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
stringlengths
1
7
revid
stringlengths
1
8
url
stringlengths
37
43
title
stringlengths
1
182
text
stringlengths
0
170k
319289
94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289
동남아중앙은행기구
319290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290
QTV (아폴로 계획)
QTV(성능 시험용 로켓, Qualification Test Vehicle)는 미국의 아폴로 계획에 의해 아폴로 사령·기계선의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서 사용된 리틀 조 II 로켓이다. 비행. 발사는 1963년 8월 28일 뉴멕시코주의 화이트 샌즈 미사일기지에서 행해졌다. 탑재된 우주선 및 비상 탈출 로켓은 모두 실물이 아닌 모형이었다. 계획의 대부분은 성공했지만, 유일한 실패는 자폭 장치가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319291
5668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291
Seacen
319292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292
보비 진덜
피유시 암리트 "보비" 진덜(, , 1971년 6월 10일 ~ )은 미국의 정치인이다. 1971년 6월 10일에 인도 이민자의 아들로 루이지애나주 배턴루지에서 태어났다. 집안에서 힌두교를 믿었으나, 학창 시절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브라운 대학교 졸업 후 로즈 장학금을 받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그 후 잠시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다 공화당 정치인의 소개로 루이지애나주 정부에서 근무했다. 주 정부에서는 의료와 교육 분야에서 경력을 쌓은 그는 2001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에 의해 보건복지부 부담당자로 임명되었으며, 2003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루이지애나 주로 돌아왔다. 10월 1차 선거에서 32세의 그는 전 후보 중 1위를 차지하며 큰 돌풍을 일으켰으나, 11월 본선거에서 민주당의 여성인 캐슬린 블랭코 후보에게 패했다. 여성과 소수민족 (아시아계)의 대결로 큰 관심을 모았던 주지사 선거에서 그는 패했으나, 젊은 정치인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그 이듬해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2006년 재선되었으나, 2007년 주지사 선거에 다시 출마했으며,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로 바로 당선되었다. 그 이듬해 1월 만36세의 젊은 나이로 주지사가 된 그는 당시 미국 최연소 주지사였다. 또한 인도계로는 처음으로 주지사 자리에 오른 것이기도 했다. 전국적으로도 이름이 상당히 알려진 정치인이 되었으며, 젊고 개혁적인 이미지로 차세대 미국을 이끌 대표적인 정치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경선에 출마했으나 사퇴했다.
319293
339833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293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다음을 가리킨다.
319296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296
청년영웅도로
청년영웅도로(靑年英雄道路)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평양직할시와 남포특급시를 잇는 고속도로이다. 1998년 11월에 착공해 2000년 10월에 완공되었으며 평양-남포간 고속도로라고도 불린다. 평양직할시 보통강구역과 만경대구역을 지나 남포특급시까지 이어진다. 주요 경유지로는 천리마군과 강서군 등이 있다. 이 고속도로가 남한으로 대응한다면 경인고속도로로 취급한다.
319297
3729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297
심천증권
319298
3729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298
심천 증권거래소
319299
3329531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299
지진희
지진희(池珍熙, 1971년 6월 24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이력. 서울특별시 출신인 그는 1999년 조성빈의 《삼류 영화처럼》 뮤직비디오에 출연하면서 연예인 활동을 시작했다.
319300
4202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00
체스키크룸로프
체스키크룸로프(, )는 체코 남보헤미아 주의 작은 도시이다. 《크룸로프 성》을 포함한 뛰어난 건축물과 역사 문화재로 유명하며, 체스키크룸로프 구 시가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체스키는 체코어로 〈보헤미아의 것〉을 의미하며, 이것에 의해 모라비아에 있는 모라프스키크룸로프(Moravský Krumlov)와 구별된다. 크룸로프는 〈강의 만곡부의 습지〉를 의미하며, 독일어의 크루메 아우에(Krumme Aue)를 그 어원으로 한다. 1920년 이전에는 〈크루마우안데어몰다우〉라는 명칭으로 알려졌으며, 오래된 옛 지도에는 크루마우(Krumau)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이 많다. 역사. 체스키크룸로프 성이 지어지기 전부터 주민들이 정착해서 살았으며, 성은 1240년부터 프리체의 위티코(Witiko of Prčice)의 후손인 귀족 비트코프치(Vítkovci) 가문에 의해 지어졌다. 성은 1253년 오스트리아의 문헌에 크룸베노베라는 이름으로 처음 언급됐다. 전설에 의하면, 중세 독일어인 "krumbe ouwe"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것은 굽은 초원이라는 뜻이었다. 블타바 강이 체스키크룸로프를 굽이쳐 흘러가기 때문이다. 1255년 독일의 민네장 시인인 울리히 폰 리히텐슈타인가 지은 ‘귀부인에 대한 봉사(Frauendienst)'이란 시에도 언급되어 있다. 보헤미아 왕국의 중요한 교역로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곧 성 아래쪽에 마을이 형성됐다. 체코어 지명인 크룸로프는 1259년 초에 기록됐다. 1302년 비트코프치 가문은 멸문당했고, 바츨라프 2세는 로즘베르크 가문에 성을 넘겼다. 보헤미아의 왕 얀의 시종장인 로즘베르크 가문의 피터1세는 이곳에 상주했으며, 14세기 초에 체스키크룸로프 윗 성을 축조했다. 당시에는 동방식민운동(Ostsiedlung)으로 바이에른 공국과 오스트리아 공국에서 이주한 독일인들이 주민의 대다수였다. 관광. 체스키크룸로프의 구시가지와 성은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3세기에 걸쳐서 형성됐다. 시가지에서는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 등 다양한 건축양식을 볼 수 있다. 체스키크룸로프의 시가지는 블타바강이 편자모양으로 굽이쳐서 흘러가며,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체스키크룸로프 성. 체스키크룸로프 성은 도시의 규모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프라하의 흐라드차니 다음으로 체코공화국에서 두번째로 성 규모가 크다. 성 내에는 로코코 양식의 정원이 있으며, 성이 지어진 거대한 바위 사이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있다. 정원은 반세기가량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다가, 세계기념물기금(WMF)이 선정한 1996년 세계기념물감시 대상에 선정됐다. 이후 아메리칸 엑스프레스의 후원 아래 정원의 분수가 복구됐고, 재가동 되고 있다. 성 내에는 성 비투스 교회(Kostel Sv. Víta)라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교회가 있다. 교회는 15세기에 지어졌으며 벽화 역시 15세기에 그려졌다. 교통. 여러 버스 회사가 프라하에서 출발하는 직행 버스를 운행한다. 또한, 뮌헨, 비엔나 등의 도시를 오가는 미니 셔틀버스도 운행되고 있다..
319302
34637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02
해공 신익희
319303
3729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03
개그야(夜)
319304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04
하느님의 종
하느님의 종()은 기독교에서 어떤 신앙인의 업적을 드높이기 위해 사용하는 호칭이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성인으로서의 공식적인 승인을 숙고하려고 선종한 신앙인의 일생과 업적을 조사하기 시작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호칭이다. 시성 절차의 네 단계 가운데 첫 번째 단계는 ‘하느님의 종’이라는 호칭을 받는 것이다. 다음 단계는 시성성에 제출되어 순교했다거나 덕행에 뛰어난 모범을 보였다는 판결이 나면 ‘가경자’가 되는 것이다. 그다음에 시성성에서 가경자의 기적을 확인한 다음에는 시복됨과 더불어 ‘복자(여성형은 복녀)’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마지막 단계로는 시성이 있는데, 이것은 ‘성인’(여성형은 성녀)의 호칭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319307
712661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07
테라포밍
테라포밍(Terraforming) 또는 지구화(地球化), 행성 개조(行星改造)는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 및 위성, 기타 천체의 환경을 지구의 대기 및 온도, 생태계와 비슷하게 바꾸어 인간이 살 수 있도록 만드는 작업을 말한다. 지구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행성의 환경을 의도적으로 변경하는 것이지만, 다른 행성에 지구처럼 생물권을 만들 수 있을 가능성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화성이 테라포밍의 유력한 후보로 간주된다. 인간의 과학기술 수준으로 화성의 기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몇 가지 가능성이 제기되었지만, 현재로서는 화성을 테라포밍하는데 필요한 경제적인 자원이 부족한 상황이다. 또한 테라포밍에 소요되는 긴 시간과 실용성, 테라포밍의 방법 외에도 윤리, 정치, 경제적인 논란도 있다. 역사. '테라포밍'이란 용어는 1942년 미국의 SF 작가 잭 윌리엄스의 소설 《충돌 궤도(Collision Orbit)》에 처음 사용되었다. 칼 세이건은 1961년에 《사이언스지》에 게재된 〈The Planet Venus.〉라는 논문에서 금성의 테라포밍에 대한 의견을 제안했다. 세이건은 금성에 조류를 심어 대기의 물과 질소와 이산화탄소를 유기물로 합성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대기에서 이산화탄소를 제거하는 이 방법은 금성의 온실효과를 감소시켜, 표면온도를 쾌적한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세이건은 그 결과 탄소는 금성의 표면에서 비휘발성인 흑연으로 분리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금성에 대한 추가적인 발견에 의해 이러한 방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첫 번째 문제는 금성의 구름이 고농도의 황산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비록 금성의 적대적인 환경에서 조류가 번성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금성의 두꺼운 대기권으로 인한 높은 기압이라는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러한 불안정한 조합은 긴 시간동안 지속될 수 없다. 유기물의 형태로 고정된 탄소는 연소되어 다시 이산화탄소의 형태로 해방될 것이며, 테라포밍은 중단된다. 세이건은 또한 1973년에 《이카루스지》에 게재된 〈Planetary Engineering on Mars〉에서 화성에 대한 테라포밍을 제안하였다. 3년 후에 NASA는 화성의 테라포밍에 대한 연구를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NASA는 화성을 거주 가능한 행성으로 만들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그 해에 테라포밍에 대한 첫 번째 학회가 조직되었다. 1979년 3월에는 NASA의 엔지니어이자 입안자인 제임스 오벅(James Oberg)에 의해 달과 행성의 테라포밍에 대한 학회가 휴스턴에서 개최되었다. 오벅은 학회에서 논의된 테라포밍에 대한 개념을 1981년에 그의 책 《New Earths》에서 다루어 대중화하였다. 1982년 이전까지는 학술지의 제목에 테라포밍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적이 없었다. 1984년에는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과 마이클 앨러비(Michael Allaby)가 《The Greening of Mars》를 출판했다. 러브록의 책은 화성의 온난화에 프레온 가스를 사용하는 것을 첫 번째로 다루었다. 요구사항. 생명유지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에너지원이다. 하지만 생명체가 거주할 수 있는 행성의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그 외에도 지구물리학, 지구화학, 천체물리학적인 기준 역시 충족해야 한다. 특히 간단한 유기체뿐만이 아니라 복잡한 형태의 다세포 생물이 지속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한다. NASA는 생명체가 거주 가능한 환경의 우주생물학적인 지침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테라포밍의 초기 단계. 우선 행성에 미생물을 들여보내, 보다 복잡한 생명체가 살아가기에 적합한 조건으로 만든다. 시간이 지나 행성의 환경이 지구와 비슷해졌을 때, 식물을 이용하여 산소를 포함한 대기를 형성한다. 이론적으로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인간과 동물의 생존에 필요한 산소의 생성을 가속화시킬 수 있다. 유망한 천체. 화성. 여러면에서 화성은 태양계의 모든 행성 중에서 가장 지구와 비슷하다. 사실, 화성은 두꺼운 대기와 풍부한 물이 있는 등, 초기에는 지구와 비슷한 환경이었지만 수억년이 지나면서 그것을 잃게 되었다. 화성의 대기와 물 등이 손실된 정확한 메커니즘은 아직 불분명하나, 다음과 같은 세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 번째는, 표면의 물이 이산화탄소가 탄산염을 형성할 때 함께 행성의 표면에 결속되었다는 것이다. 지구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발생하더라도 화산폭발 등으로 이산화탄소 등이 다시 대기로 환원된다. 하지만 화성에서는 그러한 지각활동이 적어 토양에 갇힌 가스의 환원이 일어나지 않는다. 두 번째로, 화성을 둘러싼 자기권의 부족으로 인해 태양풍이 화성의 대기를 점차 침식했다는 것이다. 주로 철로 이루어진 화성의 핵이 대류하면서 자기장을 생성하게 된다. 하지만 오래전에 화성의 핵의 대류가 멈추게 되면서, 그로 인해 발생하는 자기장이 사라졌다. 화성은 표면의 40%를 덮는 제한적인 자기권을 유지하고 있다. 자기장은 주로 화성의 남반구를 작은 우산 모양으로 덮고있다. 마지막으로, 대략 38~41억년 전에 일어난 다량의 소행성 충돌로 인해 화성 표면의 환경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화성의 작은 중력은 이러한 영향으로 화성의 대기가 우주공간으로 날아가버렸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화성의 테라포밍은 대기를 만들고 대기의 온도를 높이는 과정을 수반한다. 이산화탄소와 같은 온실가스로 이루어진 두꺼운 대기가 태양 복사를 가두게 될 경우 기온이 상승하며, 상승한 기온은 대기에 온실가스를 추가할 수 있기 때문에 두 과정은 서로의 효과를 증폭시킨다. 금성. 금성의 테라포밍에는 두 가지 중요한 변화가 필요하다. 우선 금성의 9.3MPa에 달하는, 이산화탄소로 이루어진 밀도 높은 대기의 대부분을 제거하고, 450°C(723.15K)에 달하는 표면온도를 감소시켜야 한다. 금성의 극단적인 온도는 금성의 밀도 높은 대기로 인해 발생하는 온실효과에 의한 것이기에, 이 두 가지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 대기의 탄소를 제거할 경우, 온도문제 역시 해결될 것이다. 유로파.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 역시 테라포밍의 가능성이 있는 후보다. 유로파의 장점은 고체상태의 물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로파의 테라포밍에는 수많은 문제가 있다. 유로파는 목성 주위에 있는 방사선 벨트 인근에 있다. 이 때문에 방사선을 막을 수 있는 건축물이 필요한데, 이것은 현재로서는 비현실적이다. 또한 이 위성은 얼음으로 뒤덮여있어 가열이 필요하지만, 여기에 필요한 산소는 물을 전기분해하여 현지에서 얻을 수 있다. 기타 천체. 테라포밍의 가능성이 있는 또다른 후보에는 달, 수성, 타이탄, 칼리스토, 가니메데, 엔셀라두스, 세레스, 화성 등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대기를 붙잡아둘 수 있기에는 질량이나 중력이 너무 작다. 또한 달과 수성을 제외하면 태양으로부터 너무 멀어, 충분히 온도를 높이기가 어렵다. 수성의 테라포밍은 또다른 일련의 도전을 요구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금성의 테라포밍보다 한결 수월할 것이다. 비록 널리 논의된 사항은 아니지만, 수성의 극지방에 대한 테라포밍의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토성의 위성인 타이탄에는 지구와 비슷한 대기압, 풍부한 고체상태의 물과 질소 등의 독특한 이점이 있다.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 가니메데, 칼리스토에 또한 풍부한 물이 있다. 패러테라포밍. 패러테라포밍(Paraterraforming) 혹은 부분지구화는 행성에 돔으로 이루어진 거주할 수 있는 시설물을 건축하여, 그것이 결국 행성에서 사용하고자하는 지역의 대부분을 뒤덮도록 하는 것이다. 투명한 지붕으로 이루어진 시설물을 건설하여, 지표면에서 수km 이상의 숨 쉴 수 있는 대기와 기압을 유지하도록 만든다. 패러테라포밍의 제안자들은 1960년대까지 알려진 기술로도 건설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바이오스피어 2 프로젝트에 따라 지구상의 환경을 재현한 돔이 건설되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건설 및 운영에 어려움이 있었다. 패러테라포밍은 전통적인 테라포밍에 비해 몇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투자자에 대한 즉각적인 자금회수를 보장한다. 돔으로 된 도시는 작은 지역으로 시작하지만, 그 지역은 처음부터 거주가 가능하기 때문에 빠른 이용이 가능하다. 또한 이러한 방식은 모듈식의 접근을 허용하기 때문에, 빠른 인구성장 등으로 필요한 지역에 맞춤화된 개발을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화성과 같은 행성에 지구와 같은 대기압을 만들기 위해 추가할 대기의 양이 크게 감소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소행성과 같이 자체적으로 대기를 유지하지 못하는 천체에 거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다. 패러테라포밍에는 시설물의 건설 및 유지보수에 엄청난 자금이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다. 또한 완전히 독립적인 물의 순환을 일으키기 어려운데, 높은 지붕을 이용한 강우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농업 등에 사용하기에는 비효율적이다. 추가비용은 자동화된 제조 및 수리 메커니즘으로 감소시킬 수 있을 것이다. 패러테라포밍에 이용하는 돔형 시설은 중대한 사고가 발생할 경우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데, 이러한 위험은 구획화 등의 안전조치에 의해 줄어들 수 있다. 패러테라포밍은 행성 전역에 대기를 형성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유성 등이 대기권에서 불타 없어지지 않고 지표에 도달하므로, 유성에 의한 피해가 우려되기도 한다.
319308
14763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08
지구화
319311
23169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11
천주의 종
319312
173194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12
삼청장
삼청장(三淸莊)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부주석 김규식의 개인 사저였다. 그는 1945년 12월 귀국 후 1950년 납북될 때까지 이곳에서 거주하였다. 위치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에 소재하고 있었다. 원래는 민규식의 소유였으나 해방뒤 임정요인이 귀국하자 민규식은 자신의 사저인 삼청장을 김규식에게 기부하였다. 이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이화장,김구의 경교장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인 해방 정국 정치 활동의 중심을 이룬 3대 요람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319313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13
장현정
전량 충공 장현정(前涼 沖公 張玄靚, 350년 ~ 363년, 재위 : 355년 ~ 363년)은 중국 오호십육국 시대 전량(前凉)의 제8대 국왕이다. 시호는 충공(沖公)이다. 생애. 장현정은 장중화(張重華)의 서자로 장요령(張耀靈)의 동생이다. 354년에 장조(張祚)에 의해 양무후(凉武侯)에 책봉되었으며, 장조가 살해되자 송혼(宋混)·장거(張琚) 등이 장현정을 서평공(西平公)에 추대하였다. 또한 장조가 사용한 연호 화평(和平)을 폐지하고 다시 건흥(建興) 43년으로 돌아갔다. 뒤이어 수도 고장(姑臧)에 들어온 장관(張瓘)은 장현정을 양왕(凉王)에 추대하고 자신은 국정을 전횡하였다. 이에 반대한 이엄(李儼) 등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356년에는 전진(前秦)에 복속하여 속국이 되었다. 장관은 폭정을 행하였기 때문에 359년에 송혼에게 살해되었으며 뒤이어 송혼이 정권을 잡았다. 송혼은 장현정에게 양왕의 칭호를 버리게 하고 양주목(凉州牧)을 자칭하게 하였다. 361년에 송혼이 병사하자 송혼의 동생 송징(宋澄)이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곧 살해되었으며 장옹(張邕)이 정권을 잡았다. 장옹은 포악하였기 때문에 또 반정이 일어나 장옹은 자살하였으며 장천석(張天錫)이 정권을 잡았다. 장천석은 동진(東晉)의 연호 승평(升平)을 받들어 사용하였다. 363년에 장흠(張欽)이 장천석을 죽이려다 실패하자 장천석은 장현정을 살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였고 시호는 충공(沖公), 동진 효무제(孝武帝)는 경도공(敬悼公)이라 시호를 하사하였다.
319317
529523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17
민규식
민규식(閔奎植, 1888년 9월 30일 ~ ?)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금융인 겸 기업인으로, 민영휘의 차남이며, 본관은 여흥, 본적은 경성부 삼청정이다. 본관은 여흥이다.
319322
173194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22
강익하
강익하(康益夏, 1896년 ~ ?)는 한국의 기업인으로, 한국 최초의 민간보험인 대한생명의 창업자이며, 김구의 제자이다. 생애. 1907년 강익하는 11살로, 김구가 치하포 사건으로 수감 중에 탈옥여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서던 때에 처음 만났다. 당시 김구는 재령에서 보강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강익하는 김구에게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1911년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암살모의로 김구가 구속되자 강익하는 경성법학전문(현 서울법대)에 입학했다. 해주지방법원 판임관으로 근무하던 1919년, 3·1운동으로 수많은 조선인이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을 때였다. 황해도 연안 출신의 경성여고보생이던 황온순이 검사정의 질문에 불리한 답변을 하고 있었다. 강익하는 재판에 유리하게 통역을 해줘 그녀가 풀려나도록 했다. 이때부터 강익하는 그녀가 중국으로 유학을 갔을 때도, 귀국해 이화여전에 입학한 후에도 따라다녔다. 8년 동안의 집념에 감동한 그녀는 결국 결혼을 승낙하고 1928년 자신이 설립한 화광유치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46년 6월 이승만이 전라북도 정읍군에서 단독정부 수립론을 말할 때 김구는 탈장증으로 용산 성모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김구의 제자였던 강익하는 성모병원에 입원한 김구를 문병하고 3백만 원의 수표를 정치자금으로 건넸으나, 김구는 국사에 쓰일 돈이라면서 이승만에게 드려서 쓰게 하라며 돈이 필요하면 자신은 이승만에게 얻어쓸 것이라며 사양하였다. 강익하는 김구에게 3백만 원을 제출하기 전, 이승만에게도 5백만 원의 정치자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1946년 순수 토종 보험사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한국 국내 자본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보험생명사인 대한생명을 창설하였다. 초기에는 회사명을 결정할 때 ‘한국생명’이라는 사명(社名)이 거론됐지만, 그는 광복 직후라는 점을 들어 ‘대한독립 만세’의 이미지를 부각할 수 있는 대한생명으로 결정했다. 부인 황온순은 휘경학원을 설립하고 원불교 종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녀는 이승만에게는 이화장을 제공하였으며, 또한 ‘전쟁고아의 어머니’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319324
22169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24
윤지충
윤지충(尹持忠, 1759년 ~ 1791년 12월 8일)은 조선 후기의 천주교인으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이다. 본관은 해남이며, 자는 우용(宇庸), 세례명은 바오로이다.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제사를 폐지하였으며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루었다가 참수당했다. 2014년 8월 16일에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시복되었다. 2021년 9월 1일에 천주교 전주교구는 2021년 3월 초남이성지의 바우배기에서 성역화 작업을 하던 중 윤지충의 유해가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일대기. 출생과 성장. 전라도 진산군 장고치(현 충청남도 금산군 벌곡면 도산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해남 윤씨이다. 윤선도가 6대조이고 증조부는 윤두서다. 조상대대로 해남에 살았는데 아버지 윤경이 해남을 떠나 외가인 안동권씨들이 많이 모여 살고있는 진산에 옮겨와 살았다. 아버지는 벼슬길에 나아가지는 않았고 대둔산 밑 조용한 마을에서 평범한 선비로 살았다. 고모 윤소온이 정약용의 부친인 정재원과 혼인하여 정약용을 낳았으므로 정약용은 윤지충의 고종사촌 동생이 된다. 이런 인연으로 정약용의 형제 그리고 그의 매부인 이승훈과도 자연스럽게 교제할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남인에 속했는데, 당시 시대적 분위기는 정조가 남인을 중용하여 서인을 견제하는 탕평책을 펼침으로 인해 남인들에게도 관직출사의 기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윤지충은 벼슬에 뜻을 품고 과거시험에 응하여 1783년(정조 7)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천주교 입교. 윤지충은 1783년 진사시에 합격한후 상경하였다. 이때 그의 고종사촌인 정약용을 통해 천주학을 접한 뒤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열리는 '명례방공동체'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성균관에 입학하려던 계획을 접고 《천주실의》와 《칠극》을 얻어 고향으로 내려왔다. 교리를 독학하며 부족한 부분은 정약종으로부터 배웠다. 1787년에 정약전을 대부로 하여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었다. 1789년 북경에 가서 견진성사를 받고 귀국하였는데 명례방 사건(1785년)과 반회사건(1787년)이후 천주교 서적 소각등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낙향하여 조용히 지냈다. 이 시기에 어머니와 동생 윤지헌, 외종사촌 권상연에게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했다. 제사폐지. 1790년 북경 교구장인 구베아 주교가 조선 천주교인들에게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의 외종사촌 권상연은 자신의 집안에 모시고 있던 신주를 불태워 땅에 묻고 제사를 더 이상 지내지 않았다. 윤지충도 제사를 폐했으나 신주는 그대로 두었다. 이 일로 인해 종친들이 격노했고 주변 선비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윤지충은 이에 대해 항변하기를, 평민들이 신주를 모시지 않는 것을 나라에서 엄히 단속하지 않으며 살림이 어려운 선비가 제향을 못하는 것은 예에 어긋하지 않으니, 교리를 지키기 위해 사대부로서 죄를 지었을지언정 나라에서 금한 일을 범한 것이 아니라고 하며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유교적 제례는 법으로 규정한 것이 아니라 사대부의 관례라는 것이다. 진산사건. 1791년 5월에 윤지충의 모친 안동권씨가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지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였다. 그런데 하필 그때에 지역일대에 전염병이 돌아 관아에서 통행을 금지하자 윤지충은 초상 치룰수 없었다. 8월 그믐날에야 겨우 장사를 치르렀는데, 모든것을 전통의식대로 진행하였으나 신주를 만들지 않았고 제사 또한 지내지 않았다. 장례를 치루는 동안에는 전염병의 여파로 인해 조문이 적었고 조객록(弔客錄)에 기록이 많지 않았다. 이를 수상히 여긴 조문객들에 의해 신주를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조문을 고의로 방해하며 천주교식으로 비밀리에 장례를 치루었다는 유언비어가 퍼져나갔다. 심지어 모친의 시신을 버렸다는 식으로 부풀려진 해괴망칙한 괴소문이 돌아다니기까지 했다. 이런 흉흉한 소문은 서울에까지 퍼져나가자 조정 대신들간 당파싸움의 빌미가 되면서 사건이 증폭되었다. 결국 진산군수 신사원에게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여 진상을 조사하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체포령이 떨어지자 윤지충은 경기도 광주로, 권상연은 한산으로 도피하였다. 진산군수가 윤지충의 숙부 윤등을 잡아들였다는 소식을 접한 윤지충은 그해 10월에 자수하였고 곧 권상연이도 체포되었다. 윤지충의 항변. 진산군수 신사원이 배교를 강요하며 모진고문을 가했으나 이들은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두 사람을 회유하는데 실패한 진산군수는 이들을 전주의 전라 감영으로 이송했다. 윤지충은 전라감사 정민시의 심문에 모든 것을 토설한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천주교를 신봉함으로써 제 양반 칭호를 박탈당해야 한다 해도 저는 천주께 죄를 짓기는 원치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주를 모시지 않는 서민들이 그렇다고 하여 정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또 가난하기 때문에 모든 제사를 규정대로 지내지 못하는 양반들도 엄한 책망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여 주십시오. 그러므로 제 낮은 생각으로는 신주를 모시지 않고 죽은 이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서도 제 집에서 천주교를 충실히 신봉하는 것은 결코 국법을 어기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윤지충의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처결. 전라 감영에서 갖은 문초와 혹독한 고문에도 두 사람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자, 전라 감사는 조정에 장계를 올려 두 사람에 관해 보고했다. 조정에서는 두 사람을 처형해야 한다는 소리가 커지자 결국 정조는 처형을 윤허한후 천주교도로 지목받은 이승훈과 권일신의 추포를 명했다.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유학의 핵심인 '효'를 부정하는 일로써, 이는 곧 나라의 어버이 되는 왕에 대한 '충'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이런 무부무군(無父無君) 사상의 신봉은 유교이념으로 떠받쳐져 있는 조선의 지배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도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천주교도들은 '나라를 원망하며 세상을 뒤엎고자 하는 무리'로 규탄받아야 하고 역모사건 차원에서 다스려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만 했다. 이렇듯 조선 지배층이 바라본 천주교는 체제와 정통에 대해 도전하는 사악한 종교였다. 지난 1787년 반회사건 이후 정조 역시 사교로 규정했었기 때문에 사형으로 처결함에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순교. 윤지충과 권상연은 두 사람이 사회도덕을 문란케 하고 사교를 신봉했다는 죄명으로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전주 남문 밖(현재 전동성당 자리)에서 차례로 참수형에 처해졌다. 이 당시 윤지충은 32세, 권상연은 40세였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이승훈과 권일신이 구속되었는데 이승훈은 이미 배교했다는 변론이 수용되어 석방되었으나 관직은 박탈당했다. 권일신은 노모의 간청으로 배교함에 따라 귀양지가 제주에서 예산으로 변경되었으나 예산으로 이동중에 고문의 후유증인 장독(杖毒)으로 죽고말았다. 한편 진산군은 5년동안 현으로 강등되었고 초기에 느슨하게 대응했던 진산군수 신사원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유산. 전동성당. 현재 전주 전동성당이 위치한 자리는 윤지충을 비롯한 권상연, 윤지헌, 유항검 등 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자리이다. 1908년 보두레 신부가 이들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서 전동성당을 건축하였다. 일제강점기중 도로를 개설하며 전주읍성의 풍남문 인근 성벽을 철거했는데, 이때 윤지충이 참수될 당시 피가 튀었던 돌을 가져와 주춧돌로 삼았다고 한다. 전동성당은 명동성당, 대구성당과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건축물로 국가 기념물 사적 288호로 지정되어있으며, 성당 한쪽에는 윤지충의 순교 모습이 동상으로 제작되어 있다. 2014년 8월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 천주교 순교자 124위에 대한 시복 선언을 했는데, 윤지충은 124위 중 첫 번째 복자로 서품되었다. 윤지충 일기. 윤지충은 투옥기간중에 일기를 기록하였으나 현재에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자신의 천주교 봉행과 체포후의 신문과정, 옥중생활 등을 기록하였는데 순교 후 필사되어 널리 읽혔다고 한다. 이 수기는 1801년 신유박해 때 관변 측 기록인 ≪사학징의≫에 천주교들로부터 압수한 서적목록 가운데 ≪죄인지충일기≫라는 기록이 들어 있으나 현재까지 한문본, 한글본 모두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달레(Dallet) 저술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일부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사후. 당파 다툼. 정조는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고 마무리 짓기를 원했다. 이런 조처는 자신의 측근중에 천주교에 가까이 간 자들이 많았던 이유도 있었다. 아울러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던 한역 서양서적을 소각하는 등 천주교의 전파를 억제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정조의 생각과는 달리 조정은 이 사건을 둘러싸고 남인 계통이면서 당시의 상국(相國)인 채제공을 중심으로 한 소위 신서파와 이에 반대하는 홍의호 등의 소위 공서파가 대립하였다. 진산사건으로 인한 갈등과 당쟁은 1801년 신유박해로 신서파가 결정적 타격을 입을 때까지 10여 년간 계속되었다. 전교 활동. 신해박해로 인해 천주교가 정치적 종교적 박해의 대상이 되자 많은 양반계층 교인들이 동요하여 배교후 떨어져 나갔다. 그 공백은 중인계층이 메워나갔는데, 탄압에도 불구하고 1794년 무렵 신도수가 4천여 명으로 증가하자 중국 교회의 구베아 주교는 진산사건으로 보류되었던 선교사 파견을 다시 추진하였다. 1795년 초에 서울에 잠입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는 이내 체포령이 떨어져 은밀히 활동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강완숙 등의 도움에 힘입어 5년후 교세는 1만명을 육박하게 되었다. 기타. 이번 사건으로 정약용의 집안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윤지충이 정약용의 외사촌이었기 때문이다. 정약용과 둘째형 정약전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배교하며 천주교와 관계를 완전히 청산했으나 윤지충과 친척이라는 사실과 윤지충에게 천주교를 소개한 자가 정약용이었기 때문에 서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정약용의 셋째 형인 정약종은 신앙을 지키며 교리에 따라 집안에 제사를 거부하며 갈등하다가 처자식을 데리고 한강 건너 양근의 분원으로 이사를 가버렸다. 조상제사 거부 교리가 널히 알져지게 되었고 향후 천주교 탄압의 명분으로 활용되었다. 유해발굴. 2021년 9월 1일 천주교 전주교구의 발표에 따르면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의 유해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같은해 3월에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있는 초남이성지의 바우배기에서 성역화 작업을 하던 중에 출토된 유해와 유물에 대해 그간 면밀히 검사한 결과 순교한 세분의 유해임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윤지헌은 윤지충의 동생으로 1801년 신유박해때 순교하여 지난 2014년에 시복된바가 있다. 발굴이후 출토물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통해서도 묘소 조성 연대등이 세사람이 순교한 1791년과 시기적으로 부합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유해에 대해서는 성별검사, 치아와 골화도를 통한 연령검사 및 해부학적 조사, Y염책체 부계 확인검사(Y-STR)를 진행해 순교자들의 유해가 확실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유해 목뼈 부분은 날카로운 도구로 자른 '예기 손상'이 있어 참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국 천주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되어 있는 윤지충과 권상연의 묘를 찾는 것은 한국 천주교의 과제였다. 천주교 박해에 관한 조선 정부 측 기록을 수집, 정리한 <사학징의(邪學懲義)>에는 윤지충과 권상연의 무덤이 존재한다는 사실만 나올 뿐 구체적 장소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간 바우배기에 순교자 묘소가 있다고만 구전되어 왔었는데 이번에 230년만에 발굴하게 된 것이다. 가계. ※ 가계 참고 자료
319325
75578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25
네 명의 황제의 해
네 명의 황제의 해는 네로 황제의 죽음 이후의 혼란기이다. 네로 사후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붕괴되며, 68년에 4명의 황제(갈바,오토,비텔리우스,베스파시아누스)가 서로 황제를 자칭했고 이후 베스파시아누스가 최후 승자로 플라비우스 황조를 창시한다. 배경. 54년에 클라우디우스가 죽자 네로가 황제로 취임하여 세네카와 근위군단 장교 부루스의 보좌를 받아 치세 초기에는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55년 양아버지인 전임 황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친아들인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하더니, 59년에는 정치적으로 간섭해온 친어머니 소 아그리피나를, 62년에는 아내 옥타비아를, 65년에는 세네카를 자살 명령으로 살해하였다. 더불어 64년에 기름 창고 사고가 원인인 로마 대화재가 발생하여 민심이 혼란스러워지자, 소수 종교인 기독교에 책임을 뒤집어 씌워 박해하였다. 네로의 기독교 박해로 사도 성 바오로 등의 성직자들이 순교하는 등 교회는 타격을 입었고, 네로는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폭군으로 불리게 되었다. 68년 타라콘네시스 속주 총독 갈바가 주도한 반란이 일어났으며, 이에 각지의 총독들이 동조하여, 마침내 원로원으로부터 “국가의 적”으로 선고받았고, 네로는 68년 6월 8일 자살하였다. 네 황제가 옹립되다. 갈바. 히스파니아 타라고넨시스 총독이던 갈바는 68년 네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갈리아 총독 빈덱스에 의해 반란의 주모자로 추대되었다. 빈덱스는 군대에 의해 진압당했지만 68년 6월 8일 네로가 자살한 직후 원로원에 의해 황제로 선포된다. 10월에 로마로 돌아왔는데 로마에 돌아와 그가 국정에 관하여 내린 조치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중 하나가 네로의 선물을 몰수한 것으로 이 조치는 재정을 다시 건전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으나 많은 사람들에게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거기다 수하들까지 탐욕적으로 재물을 긁어모아 갈바에 대한 사람들의 신임을 더욱 실추되기 시작한다. 69년 1월 2일에는 라인 강 방위군이 갈바가 황제가 된데에 불만을 품고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1월 10일에는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 리키니아누스를 입양하여 자신의 후계자임을 세상에 알렸는데 이는 자신이 갈바의 후계자라고 생각하고 있던 오토를 분노케하여 오토의 쿠데타를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오토는 1월 15일에 황제를 수행하던 중 일행에서 빠져나와 근위대에 접근하여 황제로 추대되었다. 갈바는 이에 당황하여 반란군과 대항하려 했으나 오토 측의 기병에 공격을 받고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나이 72세였다. 오토. 당시 루시타니아 총독이던 오토는 갈바가 네로 정권을 뒤집고자 세력을 구축하자 그를 지지하여 네로의 종말에 한 몫을 했다. 예전부터 권력을 원했던 그는 자신이 군인들에게 인기가 있음을 이용하여 갈바와 그의 후계자 피소를 죽이고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는 곧 원로원의 투표에 의해 네로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지 3개월 후 비텔리우스가 다시 내란을 일으키고 초기 진압에 실패한 오토는 자신의 침대에서 자살을 함으로 내란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것을 막았다. 그는 황제 시절엔 원로원으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지만 그의 뜻 깊은 죽음으로 그의 위상이 회복되었다. 비텔리우스. 하게르마니아 사령관이던 비텔리우스는 69년 1월 2일에 하게르마니아군에 의해 반란의 주모자로 추대되었다. 주모자로 추대되었으나 막상 군을 끌고 오토를 공격하여 로마를 점령한 사람은 부하인 카이키나와 발렌스였다. 덕분에 별다른 행동도 하지 않은 채 쉽게 4월 16일에 원로원에 의해 황제로 승인되었다. 로마로 가는 길에 그가 보여준 것은 환락, 축제, 그리고 무분별한 언동이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가장 경솔했던 것은 그가 내뱉은 무분별한 말로 “죽은 적의 냄새는 달콤하다”는 말은 수많은 사람의 적개심을 샀다. 그 해 5월에는 자신의 게르마니아군을 근위대로 승격시키고 기존의 수도의 근위대는 해체시켰다. 그 해 7월 1일에 비텔리우스에 대항해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가 반기의 기치를 들고 일어서게 된다. 비텔리우스는 7월 18일 휘하 병력과 함께 로마에 입성하였다. 입성한 비텔리우스는 부하들의 전횡 방치, 연이은 환락생활, 무분별한 군단관리 등 그야말로 정치에 관해서는 무능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해 10월에는 분노가 극에 달해 있던 도나우 군단이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며 카이키나가 이끄는 라인군단과 충돌, 승리하고 자신들을 모욕하였던 크레모나의 주민을 무참히 학살한 뒤 로마로 쇄도하기 시작한다. 그 해 12월 20일, 도나우 군단에 맞서 군사를 보내나 보낸 군사들이 쉽게 도나우 군단에 항복을 하게 되어 위기를 맞게 된다. 이에 겁을 먹은 비텔리우스는 퇴위할 것을 간청하나 시민들에게 거부 당하고 숨어 지내다 도나우군단에게 끌려나와 처형되고 만다.그의 나이 54세였다. 베스파시아누스.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독립전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이를 평정할 지휘관으로서 새로이 임명을 받고 유대땅으로 파견되는데 지략과 용맹성으로 갈릴래아 지역을 점령하게 되고 요셉이라는 유다인 지도자를 포로로 잡게 된다. 네로의 급서로 말미암아 큰 혼란이 야기되자 이를 수습할 적임자로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인에게 선택되면서 비텔리우스를 물리치고 로마에 입성하게 된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내전 상태의 로마를 평정하고 국가의 질서를 회복시키면서 무능한 군인 출신 세 황제의 뒤를 이어 새로 로마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최초의 평민 출신 로마 황제이며 그 아들 티투스가 뒤를 이어 황제가 되는 플라비우스 황조를 이루게 되었다.
319326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26
찬드라굽타 1세
찬드라굽타 1세()는 굽타 왕국의 후신인 굽타 제국의 제1대 마하라자디라자이다. 당시 바이샬리 지역에 존재하던 막강한 세력인 리차비 가문의 공주 쿠마라데비와 결혼함으로서 리차비 가문으로부터 각종 지원들을 얻어낸 찬드라굽타 1세는 비하르와 벵골, 그리고 알리하바드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정복하였고 이후 이 영토들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마우리아 제국 시대의 행정 제도를 보완한 행정 제도를 실시하였으며, 왕중왕, 즉 황제를 의미하는 마하라자디라자를 굽타 제국의 공식적인 군주 칭호로 지정함으로써 절대적인 권한의 왕위와 세습적인 형태를 취하는 절대왕정을 확립하였다.
319328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28
찬드라굽타 2세 비크라마디티야
찬드라굽타 2세 비크라마디티야(, )는 굽타 제국의 제4대 마하라자디라자다. 중국에서는 초일왕이라고 한다. 아버지 사무드라굽타의 뜻을 이어 받아 대정복 사업을 벌였다. 4세기 말 말라바와 사카 왕국을 멸망시켜 굽타 제국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이 시기 굽타 제국은 문학과 예술의 황금 시대를 맞이하였으며 동진의 승려 법현이 이때 인도를 방문하였다.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영토를 확장했으며 동로마, 아라비아와 무역을 했다. 또한 그의 치세에 인도의 중심적 종교는 불교에서 힌두교로 전환되어갔다.
319330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30
장천석
전량 도공 장천석(前涼 掉公 張天錫, 346년 ~ 398년, 재위 : 363년 ~ 376년)은 중국 오호십육국 시대 전량(前凉)의 제9대이자 마지막 국왕이다. 시호는 도공(掉公)이다. 생애. 장천석은 장준(張駿)의 막내 아들로 346년에 태어났다. 354년에 형 장조(張祚)에 의해 장녕후(長寧侯)에 책봉되었으며, 361년에는 중령군(中領軍)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같이 정권을 장악한 장옹이 포악하였기 때문에 장천석은 반정을 일으켜 장옹을 자살하게 하고 스스로 정권을 잡았다. 363년에 장흠(張欽)이 장천석을 죽이려다 실패하자 장천석은 장현정을 살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였다. 장천석은 366년에 전진(前秦)으로부터 독립하고 동진(東晉)의 종주권을 받들었다. 또한 세력 확대를 시도하여 367년, 반독립적인 세력인 이엄(李儼)이 다스리는 농서(隴西) 지방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엄이 전진에 항복하였기 때문에 전진의 구원군과 싸워 패배하였으며, 왕맹(王猛)과 평화 협정을 맺고 귀환하였다.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이 371년에 전량을 공격해오자 장천석은 전진에 복속하여 속국이 되었다. 장천석은 주색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으며 후계자 문제로 전량 국정이 혼란에 빠졌다. 이에 376년, 부견은 전량을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며 장천석과 전량 왕족들은 포로로 장안(長安)에 끌려갔다. 장천석은 귀의후(歸義侯)에 봉해졌다. 383년, 비수대전(淝水大戰)에 참전했던 장천석은 전진군이 패주하는 틈을 타서 동진에 항복하였으며 동진 조정은 장천석을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임명하였다. 동진에서 살다가 398년에 사망하였으며 도공(掉公)이라 시호를 받았다.
319333
5668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33
조지프 스미스
319335
5668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35
올림픽 위원회
319337
5668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37
올림픽위원회
319340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40
찬드라굽타
찬드라굽타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319344
313311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44
무아위야
319345
5668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45
올림픽 경기 대회
319346
5668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46
Quantum hall effect
319347
756154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47
고대 올림픽
고대 올림픽(, )은 기원전 776년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인 엘리스에서 헤라클레스가 처음으로 개최했다는 설도 있지만, 사실 그보다 1세기 전부터 올림피아에서 4년마다 한 번씩 열렸다고 한다. 고대 올림픽 경기는 남자들만이 참가할 수 있었으며, 여자는 참가뿐만 아니라 관전조차 금지되었고, 올림픽을 관람하거나 올림픽에 참가한 여성은 사형을 당했다. 또한 모든 선수들이 벌거벗은 채로 경기를 벌였다고 한다. 경기 종목도 처음에는 단거리 달리기만 실시하다가 차츰 중거리 달리기·장거리 달리기를 포함시키고, 복싱·레슬링·원반던지기·창던지기·전차 경주 등이 더해졌다. 그러나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말미암아 주최국인 엘리스의 정치적 중립이 깨지면서부터 올림픽 조직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서기 392년에 로마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정하면서, 서기 393년 제293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고대 올림픽은 종막을 고했다. 그 후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 근대 올림픽을 설립하기까지 올림픽은 중단되었다. 개최. 그리스의 여러 도시 국가들을 출전시킴으로써 국가의 위상을 높임과 동시에 동맹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개최되었을 것이다. 고대 올림픽의 특징은 지금의 개막식, 폐막식이라 할 수 있는 제우스 신에 대한 기념제, 감사제를 올린 뒤에 5개의 종목을 3일에 걸쳐서 실시된다. 개최 기간은 제우스 신에 대한 기념제, 감사제를 포함한 5일 간이다. 각 종목별 우승자에게는 월계수로 만든 관이 수여되며 보상금을 받게 된다. 벌칙. 반칙을 범했을 경우 행해지는 벌칙은 다음과 같다. 폐지. 우승자에 대한 지나친 보상으로 인해, 올림픽은 세월이 흐를수록 타락해갔다. 특히 고대 올림픽 후반에는 선수, 심지어 국왕마저도 뇌물과 반칙을 주로 할 정도였다. 로마 제국은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의 하나로서 참가가 허용되었지만, 후에 로마 제국이 그리스를 정복한 후에도 올림픽은 계속되었다. 로마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서기 392년에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정식 선포하면서, 이교도의 신인 제우스를 기리는 경기를 용납할 수 없었으므로 고대 올림픽도 금지되었다. 마지막 293회 고대 올림픽은 다음해인 393년에 개최되었다. 이후 로마의 이교도 신전 파괴령에 의해 고대 올림픽 경기장을 파괴하였고, 기록을 지워버렸다. 현재 기록에 남아 있는 마지막 고대 올림픽은 369년에 열린 287회 고대 올림픽으로, 그 해의 우승자만 기록되어 있다.
319349
5668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49
올림픽 게임
319352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52
데이터 마트
데이터 마트(Data Mart, DM)는 데이터 웨어하우스(Data Warehouse, DW) 환경에서 정의된 접근계층으로, 데이터 웨어하우스에서 데이터를 꺼내 사용자에게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데이터 마트는 데이터 웨어하우스의 부분이며, 대개 특정한 조직, 혹은 팀에서 사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용어의 정의. 개개의 데이터 마트와 데이터 웨어하우스는 형식상 다른 존재이다. 그러나, 이 용어를 사용하는 대부분의 저자들은 용어의 의미상 데이터마트가 사용자 요구 분석에서 시작하는 개념으로 해석하고 데이터 웨어하우스는 기존의 데이터를 어떻게 수집, 분석하고 이를 어떻게 재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개념으로 해석한다. 데이터 웨어하우스는 중앙 집중식 데이터 집합체 (물리적으로는 분산되어 있음)를 뜻하며, 데이터 마트는 데이터 저장소의 역할을 한다. 데이터 마트는 (데이터 웨어하우스에서 상속여부를 떠나서) 사용 목적에 맞는 접근성과 사용성을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데이터 웨어하우스는 전략적인 성격을 띄지만, 명확하지 않은 개념이다. 데이터 마트는 전술적이고 즉각적인 요구를 충족킨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Marc Demarest는 데이터 마트와 데이터 웨어하우스의 개념을 통합하고자 통합 데이터 아키텍처 (Universal Data Architecture; UDA)라는 용어를 제안했다. 데이터 웨어하우스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부 회사에서는 데이터 마트 서비스도 같이 제공한다.
319354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54
페르시아어 위키백과
페르시아어 위키백과()는 아랍 문자를 사용하는 페르시아어 위키백과이다. 2003년 12월에 시작되었으며, 2012년 7월 9일, 문서 수가 200,000개를 넘었다. 기호는 fa이다.
319356
3334520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56
도전 1000곡
《도전 1000곡》은 2000년 10월 22일부터 2014년 6월 22일까지 방송된 음악 프로그램이다. 패자부활전 게임. 1차전에 세 팀 이상 탈락하고 2차전에 한 팀이 남으면 1차와 2차 패자부활전을 진행한다. 앙케이트 퀴즈. 주어진 주제에 맞는 앙케이트 내용을 보고 1~10위에 해당하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 릴레이로 돌아가면서 진행하며, 많이 맞힌 사람이 승리한다. 이 가수(장르)를 잡아라. 가수, 장르 문제판을 보고 자신있는 가수의 히트곡, 장르곡, 10곡 등을 불러야 한다. 60초 동안 많이 부른 사람이 승리한다. 애창곡 메들리. 우리가 알만한 애창 트로트와 댄스곡을 릴레이로 돌아가며, 두 소절씩 부른다. 한 글자라도 틀리면 탈락한다. 도전 40초. 두 진행자 가운데 노래를 잘할 것 같은 한 사람을 찍어 그 사람이 부르는 노래 제목을 맞혀야 한다. 많이 맞힌 사람이 승리한다. 황제전. 도전 1000곡 왕중왕전에서 승리한 출연자들을 모아 방송하는 황제전이 있다. 황제전은 80회 단위 특집마다 이루어진다.
319357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57
웹 마이닝
웹 마이닝()은 웹자원으로부터 의미있는 패턴, 프로파일, 추세 등을 발견하기 위하여 데이터마이닝 기술(많은 데이터 가운데 숨겨져 있는 유용한 상관관계를 발견하여 미래에 실행 가능한 정보를 추출해 내고 의사결정에 이용하는 과정)을 응용한 것이다. 그 활용분야에는 정보필터링, 경쟁자와 특허 그리고 기술개발 등의 감시, 이용도 분석을 위한 웹 엑세스 로그의 마이닝, 브라우징(고객의 웹에서의 이동경로 탐색) 지원 등이 있다.
319358
10476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58
겜블러크루
319364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64
정순석
정순석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319365
529523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65
정순석 (경찰관)
정순석(1919년? ~ ?)은 대한민국 초기의 경찰관이었다. 광주 출신의 제15,16,17대 국회의원 정동채의 아버지로 일제강점기 당시 경찰관이었던 정순봉과 동일인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어 있다. 생애. 1919년경에 태어나 송정중학교(松汀中學校)를 졸업했다. 송정중학교의 전신인 송정농업실수학교가 1936년 개교하였으므로 이때 입학하여 3년 과정을 마쳤던 것이다. 그 뒤 일본으로 유학 주오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강제징집을 피해 만주에 갔다가 해방후 미군정청에서 실시하는 경찰간부시험을 보아 합격하여 경찰의 길에 들어섰다고 한다. 그러나 1939년 송정중학교 졸업을 하고 일본에 유학을 하여 중앙대학교 법학부 4년을 마치고(1943년경) 1947년 미군정청에서 실시하는 경찰 간부시험에 응시 합격하여 경찰에 투신하였다는 기간 사이에 4년의 공백기간이 생기며, 강제징집을 피한 만주에서의 4년간의 행적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45년 해방 후 그는 전라남도 경찰청 총무과 수사부장을 지냈다. 광양경찰서 총무과장, 공안과장과 전남 장성경찰서 공안과장 등을 거쳐 1949년 장성경찰서 수사과장으로 부임했다. 그 후 경감으로 전남 곡성 경찰서에 1952년 3월6일 재14대 경찰서장으로 임명되어 1953년 1월13일까지 근무하였다. 한편 대한민국 경찰 인사록상에 학력과 이름을 다르게 표기한 것에 대한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319366
48356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66
대형할인점
319367
5668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67
대형마트
319368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68
국제 테니스 연맹
국제 테니스 연맹(")은 세계 테니스를 운영하고 관리하는 국제 기구이다. 205개의 국가별 테니스 협회로 구성되어 있다. 국제 테니스 연맹은 1913년 3월 1일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12개국 테니스 협회 회의에서 국제 론 테니스 연맹 (", ILTF)이 결성되면서 시작되었다. ILTF는 1924년 ‘ILTF 테니스 규정’과 함께 세계 론 테니스를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주체로 공인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세계적으로 전체 테니스 코트 중 잔디 코트가 차지하는 비율이 지속적으로 감소하자, 이에 1977년 조직 명칭에서 잔디를 뜻하는 단어인 ‘론 (lawn)’을 삭제하였다. 국제 테니스 연맹의 재단(fund)은 최초에 파리에 위치했다가 제2차 세계 대전 때 런던으로 이동하였으며, 이후로 계속 런던에서 운영되었다. 1987년부터는 본부가 윔블던에 위치하였다가 곧 퀸즈 클럽 (Queens Club) 부근의 베런즈 코트 (Barons Court)로 이동하였으며, 1998년에는 다시 로햄턴 (Roehampton)으로 이동하였다. 최근 12개월간의 협회 활동을 소개하는 공식 연보인 "The ITF Year"를 매년 발간해왔으며, 이것은 최근 《월드 오브 테니스》("")로 교체되었다. 역할. ITF는 3개의 메이저 국가 대항전인 데이비스 컵, 페드 컵, 그리고 호프만 컵 대회를 운영한다. 또한 4개 그랜드 슬램 대회(호주 오픈, 프랑스 오픈, 윔블던, US 오픈)도 주관한다. 그랜드 슬램 대회를 제외하면, ATP 투어 및 WTA 투어가 대부분의 상위 클래스 대회들을 주관하며 ITF는 가장 하위 클래스 대회들의 운영을 맡고 있다. 남자의 경우 1주 단위로 열리는 퓨처스 대회들이 이에 해당하며, 이러한 퓨처스 대회 시리즈를 통틀어 ITF 남자 서킷이라고도 부른다. ITF는 과거 4주 단위의 세틀라이트 대회도 운영했는데, 이것은 퓨처스와 거의 동일한 레벨의 대회였으며 2006년을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처음 프로에 데뷔하는 남자 선수들은 대부분 ITF 남자 서킷 대회를 통해 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한편, ITF는 18세 미만 남녀 선수들의 국제 주니어 대회도 주관한다.
319369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69
시성성
시성성(諡聖省, )은 로마 교황청의 심의회로, 기적의 인가를 포함하여 기독교의 성인 후보자들에 대한 뛰어난 덕목을 지녔다는 진술들과 시복 단계에서부터 시성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감독하는 기관이다. 기적 사례에 대한 관례적인 조사들을 마무리한 다음 교황에게 제출하여 후보자를 시복 또는 시성 절차를 밟을지를 결정해 달라고 요청한다. 시성성의 모체는 1588년 1월 22일 교황 식스토 5세가 교황 교서 《Immensa Aeterni Dei》를 반포하면서 창설한 예부성성(禮部聖省, Sacra Congregatio Rituum)이다. 예부성성은 경신례와 시성 문제를 함께 처리하였다. 1969년 5월 8일에 교황 바오로 6세가 사도적 헌장 《Sacra Rituum Congregatio》를 반포하여 예부성성을 경신성사성과 시성성 두 개의 심의회로 분할하였다. 시성성에는 세 가지 직무를 줬는데, 첫째는 사법 소송 절차를 다루는 직무, 둘째는 신앙을 보호하는 직무, 셋째는 역사적 법률적 직무이다. 198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도입된 시성 절차 변경에 따라 하느님의 종으로 선언된 후보자들의 시성 준비를 위해 일단의 보고관들이 추가되었다.
319374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74
하위문화
하위문화(下位文化) 또는 서브컬처(Subculture), 부차적문화(副次的文化)는 한 사회에서 정통적・전통적인 위상을 지닌 문화에 대해, 그 사회 내부에서 독자적 특질과 정체성을 보여주는 소집단의 문화를 가리킨다. 그 예로는 대중문화, 도시문화, 청소년 문화 등이 있다. 지배적인 문화나 체제를 부정하고 적대시하는 하위문화는 반문화(대항문화)라고 불리기도 한다. 용례. 문맥상으로 주로 다음과 같은 용법이 있다. 1항이 원래의 의미로, 경제 성장과 도시화, 그에 따른 대중문화 저변의 확산 등으로 인해 2나 3항에 해당하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늘어났다. 어느 경우에도 '기성문화에 대비되는 2차적인 측면'이라는 함축적인 뜻이 있다. 한자어로 '하위문화'라는 번역이 통용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 것으로 보인다. 또, 미대생이나 아티스트 지망생이, 자신들이 만들어낸 작품이나 문화를, 상업성에 기반한 기존의 문화와 구별하려는 뜻에서, 컬처럴 스터디스(cultural studies)적인 의미를 담아서 하위문화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어원. 용어의 기원은 1950년에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이 사용한 것이 최초이다. 의미는 '주류문화에 반하는 개인의 모임'이었다. '서브'(sub)란 사회적 주류 문화와 가치관으로부터 일탈한, 인종적으로 소외된 그룹이나 스트리트 칠드런(street children)등의 하위집단이란 의미로, 미디어 문화 이외의 가치관과 행동양식, 언어 등, 원래의 '문화(컬처)'에 대응하는 의미에서 서브'컬처'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예시. 오랫동안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빈민지역들을 연구하고 많은 저작들을 남긴 인류학자 오스카 루이스(Oscar Lewis 1978)가 제시한 개념인 ‘빈곤의 문화’도 사실은 ‘빈민들의 하위문화’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빈민촌에서는 사회의 다른 부분에서와는 상이한 특유의 생활양식이 있다는 것이며, 루이스는 그의 학문적인 생애를 통해 이런 빈민들 사회에서 나타나는 하위문화를 기술하고, 분석하며, 해석해 내려고 노력하였다. 우리의 전통사회에서도 양반들의 생활양식으로는 손으로 하는 일에는 관심을 쏟지 말 것이며, 특히 남자들의 경우 오직 글을 읽어 벼슬하는 데에만 몰두할 것이 요구된 ‘양반문화’도 ‘상민문화’와는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모두 역시 한국문화의 테두리 속에서 존재하였고, 이것은 중국문화, 일본문화 등과 같은 다른 문화와는 확연하게 구별될 만한 것이었다. 영향. 서브컬처는 전체적 문화로부터 상대적으로 구별되는 독자성을 가지는 문화이기 때문에, 이 문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지배적인 전체문화 속에서는 채울 수 없는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역할을 할 때가 많다. 또, 그들에게 심리적인 지주(支柱) 구실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동시에 다양한 서브컬처의 존재는 문화의 획일화를 방지하고 문화에 동태성과 활력을 불어넣는 작용을 한다. 서브컬처와 전체문화, 또는 주요문화 사이의 기능적 관계는 대개의 경우 상호 보완적이다. 즉, 서브컬처는 그 독자성을 통해 지배적인 문화구조를 보완하고, 이의 유지·존속에 공헌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지배적 문화에 대립·저항하는 대항문화(counter culture)로서의 작용을 하는 일도 있다. 즉, 서브컬처의 독자성이 강하여 그 내용이 지배적 문화에 대하여 비판적·적대적이며, 더욱이 그것이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게 될 때에는 대항문화로서 작용, 지배적 문화구조의 동요와 변동을 유도함으로써 새로운 문화형성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가령, 히피의 활동과 신좌익운동이 등장한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전반의 선진적 산업사회에서의 청소년문화에서는 그와 같은 대항문화적인 성격을 확실히 찾아볼 수 있다.
319375
514184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75
하키 (가수)
하키(, )는 대한민국의 인디 뮤지션이다.
319381
66951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81
미국의 대통령 목록
미국의 대통령 목록은 미국의 대통령의 명단이다. 미국 대통령 임기는 4년이고 중임은 가능하지만 3선은 헌법에 의해 금지된다.
319382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82
랜딩 페이지 최적화
랜딩 페이지 최적화(Landing page optimization;LPO)는 인터넷 마케팅 과정 중 하나이다. 검색엔진, 광고 등을 경유하여 접속하는 유저가 최초로 보게 되는 웹페이지를 랜딩 페이지라고 부른다. 그곳에서 유저가 원하는 웹페이지를 찾을 때, 메뉴나 사이트 검색 기능 등이 충실하지 않을 경우, 유저는 원하는 웹페이지를 찾는 것을 단념하고 다른 사이트로 이동을 해버리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다른 사이트로 이동하지 않도록 랜딩 페이지에서 목적 페이지로 간단히 이동할 수 있도록 최적화하는 것이다. 불필요하거나 혼란을 주는 내용을 최대한 피하고 방문자가 방문 목적을 쉽고 빠르게 달성할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319383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83
인자즈
인자즈(إنجاز)는 2009년 4월 8일 태어난 암컷 단봉낙타로, 세계 최초의 복제된 낙타이다. 2009년 4월 14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위치한 낙타생식센터(The Camel Reproduction Center)의 동물발생학자 니사르 아흐마드 와니 박사는 복제된 낙타가 378일간의 임신을 끝내고 태어났다고 발표했다. 이 복제 프로젝트는 아랍에미리트의 총리이자 부통령이며 두바이의 에미르인 무하마드 빈 라시드 알막툼의 후원을 받았다.
319384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84
양산화물역
양산화물역(Yangsanhwamul station, 梁山貨物驛)은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에 위치한 철도역이다. 영남권 내륙화물기지 건설에 따라 화물 수송을 위해 건설된 역으로, 화물열차만 운행한다.
319385
33252749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85
사우고등학교
사우고등학교(沙隅高等學校)는 경기도 김포시 사우동에 위치한 공립 고등학교이다.
319386
499659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86
대한민국의 대통령 목록
대한민국의 대통령 목록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의 명단이다. 헌법에 따라 현행 대통령 임기는 5년 단임제이다.
319388
5668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88
김성한 (중국계 신라인)
319389
334079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89
프랑스의 대통령 목록
이 문서는 1848년부터 1852년까지, 1871년부터 1940년까지, 1947년부터 지금까지의 프랑스 대통령의 목록을 다룬다. 목록. 1848년부터 현재까지 25명이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직을 역임했다. 현재까지 임기가 끝난 대통령 24명 가운데 14명은 임기 중 사망하거나 법적으로 또는 실질적으로 사임했다. 제3공화국 대통령 14명 중 10명이 임기 중 사망하거나 사임했기 때문에 위 경우는 특히 제3공화국에서 두드러진다. 제2공화국(1848-1852). 제2공화국 초기, 1848년 2월부터 대선이 열린 12월까지 실질적으로 국가수반 직무는 차례대로 다음 이들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프랑스 제2공화국의 대통령을 선출하고자 열린 1848년 프랑스 대선은 1848년 12월 10일부터 11일까지 치러졌다. 제3공화국(1871-1940). 보불전쟁이 한창이던 1870년 9월 4일, 다음 인물을 수장으로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제5공화국(1959- ). 5공화국에 접어드면서 대통령제로 전환한다. 2000년 헌법 개정 국민투표를 통해 7년 연임제에서 5년 연임제로 단축시켰다.
319390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90
옥구역
옥구역(Okgu station, 沃溝驛)은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에 있는 한국철도공사의 화물역이다. 2011년 4월 1일부터 매달 2번 화물 열차 운행을 재개했지만, 역 구내는 방치되어 있다. 이 역에서 군산공군기지로 들어가는 전용선이 분기한다.
319391
10476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91
파소부인
319392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92
소백손
소백손(蘇伯孫)은 진주 소씨 족보에만 등장하는 삼한시대의 군주로 진한을 건국하고 후진한주(後辰翰主)로 즉위했다고 한다. 생애. 《진주소씨세보(晉州蘇氏世譜)》에 의하면 오방신장(五方申將)의 하나인 적제(赤帝)의 61세손 태하공(太夏公) 기풍(己豊)이 성을 소(蘇)로 바꾸고 적제의 배곡(倍谷)에서 처음엔 난하로 옮겼다가 숙신(肅愼)의 홍제(洪帝) 때에 불함산으로 들어가 그곳에 봉해졌으며, 그 나라 이름을 유소(有蘇)라 하였다. 뒤에 태하공의 후손들 중 일부가 한반도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태하공의 69세손인 진공(辰公) 소백손은 기원전 240년에 태어났는데, 소국(蘇國)이 망하자 신하들을 이끌고 경주 형산(兄山)으로 내려와 후진한주(後辰韓主)로 즉위하였다고 한다. 그의 5대손 소벌도리는 진주 소씨와 경주 최씨의 조상이라고 한다. 진주 소씨에서는 소벌도리와 소백손을 모두 조상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경주 최씨에서는 소벌도리가 최초의 조상이며, 소백손은 존재하지 않는다.
319394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94
삼화역
삼화역(Samhwa station, 三和驛)은 강원도 동해시 이로동에 있는 북평선의 종착역이다. 과거에는 여객열차 운행도 했었으나, 현재는 화물만을 취급하고 있다. 역 장내 선로의 대부분이 쌍용양회공업 공장 부지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열차가 도착하면 삼화역 직원들이 쌍용양회공업 공장 내로 이동하여 입환 작업을 한다.
319395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95
로렌초 데 메디치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년 1월 1일 ~ 1492년 4월 8일)는 이탈리아의 정치가이자 피렌체 공화국의 사실상의 통치자로, 막강한 권력을 지녔고 르네상스의 열렬한 후원가였다. 동시대 피렌체인들에게는 로렌초 일 마니피코(Lorenzo il Magnifico)로도 알려진 그는 외교관이자 정치인이였으며 학문과 예술인들의 후원자였다. 그는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 같은 예술가들을 후원하였으며 그밖에도 여러면에서 예술계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생애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절정기와 일치하고 그의 죽음은 피렌체 황금기의 종말과 동시에 일어났다. 그의 생애동안 유지되었던 이탈리아 국가들간의 평화는 그의 죽음과 함께 무너졌다. 사후에는 피렌체의 메디치 예배당에 묻혔다. 초기 생애. 로렌초의 할아버지인 코시모 데 메디치는 이끌고 있던 피렌체 공화국과 운영하고 있던 메디치 은행을 결합시킨 최초의 메디치 가문의 일원이었다. 코시모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 중 하나였고 정권과 자선 활동에 그의 재산 많은 부분을 사용했다. 그는 예술의 후원가였고 공공 사업에 자금을 댔다. 로렌초의 아버지 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는 피렌체 정치의 중심이었고 주로 예술 후원자이자 수집가였다. 로렌초의 숙부 조반니 디 코시모 데 메디치는 가문의 사업상 이익을 책임졌다. 로렌초의 어머니 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는 소네트 작가이자 메디치 아카데미의 시인과 철학자들과 친구였다. 그녀는 남편이 사망한 후 로렌초의 좋은 조언자가 되어주었다. 피에로와 루크레치아의 다섯 자식 중에 가장 뛰어나다고 여겨지던 로렌초는 외교관이자 주교인 젠틸레 데 베키와 인문주의 철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에게서 교육을 받았고, 요안니스 아르이로풀로스에게서 그리스어를 배웠다. 그의 동생 줄리아노와 함께 마상 창시합, 매사냥, 사냥을 즐겼으며 시에나의 마상 대회인 팔리오를 위한 말을 사육 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말을 좋아했는데 모렐로 디 베네토 (Morello di Vento)라는 이름을 가진 그의 애마에게 직접 먹이를주며 무척 아꼈다. 19세때 그는 이탈리아 최고의 기사들을 상대로 한 피렌체 지도층 가문들의 아들들이 참여하는 토너먼트에서 1등을 하였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인기있는 방식은 아니지만, 그가 가진 용기와 무기 기술에 의한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아버지 피에로는 교황과 다른 중요한 종교과 정치 인사들을 만나러 로마에 갔을 때를 포함해 로렌초가 어릴 당시에도 그에게 많은 중요한 외교 임무에 수행하게 했다. 로렌초는 큰 골격과 짧은 다리, 거무스름한 피부, 낮은 코, 근시의 눈,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등을 가진 평범한 키가 있는 상당히 평범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에 반해 동생 줄리아노는 미남으로 보티첼리의 작품 비너스와 마르스의 모델이기도 했었다. 통치권 계승. 로렌초는 20세 때인 1469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피렌체의 통치권을 이어 받았다. 메디치 은행의 자산은 상당히 줄어들어 있었는데 이는 그의 할아버지가 건축 사업에서 실패하였고, 전쟁과 정치 비용지출등이 늘어났기 때문이였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때처럼 상황에 따라 매수와 정략 결혼을 통해 간접적으로 피렌체를 통치했다. 로렌초의 통치 기간에 피렌체가 번영했지만, 그는 독재자로 군림하였고 피렌체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는 위축되었다. 피렌체 경쟁 가문들은 메디치 가문의 지배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가장 큰 경쟁 가문은 파치 가문이며, 로렌초의 통치가 시작한 직후 그들로 인해 큰 시련을 겪었다. <br><br> 볼테라 광산 사건. 기본 배경. 피렌체에서 남동쪽으로 50km 떨어진 곳에 볼테라(Volterra)로 불리는 도시가 있는데, 이 지역은 외교권을 제외한 자치권이 어느 정도 인정되는 다소 불안한 형태였지만 피렌체의 부속도시에 속해 있는 곳이었다. 이 볼테라에서 명반 광산이 발견되었는데, 볼테라 시민들은 채굴을 위해 피렌체의 투자를 요청했다. 1462년 먼저 교황청이 광산개발에 참여했으나, 그로부터 1년이 안되어서, 메디치 은행이 광산 운영사업에 뛰어들었다. 채굴권은 투자자 8명이 결성한 길드(조합)와 계약을 통해 위임되었으며 조합원은 피렌체인 3명, 시에나 출신 3명, 볼테라 사람 2명으로 구성되었다. 명반은 유리 제작, 가죽 무두질, 직물 산업에 있어서 중요한 원자재로, 이탈리아 내 톨파(Tolfa)에서 생산되기 이전에는 오스만 제국의 수출통제와 제노바의 독점권 때문에 공급양이 적었다. 교황은 명반 칸다 퀸틀(cantar quintal)당 2 두캇의 수수료를 받는 대가로 이교도 국가인 튀르키예에서 생산되는 명반수입 금지조치를 취한후 독점권을 보장해주었다. 갈등의 시작. 한편 볼테라 시민들은 명반광산 개발에 따른 가치와 이익이 예상보다 무척 크다는 사실을 깨달은후 그 수익이 외부 투자자에게 들어가기보다는 자신들에게 남길 원했다. 길드(조합)가 사기로 유리한 계약을 따냈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볼테라는 자치정부 행정장관을 임명하여 광산을 장악하고 작업자들을 해고했다. 이로써 조합과 볼테라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는데 조합원도 아닌 로렌초에게 중재요청이 들어왔다. 이 요청에 대해 로렌초는 조합원들에게 광산 통제권이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을 토대로 볼테라 출신 조합원인 인기라미와 기코발디가 광산을 접수하기 위해 경비대와 함께 광산으로 갔으나 폭력사태가 벌어지며 인기라미가 살해되었다. 뒤늦은 갈등은 폭동수준으로 사건이 커지더니 1472년 6월경에는 피렌체로부터 분리독립하려는 반란으로 발전하여 반대파를 죽이기까지 했다. 피렌체 공사(公使)가 간신히 볼테라를 탈출하기도 했다. 진압과 약탈. 로렌초는 볼테라 주교와 피렌체 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압을 위해 용병을 투입했다. 만약 이번 사태를 진압하지 못하면 다른 소도시들도 이에 동조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볼테라에서는 과거에도 여러차례 민란이 일어났었다. 우르비노 백작 몬테펠트로가 이끄는 용병들이 한달에 걸친 포위끝에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도시로 진입한 용병들이 약탈을 자행하였고 그 과정중에 수백명의 볼테라 시민들이 죽거나 다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로렌초는 급히 볼테라로 달려가 피해에 대해 보상을 하고 사태수습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이 일은 그의 이력에 큰 오점으로 남고 말았다.</br></br> 파치 음모 사건. 암살시도. 1478년 4월 26일 일요일에 지롤라모 리아리오, 프란체스코 파치 (Francesco Pazzi), 피사 대주교 프란체스코 살비아티를 중심으로 한 무리들은 교황 식스토 4세의 묵인하에 파치 음모사건을 저지른다. 로렌초와 그의 동생이자 공동 통치자 줄리아노를 암살하고 피렌체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두 형제를 공격했다. 동생 줄리아노는 19군데나 칼에 찔려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고, 형 로렌초는 시인 폴리치아노의 보호를 받으면서 어깨에 작은 상처만을 입고 현장탈출에 성공했다. 암살과 동시에 의회와 행정부를 장악하려는 시도가 실패하면서 쿠테타는 최종적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암살과 쿠데타 소식이 피렌체 전역에 퍼졌고 피사 대주교(프란체스코 살비아티)와 사건 주동자들은 성난 피렌체 시민들에게 잡혀서 교수형을 당했다. 교황 식스토 4세는 피사 대주교 프란체스코 살비아티가 효수당한것에 대해 분노하며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 공화국에 대해 파문과 성무금지령을 내렸다. 또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메디치 은행의 로마지점을 비롯한 메디치 가문의 모든 재산을 몰수한후 피렌체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피렌체 전쟁. 쿠데타(파치 음모 사건)가 실패하자 교황 식스토 4세는 교황령 연합군을 결성하여 피렌체를 침공했다.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는 영토확장의 좋은 기회로 판단하여 교황군과 동맹을 체결한후 그의 아들 알폰소로 하여금 피렌체를 상대로 한 전쟁에 참여하도록 했다. 교황은 우르비노, 시에나, 루카도 전쟁에 가담하도록 만들었다. 로렌초는 시민들을 결집시켜 대항하면서 우방국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각국이 처한 자국의 정치상활 때문에 볼로냐와 밀라노 등 전통적인 메디치 가의 동맹국들로부터 제대로된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전쟁이 장기화 되자 상황은 피렌체에게 매우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전투에서 연패하며 여러 지역들이 함락됨에 따라 피난민이 증가하였고, 국토가 파괴되고 도적들에 의한 약탈이 증가하였으며, 역병이 창궐한 가운데 잉글랜드가 양모 수출을 중단하자 대량실직이 발생하며 경제상황마저 극도록 악화되었다. 전비는 계속 증가하였으나 경기하락으로 전비조달을 위한 추가적인 세금징수에는 한계가 있었다. 피렌체는 실로 건국이래 최대의 난국에 빠졌다. 외교담판. 로렌초는 위기 극복을 위해 특별한 용단을 내렸다. 1479년 12월에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인 나폴리로 직접 가서 볼모 생활을 자청하며 나폴리 국왕과 외교 교섭을 진행했다. 이는 목숨을 담보로 한 매우 위험한 결정으로 교황의 복수의지가 여전하며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는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교섭은 그리 순탄하게 진행되지는 못했다. 페르디난도 1세는 산전수전 다 겪은 정치 고수였고 속내를 잘 들어내지 않으며 의심이 많고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등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로렌초는 훌륭한 매너와 뛰어난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정세에 대한 탁월한 분석과 견해를 제시하였다. 교황이 바뀔때마다 교황청 정책이 종잡을 수 없이 바뀌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는 점, 피렌체 만큼 가치있는 우방이 없다는 점, 전쟁보다는 평화를 추구하여 위인이 된 고대 통치자들의 선례등을 언급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끈질기게 협상을 지속했다. 3개월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페르디난도 1세를 설득하여 강화조약을 맺는데 성공했다. 영웅의 귀환. 위험을 무릎쓰고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가 뛰어난 기지와 능력으로 값진 결과를 이루어낸 로렌초가 1480년 4월에 피렌체로 돌아왔다. 풍전등화에 놓였던 조국을 구한 로렌초를 피렌체 시민들은 열렬히 환영했으며 로렌초는 피렌체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한편 소식을 접한 교황은 격노하며 전쟁의 지속을 외쳤으나 나폴리가 이탈하자 그 밖의 도시 국가들도 떨어져 나가버렸다. 자신에 대한 여론이 악화된것을 인지한 교황 식스토 4세는 어쩔 수 없이 참회라는 형식적 단계를 거쳐서 피렌체에 대한 성무금지령을 철회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성공으로 로렌초는 피렌체 공화국내 헌법 개혁할 수 있게 되어 로렌초는 가문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그 후 로렌조는 할아버지인 코시모 데 메디치와 마찬가지로 북부 이탈리아 국가들 사이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며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등 유럽의 주요 강대국들이 이탈리아에 넘보지 못하게 하는 평화 유지 정책을 추진하였다. 로렌초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오스만 제국의 플로렌타인 해양 무역이 메디치에게 주요한 부의 원천이기 때문이었다. 메디치 은행의 몰락. 메디치 은행. 증조부 조반니 디 비치(1360–1429)가 창업한 메디치 은행은 성장을 거듭하였고 유럽 여러 국가에 지점을 개설하며 다국적 기업되었다. 이로써 은행업은 가문의 핵심사업이 되었다. 1429년 조반니가 사망할 당시 메디치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중 하나로 손꼽힐 정도였다. 조반니의 증손자인 로렌초는 뛰어난 외교관이자 정치인으로 피렌체를 번영하도록 했으며 이탈리아 여러 국가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평화를 이끌었다. 예술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그는 미켈란젤로등 예술가를 후원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절정기를 이끌기도 했다. 무능한 경영인. 조반니의 증손자인 로렌초는 뛰어난 정치인이자 외교관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무능하고 무심한 경영인이었다. 기업활동과 금융에 대해 문외한이었고 금융계 수장이었지만 재무제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전문 경영인을 선정하여 운영을 위임하였을뿐 문화예술 후원과 정치활동에 지나치게 몰두하면서 사업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토마소 포르티나리를 대리인으로 임명하여 은행경영을 맡겼는데 맡긴이유가 어려서 함께 자라서 자기와 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결과 은행들이 줄도산했는데 1472년 런던지점, 1478년 밀라노 지점, 1480년 브뤼제 지점, 1481년 베네치아 지점이 문을 닫았다. 은행들이 계속 도산하는데도 불구하고 로렌초는 이를 막기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은채 지속적으로 엄청난 금액을 예술후원에 탕진해 버렸다. 연쇄 도산. 증조부가 물려준 유럽 전역에 16개의 은행중 15개가 도산했고 1492년에 로렌초가 사망할 당시에는 피렌체 본점만 남아있었다. 금고가 바닥나자 로렌초는 피렌체 정부의 공금에 손을 대기도 했다. 마지막 남아있던 피렌체 본점은 로렌초가 사망한 2년후인 1494년 도산했다. 가업인 은행업을 물려받은지 25년만에 완전히 파산한 것이다. 메디치 은행이 파산하자 피렌체의 르네상스도 쇠퇴하였고 예술인들은 하나둘씩 피렌체를 떠났다. 1472년 부도난 런던 지점은 잉글랜드 에드워드 4세에게 거액을 빌려주었다가 떼어먹히며 파산하였다. '국왕이나 귀족에게 돈을 빌려줄 때는 주의하라'는 선대의 가르침을 어긴탓이다. 잉글랜드가 양모수출을 금하고 모직물 제조업에 직접 뛰어들자 이탈리아의 모직물 산업은 급격히 쇠퇴했으며 메디치의 가업중 하나인 모직물 사업도 어려워졌다. 잉글랜드산 양모를 수입하고자 에드워드 4세에게 접근하였는데, 에드워드 4세는 양모거래를 조건으로 대출을 요구했다. 거절하지 못하고 응했다가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한채 잉글랜드 지점만 도산하고 말았다. 후원. 로렌초의 궁전에는 15세기 르네상스를 연 피에로와 안토니오 델 폴라이올로 형제,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산드로 보티첼리,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같은 예술가들이 있었다. 로렌초는 자기자신을 위한 의뢰는 많이 하지는 못 했지만, 그는 이 예술가들이 다른 후원자들에게서 의뢰를 받는 것을 도왔다. 미켈란젤로는 로렌초와 그의 가족들과 함께 5년을 살았으며, 함께 저녁 식사를 같이 했고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주도한 논고에도 참여하였다. 로렌초는 그의 모어인 토스카나어로 시를 쓰는 예술가이기도 했다. 그의 시에서는 인생을 찬미하는 반면에, 특히 그의 후기 작품에서 인간 상태의 허약함과 불안정성에 대한 우울감을 나타낸다. 사랑, 향연, 빛이 그의 시 대부분을 차지한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메디치 도서관 (메디체아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이라고도 불림)이 되는 서적 컬랙션을 모으기 시작했고, 이를 로렌초가 늘렸다. 로렌초의 대리인들은 많은 수의 고전 작품들을 동방에서 찾아다녔고, 그는 그의 수집한 책들을 복사하고 유럽 대륙에 그 지식을 퍼트리기 위한 커다란 공방을 고용했다. 그는 철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 안젤로 폴리치아노,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를 포함한 그의 학문적 동지 무리를 통해 인본주의 발전을 후원했다. 그들은 그리스 철학자들에 대해 연구하고 플라톤의 이론을 기독교와 접목시키려 하였다. 개인적인 관심 외에도 로렌초는 그의 외교 노력을 위해 피렌체의 순수 미술 분야를 사용했다. 기를란다요, 보티첼리, 페루지노, 코시모 로셀리가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를 그리러 로마로 간 것을 포함것이 그 예이며, 이러한 행동은 로렌초와 교황 식스토 4세 간의 동맹을 형성하려 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1471년에 로렌초는 1434년 이래로 메디치 가문이 자선 사업, 건축물, 세금등으로 663,000 플로린 (오늘날 약 4억 6천만 달러)을 사용했다고 계산하였다. 그가 기록을 남기길,"많은이들이 그들의 주머니 사정에 그 액수의 일부라도 갖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여기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의 조국에한 큰 영광이였다고 생각하고, 나는 그 금액이 잘 쓰였다고 생각하고 나는 아주 기쁘다." 혼인과 자녀. 로렌초는 1469년 2월 7일 대리인을 통해 클라리체 오르시니와 혼인했다.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것은 1469년 6월 4일 피렌체에서다. 그녀는 몬테로톤도와 브라차노의 영주인 자코모 오르시니와 그의 아내이자 친척인 마달레나 오르시니 (Maddalena Orsini)의 딸이다. 클라리체와 로렌초는 10명의 자녀를 가졌다: 로렌초는 파치가의 음모사건(1478)때 살해당한 남동생 줄리아노의 사생아였던 조카 줄리오를 입양하여 친 자식처럼 키웠다. 줄리오는 성장하여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되었다. 말년과 죽음, 유산. 로렌초의 지배 기간에 메디치 가문의 은행 몇몇 분점들이 대출로 인해 파산했고, 말년에 그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고 자신의 신용과 국가 자금을 쓰는 것에 의지했다. 로렌초의 생애가 다할 무렵, 피렌체는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로마 문화에 너무 심취했다고 믿었던 사보나롤라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 로렌초는 사보나롤라를 피렌체로 불러들인 역할을 했다. 로렌초는 카레지의 가문 저택에서 오랜 기간을 보내다 4월 8일 늦은 밤에 사망했다. 사보나롤라는 그의 임종에 방문을 했었다. 풍문으로는 사보나롤라가 로베르토 리돌피의 저서 Vita di Girolamo Savonarola에서 논박을 당하던 때 로렌초의 임종에서 그를 저주했다고 한다. 로렌초의 죽음을 목격한 자들은 편지를 써 기록하길 그는 그 날에 복음서를 들으면서 평화롭게 사망했다고 한다. 피렌체 대성당의 돔에 번개가 맞고, 유령이 나타나며, 레오네 (Leone) 길의 사자가 서로 싸우는 등의 그의 사망 순간에 많은 흔적과 전조가 있었다고 한다. 피렌체 시뇨리아와 의회는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로렌초는 산 로렌초 성당에 있는 붉은색 반암 석묘안에 남동생 줄리아노 옆에 안치되었다. 이 석묘는 피에로와 조반니를 위해 미켈란젤로가 설계하여 만든 것이었다. 이 예배당에는 로렌초와 줄리아노의 무덤과 로렌초의 손자이자 동명이인 로렌초 2세(우르비노 공작)와 로렌초의 삼남 줄리아노(느무르 공작)의 무덤도 있다. 윌리엄슨과 다른이들에 따르면, 로렌초 2세와 느무르 공작 줄리아노(1479-1516)의 조각상은 유명했던 이의 특징을 담아 조각했다고 한다. 1559년 로렌초와 동생 줄리아노의 시신은 새로운 성구실 안에 미켈렌젤로의 성모 마리아 상 아래 만들어진 표시없는 무덤에 안치됐다. 사망 이후. 로렌초의 후계자는 "불행한 피에로"라고도 알려진 그의 장남 피에로 디 로렌초 데 메디치였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낭비했으며 피렌체를 이끌어나가기에는 리더쉽이 부족했다. 1494년,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추방된다. 1503년 장남 피에로는 사고로 죽었고 차남 조반니는 교황 율리오 2세의 도움으로 1512년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 통치권을 회복시켰다. 차남 조반니는 1513년에 교황 레오 10세가 되며 로렌초가 아들처럼 키웠던 조카 줄리오는 1523년에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된다. 메디치 가문 출신의 두번째 교황인 클레멘스 7세는 재종손자인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를 피렌체의 최초 세습 공작으로 만들어 피렌체의 공화정을 종식시키고 공식적인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 통치 시대를 이끌어냈다.
319396
4726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96
로렌초 데메디치
319397
4726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397
로렌초 메디치
319400
12703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00
구일본군
319401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01
역사 (헤로도토스)
《역사》()는 헤로도토스가 지은 역사서이다. 헤로도토스는 이 책을 저술함으로써 ‘역사의 아버지’로 불렸다. 기원전 5세기의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와 고대 그리스 여러 폴리스 간의 전쟁(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중심 주제로 페르시아의 건물과 확장, 오리엔트 세계의 역사, 풍속과 전설을 장식한 지리지이기도 하다. 기원전 443년, 아테네를 따르 남부 이탈리아(마그나 그라이키아)의 토우리오이 시의 식민지 개척에 헤로도토스도 참여하여 이 땅에서 글을 썼다. 이오니아 방언으로 묘사되어 있다. 헤로도토스는 고대 세계를 여행하고 각지의 이야기를 모아 놓고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의심스러운 이야기도 많이 있다. 10세기 후반에 동로마 제국에서 편찬된 《수다사전》에 의하면, 헤로도토스는 통치자에 대항한 쿠데타에 참가했기 때문에 할리카르낫소스에서 추방되었다고 한다.여행은 이 기회에 이루어 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분쟁 원인으로 헤로도토스는 절대 권력을 가진 페르시아 왕과 민주적 행정부를 가진 그리스의 이데올로기의 차이가 원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유명한 마라톤 전투는 제6권에 포함되어 있다. 개요.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항쟁, 유래로부터 페르시아 전쟁의 종결에 이르기까지 저술되어 있는데 제9권은 미완성이다. 과거의 위업을 후세의 기억 속에 남긴다는 지극히 서사시적 발상 하에 지리·풍속·역사·삽화·종교 등 너무나도 다양한 사항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이 때때로 주제에서 이탈함으로써 보기에 따라 전체의 통일성이 결여된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사항을 동서간의 항쟁이라는 일관된 역사적 전체 속에 집어넣고 페르시아 전쟁도 그 한 부분으로서 파악한 데에 《역사》의 구성상 통일이 있고 그의 역사적 달관이 담겨 있다. 《역사》의 문체가 지니는 매력은 다양성과 유연성에 있다. 직설적인 묘사와 과학적 산문이라고 할 건조한 문체, 또한 줄거리의 교묘함, 서사시적 웅대함, 즐거움을 주면서 가르치는 수완, 낭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점 등이 헤로도토스가 ‘산문의 호메로스’로 불리는 이유이다. 구성. 기원전 431년부터 기원전 425년 사이에 집필된 것으로 보이는 《역사》는 언뜻 보기로는 무계획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서사시와 비극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며, 실제로는 정연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헤로도토스는 과거의 사실(史實)을 시가(詩歌)가 아닌 실증적 학문의 대상으로 삼은 최초의 그리스인으로, 《역사》는 그리스 산문사상 최초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역사》는 동서분쟁이라는 관점에서 중요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9~479년)의 역사를 쓴 것으로 후대의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이 편의상 아홉 개 부분으로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 자신이 9개의 파피루스 두루마리로 된 《역사》를 청중 앞에서 직접 낭독했다는 카그나치의 주장도 있다. 카그나치에 의하면 《역사》 9권은 각기 3개(제5권은 4개)의 낭독 단위로 나뉘어 전부 28개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각각은 대략 4시간에 걸쳐 청중에게 낭독되었다는 것이다.   내용을 보면 1권에서 6권까지는 페르시아 제국의 성장을 다루고 있다. 최초의 아시아 군주인 리디아(Lydia)의 크로이소스(Croesus : 595 BC~546 BC)가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정복하는 것에서 시작해 마라톤 전투(19강 講)에서 페르시아인들이 패퇴하는 것으로 끝난다. 다음 7∼9권은 10년 후 마라톤 패배를 복수하고 그리스를 페르시아 제국에 흡수하려는 크세르크세스 왕의 기도를 묘사한다. 이어서 제 22강에서는 테르모필레 전투를, 제 24강에서는 살라미스 해전을 묘사하고 있으며, 제 26강의 페르시아의 패퇴에 이어 아테네 제국이 수립되는 제 28강에서 내용이 끝난다.
319403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03
역사 (동음이의)
역사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319405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05
김정훈 (1980년)
김정훈(金楨勳, 1980년 1월 20일~ )은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이다. 2000년에 남성 듀오 그룹 UN(United N-generation)의 멤버로 데뷔하였다. 중국에서는 '찐쩐쒼(金桢勋)', 일본에서는 '존훈(John-Hoo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약력. 캐스팅. 김정훈은 어린 시절부터 수학과 과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우주과학이나 순수과학을 좋아해 대학 진학 역시 자연과학부를 원했지만, 안정적인 전문직을 원한 부모님과 주변 지인들의 권유로 서울대학교 치의예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학과 공부가 맞지 않아 방황하며 고민하던 차 학교 근처의 막걸리집에서 선배들에게 조언을 듣던 중에 우연히 소속사 관계자에게 눈에 띄어 캐스팅 되었다. 가수 활동. 김정훈은 2000년 7월 최정원과 함께 남성 듀오 그룹 유엔의 멤버로 1집 앨범 타이틀곡 《보이스 메일》을 발표하며 데뷔해 활동을 시작했다. 유엔은 《평생》, 《파도》, 《선물》,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미라클》, 《Crazy For You》, 《유리》, 《허니문》,《그녀에게》 등의 히트곡을 발표하며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2005년 9월에 5집 앨범을 마지막으로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2006년에는 베스트 앨범 《Good Bye & Best》을 발표했다. 솔로 활동. 김정훈은 가수 시절부터 연기 활동에 많은 관심을 보여온 것으로 알려졌으며, 단막극이나 버라이어티 속 드라마에 출연을 했었다. 2004년 영화《DMZ 비무장지대》에 출연하며 연기자로 데뷔했고, 2005년 초 출연한 MBC 단막극 《한뼘 드라마 - 한밤의 티파니》에서 황인뢰 PD와 첫 인연을 맺은 이후, 2006년에 MBC 드라마 《궁》에 출연하며 국내 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등에서도 많은 인기를 끌며 한류 스타로 발돋움 했다. 김정훈은 2007년 SBS 드라마 《마녀유희》이후, 여러장의 음반을 발표하며 거의 일본에서 활동을 한 2007년, 2008년에는 후지 TV 《타케시의 고마네치 대학 수학과》에 한국 대표로 출전해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많은 화제를 모았다. 2009년 4월에 한국에서 첫 솔로 앨범을 발표한 김정훈은 2009년 4월 28일, 현역으로 군대에 입대했다. 경기도 의정부시 306보충대, 강원도 철원군 6사단 GOP, 6사단 군악대, 국방부 홍보지원대에서 1년 10개월의 군생활을 마친 후 2011년 2월 28일에 전역했다. 2011년 tvN 드라마 《로맨스가 필요해》로 연기자로 복귀하였고, SBS 드라마 《바보엄마》(2012년), JTBC 드라마 《그녀의 신화》(2013년)에 출연했다. 김정훈은 2012년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 천재적인 사기꾼 프랭크 역할을 맡아 뮤지컬에 첫 도전하였다. 또한 일본 외에도 중국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비비안 수와 드라마 《연애병법》(2008년)에 출연했고, 중국 영화 《벽루천》(2011년), 《점기각첨문도애》(2013년)에 출연했다. 2014년에는 tvN 《더 지니어스3-블랙가넷》에서 오랜만에 국내 방송의 예능에 출연했다. 2016년에는 tvN의 새 예능프로그램인 《아버지와 나》에 출연을 확정하고 현재 뉴질랜드에서 촬영을 하고 있다. 그는 5월 13일 개최되는 가수 김현성과의 조인트 콘서트에서 자신의 새 디지털 싱글 앨범인 'Marry me, Marry U' 무대를 최초로 공개할 예정이다. 특히 이날 공연에서는 레인보우의 보컬 조현영이 듀엣 호흡을 맞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19409
33229521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09
반다이
주식회사 반다이(, )는 일본의 완구 회사이다. 현재는 반다이 남코 홀딩스의 자회사이다.
319411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11
필론
필론() 혹은 필로()는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이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사회의 지도자이며, 《구약성서》의 창세기를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을 사용하여 알레고리 해석을 최초로 시도한 학자이다. 이 방법은 오리겐에게 알레고리 성경해석을 만들게 했다. 필론의 사상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교리학교의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생애. 그는 기원전 30년경에 태어나 기원후 45년까지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는 그리스어를 훌륭하게 구사했지만 히브리어를 말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경건한 유대인이었고 유대율법을 준수하는 사람이었다. 사상. 그는 그리스 철학과 유대신앙을 결합하는 시도를 행하였는데, 예를 들어 그의 <창세기> 해석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전개되어 있는 데미우르고스(造物神)와 이데아의 관계를 교묘히 엮어 넣으면서 전체가 신에 의해 창조된 혼의 타죄(墮罪)-정화(淨化)의 과정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 그에 의해 《구약성서》의 신의 초월성은 주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의해서 비로소 이론적으로 뒷받침되어 체계화되었다. 또한 그는 저서 중에 유대인의 종교상 절대적 정당성을 그리스 철학자의 주장을 많이 인용하면서 증명하려 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당시의 사상을 알기 위해 그의 저서는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다. 그의 사상은 신플라톤 주의나 기독교 교부(敎父) 및 근세의 스피노자 철학 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천지 창조에 관하여> <비유적(比喩的) 해석> <특수율법에 관하여> 등 주로 《구약성서》의 모세 5경(五經)이라고 하는 부분을 대상으로 하는 방대한 저작이다.
319412
4726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12
교부철학
319418
5668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18
구니 구니요시
319420
12703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20
와카마츠 유지로
319421
94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21
조간신문
319425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25
마르틴 부버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년 2월 8일 ~ 1965년 6월 13일)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계 종교철학자이다. 유대인 히브리 고전학자 솔로몬 부버의 손자이다. 빈에서 태어나 빈, 취리히, 베를린 등지의 대학에서 철학과 미학을 배웠다(1896~1900).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초빙되어 종교철학·윤리학을 강의했다(1923-1933). 나치의 유대인 박해로 독일에서 피난하여(1923), 여러 나라에서 망명생활을 보내고, 1938년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에서 사회철학 교수가 되었다. '나와 너'의 관계를 기조로 한 인격주의적 철학은 실존주의와 함께 제1차 대전 후의 유럽, 미국의 기독교 신학이나 철학, 또한 정신의학계에까지 넓고 깊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로젠츠바이크와 함께 구약성서의 새로운 독일어역을 시도하기도 하고, 하시디즘(신비주의적 유대교의 운동)에 깊이 참여하여 추진자가 되었으며, 유대교의 현대적 우위를 명백히 하는 데 큰 공헌을 남겼다. 잡지 <유대인>(1916-24) 및 <피조물>(1926- )을 편집, 발행하였다.
319426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26
노버트 위너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 1894년 11월 26일 ~ 1964년 3월 18일)는 미국의 수학자, 전기공학자, 컴퓨터과학자이다. 매사추세츠 공대 교수. 종합 과학이라고도 할 새로운 학문 분야인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의 제창자로서 유명하다. 천재여서 보통 사람보다 5년이나 빨리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계산기 연구로 전쟁에 협력하였다. 1948년 사람의 신경 작용을 신호로 나타내는 새로운 과학을 개발하여 "사이버네틱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제2차 세계 대전 때에 고사포에 부착시키는 자동 조준기의 발명에 의해서 유명해졌다. 전자 계산기·번역 기계·오토메이션 등의 원리에도 이용되었다. 사이버네틱스란 심리학·사회학·생리학·경제학 등의 학문을 하나로 종합한 과학이다. 위너의 아버지 레오 위너(Leo Wiener)는 역사학자이며 언어학자이자 20여개 언어를 사용하는 번역가이기도 했다. 노버트 위너는 어린 시절 학교를 다니지 않고 아버지로부터 가정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1세의 나이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4세에는 수학 전공으로 터프츠 대학교를 졸업했다.
319427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27
중국철로고속
중국철로고속(, China Railway High-speed, CRH)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철도 전용으로 도입된 고속철도 차량으로 외국에서 기술 이전을 목적으로 라이선스 생산된 철도 차량이다. 개요. 국토가 넓은 중국에서 물류와 이동의 시간을 줄여줄 수 있는 빠른 철도의 등장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는데 고속철도의 자체 개발에 실패한 이후 합자회사 설립 등 외국의 기술이전을 통해 등장한 것이 중국철로고속이다. CRH1형, CRH2형, CRH5형은 최고 속도 200km/h 이상, CRH2, CRH3 차세대형은 최고 속도 300km/h의 속도를 낼 수 있고 CRH형의 대부분은 2007년 4월 18일 제6차 철도고속화로 제공되었지만, 중국의 모든 고속 열차를 CRH형으로 대체하지는 못했다. 이듬해 2010년 9월 27일 중국최초 독자개발열차 CRH380이 영업속도 380km/h의 속도를 낼 수 있으며 곧 상업운행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각각 정원이 610~668명으로 8량 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CRH1은 캐나다의 봄바디어와 중국의 쓰팡 그룹(四方集団)과의 합작 기업 Bombardier Sifang Power Transportation에 의해서, 산둥성 칭다오에서 제조되었다. CRH의 차량은 국제 철도연합 등의 국제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 각각 차량은 8.5t 무게의 강도를 견딜 수 있는 알루미늄 합금을 사용하고 있다. 모델. 자국 기술로 고속철도 차량 개발을 위해 만들어진 중화지성(中華之星)은 잦은 문제가 발생하였고, 최고 속도도 160km/h에 머물렀다. 그 후 해외에서의 기술이전을 통해 자국의 고속철도 차량을 개발하는 것으로 기본 계획을 변경하여 해외 기술로 차량을 제조하였다.
319428
44337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28
아너스 포 라스무슨
319429
44337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29
라스 뢰케 라스무슨
319433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33
존 울먼
존 울먼(John Woolman, 1720년 10월 19일 ~ 1772년 10월 7일)은 미국의 퀘이커 설교자이다. 양복점 직공으로 들어갔었으나 23세 때 퀘이커 전도자가 되어 각지를 순회 여행했다. 노예 제도 반대나 노동·교육 문제의 논문도 있으나, <일기>(1774)는 소박한 문체로 퀘이커 설교자로서의 체험을 기술하고 있으며, 일기문학의 고전이라고 불리고 있다. 영국 수필가 램의 울맨 예찬은 유명하다.
319437
602511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37
CRH
CRH는 다음을 가리킨다.
319439
55154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39
중국고속철도
319440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40
토마스 아 켐피스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1380년 ~ 1471년 7월 25일)는 독일의 신비사상가이다. 라인 강 하류의 켐펜에서 태어나, 92년 동안의 일생을 거의 즈볼러에 가까운 아그네텐베르크 수도원에서 보냈다. 여기서는 네덜란드의 신비사상가 헤르트 호르테 및 제자 플로렌티우스 라데빈스가 창설한 '공동생활의 형제회'(Brethren of the Common Life)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토마스 아 켐피스도 이 회에 가담하여 모범적인 경건한 생활을 보냈다. 이 회는 속세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수도적인 청빈·정결·복종의 생활을 보내도록 노력하고 재산은 공유하며, 스스로의 노동으로 그날그날의 양식을 벌었다. 일은 사본(寫本) 및 인쇄·제본과 교육으로, 특히 연소자의 교육에 힘을 기울였으며, 후에 에라스무스, 니콜라우스 쿠사누스 등을 배출했다. 그들은 프란치스코회와는 달라서 자신의 양식을 다른 사람에게 구걸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신비주의의 조용한 실천활동이 강조되고 있다. 그보다 더 경건한 사람은 없다는 말까지 들은 토마스 아 켐피스는, 1425년 이후 부원장으로서 후진 지도에 진력했다. 그래서 후진 지도를 위한 지도서를 몇 가지 썼는데, 그 중 <준주성범>, 또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기독교 세계에서 널리 애독되는 책이 되었다. 영향을 준 인물. 존 웨슬리. 1725년에 웨슬리는 온전한 거룩을 향한 구도자적 자세로의 전환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해였다. 이 때 그가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고 더욱 가속화되었다.
319441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41
융 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319443
65024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43
존 드라이든
존 드라이든(John Dryden, 1631년 8월 19일 ~ 1700년 5월 12일)은 영국의 시인이자 극작가, 비평가이다. 생애. 노샘프턴셔주 올드윙클에서 출생했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배워 왕정복고기의 대표적 문인이 되었다. 처음에는 크롬웰의 공화정치를 지지하였으나 왕정복고와 더불어 왕당파가 된다. 네덜란드와의 해전과 런던 대화재의 국가적 사건을 주제로 한 서사시풍인 《경이(驚異)의 해》(1667년)와 왕위 계승분쟁을 다룬 정치적 풍자시 《압살롬과 에키토펠》(1681년), 그리고 음악의 위력을 칭송한 《알렉산더의 향연》(1697년)등이 유명하다. 극작품은 찰스 2세의 궁정취미를 반영한 ‘사교희극’(社交喜劇)과 ‘영웅비극’이라는 두 유형(類型)을 만드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다하였으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비련을 엮은 《지상의 사랑》(1677년)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비평가로서는 당시 프랑스 고전주의 이론의 영향을 다분히 받았지만 어디까지나 ‘영국작가의 명예를 지키는’것을 자기의 사명이라 하였다. 그의 정확한 셰익스피어 비평은 그 후 100년간에 걸쳐 셰익스피어 비평의 기초가 되었고 새뮤얼 존슨에 의하여 ‘영국 비평의 아버지’라고 불리었다.
319444
32614409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44
크리스토퍼 말로
크리스토퍼 말로(Christopher Marlowe, 1564년 2월 26일 ~ 1593년)는 16세기 영국의 극작가이다. 생애. 켄트주의 캔터베리에서 제화공 존 말로와 캐서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564년 4월에 태어난 셰익스피어보다 두 달 먼저 태어난 셈이다. 말로는 캔터베리의 왕립학교에서 교육받았으며, 케임브리지 대학의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에서 장학생으로 수학했다. 성직자의 미래가 예정된 행보였으나, 말로의 인생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환된다. 재학 중 이미 말로는 첫 희곡 ≪디도, 카르타고의 여왕≫를 썼으며, 오비디우스와 루카누스를 번역하는 등 창작 활동을 시작한다. 1587년 말로의 석사학위 수여가 보류되는데, 그가 1585∼1856년에 케임브리지를 떠나 가톨릭 신학교가 있는 랭스에 다녀왔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케임브리지 부재 기간 여왕에게 ‘유용한 봉사’를 했다는 추밀원의 개입으로 말로는 일단 혐의를 벗는다. 당시 ‘유용한 봉사’란 밀정 활동을 에둘러 표현하는 말이었다. 말로는 석사학위를 받지만, 성직 대신 극작을 택하여 런던으로 향한다. 말로가 1587년에서 1588년 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탬벌레인 대왕≫ 1부와 2부는 런던 로즈 극장에서 애드미럴 경 극단에 의해 공연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는 ≪파우스트 박사≫, ≪몰타의 유대인≫의 성공으로 이어진다. 말로의 런던 시절에 대해서는 이 네 편의 희곡들이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 이외에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토머스 키드, 로버트 그린, 가브리엘 하비 등 동시대 문인들이 기억하는 말로는 이단적 사고와 무신론에 빠져 있는 위험하고 난폭한 인물이었다. 말로는 필경 월터 롤리 경의 무신론 학파에 속했으며, 엘리자베스 여왕의 밀정 팀, 즉 프랜시스 월싱엄 경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1593년 말로는 의문의 사고로 죽음을 맞는다. 5월 30일 뎁퍼드에 있는 선술집에서 일어난 칼싸움에서 눈을 찔려 숨을 거둔 돌연사였다. 이는 토머스 키드의 증언에 따라 이단 혐의로 추밀원이 말로의 체포 영장을 발부한 후의 일이었다. 그는 진정 사소한 술값 다툼으로 인한 칼부림의 희생자였는지, 아니면 말로의 이단적 사상이 첩보라는 그의 ‘유용한 봉사’를 덮어버릴 만큼 현 정부와 질서를 위협하여 제거된 것인지 분명한 점은 없다. 말로는 불과 10년이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영문학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다. 셰익스피어에 가장 영향을 준 작가일 뿐만 아니라 그 두세 가지 작품의 부분적 집필자였다고도 추측되고 있다. 그는 파우스트, 바라바스, 탬벌레인 대왕, 디도와 같은 거인적 영웅을 만들어낸 것은 한계와 통념을 뛰어넘고자 하는 전복과 위반의 정신이다. 이러한 인물상은 말로가 살았던 르네상스라는 시대와도 무관하지 않다. 말로의 작품들에는 중세 기독교적 우주의 거대한 질서와 틀에서 벗어나 자아와 자유를 찾고자 하는 개인들의 투쟁, 도전, 좌절, 회의, 두려움, 절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말로는 약강 5보격의 무운시 양식을 희곡 양식에 부활시켜 벤 존슨의 찬사처럼 ‘막강한 시행’을 통해 실제보다 거대한 인물상을 빚어낸다. 이들은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혼란 속에서 자아를 찾아 비상하고 추락한다. 그렇기 때문에 말로의 영웅들에게서 최초의 근대적 인간상을 발견하는 것이며, 말로를 영국 근대극의 시초로 평가하는 것이다. 작품 세계. 학생시대의 습작으로 생각되는 《디도, 카르타고의 여왕》에서 미완의 서사시 《히어로와 리앤더》를 남기고 급사하기까지 극작기간은 겨우 6, 7년이며 희극의 수도 7편밖에 되지 않으나 모두가 강렬한 개성으로 가득 찬 이색적인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스>에서 취재한 《디도, 카르타고의 여왕》를 비롯, 독일 전설의 최초의 극화이며 도덕극의 전통을 계승한 <포스터스 박사의 비극적 생애>, 세네카풍 유혈비극의 잔혹한 무드, 마키아벨리즘, 멜로드라마적인 희극의 각 요소를 교묘하게 내포한 <말타섬의 유태인>을 거쳐 마지막 작품이라고 하는 <에드워드 2세>에 와서는 영국 연대사극(年代史劇)의 장르를 개인의 성격에까지 높여 극작가로서 놀라운 진보를 보였다. 말로의 가장 큰 특색은 <탬벌레인 대왕>이 대표하고 있듯이 청춘의 정열을 비극적으로 노래하는 무운시(無韻詩)의 매력과 극적 박력을 지닌 웅장함에 있으며 또 개인의 내부에 깃들인 무한한 욕망(예컨대 정복욕(<탬벌레인>)·지식욕(<포스터스 박사>)·물욕(<말타섬의 유태인>))을 추구함과 동시에 운명이나 자아와의 내적 갈등을 힘차게 묘사하여 개성 존중의 신시대 정신을 고취했다는 점이다. 단명했기 때문에 극작가로서는 셰익스피어 정도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으나 중세 연극의 좁은 테두리 안에서 영국 연극을 해방시키고 근세 르네상스 연극의 확립에 기여한 공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319445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45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
페드로 칼데론 데라바르카(Pedro Calderón de la Barca, 1600년 1월 17일 ~ 1681년 5월 25일)는 에스파냐의 극작가이다. '황금세기'의 4대 극작가의 한 사람이다. 마드리드에서 출생, 살라망카 대학에서 수학하고 궁정(宮廷)시인이 되었다. 그의 방대한 양의 작품 특징은 가톨릭에의 절대적 귀의(歸依), 국왕에의 충성, 극단적으로 명예를 존중하는 명예감정(名譽感情)이다. 등장인물의 성격은 일반적으로 유형적(類型的)이었으나 로페 데 베가의 뒤를 물려받아 오랫동안 연극계에 군림했는데 그의 죽음과 함께 황금세기는 그 막을 내렸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살라메아 촌장> <인생은 꿈> 등이 있는데 19세기에 독일 낭만파의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생애.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Pedro Calderó́n de la Barca)는 1600년 1월 17일 하급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귀족이었으며 펠리페 2세와 펠리페 3세의 재정고문관의 비서였다. 어머니는 플랑드르 귀족 출신의 후손이었다. 그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부유하지는 않았다. 1608년 마드리드의 예수회 제단 학교에 입학해 1613년까지 철학, 수학, 역사, 라틴어, 그리스어 등을 배웠고, 훗날 그의 작품에 깊이 각인될 예수회 정신을 체득한다. 1614년 알칼라 데 에나레스 대학에서 논리학과 수사학을 공부했으며, 1615년부터 살라망카 대학에서 법학과 철학, 지리, 정치 등을 공부하고 교회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때 공부한 것이 훗날 칼데론이 극작 활동을 하면서 작품 세계를 심화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610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계모 후아나 프레일레(Juana Freyle)의 모진 구박을 견뎌야만 했는데, 1615년에는 아버지마저 사망했다. 어려서부터 문학과 연극에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로 무대에서 공연된 작품은 ≪사랑, 명예, 권력(Amor, honor y poder)≫으로, 1623년 6월 29일 마드리드에서 후안 아카시오 베르날(Juan Acasio Bernal) 극단에 의해 공연되었다. 군 복무 중이던 1625년 ≪위대한 세노비아(La gran Cenobia)≫가 공연되고 이어서 ≪브레다 포위≫, ≪시장 스스로가(El alcade de sí mismo)≫, ≪선과 악에 대해 알기(Saber del mal y del bien)≫ 등이 공연되면서 극작가로서 칼데론의 명성은 높아졌다. 1630년 칼데론은 본격적으로 성공적인 극작가의 길을 걷게 되는데, 특히 ≪아폴로의 월계관(El laurel de Apolo)≫으로 로페 데 베가의 인정을 받게 된다. 이후 1650년까지 칼데론은 전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세속극을 많이 썼다. 이 시기에 쓰인 대표적인 작품들로 ≪요정 부인(La dama duende)≫, ≪문이 두 개인 집은 지키기 어려워(Casa con dos puertas, mala es de guardar)≫, ≪사랑을 조롱해서는 안 돼(No hay burlas con el amor)≫, ≪지조 깊은 왕자(El príncipe constante)≫, ≪경이로운 마법사(El mágico prodigioso)≫, ≪자신의 명예를 고치는 의사(El médico de su honra)≫, ≪살라메아 시장(El alcalde de Zalamea)≫, ≪세 가지 불가사의(Los tres mayores prodigiosos)≫, ≪은밀한 모욕에는 은밀한 복수를(A secreto agravio, secreta venganza)≫ 등이 있으며, 칼데론의 가장 훌륭한 작품인 ≪인생은 꿈(La vida es sueño)≫도 1630년대에 쓰인다. 칼데론은 성찬신비극(El Auto Sacramental)이라는 종교극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El gran teatro del mundo)≫, ≪인생은 꿈≫(성찬신비극), ≪성스러운 오르페오(El divino Orfeo)≫ 등의 대표적인 성찬신비극을 썼다. 1640년대부터 칼데론의 극작 활동은 눈에 띄게 줄어든다. 1680년에는 마지막 희곡 ≪레오니도와 마르피사의 운명과 명찰(Hado y divisa de Leonido y Marfisa)≫을 쓴다. 궁정 기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왕궁에서 먼저 상연된 뒤 대중을 위한 코랄에서의 공연이 21일이나 지속되는 등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을 썼다. 1681년 성체절을 위한 성찬신비극 ≪이사야의 양(El cordero de Isaias)≫을 쓰고, ≪신성한 필로테아(La divina Filotea)≫를 절반만 완성한 채, 유언을 써 놓은 지 닷새 만인 1681년 5월 25일 사망한다.
319446
3261455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46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1729년 1월 22일 ~ 1781년 2월 15일)은 독일의 극작가, 비평가이다. 계몽주의의 대표적 극작가·평론가로서 독일문학·연극의 근대화를 촉진시킨 시조라 하겠다. 생애. 작센의 카멘츠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의학과 신학을 배웠으나 노이베린 극단에 의해 연극 혁신의 계몽을 받았다. 일찍부터 연극에 관심을 가져 초기의 희극 <젊은 학자>(1747년)는 노이베린 극단에 의해 상연되었다. 그러나 부채로 인해 베를린 대학,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옮겼다. 그 후 베를린에서 저술가로 출발, 계몽적인 연극 잡지를 발행하는 한편 독일 최초의 시민비극 <사라 심프슨 양>을 발표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유태인인 친구와 평론지 <문학서간>을 편집, 곳스셰트 일파에 통렬한 반론을 시도했다. 7년 전쟁을 배경으로 한 1막 비극 <필로타스(Philotas)>(1759)를 쓴 이후 돌연 프로이센의 브레슬라우의 총독 타우엔친 장군의 비서가 되어 1760년 ~ 1765년에 걸쳐 방종한 생활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향락생활을 보내는 한편으로 다방면의 재료를 수집하여 〈미나 폰 바른헬름〉,〈라오콘〉,〈함부르크 연극론〉등의 구상을 준비하였다. 그 후 베를린으로 돌아와 그림과 시의 대상묘사의 특성을 논한 예술론집 <라오콘(Laokoon)>(1766), 군인희극 <민나 폰 바른헬름>(1765년 완성, 1767년 출판 초연)을 발표, 확고한 지위를 확립했다. 〈군인의 행복〉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민나 폰 바른헬름〉은 독일 최초의 걸작 희극으로 7년전쟁 후의 정치권력이나 사회상태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1767년에 함부르크에 국민극장이 창설되자 고문으로 초빙되어 그 2년 동안의 극평 활동에서 <함부르크 연극론>을 집필되었다. 이것은 그 극장에서 상연된 희곡에 관한 논평과 독일연극의 존재양식을 논한 것으로서 독일연극의 지표가 된 중요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이 국민극장의 경영이 실패하자 어느 고관(高官)의 사서직(司書職)을 보면서 고전 연구에 몰두, 또한 미망인 에바케니히와 47세에 최초의 결혼생활을 가졌으나 1년 만에 사별(死別)했다. 그는 1770년 볼펜뷔텔 시로 가서 시의 도서관장이 되었으며 이곳에서 그의 연극이론을 그대로 실천에 옮긴 비극 <에밀리아 갈로티>를 쓰게 됐다. 만년에는 함부르크의 주임사제(主任司祭)와 신학논쟁을 벌여, 루터 정통파의 배격을 받았으며, 그 반증으로서 사랑과 관용을 테마로 한 비극 <현자 나탄(Nathan der Weise)>(1779)을 집필하였다. 그의 최후 저작은 〈인류의 교육〉(1780년)인데 만년에는 건강을 해쳐 사서관사(司書官舍)에서 52세 나이로 사망했다. 레싱은 진정한 의미에서 독일 계몽주의의 가장 위대한 완성자인 동시에 독일 시민문학의 기초를 개척했으며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의 영향을 배척하고 독일정신에 근거한 문학을 명석한 이론과 창작의 실천이라는 두 가지 면에서 확립한 당대 제일의 지도자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레싱의 연극. 독일의 국민연극의 이론적 기초를 이룩한 레싱은 디드로의 연극론(演劇論)에서 직접 영향을 받고 여기에 셰익스피어적 연극관을 더함으로써 프랑스 고전주의의 영향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시민극을 참으로 생기있는 장르로 만들었다. 그의 <함브르크 연극론>(1755)에서는 디드로가 반고전주의적 의식에서 등장인물의 경우만을 강조했음에 반해 여기에다 성격의 중요성을 가미시켰다. 즉 어떤 성격이 어떤 상황에서 낳은 비극적 결말을 보고 관객이 같은 상황을 자신의 처지로 상정하여 불안과 동정을 느낄 때 비극의 효과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시민극으로 자신 있게 내놓은 것은 <사라 삼프슨 양>뿐이지만 그 밖에 특히 걸작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319448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48
토머스 맬러리
토머스 맬러리 경(Sir Thomas Malory, 1415년경~1471년 3월 14일)은 영국의 군인 겸 작가이다. 워릭셔에서 태어나, 워릭 공작(Duke of Warwick) 아래에서 직업군인으로 봉사했다. 명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늦어도 1441년에는 기사에 서임된 것으로 보인다. 토머스 맬러리는 인쇄술을 보급한 윌리엄 캑스턴과 함께 영국 산문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복잡다양했던 중세의 아서왕 이야기를 집대성했으며, 간명하고 절도있는 새로운 산문 문체를 구축하여 문학적 불모의 시기로 표현되는 15세기에 활력을 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에드먼드 스펜서의 《선녀 여왕(The Faerie Queene)》 등 16세기의 작품들에서도 아서왕 이야기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319449
48837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49
올리버 홈스
319451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51
올리버 웬들 홈스
올리버 웬들 홈스(Oliver Wendell Holmes, 1809년 8월 29일 ~ 1894년 10월 7일)는 미국의 의사, 시인, 수필가, 평론가이다. 뉴잉글랜드의 명문가 출신으로 다방면에 걸쳐 활동하여 각분야에서 뛰어난 명성을 떨쳤고 문단에서는 중심적 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1829년에 하버드 대학교 학부를 졸업했고 하버드 메디컬 스쿨로 진학하여 1836년에 M.D.(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기지가 풍부한 《아침 밥상의 독재자》,《아침 밥상의 교수》,《아침 밥상의 시인》등이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변명은 특히 이기주의를 뒤집은 것" "남자는 마음먹은 것을 주장하고, 여자는 마음먹은 것을 행한다" 등의 경구로 차 있다.
319455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55
찰스 라이엘
제1대 라이엘 준남작 찰스 라이엘(Sir Charles Lyell, 1st Baronet, FRS, 1797년 11월 14일~1875년 2월 22일)은 근대 지질학을 창설한 영국의 지질학자이다. 스코틀랜드 앵거스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지질학을 배우고, 1826년 왕립 학회 회원이 되었다. 과 함께 이탈리아의 해성 제3기층을 연구하였으며, 이것이 동기가 되어 의 힘을 얻어 백분율법을 완성하였다. 1830년 《지질학의 원리》라는 책을 썼는데, 허턴이 주장한 "현재는 과거에 대한 열쇠이다"라는 견해 아래서 지질 현상을 통일적으로 설명하고, 지질학의 근대적 체계를 확립하였다. 지질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생애. 1797년 스코틀랜드의 앵거스 키노디(Kinnordy)에서 10명의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라이엘의 아버지는 식물학을 즐기고 있었으며, 어린 라이엘에게 자연을 탐구하는 즐거움을 일깨워 주었다. 라이엘은 유년기를 뉴포레스트(New Forest)의 바틀리 롯지(Bartley Lodge)에서 보냈고, 자연계에 매우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옥스퍼드 대학교 에 다니며 지질학을 접했고, 윌리엄 버클랜드(William Buckland)의 지도하에 열심히 공부했다. 1816년 졸업한 이후엔 법률을 다루는 일로 주업을 삼았지만, 라이엘은 지질학에도 관심을 놓지 않고 두가지 일을 병행하였다. 라이엘은 1822년에 최초의 논문 〈"On a Recent Formation of Freshwater Limestone in Forfarshire"〉를 발표하고, 1827년 즈음에는 결국 법률 일을 단념하고 본격적으로 지질학에서의 경력을 시작하였다. 1830년 킹스 칼리지 런던 지질학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1830년부터 1833년까지 《지질학의 원리》("Principles of Geology") 초판 3권(합계 약 1200페이지)을 썼다. 이것은 라이엘의 최초 간행물이자 가장 유명한 간행물이며, 라이엘이 지질학 이론가로 자리매김을 하게 해 준 책이다. 이 《지질학의 원리》가 바로 수 십년 전에 제임스 허턴에 의해 제창되던 아이디어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ism)을 널리 세상에 알린 저서이다. 1840년대 라이엘은 미국과 캐나다로 여행했다. 이 때의 경험은 1845년의 《북미여행》과 1849년의 《미국 두 번째 방문》 등 지질학 이론을 바탕으로 한 기행문을 쓸 수 있게 한 밑거름이 되었다. 1875년 타계했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영향. 1831년 12월 27일 시작한 〈비글호〉의 항해를 떠나기 전에 선장 로버트 피츠로이는 항해의 동반자로 선택한 찰스 다윈에게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 1권을 선물한다. 이후 찰스 다윈은 5년간의 항해에서 이 책을 탐독하였으며, 그의 진화론이 세상에 나오는데 많은 도움을 준 책이 되었다. 수상 및 서훈. 수상. 이후 라이엘의 이름을 따 라이엘 메달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런던지질학회가 수여하는 포상 중 가장 권위있는 것으로 꼽힌다.
319457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57
벤 존슨 (문학가)
벤저민 존슨(, 1572년 6월 11일 ~1637년 8월 16일)은 17세기 영국의 극작가·시인·비평가로 윌리엄 세익스피어와 동시대에 활약한 문인이다. 1616년 계관시인이 되었다. 생애. 1572년 6월 11일 런던의 교외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하여 웨스트민스터를 졸업한 후 대학에는 진학하지 않았으나 캠딘 교장의 뛰어난 교육으로 자기 자신도 자부했듯이 셰익스피어나 '대학수재'들보다도 뛰어난 학식과 깊은 교양을 갖춘 지식인으로서 활약했다. 가업을 돕기도 하고 군대에 들어가 대륙 전쟁에 참가도 했다. 귀국한 뒤에 연기자 겸 극작가가 되었다. 비극의 연기자로 당시의 손꼽히는 명배우였지만, 희극 《십인십색》("Every Man in His Humour")(1598년)으로 일약 스타가 되어 그때부터 극작에 전념하였다. 이 《십인십색》의 초연에는 셰익스피어도 연기자로 출연하였다고 한다. 《연금술사》("The Alchemist")(1610년), 《볼포니》("Volpone")(1606년), 《에피신》("Epicoene, or the Silent Woman")(1609년) 등이 대표적 희극 작품이며, 풍자희극인 《서투른 시인》("The Poetaster")(1601)은 데카가 이에 대한 반론의 희극을 썼으며 또한 그는 비극과 시에도 뛰어났다. 배우수업을 한 뒤 40년 가까운 창작생활을 통해 희극·희비극·풍자극·비극·가면극 등 다방면에 걸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코미디 오브 유머즈(기질희극)'의 창시자, 또는 일련의 풍자희극의 걸작으로 제임스 1세 시대의 대표적 극작가가 되었으며 영국의 연극사상에 이채를 띤 바 있다. 제임스 1세의 연금을 받아 사실상 최초의 계관시인이 되었다. 작품 세계. 《십인십색》("Every Man in His Humour")(1598)이 대표하는 '기질희극'은 인간의 4체액(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의 배합으로 결정되는 기질(예컨대 점액질, 담즙질 등)에서 생겨나는 각양각색의 성격을 유형화하고 그것들의 충돌이나 상호작용을 희화화한 것이나, 셰익스피어 희극과는 그 취향을 달리하는 신기함으로 당시 크게 인기를 획득했다. 그 후 《신시아의 향연》("Cynthia's Revels", 1600)이나 《서투른 시인》("The Poetaster", 1601)으로 데커와 싸움이 끊이지 않고 극계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서도 반감을 사게 되어, 한때 비극 《세자누스의 몰락》("Sejanus His Fall", 1603)로 옮겼으나 끝내 좋은 평을 받지 못하고 말았다. 한편, 제임스 1세의 총애를 받아 《검은 가면》("The Masque of Blackness", 1604) 이후 20여년 동안 궁정 가면극의 제1인자로서 군림했으나 그의 본령은 신랄한 비판정신에 바탕을 둔 풍자희극 분야에 있으며, 《볼폰》("Volpone", 1606), 《연금술사》("The Alchemist", 1610), 《에피신(침묵의 여자)》("Epicoene, or the Silent Woman", 1609) 등의 걸작이 크게 성공하였다. 후기의 대표작 《바톨로뮤의 시장》("Bartholomew Fair", 1614)은 당시 런던에서 열렸던 정기 시장을 무대로 펼쳐지는 시정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린 파노라마풍의 대작으로 호평을 받았으나 그 이후로 가면극 이외는 부진하여 찰스 1세 시대의 작품도 실패작이 많다. 그의 입장은 셰익스피어, 말로 등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흘러넘치는 낭만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당시의 주류에 대하여 삼일치의 법칙을 준수하는 고전주의로서 고립되어 있었으나 왕정복고기의 풍속희극을 거쳐 와일드, 서머싯 몸, 카워드 등 현대 풍속희극과 결부되는 영국 정통희극의 전통을 이끈 공적은 크다고 하겠다. 비평가로서는 해박한 학식을 가지고 고전적 전통에 입각하여 셰익스피어로 대표되는 낭만적 작풍에 대립한 일파를 이루었으며 영국 초기 비평문학의 중요한 존재이다. 셰익스피어는 한 줄도 지우지 않은 채 썼다고 칭찬을 받았으나 한 천 줄쯤 지워버렸으면 좋았겠다는 비평은 특히 유명하다.
319459
32774577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59
니벨룽의 노래
니벨룽의 노래() 또는 니벨룽겐의 노래는 중고지 독일어()로 쓰여진 서사시로,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대인 5~6세기경부터 전승되다 1200년경에 궁정 서사시로 정리되어 현재까지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본. 단편(斷編)적인 것을 포함해서 삼십 여종의 사본이 전해지고 있는데 가장 오래된 사본도 122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며 원작은 그 저자와 더불어 불명이다. 오늘날에는 1200년경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일보던 기사(騎士)가 고대 게르만의 영웅전설을 집대성하여 발표된 작품으로 해석하고 있다. 줄거리. 내용은 전반에서는 영웅 지크프리트와 군터 왕(王)의 누이동생 크림힐트의 결혼, 군터 왕(王)과 브륀힐트의 결혼, 하겐의 배반에 의한 지크프리트의 암살이 화려한 정경 묘사로서 표현되어 있다. 후반은 아주 판이하게 음울한 분위기 가운데 이야기가 펼쳐진다. 크림힐트는 훈족의 국왕 에첼과 결혼하여 지크프리트의 원수를 갚을 것을 결의한다. 이렇게 해서 흉노국(匈奴國)에 초청된 부르군트의 사람들과 훈족 사이에 사투가 벌어져 마침내는 양(兩) 민족이 모두 멸망한다는 것이다. 영향. 게르만 민족 이동기의 영웅을 소재로 한 이 서사시에는 전후반 각각 저자가 참고로 한 작품이 따로 있었다고 보이며 그 구성면이나 내용의 균형이 잡혀 있는 점에서 중세기 최대 걸작 중의 하나이다. 특히 화려하고 호사스러운 궁정 사회를 배경으로 중세의 기사 도덕(명예와 충성)을 게르만 민족의 영웅주의에 결부시키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또한 바그너의 가극 <니벨룽의 반지> 원전(原典)이다. 한국어 번역판. 비슷한 제목의 한국어 번역판이 많이 있으나, 대부분 바그너의 음악극 대본이거나 청소년을 위한 동화를 옮긴 것으로 원전을 옮긴 책은 한 종류뿐이다.
319460
3306081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60
롤랑의 노래
《롤랑의 노래》()는 중세 프랑스의 무훈시로, 작가는 불명이다. 총 4000행의 10음절 반해음 시절(半諧音 詩節)로 이루어져 있으며, 청중에게 구어로 전달되었다. 판본은 총 아홉이 있으나 그 중 1834년에 발견된 옥스포드의 앵글로노르만어본이 원본으로 인정된다. 서사시의 큰 줄거리는 샤를마뉴가 에스파냐 원정의 귀로 중 피레네 산중에서 바스크족(族)의 습격으로 후군이 전멸한 바 있는 778년의 사건에 따랐다. 그러나 그 가운데 그려진 풍속, 습관, 사상, 감정 등은 모두 12세기 초기의 것으로 <노래>의 주제는 십자군 그리스도교도의 패전, 신의 전사(戰士)들의 최후의 승리이다. 슬프고도 장엄한 아름다움은 기사들의 애국과 신앙의 정열, 또한 롤랑이 절명할 때에 천사가 내려왔다고 하는 초자연적인 고요함에 의해 채색되어 있다. 단일하여 막힘이 없는 이야기의 구성과 사건 및 인물과 배경의 균형잡힌 배치는 수사학으로 가꾸어진 고도의 문학기법을 나타내고 있으며 인간 심리의 예민한 관찰과 간명한 표현 등은 이 시의 프랑스적 성격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저자. 튀롤(Turold)이라는 인물이 쓴 것을 추측되고 있으나 확실치 않다. 마지막 행이 다음과 같은데 이 declinet이라는 단어의 해석이 불분명한 바, 이게 해당 옥스포드 판본의 저자를 얘기하는 건지, 원래 이야기의 저자를 얘기하는 건지, 필사자를 얘기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애매한 문제이다. 줄거리.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의 조카인 롤랑은 12명의 성기사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다. 샤를마뉴는 그를 특히 사랑하여 명검 듀렌달을 하사하였는데 이 칼은 요정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산 하나를 반으로 가를 수 있을 만큼의 위력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에스파냐의 이교도인 사라센 인들과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약 7년뒤인 778년 8월 15일 샤를마뉴의 군대는 승승장구하여 마지막 사르고스의 마르실왕과의 싸움만이 남아있었다. 위기에 처한 마르실 왕은 거짓 화평을 제안하였고 샤를마뉴는 중신들에게 조언을 구한다. 롤랑은 마르실왕이 전에도 간계를 꾸며 속인적이 있었음을 상기시겼으나 그의 계부 가늘롱과 여러중신들은 평화에 혹해 화평을 받아들이자고 왕을 설득한다. 이에 왕은 허락하고 롤랑은 정히 그렇다면 계부인 가늘롱을 사절로 보내자고 말한다. 왕은 가늘롱을 사절에 임명하고 사라센인들과 협상을 하고 오라고 명한다. 가늘롱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속으로는 롤랑이 자신을 미워하여 자신을 죽이고자 자신을 천거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마르실왕과 만나 간계를 꾸민다. 가늘롱이 협상이 성공했다고 전하자 샤를마뉴는 군대를 물린다. 이때 가늘롱이 롤랑을 후위부대의 사령관으로 천거하고 사를마뉴도 이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마르실왕은 조약을 깨고 샤를마뉴의 군대가 철수한 틈을 타 롤랑의 후위부대를 공격한다.롤랑의 후위부대는 피레네 산맥의 롱스포에까지 추격당했다. 롤랑의 전우이자 지략가인 올리비에는 롤랑에게 구원을 청하라고 세번 청한다. 롤랑의 큰 뿔나팔 올리판트는 멀리 있는 샤를마뉴의 군대에까지 울릴 수 있었다. 그러나 롤랑은 오만했다. 자신은 명검 듀렌달을 가지고 있었고 최고의 기사라고 생각한 롤랑은 구원을 청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공격을 받았고 롤랑은 자기 주위에 약 60명 가량만이 남았을때야 비로소 뿔피리를 불어 구원을 요청한다. 그러나 뿔피리 소리를 들은 샤를마뉴가 군대를 돌려 싸움터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모두가 전멸한 뒤였다. 샤를마뉴는 그 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사르고스를 점령하였고, 이교도를 전멸시켰다. 그는 롤랑과 그의 전우 올리비에 및 대주교 튀르벵의 유해를 수습하여 프랑스로 가져갔다. 이후 그는 프랑스에 돌아와 가늘롱을 처벌하였다. 다음날 샤를마뉴의 꿈속에 가브리엘 대천사가 나타나 새로운 십자군을 조직할 것을 명령한다.
319462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62
전자 이동도
전자이동도(電子移動度, )는 외부에서 가해진 전기장 formula_1 에 대한 전자의 표류 속도의 비로 정의된다. 2차원 전자계에서는 매우 낮은 산란도(Scattering rates)를 가진다. 평형 상태(Equilibrium state)에서 전도 전자(Conduction electron)들이 임의의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전류의 흐름은 없다. 평형 상태에서 특정 방향으로 외부 전기장 formula_1을 가해 주면 전도 전자들은 외부 전기장의 방향으로 formula_4의 힘을 받아 표류(drift)를 하게 되고 그에 따라 전류 흐름이 생긴다. 안정된 상태 (Steady state)에서 외부 전기장 때문에 생기는 전도 전자들의 운동량(Momentum) 변화는 산란에 의해 잃게 되는 운동량 변화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리고 formula_6을 운동량 완화 시간(momentum relaxation time)이라고 한다면 을 만족하고, 이 경우 mobility formula_8는 이 식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전자 이동도는 운동량 완화 시간과 관련이 있다.
319464
307506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64
워싱턴 어빙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 1783년 4월 3일 ~ 1859년 11월 28일)은 미국의 수필가·소설가,전기 작가, 역사가, 외교관이다. 1809년에 쓴 〈뉴욕의 역사〉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며, 《스케치북》(1819)을 통하여 미국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단편집, 전기, 여행기 등을 다작하며 왕성하게 활동했으며, 경묘한 풍자와 유머러스한 필치로 유명하며 로맨틱한 소재를 고집하였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와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무함마드 등 유명인들의 전기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어빙은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허구인 소설적 요소를 혼합하여 전기를 서술하였기에 콜럼버스와 조지 워싱턴에 대한 거짓 신화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로인해 대중에게 잘못된 역사상식을 심어주기도 했고 거짓 감동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생애. 부유한 뉴욕 상인의 집안에서 11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소장한 풍부한 장서를 읽으며 성장했다. 어린시절에는 변호사가 되기를 희망했으나 작가로 전향하였다. 1802년부터 이듬해까지 극평이나 풍자 기사를 신문에 기고하였다. 1807년에는 영국의 《스펙테이터》지를 본떠 잡지 《샐머건디》를 창간하여 매호마다 극평이나 시평을 기고하였다. 1809년 네덜란드령 시대에 대해 쓴 《뉴욕사(史)》를 출간하여, 경묘한 풍자와 유머러스한 필치로 일약 유명해졌다. 1815년에는 어느 상회(商會)의 대리인으로 영국으로 건너갔으나, 얼마 후 문필생활로 돌아와, 1819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영국의 전통이나 미국의 전설을 그린 《스케치북》(립밴윙클 수록)을 출판, 미국 작가로서는 처음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1826년부터 3년 동안 마드리드의 미국공사관에 근무하면서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한후, 콜럼버스에 관한 전기 2권을 썼으며, 각각 1828년과 1831년에 출판하였다. 또한 《무함마드 전기》와 《알함브라 전설 The Alhambra》(1832) 등을 출판하였다. 1832년에 17년 만에 귀국하여 서부를 여행하고 《대초원 여행》(1835) 등을 썼다. 1842년부터 약 4년간 스페인 주재 미국공사로 근무하고, 말년에는 《워싱턴전(傳) George Washington》(5권, 1855∼1859)을 비롯한 전기 등을 집필하였다. 유산. 콜럼버스 신화. 1826년, 스페인에 외교관으로 근무하는 동안에 콜럼버스 전기를 썼다. 때마침 스페인은 신대륙 정복역사에 대한 자료를 공개하였기에, 어빙은 스페인 기록 보관소에 있는 방대한 자료들을 분석한후 이를 기초로 하여 글을 쓸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허위적 사실을 추가하여 콜럼버스를 영웅시하였다. 1828년에 출판한 《콜럼버스의 생애와 항해》에서 그는 중세인들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으나 콜럼버스만은 과학적인 인물이었기에 지구가 둥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기술하였다. 이를 통해 중세인 대부분이 미신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는데, 콜럼버스만 예외적으로 깨어 있는 선구자라는 식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콜럼버스는 1차 항해를 통해서 지구구형설을 증명했다고 추겨세웠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유럽인들은 지구가 구형임을 알고 있었다. 또한 중세인들 중에 지식인 계층과 해운업에 종사하는 선원들 사이에는 지구구형설이 상식에 해당하였다. 《콜럼버스의 생애와 항해》는 19세기 말까지 175판이 출판되며 미국과 유럽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때문에 콜럼버스만이 중세인들과 달리 과학적 사고를 한 선구자라는 거짓 신화가 널리 퍼지게 되었고, 대중들은 잘못된 역사상식을 오랫동안 사실로 오해하게 되었다. 아무튼 역사적 사실과 픽션에 해당하는 소설적 요소를 혼합한 어빙의 전기 서술방식은 낭만주의 역사라고 불리는 장르로 분류되고 있다.
319465
4726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65
수필가
319466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66
알프레드 드 뮈세
알프레드 드 뮈세(, 1810년 12월 11일 ~ 1857년 5월 2일)는 프랑스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이다. 파리 태생으로, 20세에 대담 분방한 시집 〈에스파냐와 이탈리아 이야기〉(1830)로 문단에 데뷔하여 낭만파의 청춘 시인으로서 사교계의 총아가 된다. 그러나 점차 낭만파 동향에 비판적이 되어 독자적인 길을 걷는다. 1833년 작가 조르주 상드와 사랑에 빠졌으나 이듬해에 헤어지고 연애의 번뇌와 고통을 노래하며 시인으로 크게 성장한다. 한때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30세를 넘긴 후부터는 재능이 쇠퇴하기 시작하여 1852년에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으나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죽었다. 분방한 상상력과 섬세한 감수성으로 항상 신선하고 솔직하게 사랑을 노래한 뮈세는 낭만파 시인 가운데 가장 시인다운 시인이라 일컬어진다. 작품. 뮈세의 극작이 시대조류에 항거할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로는 그의 작품이 상연을 전제로 하지 않고 쓰여졌다는 외적 조건이 있다. 최초의 극작인 <베니스의 밤>은 1830년 오데온 극장에서의 첫 상연일에 주연여우의 과실도 있고 해서 야유와 욕설 가운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극작을 단념하지 않고 다음에 출판한 시집에서는 <술잔과 입술> <처녀는 무엇을 꿈꾸는가>의 두 운문극을 시도하여 '안락의자에서 보는 연극'이라는 제명을 붙였다. 이 작품으로 극작에의 방향을 확인한 그는, 그 후 세계평론지(世界評論誌)에 상연을 고려하지 않는 많은 극작품을 발표했다. 1833년의 <앙드레아 델 사르토(Andrea del Sarto)>를 비롯하여 <마리안의 변덕(Les Caprices de Marianne)>, 1834년의 <판타지오(Fantasio)>, <사랑을 장난으로 하지 말아라(On ne Badine pas avec l' Amour)> <로렌자초(Lorenzaccio)> <종마(種馬)>, 1837년의 <바람기(Un Caprice)> 등이 극작집 <희극과 격언극(格言劇)>에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작품은 상연상의 제약이 없기 때문에 한층 자유로운 형식이나 여유있는 시정(詩情)을 발휘할 수 있었으나 동시에 마리브식(式)의 정밀한 심리주의를 계승하여 프랑스 연극의 전통을 확대, 강화했음도 잊을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사극(史劇) <로렌자초>는 셰익스피어풍 규모와 문체의 화려함을 갖춘 낭만주의극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뮈세의 극은 1846년에 <바람기>가 여배우 알랭에 의해 상연된 이후 그 연극적 가치가 재평가되었으며 잇따라 각광을 받았으나 20세기에 들어와 연극에서 시정을 되찾으려는 자크 코포의 운동 후 처음으로 참다운 이해를 받았다고 하겠다. 시는 〈초기시집〉(1829-1835)과 〈신시집〉(1836-1852)에 수록되어 있으나 유명한 4편의 〈밤〉(1835-1837)에는 상드와의 연애 고뇌에서 나온 훌륭한 서정시가 담겨 있다. 장편소설 〈세기아(世紀兒)의 고백〉(1836)도 같은 괴로움에서 생긴 것이지만 여기에는 동시에 샤토브리앙의 〈르네〉따위의 흐름인 '세기병'을 역력하게 읽어볼 수 있다. 기타 〈두 사람의 애인〉(1837), 〈미미 팡송〉(1845) 등 10편이 넘는 소설이 있고 또 현재에 한층 높이 평가되기 시작한 〈장난으로 사랑하지 않을 것〉(1834), 〈로렌자치오〉(1834)〔〈희극과 격언극〉(1854)에 수록〕 등 극작품도 많다.
319467
75312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67
알퐁스 도데
알퐁스 도데(, 1840년 5월 13일 ~ 1897년 12월 16일)는 프랑스의 소설가, 극작가이다. 생애. 알퐁스 도데는 1840년 5월 13일 님에서 정통왕당파이던 가톨릭 가문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세벤 출신의 아버지 뱅상 도데는 방직공이자 비단 상인이었고. 어머니 아들린은 아르데슈 출신의 부유한 상인 앙투안 레노의 딸이었다. 도데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님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마을 브주스에서 보낸다. 이후 그는 카니베 사립학교에서 수업을 받는다. 도데의 아버지가 방직 공장을 그만 운영하게 되며 도데 가족은 1849년 리옹으로 이사하고, 도데는 리옹의 앙페르 고등학교에 6학년으로 들어간다. 1855년 아버지가 완전히 파산하자 도데는 바칼로레아 입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도데는 알레스 중학교의 교사가 된다. 이 고된 경험은 그로 하여금 형의 죽음과 같은 허구와 사실이 섞인 자신의 첫 소설, <소소한 이야기>(1868)을 쓰는데에 영감을 주었다. 문학 활동을 꿈꾸던 도데는 1857년 11월 파리에서 형 에르네스트 도데와 재회한다. 도데는 무일푼이었으나 행복하게 자유분방한 삶을 누린다. 그러나 외제니 황후 주변의 부인들과 어울리면서 그는 평생 동안 고통을 안겨준 심각한 매독 증상, 특히 이동성 운동실조증을 얻게 되며 걸을 때면 목발을 짚어야 했다. 여러 신문사(특히 파리주르날, 뤼니베르셀, 르 피가로)에 몸을 담으며 도데는 1858년 운문 모음집 <연인들>을 출간하고, 같은해 방탕한 어린 모델이던 마리 리외와 관계를 가진다. 리외는 도데의 공식 정부가 되며, 도데의 소설 <사포>에 영감을 준다. 다음 해 도데는 작가 프레데릭 미스트랄과 만나고, 이는 최고의 우정의 시작이 되었다. 40년 가까이 두 사람이 주고받은 두툼한 분량의 편지는 도데가 <아를의 여인>(1869)와 남프랑스 기질의 풍자가 담긴 소설 <뉘마 루므스탕>(1881)을 출간할 때가 되어서야 색이 바랬다. 프로방스의 작가. 프로방스 작가의 전형이라 불리는 알퐁스 도데는, 현재 관광객들이 찾는 방앗간에 한번도 간 적이 없으며, 퐁비에유에서는 단 몇달밖에 살지 않았으나, 어찌됐든 그가 <방앗간 편지>에서 프로방스에 관한 놀라운 견문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다. 더욱이, 도데를 통해 인기를 얻은 글 들 가운데 몇몇은 주로 폴 아렌, 레옹 아라르, 블랑쇼 드 브르나와 도데의 아내 쥘리아 도데같은 다를 작가들과의 공동 작업물이다. 반유대주의. 알퐁스 도데의 반유대주의는 1873년 그의 인물 중 한 명인 고리대금업자 아우구스투스 칸의 초상화에 반영되어 있다. 도데와 관련된 장소. 작가가 살았던 곳. 1840년 님에서 태어난 도데는 몇년간 가르에서 자라서 알레스와 리옹에서 잠시 머문 후 파리로 상경한다.
319469
10476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69
Phase change-Dual
319472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9472
고트프리트 켈러
고트프리트 켈러(Gottfried Keller, 1819년~1890년)는 스위스의 소설가이다. 시적 사실주의의 대표적 존재로서 '스위스의 괴테'라고 일컬어진다. 일대기. 프랑스 혁명 이래의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목공'을 아버지로 하여 취리히에서 태어났다. 요절한 부친의 유지를 이어 공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교사 배척사건에 연루되어 퇴학(1834) 당한다. 보수적인 농민에 대항하여 자유주의적 목사 다비드 슈트라우스의 취리히 초빙(1839)에 찬성하는 등 자유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선천적인 자연애(自然愛)와 화재(畵才)를 지녀 풍경화가를 지망하고 뮌헨으로 나아갔다(1840년). 이곳에서의 생활은 고통스러운 것이어서 2년이 채 못 되어 귀향, 정치시를 신문·잡지 등에 발표하며 지방의 보수파에 대항했다. 그즈음 문학에 관심을 쏟게 되어 1847년 스위스가 시민혁명에 성공하자 주정부(州政府)의 장학금을 얻어서 하이델베르크로 가서(1848-1850년), 포이어바흐의 <종교의 본질에 관한 강연>에 큰 감명을 받았다. 신(神)을 인간의 힘과 의욕의 결집(結集)이라고 보는 현세적 인간주의로서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녹색(綠色)의 하인리히>(초판)에 착수하면서 베를린으로 나가 극작가가 되기를 지망하나 실패하여 다시 귀향했다. 그 후 앞서의 초판본(初版本)(1855)과 <젤트빌라의 사람들> 제1부(1856) 등의 두 작품을 남기고 작가활동을 중단한 후 주정부(州政府)의 서기관이 되었다. 재차 창작활동을 시작한 것은 퇴관(1876)을 전후한 50세를 넘어서부터로 젊었을 때의 사상태도에 입각하여 시민사회에의 참여, 시민적 윤리의 확립을 항상 문제로 삼았다. 그러나 그의 묘사만은 현실을 냉혹하게 폭로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성이 풍부하며 재미있고, 예리한 점은 있으나 따뜻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장편에는 <녹색의 하인리히>외에 미완성의 사회소설 <마르틴 살란더>(1886)가 있으며 가까운 장래의 사회개혁과 인간혁명의 가능성을 묘사하고 있다. 수많은 단편이 <일곱 개의 전설>(1872), <젤트빌라의 사람들>(제1부 1856, 제2부 1874) 등에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젤트빌라>는 지극히 스위스적인 가공의 소읍(小邑) 풍속을 풍자와 유머로 묘사하여 인생의 진정한 의의를 구하고 있다.