 경우 등에는 경호 이외의 예우는 하지 않는다. 헌법 제90조 제2항에 따라 국가원로자문회의를 두는 경우에는 전직대통령 가운데 직전 대통령은 국가원로자문회의의 의장이 된다. 1989년 3월 의장을 위해 국회의장에 준하는 예우를 규정한 국가원로자문회의법이 폐지되었고, 1995년 12월 전직 대통령들을 원로위원으로 모신 전직 대통령 예우법 해당 규정은 폐기되었다. 이후 법으로는 국가원로자문회의 규정은 존재하나, 설치되지 않고 있다. 현재 생존하고 있는 전직 대통령은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으로 총 3명이지만, 이중 문재인 대통령을 제외한 두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가 박탈되었다. 박근혜는 사면 복권으로 출소하면서 경호 기간내여서 경호 예우는 받게 되었다. 이명박은 구속 수감되었으나, 배우자가 살아있어 경호기간 내에 배우자가 예우에 따른 경호를 계속 받고 있다. 전직 대통령 예우 박탈 사유는 이명박은 재임기간 중 직권남용, 뇌물수수, 대통령기록물법 위반 등 여러 가지 혐의, 박근혜는 탄핵으로 인해 대통령 예우가 각각 박탈되었다. 장례와 안장. 대통령은 국가장법에 따라 사망한 경우에는 유족 등의 의견을 고려하여 행정자치부 장관의 제청으로 국무회의의 심의를 마친 후 대통령이 결정하는 바에 따라 국가장으로 할 수 있다. 또,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립서울현충원 및 국립대전현충원 안장 대상자가 된다. 또한,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않더라도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보존묘지로 지정될 수 있다. 권한. 대통령은 그 지위에 따라 일정한 권한을 갖는다. 국가대표자의 지위. 외교에 관한 권한. 대통령은 국가의 대표로서의 조약을 체결·비준한다(헌법 제73조). 또한 대통령은 외교사절의 신임·접수·파견권(헌법 제73조), 선전포고와 강화에 관한 권한(헌법 제73조), 국군을 외국에 파견하는 권한(헌법 제60조 제2항)을 가진다. 다만 외교에 관한 권한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하며(헌법 제89조 제2호~제6호),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이 부서한 문서로써 하여야 한다(헌법 제82조). 또한 일정한 조약을 체결·비준하거나 외국 군대를 대한민국에 주둔시키기 위해서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헌법 제60조 제1항 및 제2항). 영전수여권. 대통령은 국가의 대표로서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훈장 기타의 영전을 수여한다(헌법 제80조). 국가 및 헌법의 수호자의 지위. 국군통수권.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군을 통수한다(헌법 제74조). 다만 군사에 관한 중요사항의 경우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자문과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이 부서한 문서로 하여야 하며(헌법 제91조, 제89조 제6호, 제82조), 선전포고나 국군의 외국 파견 등에는 국회의 사전 동의를 필요로 한다(헌법 제60조 제2항). 긴급명령권. “대통령은 국가의 안위에 관계되는 중대한 교전상태에 있어서 국가를 보위하기 위하여 긴급한 조치가 필요하고 국회의 집회가 불가능한 때에 한하여 법률의 효력을 가지는 긴급명령을 발할 수 있다”(헌법 제76조 제2항). 긴급재정·경제처분 또는 명령권. “대통령은 내우·외환·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에 있어서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긴급한 조치가 필요하고 국회의 집회를 기다릴 여유가 없을 때에 한하여 최소한으로 필요한 재정·경제상의 처분을 하거나 이에 관하여 법률의 효력을 가지는 명령을 발할 수 있다.”(헌법 제76조 제1항) 계엄선포권. “대통령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헌법 제77조 제1항) 위헌정당해산제소권. 대통령은 국가와 헌법의 수호자로서 위헌정당해산제소권을 갖는다(헌법 제8조 제4항). 국정의 통합·조정자의 지위. 헌법개정안 발안권. 대통령은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헌법 제89조 제3호) 헌법개정안을 발안할 수 있다(헌법 제128조 제1항). 국가중요정책에 대한 국민투표 부의권.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국방·통일·기타 국가 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헌법 제72조). 이는 대한민국 헌법이 채택하고 있는 간접민주제의 예외인 직접민주제에 대한 규정이며, 헌법개정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필수적인 것과 달리 임의적 국민투표이다. 특히 헌법개정안의 경우 국회의 의결을 통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헌법 제130조 제2항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제72조의 국민투표를 통하여 국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고 헌법개정안을 확정하려고 하는 시도는 헌법에 명백히 위배된다. 뿐만 아니라 헌법에 위배되는 내용의 정책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사면·감형·복권에 관한 권한. 헌법 제79조 제1항은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사면·감형 또는 복권을 명할 수 있다”, "일반 사면은 국회의 동의를 거쳐야 한다"고 하여 대통령의 사면권을 규정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사면법이 정해져 있다. 사면은 좁은 의미로 형사소송법이나 그 밖의 형사법규의 절차에 의하지 않고 형의 선고의 효과나 공소권을 소멸시키거나, 형의 집행을 면제시키는 국가 원수의 행위를 말한다. 헌법에서 대통령에게 부여한 사면권은 이러한 좁은 의미의 사면과 함께 감형 및 복권에 대한 권한도 부여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사면권에 대하여 한계를 규정한 조문은 없지만, 일부 법학자는, 이와 같은 사면권의 한계를 주장하기도 한다. 헌법기관 구성자의 지위. 대통령은 헌법기관 구성자로서의 지위에서 헌법기관을 구성할 권한을 갖는다. 구체적으로는 감사원장과 감사위원의 임명권(헌법 제98조 제2항 및 제3항), 대법원장 및 대법관의 임명권(헌법 제104조 제1항 및 제2항), 헌법재판소장과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임명권(헌법 제111조 제2항 및 제4항),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가운데 3인에 대한 임명권(헌법 제114조 제2항)을 갖는다. 이 가운데 감사원장과 대법원장 및 대법관, 헌법재판소장의 임명에 대하여는 국회의 동의를 요한다. 행정부 수반의 지위. 행정부의 수반이라 함은 행정부의 조직자로서 집행에 관한 최고 결정권과 지휘감독권을 행사함을 의미한다. 대통령은 탄핵소추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국회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 법률안 거부권. 법률안 거부권이란 국회에서 의결하여 정부로 이송된 법률안에 대해서 대통령이 이의가 있을 때 재의를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말한다. 미국 대통령제 헌법에서 유래된 것이다. 행정입법권. 현대복지국가 사회국가에 있어서는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사항이 증대되고 이에 대한 신속한 대처가 필요하기 때문에 국회가 권리의무에 관한 모든 사항을 법률로 규정하기가 어렵게 되었으며 법률로 구체적인 범위를 정하여 입법권을 행정부에 위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행정부에 의하여 만들어진 법을 행정입법이라 한다. 대통령은 법률에서 구체적으로 범위를 정하여 위임받은 사항과 법률을 집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항에 관하여 대통령령(=시행령)을 발할 수 있다. 행정부 구성권.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행정부의 각 부서와 기관을 조직할 수 있다. 즉, 새로운 부서나 기관을 만들 수 있고 또는 폐지할수도 있다. 그리고 각 부서와 기관을 책임질 장인 장관이나 기관장을 임명 할 수 있다. 또한, 청와대 내부의 인사나 조직들도 대통령이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국무총리, 대법원장, 감사원장, 헌법재판소장, 대법관, 국회에서 선출하는 헌법재판소 재판관 및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은 국회로부터의 동의가 필요하다. 공무원 임면권.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공무원을 임명한다. 사건.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준수요청 조치 사건.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 준수요청 조치 사건(2007헌마700)은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 준수요청 등 조치 취소에 대한 헌법재판소 결정례이다. 사실관계. 현직 대통령인 청구인이 대통령 선거에 즈음하여 강연, 특강, 기념사, 대담 등에서 공직선거법상의 선거중립을 해치는 내용의 발언을 거듭하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발언을 자제해 줄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 준수’ 조치를 취하자 청구인은 위 조치가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면서 헌법소원을 청구하였다. 관련조문. 공직선거법. 제9조 (공무원의 중립의무 등) (1) 공무원 기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기관, 단체를 포함한다)는 선거에 대한 부당한 영향력의 행사 기타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 결정 요지. 위 법률조항은 선거영역에서의 특별법으로서 일반법인 국가공무원법 조항에 우선하여 적용된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 법률조항의 행위는 공직자가 공직상 부여되는 정치적 비중과 영향력을 국민 모두에 대하여 봉사하고 책임을 지는 그의 과제와 부합하지 않는 방법으로 사용하여 선거에서의 득표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말한다. 공무원의 중립의무를 정한 공직선거법 제9조는 입법목적과 입법경위, 수범자의 범위 및 선거과정의 특징을 고려할 때 명확성의 원칙에 반하지 않으며, 공명선거의 책무는 우선적으로 국정츼 책임자인 대통령에게 있으므로 대통령의 정치인으로서의 지위가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선거활동에 관하여는 선거중립의무가 우선되어야 하며, 이 사건 법률조항은 단지 선거가 임박한 시기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으로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만을 제한적으로 금하고 있으므로 과잉금지원칙에 위반되어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이 사건 법률조항은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권한대행.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은 대한민국 정부에서 대통령 직위가 유고 시에 대통령 자리를 대신한 직위를 뜻한다. 이 직위는 대한민국 헌법 제71조 "대통령이 궐위되거나 사고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국무총리, 법률이 정한 국무위원의 순서로 그 권한을 대행한다."에 규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